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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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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반적으로 동양권 국가에서 관군 중에서 조정임금을 지키는 친위대, 근위대를 일컫는 말. 현 대통령경호처와 유사한 역할을 맡았으며, 한국사에서는 고려, 조선 때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금군이라 불렀다. 금군은 단순 근위대 노릇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군의 대표이자 중추이고 최정예로서 전쟁전투에서의 중요 역할을 담당하는 군단이기도 하였다.

2. 한국

파일:궁56695444v2.jpg
경복궁을 지키는 금군을 재현한 수문장 교대식

2.1. 백제

백제에서는 직접적으로 금군이라는 호칭은 등장하지 않지만 최고위직인 6좌평국왕경호를 맡은 위사좌평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금군에 해당하는 근위대가 존재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사좌평 중 동성왕 대에 오히려 왕을 시해한 백가가 유명하다.

2.2. 신라

'금군'이라 명시된 기관은 삼국사기에서 874년의 이찬 근종(近宗)의 반역을 토벌하는 기사에서만 언급된다.

그 외에 왕실왕궁을 근위, 경비하는 기관으로 시위부(侍衛府), 흑개감(黒鎧監)이 있다. 이 둘 중 시위부는 근위대의 역할을 맡은 것이 명확하며, 흑개감은 시위부와 역할이 겹치기 때문에 근위가 아니라 병고(兵庫) 관리를 맡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1]도 있다.

금군이 중국식 용어고 신라는 당제를 받아들인 발해, 고려와 달리 고유 관직명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874년의 기사는 이들에 대한 별칭으로 중국식 용어인 금군이 일시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신라후기 시절, 중앙군 역할을 담당하는 근위대인 9서당 역시 별칭으로 금군이라고도 하였다.

2.3. 발해

발해의 군제는 10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중 근위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각 위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위가 그 역할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2.4. 고려

태봉~고려초기 시절, 궁궐과 도성의 경비, 왕의 경호를 맡은 내군(內軍)과 시위군(侍衛軍)이 금군이라 불렸고, 이후 해체된 이들의 역할을 맡은 견룡군(牽龍軍)[2], 공학군(控鶴軍)[3], 순검군(巡儉軍)[4][5]도 금군이라 불렸다. 중앙군의 2군 6위 중 2군(응양군,용호군)과는 다른 부대이다.[6]

2.5. 조선

1392년, 이성계자신의 사병들을 기반으로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설치하게 한다. 이후 의흥친군위는 기존 고려의 중앙군이었던 2군 6위와 합쳐져 10위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의흥친군위[7]와 나머지 8위[8]의 지휘체계가 달라 비효율적이란 지적이 나오자, 1394년 정도전의 제청에 따라 10위(十衛)는 10사(十司)[9]로 개편되었다. 의흥친군좌위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의흥친군우위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개편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8위의 응양위(鷹揚衛)[10] 역시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개편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이후 태종 4년인 1404년, 응양위(鷹揚衛)[11]가 창설되었고 1407년에는 내금위(內禁衛)[12]가, 이어 1409년에는 내시위(內侍衛)[13]와 겸사복(兼司僕)[14]이 연달아 설치되면서 금군의 전력이 증강되었다. 그러나 북방 국경이 여진족의 침입으로 혼란해지자 점차 내금위, 겸사복 병력을 북방으로 파견하는 관행이 생겼고, 이에 따라 궁궐의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지적이 나오자 성종 대인 1492년 우림위(羽林衛)[15]가 새로 만들어져 3위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우림위의 창설에도 금군의 부족은 여전했는데, 이는 세조 이후 대규모 군축이 진행되어 군 규모 자체가 크게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16] 북방군과 남도의 수군을 제외하고는 질 역시 현저히 저하되어 어쩔 수 없이 금군이 계속 국경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금군을 보충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17], 평로위(平虜衛)[18] 등이 창설되었고 중앙군인 오위 중 정예 병종인 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등도 역시 궁궐 숙위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갑사와 별시위 역시 북방으로 파견되어 임진왜란 전까지 병력 부족 문제는 영 해결되지 않았다.

양란 이후 효종 재위 시 내3위[19]를 통합하여 내삼청(內三廳)이란 단일 군영 통제 아래 두었고[20], 지휘는 좌우별장 두 명과 밑에 10장(내금위6, 겸사복2, 우림위2)이 맡았다.[21] 그러나 이후 현종 7년 금군청(禁軍廳)으로 개칭 축소하면서 좌우별장을 통합하여 금군별장과 금군7장(내금위3, 겸사복2, 우림위2)을 두고, 숙종대에 금위영(禁衛營)이 설치된 후 금군별장을 금위영 중군(中軍)이 겸하게 함으로써 금군청이 금위영 휘하에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12년 병조에서 금군별장을 별도로 뽑게 한 뒤 금위영에서 독립하였으며 금군별장 아래 7명의 번장(番將)[22]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영조 재위 시 명칭이 다시 용호영(龍虎營)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군영의 최고책임자는 금군별장으로 부르게 하였다. 정조 즉위 후 숙위소[23], 장용영이 창설되어 새로 궁궐 숙위 업무와 국왕 경호 업무를 맡자 기존 인원에서 100명 감축된 600여명의 규모를 유지하다가 정조 사후 순조 재위 시 다시 700명으로 증원되었다.[24]

조선에서는 금군을 제외하고도 무예청(武藝廳)[25], 호위청(護衛廳)[26], 선전관청(宣傳官廳)[27], 내시부(內侍府)[28] 등이 왕의 근접 경호와 궁궐의 경비를 맡았다.

이후 1881년 무위영(武衛營)[29]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무위영이 창설된지 6개월도 채 안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해체되었고 친군영(親軍營)으로 재편성되었다.[30] 1894년 친군영이 해체된 이후에는 훈련대시위대가 맡다가 친위대에 해당 업무가 이관되었다. 이후 역사는 대한제국군 항목 참조.

3. 중국

3.1. 한나라

한나라때 금군은 우림군(羽林軍)/호분군(虎賁軍)이라는 명칭으로 중앙군을 겸했었다. 동시에 이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대장군, 지휘관으로는 위장군(衛將軍)이 최고통수를 맡았고 그 예하로 사령관인 5명의 중랑장(中郞將)이 존재했다. 소위 5중랑장이라고 하여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 우림중랑장(羽林中郞將) /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将) / 좌중랑장(左中郎将)/ 우중랑장(右中郎将)이 그들이다. 원래 전한때는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将) / 좌중랑장(左中郎将)/ 우중랑장(右中郎将)으로 3중랑장이었으나 증설되었다. 후한십상시환관 세력을 보위하기 위해 서원팔교위를 설치했다.[31]

3.2.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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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송나라

황제의 전제 정치와 문치주의의 병폐 때문에 강간약지()[32]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문(文)의 극단적 우세와 무(武)의 극단적 열세의 풍조가 이어졌고, 송나라 군대는 개국 이래 멸망할 때까지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연전연패하였다.

3.4.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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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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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는 국왕 경호, 궁궐 경비 외에도 왕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에는 왕과 황제를 지키는 전속 경호병이자 황제의 밀명을 받아서 행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류는 유해의 폭포사모 페이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붙여준 갈바마리를 비롯한 22명의 두억시니이며, 금군들에게는 고위 관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도 불문에 부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이십이금군 항목 참조.

드라마 킹덤에서 등장한다.

백야극광의 전설 오로리안인 프리토리언의 중문명이 금위좌(禁卫座)인데, 이는 금군을 별자리로 묘사한 작명이다.

내금위장의 경우 상기한대로 3인 이상이나 왕의 최측근 무사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드라마나 영화에선 1명으로 나온다.

5. 관련 문서


[1] 이인철, 《신라정치제도사연구》, 1993, 65쪽[2] 고려에서만 사용하던 명칭으로 御牽龍, 太子牽龍으로도 불리며 金畵帽를 썼다. 주 임무는 왕이나 태자가 움직일 때 경호대였으며, 독립적인 군부대라기 보다는 응양군이나 용호군에서 차출된 것으로 보인다.-'마이 라이프 포 고려왕!' 고려의 친위대에 관해 참조-[3] 唐에서부터 사용하던 명칭으로 견룡군과 비슷한 부대였으나 黑帽(<<고려도경>>에서는 紫文羅袍를 입고서 꽃무늬를그린 오색비단을 둘렀으며, 折脚幞頭를 썼다고 한다.)를 썼다. 역시나 응양군이나 용호군에서 차출된 것으로 보이며, 견룡군과 함께 사서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경호대이다.[4] 의종시기 설립한 친위대로 보라색 의복을 착용하였는데, 기타 의장대완 구분되어 서는 위치나 대우가 달랐고, 밤낮으로 궁궐을 호위했다.[5] 기타로 衛國抄猛班(명종시기 설립, 기존의 친위대들이 무신정변으로 통제불가 상태가 되자 창설), 忽赤/近侍衛(元간섭기 충렬왕때 설립, 왕의 친위대로써 만들었으나 무인정권시기 중앙군이 무력화 되면서 중앙군의 성격 결합), 忠勇衛(공민왕때 설립, 홀적과 동일 목적)[6] 금군을 오늘날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이라 한다면 2군은 수도방위사령부, 6위는 야전부대라 할 수 있다.[7] 의흥친군좌위와 의흥친군우위로 구성[8] 응양위, 금오위,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비순위, 천우위, 감문위.[9]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10] 고려 시대 국왕의 호위를 맡았던 2군 중 하나인 응양군(鷹揚軍)이 개편된 부대.[11] 상단의 응양위와는 이름만 같은 부대로서 1474년 내금위에 흡수된다.[12] 궁중 숙위를 담당했던 내상직(內上直)을 정리, 개편하여 조직한 왕의 친위군 혹은 금군으로, 처음에는 그 수가 불과 60∼90인에 지나지 않는 정예 부대였다가 내시위(內侍衛)를 통합해 그 수가 200인에 이르렀으며, 5품 이하의 의관자제(衣冠子弟) 중 무재(武才)와 지략이 뛰어나고 용모가 단려(端麗)하며 키가 큰 자를 뽑아 조직하였다.『경국대전』에는 190인 정원의 체아직(遞兒職)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빈번한 부방 등으로 왕의 호위의 약화를 가져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예차내금위(預差內禁衛)의 제도를 실시하면서 그 수가 700인에 이른 때도 있었다. 그러나 1510년(중종 5) 실차(實差) 190, 예차(預差) 200, 가예차(假預差) 100으로 정해지는 등 금군의 중추를 이루었다. 이들은 교대로 근무하는 병종이 아닌 장번군(長番軍)으로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주로 양반 자제로 편제되었으며, 다른 병종보다는 후대하였다. 특히나 이들의 주된 임무는 왕을 직접 호위하는 것이었으나, 무재(武才)가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양계(兩界)에 부방(赴防)했으며, 조선 전기 무장 중에는 내금위 출신이 많았다.[13] 내금위의 인원이 부족하다 하여 구성되었으며, 120인으로 40인씩 세 번으로 나누어 숙위하였다. 1424년 내금위에게 흡수된다.[14] 1409년(태종 9) 처음으로 성립되었고, 1464년(세조 10)에 정비된 조직을 갖었으며, 주로 국왕의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 및 친병 양성 등의 임무를 맡았던 금위(禁衛)의 군사였다. 임용에는 사회적인 신분보다 무재(武才)가 더 중시되었다. 따라서 양반으로부터 서얼·양민·천인, 심지어 향화인(向化人)·왜인(倭人)들까지 포함되어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친위병이었던 관계로 용모·학식·신장·시수(矢數) 등이 중요한 자격 요건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원이 50인으로 장번복무(長番服務)를 하며 채아직이였다. 만기 복무 연한은 대체로 7년이었으나, 향화인 및 북계인들은 2년 혹은 2년 반에 교대로 복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15] 무재(武才)가 특이한 서얼 가운데 시취(試取)한 50인을 정원으로 하여 장번(長番) 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모두 체아직을 받았다. 금군으로서 겸사복이나 내금위보다는 낮지만 갑사(甲士)보다는 상위에 위치하였다.[16] 세조 시기 조선의 상비군은 무려 8만명에 달하였으나 이후 성종 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을 보면 중앙군 약 1만, 지방군 약 4만(수군 포함)으로 크게 줄어든다. 설상가상으로 장부 상의 병력 중 상당수는 방군수포 제도를 통해 군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아 실제로 근무하던 병사 수는 더욱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7] 한량들로 구성된 부대로, 겸사복장의 지휘를 받아 궁궐 숙위 등을 담당했다. 한량들이 금군에 가기 위해서는 정로위 근무 경험이 필수였다. 중종에 설치되어 광해군 대에 폐지된다.[18] 조선 초 하삼도의 한량들로 구성한 부대인 호익위(虎翼衛)가 세조 대에 개편된 부대로 권문세가의 자제들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갑사별시위(別侍衛)로 전출되었다.[19]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20] 내삼청이라는 단어 자체는 내3위를 모두 합한 명칭으로 불리었다. 효종 이전에는 3위를 통칭하는 단어로 쓰였다면, 효종 이후로는 부대 이름으로 개칭한 것. 징비록(드라마) 15화에서 류성룡이 도성과 왕실을 수비하는 내삼청 군사들이 도망을 가냐며 대노하는 장면이 있다.[21] 이는 그 이전 종2품직이였던 내금위장, 우림위장, 겸사복장을 정3품 당상관으로 내리고, 새롭게 종2품직으로 금군별장을 둔 것이다.[22] 내금위장 3명, 우림위장 2명, 겸사복장 2명[23] 숙위대장은 홍국영이 맡았었다.[24] 2만명에 달하는 장용영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25] 무예청에 소속된 호위무사들을 무예별감, 줄여서 무감이라 불렀었다.[26] 인조반정 당시 동원된 사병(士兵)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부대로, 350명 전원 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정1품의 호위대장이 있었으나 정3품의 호위별장이 사실상 지휘하였다.[27] 왕명 출납과 경호를 맡았던 선전관들이 속해있던 관청. 문반이 홍문관에 들어가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면 무반은 선전관이 되는 것을 명예로 여길 정도로 조선시대 무반들의 선망직 중 하나였다.[28] 왕의 근접경호를 도맡던 내시를 시위(侍衛)내시라 한다.[29]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폐합해 만든 군영.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았다.[30] 친군장위영(親軍將衛營)이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도맡았다.[31] 삼국지에서는 금군의 지휘관이 대장군인 하진이었는데, 하진이 십상시에 의해 척살당한 이후 지휘체계가 붕떠버렸다. 이후 동탁낙양에 입성하자 가후가 동탁에게 진언하여 동탁의 병력 3,000명을 800명씩 3개조로 나눠 2400명으로 만들어 새벽에 몰래 내보낸 후 나머지 600명만으로 주둔하도록 한 뒤 아침에 1개조, 점심에 1개조, 저녁에 1개조를 각각 북을 울리며 낙양성에 입성하도록 했고, 이 3개 조는 또다시 야밤에 몰래 성 밖으로 나간 뒤 다시 입성하는 방식을 몇날 며칠동안 반복한 끝에 하진이 지휘하던 금군들을 동탁에게 항복하게 했다. 금군은 서량에서 동탁을 도와주기 위해서 계속 병력을 보내는 줄 알고 동탁에게 귀부했다. 그 금군 장수 중 한 명이 조조도 무찌르고 손견도 무찌른 서영이었다.[32] 중앙의 금군을 강화하고 지방군을 약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