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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 |
라틴어 이름 | 레나투스 카르테시우스[2] Renatus Cartesius |
출생 | 1596년 3월 31일 |
프랑스 왕국 라에앙투렌 | |
사망 | 1650년 2월 11일 (향년 53세) |
스웨덴 제국 스톡홀름 | |
국적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
학력 | 라 플레슈 콜레주 (졸업, 1606~13) 푸아티에 대학교 (법학 / 학사, 1613~16) 프라네커 대학교 (무학위) 레이던 대학교 (무학위) |
종교 | 가톨릭[3] |
서명 |
[clearfix]
1. 개요
"Cogito, ergo sum."[4] ( Je pense donc je suis.[5][6])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 방법서설(1657년판) 34쪽 철학의 원리(1656년판) 2쪽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연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7], 과학자.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 확신하고는, 이를 모든 학문의 제1 원리로 정립하였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 방법서설(1657년판) 34쪽 철학의 원리(1656년판) 2쪽
이어서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학문의 제1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다시 신 존재를 증명해 내고, 이를 다시 물질 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마련하여, 마침내 자연 과학적 방법으로 물질 세계의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의 순서를 제시한다. 그리고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물질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사실, 즉 '연장'에 있다고 보고, 이로써 물질 세계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공간이며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이후 근대의 수많은 학자들을 자극시켜 자연 과학과 수학에 있어서 급격한 발전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서양이 중세를 벗어나게 된 그 결정적인 동력을 데카르트가 제공하였기에 그를 두고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생가 |
프랑스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앙투렌(La Haye-en-Touraine)[8]에서 브르타뉴주의 고등 법원 평정관이었던 아버지인 조아킴 데카르트(Joachim Descartes)와 잔 브로샤르(Jeanne Brochard)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잔 브로샤르는 르네 데카르트를 낳고 1년 1개월 후에 죽게 되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데카르트 또한 생명이 위태로웠지만 다행히도 살아남는다.[9] 물론 어머니와 같은 결핵 징후를 보이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계속 창백하고 마른 아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자신을 돌봐주던 간호사와 사팔뜨기 소녀 친구 프랑수아즈가 있었다. 후에 시간이 지난 뒤에도, 데카르트는 이 둘에게 놀랄 만한 정도의 충실함과 헌신을 보였다고 하는데, 심지어 유산을 얻었을 때에도 간호사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자신의 일생 동안 프랑수아즈와도 우정을 돈독히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학문적으로는 능력자였으나, 몸이 많이 약한 편으로 그의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듯하다.[10] 이 때문에 르네의 아버지는 아들도 아내처럼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하여, 그가 학교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리고 강제로 쉬게 했다. 그래서 8살(또는 10살)이 되던 해에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 플레슈(La Flèche)에 입학해 8년을 공부하는데, 몸이 약해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한다.[11] 그런데 수업을 그렇게 듣지를 못했는데도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공부는 무지 잘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본 어느 관대한 교장이 수업을 듣는 대신에 그 시간에 데카르트에게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을 허락했다. 데카르트의 늦잠 자는 버릇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러나 이런 늦게까지 침대에 있는 습관에서 그는 사색과 생각을 많이 했고 이 생각들이 훗날 그의 사상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대표적인 업적이 후술할 좌표의 발견인데 날벌레가 천장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저 날벌레의 위치를 계산하려다가 만들어진 것이 바로 좌표의 발견이다.
라 플레슈를 졸업하곤, 바로 푸아티에 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의학을 배웠고 2년 뒤 20세의 나이에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으로 여행의 길을 떠났다.[12]
2.2. 군인 생활
젊은 시절(1620년대) |
데카르트는 당대의 프랑스를 주름잡던 검술 마스터 샤를 베나르에게 검술을 배웠다. 20대에는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 위해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간혹 데카르트가 귀족이었기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 데카르트 집안은 돈이 많았지만 정작 데카르트 때까지는 귀족은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3대가 높은 위치나 명성을 얻어야 귀족이 될 수 있었는데, 이에 따라 데카르트 이후에 그 후손들이 귀족이 되었던 것이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럼에도 물론 돈이 많아서 군대에 병사 훈련을 받을 때도 그를 모시는 수행원이 있었을 만큼, 귀족과 다름없는 부자였긴 했다. 또한 군인 신분임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따라다니면서 세상 경험을 할 목적으로 군인이 된 것도 있었다. 데카르트는 아무튼 그럴 요량으로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공 휘하에서 군 복무를 거친다. 이 무렵 데카르트는 학창 시절 때처럼 아주 골골대진 않았고 사병 복무에 검술 수련도 열심히 했으며, 자신의 애인에게 무례하게 군 연적에게 기사도의 방식으로 결투를 하여 잔뜩 혼을 내주는 등 칼싸움에 능한 무사였다. 그리고 여행 도중 뱃사람들이 데카르트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위기도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해적들의 칼을 빼앗아 그들을 제압하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타고난 체질이 약해서 병에 쉽게 걸리는 편이었다고.
1617년 장교가 되어 네덜란드로 갔을 때 거리에 걸려 있는 네덜란드어로 쓰인 글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에게 그 내용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행인은 홀란트 대학의 학장이자 수학자였던 이사크 베이크만(Isaac Beeckman)이었다. 베크만은 데카르트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기하학 문제를 하나 풀면 청을 들어 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사실 베크만이 제시한 문제는 그때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였으나, 데카르트는 몇 시간 만에 풀어와 베크만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과 베크만과의 친교는 데카르트에게 학문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2.3. 세 번의 꿈과 학문
30년 전쟁이 일어 났다는 소식을 접한 데카르트는 전쟁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다는 생각에, 구교 진영에 속하는 바이에른 휘하 군대에 들어간다. 그곳에 있으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페르디난트 2세의 대관식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중, 독일 남부 울름(Ulm) 근교의 작은 마을에 머문다. 그리고 1619년 11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커다란 벽난로가 지펴진 '난로 방'에서, 데카르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하며 자주 분석되는 꿈을 꾸게 된다.[14] 그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잠시 졸았는데, 이때 그 유명한 세 번의 생생한 꿈을 꾼 것이다.첫 번째 꿈은, 거리를 걷다가 거센 폭풍이 불어서 필사적으로 아무 건물로 들어갔는데, 마침 그 건물이 그가 다녔던 라 플레슈 학교였고, 캠퍼스에는 그가 잘 아는 성당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 성당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말을 걸기 위해 발길을 되돌렸다. 그런데 괴팍한 바람이 "성당 쪽으로" 그를 강하게 밀쳤다. 그 순간 다른 지인을 보았고, 그는 데카르트에게 'N이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사 온 멜론을 주기로 했는데 그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었고 그때 데카르트는 꿈에서 깼다. 잠에서 깬 그는 "깊은 슬픔을 느꼈으며, 이것은 나를 현혹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늘이 폭풍으로써 경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이 세상의 선과 악을 생각하며" 두 시간이나 잠을 설쳤다.
두 번째 꿈은, 데카르트가 방 안에 있었다. 그런데 방이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귀청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굉음이 들렸다. 데카르트는 이를 천둥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꿈의 폭풍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마치 환각처럼 느껴졌다. 그가 안전한 방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나운 비바람이 그에게 닿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백과사전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는 『시선집 (Corpus poetarum)』이라는 라틴어 제목이 붙은 또 다른 책을 발견했다. 그는 이 책을 아무렇게나 펼쳤는데, 거기에 시 한 편이 있었다. 로마 시인 아우소니우스가 쓴 〈이딜 XV〉이라는 시였다. 그는 첫 행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Quod vitae sectabor iter?)" 그때 낯선 사람이 나타나 데카르트에게 제목이 '예, 그리고 아니오'인 아우소니우스의 다른 시를 내밀었다. 데카르트가 시선집을 잡으려 하자, 그 책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백과사전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에 보았던 것만큼 완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그때 낯선 사람도 책도 사라졌다.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모든 학문을 한데 모은 것"을 나타내고, 자신이 집으려 했던 시선집은 "철학과 지혜가 혼합된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시가 "피타고라스의 '예, 그리고 아니오'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며, 이것은 "인간의 지식의 진리와 오류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온종일 데카르트는 세 가지 꿈에 대해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이 꿈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 믿었다.
데카르트는 결국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이후 5년간 여행을 하면서 순수 수학에 몰두하였다. 이때 함수의 원리를 처음 개발하였다. 1626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소일거리로 광학 기구를 만들던 중에, 1628년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베륄(Pierre de Bérulle)과 만난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명을 받아 오로지 진리 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했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충고를 받아들여 모든 간섭과 의무를 피해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가 수학, 과학 연구에 힘썼다.[15]
하지만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로부터 단죄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듣자, 비밀리에 지동설을 지지하는 글 『세계 (Le Monde)』를 저술하고 있었던 데카르트는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한다.
2.4. 연애와 딸 프랑신
1634년 5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을 때 헬레나 얀스 판데르스트롬(Helena Jans van der Strom, ? ~ 1683)라는 이름의 전직 가정부[16]를 만난 후 1635년 7월 19일 데벤테르(Deventer)에서, 외동딸 프랑신(Francine, 1635년 7월 19일 ~ 1640년 9월 7일)를 얻는다.[17] 데카르트가 프랑신이 수태된 날짜(1634년 10월 15일)를 일기에 기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그녀가 친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얻은 사생아여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프랑신이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프랑신의 이름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소녀의 이름인 프랑수아즈[18]에서 이름을 따서 비슷한 이름인 프랑신이라고 붙여주었다는 설이 있다. 단, 동물 기계설 등의 기계와 관련이 있는 걸로 봐서는 데카르트가 자주 거닐던, 생제르맹앙레성(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정원의 분수 기계 제작자 프란치니(Francini) 형제의 성씨의 프랑스식 변형인 프랑신(Francine)에서 따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1638년 8월 23일에 마랭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세 살 난 소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박수를 치면, 소녀가 박수 소리를 듣고 정원을 달리는 것에 대한 동화가 쓰여있는데, 정황상 데카르트 자신이 프랑신과 놀아준 것을 묘사한 걸로 추정된다.
1640년, 데카르트는 프랑신을 프랑스로 데리고 간 후 자신의 외할머니의 조카이자 국회의원의 아내인 프랑수아즈 뒤 트롱셰(Françoise du Tronchay)에게 맡겨[19] 교육을 받게 할 것이라고 기록한다.[20] 하지만 프랑신은 동년 9월 7일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에서,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뜬다. 데카르트는 친구가 자신의 가족을 여의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괜찮으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마라며 꿋꿋이 슬픔을 참고 이길 것을 친구에게 간곡한 편지로 써 보냈지만, 그의 전기 작가였던 아드리앵 바이예(Adrien Baillet)에 의하면 정작 데카르트는 프랑신의 사후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한다.[21]
1641년 1월 최근 아주 친밀한 "두 사람"을 잃었다고 알퐁스 폴롯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한 명은 1640년 10월에 죽은 그의 아버지인 게 확실하나, 두 번째 인물은 프랑신인지, 데카르트의 누나인 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018년에 누나 잔의 사망일이 1641년 6월이라고 밝혀지면서, 다른 한 명이 프랑신이라는 게 드러났다.
1643년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는 데카르트에게 혼외 관계에서 아이가 있지 않냐고 공격을 한다.[22] 이후 데카르트는 헬레나와 헤어진다. 1644년 5월 헬레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이때 지참금을 주었다. 그 후 데카르트는 평생 독신으로 산다.[23]
1644~49년경.[24] 화가는 얀 리번스(Jan Lievens) |
2.5. 장미십자회와 위트레흐트 논쟁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유흥을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학문에 푹 빠지게 되자, 친구들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 회원일 것이라 어림짐작을 했다. 당시 수학,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비밀 결사 단체의 회원이라는 소문이 프랑스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는 실제로도 그 단체에 가입하고 싶어 했다. 데카르트는 장미십자회 회원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데카르트는 훗날 장미십자회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한다. 1637년까지도 장미십자회 회원이라는 소문에 시달리던 데카르트는 거듭하여 이 혐의를 반박했다. 『방법서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머릿수만큼의 개혁자가 있었다." 개혁자를 반대한다는 것을 돌려서 말하는 대목인데, 이것은 장미십자회와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장미십자회와의 관계를 의식한 듯 '어리석은 짓거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방법서설』의 1부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꽤 분명히 표현한다.
그리고 끝으로, 나는 그릇된 여러 학설에 대해 이미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어서 연금술사의 약속에도, 점성술사의 에언에도, 마술사의 속임수에도, 또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떠들어 대는 어느 누구의 잔꾀나 허풍에도 더 이상 속지 않게 되었다.
당시 연금술사, 점성술사, 마술사는 장미십자회를 가리키는 말로 통했었다. 1647년에는 이와 관련해서 지독한 사상 논쟁(위트레흐트 논쟁)에 휘말린다. 이는 그가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의 철학이 유럽의 각 대학에서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어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세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트레흐트 대학 학장인 보에티우스는, 데카르트를 당시 잘 알려진 장미십자회 회원들과 엮으면서 데카르트가 무신론자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또한 데카르트에 관한 강의를 금지하고, 제자의 이름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박하는 팸플릿을 돌렸다. 논란이 커지자, 장미십자회 회원임을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유명인이었던 데카르트의 이름을 팔고선 자기네 조직의 적법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당시 무신론자는 화형에 처했기 때문에,[25] 데카르트는 무신론자라는 공격에 한편으로는 겁을 먹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데카르트는 보에티우스에게 공식 사과 편지를 보내 이 논란을 무마시켰지만, 그는 이미 이 부질없는 싸움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네델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현대의 데카르트 전공 학자들은 데카르트와 장미십자회의 관련성을 의심하고 있다. 2001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에두아르 멜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의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데카르트가 쓰는 많은 용어가 장미십자회가 쓰는 용어와 겹친다. 장미십자회는 자신들만의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심적 흥분(enthusiasm)', '놀라운 학문(admirable science)', '위대한 발견(marvelous discovery)' 같은 표현들은 정확히 당시에 장미십자회 회원들이 암호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난로 방에서 꾼 꿈들과 장미십장회 철학 사이에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데카르트는 꿈에서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시를 보는데, 이는 장미십자회 철학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2.6. 스웨덴에서의 말년
말년인 1649년에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26]의 간곡한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이주하는데, 이 과정이 또 기가 막힌다. 네덜란드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던 데카르트는 딱히 그걸 무너뜨리며 스웨덴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본래 여왕의 초청을 계속 거절했었다. 하지만 몸이 단 여왕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초청장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스웨덴 군함을 보내 데카르트를 태워 오게 했고, 눈앞에 나타난 스웨덴 군함을 본 데카르트는 그만 항복하고 여왕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여기까지는 좋은데 여왕이 자기는 그때밖에 시간이 안 난다며 새벽 5시에 왕궁으로 와서 철학 강의를 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케줄은 보통 사람이라 해도 체력상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데카르트는 원래 몸이 약해서 항상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던 사람이었다. 수도원 시절에도 (수도원에는 새벽 미사가 있다) 정말로 못 일어나서 담당 신부로부터 특례로 새벽 기상을 면제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푹 빠져서 데카르트와의 정해진 수업 외에도 하루에 몇 시간씩 혼자서 공부를 했다. 심지어 업무를 보는 사이사이에도 데카르트의 책을 읽고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갈 때도 손에는 데카르트의 책을 놓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철학 외에도 문학, 종교, 정치에 관한 문제들을 질문을 했고, 데카르트는 여왕이 가장 총애하는 고문이 되었다. 기존의 신하들은 여왕이 데카르트를 통해 프랑스와 가톨릭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여 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데카르트는 사람들의 적대감을 느꼈고,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을 만큼 스웨덴행을 후회했다.[27]
결국 과로에다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날씨[28]와 독감에 따른 폐렴까지 겹쳐서 다음 해인 1650년 2월 3일 앓아눕게 되는데, 당시 데카르트의 친구이자 여왕의 시의[29]였던 '뒤 리에'가 없어서 대신 뵐레스를 보냈다. 문제는 이 뵐레스는 평소에 '데카르트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데카르트를 싫어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이를 알고 있었던 데카르트는 그의 치료[30]를 거부했다. 며칠간 고열과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지만 저절로 나았고 병세는 한풀 꺾였다. 데카르트는 담배 향을 탄 술을 부탁했는데, 뵐레스는 알코올과 담배 냄새가 풍기는 검은 액체가 담긴 잔을 데카르트에게 건냈다. 다음 날 아침, 데카르트의 병은 다시 나빠져 있었다. 그는 피와 거무튀튀한 액체를 게워냈고 입에서는 가래가 끊임없이 나왔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졌고, 1650년 2월 11일 새벽 4시에 데카르트는 숨을 거뒀다. 사망 원인은 폐렴으로 인한 단순한 병사로 기록됐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독살 의혹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른쪽 탁자의 여인이 크리스티나 여왕이고, 바로 오른쪽 옆에 데카르트가 있다. |
데카르트가 죽은 후 몇 년이 흘러 1666년 10월 2일, 그의 시신이 발굴되어 유해가 프랑스 본국으로 운구되었다. 유해는 성 바오로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생트 즈느비에브 뒤 몽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때 이 성당이 파괴되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위인들이 묻혀 있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 위대한 철학자의 유해를 옮기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 공회는 투표를 통해 이장을 승인하였으니 프랑스 5집정관 정부가 결정을 번복하고 유해를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1819년에 마침내, 데카르트는 오래된 건축물인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에서 최종 안식처를 얻었다.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쳐 그의 유해를 다시 안치하는 도중 그의 유골에 두개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누가 빼돌렸는지는 모르지만[31] 데카르트의 두개골은 스웨덴의 경매장에 있다는 게 밝혀졌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현재는 프랑스 인류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두개골은 이빨과 턱이 없어져 훼손이 많이 된 상태로, 이마에 "이 두개골은 르네 데카르트의 두개골이 맞다. 스웨덴 근위대장 한스트림이 보증한다"라고 적혀있다. 한때는 10만 년 전 유골인 크로마뇽인과 함께 인류 대표로 전시되었으나, 지금은 전시하지 않고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 내 데카르트 묘비 |
3. 사상
3.1. 방법적 회의
그렇다고 내가 의심하기 위해서만 의심하고, 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회의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와 반대로 내 모든 의도가 향한 것은 나를 확신시키는 것에만, 바위나 찰흙을 찾아내기 위해 무른 흙이나 모래를 내던지는 것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32]
1562년과 1569년에 라틴어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들이 번역되고 출판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몽테뉴와 샤롱 등에 의해 고대의 회의주의가 다시 한번 대세가 되었으며,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 전쟁이 벌어지면서 신 중심의 진리관에 대한 회의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가 만연한 이 시기에, 회의주의를 다시 회의함으로써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합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33] 그리고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의심해서, 그 중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찾는 것이었다. '회의(의심)'를 통해 '확실한 진리'를 찾는 이러한 방식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32]
즉, 회의(懷疑) 그 자체가 진리인 것(회의주의)이 아니라 회의는 단지 그 진리를 찾는 방법(방법적 회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기존에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선입견과 관습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첫 번째로 의심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지식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났는가. 이것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도 쉽게 드러난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걸었다가 막상 얼굴을 확인하니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감각으로 내린 판단이 정말 맞는지 헷갈리곤 한다. 다만, 감각이 종종 틀리긴 하더라도 여기에 감각하고 있는 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 번째는 나의 몸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내가 여기에 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앎은, 꿈속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 실재성이 의심된다. 꿈과 현실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보여줄 수 없다면, 내 몸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지식 역시, 확실하게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꿈의 가설'에서는 감각하고 있는 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된다. 그러나 형태, 수, 장소, 연장과 같은 물질의 보편적인 특성과 이것들의 연관을 문제 삼는 학문인 대수나 기하학은, 꿈에서도 감히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카르트는 세 번째로 마침내 물질의 보편적 특성과 단순한 수학적 명제들의 진리성을 의심하기 위해 '악마(악신)의 가설'을 끌어들인다. '물체가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이라는 것', '2 더하기 3은 5라는 단순하고 산술적인 것'들이 제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만적인 신'(deus mendax)의 조종과 농간에 우리가 속고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 가정이 비록 극단적이라 해도, 만약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진 신이 우리를 기만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수학적 진리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기만적인 신을 가정하고 이 모든 것을 의심하여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고 해도, 단 한 가지만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생각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생각하는 한,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34][35] 즉, '사유하는 동안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이 되며, 따라서 이것이 모든 학문의 제1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사유하는 자아'를 기초로, 다시금 신 존재를 처음부터 증명하고자 한다.
3.2. 신 존재 증명
데카르트는 신 존재를 2가지 방식으로 증명한다. 의심이라는 불완전성은 완전성을 대면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드러날 수 있고, 이 완전성의 극단에 바로 신이 있다. 즉, 모든 의심은 완전한 관념에 대한 의심이고, 우리가 의심하는 존재인 이상,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 속에는 완전성에 대한 관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성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관념(본유 관념[36])'이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하고 무한한 신의 관념이 유한한 나로부터 생겨났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관념을 야기한 무한한 실체가 있어야만 한다.(인과론적 신 존재 증명) 또한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 이외의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는 한에서만 그 현존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만, '신'은 자기 존재를 산출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현존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신'과 '필연적 현존'은 분리될 수 없다. 현존하지 않는 신은 전능하다는 신의 관념과 모순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하지만 동시대의 인물인 피에르 가상디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서 일종의 순환을 발견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순환 논증이 시작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데카르트 당신은 신에 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신이 틀림없이 존재하며 기만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런가 하면 당신은 기만자일 리 없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명석 판명한 관념은 틀림없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즉, "신에 대한 관념이 유한한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은 신이 있기 때문이며, 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신은 현실 세계에 실재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일종의 순환 논증이라는 것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데카르트의 순환 논증(Cartesian circle)'이라 부르며, 가상디의 지적이 타당함을 인정하고 있다.[37]3.3. 물질의 원리
이러한 신 존재의 증명[38]은 다시 물질 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쓰인다. 데카르트가 처음에 '기만하는 신'을 가정한 이유는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그 의도에 있었으나, 위에서 증명된 '(철학적) 신'은 '완벽하고 전능하고 선한 신'이기 때문에 이제 그러한 선한 신은 사람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신은 감각 관념이 물질적 사물로부터 유래한다고 믿는 커다란 경향성[39]을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에, 감각 관념은 물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감각'이 종종 틀리긴 하더라도, '물체'를 느끼는 '인간의 감각 그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닌 것이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물체에 대한 감각을 명백하게 판단하여 분명하게 밝히는 한에서,[40] 우리는 물체의 현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이 확신으로부터 데카르트는 물질적 혹은 자연학적 사물의 원리를 찾기 시작한다. 우리가 물체의 현존을 인정할 때, 그 물질의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 물질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사실, 즉 '연장'에 있다. 즉, 길이, 넓이, 깊이의 연장(Extension)을 가진 물체가 현존하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를 갖고 온갖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는 점이 확실하다. 그리고 물체는 오직 연장적 사물이라는 점에서, 모든 물질적 세계는 원칙적으로 모두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순수 자연학과 응용 수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물론 데카르트가 원리로 제시한 진리는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나, 데카르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그것들을 철학의 원리로, 즉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의 연역 근거로 간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4. 심신 이원론
우리는 분할 가능한 것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물체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정신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확증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작은 임의의 물체라도 그 절반을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정신도 그 절반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것들의 본성들은 단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 상반된다는 것이 인지된다.
르네 데카르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41]
데카르트는 정신은 분할 불가능하지만 물질은 분할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정신과 육체를 각각의 두 실체로 규정한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다.[42] 쉬운 예를 들면, 물질인 손발이 잘려나가더라도 정신은 그만큼 없어지지 않는다. 즉, 정신과 육체(물질)는 결코 1대1로 합쳐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육체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정신은 어떤 특정 지점에서 육체와 만난다고밖에 볼 수 없으며, 데카르트는 그곳을 솔방울샘이라 추측하였다.르네 데카르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41]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전략은 근대 자연학과 수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물론 이런 형이상학적 관점 자체는 전적으로 그 철학자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논리를 구성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 과학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한다. 분명 운동은 접촉을 필요로 하고, 접촉은 연장을 필요로 하며, 영혼은 연장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영혼이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여기에 대해 데카르트는 중력은 필요로 하는 표면 접촉이 없는데도 물체를 아래로 밀어내린다며 반론한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나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육체를 움직이고 육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보다는, 영혼이 질료와 연장을 가졌다는 것을 더 쉽게 용인할 수 있다."고 대꾸한다. 거기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영혼을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는 '더 이상 그 문제로 어여쁜 머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3]
4.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
데카르트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절망과 분노, 슬픔의 정념에 휘둘리는 수많은 삶들을 마주했으며, 그 혼돈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이성의 확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성의 확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자는 데카르트의 방식이, 과연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이성의 정답에 따라 사는 삶은 예측된 삶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어떠한 모험도 없으며 삶은 정해져 있고 지루하며 단조롭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성의 확신에 의해서만 그 삶을 영위하진 않으며, 때로는 감성에 이끌리고 때로는 본능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감성과 본능에 이끌리는 것을 원칙적으로 통제하려는 데카르트적 확신의 삶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다.또한 데카르트는 학문을 나무에 비교했다.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줄기는 자연 철학이며 가지는 의학, 기계학 등의 응용 학문이고 말단은 윤리학이라고 보았다. 이 전체가 하나의 보편적 학문인 철학으로서 유기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단일성, 보편성, 전체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다원성, 특수성, 상대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물질에 영혼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물질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며,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 결국 자연의 심각한 파괴를 불러온 것이라고 생태주의 지지자들은 비판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동물을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했는데, 동물 애호가들은 동물에게도 생명이라는 존엄성이 있으며 그것을 인간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 중심적 사고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5. 업적
5.1. 철학
철학사에서 데카르트의 위치는 모래시계의 잘록한 허리 부분과 유사하다. 모래시계에서 위쪽의 모래가 오직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좁은 관을 통해서만 아래쪽으로 떨어지듯이 중세에 뿌리를 둔 여러 사상들은 오직 좁은 여과 장치를 거쳐서만 근대 세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 여과 장치는 바로 데카르트라는, 다방면의 재능이 압축된 천재였다.
엔서니 케니, 근대철학(2006)
데카르트는 철학적 논쟁을 "무엇이 참된가"에서 "내가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로 전환시켰고, 이를 통해 진리의 권위를 보장하는 역할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었다.[44] "무엇이 참된가"에서는 진리의 근거로 신을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에 달려있어 '진리의 근거로서의 신'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엔서니 케니, 근대철학(2006)
즉, 데카르트 이후로 '신 중심'의 철학은 점차 '인간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 바뀌어 갔다. 진리의 보증인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각자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자의식의 형성자'로서 '생각하는 주체'를 가진다. 주체를 가진 각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어른이 된다. 이제 인류는 기독교 계시 진리와 교회 교리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법을 만들고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45] 이때문에 데카르트의 철학적 작업은 기독교 중세에서 근대 주체로의 전환을 극적으로 성취한 혁명적인 결과라고 평가받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이성을 자율적으로 확립한 그의 관점은 이후 계몽주의가 신과 교회로부터 해방되는 기초를 제공한다.[46][47][48]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이전 시대의 철학 사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비연속적으로 출현한 것은 아니다. 가령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그 자체로는 딱히 발칙한 시도라거나 반골적인 시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스콜라학자 안셀무스가 보인 신 존재 증명의[49] 전통에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신 존재 증명에 한에서는 명백히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50]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에서, 이성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 후기 스콜라학자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51] 그러나 그의 신 존재 증명은 앞선 학자들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말했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업적이라 볼 수 없으며 데카르트의 한계라고 말해진다.[52] 데카르트가 철학계에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그가 '코기토'를 발견했다는 것에 있지, 신 존재를 증명한 것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기존 스콜라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그가 철학에서 우선순위를 '신'보다 '인간의 이성'에 먼저 두었다는 점에 있다. 즉, 데카르트는 "철학의 제1원리"를 '코기토(생각하는 주체)'에 두었다는 점에서, 기존 스콜라학자들과 전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기존 스콜라학자들도 '이성'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맞으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신'이 철학의 제1원리였고, 인간의 이성은 단지 '신 존재 또는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일 뿐이었다.[53] 반면 데카르트는 그 순서를 뒤집어 "생각하는 주체"인 인간의 이성이 철학의 첫 번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해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인 동시에 낡은 것의 대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일소하고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 그의 신 존재 증명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Gunnar Skirbekk · Nils Gilje [54]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보통 근대 철학자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신 존재 증명에 한해서) 후기 스콜라학자로 분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그것은 낡은 것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철학과 신을 분리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이자 그 낡은 모든 것을 일소하여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한 인물이었다.Gunnar Skirbekk · Nils Gilje [54]
5.2. 수학
데카르트가 '좌표계'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직교 좌표계[55]를 도입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수학 특히 그리스 시대에서 머물고 있었던 기하학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별도로 발달했던 기하학과 대수학이 데카르트가 만든 직교 좌표 위에서 융합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해석 기하학 (Analytical Geometry[56])'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좌표의 도입만으로도 데카르트는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들기 충분하다. 이 때문에 직교 좌표계를 두고 'Cartesian coordinate (데카르트 좌표)'[57]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좌표계에 기초한 대수적 함수의 개념이 데카르트에 의해 이미 도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방정식에 미지수 X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에서는 미지수를 현재와 같이 ( x, y, z )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많은 글자 중 왜 하필 X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전까지는 수학에서 '어떤 수'를 가리키는 방법이 나라별로 달랐으나 보다 간결한 X의 등장으로 언어를 불문하고 세계의 수학 언어를 통합시켰다는 것. EBS 다큐 오늘 - 데카르트 x의 비밀
1987년 피에르 코스타벨은 '데카르트의 비밀 노트'에, 위상 수학에 해당하는 오일러 공식이 이미 증명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는 데카르트 전기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라는 책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5.3. 과학
그 당시에는 유명한 물리학자였다.모든 현상은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단순 정량자와 몇 가지의 법칙에 지배되는 운동에 의한다.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3차원 컴퓨터 그래픽스가 발전한다.
음펨바 효과로 보이는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데카르트가 물리학에서 부족한 면이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이 효과는 아직도 그 원인이 불명이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가설인 싱가포르의 난양이공대학 연구진이 제기한 이론에 의하면 물의 특이한 상전이 방식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추정되는데, 이게 현대의 열역학 이론과 분자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그럴싸한 설명이라도 할 수 있는데, 분자의 존재는커녕 원자가 있는지도 몰랐던 시대의 과학자가 이를 규명해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58]
5.4. 의학
네덜란드에 있을 때 해부학에 관심을 두었다. 인간의 영혼을 찾기 위해 인체를 해부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였고, 윌리엄 하비와 심장의 움직임에 대해 다투기도 했다.[59] 그러다가 솔방울샘이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마저도 동시대인인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비판받은 흑역사가 있는데, 그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도입한 육체-정신 이분법을 인체에도 적용하느라 생긴 해프닝이다.대학에서 수업을 하지 않을 때에는 의사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건강을 상담하고 처방했다. 이 당시에는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등의 기본적인 처방이 잘 먹혀들었다.
그러다가 프랑신이 죽은 뒤 의학자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철학자로 살게 된다.
6. 어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방법서설』
『방법서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철학의 원리』 [60]
『철학의 원리』 [60]
하지만 제 생각에 자연의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일어납니다.
메르센에 대한 답변 [61]
메르센에 대한 답변 [61]
지금까지 철학이라 일컬어 온 모든 것들을 가장 적게 배운 사람들이 참된 철학을 배울 능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철학의 원리』 서문 中
『철학의 원리』 서문 中
아주 느리게 걷더라도 늘 곧은 길을 따라간다면, 뛰어가면서 곧은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방법서설』
『방법서설』
동물은 기계다.
데카르트 하면 생각나는 말 [62]
데카르트 하면 생각나는 말 [62]
7. 저서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 Regulaead directionem ingenii | <colbgcolor=#fff,#1f2023> 1701년[63] |
《세계》 Le Monde | 1664년[64] |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 | 1637년[65] |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 1641년[66] |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 | 1644년 |
《인간론》 Traité de l'homme | 1664년[67] |
《정념론》 Les passions de l'âme | 1649년[68] |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은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성찰》을 그 시대 대표 학술 언어였던 라틴어로 출간했었는데, 한국에서는 이현복 교수가 그 라틴어 원문을 직접 번역하여 출간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이 가장 원문에 가깝다. 대신 문장이 길고 이해하기 많이 어려운 편이다. 이에 비해, 애초부터 프랑스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비교적 쉬운 프랑스어로 출간된 《방법서설》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단 《방법서설》만으로는 데카르트 철학의 전모를 파악하긴 힘들다.
한국에서는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아동용을 제외하곤 진지하게 데카르트의 일생을 다룬 전기나 평전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라는 책만이 그러한 전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데카르트를 활용한 소설처럼 꾸며져 있어 픽션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그러나 의외로 제법 충실하게 데카르트의 일화들을 잘 서술해 놓았다. 데카르트라는 사람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8. 대중 매체에서
- 소설 소피의 세계에 등장했다.
- 모바일 게임 네메시스 : 또 하나의 태양의 등장 전함 네메시스-데카르트는 이 사람에서 이름을 따온 듯.
- 지식e 서적에는 Sentio[69]감각을 가지다,인식하는 것을 느끼다라는 뜻이다.] ergo sum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패러디 한 것으로 '나는 느낀다(Sentio) 고로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 유희왕 오피셜 카드게임의 심연룡 알버 레나투스, 혁의 성녀 카르테시아의 이름의 유래다.
- 블루 아카이브에 나오는 조연 등장인물인 소확행이란 단체의 교주가 그의 이름을 패러디했다. 데카르트(블루 아카이브) 참조.
9. 여담
- "Give her the dick"이라는 인터넷 밈이 있다. 2009년 Pornhub에서 야동을 감상하던, 데카르트를 프로필 이미지로 쓰던 미국의 모 유저가 'give her the dick'이라며 섹드립을 쳤는데, 뜬금없는 데카르트의 묘한 표정과 은근히 고상한 말투 문구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2012년에 4chan에서부터 유행이 시작되었다. 관련 내용
나는 좆을 준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는 언뜻 보면 숀 코너리와 비슷하다.
- 소문으로는 생전 딸의 모습을 빼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전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71]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했으며, 최후에는 데카르트가 배를 타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선장이 가방을 들추어 보았고, 너무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보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해 바다에 빠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평소 데카르트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 특히 그의 사상에 반기를 든 이들이 지어냈다며 이 일화를 거짓 취급한다. 단,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그 딸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결부시켜 프란시느 인형 얘기를 꾸며낸 것 같다. 해당 설의 진위 여부와는 별도로 딸바보 아빠의 진한 부성애와 로봇을 딸처럼 생각한다는 기괴함이 매력적인 요소로 느껴져 각주에서 선술한 꼭두각시 서커스의 프란시느와 같이 창작물에 영감을 제공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까뜨린느의 스토리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오리아나의 구 스토리도 이 소문에서 따온 걸로 추정된다.
- 많은 업적과 대조적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개쌍놈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다.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처럼 말도 안 되고 우스운 이야긴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고로 영혼을 가진 증거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동물 기계론'이라 불리는 사상이다. 동물은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매우 정교한 부품들의 조합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고 주장했던 것. 그는 이 주장을 더욱 밀어붙여 사고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 역시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동물 관련 잡지에서도 철학자로선 위대하지만 동물학자들에겐 빌런 같은 존재로 그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를 비롯한 전근대 시대에선 흔한 사상이라 그만 가지고 까는 건 다소 억울한 일이다.
- 토머스 홉스와 교류했는데 특히 학문 접근 방식과 철학과 광학 이론 등을 가지고 견해 차이를 보였다.[72] 홉스는 데카르트를 "기하학만 했으면 위대한 수학자가 될 것을..."이라고 깠고, 데카르트는 그냥 무시했다.
- 모든 감각을 통해 획득한 정보가 불확실함을 가정했을 때, 어떤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지 추론한 데카르트의 악마라는 사고 실험이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로.
- 발터 베냐민이 데카르트를 모티브로 삼아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하고, 심지어 희망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는 '유행'과 '새로움', 그리고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10. 관련 문서
[1] 네덜란드의 초상화 전문 화가인 프란스 할스(Frans Hals)가 그린 초상화의 사본. 1649년 만들어진 원본보다 뒤에 만들어진 사본이 더 유명하다. 루브르에 있다. 초상화 4개의 얼굴을 평균 내면 대략 이렇게 생겼다.[2] 라틴어 이름에서 "데카르트의", "데카르트적" 같은 의미의 영어 표현인 "Cartesian"이 유래했다.[3] 데카르트는 스스로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책 『성찰』 서문에서 "무신론자의 시각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했다"고 밝혀놓았고, 게다가 그 증명 과정에서 '철학의 제1원리'를 "신"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코기토)"로 두었기 때문에, 데카르트 사후 1663년 그의 종교 철학 관련 저작들이 가톨릭교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4] 고전 라틴어 발음은 (코기토 에르고 숨), 교회 라틴어 발음은 (코지토 에르고 숨).[5]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에서는 프랑스어로 적혀있으나, 이후 라틴어로 낸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 1644)에서 이것이 라틴어로 적혀있다. 방법서설 초기본에는 쉼표가 없으며 j를 사용하지 않아 당대 표기를 반영하면 'ie penſe donc ie ſuis'가 된다.[6] 프랑스어 발음은 (쥬 뽕 동 쥬 쑤이)[7] 데카르트는 좌표계를 고안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해석 기하학으로의 수학적 변화를 이끌어냈으며 철학에서 '존재'의 문제를 '시공간'의 문제로 바꾼 역사적인 인물이다.[8] 1990년대에 데카르트시(Descartes)로 이름을 바꾸었다.[9] 이때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름을 '다시 태어난다'는 뜻의 레나투스(Renatus)의 프랑스식 변형으로, '르네트르(Renaître)'의 과거 분사형인 르네(René)로 지어졌다.[10] 사실 칸트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지만, 본인이 그걸 일찍 깨닫고 평생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건강에 나쁜 걸 기피하는 생활을 유지하여 장수하였다.[11] 이때 같은 학교에 입학한 마랭 메르센과 교류한다.[12] 데카르트는 "세상"을 "책"으로 비유했는데, 이런 생각은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이후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에서 다시 나온다. 레이몽 스봉은 신이 인간에게 두 가지 책을 주었다고 말한다. 한 가지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세계"다. 그리고 인간은 이 "자연 세계"라는 책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읽을" 수 있다고 스봉은 주장한다. 그 "읽음"은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관용적인 자연 탐구에서 시작된다. 물론 이 책은 가톨릭에 의해서 금서로 지정되지만, 당시 회의주의 사상을 대세로 만들었던 몽테뉴의 『에세』에 수록되어 널리 퍼졌고, 젊은 데카르트는 이 『에세』를 읽으면서 회의주의적 영향을 받게 된다.[13] 1617년경 이사크 베이크만(Isaac Beeckman)과 함께. 삽화가는 실라 테리(Sheila Terry). 다만 당시의 그림이 아니라, 21세기에 그려진 상상화이다.[14] 올림피카(Olympica)로 알려진 데카르트의 일기장에 기록이 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해당 일기를 출간하지 않고, 사후인 1691년 아드리앙 바이예(Adrien Baillet)가 쓴 데카르트의 전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첫 번째 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코기토 증명에 나오는 첫 번째 의심, 즉 인간 감각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 두 번째 꿈은 코기토 증명에 나오는 두번째 의심, 즉 꿈의 가설을 통한 몸의 실재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 세 번째 꿈은 코기토 증명에 나오는 세 번째 의심, 즉 악마의 가설을 통한 '세상의 모든 지식'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15] 그의 합리주의적인 신 사상이 종교적인 시비에 걸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당대 유럽에서 가장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던 네덜란드로 간 것.[16] 어떤 사람의 하녀였다고 한다. 둘은 상당히 오랜 기간 교제했으며 종교 문제로 결혼은 하지 않았다.[17] 1635년 7월 28일 작성된 세례 기록에는 프란신트허 레이너르(Fransintge Reyner)라고 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종교 문제로 헬레나와 결혼을 못 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레이너르 요험스(Reyner Jochems), 즉 '조아킴의 아들 르네'의 네덜란드식 이름으로 등록했기 때문이다.[18] 그녀는 사시(정확히는 내사시(內斜視))였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평생 동안 사시를 가진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19] Adrien Baillet, Vie de Monsieur Des-Cartes(1691), t. 2, 90쪽[20] Russell Shorto, Descartes' Bones: A Skeletal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Faith and Reason, New York : Random House, 2008.[21] 르네 데카르트, 최명관, 데카르트 연구 방법서설ㆍ성찰, 서울 : 창, 2010, 51쪽.[22] 아미르 D.악젤, 김명주, 데카르트의 비밀노트, 한겨레출판, 2005→2007.[23] 이후 데카르트의 열렬한 팬이 되는 엘리자베스 공주와 크리스티나 여왕과의 관계도 있었지만, 그건 전적으로 학문적인 관계였다. 다만 몇몇 학자들은 엘리자베스 공주와 플라토닉한 사이가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24] 1647년경이라는 추측도 있다.[25]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바니니라는 남자가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26]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딸로 스웨덴의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학구열이 강해 데카르트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을 불러 교류했다.[27] 데카르트는 1650년 1월 15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곳은 겨울이 되면 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도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나의 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이 날이 갈수록 점점 간절해집니다."라고 썼다. 또 다른 친구에게는 "궁전의 아첨꾼들은 그들 속에 낀 이방인들은 모조리 시기한다."라고 편지를 보냈다.[28] 1650년경이면 소빙하기로 인한 이상 기후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인지라 전 지구적으로 현대와 달리 아주 차가웠다.[29] 우리나라로 치면 임금과 왕족의 병을 고치는 '어의'에 해당한다.[30] 그 당시 치료는 사혈 치료, 즉, 피를 뽑는 치료이다.[31] 독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데카르트의 두개골에서 독살의 흔적이 발견될까 봐 입 주변을 훼손하고 따로 빼돌린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32] 《방법서설》 이현복 옮김. 2019. 문예출판사. p.174[33] 데카르트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 논증들을 수단으로 하여 회의주의자의 의심을 뒤엎어 버린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34]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 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고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후에 《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로 제1명제를 치환하는데 그 이유는 "고로"를 포함한 표현이 전제와 결론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의도한 바는 '사유'가 '존재'라는 것이다. 즉, 사유=존재 이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자기 견해를 더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사람들에겐 이전의 공식이 너무 뇌리를 떠나지 않아 그것도 "고로" 때문에 오늘날까지 제1명제는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알려져 있다.[35] 그런데 사실 이 간지 나는 문구는 원래 데카르트가 아니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라틴어로 이미 말했던 것이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뒤에 데카르트와 같은 자세한 방법적 설명을 제시하진 않았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그 말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36] 후대의 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이 개념을 '본유 관념'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본유관념은 없다는 것이 바로 존 로크의 빈 서판(타불라 라사: 태어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라는 것)이다.[37] 논문 『데카르트는 회의주의를 극복하였는가?』 황설중[38]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이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은 본유 관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인식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며 고로 극도로 성실하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배치하여 우리를 기만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세상도 존재한다.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알 수 없는 실로 엉망인 논증이다(...), 이 논증 자체는 수학적 연역을 통해 세상을 증명하려고 한 데카르트의 새로운 시도 중 하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수학자 겸업 철학자였던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39] '직관'을 말한다.[40]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다', '명백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등의 전제 조건을 단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감각'은 종종 틀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으려면, 의심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소거법) 그 감각을 명백하게 판단하여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41]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이현복 옮김. 2021. 문예출판사. p.31[42] 육체와 정신은 근본적으로 달라 육체는 물질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반면에 정신, 즉 영혼은 영적인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주장. 몇백 년 후 이런 주장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이 나타나며 계속되어 오던 이성적 주체라는 존재가 크게 빛이 바래며 심리학이 발전한다. 자세한 건 심리 철학 문서로.[43] 앤서니 케니 편, 김영건 옮김, <서양 철학사>(이제이북스, 2004), P.183~184[44] In shifting the debate from "what is true" to "of what can I be certain?", Descartes arguably shifted the authoritative guarantor of truth from God to humanity (even though Descartes himself claimed he received his visions from God)—while the traditional concept of "truth" implies an external authority, "certainty" instead relies on the judgment of the individual.[45] 데카르트의 '주체'는, '개인'의 탄생과 '사회 계약론'의 탄생을 촉발시켰다.[46] 데카르트가 증명한 '철학적인 신'은 무한하고 완벽하고 전능하며 선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변덕을 부리고 화를 내는 '인격적인 신'은 점차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런 관점에서 범신론, 이신론, 그리고 유물론 등이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데카르트 사상을 계승한 바뤼흐 스피노자가 곧바로 범신론을 제시하였던 것도 사실 우연이 아니다.[47] 물질적 세계를 단지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으로 파악함으로써 순수 자연학과 수학의 급격한 발전에 기여하였고, 이를 통해 원칙적으로 인간은 물질적 세계를 계산할 수 있고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48] 역설적이게도 데카르트의 동일자-즉 '나'- 중심의 철학은 20세기로 이행하며 세계 대전을 겪으며 철학적 회의를 받았고, 이는 기존의 유아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자적 사고의 철학을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전의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철학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이가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 그는 동일자의 철학에서의 완고한 위치를 '타자에게 인식에 의해 귀속될 수 있는' 위치로 격하시켜 일인칭적 사고의 철학에 사람 간의 철학, 다자간의 철학 구도를 제안하기도 했다.[49]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수세기 동안 많은 토론의 소재가 되며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인 입장에서 증명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은 가우닐로 수사와 마찬가지로 사고 속의 가장 완전한 존재로부터 최고 완전자의 실존으로 넘어가는 안셀무스의 사고 과정을 비판했다. 이에 반해 신 존재 증명을 변호했던 스콜라학자들, 예를 들어 〈안셀무스의 충실한 제자〉 보나벤투라나 둔스 스코투스 같은 이는 증명 과정의 형이상학적인 심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여러 근대 철학자들, 즉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헤겔 등은 자신들의 철학 체계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안셀무스의 증명 방식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의 철학적 신론을 발전시켰다. 반대로 칸트는 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이러한 시도를 통렬하게 비판했다.」(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씀. 박승찬 번역. 《모놀로기온 · 프로솔로기온》)[50] (프란시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스콜라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비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중세 사상가들이 사용한 사유 범주들 및 철학적 원칙들을 오랫동안 사용했다.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들의 스콜라적 요소들을 고전 문예에 대한 르네상스적 흥미라고 취급하는 건 오류일 것이다. Francis Bacon and Descartes may have inveighed against scholastic Aristotelianism; but philosophers continued for many years to use categories of thought and philosophical principles which had been used by medieval thinkers. It would be a mistake to attribute what we might describe as the scholastic elements in philosophies such as those of Descartes, Malebranche and Leibniz to the interest in classical literature which was shown during the Renaissance. (-Frederick C. Copleston. 《A History of Medieval Philosophy》)[51] "중세 철학과 근대 철학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 일반적인 분류 방법과는 달리, 데카르트를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에 함께 포함시키는 것도 하나의 좋은 사례라 말할 수 있다. ... 어떠한 분류 방법을 취하든 간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철학 사상의 역사는 물샐틈없는 배의 구획실처럼 완전히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것과, 그 사상의 변천은 돌발적이 아니고 점진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서로 겹치는 부분과 서로 관련되는 부분이 있고, 따라서 잇따르는 체계들이 칼로 베듯이 서로 잘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Frederick C. Copleston 씀. 박영도 옮김. 《중세철학사》)[52] 즉, 그가 스콜라 전통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신 존재 증명"에 한해서만 그러한 것이고, 그마저도 그는 스콜라 전통의 이야기를 동일하게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53] 기존 스콜라 철학자들도 '이성의 힘'을 사용한 것은 맞지만,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주체'를 철학의 제1원리로 놓진 못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신'이 철학의 제1원리였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즉, 둘 사이에는 우선 순위를 '신'으로 두느냐 '인간'으로 두느냐에 따른 차이가 있다.[54] 군나르 시르베크, 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1》 윤형식 옮김. 2016. 이학사. 414쪽.[55] 다만 이 당시 음수의 개념은 없었다고 한다. 일화로 좌표 개념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몸이 허약해서 병영 내무반에서 누워 지내다 천장의 날벌레의 움직임을 나타낼 방법이 궁금해서였다고 한다.[56] 방정식, 함수 등을 이용해 도형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57] Descartesian이 아닌 이유는 Des가 관사이기 때문이다.[58] 원자의 존재는 1897년에 영국의 물리학자인 조지프 존 톰슨에 의해 전자의 존재가 입증되면서 함께 증명되었다. 분자설 역시 19세기 초중반에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변호사인 아메데오 아보가드로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음펨바 효과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쓰인 열역학 이론들은 19세기 말에서야 확립되었다.[59] 데카르트는 심장이 팽창할 때 혈액이 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하비의 주장이 맞는 걸로 판명되었다.[60] "Veritatem inquirenti, semel in vita de omnibus, quantum fieri potest, esse dubitandum"[61] "Mais apud me omnia fiunt Mathematicè in Natura" (Correspondence with Mersenne note for line 7 (1640), page 36)[62] 동물 복지에 관련하여 항상 비교되는 문구다. 몸·마음 문제 문서로.[63] 1628년에 집필하지만, 데카르트가 죽은 후 50년이 지난 1701년에야 비로소 출간된다.[64] 1633년에 집필하였지만, 갈릴레이의 유죄 판결로 인해 출간을 보류한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 14년이 지난 1664년에 출간된다.[65] 1636년에 이미 프랑스어로 집필하였고, 1년 뒤 《굴절광학》, 《기하학》, 《기상학》과 더불어 《방법서설》을 익명으로 출간한다.[66] 1640년에 탈고하여 신학자 카테루스에게 보내 반론을 받고, 이어 파리의 메르센 신부에게 보내 홉스, 아르노, 가상디 등으로부터 반론을 받아, 1년 뒤 반론과 답변을 포함한 《성찰》을 파리에서 출간한다.[67] 1648년에 탈고하였으나, 그가 죽고 14년 뒤인 1664년에 출간된다.[68] 1645년 엘리자베스 왕녀의 요청으로 집필을 기획하고, 4년 뒤인 1649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으로 스톡홀름으로 떠나는 도중,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다.[69] 라틴어로 센티오라는 말은[70] 이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철학의 원리를 송시열에게 보여주고, 송시열은 그 인식도 결국 사회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지 않은가라고 반론한다.[71] 꼭두각시 서커스의 프란시느가 떠오르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꼭두각시 서커스 작가가 직접 트위터로 증언한 사실로, 프랑신 데카르트를 모티브로 프란시느 캐릭터를 창안한 것이 맞다고 한다. 즉 이름이 '프란시느'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72] 가장 논쟁이 된 데카르트의 저서 성찰에 홉스의 비평문도 같이 실리게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