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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이자 행운의 상징인 쿠란의 문[1]
이란의 3대 쉬아 성지 중 하나인 샤 체라그
시내 주요 명소인 나시르 알 물크 모스크, 일명 '핑크 모스크'
이란의 도시 شیراز 시라즈 | Shiraz | ||
지역 | 파르스 | |
면적 | 240km² | |
인구 | 1,570,000 명 | |
도시권 인구 | 1,870,000 명 | |
인구밀도 | 6,670명/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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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남부지방을 대표하는 대도시. 인구는 약 160만명으로, 이란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파르스 주에 있으며, 페르세폴리스 & 이스타크르와 키루스 2세의 무덤이 있는 파사르가다에가 이 도시 근방에 있다. 또한 이란 최고의 시성 하페즈, 사디, 커주 케르마니의 묘소가 있는 페르시아 문화와 문학의 중심이다. 이외에도 쿠란의 문, 바그 에람, 나시르 올 몰크 모스크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경제적으로도 중동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쇼핑몰[2]로 알려진 페르시안 걸프 역시 개장해 운영중이다. 크기는 정말 엄청나게 크다. 그 크다는 두바이 몰보다 30% 정도 더 크다. 이란에서 시라즈는 시인들의 도시 (하페즈의 도시), 장미의 도시,
2. 역사
쉬라즈는 이스파한, 타브리즈, 마슈하드, 케르만, 하마단, 테헤란과 함께 이란의 7대 역사 도시 중 하나이다. 고대부터 마을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도시가 설립된 것은 693년 우마이야 왕조의 동부 부왕 핫자즈 빈 유수프의 동생 무함마드 앗-타카피에 의해서이다. 이후 쉬라즈는 기존의 이스타크르를 대체하는 파르스 지방의 중심지가 되어 번영하였다.다만 고대 이후로 파르스 지방은 이란 서부나 북부 지방에 주도권을 빼앗겼기에 쉬라즈는 이란 통일 왕조의 수도였던 적은 없었고, 대부분 파르스를 기반으로 이란 고원 주요부를 다스린 왕조들의 수도였다. 시간 순서대로 파르스 부와이 왕조, 살구르 왕조, 인주 왕조, 잔드 왕조 등이 있다. 다만 부와이, 잔드 왕조의 경우 통일 왕조로 보기도 한다.
이란의 주요 도시이자 이란 3대 쉬아 성지 중 하나인 샤 체라그를 품고 있기에 간혹 테러 단체들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2008년 시내의 모스크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져 14명이 사망하였고, 2022년 10월에는 ISIS (다에시)의 총기 난사 테러로 1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는 비극이 있었다.
2.1. 고대
기원전 6세기 이전 엘람 시절부터 '티라지쉬'로 불렸고, 아케메네스 제국을 거치며 고대 페르시아어로 '쉬라지쉬'로 표기되었다. 현지인들은 지명의 유래를 샤나메에 언급된 왕자들의 이름 중에 하나로 추측한다. 사산 제국 시기 현 시가지 동쪽에 샤모바드 성채 (카스레 아부 나스르)가 세워졌고, 페르세폴리스-이스타크르의 인근 도시로써 식량을 보급하는 배후지였다. 행정적으로도 파르스 분지를 관리했다.2.2. 중세
이슬람 정복 시기에 바스라에서 출정한 이슬람 제국군은 641년경 샤모바드 등 요새들을 점령, 강하게 저항하던 이스타크르 공격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653년 이스타크르의 함락으로 파르스 지방을 평정한 이슬람 군대는 페르시아 및 조로아스터교 색채가 짙은 이스타크르를 대체할 새 병영 도시 (암사르)로써 쉬라즈를 택했다. 다만 얼마후 1차 피트나의 혼란이 찾아와 이루지 못했다.
쉬라즈가 본격적인 도시로 발돋움 한 것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인 693년에 2차 피트나를 진압한 대장군 알 핫자즈의 동생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알 타카피가 도시를 재창건하면서 부터이다.[6] 또한 이때부터 현재까지 파르스 지방의 주도로 유지되고 있다. 다만 이스파한보다 더 큰 도시로 설계되었음에도 쉬라즈가 이스타크르를 추월하는 데에는 더 시간이 걸렸고, 페르시아인들이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9세기에 들어서야 점차 역전이 이루어졌다.
790년경 쉬라즈 출신의 페르시아인 학자 시바와이는 첫 아랍어 문법서를 편찬했다. 9세기 초엽에는 시아파 이맘 알리 알 릿다 (알리 레자)의 암살 후 함자 등 그의 세 동생들이 쉬라즈로 피신했고, 835년 함자의 아들 알리가 압바스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그 무렵 쉬라즈는 중동 최고의 포도주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다.
2.2.1. 사파르 왕조
사파르 시기에 세워진 옛 대사원 (자메 아티크)
875년 (혹은 869년)경, 2세기 만에 세워진 이란계 국가인 사파르 왕조의 창건자 야쿱 이븐 알 라이트가 파르스를 정복했다. 그는 쉬라즈를 서부 수도로 삼았고, 894년에는 야쿱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아므르가 쉬라즈의 첫 대사원 (금요 모스크)을 세웠다. 이것이 여러 증축과 보수를 거쳐 현재의 마스제드 자메로 남아있다. 사파르 왕조를 거치며 쉬라즈는 확고히 파르스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2.2.2. 사파르 VS 압바스 왕조
876년 사파르 조의 이라크 침공과 883년 잔즈 반란을 극복한 압바스 왕조는 당시 이라크의 동쪽 방패로 여겨진 파르스 지방 수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 890년경 사파르 왕조는 호라산에서 벌아진 라피 빈 하르마타의 반란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894-896년, 둘라프 왕조를 멸망시키며 이란 서부를 수복한 압바스 조는 세력이 너무 커진 라피를 사파르 조와 함께 멸망시켰다. 이후 한동안 양측 간에 평화가 유지되던[7] 900년, 사파르 조의 2대 군주 아므르가 북쪽의 사만 왕조에게 패해 포로가 되자 압바스 군대는 정권 교체의 혼란을 틈타 파르스를 정복했다. 한편 사파르 조에서는 아므르의 조카 타히르가 아미르로 즉위했는데, 실권은 튀르크 굴람 (노예병사) 세뷔크-케리에게 있었다.900-901년 타히르와 세뷔크-에리는 파르스를 수복했으나 곧 물러났다. 다만 호전적인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사망하고 904년, 그들이 재차 파르스를 장악하자 신임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칼리파의 명의로 파르스 및 케르만 지배권을 타히르에게 주었는데, 실상은 세뷔크-에리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타히르가 본거지인 시스탄에서 향락에 빠지자 905년부터 세뷔크-에리는 파르스와 케르만의 세금을 바치지 않으며 자립했다. 이에 타히르는 파르스로 진격했으나 측근의 만류로 회군했다. 908년, 타히르의 5촌 당숙 알 라이트 빈 알리가 수도를 차지하자 세뷔크-에리는 타히르에게 원군을 보냈으나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복위에 실패하고 파르스로 향하던 타히르는 귀순하려던 생각을 바꿔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세뷔크-에리를 끌어내리고 영토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909년 6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세뷔크-에리는 적장들을 매수해 손쉽게 승리했고, 바그다드로 보내진 타히르는 비록 연금되긴 했지만 좋은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타히르의 실각 후 세뷔크-에리는 공식적으로 사파르 왕조 대신 압바스 칼리파에 복속했다. 이에 910년 봄, 알 라이트는 직접 출정하여 세뷔크-에리를 격파하고 파르스를 회복했다. 알 라이트는 동생 알 무앗달을 쉬라즈에 총독으로 두고 회군했는데, 그해 여름 무니스 알 무자파르가 이끄는 압바스 군대가 파르스를 정복하고 세뷔크-에리를 복위시켰다. 알 라이트는 이를 인정하고 케르만으로 물러났지만, 세뷔크-에리는 압바스 군대와 그를 추격해 격파했다. 사로잡힌 알 라이트 부자는 라카에 연금되어 928년에 죽었다. 이로써 세뷔크-에리가 파르스 및 케르만에서 완전히 집권하나 싶었지만, 곧 약속했던 연공을 내지 못하여 폐위되었다. 이로써 파르스와 케르만은 35년만에 완전히 압바스 령으로 회복되었다.
특히 사실상 간접 지배였던 케르만에 비해 본국에서 더 가까운 쉬라즈는 이스파한과 함께 중요 거점으로써 총독이 직접 파견되는 등 세심히 관리되었다. 911년에는 아예 사만 왕조가 시스탄을 정복, 사파르 왕조를 일시적으로 멸망시키며 압바스 왕조는 이란 대부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비록 압바스 왕조는 점차 쇠퇴했지만, 사만 왕조 역시 호라산 ~ 페르가나 지배에 만족했기에 이란은 한동안 현상유지[8]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931년, 지여르 왕조의 조로아스터교도 마르다비즈가 하마단 ~ 이스파한 일대를 정복하며 압바스 왕조의 이란 지배는 점차 무너졌다. 932년에는 케르만에 일야스 왕조가 자립했고, 이듬해 파르스 역시 재차 페르시아계 세력이 차지한다.
2.2.3. 부와이 왕조
부와이 시기의 성문 중 하나인 쿠란 문
933년, 첫 이란계 시아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의 이마드 앗 다울라 알리가 쉬라즈를 정복했다. 949년 알리가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조카 아두드 앗 다울라 파나 호스로는 983년까지 재임하며 쉬라즈를 바탕으로 케르만과 이라크까지 얻으며 제국을 이루었다. 그의 지배 하에서 쉬라즈는 이란 지역의 경제적, 학문적 중심지로 성장했고 이슬람권의 주요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파나 호스로는 시내에 대도서관 및 병원 (비마리스탄)과 함께 다수의 모스크, 바자르, 카라반사라이 (객관), 궁전, 정원들을 세웠다. 궁전 중 하나는 길이가 5km에 달했고, 360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도시 남쪽에 974년 카르즈 파나 호스로라 불린 병영 성채를 더했고, 동생 루큰 앗 다울라 하산은 산지에서 도시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지하 수로를 세웠다. 이때의 건물들 중 대사원과 쿠란 문이 현존한다. 한편 이 시기 쉬라즈에는 개종하지 않은 페르시아인들을 위한 두 곳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아슈테카데) 역시 있었다.
부와이 시기 쉬라즈는 포도, 장미, 아마포, 양모, 목화, 세정제, 대추야자 꽃물, 보라색 염료 등 파르스 지방의 농산물을 수출하며 번영했다. 서가 1000년경 시가지는 12개 구역으로 나뉘었고, 8개의 문이 있는 성벽으로 둘러졌다. 시내에는 또한 카펫, 그림 시장도 있어 화려한 문화와 부를 나타냈다. 여러 특산물 중 포도주, 곡물, 금, 은 등은 시라프나 나자이람 등의 항구들을 통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파나 호스로가 과학, 의학, 신학 등을 후원했기에 쉬라즈는 학문적으로도 발전했다. 983년 파나 호스로의 사후 쉬라즈를 중심으로 한 파르스는 케르만과 함께 샤라프 앗 다울라 쉬르딜 아부 파와리스 (983~988), 삼삼 앗 다울라 아부 칼리자르 마르주반 (988~ 998), 바하 앗 다울라 아부 나스르 피로즈 화르샤드 (998~1012)에 이르는 군주들의 통치를 받았다.[9] 11세기 초엽, 도시의 인구는 10만을 넘겼다. 부와이 군주들은 조로아스터교도, 기독교도, 유대인 등을 고위직에 등용하는 등 관용적 정책을 펼쳤기에 쉬라즈 역시 개방적 분위기를 유지했다.
1012년 케르만과 분리되어 술탄 앗 다울라 아부 슈자의 이라크와 합쳐졌던 파르스는 1028년, 그의 아들 아부 칼리자르 마르주반에 위해 다시 케르만과 합쳐졌다. 1048년, 마지막으로 부와이 왕조 대부분을 지배한 마르주반이 사망하자 부와이 조는 분열되어 쇠퇴했다. 본래 장남 아부 나스르 호스로 피로즈 (알 말리크 알 라힘)가 계승했지만 동생 아부 만수르 풀라드 술탄이 반기를 들어 파르스를 차지했고, 케르만은 신생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1049년, 호스로 피로즈는 다른 동생 아부 사드 호스로 샤를 파견했고 그는 쉬라즈를 점령한 후 풀라드 술탄을 사로잡았다. 다만 튀르크, 다일람 병사들 간의 다툼으로 호스로 샤는 곧 철수했고 풀라드 술탄이 복위했다. 이에 1051-52년 호스로 피로즈가 직접 나서 풀라드 술탄을 격파한 후 호스로 샤를 총독으로 봉했다. 그러자 풀라드 술탄은 셀주크 술탄 토그릴 1세에 복속하여 군대를 지원받은 후 1053-54년 쉬라즈를 수복하였다. 이러한 내전들을 거치며 부와이 시기 쉬라즈의 건물들 중 상당수가 훼손되었다.
2.2.4. 셀주크 제국령
재차 복위한 풀라드 술탄은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토그릴 1세, 호스로 피로즈 순으로 언급하며 두 세력 사이에서 평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1055년, 풀라드가 이끄는 다일람 부대가 쉬라즈를 장악하고 호스로 피로즈에 복속했다. 다만 풀라드를 믿지 못한 호스로 피로즈는 축출된 동생 풀라드 술탄을 용서하고 그를 복위시켰다. 이후 풀라드 술탄은 형 호스로 피로즈에 복속하며 부와이 왕조의 안정이 회복되었으나, 1055년 12월에 토그릴 1세가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호스로 피로즈를 폐하자 풀라드 술탄은 다시 셀주크 조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약화된 파르스 부와이 조는 1062년, 파르스 동부를 거점으로 한 쿠르드계 샤반카라 부족장 파들루야 (니잠 앗딘 파즈랄라 / 아미르 아불 압바스 파들라와이)에 의해 풀라드 술탄이 전사하며 멸망하였다.이전부터 셀주크 왕공 카부르트와 친교가 있던 파들루야는 1063년 그를 따라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며 연공 납부를 중단했고,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재상 니잠 알 물크가 진격해 진압했고, 파들루야는 사면을 받아 권좌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1072년에 만지케르트 전투를 틈타 재차 반란을 일으켰고, 니잠 알 물크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자 다시 진압했다. 사로잡혀 이스타크르 성채에 구금된 파들루야는 1078년 수비대를 장악하려 시도하다가 처형되었다. 그리고 1075년을 전후로 하여 셀주크 아타베그 잘랄 앗 딘 부자가 도시의 인프라를 재건 및 보수하자 인구가 증가하며 쉬라즈는 안정을 되찾았다.
1090년대 셀주크 내전을 틈타 쉬라즈에서는 튀르크계 순구르 가문이 자치를 누렸고, 그들 역시 1105년에 성벽을 재건하는 등 쉬라즈를 발전시켜 나갔다. 12세기 초엽에는 여러 율법 학자들이 배출되는 등 쉬라즈는 이슬람 신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고, 여러 성지들 및 새로운 대사원이 세워졌다. 한편 11-13세기 들어 파르스 지방에는 많은 튀르크-캅카스계 부족들이 이주해왔고, 그중 카슈카이나 루르인 등이 현존한다. 반세기 넘게 셀주크령으로 안정을 누리던 파르스 지방은 술탄 기야스 앗 딘 마수드가 이란 서부 및 이라크를 신경쓰고, 조카 말리크샤 3세와 내전을 벌이던 틈에 튀르크계 왕조로 자립하게 된다.
2.2.5. 살구르 왕조
살구르 왕조는 셀주크 제국에게 동,서,북으로 둘러싸였기에 명목상 셀주크 술탄에 복속했으나 12세기 후반 들어 점차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 쉬라즈는 페르시아 문화의 산실로써 번영했다. 1170년 루즈비한 바클리가 쉬라즈에 자신의 수피 조직을 구성했다. 이후 내전을 겪으며 기근이 닥치는 등 쇠퇴하던 도시는 1195년 사드 1세의 집권 후 안정을 찾았다. 그는 1203년 셀주크 조의 붕괴 이후 혼란기를 틈타 이스파한을 점령, 이란 남부를 석권했다. 비록 신흥 강자호라즘 왕조에 복속했으나, 호라즘의 본거지와 매우 멀었기에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10] 1220년경 또다른 신흥 강자인 몽골 제국이 호라즘을 격파하며 다가오자, 살구르 조의 군주 아부 바크르는 몽골에 복속하여 친구를 뜻하는 쿠틀루그 칸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쉬라즈는 니샤푸르, 메르브 등과 달리 파괴를 당하지 않았다.
한편 아부 바크르의 치세에 궁전 건설을 위해 땅을 파던 중 재상 아미르 무라카브 앗 딘은 7대 쉬아 이맘 무사 알 카짐의 아들 아흐마드의 무덤을 발견하고는 이듬해 성지를 조성했다. 이것이 현재의 샤 체라그이다. 13세기 중반 쉬라즈의 모자파리 병원에서는 당대 이란의 명의 쿠트브 앗 딘 마흐무드 시라지가 1262년 마라게로 이주할 때까지 병원장으로 활약했다. 13세기 후반 살구르 군주들은 쉬라즈 출신의 대시인 사디와 역사가 바사프 시라지 등을 후원하며 안정기와 문화적 번영기를 구가했고, 쉬라즈는 이란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한편 사드 2세의 딸 아비쉬 하툰은 아타베그 칭호를 받고 통치하였는데, 그녀는 쿠트바에 언급된 몇 안되는 여성 군주였다.
1272년, 그녀는 훌라구의 막내 아들 몽케 테무르와 결혼해 공동으로 통치했다. 다만 부부는 일 칸국이 원하던 대로 세금을 크게 올랐고,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1282년 몽케 테무르가 사망하자 아비쉬 하툰은 재차 독립을 꾀하려 하다가 폐위되었다. (1284년) 이후 파르스는 일 칸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뒤이어 1287년, 가뭄과 기근으로 쉬라즈에서만 최대 10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속출했다. 1291년에는 대시인 사디가 사망하여 예술가의 정원에 안장되었다. 1297년, 홍역과 역병으로 쉬라즈 일대에서 5만여명이 사망하자 아비쉬 하툰과 몽케 테무르의 딸인 쿠르두진 하툰이 자선을 통해 인명 구조 및 인프라 보수에 나섰다.
2.2.6. 인주 왕조
1304년, 올제이투 칸은 페르시아인 샤라프 앗 딘 마흐무드 샤[11]를 파르스 총독에 봉했다. 당시 파르스 지방은 왕령지, 즉 인쥐 (injü)였기에 그의 가문은 인주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흐무드 샤는 20년 넘게 재임하며 파르스에서 거의 자립했고, 이에 1319년 아부 사이드 칸은 그를 해임한 후 셰이크 후세인 이븐 주반을 새 총독으로 파견했다. 당시 쉬라즈를 통치하던 마흐무드 샤의 아들 아미르 기야스 앗 딘 카이호스로는 저항했지만, 결국 중앙군에게 축출된 후 셰이크 후세인과 쿠르두진 하툰이 쉬라즈에 집권했다. 한편 마흐무드 샤는 셰이크 후세인을 암살하려다 사로잡혀 타브리즈에서 투옥되었고, 1335년 아부 사이드 칸의 사후 그를 계승한 아르파 케운에게 처형되었다. 이때 도피했던 아들 잘랄 앗 딘 마수드 샤는 이듬해, 반군이 보내온 아르파 케운의 목을 베어 복수했다. 그리고 카이호스로는 일 칸국의 내전을 틈타 쉬라즈를 수복하고 파르스를 장악했다.한편 잘라이르 왕조의 재상을 역임하던 마수드 샤는 꼭두각시 칸 무함마드 칸이 피살되자 쉬라즈로 향했는데, 그에게 권력을 나누지 않고 대립하던 카이호스로가 1338년 사망한 후 집권했다. 하지만 이듬해 동생 샴스 앗 딘 무함마드가 탈옥하여 추판 왕조의 군주 피르 호세인과 쉬라즈로 진격,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후 피르 호세인이 무함마드를 살해하자 쉬라즈에선 그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로써 그가 철수하자 로레스탄으로 도주했던 마수드 샤가 복위했으나, 1340년 피르 호세인이 쉬라즈를 재점령했다. 잘라이르 조로 망명한 마수드 샤는 피르 호세인의 사촌이자 경쟁자인 야기 바스티와 연합해 1341년 쉬라즈 수복에 나섰다.
다만 그 직전에 마흐무드 샤의 또다른 동생이자 피르 호세인에게 이스파한에 봉해졌던 셰이크 자말 앗 딘 아부 이샤크가 쉬라즈를 장악한 상태였다. 그에 상관없이 둘은 쉬라즈를 점령했는데, 이번에도 야기 바스티가 마수드 샤를 죽이고 도시를 장악하자 여론은 분노하였다. (1342년) 결국 이듬해 3월, 아부 이샤크가 쉬라즈를 장악하며 8년에 걸친 내전 및 외침을 종식시켰다. 이후 다시 군대를 모아 쉬라즈로 진격하던 야기 바스티는 추판 조의 왕위가 비었다는 소식에 타브리즈로 향하여 내전에 뛰어들었다가 1344년 피살되었다. 아부 이샤크는 쉬라즈에 (미완성 상태로 사라진) 타케 카스라와 비슷한 궁전 건설에 나서고 허페즈, 카와주 케르마니, 우베이드 자카니 등의 수피 시인들을 후원했다.
1350년경 쉬라즈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정원, 물줄기, 바자르이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깔끔한 위대한 도시로 묘사했다. 아부 이샤크는 1350년부터 케르만 정복을 목표로 무자파르 왕조를 침공했다. 한편 아부 이샤크가 야즈드까지 공격하자 분노한 무자파르 술탄 무바리즈 앗 딘 무함마드는 1352년 파르스를 침공해 인주 군대를 격파한 후, 1353년 쉬라즈를 포위했다. 포위가 장기화되며 주민들이 전의를 상실하자, 아부 이샤크는 배신자를 색출한다며 2개 구역을 철거해버리는 등 광기를 보였다. 이에 다른 구역의 책임자가 주민들의 안위를 위해 몰래 무바리즈 앗 딘의 아들 샤 쇼자에게 성문의 열쇠를 바쳤다. 아부 이샤크는 항복한 후 도주하여 잘라이르 조의 도움으로 이스파한에서 농성했지만, 1357년에 재차 항복했다. 무바리즈 앗 딘은 그를 쉬라즈로 압송, 주민들의 저주와 함께 처형을 집행했다.
2.2.7. 무자파르 왕조
또다른 페르시아계 왕조인 무자파르 왕조의 무바리즈 앗 딘은 1319년 야즈드, 1340년 케르만 정복 후 기존의 동명이던 인주 왕조와 대립했다. 1357년 인주 왕조를 멸한 무바리즈 앗 딘은 쉬라즈를 수도로 삼았고, 잠깐이나마 타브리즈까지 차지하며 이란 주요부를 통일했다. 다만 이듬해 그는 아들 샤 쇼자에게 폐위되었고, 1363년 옥사하였다. 한편 샤 쇼자는 이스파한을 지배하는 동생 샤 마흐무드와 대립했는데, 1364년 후자는 처가인 잘라이르 조의 도움으로 쉬라즈를 점령했다. 샤 쇼자는 1366년에야 수도를 수복했고, 1374년 우웨이스의 죽음을 틈타 샤 마흐무드가 타브리즈를 장악했다가 병으로 회군한 후 이듬해 사망하자 이스파한을 병합했다. 뒤이어 샤 쇼자는 일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장악하며 이란의 패권을 쥐었지만, 조카 야흐야의 반란으로 회군했다. 인주 왕조 말기에 파괴를 겪었던 쉬라즈는 샤 쇼자의 치세에 재건되었다. 특히 그는 대시인 허페즈를 후원했다.하지만 샤 쇼자는 알코올 중독으로 후계자를 죽인 후 후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1384년 사망했고, 유언과 함께 당시 아제르바이잔 원정 중이던 티무르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들의 복속을 약속했다. 이로써 쉬라즈는 티무르의 칼날을 모면했지만, 무자파르 조의 내전에 휘말렸다. 1387년 티무르가 일시적으로 쉬라즈를 장악하자, 샤 쇼자의 아들 자인 알 아비딘은 후제스탄으로 피신했다. 그 틈에 야즈드의 샤 야흐야가 티무르가 떠난 직후 쉬라즈를 장악했다. 야흐야의 동생 만수르는 잘라이르 조의 지원을 받아 후제스탄의 슈슈타르에 있다가 사촌 자인 알 아비딘이 의탁해오자 그를 감금, 군대를 빼앗고 1388년 쉬라즈로 진격해 장악했다. 축출된 야흐야는 탈옥한 자인 알 아비딘과 쉬라즈 수복을 노렸으나 패퇴했고, 그후 만수르는 케르만의 숙부 이마드 앗 딘 아흐마드에게 티무르에 대한 공동 전선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었다. 이에 만수르는 오스만 제국에까지 동맹을 청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없었고, 결국 홀로 티무르를 이란에서 축출하기로 했다. 1393년 초엽, 이스파한에 이어 쉬라즈를 요새화한 후 파사로 향하려던 만수르는 그가 도시를 버린다고 여긴 노파의 호통으로 쉬라즈에 남았다.
1393년 3월, 티무르의 3만 대군이 다가오자 만수르는 2천의 기병대와 출격했으나 자인 알 아비딘의 아들 무함마드가 이탈하며 1천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30배의 병력 차이에도 전투를 준비했고, 쉬라즈 북쪽 5km 지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자파르 기병대는 용맹히 돌격하여 티무르 진영을 휩쓸었다. 티무르도 스스로 검을 빼어 싸우고 투구에 칼이 부딪힐 정도로 싸웠으나, 결국 무자파르 기병대는 중과부적으로 대부분 전사했고 만수르 역시 전사했다. 이후 야즈드, 이스파한, 케르만 등이 연이어 항복하며 무자파르 조는 단숨에 멸망하였다. 역시나 항복한 쉬라즈에 입성한 티무르는 한달간 머물며 연회를 벌였다. 또한 그는 무자파르 왕가의 보물을 접수하고 그 왕족들은 일단 살려두었다가 곧 파르스 지배에 방해가 된다 여겨 그해 5월에 이스파한 근처 메흐야르에서 학살하였다.[12] 이렇듯 14세기 중반 ~ 후반까지 여러번 내우외환을 겪은 쉬라즈의 인구는 6만 정도로 줄어 있었다.
2.3. 티무르 제국기
티무르는 페르시아 문화에 능통한 손자를 쉬라즈 총독에 봉해 도시의 재건을 맡겼다. 티무르 사후 샤 루흐는 조카 이스칸데르 미르자를 쉬라즈 총독에 봉했으나, 1413년 반란을 일으키자 동생 바이카라로 대체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스칸데르의 설득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친정하여 진압했다. (1414년) 티무르 제국기 쉬라즈는 사디와 허페즈의 도시로 알려졌고, 그들의 무덤은 거의 순례지가 되었다. 1420년 기준 쉬라즈의 인구는 20만 수준을 회복했다. 그러던 1446년, 샤 루흐가 와병하던 틈에 그의 손자 술탄 무함마드가 파르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70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진압한 샤 루흐는 이듬해 봄, 헤라트로 돌아가던 중 병사했다.그러자 술탄 무함마드는 재차 쉬라즈 및 이스파한을 장악했고, 이어진 내전기에 형 아불 카심 바부르가 지배하던 헤라트를 점령하며 제국의 주도권을 잡는다. (1449년) 다만 이듬해, 술탄 무함마드가 회군하자 본래 그의 동맹이던 다른 형 알라 앗 다울라가 헤라트를 점령했다가 다시 아불 카심 바부르에게 뺏겼다. 아불 카심 바부르는 더 나아가 1451년 술탄 무함마드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파르스와 이스파한을 얻었다. 하지만 1452년 흑양 왕조의 자한 샤가 티무르 조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고 동진하자 그는 일대를 모두 상실하였고, 알라 앗 다울라의 반란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이후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자한 샤와 이란을 양분하여 전자는 라이 - 이스파한 - 케르만, 후자는 타브리즈 - 하마단 - 쉬라즈를 지배하기로 했다. 이로써 파르스 지역은 흑양 왕조령이 되었다.
2.4. 중근세
1467년, 자한 샤를 전사시키고 서아시아의 새 강자로 등장한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은 빠른 속도로 영토를 넓혔다. 이를 경계한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흑양 조와 동맹하여 친정에 나섰지만, 1469년 초엽 역시 패하고 곧 피살되었다. 그해 10월, 우준 하산은 두 아들들과 정예병을 보내 흑양 왕조의 마지막 술탄 유수프를 쉬라즈에서 붙잡아 처형했다. 한편 그 역시 신임 티무르 군주 후세인 바이카라와 협상해 루트 사막을 경계로 휴전했고, 한동안 쉬라즈는 백양 왕조 령으로 남았다.2.4.1. 사파비 제국
1503년 (혹은 1504년) 이스마일 1세가 점령하며 쉬라즈는 사파비 제국령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순니 성직자들을 살해 혹은 추방하여 쉬라즈를 쉬아 도시로 확정시켰다. 사파비 시기 쉬라즈는 파르스의 주도로써 안정을 누리며 발전했고, 1550년에 총독으로 부임한 알라 베르디 칸과 그의 아들 에맘 콜리 칸이 도시를 대대적으로 재건했다. 16세기 후반에는 여러 쉬아 학교 및 성지들이 세워졌고, 상당수가 현존한다. 특히 아바스 1세 시기, 에맘 콜리 칸은 여러 궁전들과 이스파한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을 세웠다.쉬라즈는 예술의 도시로써 타지마할의 건설 시에도 장인들을 보냈고, 1600년경 인구는 20만 선을 유지했다. 그 무렵 도시를 방문한 영국인들은 쉬라즈 포도주가 세계 최고라 평가했고, 1621년 영국 및 프랑스 상인들은 현지 포도 종자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1634년에는 울라마의 해석을 맹신하는 대신 무슬림 각자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현지 철학자 물라 사드라가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한편 1630년과 1668년, 두 차례의 홍수로 시가지 상당 부분의 파괴를 겪은 쉬라즈는 1724년 아프간계 호타키 왕조에게 함락된 이래로 다시 혼란과 쇠퇴를 겪게 된다.
2.4.2. 혼란기
하지만 18세기 초엽 사파비 조의 쇠락기에 쉬라즈는 호타키 왕조의 습격으로 쇠퇴했다. 이후 아프샤르 왕조기에 안정을 찾나 싶다가 나디르 샤가 다게스탄 원정에서 어려움을 겪던 1744년 1월, 파르스 총독 모하마드 타키 칸 쉬라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급히 회군한 나디르 샤는 그해 6월에 쉬라즈를 포위했고, 수개월간 포위한 끝에 겨울에 함락했다. 나디르 샤는 전에 타키 칸을 죽이지 않기로 서약한[13] 바가 있었기에 고문 후 궁형 및 안구 적출 등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그후] 이때 쉬라즈도 큰 피해를 입었다. 17세기 20만에 이르던 인구는 나디르 샤가 사망한 1747년기준 5만여에 그쳤고, 시내의 유서 깊은 건물들은 대부분 훼손되었다.2.4.3. 잔드 왕조
잔드 왕조의 궁성으로 지어진 카림 칸 아르그
피폐해 있던 도시는 얼마 안가 1762년, 카림 칸에 의해 잔드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 카림 칸은 1만 2천이 넘는 노동력으로 아르그 (궁성), 행정 건물, 모스크, (지붕 덮힌) 바자르 등의 왕실 구역을 조성했다. 그는 또한 도시 성벽을 재건하고 그 주변에 해자를 둘렀으며, 관개 및 배수 시설 등의 인프라를 건설했다. 잔드 시기 쉬라즈는 11개 구역 (무슬림 구역 10개, 유대 구역 1개)으로 구성되었고, 6개의 성문이 있었다. 부와이 시기때처럼 문화적, 예술적 번영과 함께 소수자들도 관용을 누리며 공존했다. 1779년 3월, 카림 칸은 사망하여 나자르 정원 (현 파르스 박물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그의 후계자들이 연이어 내전을 벌이며 잔드 왕조는 크게 약화되었고, 쉬라즈에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한 카자르 왕공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란 북부에서 복수를 노렸다. 섭정 자키 칸이 그를 추격하기 위해 파견된 알리 모라드 칸은 이스파한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쉬라즈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케르만에서 니자리파의 도움으로 군대를 모으던 카림 칸의 동생 사데크 칸은 자키 칸의 급사를 틈타 1779년 6월, 쉬라즈로 진격해 자키 칸의 아들 아크바르 칸을 손쉽게 제압한 후 조카 아볼 파스 샤를 옹립했다가 2달만에 스스로 샤에 올랐다. 하지만 이스파한에서 세력을 키운 알리 모라드 칸은 1781년 2월, 쉬라즈를 포위해 한달의 공성전 끝에 함락한 후 사데크 칸을 죽이고 샤가 되었다. 이러한 내전을 틈타 더욱 세력을 키운 아가 모하마드 칸이 잔드 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에 알리 모라드 칸은 직접 출정했으나, 그 틈에 쉬라즈 함락 당시 사데크 샤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자파르 칸이 봉기하여 집권했다. 다만 자파르 칸 역시 아가 모하마드를 상대할 뾰족한 수가 없았기에 연패했고, 보물과 하렘도 팽개친 채로 쉬라즈로 도주했다.
이로써 이스파한을 접수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쉬라즈를 노렸다. 1788년, 그는 자파르 샤가 부재하길 바라며 쉬라즈로 진군했다. 다만 샤가 있었기에 견고한 수비 태세를 확인한 그는 회군했다. 이후 이스파한 수복을 시도한 자파르 샤는 아가 모하마드 칸이 재차 남하하자 쉬라즈로 철수했다. 카자르 조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맞서던 자파르 샤는 1789년 2월 23일, 알리 모라드 칸의 아들 세예드 모라드 칸에게 암살당했다. 그러자 곧바로 복수에 나선 자파르 샤의 아들 로프트 알리 칸이 쉬라즈를 포위, 2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세예드 모라드 칸이 항복하자 그를 처형하고 샤로 즉위했다. (1789년 5월 10일) 한편, 연이은 내분을 기회로 여긴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재차 쉬라즈로 진군했다. 성밖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낙타를 이용해 잔드군의 말들을 놀라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로프트 알리 칸이 견고한 쉬라즈 성채에서 우주방어에 나서자 테헤란으로 회군했다.
1791년 로프트 알리 칸은 1791년 이스파한 회복을 위해 출정했는데, 도중 쉬라즈의 칼란타르(수비대장) 핫지 이브라힘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그 아들을 인질로 대동했다. 예상대로 군대가 떠나자 핫지 이브라힘은 남은 군대로 하여금 자신의 형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하며 쉬라즈를 장악했다. 이에 로프트 알리 샤는 수백명의 근위대와 함께 쉬라즈로 돌아왔지만 성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본 병사들 대부분은 성내의 가족들이 보복당할까 우려하며 이탈해버렸다. 그후 쉬라즈는 카자르 조에게 넘어갔고, 잔여 병력과 걸프 해안을 떠돌던 로프트 알리 칸은 쉬라즈 수복에 나서 수적 열세에도 아가 모하메드 칸의 동생 모스타파 콜리 칸과 카자르 조의 원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이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4만 대군과 남하했고, 페르세폴리스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프트 알리 칸은 야습을 통해 승리할 뻔 했으나 결국 케르만으로 후퇴했다. (1792년) 로프트 알리 칸은 다시 군대를 모아 쉬라즈 수복을 시도했으나 아가 모하메드 칸이 직접 수비했기에 실패했다. 그해 7월, 아가 모하메드 칸은 잔드 왕실과 로프트 알리 샤의 하렘을 테헤란으로 압송했다.
2.5. 카자르 왕조령
나렌제스탄 카밤 : 19세기 페르시아 정원의 대표적 예시
1888년에 세워진 나시르 올 몰크 모스크
1794년, 마침내 로프트 알리 칸의 죽음과 함께 카자르 왕조는 이란을 통일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의 약탈 및 파괴와 함께 30여년 만에 재차 수도 지위를 잃은 쉬라즈는 쇠락했다. 1822년 역병과 콜레라로 수천명이 죽었고, 1824년에는 지진으로 시가지 일부가 파괴되었다. 1830년에는 메뚜기 때가 곡물 농사를 망쳐 벌어진 기근으로 수천이 사망하고 더 많은 수가 도시를 떠나 인구가 1만 9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1853년에도 큰 지진이 있었다.
한편 1819년 쉬라즈에서 태어난 상인 세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1844년 5월 22일 밤에 스스로를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도, 즉 '버업' (باب)이라 칭하며 바비교를 창시했다. 따라서 바비교의 후신인 바하이교에서도 쉬라즈를 성지로 여긴다. 다만 1850년 그의 처형 후에도 한세기 가량 여러 공격을 겪으며 바하이 순례지로 남아있던 버업의 집은 1979년 이란 혁명 후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어 1981년에 평탄화 및 공원화 되었다.
여라 재해에도 불구하고 쉬라즈는 19세기 전반에 걸프 연안과의 교역 덕에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따라서 파르스 총독 자리는 카자르 왕족들에게 있어 특별한 지위로 여겨졌고, 여러 저택과 정원들이 세워졌다. 다만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걸프 무역은 큰 타격을 받았고, 1860년대부터 강해진 영국의 영향력에 대해 산지의 카슈카이 부족 등이 저항하며 인근에서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근대화가 이루어져 1872년, 파르스 신문이 창간되었다.
1880년, 쉬라즈의 유지인 카밤 가문은 영국-인도군의 지원으로 주민들의 반영 봉기를 진압했다. 1883년의 통계에서 쉬라즈의 인구는 5만 4천여로 집계되었다. 1903년 쉬라즈에는 영국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영국은 이후 후제스탄의 석유 발견과 함께 더욱 그 배후지인 쉬라즈에 신경썼다. 20세기 초의 입헌혁명 당시 쉬라즈는 입헌파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1907년 미르자 자한기르 칸 시라지는 신문 '수레 에스라필'을 통해 혁명 및 카슈카이 부족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듬해 자한기르 칸이 처형되고 그의 신문은 폐간되었다.
1910년에는 유대인들이 무슬림 소녀를 제물로 바쳤다는 거짓 소문이 퍼진 후 군중 및 (이들을 진압하라고 투입된) 군인들이 유대인 구역을 습격했다. 대부분의 유대 주민들은 영국 영사관, 모스크, 무슬림 친구집, 테라스 등에 몸을 숨겼지만 남은 이들 중에는 희생자가 나왔다. 이 폭동 당시 유대인 12명이 살해되고 5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6천여명이 재산을 강탈당했다. 이때 파괴된 260채의 유대 구역은 영국 영사관, 무프티, 시정부, 몇몇 상인들의 지원으로 복구되었다.
1911년에는 현지 쉬아 지도자 세예드 지아에딘 타바타바이가 영국의 도움으로 신문 '바나예 이슬람'을 창간했고, 1913년 파르스 신문이 복간되었다. 세계 1차 대전기 이란은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었고, 파르스 지방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 1918년,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에 나세르 칸 휘하의 카슈카이 부족이 쉬라즈를 포위했으나 카밤 가문 및 영국군의 개입으로 격퇴되었다. 1919년에는 독감으로 1만여명이 사망했다.
2.6. 근현대
현대 시가지
세예드 지아에딘 타바타바이의 지지 하에 들어선 팔라비 왕조 시기 쉬라즈에는 허페즈와 사디의 영묘 등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다. 1945년 쉬라즈 대학교, 1962년 팔라비 대학교가 세워졌고 1967년부터는 쉬라즈 문화제가 열린다.
다만 해안 도시들과 달리 도시는 산업화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고, 종교적 기반도 크지 않아 이란 혁명 당시에도 중심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20세기 후반 들어 인구는 빠르게 늘었고, 여러 문화유산들이 복원 및 보수되었다. 1963년만 해도 23만이던 쉬라즈의 인구는 빠르게 늘어 1996년, 100만을 돌파했다.
3. 예술의 도시
이란의 시성 (詩聖) 하페즈의 영묘
13-14세기 쉬라즈는 군주들이 페르시아인 학자 및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페르시아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중세 후반기 이란에서 활동한 양대 시인으로 불리는 허페즈와 사디가 쉬라즈에서 태어났다. 또한 수피 (어레프) 루즈베한, 철학자 물라 사드라 등이 쉬라즈에서 활동했다. 이에 고전 지리가들은 쉬라즈를 다롤 엘름, 즉 '지식의 집'이라 일컬었고 서구 학자들은 '이란의 아테네'로 평가한다.
4. 음식
현재는 이란 전역에서 술을 소비하는 것이 불법이지만, 과거에는 와인으로 유명했던 도시다. 술에 관심을 가지면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시라즈 와인이 바로 이 지방에서 유래된 것. 지금은 술을 담글 수 없으니 현재 공식적으로 이란산 시라즈 와인은 없다. 다만 외국에서 시라즈산 포도를 수입해서 시라즈 와인이라고 판매하거나, 밀주로 담가서 내부에서 소비하는 형태는 존재한다.지중해 지역처럼 오이, 토마토, 양파 등을 주 재료로 하여 민트나 올리브유를 첨가하는 쉬라지 샐러드 (سالاد شیرازی) 역시 유명하다.
또한 이란 남부지방 특산이라는 팔루데(faloodeh)라는 아이스크림이 있다. 한국의 용수염을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놨다고 생각하면 편할 듯. 식감이 꽤나 독특하다.
5. 교통
시내 대중교통으로 쉬라즈 지하철이 있다. 2014년에 1호선, 2023년에 2호선이 개통했다. 총 6호선으로 계획되어 있다.쉬라즈 역에서는 이스파한을 경유하여 테헤란, 마슈하드로 향하는 기차가 있다. 내륙임에도 남쪽으로 향하는 철도가 없어 이곳이 시종착 역이다.
시가지 남동쪽에는 쉬라즈 샤히드 다스티게입 국제공항이 있어 이란 남부의 허브 공항으로 기능한다.
6. 볼거리
시내에는 여러 역사 유적지가 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시아파의 성지 중 하나인 샤에체라그 영묘가 위치해있다.
6.1. 샤에체라그
شاه چراغ
영어 Shah Cheragh
이란의 쉬아 무슬림 사이에서 마슈하드, 쿰과 함께 3대 성지를 이룬다. 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의 아들 아흐마드가 형이자 8대 이맘인 알리 알 릿다 (레자)를 만나러 호라산으로 가던 중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어 묻힌 곳이다. 13세기 살구르 왕조 대에 영묘가 조성되었고, 14세기 인주 왕조 대에 부속 시설들이 더해져 복합 단지로 거듭났다. 그후 사파비 왕조와 카자르 왕조 대에 보강되었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지고 있다. 페르시아어로 '빛의 군주'란 의미인 샤 체라그는 남부 이란 시아파의 상징적인 곳이나, 2022년 10월 26일 이를 노리고 다에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가 발생하여 순례객 13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6.2. 시타델 (아르그)
피사의 사탑에서처럼 사진을 찍기도 한다
7. 주변 관광지
이란의 상징 페르세폴리스. 과거 페르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옛 수도다.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워낙에 터가 넓어 복원, 관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페르시아어로는 تخت جمشيد(Takht-e Jamshid)[15].
페르세폴리스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더 가면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번째 수도인 파사르가다에가 있다.
그외에 남쪽 부셰르 방향에 갈루라는, 산책하기 좋은 곳도 있다.
8. 창작물에서
- 어떤 영웅의 주인공 라힘 솔타니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다.
[1] 부와이흐 왕조 당시 9세기본 쿠란을 기둥에 넣어 세움. 현대 보수 공사 후 쿠란 진본은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2] 같은 시기 개장한 이스파한의 '이스파한 쇼핑 센터'가 조금 더 커서 2위로 밀렸다.[3] 시라즈 와인(정확히는 포도의 품종)은 프랑스 론 지방 북부에서 재배하는 시라(Syrah) 품종을 말하는 것으로 이 포도가 호주로 넘어가면서 시라즈라는 명칭이 된 것일뿐 도시 시라즈와는 무관하다.[4] 대우자동차에서 한때 개발중이었던 대형 승용차 이름으로 작명하려 했지만 대우자동차의 쌍용자동차 인수와 그로 인해 말미암은 대우자동차 부도로 무산되었다.[5] 다른 예시로 케르만, 야즈드, 타브리즈 정도가 있다[6] 혹은 알 핫자즈의 다른 친척 무함마드 빈 카심이 창건한 것이라고도 한다[7] 압바스 조는 라이, 하마단, 이스파한까지 세력을 넓혔다[8] 압바스 조가 후제스탄, 파르스, 아제르바이잔, 이스파한, 라이, 케르만 차지. 사만 조가 타바리스탄, 쿠미스, 쿠히스탄, 호라산 차지.[9] 후자의 경우 이라크까지 지배했다.[10] 1210년경에는 시인 사디가 태어났다[11] 일설에 따르면 11세기 헤라트의 수피 성인 압둘라 안사리의 후손이라 한다[12] 이때 야흐야의 모친 알리야 샤 하툰이 주검을 수습, 자신이 야즈드에 세운 하투니예 마드라사에 안장했다. 한편 장님이 된 자인 알 아비딘 등은 사마스칸트에서 여생을 보냈다[13] 쉴레이만 1세와 이브라힘 파샤의 약속과 유사하다[그후] 목전에서 형제와 아들들 및 친구들이 처형되고 부인이 나디르 샤의 병사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는 등의 모욕을 당했다. 차라리 장님이 된게 다행일지도[15] 한국어로는 타크테 잠쉬드라고 읽는다. 왕들의 무덤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