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혼혈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 |
<nopad> | |
장르 | 대체역사 |
작가 | 귀차 |
출판사 | 제이트리미디어 |
연재처 | 문피아 ▶ 시리즈 ▶ 카카오페이지 ▶ 리디 ▶ 조아라 ▶ 원스토리 ▶ |
연재 기간 | 2024. 08. 05. ~ 2025. 06. 18. |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작가는 귀차.2. 줄거리
원래 역사의 여말선초 속 공민왕의 유산되었어야할 태자로 환생한 주인공이 부모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그리고 본인이 살아갈 고려를 지키기 위해 역사를 바꾸는 이야기이다.귀차 작가가 2022.5.11~6.30. 연재한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의 리메이크작이다.
1352년, 유산되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아이가 살아남았다.
…미래의 신품종 볍씨와 함께.
…미래의 신품종 볍씨와 함께.
3. 연재 현황
2024년 8월 5일 문피아에서 연재를 시작하였다.4. 등장인물
4.1. 고려
4.1.1. 왕실
- 왕진(王瑨)/왕카사르테무르(王合撤兒帖木兒)(1352~1452, 향년 100세)[1][2]
주인공. 전생에선 역사에 관심 있던 군인이며, 밀려 내려온 트럭을 레토나로 받아내다가 사망하였다. 그때, 쌀에 미쳐있던 친구가 만들어낸 신품종 볍씨를 들고서 원래 역사에선 유산으로 죽은 왕자로 환생한다.[3] 몽골식 이름은 '카사르테무르'로, 바얀 후투그 황후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토곤테무르와 바얀후투그 모두 이대로라면 자신들의 일족이 망할 것임을 깨닫고 왕진에게 전폭적인 후원을 해줬으며, 이를 통해 점차 원나라 중앙의 권력에 가까워지게 된다.
5살 때 공민왕의 화폐 개혁에서 매우 중요했던 요소인 은의 확보를 연은분리법의 개발을 통해 무사히 이뤄내면서 재능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어 로프 솔트의 도입으로 기존의 자염에 비해 소금 생산량을 확보하여 신품종 볍씨와 함께 여진족의 교화에도 성공한다. 이에 고려의 경제가 화폐 경제로 전환되고 부랑자들이 점차 경제가 안정화되어 양민으로 정착됨으로써 상업의 발달 기반이 확보된다.
이러한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공민왕 대 고려의 위기였던 홍건적의 난[4]과 흥왕사의 변 등을 무사히 막아내고, 왜구를 토벌하면서 오우치 가문을 포섭하여 사실상 고려의 번국으로 만드는 등 고려 말의 외환들을 하나하나 없애간다. 그리고 흥왕사의 변을 틈타 내통을 하려던 친원 성향의 권문세족들과 타락한 불교 세력을 숙청하면서 내실을 다지고 흥왕사의 변에 호응해 덕흥군을 옹립하려던 원의 군대를 물리치고 오히려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등, 세력 확장에도 성공한다.
이성계의 제자였기 때문에 무력이 상당히 뛰어난데, 특히나 돋보이는 것은 편전을 비롯한 궁술과 황금씨족의 피를 물려받은 듯한 마상술.[5] 군을 지휘하면서 편전으로 상대 궁수를 저격해 아군의 사기를 올리거나, 단기필마로 6기의 기병을 편전으로 저격하고 접근한 2기는 마상술을 활용해 회피 후 반격으로 모조리 썰어버리는 등어머니와 아내의 등짝공격 때문에 자제하고 있을 뿐이성계의 제자라는 이름값은 톡톡히 한다. 특히나 작 중 삼국지연의의 장판파 일화를 재현했다고 평가받았던 이방과를 왕진보다는 부족하다고 평가한 것이 이성계임을 감안하면 동세대 한정 최강자 반열에 들 만한 무력을 보유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전생에 군인이었던 짬밥과 최영과의 전술토론을 통해 전략전술에서도 뛰어남이 부각되며, 군을 지휘함에 있어서도 병졸과 같은 식사를 하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등 오기의 지휘력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6] 그 외에도 핏줄의 영향인지 시력이 매우 좋다는 것도 종종 언급된다. 몽골인들조차 칭기즈 칸의 피를 물려받은 듯한 무재와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 외에 체스도 굉장히 잘하는데, 전생에도 웨스트포인트에 유학했을 당시 체스에서 무패로 명성을 날렸고 티무르를 상대했을 때도 미래지식 치트까지 동원해서 탈탈 털어버렸다.[7]
세샨의 대에는 원나라의 좌승상이자 심왕이 되었고, 본래는 고려를 부흥시키고 영토를 확장한 뒤 중원을 남북조 상태로 유지하면서 온화하고 유능한 의형제와 함께 꿀만 빨려고 했지만,[8] 명나라가 원나라를 공격할 여유가 잠시 없어진 사이 몽골 제국이 그놈의 내전 스핀을 또다시 돌리면서 몽골식 의형제였던 세샨이 살해당하고 반란 진압 과정에서 세샨과 여동생 아미의 어린 아들은 간신히 살렸지만 대부분의 쿠빌라이계 황금씨족이 죽게 된다. 결국 분노에 찬 왕진은 세샨의 복수를 갚은 뒤 자신이 더 이상 바라는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임을 받아들이며 흑화,[9] 섭정으로서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10] 원나라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11] 원칙적으로는 조카가 성년이 된 뒤에 물러나야 했지만, 이 조카는 할아버지인 토곤테무르를 닮아 게으른 암군이라서 계속 떠넘긴 덕분에 이 체제가 죽 이어졌다고 한다.[12]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야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을 무척 사랑했음을 알고 절규하기도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개변된 역사의 21세기에서 '왕진'이라는 동명이인의 고려 태자로 환생하였으며,[13] 부모님 또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환생임이 암시된다. 군복무의 의무 때문에 하급 군관으로 군복무를 하다가 원 역사처럼 레토나 사고를 당해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간신히 깨어나 어머니에게 혼나고, 아버지와는 왕진(王瑨) 시절처럼 솔직하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껄끄러운 관계였다. 여기서는 원나라가 고려제국의 제후국으로 서열이 역전된 채 21세기까지 존속하고 있었고, 원나라의 공주와 정략결혼할 상황에서 맞선을 본 공주가 챠브이와 다른 외모임을 깨닫고 실망해서 현장에서 도망쳤다가 같은 이유로 도망친 챠브이와 환생과 마주치자[14] 이번 생에서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고 싶다고 생각하고[15] 챠브이의 환생에게 청혼하는 것으로 작품이 끝난다.
292화 제국위키에 따르면 사후 태종(太宗) 대용장효광열헌명원무황제(大勇章孝光烈獻明元武皇帝)라는 시호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16] 보르지긴 혈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인지 몽골계 고려인으로 표기된다.[17] 생전 예성황후(챠브이)와의 사이에서 2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태종 무제의 업적은 고려 왕조가 제국으로서 500년을 더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워낙 장수해서[18] 생전 태상왕으로 물러났음에도 사망 당시에는 아들인 왕운이 아니라 손자 경제(景帝)가 재위하고 있었고, 경제는 무제의 긴 재위기간 동안 껍데기만 남아있다시피 했던 원나라와 하북 일대를 완전히 무릎 꿇려서 일시적으로 동아시아가 불안정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21세기까지 원나라가 남아있기는 하다는 모양.[19]
신하들을 노예 취급하는 면이 강한데, 특히 외전에서 그 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빨리 쓰러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중간중간에 제대로 휴식을 시켜서 페이스 조절도 착실하게 헤내고, 경우(競牛) 시합에 나가는 소들에게 신하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기행을 보여 신하들이 항의했지만 소가 뭐 나쁘냐, 소만도 못한 밥버러지 신하들이 더 많다고 무시하기도 했다.[20]4. 신이 된 황제당연히 이런 완벽한 황제는 거의 종교의 차원에서 광적으로 숭배받았다. 당장 당대의 지식인들도 세자/태자 시절의 무제를 '미륵의 현신', '요순의 재림' 등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이슬람교도인 마화는 그를 '알라의 계시를 받은 현인'이라 칭송했고 그와 접촉한 기독교인들은 무제를 '신의 은총을 받은 예언자'라 여겼을 정도였다.그리고, 이 시기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미 '세자 신앙'이라 불리는 민간 신앙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부처와 미륵의 은혜를 받은 세자가 왼손에서는 쌀을 내어 백성들을 먹이고, 오른손에서는 철을 내어 황폐해진 밭을 갈게 한다는 당대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거기에 더해, 무속 신앙에서도 무제는 일찍이 신으로 모셔졌다. 고려의 무당들이 무제와 예성황후를 두 마리 용이 받드는 쌍신으로 함께 공경했을 정도다.한편 이 신앙의 형태는 일찍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중원과 몽골에서도 발견되는데, 특히 몽골의 텡그리 신앙과 결합된 솔랑카 카간 신앙은 용과 흰 사슴을 공경하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 재미있는 점.292화 제국위키-태종(太宗) 무황제(武皇帝) 中
292화 제국위키에 따르면 생전부터 사람들의 숭배를 받었던 인물답게 사후에도 신으로서 널리 숭배되었고, 그 신앙은 중원과 몽골에도 퍼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국위키에서는 한국 신화/신의 분류에도 들어간다고 한다.
빙환트의 주인공이다보니 미스테리한 요소가 여럿 제기되는데, 그의 탄생 무렵 재배되기 시작한 신품종 볍씨나어쎄신크리드 하고 싶어서왕진이 그렸던 베네치아 지도가 대표적. 역사학적으로는 전혀 밝혀내기 어렵다보니 미스테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
리메이크 전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낳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정이었으며, 노국대장공주의 이명(異名)으로 전해지는 왕가진(王佳珍)에서 따온 이름인 왕진(王珍)이라는 설정이었다. 전생에 유망한 군인이었고 고려에 회빙환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수호신인 용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 뛰어난 무술과 군사력의 소유자이며 이성계가 왕진의 부하가 된 게 역사 개변의 주요 분기점인 등 캐릭터성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리메이크 전에는 용의 비늘이 몸에 있거나 이성계의 태몽에 흑룡으로 나타나는 등 용의 특성이 강조되었지만, 리메이크되면서 몽골 황금씨족의 피가 상당히 강조되는 것으로 바뀐 것이 소소한 특징.
- 공민왕
왕진의 아버지이자 원래 역사에서의 냉혈한 면모를 보이는 고려의 국왕이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 작중 주요 테마 중 하나가 아들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공민왕과 환생 후 공민왕의 부정을 나름대론 알지만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 왕진의 부자관계이기도 하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노국대장공주를 닮은 큰아들을 예뻐하고 있었지만 표현을 안 해서 오해를 산 전형적인 옛날 츤데레 아버지 타입이다.[21] 작중 언급에 따르면 원 역사처럼 후궁도 있다고 하는데 워낙 일편단심이라 후궁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노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만 두었다.[22] 다행히 원 역사와 달리 모두 잘 컸지만.[23]
생전 충렬왕에게 열종(烈宗), 충선왕에게 소종(昭宗), 충숙왕은 공종(恭宗)의 묘호를 주었고 형인 충혜왕은 양종(煬宗)[24]이며 충혜왕의 아들인 충목왕, 충정왕은 묘호를 빼버렸다. 이중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왕진이 즉위 이후 칭제건원하면서 조(祖)로 격상되었다. 신하들은 처음에는 세조와 열조를 제안했지만, 왕진은 원 역사 조선의 패륜 삼촌과 런도못한조의 묘호라는 이유로 기각했고, 논의 끝에 고조(高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존되었다.[25]
외전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어릴 때는 고려왕이 되어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조카들에게 밀려나고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자 절망해서 '내 인생 망했다'며 밤마다 독주를 마구 들이켜며 폐인처럼 살았고, 이제 와서 고려에 돌아가봐야 뭐하겠냐고 생각해서 '원에서 내 인생 끝나는 거지 뭐'라며 체념하고 있었다.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형)의 대까지 반복되던 잔혹한 왕실의 굴레 때문에 유년부터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지독한 인간불신과 인간혐오, 애정결핍으로 인한 고독감에 의해 속이 썩어문드러져 있었다.[26]
충정왕 재위기간에 고려가 혼란스러워지자 귀찮았던 토곤테무르는 공주 하나와 결혼에 고려왕이 되라며 우선 위왕의 딸과 맞선을 보라 명령하고, 강릉대군(공민왕)은 귀찮아하다가 시녀로 변장했던 부다시리와 만나게 된다. 위왕은 누이인 조국장공주가 강릉대군의 아버지인 충숙왕과 있었던 악연 때문에 공민왕을 싫어했고, 공민왕의 무감정한 시선에 실망해서 고려를 욕했다가 공민왕은 공민왕대로 빡쳐서 위왕을 욕했다. 이때 부다시리에게 '태양처럼 빛나는 미모의 소녀'라고 플러팅(?)을 의도치 않게 시전했다가 여기에 꽂힌 부다시리가 강릉대군에게 반해서 쫓아다니게 된다. 강릉대군은 자신의 선 안을 마구 헤집고 들어오려는 부다시리를 보고 거북함을 느껴 부다시리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지만 결국 부다시리를 해하지 않았고 무시한다.[27]
그러나 부다시리는 공민왕의 약점이라도 잡아내겠다며 공민왕이 밤마다 다닌다는 술집을 알아내 쳐들어갔지만, 알고 보니 대도에 끌려온 고려인들을 보살피는 아지트였다. 술집의 독주들을 퍼마시던 건 사실이었지만 여색 때문에 술집에 간 건 아니었던 것. 실제로 여자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인간불신 와중에도 백성들은 긍휼이 여겨야 할 대상이고 일부는 신하들과 달리 조금이나마 믿을 만하다고 부다시리에게 말했다가 술에 취한 부다시리에게 냅다 고백을 받게 되어 놀란다. 이때 했던 말로 인해 부다시리에게 반하게 된 강릉대군은 부다시리가 통금 시간을 어기고 술집에서 곯아떨어지게 되자 자신이 부다시리를 유혹했다고 스스로 뒤집어썼고, 위왕에게 12시간이나 무릎 꿇음을 당한 뒤 토곤테무르를 찾아가 부다시리와의 혼인을 정식으로 허락받는다.[28]
혼인하게 되면서 부다시리에게 술 끊으라고 해서 술을 끊게 되고,[29] 신하들을 이전보다 챙기라는 말 때문에 예전보다는 사람을 믿게 되고,[30] 자신만을 사랑해달라고 하자 죽어서도 부다시리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렇게 둘은 행복한 부부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70살이 되었을 때 부다시리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1년 뒤 자신 또한 죽고 부다시리와 함께 합장되었다. 해당 외전 에피소드가 전형적인 로판이라서 관련 드립이 흥했다.[31]
에필로그에서는 21세기에서 고려 태왕으로 다시 환생하여 전생처럼 노국대장공주의 환생과 연애결혼을 했다. 전생처럼 2남 1녀를 낳은 것으로 추정. 21세기의 고려제국은 입헌군주정이라서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적은 듯하나 공무는 많다고 한다. 특유의 츤데레 기질과 엄격함은 여전해서 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왕진(王瑨)의 기억을 되찾은 왕진은 이번 생에서는 아버지와 빨리 화해하고 제대로 효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나와서 빨리 화해할 듯하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인 왕진(王珍)을 낳는 데 성공하지만 바로 사망해서 "우리 아이를 지켜달라"는 노국대장공주의 유언 하나 때문에 간신히 버틸 정도로 초췌한 인물로 나온다.[32] 이 때문에 양육은 모후인 명덕태후에게 떠넘기고 아들을 거의 상대하지 않았으며, 원 역사처럼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지만 늘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며 상심한 모습이 강조된다.[33] 왕진(王珍)이 장성하고 황산대첩을 총지휘해 대승을 거두며 이성계를 비롯한 군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정몽주를 기점으로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자 왕진(王珍)에게 국정을 하나둘씩 넘기면서 이인임을 비롯한 기성 권문세족의 대숙청 모드에 들어간다. 이 때문에 모니노(우왕)를 내세운 권문세족의 쿠데타에 당해 죽을 뻔했지만[34] 제때 왕진(王珍)이 구조하면서 살아남고, 권문세족에 대한 대숙청이 끝난 뒤 아들에게 바로 양위하고는 노국대장공주의 사당으로 갔다가 곧바로 사망한다.
- 노국대장공주
본명은 보르지긴 부다시리.[35] 공민왕의 9촌 조카이며[36] 설정상 1334년생이다.[37] 현 원나라 황제인 토곤테무르와 6촌 형제이기도 하다.[38] 원나라에서는 '승의공주'라고 불린다. 원나라 황족 출신이지만, 고려와 가족을 사랑하고 강단도 있어 공민왕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솔직할 수 있는 왕후이다. 자식들에겐 공민왕이 마음을 못 여는 만큼 왕후가 중재하고 설득하며 마음을 열도록 한다.
몸이 약해서 아이를 낳기 힘들다고 언급되는데, 원 역사에서도 유산 1번에 출산 도중 자식과 함께 사망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임신 및 출산이 힘든 체질인 건 맞는 듯하다. 본작에서도 이 때문에 왕진을 유산할 뻔하다가 간신히 낳거나 2남 1녀만 낳았는데 그 자식들 간에도 나이 차이가 현대 기준으로도 큰 편이다. 본작에서도 유산될 뻔했지만 왕진을 트립시킨 고려 왕조의 수호신(용)이 신통력을 발휘해 살려주어 이를 본 시녀들은 기적이라 평했다고. 자상한 어머니라 전생에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주인공이 노국대장공주의 모성애에 큰 위안을 느껴서 가능하면 효자 노릇하려고 노력한다. 심한 난임이기 때문에 남편이 첩을 두는 걸 허락했지만 남편이 첩 만나러 가면 엄청 질투한다고 한다.(원 역사에서도 이랬다) 현모양처지만 근본적으로는 터프한 몽골 여자라서 남편이나 자식들이 사고 치면 가차없이 등짝스매싱을 날린다. 공민왕이 말년에 한 말에 따르면 유산될 뻔했다가 고려 왕조를 수호하는 용신의 신통력으로 간신히 살아서 낳을 수 있었던 왕진을 늦둥이 자식들보다 더 아꼈다고 한다.
외전에서 신혼 시절 에피소드가 나오는데,[39] 소녀 시절 부다시리는 위왕부에서 엄청난 미모 때문에 애지중지되고 있던 공주로 유명했다. 토곤테무르는 그런 5촌 당숙의 주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충정왕이 즉위한 뒤 고려의 정계가 혼란스러워져 덕녕공주가 원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자 귀찮았던 토곤테무르는 '왕 바꾸면 되잖아'라고 생각해서 부다시리와 강릉대군을 혼인시키고 고려에 던지려고 했다. 당시 강릉대군은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라며 절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폐인처럼 살고 있어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었고, 아직은 혼담만 오가는 상황이었던지라 베이르테무르는 누이인 조국장공주를 죽게 만든 충숙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강릉대군의 혼담을 반대했다.
당시 강릉대군은 지금 고려 돌아가서 뭐하겠냐며 한창 좌절하던 시절이라 대충 얼굴 1번만 보고 돌아가려 했지만, 오냐오냐 커서 말괄량이었던 당시의 부다시리는 호기심에 시녀로 변장하고 강릉대군에게 접근했다. 강릉대군은 베이르테무르가 강릉대군을 떠보고자 부다시리로 변장시킨 진짜 시녀에 대한 태도가 싸늘하고, 부다시리처럼 태양같이 빛나는 미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다시리를 알아보았다. 이 플러팅에 넘어간 부다시리는 강릉대군에게 꽂혀 매일마다 강릉대군을 쫓아다녔지만 강릉대군에게 거절당했고, 강릉대군의 약점을 잡아보겠다고 생각한 부다시리는 강릉대군이 매일 밤마다 간다는 술집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 술집은 대도로 끌려온 고려인들을 도와주기 위한 아지트였고,(술 퍼마시던 건 진짜다) 강릉대군이 무감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세하고 여린 정서의 소유자이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임을 알고 강릉대군에게 고려왕이 되어 사람들을 도우라 응원하면서 자신도 강릉대군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겠다 고백하였다.[40]
문제는 강릉대군이 마시던 독주를 호기로 뺏어 마셨다가 대도의 통금 시간을 위배하고 잠들어버렸고,[41] 결국 강릉대군은 자신이 부다시리를 밖에 빼돌렸다 돌려보낸다고 위왕에게 거짓말했다. 위왕은 분노해서 강릉대군에게 12시간 동안 무릎 꿇린 뒤 위왕부에서 쫓아냈지만 이 고백을 계기로 부다시리에게 제대로 꽂힌 강릉대군은 곧바로 토곤테무르를 찾아가서 고려왕이 되어 고려 정국을 안정시킬 테니 부다시리를 달라 요청하였고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던 토곤테무르는 그대로 인장을 찍어주어 위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혼인하게 된다. 부다시리는 공민왕에게 더 이상 술 마시지 말고, 적어도 측근들은 신용해줄 것이며, 자신만을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강릉대군은 '죽은 뒤에도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후 원 역사에서 그랬듯이 중년 시절에 사망하고 공민왕이 절망에 빠지는 미래를 꿈으로 수차례 보아 불안함에 떨었지만, 본작에서는 역사개변으로 인해 70 가까이 무탈하게 살았다. 공민왕보다 1년 빨리 사망했으며 불교를 믿어 내세에서 공민왕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설정상 대단한 미인이다. 외전에 따르면 소녀 시절에는 '대도 제일의 미녀 중 하나이자 원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 불렸고, 공민왕이 강릉대군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태양 같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위왕 베이르테무르가 중증 딸바보 노릇을 해서 주위에서 질려할 정도였다. 주인공의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하도 염장질을 해서 우스갯소리로 진 히로인, 로판 여주인공 드립이 있었는데 외전의 과거편이 나오면서 로판 여주인공 취급을 확실히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21세기에 환생하여 전생처럼 남편과 연애결혼을 했다고 한다. 출신은 정확히 안 나오지만 본작에서는 21세기에도 원나라가 고려제국의 제후국으로나마 존속하는 만큼 정황상 챠브이처럼 원나라 종실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이 군복무하러 군대 갔다가 레토나 사고를 당하자 등짝스매싱을 날리기도 했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전생처럼 아들 둘과 딸 하나인 듯하다. 292화 제국위키에 따르면 사후 고려에서는 인덕황후(仁德皇后)로 추존되었으며, 원나라에서도 원 역사처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 챠브이
본작의 히로인으로 왕진의 처. 왕진이 1357년 처음 대도에 갔을 때 어린 소녀로 처음 만났다. 왕진이 유행시킨 디퓨저와 비누를 어머니가 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왕진에게 혼자 찾아와서 달라고 요청했고, 왕진은 작고 움츠러든 모습이 다람쥐 같다고 생각해서 탕후루를 먹인 뒤 디퓨저와 비누 일부를 나눠줬는데, 얼마 뒤 왕진에게 다시 찾아와서 동심결(同心結)이 담긴 상자를 주었다. 왕진은 이게 뭔지 못 알아봤지만 노국공주는 이를 알아보고 어른이 되면 알 거라고 키득거렸다.[42] 왕진은 이때까지만 해도 방계 황족 A로만 생각했지만 훗날 토곤테무르의 딸(!)임이 밝혀지고, 왕진은 충렬왕 이후 최초로 대칸의 딸과 혼인한 고려 왕족이 된다. 55화에서 바얀후투그 황후가 한 말에 따르면 챠브이의 친어머니는 말단 재인(才人)이었는데, 딸이 없던 바얀후투그가 딸 하나 키우고 싶어서 양녀로 삼았었다고 한다.[43]
챠브이는 처음 왕진을 만났을 때부터 반해서 혼인을 꿈꿔오고 있었지만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외전에서는 토곤테무르와 바얀후투그 황후의 주선으로 결혼하기 전, 연쇄살인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챠브이의 전속 시녀를 구출하기 위해 동행했다가 서로 친해지는 에피소드가 외전으로 나온다. 혼인 시기는 나오지 않지만 토곤테무르의 친위 쿠데타를 기점으로 하고 원 역사와 동시기에 벌어졌다는 것을 보아 1364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에필로그에서는 21세기에 원나라의 공주로 환생해서 전생처럼 다른 공주와 함께 고려 세자와 맞선을 볼 예정이었다가 도망쳤는데, 같은 이유로 도망친 남편의 환생과 재회하고 남편의 청혼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왕진과는 금슬이 무척 좋지만 질투심도 세다고 한다.[44] 왕진이 너무 장수해서(향년 100세) 챠브이가 훨씬 일찍 사망했다고 하며, 후궁 1명이라도 있던 공민왕과 달리 왕진은 평생 챠브이 외에 처첩이 단 1명도 없던 당대 굉장히 특수한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고 한다. 292화 제국위키에 따르면 사후 고려에서 예성황후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며, 토곤테무르의 막내딸이라고 한다.[45]
작가의 전작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에 나온 서브 히로인인 아이신기오로 마카타가 주인공과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독자들이 많아 그 대신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왕진(王珍)이 가진 용의 피를 탐내 이성계의 장녀로 의태한[46] 이아린(李婀鱗)이 히로인이었다. 주인공의 나이가 1365년생에서 1352년생으로 앞당겨지고, 당시 이아린의 캐릭터가 너무 판타지적이라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 점도 히로인이 바뀐 원인 중 하나일 듯하다.
- 왕운
왕진이 챠브이와 혼인하고 얼마 안 있어 태어난 아들로, 이후에 태어난 자식들(2남 2녀)은 상당히 뒤늦게 태어나서 동생들과는 터울이 크다. 토곤테무르의 친위 쿠데타(1364~1365)가 왕진의 도움으로 성공하고 얼마 뒤에 왕진이 챠브이와 혼인했기 때문에 1360년대 중반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름은 정세운(世雲)의 '운' 자에서 따왔다고. 전투력은 별로 없는 듯하지만 머리는 상당히 좋다고 묘사된다. 왕진이 공민왕이 죽고 고려 태왕이 된 뒤에는 아버지의 원나라 섭정직을 물려받아 정무를 보았지만, 운동을 안 해서 몸이 퍼지자 티무르와의 만남으로 깨달음을 얻은(?) 왕진이 단련 좀 하라고 한동안 갈궜다고 한다. 왕진이 생전에 양위를 했기 때문에 태왕이 된 것으로 보이나 왕진이 100살까지 산 탓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한다.
- 왕아미(王阿彌)[47]
노국대장공주가 낳은 둘째이자 딸로, 1364년생이다. 어머니인 노국대장공주가 워낙 난임 체질이다 보니 현대에도 보기 드문 12살 차이의 친남매다.[48] 공주라는 특성 때문에 공민왕이 대놓고 예뻐해서 왕진이 좀 불편해했다. 그래도 여동생이다 보니 왕진도 부담 없이 잘 대해준 편이었다. 남장하고 밖에 나갔다가 마찬가지로 신분을 숨겼던 원 황태자와 만나기도 했다. 이방과와 원나라 황태자의 구애를 받았다가 황태자가 황제가 된 뒤 제2황후가 되었다. 이전부터 아미는 이방과에 대해 '친오빠보다 더 오빠같다'는 평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안 봤던 모양이지만, 독자들은 이방과가 불쌍하다는 평이 많았다. 남편인 세샨과는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세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남편의 사후 대칸이 되었다. 이후 에필로그에서는 전생처럼 같은 부모형제 밑에서 환생한 것이 암시되며 이방과의 환생과 혼인 예정이라고 한다.
- 왕우
노국대장공주가 낳은 셋째이자 차남으로, 원 역사의 우왕(禑)과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태어난 시기도 우왕과 다르며 나이도 주인공의 장남인 왕운보다 연하이다. 이 때문에 형, 누나보다는 나이가 비슷한 조카인 왕운과 더 친하다고. 종종 까불거리다가 어머니에게 혼나는 모습이 많다.
작가의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모니노와 동일인물이었고,[49] 공민왕은 모니노의 어머니를 죽이고 정체를 숨긴 채 절에서 승려로 만들었다. 왕진(王珍)이 장성하자 마음이 바뀐 공민왕이 궁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일찍부터 모니노의 정체를 눈치챈 권문세족이 공민왕과 왕진(王珍)을 죽이고 꼭두각시로 내세우고자 어릴 때부터 세뇌하고 있었고, 모니노 본인도 멍청하고 탐욕스러워서 이에 동조하는 건 물론 어리석은 판단만 보이다가 파멸한다. 마지막까지 나는 왕자라며 각종 찌질한 모습만 보여서 심문하던 이방과에게 두들겨 맞았고, 이런 모니노의 태도에 질린 왕진(王珍)은 네가 처신만 똑바로 했으면 왕자가 될 수 있었지만 너는 그 모든 기회를 날린 어리석은 자라 비난하고는 원 역사처럼 신돈의 아들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죽인다.[50]
- 덕녕공주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원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다만 원 역사와 달리 노왕과 결혼한 딸인 장녕공주가 대도 함락과 함께 포로로 잡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공민왕의 형수 대접을 받으며 고려에서 살다가 말년에 대도로 돌아가 딸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역사 개변으로 원나라 내부에서 고려의 위치가 상승해서 대도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공민왕이 형수에게 더 신경을 써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 명덕태후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원 역사에서는 공민왕의 기행과 우왕의 섭정 건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정치에 많이 개입했지만, 본작에서는 노국대장공주가 장수해서 공민왕의 정신이 안정되어 있었고 신돈은 왕진이 일찌감치 배제하는 등 고려의 국정에 개입할 일이 없어 별달리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명덕태후가 고려인 출신이다 보니 원나라 공주인 노국대장공주가 궁을 장악한 것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어쨌든 아들인 공민왕이 행복해하고 원 역사와 달리 무사히 태어나 신동으로 칭송받으며 잘 크고 있는 손자를 보며 무난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왕진에게는 본편에서 묘사된 위왕의 주책을 속으로만 부리는, 아들 공민왕처럼 겉과 속이 조금 다른 할머니였다고. 이를 보아 공민왕의 엄격한 츤데레 기질은 명덕태후의 유전인 듯하다. 작가의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주인공 왕진(王珍)이 아버지에게 반쯤 방치당한 채 성장하자 사망할 때까지 왕진(王珍)을 대신 양육한 인물로 나오며, 왕진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1.2. 전주 이씨
- 이성계
동북면의 권력자이자 왕진의 스승이다. 왕진이 고려를 개혁한 것과 더불어 스승이 된 순간이 역사개변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51] 야심이 큰 정치군인이지만 왕진과는 죽이 잘 맞는 편이며, 외전 언급에 따르면 이성계가 왕진을 아들처럼 아껴서 제자 자랑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자신이 키운 제자인 왕진과 나란히 군을 이끄는게 꿈이었는데, 정작 가별초라는 부대가 막강하다보니 왕진과 따로 떨어져 지휘를 하는 경우가 많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가, 명나라와의 일전 당시 남옥의 별동대를 격파하기 위해 왕진이 이성계와 같이 가게 되면서 꿈을 이루게 된다.
원래는 동북면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촌스럽다고 놀림당한 적이 있어서 퉁두란이나 사투리를 써도 개의치 않는 왕진 외에는 수도권 말씨를 쓴다.[52] 몽골식 이름이 있지만 본인은 몽골식 이름을 싫어해서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53] 원 역사처럼 초인적인 무용의 소유자라서 그 몽골인들 사이에서도 대단하다고 화제가 되었다.
본작에서는 왕진을 아들처럼 아껴서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지만,[54] 대신 가문 대대로의 영지인 동북면과 요서 일부를 받아서 '조선왕'이라는 이름의 제후왕이 되었고 이 지위를 차남인 이방과에게 세습시켜 주면서 다른 의미로의 '조선왕'이 되었다. 이후 21세기 에필로그에서 조선국이 고려 제국의 제후국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비록 (제후왕이 아닌) 일국의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원 역사에서 망탁조의보다 수단이 더 악질적이라는 평을 듣는 찬탈 및 왕씨 몰살이라는 흑역사가 사라지고 왕이 된 대가 말년에 겪어야 했던 가정 파탄도 일어나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훨씬 행복한 삶을 산 셈이다.
작중에서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은 언급되는 반면 나머지 자식들은 별다른 등장이나 언급이 없다. 신덕왕후와 그 소생 아들들의 언급도 아예 없는 것을 고려하면 원 역사에서 신덕왕후가 후계 문제로 사고 친 걸 알고 있는 왕진이 손을 써서 신덕왕후가 후처가 되는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55][56]
작가의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노국대장공주가 왕진(王珍)을 낳고 사망해 공민왕이 완전히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피폐해진 데다 상황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라 은밀히 야심을 품었지만,[57] 5살 때 왕진(王珍)의 무술 스승이 된 것을 계기로 왕진(王珍)에게 줄을 대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고, 경처 강씨(京妻)가 낳은 장녀인[58] 이아린(李婀鱗)을 왕진(王珍)의 아내로 만드는데 성공하면서 국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다만 고려 전황이 워낙 나쁘던 시기이다 보니 왕진(王珍)이 즉위한 뒤에도 한동안 전장을 떠돌아다녀야 했다고. 초안에서는 야심가에서 주인공의 조력자로 달라진 이성계의 심리 변화가 더 자세히 묘사되었고, 왕진의 호위로 자기 아들들을 맡겨 놓아서 리메이크되며 등장이 삭제된 이방간이 왕진(王珍)의 종자로서 여러 번 등장하며 이천계, 이방우, 이방의, 이방연도 잠깐 등장한다.
- 이지란
작중에서는 여진인 퉁두란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성계보다 4살이나 연상이지만 이성계에게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서열이 아래. 고려어를 이성계에게 배워서 동북면 사투리로 구사하기 때문에 은근히 깬다. 왕진의 첫 친위대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을 때는 빨간 모자를 쓰고 하트먼 상사 코스프레를 하며(...) 여진어와 각종 기행으로 해병문학을 절찬리에 찍으며 야만전사로 만들어 버려 왕진에게 트라우마를 주었고[59] 이후 고려의 후원 아래 건주여진의 우두머리가 되어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여진족들을 자기 휘하로 복속시키고 있었다. 이성계 일족과 고려 조정의 후원 덕분에 많은 여진족들이 생계를 후원해주는 이지란에게 복속되기를 택해 여진의 대추장이었던 호바투와 싸우기도 했다. 왕진에게는 친근하게 대하지만 왕진은 이지란을 나름 좋게 생각하면서도 이지란의 괴짜 기질 때문에 조금 꺼린다.
175화에 따르면 최영의 서녀[60]와 혼인했는데 어쩌다가 둘이 혼인하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라고 하며, 최영이 이지란을 볼 때마다 노려보는 것 때문에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정도라고 한다. 외전에서 진실이 밝혀지는데, 오랫동안 망나니 노릇을 하며 혼인하지 않고 노총각으로 살다 어느 날 밤중에 술집에서 사고 치고 도망치다가 실수로 최영의 집에 들어갔고,[61] 그곳에서 최영의 서녀에게 잘못 걸려서[62] 약점이 잡힌 채 최영의 서녀와 반강제로 어울려주다가 서로 눈 맞아버린 나머지 실수로 임신시켜(...) 최영에게 부형청죄를 했고 결혼한 뒤 아내에게 잡혀 사는 공처가가 되었다고 한다.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거라서 최영은 이지란이 자식을 여럿 가진 뒤에도 한동안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못하게 했고, 말년까지도 술 취하면 이지란을 깠다고.[63]
이지란이 최영의 서녀와 혼인한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지만 해당 언급이 처음 나온 시점이 1382년임을 고려하면 그 즈음에 혼인한 듯하다. 영비 최씨는 원 역사에서 1388년에 우왕의 비가 되기는 했지만 작가가 1390년대라 공인한 토구스테무르의 난 직후[64] 겉으로 보이는 최씨의 나이가 20대 후반이라는 언급을 보아 작가가 최씨의 나이를 올려서 설정한 듯하다.아니면 이지란이 천하의 도둑놈이고 최씨가 남편과 달리 조금 노안일 가능성도...
- 이방과
이성계의 차남. 이성계의 아들들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재(武才)를 지녀 이성계가 일찍부터 동북면의 차기 영주로 발탁되었다. 당시 동북면 일대의 영주는 철저한 배틀로얄로 정해졌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이 떨어지면 계승받을 수 없었는데[65] 장남인 이방우는 문무 모두 너무 평범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이성계의 판단이 있었고, 동북면의 영주이자 여진족들의 어르신 노릇을 하는 것 때문에 고려 조정의 경계를 사는 것을 고려해서 이방과를 일찍부터 개경에 있는 5살 연상의 왕진에게 맡겨서 교육과 인질 노릇을 함께 하도록 했다.
본작에서는 무관으로 임관하고 얼마 안 되어 공민왕의 딸이자 왕진의 여동생인 아미의 호위무사 노릇을 하게 되면서 아미를 어릴 때부터 돌보았다. 8살 아래였지만 자신을 잘 따르고 미인이었던 아미에게 반하게 되지만 아미는 이방과를 오빠 취급했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려서 실연당한다.[66]나이 차이는 넘어가자공민왕의 명령으로 정안왕후가 아니라 공양왕의 막내 여동생과 혼인했으며, 이후에도 실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독자들에게 동정심을 샀다. 이성계의 무력을 가장 잘 이어받았는지, 반란으로 인해 포위된 대도를 몇백 기로 돌파해 탈출하는 등 무위를 뽐내는 장면이 유독 많다. 이때 실연의 고통까지 담은 압도적인 무위 때문에 몽골군이 '추트구르'[67]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 정도. 그러나 이때 회복 불가의 부상과 장애가 생겨 분노한 왕진이 토구스테무르를 친히 고문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성계가 조선왕이라는 제후왕이 되면서 그 후계자 자리를 이방과가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 21세기에 이방과의 환생이 아미의 환생과 약혼했다는 암시가 나온다. 본작의 이방원과 이도는 고려의 중앙 조정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왕 자리는 이방과의 후손들에게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왕진(王珍)과 나름 친하다고 언급되며 모니노를 직접 심문하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던 모니노를 두들겨 패는 성깔을 보여준다.
- 이방원
이성계의 5남. 본작에서는 고려가 잘나가고 있고 아버지인 이성계도 왕진의 스승으로서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원도 고려와 왕진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방원의 철퇴 밈을 알고 있던 왕진은 이방원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방원의 성질머리를 걱정해서 이방원이 태어나자마자 정몽주의 제자로 넘겼고 이방원을 처음 봤을 때는 '철퇴를 멀리해야 할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진이 쇠몽둥이 들고 땡중들을 때려잡은 일화와 왕진이 유년기에 철퇴를 들고 적을 제압한 일화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아버지에게 철퇴를 배워서 쓰는 기행을 선보여, 이 소식을 들은 왕진은 뒷목을 잡았다고.
주체가 어릴 적 정체를 숨기고 고려에 놀러왔을 때 주체를 형이라 부르며 잘 따라서 독자들이 뿜었다.[68] 본작에서는 정몽주와 이성계가 빨리 친해진 덕분에 정몽주와 그 제자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0대의 나이에 서경에서 왕진이 주관한 최초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해서 관직에 나가게 된다. 반 여진족, 동북면 촌놈 소리를 듣던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최초로 과거 급제자, 그것도 실력으로 뽑힌 거라서 이성계는 굉장히 기뻐했다.[69][70]계책이 필요하면 계책을 써서, 안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습한 방책을 강구해서라도 짓뭉개 없애야지요. 정 방도가 없다면, 소인이 직접 철퇴라도 들고 쳐들어가 놈들을 박살 내겠습니다. 고려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미 위대하신 저하께서 천선원의 땡중들에게 쇠뭉치를 직접 휘두르셨듯이요. - 국가보위성에 스카우트될 때 한 말
특유의 유능함과 성깔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국가보위성(국정원 비슷한 조직)에 스카우트되었고, 이인임에게서 수장위를 물려받게 된다.[71] 이런 이방원의 성깔을 우려한 왕진은 그 성깔을 대신 풀고 오라는 의미에서 주체에게 보내 한동안 주체의 옆에서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다가 세월이 상당히 지난 뒤 귀국한다. 처음 주체를 만났을 때는 주체가 황자인 걸 몰라서 주체가 황자인 걸 알고는 서로 당황했지만 곧장 친해졌고, 주체는 이방원이 서생이라 들었는데 철퇴 들고 킬킬거리는 걸 보고는 좀 이상하지 않냐고 속으로 딴지를 걸기도 했다. 이후에는 각종 중책을 맡으며 고려 조정에서 고위 관료로 이름을 날렸다고. 원 역사처럼 원경왕후와 혼인해서 원 역사와 같은 아들들을 두었고, 1~3남 요절도 그대로 일어났다고 한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주인공의 호위 시중을 들며 일찍 친해진 형들과 달리 과거 공부를 하느라 나중에 합류한다. 아버지를 닮아 덩치가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형들과 달리 상당히 호리호리한 체형이고 말 타기도 보통이지만[72] 매서운 야심가로 묘사된다. 그래도 왕진(王珍)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될 생각은 없고 이복 여동생이 왕진(王珍)과 혼인한 인맥을 이용해 권세를 잡는 쪽이 목적.본인이 외척이 되었네조선 건국 이전까지는 계모 강씨와 이복동생들과 친했기 때문에 본작에서도 친하다고. 왕진(王珍)이 명나라로 입조(入朝)할 때 사신단에 형 이방간과 함께 동행하며 배멀미로 고생했지만, 귀국 중 권문세족이 왕진(王珍)을 죽이고자 파견된 자객들이 제압된 뒤 사기를 쳐서 계획을 알아내고는, 왕진(王珍)의 친필 서신을 받아 몰래 개경으로 돌아가 이복 여동생을 통해 공민왕을 만나 서신을 전하고 대피시키는 걸 돕는다.[73]
- 이도
이방원의 6남. 원 역사처럼 이방원의 1~3남은 영아기에 사망해서 실질적으로는 3남이다. 원 역사 세종의 천재성을 잘 알고 있던 왕진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도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이도라는 이름도 정황상 왕진이 지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도에게 책을 잔뜩 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려먹으려 했고,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를 해서 아들바보였던 이방원이 매우 기뻐했을 정도.[74] 장원급제를 하자마자 미래전략실로 개편된 집현전에 파견되는데, 원 역사와 반대로 집현전의 선배였던 황희, 맹사성의 하급자가 된다.[75] 원 역사에서의 인연 때문인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끼며 빨리 적응했고,[76] 엄청난 재능 덕분에 곧장 남들의 몇 배의 성과를 냈으며 특유의 기술공학적 재능이 발휘된 끝에 어쩌다가 증기기관 개발(?!)을 해버린다.[77][78] 와중에 상급자였던 이천과 최산해, 장영실은 물론 화통도감의 관원들을 죄다 갈아댄 건 덤이다.
너무 뛰어난 재능 때문에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했지만[79] 미래인 치트보정으로 이도가 개발한 기술을 모조리 알아내고 보완책까지 제시하는 왕진에 의해 처음으로 이해자가 생겼다고 생각하여 충성하게 되고, 아라비아 수학과 공학 연구 과정에서 기존의 한자 체제의 불편함을 느끼고 훈민정음을 고안한다.[80] 왕진의 비호 덕분에 연구와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어 훗날 명신이자 수학자, 공학자, 언어학자로서 이름을 날리며 산업 혁명의 기반을 다졌다고 한다. 왕진이 이도의 몸 건강을 우려해서 몸 관리도 신경 써서 해준 덕분[81]에 원 역사보다 오래 살았다고. 워낙 뛰어난 재능 덕분에 순식간에 선임들을 제치고 높은 자리[82]에 올라 왕진 못지않게 부하들을 갈아버리는 악랄한 상사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며, 원 역사 세종대왕의 카리스마는 어디 안 가서 신하들과 대장장이들은 마치 왕진을 상대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위압감을 느낀다고 묘사된다.패왕색 패기원 역사에서 수학과 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점을 반영했는지 어린 시절 티무르 제국에서 수입한 수학과 공학 관련 서적을 제일 좋아했고, 이 때문에 태학 시절 인기 없던 공학을 전공하던 얼마 안 되던 인물이었다.
4.1.3. 관료
- 정몽주
본작에서는 왕명을 받고 왕진을 가장 먼저 따르게 된 문관 측근이 된다. 어쩌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세자 보좌관이 된 이성계와는 친한 친구로 지낸다. 매번 엄격 근엄 진지한 북부대공 이성계를 철딱서니 없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보통 남들은 베일까봐 입도 벙긋 못하는 이성계의 약점을 거침없이 놀리고, 이성계는북부대공답게정몽주의 약점인 재력으로 엿을 먹이며 보복하는 패턴이 많다.중년이 넘어서도 계속 이랬으니 찐친이라 할만하다.문관 중 가장 먼저 측근으로 들어간 뒤로 왕진이 줄줄이 광인들을 아래로 들이면서 고생길이 열리는데 그러다 온화하던 얼굴이 금강역사로 변하며 각성, 후임들을 쥐잡듯 잡으며 고려를 위해 갈아넣는다.[83] 원 역사에서 철퇴에 맞아 죽은 탓인지 철퇴를 보거나 언급이라도 되면 저도 모르게 두통을 앓는다. 작중에서 왜인지 모르게 신하 믹서기로 개그 취급을 자주 당하지만 외교관으로 나서면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주는 것도 특징. 오우치와 대립하는 무로마치 막부를 협박해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거나, 주원장이 몸져 누운 뒤 주표를 겁박해 보상을 뜯어내는 등 외교관으로서는 작중 탑급이며, 외교 능력이 초반부터 워낙에 좋았던지라 작중 초반에는 외교 성과가 목표를 훨씬 초과달성하는 바람에 공민왕에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왕진이 고생하기도 했다.
작가의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왕진(王珍)이 일찍부터 총명한 모습을 보이자 5살인 왕진(王珍)에게 성균관 생도같은 고려 최고의 엘리트 집단과 같은 난이도의 성리학 교육을 강요하는 막장 스승(...)으로 등장한다. 조선 원자-세자에게도 요구하지 않는 수준의 무리한 교육 난이도라서 아직 성리학 원리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고려 조정에서는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고. 그래도 광신적인 성리학 추종자이자 유교 탈레반인 제자들보다는 정상적이라고 한다. 이에 원한을 가진 왕진(王珍)은 즉위한 뒤 정몽주를 뼈 빠지게 부려먹고, 정몽주는 하급자들을 내리갈굼하는 갑질 상사가 되었다고. 어린 주인공에게 무리한 난이도의 성리학 교육을 강요하는 장면은 리메이크되면서 삭제되었다.[84] 초안에서는 전장을 후방에서 보좌하는 등 정몽주의 군사적 능력이 주로 묘사된다.
- 최영
고려의 충직한 중신, 작중에선 고려에 대한 충심은 물론이고 장사성의 난 진압을 위해 파견 갔을 때 겪은 참혹한 경험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는 나라를 위해 힘쓰는 면이 강조된다. 그 경험이란 고려 본토에서 고작 2천명만 징발되다보니 요동에서 추가로 징병을 해야 했는데, 정작 요동에 있는 고려 백성들은 무신정권 당시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자 이주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자신들이 왜 징병되어야 하냐고 항의하는 것에 떳떳하지 못했던 기억이었다. 이 때문에 옷치긴 왕가에서 고려의 요동진출을 막으려고 침입해오자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선봉에 서서 싸웠다. 토구스테무르의 난이 끝나고 얼마 뒤에 은퇴해서 유경(평양)에서 은퇴 라이프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하필 자신이 나이 들어 가진 서녀가 이지란과 눈이 맞아 속도위반을 해버려(...) 결혼한 건 때문에 술에 취하면 이지란을 깠다고 한다.
작가의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기성 권문세족과 뜻을 함께하며 신진사대부를 경계하는 모습을 주로 보이는 반동인물이었다 권문세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목숨 걸고 공민왕을 구출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기성 권문세족이 문제가 많다는 걸 알면서도 신진사대부를 적대하고 그들의 편을 들었던 건 가문 때문이 아니라[85] 성리학 원리주의를 추종하는 유교 탈레반인 신진사대부는 고려 왕조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공맹의 가르침에 나오는 자신의 이상 속 나라만을 추종할 뿐이라 공민왕과 왕진(王珍)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이상과 맞지 않다고 간주하면 고려 왕조를 배제할 것이라 여겼고, 권문세족은 부패한 자들이기는 해도 기존 고려의 체제와 왕조를 건드릴 의지는 없기 때문이었다고. 정몽주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중간이라 덜 경계한다고 한다. 원 역사에서 이들이 보인 행보를 고려하면 상당히 정확한 평이다.
- 정도전
왕진 피셜 빨간 맛 나는 또라이. 사상 이전에 타고난 천성 자체가 상당히 맛이 가 있고 극단적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작중에서 벌인 또라이짓만으로도 왕진을 여러 번 뒷목을 잡게 했다. 예를 들면 불신지옥, 공맹은 위대하시다, 공맹의 요술봉, 유학자 형제단 등.[86] 초반에는 불교를 증오하고 성리학을 광적으로 추종하는 광신적인 모습을 보였고, 또래 성리학자들과 함께 '불신지옥(...)'이라는 클럽을 만들고, 불교를 손보기 위해 일부 절을 제압하라고 했더니 왕진의 허락 없이 최무선의 화약을 빌려 화약으로 절을 불태우고 공맹은 위대하시다를 외쳤다가유교 탈레반스러운 행적에분노한 왕진이 아주 개경의 모스크에 가서 이슬람으로 개종이라도 할 거냐 닦달하고는[87] '성리학이 한 사회의 주류가 되고 과거의 불교처럼 타락했을 때의 구체적인 대책을 여러 가지 내놓으라'며 한동안 절의 독방에 가두고 반성문을 왕창 써오게 만들기도 했다.[88]
맹자를 자주 인용하는 급진주의 사상 때문에 초반에는 경계를 많이 받지만, 여러 사람에게 여러 차례 조교되며 매운 맛이 조금 빠지면서 훌륭한 측근이자 노예로 변신한다. 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공민왕의 최측근이자 대신인 이인임에게도 들이박는 등 까칠함은 여전한 편. 주군인 왕진은 요순의 재림으로 철석같이 믿으며 고려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펼치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넣는다. 그 과정에서 염전과 제철소에서 스스로 일하며 신염철론을 저술한 끝에 고려에 실용주의 유학이 꽃피는 계기가 된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가장 감당할 수 없는 야심가이자 몽상가로 묘사된다. 광신적으로 성리학을 추종하는 유교 탈레반으로 고려 왕조를 섬기는 게 아니라 오로지 성리학에 나오는 이상세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체제도 왕조도 다 파괴할 위험분자라서 최영이 신진사대부를 적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왕진(王珍)도 이 점을 알고 있어 정도전을 다소 경계하고 있지만 써먹기에 따라 다르다며 정몽주의 주선으로 처음 만났을 때 '진짜 생각'을 말하라 압박면접에 들어가자 자신의 본심을 가감없이 드러내었고,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몽상가적이라 정도전의 구상 대부분이 기각되었지만 그 불도저 같은 성격 때문에 대간 일은 꽤 잘했다고 한다. 유교도 성리학도 수단 중 하나로만 인식하는 왕진(王珍)의 특성상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개기면 안 된다는 인식은 한다고.
- 이인임
본작에서는 타락하지 않고 충실하게 고려의 신하로서 제 일을 다했지만, 특유의 음험하고 잔인한 성격은 어디 안 가서 국가보위성의 초대 수장이 되어[89] 왕진조차 모르는 각종 공작을 펼치기 일쑤였다. 공민왕이 왕진을 아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어서 그 점을 가지고 공민왕에게 좀 더 솔직해지라고 짓궂게 농담을 하기도 했다.어딘가에서는 평생의 숙적이였던정도전과는 사상 차이가 크지만 수단에는 뜻이 많이 통해서 보위성 업무에 한해서는 죽이 잘 맞다고. 자신이 늙어서 은퇴하기 전 보위성의 수장위를 물려줄 마땅한 인재가 없어 물색하다가 10대 중반의 이방원에게 자신과 동족의 재능을 엿보고 그대로 후계자로 지명한 뒤 은퇴한다.아니 그토록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인간들이 입장만 바꿔도 이렇게 인간관계가 변할 수 있는 건가?(원 역사의 행보까지 반영하면) 치세에는 능신, 난세에는 간웅이라는 표현이 참 들어맞는 인물이 되었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왕진(王珍)이 태어난 뒤 공민왕의 총애를 점차 잃어가자 완전히 타락해서[90] 권문세족과 손잡고 공민왕에 대항하다 황산대첩으로 인해 왕진(王珍)이 군부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각 잡고 권문세족의 배를 째려 하자 공민왕이 몰래 숨겨두었던 모니노를 세뇌하고는 공민왕과 왕진(王珍)을 죽이고 모니노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정권을 잡으려 했지만, 오판과 불운으로 실패하고 붙잡힌 뒤 사형당하고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공민왕과 왕진(王珍)을 개인적으로는 마냥 나쁘게 보지는 않아 왕진(王珍)과의 관계는 여러모로 복잡했다. 리메이크된 본작에서도 이인임을 강약약강, 권력에 영합하기 위해 형제도 팔아버리는 인간이라 묘사되는 등 타고난 천성이 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설정은 바뀌지 않은 듯하다.
- 마화
원 역사의 명나라 환관 정화. 운남성 회족 출신으로 당시 회족은 중앙아시아계 유전자가 제법 남아있어 백인에 가까운 외모와 큰 덩치를 가지고 있다고 서술된다. 운남성 회족들은 당시 색목인의 피가 짙어서 운남성에 있던 몽골 황족의 편을 들었고 명나라의 편을 들지 않았는데, 이들이 패망하자 살기 위해 각종 고생을 해가며 베트남으로 도망쳤다가 배를 구해 고려로 도망치려 했지만 명나라 수군에게 나포되었다. 이대로 집안 사람들이 다 죽고 자신은 환관으로 팔려갈 뻔했지만 그때 지나가던 고려 수군이 구해주었고, 이 때문에 명나라의 환관이 되지 않았다.[91] 이전부터 소문 때문에 동경하던 고려 세자의 숭배자가 되어 장사 문제로 들렀던 세자의 열혈 숭배자인 최대식과 만나고[92] 최대식을 따라 고려로 갔지만, 오자마자 국가보위성에게 붙들려서 한창 사상검증과 심문을 당해야 했다. 그래도 여차저차 받아들여진 뒤에는 왕진의 후원 아래 수군 제독으로 크게 성공한다.
이슬람식 이름인 '무함마드'라는 이름도 있는데, 왕전은 정교분리를 지키면 무슨 종교를 믿든 개의치 않기 때문에 당당하게 이슬람교 신자 노릇을 하는 중. 왕전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충성심을 가지고 있으며 알라의 계시를 받은 자라 여기고 있다. 외전에서는 고려 황제 시절 왕전의 명에 따라 티무르 제국-맘루크 술탄국-동로마 제국-베네치아 공화국 순으로 서방 원정을 하고 있으며, 도중에 자신들에게 까분 해적들을 전멸시키기도 했다.[93] 베네치아와의 교류를 마치고 돌아온 자리에서 다음 항해지로 아메리카 대륙을 권유받았다.
- 이종무
외전에서 고려 원정대의 일원으로 등장. 왕전이 그려준 아프리카 지도와 해로를 따라 희망봉을 돌파해서[94] 아프리카를 시계 방향으로 빙 돈 뒤 포르투갈 왕국의 주앙 1세와 만나 대항해시대를 앞당기게 된다. 아내가 나이만 부 출신의 몽골인으로[95] 네스토리우스파가 현지화된 경교(景敎) 신자라고 한다.
- 황희
정몽주가 연그리고 이성계가 절친을 엿먹이려 대놓고 학당 간판에 성명을 박제한학당인 정박사도(鄭博士徒)에 속했던 유생 중 1명으로, 맹사성과 동창이며, 서경에서 열린 첫 번째 과거시험의 급제자 중 1명으로 이방원과 과거급제 동기이다. 이방원은 국가보위성에 납치되어(...) 스카우트되었지만, 황희는 한동안 동기들과 함께 한창 건축 중이던 서경에서 벽돌 올리고 기와 굽는 등 각종 노역에 시달렸다고 한다. 외전에서 이도가 집현전에 파견되었을 당시 상관으로 등장하는데, 이도보다 34세 연상이다 보니 어르신 분위기를 풍긴다. 성격이 괴팍해서 맹사성 외에는 친구가 없다고 묘사되며, 유능하지만 부패하고 하급자에 대한 갑질이 심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왕진은 맹사성과 황희를 집현전의 '당근과 채찍'이라고 불렀을 정도.
당시까지만 해도 절친인 맹사성과 함께 차기 재상 후보로 각광받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집현전에 파견된 이도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순식간에 자신을 추월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생에 부하였던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심리적으로 자꾸 위축되기 때문에 맹사성에게 신세한탄을 하면서 절규하는 게 압권이다. 특히 죽을 때까지 황궁에서 부려먹힐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는데, 결국 원 역사처럼 90세까지 절찬리에 악덕 상사 둘에게 부려먹혀서 진심으로 은퇴시켜 달라고 절규하곤 했지만 11살 연상인 왕진이 100살까지 산 탓에 원 역사만큼 오래 정계에서 일하며 더 쥐어 짜였다고 한다.[96]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왕진(王珍)이 즉위한 뒤 입사하는데, 왕진(王珍)이 옹정제 모드로 신하들을 갈구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들은 후회하기 전에 당장 때려치우는 게 네 구원이라고 경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자폭을 한다.
- 맹사성
정몽주의 학당인 정박사도에 속한 유생 중 1명으로 황희와 동창이었다. 외전에서 이도가 집현전에 파견되었을 당시 상관으로 등장. 이도보다 37세 연상이다 보니 어르신 분위기를 풍긴다. 황희가 부하들에게 갑질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맹사성은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부하들을 챙겨줘서 황희와 함께 집현전의 당근과 채찍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래도 괴팍한 성격인 황희의 얼마 안 되는 친구다. 이도가 파견되었을 때 처음에는 잘 챙겨줬지만, 황희가 이도가 나중에 자신들을 추월해서 쥐어짤 것 같다며 절규하자 뒤늦게 불길함을 느낀다.
- 하륜
이도가 등장하는 외전에서 승상으로 등장. 증기기관 관련 시험에서 집현전 관원들이 황희, 맹사성 외에 다 불합격한 데다 태학 생도였던 정인지만도 못하다는 이유로 집현전 관원들을 며칠 동안 감금하면서 히스테리를 부린다. 여담으로 하륜은 1348년생이라 왕진보다 4살 연상이다.
- 정인지
이도 등장 외전에서 등장. 1397년생으로 이도와 동갑이라 이도가 최연소 과거 급제자로 막 관청에 입사했을 당시 아직 태학 생도였다. 태학에서 인기 없는 과목인 공학을 전공하던 몇 안 되던 인물. 증기기관이 막 개발되었을 때 이 기물을 어떤 식으로 국정에 사용해야 하냐는 문제가 나오자 '그런 기물이라면 제작이 매우 힘들 테니 제작하기 쉬운 구조로 개편해서 대량생산을 해야 하지 않겠냐'라는 대답을 내놓아서 왕진에게 1등 답안으로 꼽히고, 그대로 장원급제를 해서 화통도감에 파견되어 이도와 함께 파트너로 일하게 된다. 원 역사에서 행운의 장원급제로 이름 날린 것과 비교하면 제대로 들어온 셈. 여기서는 원 역사와 같은 오명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2. 원나라
4.2.1. 황실
- 토곤테무르
원나라의 황제. 1357년 당시에는 만력제마냥 정사를 내팽개치며 원나라 정계를 개판으로 만드는 중인 암군의 모습을 보인다. 황자 시절과 재위 초기에 워낙 불우한 일들을 많이 겪어서 번아웃 증후군이 세게 와버렸다고. 왕진이 처음 대도에 왔을 때 왕진이 고안한 삽겹살-쌈장-소주-소금기름장[97]-고려 두부-백김치[98] 세트 요리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여러 번 시전했는데 황자 시절 고려 대청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정신의학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던 왕진의 도움으로 정신적 상처가 치유되는 모습을 보인다. 목공예에 능하며 예술적 안목이 있어서 예술가들을 후원해주는데 악덕 상사처럼 쥐어짠다고 한다.[99]
직감적으로 자신의 사후 쿠빌라이계 황금씨족이 이대로 가면 망할 것임을 깨닫고 왕진을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었으며,[100] 자신이 죽고 얼마 뒤 아리크부카계가 오이라트, 명나라, 킵차크 칸국과 손잡고 원나라를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현실화되기도 했고 세샨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미리 왕진의 꿈에 나타나서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292화 제국위키에 따르면 원 역사처럼 원 혜종(惠宗)의 묘호를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불명이나 홀로 반세기(50) 가까이 재위했다는 점(원 역사에서는 37년)과 토곤테무르가 사망했을 당시 티무르가 막 호라즘의 옹기라트 왕조를 무너뜨리고 우르겐치를 함락시켰다는 것(1379)을 보아 1379년으로 추정된다. 1379년에 사망했다 가정하면 1320년생이므로 59세에 사망한 것이 되며, 1333년에 즉위했으므로 45년을 재위한 것이 된다.
- 바얀 후투그 황후
토곤테무르의 제1황후. 칭기즈 칸의 정실인 보르테 우진의 친정이자 원나라 외척 자리를 대대로 장악해온 옹기라트 부족 출신이다. 그러나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취향이라고 한다. 왕진이 1357년 처음 대도에 왔을 때 기황후에 대항하기 위해 포섭하려고 했던 대상이었다. 바얀후투그 입장에서도 1355년 2살 난 첫아들 친킴을 잃고 '세샨'이라는 아들을 가졌는데, 제2황후인 기씨와 그 아들인 아유시리다라가 조정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미래를 위해 고려 왕실과 손잡는다. 기황후에게 어지간이 쪼였는지 상당히 초조한 모습을 보이며 왕진에게 몽골식 이름인 '카사르테무르'를 지어주고 원 황실의 후견인이 되었다.[101] 친딸이 없어서 왕진을 자신의 사위로 삼기 위해 양녀를 물색하다 우연히 왕진과 엮이게 된 토곤테무르의 막내딸 챠브이를 자신의 양녀로 삼았고[102] 옹기라트부와 왕진의 관계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정실이라서 토곤테무르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며, 토곤테무르도 바얀후투그의 식견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다. 아유시리다라가 죽고 세샨이 유일한 적자가 되자 토곤테무르를 설득해서 챠브이를 왕진과 혼인시켰고, 이후에도 왕진의 후견인이 된다. 토곤테무르가 죽자 토곤테무르와 사전에 논의한 대로 쿠릴타이를 주도하여[103] 세샨을 차기 대칸으로 추대하고, 세샨의 안다(의형제)인 왕진을 토곤테무르의 서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히는 등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모습을 보여 토곤테무르의 서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예정에 없던 티무르의 등장으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을 때 진압하는 모습을 보인 건 덤. 이후 세샨의 치세를 충실히 도와주며 훌륭한 조언자의 역할을 했지만, 토구스테무르(원 역사 천원제)가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비소로 독살당한다. 죽기 직전 반란군이 자신과 차칸테무르를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을 깨닫고, 무(武)가 부재한 세샨이 이를 진압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세샨에게 왕진을 불러들일 것이며 옹기라트부 출신의 제1황후와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 기황후
토곤테무르의 제2황후. 몽골식 이름은 울제이쿠투그인데, 소박한 성격인 바얀 후투그와 달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이라고 한다. 토곤테무르가 번아웃이 와서 정사를 내팽개치자 국정을 장악하고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몽골 귀족들에게 경계를 사고 있다. 공민왕이 오빠인 기철을 비롯한 친족들을 죽인 것 때문에 공민왕을 증오하지만, 원 조정에서는 공민왕이 교묘하게 눈치를 보는 것 때문에 바로 조질 필요가 있냐고 반응 중이다. 작중 초반에는 토곤테무르가 정사를 내팽개친 상태라서 기황후와 그 일파가 국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왕진이 대도에 와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는 로판의 3류 악녀같은 모습을 보여서 독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작중 초반에 토곤테무르의 친위 쿠데타 여부로 몰락한다.
- 아유시리다라
기황후의 아들로 원나라의 황자. 토곤테무르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다시 장악할 때 일이 꼬여서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반란수괴로 지정되어 효수되지만 토곤테무르는 아끼던 장남의 죽음에 매우 상심했었다.
- 세샨
바얀후투그 황후의 아들로 1357년생이다. <원사종실세계표>에 따르면 바얀후투그 황후는 친킴(眞金)과 설산(雪山)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작가 후기에 따르면 친킴과 달리 설산 황자는 발음을 찾을 수 없어서 '세샨'이라고 하였으며 사서에 따라 설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지만 본작에서는 있는 것으로 설정하였다.[104][105] 바얀후투그 황후는 장성한 황자인 아유시리다라를 경계하여 아들의 지지세력을 만들고자 했고, 아기 시절 8촌 형제인 왕진과 의형제 지간이 된다. 어머니를 닮아서 유능하고 현명하지만 온화하고 무(武)가 부재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대라면 모를까 당장 나라가 망할까 말까 하는 전란의 시대에 맞는 황제는 아니었고, 이를 우려한 토곤테무르는 자신이 죽기 전 왕진을 불러 안다의 의식을 시킨 뒤 세샨의 형제들보다도 더 밀어주었다. 그렇게 세샨은 원나라의 내정을 훌륭히 이끌었고, 왕진도 그런 세샨과 공생하면서 적당히 잘 살고 있었지만... 그놈의 몽골 제국 민속놀이인 반역이 다시 터져버려 반란군에게 붙잡힌 뒤 고문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반란이 진압된 뒤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얼마 안 가 죽게 된다. 죽기 전에 자신과 왕아미의 아들을 왕진에게 맡겼으며 의도치 않게 왕진의 운명을 완전히 꼬아버리고 만다. 제1황후로 옹기라트씨 여성이 있었고 제2황후로 왕아미가 있었는데 왕아미를 더 총애해서 왕아미와의 사이에서만 자식이 있었다고 한다. 292화 제국위키에 따르면 원 역사의 아유시리다라를 대신하여 원 소종(昭宗)의 묘호를 받았다.
- 위왕 베이르테무르
원나라의 황족으로 위왕(魏王)이자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106] 작중에서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토곤테무르의 5촌 당숙이자[107] 공민왕의 계모였던 조국장공주의 형제이기도 했다.[108] 토곤테무르의 5촌 당숙이지만 당시 위왕부는 상당히 쇠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지가 그리 좋지는 않다고 한다. 왕진이 처음 대도에 왔을 때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외손자인 왕진을 예뻐해서 왕진도 베이르테무르에게 호감을 가졌다. 어린 외손자가 고안한 물건들 덕분에 간만에 위왕부에 사교회가 열려서 활기를 띄자 왕진이 복덩이라고 매우 좋아했고, 이후에도 왕진이 대도에 올 때마다 외할아버지로서 잘 챙겨준다.
사위인 공민왕을 미덥지 않게 보는데 누이인 조국장공주가 고려에서 요절한 것도 있고, 조국장공주의 남편인 충숙왕이 전처였던 복국장공주와 부부싸움이 심해서 복국장공주를 죽였다는 오해를 산 적도 있는 데다[109] 무엇보다 공민왕의 비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자신의 딸이 공민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한들 진정으로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외전에서는 중증 딸바보 아버지로 나오며 처녀 시절 부다시리를 너무 아껴서 부다시리를 질리게 할 정도였는데, 강릉대군(공민왕)과의 혼담을 한사코 반대했지만 결국 부다시리와 강릉대군이 눈 맞아버린 데다 토곤테무르가 귀찮아서 둘의 사이를 못박아버린 덕분에 못 막았다고 한다.
- 위왕비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아내이자 노국대장공주의 어머니로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왕진이 처음 대도에 왔을 때 고안한 기물들 덕분에 평소 처지가 좋지 않았던 위왕부가 외손자 덕분에 손님들이 몰려와 활기를 띄자 좋아했다. 왕진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등장하는 등 제법 오래 산 것으로 보인다.
- 토구스테무르
토곤테무르와 바야우트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옹기라트부 출생이지만 나이가 어리고 문(文)에 치우친 세샨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며, 몽골 순혈주의자라서 고려인인 왕진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 것에 반발하였다. 티무르가 대칸이라면 마땅히 '가장 강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자극을 받아 반란을 결심하고, 명나라가 대숙청으로 혼란스러운 사이 승상 차칸테무르와 바얀후투그 황후를 비소로 독살한 뒤 왕진이 고려에서 정무에 집중하던 사이 반란을 일으켜 세샨을 사로잡는다. 세샨과 왕아미의 어린 아들을 붙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당시 몽골인들 중에는 고려인의 간섭을 싫어하는 순혈주의자들이 많았기에 원나라 각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런 토구스테무르의 태도에 반발한 몽골인을 비롯한 원나라 상층부도 많았고,[110] 토구스테무르의 반란에 분노한 왕진이 친정에 나서 반란을 진압하면서 실패하고 분노한 왕진에게 살해당한다. 왕진을 잡혈이라 비하했지만 능력도 인성도 영 부족한 모습을 보여 왕진에게 대차게 까인 건 덤. 다만 티무르의 발언은 반란을 더 격화시켰을 뿐 몽골 제국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려에서 평안히 먹고 살려 했던 왕진을 흑화시킨 주범이다.
4.2.2. 기타
- 차칸테무르
원의 장수이자 코케테무르의 외숙부, 양아버지. 원 역사에서는 1362년 투항한 홍건적 출신의 전풍에게 암살당했지만, 본작에서는 이를 알고 있던 주인공이 처음 대도에 왔을 때 코케테무르를 통해 이를 듣게 된다. 왕진의 기이함을 보고 하늘이 모종의 계시를 내려준 것이라 생각해 정녕 이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몽골식 피의 맹세를 하였다. 이후 고려 왕실에게 홍건적의 침공 등등을 가르쳐주고 아내에게 줄 선물을 받는 등 협력관계가 되었다. 원 조정에서 설치고 다닌다는 이유로 기황후 일파를 싫어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왕진이 미래 지식으로 고안해서 1357년 대도에 유행으로 퍼뜨린 삼겹살-쌈장-소주 세트가 매우 입맛에 잘 맞았다고 한다.
왕진의 개입으로 살아남은 뒤에는 명나라를 비롯한 남방 군벌들이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 활약을 펼치고 있었고, 왕진의 중재로 토곤테무르의 친위 쿠데타를 도와 기황후 세력을 쓸어버린 뒤 승상이 되어 원나라의 국정을 총괄하게 된다. 토곤테무르의 게으른 성격이 다 고쳐진 건 아니라서 토곤테무르에게 각종 잡무를 넘겨받아 엄청 고생했지만 그래도 능력은 확실했는지 국정을 잘 처리하기는 했다고 하며, 토곤테무르도 과거 토크토아 숙청 건을 후회하고 있어서 별다른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이후 군사 문제는 양자인 코케테무르에게 넘어갔다고. 그 뒤 세샨의 치세까지도 승상 차칸테무르를 중심으로 한 나이만 부가 세샨의 치세를 뒷받침하며 권세를 누렸지만, 토구스테무르를 중심으로 한 반란세력들에 의해 비소로 독살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도 원 역사와 달리 오래 살았다고 한다. 차칸테무르의 생년은 불명이나 원 역사에서 1362년까지 산 반면 본작에서는 1390년대 초까지 살았기 때문에[111] 30년 정도 더 산 것이다.
- 코케테무르
원 역사에서 원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사람으로, 왕진은 원 역사처럼 주원장에 의해 원나라가 허망하게 중원에서 밀리면 안 되고 코케테무르의 인생을 나름 동정해서 1357년 처음 대도에 왔을 때 저점매수를 시도했다. 코케테무르는 코케테무르대로 기이한 소문이 많은 어린 고려 세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차칸테무르의 명을 받고 왕진을 찾아왔는데, 왕진은 곧 강남의 강한 놈 하나(장사성)가 원 조정에 항복할 것이며 만약 자신의 말이 맞아떨어진다면 5년 뒤 차칸테무르가 거짓 항복한 홍건적 사람에게 암살당할 거라고 조언하였다. 양부인 차칸테무르가 토곤테무르의 친위 쿠데타 이후 승상이 되면서 대도를 떠나기 힘들어지자 아버지의 군무를 물려받았고, 그 뒤 원나라 제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명나라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390년대 초 토구스테무르의 반란 당시에는 다른 곳에 가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했지만 이 때문에 내전이 끝날 때까지 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이후 섭정이 된 왕진을 보좌하며 원나라의 중흥을 이끌었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멘탈이 강하다고 한다.
- 나관중
왕진이 처음 원나라에 갔을 때 수소문해서 불렀는데 나관중은 처음에는 자신을 조지려고 부른 줄 알고 벌벌 떨었다. 물론 왕진은 나관중을 죽이려고 부른 건 아니고 르네상스 시대 지배층들처럼 훗날 작가로 대성할 나관중을 미리 후원해서 명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이다. 당대 유행하던 삼국지 2차 창작이 죄다 스토리가 엉망이라서 나관중에게 더 좋은 삼국지 2차 창작을 써보라 권했고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희곡으로 쓴 뒤 원잡극(元雜劇)(일종의 오페라)으로 공연했고, 연재물이었기 때문에 내용의 일부만 공개되었지만 큰 호응을 얻었다. 고증과 개연성이 다소 희생되기는 했지만 극으로서의 예술성이 높았기 때문에 평이 좋았다. 나중에 토곤테무르에게 작가로서 신나게 착취당하며 고생하는데, 도중에 주인공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지만 훗날 다시 잡혀가자 외전 시점에서는 완전히 타락해서 다른 작가들을 속여서 황궁 방에 가둬놓고 황제에게 소설 기계로 바치는 중이다. 작중에선 최소 80세 이상까지 산 것으로 묘사된다.
4.3. 여진족
- 호바투
당대 여진족의 거물 추장. 본작에서는 고려가 이지란과 이성계를 이용해 건주여진을 비롯한 여러 여진 부락들을 복속시키자 이에 분노하여 고려를 적대한다. 고려의 요동 북벌 당시 옷치긴 올로스의 편을 들고 고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만, 몽골인들에게는 여진 오랑캐라 개무시당하는 중. 당대 여진족답게 몽골족 이상의 기마술과 전투력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왕진에게 패배한다.
-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청나라 황실의 조상. 1382년 이지란이 친척인 동휘호의 부탁을 받고 왕진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였지만[112] 먼터무의 후손인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것 때문에 이참에 먼터무를 곁에 두고 헛짓거리를 못하게 사고를 테라포밍시켜 주겠다며 잠깐 시종으로 삼았고, 여진족 부족장들에게 출신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4.4. 명나라
- 주원장
본작 초반부터 강남 군벌 중 1명으로 언급되지만 이때는 아직 강남의 많고 많은 군벌 중 1명이라서 두드러지는 모습을 못 보였다. 왕진이 원나라를 완전히 망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한데 원 역사처럼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허무하게 몽골 초원으로 밀려나고 홍무제가 중원을 다 장악해버렸다가는 스탈린급의 의심병 및 편집증 환자인 홍무제가 보르지긴의 외손인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기의 조언을 받아 연운 16주를 내주는 대신 왕진을 쳐낼 것을 간접으로 유도하는 계책을 시도함으로써 왕진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고, 공민왕은 이에 빡쳐서 왕진이 왜구를 통해 명나라를 괴롭히는 것을 묵인했다. 중화 천자 특유의 한심한 외교력은 이 양반도 예외가 아니라서 티무르에게 중화사상 갑질을 시전했다가 빡친 티무르가 사신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113]
본작에서는 역사 개변의 나비효과로 1382년 각 잡고 시도한 중원 정복에 실패해서 울화통을 터뜨리다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독자들은 꼴 좋다고 깠다. 화병이 도졌는지 원 역사에서의 대규모 숙청은 시작하지 못한 채 죽으면서 주표를 후계자로 세운다. 주원장의 능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강남의 많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남중국 일대의 유일한 군벌로 자리매김하며 명나라를 세웠고, 작 중에서도 서달 다음가는 명나라의 명장이라 묘사되지만 주원장의 위험성을 잘 알았던 왕진의 효과적인 견제로 인해 천명을 얻지 못하고 통일의 업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초기 설정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왕진(王珍)이 1365년생이라 이미 중원의 주도권을 쥔 상태라 혈통을 이유로 왕진(王珍)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공민왕이 명나라 라인을 잡아서 아주 사이가 나쁘지는 않고, 고려의 외왕내제도 눈감아주고 있다. 블러핑으로 내세운 '고려 태자의 입조'를 내세웠는데 왕진(王珍)이 마 황후 생전(1382년 이전)에 명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이것저것 정리하고 싶고 정난의 변도 고려하여 진짜로 입조를 하자 본인도 놀라서 부랴부랴 각지에 보낸 번왕들을 남경으로 소집하고 기분이 좋아서 흔쾌히 환대해주었다. 포악하고 독선적이지만 그만큼 서민 출신으로서의 솔직함과 매력이 있다고 묘사되었다.
- 마 황후
주원장의 정실로 원 역사처럼 매우 자애롭고 현명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본작에서는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 요절한 고려인 후궁의 아들이었던 주체를 직접 키웠는데 자신의 친아들과 구별하지 않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인다. 주원장이 토곤테무르 사후 야심차게 추진한 1382년 북벌이 왕진에 의해 실패하고 주체와 서달이 포로로 잡힌 직후 사망하는데 아직 원-고려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114]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했고 당장 광기가 폭발해서 대숙청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얼마 후 주원장 또한 쓰러지고 사망하면서 장남인 주표가 타락하여 대신 대숙청을 이끌게 된다.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어질고 현명한 모습으로 남편을 잘 보좌하는 한편, 막내딸의 혼인 상대가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아 주원장에게 항의하며 왕진(王珍)에게 시집 보낼 수 없냐고 농담을 하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한다.
- 서달
주원장의 고향 친구 출신 측근이자 주체의 장인어른으로 주체를 매우 아낀다. 신돈과 함께 명의 사신으로 왔으나 사실상 사신의 노릇보다는 고려의 현 상황을 정탐하는 역할을 했으며, 따라온 주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겸했다. 주원장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단언할 정도로 주원장에게 충성스럽고, 정치적으로 철저히 중립을 지켜 주원장의 숙청 레이더에 벗어난 인물이지만 재수없다는 이유로 그만큼 정적도 많다. 시골 목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백전불패의 명장으로 명성을 날린 당대의 진짜 천재 중 1명이다. 명의 장수들 중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필 상대가 미래인 치트를 뒤집어쓴 왕진이었던 관계로, 1382년 명나라의 북벌 당시 중원 전선에서 20만의 군대가 단 2번의 일전으로 박살나고 주체와 함께 포로로 잡힌다.[115]
동시기 마 황후가 죽고 주원장이 흑화해 숙청모드로 들어갈 것이라 이후 명의 북진이 어려운 것을 알았던 왕진은 서달을 주체와 함께 살려 보내고, 서달에게 낙향을 권유했다.[116] 정작 왕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주원장은 북진한 서달군과 이문충군의 격멸 소식에 쓰러진 뒤 장남인 주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해서 주원장의 숙청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재상으로 기용된 신돈이 주표를 흑화시키는 바람에 주원장의 숙청에 못지 않은 주표의 숙청이 벌어졌고, 이를 못마땅해 한 주체가 주표를 암살한 이후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주체에게 합류한다. 호탕하고 정치에 중립적인 호걸이었기 때문에 주원장의 신임을 받았고 왕진도 서달의 호걸다운 풍모에 상당한 호감을 느꼈다.
- 주표
주원장의 장남으로 원 역사보다 빨리 사망한 주원장의 사후 황위에 오르게 된다. 처음에는 온후한 성격이라 아버지의 잔혹성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라 상황이 매우 나쁜 데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완전히 타락해서 원 역사의 주원장을 대신해서 대숙청을 주도하게 된다. 이런 주표의 행동을 보고 안심한 몽골 순혈주의자들이 세샨을 죽이는 반란을 일으키는 나비효과로 이어진 건 덤. 세샨 사후 타락한 왕진이 원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명나라에 분열을 야기시키기 위해 주체에게 비소를 주며 주표를 죽이라 충동질했고, 주체는 이전부터 몰래 품던 권력욕 때문에 덥석 받아들이고는 주표를 비소로 독살하고 내전을 벌여 명나라를 분열시키게 된다.
- 주체
홍무제의 4남. 본작에서는 주원장이 중원 정복을 실패해서 연왕(燕王)이 아니라 송왕(宋王)이다.[117] 어릴 때부터 고려 문화를 좋아했고 고려 세자 왕진의 전설을 동경했다.[118]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정체를 숨기고 서달과 함께 잠깐 고려에 방문했다가 왕진에게 정체를 들킨다. 독자들은 '서고치'라는 가명을 사용한 점과 나이가 주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빠르게 정체를 눈치챘는데, '고치'라는 이름은 주체의 아들인 홍희제 주고치(朱高熾)와 같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서달의 딸(인효문황후)과 약혼 상태였지만 혼인해서 아들이 생기면 '고치'라는 이름으로 지어주자고 합의가 된 상태라서 예비 아들(?)의 이름을 사용했다가 21세기 사람인 왕진에게 걸린 것. 왕진을 동경한 건 진짜라서 정체를 들킨 뒤에도 넉살 좋게 '사부'라 불렀고, 왕진은 공민왕에게 보고한 뒤 적당히 숨겨주고 고려 여행을 끝까지 즐기게 해줬다. 1382년 북벌 당시 서달과 함께 종군했다가 패배하지만 정난의 변을 일으키기 위해 부하에게 정중하게 모셔오라 지시해서 서달과 함께 포로가 되고, 전쟁이 끝난 뒤에 귀국하게 된다. 아버지가 화병으로 쓰러지고 형인 주표가 즉위하면서 역모를 꾸미던 공신들에게서 서로 믿을 건 형제뿐이라며 도움을 요청하자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평소 병약하던 형의 몸이 더 약해진 걸 보고 황제 자리에 대한 야심을 각성한다.
영락제는 친모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본작에서는 고려인 후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고려인 후궁이 주체를 낳고 얼마 안 가 죽어서 마 황후가 정체를 감추고 키웠다고 나온다.[119] 여기서도 아버지와 형이 죽은 뒤 조카를 통수 쳐버리지만[120] 결국 조카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는데 실패하여 명은 동서로 갈라진다.[121] 명나라에 화이트 스파이로 파견된 이방원과는 주체가 고려에 왔을 때 이미 안면이 있었던 데다[122] 서로 정난의 변과 왕자의 난을 일으킨 성향이다보니 죽이 잘 맞다고 하며, 외전에서는 이방원이 고려인 현비 권씨를 소개해줬는데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고 한다.[123]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5살 연하인 왕진(王珍)의 무용에 흥미를 느껴 접근했는데, 상당히 제멋대로라 외교적으로 양국 모두 곤란하게 만들어 예부상서의 목을 (물리적으로) 날릴 뻔했고, 결국 주원장에게 적당히 나대라고 경고를 들었다. 왕진(王珍)은 주체의 성격이 나름 호감이 가기는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에 투머치토커라 부담스러워했고, 주체의 야심을 부추겨 정난의 변 때 이익을 취하고자 했다.
- 주권(朱權)
홍무제의 17남으로 영락제의 난 때 영락제의 편을 들었다. 각종 문화 예술에 능하며 원 역사에서는 영락제의 즉위 이후 은거하며 살았지만 본작에서는 고려의 동방 원정대에 참여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을 마음에 들어해 원정이 끝난 뒤 동로마 제국에 남아서 중국의 차 문화를 동로마 제국에 퍼뜨렸다.
- 유기
주원장의 장량이라 불리는 명나라 제일의 책사로 존재감이 확고하다. 공민왕이 또 다른 아들을 본 것을 계기로 고려에게 연운 16주를 제시함으로써 왕실의 분열[124]을 일으키려고 하나,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 왕진을 아들로써 매우 아꼈던 공민왕의 역린을 건드린 결과 오히려 왜구에게 시달리는 결과로 돌아왔다. 왕진을 몰아내려고 한 이유는 단순히 고려의 세자가 너무 유능해서 그런 건 아니고, 왕진이 대칸인 토곤테무르의 사위이며 이때는 요동의 통치자로 임명된 지 오래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왕진의 처 챠브이의 양모인 바얀후투그의 친정 옹기라트부의 당시 영지가 요동 바로 서북쪽에 있는 등 이 시점의 왕진은 단순한 고려 세자라기보다는 보르지긴 쿠빌라이계-옹기라트부-고려의 사이를 이어주는 원나라의 대영주라고 봐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기는 고려 세자를 숙청하면 공민왕의 차남과 주원장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제안도 같이 했다.[125]
사실 이건 공민왕이 자신을 아끼는 걸 모르는 왕진 입장에서나 위기였지, 고려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면 진언하는 것 자체로 수준 미달을 증명하는 계책이나 다름없다. 실패할 때의 리스크조차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것이, 이 계책의 경우 실패한다면 고려를 잠재적 적성국으로 만들게 되는데 이미 장사성의 세력을 고려 수군 때문에 완전히 병합하지 못한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로 명의 수군 전력은 고려에 한참 미치지 못했기에 고려가 명에 적대적으로 나서도 명은 고려를 바로 징벌할 수 없는 반면 고려는 수군을 통해 얼마든지 명을 공격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왜구를 통해 손 안대고 코 푸는 형식으로 나갔으나, 만약 고려가 수군에 힘을 실어서 해안선을 타격했다면 명은 원 역사의 북로남왜 이상으로 아예 해안선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지경으로 갔을 것이다. 차라리 신돈이 자신을 내쫓은 왕진에게 원한이 있어 주원장을 부추기다 보니 이런 수준 미달의 계책이 진상되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계책이 나온 배경이 '공민왕이 등극한 뒤 초기에 반원 정책을 펼쳤다.'라는 사실 단 하나뿐인데, 이 시점에선 이미 후계자인 왕진이 원 혜종의 친위 쿠데타까지 협조하고 그 대가로 요동 지역을 고려에게 넘겨줄 정도로 고려와 원은 사실상 협조관계였다. 즉, 공민왕이 펼쳤던 반원 정책의 원인이었던 원의 지나친 간섭과 반 고려 세력인 기황후와 옷치긴 왕족, 요동 심왕 휘하의 기사인테무르 등이 모조리 축출당한 상황인데다 황후와 좌승상인 차칸테무르가 모두 친고려 성향이며 아직 잠재적 적국으로 남은 옷치킨 왕가가 요동을 노릴 수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고려는 원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이득이다.여말선초 대역물을 여럿 접한 독자 입장에서는 명나라 상대로 요동 뜯어내기 난이도가 상당한 것을 볼 때 원나라가 얼마나 혜자스러운지 체감될 정도다.그런 상황에서 고려에게 소화하기도 어렵고 명의 방파제 역할이나 해야 하며 명나라가 언제 뒤통수쳐서 탈환해갈지 모르는 연운 16주를 제시하면서 원나라를 배신하고 유망한 후계자까지 갈아치우라는 계책은 당연히 통할 리가 없다.
다만 해당 계책의 본질은 고려를 포섭하는 게 아니라 공민왕과 왕진을 이간질하는 것이다. 세간에는 공민왕이 왕진과 사이가 나쁘다고 알려져 있었고, 첩자들과 신돈도 그렇게 보고해서 그런갑다 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 왕실은 부자간의 골육상쟁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아들이 너무 일찍부터 아버지보다 두각을 드러내면 아버지의 자리에 위협이 되어 되려 뛰어나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공민왕이 아들바보가 아니라 자신의 선대들처럼 국익보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더 우선시했으면 왕진을 숙청하는 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며, 공민왕의 할아버지 충선왕은 큰아버지인(그것도 충숙왕의 동복형이다) 광릉군을 죽인 전적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뛰어난 아들을 아버지가 견제하거나 죽이는 일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당시 유기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공민왕을 충동질해 왕진의 처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지 고려와의 외교관계와 영토 문제가 아니었다.[126] 또 고려가 요동 정복에 전 국력을 쏟아부은 바로 다음 해라서 당시 고려는 명나라를 직접적으로 보복 공격할 상황이 아니라 왜구를 고용한 것이다.
서달과 주체가 사신단에 동행한지라 나름 걱정이 되어 열심히 하늘을 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데,[127]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임을 알고는 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천수를 다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호유용 일파에 의해 독살당했고, 이는 주원장이 사망하기 전 주표에게 호유용 일파의 악행을 알려줌으로써 신돈과 함께 주표가 흑화하는 단초가 되었다.
본작에서 직접적으로 초능력이 묘사되는 얼마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로, 천기를 읽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서달은 단순히 유기가 뛰어난 두뇌를 통한 상황판단력으로 앞날을 계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대낮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바다 너머 고려에서 펼친 공작이 안 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보아 진짜로 초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중 묘사를 보아 어디까지 읽을 수 있는지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호유용
주원장 몰래 각종 수상한 행동을 꾸미고 있었으며, 유기가 방해되자 몰래 독살한다. 서달이 고고한 척한다고 깐 건 덤. 원래는 주원장에게 숙청당할 운명이었는데 본작에서는 역사개변의 나비효과로 주원장이 쓰러지자 다른 공신들과 함께 역모를 꾸미지만, 타락한 주표를 상대로 방심하다가 숙청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 신돈
원 역사에서 공민왕 치세에 권력을 행사한 고려의 괴승. 본작에서는 공민왕에게 접근했다가 무시당해서 고려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자 중국 강남으로 이주했고,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 주원장의 수하로 재등장한다. 고려통으로 고려의 정보를 전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주위에서도 요사스러운 땡중이라 경계를 받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아주 능력이 없는 건 아니라서 자리를 유지 중이다. 유기와 함께 연운 16주를 미끼로 왕진을 숙청하자는 함정을 짜는 걸 고안하였지만 공민왕이 왕진을 꺼리는 것으로 착각해서 작전을 잘못 짠 탓에 계획은 망한다. 주원장이 쓰러지고 주표가 즉위한 뒤에 주표를 타락시키는데 크게 일조한다. 작가의 초안인 고려 최후의 태자가 되었다에서는 공민왕에게 기용되었지만 공민왕이 원 역사와 달리 정신줄을 붙들고 있어 신돈을 확실히 제어하고 있었고, 때가 되자 신돈의 부패를 이유로 숙청해 버린다.
4.5. 티무르 제국
- 티무르
원 역사에서 티무르 제국을 세우는 그 티무르가 맞다.[128] 토곤테무르가 죽고 세샨을 대칸으로 추대하는 쿠릴타이에 갑작스레 출몰하여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129] 독자들도 '님이 왜 여기서 나와?'라고 놀랐을 정도. 자신이 티무르 제국을 세웠다는 진상을 밝혔다가는 쫓겨날 게 뻔했기 때문에 차가타이 칸국의 아미르(이슬람 지도자)인 '테무르(몽골식 이름)'라고만 밝혔다. 쿠릴타이에서 문제 없이 회화를 나눌 만큼 몽골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억양이 섞여서 원나라에서는 이질적이라고. 붉은 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절름발이 티무르'의 이명대로 발을 전다고 한다.
토곤테무르가 막 죽었을 당시[130] 명나라의 사신이 사마르칸트(現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까지 들러서 티무르와 접촉했는데, 티무르는 명나라를 만지(蠻子)라고 비하한 뒤 한창 벌이고 있던 정복 활동을 늦추고 원나라 정세를 조사하는데 집중했다.[131] 이미 튀르크, 페르시아화가 완전히 진행된 아들 우마르는 '명나라 따위가 뭘 하든 신경 끄고 페르시아와 인더스나 정복하자'고 주장했지만 몽골 제국을 자신의 손으로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에 불타던 티무르는 기각했다. 그러다가 왕진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면서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고,[132] 마침 호라즘 원정이 막 끝나서 얼마간 쉬어야 했기 때문에 직접 상도까지 간 것이다.
쿠릴타이에서는 몽골 제국의 황제는 관례대로 '가장 강한 자'를 추대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여론을 뒤흔들고, 세샨은 네가 말하는 강함의 기준이란 무엇이냐며 티무르를 말빨로 제압한다. 이에 대칸 울루스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자가 누구냐 묻자 다들 말없이 왕진을 쳐다보았고, 그 광경을 본 티무르는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세샨의 즉위가 확정된 뒤 연회에서 자신의 절름발이를 숨기지 않고 왕진에게 접근하며 왕진을 부추긴다.사내란 누구나 만인의 위에 올라 보고 싶은 야망을 품은 법이지. 물론, 만인의 정점에 오르는 꿈은 단순히 간절히 원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드넓은 초원을 달렸던 위대한 카간처럼, 시대의 부름을 받아야만 가능한 법. 나는, 시대의 부름을 받았다. 쿠르겐. 또한,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야. 시대의 부름을 받은 자는 언젠가 깨닫게 될 테니까. 들개 사이에서 사자가 섞여 있으면, 반드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법 아니겠나.
티무르가 왕진에게 느끼던 동질감은 왕진이 '원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것'이었다고 한다.[133] 왕진의 재능은 고려같이 거의 망한 나라의 샤(왕) 자리에 머물 정도가 절대 아니고, 자신 또한 망해버린 바를라스 씨족의 족장에 만족하지 못해서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고.[134] 왕진은 이때까지만 해도 당시의 원나라를 명나라를 막기 위한 고기방패로 써먹고 고려의 영토를 요동으로 확장시킨 뒤 적당히 살 생각이었기 때문에 티무르의 말에 반발했지만, 티무르는 왕진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부름'을 받은 자라며 아직 자기 아들(아무르)과 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라 아직 못 깨달은 듯하지만 그런 건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말하고는 그대로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 왕진은 워낙 터무니없는 인생을 산 사람이라 말 안 통하는 꼰대 영감이라 생각하며 찝찝해했지만.[135]날 후회하게 만들고 싶다면, 이 사마르칸트로 군대를 이끌고 직접 오라고 전해라. 부하의 등 뒤에서 오만한 소리나 지껄이는, 시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놈에게 이 몸의 웅대한 계획을 방해받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으니까.
한편 사마르칸트에서 돌아온 직후 주원장이 언제나처럼 중화사상으로 가득한 고압적인 서신을 보냈다가 빡친 티무르가 직접 사신들을 몰살시켜 버리는데, 명의 사신들이 자신들은 천명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대자 주원장은 '시대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라 코웃음쳤다. 선조들이 송(宋)이라는 나라를 중원 남쪽에 세웠던 시절 만지들이 하나같이 거만하고 배신을 서슴치 않는 놈들이라 조상에게 들었는데 말 그대로였다고 까는 건 덤.[136] 사신 하나는 증언을 해야 해서 팔다리만 자르고 살려 보냈고 나머지 사신들은 두개골만 남긴 채 신분패와 함께 낙타에 실어 돌려보냈는데, 이를 본 주원장은 이전에 자신과 협력을 약속한 오이라트, 킵차크 칸국과 상황이 다르며 자신이 괜히 적을 늘렸음을 깨닫고 계획이 꼬였다 혀를 차면서 서쪽 국경의 방비를 강화한다. 이후 왕진에게 서신을 보내 명나라가 원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자신에게 집적거렸음을 알려 원나라가 이에 대비하도록 한다.시대의 부름을 받은 자가 결국 몸을 일으켰군.
세월이 흘러 반란으로 인해 세샨이 피살당하고[137] 다시 쿠릴타이가 열리게 되자 쿠릴타이에 참가하는데,[138] 결국 운명에 휩쓸린 끝에 원하지 않았음에도 원나라의 정점에 오르게 된 왕진을 보고 결국 자신의 예상대로 되었다고 껄껄 웃었다. 지난번에는 정체를 숨겼지만 이번에는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서 몽골 부족장들도 지금 와서는 티무르가 실질적인 차가타이 울루스의 수장 노릇을 하는 걸 알고 있다. 왕진은 언젠가 일어날 반란이기는 했지만 티무르의 발언이 이를 앞당겼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울분을 갖고 있었다.
쿠릴타이에서 왕진을 찾아와서 체스 시합을 거는데, 처음에는 룰에 차이[139]가 있어서 졌지만 왕진은 21세기 시절 웨스트포인트 유학을 가서 체스판을 휩쓸고 다녔던 능력자인지라 곧 적응한 뒤 미래 지식 치트로 티무르를 처발라버렸다. 티무르는 왕진이 약하다 싶으면 서쪽 정복이 끝난 뒤에 대칸 울루스와 명나라 모두 박살내버릴 생각이었지만, 체스로 패배한 뒤 몽골 제국의 두 개의 태양을 인정하면서 물러난다. 언젠가 왕진과 전쟁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자 왕진은 그럴 거면 한겨울에 얼음물 마시지 말라고 대답하고 티무르는 낄낄거린 뒤에 물러난다.[140] 이후 원과 티무르 제국간의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간만에 몽골 제국 시절의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141]
외전에서는 사마르칸트에 들른 왕진과 놀았다고 하는데, 왕진은 21세기 당시 이미 사마르칸트에 온 적이 있었기에 티무르가 소개해주는 문물에 대해 '이때는 이랬었군' 식의 반응을 보여 티무르가 당황하기도 했다. 근엄하고 잔혹한 성격의 티무르가 왕진에게는 잘 웃으며 대해줘서 가족들도 신기해한다고. 원 역사처럼 무리하면서 동방 원정을 추진할 필요가 없어 서쪽 정복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원 역사보다 장수했고 왕진도 선물이라고 티무르에게 인삼이나 홍삼 등을 주고 있다. 서쪽 정복에 집중하고 있어서 서쪽 영토가 원 역사보다 더 넓다고 한다. 말년에는 왕진의 조언을 받아서 학살과 약탈을 그만두고 이전보다 관대한 통치와 무역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덕분에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알라의 자비를 깨우쳤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을 아나톨리아에서 축출하고 발칸 반도로 밀어냈으며 맘루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손에 넣었는데, 후계자 문제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4남인 샤 루흐를 후계자로 정해주었고[142][143]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수에즈 운하를 재건하지만 운하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한다. 그래도 원 역사에 비해서는 장수한 편이라고 하며, 고려와 화합하는 것이 티무르 제국의 발전에 중요하니 이를 유념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292화 제국위키에서는 '바를라스 티무르'로 불리며,[144] 고려 태종 무황제(왕진)와의 관계는 학계에서도 주된 연구대상 중 하나이며 제국위키에서 독자적 항목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 사라이 물크
티무르의 정실로 차가카이 왕국의 마지막 공주라서 구르칸(부마)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 티무르가 약탈혼을 했지만 부부 간의 사이는 좋다고 하며 티무르가 원정을 나간 동안 내정을 대신 맡기도 하는 등 유능한 인물이다.
- 우마르
티무르의 장남으로 몽골 제국의 정체성이 남아있는 아버지와 달리 완전히 튀르크-페르시아-이슬람화가 되어 몽골 제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의견이 다소 다르다.
- 샤 루흐
티무르의 4남으로 외전에서 마화가 파견되자 직접 마중 나온다.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 안 하지만 종교 극단주의는 용서하지 않는 왕진의 처신에 대해 자신도 이슬람 신자이기는 하지만 이해한다고 반응한다. 마화가 고려에서 새로 개발한 홍삼이 정력제로 좋다고 하자 은근히 좋아하는 게 압권. 본작에서는 티무르가 죽기 몇 년 전에 맘루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정복한 뒤 베네치아와 손잡고 수에즈 운하 사업을 주도했으며, 티무르가 왕진의 조언을 받아 후계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샤 루흐를 후계자로 정했고 티무르 사후 티무르에게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이후 원 역사 오스만 제국을 대신하여 티무르 제국이 오래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다졌고 원 역사 오스만 제국보다 동서 교류에 활발히 임해서 세계사를 바꾸었다고 한다.
4.6. 동로마 제국
- 마누일 2세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본작에서는 티무르가 오스만 왕국을 아나톨리아에서 쫓아내면서 한숨 돌렸지만 티무르의 확장에 경계하고 있다. 티무르가 동방 원정대 대접을 요청하자 융숭하게 대접해주며 중국 차를 마음에 들어했다.
4.7. 베네치아 공화국
- 미켈레 스테노(Michele Steno)
외전에서 마화의 동방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로 등장한다. 고려 원정대가 가는 곳마다 동방의 각종 귀중품들을 파는 걸 보고 VIP로 눈독 들이고 있었고, 이때가 베네치아 최고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무역으로 벌어들인 베네치아의 부를 보여주며 자랑하지만 얼마 안 가 고려 원정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포르투갈에 도달하자 이대로 가면 베네치아의 강점이었던 동지중해 무역망이 붕괴될 것임을 깨닫고 경악해 왕진이 마화를 통해 제안한 수에즈 운하 개발에 참여한다.[145][146]
4.8. 포르투갈 왕국
- 주앙 1세
고려에서 보낸 동방 원정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포르투갈에 도달하자 지금까지의 기술력으로는 아프리카 남쪽으로 갈 수 없었는데 이들을 이용하면 더 이상 베네치아 공화국의 갑질에 시달리지 않고 우리가 동방 무역을 주도할 수 있다며 기뻐한다.
5. 개변된 역사
5.1. 개변된 사건
5.2. 고려
- 고려의 재부흥 및 현대까지 이어진 사직
고려 의종때 일어난 무신정권 100년을 시작으로 대몽항쟁, 원간섭기로 이어진던 약 230여년의 암흑기를 종식시키고 고려는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고, 원역사의 고려의 500년 사직이 신라의 천년을 넘은 1100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5.3. 중원
- 명의 강남정권화
차칸테무르의 암살을 막은 결과 차칸테무르와 코케테무르의 활약으로 명의 북진이 저지되었다. 또한 장강 경제의 핵심인 장강 하류를 장사성이 고려 해군의 보호로 세력을 지켜냄으로써 사실상 제해권조차 고려에게 밀리게 되었다.[147]
- 정난의 변과 명의 분단
원 역사의 정난의 변이 비슷한 구도로 일어났으나, 건문제가 도주에 성공해 명이 동서로 분단되었다. 강역 자체는 서쪽으로 도주한 건문제의 영역이 더 넓으나, 경제의 핵심지역은 장강 중하류를 차지한 동쪽 주체의 영역이라 사실상 반반 구도가 된 셈.
5.4. 일본
5.5. 그 외
- 티무르 제국의 서진 및 존속
티무르가 왕진의 기량에 탄복하여 동진을 포기하고 서진에 주력한 결과 맘루크 술탄국까지 점령하게 되었으며, 왕진의 영향으로 점령지의 교화와 약탈이 아닌 무역경제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티무르 제국의 존속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에 더불어 동맹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적 지원으로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어 지중해 무역의 쇠퇴를 막음과 더불어 티무르 제국 해군의 제해권이 지중해-홍해 연계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후계자로 제국의 안정을 가져다 줄 샤 루흐를 선택함으로써 샤 루흐의 치세에 티무르 제국은 장기 존속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여 역사가 바뀌었다.
6. 평가
내 조선에 세종은 없다처럼 여말선초기 왕실을 배경으로 하며, 가족물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주인공 못지 않게 주인공의 부모인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강조되며,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트콤이 본작의 메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는 주인공의 외가이자 처가인 원나라 황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주인공이 원 역사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아들'로 설정된 이유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당대부터 현대까지 회자되는 로판 실사판스러운 일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간의 관계가 워낙 로판 그 자체다 보니 둘 중 1명이 원 역사와 타인이면 느낌이 안 산다는 것 때문에 '차라리 둘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게 더 대역 가능성이 있다'는 논의가 본작 연재 전에 있었는데, 작가가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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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9.70 / 10.0 | 조회 수 49만 2025-08-11 기준 |
작가가 전작에서 로맨스를 잘 쓴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본작에서도 로맨스에 대한 평이 좋았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부부가 특히 염장 커플이라는 평을 들었고, 왕진과 챠브이 또한 순애 커플로 독자들 사이에서 평이 좋았으며, 아미 공주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도 흥미로웠다는 평을 듣는다.
작중의 주요 배경이 몽골 제국이다 보니 여말선초기 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특히 외전에서는 몽골 제국의 끊어진 동서가 원나라-티무르 제국으로 부활해서 유라시아사 전체가 변하게 되는데 본편보다 더 재미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
7. 기타
설정상 고려 왕조가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공민왕만 해도 31대인데 묘호와 시호의 중복 없이 600년을 더 존속했다는 소리이니 황제들 시호와 묘호를 안 겹치게 하느라 꽤나 고생할 듯하다.[148][149]일본 왕조는 묘호를 안 쓰며 시호도 화풍(和風)이 강해서 중국과 한국 기준으로는 이질적인 시호투성이고 메이지 덴노 이후 연호와 시호를 합치면서 사실상 폐지되었음을 고려하면 시호는 그렇다 쳐도 묘호는 고생이 많을 듯하다. 이는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원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루프물이 아닌가 싶은 떡밥이 여러 차례 나온다. 작중에서 원 역사의 등장인물들은 무의식적으로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오며, 외전에서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과 혼인하기 전부터 원 역사에서 자신이 사망할 당시의 일을 꿈으로 꾸기도 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꿈을 꾸었으며 공민왕도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원 역사의 자신이 겪는 일을 꿈으로 꾸기도 했다.
주인공의 빙환트로 인해 원 역사에서 주인공이 개변한 역사로 덧씌워져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 외 주인공이 처음 빙환트할 때 용의 비늘이 암시되거나 21세기의 볍씨도 같이 트립한 것, 토구스테무르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 토곤테무르가 왕진의 꿈에 나타나서 위험을 경고하는 등 초자연적 존재를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외전 6화에서 마화가 샤 루흐와 대화할 때 "고려 태왕(주인공)은 유학자든, 승려든, 무슬림이든 백련교도든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백련교는 불교와 현대에는 사라진 마니교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종교로 원 역사에서는 19세기까지 비밀종교로서 존속하며 백련교도의 난, 의화단의 난에 영향을 끼치다 20세기 이후 사멸한 종교이다. 백련교가 21세기까지 존속하는지는 불명.[150]
주인공 이후 고려가 유라시아 전체와의 광범위한 무역을 중시함을 고려하면 실제 고려에 유입된 종교는 이것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고려의 법과 제도만 잘 지킨다면 뭘 믿든 신경 쓰지 않던 고려의 특성상 종교 박물관 같은 나라가 되었을 듯하다.
작가의 차기작인 정조의 왕자가 작가로 살아남기 ▶에서 본작의 사건을 극중극으로 셀프 패러디했다. 그래도 모든 내용이 같지는 않고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난다고.
작중에서 중국어로 대화할 때 서로 사투리 수준으로만 취급하고 다 알아듣는 식으로 나오는데, 14세기 후반으로 가면 각 지방간의 언어 차이가 커져서 원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던 대도(베이징) 일대의 근고한어와 강남 일대의 여러 언어들은 서로간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북경 계통의 중국어를 배웠던 조선 사신이 주원장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지만 주원장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나하추와 억양이 비슷하다는 것만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안휘성 추저우시 출신인 서달과 왕진이 통역 없이 대화하는 장면은 고증오류에 가깝다. 다만 중고한어가 여러 언어로 갈라진 시기가 13세기 남송 멸망을 기점으로 100년 정도인지라 당시에는 언어 분화가 상대적으로 덜했을 것이다.
주인공에 관한 우상화와 숭배 장면이 굉장히 자주 나온다.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이를 질색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주인공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우상화와 숭배의 경우 북한/우상화를 패러디한 것이 많아 주인공이 백두혈통을 떠올리게 하는 우상화들은 특히 단속하는 개그씬이 여러 번 나온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금수산태양궁전 등은 대놓고 패러디했다.
[1] 292화 제국위키에서 휘가 공개되었다. 천보궁 후원 전각의 벽화에서 공민왕이 직접 지은 휘임이 밝혀졌다고.[2] 역대 고려왕들 대다수가 단명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천수를 누리고 갔다. 1452년은 원 역사에서 문종이 사망하고 단종이 즉위한 해인데, 단종의 증조부인 이방원보다 15살 연상인 걸 고려하면 당대 기준 4~5세대를 산 셈이다.[3] 작중에선 1352년 생으로 설정. 고려사 폐행열전 최안도 편 ▶에 실린, 최안도의 아들 최원이 수행원을 함부로 매질한 데 놀라 노국공주가 유산한 아이로 보인다. 이 사건의 정확한 날짜는 고려사에 적혀있지 않으나 조일신이 처단되는 공민왕 1년(1352년) 10월과 고려군이 장사성을 공격하러 출격하는 공민왕 3년(1354년) 10월 사이에 일어난 일임은 확실하다.[4] 압록강변에서 막아냈던 1차 홍건적의 난과 다르게, 2차 홍건적의 난은 무려 20만 규모의 침입군이었기 때문에 10만 가량의 병사 동원이 최선이었던 고려가 국경에서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약탈이 주 목적이었던 홍건적들때문에 사실상 청야작전은 필수나 다름없었는데, 여기서 왕진이 청야작전 이후 복구비용을 모조리 자신이 부담할 것을 천명함으로써 청야작전을 아무런 뒤탈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5] 5살 때부터 이성계의 말인 횡운골(橫雲鶻)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는데, 횡운골은 사나운 야생마라서 이성계 외에는 굉장히 포악한 모습만 보였지만 왕진에게는 애교 잘 부리면서 착하게 굴어 이성계가 신기해했다. 말년에 이성계가 횡운골 건을 가지고 최영에게 말한 걸 보면 말년까지도 왕진만 가능했던 모양.[6] 오기는 본인의 저서인 오자병법 기준 76전 무패를 기록했으며, 이에 대한 반박은 딱히 없는 것으로 볼 때 최상급의 지휘력을 겸비한 병법가였다.[7] 왕진이 미래지식 치트 이전에 전생부터 머리가 좋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8] 이후 토구스테무르의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언급에 따르면 당시 몽골 순혈주의자들은 충선왕처럼 빨리 쫓아내고 싶었지만 어쨌든 대칸위를 노리던 옷치긴 왕가 견제, 명나라를 비롯한 남중국 군벌들 견제 등에 쓸모가 있었고 세샨이 즉위하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고려와 요동에만 거주하면서 원나라 중앙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내버려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명나라가 대숙청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이제 쓸모가 다했다고 생각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 물론 이건 순혈주의자들의 망상이고 그렇지 않은 몽골인들은 왕진 아니었으면 원나라가 폭망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 무슨 개소리냐고 반응했다.[9] 반란군이 바얀 후투그 황후와 차칸테무르를 죽음에 몰아넣었던 비소 제조법을 찾아낸 뒤 주체를 부추겨 명나라의 내전을 일으켰고, 이전과 달리 심한 인간불신에 시달렸다고 한다.[10] 형식적으로는 태왕(太王)의 이름을 사용하며 이를 고려 왕에게 대대로 물려줄 생각이다. 다만 작중에서도 주인공 사후에 이 체제가 얼마나 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11] 본래는 세샨의 반란이 일어날 즈음에 공민왕에게 고려 왕위를 물려받고 부모는 은퇴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왕진이 대도에 머물며 원나라를 통치해야 하다 보니 결국 죽을 때까지 양위를 못했다.[12] 만약 순치제나 강희제 같은 타입이었으면 아무리 왕진이라도 명분상의 문제가 있어서 위험했을 것이다.[13] 고려 왕조가 현재진행형인 이상 한자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14] 본편 도중에 토곤테무르가 두 공주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했듯이 이번에도 공주 둘을 데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15] 본작 21세기 당시 고려 황실은 입헌군주정으로 전환된 상태였다.[16] 현실의 고려에서는 태조(太祖)는 있어도 태종은 없었다.[17] 부계 후손이 아니라서 황금씨족에 분류되지는 않지만 어머니(노국대장공주)와 고조할머니(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후손이라서 보르지긴의 피가 짙었고,(증조모인 의비는 보르지긴이 아닌 일반 귀족으로 추정된다) 작중에서도 칭기즈 칸으로부터 이어지는 보르지긴 씨족 특유의 기질과 신체능력이 있다고 묘사되며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생각하는 왕진도 이런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각은 있었다.[18] 옛고려의 장수왕보다 더 오래 살았다[19] 번국으로 삼은 듯하다.[20] 문제의 소 사건은 나중에 경우 시합이 대흥행하면서 마케팅 요소가 되어 신하들이 돈 주고 이름 붙이기도 하는 등 잘 해결되기는 했다.[21] 본인 사후에 아들을 매우 귀여워해서 그림으로 꾸준히 아들을 그렸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22] 전근대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이라 노국대장공주처럼 심한 난임일 경우에는 첩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23] 292화 제국위키와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혜비 이씨 외의 후궁은 없다고 한다. 근데 노국공주에게서만 후사를 봤으니 이렇게 되면 혜비 이씨는 내내 낙동강 오리알신세 밖에 안되는 꼴이다.[24] 수양제의 시호와 같다. 공민왕은 자기 친형에게 최악의 폭군에게 내리는 시호를 묘호로 준 것.[25] 고려에서는 고조(高祖)의 묘호를 쓴 왕이 없었다. 고종(高宗)은 있었는데, 이 사람은 46년이나 재위했지만 내내 최씨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인 데다 몽골 제국의 침공에 시달려서 아무것도 못 했기 때문에 존재감은 제로에 가깝다.[26] 공민왕의 냉혹하고 무감정한 성격도 실제로는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공민왕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기제이다.[27] 강릉대군도 첫 만남부터 부다시리의 외모를 '태양처럼 빛난다'며 감탄하거나 부다시리에게 은근히 신경을 쓰는 묘사를 보아 초면부터 반했지만 자각이 없던 듯하다.[28] 위왕은 이를 알고 노발대발해서 혼인을 물리려고 했지만 토곤테무르가 귀찮아서 실패했다.[29] 이 때문에 본편에서는 술을 잘 마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날이 아니면 술을 절대 안 마신다고 한다.[30] 원래는 인간불신이 너무 심해서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자들조차 믿지 못하고 다 내치는 상황이었다.[31] 여담으로 공민왕은 1330년생인데, 충정왕이 1349년 6월 2일에 즉위했기 때문에 혼인 당시 공민왕의 나이는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만혼인 편. 원 역사에서도 충정왕 즉위 이후에 부다시리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역시 만혼이었을 것이다.[32] 이 때문에 완전히 정신줄을 놓지는 않아서 신돈도 제대로 통제하다가 필요가 다하자 부패 스캔을 이용해 바로 숙청하고, 암살을 피해 원 역사보다 오래 살았다.[33] 아들이 싫은 건 아니고 아내를 빼닮은 외모 때문에 아들을 볼 때마다 아내가 생각나 슬퍼져서 그런 것이며, 아내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증거라 아버지로서 아끼고 있어 아들이 장성한 뒤에는 진심을 토로하며 슬퍼하기도 했다.[34] 우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죽고 4개월 뒤에 태어나서 노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 모니노가 잉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이 모니노의 존재를 왕진(王珍)에게 처음 밝힐 때 그건 실수였고 나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 돌린 적이 없다고 한탄한 것을 보아 하룻밤의 실수로 생긴 듯하다. 적자가 요절할 경우를 대비해 죽이지 않았지만 모니노의 어머니를 죽이고 절에 유폐시킨 뒤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죄책감은 있어서 아들이 장성하자 데려올 생각도 있었다.[35] 계국대장공주와 동명이인인데, 당시 몽골에서는 서양처럼 선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본작에서도 동명이인 몽골인들이 간간이 언급된다. 충혜왕도 부다시리로 동명이인이다.[36] 쿠빌라이 칸-친킴-다르마발라-아무케-베이르테무르-부다시리 / 쿠빌라이 칸-제국대장공주-충선왕-충숙왕-공민왕.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이라서 공민왕의 항렬이 다른 원 황족보다 높은 편이었다.[37] 49화에서 흥왕사의 변(1363) 당시 공민왕 33세, 노국대장공주 29세이며 1352년 왕진을 낳았을 당시 18세라 언급된다.[38] 토곤테무르의 조부 카이산과 노국대장공주의 조부 아무케가 이복형제지간이었다.[39] 49화에서 15세일 때 혼인했다고 나오는데, 노국대장공주를 1334년생이라 가정하면 1349년이 된다. 충정왕이 1349년 6월 2일에 즉위하였으며, 충정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는 설정을 고려하면 1349~1350년이 된다. 공민왕이 1330년생이므로 19~20세가 되는데, 고려는 조선보다 늦게 혼인해서 남성 평균 20세, 여성 16세였다.[40] 부다시리도 이때는 아직 미숙한 소녀였던지라 자신의 감정을 이때에 가서야 깨달았다.[41] 본편에서도 몽골인치고는 술에 상당히 약하다고 나온다.[42] 당송시대 중국에서 동심결은 프로포즈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왕진은 7년 뒤에 재회하고서야 알았지만,[43] 70화에 따르면 바얀후투그 황후가 왕진을 포섭하기 위해 왕진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어했는데, 챠브이가 우연히 왕진과 엮였다는 것을 알고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44] 이는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예외라면 남편은 포기하고 권력에만 집중한 덕녕공주 정도.[45] 원 역사에서 토곤테무르의 막내딸은 5녀 촉국공주(蜀國公主)로 안평왕 파통격만(安平王 把通格滿)와 혼인하였다.[46] 경순공주의 쌍둥이 언니로 도중에 끼어들었다.[47] 불교 신자였던 노국대장공주가 아미타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48]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왕진의 생년인 1352년은 임진년, 아미의 생년인 1364년은 갑진년으로 십이지가 진(辰)인데, 임진을 상징하는 동물은 흑룡, 갑진을 상징하는 동물은 청룡이다. 고려 왕조가 용손(龍孫)을 자처했음을 고려하면 용의 해에 태어난 왕진과 아미 모두 길한 출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49] 주인공인 왕진(王珍)이 초안에는 1365년생인 게 원인이다. 모니노는 노국대장공주가 산모사망하고 4개월 뒤에 태어났기 때문.[50] 이때도 끌러가면서 자기보다 일찍 태어나서 그 자리의 있는 주제에 잘난 척 하지 말라며 왕의 사생아인 동생이 정실 왕후의 적자인 형한테 개기다가 이방과에게 몇대 더 맞고 끌러갔다.[51] 외전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고려에 귀부할 때까지도 오랑캐니 촌놈이니 하며 중앙에서 무시를 많이 당해서 고려에 대한 별 충성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비상한 모습을 보인 왕진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52] 왕진도 특유의 서민적이고 투박한 동북면 사투리를 쓰는 이성계를 처음 봤을 때 좀 깬다는 평을 내렸다.[53] 나중에 '셍게바투르(ᠰᠡᠩᠭᠡᠪᠠᠲᠤᠷ)'라고 불리는 것이 확인되는데, 몽골인들 언급에 따르면 굉장히 촌스럽고 별로인 이름인 듯하다. 직역하면 "사자 영웅"이라는 다소 투박한 뜻이다. 참고로 셍게는 티베트어 단어인 셍게(སེང་གེ)에서 파생되었는데 의미는 동일하게 사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 텡그리 신앙과 더불어 몽골에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주던 티베트 불교의 단어가 원나라에서 쓰인 것일듯. 현대의 몽골에서는 사자를 주로 '아르슬란(арслан)'이라고 부르지, 셍게라고는 잘 안 한다.[54] 다만 작중 묘사를 보아 나라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왕진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에 더 가깝다.[55] 늦둥이 딸이 언급되기는 하는데 사서에 따르면 신의왕후의 두 딸과 신덕왕후의 두 아들이 늦게 태어났다고 명시되기 때문에 신의왕후의 늦둥이 딸을 언급했다고 하면 개연성이 충족된다.[56] 이성계가 신덕왕후와 결혼한 것은 정략결혼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원 역사와는 다르게 후계자인 왕진의 무예스승이라는 압도적인 배경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 중 이방과와 이방원은 왕진이 매우 아끼는 신하들이었기에 정략결혼의 필요성이 매우 낮아졌을 가능성도 크다.[57] 이 때문에 최영에게 그 위험한 신진사대부들과 어울리다니 무슨 생각이냐고 경고를 듣기도 했다.[58] 실제로는 이무기가 의태한 것이라 원 역사 장녀인 경순공주를 밀어내고 장녀가 되었다.[59] 이 때문에 요왕 야나스리와의 전투 당시 여진 추장 호바투가 여진어를 쓰는 걸 듣고 이거 이지란이 해병문학 찍을 때 사용한 여진어 아니냐고 알아듣는 모습이 나온다.[60] 영비 최씨로 추정된다.[61] 최영의 소박한 성격 때문에 집이 평범한 편이었는데, 사적으로는 최영을 꼰대라고 기피하던 이지란은 이때까지도 최영의 집에 간 적이 없어서 몰랐다.[62] 이지란이 동안의 예쁘장한 외모를 하고 있어서 나이를 착각당하기도 했다.[63]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이지란을 선봉에 세웠는데 또 안 죽었다고 하는 건 덤이다.[64] 토구스테무르의 난이 끝난 직후 티무르가 원 역사(1395)보다 빨리 토크타미쉬 칸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보아 1390~1394년 사이로 추정된다.[65] 당장 이성계부터 이복형이자 백부(이자흥)의 양자인 이천계에게서 천호장 자리를 빼앗고 서자로 격하시킨 전적이 있으며, 원 역사에서는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내치고 신덕왕후의 차남인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역공을 당해 몰락한다.[66] 사실 나이가 찬 뒤에도 공민왕이 계속 공주의 호위무사로 붙여놓은 걸 생각하면 공주가 대도에서 원 황태자와 눈이 맞는 사고만 안 터졌다면 이방과의 소망은 이뤄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중에서 리얼 고려의 북부대공이 된 전주 이씨 가문을 혈연으로 묶어놓는 것은 고려 왕실에도 큰 이득이었기 때문. 그러나 고려와 혈연관계로 묶이는 게 절실해진 원 황실에서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고 고려에서도 이를 거부할 명분도 실리도 없었기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진 것.[67] 몽골 신화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68] 주체(1360년생)가 이방원(1367년생)보다 7살 연상이다.[69] 당시 과거시험은 출제자가 시험자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많아 비리가 형성되기 쉬웠는데, 이를 혁파하고자 했던 왕진은 시험 문제는 당일까지 철저하게 타인에게 비밀로 한 것은 물론, 자신에게 올 때는 이름을 감추고 필체도 서리가 한 번 필사하게 만들어 채점자가 모르도록 조치했다. 즉 교육 환경 버프를 받기는 했지만 다른 출제자들을 제친 건 방원의 실력이었다.[70] 과거에 합격한 정확한 시기는 안 나오지만 원 역사보다 조금 빨리 과거에 급제했다는 서술이 있고 민제의 딸과 막 혼인했다는 것을 보아 1382년으로 추정된다. 이때 이방원은 신혼 시절이라 그런지 2살 연상의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좋아 죽는 모습을 보인다.[71] 조직의 특성상 가족에게도 국가보위성 업무는 비밀이라고 한다. 독자들도 킬방원 밈이 될 정도로 젊을 때 한 성깔했던 이방원의 특성상 잘 어울린다고 평했다.[72] 원 역사에서 즉위 이후 사냥 하러 나갔다 낙마를 여러 번 한 것을 보아 마상술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 가족들을 데리고 탈출에 성공한 것도 그렇고 여러 번 낙마했음에도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도 없기에 아주 못하지는 않았을 듯하다.[73] 이때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지만 무엇인지 깨닫지는 못하는데, 원 역사에서 잃어버린 것(이씨 왕조와 왕위)으로 추정된다.[74] 이방원은 작 중 서경에서 시행된 과거의 최초 장원급제자다. 즉, 자신의 영광을 아들이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면서 재현하니 더욱 기뻐한 것.[75] 이도가 1397년, 황희가 1363년, 맹사성이 1360년생으로 황희보다 34세 연하, 맹사성보다 37세 연하이다. 이 정도면 당대에는 손자뻘 수준의 나이 차이다.[76] 이때 김종서가 선배로서 이도를 챙겨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김종서는 1383년생으로 이도보다 14세 연상이다.작중 집현전의 위상을 보면 김종서가 막내인 상황이 정상인 게 함정. 그러길래 누가 10대 중반에 장원급제하래?[77] 촉한에서 천연가스를 통한 원시적인 제염 기술이 있었고 송나라도 중세 수준을 못 벗어나긴 했지만 석탄 공업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고려하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닐지도? 여담으로 석탄으로 인한 오존층 문제는 몽골 제국의 대학살과 문명 파괴로 리셋당하면서 자연히 해결되었다고 한다.[78] 왕진도 원 역사에서 이도의 재능을 알고는 있었지만 증기기관 개발까지 튀어나올 줄은 상상치도 못했는지 속으로 '허허...... (세종)대왕님, 이 정도실 줄은 몰랐는데요. 이 물건이 벌써 세상에 나올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라고 독백했다.[79] 상급자인 이천은 이도가 이슬람 수학을 제시하면서 이천이 갖고 있던 문제의 해결책을 전개해나가자 아예 정신줄을 놔버렸으며, 이도의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왕진에게 자신의 보직을 변경하거나 이도를 자신의 밑에 두지 말 것을 상소로 올렸으나 이천 역시 발명 쪽으로는 꽤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 왕진이 이를 각하했다.[80] 왕진은 세자 시절부터 훈민정음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음운학적 지식이 떨어져서 이도가 성장할 때까지 수십 년간 기다리고 있었다.[81] 원래 식성인 고기를 많이 준 것은 물론, 활동량 부족으로 살이 찔까봐 집현전과 화통도감 사이에 언덕길로 배치해서 간접적으로 운동을 하게 유도했다. 또한, 뉴커먼식 증기기관의 문제점(냉각 방식의 문제로 인한 연료의 과소비)을 지적한 뒤 바로 시정하겠다는 이도의 말에 우선 열흘간의 휴식을 강제로 부여해서 혹사를 방지한 것은 덤이다. 얘 때문에 멀쩡히 커피에 설탕 타먹던 신하들은 갑자기 금당령이 내려오며 날벼락을 맞는다.[82] 증기기관의 개발로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당상관인 부제조에 올랐고, 파격적이라고 간주될 이른 승진에도 이도의 실적과 태왕의 총애, 전주 이씨 가문빨이 겹쳐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이후 훈민정음 개발은 물론 원 역사를 초월한 실적들을 마구 달성했을테니 벼슬이 높아졌을 것은 명약관화다.[83] 후임들에게 임무를 잘 완수했으니 보상을 받아야겠지? 드립을 무심결에 쳐 가며 갈아넣는 모습이 압권[84] 이후 해당 설정은 정조의 아들이 작가로 살아남기의 정약용과 정조에게 재활용되었다.[85] 기성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차이는 세대와 성향에서 나온 것일 뿐 출신 가문과 신분은 같았다. 한국사의 주요 가문들은 원삼국시대~후삼국시대에 자리 잡은 호족들이 고려시대 문벌귀족-권문세족-신진사대부로 이어지고, 조선시대 양반과 중인으로 분화되어 구한말까지 거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게 된다.[86] 이슬람 관련 밈이 많은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작중의 정도전이 이슬람 교리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유교 탈레반이[87] 고려 후기에는 이슬람 색목인(중앙아시아인)이 고려에 들어와서 세운 예궁(禮宮)이라 불린 모스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사라지지만.[88] 불씨잡변 같은 불쏘시개 따위를 만들 시간에 제대로 된 글을 써오라는 취지도 있었다.[89] 하는 역할은 북한의 동명(同名) 조직인 국가보위성과 같다.[90] 공민왕을 충실히 섬기던 시절에도 비대한 권력욕을 가진 사악한 인간이었다고 한다.[91] 외전에서 샤 루흐에게 홍삼을 주면서 정력제 드립을 치기도 했다.[92] 최대식도 색목인 혼혈이라서 금방 친해졌다.[93] 이때 털어버린 해적 중 하나가 바르바리 해적이었는데 바르바리 해적은 오스만 제국의 용병 노릇을 하고 있었고 본작에서는 티무르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관광 보낸지라 티무르 제국과 형제국이었던 고려 사신단을 적으로 간주해 노예로 삼으려 하자 관광 보냈다.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이슬람교 율법상 무슬림끼리는 노예 매매를 하면 안 되는데 무슬림인 자신도 노예로 삼으려 한 것에 대한 분노도 있을 듯하다.(마화는 원 역사에서도 본작에서도 독실한 신자였다)[94] 이종무는 희망봉을 '태왕봉'이라 명명했다.[95] 차칸테무르, 코케테무르가 속한 몽골 부족.[96]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왕진은 생전에 양위를 했지만(본인도 100살까지 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과학 분야처럼 미래지식이 필요한 분야들은 여전히 자신이 관리했고, 황희는 왕진의 휘하에 속해 있어서 90살까지 갈궈진 거라고 한다.[97] 남인도산 후추를 사용했기 때문에 왕진은 이대로 주원장이 중원 정복하고 해금령 걸어버리면 후추를 못 먹는다는 이유로 중원을 둘로 쪼갤 의욕을 다졌다.[98] 고춧가루가 없어서 산초가 섞여 마라맛이 나는 쌈장으로 대신했다.[99] 이런 토곤테무르의 예술가 기질(예민함)이 작중 초반의 번아웃 증후군에 큰 영향을 끼친 걸로 추정됨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기도 하다. 이는 원 역사의 공민왕도 마찬가지인데 공민왕은 화가의 재능이 뛰어났고 유일하게 사랑하던 노국대장공주가 결혼 초기 아이를 유산한 뒤 십수 년이 지나서야 다시 임신했는데 아내와 아이 모두 죽어버리자 절망감에 망가져 버렸다.[100] 너무 노골적으로 왕진을 밀어준 탓에 몽골계 부족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나 반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지만, 작중 묘사에 따르면 어차피 몽골 제국의 특성상 반란은 일어났을 거라고 한다. 오히려 이 반란의 여파로 쿠빌라이계 황금씨족 대부분이 죽고 원나라도 공중분해당할 뻔했다가 왕진이 원나라의 권력을 쥐면서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될 수 있었다.[101] 이는 충선왕이 쿠빌라이 칸의 맏며느리인 코코진에게 몽골식 이름을 받아 피후견인이 되면서 코코진의 손자(차남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카이산, 아유르바르바다와 일찍부터 친해지고 둘을 대칸 자리에 올리는데 기여한 것과 유사하다.[102] 챠브이의 친모는 미인이지만 히스테리가 심한 성격 때문에 곧장 토곤테무르의 총애를 잃은 말단 재인(하급 후궁)으로, 당시 챠브이는 친모의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103] 몽골 제국의 쿠릴타이 개최는 태후의 영향이 컸다.[104] 원말명초 시기의 인물인 엽자기(葉子奇)가 쓴 서적「초목자(草木子)」에 따르면 장수 베이르테무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려 혼혈인 아유시리다라 대신에 바얀 후투그 황후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옹립할 뻔했으나 아유시리다라를 돕기로 한 코케테무르의 도움으로 상황이 정리되었고 이 때 바얀 후투그 황후는 마음 속으로 근심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태자 후보로 점쳐지던 황자는 실존 인물인지 의심되는 존재이며 초목자에서조차도 幼子雪山(유자설산)으로만 표현됐는데, 이는 '어린 아들의 이름이 설산' 이라는 뜻도 되지만 '어린 아들은 설산에 있었다(혹은 설산으로 보냈다)로 뜻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아마 실존 인물이고 당시에 생존했어도 역신(逆臣)이 내세운 황자였기 때문에 베이르테무르의 난이 정리된 후 처형되었을 것이다.[105] 그리고 원사종실세계표의 순제 항목에는 순황제, 아들 3명: 장남은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이며 나머지 2명은 일찍 죽었다(順皇帝,三子:長皇太子愛猷識理達臘,餘二子,蚤世) 라고 되어 있다. 친킴 태자는 바얀 후투그 황후의 열전에라도 기록되어 있지만 설산이라는 이름은 초목자 외엔 그 어디에도 언급이 안 되어 있다. 작가가 바이두 백과나 위키백과에 기재된 잘못된 정보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106] 베이르테무르는 원 역사에서 사망 시기에 대한 기록이 갈리는 인물로 1353년 홍건적 토벌 와중에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1369년에 죽었다고 하기도 하며, 고려사에서는 1370년에 처형당해서 공민왕이 조회를 금지시키고 고기 반찬을 끊었다고 하기도 한다. 작가는 1370년 사망설을 따랐는데 고려사에서 공민왕이 장인의 사망에 대해 따로 반응한 기록이 있고 이때가 토곤테무르가 죽고 아유시리다라가 즉위한 해라 한창 치열한 정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107] 토곤테무르의 할아버지인 카이산의 이복형 아무케의 차남이었다. 다르마발라-아무케-베이르테무르 / 다르마발라-카이산-쿠살라-토곤테무르.[108] 공민왕의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였다.[109] 복국장공주는 베이르테무르의 7촌 고모였다.(쿠빌라이-후게치-에센테무르-복국장공주)[110] 초원에서 부족 생활을 유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북중국에서 정주 생활을 하면서 남중국 군벌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몽골인들은 왕진이 없었으면 진작에 원나라가 망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111] 작가 曰 정확한 년도는 안 정했다고. 원 역사에서 1395년에 티무르에게 패망한 토크타미쉬가 더 빨리 망했다고 하므로 1390~1394년 사이이다.[112] 먼터무는 1370년생이라 이 당시 12세였다.[113] 처음에 사신을 보냈을 때는 티무르도 그저 관망을 하려는 상황이었고 주원장 역시 단순히 서로 갈 길을 가자는 원교근공의 노선이었기에 대립각이 서지 않았던 반면, 오이라트가 반기를 들자 자신이 이미 중화통일을 이루었다고 착각했는지 티무르에게 고자세로 나갔다. 당연히 원 역사에서는 통일 제국이 된 명나라를 치려고 마음먹었던 티무르에게 갑질이 통할 리가 없었다.[114] 주원장이 북벌로 추진한 전선은 2개였는데 그중 1개가 끝나지 않았고 고려가 수군으로 명나라 해안선을 타격해서 추가 전선이 열린 상태였다.[115] 그러나 작중에서 왕진을 가장 긴장시킨 난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주인공이 미래인이 아니었으면 이기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6] 더불어 거위고기 일화를 떠올렸는지 거위고기를 먹지 말 것을 당부했다.[117] 1382년 북벌 당시에는 위왕(魏王)이었지만, 북벌에 실패하고 주표가 즉위한 뒤 송(宋) 땅으로 전봉되었다.[118] 주체는 1360년생이라 1352년생인 왕진보다 8살 연하이다.[119] 본작에서는 명나라와 고려 사이가 원 역사보다 더 나쁘다 보니 당사자에게도 숨긴 것으로 보인다.[120] 원 역사에서는 요절한 형의 뒤를 이은 조카가 먼저 숙청 시도를 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안 그래도 격무에 골골거리는 형을 비소로 보내버린다. 그 뒤 조카가 번왕들을 숙청 시도한 것은 같다.[121] 원나라를 포함하면 삼국지의 위촉오와 비슷한 형세라고 보면 된다.[122] 주체가 이방원에게는 원래 정체를 말하지 않았고 왕진 역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대면했을 때 송왕의 거처에서 나오는 주체를 보고 이방원이 당황한 것은 덤이다. 물론 신분을 숨긴 것에 나쁜 의도가 하나도 없었고 워낙 두 사람의 성향이 잘 맞다 보니 친분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123] 원 역사의 공헌현비 권씨(恭獻賢妃 權氏)로 추정된다.[124] 연운 16주를 받는 대가로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협조했으니 당연히 고려 내에서도 반원 기조가 일 것은 자명하며, 이는 후계자였던 왕진에게도 당연히 위협이 된다.[125] 원 역사에서도 홍무제는 이방석과 자신의 딸 사이의 혼담을 잠깐 논했다가 서로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파토난 적이 있었다.[126] 공민왕이 1382년 원정에서 해군을 보낼 때 명나라 사신들이 페이크로 자신에게 결례를 저지른 건 잊어버렸지만 자기 아들을 숙청하라 사주한 것은 안 잊고 보복했다고 나온다. 해당 계책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왕진 숙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127] 백주 대낮이라 일반인들은 그냥 청명한 하늘로만 생각했다.[128] 티무르는 1336년생으로 공민왕(1330)보다 6살 연하, 이성계(1335)보다 1살 연하이다.[129] 사군사주의 일원이었던 바를라스 쿠빌라이(칭기즈 칸의 8촌 형제)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쿠릴타이 참가 자격이 있었지만 바를라스 부는 오래전에 차가타이 칸국에 속하게 되면서 원나라와 연이 끊어져 잊힌 지 오래였다. 물론 모든 바를라스 부가 차가타이 칸국으로 가지는 않아서 원나라에 속한 바를라스 씨족도 있기는 했지만, 원나라와 연이 끊어진 차가타이 칸국의 바를라스 씨족이 갑툭튀한 거니 당황한 것.[130] 여러 정황을 보아 1379년으로 추정된다.[131] 이 시점에서는 차가타이 칸국을 하나로 합치고, 동맹 토크타미쉬를 지원해 북쪽으로 원정을 나가 킵차크 칸국의 동부를 무너뜨렸으며, 서방 원정에서 아랄 해 남부 호라즘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옹기라트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 땅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 뒤 일 칸국-북인도-오스만 술탄국 순으로 정복을 이어갈 예정이었다.[132] 티무르는 모계로 칭기즈 칸의 차남인 차가타이의 피가 이어지고 있고, 구르칸(부마)의 지위를 손에 넣기 위해 차가타이 칸국의 마지막 공주였던 사라이 물크를 약탈혼했다. 그래도 사라이 물크와의 금슬은 좋다고 한다.[133] 티무르도 자신이 황금씨족의 부계 후손이 아니라서 차가타이 칸국의 후손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상태였다.[134] 원나라에 쿠르겐(부마)이 왕진 외에 많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왕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135] 일부에서는 왕진과 티무르의 관계가 정도전(드라마)의 정도전과 이인임,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홍인방같은 관계로 느껴진다고 한다.이게 누군가!? 나의 가장 절친한 벗 카사르테무르가 아니신가!?[136] 실제로 본작의 주원장은 하늘에게 선택받았다고밖에 볼 수 없던 원 역사와 달리 주인공에 의해 천명을 잃고 만다.[137] 원래 일어날 일이긴 했지만 티무르의 '가장 강한 자'의 발언이 특유의 혈통주의와 결합하여 더 심하게 폭발했다. 세샨의 혈통이 딸리는 건 아니지만 고려인 잡혈(왕진)이 세샨을 통해 원나라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 물론 이 반란군들은 능력이 한참 떨어져서 왕진에게 다 처발리고, 몽골인들도 대도의 중신들은 대부분 왕진 덕분에 망할 뻔한 나라가 건사된 걸 알고 있어서 반란군을 얼간이 취급했다.[138] 원 역사보다 빨리 토크타미쉬를 때려잡은 상태였다고 한다.[139] 일반적인 체스가 아닌 티무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티무르 체스라고 언급된다.[140] 원 역사에서 티무르가 열병으로 죽은 이유가 한겨울에 얼음물을 마셔서였다. 충고를 들은 티무르는 자신에게도 천기를 읽어준 것이냐며 감탄한 것은 덤이다.[141] 외전에 나온 바에 따르면 제국의 영토와 인구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대신 실크로드 바닷길이 뚫려서 마냥 처지가 나쁜 건 아니고, 티무르도 약탈에만 치중하던 경제를 좀 더 정상적인 무역 경제로 바꾸려고 시도 중이라고 한다. 이는 자신이 실행했던 약탈 경제보다 무역경제가 가져다 주는 부가 더 크기에 사마르칸트의 발달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142] 왕진과의 토론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후계자로 세워야 했다는 지론을 펼쳤으나 왕진이 했던 말인 '제국을 창건하는 군주는 가장 강한 사람이어야 하지만, 제국을 유지하는 군주는 사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았다. 왕진은 티무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대도에서 섭정 노릇을 하던 왕운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고.[143] 샤 루흐와는 다르게 후계자로 총애하던 손자가 수에즈 운하 자체의 가치를 모르자 왕진의 충고가 옳았음을 되새기기도 했다. 수에즈 운하 덕분에 티무르 제국의 해군이 지중해와 홍해를 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이 어마어마한 가치였기 때문. 또한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면 자연스레 티무르 제국의 무역경제도 쇠퇴하기 마련이라 수에즈 운하의 가치는 티무르 제국-고려-베네치아 공화국 3나라 모두에게 윈윈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원 역사의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어렵다보니 바르바리 해적을 아예 사략함대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쇠퇴에 지중해 무역의 쇠퇴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이 된다.[144] 서양권에서는 티무르 바를라스로 부를 가능성이 높다.[145] 왕진의 제안이 비현실적인 건 절대 아니었다. 현실에서 가동되고 있는 수에즈 운하는 19세기에 와서야 뚫린 것이긴 하나, 수에즈 지역에 운하를 뚫는다는 구상 자체는 기원전부터 있었다.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근대와는 다른 경로로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아케메네스 왕조 대에는 성공해냈다. 즉, 이미 기원전부터 대략적인 개념은 잡혀있어서 국력이 어느 정도 되는 나라들은 한 번쯤 시도해본 프로젝트였고, 기술력과 노동력 문제로 실패한 경우가 많았지만 성공한 사례도 있었던 것.[146] 원 역사에서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15세기 후반 우호관계였던 맘루크 술탄국의 도움을 받아 수에즈 운하를 재건해 활로를 찾고자 했지만, 하필 이때 맘루크 술탄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해버렸고 오스만 제국은 폐쇄적인 무역 정책을 고수해서 그대로 망해버린다.[147] 장사성의 세력은 주인공이 회귀한 시점에서는 고려 제국의 번국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148] 신라도 왕조 역사가 800~900년에 달하지만 시호를 쓰기 시작한 건 태종 무열왕 때부터고, 묘효가 확인된 건 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 열조 원성왕 정도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수당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묘호를 주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신라도 이 영향을 받은 것이며, 묘호를 일일이 주게 된 것은 수당시대의 영향을 받은 왕씨 왕조부터이다.[149] 공민왕의 시호와 묘호를 줄 때도 이미 31대나 되다 보니 고르느라 신하들이 고생했는데 후대에는 뭐 말할 것도 없다. 한자문화권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묘호-시호가 리셋되어 중복되어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왕조 수명이 안 길어서 문제가 안 되었지만 1100년 단위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150] 백련교가 마니교와 완전히 같은 종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