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에 무장친위대의 전신인 친위대 특무부대에 들어간 비트리히는 근위 SS 아돌프 히틀러에 배속되었다가 1939년에 제1연대<도이칠란트>에 배속되어 제2차 세계 대전시 폴란드 침공 및 프랑스 침공작전에 종군했다. 비트리히는 1941년10월부터 12월에 걸쳐 부상으로 인한 요양을 마치고 파울 하우서 대신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비트리히 휘하의 다스 라이히는 모스크바 공략작전에 참가해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한 공로로 그는 기사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43년2월까지 제8SS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사단장으로 임명된 비트리히는 루체프와 오룔 지구의 방어전에 참가했다. 1943년2월부터 1944년6월까지는 제9 SS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의 사단장으로 종군했다. 1944년6월에 다시 제2 SS 기갑군단[3]의 군단장으로 부임한 비트리히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했다. 8월엔 캉에서 미군에게 포위당했었지만 돌파에 성공했다. 이 일은 히틀러의 호감을 사 그에겐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이 내려졌다. 독일군이 네덜란드로 후퇴한 뒤 9월 17일에 영국군이 마켓 가든 작전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비트리히의 제2 SS 기갑군단이 진을 치고 있는 아른헴에 낙하했지만 비트리히의 격퇴전에 밀리고 말았다. 이것은 서부전선의 독일군에겐 마지막 승리였다. 그 후 요제프 디트리히의 지휘하에서 제2 SS 기갑군단을 지휘해 헝가리에서 소련군을 격퇴한 비트리히는 1945년4월부터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방위를 담당했다.
1945년5월 8일에 미군에게 체포된 비트리히는 신병요구로 미군에서 다시 프랑스 정부로 인계되었다. 그는 17명의 레지스탕스를 살해한 혐의로 프랑스 군사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징역형을 살다가 1954년에 석방된 후 서독으로 돌아가 1979년에 바이에른 주의 볼프라츠하우젠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