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20 02:04:21

공민왕의 혼혈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공민왕의 혼혈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nopad> 파일:1731637797825.jpg
장르 대체역사
작가 귀차
출판사 제이트리미디어
연재처 문피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리디
조아라
원스토리
연재 기간 2024. 08. 05. ~ 2025. 06. 18.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등장인물
4.1. 고려
4.1.1. 왕실4.1.2. 전주 이씨4.1.3. 관료
4.2. 원나라
4.2.1. 황실4.2.2. 기타
4.3. 여진족4.4. 명나라4.5. 티무르 제국4.6. 동로마 제국4.7. 베네치아 공화국4.8. 포르투갈 왕국
5. 개변된 역사
5.1. 개변된 사건5.2. 고려5.3. 중원5.4. 일본5.5. 그 외
6. 평가7. 기타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작가는 귀차.

2. 줄거리

원래 역사의 여말선초 속 공민왕의 유산되었어야할 태자로 환생한 주인공이 부모 공민왕노국대장공주, 그리고 본인이 살아갈 고려를 지키기 위해 역사를 바꾸는 이야기이다.

귀차 작가가 2022.5.11~6.30. 연재한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의 리메이크작이다.
1352년, 유산되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아이가 살아남았다.
…미래의 신품종 볍씨와 함께.

3. 연재 현황

2024년 8월 5일 문피아에서 연재를 시작하였다.

4.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1. 고려

4.1.1. 왕실

4.1.2. 전주 이씨

4.1.3. 관료

4.2. 원나라

4.2.1. 황실

4.2.2. 기타

4.3. 여진족

4.4. 명나라

4.5. 티무르 제국

4.6. 동로마 제국

4.7. 베네치아 공화국

4.8. 포르투갈 왕국

5. 개변된 역사

5.1. 개변된 사건

5.2. 고려

5.3. 중원

5.4. 일본

5.5. 그 외

6. 평가

내 조선에 세종은 없다처럼 여말선초기 왕실을 배경으로 하며, 가족물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주인공 못지 않게 주인공의 부모인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강조되며,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트콤이 본작의 메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는 주인공의 외가이자 처가인 원나라 황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원 역사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아들'로 설정된 이유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당대부터 현대까지 회자되는 로판 실사판스러운 일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간의 관계가 워낙 로판 그 자체다 보니 둘 중 1명이 원 역사와 타인이면 느낌이 안 산다는 것 때문에 '차라리 둘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게 더 대역 가능성이 있다'는 논의가 본작 연재 전에 있었는데, 작가가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table align=center><table width=480><table bordercolor=#00e164,#00e164><table bgcolor=#ffffff,#2d2f34><bgcolor=#00e164,#00e164> 파일:네이버 시리즈 로고.svg ||
별점 9.70 / 10.0 | 조회 수 49만 2025-08-11 기준



작가가 전작에서 로맨스를 잘 쓴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본작에서도 로맨스에 대한 평이 좋았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부부가 특히 염장 커플이라는 평을 들었고, 왕진과 챠브이 또한 순애 커플로 독자들 사이에서 평이 좋았으며, 아미 공주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도 흥미로웠다는 평을 듣는다.

작중의 주요 배경이 몽골 제국이다 보니 여말선초기 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특히 외전에서는 몽골 제국의 끊어진 동서가 원나라-티무르 제국으로 부활해서 유라시아사 전체가 변하게 되는데 본편보다 더 재미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

7. 기타

설정상 고려 왕조가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공민왕만 해도 31대인데 묘호와 시호의 중복 없이 600년을 더 존속했다는 소리이니 황제들 시호와 묘호를 안 겹치게 하느라 꽤나 고생할 듯하다.[148][149]

일본 왕조는 묘호를 안 쓰며 시호도 화풍(和風)이 강해서 중국과 한국 기준으로는 이질적인 시호투성이고 메이지 덴노 이후 연호와 시호를 합치면서 사실상 폐지되었음을 고려하면 시호는 그렇다 쳐도 묘호는 고생이 많을 듯하다. 이는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원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루프물이 아닌가 싶은 떡밥이 여러 차례 나온다. 작중에서 원 역사의 등장인물들은 무의식적으로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오며, 외전에서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과 혼인하기 전부터 원 역사에서 자신이 사망할 당시의 일을 꿈으로 꾸기도 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꿈을 꾸었으며 공민왕도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원 역사의 자신이 겪는 일을 꿈으로 꾸기도 했다.

주인공의 빙환트로 인해 원 역사에서 주인공이 개변한 역사로 덧씌워져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 외 주인공이 처음 빙환트할 때 용의 비늘이 암시되거나 21세기의 볍씨도 같이 트립한 것, 토구스테무르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 토곤테무르가 왕진의 꿈에 나타나서 위험을 경고하는 등 초자연적 존재를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외전 6화에서 마화가 샤 루흐와 대화할 때 "고려 태왕(주인공)은 유학자든, 승려든, 무슬림이든 백련교도든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백련교불교와 현대에는 사라진 마니교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종교로 원 역사에서는 19세기까지 비밀종교로서 존속하며 백련교도의 난, 의화단의 난에 영향을 끼치다 20세기 이후 사멸한 종교이다. 백련교가 21세기까지 존속하는지는 불명.[150]

주인공 이후 고려가 유라시아 전체와의 광범위한 무역을 중시함을 고려하면 실제 고려에 유입된 종교는 이것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고려의 법과 제도만 잘 지킨다면 뭘 믿든 신경 쓰지 않던 고려의 특성상 종교 박물관 같은 나라가 되었을 듯하다.

작가의 차기작인 정조의 왕자가 작가로 살아남기 에서 본작의 사건을 극중극으로 셀프 패러디했다. 그래도 모든 내용이 같지는 않고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난다고.

작중에서 중국어로 대화할 때 서로 사투리 수준으로만 취급하고 다 알아듣는 식으로 나오는데, 14세기 후반으로 가면 각 지방간의 언어 차이가 커져서 원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던 대도(베이징) 일대의 근고한어와 강남 일대의 여러 언어들은 서로간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북경 계통의 중국어를 배웠던 조선 사신이 주원장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지만 주원장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나하추와 억양이 비슷하다는 것만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안휘성 추저우시 출신인 서달과 왕진이 통역 없이 대화하는 장면은 고증오류에 가깝다. 다만 중고한어가 여러 언어로 갈라진 시기가 13세기 남송 멸망을 기점으로 100년 정도인지라 당시에는 언어 분화가 상대적으로 덜했을 것이다.

주인공에 관한 우상화와 숭배 장면이 굉장히 자주 나온다.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이를 질색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주인공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우상화와 숭배의 경우 북한/우상화를 패러디한 것이 많아 주인공이 백두혈통을 떠올리게 하는 우상화들은 특히 단속하는 개그씬이 여러 번 나온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금수산태양궁전 등은 대놓고 패러디했다.


[1] 292화 제국위키에서 휘가 공개되었다. 천보궁 후원 전각의 벽화에서 공민왕이 직접 지은 휘임이 밝혀졌다고.[2] 역대 고려왕들 대다수가 단명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천수를 누리고 갔다. 1452년은 원 역사에서 문종이 사망하고 단종이 즉위한 해인데, 단종의 증조부인 이방원보다 15살 연상인 걸 고려하면 당대 기준 4~5세대를 산 셈이다.[3] 작중에선 1352년 생으로 설정. 고려사 폐행열전 최안도 편 에 실린, 최안도의 아들 최원이 수행원을 함부로 매질한 데 놀라 노국공주가 유산한 아이로 보인다. 이 사건의 정확한 날짜는 고려사에 적혀있지 않으나 조일신이 처단되는 공민왕 1년(1352년) 10월과 고려군이 장사성을 공격하러 출격하는 공민왕 3년(1354년) 10월 사이에 일어난 일임은 확실하다.[4] 압록강변에서 막아냈던 1차 홍건적의 난과 다르게, 2차 홍건적의 난은 무려 20만 규모의 침입군이었기 때문에 10만 가량의 병사 동원이 최선이었던 고려가 국경에서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약탈이 주 목적이었던 홍건적들때문에 사실상 청야작전은 필수나 다름없었는데, 여기서 왕진이 청야작전 이후 복구비용을 모조리 자신이 부담할 것을 천명함으로써 청야작전을 아무런 뒤탈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5] 5살 때부터 이성계의 말인 횡운골(橫雲鶻)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는데, 횡운골은 사나운 야생마라서 이성계 외에는 굉장히 포악한 모습만 보였지만 왕진에게는 애교 잘 부리면서 착하게 굴어 이성계가 신기해했다. 말년에 이성계가 횡운골 건을 가지고 최영에게 말한 걸 보면 말년까지도 왕진만 가능했던 모양.[6] 오기는 본인의 저서인 오자병법 기준 76전 무패를 기록했으며, 이에 대한 반박은 딱히 없는 것으로 볼 때 최상급의 지휘력을 겸비한 병법가였다.[7] 왕진이 미래지식 치트 이전에 전생부터 머리가 좋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8] 이후 토구스테무르의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언급에 따르면 당시 몽골 순혈주의자들은 충선왕처럼 빨리 쫓아내고 싶었지만 어쨌든 대칸위를 노리던 옷치긴 왕가 견제, 명나라를 비롯한 남중국 군벌들 견제 등에 쓸모가 있었고 세샨이 즉위하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고려와 요동에만 거주하면서 원나라 중앙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내버려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명나라가 대숙청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이제 쓸모가 다했다고 생각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 물론 이건 순혈주의자들의 망상이고 그렇지 않은 몽골인들은 왕진 아니었으면 원나라가 폭망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 무슨 개소리냐고 반응했다.[9] 반란군이 바얀 후투그 황후와 차칸테무르를 죽음에 몰아넣었던 비소 제조법을 찾아낸 뒤 주체를 부추겨 명나라의 내전을 일으켰고, 이전과 달리 심한 인간불신에 시달렸다고 한다.[10] 형식적으로는 태왕(太王)의 이름을 사용하며 이를 고려 왕에게 대대로 물려줄 생각이다. 다만 작중에서도 주인공 사후에 이 체제가 얼마나 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11] 본래는 세샨의 반란이 일어날 즈음에 공민왕에게 고려 왕위를 물려받고 부모는 은퇴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왕진이 대도에 머물며 원나라를 통치해야 하다 보니 결국 죽을 때까지 양위를 못했다.[12] 만약 순치제강희제 같은 타입이었으면 아무리 왕진이라도 명분상의 문제가 있어서 위험했을 것이다.[13] 고려 왕조가 현재진행형인 이상 한자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14] 본편 도중에 토곤테무르가 두 공주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했듯이 이번에도 공주 둘을 데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15] 본작 21세기 당시 고려 황실은 입헌군주정으로 전환된 상태였다.[16] 현실의 고려에서는 태조(太祖)는 있어도 태종은 없었다.[17] 부계 후손이 아니라서 황금씨족에 분류되지는 않지만 어머니(노국대장공주)와 고조할머니(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후손이라서 보르지긴의 피가 짙었고,(증조모인 의비는 보르지긴이 아닌 일반 귀족으로 추정된다) 작중에서도 칭기즈 칸으로부터 이어지는 보르지긴 씨족 특유의 기질과 신체능력이 있다고 묘사되며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생각하는 왕진도 이런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각은 있었다.[18] 옛고려의 장수왕보다 더 오래 살았다[19] 번국으로 삼은 듯하다.[20] 문제의 소 사건은 나중에 경우 시합이 대흥행하면서 마케팅 요소가 되어 신하들이 돈 주고 이름 붙이기도 하는 등 잘 해결되기는 했다.[21] 본인 사후에 아들을 매우 귀여워해서 그림으로 꾸준히 아들을 그렸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22] 전근대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이라 노국대장공주처럼 심한 난임일 경우에는 첩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23] 292화 제국위키와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혜비 이씨 외의 후궁은 없다고 한다. 근데 노국공주에게서만 후사를 봤으니 이렇게 되면 혜비 이씨는 내내 낙동강 오리알신세 밖에 안되는 꼴이다.[24] 수양제의 시호와 같다. 공민왕은 자기 친형에게 최악의 폭군에게 내리는 시호를 묘호로 준 것.[25] 고려에서는 고조(高祖)의 묘호를 쓴 왕이 없었다. 고종(高宗)은 있었는데, 이 사람은 46년이나 재위했지만 내내 최씨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인 데다 몽골 제국의 침공에 시달려서 아무것도 못 했기 때문에 존재감은 제로에 가깝다.[26] 공민왕의 냉혹하고 무감정한 성격도 실제로는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공민왕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기제이다.[27] 강릉대군도 첫 만남부터 부다시리의 외모를 '태양처럼 빛난다'며 감탄하거나 부다시리에게 은근히 신경을 쓰는 묘사를 보아 초면부터 반했지만 자각이 없던 듯하다.[28] 위왕은 이를 알고 노발대발해서 혼인을 물리려고 했지만 토곤테무르가 귀찮아서 실패했다.[29] 이 때문에 본편에서는 술을 잘 마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날이 아니면 술을 절대 안 마신다고 한다.[30] 원래는 인간불신이 너무 심해서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자들조차 믿지 못하고 다 내치는 상황이었다.[31] 여담으로 공민왕은 1330년생인데, 충정왕이 1349년 6월 2일에 즉위했기 때문에 혼인 당시 공민왕의 나이는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만혼인 편. 원 역사에서도 충정왕 즉위 이후에 부다시리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역시 만혼이었을 것이다.[32] 이 때문에 완전히 정신줄을 놓지는 않아서 신돈도 제대로 통제하다가 필요가 다하자 부패 스캔을 이용해 바로 숙청하고, 암살을 피해 원 역사보다 오래 살았다.[33] 아들이 싫은 건 아니고 아내를 빼닮은 외모 때문에 아들을 볼 때마다 아내가 생각나 슬퍼져서 그런 것이며, 아내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증거라 아버지로서 아끼고 있어 아들이 장성한 뒤에는 진심을 토로하며 슬퍼하기도 했다.[34] 우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죽고 4개월 뒤에 태어나서 노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 모니노가 잉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이 모니노의 존재를 왕진(王珍)에게 처음 밝힐 때 그건 실수였고 나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 돌린 적이 없다고 한탄한 것을 보아 하룻밤의 실수로 생긴 듯하다. 적자가 요절할 경우를 대비해 죽이지 않았지만 모니노의 어머니를 죽이고 절에 유폐시킨 뒤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죄책감은 있어서 아들이 장성하자 데려올 생각도 있었다.[35] 계국대장공주와 동명이인인데, 당시 몽골에서는 서양처럼 선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본작에서도 동명이인 몽골인들이 간간이 언급된다. 충혜왕도 부다시리로 동명이인이다.[36] 쿠빌라이 칸-친킴-다르마발라-아무케-베이르테무르-부다시리 / 쿠빌라이 칸-제국대장공주-충선왕-충숙왕-공민왕.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이라서 공민왕의 항렬이 다른 원 황족보다 높은 편이었다.[37] 49화에서 흥왕사의 변(1363) 당시 공민왕 33세, 노국대장공주 29세이며 1352년 왕진을 낳았을 당시 18세라 언급된다.[38] 토곤테무르의 조부 카이산과 노국대장공주의 조부 아무케가 이복형제지간이었다.[39] 49화에서 15세일 때 혼인했다고 나오는데, 노국대장공주를 1334년생이라 가정하면 1349년이 된다. 충정왕이 1349년 6월 2일에 즉위하였으며, 충정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는 설정을 고려하면 1349~1350년이 된다. 공민왕이 1330년생이므로 19~20세가 되는데, 고려는 조선보다 늦게 혼인해서 남성 평균 20세, 여성 16세였다.[40] 부다시리도 이때는 아직 미숙한 소녀였던지라 자신의 감정을 이때에 가서야 깨달았다.[41] 본편에서도 몽골인치고는 술에 상당히 약하다고 나온다.[42] 당송시대 중국에서 동심결은 프로포즈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왕진은 7년 뒤에 재회하고서야 알았지만,[43] 70화에 따르면 바얀후투그 황후가 왕진을 포섭하기 위해 왕진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어했는데, 챠브이가 우연히 왕진과 엮였다는 것을 알고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44] 이는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예외라면 남편은 포기하고 권력에만 집중한 덕녕공주 정도.[45] 원 역사에서 토곤테무르의 막내딸은 5녀 촉국공주(蜀國公主)로 안평왕 파통격만(安平王 把通格滿)와 혼인하였다.[46] 경순공주의 쌍둥이 언니로 도중에 끼어들었다.[47] 불교 신자였던 노국대장공주아미타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48]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왕진의 생년인 1352년은 임진년, 아미의 생년인 1364년은 갑진년으로 십이지가 진(辰)인데, 임진을 상징하는 동물은 흑룡, 갑진을 상징하는 동물은 청룡이다. 고려 왕조가 용손(龍孫)을 자처했음을 고려하면 용의 해에 태어난 왕진과 아미 모두 길한 출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49] 주인공인 왕진(王珍)이 초안에는 1365년생인 게 원인이다. 모니노는 노국대장공주가 산모사망하고 4개월 뒤에 태어났기 때문.[50] 이때도 끌러가면서 자기보다 일찍 태어나서 그 자리의 있는 주제에 잘난 척 하지 말라며 왕의 사생아인 동생이 정실 왕후의 적자인 형한테 개기다가 이방과에게 몇대 더 맞고 끌러갔다.[51] 외전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고려에 귀부할 때까지도 오랑캐니 촌놈이니 하며 중앙에서 무시를 많이 당해서 고려에 대한 별 충성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비상한 모습을 보인 왕진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52] 왕진도 특유의 서민적이고 투박한 동북면 사투리를 쓰는 이성계를 처음 봤을 때 좀 깬다는 평을 내렸다.[53] 나중에 '셍게바투르(ᠰᠡᠩᠭᠡᠪᠠᠲᠤᠷ)'라고 불리는 것이 확인되는데, 몽골인들 언급에 따르면 굉장히 촌스럽고 별로인 이름인 듯하다. 직역하면 "사자 영웅"이라는 다소 투박한 뜻이다. 참고로 셍게는 티베트어 단어인 셍게(སེང་གེ)에서 파생되었는데 의미는 동일하게 사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 텡그리 신앙과 더불어 몽골에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주던 티베트 불교의 단어가 원나라에서 쓰인 것일듯. 현대의 몽골에서는 사자를 주로 '아르슬란(арслан)'이라고 부르지, 셍게라고는 잘 안 한다.[54] 다만 작중 묘사를 보아 나라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왕진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에 더 가깝다.[55] 늦둥이 딸이 언급되기는 하는데 사서에 따르면 신의왕후의 두 딸과 신덕왕후의 두 아들이 늦게 태어났다고 명시되기 때문에 신의왕후의 늦둥이 딸을 언급했다고 하면 개연성이 충족된다.[56] 이성계가 신덕왕후와 결혼한 것은 정략결혼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원 역사와는 다르게 후계자인 왕진의 무예스승이라는 압도적인 배경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 중 이방과와 이방원은 왕진이 매우 아끼는 신하들이었기에 정략결혼의 필요성이 매우 낮아졌을 가능성도 크다.[57] 이 때문에 최영에게 그 위험한 신진사대부들과 어울리다니 무슨 생각이냐고 경고를 듣기도 했다.[58] 실제로는 이무기가 의태한 것이라 원 역사 장녀인 경순공주를 밀어내고 장녀가 되었다.[59] 이 때문에 요왕 야나스리와의 전투 당시 여진 추장 호바투가 여진어를 쓰는 걸 듣고 이거 이지란이 해병문학 찍을 때 사용한 여진어 아니냐고 알아듣는 모습이 나온다.[60] 영비 최씨로 추정된다.[61] 최영의 소박한 성격 때문에 집이 평범한 편이었는데, 사적으로는 최영을 꼰대라고 기피하던 이지란은 이때까지도 최영의 집에 간 적이 없어서 몰랐다.[62] 이지란이 동안의 예쁘장한 외모를 하고 있어서 나이를 착각당하기도 했다.[63]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이지란을 선봉에 세웠는데 또 안 죽었다고 하는 건 덤이다.[64] 토구스테무르의 난이 끝난 직후 티무르가 원 역사(1395)보다 빨리 토크타미쉬 칸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보아 1390~1394년 사이로 추정된다.[65] 당장 이성계부터 이복형이자 백부(이자흥)의 양자인 이천계에게서 천호장 자리를 빼앗고 서자로 격하시킨 전적이 있으며, 원 역사에서는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내치고 신덕왕후의 차남인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역공을 당해 몰락한다.[66] 사실 나이가 찬 뒤에도 공민왕이 계속 공주의 호위무사로 붙여놓은 걸 생각하면 공주가 대도에서 원 황태자와 눈이 맞는 사고만 안 터졌다면 이방과의 소망은 이뤄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중에서 리얼 고려의 북부대공이 된 전주 이씨 가문을 혈연으로 묶어놓는 것은 고려 왕실에도 큰 이득이었기 때문. 그러나 고려와 혈연관계로 묶이는 게 절실해진 원 황실에서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고 고려에서도 이를 거부할 명분도 실리도 없었기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진 것.[67] 몽골 신화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68] 주체(1360년생)가 이방원(1367년생)보다 7살 연상이다.[69] 당시 과거시험은 출제자가 시험자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많아 비리가 형성되기 쉬웠는데, 이를 혁파하고자 했던 왕진은 시험 문제는 당일까지 철저하게 타인에게 비밀로 한 것은 물론, 자신에게 올 때는 이름을 감추고 필체도 서리가 한 번 필사하게 만들어 채점자가 모르도록 조치했다. 즉 교육 환경 버프를 받기는 했지만 다른 출제자들을 제친 건 방원의 실력이었다.[70] 과거에 합격한 정확한 시기는 안 나오지만 원 역사보다 조금 빨리 과거에 급제했다는 서술이 있고 민제의 딸과 막 혼인했다는 것을 보아 1382년으로 추정된다. 이때 이방원은 신혼 시절이라 그런지 2살 연상의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좋아 죽는 모습을 보인다.[71] 조직의 특성상 가족에게도 국가보위성 업무는 비밀이라고 한다. 독자들도 킬방원 밈이 될 정도로 젊을 때 한 성깔했던 이방원의 특성상 잘 어울린다고 평했다.[72] 원 역사에서 즉위 이후 사냥 하러 나갔다 낙마를 여러 번 한 것을 보아 마상술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 가족들을 데리고 탈출에 성공한 것도 그렇고 여러 번 낙마했음에도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도 없기에 아주 못하지는 않았을 듯하다.[73] 이때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지만 무엇인지 깨닫지는 못하는데, 원 역사에서 잃어버린 것(이씨 왕조와 왕위)으로 추정된다.[74] 이방원은 작 중 서경에서 시행된 과거의 최초 장원급제자다. 즉, 자신의 영광을 아들이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면서 재현하니 더욱 기뻐한 것.[75] 이도가 1397년, 황희가 1363년, 맹사성이 1360년생으로 황희보다 34세 연하, 맹사성보다 37세 연하이다. 이 정도면 당대에는 손자뻘 수준의 나이 차이다.[76] 이때 김종서가 선배로서 이도를 챙겨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김종서는 1383년생으로 이도보다 14세 연상이다.작중 집현전의 위상을 보면 김종서가 막내인 상황이 정상인 게 함정. 그러길래 누가 10대 중반에 장원급제하래?[77] 촉한에서 천연가스를 통한 원시적인 제염 기술이 있었고 송나라도 중세 수준을 못 벗어나긴 했지만 석탄 공업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고려하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닐지도? 여담으로 석탄으로 인한 오존층 문제는 몽골 제국의 대학살과 문명 파괴로 리셋당하면서 자연히 해결되었다고 한다.[78] 왕진도 원 역사에서 이도의 재능을 알고는 있었지만 증기기관 개발까지 튀어나올 줄은 상상치도 못했는지 속으로 '허허...... (세종)대왕님, 이 정도실 줄은 몰랐는데요. 이 물건이 벌써 세상에 나올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라고 독백했다.[79] 상급자인 이천은 이도가 이슬람 수학을 제시하면서 이천이 갖고 있던 문제의 해결책을 전개해나가자 아예 정신줄을 놔버렸으며, 이도의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왕진에게 자신의 보직을 변경하거나 이도를 자신의 밑에 두지 말 것을 상소로 올렸으나 이천 역시 발명 쪽으로는 꽤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 왕진이 이를 각하했다.[80] 왕진은 세자 시절부터 훈민정음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음운학적 지식이 떨어져서 이도가 성장할 때까지 수십 년간 기다리고 있었다.[81] 원래 식성인 고기를 많이 준 것은 물론, 활동량 부족으로 살이 찔까봐 집현전과 화통도감 사이에 언덕길로 배치해서 간접적으로 운동을 하게 유도했다. 또한, 뉴커먼식 증기기관의 문제점(냉각 방식의 문제로 인한 연료의 과소비)을 지적한 뒤 바로 시정하겠다는 이도의 말에 우선 열흘간의 휴식을 강제로 부여해서 혹사를 방지한 것은 덤이다. 얘 때문에 멀쩡히 커피에 설탕 타먹던 신하들은 갑자기 금당령이 내려오며 날벼락을 맞는다.[82] 증기기관의 개발로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당상관인 부제조에 올랐고, 파격적이라고 간주될 이른 승진에도 이도의 실적과 태왕의 총애, 전주 이씨 가문빨이 겹쳐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이후 훈민정음 개발은 물론 원 역사를 초월한 실적들을 마구 달성했을테니 벼슬이 높아졌을 것은 명약관화다.[83] 후임들에게 임무를 잘 완수했으니 보상을 받아야겠지? 드립을 무심결에 쳐 가며 갈아넣는 모습이 압권[84] 이후 해당 설정은 정조의 아들이 작가로 살아남기정약용정조에게 재활용되었다.[85] 기성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차이는 세대와 성향에서 나온 것일 뿐 출신 가문과 신분은 같았다. 한국사의 주요 가문들은 원삼국시대~후삼국시대에 자리 잡은 호족들이 고려시대 문벌귀족-권문세족-신진사대부로 이어지고, 조선시대 양반중인으로 분화되어 구한말까지 거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게 된다.[86] 이슬람 관련 밈이 많은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작중의 정도전이 이슬람 교리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유교 탈레반이[87] 고려 후기에는 이슬람 색목인(중앙아시아인)이 고려에 들어와서 세운 예궁(禮宮)이라 불린 모스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사라지지만.[88] 불씨잡변 같은 불쏘시개 따위를 만들 시간에 제대로 된 글을 써오라는 취지도 있었다.[89] 하는 역할은 북한의 동명(同名) 조직인 국가보위성과 같다.[90] 공민왕을 충실히 섬기던 시절에도 비대한 권력욕을 가진 사악한 인간이었다고 한다.[91] 외전에서 샤 루흐에게 홍삼을 주면서 정력제 드립을 치기도 했다.[92] 최대식도 색목인 혼혈이라서 금방 친해졌다.[93] 이때 털어버린 해적 중 하나가 바르바리 해적이었는데 바르바리 해적은 오스만 제국의 용병 노릇을 하고 있었고 본작에서는 티무르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관광 보낸지라 티무르 제국과 형제국이었던 고려 사신단을 적으로 간주해 노예로 삼으려 하자 관광 보냈다.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이슬람교 율법상 무슬림끼리는 노예 매매를 하면 안 되는데 무슬림인 자신도 노예로 삼으려 한 것에 대한 분노도 있을 듯하다.(마화는 원 역사에서도 본작에서도 독실한 신자였다)[94] 이종무는 희망봉을 '태왕봉'이라 명명했다.[95] 차칸테무르, 코케테무르가 속한 몽골 부족.[96]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왕진은 생전에 양위를 했지만(본인도 100살까지 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과학 분야처럼 미래지식이 필요한 분야들은 여전히 자신이 관리했고, 황희는 왕진의 휘하에 속해 있어서 90살까지 갈궈진 거라고 한다.[97] 남인도산 후추를 사용했기 때문에 왕진은 이대로 주원장이 중원 정복하고 해금령 걸어버리면 후추를 못 먹는다는 이유로 중원을 둘로 쪼갤 의욕을 다졌다.[98] 고춧가루가 없어서 산초가 섞여 마라맛이 나는 쌈장으로 대신했다.[99] 이런 토곤테무르의 예술가 기질(예민함)이 작중 초반의 번아웃 증후군에 큰 영향을 끼친 걸로 추정됨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기도 하다. 이는 원 역사의 공민왕도 마찬가지인데 공민왕은 화가의 재능이 뛰어났고 유일하게 사랑하던 노국대장공주가 결혼 초기 아이를 유산한 뒤 십수 년이 지나서야 다시 임신했는데 아내와 아이 모두 죽어버리자 절망감에 망가져 버렸다.[100] 너무 노골적으로 왕진을 밀어준 탓에 몽골계 부족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나 반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지만, 작중 묘사에 따르면 어차피 몽골 제국의 특성상 반란은 일어났을 거라고 한다. 오히려 이 반란의 여파로 쿠빌라이계 황금씨족 대부분이 죽고 원나라도 공중분해당할 뻔했다가 왕진이 원나라의 권력을 쥐면서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될 수 있었다.[101] 이는 충선왕쿠빌라이 칸의 맏며느리인 코코진에게 몽골식 이름을 받아 피후견인이 되면서 코코진의 손자(차남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카이산, 아유르바르바다와 일찍부터 친해지고 둘을 대칸 자리에 올리는데 기여한 것과 유사하다.[102] 챠브이의 친모는 미인이지만 히스테리가 심한 성격 때문에 곧장 토곤테무르의 총애를 잃은 말단 재인(하급 후궁)으로, 당시 챠브이는 친모의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103] 몽골 제국의 쿠릴타이 개최는 태후의 영향이 컸다.[104] 원말명초 시기의 인물인 엽자기(葉子奇)가 쓴 서적「초목자(草木子)」에 따르면 장수 베이르테무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려 혼혈인 아유시리다라 대신에 바얀 후투그 황후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옹립할 뻔했으나 아유시리다라를 돕기로 한 코케테무르의 도움으로 상황이 정리되었고 이 때 바얀 후투그 황후는 마음 속으로 근심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태자 후보로 점쳐지던 황자는 실존 인물인지 의심되는 존재이며 초목자에서조차도 幼子雪山(유자설산)으로만 표현됐는데, 이는 '어린 아들의 이름이 설산' 이라는 뜻도 되지만 '어린 아들은 설산에 있었다(혹은 설산으로 보냈다)로 뜻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아마 실존 인물이고 당시에 생존했어도 역신(逆臣)이 내세운 황자였기 때문에 베이르테무르의 난이 정리된 후 처형되었을 것이다.[105] 그리고 원사종실세계표의 순제 항목에는 순황제, 아들 3명: 장남은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이며 나머지 2명은 일찍 죽었다(順皇帝,三子:長皇太子愛猷識理達臘,餘二子,蚤世) 라고 되어 있다. 친킴 태자는 바얀 후투그 황후의 열전에라도 기록되어 있지만 설산이라는 이름은 초목자 외엔 그 어디에도 언급이 안 되어 있다. 작가가 바이두 백과위키백과에 기재된 잘못된 정보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106] 베이르테무르는 원 역사에서 사망 시기에 대한 기록이 갈리는 인물로 1353년 홍건적 토벌 와중에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1369년에 죽었다고 하기도 하며, 고려사에서는 1370년에 처형당해서 공민왕이 조회를 금지시키고 고기 반찬을 끊었다고 하기도 한다. 작가는 1370년 사망설을 따랐는데 고려사에서 공민왕이 장인의 사망에 대해 따로 반응한 기록이 있고 이때가 토곤테무르가 죽고 아유시리다라가 즉위한 해라 한창 치열한 정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107] 토곤테무르의 할아버지인 카이산의 이복형 아무케의 차남이었다. 다르마발라-아무케-베이르테무르 / 다르마발라-카이산-쿠살라-토곤테무르.[108] 공민왕의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였다.[109] 복국장공주는 베이르테무르의 7촌 고모였다.(쿠빌라이-후게치-에센테무르-복국장공주)[110] 초원에서 부족 생활을 유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북중국에서 정주 생활을 하면서 남중국 군벌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몽골인들은 왕진이 없었으면 진작에 원나라가 망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111] 작가 曰 정확한 년도는 안 정했다고. 원 역사에서 1395년에 티무르에게 패망한 토크타미쉬가 더 빨리 망했다고 하므로 1390~1394년 사이이다.[112] 먼터무는 1370년생이라 이 당시 12세였다.[113] 처음에 사신을 보냈을 때는 티무르도 그저 관망을 하려는 상황이었고 주원장 역시 단순히 서로 갈 길을 가자는 원교근공의 노선이었기에 대립각이 서지 않았던 반면, 오이라트가 반기를 들자 자신이 이미 중화통일을 이루었다고 착각했는지 티무르에게 고자세로 나갔다. 당연히 원 역사에서는 통일 제국이 된 명나라를 치려고 마음먹었던 티무르에게 갑질이 통할 리가 없었다.[114] 주원장이 북벌로 추진한 전선은 2개였는데 그중 1개가 끝나지 않았고 고려가 수군으로 명나라 해안선을 타격해서 추가 전선이 열린 상태였다.[115] 그러나 작중에서 왕진을 가장 긴장시킨 난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주인공이 미래인이 아니었으면 이기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6] 더불어 거위고기 일화를 떠올렸는지 거위고기를 먹지 말 것을 당부했다.[117] 1382년 북벌 당시에는 위왕(魏王)이었지만, 북벌에 실패하고 주표가 즉위한 뒤 송(宋) 땅으로 전봉되었다.[118] 주체는 1360년생이라 1352년생인 왕진보다 8살 연하이다.[119] 본작에서는 명나라와 고려 사이가 원 역사보다 더 나쁘다 보니 당사자에게도 숨긴 것으로 보인다.[120] 원 역사에서는 요절한 형의 뒤를 이은 조카가 먼저 숙청 시도를 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안 그래도 격무에 골골거리는 형을 비소로 보내버린다. 그 뒤 조카가 번왕들을 숙청 시도한 것은 같다.[121] 원나라를 포함하면 삼국지의 위촉오와 비슷한 형세라고 보면 된다.[122] 주체가 이방원에게는 원래 정체를 말하지 않았고 왕진 역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대면했을 때 송왕의 거처에서 나오는 주체를 보고 이방원이 당황한 것은 덤이다. 물론 신분을 숨긴 것에 나쁜 의도가 하나도 없었고 워낙 두 사람의 성향이 잘 맞다 보니 친분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123] 원 역사의 공헌현비 권씨(恭獻賢妃 權氏)로 추정된다.[124] 연운 16주를 받는 대가로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협조했으니 당연히 고려 내에서도 반원 기조가 일 것은 자명하며, 이는 후계자였던 왕진에게도 당연히 위협이 된다.[125] 원 역사에서도 홍무제는 이방석과 자신의 딸 사이의 혼담을 잠깐 논했다가 서로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파토난 적이 있었다.[126] 공민왕이 1382년 원정에서 해군을 보낼 때 명나라 사신들이 페이크로 자신에게 결례를 저지른 건 잊어버렸지만 자기 아들을 숙청하라 사주한 것은 안 잊고 보복했다고 나온다. 해당 계책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왕진 숙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127] 백주 대낮이라 일반인들은 그냥 청명한 하늘로만 생각했다.[128] 티무르는 1336년생으로 공민왕(1330)보다 6살 연하, 이성계(1335)보다 1살 연하이다.[129] 사군사주의 일원이었던 바를라스 쿠빌라이(칭기즈 칸의 8촌 형제)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쿠릴타이 참가 자격이 있었지만 바를라스 부는 오래전에 차가타이 칸국에 속하게 되면서 원나라와 연이 끊어져 잊힌 지 오래였다. 물론 모든 바를라스 부가 차가타이 칸국으로 가지는 않아서 원나라에 속한 바를라스 씨족도 있기는 했지만, 원나라와 연이 끊어진 차가타이 칸국의 바를라스 씨족이 갑툭튀한 거니 당황한 것.[130] 여러 정황을 보아 1379년으로 추정된다.[131] 이 시점에서는 차가타이 칸국을 하나로 합치고, 동맹 토크타미쉬를 지원해 북쪽으로 원정을 나가 킵차크 칸국의 동부를 무너뜨렸으며, 서방 원정에서 아랄 해 남부 호라즘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옹기라트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 땅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 뒤 일 칸국-북인도-오스만 술탄국 순으로 정복을 이어갈 예정이었다.[132] 티무르는 모계로 칭기즈 칸의 차남인 차가타이의 피가 이어지고 있고, 구르칸(부마)의 지위를 손에 넣기 위해 차가타이 칸국의 마지막 공주였던 사라이 물크를 약탈혼했다. 그래도 사라이 물크와의 금슬은 좋다고 한다.[133] 티무르도 자신이 황금씨족의 부계 후손이 아니라서 차가타이 칸국의 후손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상태였다.[134] 원나라에 쿠르겐(부마)이 왕진 외에 많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왕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135] 일부에서는 왕진과 티무르의 관계가 정도전(드라마)의 정도전과 이인임,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홍인방같은 관계로 느껴진다고 한다.이게 누군가!? 나의 가장 절친한 벗 카사르테무르가 아니신가!?[136] 실제로 본작의 주원장은 하늘에게 선택받았다고밖에 볼 수 없던 원 역사와 달리 주인공에 의해 천명을 잃고 만다.[137] 원래 일어날 일이긴 했지만 티무르의 '가장 강한 자'의 발언이 특유의 혈통주의와 결합하여 더 심하게 폭발했다. 세샨의 혈통이 딸리는 건 아니지만 고려인 잡혈(왕진)이 세샨을 통해 원나라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 물론 이 반란군들은 능력이 한참 떨어져서 왕진에게 다 처발리고, 몽골인들도 대도의 중신들은 대부분 왕진 덕분에 망할 뻔한 나라가 건사된 걸 알고 있어서 반란군을 얼간이 취급했다.[138] 원 역사보다 빨리 토크타미쉬를 때려잡은 상태였다고 한다.[139] 일반적인 체스가 아닌 티무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티무르 체스라고 언급된다.[140] 원 역사에서 티무르가 열병으로 죽은 이유가 한겨울에 얼음물을 마셔서였다. 충고를 들은 티무르는 자신에게도 천기를 읽어준 것이냐며 감탄한 것은 덤이다.[141] 외전에 나온 바에 따르면 제국의 영토와 인구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대신 실크로드 바닷길이 뚫려서 마냥 처지가 나쁜 건 아니고, 티무르도 약탈에만 치중하던 경제를 좀 더 정상적인 무역 경제로 바꾸려고 시도 중이라고 한다. 이는 자신이 실행했던 약탈 경제보다 무역경제가 가져다 주는 부가 더 크기에 사마르칸트의 발달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142] 왕진과의 토론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후계자로 세워야 했다는 지론을 펼쳤으나 왕진이 했던 말인 '제국을 창건하는 군주는 가장 강한 사람이어야 하지만, 제국을 유지하는 군주는 사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았다. 왕진은 티무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대도에서 섭정 노릇을 하던 왕운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고.[143] 샤 루흐와는 다르게 후계자로 총애하던 손자가 수에즈 운하 자체의 가치를 모르자 왕진의 충고가 옳았음을 되새기기도 했다. 수에즈 운하 덕분에 티무르 제국의 해군이 지중해와 홍해를 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이 어마어마한 가치였기 때문. 또한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면 자연스레 티무르 제국의 무역경제도 쇠퇴하기 마련이라 수에즈 운하의 가치는 티무르 제국-고려-베네치아 공화국 3나라 모두에게 윈윈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원 역사의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어렵다보니 바르바리 해적을 아예 사략함대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쇠퇴에 지중해 무역의 쇠퇴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이 된다.[144] 서양권에서는 티무르 바를라스로 부를 가능성이 높다.[145] 왕진의 제안이 비현실적인 건 절대 아니었다. 현실에서 가동되고 있는 수에즈 운하는 19세기에 와서야 뚫린 것이긴 하나, 수에즈 지역에 운하를 뚫는다는 구상 자체는 기원전부터 있었다.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근대와는 다른 경로로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아케메네스 왕조 대에는 성공해냈다. 즉, 이미 기원전부터 대략적인 개념은 잡혀있어서 국력이 어느 정도 되는 나라들은 한 번쯤 시도해본 프로젝트였고, 기술력과 노동력 문제로 실패한 경우가 많았지만 성공한 사례도 있었던 것.[146] 원 역사에서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15세기 후반 우호관계였던 맘루크 술탄국의 도움을 받아 수에즈 운하를 재건해 활로를 찾고자 했지만, 하필 이때 맘루크 술탄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해버렸고 오스만 제국은 폐쇄적인 무역 정책을 고수해서 그대로 망해버린다.[147] 장사성의 세력은 주인공이 회귀한 시점에서는 고려 제국의 번국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148] 신라도 왕조 역사가 800~900년에 달하지만 시호를 쓰기 시작한 건 태종 무열왕 때부터고, 묘효가 확인된 건 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 열조 원성왕 정도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수당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묘호를 주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신라도 이 영향을 받은 것이며, 묘호를 일일이 주게 된 것은 수당시대의 영향을 받은 왕씨 왕조부터이다.[149] 공민왕의 시호와 묘호를 줄 때도 이미 31대나 되다 보니 고르느라 신하들이 고생했는데 후대에는 뭐 말할 것도 없다. 한자문화권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묘호-시호가 리셋되어 중복되어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왕조 수명이 안 길어서 문제가 안 되었지만 1100년 단위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150] 백련교가 마니교와 완전히 같은 종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