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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Foxtail millet | |
학명 | Setaria italica (L.) P. Beauvois |
분류 | |
<colbgcolor=#d7ffce,#0f4a02> 계 | 식물계 Plantae |
분류군 | 관다발식물군(Tracheophytes) |
속씨식물군(Angiosperms) | |
외떡잎식물군(Monocots) | |
닭의장풀군(Commelinids) | |
목 | 벼목(Poales) |
과 | 볏과(Poaceae) |
속 | 강아지풀속(Setaria) |
종 | 조(S. italica)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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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역사적으로 기장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대표적인 구황작물 역할을 하던 곡물로, 기장과 조를 함께 서속(黍粟)이라고 부른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조를 여기서 유래한 '서숙'이라고 부르며, 영미권에서는 foxtail millet이라고 한다.
한민족에게 조는 오곡[1]의 일부로 분류되어 중요한 식량원이자 먹어도 질리지 않는 주요 곡식으로 간주했다.[2]
2. 특징
외떡잎식물 벼목 벼과의 한해살이풀로 원산지는 동아시아이다. 잡초인 강아지풀을 길들이며 개량한 것이라 생명력이 엄청나게 강하며, 이로 인해 열악한 환경에서 조잡한 영농기술로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있는 곡물이다.[3] 그 덕에 관개기술이 발달하여 논벼의 생산력이 월등히 높아지기 전까지 좁쌀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주식용 곡물이었다.반대로 이런 점 때문에 벼 농사를 하는 농민들 입장에서는 조가 제초제를 쳐도 죽지도 않는 잡초 취급을 받고 있으며 보이면 전부 뽑는다.
곡식으로 쓰는 종류는 크게 메조와 차조가 있다. 차조에는 노란색 품종인 황차조와 초록색 품종인 청차조가 있다. 황차조는 겉모습만 보면 기장과 구별하기 아주 어렵다.(기장 쪽이 낱알이 다소 크다.) 차조는 찰기가 있기 때문에 다른 곡류 없이 이것만 가지고도 밥을 지을 수 있어 주식으로 먹기에는 차조가 월등히 선호되었다.
조로 지은 밥을 먹는 백종원 |
반면에 메조는 밥으로 먹기엔 찰기도 없고 극도로 까칠해 목으로 넘기기도 힘들었다. 이 때문에 화전으로 밭을 일구고 살아가던 화전민들은 메조만으로 밥을 지으면 잘 넘어가라고 반드시 미끌미끌한 도토리묵이나 청포묵 등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백종원이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생활 때 먹었던 조밥을 생된장만 넣고 상추에 싸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할머니들한데는 죄송하지만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짠맛 밖에 나질 않는다"라며 너무 거칠고 껄끄러워서 당시 김정희의 입장에선 절망과 공포가 뒤따르게 했을 맛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김정희 본인조차도 "이게 사람이 먹는 밥상이냐"라며 상당히 당황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조에도 장점은 있다. 차조보다 향이 좋아 술 빚기에 좋고, 조밥을 생선과 함께 삭히는 생선 식해를 할 때는 차조보다 발효가 더 잘 되고 결과물도 좋았다고 한다.
조, 혹은 이와 비슷하게 생긴 기장을 이용해서 잡곡밥을 짓는 경우도 있다. 하도 씨알이 작아서 맛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한데다가, 오밀조밀 노랗고 작은 점이 흰 쌀밥에 끼어있는 모습으로 보이기에 콩이 들어간 것보다는 호불호를 덜 타는 편이기는 하지만, 구황작물로써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흰쌀밥을 선호하는 경우가 훨신 더 많다.
낟알은 좁쌀이라고 부르며 정말 작아서 볼펜촉 구슬과 크기가 비슷하다. 보통 조밥[4]이라고 하면 쌀밥에 좁쌀을 소량 넣은 것으로, 그냥 쌀밥에 비해 아주 약간 고소해진다. 좁쌀로만 지은 밥은 '강조밥'[5]이라고 한다.
3. 재배사
3.1. 한국
기장과 함께 가장 오래 전부터 농사지어 먹어온 곡식으로, 부산광역시 동삼동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서 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자료 중 하나이다.고구려에서는 평민들의 주식으로 사용되었던 곡식으로#,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는 예로부터 좁쌀 농사가 발달하였다. 당시는 관개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강에 접한 평야에서나 나는 쌀은 귀족들의 차지였고, 평민들은 건조한 밭에서 나는 조로 밥을 지어먹었었는데 찰기가 있는 차조로 밥을 해 먹냐 까끌까끌한 메조로 밥을 해 먹냐로 빈부의 차이를 구별하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쌀이 주곡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은 조선 중기이며, 그 이전까지는 조가 쌀을 제치고 한민족의 식생활에서 주된 탄수화물 공급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벼는 열대성 작물이라 관개농법이 정비되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의 생산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은 도량형을 정리할 때 황해도의 좁쌀을 기준으로 잡았고, 땅에 세금을 매기는 공법(貢法)을 제정할 때도 '밭에서의 조 생산량'을 기준으로 잡았다. 이 역시 조가 주식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벼 재배는 함흥평야 이남에서만 가능했으며, 함흥 이남에서도 국지적으로 벼 재배가 힘든 지역이 많았다. 그런 지역에서는 어김없이 조밥을 해 먹었다. 평야가 많고 강수량이 많아 대한민국 최고의 곡창으로 일컬어지는 전라남도 지역도 늪이 많고 관개가 잘 되지 않았기에 일제강점기의 대규모 치수정비 사업 이전까지는 쌀보다는 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오곡 생산이 많았다.
경북과 충북 영동 지역은 산간 지역이어서 쌀이 부족해 밥을 지을때 조를 쌀보다 많이 넣어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의 특산 음식으로 손꼽히는 묵조밥이 이 부류에 속하는데, 오늘날에는 조가 쌀밥보다 원가는 훨씬 비싼 주제에 사람이 먹지 못할 맛과 식감을 내는 관계로 옛날처럼 메조로만 밥을 지어서 내는 음식점은 드물어졌다. 실제로 조밥은 쌀의 비율이 더 높다한들 조의 비율이 두자리 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맛이 매우 형편없어진다. 강원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딸은 시집가기 전에 쌀 세 주먹 먹으면 많이 먹어보는 거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전국에서 쌀 자급이 가장 어려웠던 곳은 바로 제주인데, 물이 다 빠져나가는 현무암 토질 덕에 자체 쌀 생산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대부분의 쌀은 육지에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옛 제주도민들은 쌀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조밥을 해 먹었다. 그마저도 차조가 귀해 거의 거친 메조 위주였는데, 이걸 어떻게든 부드럽게 먹어 보겠다고 한 번 데친 메조를 다시 끓는 물에 넣어 삶으면서 흥건해진 물기에 메밀가루를 풀어 메밀죽에 삶은 메조가 들어가는 느낌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조는 쌀의 생산량이 증대한 이후로도 중요한 구황작물의 역할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본 제국의 계속된 인구증가와 도시화 및 공업화에 따른 농지 감소로 일본에서 쌀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조선의 쌀을 끊임없이 수탈했다. 이 때문에 조선인에게 공급되는 쌀은 부족해졌으며 그렇기에 당시 조선의 하류층의 주식은 조밥이었다. 조밥이 주식이 된 당시의 사회상은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한 소설에서도 종종 투영되는데,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조밥도 못 처먹는 년이 설렁탕은!"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전라남도식 메조밥도 일제 말기의 극심한 쌀 수탈로 인해 값싼 만주산 메조를 어떻게든 맛있게 먹기 위해 고민하며 발전한 음식이다. 미리 삶아놓은 팥에 불린 쌀과 찹쌀을 조금 섞고, 적당히 썰어놓은 고구마와 다량의 불린 조를 섞어 가마솥에서 안치면 되는데, 이렇게 하면 메조의 비율이 높아도 부드러운 고구마와 쌀, 찹쌀, 팥이 거친 메조의 식감을 누그러뜨려서 짭짤한 김치만 있으면 충분히 먹을만한 주식이 된다.
이 좁쌀마저도 대공황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며 부족해져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좁쌀은 커녕 피도 부족해서 비지를 끓어먹었는데, 이것조차도 못 구하는 빈민층은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일이 허다해졌다고 한다.
지금의 북한 또한 좁쌀을 구황작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도 북한 황해도 지역에서는 잡곡밥을 지을 때 좁쌀을 즐겨 넣는다.
3.2. 중국
고대 중국에서도 좁쌀은 평민과 사대부 할 것 없이 가장 흔하게 먹는 곡식 중 하나였고, 상주 교체기때 상나라의 충신이었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관부에서 주는 좁쌀을 거부해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때에는 군주가 신하들에게 봉록으로 내리는 하사품 중 하나였으며, 그 밖의 공로가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경우에도 대량의 좁쌀을 주었다. 공자도 노나라에서 대사구벼슬을 하던 시절에도 녹봉으로 좁쌀 6만섬을 받았고, 좁쌀밥을 주로 먹었다.[6]조나라 또한 한단 지역을 중심으로 보리 농사와 조 농사가 잘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국력을 쌓을 수 있었고[7], 최대의 국력을 자랑한 진나라도 진시황 시절에 관중 위수 일대에 정국거라는 운하를 건설하여 대규모 조밭을 개간해 6국통일을 위한 군량을 모았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기원전 시대를 다룬 중국 사극에서 군대가 쌀밥이나 찐빵을 먹는 것은 고증오류이다. 당시의 군대는 대부분 조밥이나 기장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염파의 사례를 보듯, 쌀밥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먹곤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빈민이나 천민 등 엄청나게 가난한 사람들만 먹는 곡식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같은 이유로 고증 오류이다. 삼국시대에 벼는 화남지방에서만 재배가 가능했으며 중국인의 식단에 쌀밥이 일상적으로 포함되는 것은 남북조 시대에 강남 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이후이다.
4. 언어별 명칭
학명 | Setaria italica |
일본어 | アワ(粟) |
중국어 | 小米 |
영어 | Foxtail millet |
프랑스어 | Millet des oiseaux |
독일어 | Kolbenhirse |
5. 기타
물물교환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좁쌀 한 톨이라는 동화도 있다. 중국 민화 중에는 외지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조 밭에 웬 박덩굴을 심어서 시어머니가 혼냈는데, 수확할 때 박을 켜자 박 안에서 잘 마른 좁쌀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중국의 기업인 샤오미는 좁쌀에서 사명을 따왔다. 창업 초기에 좁쌀죽만 먹고 살 만큼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국어사전에 실린 표준어 중에 '좁쌀과녁'이라는 낱말도 있다. 얼굴이 매우 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좁쌀처럼 작은 물건을 던져도 잘 맞을 정도라는 의미이다.
[1] 쌀, 보리, 콩, 기장, 조 등의 다섯 가지 곡물을 이르는 말.[2] 오곡이 아닌 곡식은 오래 먹으면 질린다고 하여 늘 먹는 주식으로는 기피했는데, 여기에는 밀, 피, 팥, 수수, 옥수수 등이 있다. 단, 그 중에서 피는 조가 오곡에 포함되기 이전까지 오곡 중 하나로 여겼다.[3] 반면에 밀은 연중 강수량과 일조량이 일정하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으며, 벼는 폭우와 무더위는 잘 견디지만 가뭄에 약하다.[4] 표기는 '조밥'이지만 조 뒤에는 ㅎ이 덧나기 때문에 발음은 '조팝'이다. 나무 중 조팝나무가 여기서 발음을 따왔다. 반면 쌀밥은 이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쌀을 뜻하는 이- 뒤에 ㅎ이 덧나는 것이다. 북한에서 말하는 이팝에 고깃국이 바로 쌀밥을 말하는 것이다.[5] 흔히 '깡조밥'이라고 쓰지만 표준어는 '강조밥'이다.[6] 공자의 인간적인 일화 중에 하나가 바로 제자들과 길을 떠나다가 굶주리고 날이 저물어 한 민가에 노파에게 하룻밤 의탁해 저녁으로 좁쌀죽을 얻어먹은 일이다. 제자들은 궁하디 궁한 좁쌀죽에 불만을 표했지만, 공자는 "너희들에겐 노파의 친절이 보이지 않는게로구나. 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라며 그들을 달래었다. 공자는 어릴 적부터 어려운 생활을 했고, 또 관직에 나간 뒤에 항상 남들의 시기와 견제를 당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순수한 호의로 내어주는 음식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을 것이다.[7] 조나라는 지금의 산서성과 허베이성 일대를 영토로 하여 북방에서 특히 농사가 잘되는 곳 중 하나였다. 삼국시절 하북을 제패한 원소의 근거지도 바로 이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