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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8:45:13

1953년 동독 봉기

1953년 동독 사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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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75-14676%2C_Leipzig%2C_Reichsgericht%2C_russischer_Panzer.jpg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시위에 호응하여 라이프치히에서 발발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진입한 소련군의 IS-2 1944년형.

1. 개요2. 내용
2.1. 배경2.2. 진행2.3. 결과
3. 여담

1. 개요

독일어: Aufstand[1] vom 17. Juni 1953 / Aufstand in der DDR
러시아어: События 17 июня 1953 года в ГДР
영어: Uprising of 1953 in East Germany



1953년 동독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동베를린을 위시한 동독 전역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 운동. 이전부터 체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산발적인 시위가 지속되었다가 마침내 1953년 6월 16일 본격적인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나 다음날인 17일 아침 소련군의 신속한 무력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이후 동독에서는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보다 일찍 일어난 동유럽 최초의 민주화 봉기로 평가받는다.

2. 내용

2.1. 배경

1952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서기장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에서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의 경제 계획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노동할당량을 10% 늘리는 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상흔이 여전히 깊게 남은 당시 동독의 경제 상황에서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은 많은 부작용과 반발을 낳았다. 공산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제일 먼저 큰 타격을 입게 된 자영농과 소상공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며 많은 수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서독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여기에 생필품 부족까지 겹쳤다. 생필품 부족을 타개하려면 경공업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 매우 기초적인 상식이겠지만 스탈린은 1930년대 소련의 경제 개발 계획을 모방하여 동독에도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것을 지시했으며 여기에 냉전의 격화에 따른 군비 경쟁까지 겹치면서 동독은 나머지 경제적인 여력조차 군수산업에 탈탈 털어 넣어야만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독에서는 "유럽에서도 스탈린이 동독과 함께 서독을 침공할지 도발할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퍼져나갔고 이에 독일 연방군 창립을 추진하였으며 동독도 서독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국가인민군을 창설하였다.[2]

동독은 정부가 선전하는 수치상으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급성장하는 서독과의 경제 격차는 나날이 커져 갔다. 동독도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 나름 경제 개발을 추진하긴 했는데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면서 내수를 희생시켰다. 전후 5년이 넘어서도 생필품은 부족했고 실질 생활수준은 서독에게 심각하게 뒤쳐지게 되었기에 동독 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 갔다. 당시 동독 사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발전량이 터무니 없이 모자라서 저녁만 되면 공장을 비롯한 모든 도시가 암흑천지가 되었다. 더불어 공산화 이후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업집단화를 실시했으나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식량 생산량이 급감했다. 급기야 1952~1953년 겨울 동독에서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졌으며 상점 진열대에는 식량과 생필품이 비게 되었고 물가가 치솟았다. 사회주의 지상낙원은커녕 굶어 죽게 생긴 현실을 직시한 동독 주민들은 체제에 심각한 회의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울브리히트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울브리히트의 60세 생일인 1953년 6월 30일에 맞춰 노동배가 운동을 추진하며 1952년부터 노동자들에게 노동할당량을 10% 이상 늘리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임금을 고정시킨 채 작업량을 늘리는 노동수탈에 해당했고 동독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농업집단화로 인한 식량부족, 중공업만 육성하고 경공업에 손놓다시피 한 결과 야기된 생필품 부족, 군사력 증강으로 인한 군역 부담 증가, 기독교 탄압, 정치 사상 탄압, 서독에 비해 심각한 실질 임금 저하, 임금 인상 없는 노동량 증가 등의 요소들이 누적되면서 결국 동독 주민들은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미 1952년 말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할레, 줄 등의 도시에서 산발적인 소요가 일어났고 1953년이 되자 노동자들은 공산 정권에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고 스탈린 사후 일시적으로 권력을 손에 쥔 베리야는 전임자와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목적에서 냉전을 완화하는 유화적인 정책을 표방하였지만 베리야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은 동유럽의 반소 감정이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베리야도 1953년 상반기에 확산되던 동독 내 노동자들의 시위 문제와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울브리히트에게 급진적 공산주의 정책을 완화 혹은 보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1953년 6월 2일 동독 정부에 전달된 크렘린의 새 지침에는 농업집단화 보류, 경공업 위주로 전환, 정치국 통제 완화, 기독교 억압 중단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노동할당량 10% 증대에 대한 폐기 조치가 빠져 있었다.

동독 정부는 소련으로부터 하달된 지침을 언론에 발표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노동할당량 증대 조치가 폐기되지 않은 사실에 분노했으며 동독 주민들은 울브리히트의 정권이 소련 모스크바의 지침에 의해 움직이는 허수아비 정권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6월 12일과 13일 5,000명의 시위대가 브란덴부르크에서 집회를 열었다. 6월 15일 동베를린 스탈린 거리에 노동자들이 작업할당량 축소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2.2. 진행

본격적인 대규모 시위는 1953년 6월 16일에 일어났다.

동베를린의 건설 노동자들이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며 파업을 결의하였는데 이들은 베를린 도심에서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베를린 시내를 누비면서 총파업을 선동했다. 시위대는 정부 청사 앞에서 울브리히트 서기장의 응답을 요구했지만 울브리히트는 몸을 피했고 중공업 장관이 대신 나와 군중 앞에 섰는데 울브리히트가 나타나지 않자 군중들은 분노했고 야유 속에서 중공업 장관은 자리를 떠나야 했다.

오후가 되자 동베를린에서의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오전에 300명의 건설 노동자들의 가두 시위로 시작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4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다. 급기야 시위대들은 일시적으로 동베를린을 넘어서서 서베를린에 도달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를린 내에서는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지식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망명을 감행할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의 일이다.

시위대는 이슈를 정치 문제로 확대했고 자유총선거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동베를린에서의 파업의 소식은 삽시간에 동독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6일이 지나기 전에 동독 전역의 2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에서 100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다. 동독 전체 마을의 약 80%에서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다음날 전국적인 시위를 예정하고 해산했다.

위협을 느낀 동독 정부는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미 6월 초에 동독에서 반소련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당시 소련 최고지도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동독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서 일처리를 똑바로 하라고 조인트를 깠다고 한다. 이 시점에 이미 소련군이 개입할 것은 분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이 소식이 전해지자 소련 역시 큰 당혹감을 느꼈다. 흐루쇼프 등은 베리야의 성급한 개혁조치가 동독 사태를 야기했다며 비판했다. 16일 저녁 소련은 군대를 동원하여 동독 시위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17일 아침부터 시위는 한층 격화되어 반체제 민주화 시위로 발전했다. 전날만 하더라도 노동 부담 완화라는 요구 조건에서 보이듯 노동 쟁의의 요소가 강했으나 17일 시위대는 자유선거와 발터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동독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17일 새벽 베를린 외곽에 주둔하면 2만명의 소련군이 T-34-85 탱크를 앞세워 8천여명의 동독 경찰과 함께 베를린 시내로 진주하면서 시위 진압을 시작했다. 계획된 무장 봉기가 아니라 파업에서 촉발된 즉흥적인 민주화 시위였기 때문에 시위 지도부가 조직화되지 못했고 소련군의 대규모 탱크 행렬로 인해 봉기는 신속하게 진압되기 시작했다.

동베를린 등지의 주요 봉기는 17일 사실상 진압되었지만 동독 전역의 수백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저항이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사태가 막을 내린 것은 6월 24일이었다.

동독 정권에서 밝힌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25명이지만 서독 정부는 시위 진압 이후 동독 정권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한 희생자들까지 합쳐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2.3. 결과

시민들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동독에서는 이 사건을 "파시스트 폭동"으로 규정하게 되었으며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더욱 공고화되었다. 동독 정권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는 달리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지했기 때문에 동유럽 혁명 때까지 소련의 가장 중요한 심복으로 남았다.

울브리히트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의 신속한 진압이 아니었으면 정권이 전복될 뻔했기 때문에 이 사태를 큰 교훈으로 삼게 되었고 이후 동독의 국정 운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동독 정권은 다른 공산정권에 비해 덜 급진적이고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미 봉기가 터지기 2주 전 소련이 울브리히트 정권에 농업집단화 보류, 중공업에서 경공업 위주로 전환, 정치국 통제 완화, 기독교 억압 중단 등 기존 정책의 대폭 완화를 지시한 바 있다. 소련은 이미 울브리히트 정권보다 먼저 동독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고 동독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차별화된 온건한 사회주의 정책으로 다스려야 함을 알았다.

동독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으로 선회했고 인민들의 생활적 불만을 잠재우는 데 신경썼지만 이면으로는 각 공장과 작업장에 슈타지 등 정보기관을 동원한 촘촘한 감시망을 구축하여 다시는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며 아울러 노동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 주 이유가 서독과의 접촉에 따른 비교 때문이라고 여기고 서독 쪽 국경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수면 밑에서는 반체제 운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이는 결국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이어졌다.

한편 서독에서는 입으로만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 일이 터졌을 때는 방관한다면서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6.25 전쟁 와중에 또 소련이 민중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서독에서 반공주의 여론이 확산되면서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끌던 기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가 더욱 높아졌고 반대급부로 서독의 사회주의 계열 정당은 반소련을 명확하게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지지율의 침체를 겪었다.

3. 여담


[1] 봉기를 의미한다. 혹은 Volksaufstand(폴크스아우프슈탄트: 인민 봉기)나 Arbeitersaufstand(아르바이터아우프슈탄트: 노동자 봉기)라고 쓰기도 한다.[2] 정확히는 서독 연방군이 동독 인민군보다 3.5개월 먼저 창설되었다. 동독은 서독의 연방군에 대응한다는 논리로 군대 창설을 진행했다.[3] #[4] 이 시기에는 반공 논리에 밀려 과거사 청산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과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관계자들이 입을 씻은 채 기민/기사련에 입당해서 어물쩍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고(대표적으로 키징어 총리) 이 당시에는 폴란드가 차지한 오데르 나이세 선 동부 지역이 예전에 자기네 영토였으니까 되찾아야 된다는 여론도 강했으며 기민/기사련이나 사민당이나 이러한 여론을 무시할수없었기 때문에 오데르 나이세 이동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었다. 이렇던 독일에서 나치 청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68운동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