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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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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신해 대기근
庚戌辛亥大飢饉 | Kyŏngsin Famine
(The Great Famine of 1670 and 1671 in Korea)
<colbgcolor=#ffdada,#121212> 발생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시기 1670년(현종 11, 술년)
1671년(현종 12, 해년)
장소 조선 전역
원인 태양 활동의 저하로 인한 17세기 소빙하기 도래
국지적 이상기후의 발생
흉작으로 인한 식량난
전염병의 유행
피해 아사 및 병사자 약 100만 명 내외
한성부를 비롯한 전국 행정의 일시적 마비
가축 및 식량 작물 피해
영향 대동법의 보급 확대[1]
화폐 제도 개혁의 연기
온돌 구조의 확산에 따른 산림 파괴 가속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 가속

1. 개요2. 원인3. 전개
3.1. 경술년 (1670년)
3.1.1. 불길한 징조 (음력 정월)3.1.2. 극도의 이상기후 (2월, 윤 2~5월)3.1.3. 태풍집중호우, 그리고 전염병 (6~9월)3.1.4. 구제역의 발생과 이어지는 냉우, 폭풍우3.1.5. 대기근의 도래
3.2. 신해년(1671년)
3.2.1. 지옥도, 아귀도3.2.2. 조정 내 상황
4. 결과와 영향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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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술·신해 대기근(庚戌辛亥大飢饉) 또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11년(1670)과 12년(1671)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이다. 경술(庚戌)년에서 신해(辛亥)년의 2년에 이르렀기 때문에 앞 글자를 따서 '경신(庚辛)대기근'이라 부른다.[2]

1670년부터 2년간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와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태풍,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국 규모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해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주변 청나라와 일본도 동일한 대기근으로 큰 위기였다.

조선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여파에서 탈출하지 못한 데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국란이다 보니 이른바 예송논쟁 등 당파싸움도 쉬어갈 정도였다. 당시 조정은 세금도 낮추고 구휼미도 온 힘을 다해 배급했지만, 백성들의 떼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외척인 병조판서 김좌명과 그 후임인 서필원 등 고관대작들조차 굶주리다 병에 걸려 죽는 전대미문의 위기였다.

2. 원인

파일:CO2 mixing ratios at Law Dome.png
남극 Law Dome에서 시추된 빙하 코어에 기록된 시대별 이산화탄소 분포.
17세기에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현저히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17세기 소빙하기 가설에 따르면, 약 1600년에서 1800년대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이 1℃ 정도 떨어지는 소빙하기 기후가 나타났다(17세기 위기론). 고작 1℃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반대인 지구온난화 같은 경우에는 지구 온도가 약 0.5℃만 올라가도 심각하며, 학술적으로 빙하 시대가 온 것으로 보는 기준은 연평균 기온 2~3℃ 이상 하락이니 결코 작은 수치가 아니다. 과학적인 방재 기술이 전무하던 당시의 기후 이변은 현대인이 예측하는 것보다도 더 치명적이었다.

경신대기근과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에서 인도데칸 대기근(Deccan famine, 1630–32)이 일어나 사망자가 최소 3백만에서 많게는 7백만 명이 나왔다. 일본 에도 막부에서도 칸에이 대기근(寛永の大飢饉, 1640-43)과 엔포 대기근(延宝の大飢饉, 1674-75)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추위로 강남 감귤 농장들이 전멸했고 천진 운하의 결빙 기간이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1627년에 수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가뭄 끝에 결국 이듬해인 1628년에 관중 일대에 대기근이 터지고 말았고, 이는 대규모 농민 반란을 불러일으켜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도 마녀사냥이 중세가 아닌 특히 17세기의 근세에 극으로 달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유럽에서는 포도 수확일이 늦어졌고 평균 기온이 떨어졌으며, 알프스산맥빙하가 확산하고 운하가 자주 얼었다. 역병도 17세기에 들어 유독 유럽 전역을 괴롭혔는데, 1647년~1652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1665년~1666년 영국 런던에서, 1679년 빈에서 대역병들이 발생하는 등, 전염병이 연이어서 전 유럽을 휩쓸었다. 17세기가 끝나가는 1690년대에도 스코틀랜드 지역과 북유럽에서 전염병이 발발하였다.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제국에서는 눈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서울 지역 강수량이 가장 많았으며 그 외에도 우박, 벼락, 가뭄, 때아닌 , 태풍, 지진자연재해가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을병대기근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나타났다.

3. 전개

3.1. 경술년 (1670년)

3.1.1. 불길한 징조 (음력 정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4]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현종 11년(1670) 1월 10일 1번째 기사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밤에 화성이 방성(房星)[5]을 범하였다.
현종 11년(1670) 1월 19일 1번째 기사

불길한 징조는 새해 벽두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670년 음력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가 관측되었고, 4일에는 달무리가 관측되더니, 1달 내내 햇무리와 달무리가 매일같이 관측되었다.[6] 보통은 다음날 비가 내리거나 큰 먼지가 있다는 징조로 해석되는데, 이것이 매일 관측되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예로부터 하늘에 뭔가 다른 것이 보이면 큰일이 날 징조로 여겼기에 국왕과 신하들은 크게 놀랐고, 사헌부 장령 이관적은 "위망의 모양이고 쇠란의 징조"라고 말했다.

1670년 1월 9일유성평안도 중화 땅에 떨어졌다.[7] 1월 10일 한밤중에 서울에서 붉은 색의 유성이 관측되었다. 1월 13일에는 적색[8], 21일에는 백색 빛을 내는 유성이 관측되었다.[9] 윤 2월에는 꼬리가 18m나 되는 붉은 색의 대형 유성이 관측되었다.[10] 유성이 잦고 운석이 떨어지면 엄청난 양의 미립자, 즉 먼지가 발생해 햇무리, 달무리는 물론이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는 날이 잦아진다.[11] 해가 보이지 않으니 기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12]

1670년 1월 4일, 5일에 전라도 영암, 영광에서 보름전 대문과 창문이 흔들리는 지진이 있었다고 전라감사가 보고했다. 2월에는 경기도 교동[13]통진[14]에서, 경상도 안음[15]거창에서 지진이 발생했다.[16] 5월에는 황해도 풍천[17], 7월에 경상도 동래[18], 충청도 대흥[19]에서 지진이 발생했다.[20] 8월 21일,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때 삼남 지방(영남, 호남, 충청)에서 상당히 강력한 지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21] 12월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에서 지진이 동시 관측되었다.[22]

여기에 자연재해, 전염병, 해충들까지 겹치기 시작했다. 1670년 1월 4일 충청 감사가 전염병이 도내를 돌아 513명이 통증을 호소하고 사망자가 30명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23] 전라도에서도 598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 43명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24]

3.1.2. 극도의 이상기후 (2월, 윤 2~5월)

짧은 기간 안에 우박, 서리, 가뭄홍수, 그리고 메뚜기떼의 습격까지 받았다.

2월에 들어 전염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윤 2월 이후 본격적인 가뭄이 시작되었다. 1670년 윤 2월 26일 을 앞둔 시점에 서울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오에 크기만 한 우박이 떨어졌다.[25][26] 3월 8일에는 경상도에서도 우박이 떨어졌다.[27]

3월(양력 4~5월. 보통 모내기가 이뤄지는 시기)에도 비가 오지 않아 새 작물을 파종해야 할 계획은 접어야 할 마당이었고, 우물과 냇가도 마를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 평안도 5개 고을에선 서리가 내려 냉해가 예상되기도 했다.[28]

4월에 들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비는 내리지 않고 우박만 떨어지는 데다 밤만 되면 서리까지 겹치니[29][30] 그야말로 1년 농사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큰 비가 내렸다. 이때 크게 가물어 곡식들이 자라지 못하였는데, 팔도가 마찬가지였다. 이제 비로소 비가 내렸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농사가 마침내 큰 흉작이 되었다.
현종실록, 현종 11년(1671년) 5월 24일 1번째 기사

5월, 여전히 가뭄이 이어졌으며 우박 세례가 더욱 심해졌다. 평안도 쪽이 피해가 막심했는데, 곡식들은 모조리 죽어났으며 4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고 동물들도 많이 죽었다.[31] 5월 22~24일에 큰비가 내렸다. 하지만 1년 농사는 이미 끝난 마당이었는데 비마저 내리니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32]
정태화가 아뢰기를, "현재 만난 재난은 보통 유행하는 재난이 아닌 듯합니다.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의당 가벼운 죄수들은 모두 석방시켜야 합니다. 외방의 옥사는 간혹 10년씩 지체되기까지 합니다. 억울한 기운이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 어찌 도년의 죄수들에게만 있겠습니까."
현종실록, 현종 11년 5월 6일 2번째 기사

병충해가 이쯤부터 보고되기 시작했다. 메뚜기 떼[33]가 한번 쓸고 가면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영의정 정태화는 냉해, 가뭄에 이어 병충해까지 등장하자 현재 겪고 있는 재난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3.1.3. 태풍집중호우, 그리고 전염병 (6~9월)

전라도에 큰 비가 연일 내려 들판이 시내가 되었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6월 1일 3번째 기사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산음(山陰) 교생 정이원(鄭以元)의 집이 폭우가 올 때 산사태에 깔려, 정이원 및 자녀 손자 남녀 6명이 모두 죽었다. 휼전(恤典)[34]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 6월 8일 1번째 기사
경기에 수재가 참혹하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6월 20일 1번째 기사
경기에 큰물이 졌다. 당시 각도에 모두 큰 물난리가 났는데, 호남이 더욱 심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6월 20일 1번째 기사
충청도가 올린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장계에 대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6월 21일 3번째 기사
함경도의 수재가 매우 참혹하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7월 1일 을묘 1번째기사

6월에도 우박 세례는 지속되었다. 6월 중순부터 7월까지 전국에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났다. 예년과는 다른 차원의 장마 전선과 태풍이었다. 원래 같으면 한반도 남부만 강타했을 태풍이 그 해에는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함경도에 수재가 매우 참혹하며, 삼수(三水)[35]에 6월 5일[36]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 알만하였고, 황충(蝗虫)이 온 들판에 퍼져 각종 곡식을 빨아먹고 갑충(甲虫)으로 변해 물밑으로 들어가 끊임없이 해를 끼치며, 또 황작(黃雀) 천만 마리가 무리를 지어 들판을 덮고 먹이를 쪼아 먹어서[37] 심지어 상율(橡栗)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7월 11일 5번째 기사

함경도에선 황충 떼가 기승을 부렸다. 천만 마리가 들판을 덮고 닥치는 대로 먹는 바람에 당대의 구황작물 도토리마저 열매를 맺지 못했다. 함경도는 메밀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도토리의 부재는 실로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

7월에도 우박 세례를 포함해 서리와 눈이 내렸다. 추수를 앞둔 작물이 죄다 말라 죽었고, 함경도 쪽이 특히 피해가 심했다.
"7월 27일 강풍과 폭우가 일시에 닥쳐, 하룻밤 사이에 큰물이 갑자기 불어나 수구(水口)의 홍성(虹城)과 누각까지 아울러 무너져 바다 속으로 떠내려갔으며, 침수된 민가가 아주 많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명입니다. 밝은 대낮이 컴컴해졌고 성난 파도가 눈처럼 흩날려 소금 비가 되어 온 산과 들에 가득하였으며, 사람이 그 기운을 호흡하면 꼭 짠물을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초목은 소금에 절인 것 같고 귤·유자·소나무·대나무 등이 마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종 나무 열매는 거의 다 떨어지고 기장·조·콩 등은 줄기와 잎이 모두 말랐습니다. 농민들이 서로 모여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섬안에 인간이 앞으로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만고에 없었던 참혹한 재변입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 9월 9일 1번째 기사

게다가 영제(榮祭)[38]를 지냈음에도,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와 경상도 남해안 일대를 휩쓸었다. 제주도가 특히 피해가 엄청났는데, 해일로 말미암아 짠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 들어왔고 작물들은 소금물에 절어 말라 죽었다. 파도가 어찌나 심했는지,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를 때 바닷가에서 숨을 쉬면 짠 맛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농작물은 고사하고 풀뿌리, 나무 뿌리 어느 하나 살아있는 게 없었다.

당시 제주도의 전체 인구 4만 2700명 중에서 굶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제주목사(164대)[39] 노정(盧錠)[40]은 급한 대로 본토에 곡물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진휼곡도 얼마 안 가 바닥나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판이라고 호소한 보고에서, 제주 목사의 절박한 심정을 알 수 있다. 지원도 물길이 험해서 쉽게 오지 못하자, 노정 본인이 직접 항구까지 나와서 백성들과 함께 배를 기다리다 배가 올 때마다 구휼선인가 싶어 갔다가 아니어서 그때마다 번번이 대성통곡을 하며 돌아왔을 정도니 당시 제주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노정은 조선왕조실록에 9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무려 6회가 대기근으로 인한 상황 보고이다. 노정이 항구에 나가 배를 기다렸다는 기록 전부터 백성들이 마소까지 잡아먹는다는 기록이 나오며 그 기록 이후에는 개와 닭까지도 몽땅 잡아먹어 개 짖는 소리와 닭소리가 사라졌다는 보고까지 나올 정도. 마지막 9번째 기록에서 12월에 가자(승진) 기록으로 백성 구제에 힘썼다는 행적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 경신대기근의 참사는 제대로 제주를 강타해서 현종 11년(1670) 9월에 제주 3읍 합쳐 4만 2700여 명이었던 제주도의 인구는 현종 13년(1672) 10월에는 2만 7578명[41]으로 거의 6할로 줄었다.

3.1.4. 구제역의 발생과 이어지는 냉우, 폭풍우

구제역도 이쯤부터 창궐하기 시작했다. 황해도에서 7월 한 달에만 폐사한 소가 897마리나 되었다. 8월에는 그 수가 1만 6천 마리로 증가했다. 이후 11월에도 2350마리가 폐사하는 등, 총 2만 2165마리가 폐사했다. 한편 수도권 지역에서는 137마리가 집단 폐사했다. 사람들 또한 역병으로 인해 505명이 감염되었고 26명이 죽었다.

8월이 되면서 냉우, 즉 차가운 비까지 더해졌다. 함경도 쪽은 더욱 상황이 나빠졌는데, 냉우와 우박이 번갈아 내리며 물에 빠져 죽거나 우박에 맞아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 물에 잠기고 산삼 싹이 냉해로 말라 죽었으며 도토리까지 열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가 산삼, 도토리 채취는 물론 담비까지 사냥했다. 물론 이것은 청나라와 국경분쟁을 야기했고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했다.

8월 중순에 또다시 폭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경상도에서 익사자만 67명에 달했다.[42] 8월 하순, 폭풍우가 또다시 한반도 남부를 강타했다. 어린이가 강풍에 날아가다가 추락해 죽고[43], 수확기인 목화가 죄다 말라 죽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라도에선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내리 닷새 동안 서리가 내렸고, 8월 1일과 22일엔 냉우가 쏟아져 작물이 침수됐다. 거기에 녹새풍(錄塞風) 내지는 살곡풍(殺穀風)이라 불리는 동풍이 불어와 들이 말라 죽었다.

9월 초, 강원도가 폭풍우에 휩쓸려 물 난리가 났다. 황해도에선 우역의 피해가 지속되었고 9월 한 달 동안 8418마리가 추가적으로 죽었다. 경기도에서도 우역으로 3500마리가 죽었다.

10월 말에 폭풍우가 또 한 차례 전국을 휩쓸었는데, 경상도에선 이듬해 수확해야 할 밀과 보리 씨가 말라버렸다. 경기도에선 우역으로 1800마리가 추가적으로 죽었다.

11월, 전염병의 기세는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거세졌다.

여름에도 눈과 서리가 내릴 정도였던 이 해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거리로 나선 유민들이 얼어 죽은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유민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남의 옷을 빼앗거나, 시신의 옷을 벗겨 입었다. 이때 혹한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제주도마저 이랬으니 제주도보다 추운 본토 한반도에 불어닥친 혹한의 위력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었을 것이다.
제주에서 지난 11월 2일[44]에 큰 바람과 큰 눈이 한꺼번에 사납게 일어 쌓인 눈이 한 길[45]이나 되었다. 산에 올라가 열매를 줍던 자가 미처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길이 막혀 얼어 죽은 자가 91인이었으며... (생략)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2월 3일 4번째 기사

3.1.5. 대기근의 도래

1670년 한 해 동안 냉해, 가뭄, 수해, 풍해, 병충해 등 총체적인 자연 재해에 시달린 조선은 전국의 고을 360여 곳이 대흉작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 팔도 전역이었다. 보통 한쪽이 기근이면 한쪽은 평년 수준이거나 풍년이었는데, 이 해에는 전국 팔도가 모조리 흉작이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으며, 그해 4~5월의 냉해로 밀과 보리가 흉작일 때부터 기아자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자기가 살던 곳을 버리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670년 7월에 최초로 아사자가 보고되었고, 8월부터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주로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경상도와 전라도, 도성 수도에서도 아사자가 보고되었다. 즉 기근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사태가 심해지자 조정에선 그 동안 금지되었던 의 도축을 허용하였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사를 위해서 그동안 국가 전략 자원인 소를 도축하는 것을 막아왔지만, 이번에는 워낙 심해서 도저히 도축을 막을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농사를 대비해서 도축을 금지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장의 식량이 더 급하다는 의견이 대세여서 일시적으로 도축 금지령을 폐했다.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소고기를 먹거나 팔아서 식량을 얻기 위해 소를 무단으로 도축하는 일이 잦았고 우역으로 죽어 묻은 소를 파내서 먹는 일도 허다했다.

전염병도 전염병이지만, 갑자기 쇠고기를 섭취하여 사망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극심한 굶주림 이후에 함부로 음식을 먹을 경우 소화를 못하고 사망한다.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할 때는 쇠약해진 몸이 소화할 수 있는 묽은 같은 가벼운 음식부터 섭취하는 것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몇날며칠을 굶어서 너무 배가 고프니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런 대처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2. 신해년(1671년)

보리 수확을 기대하며 맞이한 1671년의 봄은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아사자는 더 늘어나 수천, 수만 단위로 보고되었고, 어딜 가든 굶어 죽은 시체가 길거리를 메웠다. 참고로 이건 공식 구휼소에서 죽은 사람들만 집계한 자료이기에, 구휼소 밖에서 발생한 아사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전염병 또한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유민들은 오랫동안 굶어서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사망하는 동시에 보균자가 되었다. 또한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평시에 비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졌다.

1671년 1월에 정부에서 서울에 진휼소를 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물론, 그에 따라 전염병은 빠르게 서울 경내로 퍼져나갔다. 서울의 백성과 양반들, 심지어 궁궐을 지키는 군인까지도 감염자가 발생해 임금 경호에 비상이 걸렸다. 감염되어 밖으로 추방된 궁녀 중엔 사망자도 발생했다. 1월에 임금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공주까지 마마병에 걸려 사망하니 급기야 2월 2일 임금은 왕대비, 세자와 함께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2월 4일에 대왕대비중전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전염병의 기세가 다소 꺾인 4월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궁궐 밖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진휼소에 설치된 움막에서 죽어가는 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사대부들도 감염되어 죽어갔다. 심지어 왕실 종친들도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왕실 종친은 나라의 지원과 자신의 재산으로 넉넉한 삶을 누렸기에, 질병이라면 몰라도 기아로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종친들마저 기아로 사망할 정도로 상황이 그만큼 끔찍했던 것이다.

이를 피해 서울을 떠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로 인해 행정 공백이 상당히 발생했다. 텅 빈 지방 관청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역참 또한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평소에는 한성에서 평양까지 가는 데는 하루에서 이틀이면 충분했지만, 역참이 텅 비고 파발이 부족해 5일에서 일주일이나 걸렸다. 전라 우수영에서 서울로 공문서를 가지고 오던 사람이 과천 즈음에서 병에 걸리는 바람에 쓰러졌는데, 결국 다른 사람이 교대해서 가지고 왔다. 평소에는 일주일 정도 걸렸지만, 이 때는 19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관리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임금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임금 또한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서울을 떠나게 하지 않으니 양반이 병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평민의 집을 강제로 점거하는 사태마저 발생했기에 사직서를 수리해 줬다. 당시에 영의정이던 허적의 경우에는 열네 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했다.[46]

서울 시내의 병사자와 아사자 시체도 급증했는데, 일가족이 모두 죽거나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원래대로라면 한성부의 관원들이 이를 수습해야 하지만, 인원에 비해 시신들이 너무나 많았고 하급 관원들도 기근으로 인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승려들을 동원해 시신을 수습했는데, 시신 수천 구를 도성 밖에 집단으로 매장한 일이 수차례 있었다. 이 때문에 세월이 지나 영조조에 도성을 정비하면서 한꺼번에 매장된 인골(人骨) 수천 구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지평 이상윤(李尙允)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성(東城)을 개축(改築)할 때 동문(東門)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의 거리가 1리입니다. 근래 여역(厲疫)과 두진(痘疹)으로 죽은 남녀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그 사이에다 묻었습니다. 이제 감독하는 사람이 잘 살피지 못한 탓으로 성을 개축할 즈음 수천 개의 남녀 무덤에서 발굴된 뼈를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는데, 해골과 몸뼈가 부러지고 부서져 머리와 발이 위치가 바뀌어져 그 낭자하게 전도된 꼴은 차마 볼 수가 없는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 재이(災異)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듣고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감예관(監瘞官)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라."[47]

하였다.
영조 29년(1753년) 6월 3일, 지평 이상윤이 올린 수구문 밖의 흩어져 있는 해골에 관한 상서

1670년과 1671년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 명이 보고되었고,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천 명 이상은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전라도가 가장 높았으며(1만 2500명, 54%), 경상도가 그 뒤를 이었다(4천 명, 17%).

3.2.1. 지옥도, 아귀도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 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뻐개고 고장(藁葬)을 파내어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 빌어먹는 무리들은 다 짚을 엮어 배와 등을 가리고 있으니 실오라기 같은 목숨은 남아 있지만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저기 다 그러하므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감영(監營)에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백 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는데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돌림병이 또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백 70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현종실록 현종 12년 1월 11일 1번째 기사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열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김산군(金山郡)에서는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粥所)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哭泣)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2년 4월 5일 4번째 기사
전국에선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패륜 사건들이 속속히 보고되었다. 부모가 아이를 도랑이나 강물에 던져 버리고 가는 사건과, 나무에 묶어두고 가버린 사건이 있었다.[48] 굶주린 자를 구제하기 위한 배식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쓰러져 죽었는데, 아내는 그 옆에 남은 을 모조리 긁어 먹은 후에야 곡을 했다. 어머니를 업고 다니며 구걸하던 아들이 어느 순간 어머니를 버리고 가 버렸는데,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굶주림 앞에서는 가족이고 인륜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기를,

"연산(連山)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順禮)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5살 딸과 3살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하여 얼굴이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미친 귀신 같은 꼴이었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해조(該曺)를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연산 사람이 아들과 딸을 삶아 먹은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 자애로운 성품은 천부적으로 같이 타고 나는 것인데 그가 흉측하고 완고하더라도 어찌 지각이 없겠습니까. 심한 굶주림에 부대껴서 이토록 악한 짓을 하였으니, 이것은 교화가 크게 무너진 데 말미암은 것이지만 실로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 도신(道臣)은 먼저 수령의 죄를 거론해야 할 것인데 면의 책임자들만 다스리고 말았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와 수령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이어서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구황 정책에 대한 강구를 여러모로 극진히 하고 있으나 부고(府庫)는 다 비고 관리는 지쳐서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이 마치 물고기가 위로 향하여 입을 벌리듯이 갈망하다가 장차 다 죽게 되었는데, 더구나 이제 봄 가뭄의 조짐이 이미 있어 밀보리가 점점 말라가고 있으므로 흙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지는 화(禍)가 훤히 드러나있는 때이겠습니까. 서울 안 진휼청을 설치한 곳에 다시 더 주의시키고 각도의 감사에게 글을 만들어 하유하여 진휼(盡恤)의 정사가 미진한 걱정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침에 장계를 보고 놀랍고 슬퍼서 차마 말할 수도 없었으나 말이 명백하지 않아서 상세히 알기 어렵다. 해조에 계하(啓下)하는 데에는 뜻이 있거니와, 범연히 추고(追告)하기를 청한 것은 착실하지 않은 듯하나 계사(啓辭)가 이러하니 우선 추고하라. 마지막에 경계한 뜻은 참으로 절실하므로 매우 감탄하였다.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2년 3월 21일 2번째 기사
식인 사례도 보고되었다. 충청도 깊은 산골에서 한 어머니가 5살 된 딸과 3살 된 아들이 죽었는데 그 고기를 삶아먹었다는 것(果爲烹食, 而非殺食 [49])이었다. 평소 같으면 나라 전체가 완전히 뒤집힐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으나, 이 때는 이미 워낙 흔한 일이었기에 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평할 정도였다.[50] 그 자녀의 고기를 삶아먹은 여인은 얼마 못 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1]

물론 조선 정부도 대책을 마련하는데 나섰고 진휼소를 열긴 열었으나 모자라는 곡물, 전염병 등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휼소를 억지로 운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법적으로 기한이 정해진 진휼소를 정부는 예정대로 철수한다고 통보했는데, 이에 관리들은 아사자가 더욱 늘어나리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결국 5월 15일에 진휼소를 철수했고, 관리들의 말대로 진휼소에서 주는 죽조차 못 먹은 자들이 굶어 죽는 상황이 크게 늘어났다.

3.2.2. 조정 내 상황

이런 마당에 조정은 정쟁에만 관심을 쏟았다는 인식은 그저 조선에 대한 안 좋은 인식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아직도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같은 보수 언론 중심으로 이런 인식이 여전히 확산되고 있다.

경신대기근이 한창일 당시, 조정에는 정쟁 따위에 힘을 쏟을 여력조차 없었다. 실제로 1차 예송논쟁은 기근 발생 10년 전인 59년, 2차 예송은 현종 말년인 74년에 발생했으며, 대기근 시기에는 예송과 관련한 상소문도 사라진다. 집권한 서인들은 왕실에서 조금이라도 사치로 판단될 만한 행사들을 비판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자구책을 내놓거나, 이와 관련해 척신 세력과 함께 상대 당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학자 심용환은 "쌀이 부족해도 수입하지 말자고 했던 양반 관료들의 속셈은 표면적으로는 병자호란의 원한을 기억하자는 것이었고 이면에는 자신들은 살만했기 때문이리라"라고 혹평했는데 # 경신대기근 기간에는 재상급 인사들마저 10여 명이나 사망했다. 대표적으로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첫해(1671)에 사망한 당시 병조판서 김좌명을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대동법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김육의 장남이며 그의 동생이 바로 숙종의 외할아버지 김우명이다. 즉, 현종에게는 처백부 되는 인물. 이런 정치 명문가의 인물이, 그것도 국왕의 외가쪽 친인척이 죽었을 정도면,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52]

김좌명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우의정 홍중보, 전 형조판서 조계원,[53] 함릉부원군 이해, 전 부제학 이민구, 전 호조판서 오정일, 예조판서 조복양, 예조참판 유철, 한성부좌윤 이정기, 전 영의정이자 영중추부사인 이경석, 개성유수 박장원도 이 때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경신대기근이 지나간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유림의 거두이자 양송 중 하나였던 송준길도 목숨을 잃었고 이후에도 한성부우윤 권시, 원임관찰사 정언황, 홍문관제학 정두경, 좌의정 이경억, 전직 영의정이자 영중추부사인 정태화, 우의정 이완도 목숨을 잃었다.

일반 백성보다 그나마 부유했을 지배층까지도 죽어나가는, 심용환이 비아냥거린 것과 달리 결코 양반 관료들이 살 만하지 않았던 진정한 대위기였던 것이다.[54] 지배층마저 이 지경인데 민생 수준은 어떠했겠는가? 지배층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대기근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대책을 세우려 해도 워낙 압도적인 재앙이라 딱히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兵禍)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55][56]
현종실록, 현종 12년(1671) 2월 29일 5번째 기사
1671년도 저물어가는 12월, 윤경교가 이 때까지의 사망자가 100만 명을 상회한다고 보고했다. 물론 이는 추정치고, 실제 구휼소에서 기근으로 죽었다고 판정한 인원은 8만 5천이다. 평소 조선에서 기근으로 죽는 인원이 3천 명 내외라는 걸 생각하면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근무 성적 때문에 축소 보고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므로, 작게 잡으면 20만~30만, 크게 잡으면 구휼소 사망자의 5~10배인 40만~85만 명 정도로 본다.

1669년 기준으로 조선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516만 명이나 실제 인구는 최대 1500만~1600만 내외로 추산되었다.[57] 즉, 대기근 2년 동안 인구의 절대다수가 기아를 직접적으로 체험했고 그 중에 최소한 1.5%, 많으면 5% 가까이 죽어나간 것이다. 가히 현세에 도래한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노인들이 말했다는 "임진년 병란도 이것보다 참혹하지는 않았다." 하는 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58]

1671년 여름 아사자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의 수입하자고 현종에게 건의했다. 당시 조정은 운송과 후환을 두려워해서 반대했다. 그해 말 기아를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비축미가 바닥나자, 이번에는 현종이 청나라 쌀 수입건을 다시 꺼냈다. 하지만 신하들은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반대를 했다. 명분에 집착하는 신하들에게 현종은 이곳의 사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으나 신하들은 그조차도 부정적이었다.

사실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침략당하고 수탈당하며, 비록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서로 간에 악감정이 엄청나던 상황에서, 과연 청나라를 믿고 곡식을 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강희제도 조선 사신에게 조선의 사정을 듣고는 군약신강(君弱臣強)이 문제니 왕권을 강화하라고 대놓고 비난할 정도로[59]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시각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이 말을 할 당사자인 강희제는 20대도 안 된 새파란 애송이 황제였고 경신대기근 이전에는 구왈기야 오보이의 반란을, 경신대기근 이후에는 삼번의 난에 시달릴 정도로 후대의 명성과는 달리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청나라도 이상한파가 심했고 요동이 기근에 시달렸으니, 청나라가 과연 쌀을 수출할지도 의문이었다.

이 부분을 가지고 심용환처럼 경신대기근에서도 정말 지배층마저 굶어 죽을 상황이었으면 명분이든 그보다 더한 것이든 수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조선의 지배층은 충분히 먹고 살만했다는 근거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한성 내에서도 사대부들이 기아로 고생한다는 내용이 있다. ## 또한 실록을 보면 현종 12년(1671) 8월 조선 조정은 기근으로 재정난과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청에 보내는 세폐를 감면하는 것이 어떤가 의논을 하지만 청나라가 세폐를 제대로 바치지 않을 경우 뒤에 이를 가지고 더 무거운 트집을 잡을까 우려하여 논의를 그만두는 기사가 있는데 ## 청나라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사정이 나아서 포기했다기보다는 그 동안 조선이 수집한 정보를 보아 청나라가 조선이 원하는 만큼 구휼식량을 보내줄 지가 의문스러운 데다, 받아온 후 더한 정치적 군사적 종속을 우려했기 때문에 안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60] 사실 기아가 판치는 와중인 만큼 정말로 외적이 침공하면 답이 없기에 청나라에게 기아로 고생 중이라는 점을 들켜 침공당하는 것을 우려했다면 그렇게 이해 못할 명분은 아니다.

4. 결과와 영향

한성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굶어 죽기도 합니다.[61]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2년 6월 4일, 대사헌 장선징의 상소 중에서.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년 5월 2일, 2번째 기사에 기록된 의 자책. 같은 날의 현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이리 적혀 있다.
실로 국운(國運)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평안 감사 민유중[62]이 형 민정중에게 보낸 편지(1670년 5월)

불운하게도 대기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신대기근이 끝난 지 24년 후, 갑술환국 다음 해인 1695년(숙종 21년)에 또다시 2년에 걸친 을병대기근(을해 - 병자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 때도 사망자 숫자는 기록상 경신대기근 못지않았으며 고위층 사망자가 어김없이 나왔는데 지중추부사 최관, 좌의정 박세채, 봉조하 이관징, 전 이조참판 송광열, 능평군 구일, 전 부제학 임영, 형조판서 박태상 등 7명의 재상급 인사들이 사망했다.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전라도관찰사 심권, 지중추부사 이수언, 우참찬 임상원, 판중추부사 신익상, 전 부제학 윤진, 전 형조판서 민취도 등 재상급 인사 6명이 더 숨을 거두었다. 이때는 그나마 청나라에서 쌀을 들여오자는 논의가 수용되어 쌀 3만 석[63]이 들어왔지만 기근을 막지는 못했다.[64]

그리고 1699년(숙종 25년)에 다시 대기근이 발생해[65] 1693년(숙종 19년)에 비해 인구가 141만 명이 감소했고, 전염병으로 25만 명이 추가로 사망하였다. 이 때도 전 평안도관찰사 이징명, 충청도관찰사 김성적, 전 경기도관찰사 조형기, 전 영의정 권대운, 전 형조판서 유하익 등 재상급 인사 5명이 죽었다. 그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우의정 민진장, 이조판서 민진주, 공조판서 신여철, 전 공조참판 김수증, 전 한성부판윤 이광하, 전 형조판서 윤이제, 지중추부사 이세화, 지중추부사 권열 등 재상급 인사 8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생각하면 인구의 10% 정도가 죽어나간 것인데, 이에 비견될 만한 것은 마찬가지로 생지옥 그 자체로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제사해 운동 시기의 중국 뿐이다. 문제는 대약진 운동과 제사해 운동은 인재였고 그 두 사건조차 인구의 10%까지 날아가는 대재앙은 아니었다는 점에서[66]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만하게 해준다.[67]

이러한 대기근을 겪은 후, 조선 내부에는 체제에 대한 불만 세력이 많이 생겼다. 이건 체제에 문제가 있든 없든, 당시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든 아니든 불가피한 현상으로, 숙종 때는 흔히 알려진 장길산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비기, 도참, 미륵 신앙 등이 성행했다. 이에 조선 정부도 호패법을 강화하고 오가작통제를 본격적으로 행정에 활용하면서 유민을 통제했다.

대동법 지지 여론도 상승했다. 이때까지 대동법은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호남 연해[68]에서 시행되었고 호남 내륙 일대의 시행을 논하던 시점이었다. 경신대기근 이후 대기근에서 그나마 백성들이 살아남은 건 대동법으로 부담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란 인식이 지방 사림들에게 퍼져, 대동법이 더더욱 지지를 받았다. 충청도에서 그때까지 결당 10두였던 세금을 12두로 높이는 한이 있어도 대동법을 계속 시행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상술한 김좌명은 화폐발행 지지세력의 거두였는데, 그의 죽음은 화폐발행을 늦추었다. 경술년 말에 "김좌명이 국가 지출을 줄이는 방안을 다각도로 제시했다. 돈이 천하에 통행되는데 유독 조선에서만 유통되지 않는다며 동전을 주조하자고 건의했다. 동전 주조를 주장한 의도는 상업 진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수입 확보에 있었다. 일본에서 구리가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조가 불가능하지 않았다. 임금도 허락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에 김좌명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69] 상평통보는 숙종조가 되어서야 발행되었는데, 기근으로 인한 재정 악화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7세기 말 대기근을 거치면서 발생한 다수 유민들은 비교적 미개척지였던 북방과 만주로 많이 향했다. 여기에 모피인삼[70] 등을 찾아 북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면서, 폐4군의 개발 논의가 활발해지는 한편,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는데, 본의 아니게 이것이 간도 문제를 촉발시켰다.

경신대기근이 직접 유발시겼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기근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변화를 일정 부분 가속시킨 듯하다. 예를 들어 양반의 경제력이 기근으로 감퇴하면서 농장의 해체 경향이 나타나고, 노비 제도도 이에 힘입어 해체 국면에 들어갔다. 조선의 역량이 서울로 특히 집중되는 경향 분기 현상도, 대기근 당시에 구휼 체계가 그나마 마지막까지 작동할 수 있었던 서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일어났다는 분석이 있다. 이 기근을 계기로 지방민들이 서울의 외곽 지역이었던 성저십리로 모여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추위를 견디고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자, 조선 전기까지 상당수 남아있던 2층 한옥이 2층에는 온돌 설치가 불가능한 문제 때문에 이 시기 이후로는 사라졌다. 또한 온돌이 흔해지니 나무 땔감의 수요량이 급증해 조선의 삼림 자원은 급속히 고갈되어,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민둥산이 아닌 산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71]

조선 말기에 이르면 실록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된 대량벌목 때문에 토사가 유실되니 농업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논의할 정도였다. 당시 16~17세기를 거치면서 인구 증가와 목재 수요 증가로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은 고갈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인구증가뿐 아니라 온돌이 보급되면서 이러한 형상이 심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18세기 조선에는 산림의 소유권을 둘러싼 송사인 산송(山訟)이 증가했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도 산림 보호를 위한 금산(禁山) 규제와 정부 주도로 비변사와 각 지방 군관을 동원한 대규모 나무 심기를 시행하였다. 1788년에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산림법인 송금사목을 제정했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와 나무 심기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삼림이 대부분 고갈되었다. 이후 일제 시대와 6.25 전쟁, 정부 수립 초기의 경제 발전으로 인한 급속한 개발 등으로 인해 삼림 자원이 더욱 소모되었으며, 지금처럼 삼림 자원이 어느 정도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환경 문제의 심각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불과 몇십 년 전쯤부터였다.

또한 본래 사대부 사이에서는 청빈함이 덕목이었으나, 경신대기근 당시에는 정승마저 굶거나 병에 걸려 줄줄이 죽어나간 판국이었던 탓에 사대부 사이에서 청빈함을 숭상받는 일도 사라졌다.

5. 기타



[1] 경신대기근이 끝난 1677년에는 경상도에서도 대동법이 시행되었다.[2] 경신(庚申)년에 일어난 대기근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경신(庚申)년은 10년 후 숙종 시기, 경신환국이 있었던 1680년이다. 이 대기근 자체가 경신환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일련의 대기근이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을 가속화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3] 이후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엄청나게 높아진다.[4] 알타이르.[5] 지금의 전갈자리 일부[6] 1월 3일~5일, 1월 11일, 1월 16일~17일, 1월 19일, 1월 27일, 1월 30일, 2월 5일~6일, 2월 9일, 2월 12일, 2월 14일, 2월 17일~18일, 2월 22일, 2월 26일, 2월 28일, 윤 2월 1일~3일, 윤 2월 5일, 윤 2월 14일, 17일~19일, 윤 2월 21일, 24일, 27일, 3월 8일~11일 등. 승정원일기, 실록에 자주 보인다.[7] 현종실록 현종 1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14일 8번째 기사.[8]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13일 2번째 기사.[9]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21일 2번째 기사.[10]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윤 2월 29일 14번째 기사.[11] 현종실록 현종 11년 윤2월 11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윤 2월 11일 29번째 기사.[12] 다만 이 시기의 소빙하기는 운석보다는 태양의 활동이 약해진 것이 더 영향이 크다.[13] 현종실록 현종 11년 2월 24일 1번째 기사.[14] 현종실록 현종 11년 2월 28일 4번째 기사.[15]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16] 현종실록 현종 11년 3월 6일 2번째 기사.[17] 현종실록 현종 11년 5월 12일 3번째 기사.[18] 현종실록 현종 11년 7월 16일 3번째 기사.[19]충청남도 예산군[20] 현종실록 현종 11년 7월 30일 2번째 기사.[21] 현종실록 현종 11년 9월 4일 1번째 기사, 17일 1번째 기사, 10월 3일 1번째 기사.[22] 현종실록 현종 12년 12월 12일 1번째 기사, 25일 2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 12월 25일 1번째 기사.[23]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4일 8번째 기사.[24]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15일 6번째 기사.[25] 현종실록 현종 11년 윤2월 26일 1번째 기사.[26]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15일이다. 4월 중순에 눈과 우박이 내린 셈.[27] 현종실록 현종 11년 3월 8일 3번째 기사.[28] 현종실록 현종 11년 4월 7일 2번째 기사.[29] 현종실록 현종 11년 4월 14일 3번째 기사, 4번째 기사, 19일 1번째 기사, 23일 1번째 기사, 28일 2번째 기사.[30] 현재 기준으로 치면 양력 5~6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이다[31] 현종실록 현종 11년 5월 5일 4번째 기사, 7일 2번째 기사, 16일 3번째 기사, 17일 3번째 기사, 22일 4번째 기사.[32] 1670년 음력 5월 22~24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7월 8~10일이다. 이미 모내기가 끝나고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야 할 시기인데 파종을 전혀 못했으니, 뒤늦게 비가 내려도 소용이 없다.[33] 당시엔 황충(蝗蟲)이라 불렀다. 메뚜기보다 더 질긴 것이 황충이다. 이른바 누리 떼.[34] 천재지변 등으로 생계가 곤란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하며, 장례를 지원하는 것도 포함된다.[35] 함경남도 삼수군[36] 양력 7월 21일[37] 메뚜기 떼가 기승을 부리니 그 천적인 참새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듯하다.[38] 비가 그치길 바라며 올리는 제사. 기청제(祈晴祭)라고도 부른다.[39] 1669-72 재임[40] 본관은 풍천으로 1615년 태어나 1691년 사망했다. 무과에 급제한 후 제주판관, 경상도 중영장(中營將), 경상좌수사, 전남우수사, 제주목사, 통제사, 훈련도정, 총융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 4년(1653년)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류했을 때 제주판관(1651~1653)으로써 그들을 처음 만나 조사하고 보호 관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의 비원지구대 출입문 서쪽에 노정의 공덕비가 남아 있는데, 효종 때 지방군사제도가 영장제(營將制)로 바뀌면서 경상도에는 전 · 후 · 좌 · 우 · 중 · 별영 이렇게 6곳의 영이 설치되고 이 가운데 중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그 초대(1654-1656) 중영장을 지낸 인물이 노정이었던(대구부읍지) 것에 기인한다. #[41] 남자 1만 557명에 여자 1만 7021명.[42] 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 11일 3번째 기사, 19일 2번째 기사.[43] 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 27일 1번째 기사. 일기에 따르면 아이는 9살 내외라고 한다. 9살짜리 아이가 날아가다가 추락해서 죽을 정도면 거의 토네이도와 맞먹는 위력의, 초속 수십 m/s의 거대한 강풍이 몰아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정도 바람이면 길가의 네온 사인 간판은 가볍게 떨어진다.[44] 양력 12월 13일. 제주시 기준으로 1923년 관측 이래 99년 동안 기록된 12월 평균기온이 7.8℃이고, 12월 13일 하루 평균으로는 8.0℃이다. 어딜 봐도 눈이 올것 같지 않은 평균기온을 자랑하는 제주도가, 12월 중순에 큰 눈이 내렸다는 것은...[45] 대략 2.4m~3m[46] 현종은 허적의 사직서만은 수리해 주지 않았다. 허적은 서인 견제용으로 중용했는데 허적이 가버리면 서인을 견제할 인물이 없어서 잡아뒀을 것으로 보인다.[47] 공사 감독관을 의금부로 끌고 가라는 뜻이다.[48] 그나마 어딘가에 묶어 두고 가는 정도는 양반이었다. 차마 직접 죽이지는 못할 정도의 최소한의 인간성 정도는 남아있었다는 소리니. 당시 참상을 생각하면 도저히 아이를 버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버리되 정말 운이 좋다면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살아달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49] 과위팽식, 이비살식. 과연 삶아 먹은 것은 맞지만,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라는 말. 즉, 아이들을 먹은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50] 임진왜란 시기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엄중하게 처벌했다. 징비록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라고 서술했는데, 당시에는 만력제가 쌀을 백만 석(18만 톤)이나 지원해 줬기 때문에 경신기근만큼 굶주림이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51] 자식을 삶아먹을 지경에 이른 사람인 만큼 먹을게 없었을 것이고 때문에 자식을 삶어먹어봤자 당장의 허기만 면할 뿐 결국은 또 굶주리게 되었을 것이고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다.[52] 이는 당시 지배층들의 비축한 식량의 양이 상당히 적었음을 의미하고, 근검절약이 단순히 국가정책이 아니라 당시 지배층의 일반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53] 현종 때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의 백부이기도 하다.[54] 그나마 고위층은 굶어 죽는 게 아니라 병 걸려 죽는 것이지 조선왕조실록에는 벼슬이 낮아 봉록이 낮은 자는 태반이 굶주리고 있으며 구실아치들은 거의 다 굶어 일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라는 경악스런 이야기까지 실려있다. 봉록이 낮아도 사대부는 사대부고 시대 특성상 벼슬을 할 정도면 공부를 한 사람이며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집안에 쌓아 놓은 부도 있기는 하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람들의 태반이 굶주릴 정도면 말할 것도 없다.[55] 참고로 을병대기근에도 이에 못지않게 대기근이 시작된 숙종 22년(1696) 7월에 예와 이제에 듣지 못한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이는 사관의 평이지 민간의 평이 아니기는 하나 그래도 대기근이 직격타를 맞는 일반 백성도 아닌 나름대로 벼슬도 하고 녹봉도 받는 관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죽어나가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56] 이 당시 임진년을 기억하고 있는 정도의 노인들이라면 구순이 넘은 나이이기에 나라에서도 특별히 신경쓸 정도로 장수하고 있는 인원들의 증언이다.[57] 양반의 외거 노비, 머슴으로 들어간 인구나 유랑민이 상당했기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가 실제 인구와 큰 차이를 보였다.[58] 기근 직전인 1669년 조사된 인구수는 5,164,524명인 반면 기근 직후인 1672년 조사된 인구수는 4,695,611명으로, 공식적으로는 3년 만에 323,033명 가량이 사망한 셈이다. 상술하였듯 실제 인구는 호적에 등록된 인구보다 많았으므로 실제 사망자 수 또한 32만 명보다 월등히 많았을 것이다.[59] 즉, 강희제는 이 원인을 '왕이란 자가 신하들을 통제하질 못하니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사사로이 막혀 조정이 돌아가질 않아서 이 사단이 난 것 아닌가'라고 본 것이다.[60] 병자호란 직후의 상황으로 보건대, 청나라가 구휼을 핑계로 내정간섭을 시도했을 공산이 크고, 최악의 경우 고려 시대 원 간섭기가 재림했을 수도 있었다. 한족 왕조의 사례이지만 명나라 또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이 명분이 되어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로 이어지기까지 한 바 있다.[61] 여담으로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징비록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그나마 이 때는 지나가던 명나라 군사들이 불쌍히 여겨 거두었다고 하지만...[62] 여담으로 평안 감사는 조선의 지방직에서 알짜 보직으로 유명한 직책이었다. 괜히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지'라는 속담이 나온 게 아니다. 조선시대의 소위 '꿀보직'으로 유명한 지방관직은 과천 현감, 나주 목사가 꼽혔다. 저런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이거 국운이 걸린 재앙이라 너무 걱정된다!" 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 참담함이 알만하다.[63] 정확히는 압록강 중강을 통해 1만 석은 평안 - 황해도에 무상, 2만 석은 판매를 통한 유상 지원[64] 여담으로 이 쌀을 들여오는데도 좀 곡절이 있어서 유상 지원은 쌀값을 어떻게 정할지 두고 청 사신과 흥정을 해야 했다.[65] 그래서 을병대기근은 1695년부터 1699년까지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도 숙종 23년(1697)과 24년(1698)도 기근으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여서 23년에는 식인 사건만 네 건이나 기록되어 있고 24년에 사망한 이들도 최대 11만 명으로 추정된다.[66] 오히려 높은 출산율 덕분에 인구 자체는 늘었다.[67] 다만 통계청에서 발행한 인구대사전#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가 경신대기근으로 크게 감소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신대기근의 경우 경신대기근 전인 1669년의 추정 인구는 1319만 2천명이나 경신대기근 직후인 1672년의 추정 인구는 1393만 5천명으로 오히려 증가한 수준이였다. 인구가 실제로 10%가 감소한 사건은 을병대기근으로 1694년에 1574만 8천명으로 추정된 인구가 5년에 걸쳐 감소하여 1700년에는 1435만 5천명으로 약 9% 감소하였다. 다만 이 사건도 5년에 걸쳐 일어난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급격한 인구 감소와는 거리가 있었다.[68] 경상도, 평안도는 각각 사신 문제로 논외였고 함경도는 아예 거두지 않았다.[69] 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참조.[70] 모피와 그것으로 만든 방한용 모자는 조선 후기 조선이 청나라에서부터 수입한 대표적인 물품이었다. 개간이 활발해지면서 모피를 얻을 만한 야생 동물이 줄었을 뿐더러, 소빙하기로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쯤에는 주변국의 수요 상승, 조선 내의 자연삼 고갈 등으로 조선 내에서 인삼을 찾기 힘들어졌고, 만주로 향하는 발걸음이 18세기 재배삼 시대까지 계속되었다.[71] 이런 민둥산 문제는 한국의 경우는 1950년대까지도 매우 심했다.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의 산들은 1,000m 이상인 산을 제외하고 전체가 민둥산이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산에서 관목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상황이 매우 나빴다. 일제강점기에는 산업과 군수 물자 수탈 등으로 어지간한 나무들은 죄다 베어졌고, 그나마 남았던 잔나무들조차 6.25 전쟁의 포화와 진지 구축으로 싹 다 없어졌다. 그 후로도 전후복구 사업이나 난방에 쓸 장작 용도로 마구 베었는데,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할 시대 상황상 산림보존을 신경 쓸 여력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1960년대는 와야 해결되기 시작한다. 위와 같은 문제를 직시한 박정희 정부는 1961년 12월 27일에 산림법을 제정함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산림녹화 사업을 펼쳤다. 당시 산림녹화 사업은 30년을 바라보는 장기계획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초대형 프로젝트였고, 나무를 심고 가꾸기를 권장하고자 식목일/육림의 날까지 제정했다. 하여간 30여 년에 걸친 녹화사업이 결국 성공하여 지금은 일부 돌산을 제외하곤 민둥산이 거의 없어졌다. 거기에 난방에 훨씬 편리하고 강력한 연탄이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땔감 사용이 급감했다. 참고로 북한은 남한과 달리 녹화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21세기 현재까지도 대다수 산들이 민둥산이다.[72]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 한국 역사에서 1997년 외환 위기가 아무리 임팩트가 커도 6.25 전쟁의 그것과 참상을 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73] 최빈국에서 일어나는 기근도 알고 보면 비상사태에 가까운 수준이며, 일상적으로 기근이 일어나는 나라는 전멸한 상황이다. 현재는 최빈국들도 평상시에는 두 끼나마 챙겨 먹으며 굶지는 않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자세한 것은 기근 문서 참조.[74] 실제로 한국은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 아사자가 발생하거나 나라가 위태로워졌던 많은 나라들과 달리 밥상이 좀 단조로워지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