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8:56:05

1기 지하철 계획

파일:서울특별시 휘장.svg 서울특별시 지하철 및 경전철 계획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1기 파일:Seoulmetro1_icon.svg 1호선 서울역 - 청량리역
파일:Seoulmetro2_icon.svg 2호선 시청역 - 시청역
파일:투명 10x10.png/ 신설동역 - 성수역
파일:Seoulmetro3_icon.svg 3호선 구파발역 - 양재역
파일:Seoulmetro4_icon.svg 4호선 상계역 - 사당역
<colbgcolor=#fff,#191919> 2기 파일:Seoulmetro2_icon.svg 2호선 신도림역 - 까치산역
파일:Seoulmetro3_icon.svg 3호선 구파발역 - 지축역
/ 양재역 - 수서역
파일:Seoulmetro4_icon.svg 4호선 상계역 - 당고개역
파일:Seoulmetro5_icon.svg 5호선 방화역 - 상일동역
파일:투명 10x10.png/ 강동역 - 마천역
파일:Seoulmetro6_icon.svg 6호선 응암역 - 봉화산역
파일:Seoulmetro7_icon.svg 7호선 온수역 - 장암역
파일:Seoulmetro8_icon.svg 8호선 암사역 - 모란역
3기 파일:Seoulmetro3_icon.svg 3호선 수서역 - 오금역
파일:Seoulmetro9_icon.svg 9호선 개화역 - 중앙보훈병원역
10호선 광명역 - 토평역
11호선 신월역 - 우면역
12호선 왕십리역 - 광운대역







1차 파일:UiLine_icon.svg 우이신설선 신설동역 - 북한산우이역
파일:SillimLine_icon.svg 신림선 샛강역 - 관악산역
동북선 왕십리역 - 상계역
서부선 새절역 - 서울대입구역
면목선 청량리역 - 신내역
위례신사선 신사역 - 중앙역
위례선 마천역 - 복정역
목동선 당산역 - 신월역
2차 파일:Seoulmetro3_icon.svg 3호선 전구간 급행화
파일:Seoulmetro4_icon.svg 4호선 전구간 급행화
파일:Seoulmetro5_icon.svg 5호선 둔촌동역 - 굽은다리역
파일:투명 10x10.png(길동삼각선)
서부선 서울대입구역 - 관악산역
강북횡단선 목동역 - 청량리역
}}}}}}}}} ||


1. 개요2. 역사
2.1. 일제강점기부터 김현옥 시정까지2.2. 양택식 시장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추진2.3. 구자춘 시정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추진 및 그 이후2.4. 서울 지하철 3, 4호선 추진과 그 문제점2.5. 추가 구상들
3. 1기 지하철에 해당되는 노선4. 같은 시기에 개통한 타 지역의 지하철 노선

1. 개요

서울 지하철 운행 구간을 착공 및 개통시기 별로 이르는 말로 운영주체는 서울교통공사(구 서울지하철공사, 서울메트로)이다. 1호선이 사업에 착수된 1970년부터 3, 4호선이 개통된 1985년까지 건설된 서울 지하철 노선이 1기 지하철 계획에 해당된다.

흔히 1기 지하철이라 하면 단순히 서울 지하철 1~4호선을 통틀어서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호선 서울역~청량리, 2호선 본선 및 성수지선, 3호선 구파발~양재, 4호선 상계~사당 구간만이 1기 지하철 노선이고 2호선 신정지선, 3호선 양재~수서(3호선 수서~오금 연장은 3기 지하철 계획에 해당), 4호선 당고개~상계는 2기 지하철 계획에 해당된다.

1기 지하철이라는 말은 지하철 1~4호선이 지어진 1970년~1985년에는 없었으며, 1호선과 2, 3, 4호선은 사실상 별개의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 서울특별시에서 기존 노선 연장 및 4개 지하철 신설 계획을 2기 지하철 계획이라고 퉁쳐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그 전에 지어진 지하철은 '1기 지하철'로 분류되었다.

2. 역사

2.1. 일제강점기부터 김현옥 시정까지

서울 전차 자체는 이미 일제강점기때부터 수요가 넘쳐났었다. 이에 1939년 경춘철도회사에서는 종로선의 건설을 계획하였고, 성동역(현 한솔동의보감)-동대문-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미츠코시 경성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경성역 간 약 7.5km 구간의 지하철도 건설을 계획하여 성동역-동대문 간 약 2.5km 구간을 우선 착공하고자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삽도 뜨지 못하고 무산되었다.[1][2]
일제강점기 계획 [ 펼치기 · 접기]
파일:1기지하철일제.png


같은 해,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경인선을 직류 3,000V로 복선전철화하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경인선 전철과 직결하는 경성역-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간 1km 구간의 지하철도 건설을 계획했으나, 마찬가지로 전시체제 돌입으로 무산되었다.[3]

8.15 광복 후에도 지하철 건설계획은 종종 제시되었지만, 역시 1950년대에는 6.25 전쟁의 여파로 전후복구가 시급한 과제인지라, 전차의 복구 및 운영에 집중되었고, 전후복구가 어느정도 진행된 1960년대부터 지하철 계획이 시작됐다.
1966년 계획 [ 펼치기 · 접기]
파일:1기지하철1966.png
1966년 계획
1호선(8.5km) 서울역~남대문~광화문~종로~동대문~청계천변~청량리[4]
2호선(7.5km) 서소문~시청앞~을지로~동대문~성동역[5]
3호선(28.0km) 갈현동~중앙청앞~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뚝섬~천호동[6]
4호선(24.0km) 우이동~돈암동~종로4가~을지로4가~퇴계로~한남동~말죽거리[7]
이 계획은 영등포, 강남, 천호, 망우, 숭인, 은평 총 6개 지구에 새로운 부도심을 형성하여 다핵도시로 전환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1968년,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서울전차를 폐선하고, SS트램을 도입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 조달 문제, 차관 문제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SS트램 초기 구상안
순환 연희-서대문-세종로-답십리-금호-한남-제2한강교-망원
방사1 마포-서울대교-여의도-도림-개봉-오류-화곡-김포공항-가양-염창-양화-제2한강교-여의도
방사2 남산-제3한강교-양재-과천-안양-시흥-구로-노량진-국립묘지-제3한강교
방사3 행당-워커힐-망우-태릉-상계-의정부입구-도봉-쌍문-수유-미아-고려대입구-신설/용두
방사4 연희-증산-구산-박석고개-신도면-화전-수색-신촌
SS트램 후기 구상안 [펼치기 · 접기]
파일:1968-10-29-ss.png
[8]
파일:1기지하철ss.png
SS트램 후기 구상안
지하철 서대문-용두[9]
1호선 상계-쌍문-수유-종암-용두[10]
2호선 삼송-불광-홍제-서대문[11]
3호선 안양-시흥-구로-대방-원효-서울역-서대문[12]
4호선 수진-오금-천호-구의-왕십리-용두[13]

2.2. 양택식 시장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추진

1970년 4월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은 지하철 노선들을 확정지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으나 개통 당일에 하필 육영수가 저격당하면서 양택식 시장이 사임하고[14] 그 후 구자춘 시장이 취임하면서 이미 개통된 1호선을 제외한 2 ~ 5호선 계획은 폐기되었다.
1970년 계획 [ 펼치기 · 접기]
파일:attachment/서울 지하철 1호선/1_subway.jpg[15]
파일:attachment/3553829758_ac2af715.jpg
1호선 서울역 ~ 청량리 (수도권 전철 직결: 수원/인천 ~ 서울역, 청량리 ~ 성북)[16]
2호선 김포공항 ~ 답십리/말죽거리[17][18]
3호선 연신내 ~ 수유[19][20]
4호선 독산 ~ 방이(초기에는 대림동 ~ 포이동 ∩자 선형)[21][22]
5호선 연희[23] ~ 성남[24][25][26]

2.3. 구자춘 시정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추진 및 그 이후

구자춘 시장은 강남 ~ 영등포 ~ 도심 3핵도시론에 입각, 이를 연결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장거리 순환선인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계획하고, 3호선은 불광 ~ 서울역 ~ 사당, 4호선은 미아 ~ 동대문 ~ 보광동 ~ 영동을 잇는 형태, 즉 지금의 3호선과 4호선을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형태를 제시한다.[27] 2호선은 노선 선형이 일부 변경된 영등포 통과 구간을 제외하면 이때 계획됐던 노선대로 착공되었고, 3호선과 4호선은 1977년경 계획이 수정되어 서울 도심을 X자로 관통하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선형이 확정된다.

2.4. 서울 지하철 3, 4호선 추진과 그 문제점


그러나 당시 중앙정부든 서울특별시든 빈약한 재정으로 인해 계획대로 지하철을 건설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을 민간투자사업으로 지으려고 했고, 대우그룹 등 여러 재벌들의 투자금을 끌어모아 1979년 3월에 (가칭)지하철건설주식회사를 출범시켰으며, 이 기업은 1980년 2월에 사명을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들 기업의 주도 하에 자금을 모아 서울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을 착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류파동 등 당시의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3호선과 4호선의 공사비는 노선 최종 확정 때에 예상되었던 비용의 2배 이상으로 치솟았고,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에 출자한 기업들은 추가 출자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지하철공채를 발행하여 부족한 지하철 건설 사업비를 메꾸는 대신, 민간투자사업 방식을 포기하고 서울특별시가 전액 출자하는 지방공기업 방식으로 합의하여 지하철을 건설하고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는 해산되고, 이를 대신하는 형태로 1981년 9월 1일에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를 설립한다. 출처 이에 따라 1호선과 2호선을 서울특별시 지하철본부가 건설한 것과는 달리 3호선과 4호선은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가 직접 건설하고 개통 후 운영하였다. 그 후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는 2005년 10월 27일 서울메트로로 사명을 바꾸고, 2017년 5월 31일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와 통합해 서울교통공사가 된다.

2.5. 추가 구상들

1980년대 중반부터 서울 지하철은 확장을 멈추고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이 때에도 수많은 지하철 노선 구상이 서울특별시에서 나왔지만 2기 지하철 계획이 1989년에 세워지기 전까지 서울에서는 지하철을 추가로 건설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지하철 건설 부채 및 운영 적자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1~4호선 모두 1980년대 중반에는 예측 대비 과소한 수요로 인해 적자에 시달렸으며, 막대한 지하철 건설 부채를 상환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당시에는 도시철도 건설에 대한 국비 지원 체계가 확립되지 않아 지하철 건립 비용을 거의 대부분 서울시가 부담했으므로 중앙정부에 비해 빈약했던 서울시 재정에 부담을 가중하였다. 이 문제는 연일 신문과 뉴스에서 오르내렸고, 서울특별시의 그 누구도 지하철을 더 건설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84년에 2호선이 완전 개통할 때 서울특별시는 서울지하철건설본부를 결국 해산해버렸다.

1980년대 초반 1기 지하철이 예측에 비해 과소한 수요를 보인 것은 1호선을 제외한 2~4호선은 서울 시가지 내의 교통 흐름과는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강남 지역은 막 테헤란로 북쪽 지역이 주거지역으로 개발된 정도에, 테헤란로 업무지구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잠실 정도와 주공아파트나 올림픽 시설물로 그럭 저럭 시가지 같았던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서울의 주요 업무지역이 4대문 안에 집중된 탓에 나름 인구 밀집지역인 관악구 등에서는 도심 진입시 뺑 돌아가는 2호선 보다는 25번 등 시내버스를 애용하는 바람에 특히 2호선 수요를 창출할 일도 없었다. 3호선이 지나가는 서울 서북지역은 단독주택으로 개발이 끝난 곳이라 1980년대 후반 빌라 건설 붐이 일기 전까지는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으며, 4호선 이 지나가는 동북 지역은 수유역 북쪽으로는 농촌지역 허허벌판이 대부분이었다. 미래를 대비해서 북쪽 끝까지 건설했다 해도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 멀리 나갔다. 나중에 지옥철의 대명사가 된 4호선 동북부 구간도 개통 직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10량 승강장에 전동차 6량으로 다녀도 전혀 문제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 서울특별시가 지하철 건설에 다시 나선 때는 1980년대 후반으로, 기존 지하철의 이용객이 폭증하고 도로교통의 정체가 극심해진 데 따른 것이었다.[28] 창동, 상계, 양재, 개포 등에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뤄지면서 과소한 수요 문제가 해소되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지하철이 뚫려서 교통이 좋아진 것을 계기로 1980년대 중후반에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을 진행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상계주공아파트와 창동, 노원, 개포지역 아파트군은 이때 완성된 것이다. 군사정권 스타일의 저가 토지수용과 아파트 개발로 발생한 개발 이익금을 지하철에 투자할 수 있었고, 연선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많이 들어옴에 따라 초창기 과소한 수요가 이후 지옥철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수요가 많아진다.

1 - 5호선 직결은 구자춘 시장 취임 후에도 계획이 있었지만, 종로 지하에 예상못했던 지장물이 많아서 폐기시켰다는 썰이 있다.1976년도 계획[29] 이때 흔적이 신설동역 지하 3층 유령승강장이다. 그 외에 용두 ~ 신답 구간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복선터널을 만들려던 노반이 남아 있다.[30] 참고.

이후 5호선은 특이하게도 김포공항 ~ 구로구 서부 구간과 천호동 ~ 잠실 ~ 성남시 동부 구간으로 추진되다가 1981년경 천호동 ~ 성남시 구간은 6호선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둘 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는지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31] 이후 2기 지하철이 계획될 때 5호선 서쪽 구간 중 방화 - 까치산 구간은 70년대 5호선 계획과 합쳐서 현재의 5호선이 되었고, 나머지 까치산 - 신도림 구간은 2호선 신정차량사업소와 맞물려 신정지선이 되었으며, 5호선 동쪽 구간은 8호선이 되었다.

3. 1기 지하철에 해당되는 노선

4. 같은 시기에 개통한 타 지역의 지하철 노선

이 당시에는 부산을 제외하고는 지방 대도시들의 지하철 계획은 아직 없는 상태였다.


[1] 「서울에도地下鐵道(지하철도)」, 동아일보, 1939-06-01[2] 양택식 시정의 지하철 계획 하의 서울 지하철 4호선 서울역-종각,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제기동 구간과 유사하다.[3] 「電鐵化計劃遂具體化」, 동아일보, 1939-07-22[4] 서울역~동대문 구간은 현재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하나, 동대문~청량리 구간은 청계천변 고가노선을 검토했다.[5] 현재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충정로~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서울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제기동 구간과 유사하다.[6] 현재의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신내~충무로,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서울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잠실 구간과 유사하다.[7] 현재의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성신여대입구,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충무로, 서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양재 구간과 유사하다.[8] 수긴리는 수진리의 오기.[9] 현재의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종로3가 구간 및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제기동 구간과 비슷하다.[10] 현재의 서울 지하철 4호선 상계~미아사거리 구간 및 서울 경전철 동북선 미아사거리~제기동 구간과 비슷하다.[11] 현재의 수도권 전철 3호선 삼송~독립문 구간과 비슷하다.[12] 현재의 수도권 전철 1호선 안양~종각 구간과 비슷하나, 대방~서울역 구간은 80년대에 나온 원효로를 지나는 서울역~구로역전철신설계획과 비슷하다.[13] 현재의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 모란~복정 구간 및 서울 지하철 8호선 복정~가락시장 구간, 서울 지하철 3호선 가락시장~오금 구간, 서울 지하철 5호선 오금~왕십리 구간, 서울 경전철 동북선 왕십리~제기동 구간과 비슷하다.[14] 기념행사 총괄 담당을 했었는데 보안취약으로 인해 터진 걸로 판단하여 책임하에 사퇴를 했고 경호원들도 줄줄이 사퇴했다. 그리고 기념행사 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개통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대통령은 끝내 개통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국내 최초의 지하철 개통인 만큼 성대한 축제분위기여야 할 1호선 개통식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조촐하게 개통식을 거행했다. 공교롭게도 개통식이 치러진 그 날 오후에 비가 내렸다고(...)[15] 대포동은 개포동의 오기.[16] 유일하게 실현된 노선이며 이미 철도청구간인 수도권 전철과 직결운행을 염두에 뒀다.[17] 답십리에 분기선이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군자차량기지 때문으로 추정된다. 군자기지는 첨부터 여러 노선의 열차를 검수할 목적이였다. 공교롭게도 1호선 시청역과 환승도 동일하게 존재했다.[18] 말죽거리 ~ 여의도 구간 선형이 현재 463번 버스와 상당히 비슷하다.[19] 현재의 3호선과 4호선 강북구간 직결로 보면 된다.[20] 연신내 역촌 구간은 현재 6호선의 응암순환 구간과 비슷하다.[21] 한강을 두 번 건너는 ∩자 형의 노선이었으나 나중에 노선이 연장되고 경유지가 바뀌어서 싱가포르 MRT 다운타운선처럼 기괴한 선형으로 되었다.[22] 1호선 서울역과 환승연계가 계획되었으며, 1호선과 4호선간의 연결선로도 원래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23] 자료에 따라 가좌라고도 한다.[24] 종로구간은 1호선과 혼용할 계획이었다. 특이사항은 1~4호선은 좌측통행이었지만 5호선은 우측통행으로 계획했었다. 신설동역 유령승강장과 통행전환 꽈배기굴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검수도 군자기지에서 할 계획이었다.[25] 연희 ~ 신촌 구간은 서울 경전철 서부선 104정거장 ~ 신촌 구간과 유사하다.[26] 5호선도 천호까지 구상했었는데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성남까지 연장 떡밥(...)을 쳤던거~... 실상은 상술한 광주대단지사건에 잘 나와 있다. 현재는 서울 지하철 8호선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이 성남 구간을 계승했다.[27] 이 계획에선 3호선과 4호선 환승역이 없었다. 현 3호선 강남구간이 그때는 4호선의 일부로 계획되었고, 현 4호선 강남구간은 그때는 3호선의 일부로 계획되었다. 즉, ) ( 형태의 선형이었다는 것.[28] 서울특별시 도시기반시설본부(2003), 서울지하철건설삼십년사[29] 2호선이 순환선으로 계획이 바뀌면서 4호선의 강남을 가로지르는 구간이 2호선으로 대체되었고 5호선 충정로 서쪽 구간이 기존 2호선 구간으로 대체되었으나, 한양대와 2호선 지선을 잇는 삼각선, 3호선 전 구간과 4호선의 ∩형 구간, 5호선 신설동 동쪽 구간이 그대로다.[30] 신설동 ~ 답십리를 잇는 구간 흔적이며, 현재의 본선은 차량기지 입출고선 용도였다.[31] 현재 잠실역에서 잠실나루역 방면 지상으로 나오기전에 빈 공간이 나오는데 아마도 5호선 중정비 연결선로 같은 용도로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2호선 신도림역의 거대한 규모는 신정기지 및 그 입출고선로(신정지선)때문만이 아니라 5호선 분기역으로 계획되었던 흔적이기도 하다.[32] 안산선은 1기 지하철 및 2기 지하철 계획의 과도기에 건설된 반면, 4호선 직결 전 선개통된 과천선의 일부 구간은 2기 지하철 계획 추진중에 건설되었다.[33] 신정지선(신도림역~까치산역)은 2기 지하철 계획의 일부에 해당되기에 제외[34] 구파발역~지축역 구간과 양재역~수서역 구간은 2기 지하철 계획, 수서역~오금역3기 지하철 계획, 그리고 지축역~대화역일산선 국철구간이기에 제외[35] 당고개역~상계역구간은 2기 지하철 계획, 그리고 남태령역~오이도역 구간은 과천선안산선 구간에 해당되어 제외[36] 사당역 ~ 남태령역 구간은 본래 대한민국 철도청이 시공한 과천선의 일부 구간으로, 개통 직후 서울특별시 내에 있으며 전력 공급 및 열차의 통행 방식이 전환되는 일명 꽈배기굴 이북에 위치한 사당역 ~ 남태령역 구간을 서울특별시가 관리하는 도시철도 운영구간으로 간주하고 운영권 역시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에 이관하였다. 그래서 이후 서울메트로를 거쳐 현재는 서울교통공사가 관리하고 있는 것. 또는 남태령역 ~ 선바위역 사이에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행정경계로 인하여 개통 당시 서울지하철공사와 철도청간의 운영구역을 철저히 분리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