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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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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전/이후의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1. 개요2. 역사
2.1. 상고대2.2. 고대
2.2.1. 에메사 왕조2.2.2. 세베루스 왕조와의 인연2.2.3. 3세기의 위기
2.3. 크리스트교의 도래2.4. 이슬람의 도래 & 아랍화
2.4.1. 에메사 공방전2.4.2. 레반트 지역 시아파의 중심지
2.5. 중세: 혼란 속의 번영
2.5.1. 9세기 중반: 연이은 반란들2.5.2. 10세기의 혼란2.5.3. 셀주크 제국과 십자군2.5.4. 맘루크 왕조 (vs 일 칸국)
2.6. 오스만 시대
2.6.1. 시리아의 맨체스터
2.7. 근대2.8. 시리아 내전
3. 창작물에서

1. 개요

파일:CH2-5.jpg
전쟁 전 홈스의 한 거리 모습 #

시리아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Ḩimş 라고도 불린다. 인구 66만으로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알레포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무슬림, 기독교도가 공존하던 도시였다. 2016년 통계에 의하면 20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난민들이 돌아오면 어느 정도 회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로마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당시 명칭인 에메사가 더 친숙할 것이다. 3세기의 로마 황제인 세베루스의 황후 율리아 돔나와 이후 황제가 되는 엘레가발루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홈스는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태양신 숭배 신앙의 중심지로서 '검은 돌들의 어머니' (أم الحجارة السود)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무슬림에게는 7세기의 명장인 이븐 알 왈리드의 도시로 불린다.

4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도시이며, 십자군 전쟁기에는 서유럽 성채 건축의 진수라 불리는 크락 데 슈발리에가 도시 인근에 방어용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성 엘리아누스 성당과 알 누리 모스크의 공존이 돋보였던 도시였으나 시리아 내전 중에 일어난 홈스 공방전으로 시가지가 심하게 파괴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성벽은 검은색 화강암이 섞인 돌로 지어졌으며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으나 도시화와 여러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다.

2. 역사

파일:29513069_1903265916374706_6983804241508532523_n.jpg파일:15119177539_ac90891c2e_o.jpg
유서깊은 시타델. 다만 19세기 파괴되었고 20세기 프랑스 주둔군과 21세기 시리아 정부군이 기지로 사용하며 더욱 파괴되었다. 칠중성?

2.1. 상고대

도시 중심부의 시타델 (내성) 발굴 결과 기원전 2300년경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구약 성경에는 조바흐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람세스 2세의 이집트 제국과 무와탈리 2세의 히타이트 제국이 대결한 카데시 전투가 홈스 인근의 오론테스 강가에서 일어났다.[1]

2.2. 고대

헬레니즘 ~ 로마 시대에 홈스는 에메사로 불렸다.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셀레우코스 1세가 설립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곳에 토착 왕조가 들어섰고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정복을 도우며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2.2.1. 에메사 왕조

기원전 1세기부터 에메사를 다스리던 셈계 (아랍/아람인) 왕조는 군주임과 동시에 태양신 엘 가발 (엘라가발)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정교일치 체제는 300여 년간 이어졌다. 그 시조격인 아지즈는 본래 베두인 족장이었는데 시리아로 이주, 오론테스 강가에 정착하였다. 그는 쇠퇴해 가던 셀레우코스 왕조에 개입하여 필리포스 1세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꺾고 즉위하게 도와주었고 그 후계자인 필리포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다. 아지즈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1세는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협조하여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로마의 요청대로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13세를 죽였다. (기원전 64년)

다만 삼프시케라무스 때의 수도는 에메사의 북쪽 교외에 위치한 아레투사였고 그의 후계자인 람블리쿠스 1세 (기원전 48 ~ 31년) 때에 에메사로 천도하였다. 에메사 일대의 화산질 토양 덕에 도시는 농업을 바탕으로 번영하였다. 도시 서쪽에 위치한 카티나 호수와 오론테스 강에 조성된 댐은 안정적인 농업 용수를 제공해 주었다. 그외에도 동쪽의 팔미라에서 페니키아로 향하던 상인들이 왕래하며 에메사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도시였다. 한편, 람블리쿠스 1세는 왕실과 폼페이우스 간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전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전투 당시 그에게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그 대가로 람블리쿠스 1세는 로마 시민권과 율리우스 성을 하사받았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람블리쿠스 1세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는 그의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의 수중에 있었고, 그는 람블리쿠스의 동생 알렉시오스 1세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람블리쿠스는 살해되었고 알렉시오스가 즉위하였으나 (기원전 31년) 같은 해 악티움 해전으로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시오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다. 이후로 에메사는 시리아 속주의 자치 도시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람블리쿠스 1세의 아들 람블리쿠스 2세 (기원전 20 ~ 서기 14년)를 에메사의 왕으로 임명하며 왕조는 복원되었다.

람블리쿠스 2세가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후 그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2세 (14 ~ 42년) 29년간 재위하며 에메사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콤마게네 왕국의 공주 로타파와 결혼하였으며 에메사 일대 한정이긴 하지만 삼프시케라무스 2세는 대왕 (Regis Magni)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치세인 32년에 에메사는 헬리오폴리스 (바알벡)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재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지즈 (42 ~ 54년)는 52년 경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헤롯 왕국의 공주 드루실라와 결혼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드루실라는 곧 로마의 유대 총독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져 이혼한 후 그와 결혼해버렸다. 아지즈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고 동생 소하이무스 (54 ~ 73년)이 계승하였다.

그는 친로마적 태도를 강화하여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에 궁수들을 파병하였고 72년 외가인 콤마게네를 로마가 합병할 때도 반발없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소하이무스의 친로마 정책에도 불구하고 73년에 그가 사망하자 에메사의 자치권은 박탈되었다. 소하이무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2세는 국왕 대신 로마 제국의 에메사 총독이 되었다. 이후로 시리아의 율리우스 가문은 태양신 엘 가발에 대한 제사장으로의 활동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엘 가발 신전의 사제는 금으로 수놓인, 발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보라색 튜닉을 걸쳤고 각종 보석이 박힌 왕관을 썼다.

2.2.2. 세베루스 왕조와의 인연

파일:세베루스황가.png
세베루스-에메사 황가

에메사 왕족 출신의 율리우스 바시아누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2세기 말엽 에메사의 제사장을 지냈는데, 당시 재혼을 위해 시리아 일대를 돌아다니던 로마 장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자신의 차녀 율리아 돔나를 결혼시켰다. 이후 193년, 세베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었고 바시아누스는 황제의 장인으로서 영화를 누렸다. 세베루스는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율리아 돔나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그중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하였는데 그역시 217년 파르티아 원정 직후 암살되었다. 당시 안티오키아에서 와병 중이던 모후 율리아 돔나는 아들의 시신을 마주하곤 자살하였다. 한편, 카라칼라의 치세에 에메사는 Ius Italicum, 즉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는 특례 도시가 되었다.

카라칼라의 암살을 사주하고 즉위한 마크리누스는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율리아 돔나의 언니인 율리아 마이사는 역시 에메사 왕가의 일원으로 보이는 율리우스 아비투스와 결혼하여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얻었다. 그리고 소아이미아스는 시리아 귀족 마르켈루스와 결혼하여 아들 아비투스를 얻었다. 마이사는 외손자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218년 5월 15일, 카라칼라를 그리워하는 병사들이 그를 에메사 인근 라파나이아의 군단 기지로 데려갔다. 병사들이 아비투스를 추대하자 마크리누스는 도주하였으나 결국 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아비투스가 즉위하며 로마는 첫 시리아인 황제를 맞았다.

그러나 본래 황위와 별 관련이 없던 그는 어린 시절 엘 가발 신전에서 사제로 지낸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신전의 수호자라는 뜻인 엘라가발루스로 불렸는데, 황제가 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아 로마에 미트라 신앙을 강요하고 남색을 일삼는 등 지지를 잃어버렸다. 이때 에메사 신전의 상징인 검은 돌[2]이 로마로 옮겨지고 포로 로마눔에 있던 유피테르 신전이 엘라가발리움이란 이름의 태양신 신전으로 바뀌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가문 자체가 붕괴될 것을 염려한 그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그나마 인망이 있던 그의 사촌이자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인 알렉산데르를 카이사르 (부제)로 삼았다.

그리고 222년, 엘라가발루스와 태후 소아이미아스가 근위대장에 의해 살해되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추대되었다. 그는 유약한 성격이었지만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지도로 무난히 재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27년, 10여년간 섭정을 맡았던 유능한 정치가 마이사가 사망하였다. 비록 알렉산데르는 232년에 사산 제국과의 전쟁은 무난히 치러냈으나 유약한 성품 탓에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휘둘렸고, 불행하게도 그녀는 어머니에 비해 정치에 소질이 없었다. 결국 235년, 게르만 족의 침공에 대비하러 원정에 나선 알렉산데르는 전투도 없이 평화를 매수하려 시도했다가 병사들의 반발을 샀다. 모녀는 진영에서 살해되었고 이로써 세베루스-에메사 황가가 단절되며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2.3. 3세기의 위기

에메사 황가 이후 로마 제국은 238년의 여섯 황제의 해와 연속으로 암살된 두 황제들[3], 또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한 데키우스를 거치며 쇠퇴하였다. 데키우스를 이은 트레보니아누스는 253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공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같은 해에 게르만 족이 재차 남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게르만 족을 격퇴한 아이밀리아누스가 봉기하여 그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역시 반역자 처단을 외치며 봉기한 라인 군단의 발레리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었다. 세 황제의 해 (253년)를 거치며 로마의 국방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254년, 샤푸르 1세는 재차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이때 235년부터 에메사의 총독을 맡았던 에메사 왕가의 후예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이란군을 격퇴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260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 나선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 1세의 포로가 되며 3세기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해 갈리아 제국이 독립하였고 267년에는 오데나투스가 사망하자 부인 제노비아에 의해 팔미라 제국이 세워졌다. 이듬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가 암살되며 분열은 장기화 되었다.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고트족을 격파하였으나 병사하였고 270년, 퀸틸루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부를 정비한 후 272년, 시리아 정벌에 나서 안티오크에 이어 에메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팔미라 군을 격파하였다. 제노비아는 포로가 되었고 팔미라가 항복하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에메사의 엘 가발 신전을 찾아 감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다만 에메사의 주요 교역 상대였던 팔미라가 몰락함에 따라 도시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2.3. 크리스트교의 도래

제국을 통합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사후 잠깐의 타키투스 형제를 지나 로마는 프로부스, 카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리고 사두정치 이후 등장한 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현제들의 치세를 거치며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기존 로마 정치에 대한 불신과 종말론적 사회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크리스트교가 뿌리내렸다. 다만 에메사는 인근의 다마스쿠스와 달리 태양신 숭배의 중심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4세기에도 여전히 소수였다. 주교가 설치되었지만 실권은 없었고 초대 주교인 실바누스는 메소포타미아 원정을 위해 에메사를 들른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처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막지 못했는지 5세기 무렵 에메사는 시리아 중부의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로마 관리의 아들로서 개종을 거부하고 순교한 성 엘리아누스 (? ~ 282년)를 기념하는 성당이 기존 엘 가발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432년) 변화의 상징이었다. 452년에는 시내에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에메사는 시리아 중부를 관할하는 주교구가 되었다. 엘리아누스 성당에는 6세기 경 프레스코 화가 남아있다. 에메사는 618년 이란 군대에 함락되었으나 큰 피해를 입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로마-사산제국 전쟁을 틈타 바누 칼브를 중심으로 한 아랍인들이 에데사 인근에 정착하였다. 아랍화는 이슬람 정복 이전에 시리아와 이라크에 만연하였다.

2.4. 이슬람의 도래 & 아랍화

그들의 식량은 낙타의 고기와 젖에 불과하다. 그들은 추위를 버텨낼 수 없다. 추운 날마다 그들과 응전하라, 봄이 올 때까지 그들 중 아무도 남아있지 않도록.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에메사 총독 하르비스에게.

634년 9월,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며 시리아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공세가 본격화 되었다. 635년, 라쉬둔 왕조의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시리아 중부로 파견하였다. 이에 에메사와 킨나스린의 주민들은 공물을 바치며 아랍 측과 1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다만 동로마 지원군이 도달한다면 휴전은 무효화 된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에메사는 1만 디나르와 100벌의 예복을 제공하였다. 휴전이 성립되자 에메사의 성문은 개방되었고 무슬림들이 시내의 시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메사의 동로마 지도부에게 휴전은 수비 태세를 강화할 시간 벌이용에 불과하였다.

에메사는 동로마 제국의 대아랍 사령부가 위치했던 중요한 도시였고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에메사 총독 하르비스는 곧 다가올 겨울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아랍 군대를 약화시킬 것을 믿고 협정을 위반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에메사 대신 시리아 중북부를 공략하던 아랍인들은 샤이자르를 항복시킬 즈음 이 소식을 들었다. 할리드를 선두로 한 군대가 협정을 어긴 에메사를 포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동로마 수비군이 성밖을 나와 맞섰지만 할리드에게 패배하고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635년 12월) 원형 성벽에 해자가 둘러진 에메사는 당시 시리아 도시들 중 가장 견고한 요새였다.

2.4.1. 에메사 공방전

우리는 기존에 경험한 (동로마 제국의) 억압과 폭정보다 당신의 지배와 정의를 훨씬 더 선호합니다.
ㅡ 에메사 시민들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알 발라두리의 기록
자애롭고 자비로운 신의 이름으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주민들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중략) 그는 그들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교회들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들의 도시 성벽은 파괴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무슬림도 그들의 집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유일신과 그의 예언자, 칼리파들, 그리고 그의 신도들의 보호를 서약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인두세[4]를 납부하는 한 그들에게 좋은 일만이 있을 것입니다.

ㅡ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약속[5]

아랍 군대는 4개의 문에 각각 진영을 세웠고 북문 쪽에 아부 우바이다와 할리드가 배치된 본영을 설치하였다. 이후로 3달간 양측은 서로 활을 쏘며 대치하였고 예상과 달리 무슬림 병사들은 겨울을 이겨내었다. 해가 바뀌어 636년 3월, 겨울이 끝나갔음에도 포위가 유지되자 동로마 수비대는 당황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식량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이에 하르비스는 포위측에 지원병이 도달하기 전에 그들을 격파하기로 하고 5천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아침 일찍 성을 나와 아랍 진영을 기습하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랍인들은 당황하여 밀려났다. 하지만 할리드는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활약하였고 이에 무슬림 군대는 재정비할 수 있었다.

할라드는 방어에 일관하다가 한순간 반격을 가하여 동로마 군을 몰아내었고, 해질녘 쯤에 그들은 다시 성안으로 퇴각하였다. 포위 내내 아랍 측이 가장 큰 피해인 200여명을 잃긴 했지만 결국 하르비스의 돌파 시도는 실패하였다. 한편, 다음날 아침 아부 우바이다는 작전 회의를 열어 전날 습격을 허용한 병사들을 질타하였다. 할리드 역시 '그들은 내 지금까지 봐온 로마군 중 가장 용감했다'고 말하였다. 이에 아부 우바이다가 조언을 구하자 할리드는 거짓 후퇴 작전을 내었고 이는 수용되었다. 다음날, 아랍 군대는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정석과 달리 후미에 정예병이 배치된 상태였다. 아쉽게도 하르비스는 용맹했으나 전략에 능하지 못하였다.

아랍인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패주한다고 생각한 하르비스는 이 기회를 놓칠새라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무슬림 군대를 '따라잡자' 그들은 즉각 돌아서서 반격하였고 할리드가 명령을 내리자 두 무리의 병사들이 전장을 이탈하였다. 그들은 동로마 군대를 우회하여 그들의 후위에 나타난 후 그대로 돌격하였다. 13세기 몽골군의 모습을 보는 듯 아랍 기병대는 체계적으로 동로마 군대를 포위망에서 옥죄기 시작하였다. 한편, 할리드는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동로마 군의 중심으로 돌격하였다. 그는 전투 중이던 하르비스를 노리고 있었다. 거구의 동로마 장수가 막아섰으나 할리드와의 일기토에서 쓰러졌고 하르비스도 곧 전사하였다.

한편, 전투가 지속되던 와중에 마아즈 이븐 자발이 이끄는 5백의 아랍 기병대는 전장을 떠나 에메사로 향하였고 성안의 로마군이 나오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성밖의 로마군이 성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통제하였다. 다만 5천에 달하던 동로마 추격대 중 고작 백여명만이 살아남아 마아즈가 활약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1만 5천의 무슬림 군대는 세 달의 포위 동안 겨우 235명만을 잃었다. 결정적인 전투 이후 할리드가 재차 에메사를 포위하자 주민들은 10만 디나르의 지즈야[6]를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아부 우바이다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636년 여름, 에메사를 탈환하려 노력하던 헤라클리우스는 야르무크 전투에서 대패하자 철수하였다.

2.4.2. 레반트 지역 시아파의 중심지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부는 다마스쿠스, 북부는 에메사 (홈스)를 중심으로 분할하였다. (준드 힘스) 이때 5백여명의 사바하 (무함마드의 동료)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이 유입되며 홈스는 7세기경 시리아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럼에도 홈스 중심부에 위치한 성 요한 성당의 절반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마스지드 (모스크)로 개조된 것을 제외하면 시내의 교회들은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665년, 4대 칼리파 알리의 즉위와 함께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가 벌어졌다. 이때 홈스 시민들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 대신 정통성을 지닌 알리를 지지하였는데, 661년 알리가 암살되며 무아위야가 승리하였다. 그는 홈스가 중심인 준드 힘스를 분할하여 시리아 북부를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준드 킨나스린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응징하였다. 이때부터 시리아는 3개의 지방으로 분류되게 되었다.

홈스는 우마이야 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의 거점으로 남았다. 특히 알리의 지문이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설교단은 성유물로 여겨졌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말엽 벌어진 3차 피트나 당시 홈스 주민들은 바누 카이스에 맞서 바누 칼브가 속한 예메니, 그리고 그 예메니를 선호한 왈리드 2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가 살해되고 야지드 3세가 집권하자 홈스 시민들은 무아위야 1세의 증손자 아부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옹립하였으나 정부군에 패하였다. (744년) 다만 이후로도 홈스는 혼란을 틈타 반정부 도시로 남아있었다. 왈리드 2세 사후 744년에 야지드 3세가 요절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브라힘이 양위하며 마침내 마르완 2세가 집권하였다. 제국 복원을 꾀한 마르완 2세는 745년 말, 우선적으로 홈스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무려 10개월이나 지속되었고 그 틈에 이라크 북부에선 앗 다하크가 카와리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746년 여름, 홈스는 함락되었다. 다만 3년도 못가 도시는 아바스 왕조령이 되었다.

2.5. 중세: 혼란 속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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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왕조 시절 시리아 일대와 준드 홈스

891년 무슬림 지리학자 알 유쿠비에 의하면 홈스는 큰 강 옆에 위치하여 주민들의 식수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10세기 초엽 아랍 지리학자 알 마수디는 홈스의 거주민들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였다고 기록하였다. 985년 알 무카다시는 홈스가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나 '큰 불행'을 겪었고 파괴의 위협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2.5.1. 9세기 중반: 연이은 반란들

압바스 왕조 시절 홈스는 수차례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854 ~ 855년에 일어난 반란이 가장 큰 규모였다. 9세기 중반 무렵 압바스 조는 튀르크 인들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삼았고 홈스에도 튀르크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가 시민들과 충돌한 것이다. 854년 가을, 튀르크 주둔군 사령관이자 태수인 무사가 홈스의 원로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하는 일이 벌어지자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튀르크 병사들이 다수 살해되었고 무사를 포함한 압바스 측 관료들은 하마(도시)로 도주하였다. 이에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후임 태수로 아랍인인 무함마드 이븐 압다와야를 파견하였고 이어진 협상에서 시민들은 그를 수용하였다.[7] 하지만 이븐 압다와야 역시 높은 세금을 유지시켰고 당시 시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폈다. 결국 855년 가을에 도시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2차 반란이 일어났다.

비보를 들은 알 무타와킬은 신속히 다마스쿠스와 팔레스타인 (라믈라)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3명의 원로들이 장살당한 후 십자가에 메달렸고 20여명의 시민들이 매질을 당한 후 제국의 수도인 사마라로 압송되어 성문에 효수되었다. 한편, 그렇지 않아도 타종교에 대한 불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알 무타와킬은 2차 반란을 그리스도교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637년에 이슬람 제국군에 점령된 후 200여년간 무슬림들과 공존하던 홈스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때 추방되었고 시내의 교회들이 이슬람 사원 (마스지드/모스크)로 바뀌었다. 절반은 성당으로, 나머지 반은 모스크로 쓰이던 성 요한 성당은 이때 알 누리 모스크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다만 수십 개의 교회들은 이때에도 살아남아 현재에 이른다.

홈스는 이후로도 862년과 864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전자의 경우 태수 카이다르의 폭정에 의한 것이었고 그는 도시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850년대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새로 파견된 태수 알 파질을 수용하였다. (862년) 그럼에도 반란 세력은 여전하였고 이에 파질이 도당들을 처형하고 백명의 귀족들을 사마라로 압송하였으며 도시 성벽을 허물었다. 하지만 그의 강경 조치는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 하였고 결국 시민들은 아랍 부족인 바누 칼브와 연합하여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864년) 파질은 칼리드 궁전에서 농성하였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반군에 넘겨져 처형되었다. 반군은 그의 시신을 성문에 효수하고 몇개월간 반란을 지속하였으나 압바스 조의 튀르크 계 장군인 무사 이븐 부가에게 진압되었다. 878년부터 홈스는 툴룬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잠깐의 카라마트 수중을 거쳐 함단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944년)

2.5.2. 10세기의 혼란

함단 왕조는 960년대 동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아 약화되었다. 그러자 함단 조의 튀르크계 장군이던 아프타킨이 북부 시리아를 침공하여 홈스를 근거지로 삼았다. 975년, 동로마의 중흥을 이끈 요안니스 1세는 파티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남하하여 340년만에 홈스에 로마군이 주둔하였다. 이때 일시적으로 모스크들이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학살과 약탈이 이어졌다. 이후로 파티마 제국의 속국인 미르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홈스는 1090년, 아크 산쿠르 알 하지브가 이끄는 셀주크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

2.5.3. 셀주크 제국과 십자군

십자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요새

1106년 아파메아 함락, 1108년 하마 함락.

홈스도 위협받음

레몽 드 생질은 홈스 (라 샤멜레)를 자신의 수도로 삼으려는 야망이 있었다.

자나흐 앗 다울라 트리폴리 인근 자신의 요새를 구원하러 가기 전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나오던 중 아사신에게 암살됨.

1118년 트리폴리 포위 당시 다마스쿠스 (부리 왕조) 군대가 구원을 시도했다가 패한 후 홈스로 도주. 십자군이 추격해왔으나 요새화된 홈스를 공격하기보다 샤이자르 등의 마을 약탈하고 돌아감

1175년에 홈스를 접수한 살라흐 앗 딘은 1179년부터 자신의 숙부이자 은인인 시르쿠의 후손들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홈스의 아이유브 가문은 1262년 알 아슈라프 무사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1225년 아랍 지리학자 야쿠트 알 하마위에 의하면 홈스는 크고 유명하며 성벽이 둘러진 강력한 요새 도시로 기록하였다.

2.5.4. 맘루크 왕조 (vs 일 칸국)

1265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원을 세웠다. 다만 당시의 모습은 1912년의 보수 공사로 인해 다소 달라졌다.

1299년 3차 홈스 (와디 알 카잔다르) 전투에서 맘루크 패배

1355년 홈스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괜찮은 나무가 많고 좋은 시장이 있으며 좋은 자미 마스지드 (금요 모스크)를 가졌다고 기록하였다. 또 주민들이 모두 아랍인이라 하였다.

맘루크 조가 십자가를 몰아내고 몽골과 평화가 수립되자 홈스의 중요성 하락.

1400년 아미르 이븐 알 라와스가 보물을 바치며 티무르 무마

15세기 말 맘루크 조가 쇠퇴하자 베두인의 습격 받음

1510년 베두인 부족장 알 파즐 이븐 누아이르가 다마스쿠스 촐독의 사주로 홈스의 시장을 약탈하기도 하였다.[8] 야인시대급

15세기 초엽, 시리아를 유린한 티무르는 예외적으로 홈스는 약탈하지 않았는데,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6. 오스만 시대

1516년 홈스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15세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농경과 목축, 그리고 모직물 산업이 중흥기를 맞을 수 있었다. 알레포의 양 & 염소를 다마스쿠스의 소 & 낙타와 교환이 이루어지던 홈스의 가축 시장 역시 매우 유명했다. 또한 도시에서 생산된 비단은 이스탄불의 상류층에 의해 소비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정책에 집중하며 시리아 지역은 서서히 쇠퇴하였다. 17세기 무렵 도시를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가는 성벽의 견고하모가 시장의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다고 기록하였지만 1785년 방문한 여행가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현재는 '처참한' 상태이며 넓지만 폐가가 많고 다마스쿠스에 의존하는 상태라고 기록하였다.

2.6.1. 시리아의 맨체스터

18세기 말엽 오스만 당국이 반란을 우려하여 성문을 허물어버리자 홈스는 15세기 때처럼 베두인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19세기 초반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홈스는 1832년 자립한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시리아를 등한시 여겼고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하였는데, 근대화된 이집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때 유서깊은 시타델이 파괴되었다. 다만 1860년대 홈스를 회복한 오스만 제국은 시리아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870년대 유럽의 직물 산업이 침체에 빠지자 홈스의 면화가 산업이 발전하였다. 홈스 내외로 5천여 개의 직물 공장이 가동하는 것을 본 영국 영사는 '시리아의 맨체스터'라는 말을 남겼다.

2.7.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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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시리아 총독 나짐 후세인 파샤에 의해 중건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19세기 말엽의 경제 부흥을 계기로 시리아의 중심 도시로 재부상한 홈스는 1차대전 이후 수립된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놓였다. 1925년 가을, 드루즈 교도들을 중심으로 반프랑스 봉기가 시리아를 휩쓸었을 때에 홈스도 그에 동참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프랑스는 1932년 다마스쿠스의 군사 학교를 홈스로 옮겨 도시에 대한 장악을 공고히 하였다. 동시에 키르쿠크에서 트리폴리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과거 대상들의 행렬을 연상시키며 홈스를 지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당국은 홈스 군사 학교에 소수인 알라위 파를 기용하여 다수인 수니 무슬림을 감시하게 하였다. 아사드 정권을 세운 하페즈 알 아사드 역시 그 출신이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때에 이스라엘 공군이 홈스의 정유소를 폭격하기도 하였다.

2.8. 시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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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홈스 : 드론 영상

2011년 5월부터 홈스는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식량과 의약품, 연료 등이 차단되며 고통의 도시가 되었다. 무자비한 폭격과 함께 수천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결국 2015년 12월, UN의 중재 하에 시내의 반군과 그 가족들은 홈스를 빠져나갔다. 현재 복구 공사가 진행중이다. #

2023년 10월 5일, 홈스 육군사관학교에서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장교 졸업자 및 행사 참석자 100여명이 사망하고 약 300명이 부상을 입었다.

3. 창작물에서


[1] 무려 6천여대의 전차가 동원된, 역사상 가장 많은 전차가 동원된 전투였다.[2] 메카의 카바 신전에 있는 검은 돌과 유사한 것으로 추정됨.[3]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부스 아라부스.[4] 성인 1인당 1 디나르와 한묶음의 밀.[5] 다마스쿠스, 바알벡, 하마 등의 도시에서도 항복 시 같은 약속을 하였다.[6] 인구가 10만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7] 그를 호위한 압바스 군대는 시민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도시를 포위할 예정이었다.[8] 그럼에도 고용된 '값'을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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