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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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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柳在夏 | Yoo Jaeha
파일:유재하1.jpg
<colbgcolor=#324aac><colcolor=#fff> 출생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620[1]
사망 1987년 11월 1일 (향년 2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한남대교 북단)
출신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본관 풍산 류씨 (豊山 柳氏)[2]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로 154-62[3]
가족 아버지 유일청 (柳一靑, 1922 ~ 1989)[4]
어머니 황영 (1926 ~ ?)
3남 4녀 중 여섯째(3남)
학력 은석국민학교[5] (졸업)
삼선중학교 (졸업)
대일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 음악학사)
소속 위대한 탄생[6]
봄여름가을겨울[7]
종교 가톨릭[8] (세례명: 미카엘)
서명 파일:유재하 사인.svg

1. 개요2. 위상3. 생애
3.1. 유년기3.2. 그룹 활동3.3. 솔로 활동3.4. 사망
4. 평가5. 음반
5.1. 1집 사랑하기 때문에5.2. 추모 앨범
5.2.1. 1997년 앨범5.2.2. 2017년 앨범5.2.3. 2023년 앨범5.2.4. 미공개곡: 별 같은 그대 눈빛
5.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유재하씨.jpg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

2. 위상

25세의 짧은 생애 동안 단 1개의 앨범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데뷔작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가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방향성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2018년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도 이 앨범을 1위로 놓으며,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중요한 단일 작품'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날 들어도 훌륭한 세련미와 단아함을 지녔으며, 어눌하지만 정직한 보컬, 절제를 아는 세션, 간결하고 담백한 노랫말 등이 고루 인상적이다.

3. 생애

3.1. 유년기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現 안동시 풍천면 하회1리) 하회마을에서 유창물산(裕昌物産)주식회사 사장을 지낸 아버지 유일청(柳一靑)[9]과 어머니 창원 황씨 황영[10]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호적상으론[11] 숙부 유시목(柳時沐)에게 입양되었다. 참고로 조선 선조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의 14대손으로 안동 하회마을은 유씨의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2]

소박한 이미지와는 달리, 김광민 등 생전 유재하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집안이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 집안으로 의외로 유복했다고 한다. 다만 친구들 증언에 따르면, 평소 차림은 노무자 스타일 점퍼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본인은 나름 차려입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함정.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성장한 곳은 서울로, 생전 삼선동동숭동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서울 은석국민학교, 삼선중학교,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13] 전공은 순수음악으로,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교수가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 오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음악이 모차르트만큼 훌륭한 나머지 교수가 착각했다는 뜻이다. 그의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의 수록곡들 중 5번 트랙 "Minuet"는 아예 고전음악이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 전공이었지만, 그는 대중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14] 작곡작사, 편곡 외에도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밴드 레모네이드의 유혁의 글에 따르면, 대학시절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한다.[15]

3.2. 그룹 활동

파일:조용필_유재하.jpg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시절.(왼쪽에서 두번째. 유재하 오른쪽은 김광민과 송홍섭)

한양대 재학 중이던 당시 '조용필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순수음악 전공 학생이 가요계와 연결되면 퇴학(...) 조치를 당하던 시절이라 카메라에 절대 잡히지 않는 조건을 걸고 시작했다. 하나 조용필의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2개월만에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하게 된다.

그래도 이때 조용필과 연이 있었던 것이 묘하게 연결되어, 유재하는 훗날 본인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 7집에 먼저 취입하게 된다. 좀 더 정확하게는 7집이 발매되기 약 반년 전인 1984년 11월 일본에서 발매된 조용필의 <아시아의 불꽃> 앨범에 한국어 버전과 일본어 버전('芙蓉の花のように') 2가지로 먼저 실렸다. 이것은 유재하의 곡 중 최초로 레코딩된 버전이다.

이때 곡이 가게 된 설 중 하나로는, 당시 위대한 탄생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 편곡자, 프로듀서였던 송홍섭이 유재하 집에 방문했을 때 유재하가 자신의 곡을 조용필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악보를 전해 받은 조용필이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장조 발라드의 곡이라며 유재하 곡에 관심을 가져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재하가 조용필에게 준 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16]
파일:external/image.music.naver.net/121101_yjh_akbo_.jpg
수록곡 중 하나인 '우리들의 사랑' 악보
조용필에게 주었던 버전이다. 악보 상단에 적힌 2절 도입부 가사를 보면 현재 불리는 유재하 버전 가사와는 다른 부분이 보인다.

또다른 설로는, 청년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용필이 "너 곡 좀 써봐라"라고 이야기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설은 후술되어있듯 유재하와 친구였던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유재하와 김현식 사이 얘기라고 푼 적이 있어서[17] 신뢰도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 가요계의 썰 중 하나 정도로 보면 될듯.
위대한 탄생 시절 공연 영상[18]
오랫동안 유재하의 방송 출연은 젊음의 행진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위대한 탄생 활동 당시의 방송을 찾아보면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재하 본인부터도 전화로 지인들에게 "나 티브이에 나와! 꼭 봐!" 라고 좋아라 전화하던 것이 젊음의 행진에 나오던 거였듯이 본인은 슬쩍 말없이 얼굴만 나오는 일종의 보조 출연에 대해선 딱히 출연했다고 여기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이 단독샷도 유재하의 몇 안되는 영상이다 보니 나름 특별한데, 유재하의 신스 솔로 파트 내내 유재하를 비추고 끝남과 동시에 풀샷으로 바뀐다.[19]

한양대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20] 유재하는 1986년 김현식봄여름가을겨울키보디스트로 입단하게 된다.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당시 3집을 준비 중이던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유재하가 그때까지 자신이 썼던 자작곡 10여곡을 다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현식이 형평성을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는다고 하자, 유재하가 삐쳐서 6개월 정도만에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고 밝혔다. 이때 김현식이 받은 곡은 유재하 1집 수록곡이기도 한 명곡 <가리워진 길>.[21][22]

다만 유재하가 밴드에서 나간 뒤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술친구로 잘 지냈다고 한다. 김현식이 본인의 3집 앨범을 줄때도 '사랑하는 동생 배신자 친구 재하에게'라고 농담삼아 써서 줬다고 한다.

3.3. 솔로 활동

1986년 11월 밴드에서 나온 후, 유재하는 돈 800만 원[23]을 들여서 자신이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한 솔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제작, 1987년 8월에 서울음반을 통해 내놓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악기 한 두개씩 다루거나 미디를 하고 작사, 작곡을 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은 많다. 하지만 악기 편성과 리듬, 코드 진행, 형식, 편곡에 노래, 앨범 컨셉까지 주위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다 해낼 수 있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싱이 가능하며, 대중의 인정까지 받은 이들은 드물다.[24]

신중현이나 조용필같은 가요계 거장들도 쉽게 하기 힘든 작업을 유재하는 만 25살에 한 앨범 통째로 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유재하는 클래식 작곡 전공자 출신이었기에 그 어렵다는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까지 했다. 드럼, 베이스와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외하고는 피아노, 키보드, 기타 등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도 모두 자신이 맡았다.

오케스트라 반주 역시 유재하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섭외해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 앨범의 반주를 연주했던 후배들은 처음에 대중 음악의 반주를 녹음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당시 클래식 음대에서 학생들이 대중음악을 하는게 교수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바로 퇴학 조처를 당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당황했던 모양.

198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한 가수 우순실도 한양대 작곡과에 재학중이었는데, 가요제 출전 후 제적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이런 거 해도 되나? 이러다 걸리면 학교에서 짤리는 거 아냐?' 식으로 연주자들사이에 걱정도 많았다고.

유재하는 그런 후배와 지인들을 다독여주면서 앨범 녹음을 무사히 끝냈다.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에에 수록된 상당수의 곡들은 이미 유재하가 한양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당시 연습실에서 만들어졌으며, 친한 동기들과 선후배들 앞에서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처럼 연주를 해주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재하가 많은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런 예술 작품을 만드는 듯한 정성스러운 자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의 앨범은 시대를 초월한 세련되고 감동적인 음악으로 대중음악 뿐 아니라 대중음악을 금기시하던 클래식 음악계의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당시의 몇몇 평론가들은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특이한 앨범 정도로만 치부했다.

또한, 당시만 해도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기 전에는 PD들에게 사전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테스트에서도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히 통과하지 못해 방송 출연에 제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이문세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한 주간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가요 순위를 선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가 있었는데, '지난날'이 장기간 1위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다만 사망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한편, 당시에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을 고상한 문화예술로 치는 반면 가요는 대중 오락의 한 종류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였고, 클래식 전공자들 입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유재하가 대중 가요를 만든다는 건 고상한 문화 음악을 포기하고 질 낮은 딴따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유재하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때려칠까..." 라고 유재하가 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유재하가 1집을 녹음하기 직전 지인들이 유재하에게 작곡한 음악을 들려 달라고 부탁하여 유재하의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유재하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요 형편없죠…" 하며 푸념했다고 한다.[25]

이 외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유재하의 평소 성격에 대해선 상반되는 진술들이 있는데, 유재하의 앨범 녹음 과정을 참관했던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명작스캔들 참조) 무척 수줍어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이 조금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면서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고.

유재하는 술만 마시면 말도 많아지고, 피아노가 있는 술집에 가면 끝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계속해 주인이 나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김현식의 소속사 사장이자 유재하를 데뷔시킬 뻔 했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재하의 성격을 개그맨에 비유할 정도로 밝고 쾌활한 타입이라고 소개했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이 처음 보면 '바람둥이'같이 보일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친한 누나였던 한영애가 공개한 일화에 따르면, 유재하는 항상 대중음악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본인한테 팬레터가 왔을 때도 그는 모두 모아놓으라고 하였고, 어제 뭐했냐는 질문에 팬레터 답장 쓰느라고 밤 꼬박 샜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였던 김종진 왈 유재하의 꿈 중 하나가 무대 위에 올라가서 딱 피아노를 쳤을 때 "오빠~!"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3.4. 사망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유언[26]
유재하 군이 있어요. 그 뭐... 조용필 씨한테 준 곡이 뭐드라요? (사랑하기 때문에) 아 사랑하기 때문에라든가, 여러가지 좋은 곡들을 많이 쓴 친군데, 제가 굉장히 좋아하던 동생이고 후배이며, 저와 술친구였었는데, 결국은... 그 친구가 술을 많이 먹고... 그렇게 어떻게... 됐네요...
라디오에 출연한 김현식이 한 말[27][28]

1집을 발표하고 2개월이 막 지난 무렵인 1987년 10월 31일 저녁에 웬일인지 잘 가질 않던 동창회를 갑자기 간다고 나섰으며[29] 다음 날인 11월 1일 새벽에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현대 포니2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차가 용산구 한남대로 근처 강변북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30]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했다.[31][32] 당시 25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사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現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됐다.[33]

앨범 발매 이후 유재하가 세상을 떠나기 전 우연히 그와 만나 술 한잔을 기울였다는 서울음반 관계자 이재석 씨 증언에 따르면, 유재하는 자신의 작업물에 대해 부끄러워했는데,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반응을 얻기 시작할 무렵이라 벌써부터 2집 앨범을 계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열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하던 친구 성 모씨도 이 사고로 숨졌으며, 유재하 유족들은 음주운전자의 아버지 성씨와 충돌한 택시 업체인 한도콜택시를 상대로 4억 1,600여 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 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 택시측은 피해자의 입장이라고 판결된건지 따로 손해배상을 물지 않았다.

유재하 사망 당시 65세였던 아버지 유일청[34]이나 61세이던 어머니 황영도 자식 잃은 슬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유재하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음악을 좋아하여 연주하는 것을 시끄럽다고 꾸짖은 것이 두고두고 한이라고 1988년 한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언급했다. 당시 아들의 생전 음반 연주 사진을 방구석에 두고 말없이 쳐다보던 아버지 사진이 이 잡지를 보던 유재하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해당 잡지 스캔 자료.[35]

생전 유재하를 친동생마냥 아낀 이문세도 유재하가 생전에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별이 빛나는 밤에서 울면서 뉴스를 전했다고 한다. 유재하는 이문세에게 1집과 3집에 각각 수록 된 그대 내품에[36]와 그대와 영원히 두곡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고, 이문세는 유재하 노래 <지난 날>에서 코러스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음반 작업을 함께한 경험과 더불어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이 나온듯 하다.

유재하 사망 이후 라디오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와 '지난 날'이 정말 많이 나왔다[37]. 생전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38] 사후에 인지도가 올라가며 인기를 얻은 셈이 되었지만, 덕분에 오늘날 유재하도 알려져 있는 거니 이것도 연이라면 연이다.

4. 평가

발라드의 기준이 된 천재 뮤지션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 소개문구

오늘날 한국형 발라드의 문을 연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2008년 MBC FM4U의 '한국 대중음악, 시대를 걷다'에서 '대한민국의 발라드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유재하가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로[39] 발라드의 지평을 올렸다'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김영대 평론가도 당시엔 잘 쓰지 않던 9th 코드 등 여러 화성학적 디테일을 발굴해내고 모던함을 연 '모던 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평했다.

2021년 SBS에서 방송한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서도 이영훈과 유재하를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초라 평가하면서, 특히 유재하는 발라드에 팝적 요소를 가미하고, 단조 대신 장조 코드를 유행시키고, 브릿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영상.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대중음악하는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세련된 오케스트라 선율이 들어가는 등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는데, 쉽게 말해 기존 대중가요가 일률적으로 가졌던 소위 뽕끼가 그의 음악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40]

그의 노래 대부분이 다소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가요처럼 신파조는 아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요 발라드계의 양대 원조격인 이영훈의 음악들조차 사실 저 '뽕끼'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했던 것을 고려하면[41] 유재하가 얼마나 앞선 감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즉, 당대 한국 가요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20대 중반의 나이에 개척했고, 이것이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 그가 오늘날 와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단순하게 봐도 조용필이라는 대가수가 지배하던 당시 가요 지평에 그 조용필조차 뛰어넘으려고 시도했지만[42] 결국 완벽히 성공하진 못한 대중적 장르 깨기를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주류가 된 가요(팝) 발라드로 성공시킨[43], 두 시초 중 1명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에 대단한 점이 있다.

당시 활동한 가수들인 김종진, 전태관이나 반세대 정도 뒤 가수인 김장훈 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대 자신의 삘대로 노래하며 제대로 된 음대 코스를 접한 적은 별로 없던 다른 대중 가수들과 다르게, 유재하는 정통 음대 출신이라 그에 대한 기대가 선배 가수들에게 컸다고 하는데, 실제로 단 1개의 음반만으로 그 기대를 충족해줬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원로 가수들이 일찍 요절해서 가장 아까운 인물로 유재하를 많이 이야기하며 오래 살았다면 한국의 대중 음악이 지금보다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언급도 한다. 이 당시 유재하가 만든 1집 앨범의 여러 음악적 특징들이 수 십년 지난 오늘날에도 상당수 통용되는 공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발전상이 궁금하긴 하다.

알다시피 한국형 발라드는 (꾸준한 변화와 발전, 락발라드 등 장르적 혼합도 있어왔지만) 지금도 힙합, 댄스 아이돌 음악 등과 함께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다. 물론 이들이 무슨 대형 기획사를 세웠다거나 후배 뮤지션들을 직접 기른건 아니라[44] 오늘날 대형 기획사만큼의 꾸준한 영향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예술적 영감을 줬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결코 작진 않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후배 가수들, 특히 1990년대 발라드 가수나 작사, 작곡가 등 종사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 역시 상당했다.[45]

다만 요절해서 상대적으로 음악적 성과가 적기 때문에, 일각에선 1집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뒤에 기량이 떨어진 가수들과 비교하며, 이른 나이에 사망한 아쉬움이 더해진 약간의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 활동 이전부터 조용필, 김현식 등 거장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본인도 1집에 아쉬움이 있다고 2집 의욕을 드러냈던 것을 보면, 그런 그가 겨우 1집밖에 내지 못한 채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당연히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빨리 떠났기에, 몇몇 안티들이 이영훈 등에게 간혹 제기하는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다.

한편, 가창력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인데, 오죽하면 당시 유재하가 음정 불안 등의 이유로 가창력 미달이라고 방송 출연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방송사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 유재하가 무슨 고음을 탄탄하게 내는 그런 스타일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순수하고 담백한 음색은 오늘날까지도 독창적이라고 호평받으며, 그렇기에 그의 곡들은 가창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쉽게 따라부르긴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애초에 형이 밝혔듯 유재하의 가수보단 프로듀서였고, 특히 늘 같이 묶이는 가수가 유재하처럼 젊은 시절에 요절한 동시에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는 김현식김광석, 그리고 신해철이라 좀 더 대비되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47]

5. 음반

5.1. 1집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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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추모 앨범

5.2.1. 1997년 앨범

1997년 유재하 10주기를 맞아 김현철의 프로듀싱으로 추모 앨범인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가 발매되었다.

음악 포털 등지에서 1997, 1987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1987의 8을 9와 8을 동시에 표현하는 문자로 디자인해 1997년에 1987년의 유재하를 추모한다는 의미의 앨범 타이틀이였다. '~그대를 위해' 등으로 기재된 곳도 있으나 이는 맞춤법에는 맞으나 원 앨범 제목과는 거리가 있다. 김현철이 전체 프로듀싱을 하고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업이 가창과 편곡으로 참여한 앨범.#

김현철의 프로듀싱치고는 과소평가받는 앨범이지만 추모 앨범에서 흔히 일어나기 마련인 '보컬/편곡 미스매칭'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전체 프로듀싱을 한 명의 프로듀서가 담당함으로써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다.

음악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서정적인 스트링 편곡으로 가요계에 새 전기를 마련한 유재하의 추모 앨범임에도 당시 김현철의 음악 스타일이던 도회적인 브라스 위주 편곡으로 원곡과 정서가 많이 달라진 곡들이 좀 있어서[48], 호불호는 좀 갈리는 편이다.

같은 해 발매된 신중현 헌정 앨범과 더불어 대한민국 대중음악 헌정앨범의 효시격인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수익금은 전액 유재하 기념 사업에 쓰였다고 한다.

5.2.2. 2017년 앨범

2017년 12월 7일, 유재하 30주기를 맞아 김형석의 프로듀싱 하에 헌정 앨범 "유재하 30년, 우리 이대로 영원히"가 발매되었다.

앨범 제작 과정을 수지가 브이앱으로 실황중계하여 관심을 모았다. 프로듀서 김형석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뮤지션을 대거 참여시킨 것도 특징이다.

다만 헌정앨범은 그 원곡의 감정선을 그대로 이어서 재편곡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그대 내 품에, 우울한 편지, 가리워진 길을 빼고 나머지 곡은 아예 자기만의 색깔로 만들어서 곡 자체가 다른 것마냥 리메이크 되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물론 21세기 트렌드에 맞춰 힙합, 일렉트로니카,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를 편곡에 음악적으로 사용하여 의외로 세련되고 신선하다는 평가도 있으므로 들어보고 판단하자.

5.2.3. 2023년 앨범

2023년 6월 28일, 유재하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며 데뷔 당시의 느낌을 되살린 앨범.

수록된 음원들은 마스터 릴테이프로 여러번 리마스터링을 거쳤다고 하며, 지금까지 나온 음원 중 음질이 제일 좋다.

앨범 재킷은, 1987년 당시 초반 앨범 커버로 수록될 뻔 했지만 유재하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록되지 못한 소위 '담배연기 이미지'이다.

5.2.4. 미공개곡: 별 같은 그대 눈빛

별 같은 그대 눈빛

1982년 겨울, 유재하는 한 심야 라디오프로그램에 캠퍼스 싱어로 초대받았는데 당시 피아노를 연주할 여건이 되지 않아 평소 친분이 있는 레모네이드의 멤버인 유혁•유욱상 형제에게 출연 전날 연락하여 기타로 편곡한 버전을 밤 늦게까지 유재하에게 전화로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 당시, 레모네이드의 기타리스트 유혁이 카세프테이프로 녹음한 곡이 ’별 같은 그대 눈빛‘이다.

2023년 초, 유혁은 이 트랙을 현대기술로 재현하기로 마음먹고 음원으로 발매하기 어려운 유재하의 어긋난 기타 조율을 새로운 기타 반주로 변경하기로 하고 보컬과 본래의 기타 반주를 분리하였다. 음원분리를 포함한 모든 엔지니어링 작업은 그간 유혁 발표곡들의 믹싱을 맡아온 안동환 프로듀서가 했는데, 여러 방식을 시도한 끝에 2023년 비틀즈존 레논의 목소리를 옛 카세트 테이프에서 분리하여 그들의 신곡 "Now And Then"에 사용한 방식과 마찬가지로 AI를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보컬과 기타를 분리하였다고. 이 과정에서 AI는 분리에만 사용하고 목소리를 새로 창출하는 용도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표되는 음원은 유재하 본연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으며, 분리된 보컬 트랙을 다듬는 과정에서 옛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면서 남아있는 잡음을 일일이 제거하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출처

이 곡을 레모네이드가 밴드 버전으로 편곡을 했는데, 유재하 본인이 흥얼거린 음을 기타 솔로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훗날 유재하는 자신이 부른 음임을 까먹은 채 유혁에게 간주가 잘 나왔다고 말했다고.

5.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유재하음악장학회 홈페이지

1988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이 아들이 남긴 1집 앨범 수익금과 자신의 재산을 출연하여 유재하 장학 재단을 설립, 1989년부터 재능 있는 신인 음악인 특히 싱어송라이터들을 발굴하기 위해[5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재정 문제로 중단되었으나 2006년에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되었다. 2013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경연대회 개최가 힘들었으나, 100명에 가까운 이른바 '동문(역대 수상자들)'의 힘을 모아 겨우 개최가 가능하게 되었다.

2014년부턴 CJ문화재단이 후원을 시작, 2018년도부터는 공동 주관사로 대회 운영을 함께하고 있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그동안 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해냈다. 단순히 음악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아 그 라인업이 자못 화려한데, 조규찬, 방시혁[54], 루시드폴, 유희열, 이규호, 나원주[55], 정지찬[56], 심현보, 김연우, 정준일, 임헌일, 노리플라이, 오지은, 박원, 박세진, 고찬용, 스윗소로우, 홍이삭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57]

6. 여담

7. 관련 문서


[1]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하회마을 경내 유재하 생가에 다녀온 네티즌의 증언에 따르면 하회리 620번지(신 주소 : 하회남촌길 54)에 유재하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사촌 형인 유운하(柳雲夏)가 소유자로 되어 있다.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 집성촌이다. 배우 류시원, 류돈우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찰방공파-문충공(文忠公) 서애종파(西厓宗派)-진철(進喆)파 27세 하(夏) 항렬.[3] 천주교용인공원묘원.[4] 1989년 타계. 풍산류씨세보 3권 찰방공파 378쪽에는 192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5] 現 은석초등학교.[6] 키보디스트로 약 2개월 활동했다.[7] 키보디스트로 약 6개월 활동했다.[8] 친구였던 장기호 교수 말에 따르면, 원랜 무종교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십자가가 있길래 이거 뭐냐고 물었더니 여자친구가 같이 성당에 안 나가면 안 만나주겠다고 해서 믿게 되었다고 한다.[9] 초명 유시명(柳時洺).[10] 황순일(黃淳一).[11] 호적상으로만 친척인 양부모에 입양되고 실질적으로는 입양되지 않고 친부모랑 같이 사는 경우가 과거엔 비일비재했다.[12] 대표적으로 류시원이 있다.[13] '잃어버린 우산'으로 대학가요제 동상을 수상한 우순실이 동기다.[14] 애초에 대학동창이던 오창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유재하가 작곡과에 진학한 것도 팝 음악을 위한 기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15] 모두 한양대 음대생들이었는데 유재하는 기타를 잡았다.[16] 다만 유재하는 이후 조용필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듣곤 본인이 생각한 곡의 정서와 좀 맞지 않아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때 조용필이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 버전은 내 마음 당신 곁으로나 눈물로 보이는 그대와 같은 1980년대식 조용필 발라드의 형식이 강한 편이었다.[17] 이때 대상은 '사랑하기 때문에'가 아니고 '가리워진 길'.[18] 52분 25초부터 약 20초간 단독 샷이 나온다. 유재하가 키보드로 연주하고 있는 간주 부분은 조용필 7집에 수록된 '눈물로 보이는 그대'이다.[19] 그만큼 곡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고 지금 어떤 파트가 솔로 중인지, 또 누구를 비춰야 할지를 카메라맨과 조정실에서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말도 된다. 지금도 무대에서 기타 솔로를 대놓고 해도 가수를 찍거나 다른 곳을 찍는 경우가 허다한데, 저 시절 치고는 상당히 신경 써서 찍은 것이라 할 수 있다.[20] 당시 육해공군 복무기간은 최소 30개월 이상이었고, 군 복무 기간에는 대부분의 활동이 제한되는 데도 불구하고 복무기간으로 추정되는 85~86년 사이에 음악활동의 행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복무기간이 14~18개월 정도로 짧고 출퇴근이 가능했던 방위병으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는 추정도 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조교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방위병을 대상으로 훈련조교를 했던 듯 하다.[21] 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사후, 추모의 의미로 <그대 내 품에>를 자신의 4집에 수록했다.[22] 여담으로 유재하의 대타로 급히 영입된 박성식이 김현식 3집 때 내놓은 곡 또한 희대의 명곡인 <비처럼 음악처럼>이였다.[23] 2020년대 기준 가치로 환산시 약 2~3천만원 내외.[24] 굳이 찾자면 신승훈, 김동률, 윤상 등 없는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명망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정도 능력이 되면 이미 업계에서도 다수는 자리 잡은 케이스란 소리.[25] 다만 생전 유재하와 친분이 있다고 주장한 한 유튜버 댓글에 의하면 친한 사람에게는 노래를 들려주면서 "가사 잘 쓰지 않았냐?"고 했다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겸손의 말일 수도 있다.[26] 동창회에 가기 전 수술 후 칩거 중이던 형에게 한 말.[27] 해당 녹음본은 김현식 사후 1996년 7집 Self Portrait의 1번 트랙으로 등재된 생전 인터뷰에서의 언급이다.[28] 공교롭게도 김현식은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3년 뒤인 19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사망했다.[29] 김종진에 의하면 유재하가 면허를 딴 기념으로 술자리를 가다가 사고를 당한 거라고 말하였다.[30] 중앙선을 침범한 주체가 친구 차인지 택시인지 헷갈리게 서술했는데 음주운전이라는 정황상 유재하가 탄 차가 중앙선을 침범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듯 하다.[31] 1980년대 당시에는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이 2000년대 이후 지금처럼 철저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흡연과 비슷하다. PC방에 흡연실이 설치되기 전까지 초등학생들 간접 흡연되건 말건 옆자리에서 대놓고 담배 피던 것이 2010년대까지 이어져왔다.), 몇잔 한 정도로는 큰 죄의식 없이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물론 유재하도 음주운전한 친구 차를 얻어탔기에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시대적 상황이나 동승자 입장일 뿐이라 이 부분에선 덜 비판받는 것일 뿐이다.[32] 당시 강변북로는 고속화도로가 아닌 현재의 서빙고로로 중앙분리대가 없는 일반도로였다.[33] 훗날 1993년 헬리콥터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변영훈과 2009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이 안치된다.[34] 유재하 사후 2년 뒤 아들을 따라 사망했다.[35] 네띠앙 메일로 된 주소가 나왔는데 2000년 초반에 스캔한 자료로 지금은 스캔 자료조차 레어가 된 셈이다.[36] 1집 앨범상에는 당사자들만이 아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작사/작곡이 이문세로 기재되어 있으나 노래는 유재하 곡과 같다. 이문세-그대 내품에
파일:리문세 1집 가사지.png
[37] 예를 들어 이 영상의 라디오 녹음에서 이문세가 진행한 별이 빛나는 밤의 한 코너에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송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38] 물론 음악 자체는 생전에도 라디오 등에서 나와 아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방송 출연 자체가 1회에 불과할 정도라 유재하 자체의 대중적 인지도는 낮았다. 애초에 1987년 8월 20일에 1집을 내놓고, 11월 1일에 사망했으니 생전 활동 기간이 채 3개월이 안된다.[39] 참고로 이영훈의 전성기 시절 곡들 편곡은 대부분 김명곤이 담당했다. 노래는 페르소나 가수 이문세가 있었다.[40] 다만,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한세대 위의 가수인 조용필이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는 뽕끼가 어느정도 느껴진다. 편곡이나 창법 차이도 있었던 것. 그래서 유재하가 더 평가받는 것이기도 하고.[41] 물론 뽕끼 자체가 무조건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팝송이 주류이던 시대적 흐름에서 정반합하지 못하고 구시대적으로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42] 조용필 역시 당대 팝송의 영향을 받아 부단하게 한국형 가요의 새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뮤지션이긴 했다.[43] 다만 본인은 딱히 이것을 발라드라고 지칭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발라드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 후반 직전이라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2017년 유재하 형의 인터뷰에 따르면 "제가 재하에게 '장르가 뭐야?'라고 물으니 '음악장르가 어딨어. 뭐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크로스오버랄까'라고 하더군요. '그런 장르도 있니?'라고 하자 '나 같은 장르' 라며 웃었어요. 음악적인 자존심이 무척 강했죠."라고 한다.#[44] 후술되어있듯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있긴 하지만, 이건 사후 유족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대회라 생전 직접적인 연관은 없긴 하다.[45] 오늘날에도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후배 뮤지션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재미있는건 R&B 쪽에서도 이런 반응이 제법 있다는 것인데, 유재하가 멘토라는 정엽이나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유재하 1집이라는 태양, 유재하를 가장 존경한다는 베이빌론 등이 대표적이다.[46] 이런 점에선 유재하의 간접적인 후계자라고 볼 수도 있다. 김형석은 훗날 인터뷰에서, 실제 대학 시절 만난건 2~3번 정도에 대선배라 그때도 음악 얘기만 나눴지 개인적으로 친해지진 못했다고 매우 아쉽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2023년 영상에서도 유재하를 멘토라고 표현하며 여전한 존경심을 드러냈다.[47] 유재하가 워낙 일찍 요절한 탓에 유재하가 이들 중 제일 어릴 것이라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데 사실 김현식과는 고작 4살밖에 차이가 안 나고 김광석보다 2살, 신해철보다 6살 더 많으며, 이는 유재하가 이들 중 유일하게 20대라는 비정상적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기에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넷 모두 사인은 다른데 유재하는 교통사고, 김현식은 병사, 김광석은 자살, 신해철은 의료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48] 대표적으로 '지난 날'.[49] 제 7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50] 제 2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51] 제 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금상(당시 최고상) 수상자[52] 이 중 전태관, 조동진, 김민기가 이젠 고인이 되었다.[53] 오랜기간 지속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을 위한 국내 대중음악 경연대회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거의 유일하다.[54] 6회 동문. 2023년 "유재하 선배의 뜻을 기리고 후배 음악인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며 유재하음악장학회에 5천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55] 남성 듀오 ‘자화상’의 멤버로 현재는 작곡가, 피아니스트, 영화음악 감독으로 활동중이다.[56] 나원주와 함께 ‘자화상’의 멤버.[57] 박수홍도 유재하를 동경해 개그맨이 되기 전 가수를 꿈꾸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했는데 얼마 안가 떨어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58] 당시 민규와 배종옥이 진행을 맡았다.[59] 단순 출연까지 포함한다면 위대한 탄생 멤버일 때의 방송 출연도 포함된다. 하지만, 상술되어있듯 유재하 본인은 이때 장면을 일종의 보조 출연 정도로 여겼는지 주변에 그다지 자랑하지 않았다. 따라서 본인이 지인들에게 방송 나간다고 자랑한 것은 이 젊음의 행진 출연 장면이 유일했다.[60] 후술된 여자친구 썰과 이어서 연관지어 보면, 초등학교 이후 대학에서 다시 재회한 연인을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를 타이틀로 선정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유재하 1집의 곡들은 대부분 그녀와 연관되어 있는데, 대학에서 첫 만남 이후 2년간 퇴짜를 맞으며 구애를 펼친 결과, 처음으로 받았던 편지를 소재로 '우울한 편지'가 만들어졌다. '그대 내 품에'는 사랑을 구애하는 그의 애타는 마음을 그렸고,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이 받아들여진 기쁨을 나타내었다. '지난 날'은 짧은 이별의 서글픔을, '사랑하기 때문에'는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바치는 헌정곡이다.[61] 김현식은 기본적으로는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 화가 나면 매우 무서워지는 성격이었다고 하며, 특히나 아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사람이었는지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식은 상당히 무섭고 엄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다만 후배들의 회고나 1980년대 자체가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지금보단 매우 강했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기준으론 김현식이 유별나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군기잡기 등이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당시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김현식조차 유재하는 건드리지 않았다는 소리.[62] 사랑하기 때문에에 동일한 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해당 곡의 데모 버전 격인듯 하다.[63] 사족으로 유재하의 지인이 유학을 가기 직전 연인과 헤어졌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유재하가 감정이입이 됐는지 정색을 하며 인생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사랑에 굉장히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4] 참고로 유학 오기 전 부모를 교통사고로 여읜 김광민은 미국에서 유재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지구에서 온 편지”를 작곡해 헌정하고 자신의 첫 앨범 타이틀 곡으로 쓰기도 했다. 김광민은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회고하며 “수요예술무대 같이 했을텐데… 잘 지내지?” 라고 하기도 했다. # 1992년 MBC에서 첫 방영을 한 일요예술무대 (나중에 금요-수요 예술무대)가 상업성이 없어 심야프로이긴 했어도 90년대 문민시대를 맞아 진정한 문화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망에 발맞추어 김광민 자신의 음악뿐 아니라 팻 메시니 그룹, 끌로드 볼링, 척 맨지오니, 밥 제임스, 칙 코리아, 정원영, 한상원, 한충완, 정재일 등의 수준 높은 국내외 대중음악을 우리 공중파에 처음 보급한 역사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미국 NBC에서 1988년부터 90년까지 방영된, 색소포니스트 데이빗 샌본이 진행하고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가 음악감독을 맡은 ‘Sunday Night (나중에 Night Music)’##이라는 SNL의 스핀오프격으로 라이브 공연 무대와 CG 포맷등을 그대로 차용한 전설적인 주말 심야 음악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재즈뿐 아니라 점차 모든 장르의 뮤지션들을 초청하며 크로스 오버를 지향했는데 일요예술무대가 아무래도 이에 아이디어를 영향받지 않았나 싶다. 일요예술무대가 물론 당시 귀국해 활동을 펼치던 미국 유학파들의 영향을 무시 못하지만 당시 국내 대중음악인들과 음악 팬들에게 미친 크나큰 영향을 생각하면 유재하가 조용히 뿌린 새로운 대중음악의 씨앗이 그대로 이어져 9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을 풍요롭게 꽃피웠다고 볼 수도 있다.[65] 김장훈이 불러 히트시킨 '오페라'의 원곡 가수이다. 또한 해당 음반의 발매가 사정상 늦어진 사이에 김현식이 노래를 듣고 작곡가에게 곡을 부르게 해달라고 사정해 먼저 음반을 내버리고 유명세를 가져간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있다. 여러모로 명곡이 두 번이나 사람을 비껴간 셈.[66]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 및 인용.[67] 완전히 맹구같진 않고, 후술되어있듯 실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던 음성이 남아있다.[68] 마찬가지로 앞의 가요광장 라디오 방송에서 나온 음성 중 일부이다.[69] 2024년 AI버전 그대와 영원히. 발음이 좀 뭉개지는건 있다.[70]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향년 3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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