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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0:10:21

진구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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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이 천황의 황후
진구 황후
神功皇后
파일:진구 황후.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생몰 170년 ~ 269년 6월 3일(향년 98 ~ 99세)
섭정 201년 ~ 269년
능호 사키노타타나니노이케노에노능
(狹城盾列池上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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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한풍 시호[1] 진구 황후(神功 皇后, 신공 황후)
화풍 시호[2]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노미코토
(気長足姫尊[3], 息長足姬尊)
오오타라시노히메노미코토[4]
(大帶比賣命,大足姬命皇后)
별호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노스메라미코토
(気長足姫皇尊[5])
오키나카노타라시히미(息長帯媛天皇)[6]
이와레와카사쿠라노미카도(磐余稚櫻朝)[7]
신공위[8](神功為)
신공천황[9](神功天皇, 息長足姫天皇)
황거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穴門豊浦宮)
츠쿠시노카시이노미야(筑紫橿日宮)
카루시마노토요아키라노미야(軽島豊明宮)
}}}}}}}}}
1. 개요2. 일본서기 내용상 행적
2.1. 진구 황후가 산도를 돌로 막았다?2.2. 전근대 일본인들의 시선2.3. 오진 천황의 친부(親父) 문제
3. 고사기의 계보도4. 실존 인물?5. 진구 황후의 정체에 대한 학설들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서기, 고사기, 신황정통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통치자로, 천황이면서 섭정이라는 다소 모순된 직위로 나온다. 이런 직위는 일본사에서는 전무후무하다. 이 때문인지 일본사의 다른 몇몇 사례들처럼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다른 인물을 대체하기 위해 창조한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삼한정벌을 했다고 하지만, 임신하여 출산이 임박한 여자가 주술로 출산을 늦추고 두 달 만에 외국을 정복하고 돌아왔다는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 신화적인 내용 때문에 실제의 역사를 과장, 개변하거나 아예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했다고 보는 시선이 학계에선 정설이다.

이러한 시선이 반영돼서인지 15대 천황이라고 인정되었으나 에도 시대부터 진구황후가 가상인물이거나 행적이 꾸며낸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 천황 대수 계산에서는 제외되었다.

2. 일본서기 내용상 행적


진구는 세이무 40년(170)에 태어나 스물네 살 되는 주아이 2년(193)에 주아이 천황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주아이 8년(199) 9월, 주아이 천황이 신하들과 함께 쿠마소(熊襲)[10]를 토벌하는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하였는데, 그 자리에 동석한 진구에게 뜬금없이 신령이 지폈다.

이때 신령은 (진구의 입을 빌려) 주아이에게 쿠마소는 정벌할 가치가 없고, 바다 건너 '신라'라는 나라가 있으니 자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전쟁을 하지도 않고 복속되리라는 신탁을 내렸다. 하지만 주아이가 그 말을 믿지 않자 신령은 '내 말을 믿지 않으므로 너는 그 나라를 얻지 못할 터이나, 지금 황후가 임신했으니 그 아들(미래의 오진)이 얻으리로다.' 하고 예언했다.

주아이는 신령의 말을 믿지 않고 그대로 쿠마소 공격을 강행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주아이 9년(200), 진구가 서른한 살이던 해 2월, 주아이가 어느 날 몸이 아프더니 이튿날 죽어버렸다. 진구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상의하여 주아이 천황이 죽었음을 숨기고 토유라 궁(豐浦宮: 오늘날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일대)에 시신을 옮긴 뒤 자기가 신라를 정벌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진구가 신령을 부르는 의식을 치르며 과거 주아이에게 신탁을 내린 신령이 누구시냐고 묻자, 아마테라스[11], 스미요시 3신(住吉三神) 등등 여러 신령들을 언급하였다.

진구는 (주아이에게 처음 내린 신탁 내용대로)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정벌에 나서기 전에 규슈를 진압하고자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함께 진군해서 규슈의 지쿠고가와 상류에 진을 치고 북규슈의 여러 추장들을 복속시켰으며 야마토(山門)의 여추장 타부라츠히메(田油津媛)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추장이 히미코라고 한다.

에도 시대 학자 중에서는 본래 히미코가 규슈의 야마토(山門) 출신이지만 긴키의 야마토(倭)를 참칭했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와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 2세기 말~3세기 무렵 긴키의 야마토 왕권 세력이 규슈로 진출해 전방후원분 문화를 퍼뜨린 과정을 표현한 듯하다.
진구가 다시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내가 서쪽(삼한)을 치려고 하는데, 신령께서 응감하신다면 내 머리카락이 둘로 갈라지리라.' 하면서 바닷물로 머리를 감았더니 과연 머리카락이 바닷물 속에서 둘로 나뉘었다고 한다. 진구는 나뉜 머리카락을 모아 상투를 두 개 틀었다(남장을 했다는 뜻).

9월, 진구 황후는 산달이 되어 아기가 태어날 조짐이 있었는데 돌로 출산을 늦추었다.[12]

진구는 출산을 늦추고 다음달, 즉 주아이 9년(200) 10월 3일에 출정하였다고 한다. 신라왕은 진구가 이끈 군세를 보자마자 겁에 질려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항복하고 호적을 바쳤다. 삼한의 다른 국가도 진구의 군세를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보여 스스로 다가와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파일:attachment/진구 황후/e0079724_4d90a71fd705a.jpg
진구 황후의 한반도 침공을 묘사한 오스프리의 그림.
일본서기 내용을 거의 복붙하고 있다.

그리하여 진구는 싸움 한 번 없이 삼한을 굴복시키고는 돌아와 12월 14일에 츠쿠시(筑紫), 오늘날 후쿠오카현 북동쪽에서 아들 오진을 낳았다. 일본서기의 묘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진작에 아기를 낳아야 했을 만삭의 임산부가 출정해서 전투 한 번 없이 외국을 정복하고 돌아와 아들을 낳기까지 겨우 두 달 열하루가 걸렸을 뿐이다. 대충 70일이다!

이듬해(201) 봄, 진구는 (토유라 궁에 있던) 남편 주아이의 시신을 모시고 수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카고사카 황자(麛坂皇子)나 오시쿠마 황자(忍熊皇子)[13]는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돌아와 이제 어린 자식을 임금으로 세울 텐데, 우리가 어떻게 나이 어린 동생을 섬기겠는가?" 하며 반기를 들었다. 반기를 들기 전, 두 형제는 사냥을 하여 그 결과를 보고 거사가 성공할지 점을 치기로 하였다.[14] 형제는 저마다 야외에 임시로 제단을 쌓고 거기서 기다렸는데, 갑자기 붉은 돼지가 나타나 카고사카 황자를 잡아먹었다.[15] 오시쿠마는 이러한 결과가 몹시 불길한 조짐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사를 포기하지는 않고 군사를 주둔한 위치를 바꾸었다.

하지만 진구의 명령을 받고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군대를 이끌어 적대하는 군대를 모조리 참살했다. 오시쿠마 황자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논병아리처럼 물에 빠져 자살하겠다.'는 노래를 부르며[16] 세타(瀨田)[17]의 나루터에서 몸을 던졌다.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나룻가에서 물속에 뛰어든 새가 보이질 않아 화가 난다." 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며칠 뒤 그의 시신이 우지강(菟道河)[18]에서 발견되자 "세타의 나룻가에 잠긴 새가 우지에서 잡혔다." 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해(201) 10월, 진구는 '황태후' 칭호를 받고 섭정을 시작하여 그해를 섭정 원년으로 정하였다.

섭정 69년(269) 4월에 진구가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100살이었다고 한다. 원래 일본서기에는 진구가 언제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으나, 이때 죽어 나이가 백 살이라면 태어난 해는 당연히 세이무 40년(170)이므로 이때로 잡는다.

2.1. 진구 황후가 산도를 돌로 막았다?

우리나라 인터넷상에는 진구 황후가 삼한을 정벌할 적에 돌을 산도에 꽂았다, 또는 돌로 산도 입구를 막고 천으로 감았다 하면서 '그게 말이 되냐?'며 조롱한다. 하지만 진구의 삼한 정벌 이야기가 허구인 것과 별개로, 돌로 산도를 막았다는 이야기는 아무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일본의 고서에서도 산도를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故其政未竟之間, 其懷妊臨産. 即爲鎭御腹, 取石以纒御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者阿禮坐. 故, 號其御子生地謂宇美也. 亦所纒其御裳之石者, 在筑紫國之伊斗村也.
(신라의 정벌이) 끝나기도 전에 임신한 황후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황후는 출산을 억제하기 위해 돌을 주워 입고 있던 옷의 허리춤에 감고 있었으나, 쯔쿠시(筑紫)[19]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태어났다. 그래서 그 아이가 태어난 곳을 우미(宇美)[20]라 한다. 그리고 옷에 감았던 돌은 쯔쿠시의 이도(伊斗)라는 마을에 있다.
고사기 주아이 천황[21]
于時也, 適當皇后之開胎. 皇后則取石揷腰, 而祈之曰, 事竟還日, 産於玆土. 其石今在于伊覩縣道邊.
이때(200년 9월) 마침 황후는 산달[22]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태어나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도 이토노아카타(伊覩縣)[23]의 길가에 있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조[24]

산도에 돌을 넣었다거나, 산도의 입구를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허리춤에 넣었다고만 기술했다. 진구가 돌로 출산을 늦춘 시기를 두고 고사기는 진구가 삼한으로 공격하고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 일본서기는 삼한으로 출발하기 전이라고 다르게 설명하는 차이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한국어 번역본들의 주석에 따르면, 옛 일본에서는 출산을 늦추고자 할 때 이렇게 돌을 허리춤이나 소매에 넣고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진구 황후가 출산을 늦추는 데 쓴 그 돌을 진회석(鎭懷石)[25]이라고 불렀다. 나라시대의 기록에는 이때 진회석이 남아 사람들에게 경배받았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진회석은 두 개였는데, 길이는 30 cm 남짓에 무게는 10 kg 정도라고 한다. 이만한 돌을 두 개나 허리춤에 넣을 수는 없다. 진구 황후가 아이를 낳고 돌을 버리자 그 돌이 이렇게 커졌다고 한다.[26] 이토시마시에 있는 친카이세키하치만 궁(鎭懷石八幡宮)에서 진회석(鎭懷石 친카이세키)을 신으로 모신다.

2.2. 전근대 일본인들의 시선

후대의 일본인들이 보기에도 삼한 정벌 기사를 그대로 믿기는 무리수라고 생각했는지, 14세기 중엽에 나온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는 삼한정벌은 사료 오독이니 신라 정벌이 맞다고 하고,[27] 돌로 출산 늦추기는 '우연히 여의주를 얻어 그 힘으로 출산을 늦추었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가 편찬한 사서 대일본사(大日本史)에서는 진구 황후를 제위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들의 주장이 일본 사학파 중 가장 우익 성향이 강한 미토 학파의 전신이고, 후대의 미토 학파는 진구 황후의 실존을 적극 주장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절에 나온 문서 『하치만 우동훈(八幡愚童訓)』[28]에서는 진구 황후가 '신라국의 대왕은 일본의 개'라는 문구를 바위에 새겼는데, 일본군이 돌아간 뒤 신라인들이 이를 수치로 여겨 지우려 했지만 오히려 돌의 명문만 또렷해졌다고 해놓았다.

2.3. 오진 천황의 친부(親父) 문제

진구 황후가 삼한정벌을 했다는 기록이 '합리적 수준'에서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200년 음력 2월에 남편 주아이 덴노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진구 황후는 삼한정벌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그해 9월에 산기가 보였으므로 돌을 허리춤에 넣어 주술로 출산을 늦추었다. 10월에 출정하여 삼한정벌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12월 14일에 아들 오진 천황을 낳았다고 한다. 주술로 출산을 늦출 수 없으니 이를 무시한다. 그리고 현대의학은 인간의 임신기간을 9개월 반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진구 황후가 아들을 임신한 때는 남편이 죽고 아직 제대로 경황도 없던 3월 초라는 뜻이다.[29]

계속 가정을 전개해보자. 오진 천황이 3월 초에 수태(受胎)되었다면, 주아이 천황이 친아버지가 될 수 없다. 친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물론 알 수가 없다. 다만, 삼한정벌에 동행했다는 권신 타케우치노 스쿠네도 후보가 될 수 있다. 만약 스쿠네가 친아버지라면 고겐 천황의 남계후손이 되어서 만세일계가 딱히 부정되지는 않지만, 황후가 신하와 간통하여 차기 천황을 낳았다니, 그것만으로도 일본 황실은 위신이 크게 떨어진다. 물론 진구 황후의 존재 자체가 허구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게다가 진구 황후만이 아니라 타케우치노 스쿠네 역시 신화적인 인물이다. 스쿠네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수명이 수백 년에 달했고, 진구 황후가 삼한정벌을 하던 시점에 최소한 110살, 어쩌면 130살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기이하게도 옛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오진 천황이 주아이 천황의 친아들이 아니란 이야기가 돌았다.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는 오진 천황이 주아이 천황의 유복자라고 서술했지만, 일본의 다른 기록에는 다르게 서술한다. 8세기에 나온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 따르면 주아이 천황이 붕어한 뒤 진구 황후가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30]과 관계하여 오진 천황을 낳았다는 것.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은 우와쓰쓰노오(表筒男命)・나카쓰쓰노오(中筒男命)・소코쓰쓰노오(底筒男命)의 세 신령을 가리키는데 항해를 보호한다고 한다. 세 신을 가리키는 말이라 스미요시 3신(住吉三神)이라고 쓰기도 한다. 일본서기 신대기 상의 일서(5-6)에서 이자나기이자나미를 만나러 저승에 다녀온 후 여울에 몸을 씻을 때 스미요시 3신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본서기의 진구기(神功紀)에서는 진구 황후에게 신라를 정벌하라고 신령들이 계시를 내릴 때, 진구 황후가 "이런 가르침을 내리시는 신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자 다른 신들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이후 진구 황후가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신들은 자신들을 모시라는 신탁을 내렸다.

일본 역사학자 중에서는 오진 천황이 기존의 천황 정권을 탈취하고 새로운 왕조 정권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처럼 주아이의 유복자라고 하든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처럼 신령의 아들이라고 하든, 아무튼 정통성을 꾸며주는 이야기가 필요했다는 것.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오진 천황이 바다와 연결점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해신의 아들, 용의 꼬리, 스미요시 대신의 아들. 이러한 표현은 전부 바다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오진 천황이 해안가 쪽 세력과 연계하여 정권을 탈취, 천황이 되지 않았는가 추측하는 설이 있다.

3. 고사기의 계보도

  아메노히보코
9대 가이카 천황 타지마-모로스쿠
(多遲摩母呂須玖)
10대 스진 천황 히코-이마스-노-미코
(日子坐王)
타지마-히네
(多遲摩斐泥)
11대 스이닌 천황 야마시로-노-오호쯔쯔키-노-마와카-노-미코
(山代之大箇木眞若王)
이리네-노-미코
(伊理泥王)
타지마-히나라키
(多遲摩比那良岐)
12대 게이코 천황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
(印色之入日子命)
타니하-노-아지사하-히메
(丹波能阿治佐波毘賣)
타지마-히다카
(多遲摩比多訶)
키요-히코
(淸日子)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 카니메-이카즈찌-노-미코
(迦邇米雷王)
스가카마-유라도미
(菅竈由良度美)
오키나가-스쿠네-노-미코
(息長宿禰王)
카즈라키-노-타카누카-히메
(葛城之高額比賣)
14대 주아이 천황 진구 황후
15대 오진 천황
호무다-와케-노-미코토
(品陀和氣命)

4. 실존 인물?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우세하며, 진구 황후의 실존성을 입증할 그 어떤 교차검증된 기록도 없다. 일단 진구 황후의 행동 자체가 역사적 실제 사건으로 보기에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당장 진구 황후가 신라로 쳐들어오자 신라의 파사매금(波沙寐錦)[31][32]이란 왕이 인질을 보내며 항복했고, 그 인질은 이름이 미질기(微叱己, 혹은 미질허(微叱許)라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각각 파사 이사금미사흔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파사 이사금은 재위기간이 402년~417년이 되므로, 170년~269년에 활약한 진구 황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무려 2세기나 차이가 난다.

신라 정벌 기록의 근거를 따져보자. 삼국사기파사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가 백제가야에게 침략받아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있지만 일본이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미사흔은 눌지 마립간의 동생으로, 후대의 인물이다. 파사 다음 신라왕인 지마 이사금가야에 패배하고 왜의 침입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럼 이번에는 일본서기랑 안 맞게 된다. 또한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 보면 포로로 잡은 신라왕의 무릎 힘줄을 뽑아버리고 돌 위를 기어다니게 한 후 참수했다느니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249년/253년[33] 왜군에게 죽었다는 석우로에 대한 기록이다. 즉, 하나도 맞는 게 없다.

다만 21세기 들어선 신석열 교수 등을 중심으로 신라 왕계 계보에도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즉, 삼국사기 등을 신뢰하면 파사/석우로/미사흔은 동시대 혹은 비슷한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박/석/김씨가 사실 순서대로 재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존재했는데 순서대로 재위한 것처럼 꾸몄다는 이론에 따르면 저 세 인물들이 비슷한 시대에 존재할 수 있게 되며, 이를 이주갑인상으로 끌어올린뒤 전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였다고 한다면 말은 된다. 동시대에 존재한 군주들을 순서대로 즉위한 것처럼 꾸미는 사례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왜곡 수법이며, 신라가 그런 왜곡을 안했으리라 장담할 순 없다.

더 웃긴 점은 일본서기에서 신라구에게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 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 때문에 반신라 감정이 높아져 일본인들이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으면서, 진구 황후는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제3자의 시각인 중국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일단 중국의 기록 중 후대에 신라를 일본보다 아래로 보는 내용도 간혹 있긴 하지만 정황상[34] 애매모호하며(일본서기, 임나일본부설 항목도 참조), 뭣보다 확실한 정황 근거가 위지 동이전 왜인전 기록을 비롯한 일본 고대사 관련 중국 기록엔 이시기 진구 황후가 아닌 히미코 여왕이란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진구 황후 기록은 진짜 한줄도 안 나온다. 더욱이 당시 히미코의 지배지 외 다른 곳에 있는 나라에 대한 기록도 나오고 해당 소국들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단순 지방호족/반란세력 정도로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더군다나 진구 황후 본인의 가족관계도 문제가 된다. 진구 황후의 어머니이자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息長宿禰王)의 아내인 카츠라기노타카누카히메(葛城高顙媛)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아메노히보코의 손녀(6대손이라는 기록도 있는 듯)인데, 정작 진구 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에는 신라의 존재를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게다가 천일창(아메노히보코) 설화는 한국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와 구조가 거의 같아 출연 인물들을 동일시하거나 같은 계통 설화로 보는 학설도 있는데, 이 경우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기원후 2세기경의 이사금인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기가 되어 진구 황후 집권기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거기다 이 때는 진구 황후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는 히미코가 신라와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낸 시기. 더 꼬인다.

추가로 진구 황후의 시호는 타라시(足 혹은 帶) 계통인데, 이 계통 시호는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7~8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난다.

한때 규슈 지역에서 발굴된 요시노가리 유적이 이와 관련되어 일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으나, 정작 출토되는 유물 상당수는 한반도계 유물들이 주루룩이었고, 결국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중심이 되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는 일본의 기존 연구결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35]

몇몇 일본 학자들은 야요이 시대보다 먼저 존재한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연관성에 대해 단절성보다는 연관성에 집중하여 어떻게든 일본 고대사의 상한선을 올려보려고 했지만, 두 문화는 주류 인종부터가 다른 데다 대륙(특히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야요이 문화가 현대 일본인의 직계임은 연구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지므로 이 설은 용도폐기된 상태다.

5. 진구 황후의 정체에 대한 학설들

진구 황후의 기록이 이렇게 앞뒤가 전혀 안 맞다 보니, 이미 에도시대 때부터 일본 내에서도 여러가지 설이 혼재되어 서로 갑론을박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본 사학계는 제국주의 시절 이 반론들을 다 묵살하고 일본서기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 밀어붙였다가 결국 현재는 폐기된 상태.

6. 대중매체에서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당시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일본서기.[4] 고사기.[5] 신찬성씨록 원문을 보면 気長足姫皇尊이라 쓰고 천황을 뜻하는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로 읽는다.[6] 죽내문서(竹内文書).[7] 고어습유(古語拾遺). 일본어에서는 황제의 제를 미카도라고 읽기도 한다.[8] 신당서(新唐書)[9] 송사(宋史)[10] 규슈 남부, 오늘날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人吉市) 근방에 살던 고대의 민족. 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이다.[11] 일본서기에선 '츠키사키키츠노미나타아마사카루무가츠히메(撞賢木厳之御魂天疎向津媛)'라고 이름을 밝혔는데, 이는 아마테라스의 아라미타마(荒魂), 즉 아마테라스의 거칠고 사나운 면이 드러난 신격이라고 한다. 신토는 한 신령에게 거친 면(아라미타마荒魂)와 부드러운 면(니키미타마和魂)가 있다고 설명하는데, 둘 다 같은 신령의 다른 면모지만 때로는 이름을 달리 붙이고 다른 신령처럼 모시기도 한다.[12] 고사기에는 진구가 돌로 출산을 늦춘 시기를 삼한으로 출발하여 돌아오기 이전이라고 나온다.[13] 두 사람은 주아이 천황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들이다. 즉, 진구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배다른 자식, 오진의 입장에선 이복형들이다.[14] 사냥에서 좋은 짐승을 잡는다면 거사가 성공할 징조라는 것이다.[15] 옛 일본에서 붉은색은 영적인 것을 상징했다. 따라서 '붉은 돼지'는 현실의 짐승이 아니라 영계에서 온 짐승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사기에서는 이 일을 두고 묘사가 다르다. 고사기에서는 카고사카가 상수리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갑자기 크고 사나운 멧돼지가 나타나 상수리나무를 쓰러트리고 카고사카를 잡아먹었다고 하였다.[16] 논병아리는 물속 깊숙이 잠수하여 먹이를 사냥한다. 그래서 오시쿠마가 "논병아리처럼"이라고 비유하였다.[17] 오늘날 사가현 오츠시 세타(瀨田) 일대. 비와호의 남쪽으로 물줄기가 흘러 세토 내해 쪽으로 빠진다.[18] 오늘날 요도가와강(淀川). 비와호의 물이 남쪽 오츠시 쪽으로 흘러나와 우지시(宇治市), 오사카시(大阪市)를 거쳐 오사카만(湾)으로 빠지는 짧은 강이다.[19] 오늘날 후쿠오카현 북동쪽 지역[20] 오늘날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우미 정(宇美町). '우미'는 아이를 낳는다는 뜻인 '우무'의 명사형이다. 우미 정에는 우미하치만 궁(宇美八幡宮)이라는 신사가 있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오진 천황과 어머니 진구 황후를 신으로 모신다. 또한 출산을 도와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임산부들이 찾아오며, 경내에 있는 돌에도 산모와 아기를 도와주는 힘이 있다고 하여 가져간다고 한다.[21] 노성환 역주, <<고사기>>, 민속원 출판, (2009), p213-4에서 번역문을 인용함.[22] 뱃속에 있는 아이가 나오는 달[23] 오늘날 후쿠시마현 이토시마시 지역[24] 동북아역사재단 번역, <<역주 일본서기 1>>, 2013, p476에서 번역문을 인용하되, 일본 지명을 일본어 음역으로 바꾸었다.[25] 한자를 풀이하면 '임신을 억누르는 돌'이란 뜻이다.[26] 기미가요에도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라는 구절이 있다. 신령한 돌은 자랄 수 있다고 보는 애니미즘적 관념이 전재된 구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 따른다면, 진구 황후가 자식의 출산을 늦추는 데 쓴 돌이 신령함을 얻어 크게 자랐다고 해도, 옛 일본인들의 관념에서는 자연스러울 것이다.[27] 신황정통기의 저자 키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본인도 이 부분에서 '진한, 마한, 변한을 합하여 신라라고 한다.'고 사료 오독을 저질렀다. 그가 삼국사기 같은 한국 사서를 참고했다면, 통일신라삼한일통 이전의 삼국 중 하나였던 신라의 개념을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진구 황후 대목은 삼국시대를 말하므로 그런 해석은 틀린 것이다.[28] 하치만(八幡) 신의 영험을 어리석은 아이(愚童)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訓)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대로 하치만 신의 영험과 신이담을 모았다. '하치만 우동훈'에서 진구황후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진구의 아들 오진 덴노가 하치만 신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29] 옛 일본에서는 여자의 임신기간을 딱 1년으로 친 듯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199년 9월에 진구 황후가 아들을 배었고, 200년 9월에 산기가 있었으나 주술로 늦추어 12월에 낳았다.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은 어머니 뱃속에 15개월간 있었던 것이다.[30] 바다와 관련된 3위 신을 통칭하는 이름이다.[31]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나 일본이나 고대 인명/지명들은 대부분 고유어 음차라서 그건 별로 상관이 없다.[32] 매금은 광개토대왕릉비통일신라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다. 자세한 내용은 법흥왕 항목 참조.[33] 249년은 삼국사기, 253년은 삼국유사 기록. 그나마 이건 거의 차이가 없다.[34] 백제 사신도 한번은 신라 사신이랑 같이 중국 가서 말 안 통하는 점을 이용해, 신라 사신 통역으로 호의를 베푸는 척 하면서 중국엔 신라를 자기들 속국이라고 뒤통수 친 적이 있었다. 일본도 수시로 이런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반도 사정을 잘 모르는(그나마 백제 등은 중국과 교류하기에 왜5왕 시절 무리한 작위 요구는 빼기도 했다) 중국한테 몇 번 먹힌 것일지도 모른다.[35] 심지어 한국에서 요시노가리 특별전을 열 때, 한국 학자들이 특별전의 부제로 일본 속의 고대 한국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요구하자 일본 학자들은 아무 군말없이 이를 받아들여 그대로 부제로 통과된 적도 있었다.#[36] 사실 요즘 학계는 주아이 천황도 가상인물로 여긴다.[37] 이것을 정확히 반대 입장으로 적용한 게 바로 내선일체론이다.[38] 한반도의 왜계 부족들은 야마토인들과 조상을 공유할 뿐, 정체성은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부여계 한국어족 집단과 함께 서로 상이한 집단들에 속했다.[39] 오진 천황의 아버지가 광개토대왕이라고 왜곡한다. 오진 천황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생부가 일개 신하인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아닌 고구려의 왕이라고 조작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전후사정을 보면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작중 세계관에서 우치다 료헤이의 먼 선조로 설정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