- [ 등장인물 ]
- ||<tablewidth=100%><width=1000><tablebgcolor=#e5d5bb,#1d2228><bgcolor=#cdb68c><-5> ||
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문서 참고.
- [ 회차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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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ST ]
- ||<tablewidth=100%><tablebgcolor=#1d2228><tablecolor=#e5d5bb><width=33%><nopad>||<width=33%><nopad>||<width=33%><nopad>||
[[수사반장 1958/음악#s-2.1| Part 1지피지기 백전백승]]
서은광
(BTOB)
2024. 04. 19.[[수사반장 1958/음악#s-2.2| Part 2달빛]]
김사월
2024. 04. 26.[[수사반장 1958/음악#s-2.3| Part 3여전히 그댄]]
범진
2024. 05. 03.[[수사반장 1958/음악#s-2.4| Part 4Dream]]
이승열
2024. 05. 10.[[수사반장 1958/음악#s-2.5| Special Track여전히 그댄]]
이동휘
2024. 05. 17.[[수사반장 1958/음악#s-2.6| Full Track수사반장 1958 OST]]
Various Artists
2024. 05. 20.그 외 삽입곡 및 오리지널 스코어는 음악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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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BC 금토 드라마 〈수사반장 1958〉의 탐구에 대한 문서이다.2. 시대 재현
2.1. 작중 배경
- 종남구 : 종로구를 모티브를 한 가상의 구.[1] 다만 3화에서 종로구와 중구가 따로 언급된 걸 보면 일단 종로구, 중구와는 별개라는 설정인 듯하다. 3화 은행강도와 형사들이 각각 지도를 펼치며 작전을 짜는 장면에서 종남구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데, 지도상 고려은행 종남점 옆에 크게 남대문로라고 쓰여있으며 현재 지도와 대조해 봤을때 고려은행 종남점은 광교 사거리 현 DGB금융센터 자리에 위치해있다. 이로 볼때 작 중 가상의 구인 종남구는 청계천 남쪽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오늘날 중구의 서쪽부분인 명동, 소공동, 회현동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추측된다.
- 황천시 : 경기도에 위치한 가상의 시골 마을. '황천'이라는 이름이나 최불암과의 연관성으로 보면 현재의 인천광역시(당시에는 경기도 인천시)로 추정[2]될 수도 있고, 우시장이 크게 선다는 점, 그리고 황천지서 건물 규모로 보아 군급 행정소재지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천시나 연천군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인천은 1900년대부터 개항장이었던 '부(府)'급 도시였으며, 소속상 경기도였지만 인천을 경기도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대에도 거의 없었다.
- 극 중 여경들은 주인공 종남서 1반 형사들과는 달리 사건을 보고받거나 기록하는 행정직(내근직)에서만 보이는데, 작중 배경 1년 전, 1957년 7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1298호 '경찰서 직제령'를 내려 한국 내 여자경찰서 4곳을 일제히 폐지 해체 명령을 내린다. 이후 여경들은 타 경찰서로 재배치되어 경찰 업무가 아닌 전화 응대, 청소, 커피 접대 일을 맡게 된다.# 참고로 당대의 여경들은 남경들과 별 차이 없이 6.25 이후 남은 무장공비 잔당들과 싸운 정예 전투병력이었다.[3]
- 보통 경찰들이 범인을 검거할 때, 미란다 원칙 의무고지를 하는 것이 맞는 방식이다.[4][5] 미란다의 원칙 의무고지를 하지 않을 경우,정당한 공무집행이 아닌 불법으로 간주되어 처벌할 수 없다.[6] 그리고 미란다의 원칙을 하지 않고 불법체포할 경우, 해당 경찰관은 실형을 받을 수 있다.#
- 다만, 이 '미란다 원칙'이 생긴 배경은 극 중 시점으로부터 8년이 지난 1966년 6월 13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미국과 차이는 있으나 근본정신은 같은 '미란다 원칙'이 1997년 1월에 도입[7]되었기 때문에 1회 극 초중 박영한이 범인을 검거할 때, 미란다의 원칙 의무고지하지 않고 체포한 경우는 맞는 고증이다.
- 현재, 대한민국은 '총포 화약류 단속법(약칭: 총포화약법)'이라는 법률을 가지고 총기소지, 각궁 등 각종 위험한 물건들을 불법적으로 갖고 있는 경우, 법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대신, 정당한 목적(수렵, 유해동물 사살 등)으로 총기 소유를 해야만 하는 경우, 해당 관할 경찰서에 신고(단, 총포소지허가증이 있어야만 가능)를 하고 총기 소유를 할 수 있으며, 해당 법안은 1961년 12월 13일 제정되어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8]되었다.
- 그런데 위 총포화약법과 상관없이, 1회 말미, 김상순이 M1 개런드 소총을 가지고 사건 진압하려는 과정은 맞는 고증이다. 전투병력으로 시작한 한국 경찰의 역사는 이후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자체적으로 소총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4.19 혁명 때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것도 군이 아니라 경찰 병력이었으며, 1980년대 대학가 시위 당시에도 전투경찰이 아닌 일반 경찰들이 M1 카빈을 어깨걸어총을 하고 외곽에서 데모를 감시하는 것도 흔한 풍경이었다.
- 3회 극 초반, 수사1반 앞에 지나가며 어느 한 재담꾼은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남자. 단성사에 절찬 상영중."을 홍보 하는 장면에 단성사[12]를 언급하는 것은 맞는 고증이다.[13]
- 3회 극 중후반, 은행 강도 살인 사건[14]이 일어난 이 시대 배경에는 총기 관련 법안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방송에서 나왔다시피 월급날인 경우, 직접 은행에 찾아가 돈을 받는 경우였기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노리는 경우는 당연했다.[15]
- 대표적인 사건이 2001년 12월 7일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소재 건물 지하 1층 경북총포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16] 안타깝게도 본 사건은 현재까지 [age(2001-12-07)]년 동안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 같은 해 2001년 12월 21일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KB국민은행 둔산지점(당시 충청지역본부)에서 발생한 은행강도 및 강도살인 사건[17]이 일어났는데 안타깝게도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21년이 지난 2022년 8월 25일 피의자 이승만(1970년생, 대구), 이정학(1971년생, 대구)이 검거되었으며 2023년 12월 14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다.#[18]
- 특히 당시는 6.25 전쟁 종전 5년밖에 되지 않아 민간에 군용 총기가 암암리에 많이 풀려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2000년대까지도 불법무기류 자진신고기간에 6.25때 사용했던 군용 소총류가 자진신고되는 일이 종종 있었고, 2024년에는 한 60대 남성이 6.25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스프링필드 M1903 소총으로 채무자를 협박한 사건도 있었다.#
- 현재 대한민국은 도로교통법[19]에 의거, 고속도로뿐 아니라 일반도로에서도 전좌석 안전띠 전면 의무화를 시행하고 있다.[20] 3회 말미, 박영한이 카체이싱 액션을 하고 지나가는 시민을 피하고자 다른 길가에 핸들을 꺾다 차량끼리 추돌사고가 나서 조수석에 있던 다른 강도가 그 충격으로 창문을 깨고 튕겨져 나가는 장면은 맞는 고증이다.
- 1회부터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나오는데 학도병이 쏘지 못하자 상관[21]이 쏜다. 박영한이 2화에서 언급한 경찰이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적어도 그 학도병이 박영한임과 박영한은 그 명령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극 중, 대사를 서울 사투리로 구사한다.
- 극 중 배경인 1958년, 당시 대한민국 화폐 단위는 대한민국 환으로 통용되었다.[25] 극 중 8년 전,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최초 설립되었다. 이후 1953년 2월, 화폐개혁에 따라 100원이 1환으로 통용되었다.# 같은 해 당시 지폐로 발행되었다.# 1회. 영한이 소도둑을 잡기 위해 거지분장으로 투전판에서 지폐를 꺼내는 모습은 맞는 고증이다.
- 5회 극 초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초기 모습을 고증했다.[26]
- 설립지침으로, 우리 연구소는 정부조직법 제4조에 의거해 1955년 3월25일 대통령령 제1021호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제’를 제정·공포함으로써 내무부 장관 소속하에 독립된 위치에서 감정 및 연구업무를 수행 하는 기관으로 발족됐다. 현재는 범죄수사 및 사법 재판에 관한 증거물에 대해 법의학·법과학 및 공 학적 감정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 5회 극 중반, 동대문파 일원인 방울뱀이 믿는 사이비종교인 흑백교가 등장하는데,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와 1930년대 당시 일명 살인 종교로 불렸던 백백교를 모티프한 것으로 보인다.[27]
2.2. 주요 배경 및 소품
- 경찰차로는 당시 주로 쓰였던 흰색 윌리스 M38 지프, 속칭 빽차가 등장한다.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차량처럼 오픈탑인 차량 이외에도 시발처럼 하드탑 커버를 자체적으로 단 차량도 보인다.
- 지나가는 택시나 개인 자가용 차량의 경우 시발차가 대부분이다.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1950년대 길거리에서 보이는 차량은 대부분이 시발차나 버스, 트럭이고 서울에서만 아주 드물게 외제차가 보이는 정도다. 이 풍경은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나오면서 바뀌게 된다.
- 시대 고증에 맞게 총기는 M1 개런드 소총, M1 카빈, 콜트 디텍티브 스페셜 6연발 리볼버 권총이 등장한다.[31]
- 극 중 박영한이 종남경찰서로 발령받아 서울로 올라왔을 당시, 벽보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벽보가 붙어있다.[32]
- 극 중 수사1반이 거지들을 소탕하는 장면에서 풀빵이 등장하는데, 3-4회 코멘터리 영상에 따르면, 미술팀이 직접 준비한 소품이라고 김성훈 감독이 언급했다.
- 극 중 서호정이 은행 강도 사건 기록을 파헤칠 때 쓴 펜은 딥 펜이다.[33]
2.3. 회차별
2.3.1. 1회
- 황천경찰서와 종남경찰서 건물이 실제 일제강점기 직후 양식을 연구해서 지은 세트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시점에서의 경찰서 건물은 전형적인 대한민국 경찰서 양식인 것을 보면 시대가 흘러갔음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 종남서 앞에 도착한 박영한의 뒷 배경에 선거 포스터가 게시되어 있는데, 극중 시점으로 보면 제4대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로 추정된다.[34]
- 밀수 사건에서 미군이 종남서 간부들에게 건넨 양주병은 메이커스 마크. 작중에는 Maker's Park로 나온다. 지금까지도 유명한 붉은 왁스가 칠해진 병으로, 최초 생산분이 병입된 때가 바로 1958년이다. 즉 작중 시점에서는 완전 최신상이라는 것.
- 극 중 박영한이 범인(동대문파 자칭 2인자 살모사)를 검거할 때 위에 미란다의 원칙 의무고지 없이 한 것이 맞는 고증이다.[35]
- 극 말미, 김상순이 M1 소총을 들고 사건 진압을 하려는 과정도 맞는 고증이다.[36] 다만 김상순이 M1을 들고 있는 것은 총포화약법과 무관하게 당시 경찰이 M1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는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과 6.25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발포에도 경찰은 M1을 비무장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위대에 발포했다. 경찰은 이후로도 소총을 1990년대까지 무기고에 보관하고 있었고 5.18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무장한 것도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서였다. 1990년대초 대학가 시위 때에도 경찰은 기동대 외곽에서 일반 경찰이 치안유지 항목으로 M1을 들고 다녔다.
2.3.2. 2회
- 대민지원 극 중 서울 시민들을 위해 대민봉사를 나갔다.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민간의 인원으로 처리하기가 어려울 때 지원을 나갈 때가 주이지만, 사적인 지원을 나가는 경우도 있다.
- 레스토랑 미군 간 대치 사건에서 길거리에 Adnan Menderes 터어키 수상 방한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37]
- 이승만 독재 정권 타도 플랜카드 바로 옆에서 경찰 특채 모집을 하면서 두 플랜카드가 이어져서 ‘이승만 독재 정권 경찰 특채 모집’이 되어 버린다.[38]
- 극 중 유대천 반장이 대전에 출장 갔다 올라와서 박영한, 김상순을 조우하게 되는데, 박영한이 대전 갔으면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안 사왔냐고 간접적으로 성심당을 언급한다.[39][40] 다만 성심당 드립은 현 세대인 시청자들을 위한 쿠키일 뿐으로, 1950년대 빵집의 양대산맥은 태극당과 고려당이었다.
- 1950년대지만 뜬금없이 카투사도 아니고 한국계로 보이는 남성이 미군에 있고, 그것도 중위 계급을 달고있는 것이 이상하다 여길 수 있으나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시점서부터 미군에는 한국계 장병들이 배치되어있었다. 김영옥이 이러한 케이스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다.
2.3.3. 3회
- 3회 에피소드에 은행 무장강도 사건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 실제 사건 모티프로 리버티뉴스 283호에 의하면 (1958년 12월) 상업은행 부산지점 은행강도 김종인 서울 국제극장서 체포해 당시 담당형사였던 최무근, 정기연 형사를 1계급 특진한 사건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 극 초반, 수사1반 앞에 지나가며 어느 한 재담꾼이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남자. 단성사에 절찬 상영중."을 홍보 하는 장면에 단성사를 언급하는 것은 맞는 고증이다.[41]
- 극 말미, 박영한이 카체이싱 액션을 하고 지나가는 시민을 피하고자 다른 길가에 핸들을 꺾다 차량끼리 추돌사고가 나서 조수석에 있던 다른 강도가 그 충격으로 창문을 깨고 튕겨져 나가는 장면은 맞는 고증이다.[42]
- 극중에서 군용 지프(윌리스 MB)와 개조 차량의 차이점이 중요한 포인트로 등장한다. 실제로 군용 지프는 작중 김상순의 언급처럼 차 문이 앞쪽에만 있는 3인승 소프트탑 차량이며, 이를 개조한 시발자동차 등은 2도어 하드탑 차량이다. 수사팀은 은행강도단 4인조가 한꺼번에 차량에 오르내리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군용 지프를 개조한 것임을 파악하게 된다.
2.3.4. 4회
- 4회 에피소드에 보육원 관련 사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논란되고 있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 해외 강제 입양 사건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기획의도에 보면 16개월 아이가 경찰의 외면속에 사망한 사건이 언급되는데 홀트는 이 사건에 지분이 큰 단체다.
- 사건의 범인인
오돌뼈[43] 오드리 원장을 중심으로 한 반민특위 및 친일파들의 행적이 간간히 언급된다. 작중 1반 반장도 반민특위 특채 출신으로 언급되었으며 이들이 담당한 친일파 색출과정 역시 간략히 요약되었다. - 극 중후반부, 고아원 원장인 오드리 고가 영아 10명 살인 혐의가 입증되면서 에인절스 고아원은 폐지되었고, 그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이 미국 해외입양을 가는 과정은 맞는 고증이다.[44], 국제사회봉사회(1957년) 등의 원조 기관을 통해서 해외 입양이 이루어졌다.#
- 1961년이 되어서야 '고아입양특례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납치 당해 불법적으로 입양당한 사건들은 현재도 논란 중인 대한민국의 씁쓸하고 어두운 이면으로 자리잡았다.#
- 후반부에서 에인절 하우스의 아이들을 미국 측에 인계할 때, 미국 측 차량에 붙은 성조기에 별이 48개 그려져 있는데, 이때 당시는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주가 되기 전(알레스카는 1959년 1월, 하와이는 같은 해 8월에 주로 승격)이므로 맞는 고증이다.[45] 같은 성조기가 5화에서 영장을 받아올 방법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한 번 더 등장한다.
- 극 말미, 영한과 혜주가 길을 걷다 순찰 중인 경찰 호루라기 소리에 뛰는 장면은 맞는 고증으로 이는 1945년 8월 7일부터 1982년 1월 5일까지 시행된 야간 통행금지의 영향이다.[46]
2.3.5. 5회
- 5회 에피소드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47]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초기 모습을 모티프로 따온 것으로 보인다.[48]
- 극 중반부, 동대문파 일원인 방울뱀이 믿는 사이비 종교인 흑백교가 등장하는데, 백백교[49]를 모티프한 것으로 보인다.
- 극 중후반부, 백도석이 등장하는데, 실존 인물인 백인엽을 모티프로 삼은 듯 보인다.[50]
- 극 말미, 시간이 지나 격동의 시대인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난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줬다.[51]
2.3.6. 6회
- 6회 에피소드에는 새 시대가 열렸다는 대사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52]을 일으켜 성공했다는 박정희 정권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 구담구, 홍천구라는 가상의 구가 등장한다.
- 극 말미, 국가재건최고회의[53]라는 곳을 통해 유대천 반장이 최달식 치안부국장을 임명 반대한다는 투서를 보낸 걸 알고, 최달식이 후에 새 종남서장으로 임명되는 백도석을 통해 살인교사를 명한다.
2.3.7. 7회
- 7회 에피소드로는 주가 조작 관련 에피소드가 나온다.
- 주가조작범의 차량으로 검은색 플리머스 케임브리지가 등장한다.
2.3.8. 8회
- 8회 에피소드에서는 살인 사건과 퍽치기 사건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2.3.9. 9회
- 9회 에피소드에는 동산방직 여공 김순정 실종사건 에피소드로 등장한다.[54]
- 극 중후반, 동산방직 여공 김순정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종남경찰서 수사1반이 수사하다 종남사거리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 극 말미, 종남사거리 교통사고 유일한 생존자인 남정길의 병실에 침대보를 엮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려다 그만 침대보가 끊어져 영한이 추락하는 엔딩을 맞이했다.
2.3.10. 10회
- 10회 에피소드에서는 종남 사거리 교통사고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을 담았다.[55]
- 극 초반, 종남사거리 교통사고로 종남병원에 입원해있던 남정길을 베개로 질식사 시키려던 정희성을 체포했다.
- 극 중반, 백도석이 강형사와 함께 남정길을 납치했다.[56]
- 이 납치 사건과 함께 수사1반이 종남성당에서 최종빌런인 백도석과의 마지막 대결을 시작한다.
- 극 후반, 백도석은 종남 사거리 교통사고를 지시한 악행이 밝혀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 이후 종남경찰서 서장은 유대천이 임명되었으며, 수사1반 반장은 박영한이 임명되었다.
- 극 말미, 2024년 현재, 노년이 된 박영한이 고인이 된 수사1반 동료들[57] 앞에서 "모여 있어서 재밌겠다. 안녕."하며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58]
2.4. 오류
- 주인공 박영한의 별명 '종남서 콜롬보'는 드라마의 배경인 1958년에서 10년 뒤인 1968년에 방영 개시한 〈형사 콜롬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본 드라마의 시대 배경과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다. 이전 가제였던 '수사반장 1963'을 대입하더라도 마찬가지.
2.4.1. 1회
- 작중에서 황천서가 '황천지서'라고 대사 내 표현이 왔다갔다하는 것은 옥에 티. 지서에 대해서는 주재소 문서 참조. 어쩌면 서울 중심부의 경찰이 타 지역 관서가 서인지 지서인지 헷갈릴 정도로 관심이 그닥 없어서 무시한다는 작중 표현이기도 하다. 현판에는 '京畿道北部警察署[59]황천지서'#라고 적혀 있다. 우시장이 서고 지역신문이 발행될 정도라면 최소 군급 행정구역 중심지이기 때문에 지서가 아닌 경찰서가 있어야 맞다.
- 영한의 하숙집에 있는 사람들 옷이 1958년도라고 할 수 없다. 나이롱 티셔츠와 츄리닝은 적어도 1960년대 후반은 되어야 나오는 것으로, 특히 작중 등장하는 고시생이 입고 있는 소위 태권브이식 츄리닝은 1990년대 군대 내무반 복장이었다. 일단 한국에서 합성섬유 공장에 세워지고 레이온 같은 게 쏟아져나오는 것 자체가 박정희의 중공업 정책 이후다. 작중인 1958년은 한국에서 합성섬유 자체가 귀했다.
2.4.2. 2회
- 골목 격투 씬에서 박영한이 쌓여있는 연탄재를 활용하는데, 연탄이 전국에 보급된 것은 1960년대 이후 강원도의 산업선 철도 개발과 탄광 개발이 활성화되며 무연탄이 공급된 후다. 1958년이면 석탄은 조개탄 형태로 공급되고, 아궁이는 땔나무를 주로 썼다.
- 레스토랑 미군 간 대치 사건에서 길거리에 Adnan Menderes 터어키 수상 방한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해당 장면의 시점은 9월 15일[60] 이후이고, 멘데레스 당시 총리의 방한은 같은 해 4월에 있었다. 다만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면 말이 되는데, 당시는 행정력이 모자라서 길거리의 고장난 기물이나 설치된 물품 등을 한참 동안 내버려두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61] 예외가 있다면 가로변의 태극기는 날짜 지나면 재깍 치웠는데 이는 태극기를 더럽히면 모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더러워지기 전에 빨리 철거해서 보관하는 것이다.
- 튀르키예의 경우 1958년 당시에는 터어키보다는 토이기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625 전쟁때 까지는 튀르키예를 덜기예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한자 음역으로 토이기라 많이 불렀다. 터어키 라는 말도 비슷한 시기에 많이 쓰였으나 토이기가 더 대중적이었다. 이후 터키라는 명칭으로 장기간 정착되다 2022년 여름부터 현재같이 튀르키예로 바뀌었다.
- 미군들이 든 M1911 권총 하부에 90년대에 출시된 피카티니 레일이 달려있다.
- 마지막 장면에서 위 사건이 끝나고 경찰차가 출발하면서 상술한 현수막이 붙어 있는 뒤쪽 굴다리를 비추는데 굴다리 위에 가공전차선이 있다.
이는 최소한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하는 1974년에 가야 등장함으로 명백한 오류이다.다만 전차선 모양새가 카테나리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노면전차용인지 중전철용인지는 불확실하다. 해당 촬영지는 합천군의 세트장이기 때문에 노면전차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다만 그 시절에도 굴다리 위로 노면전차가 다니는 경우는 지금의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없었다. 서울 전차는 애초에 고가선로로 다니지 않았기 때문. 이후 그 다음 주 수요일 프라임타임대에 송출된 재방송분에서는 CG로 전차선을 지웠다.
2.4.3. 3회
2.4.4. 4회
2.4.5. 5회
- 종남시장 상인회 분관 착공식 장면에서 배경으로 鐘路警察이라는 한자 현판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 봉난실이 여경시험을 볼때 연도가 1960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4293년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서기 연호가 쓰인 것은 1962년 이후이다.
2.4.6. 6회
- 백도석이 고관대작 도련님들 앞에서 굽실거리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문제는 실업회사들의 자제는 모르지만 당시 군부인사들의 나이가 30-40대라 그들의 자제가 20대에 이르러 요정에 출입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 박영한의 한국 전쟁 참전 회상 장면에서 백도석 대위가 쓰고 있는 M1 철모의 턱끈이 당시의 것을 재현한 것이 아닌 아직도 후방에서는 현용으로 쓰는 국군용 구형 방탄헬멧의 턱끈이다. 그래서 턱받침과 똑딱단추 버클이 붙어 있다. 학도병 박영한이 쓰고 있는 학생모도 1950년 당시에는 없던 학제인 고등학교 학생임을 나타나는 한자 '高'자 모표가 붙어 있다. 지금과 같이 중학교 3년 + 고등학교 3년의 학제가 정해진 것은 '복교령'에 따라 많은 학도병들이 학교로 돌아간 1951년에 이었기에 1950년 까지는 고등학교 대신 6년제 중학교를 다녔다. 이는 영화 장사리에서도 범한 고증 오류이다. 정확한 고증을 하려면 학생모에 중학생임을 나타내는 한자 '中'자 모표가 붙어 있어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1951년 3월 16일에 내려진 '복교령'에 따라 총을 내려놓고 비록 임시 천막교실이 전부였던 학교로 돌아갔으나 다수의 학도병들은 군에 계속 남아 있었다.
2.4.7. 7회
2.4.8. 8회
- 동산방직주식회사의 한자 표기가 東山紡織工場會社로 되어 있다.
2.4.9. 9회
2.4.10. 10회
2.5. 타임라인
종남서 실내에 일력이 비치되어 있고, 그 외 박영한의 하숙방 등 다른 곳에도 달력이 걸려 있어 일부 사건의 날짜를 알 수 있다.2.5.1. 1회
- 1958년 8월 28일: 박영한이 경기 황천지서에서 서울 종남서로 발령.[62]
- 1958년 9월 2일: 미군 군수품 밀수사건 발생.[63]
2.5.2. 2회
- 1958년 9월 15일: 조경환과 서호정이 제 18회 경찰 특채시험에 합격하여 각각 종남서 수사1반과 수사2반으로 합류.
- 1958년 9월 16-17일추정
- 레스토랑에서 미군 간 대치 사건 발생.[64]
- 서호정이 레스토랑에서 미군 간 대치 사건 해결 이후 종남서 수사2반에서 수사1반으로 합류.
2.5.3. 3회
- 1958년 9월 18일: 수원 은행강도 사건 발생.
- 1958년 9월 25일: 고려은행 종남지점 은행강도 사건 발생.
2.5.4. 4회
- 1958년 10월 6일 오후 5시경: 김종우 군 납치 사건 발생
- 1958년 10월 13일: 김종우 군 납치 사건이 종남서에 접수됨.
2.5.5. 5회
- 1958년 10월 26일 밤: 김성칠 살인 사건 발생.[65]
- 이 사이 박영한과 이혜주 결혼.[68]
- 1960년 하반기: 봉난실, 여경 공채 합격.
2.5.6. 6회
- 1961년 10월 19일: 이정재 사형 집행.
- 1961년 12월
- 백도석 종남경찰서장 취임.
- 종남경찰서 수사1반 유대천 반장 피습 사건 발생.
2.5.7. 7회
- 1962년 1월 3일
- 점심시간, 박영한과 이혜주가 인근 사찰에 새해 소원을 빌러 감.
- 명일증권 직원 추락사 사건. 사찰에서 돌아온 박영한이 혜주와 데이트하다 이 사건을 목격.
2.5.8. 8회
- 이 에피소드만 유독 날짜를 특정할 만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앞뒤 에피소드의 사이 시간대라고 하면 1월 중후반 정도가 된다.
- 1962년 2월
- 종남서림에서 혜주가 영한에게 임신 사실 알림.
2.5.9. 9회
- 1962년 2월 1일: 동산방직 월례조회.
- 1962년 2월 2일: 동산방직 여공 김순정 실종 사건. 그 직후 동료들이 경찰에 신고. 수사2반에 배정되었으나 묵살되고 사건 종결.
- 1962년 2월 16일
- 제4해상전투단 탈영병 박진수 검거.[73]
- 동산방직 여공 김순정 실종 사건이 수사1반에 인계되어 재수사 돌입.
- 동산방직 모기업 광호물산 사장 권형근 체포.
- 1962년 2월 17~18일 (추정): 실종된 동산방직 여공 김순정이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
- 1962년 2월 20~21일 (추정) 밤: 종남사거리 교통사고 발생.[74]
2.5.10. 10회
- 1962년 3월
- 종남사거리 교통사고를 사주한 사람이자 남정길 살인미수사건과 동산방직 여공 김순정 살인사건 진범 정희성 체포.
- 종남사거리 교통사고 유일한 생존자 남정길 납치사건 발생.
- 남정길 납치, 종남 사거리 교통사고 사주, 동산방직 여공 김은정 살해 현장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백도석 체포.[75]
- 1962년 3월 23일
- 종남경찰서 수사1반 반장 유대천이 종남경찰서 서장으로 발령 공고가 붙음.[76]
- 1962년 3월 24일
- 1962년 3월 28일
- 2024년
- 전설의 수사반장 박영한의 손자 박준서가 희대의 살인범 정호철 검거.
- 노년의 박영한이 종남경찰서 수사1반 동료들 보러 국립 서울 현충원 방문.
3. 레퍼런스 및 오마주
- 메인빌런을 당대의 정치깡패 이정재로 설정한 것과 박영한의 수사팀이 빌드업되는 과정으로 봤을 때 원작 외의 전체적인 레퍼런스는 알 카포네를 감옥에 보낸 엘리엇 네스 수사팀의 실화를 다룬 영화 〈언터처블〉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마다 8~90년대 액션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넘쳐나는 박재범 작가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부분.
- 작중 박영한은 최불암의 트레이드 마크 웃음인 ‘파-‘ 를 재현한다.
3.1. 1회
- 박영한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양조장 명칭이 '불암 양조장'이었다. 원조 '박 반장' 배우인 최불암을 기리기 위한 오마주.
3.2. 2회
3.3. 3회
- 부제인 '하이웨이맨(Highwayman)'은 '노상강도'를 뜻하는 영어단어이며, 동시에 1930년대 악명높았던 범죄자 커플인 보니와 클라이드를 추적, 사살하는 과정을 다룬 2019년 넷플릭스 영화 하이웨이맨과 동일한 제목이다. 해당 회차의 주요 빌런이 은행강도임을 생각하면 적절한 네이밍. 더군다나 당시 실제로 두 사람을 뒤쫓았던 수사관 중의 한 명이 바로 극 중에서 서호정이 롤모델로 삼은 '전설의 레인저' 프랭크 해머이다.
3.4. 4회
3.5. 5회
3.6. 6회
- 5화에서 군납비리로 불명예 전역된 백도석이 어떻게 경찰이 되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크리에이터 박재범 작가의 전작 열혈사제의 배경인 '구담구'가 언급된다. 정확히는 "구담서에서 계장 까지 올랐다"라고 언급.
3.7. 7회
- 7회 초반, 최달식 치안부국장이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로 활동하다 혈서가 발견된 부분은 실제 박정희가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군에 입대하고자 혈서를 썼다는 부분을 차용했다.[82]
- 7회에서 살해당한 증권사 직원의 아들 이름이 홍유찬(洪裕贊)[83]이다. 이때 크리에이터 박재범 작가 전작 빈센조에서 주요 인물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84]
3.8. 8회
3.9. 9회
3.10. 10회
- 반장으로 진급한 박영한에게 부인 혜주가 카키색 트렌치 코트 한벌을 선물해주는데, 이 코트는 원작 수사반장 촬영 당시 최불암이 자주 입고다녔던 의상이다.
[1] 작중 배경인 1958년 당시 서울에는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서대문구, 마포구, 영등포구 총 9개 구가 있었으며, 이후 1973년에 와서야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었다.[2] 1회에 특별출연한 최불암의 고향이 인천광역시이다.[3] 이는 해병대 등 다른 자원병력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쟁의 영향으로 1950년대에는 이런 전투경험 있는 여성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유명한 황해도 구월산 유격대에도 여성 중대장이 있었다.[4] 대한민국의 경우, "홍길동씨, 귀하를(선생님을/당신을) 현 시각(○○년 O월 O일 xx시 xx분) 부로 ○○ 혐의로 (긴급/현행범)체포합니다. 변호사를(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미란다의 법칙 의무고지한다.[5]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 개정으로 2021년 1월부터 진술거부권도 미란다 원칙 의무고지에 추가되어 현재의 미란다의 원칙 의무고지가 되었다.[6] #[7] 관련 법인 형사소송법 제200조3과 4는 1995년 12월 29일 본조신설된 상태였다. 이후 2007년 6월 1일 개정했다.[8] 2015년 이후 현재는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로 명칭이 바뀌었다.[9] 실제 인물인 김영옥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보인다.[10] 미국인 소위가 하극상을 저질렀다. 실제로, 1세대 이민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백인우월주의가 강해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보면 외형적으로 자신들과 다르고, 서로의 문화도 달라 이유없이 인종차별을 했다고 한다. 현재도 인종차별은 진행 중이다.[11]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미국 정부는 당시 한국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대전협정 및 마이어 협정에 보장된 특권을 유지하고자 이마저도 회피했다. 이후 1967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이 발효가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주한미군 범죄는 오로지 미군 당국이 단독으로 사법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초반 협정 조항이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점점 협정 조항을 개정하여 현재, 대한민국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대한민국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12]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다. 현 단성골드주얼리센터로 명칭이 바뀌었다. 단성사를 기념하기 위해 2019년 10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단성사영화역사관이 개관했다.#[13] 단성사는 1907년 6월 종로3가에 ‘연예단성사’로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영화관이 아닌 극장으로 열었는데, 그러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의리적 구토'를 상영했다. 이후 매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하였다. 이후 시대가 바뀌면서 멀티플렉스의 체인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지만, 단성사를 기념하기 위해 2019년 10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단성사영화역사관이 개관했다.#[14] 당시 실제 사건 모티프로 리버티뉴스 283호에 의하면 (1958년 12월) 상업은행 부산지점 은행강도 김종인 서울 국제극장서 체포해 당시 담당형사였던 최무근, 정기연 형사를 1계급 특진한 사건을 따온 것으로 보여 시대적으로 맞는 고증이다.#[15] 최근에도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2023년 8월 18일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신협에 강도가 침입해 현금 3900만 원을 들고 달아난 사건(일명 대전 신협 강도 사건이다.#)으로, 범인은 사건이 일어난 뒤 바로 베트남으로 향해 잡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기사에서 피의자는 현지 교민의 신고로 베트남 현지에서 체포되어 한 달 만에 국내 송환이 이루어져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구형받았지만, 이를 불복해 항소했다.#[16] 일명 대구 총포사 살인 사건이다.#[17] 일명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이다. 이후 2002년 9월 20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금암2파출소 소속 백선기 경사가 괴한에게 피살된 사건, 일명 백선기 경사 피살 사건으로 당시 전북 지역 주요 장기 미제 사건이 일어났는데 동일 인물인 피의자 이정학(1971년 생, 대구)이 한 것으로 드러났다.#[18]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 의하면 검거 이후 이 둘은 대구광역시의 한 고등학교 동창 사이로 밝혀졌다.[19] 사실, 도로교통법도 1962년 1월 17일에 제정됨과 동시에 시행되었다.#[20] 도로교통법도 계속해서 개정되어 2018년 9월부터 시행됐다.# 이행하지 않을시, 범칙금 3만원이 부과된다. 동승자가 13세 미만 어린이인 경우 과태료가 6만 원으로(2배) 늘어난다. 안전벨트 장착 의무화 최초 도입은 1978년에 시행이 되었다. 이때 의무화된 것은 ‘안전벨트’라는 안전장치의 장착이지 착용에 대한 의무화는 아니었다. 최근에는 착용까지 의무화 하는 추세로 이어진다. 국내에서는 1986년에 자동차전용도로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할 것을 의무화 도입이 되었다. 또한 2012년에는 시외버스, 택시 승객에도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 도입#이 되었다.[21] 6회에서 이 상관의 정체가 당시 대위였던 백도석으로 밝혀진다.[22] 1956년, 영화 '단종애사'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배우로서 왕성히 활동하다 신성일과 결혼하여 배우 활동을 접었다. 이후 90년대 아침마당에서 부부문제 상담코너 패널로 활동을 시작,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현재는 각종 프로그램 패널로, 심지어 모 결혼정보회사의 컨설턴트로도 활동 중이다.[23] 1957년에 영화 '황혼열차'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데뷔 초, 뛰어난 미모로 화제가 되었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같은 시기에 일했던 동료들은 2진으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199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했고, 지금도 배우로서 활동하고 있다. 배우로 왕성히 활동하면서도 영화 제작사인 '지미 필름'을 차려 영화 제작사 대표까지 역임했다.[24] 1회에서 동대문파 방울뱀이 종남시장 상인들에게 자릿세 내라고 하는 장면에서 채소가게 딸 금옥을 보게 되는데, 얼굴이 김지미 닮았다고 하는 장면과 3회 은행강도에게 인질로 붙잡힌 혜주가 영한의 정체를 의심하고 복면을 벗기려는 찰나, 버림받은 미친 여자 연기를 보이면서 강도들을 당황케 하고, 사건이 일다락 된 후에 영한이 버림받은 미친 여자 연기를 보여 준 혜주에게 정신 돌아온 거냐는 말에 연기였다고 하는 혜주의 말에 연기가 엄앵란도 울고 갈 신들린 연기력이라고 하는 장면으로 당시 왕성하게 활동한 여배우들을 언급했다.[25] 1953년부터 1962년까지 유통시킨 통화. 통화에관한특별조치령에 의거하여 통용되다가, 긴급통화조치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통용이 금지되었다.#[26] 1955년 3월 25일 내무부 장관 소속하에 독립된 위치에서 감정 및 연구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발족했다. 이후 1958년 7월, 부검감정서 감정 인쇄를 시작했다. 설립 초창기에는 집도의사가 초안을 작성하면 다른 직원들이 정서하거나 활자식 공타로 감정서를 작성했다. 1958년부터는 활자인쇄가 가능해져 부검집도의가 직접 기입했으면 발송할 때는 보조요원들이 정서를 했다.# 지금의 이름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0년부터 사용하고 있다.[27] 교주인 전용해가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이며,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는데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자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심지어 여신도가 임신했을 경우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여신도와 태아까지 전부 살해했다. 이에 더불어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다. 당시 수사의 한계로 백백교에 대해서 완전히 조사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광복 이전과 이후를 포함해도 전무후무한 살인 종교단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28] 영상 제공은 KTV 국민방송이다.[29] 이 시기부터 군사독재정권(1961.05.06. - 1987.6.29.)이 열렸다는 말을 표현한다. 이후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일명 10.26 사건으로 불린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에 의해 암살당한다.[30] 한주대 모티프를 서울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31] S&W M36으로 혼동할 수 있는데 M36은 5연발이고 총열과 총몸 상부가 일직선이며 손잡이에 있는 제조사 마크도 더 작다. 게다가 1950년에 개발되어 1958년에는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32] 실제로 1958년 5월 2일 민의원 선거가 치러졌다.#[33] 만년필보다 앞서 나온 펜이다.[34] 포스터에 명시된 인물 중 윤보선이 들어있는데, 그는 종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35]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확립된 원칙이다.[36]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쟁이 끝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고, 이후 1961년 12월 13일 '총포화약류단속법'이라는 제명으로 공포되어,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37] 실제로, 1958년 4월에 방한했다.#[38] 해당 장면은 이승만 정권에 부역할 경찰들을 모집하는걸 풍자한 장면이라 봐야한다.[39] 실제로 성심당 창립 연도가 1956년이다.[40] 6.25 전쟁 직후에 개업하여 1997년 폐업한 태극당(서울에 존재하는 동명의 기업과는 다르다.)이라는 추측도 있다.[41]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다. 현재는 단성골드주얼리센터로 명칭이 바뀌었다. 단성사를 기념하기 위해 2019년 10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단성사영화역사관이 개관했다.#[42] 도로교통법이 1962년 1월 17일에 제정됨과 동시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안전벨트 장착 의무화 최초 도입은 1978년에 시행이 되었다.[43] 상순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생긴 해프닝이다.[44] 이때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이 급진적인 증가로 인해 정부에서 1954년 전쟁고아 대책의 하나로 해외 입양 사업을 시작하였다. 해외 입양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아동양호회(1954년 설립, 현재의 대한사회복지회), 가톨릭구제회(1955년), 안식교성육양자회(1955년), 홀트양자회(1956년, 현재의 홀트아동복지회).[45] 현재의 성조기는 하와이가 주로 승격되고 난 뒤인 1960년 7월 4일부터 사용되었다.[46] 여담으로 '통행금지'는 실질적으로 1981년 12월 31일까지 시행되었는데, 이는 그 다음날부터 신정 연휴였기 때문이었다.[47] 1955년 3월 25일 내무부 장관 소속하에 독립된 위치에서 감정 및 연구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발족했다. 지금의 이름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0년부터 사용하고 있다.[48] 우리 연구소는 정부조직법 제4조에 의거해 1955년 3월25일 대통령령 제1021호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제’를 제정·공포함으로써 내무부 장관 소속하에 독립된 위치에서 감정 및 연구업무를 수행 하는 기관으로 발족됐다.#[49]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경기도 가평군에서 창궐한 사이비 종교이다.[50] 실제로, 백인엽은 군납비리를 저지렀다. 1962년 1월 29일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으로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일명 ‘혁명정부’에 의해 구속돼 무기징역과 함께 거금 7,247만 1,723환 추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전쟁 이전 여수·순천 10.19 사건에 관련된 인물이기도 하다.#[51] 영상 출처는 KTV 국민방송이다.[52] 일명 5.16 군사정변[53] 박정희를 위시한 5.16 군사정변 세력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제5대 국회를 해산하고 세운 통치기구이다. 1961년 설립해 1963년 해산했다.[54] 이 에피소드는 9-10회로 이어져 총 2회차로 진행된다.[55] 6.25 전쟁부터 오랜 악연으로 남았던 박영한과 백도석이 결판을 낸 회차이다.[56] 종남서림에 걸려온 전화에서 유대천 반장이 말하길, 남정길을 납치한 장소가 종남성당이라고 한다.[57] 실제로 원작 〈수사반장〉에 나왔던 배우들 모두 사망했다.[58] 이 장면은 원작 〈수사반장〉에 대한 예우 그리고 전설의 수사반장 박영한 역을 맡은 배우 최불암에 대한 예우로 시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준 장면으로 선사했다.[59] 경기도북부경찰서[60] 조경환과 서호정이 수사1반으로 들어온 날[61] 지방 시골의 경우 1980년대 말, 오지 산간마을의 경우는 더 심하면 90년대까지도 이랬다.[62] 그날 밤 김상순이 강아지를 데리고 소원을 비는 장면에서 보름달이 나오는데, 이 날은 음력으로는 7월 14일로 실제 보름달에 가까운 달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63] 부패한 종남서 간부들이 미군과 결탁해 밀수사건을 일으킨 날이다. 벽장에서 자다 깬 김상순의 시점에서 본 서류 정리 중인 박영한 뒤에 '4291年 9月 2日'이라 적힌 칠판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화요일인데 목욕탕에 간다니 거짓말이다'라는 식의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이 날은 화요일이었다.[64] 정확한 날짜가 나오는 것은 아니나, 수사1반의 구성이 완성된 뒤이고 수원 은행강도 사건보다는 전이므로 가능한 날짜는 이 둘 뿐이다.[65] 신고가 접수된 때가 10월 27일이었다. 이후 나오는 장면에서 사건 현장인 떡집에는 계속 일력이 26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과도 같은 성칠을 잃은 할머니의 경황없음을 나타내는 장치로 보인다.[66] 착공식 배경의 현수막에 적혀 있다.[67] 6일자 신문에 나온 내용을 읽는 장면이 있으므로 검거된 때는 5일로 보아야 한다.[68] 영한이 프로포즈를 하고 난 뒤, 눈이 내리는 것으로 보아 1959년 초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1958년 12월은 이상 고온이 매우 심했다.[69] 후반부에 대한뉴스 영상으로 등장한다.[70] 대사로만 짤막하게 언급된다.[71] 이때 상순이 새해 소원으로 새해에도 인생 종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빈다.[72] 마지막에 자막으로 언급된다. 이와 관련해 5월 8일 화요일을 묘사한 장면이 있었으나 다음날 재방송에서는 잘렸다.[73] 결혼하자고 꼬드겨 놓고 집문서를 뜯어갔다. 이 일을 당한 사람이 여러 명인 것으로 보아 실제 사건인 일명 박인수 사건을 모티브한 것으로 보인다.[74] 이 사고로 테니스보이즈클럽(종남 귀공자 4인방) 중 권형근과 노윤학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남정길은 극적으로 생존한다.[75] 1950년 6.25 전쟁 때부터 학도병과 직속 상관으로 관계를 맺어 오랜 악연이었던 박영한과 백도석은 종남사거리 교통사고 사건으로 연결고리를 끝맺었다.[76] 발령일자는 3월 23일이 맞으나, 종남경찰서 수사1반 형사들이 삼거리 소매치기 건으로 수사를 하고 난 뒤 뒤늦게 들은 듯하다.[77] 비서실장 강 형사가 한 짓.[78] 고관대작의 양자로 알려졌으나 이를 계기로 파양당했다.[79] 베냇저고리이다.[80] 원작 〈수사반장〉에서는 트렌치 코트가 박영한의 마스코트였지만, 왜 트렌치 코트를 입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 프리퀄로 전설의 수사반장 박영한이 시작된다는 의미로 여기게 됐다.[81] '흑흑흑 의의의 백백백 음과 양으로 감응하시어 만사형통이 하시옵소서'[82]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이 신문기사를 소장하고 있다.[83] 넉넉할 유, 도울 찬이라고 훈음을 직접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란 마음에서 어머니가 지은 이름이다.[84] 이 작품에서는 주요 인물인 빈센조 까사노와 자신의 딸 홍차영을 조력하는 변호사로 나왔으나, 바벨그룹 소속 바벨 제약의 신약 RDU-90 개발에 얽힌 소송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중 바벨그룹의 사주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로 결국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