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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모토 야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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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秋, ruby=あき)][ruby(元, ruby=もと)] [ruby(康, ruby=やすし)]|Yasushi Aki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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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B48 그룹 종합 프로듀서
사카미치 시리즈 종합 프로듀서
출생 1958년 5월 2일 ([age(1958-05-02)]세)
도쿄도 메구로구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65cm
가족 남동생 아키모토 신스케
배우자 타카이 마미코
장녀 아키모토 세리(2001년생)[1]
학력 주오대학 (문학부 / 중퇴)
현직 아키모토 야스시 사무소 이사[2]
교토조형예술대학 부학장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 이사장[3]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이사
프로듀싱 그룹
AKB48 그룹
(AKB48, SKE48, NMB48, HKT48, NGT48, STU48)
사카미치 시리즈
(노기자카46, 사쿠라자카46[4], 요시모토자카46, 히나타자카46[5])
22/7
극단 4달러 50센트
THE COINLOCKERS
보쿠가 미타캇타 아오조라
WHITE SCORPION
Rain Tree
소속사 주식회사 아키모토 야스시 사무실
별명 아키P, 아키모토, 추원강[6] , 야스스, 앗키[7]
링크 파일:755 로고.svg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일대기
2.1. 학창 시절2.2. 고등학교 졸업 이후
3. 업적4. 배우자에 관해5. 활동
5.1. 작사가로서5.2. 아이돌 프로듀서로서5.3. 기타
6. 논란
6.1. 작사 논란
7. 평가
7.1. 긍정적 평가7.2. 부정적 평가
8. 주요 작품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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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도쿄도 메구로구 출신의 방송작가, 작사가, 각본가, 영화감독, 만화 원작자, 소설가, 공연 연출가, 교수, 아이돌 프로듀서.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아이돌 그룹인 AKB48노기자카46의 프로듀서로 더 유명하다.

별명은 아키부타(가을돼지), 팔짱곰이 있다. 인터뷰를 할 때 보면 항상 팔짱을 끼고 말을 하는데, 이 때문에 '아키P는 팔짱을 끼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거냐'는 농담도 있다. 그래서 한국 AKB 커뮤에서 생긴 별명으로 '팔짱곰'이 있다. 오냥코클럽 멤버들에게는 '앗키'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난 후인 AKB48 멤버들은 '아키모토 센세'로 호칭이 고정돼 있다고.

흔히 오냥코클럽의 프로듀서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단독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오냥코클럽을 실질적으로 프로듀스한 것은 이시다 히로시를 비롯한 당시 후지테레비 '유우야케 냥냥'의 작가진이었고, 아키모토는 그 작가진 중 한 명이었다.

AKB48를 비롯한 자매그룹, 거기에서 파생된 유닛이나 솔로곡, 극장공연 곡,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모든 작사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작사뿐 아니라 종합 프로듀서로서 그룹이 나아갈 전체적인 방향을 지시/감독하고 있다.

쟈니 키타가와, 층쿠 등과 함께 일본 아이돌 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의 이수만, 양현석, 박진영, 방시혁 등과 비교할 지점도 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일본 안티들에겐 일본 아이돌 음악의 질적 저하를 불러와 K팝 등에 지분을 내준 역적(...) 취급을 받기도 한다.

2. 일대기

2.1. 학창 시절

파일:attachment/akimotogo_1_1.jpg

고등학생 시절.

주오대학 부속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1973년 겨울, 수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닛폰 방송의 '센다 미츠오의 일수로 2일 대진격!'을 듣던 중, '이 정도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서 수험 공부용으로 준비했던 노트에다 20페이지에 걸쳐 센다를 주인공으로 한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패러디를 작성한다. 같은 반 친구들의 칭찬을 듣고 그 노트를 닛폰 방송에 보냈더니 당시 닛폰 방송 사원이었던 카메부치 아키노부와 오쿠야마 테루노부의 눈에 들어 재능이 발굴되었다. 이리하여 닛폰 방송에 찾아올 수 있게 되어, 출입하는 동안 오쿠야마의 제자가 되어 방송 작가 그룹에 소속되게 된다. 당시 17세의 고등학생이면서 방송 작가로서 활동을 개시한 것이 업계에 들어온 계기이다.

2.2.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주오대학 문학부에 진학했지만, 방송 작가로서의 활동은 계속해서 대학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결국 방송 작가로서 살기로 결의하고 대학을 중퇴한다. 당초엔 방송 작가 활동을 단순한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받은 수입은 당시 샐러리맨의 4배 가까운 액수였다. 본인은 이것을 '악전(あぶく銭)'[8]이라고 생각했다고.

그 후, 방송 작가로서 부족함과 불만을 느끼고 있던 중 카메부치로부터 후지 퍼시픽 음악 출판의 아사츠마 이치로를 소개받은 것으로부터 작사에 관여하게 된다. 그때문에 작사가로서는 후지 퍼시픽 음악 출판과 계약되어 있다. 1981년, The Alfee의 곡인 '通り雨(소나기)'의 B면에 수록된 곡을 작사할 기회를 얻어 '言葉にしたくない天気(말로 하고 싶지 않은 날씨)'로 작사가 데뷔를 이뤘다. 이를 계기로 작사가로서도 활동을 시작한다. 방송 작가, 작사가가 된 계기나 일화에 대해서는 1988년 발간된 자전 소설 '안녕, 메르세데스'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온 일이고 특별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라서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川の流れのように(흐르는 강물처럼)'[9]을 작사한 후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수이자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한 미소라 히바리가 자신이 작사한 곡을 불러주었으므로 '나도 이제 프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고. 그래서 자신은 지금까지도 직함을 작사가로 하고 있다고 한다.

3. 업적

방송 작가로서는 '올나잇 후지', '유우야케 냥냥',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더 베스트 텐', '우타방' 등 전설급 프로그램에 관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작사가로서는 코이즈미 쿄코의 'なんてったってアイドル(뭐라해도 아이돌)', 톤네루즈의 '雨の西麻布(비내리는 니시아자부)'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였으며 오냥코클럽, AKB48 등 다수의 아티스트 곡 작사에 손을 대는 한편, 작가나 영화 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사 말고도 TV 각본이나 애니메이션 각본, 심지어 영화 각본도 쓰는데 착신아리아즈키쨩, 리리카SOS가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또한 AKB48을 모델로 한 코믹스인 AKB49 ~연애금지조례~와 애니메이션 마크로스AKB0048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코끼리의 등, 아드레날린의 밤, 사랑공장. 후에 이 소설들을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AKB48 멤버들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공연 연출가로서 '이병헌의 20주년 기념 공연' 등의 기획을 맡기도 했다.[10] 자기계발서도 집필했다.

악수권이나 투표권으로서 음반 CD를 파는, 천재적이자 악마적인 수법을 창시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앨범 자켓을 발매하고, 한 사람당 엄청나게 많은 갯수의 앨범을 사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2000년대 이후 쇠퇴해가는 음반 산업 속에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런 구조는 한국에도 전해져 케이팝 회사들의 주요 수입원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뇌과학자 모기 켄이치로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측두연합야라는 기억의 중추에 데이터가 굉장히 많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며 우리가 아키모토 야스시의 아이디어라고 접하는 것은 천 개 중에 세 개 정도밖에 안 된다고 언급했다. 프로그램 '정열대륙' 출연 때는 '자신은 천재가 아니도 아티스트도 예술가도 아니다. 피카소를 흉내내는 광고 회사원. 피카소가 되고싶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피카소는 될 수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작가 하야시 마리코는 "아키하바라에서 (AKB48)을 한다고 했을 때 아키모토 야스시도 빗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AKB의 성공을 보고) 이 사람은 빗나가는 일이 없구나 하고 굉장히 감동했다. 이렇게 오랜 동안 일을 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안되겠네", "조금 빗나갔네", "시대에 안 맞네" 하고 반드시 이야기를 듣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굉장하다. 시대가 그의 편이 되어 주고 있다는 느낌, 시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아키모토도 사람인지라 실패나 추문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세가드림캐스트. 세가가 게임기 제작에서 철수한 결정적 원인은 드림캐스트 실패에 있는데, 아키모토 야스시 또한 이 실패에 한몫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키모토 야스시는 SEGA의 임원으로 드림캐스트 프로젝트의 프로모션 부분을 총괄하고 있었고, 드림캐스트의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세가후지TV의 후원으로 아이돌 그룹을 만들게 된다. 이 아이돌이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으로 불렸던 체킷코. 여기서 체킷코는 애당초 드림캐스트의 프로모션을 위한 프로젝트성 아이돌 그룹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킷코의 여러 활동은 아키모토 개인의 사적인 욕구에 충실한 것들뿐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결과론적으로 아키모토 야스시는 약 100억엔 정도를 프로모션 비용으로 날려먹고, 드림캐스트는 실패하게 되었으며, 체킷코도 대실패했다. 후에 아키모토 본인은 자신은 체킷코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망한 후에' 딱 잡아떼고 있지만, 체킷코용 프로그램인 "DAIBA테키!!"는 '드림캐스트 제공, 아키모토야스시 사무소 협력'이라고 명시된 바 있다. 또한 호리에 타카후미와 손잡고 라이브도어 계열의 컨텐츠회사 중역으로 취임했지만, 저 유명한 라이브도어 쇼크[11]가 일어난 후 재빨리 사임하고 손을 턴다.

이런 실패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반대로 아키모토 본인이 작가진 중 한 명 겸 작사가로 참여했을 뿐인 오냥코클럽이 대성공한 후 마치 자신이 오냥코클럽을 전부 프로듀싱한 것인양 TV 등에서 말하며 경력에 크게 집어넣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하다.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저는 30년 간 여러 가지 모습을 봐왔지만 계속 변하지 않는 점은 '친절함'이네요. 대신에 모두가 모였을 때 그걸 알려주지 않으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왜 나한텐 안 가르쳐 준 거야!' 하고..."라고 언급했다.[12]

4. 배우자에 관해

파일:attachment/sdasddsa.jpg

그 와중에 심란한 안경테

오냥코클럽의 인기 멤버 타카이 마미코가 아키모토 야스시의 부인이다. 오냥코 해체 직후인 1988년 초, 당시 22살이던 타카이와 5월 23일에 결혼한다는 기사가 떠서, 당시 재결합을 외치던 팬덤은 그야말로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타카이는 결혼 후 연예계를 은퇴했다. AKB48 연애 금지의 서막

참고로 기사는 타카이 나이를 한 살 내리고, 아키모토 나이를 한 살 더 올렸는데 실제로는 타카이가 66년생으로 58년생인 아키모토랑은 8살 차이이며 당시 나이는 22살, 30살이 맞다. 그 당시 일본의 시대상 젊은 음악인들을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아키모토는 한 살을 올린 57년생으로 활동했고, 타카이 마미코도 활동 당시에는 67년생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나이에 오류가 생겼는데, 한국의 연예계도 저 당시 나이를 속인 사람들이 여럿 있었던 것처럼 일본 연예계도 별 반 다를 건 없었다.

팬클럽이 창단한 직후였던 데다가 워낙 팬이 많던 멤버라 팬덤이 박살날 만큼 그야말로 충공깽일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었고 타카이 마미코 쪽이 매우 적극적으로 대시했었다고 사이토 유키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다. 같은 위치에 있던 층쿠에게는 "마지막에 모닝구 무스메 멤버랑 결혼해"라고 귀띔했다고(...) 참고로 층쿠는 아키모토의 조언을 굴하게 씹어버리고, 2006년에 모델이었던 이데미츠 카나코와 결혼했다. 이 쪽은 12살 차이.

여기서 재미있는 여담이 있는데 아키모토 야스시는 당시 타카이 마미코의 오냥코클럽 오디션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오디션 당시 아키모토 야스시가 타카이 마미코에게 "연예계 데뷔 하면 유혹이 많을 텐데요. 작사가라든지 코미디언, 디렉터들한테요. 그 유혹에 이길 자신은 있나요?"라고 질문했고 타카이 마미코는 "물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역으로 대시할 줄이야 이 모든 것은 유우야케 냥냥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고 동영상도 남아 있다.

AKB48에게다 알게 모르게 연애 금지를 천명한 거 치고는 프로듀서 본인이 자신이 프로듀싱한 멤버 훗날 인터뷰에서 저 타카이랑 결혼한 걸 꺼내자, "그 때는 그런 거에다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라며 웃어넘겼다.

2001년 3월에 장녀를 출산했다.

심지어 9년 뒤인 1994년에는 오냥코클럽의 미소녀 멤버였던 카와이 소노코도 오냥코클럽의 거의 모든 곡을 작곡한 작곡가 고토 츠구토시랑 결혼했다.

프로듀서와 자신이 프로듀싱한 가수가 해체 후에 결혼했다는 점으로 보면, 과거 YG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였던 양현석과 양현석이 프로듀싱한 무가당의 이은주가 결혼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무가당의 인기는 모냥코클럽에 비하면 꽤나 낮았다. 오냥코클럽은 그야말로 당시 일본에서 최정상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이었기 때문다. YG 기준으로 보면, BLACKPINK 정도 되는 최정상 아이돌이었다고 보면 될 듯.

5. 활동

5.1. 작사가로서

작사 경력이 40년이 넘으며 싱글의 밀리언셀러 19회(2014년 10월 기준)를 비롯하여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무려 5,000곡에 다다른 곡들의 가사를 도맡아 써왔으며 그 중 AKB48에게 준 곡들은 700곡이 넘는다. 그리고 이 중에서 100곡이 넘는 작품이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싱글 총 매상은 2013년 2월 기준으로 총 506작품 6859.1만 매를 달성하고 여태까지 1위를 유지했던 전설의 작사가 아쿠 유(꽃의 중3 트리오와 82년조의 3/4가 데뷔했던 스타 탄생!의 프로듀서이자 핑크레이디의 상징)를 앞질러 역대 1위를 하였다.[13] 그 3할은 AKB48와 자매 그룹 관련 작곡이며 매상은 1998.7만 매로, 악수권이라는 상술을 이용한 판매 방식이기 때문에 찬반양론이 펼쳐지고 있다. 이 모든 기록은 지금도 현재진행중.

덧붙이면 아키모토 야스시는 오냥코클럽에 관여했을 시절부터 팬미팅 참가권 등을 동봉하는 방식의 상술을 펼쳐왔다. 후술할 오냥코클럽의 기록은 그룹의 인기도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나 이러한 상술에 의해 만들어 진 부분도 있다. 어찌보면 상술의 선구자인 셈

20대에 이미 여러 히트작을 배출하며 인기 작사가로서 인정 받았으나 아이돌이나 기획물 전문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한 미소라 히바리의 '강의 흐름처럼'을 작사한 후로는 이미지는 완전히 변해서 이른바 명작사가의 반열에 올랐다. 아키모토 자신이 프로듀스한 오냥코클럽, AKB48의 전곡과 솔로곡, 유닛곡의 가사는 전부 아키모토 본인이 쓰고 있으며 오냥코클럽의 곡들은 1986년 오리콘 차트 52주 중 36주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1987년은 납세액만 1억 61만 엔.

2011년, 2012년JASRAC상에서 2년 연속 금,은,동 3관왕을 독점하였다. 이는 1995년 코무로 테츠야가 달성했던 기록으로 2년 연속 수상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유일하다.

가사 스펙트럼도 넓은 편이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다. 히트곡의 경우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川の流れのように'(강의 흐름처럼)와 케야키자카46의 'サイレントマジョリティー'(사일런트 매저리티, Silent majority)와 같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 AKB48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헤비 로테이션)과 같은 사랑 노래, 코이즈미 쿄코의 なんてだってアイドル(뭐라 해도 아이돌)과 같이 아이돌들의 이면을 다룬 노래 등등,[14] 폭넓은 주제의 가사를 다루고 있다.

노래 화자의 경우에도 남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연령대 또한 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하다. 가사 주제의 경우에도 이별, 추억, 삼각관계, 바람, 심지어는 동성애까지 다양하다.

어떻게 하면 화제를 모을지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점 역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데, 좋을 때야 화제 모아서 판매량이나 주목도가 높지만, 아무래도 너무 수위가 센 경우가 많아서... 가사가 시궁창의 본좌급 중 하나로 불리는 오냥코클럽의 <セーラー服を脱がさないで>도 이 사람이 작사했다. 그리고 AKB48의 '교복이 방해 해'(원조교제), 'Dear My Teacher' (사제간의 사랑. 가사에 아예 '이 세상에는 남자, 여자, 게이밖에 없다'는 부분이 있음) 등은 물론이고, 이동복도주행대7의 '자매덮밥' 등등...

작사는 평균 2시간 정도 걸리며 하루에 4곡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AKB48과 자매 그룹, 파생 유닛, 멤버 솔로, 극장 공연곡, 이벤트성 곡,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또는 졸업멤버의 솔로곡 까지 모두 작사를 혼자서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량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아키모토의 작사 방법은 멜로디를 들으면서 우선 엉터리로 가사를 붙인 다음 그걸 다듬으면서 만든다고 한다. 그 엉터리 가사라는 게 멜로디로부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나 감정이기 때문에 그걸 테마로 삼아서 가사를 쓴다는 것이다. 멤버들에게 "소근거리는 것처럼 불러줘"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창법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케팅뿐만 아니라 본직이 글쟁이인지라 가사도 상당히 잘 쓰는데, 아이돌 프로듀서다 보니 10대 취향의 감성적인 가사를 많이 쓰고, 또 잘 쓴다. '아키P는 여고생의 일기장을 훔쳐서 보관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이 나돌 정도. 근데 이성의 화자 시점에서 가사를 쓰는 걸 좋아해서 모르고 들으면 백합 향기가 폴폴 나는 곡이 태반이다. 물론 노리고 쓰는 것일 확률이 100%(...).

의외로 1980년대~1990년대에 애니송의 작사도 한 적이 있어서 기동전사 건담 ZZ의 1기 오프닝 '애니메이션이 아냐' + 1기 엔딩 '시대가 울고 있어'와 푸른 유성 SPT 레이즈너의 오프닝 '메로스처럼' + 1기 엔딩 '5분쯤의 버릇'의 가사를 썼고 최근에도 종종 내는 듯.

원체 자기 이름으로 나오는 곡이 많은데다, 그 중에는 같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의 여러 경향의 곡들이 있고, 프로듀스하는 그룹도 프로그램도 콘서트도 엄청 많은 까닭에, 유령 작가가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는 작가 중 한 명. 아예 작가진이 따로 존재한다는 루머마저 있다. 다만 단독으로 직접 겨냥된 경우는 없고, 대작 관련 사건이 일어나거나 다른 가수의 대작 의혹이 생길 때마다 곁다리로 이 사람의 이야기도 함께 나오는 정도. 리갈 하이의 고스트 라이터 관련 에피소드(1기 2화)가 아키모토를 겨냥했다는 썰이 돌아다닌다거나. 이 에피소드에서 피고에게 "지금까지 '세라복이 벗겨졌다'거나 '부르마 입는 걸 깜빡했다'거나 로리타 컴플렉스 그 자체인 노래밖에 만들지 않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 여담으로 이 드라마의 악역의 모티브라고 추정되는 실존 인물의 폭은 제법 다양하다. 이를테면 미야자키 하야오라거나.

이런 주장에 대해 애초에 유령 작가가 있으면 뮤비 촬영이 밀리거나, 가사를 못 써서 극장 공연을 미루는 등의 일이 벌어질 리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 또한 존재.

하나 특이한 것은 5,000곡이나 작사를 해왔음에도 자기 복제에 잘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돌 프로듀서가 되고 나서는 사실상 곡도 자기가 선정해서 만드는 거니 어찌 보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AKB48만 보면 자기 복제에 빠져서 팬들에게 욕을 먹고 있지만 그룹의 유닛곡, 솔로곡, 극장곡들을 전부 들여다 보면 상당히 세련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처럼 새로운 그룹을 만들면 그 그룹에 맞는 색을 입히는 걸 정말 잘한다. 가사 내용이든 그 의미나 센스든 일본 최정상급의 작사가인 것만은 확실하다.

2019년 NHK에서 미소라 히바리을 AI로 복원한 인물중 한 명이다. '흐르는 강물처럼'을 작사한 사람으로써, 이번 복원으로 '그 후로(あれから')라는 노래를 제작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감동적인 일이 있었는데, 자신이 30년 전 신인 작사가였을 때 '흐르는 강물처럼'을 작곡하던 미국 어느 카페의 30년 전 그 자리에서 '그 후로'의 작사를 했다.

5.2.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아키모토 야스시/프로듀싱 그룹 문서도 참조.

오냥코클럽AKB48이라는 이름이 너무 커서 마치 신처럼 여겨지지만, 오냥코는 위에도 써있는 것처럼 작가진의 일원이자 작사가로 참여한 것이라 종합 프로듀서로 관여하는 AKB48과는 다르다. 아키모토 본인은 오냥코클럽은 공동 작업이며 자신이 주도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고쿠쇼 사유리는 "구성 작가였던 아키모토씨는 스태프의 일원이었고 좋은 의미로 다른 스태프들과 동급에 있었다"라고 얘기하였다.

아키모토가 프로듀스해서 말아먹은 그룹도 많은데 오냥코의 남자버전이었던 무슷코클럽, 초등학생으로 이루어진 네즈밋코 클럽, 2001년 '판치라 아이돌'이라는 해괴한 콘셉트를 들고 나온 추정소녀 등이 그것이다. 아키모토가 프로듀서는 아니었지만 기획 성립에 큰 역할을 한 90년대 말의 체킷코도 쫄딱 망했다. 최근의 성공으로 이런 것들은 전혀 어필되지 않지만 그는 성공만큼이나 무수한 실패를 기록한 사람이다.

AKB48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2005년 직접 도쿄아키하바라에 근거지를 두고 책임 프로듀서로써 역임, 전용극장을 만들어 매일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표방하였다. 당시의 아키하바라는 사회 현상을 불러 일으킨 서적 '전차남'에서 그려진 메이드 카페, 미소녀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로 인지되어 AKB48을 아키바에서 통용될 '모에 아이돌로 키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 AKB48지하 아이돌적인 상태는 장년 간 지속되었다. 마이너한 구성과 오타 성향의 걸그룹에 대중들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것. 하지만 2008년 싱글 '오오고에 다이아몬드'로 인기가 상승, 2010년 이후로는 발매되는 CD마다 100만 장을 돌파하는 국민적인 아이돌이 되는 길을 이끌었다.(자세한 설명은 AKB48 문서 참조.) 2013년의 인터뷰엔 장래에 AKB48의 프로듀서에서 물러남을 시사하였다.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철학은 '다른 사람이 생각이 들어도 절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을 하자!'라고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이래서인지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에서 프로듀싱 능력은 따라올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여돌계의 끝판왕이자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는 "(아키모토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기획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면 좋은 게 있다면 흉내내고 싶어진다. 때문에 그다지 잘 알지 않도록 하고있다. 하지만 과거의 다양한 경험 위에서 이번을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런 분야를 만들어간달까. 점을 찍는다기보다는 자리를 만들었달까."라고 언급했다.

참고로 AKBINGO!에서 AKB 오리멘(1기생)들이 말하길, 만약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수상한 오디션에 응모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1기생 미네기시 미나미는 오디션 관련 정보지를 보다가 부모님이 AKB 오디션 광고의 아키모토 야스시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 굉장한 사람이야'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당시 어떤 그룹인지도 알 수 없었던 AKB48의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한다.[15]

구글 플러스에서 AKB48 멤버들과 교류를 하고있는데 자기 자신을 '야스스'라고 부르며 절찬 개드립 중. 관련 정보를 말해 놓고는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 같은 발설을 하지만 상기하듯 이 사람은 고교생 때부터 방송계에서 일해온 데다 나이도 60이 다 되어가는 베테랑이다. 그러므로 저런 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는다. 유키링이 직접 유출 좀 제발 그만하라고 돌려서 구플에 쓸 정도면 말 다 했다. #링크 삭제됨 구플에서는 카미7 멤버들과 비견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멤버들과 장난을 치거나 멤버들 소식을 알려주거나 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팬들은 아키P에 대한 애증이 쌓이고 쌓인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돼지라고 부르며 까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아이돌 마케팅에는 도가 트인 사람.

프로듀서로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대단히 엄하다고 한다. 스탭들이 아키모토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검사받으러 올 때는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무겁다고 할 정도이다. 어떤 공을 던져도 쳐버리는 타자를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한 싱글 자켓을 결정할 때는 스탭들이 20패턴의 아이디어를 들고 왔지만 전부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콘서트나 공연등에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얄짤없이 쓴소리를 하는데 그 예로는 AKB48 및 자매 그룹의 노래 총선거라고 불리는 리퀘스트 아워가 2013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개최되었다. 그런데 아키모토는 첫 날 영상을 보고 자신의 구글플러스에 이 영상이 최악이라는 평을 내렸다. #링크 삭제됨 특히 강운 최강자를 뽑는 과정에서 선발된 카와에이 리나가 벌칙에 걸려[16] 스티로폼 공 같은 것에 파묻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버라이어티의 정석인 흰 가루가 아니라는 것을 깠다. 왜 밀가루 대신 스티로폼이 나왔냐면 카와에이가 또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화장이 지워질까봐. 하지만 아키모토는 얼굴이 하얀 상태로, 그러니까 정말 아이돌 본연의 모습을 한 채로 노래를 불러도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체 각 부위에 만보계를 붙이고 몸을 떨어 그 횟수를 세는 경기는 낡았다고 깠다. 중간에 중계를 한 이치카와 미오리[17]도 리퀘스트 아워랑 관계없다고 깠다. 근데 그래놓고 결론은 노래 총선거니까 노래를 더 보여달라고 했다.

보통 PV란 건 일단 그 곡의 내용에 따라 만드는 게 정석이라서 일단 곡이 한 달 전에 나오고 그걸 한 달 동안 생각해서 곡에 맞는 뮤직비디오를 찍는 게 상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AKB48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없다고(...) 보통 PV 촬영 열흘 전까지 미술, 의상, 촬영장소는 커녕 노래, 가사조차 완성되어 있지 않은게 허다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6일 전까지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PV촬영 각본은 감독이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짠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대개 안무, 가사, 음원은 빠르면 PV 촬영 전날 완성되고 상황이 나쁠 때는 촬영이 시작하고 오후 쯤에 가사가 올 때도 있고, 더더욱 나쁠 때는 아예 가사가 오지가 않아서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무난하게 넘어가고 싶어 하지만 아키모토 야스시는 아니다 싶으면 기한이고 뭐고 전부 뒤집어엎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촬영 중간에 가사를 수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싱글의 타이틀 곡과 커플링 곡을 정할 때는 500곡에서 1000곡 정도를 듣는다고 한다. 주로 회의가 끝난 새벽 1, 2시 쯤까지 작업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원고를 쓰기 때문에 6, 7시는 되어야 하루가 끝난다고 한다. 거의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본인은 '해야 할 때가 인생에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 필사적으로 할지, 일로서 이런 거겠지 하고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필사적으로 한다는 걸 추구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애들 프로듀스나 극장 공연 챙기지는 않고 뭐하는 짓이냐고 팬들에게 대차게 까이는 중. 또한 이 사람이 조직위 이사를 담당한 것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 AKB48을 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EXOCL의 출연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다. 아직까지는 일간지 레벨의 루머지만,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은 올림픽에 AKB를 내보낼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여담이지만 그가 AKB48를 만들고 나서 단발성애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에다 아츠코가 시작이었는데 일본에서 '오캇파 머리'라고 하는 마에다 아츠코의 초창기 머리스타일에 강하게 꽂혔다고 한다. SKE48의 센터 마츠이 쥬리나는 그다지 단발이 아니었으나 제2의 마에다라며 높이 샀던 NMB48 2기생 죠 에리코, 노기자카46의 이코마 리나, AKB48 센터를 하던 시절의 HKT48 미야와키 사쿠라, 케야키자카46의 히라테 유리나 등 그가 밀었던 센터 멤버에는 단발멤버가 많았다. NGT48 첫 오리지널곡의 센터가 타카쿠라 모에카가 된 것으로 그것은 확정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이 부르는 멤버의 나잇대와는 동떨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 10대 멤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48그룹 중에서는 대담하게 무릎에 앉아 입술로 초콜렛을 나눠먹는 노래 (口移しのチョコレート), 원나잇 (ダウンタウンホテル100号室), 원조교제 (Dear My Teacher, 制服が邪魔をする) 등과 같은 노래들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특히, Innocence가 수록된 手をつなぎながら 공연의 경우 가사가 너무 엄해서 나이가 어린 일부 멤버가 출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엔 2차원 아이돌 프로듀서를 맡는다.정보 2차원 아이돌 명칭은 22/7이다.#

2005년 시작된 AKB48가 16년차가 되면서 아키모토가 직접 관리하던 시절의 AKB의 멤버가 많이 졸업했다. 2017년 기준 아키모토 야스시의 작사가 필요한 그룹이 AKB48 , SKE48, NMB48, HKT48, NGT48, STU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까지 1년에만해도 가볍게 150곡 넘게 써야한다.

예전 AKB는 유닛이나 극장곡으로 AKB만으로 1년에 100개의 곡을 만들어줬다. AKB에 주로 힘을 쏟고 자매그룹에도 일정의 퀄리티를 유지해주었다. 하지만 최근 AKB에는 AKB에만 힘을 줄 수도 없고, 잘 나가는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도 유닛이나 솔로곡도 챙겨줘야한다. 그야말로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

그로 인해서 AKB에만 온전히 힘을 쏟지 못하고 있고, 최근 AKB 팬들에게는 AKB에 주는 곡이 너무 안 좋다는 욕을 먹고 있다. 아키모토가 기계가 아닌 이상 몇천 곡을 만들었으니 매너리즘에 빠질 만도 하다.[18]

2017년 9월 BSP 100년 인터뷰에서 "지금 현재 100개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서 잠은 3시간밖에 못 잔다"고 한다. 이게 큰 문제인 게 본인도 지쳐서 문제이지만, 48그룹 쪽의 악곡 퀄리티는 최근 4~5년 동안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데 본인이 독점하니 문제다.

2010년 AKB48의 대히트로 시작된 아키모토 야스시발 아이돌 붐도 2020년대 들어 무너지는 중이다. 이미 인기가 다 빠져버린 AKB48과 그 자매그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기자카46은 팬덤과 대중 인지도는 크지만 히트곡은 없는 신세를 8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케야키자카46은 초기의 역대급 기세에도 불구하고 고질적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개명 및 재데뷔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히나타자카46도 기존 팬덤을 기반으로 할 뿐 대중적인 인지도는 아직 모자라다. 성우 아이돌 미디어믹스 프로젝트인 22/7은 그야말로 망했으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한 아이돌 라스트 아이돌과 선발제 걸즈밴드 더 코인로커즈도 별 반응이 없이 흐지부지 해산하였다.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의 아이돌에 관한 흥미도 예전같지 않아 앞으로도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요원할 듯.

2022년 9월 메타버스 아이돌 그룹 런칭 계획을 발표했다. 관련 기사 이후 오디션을 통해 2023년 12월, 11인조 걸그룹 WHITE SCORPION이 데뷔하였다.

2023년 6월에는 노기자카46의 공식 라이벌을 표방한 23인조 걸그룹 내가 보고 싶었던 푸른 하늘이 데뷔하였다. 이로써 2023년에만 아키모토 야스시표 걸그룹만 두 팀이 데뷔하였다.

5.3. 기타

드라마 기획·극본·각본가로도 예전부터 활동해왔지만 19년에 당신 차례입니다가 좋은 반응을 얻은 이후로 20년부터 드라마 모드에 들어갔다고 할 정도로 드라마쪽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21년도도 마찬가지로 12월 14일 TVer랭킹 탑10에 3 작품[19]이 들어갈 정도로 드라마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듯싶다.

6. 논란

6.1. 작사 논란

질적 저하를 불러왔다는 그의 아이돌 제작,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 개인적 문제만 보자면, 주로 작사가로 일하면서 생기는 작사 내용 논란이 많은 편이었다.

우선 명색이 아이돌 그룹 키운다는 양반이 가사에 성적인 내용을 많이 집어넣어서 논란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85년에 발매된 오냥코클럽의 데뷔곡 'セーラー服を脱がさないで'는 대놓고 '성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며 일부 방송국에서 방송 제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 곡을 당시 미성년자 아이돌들이 불렀다. 다음 싱글인 およしになってねTEACHER도 가사 보면 성적이 떨어져 낙제 위기에 처한 여학생이 밝히는 선생님과 불륜을 시도한다(...)는 그야말로 쇼킹한 가사다.

IZ*ONE의 일본인 멤버 미야와키 사쿠라, 야부키 나코의 친정으로 잘 알려진 HKT48의 '아인슈타인보다 디애나 애그론'(アインシュタインよりディアナ・アグロン)이라는 곡 가사에 '여자애란 귀엽지 않으면 안 되지. 학창 시절은 바보인 게 좋아'(女の子は可愛くなきゃね 学生時代はおバカでいい), '여자는 바보라도 좋지만, 귀엽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거야?' 라는 등의 구절이 있어서 양국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쇄도하기도 했다. 정작 다이애나 애그론성소수자 운동, 참전 용사 지원 운동, 난민 지원 운동 등 사회 참여를 꾸준히 하고 있는 편이다. 아키모토가 이를 알았는지는 모르치만, 알고서 저런 내용의 가사에 이용했다면 애그론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20]

위의 두 그룹과 마찬가지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제작한 아이돌 그룹인 케야키자카46의 노래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어'(月曜日の朝、スカートを切られた)는 '불근신하다'며 동참을 모으는 인터넷 서명 운동이 일어나는 사태로까지 발전한 적이 있다.

이 곡은 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가사와 비슷한 일이 일본 뉴스에 보도된 바 있다. 서명을 호소한 여성은 실제로 교복 치마가 잘린 경험이 있다고 하며 '이 곡을 TV에서 소개하고 있을 때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 전차를 타는 것이 다시 두려웠습니다'라며 서명 사이트에서 불편한 심경을 토로해 8월 4일 기준으로 약 7,000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다만 이 노래 가사가 여성 비하를 옹호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가사를 잘 살펴보면 이 곡이 그러한 풍습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치마가 잘린 학생이 차별당하는 암담한 현실에 수긍하지 않고 반항한다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 출처.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어'는 케야키자카46의 데뷔곡 사일런트 마조리티프리퀄 (전편) 역할을 하고 있는 곡인데 두 곡들을 나란히 들으면 소외받는 학생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한테 반항한다는 내용임을 알아챌 수 있다.

7. 평가

7.1. 긍정적 평가

상업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키모토는 안티들도 인정하는 오타쿠 감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음반, 사진집, 콘서트 위주로만 돌아가던 일본 아이돌 시스템에 악수회, 총선거와 같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도입함으로서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21] 어쨌든 일본 아이돌 시장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오타쿠용 아이돌이다, 실력이 없다고 폄하되지만 애초에 AKB 사단이 일본 대중들에게 먹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여자아이돌 시장을 독과점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전성기의 AKB48사회 현상 수준의 인기를 누렸고[22], 현재도 노기자카46 등은 여전히 대중 영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결국 이런 아이돌들에게 관심을 준 건 일본인 본인들이고, 아키모토는 그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만들었을 뿐이라는 이야기. 상술로 욕도 많이 먹지만, 일본의 CD 시장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줄곧 하락세였고[23] 일본 가요계가 침체되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된 현상이다. AKB와 아키모토가 하나의 분기점이 된 것은 사실이고 어느 정도의 영향은 주었을 수 있지만 그 책임을 온전히 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본인이 의도한 건진 알 수 없으나, 성인이 훌쩍 지나면 아이돌을 은퇴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AKB48 이후에는 이러한 아이돌의 수명이 꽤 늘어났다. 당장 AKB48 최연장자였던 시노다 마리코만 봐도 전성기 시절 연령이 20대 중반, AKB 졸업도 한국식 나이 기준 28세로 한국 기준으로 봐도 꽤 높은 활동 연령대를 보였다.

한국과는 연이 멀었으나, 2018년 아키모토 사단과 함께한 한일 합작 프로젝트 그룹 IZ*ONE이 데뷔하면서 팬인 WIZ*ONE에게도 애증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래도 호평받은 부분은 2019년 여름 한일 무역 분쟁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와중에도 IZ*ONE은 샤베쿠리007 등 일본의 인기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 거의 빠지지 않고 출연했다는 것. 아무리 한일 합작 걸그룹이라지만 12명 중 한국인 멤버가 무려 9명이나 되는 그룹이 일본의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 거의 빠지지 않다시피하며 출연할 수 있던 건 아키모토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는 한국 팬들이 있었다. 한일감정 정도로 돈벌이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프로듀스 사태 여파로 IZ*ONE이 한국 방송이나 광고계에서 일시적으로 내쳐진 것과는 달리[24] 今夜、咲良の木の下で 등은 그대로 비워 둔 채 AKB 멤버들을 등장시켜 사쿠라와 IZ*ONE 멤버들이 돌아올 그 날만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수도 없이 던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키모토 야스시가 물밑에서 활동 재개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고, 그 의사를 AKB 멤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했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7.2. 부정적 평가

음악적 측면에선 애초에 가수나 작곡가 등 전문음악인 출신도 아니어서[25] 팬들조차 그렇게 퀄리티가 있는 프로듀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26] 팬들도 이러니 당연히 싫어하는 이들은 아예 '일본 가요계를 말아먹은 장본인'이라며 대놓고 손가락질 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 여성 아이돌 시장의 가장 큰 파이를 아키모토 사단이 장기간 섭렵하면서 일본 음악이 저질화되었다는 인식이 퍼져버린 21세기 들어서는 더 그렇다.

긍정적인 면이라는 J팝 시장에 아이돌 수명을 올렸다는 평도, 사실 총선발 선거에서 팬덤빨 덕분에 간신히 아이돌 활동을 유지하는거지 야스시가 의리로 챙기는 게 아니다. 특히 오오호리 메구미에 대한 비인격적 대우는 유명했는데, 오오호리 메구미는 당시 25세에 불과했지만 그룹내에서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아키모토는 그녀를 어떻게든 퇴출시키고 싶었는지 솔로 데뷔를 제안하면서 음반 1만장을 못 넘기면 강제 졸업이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이후엔 수치스런 의상을 입히거나 성적 공약, 막노동에 가까운 홍보를 그녀에게 직접 시키는 등 말이 많았다. 결국엔 어찌어찌해서 성적 목표인 1만장은 넘겼지만, 이때 오오호리는 어머니가 우울증에 걸리는 등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후 자서전에 자해 시도까지 했었다고 밝혔다.#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는 인식도 있다보니, 아키모토가 기존의 CD 시장을 자기 아이돌의 투표 놀이의 장으로 전락시킴으로서 기존의 오리콘 차트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켰고, 안 그래도 심한 일본의 음반 상술을 더 부추겼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일본의 싱글 음반차트는 그냥 아이돌 가수들의 팬덤 돈질 화력 뽐내기 말고는 의의를 찾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27] 게다가 어찌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2020년대 들어선 이전만큼의 프로듀싱력도 발휘하지 못해서 전성기 AKB48 수준의 후속 아이돌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즉, 상업력 원툴로 어떻게든 버텼는데 그 상업력에서도 밀리기 시작한 것.

한국과는 연이 멀었으나, 2018년 아키모토 사단과 함께한 한일 합작 프로젝트 그룹 IZ*ONE이 데뷔하면서 팬인 WIZ*ONE에게도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혹평받은 부분은 '好きと言わせたい (좋아한다고 말하게 하고 싶어)' 'Buenos Aires' , 'Vampire' 등 IZ*ONE의 일본 활동곡들이 전부 아키모토 야스시의 선택을 받은 노래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심할 정도로 AKB의 색이 진하게 묻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떼창도 벗어난 적이 없을뿐더러 랩까지 떼창을 시키는 터라(...) 당시 많은 한국 팬들은 아키모토가 일본 활동곡에서 손을 떼고 제대로 된 작곡가들이 일본 활동곡을 맡아주길 바랬다. 물론 2021년 아이즈원 활동이 종료되면서 과거의 일이 되긴 했다.

8. 주요 작품

9. 여담



[1] 현재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재학 중이다.[2]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아내 타카이 마미코가 감사를 맡고 있다.[3] 2016년쯤 아키모토가 요요기 학원에 이사장이 되었다고 기사가 떴다.[4]케야키자카46[5]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6] 이름의 한자인 秋元康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으로, 한국 한정 별명이다.[7] 오냥코클럽 멤버들이 부르던 방식이라고 알려졌다.[8] 일하지 않고 부정하게 번 돈[9] 일본의 My Way를 만들자는 발상으로 탄생한 이 곡은 지금도 많은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영원한 명곡으로 불리고 있다.[10] 이병헌의 일본 싱글곡 작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싱글곡 뮤직비디오에 데뷔전 마츠이 쥬리나가 출연하기도 하였다.#[11] 인터넷포털 라이브도어의 분식회계와 주가파동과 관련하여 호리에 타카후미 前사장이 체포된 사건. 사건이 일어나자 라이브도어의 주가는 폭락하였고 피해 주주는 2만 명이 넘었다.[12] 2010.12.19 O.A TV 도쿄『ソロモン流(솔로몬류)』인터뷰[13] 역대 1위가 아키모토 야스시(1억장), 2위가 아쿠 유(6,832만장), 3위가 마츠모토 타카시(4,985만장). #[14] 이 노래는 특히나 기념비적인 의의를 지니는데, 당시에 잘 다뤄지지 않았던 아이돌들의 이성문제(스캔들)를 다룬 첫 번째노래이다. 역시 대히트했다.[15] 사실 이런 류의 에피소드는 AKB 멤버들의 오디션 에피소드에서 꽤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시마자키 하루카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오디션 1차 심사에 합격하자 어머니께서 "너는 춤도 노래도 안되는데 합격할 리가 없다. 그런데 합격시키는 걸 보니 사기인거 같으니 2차 오디션 심사위원 중에 아키모토 야스시가 없으면 곧장 도망쳐라."라고 했다고. 다행히 아키모토가 심사위원석에 있었다고 한다[16] 자신들 말로는 이 최강자가 총감독보다 높은 지위라고 한다(...)[17] 레몬을 뒤집어 쓰고 했다.[18] 일각에서는 AKB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서 구린 곡을 주는 게 아니냐라는 의견도 있다.[19] 진범인 플래그, 이 첫사랑은 픽션입니다, 아닌 쪽의 그녀[20] 가사 중에 글리를 언급한 걸 보면 배우가 글리 드라마 속 인물이 순정적이고 애교 부리는 일과 상반된 캐릭터라서 비꼬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작품 속 역할이 아닌 실제 배우에게 저격하는 가사를 써서 문제를 일으켰다.[21] 미야와키 사쿠라가 결국 AKB 사단을 떠난 이유는 총선거 탓도 컸는데, 총선거 기간만 되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끼리도 표 경쟁해야 되는 시스템에 점차 질린 것으로 보인다. 데뷔때 한번 정도는 할 수도 있지만 명색이 팀인데 데뷔 이후에도 졸업때까지 이러는 건 10대 청소년도 많은 내부 구성원들에겐 상당히 스트레스일 순 있다.[22] 애초에 AKB 사단을 포함한 일본 다수 아이돌 컨셉은 가수라기보단 방송 예능인에 가깝고, 노래와 춤은 배우들이 콘서트 열때 팬들 위해 몇 곡 준비하듯 일종의 서비스 개념으로 준비하는 것에 가까울 지경이다. 그러니 떼창도 전혀 거리낌이 없고, 연습생 제도도 필요없는 것. 오디션 보고 합격하면 바로 일반인들도 무대에 서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비용도 당연히 줄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나잇대까지 한 팀에 포함되다보니 팀 컨트롤도 고참들에게 맡기면 그만이고, 그런 가족 비슷한 캐릭터 구성에 홀린 팬들도 끌어모으고, 그러다 총선거랍시고 화제성 끌어모아 또 선거권 미끼로 앨범몰이하고, 나이 차면 오덕용 그라비아 사진까지 찍게 하는 등 부수입도 있으니 그야말로 상업적으로는 입이 떡 벌어지는 셈. 악쿠마도 절레절레할 상술이다.[23]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다. 역으로 일본 CD 싱글 시장이 그렇게 오래 유지되었던 것이 갈라파고스화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24] 단적인 예시로 사건이 터지자 마자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겟잇뷰티 등 모든 방송이 이들의 출연 예정분을 전부 날려버렸고, 이 중 마리텔과 아이돌룸은 팬들과 엄청난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G마켓과 스쿨룩스 등도 바로 광고를 내린 뒤 새 모델로 급히 교체했다. 활동 재개 이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손을 내밀긴 했다.[25] 앞서 말했듯 그는 원래 음악과 연이 없었고, 방송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였다. 이와 비슷한 예로 본래 사업가 출신이였으나 이후 원디렉션, 피프스 하모니 프로듀서가 된 영국의 사이먼 코웰이 있다. 다만 코웰은 사업적인 면모도 있으나, 멤버들의 실력을 확인하거나 그룹의 노래 실력을 높여 주는 등 음악적인 면모에서도 제법 호평 받았다. 허나 아키모토는 오랫동안 음악을 했는데도 음악적인 면모가 여전히 부족하고 오로지 사업가적 기질만 커서 문제다.[26] 작사 부분만 한정하자면 호평하는 의견도 있지만, 상술되어있듯 논란이 되는 가사도 제법 썼던 탓에 호불호가 갈린다.[27] 사실 이건 한국이나 다른 외국도 극성 팬덤으로 가면 매한가지긴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객관적으로 봐도 퀄리티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K팝은 트렌드 안뒤쳐지려고 전세계 뒤져서 곡 찾는 성의라도 보인다.[28] 유명 싱어송라이터, 2014년 사망.[29] 근데 이건 여러 프로듀서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본인도 상대적으로 젊고 고생할 때 함께 큰 멤버들에 애정이 크지 성공 이후 들어와 나이차도 많이 나는 상황이면 서로 어색할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30] 참고로 2023년 기준 방시혁이 3조 8천억원, 박진영이 5천억원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들은 본인들이 이끄는 회사의 대주주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식 재산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경영자나 대주주가 아닌 단순 음악인으로 번 아키모토의 재산도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분 774회 참조. 링크[32] 물론 층쿠처럼 완전히 친한파인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한파 정도이다.[33] 이와 비슷하게 볼 여지도 있는게 중국의 많은 기업인들이 친중공적 포지션을 취하는거다. 기업인들 성향이 다 그렇다기보단 그냥 중국 공산당이 장기집권하니깐 사업상 불리한 점 없으라고 들러붙는 점도 있다는 것. 물론 속내는 본인들만 알겠고, 애초에 사업상 어쩌고 하는 것도 기회주의적 처신이라고 비판 받을 순 있지만, 많은 식구들이 딸린 입장에선 너무 티내듯 눈치없이 행동하지만 않는 이상 마냥 욕하기도 뭐한 포지션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