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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2:27:17

PlayStation(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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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jpg
오리지널 PlayStation 모델과 듀얼쇼크
개발 / 제조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발매일 파일:일본 국기.svg 1994년 12월 3일
파일:미국 캐나다 국기.svg 1995년 9월 9일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 1995년 9월 29일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1995년 11월 15일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1996년 11월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파일:태국 국기.svg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96년 12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년 3월
파일:대만 국기.svg 1997년 11월
생산 종료 파일:세계 지도.svg 2006년 3월 26일
가격 파일:미국 국기.svg $299 → $199 → $149
→ $129 → $99 → $49[1]
파일:일본 국기.svg ¥39,980 → ¥29,800
→ ¥24,800 → ¥19,800
→ ¥18,000 → ¥15,000
→ 오픈프라이스[2]
판매량 파일:세계 지도.svg 1억 249만 대
파일:일본 국기.svg 1,941만 대
홈페이지 한국

1. 개요2. 역사
2.1. 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2.2. 자체 프로젝트 개시
2.2.1. 서드 파티 모집
2.3. 출시 이후
2.3.1. 광고2.3.2. 가격 경쟁2.3.3. 게임 유통
3. 한국에서의 플레이스테이션4. 하드웨어
4.1. 사양4.2. 모델4.3. CPU4.4. GPU4.5. RAM4.6. SPU4.7. 메모리 카드4.8. 게임 컨트롤러4.9. CD-ROM4.10. 기타
5. 출시한 게임6. 주변 기기
6.1. 포켓스테이션
6.1.1. 지원 게임
7. 배리에이션
7.1. PS one7.2. 개발 기기7.3. 아케이드 호환기7.4. 복각판: PlayStation Classic
8. 기타
8.1. 불법 복제 칩
9.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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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동 화면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의 첫 게임기이자 거치형 게임기이다. 이름의 유래는 업무용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에서 놀이를 위한 컴퓨터인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이름을 붙였으며, 1994년 12월 3일에 일본에서 처음 출시되어 2006년 3월 23일까지 판매되었다. 게임기 판매량은 1억 249만 대이고 최다 판매 게임은 1,085만 장(10%)의 그란 투리스모. 동시 개발 게임은 남코릿지 레이서.

가전회사 소니의 게임기 시장 참여에 처음엔 그 누구도 성공을 예상하지 않았다. 출시 초기에는 세가 새턴에 밀려 근소한 차이로 100만 대 판매를 먼저 내주며 고전했지만, 1995년 6월 아크 더 래드를 시작으로 사실상 발매 2년차나 다름없는 시기였던 1996년 상반기 남코철권 2캡콤조차 예상 못했던 바이오하자드의 깜짝 대성공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하반기에는 너티 독크래시 밴디쿳툼 레이더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일본에서는 아크 더 래드 2와 파라파 더 래퍼를 100만 장 넘게 판매했다. 또한 같은 해 스퀘어파이널 판타지 7 발매 선언으로 가정용 게임기 전쟁의 패권은 완전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넘어갔다.

고가의 업무용 워크스테이션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실시간 3D 렌더링을 가정용 게임기에서 이뤄낸 뛰어난 하드웨어 설계에 개발사 친화적인 저렴한 라이선스비와 개발 환경 지원을 통한 서드파티 포섭, 지속적인 게임기와 게임 가격을 인하할 수 있는 제조와 유통 혁명에 광고계 역사에 남을 특유의 마케팅 수법까지 더해졌던 비디오 게임계 혁신의 총합이다.

한국에서의 약칭은 PS, 플스 등으로 흔히 불리며 게임 매거진 혼자서 프레스라는 약칭을 사용했지만 별로 보급되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약칭은 "프레스테(プレステ)"가 쓰였는데[3], 후속기가 나오면서 부르기 쉬운 PS(ピーエス)로 더 많이 불린다. 어떤 사람들은 직역해 "아소부에키(遊ぶ駅)" 내지는 "아소비에키(遊び駅)"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노는역" 내지는 "놀이역"이라고도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PSX[4]라고 더 많이 불리었으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플레이스테이션 20주년 기념으로 만든 PlayStation 4, PlayStation Vita의 테마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시동음이 들어갔다.#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에서 받을 수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4용이고, 플레이스테이션 4 본체에서 받거나 PC 등에서 웹으로 접속해 미리 구매(무료)할 수 있다.

2. 역사

플레이스테이션의 탄생 비화에는 닌텐도의 배신으로 인한 소니의 분노로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IGN 기사나, 오가 노리오자서전에서도 위의 일화는 사실인 것처럼 쓰여 있다. 관련 서적이나 유명 블로그등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당시 SCE의 이사회 의장이었던 마루야마 시게오(丸山茂雄)는 2016년 인터뷰에서 그간 사람들이 듣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애시당초 쿠타라기 켄은 반도체 사업을 하고 싶었고 워크스테이션을 보며 가정용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니다가 이상한 인간 취급을 받기도 한 만큼 닌텐도와의 일은 일종의 부스터가 된 것이지 타도 닌텐도라는 목표를 세우고 게임기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5] 쿠타라기 켄도 소니와 닌텐도의 대결 구도는 언론이 지어낸 것이며 패미컴을 개발한 우에무라 마사유키리츠메이칸대학에서 토크쇼도 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도 말했다.[6] 따라서 밑에 써 있는 내용은 사실과 언론이 지어낸 소설에 가까운 내용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 점을 감안해 읽는 것이 좋다.

2.1. 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NES-CD_add-on.jpg
슈퍼 패미컴용 플레이 스테이션[7] 콘셉트
파일:170b195fba29c16f.png
플레이 스테이션 데모
1975년 소니에 입사한 쿠타라기 켄(久夛良木健)은 1983~1988년 가나가와현 아츠기시에 있는 소니 정보처리연구소 소속 시절 방송국용 실시간 3D 특수 효과(VFX) 시스템인 '시스템 G'의 데모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생방송에 실시간으로 3D 효과를 넣을 수 있는 장치인 시스템 G를 보며 쿠타라기는 '이걸로 가정에서 게임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시스템 G를 가정용 게임기로 만들려면 2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LSI가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쿠타라기는 무어의 법칙이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1994~1995년 정도에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런 쿠타라기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으로 닌텐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며 쿠타라기는 게임 사업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관여한 2인치 플로피 디스크 시스템을 납품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슈퍼 패미컴에 PCM 사운드 시스템을 공급하는데 성공했다. 1987년 양사간에 2박 3일 동안 합숙을 하며 쿠타라기는 여러 제안을 했고 차세대기에는 CD-ROM을 사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989년 슈퍼 패미컴 개발이 막바지일 때 다시 한 번 제안했지만 내키지 않았던 닌텐도는 대신 소니에게 '슈퍼 패미컴의 외장형 CD-ROM 드라이브'와 소니만의 자체적인 일체형 머신을 만들 수 있게 해 줬다. 그래도 마루야마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게임기 사업이 아닌 '외장형 CD-ROM 드라이브'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1991년 5월, 사장이 되기 전 홍보이사였던 이데이 노부유키와 교토로 향하던 쿠타라기는 닌텐도와의 제휴가 깨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우 찾아간 닌텐도에서는 아라카와 미노루(荒川實)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사장[8]이 둘을 맞아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우리는 필립스와 일을 할 것 이라는 대답을 했다. 며칠 뒤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 소니 아메리카에서는 그대로 공개를 강행했지만 그 다음날 닌텐도는 필립스와의 제휴를 발표함으로서 소니에게 망신을 주어 마찬가지의 일이 되풀이되었다. 뉴욕 타임즈 기사 이미 1991년 초에 아라카와가 필립스를 오가며 협의를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왜 닌텐도와의 계약이 깨지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 계약 당시 CD-ROM에 관련된 수익 배분 문제나 플랫폼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에 두려움, 쿠타라기의 고집스런 협상 태도나 마루야마는 게임 이외의 것은 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가정용 가라오케나 독점해 볼까라고 했다고 말은 하지만 당시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중이던 소프트웨어[9]가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등의 소문이 도는 정도이다. 또한 여기에는 소니의 CD-i 사업부까지 쿠타라기의 사업을 깨기 위해 닌텐도-필립스와 내통하고 있었다. 그래도 관계자들은 대체로 소니가 순수한 피해자라고 말하는 데에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아무튼 그 때까지 만든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개발 비용과 생산 준비에 들인 비용 15억엔 정도를 날렸다.

이 취소로 이데이 노부유키는 마루야마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거냐며 크게 화를 냈고, 후에 이데이가 CEO로 취임할 때는 매우 긴장했다고 할 정도로 쿠타라기의 자리를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이후로 이런 쿠타라기 켄을 사내의 다른 간부들에게서 보호하며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그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도쿄 미나토구 아오야마에 있었던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EPIC 레코드 저팬 뉴 미디어 사업부로 출향시켰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에 대해 당시에 이미 쿠타라기에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사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쿠타라기를 총애했고, 그리고 나머지 사원들은 쿠타라기가 일 벌리면 수습하고 사과하는 노예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쿠타라기 켄이 정보처리연구소에 근무했던 시절 소니의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부카 마사루 사장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후반기까지 닌텐도와의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지지부진했고 쿠타라기는 사업보고서에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며 게임기 사업으로의 진출이라는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6월 24일에 게임기의 사업의 진퇴를 결정할 소니 그룹 최고 경영 회의에 나타난 쿠타라기 켄은 "우리는 이대로 물러나도 좋습니까? 소니는 평생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10]라고 발언했고,[11] 임원들은 '소니가 져도 되는 상대는 분하지만 마쓰시타뿐', '교토의 화투집에 지면 어쩔려고 그러냐', '천하의 소니가 장난감을 만드냐' 등등 게임 사업에 잔뼈가 굵은 닌텐도에 비해 문외한인 소니는 경쟁이 안 된다며 반대를 했지만 "닌텐도에게 먹칠을 당했는데 다물고 있을 겁니까?"[12]라고 했고 오가 노리오 사장은 "그렇게까지 말하거든 독자노선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증명해 봐라. DO IT!"[13]이라며 승인했다는 설이 있다.[14]

파일:external/nintendoeverything.com/snes-cd.jpg

2015년 7월, 닌텐도와 협약 시절의 프로토타입을 미국의 한 유저가 발굴했다고 해 화제가 되었다. 친구가 선물로 준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친구의 아버지가 닌텐도에서 근무했었다고 한다. # 해당 기기는 약 200대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플레이스테이션의 아이덴티티라 볼 수 있는 세모(△), 동그라미(○), 가위표(×), 네모(□) 대신에 슈퍼 패미컴과 같은 색깔 버튼이 있고, 버튼 이름도 슈퍼 패미컴과 동일하게 A, B, X, Y로 되어 있다.

2016년 7월에 이 기기의 구조 및 사양이 밝혀졌다. 참고 본체에 별도로 추가한 CPU나 램 등의 칩은 없고, 대신에 함께 유출된 롬 카트리지에 CD 구동 펌웨어가 들어있는 롬과 CD-ROM에서 게임을 로드하기 위한 확장 메모리 2 Mbit(256 KB), 게임 저장용 RAM 64 Kbit(8 KB), 그리고 게임 저장 데이터 보존용 전지를 내장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이곳을 참고하자.

2.2. 자체 프로젝트 개시

미국 소니는 이전부터 메가 CD용 게임들을 퍼블리싱하면서 세가와 인연을 맺어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미국의 올라프 올라프슨 주축으로 미국 세가와 함께 차세대 게임기를 공동 설계하려고 했다. 소니와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 하드웨어 시스템 사양과 하드웨어 판매 손실 분담, 수익 분배에 대하는 온건한 계약 조건[15][16]을 제안했고, 칼린스키 사장은 이를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사회에 공동 사업을 제안했지만 세가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과 이사회에서 "멍청한 생각이군, 소니는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만들 줄 모르는데, 이걸 왜 해야 하나?"[17] 라며 제안을 거절했다.#[18] 일본에서도 소니가 닌텐도와의 파담 직후 마이클 슐호프 미국 소니 사장이 자체 사업보다는 세가와 파트너십을 맺으면 어떤가 하는 제안을 했고, 실제 쿠타라기와 세가의 사토 히데키 등이 팀을 이루어 기술 검토를 했지만 3D 게임기와 2D 게임기의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그 무렵 EA를 퇴사해 3DO 컴퍼니를 설립한 트립 호킨스도 차세대 게임기 3DO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쿠타라기 켄은 견학을 갔는데, 3DO는 미리 렌더링된 3D 그래픽이나 동영상을 사용하는 2D 게임기였다. 쿠타라기는 왜 3D를 실시간으로 그리지 않는지 묻자 호킨스는 '몇 십만 달러 하는 워크스테이션에서조차 어려운 것을, 가정용 게임기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했고 쿠타라기는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웃으며 돌아왔다고 한다.#

그 뒤 쿠타라기는 임원 회의 때에 백 수십억 엔짜리 계약서를 들고 와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1993년 봄에 LSI 로직스와 CPU를 만들기 위해 투자한 돈이 140억 엔. 아까의 손해액과는 앞자리부터가 다르다. 그렇게 칩을 백만 대분 주문했고, 팔리지 않으면 정말 끝장이었다. 현장에서는 비명을 질렀고, '목표 100만 대'라는 당시 광고 구호가 단순히 구호로서만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2.2.1. 서드 파티 모집

업계에서도 비관적 태도로 주시했다. 실제로 소니에서는 서드 파티를 모으고자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게임 기업 등 관련 기업들을 돌았지만 C언어로 3D 게임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황당해 하거나,[19] 게임기 사업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듣거나 복수의 기업체들로부터는 300만 대를 팔면 그때 다시 오라는 등 냉대를 받았다.[20]

그나마 비슷한 시기 남코는 에반스 & 서덜랜드 TR3(Texture Mapping Real-Time Real-Visual Rendering System) 3D 그래픽 시스템이 들어간 시스템 22의 비싼 가격으로는 세가와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이를 해결할 저가형 3D 기판의 개발과 닌텐도와의 다툼으로 자체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데 플레이스테이션의 탁월한 가성비에 놀라 이를 기반으로 아케이드 기판인 시스템 11을 만들고 철권, 철권 2, 소울 엣지 등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인 우군으로 참여했다. 당시 SCE의 이사회 회장인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에 '대부분의 대기업이 300만 대 보급 전망이 있다면 개발을 검토하겠다고 주저하는 가운데 남코만이 개발비를 회수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일을 줬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1993년 8월, 31회 오락기기 박람회[21]에서 버추어 파이터가 공개되면서 이런 게임 회사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이전까지 '우리 업계에서 3D는 안 된다'며 냉정했던 개발자들은 버추어 파이터에서 3D의 가능성을 보고 박람회 관람을 마치는 길에 바로 소니로 찾아올 정도였고 데모를 보여주자 정말 이런 게 가능하냐며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훗날 SCE 초대 사장인 토쿠나카 테루히사는 이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은 세가 버추어 파이터의 성공 덕분임을 언론과 서적을 통해 회고했다.

1993년 10월 28일, 소니는 소니 본사 대강당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를 열었다. 이 시연회에 모인 개발자들은 대체로 대기업은 아닌 회사 쪽 사람들로 이루어졌지만 많은 수가 참석했고,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의 프로토타입 4대를 설치해 3D 데모를 시연했는데, 아래 링크되어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의 3D 그래픽이였다. 역동적인 3D 그래픽이 실시간 렌더링으로, 그것도 워크스테이션이 아니라 고작 가정용 게임기에서 매끄럽게 구동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했다. 회장이 조용해서 시연회가 실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했다. 쿠타라기 켄의 말로는 프로토타입 기기 말고도 워크스테이션이 따로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오기도 했다고 한다.

[22]


티라노사우루스 데모 행사의 대성공, 150만 엔이라는 저렴한 개발 장비 가격, 세가 새턴이 부실한 라이브러리 지원으로 원성을 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로그래머의 개발 부담을 덜기 위한 꾸준한 라이브러리 지원 등을 통해 SCE는 1994년 여름까지 플레이스테이션에 게임을 내놓기로 계약한 서드파티 게임 회사를 200곳 넘게 확보했다. 기기를 다루는 데 제약이 생길까봐 라이브러리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일류 개발자들도 있었지만 릿지 레이서를 빠르게 이식할 수 있었던 것도 라이브러리 덕분이며 꾸준한 업데이트로 최종적으로는 1800여 개에 달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외에도 SCE는 전신인 음반 회사 소니 뮤직의 발상으로 게임 개발자를 크리에이터, 아티스트로 대우하며 게임 야로제!(ゲームやろうぜ!)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XI(sai)와 도코데모 잇쇼 같은 게임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되었다. 이 때까지 대부분의 게임 제작사는 개발자의 이직을 막기 위해 크레딧에 실명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SCE는 적극적으로 게임 개발자들을 인터뷰에 내보내고 이름을 알리게 한다. 마루야마는 적극적으로 개발자 발굴에 나섰으며 코지마 히데오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우리를 예술가로 만들어줬다'라고 할 정도로 새로운 개발자, 개발사들을 적극 발굴한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 때 만난 게임 개발자들에게 '너희들 여자에게 인기 없지? 내가 음악 업계 출신이라 잘 아는데 코무로 테츠야는 인기가 많다. 너희들도 이걸 잘하면 코무로처럼 될 수 있다'며 다독였다. 이외에도 소니 뮤직 자체에서도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이라는 인재 발굴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또한 개발 지식을 갖춘 일반인들도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넷 야로제!(ネットやろうぜ!)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일정 심사를 거쳐 회원이 되면 간이 플레이스테이션 개발기와 소프트웨어를 12만 엔(소비세 별도)에 구입할 수 있었다. 개발 입문의 문턱을 이렇게까지 낮춘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다만 전용 개발기와는 달리 시리얼 통신만으로 프로그램을 전송해야 했기에 속도가 느렸고 관련 문서나 인터넷 서비스도 빈약해서 프로의 환경에 비해 게임을 개발하기엔 대체로 무리였다는 소감이 있다. 넷 야로제판 LightWave 3D를 번들로 제공했다.

이렇듯 개발 입문 허들을 낮추고 개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보니 PS1 시절 게임 중에는 중소 규모의 게임 회사들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밀어붙이는 실험적인 괴작 게임들이 많았던 편이다. 특히 일본 한정 발매 게임 중에 이런 괴작들이 많아 훗날 재발굴되어 레트로 게임 매니아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OutSide Directors CompanyLSD: Dream Emulator, 일본 내에서는 3대 괴작 게임을 꼽을때 반드시 꼽히는 쿠론즈 게이트바로크 시리즈[23], 러브델릭계라는 신조어까지 창조한 moon: Remix RPG Adventure, 에닉스 바카게로 유명한 스즈키 폭발, 세가레 이지리가 대표적.

2.3. 출시 이후

플레이스테이션은 발매 약 3주 전 겨우 완성되어 양산하기 시작했다. 최초 생산 계획 물량은 30만 대로 잡았다. 쿠타라기 켄은 발매 당일 그 어떤 언론에서도 취재하러 오지도 않았고, 이후 언젠가는 교토의 헤이안 신궁 도서관에서 1994년 12월 3일 신문축쇄판을 보았는데 어느 곳에도 플레이스테이션에 발매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이나 게임 업계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100% 실패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구입했고, 쿠타라기와 사에키는 아침부터 아키하바라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오가 되기 전에 매진이 되어 초회물량 10만 대를 하루에 다 팔았다. 다음날 신문에도 대서특필이 되었고 그 때까지 소니가 게임기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곳에서마저 주문이 쏟아졌으며 소니 안에서도 게임기 사업을 반대하던 이사의 부인이 오가 노리오에게 한 대만 구해달라며 부탁을 하는 등 세간의 평가는 180도로 변했다.

그래도 소니는 업계의 신참이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은 여전했다.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저런 게 50만 대 이상 팔리면 물구나무 서서 걸어간다' 같은 말을 했고[24] 실제로도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출시부터 이듬해인 1995년까지는 게임계에서 별 것 아닌 존재였다. 심지어는 1995년 2월 4일부터 3월 23일까지 약 46일 동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그 어떠한 게임도 발매하지 않은 적도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95년 봄에만 해도 PC-FX의 재림이라는 악평도 들었다. 최초로 100만 대, 200만 대 판매를 달성한 것도 세가 새턴이다.

1995년 7월 1만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 인하를 했고, 1995년 9월 9일 북미 시장에서 출시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96년 2월 스퀘어의 플레이스테이션 이적 선언이라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스퀘어에서는 파이널 판타지 7을 3D 게임으로 제작을 결정했으나[25] 닌텐도는 롬 카트리지 사용을 고수했고 결국 이적을 결정한다.[26] SCE는 출자를 통한 파이널 판타지 7 닌텐도 투자금 변제 및 스퀘어의 라이선스 비용 최혜 대우, 일본 내 스퀘어 독자 유통망을 통한 게임 판매를 인정하면서,[27] 스퀘어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이로 인해 그간 닌텐도의 눈치만 보던 다른 개발사들도 플레이스테이션에 참여하며 스퀘어는 탈 닌텐도의 상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스퀘어측 인원들이 수차례 닌텐도를 시대에 뒤쳐진 기업으로 취급하면서 닌텐도의 원한을 산다.[28]

1996년 6월 또 한 번의 본체 가격 인하와 더불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들의 잇달은 성공으로 1996년 발매된 닌텐도 64의 위협도 아무렇지 않게 물리쳤다. 닌텐도 64는 플레이스테이션보다 하드웨어 성능이 좋지만 개발이 까다로우며 롬 카트리지의 고집과 서드파티간의 불화 등으로 게임 가뭄에 시달리며 거치기 시장의 판도를 뒤집지 못했다. 플레이스테이션에서는 전년도의 3배 이상인 415개의 소프트웨어가 발매되었고 아케이드 이식작인 철권 2 이외에도 바이오하자드, 파라파 더 래퍼, 아크 더 래드 2 같은 오리지널 게임들이 크게 성공하며 승기를 굳히게 된다.

1997년 초 파이널 판타지 7의 발매와 더불어 또 한 번의 충격발표가 이어지는데 에닉스가 1996년 500만대 이상 보급된 연말 시장의 결과를 근거로 드래곤 퀘스트 7의 발매를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할 것을 발표했던 것이었다. 이로서 소니는 차세대기 전쟁에서 승리를 결정짓게 된다. E3 1997에서 세가에서는 컨퍼런스에서 새턴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는 발언으로 패배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보통 게임기 신제품의 발매 주기는 5년 안팎이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은 엄청나게 장수해 하위 호환할 수 있는 후속 게임기가 나온 이후에도 염가판 기기인 PS one을 발매하며 2002년까지도 소프트웨어가 200여종 이상 활발하게 발매되었으며 2004년 다이너마이트 사커와 블랙 매트릭스 더블오 2종을 마지막으로 소프트웨어 발매가 중단된다. 1999년에 세계 7천만대, 2004년 1억대 판매를 달성한 뒤 2006년 PS one을 비롯한 모든 PS1 기종의 생산이 종료되었다. 2014년 3월 31일을 기해 애프터 서비스 접수를 종료한다.[29]

2.3.1. 광고


플레이스테이션의 홍보는 소니의 캠코더 제품, 핸디캠을 성공시켰던 사에키 마사시(佐伯雅司)가 SCE 마케팅 총괄 부장이 되어 담당했다. 그는 온갖 창의적인 캠페인과 독특한 광고를 물량 공세로 소비자들의 이목을 유도했다. 로고와 함께 나오는 독특한 효과음에 발매일 12월 3일을 읊는 '1, 2, 3'과 '가자 100만대!' 같은 것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30] 그냥 광고만 하는 것이 아닌 '서비스 만점' 광고 시리즈처럼 기기의 변경점을 유효하게 홍보하기도 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인상적인 광고들은 나중에 DVD에 담겨 배포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세가 새턴과의 치열한 경쟁 구도를 차세대 게임기 전쟁이라 불렀는데 사실 이 단어는 사에키 마사시가 기자들을 만날 때 마다 흘려댄 말로 언론이 대결 구도를 좋아하는 것을 노린 계책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언론에서 알아서 광고를 해 준다며 좋아했고, 러닝메이트같았던 세가가 없었다면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음악계의 큰 손이기도 한 마루야마 시게오의 수완도 빛을 발했다. 쿠타라기 하드웨어를 담당했다면 마루야마쪽은 소프트웨어를 맡았는데, 일찌기 패미컴의 가능성을 보고 CBS소니 시절부터 몇 개의 패미컴 게임을 퍼블리싱 한 적이 있기도 하다. 마루야마는 친한 음악가들에게 플레이스테이션을 무료로 선물하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을 시도했고 그것은 음악가들이 플레이스테이션에 빠져 음악 방송 등지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이야기를 꺼내며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다. 고작 300대를 뿌린 것으로 어마어마한 효과를 본 것이다. 소니는 전자 제품을 홍보할 때 보통은 일본의 광고 대행 대기업 덴츠를 통해 홍보하는 전략을 택하는데, 마루야마 시게오가 SCE로 영입해온 사람들은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이었고,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는 연예인의 방송 출연이 음반 판매 주요 마케팅 전략이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 홍보에도 비슷한 방식을 취한 것이었다. 덕분에 마케팅에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을뿐더러 소니 홍보팀에서 뒤늦게 이 사연을 듣고 기겁해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2.3.2. 가격 경쟁

1994년 11월 22일, 세가에서는 세가 새턴을 49,800엔에 출시했고, 출시 6개월간 5,000엔 인하 프로모션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SCE에서는 12월 3일에 플레이스테이션을 39,800엔에 출시했다. 우려와 달리 플레이스테이션은 초기 흥행에 성공했으나 슬슬 약빨이 떨어지고 있었고 100만대를 팔았다고 떠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만큼 팔지 못했다.

여기서 소니는 앞서 미국에서 299달러로 발매하는 것에 힌트를 얻어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가격인하를 단행한다. 멀쩡하게 팔리고 있는 제품의 가격인하를 하는 것은 오가 노리오 회장을 비롯한 가전 회사로서의 소니 직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쿠타라기를 만류했다. 쿠타라기는 컴퓨터 제품의 가격인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득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결국 기능을 뺀다는 명분 하에 안건을 통과시킨다. 이렇게 발매된 것이 S-VHS단자가 생략된 SCPH-3000 모델이다.

북미에서도 1995년 E3에서 세가는 $399의 가격으로 즉시 발매를 발표했는데, SCE 측에서는 올라프 올라프슨이 25분 남짓 발표하다가 당시 SCEA의 사장이었던 스티브 레이스가 등장해 '299' 딱 한 마디만 얘기하고 내려가는 장면이 유명하다.#[31]

닌텐도 특히 야마우치는 4만 엔이 넘는 게임기 같은건 사업성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쿠타라기는 미래를 내다보고 추후 계속해서 가격이 떨어질 부분과 나중에 삭제해도 상관 없는 부분 등 절묘한 설계를 한 덕분에 계속해서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와도 관계없는 부품 이외의 핵심 부품들은 전부 자가제였기 때문에 가격 인하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새턴은 이런 설계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수록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으며 그 피해는 막심했다. 실제로 닌텐도 64가 출시될 무렵, 햇수로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닌텐도 64보다 가격이 더 저렴한 199달러/19,800엔으로 인하되었다.

원래 플레이스테이션보다 가격이 비쌌던 세가 새턴은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인하 압박에 눈물을 삼키며 따라서 가격을 인하해야하는 처지였다. 1996년이 되자 새턴은 후기형 화이트 모델을 내놓으며 선제적으로 2만엔으로 가격을 인하했고, 여유로운 소니는 6월이 되자 5000번 모델을 내놓으며 가격을 19,800엔으로 인하한다. 새턴의 직접적 가격 인하는 더이상 없었으나 플레이스테이션은 매 해 말 새로운 모델을 내놓으며 가격을 계속해서 인하해 PS one 시대에 가서는 99달러/9,800엔으로 가격을 내렸다. 이렇게까지 가격을 인하하고도 계속해서 팔렸기 때문에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나 세가는 버틸 수 없었고 이미 철수한지 오래였다.

2.3.3. 게임 유통

소니는 게임업계의 초심자였기 때문에 업계 관행을 잘 모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본체 공급협상 당시 리베이트나 대량 주문 할인을 해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작 가전업계 관행에 따라 본체의 마진율을 25%로 잡는 실수를 했는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설정한 마진율에 따르면 소매점의 입장에서는 대당 1만엔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을 팔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이것이 초반보급에 큰 기여를 했다.

닌텐도가 이전까지 주도하던 게임 유통관행은 문제점이 많았다. 자세한 것은 닌텐도/비판 문서를 참고하자. SCE는 서드 파티를 포섭하면서 여러 불만들을 들었고 SCE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사토 아키라(佐藤明)는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도입했다. 당시 SCE 소속 아크 더 래드 시리즈의 프로듀서였던 아카가와 료지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요소로 이 게임 유통 혁명을 꼽고 있다. 이런 소니의 유통 혁명 때문에 닌텐도의 초심회는 1997년에 해산했다.

이러한 문제점의 원흉은 대부분 롬 카트리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SCE가 플레이스테이션에 CD-ROM을 채용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게임 회사들은 CD-ROM 채용에 의문을 표시했지만 쿠타라기는 이미지를 읽어들여 재생하는 것이 아닌 3D로 생성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서드파티를 끌어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라이선스 비용 정책을 제시했다. 닌텐도의 라이선스 비용 체계는 훌륭했고 소니는 게임 기본 가격을 5800엔으로 하기 위해 비슷한 체계에 요율을 인하했다. 슈퍼 패미컴 게임 가격 1만 엔 안에는 보통 도매상과 소매상용 이득이 4000엔 정도가 포함되었지만 소니는 제조비용이나 라이센스 비용도 훨씬 저렴한데다가 직접 도매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가격을 5800엔에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롬 카트리지는 비싸며 생산 소요 시간(리드 타임)이 2개월은 걸렸고 최소 수천개 단위로 주문해야 했으나 소니의 CD-ROM 생산은 비용이 매우 저렴할 뿐만 아니라 생산 소요 시간도 매우 짧아 소량 주문도 받을 수 있는 닌텐도에는 없는 강점이 있었다. 게임이 너무 잘 팔려도 품절 이후 긴 생산 소요 시간으로 인한 기회 손실까지 걱정해야만 했던 닌텐도 시절과 달리 소니는 매주 목요일, 일주일 단위로 수요를 점검해 빠르게 찍어서 공급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개발 회사와 퍼블리싱 회사들은 기존 관행에서 발생되었던 문제들에게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다. 소니는 CD-ROM 규격을 정한 회사이면서 음반 회사였던 덕에 CD-ROM 생산 공장과 유통 체계가 있어 다른 회사들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초기 출하 20만 장의 바이오하자드가 스테디 셀러로 100만 장을 달성하며 증명된다.

생산 소요 시간이 짧기 때문에 게임이 품절되더라도 일주일만 기다리면 게임을 구입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게임 자체의 가격도 저렴한 덕에 중고시장으로 몰리는 것을 어느정도 막을 수 있었고 일정 시간이 지난 게임의 경우 염가판으로 재발매를 했는데 보통 2,800엔 정도의 절반 수준의 가격으로 나와서 철 지난 게임을 박리다매 전략으로 떨이해도 손해를 훨씬 덜 수 있었고 게임 자체의 수명 연장에도 기여했다. 또한 재고를 파기할 경우 200엔 정도만을 제외한 나머지 비용을 되돌려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게임 회사들도 자유롭게 디스크 수를 늘리거나 체험판 디스크를 넣을 수 있었고 가격을 낮추면 그에따른 비용도 같이 내려줬기 때문에 게임 하나의 가격이 1500엔밖에 하지 않는 SIMPLE 시리즈 같은 초 염가 게임도 등장할 수 있었다. '코에이 프라이스'의 코에이 조차도 코에이 기본 시리즈라는 1,500엔 부터 시작하는 염가 시리즈를 내놓을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CD와 플레이스테이션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독점 효과도 있었겠지만 수명이 끝나면 신작 공급이 뚝 떨어지는 다른 게임기와 달리 차세대기인 플레이스테이션 2가 나온 뒤에도 2002년까지 매 해 200여종이 넘는 소프트웨어[32]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구조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신 소니는 게임이 너무 많이 풀리면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지기 때문에 게임 생산량을 강하게 통제했다. 아예 모든 게임 생산량을 SCE가 결정하는 대신 생산된 물량은 SCE가 책임지고 전부 사들이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소니는 이를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영세 업체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스스로 유통할 수 있는 대기업들은 이를 불필요하게 여겼다. 소니는 거부하는 회사들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코나미는 18개월의 기한 조건을 걸어 승낙했다. 이 제도의 파기를 위해 남코에 연대를 요청했지만 남코는 소니 편을 들었다고 한다. 코나미는 마지못해 수락했지만 직접 조사해보니 그 빠른 반복 생산이라는 것도 생각 외로 잘 돌아가지 않아서 클레임을 넣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시스템만 믿고 초동 생산량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바람에 에너미 제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코나미에게 유통권을 즉시 돌려주지 않고 버티기도 하다가(당사자는 제때 반환했다고 주장) 결국 소니는 1997년 여름 이 제도를 없앴다.

소니가 자신하던 빠른 반복 생산으로 인한 수급 조절도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소니 역시 자사가 퍼블리싱하는 그저 그런 게임을 마케팅만으로 팔아보려고 대량으로 찍다가 시장에 중고가 넘치는 경우도 있었다. 캡콤도 바이오하자드 2를 많이 찍었다가 다소 가격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또한 소매점들은 플레이스테이션 유통 혁명의 수혜자가 아니었다. 매장 내 진열 방식 같은 것을 깐깐하게 관리했고, 본래 물건 인수 한 달 후 결제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소니는 납품 1주일 전에 받아갔다. 소니 영업 사원들 중에는 거만한 사람들이 많아 상대하기도 힘들었는데 반품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긴 해도 뒤로는 받아준다고 해놓고 정작 반품을 하려면 태도가 변하거나, 반액만 받아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고도 한다.

SCE는 이윤을 계산해 게임의 기본 가격을 5800엔으로 정한 것이었고, 게임이 음악 CD처럼 정가로 팔리길 원했기 때문에 소매점의 할인 판매나 중고 판매를 금지했다. 때문에 이를 어기거나 밉보이면 배송 중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게임 공급을 제한하며 소매점을 괴롭혔다. 할인 판매와 중고 판매를 금지한 것은 위법 문제가 되어 SCE는 일본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아 1998년 1월 20일 독점금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로 말미암아 배제 권고 명령이 떨어졌다. SCE는 해당 혐의를 부인했지만 2001년 8월 1일에 공정거래위원회 심결에서 사실이 인정됐고, 그해 11월 20일에 결국 SCE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배제 권고를 따랐다. 중고 판매 문제 역시 재판까지 가서 패배했다.

중고 판매 문제에서 승리한 소매점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중고 사업에 뛰어든 거대 양판점이었다. 이 시기부터 게임 소매점들은 도태되기 시작했다. 소니 역시 할인 판매를 염두에 둔 가격으로 가격을 다시 설정해 게임의 기본 가격은 6800엔 수준으로 오르게 된다.

3. 한국에서의 플레이스테이션

한국에서는 카마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1997년 3월에 정식 출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SCE의 정식 라이선스를 받진 못했지만 해외 유통상을 통해 수입해 판매했다. 출시 전 2월 12일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2월 20일에 수입 및 판매하게 될 거라고 보도된 것으로 봐서는[33] 예정보다 늦게 출시된 듯 하다.

프리볼트라는 특징이 있었지만, 이미 1995년 여름부터 밀수가 성행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얻지 못 했다. 놀랍게도 카마에서 기본적으로 불법 복제 해킹 칩이었던 모드칩을 달아 팔았다.

4. 하드웨어

파일:PlayStation 1 로고.svgVS 파일:세가 새턴 일본판 로고.svg
PS와 SS의 멀티플랫폼 게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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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먼저 내다보고 3D 기능에 집중했고 이 예상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특히 실제로도 우수한 엔지니어였던 쿠타라기 켄이 진두지휘하며 칩부터 시작해 기계를 스스로 설계한 덕분에 플레이스테이션은 뛰어난 성능, 균형적인 사양, 괜찮은 가격 등의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1998년 이후에는 위에 있는 영상들처럼 아예 기기의 한계마저 갈 정도의 뛰어난 비주얼을 자랑하는 3D 게임들이 연달아 발매되었다.

4.1. 사양

4.2. 모델

맨 끝자리의 숫자는 국가 번호이다.[46] 즉 SCPH-1000은 일본에서 나온 SCPH-100x라는 의미.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플레이스테이션 모델 가이드(아카이브), 기판 목록 참고.

4.3. CPU

CPU에 코프로세서(COP2)로 행렬(벡터) 연산을 빠르게 수행해 3D 데이터를 생성하는 지오메트리 연산 전용 칩인 GTE(Geometry Transformation Engine)를 내장했다. 3D변환과 안개, 광원, 색상 처리등을 계산한다. GTE는 쿠타라기가 영감을 얻었던 시스템G의 개발진들이 설계했으며 매우 단순한 연산을 반복하는 장치였지만 매우 혁신적인 아이디어 였다. 성능으로는 초당 최대 150만 삼각형 폴리곤을 연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플레이스테이션의 능력은 초당 백만 폴리곤'이라고 믿게 되었으나, 실제 표시 능력은 플랫 쉐이딩을 걸면 36만, 텍스처 맵핑을 하면 18만, 거기에 광원과 고러드 쉐이딩까지 추가하면 9만으로 계속 떨어지며 그것도 어디까지나 '최대' 수치이다.[47]

또한 CPU 내부에 Motion JPEG와 H.261 비디오 디코더 기능을 수행하는 MDEC(Playstation Motion Decoder)를 탑재했다. 단순 동영상 재생 이외에도 그래픽 데이터의 압축 해제와 VRAM으로의 전송을 수행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사양은 320×240의 해상도에 초당 30 프레임으로 재생할 수 있는데 이는 동영상 기능을 내세운 PC-FX와 같은 수준이다. 640×240의 해상도에 초당 15 프레임으로 재생할 수도 있지만, 2배속 CD-ROM 드라이브의 읽기 속도(300KB/s)와 MDEC의 성능, 동영상 제작 비용 문제 등으로 인해 320×224의 해상도에 초당 15프레임의 동영상을 담는 것이 보통이었다. 퀘이크 2 같이 16:9 비율의 영상을 담아 해상도가 320×192에 초당 30 프레임인 경우도 있었다.

4.4. GPU

GPU는 도시바가 만들었다. 도시바는 1988년 Gouraud Shading Processor, GSP라는 3D 렌더링 칩을 개발하고 사업을 벌렸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개발 소식을 듣고 쿠타라기를 찾아가 채용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지오메트리 처리는 GTE가 담당하기 때문에 모든 연산을 다 처리하는 현대의 GPU[48] 개념과는 다른 3D 그래픽 카드 쪽에 가깝지만, 정식 명칭도 SONY GPU(made by toshiba)이며 GPU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이쪽이다. #

카탈로그 상으로는 최대 24비트 트루 컬러(16,777,216색)까지 출력 가능하지만 성능 확보를 위해 주로 15비트(RGB555, 32,768색) 텍스처로 렌더링했다. 이 경우 컬러 밴딩 현상이 생길 수 있는데 이를 디더링(Dithering) 필터로 보완했다. S-video 이상의 선명한 화질의 단자로 연결할 경우 디더링 무늬가 잘 보이지만, 플레이스테이션 시절에 주로 쓰였던 컴포지트 영상 단자 이하로 연결하는 경우 무늬는 사라지고 계조 표현이 깔끔해진다.[49]

프레임버퍼는 1024 x 512 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한 번에 출력되는 화상과 그만큼을 제외한 남은 공간에 각종 이미지 객체들을 올려놓고 그때그때 합성하여 출력하는 유연한 방식으로 되어있다. 화면 해상도는 256×224에서 최대 640×480까지 지원하는데 담을 수 있는 이미지는 결국 비디오 메모리의 용량만큼 한정되어 있기에 주로 256×224나 320×224의 해상도를 썼다.

플레이스테이션의 텍스처 매핑은 세가 새턴의 정방향 텍스처 매핑(Forward Texture Mapping)[50]과 달리 현대의 산업 표준인 역방향 텍스처 매핑(Inverse Texture Mapping)[51]을 지원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폴리곤과 텍스처가 떨리고(wobble) 휘어지거나(warp) 깜빡이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의 텍스처 워핑 문제는 텍스처를 매핑한 물체가 이동, 회전, 변형 되는 과정에서 원근(Z축)에 따라 보간(Perspective Correction)이 아닌 선형(linear)적으로 보간 처리한 아핀 텍스처 매핑(Affine Texture Mapping)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이런 문제는 '플스에는 부동소수점 연산장치가 없기 때문에' 라고 흔히 알려져 있었는데 그보다는 보간 처리에 깊이 버퍼(Z-buffer)와 전용 하드웨어, 충분한 비디오 메모리 용량과 대역폭이 필요했는데, 쿠타라기는 1994년 게임기에 넣기에 복잡하고 비싼 기술이라 판단하고 과감하게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3D 그래픽 기술 자체가 과도기였고 최초의 가정용 3D 게임기를 그 가격에 내놓으려면 필요한 선택이었고 나중에 나온 닌텐도 64가 무리하게 고급 기술을 넣었다가 기기의 밸런스를 무너뜨린 것을 생각해보면 옳은 결정이라고 보여진다.

깊이 버퍼가 없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의 3D 그래픽 파이프라인에서 주로 사용한 가시성 판단(Visible Surface Detection) 방식은 화가 알고리즘(Painter's Algorithm)[52] 같은 Z-Sort(order) 방식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유사 3D 머신이라 불리우는 세가 새턴, 3DO 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2020년이 지난 현재 레트로 3D 게임을 표현하는데 있어 플레이스테이션의 이러한 특징을 재현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것이다.

텍스처 및 광원을 포함해 선, 삼각형(폴리곤), 사각형 등을 픽셀로 렌더링하는 기능만 있는 단순한 구조이다. 2D 그래픽 역시 텍스처를 입힌 사각형을 렌더링하는 방식. 그 외에 이미 렌더링 되어있는 픽셀 위에 픽셀을 덧씌울 때 기존 픽셀의 색과 덧씌울 색의 값을 더하거나 빼거나 평균을 낸 결과를 렌더링하는 - 즉 반투명 렌더링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런 특유의 반투명 기능은 GPU를 자체 설계하던 플레이스테이션 2 시기까지의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그래픽의 큰 특장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스프라이트 머신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세대식 스프라이트 성능 표기를 공식적으로 '8×8 픽셀의 스프라이트를 (초당 60 프레임, 고러드 쉐이딩은 불가) 1프레임 당 4000개 표시'로 하고 있다.이를 픽셀 필레이트로 환산하면 약 15.36MPixel/s가 된다.

4.5. RAM

VRAM은 비디오 메모리의 준말이 아닌 1980년대 중반에 IBM에서 개발한 DRAM 규격들의 하나인 Dual-ported DRAM을 가리킨다. 1001, 1002번대 후기 생산 버전과 3500번대 이후부터는 더 빠른 83MHz, 100MHz SGRAM(Synchronized Graphics DRAM)을 장착했다.

메인 메모리는 EDO RAM을 채용했다. 메모리 채용에는 여러 고민을 했다는데 삼성에 왔다가 당분간은 EDO RAM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진대제의 조언을 듣고 EDO RAM을 채용했다는 설이 있다. 용량은 개발기에 8MB를 넣어놓고 시제기에는 얼마를 결정할지 저울질을 했는데 1MB로 하려고까지 했다가 개발자들이 말려서 2MB로 결정되었다고 한다.[53]
.
메모리 용량이 작고 확장도 불가능한 관계로[54] 메모리의 한계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CD-ROM의 로딩 시간도 있다 보니 슈퍼 패미컴 게임도 그대로 이식하지 못하고 읽어들이는 시간만 길어졌으며, 메모리 용량 문제 때문에 프레임이 마구 삭제된 캡콤이나 SNK의 인기 2D 아케이드 게임들은 플레이스테이션 이식판이 매우 낮은 평가를 받았다.[55] 메모리 확장이 가능한 새턴은 이러한 문제가 다소 보완이 되었기에 '2D는 새턴이 강하다'는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3D에 있었고 어떻게든 문제점을 극복한 개성 가득한 게임들이 많이 나왔고, 문제가 되는 아케이드 게임들도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3, KOF 98처럼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시도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56] 록맨 X4도 새턴판 대비 몇몇 그래픽 효과가 사라졌지만 반투명 효과는 좀더 풍부하게 활용하는 뛰어난 품질로 만들어졌으며[57] 리얼 바웃 아랑전설 스페셜은 메모리 한계상 라인 이동제와 벽스턴을 삭제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를 메꾸기 위해 리얼 바웃 아랑전설 스페셜 도미네이티드 마인드라는 제목으로 출시해 스토리까지 새롭게 만들었고, 오프닝과 엔딩까지 선라이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고, 게다가 비교적 빠른 로딩에 프레임 삭제도 많이 줄이는 개념 이식을 선보여 오히려 새턴판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도 많았다. 랑그릿사 4도 새턴판에 비해 기기의 한계로 해상도와 사운드는 열화되었지만 게임성은 후속작 랑그릿사 5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들어 오히려 플레이스테이션판이 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4.6. SPU

SPU는 PCM과 ADPCM을 지원하며 MIDI 시퀀서 역할도 할 수 있다. 최대 24채널의 소리를 낼 수 있었고, ADPCM의 경우 그린 북 레벨 B 오디오 규격을 지원해 37.8kHz, 그외의 경우 44.1kHz 샘플 주파수의 16비트 스테레오 사운드를 지원했다. 음악은 다양한 방식을 지원했는데, ADPCM 가상 악기 샘플과 악보 데이터로 MIDI 음악을 반주하는 MIDI 시퀀서 방식과 전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디지털 오디오를 ADPCM 등의 손실 압축 코덱으로 압축해 재생하는 방식, 데이터와 CD 디지털 오디오가 공존하는 혼합 모드 방식이 있었으나, 주로 MIDI 시퀀서 방식을 더 선호했다. 그 당시 음질 대비 필요 성능과 용량 면에서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운드 효과로 피치 모듈레이션, ADSR 엔벨로프 생성, 잔향 효과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반복 재생도 지원했다.

플레이스테이션 기동음은 SPU의 24 채널을 모두 사용해서 연주하는 것이다.# 펌웨어 안에 3종류 ADPCM 가상 악기 샘플이 있으며 기동음은 이 샘플들의 재생 속도를 조절 및 믹싱한 가상 악보로 반주해 재생한 것이다.# 제작자는 후지사와 타카후미(藤澤孝史)이다. 그는 사운드 칩, 펌웨어, 개발 도구 팀의 일원으로서 펌웨어 개발 도중, 기동 음악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만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인터뷰를 참고하자. 그는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2의 기동음 콘테스트에도 참여했으며, 플레이스테이션 3에서는 직책이 관리자였기 때문에 그의 부하 직원들이 제작했다.

4.7. 메모리 카드

게임 데이터의 저장을 위해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한 외장 메모리 카드를 기본으로 도입했다. 이때까지 게임기에서는 롬 카트리지의 배터리 백업이나 일부 CD-ROM 게임기의 본체 내장 메모리 또는 외부 저장 장치 등 게임 저장 장치가 중구난방 이었으나 플레이스테이션은 이를 플래시 메모리 카드 한 종류로만 정리하고 컨트롤러 포트마다 메모리 카드 슬롯을 배정해 데이터의 소유권을 유저 개개인에게 돌려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용량은 128 KB(1 Mbit)이고 가격은 1800엔으로 본체에 적게나마 저장용 메모리가 내장된 새턴과 달리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개 이상 별도로 구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블럭 단위로 게임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1 블럭의 용량은 8 KB 총 15개의 블럭(120 KB)을 게임 저장용으로(나머지는 관리용으로 예약된 용량) 쓸 수 있었다. 게임 데이터 하나에 1블럭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떤 게임들은 그 이상의 공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란 투리스모 2 같은 게임은 무려 최소 4개에서 15개를 필요로 했다. 때문에 데이터를 보관하고자 하면 메모리 카드 구매 비용도 계속 들어갔다.

또한 읽고 쓰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단점으로 인해 이상한 던전 같은 게임에서는 "강제 저장"이라는 전통이 무너져 종래의 게임 다지인을 살릴 수 없게 되기도 했다.

4.8. 게임 컨트롤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SX-Original-Controller.jpg 파일:external/78a1d47705030f69b72d46d8ea6bb2560dd0f6e7474bf3a1cd14e6a9a8aa685f.jpg
초대 패드 듀얼쇼크
패드 디자인 결정에 있어서 제품 디자이너인 고토 테이유(後藤禎祐)는 현재 모두가 알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패드의 그립형 디자인을 내놓았다. 쿠타라기를 비롯한 사업부에서 기존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며 종래의 평면형 패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가용 비행기와 헬리콥터 등으로 오가 노리오 사장이 컨트롤 스틱에 일가견이 있었던 걸 알았던 고토는 오가 사장에게 컨트롤 스틱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컨트롤러 형상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를 납득한 오가 사장이 고토의 디자인을 채택하면서 그립형 디자인이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의 표준 디자인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58] 고토 테이유는 플레이스테이션 3까지의 디자인에도 참여했으며, 바이오 노트북의 네이밍과 상표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초기에는 단순히 십자 버튼만 있는 패드가 기본이었으나, 닌텐도에서 닌텐도 64용 아날로그 스틱과 진동팩 등을 내놓고 크게 호평을 받자 이걸 따라해 아날로그 패드를 내놓았고, 1997년 이후 기능을 개선해서 듀얼쇼크를 내놓았다. 아날로그의 조작감은 떨어져도 양 손에 서로 다른 진동을 전해주는 듀얼쇼크 자체는 그야말로 쇼크 그 자체였다.

4.9. CD-ROM

카트리지와 CD-ROM의 채용을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CD-ROM을 기본 매체로 선정했다. 카트리지 채용을 고민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병렬 포트이다. 최대 용량은 650~700MB.[59] 물론 이전에도 CD-ROM 게임기는 있었으나 향상된 게임기 성능과 직영 CD 프레스 공장이나 유통망 같은 소니 그룹의 자산을 이용해 게임의 가격을 닌텐도의 절반 정도인 5800엔까지 끌어내릴 수 있었고 이후에는 PC와 A/V등에도 CD가 보급에 성공하면서 매체 가격도 훨씬 더 낮아졌는데. 이 점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세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파일:1fbdf14f-s.jpg
전면은 프린팅, 후면은 검은색
플레이스테이션 CD-ROM은 검은색이다. 오가 노리오는 쿠타라기에게 캐디형 CD-ROM[60]채용을 주문했으나 비용 등의 이유로 반대했고 오가는 마지못해 색이라도 검은색으로 할 것을 요구해 받아들였다. 색이 변한 것으로 성능상 특별하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그저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CD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플레이스테이션 CD는 정품과 짝퉁을 구분하기 쉬운데, 이는 대부분의 복제 CD들은 은색면의 일반 CD로 구웠기 때문. 하지만 대만 등에서 블랙 CD가 나오면서 이런 복제 CD들은 매뉴얼, CD 인쇄[61] 같은 감별 수단으로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 황혼기나 플레이스테이션 2 때 재출시된 게임이라면 디스크 후면이 검은색이 아닌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파이널 판타지 7 인터내셔널을 꼽을 수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CD-ROM를 음악 CD 플레이어에 넣으면 플레이어는 물론 스피커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관계로 1번 트랙에는 음악 트랙으로 경고 메시지[62] 같은 걸 넣었는데, 몇몇 작품 같은 경우는 이 점을 노려서 꽤나 재미있는 경고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역습의 샤아 PS판을 음악 CD 플레이어에 넣으면 아무로와 샤아가 투닥거릴 때 나나이가 말리다가 카미유가 나와서 제타 건담 마지막의 명대사를 날리고 종료한다.(참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출시된 CD 플레이어들은 CD-ROM을 감지해 차단하거나 무음만 재생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지만, 1990년대 이후에 출시된 CD 플레이어라도 그 이전 CD 플레이어의 재고 부품을 처리하며 생산했거나, 저가형 부품을 써서 감지 기능 없이 출시된 제품도 있으므로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다.

CD는 보통의 CD 케이스 이외에도 시디 두 장 혹은 그 이상이나 두꺼운 매뉴얼도 담을 수 있는 CD 케이스 두 개를 겹친듯한 특수 사양 케이스가 있었다. 유럽판은 일본/북미와 다르게 대체적으로 두껍게 만들어진 CD 케이스에 담았다. 이 외에도 북미판 한정으로 몇몇 특수한 게임들은 긴 박스 형태의 직사각형 박스 케이스에 담았다.[63]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2부터는 자체 킵 케이스에 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게임의 용량이 증가했고 CD-ROM으로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SCE의 해법은 CD-ROM의 수를 늘려 여러 장의 CD-ROM에 담아두기 시작했고, 실제로 PlayStation 게임 중에서 CD-ROM 2~4장이 되는 게임들이 있다.[64] 도키메키 메모리얼 2 같이 CD-ROM 5장이나 되는 게임도 있었다.

4.10. 기타

플레이스테이션 컬러 밴딩 현상

5. 출시한 게임

6. 주변 기기

6.1. 포켓스테이션

5세대 콘솔 게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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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cketstation.jpg

ポケットステーション / PocketStation

플레이스테이션용 주변기기로 드림캐스트용 비주얼 메모리가 먼저 나왔다보니 모양새가 좀 안좋지만[67] 그보다는 96년 대히트했던 다마고치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98년 12월 23일 발매 예정이었으나 미뤄져서 1999년 1월 23일에 출시했다.

스스로를 초소형PDA니 휴대용 게임기니 하며 우겼지만 자체적으로 게임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보니 실질적으로는 플레이스테이션용 메모리카드에 기능을 좀 더한 주변기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포켓스테이션은 발매 직후 빠르게 팔려나갔다. 가격도 일반 메모리 카드의 1.5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큰 부담도 없었고 대응 게임인 파판8이 발매 직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나온데다가 제법 많은 게임들이 포켓스테이션에 대응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7월에 발매한 도코데모 잇쇼가 대박을 치며 기기와 소프트 동시에 품절사태가 일어났고 7월, 10월에 100만, 200만개 출하를 달성한다. 2002년 7월 19일 생산종료를 선언할 때 까지 포켓스테이션은 무려 490만개의 누적출하량을 기록한다. 도코데모 잇쇼가 100만장 정도 팔렸으니 기기 자체의 매력만으로 팔린 셈.

이렇게나 팔렸지만 포켓스테이션은 컬러 바리에이션도 적고, 서양 발매분까지 끌어다가 일본에 팔다보니 해외 발매도 하지 못했으며 후속제품도 나오지 않았다.
사양
CPU ARM7T 32비트 CPU
메모리 2 KB SRAM
스토리지 128 KB 플래시 메모리
디스플레이 32×32 단색 LCD
사운드 10비트 PCM
통신 적외선 양방향 통신
스위치 5개의 입력 버튼과 1개의 리셋 버튼
배터리 CR2032 리튬 버튼 배터리(3 V, 225 mAh)
규격 64㎜×42㎜×13.5㎜, 30 g

6.1.1. 지원 게임

일본어 위키백과를 참조.

7. 배리에이션

7.1. PS one

파일:PS one 로고.svg
파일:800px-PSone-Console-Set-NoLCD.jpg
파일:attachment/psone.jpg

GSTAR 2011에 전시한 PS one. 왼쪽에 살짝 보이는 게임은 철권.

2000년 7월 7일에 출시된 염가 모델. 2006년 3월 23일에 전 플레이스테이션 모델을 생산 중단할 때까지 일본에 491만 대, 북미에 1270만 대, 유럽에 1126만 대, 전세계 합계 2815만 대를 팔았다. 한국에서도 2002년 2월 22일SCEK를 통해 PlayStation 2와 동시 출시되었는데, 당시에 이미 PS2의 시대이기도 했거니와, PS2로 PS1 게임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에 주목 받지는 못했다.

당시 이미 발매된 PlayStation 2에서 PS1의 하위호환을 제공하다보니 PSone은 원칩으로 만들어 진 것 아닌가 하는 유저들의 추측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정도까지는 아니었고 9000번대와 구성의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리비전을 변경하며 GPU와 APU의 칩 안에 메모리를 내장하면서 계속 설계를 개선했다. 크기를 줄이려다보니 직렬 포트도 제거하고 리셋 버튼도 전원 버튼에 통합되어 PS one을 리셋하기 위해서는 전원 버튼을 껐다 켜야 한다. 또한 내장 전원부를 제거하고 어댑터로 변경했다. 가격도 초기 15,000엔에서 이듬해 9월 9,980엔으로 파격 인하하였고 이후 오픈 프라이스로 변경한다.

머리맡, 테이블, 차 안이나 여행 갈때도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본체 부착형 LCD 스크린과 차량용 시거잭 전원 장치도 별도로 내놓았다. LCD 모니터는 5인치로 작지만 내부에서 RGB로 연결되는 고성능 제품으로 가격은 발매 당시 14,800엔이었는데 이듬해 5월 오픈 프라이스화 하며 가격을 인하했다. 본체와의 콤보 제품 18,000엔으로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7.2. 개발 기기

개발자용 기종으로 연구소나 개발사급에만 판매한[68] 디버깅스테이션이 있으며, 이쪽은 코드 프리에다가 동시에 4개의 메모리카드를 사용할 수 있고 8 MB 메모리를 사용한다는 이점이 있다. 기체가 푸른색을 띠고 있어 일명 블루 플레이스테이션이라고 불렸다. 이 디버깅스테이션으로 개발한 게임은 완벽한 개별의 게임으로써 구동할 수 있다.#


또한 개발자 양성을 위해 한 때 넷 야로제 프로젝트를 진행, 무광 검은색인 넷 야로제 플레이스테이션을 SCE를 통해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서류를 구비해서 국가별 SCE에 제출하면 심사 후 구매할 수 있었으며 본체뿐만 아니라 개발에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등까지 별도로 구매해야 했기 때문에 가격에 자비가 없었다. 디버깅스테이션과 비교해봤을 때 넷 야로제의 차이점은 일반 가정용과 동일한 2MB 메모리를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액세스 카드로 메모리 카드 슬롯을 하나 사용하기 때문에 개발 환경에서는 메모리 카드를 1개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또한 넷 야로제로 개발한 게임은 반드시 부트 CD와 병행해야만 구동할 수 있다.

90년대 일본에서는 일부 게임 개발자 양성 전문학교에서 넷 야로제로 게임 개발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69]. 다만 PS2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개발킷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PC 위주로 넘어갔다.

컴링크 카드와 액션 리플레이를 이용하면 일반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게임을 개발할 수 있긴 했지만, 당연히 디버깅스테이션이나 넷 야로제에 비하면 많은 제약이 따랐다. 현재 디버깅스테이션은 유니크급, 넷 야로제는 레어급 아이템.
파일:external/lorezan.free.fr/dtlh1000+pad.jpg 파일:external/strefapsx.pl/net_yaroze_00.jpg
디버깅스테이션 넷 야로제

7.3. 아케이드 호환기

상술했듯이 SCE는 남코에게 플레이스테이션 시스템 라이선스를 내주었는데, SCE는 플레이스테이션과의 상호 이식 용이성을, 남코는 작고 저렴한 3D 아케이드 게임기를 위해 시스템 1X 시리즈 같은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과 게임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주요 아케이드 게임을 내놓는 캡콤, 코나미, 타이토 같은 회사들도 SCE와 계약을 맺어 플레이스테이션 기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을 개발하고 3D 게임을 내놓았는데, 대표적으로 캡콤 ZN-1,2 기판[70], 코나미 시스템 573 시리즈와 TWINKLE, 타이토 FX-1 시리즈와 G-NET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과 게임을 내놓았다. 이들은 90년대 중후반 (3D)게임에 사용되었으며, 세대교체에 따라 자사기판개발을 포기하고 나오미로 옮겨간 캡콤, 독자기판PS2 호환기판을 개발한 코나미, 타이토 울프 시스템을 거쳐 타이토 Type X로 이행한 타이토 등의 행보로 알 수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기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이라고 해도 사운드 시스템은 게임 회사와 기판에 따라 고유의 시스템으로 다르게 구성[71]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CPU를 오버클럭한 경우도 있고[72] RAM을 더 많은 용량으로 구성하는 경우[73]도 있다.

PS1 아케이드 호환기판은 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번째는 소니로부터 칩만 받아 기판을 생산하는 케이스로, 남코와 코나미가 이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소니의 ZN-1, ZN-2 기판에 롬과 사운드 시스템을 탑재한 별도의 기판을 올리는 케이스로, 남코와 코나미를 제외한 대부분 기업이 이 방식을 사용한다. 참고로 후자의 경우에는 메인보드와 롬 보드에 보안 코드가 들어있는 CAT702칩을 사용해 짝을 맞추지 못하면 같은 ZN-1/2라도 롬 보드 교체로 게임을 바꿀 수 없다. 국내에서는 일부 반복사[74] 기판[75]에서 보안코드를 깨고 게임을 구동시킨 예시가 있다.

이러한 SCE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 지원은 몇 년 더 이어졌는데, 플레이스테이션 2 시절에는 남코의 SYSTEM 2X6 시리즈 기판과 코나미의 파이썬 시리즈 기판에, 플레이스테이션 3 시절에는 남코의 SYSTEM 357 시리즈 기판으로 이어지다가 현재는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들을 전부 x86 PC 기반으로 이전하면서 명맥이 끊어졌다.

7.4. 복각판: PlayStation Classic

PlayStation의 복각형 게임기. 자세한 내용은 PlayStation Classic 문서 참조.

8. 기타

Mankind went to the moon
I don't even know where Grimsby is
Forget progress by proxy
Land on your own moon
It's no longer about what they can achieve, out there on your behalf
But what we can experience
Up here and of our own time
And it's called mental wealth
인간의 노력이 나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말해 줄게.
난 문제적 인간이었던적 없는데, 너는 어때?

인류는 달에 착륙했지만,
난 그림스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84]
남들이 대신 이뤄주는 진보따윈 잊어 버리고,
너만의 달로 착륙하러 떠나 봐.
이제는 남들이 뭘 이뤄낼수 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여기에서[85] 우리 스스로의 시간에서 경험할수 있느냐야
그리고 그걸 바로 정신적 풍요라고 하지.
이 내용을 대충 요약하면, 스스로가 못하는 걸 남들이 대신 이뤄주거나 스스로가 뒤쳐지는 걸 신경 쓰지 말고 게임이나 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즐겨 보라는 뜻.

8.1. 불법 복제 칩

불법 복제를 막으려는 소니의 노력도 있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약 1995년 여름경부터 불법 복제 시장이 있었다. 이 시장이 활성화된 계기로 1996년 3월 발매한 철권 2에 용팔이들이 폭리를 취하면서 생긴 반발로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게임기 가격 인하로 인한 보급의 활성화와 철권 2와 바이오하자드 등 인기 게임의 증가로 인한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초기 플레이스테이션 1000번 모델은 별도의 불법 복제 칩 없이도 불법 복제 CD를 돌리려면 '볼펜 스프링'이니 '황금축'이니 하는 것을 기기 사이에 끼우고 CD 인식시간의 허점 사이를 노리는 스왑 스타일의 복돌 꼼수가 성행했다. 그러나 모델을 개량하면서 그 방법이 막혀 플레이스테이션에 불법 복제 CD를 돌릴 수 있도록 정품 인식을 우회하는 불법 복제 칩 (모드 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불법 복제 칩에 대해 소니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1998년 경에 불법 복제 보호 기능을 만들어 유럽 쪽부터 먼저 적용했다. 후일 LibCrypt라 알려진 코드는 본체에 모드 칩이 장착되었는지 판별해 작동을 멈추는데, 이 때문에 정품으로라도 쓰기 위해 스위치를 달아 복사 칩을 끄기도 했다. 일본쪽에서는 I.Q.Final Test와 포포로크로이스 이야기 시리즈의 파생작 포포로그가 있는데 겨우 1주일도 안 지나서 용팔이 불법 복제업자가 뚫었다고 한다. 이듬해 나온 파이널 판타지 8은 조금 오래 버티긴 했는데, 액션 리플레이로도 보호 장치를 깰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코드를 제거한 불법 복제 CD가 나왔다. 단, 이렇게 수정한 게임은 정품과의 게임 데이터 구성이 다소 다르기도 했다. 이후 사일런트 힐, 사가 프론티어 2, DanceDanceRevolution 초창기 PS판, 비트매니아 고타믹스(혹은 그 이후의 5건반 비트매니아 CS판) 같은 작품들이 이 기능을 달고 나왔지만 파이널 판타지 8에서 한 번 깨진 이후로는 그런게 있었던 줄도 몰랐던 것처럼 평범하게 불법 복제품을 유통했다. 결국 2000년도 초반에 mm (Multi-Mode) 3칩의 등장으로 이 이야기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파일:external/www.superufo.com/ps-x-change.gif

아예 소프트웨어 방식으로 동작하는 PS-X Change 2도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불법 복제 칩에 밀려 알려지진 않았다. Gameshark도 동일한 기능을 지원하며 액션 리플레이는 정품 디스크를 삽입하고 CD-ROM 메뉴를 선택해 셀렉트 버튼을 눌러 CD 플레이어를 실행해 ODD를 멈추게 한 다음 수입, 서민 CD를 삽입해 플레이어에서 나가서 Game Start를 선택하면 된다.

최근엔 전용 모드 칩을 설치해 병렬 포트에 SD 카드 리더를 장착하면 사용할 수 있는 PSIO가 나왔다. 병렬 포트가 없는 모델은 구멍을 뚫어 병렬 포트를 기판에 납땜해야만 장착할 수 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위 PS-X Change와 유사한 방식을 이용하는 Tonyhax도 있다. 이름의 유래는 토니 호크의 프로 스케이터.

9. 참고 문헌


[1] 1996년 5월 16일 → 1997년 3월 3일 → 1998년 8월 30일 → 1999년 8월 23일 → 2002년 5월 15일에 인하했다. 2000년 9월 19일 PS one을 $99에 출시하기도 했다.[2] 세금제외가격. 1995년 7월 21일 → 1996년 3월 28일 → 1996년 6월 22일 → 1996년 11월 15일 → 1997년 11월 13일 → 1998년 12월 1일 → 1999년 5월 28일. 2000년 7월 7일 PS one을 ¥15,000에 출시하기도 했다.→ 2001년 9월 12일 ¥9,800 → 2002년 5월 16일 오픈프라이스[3] 소니에서는 프레스테라는 약칭을 버린다는 뜻의 '[ruby(捨, ruby=す)]て'라는 단어가 들어있어, 이렇게 해석하면 놀고 버린다가 되었기 때문에 싫어했고, '프레스테라고 부르지 마!'라는 광고도 한 적 있다.[4] 개발 코드명인 PS-X에서 딴 것. 같은 이름의 PlayStation 2 기반 비디오 레코더 PSX가 따로 있는데, 이는 일본에만 발매했다.[5] 이 인터뷰는 마루야마가 쿠타라기를 깎아내린 것이 아니다. 어차피 쿠타라기가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기에 마루야마가 대신 나서서 하는 것뿐이며, 기사를 챙겨 읽고 '또 괜한 소리는 하고 그러세요~'라고 전화로 한소리 하는 게 늘 있는 일이라고 한다.[6] 참고로 세가의 게임기를 담당했던 사토 히데키와도 원만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타라기 켄과 사토 히데키는 동갑이며, 사토 히데키는 처음에 쿠타라기상이라 불렀다가 쿠타라기 켄이 자신을 편하게 켄이라 불러달라고도 말했고, 이후 쿠타라기 켄은 사토 히데키에게 히데키쨩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사토 히데키에게는 듣기 고까운 말이었지만, 세가의 게임기 사업에 대해 일찍부터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적도 있다.[7] 이 시절의 프로토타입은 플레이 띄고 스테이션이다.[8]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이면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사위이기도 했다.[9]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는 이전까지도 패미컴, 메가 CD 등에서 몇 종의 게임을 만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고, 포르테자, 침묵의 함대, 영화 후크를 기반으로 한 슈퍼 패미컴용 CD-ROM 소프트웨어 몇 개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건이 엎어지게 되면서 그대로 제작비를 날렸다.[10] 我々は本当にこのまま引き下がってもいいのですか。ソニーは一生笑いものですよ。[11] 출처: SONY의 선율(나의 이력서), 오가 노리오, 출처 2[12] 任天堂から顔に泥を塗られて、黙っておられるつもりですか。[13] そこまで言うなら独自路線でいけるかどうか証明してみろ。DO IT![14] 시대의 리더: 쿠타라기 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사장, 일본경제신문, 2009년 5월 22일#대체[15] 세가의 게임으로 얻는 수익은 세가에서, 소니의 게임으로 얻는 수익은 소니에서 전부 갖는 것으로 제안했다. 당시 비디오 게임 관련 세가의 자산이 압도적으로 우수했으므로 세가가 더 유리한 조건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16] 당시 미국 지사는 세가 새턴의 불안한 호환성과 너무 높은 게임 개발 난이도가 서드 파티를 이탈시킬 거라는 사실을 우려했다. 여기서 소니가 제시한 협업과 계약 조건은 새턴의 단점을 커버하면서도 세가는 물론 당시 닌텐도의 라이센스 독점으로 불만이 가득 쌓여 있던 다른 서드 파티들을 세가 쪽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17] "That's a stupid idea, Sony doesn't know how to make hardware. They don't know how to make software either. Why would we want to do this?"[18] 참고로 당시 세가는 미국 지사 쪽에서 실리콘 그래픽스와의 제휴로 새턴의 호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시했지만 일본 본사 쪽에서 거절해 버렸고 실리콘 그래픽스의 칩셋은 닌텐도꿀꺽해버린 비화가 있었다. 일본 본사의 삽질 2방이 세가와 게임계의 운명을 뒤바꾸는 나비 효과를 낳아버린 것.[19] 당시 C언어1990년에 국제 표준이 정립된 최신 프로그래밍 언어였고, 3D 그래픽 역시 당시 업계에선 동키콩 컨트리, 같이 3D로 눈속임한 2D 그래픽을 사용했고 일부 디자이너들이나 취미로 연습하는 걸음마 단계였다. 즉, 대기업에서도 손에 꼽을 최정예 인력으로 제작팀을 꾸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닌텐도 같은 당대 라이벌 대기업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미야모토 시게루는 후일 사장이 묻는다 인터뷰에서 닌텐도 64 개발 당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인력 시장에서의 3D 디자이너의 부재를 꼽기도 했다.[20] 저 충고도 나름 호의적인 의도로 한 말이었고, 300만 대 발언 그정도로 시장이 커지면 반드시 참여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21] Amusement Machine Show. 현재의 Japan Amusement Expo이다.[22] 이 데모에서 사용한 음악은 나중에 나온 포탈 스토리즈: 멜에서 리메이크되어 등장했다.[23] 나머지 하나인 Garage: Bad Dream Adventure은 PC/MAC으로 나왔다.[24] 정말 100만 대 팔린 이후 야마우치 사장이 물구나무 서서 걷는 건 무리였다고 들었다며 훗날 쿠타라기 켄이 말했다.[25] 스퀘어에서는 실리콘 그래픽스의 오닉스와 인디 워크스테이션을 구입해서 만든 'Final Fantasy VI: The Interactive CG Game'이라는 3D 데모 영상을 SIGGRAPH 1995에 출품한 적이 있다.[26] 롬 카트리지는 Mask ROM이 쓰였는데 가격 때문에 대용량화가 힘들어 현재까지도 거치형 게임기에서는 광 디스크를 저장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문제는 슈퍼 패미컴 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게임 회사들에서 다양한 종류의 압축 해제 확장칩들을 롬 카트리지에 내장해 발매하기도 했다. 닌텐도에서도 S-DD1이라는 압축 해제 확장칩을 개발하기도 했고, 이 칩은 대표적으로 스타 오션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에 내장했다. 용량을 키울 수는 있으나 네오지오의 카트리지처럼 슈퍼 패미컴의 본체만큼 커지고, 두꺼워지고, 비싸진다. 실제로 네오지오 게임의 경우 하나에 수만 엔 이상이었다.[27] 이것으로 SCE의 투자금을 받아 스퀘어의 편의점 유통 자회사인 디지큐브라는 기업을 1996년 2월에 설립했다. 처음에는 게임을 유통했으나 책, 굿즈, 음악 등의 유통으로 넓혀갔다. 2003년 11월 6일에 파산해 스퀘어 에닉스는 이로 인해 7억 6천만 엔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28] 몇 년이 지나서야 닌텐도와 화해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스퀘어 문서를 참고하자.[29] 90000번을 제외한 모든 PS2, PSP 1-2000번, PS3 초기 기종도 같은 시기에 애프터 서비스 접수를 종료했다.[30] 워낙에 인상 적인 광고로 남았기에 만약 12월 3일에 발매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광고의 1, 2, 3 에 맞춰 나오게 다음해 1월 23일에 발매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1] 이 때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토머스 칼린스키는 1995년 3월의 한 언론 인터뷰에서 1995년 9월 2일 토요일(Saturday → Saturnday)에 발매할 계획이라고 인터뷰를 했지만, 세가 본사에서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먼저 시장 선점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베스트바이나 월마트 같은 대형 유통점에 미리 공지도 하지 않고 발매한 병크를 저지르는 바람에 미국 소매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유는 북미 시장의 세가 게임기는 1995년까지는 제네시스(메가 드라이브)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가 새턴의 높은 개발 난이도에 따른 동시 발매작의 부족으로 시장 선점 효과도 누리지 못했다. 유럽 시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32] 파치슬로, 파티와 퍼즐류, 심플 시리즈,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100여종이 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신작들도 다수 발매되었다.[33] 기사에는 '한 중소기업'이라고 언급되었지만, 정황상 카마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임을 짐작할 수 있다.[34] 지오메트리 생성, 광원, 좌표 변환 등에 필요한 고속 행렬 연산을 수행하는 Graphics Data Creation Processor. CPU의 코프로세서로 현대의 GPU에 있는 기능이 CPU 옆에 붙어있다.[35] 플랫 쉐이딩 기준, 고러드, 텍스처, 광원 포함시 50만[36] 플랫 쉐이딩 기준. 텍스쳐 맵핑 시 180,000/s[37] 동영상을 재생하기 위한 코프로세서. 320×240 해상도로 최대 초당 30 프레임의 Motion JPEG 코덱 동영상을 처리할 수 있었다.[38] 이후 SGRAM으로 변경[39] 8x8, 4bit에서 16x16 16bit 컬러까지 초당 28만에서 4만개까지 표시 가능[40] AV, S-Video, RGBS 출력 가능[41] 일본제 1000번 모델 한정[42] 1000번대 ~ 5000번대[43] 전용 RF단자 유닛의 전원 공급을 위한 단자. RCA단자가 없어지며 같이 사라졌고 이후 AV MULTI OUT 단자용 RF유닛이 따로 발매된다.[44] ~7500번대[45] PS one을 제외한 모든 모델에 있으나, 다른 플레이스테이션과 연결하는 통신 케이블 외에는 이 포트를 쓰는 주변기기는 없다.[46] 0: 일본(NTSC-J), 1: 미국(NTSC-U), 2: 유럽(PAL), 3: 아시아(NTSC-J)[47] 초당 이라는 말도 함정으로 실제로는 동작하는 프레임률로 나누면 나오는 숫자가 실질적인 실효 성능이다.[48] PC에서 지오메트리 및 광원 처리를 CPU가 아닌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최초의 그래픽 프로세서는 플레이스테이션 출시 후 5년이 지난 1999년에 출시된 NVIDIA의 GeForce 256이다.[49] 코드를 조작해 디더링을 끌 수도 있지만 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의 경우에는 컬러 밴딩 현상이 심해진다.[50] 텍스처 텍셀마다 물체의 어느 좌표에 매핑해야할지 계산해 결정하는 방식. 인간에게는 직관적인 방식이나, 클리핑에 불리해 텍스처가 겹쳐지는 일이 많아 프레임률에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현대 3D 게임에서는 쓰지 않고 있다.[51] 물체에 매핑해야 할 좌표마다 텍스처의 어떤 텍셀이 해당하는지 계산해 결정하는 방식.[52] 알고리즘이 마치 유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물 표면의 모든 폴리곤의 깊이(Z)값을 알아내 정렬한 후, 마치 유화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먼 곳에서 가까운 곳 순서로 그림을 그리는데, 만약 그려야할 사물의 좌표에 이미 그려져 있어 겹쳐지는 경우 덧칠하듯 프레임버퍼 데이터를 갱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버퍼 방식에 비해 렌더 출력 장치가 비효율적이 된다. 또한 물체가 서로 겹쳐 있는 경우 어떤 것이 가시성이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우며 관통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점도 있었다.[53] 쿠타라기도 게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지 게임을 부분부분 불러오는식 보다는 한 번에 전체 게임을 메모리에 올려놓는 식으로 만들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54] 메인 2MB, 비디오 램 1MB. 세가 새턴은 메인 램 2MB, 비디오 램이 1.5MB인데다가 더해서 확장 램 팩으로 1~4MB를 더할 수 있다. 닌텐도 64는 사용하는 램을 하나로 통합해서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기본이 4MB였고 확장 램 팩으로 4MB를 추가할 수 있었다.[55] 캡콤의 VS. 시리즈 이식판은 플레이스테이션의 메모리로 캐릭터 네 명분의 데이터를 동시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태그 시스템을 삭제했다.[56]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3의 경우 타격 효과를 3D 효과로 대체하거나 장기에프의 앞뒤 이동 모션을 공유해서 사용하는 등 갖은 꼼수를 사용했다.[57] 새턴도 반투명 표현 기능이 있었음에도 플레이스테이션 수준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배경 처리 프로세서인 VDP2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세가 새턴 문서를 참고하자.[58]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든 사람들' 만화에서는 쿠타라기는 끝내 납득하지 못하다가 고토의 자녀들이 재밌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59] 원래 CD-ROM은 650MB 규격으로 나왔으나 이후 트랙을 좀 더 촘촘하게 배치해 기록 용량을 50 MB 더 올린 규격이 새로 나왔다. 이 두 규격은 서로 호환되므로 플레이스테이션에서도 무난하게 700MB CD를 인식할 수 있었다.[60] 초창기 CD들은 내마모성 면에서 미숙했기 때문에 플로피 디스크나 64DD의 자기 디스크처럼 카트리지 안에 넣었는데 그게 바로 캐디(Caddy) 카트리지이다.[61] 저 때는 해상도가 높은 인쇄기들은 지금보다 훨씬 비싸서 대부분의 복사업체들은 해상도가 낮은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했다.[62] 이 요소의 원조는 PC 엔진 CD이다. 한글 3.0b CD-ROM도 음악 CD 플레이어에 넣으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가 재생된다.[63] 대표적인 예로 바이오하자드.[64] 이런 게임들은 보통 양면 CD 보관법을 쓰거나, 상술했듯 특수 사양 케이스에 담아서 발매했다. 대표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메탈기어 솔리드.[65] 당연히 미인증기기일 뿐만 아니라 소리는 아예 나지 않고, 상당수의 게임을 지원하지 않는 등 거진 폐기물급 기기였다.[66] 아시아 지역 한정으로 출시했다. 비디오 CD를 재생하기 위해 MPEG1 디코더를 추가했으며, 일본 지역 코드에 프리볼트를 지원한다.[67] 본체에 장착되니까 무개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배터리 소모가 극심했다.[68] 그나마도 가격이 그 때 그 때 라이선스에 따라 요동쳤다.[69] 대표적으로 한때 코나미가 운영하던 게임 개발자 양성 전문학교인 코나미 스쿨이 넷 야로제로 수업을 했다.[70] 사실 ZN-1, ZN-2는 소니가 생산한 기판의 명칭이고, 소니 생산 기판에 자체 기판을 붙여 판매하는 개발사는 전부 ZN-1이나 ZN-2 기판을 사용한다. 단지 다른 회사들은 별도의 기판명을 사용하는데 캡콤은 사용하지 않아서일 뿐.[71] 별도의 사운드 시스템을 구성한 기판으로 구동되는 게임들은 BGM만 해당 사운드 시스템에서 재생하며, 나머지 효과음은 플레이스테이션의 기본 사운드 프로세서인 SPU로 재생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거의 유일하게 예외인 케이스가 후술하겠지만 자체적으로 칩을 받아 별도로 생산한 남코의 SYSTEM 10/11 정도.[72] 남코의 SYSTEM 12, 그리고 ZN-2 기반의 모든 기판(캡콤 ZN-2, 타이토 G-NET 등)이 이에 해당하며, CPU 클럭이 기존 플레이스테이션 CPU를 1.5배 오버클럭한 48Mhz~50Mhz로 동작한다.[73] 거의 대부분의 호환 기판이 VRAM이 기존 플레이스테이션의 2배인 2MB이다. 가끔 메인 RAM이 2배인 4MB인 케이스도 있다(대표적으로 코나미의 시스템 573).[74] 하드웨어는 제조사 정품이지만 (롬 보드와) 소프트웨어는 복사인 게임을 지칭한 업계용어[75] 타이토 FX-1B기판을 재활용한 블러디 로어 2, 캡콤 ZN-2기판에서 롬만 교체한 초강전기 키카이오[76] 타카라/탐소프트에서 만든 게임이지만 캡콤의 아케이드 기판을 썼고 아케이드판 유통 또한 캡콤이 담당했다.[77] 어뮤즈월드에서 만든 게임이지만 EZ2DJ로 사용한 기판이 아닌 캡콤의 아케이드 기판을 썼다.[78] 아리카에서 만든 게임이지만 캡콤의 아케이드 기판을 썼고 아케이드판 유통 또한 캡콤이 담당했다.[79] 스페이스 인베이더 25주년 기념작.[80] 애니팡처럼 같은 아이콘을 3개 이상 연결하면 사라지는 퍼즐 게임.[81] 간략한 미니 게임 모음집.[82] 영국(유럽) 플레이스테이션 공식 계정에 업로드된 영상.[83]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스코티시 억양이 묻어나온다. 17살 때 본 영상을 찍었다고 하며 2014년 이후 활동 내역이 없는 걸 보아 은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트위터 계정도 2016년 이후로 갱신이 없는 상태.[84] 잉글랜드 링컨셔 주에 있는 도시이다. 기묘하게도 피오나는 이후 그림스비 출신 남자랑 결혼했다고 한다.[85]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86] 밑 영상에는 우분투 CD를 삽입했다.[87] 이는 마냥 농담이 아니고 정말 해외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 1, 2의 구동음에 대해 공포심을 느꼈다는 댓글이 은근 있다. 반대로 엄청난 향수를 느끼고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들도.[88] 위 영상의 베스트 댓글 중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특정 데이터를 찾지만 실패해서, 그 데이터를 절대 찾을 수 없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는 지연을 발생시켜 PlayStation 로고가 매우 느리게 사라지고, 징글 멜로디가 느리게 재생됩니다.(단지 나의 짐작입니다. 그러나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라는 댓글이 있다. 원문: "Here's why it happens: The PS1 tries to look for specific data, but it fails to find it, so it keeps searching for that data, even though never can find that data. This causes a lot of lag, so the PlayStation logo fades in much slower, and the jingle plays much slower. (I'm just guessing, but it shouldn't be far off from correct)"[89] SNES는 이미 다른 프로젝트에 내장을 써서 어차피 빈 껍데기였고, 플레이스테이션도 껍데기가 없었기에 앵글 그라인더로 기판과 껍데기를 눈대중으로 대충 갈아서 재단한 뒤 글루건+납땜으로 마무리했다.[90] 니코니코 동화 서비스로 유명했던 도완고(전 DWANGO Japan. 당시 미국 DWANGO 본사로부터 일본 지사의 사장직을 배정받기 전까지는 '소프트웨어 재팬'의 직원이었다고 한다.)의 사장이었으며, 이후 카도카와와 합병해 KADOKAWA의 사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니코니코 동화를 비롯한 도완고의 실적이 부진하면서 2019년 2월 13일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91] 아래의 쿠타라기 켄 관련 포스트와 같은 필자가 썼으며, 내용이 상호보완적이므로 함께 보는걸 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