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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6:27:59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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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김 살해 및 로비 혐의로 구속 수감될 당시의 윤태식
1. 개요2. 사건의 전개3. 사건 이후
3.1. 피해자 유가족의 피해3.2. 윤태식의 활동과 윤태식 게이트의 서막3.3. 의혹 제기와 재조사3.4. 재조사의 영향
4. 대중매체에서5. 윤태식의 출소, 이후6. 외부 링크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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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태식[1]이 아내[2]를 살해하고 저지른 월북 미수 사건이자 거기서 비롯된 여러 사건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정권의 필요에 따라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다. 이는 결국(결과적으로는) 반공주의를 운운했던 당대 정권들(혹은 국가기관)이 가지고 있던 안보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피해자의 유족들[3]에게는 물론, 자국의 안보에도 엄청난 위해를 초래한 사건이다.

2. 사건의 전개

사건의 시작은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었다. 1987년 1월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나간 윤태식은 사업자금 문제로 아내 김옥분과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해 김옥분을 우발적으로 살해했다.

충청북도 충주의 1남 6녀의 가난한 농촌 집안에서 셋째이자 둘째 딸로 태어난 김옥분은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일당 540원인 버스 안내원을 시작으로 서울의 공장을 거쳐 미군 술집, 일본인 대상 유흥 접객원 등의 거친 일을 하다가 홍콩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영국령 홍콩으로 이민을 갔지만 곧 이혼하고 또 다른 홍콩 남자를 만났으나 오래 가지 못했는데 그러다 만난 사람이 윤태식이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탓에 겉만 번지르르한 젊은 남자가 감언이설로 다가서자 고마운 마음에 덜컥 결혼한 것이 화근이었다. 6세 연하인 윤태식은 자격지심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채 몇 달도 함께 살지 않은 1987년 1월 3일 아내를 살해하고 말았다.

후일이 두려워진 윤태식은 싱가포르로 날아가 북한 대사관에 망명(월북)을 신청했지만 아무리 체제경쟁이 심해서 누구라도 월북하면 선전용으로 써먹던 시절이라고는 해도 살인범을 선전용으로 써먹을 가치는 없으니 당연히 북한 대사관은 윤태식을 쫓아냈다.[4] 그러고 나서 찾아간 곳은 미국 대사관이었는데 당연히 여기서도 쫓겨났고 미국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 행동이 수상한 자가 왔다 갔음을 알려줬다. 결국 윤태식은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끌려왔는데 이 때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 아내가 간첩이었다는 시나리오를 지어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제21조 3항에는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체포할 때 반항 또는 교전상태하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살해하거나 자살하게 한 경우에는 체포한 경우에 준하여 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생포해야 하지만 죽여 놓고 반항 또는 교전상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인 셈이다. 윤태식은 영화광이었고 시나리오도 첩보영화들을 보고 고안한 것이었다.

그 시나리오는 "사실 아내는 '수지 김'이라는 북한간첩[5]으로, 빚쟁이들에게 잡혀 있다며 싱가포르로 자신을 불러내 북한 대사관으로 끌고 와 납치하려 했고[6] 자신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1987년 당시의 한국은 전두환 정권 타도로 시끄러웠고 제5공화국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윤태식의 시나리오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사건의 진실인 '살인+자진 월북(시도)' 사건을 도리어 '납북' 사건으로 조작하였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직접 나서서 대대적인 사건 조작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반공, 반공' 하면서 정작 진짜 월북하려던 인간은 봐주고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살인+월북 미수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원을 완전히 뒤바꾸는 그야말로 천륜을 거스르는 짓을 저지른 셈이다. 살인자와 안기부의 더러운 공모

윤태식은 안기부 해외 공작원들로부터 입국 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실제 입국할 때의 보도 자료를 보면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야 서울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울먹이는 어조로 답하고 심정을 묻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너무 무서워가지고요 말을 못하겠어요"라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인 홍콩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었다. 시체를 침대 밑에 숨겼는데 당연히 부패되어 냄새가 났고 옆집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시체를 발견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이나 제3자의 족적이나 지문, 모발 등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도, 피해자 부부의 행적과 지인에 관한 수사에서도 북한이나 정치, 사상 등과 관련된 그 어떤 자료/문서/기타 흔적은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대공사범(국가안보 관련 사범)'이라는 핑계로 홍콩 경찰의 정당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

한편 윤태식이 스스로 월북하려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곧바로 대공분실로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모든 사건의 전모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실토했다. 이 사건을 다룬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윤태식을 직접 패던 안기부 직원이 "이 새끼 이거 완전 개구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원칙대로라면 윤태식은 이 시점에서 살인 및 월북 시도 혐의로 감옥에 보내져야 했지만 그러면 간첩 (조작)사건 작전이 망쳐진다는 이유로 그냥 출국만 막고 살인범을 그냥 풀어주고 방치했다.

피해자인 김옥분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서 미인계를 쓴 희대의 여간첩이라고 왜곡 선전되었고 언론들은 안기부의 지시대로 온갖 소설을 휘갈겨 댔다. 한국 언론은 ‘여간첩 수지 김’ 이야기를 연일 대서특필했으며 심지어 당시 방영 중이던 KBS 드라마 <남십자성>은 중간에 ‘수지 김’이라는 여간첩 배역을 만들어 투입하기까지 했다. 물론 진실이 밝혀진 홍콩에서는 ‘수지 김은 간첩이 아니며 윤태식에 대한 납치 흔적은 없다’는 보도가 계속 나왔지만 보도통제가 살아 있고 인터넷도 없어서[7] 외신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보니 한국에서는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3. 사건 이후

3.1. 피해자 유가족의 피해

피해자 유가족들은 온 가족이 모두 가정 해체에 내몰렸으며 삶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간첩의 가족'이라며 세상의 멸시를 당했고 실제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가혹행위를 수반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김옥분의 셋째 여동생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뉴스를 보고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지금 전화하지 마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때 친정집에는 이미 헌병들이 찾아온 상황이었으며 헌병들은 김옥분의 엄마와 오빠를 끌고가서 '당신 딸이 간첩이었다는 걸 실토해라', '언제 어디서 공작금을 받았는지 실토하라'며 60세가 넘었던 노모를 군화로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 김옥분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코트가 공작금의 증거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둘째 여동생의 경우 본인은 물론 남편, 3살밖에 안 된 어린이였던 아들까지 함께 연행됐다. 고문을 당하는 사이 가족들조차도 안기부에게 세뇌당해 '정말 김옥분이 간첩이었나보다'하고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옥분의 죽음은 '간첩이 임무 실패로 숙청당했다카더라'며 대충 처리되어 버렸고 안기부는 가족들이 피해자의 시신을 인도받는 것은 물론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어 어디 묻혔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해했다.

안기부는 보안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일상적으로 김옥분의 유가족들을 감시했는데 그들이 다니는 곳에 틈만 나면 연락을 취해 행적을 캐물으면서 직장과 학교에 민폐를 끼쳤다. 당연하게도 유족들은 어딜 가든 눈총을 받게 되었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직업을 가지기가 어려웠고 결혼 생활도, 학교 생활도 힘들었으며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고 알고 지내던 사람과 연락이 다 끊어졌다. 안기부는 심지어 가족들끼리도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무리 '간첩 가족'이라도 '그 간첩 본인'이 이미 죽었다는데 죄 없는 가족들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실제로 하는 것이 당시의 안기부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참혹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일개 살인범을 반공투사로 포장해 선전하는 것도 모자라서 모든 잘못들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고 그 가족들의 인생마저 연쇄적으로 망쳐놓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것이다.

3.2. 윤태식의 활동과 윤태식 게이트의 서막

사건 이후 안기부 직원들과 친분을 맺었는지 윤태식을 감시만 했고 윤태식은 아내의 죽음과 관련해 구속 같은 건 받지도 않은 채 사기 행각을 일삼다가 형사 처벌을 받으면서도 안기부의 묵인과 도움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면서 살고 있었다.

윤태식은 자금을 마련해 영화 배급 사업에 손을 댔다가 쫄딱 망한 뒤 본인 회사의 직원들이나 주변 여자들을 통해 얻은 회사원 20명 등의 신분증, 재직증명서를 위조해 신용카드 수십 장을 발급받아 5개월 동안 수억 원을 사용하다가 1994년부터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8] 이 밖에도 중국산 위폐개수기를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속여 금융기관에 납품될 제품의 공급권을 주겠다며 돈을 빌려 가로채거나 중국 푸둥지구에 건설 사업을 따게 해 주겠다고 했다가 흐지부지되어 사기 혐의를 받는 등 사기 행각을 지속해 왔으며 적발되어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기했다. 

1996년 7월에 출소한 윤태식은 교도소 수감 시절 알게 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지문인식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를 소개받아 동업을 했는데 이 동료로부터 모 언론사 사장 부부를 소개받아 이들을 끌어들여 이전 동업자와 결별하고 1998년에 ‘패스21’이라는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패스21의 초기 자본은 이들 부부 중 웨딩, 가구 관련 사업을 하던 부인이 대부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두 아들도 패스21의 감사와 이사를 지내는 등 이들은 패스21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윤태식은 전술한 교도소 동료로부터 김모 전 국회의원을 소개받아 그를 통해 정관계 로비를 했다.

오랜 기자 생활로 정관계에 발이 넓었고 언론사 사장이었던 김모 사장과 전 국회의원의 비호를 통해 윤태식의 패스21은 재경부 장관을 지낸 인사를 대표이사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정통부 장관은 물론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기술 설명을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러한 로비와 더불어 90년대 후반에 불어닥쳤던 벤처 열풍으로 인해 패스21의 장외 주식은 15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윤태식은 장부상 수백억 원 대의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 김모 사장이 고등학교 동창인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에게 부탁해 윤태식이 국정원에서 기술시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윤태식은 주목받는 사업가로 아침 방송에도 출연했다.

3.3. 의혹 제기와 재조사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아무리 봐도 내세울 게 없던 윤태식이 갑작스럽게 벤처 사업가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2000년 주간동아에서 이정훈 기자가 처음으로 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이정훈 기자는 1994년 주간조선에 근무할 때 부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전달받은 뒤 당시 싱가포르 대사였던 이장춘 대사[9]와 국제전화로 통화를 하고 수지 김의 유족들을 만나면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단, 당시에는 아직 안기부의 힘이 막강했던지라 기사가 나가지 못했고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보도할 수 있었다.[10]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자세히 취재하여 방송했다.[11]


수지 김의 유족들은 간첩 누명 자체는 정권 차원에서 조작된 거니 당장 어찌할 수 없다 쳐도 최소한 윤태식의 살인 행위만큼은 사전에 알고 있었으니 감옥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가 윤태식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해 검찰에 수사 요청을 했지만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전해철[12]이 유족들의 법률대리인을 맡아 노력한 끝에 그 과정에 안기부의 압력과 방해 공작이 있다는 의혹 등 모든 진실이 결국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때 국정원과 윤태식, 그리고 정치권의 커넥션이 폭로되었다. 국정원은 윤태식을 철저하게 입단속시켰으며 1991년부터 출국을 금지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윤태식도 이를 이용해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아니라 벤처열풍을 틈 타 패스21 주식을 여러 국회의원들, 그리고 언론 각계 인사들에게 뿌려대며 로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13] 벤처 3대 게이트에 번외로 들어가기도 하는 '윤태식 게이트'라는 헬게이트를 소환했다. 이는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공소시효 만료를 50일 남겨두고 간신히 윤태식을 구속한 검찰은 홍콩 경찰들에게서 받은[14] 수사자료를 토대로 윤태식이 살인범이자 사기꾼이며 여기에 국가 기관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15] 그러나 이 사건에 관여한 공직자들은 한 집안 사람들 모두의 인생을 망쳐 놓고도 공소시효가 매우 짧은 현행법 때문에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크게 분노한 유족들은 국가와 윤태식, 그리고 장세동을 비롯한 과거 안기부 고위관계자들에게 손해배상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죄질이 너무 나쁜 데다 반성도 안 하고 있으니[16] 중형을 받아 마땅하다며 윤태식에게 살인죄로 징역 12년, 기타 비리로 징역 3년 6개월 등 징역 15년 6개월을 선고[17]했으며 국가가 유족들에게 42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했다.[18] 이는 당시 정부가 배상한 손해배상 사건 중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큰 금액이다. 국가도 장세동을 비롯한 안기부 간부들과 윤태식에게 구상권을 행사했고 결국 대법원은 장세동에게 9억, 윤태식에게 4억 5천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윤태식의 재산은 이미 공중분해되었고 장세동은 이미 시가 8억 원대의 빌라를 처분하는 등 재산을 빼돌린 뒤였으며 현재까지도 아직 남은 구상금 6억여원을 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수지 김 사건은 단순한 실수’라는 등 반성보다는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장세동 재산, 없나? 숨겼나? 물론 이 돈을 다 받았다고 해도 유족들이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고통이 위로될 리는 없을 것이며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유족들은 재조사 이후에야 피해자가 묻힌 곳을 홍콩 현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기부의 방해로 가족도 찾아갈 수 없다 보니 무연고자 시신이 되어버린 탓에 그사이 홍콩 당국에서는 피해자를 무연고 사망자 유해들을 한 곳에 모아진 '공묘(公墓)'로 처리해둔 상태였다. 내 가족의 유해가 변변한 비석 하나 없이, '몇 번 공묘'[19]라는 팻말만 꽂힌 초라한 흙더미에 누구인지도 모르는 다른 무연고자들과 함께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는 것을 본 유족들은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20][21] 결국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유해는 송환될 수 없었고, 이 공묘의 흙을 고향으로 가져와서 고인의 어머니의 묘지에 뿌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고 한다.

3.4. 재조사의 영향

이 사건으로 국정원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지나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던 인식이 다시 극심하게 나빠졌을 뿐 아니라 신뢰도가 바닥을 기면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처럼 북한 간첩이 저질렀다고 발표한 것들조차도 조작 아니었냐며 의심받는 등 궁지에 몰렸다. 858편 사건은 이 사건으로부터 10개월 뒤에 일어났는데, 이 사건에 대한 음모론이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수지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직후다. 동정할 가치조차 없는 철저한 자업자득이다.

결국 국정원은 2003년 8월 21일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안전기획부가 사건을 조작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며 사망한 김옥분과 유가족, 그리고 국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지만 이미 저지른 악행의 수위가 끔찍해도 너무나도 끔찍한 수준이었던 탓에 한 번 잃어버린 신뢰는 쉽게 돌이키기 힘들었다.

국가가 개입해서 부당하게 개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의 인생까지 망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가 고작 1~3년 정도밖에 안 되어 관련자 대부분을 형사기소하지 못해서 이들은 아무런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가가 저지른 반(反)인륜적 범죄에는 시효를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4. 대중매체에서

4.1. 남십자성

1987년 KBS 1TV에서 방영된 주간드라마 <남십자성>[22] 마지막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본을 조연출을 맡은 PD가 전달해서 안기부 정문 수위실에 놓고 가면 일일이 대본을 고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윤태식 역은 중견 탤런트 민욱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수지 김을 교사한 사람이 싱가폴 북한 책임자(문오장 분)로 묘사된다. 사건이 시끌시끌해지던 차에 2002년 1월 23일자 한겨레21에서 담당 연출자 류시형 PD, 조연출이던 김용규 PD, 출연자였던 배우 민욱을 인터뷰했는데 류 PD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자세한 상황은 오래 전이라 기억이 안 나나, 스토리 자체는 작가가 짠 걸로 알았다"는 식으로 밝혔으며 이미 기획이 완료된 상태로 원고를 쓰는 즉시 넘기면 촬영에 바로 돌입했기에 작가와 상의할 여유조차 못 갖고 그저 픽션이라고 생각하며 연출만 전담했다고 한다.

조연출이던 김 PD도 본 사건에 대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도 당시에는 말단 신분인지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으며, 원고 전달 과정에서 담당자 얼굴조차 못 봐서 정신적으로 모멸감을 느낀 데다 해외 로케 때마다 자신만 빼고 촬영을 나갔기에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라고 했다.

민욱은 윤태식 역할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작은 역할로 출연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23]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 방송에서 몇 번 극화되었는데 법정에서 재판이 이뤄진 사건들을 재연형식으로 다룬 MBC 교양프로 실화극장 죄와 벌에서 재판과정을 다룬 바 있다. 상기에 언급한 드라마나 이거나 '실화극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4.2. 제5공화국

안기부 요원 1(윤용현[24]): 정치적 망명? 하... 그건 그렇고 말야, 네 손으로 죽인 아내를 간첩으로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윤태식: 외국 첩보영화 본 것 중에서 대충 짜서 했습니다.

안기부 요원 2: (기막혀 하며) 이 새끼 완전 구만, 이거?
윤태식 역은 배우 신성원[25], 수지 김 역은 배우 김혜진이 연기했다.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처 고종사촌인 박철언이 이 사건을 알고 있던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박철언이 사실과 다르다며 고소하여 실제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26] 이에 따라 고소 이후에 케이블 채널에서 해당 사건을 다룬 <제5공화국> 36화가 방송될 때는 박철언과 노태우가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에서 얼굴과 자막(이름, 직위)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대사도 묵음 및 자막으로 대체하고 있다.[27] 유튜브 옛드 채널의 제5공화국 요약 영상 중 수지김 조작사건 편에도 박철언이 출연한 부분은 전부 다 편집됐다. 다만 Wavve에서는 그대로 서비스되고 있다.

수지 김이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윤태식을 안기부 요원들이 마구 때리면서 북한 대사관에 간 진짜 이유를 실토하라고 한다. 윤태식이 "북한으로 가려 했다 하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잖아요!"라고 외치자 안기부 요원은 "니가 말을 하든 안하든, 우린 너의 뼛속 깊은 곳까지 다 알고 있어 이 새끼야!"라고 받아치고 결국 윤태식은 "씨발, 다 안다면서 왜 자꾸 말 시키고 지랄이야!"라고 소리친다. 2009년 이전에는 방송 심의기준이 현재보다 관대한 편이었던지라 이런 강한 욕설도 방영될 수 있었다.[28]

MBC 드라마지만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자료화면으로 나온다. 사건 이후 수지 김(김옥분)의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를 전한 후 언급된다.

4.3. 조국과 민족

레진코믹스 조국과 민족에서 곁다리로 다루어진다. 소송 문제 때문인지 '윤태수'로 개명되었다.

4.4. 실화극장 죄와 벌

35회에서 다루었으며 실제 인물들의 이름이 개명 없이 그대로 나왔다.#

4.5. 브이아이피

장동건, 김명민, 박희순, 이종석이 출연한 범죄 액션 스릴러 영화로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다만 이 사건과 다른 점은 범인(이종석)이 진짜 북한 노동당 고위간부의 아들이라는 것과 정말로 사이코패스 범죄자라는 것이다.

범죄자가 탈북해 귀순하고도 남한에서도 똑같이 유부녀를 상대로 잔혹한 살인을 저질러 이를 체포하려는 경찰과 이를 이용하려는 국정원의 대립, 그리고 이 범인을 이용해 북한을 압박해보려는 CIA가 물고 물리는 첩보전을 하는 내용이 주요 스토리로 그려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 설정과 피해자 묘사, 선정적이고 잔혹한 연출 표현이 문제가 되어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다.

4.6.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SBS에서 2020년 9월 첫 정식 방송 1회로 다루어졌다. 스토리텔러들이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어서 이 사건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사건을 전체적으로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으며, 국가 권력이 한 개인과 가족에게 얼마나 불합리하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로 인해 한 개인의 명예와 가족이 얼마나 처참하게 박살났는지, 가해자들은 법적 책임도 지지 않고 일말의 반성과 사과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것이 알고싶다의 영상자료, 비밀 전문의 문서자료, 유족의 인터뷰와 영상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해당 방송에서는 윤태식의 이름이 윤씨로 방송되었으며 모자이크 처리되었다.[29] 수지 김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 <방영 내역> - 펼치기 · 접기 ]
1. 사지에서 돌아온 남자
2. 기묘한 죽음
3. 홍콩 1986
4. 비극의 시작
5. 유인 공작
6. 여간첩 수지 김
7. 14년 후, 끝나지 않은 이야기
8. 살인자의 거짓말
9. 용서받지 못할 거짓말
10. 각하의 심기를 위하여
11. 마카로니 대책
12. 죄와 벌
13. 내 이름은 김옥분

4.7. 이제 만나러 갑니다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 510회(2021년 9월 26일 방송)에서 해당 사건을 다루었다. 1987년 당시 윤 씨의 공항 기자회견 영상부터 시작해 안기부 공문 등 여러 자료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하나씩 밝혀 가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동아일보 계열 방송사이기도 하고 자세한 설명을 위해 이 사건을 최초 보도했던 동아일보 이정훈 기자가 출연했다.

5. 윤태식의 출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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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월간조선 인터뷰 중에서

윤태식의 최종 형량은 15년 6개월로, 2001년 10월 구속기소 이후 2017년 4월 27일 만기출소했는데 출소 후 Yoonam(윤엠)이라는 보안 업체를 설립했다. 윤엠은 블록체인 기반으로 보안, 인증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30]

파이낸셜데일리[31]월간조선(2018년 2월호)에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32]

이 인터뷰들에서 윤태식은 수지 김 사건 이전 홍콩에서 영화 비디오 판권 장사를 통해 약 50억 원을 벌어들였다거나 패스21 창업에서 언론사 사장 부부는 오히려 자신의 덕을 본 것이라는 다소 믿기 어려운 주장을 했으며 본인이 수감 생활 중 출원을 진행한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 특허를 통해 훔쳐갈 수 없는 전자화폐를 만들었다며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윤태식은 ‘해킹과 도용의 위험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실시간 본인 인증 수단으로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전혀 필요없는 편리함과 보안까지 해결한 세계 유일의 본인 인증 기술’을 개발하였다며 보안 사업을 진행 중이다. 

윤엠을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아직 뚜렷한 실체를 보이지 못한 기업과 기술을 두고 일부 언론들이 "유니콘 보안", "세계적 신기술"이라고 부르는 걸 발견할 수 있는데 아직까지 윤엠의 분명한 사업적인 성과나 기술의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고[33] 대부분의 기사는 다른 기업과 MOU를 맺었다거나 개발에 "착수"했다는 내용이다. 기업 간의 MOU(양해각서)는 통상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려우며 흐지부지 무산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시 말해 MOU만으로 해당 회사가 가치나 역량을 증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윤엠은 아직 기술/제품을 상용화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윤태식의 인터뷰에 따르면 프로토 타입만 있고 내년 상반기 필드테스트를 거친 후 순차적으로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결국 윤엠의 사업적 역량과 기술의 가치는 아직 시장에서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윤엠의 재무 지표는 여기서 확인이 가능한데 2019년 기준으로 자본금 4억 원, 매출액 1억 6,468만 원, 영업 손실 882만 원, 당기 순이익 363만 원으로 규모 있는 R&D가 진행되고 있다고 추정하기는 어렵다.[34]

이처럼 일부 언론은 뚜렷한 근거나 검증 없이 윤엠을 (윤태식이 주장하는 그대로) "혁신적인 암호 체계 기술을 가진 대단한 기업"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언론 기사만을 근거로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언론 기사들이 전형적인 기업 가치 부풀리기를 위한 광고 기사인지 아니면 윤엠이 정말로 대단한 기술력과 가능성을 지닌 보안 기업일지는 이 문서를 읽는 각자가 판단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만 윤태식과 윤엠의 행보를 보면 정확한 기술력을 검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특허 출원에 유독 신경을 쓰고 정계 로비와 언론 홍보를 통해 펀딩 유치와 주가 상승을 노렸던 패스21의 잔상이 느껴지는데 이게 정말 우연이기만 할까? 관련 기사

2023년 7월 기준으로 윤엠 등 윤태식이 운영하던 업체들은 채무불이행 등록된 상태다. 또한 업체들의 도메인도 만료되었다.

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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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법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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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분류:수사기관의 사건 사고 / 분류:징계 관련 사건 사고 }}}}}}}}}




[1] 泰植, 1958 ~[2] 실제 이름인 김옥분(金玉分, 1952 ~ 1987)보다 직업상인 이유로 쓰인 이름인 수지 김으로 알려졌다.[3] 윤태식을 형사고발한 후 석연치 않게 목숨을 잃은 유족도 있다. 말 그대로 삶이 파괴된 것이다.[4] 당장 머나먼 훗날인 2023년에도 2차례의 폭행 혐의 + 아동 포르노 제작 시도로 인한 처벌이 두려워 월북한 미군 이등병 트래비스 킹을 월북한 지 2개월 만에 쫓아낸 나라가 북한인데 하물며 부부싸움 중 아내를 살해한 윤태식의 월북을 받아들이란 것은 그 북한에게 있어서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윤태식이 트래비스 킹의 열화판이자 대선배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다못해 그 트래비스 킹조차 살인을 저지르거나 자신의 범죄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지는 않았고 북한도 트래비스 킹을 2개월 동안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기부는 그런 트래비스 킹보다도 못한 자를 철저히 비호해 줬다.[5] '수지 김'이라는 가명을 실제로 쓰긴 했으나 해외 이곳저곳을 왔다갔다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6] 정확히는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웬 여자가 나와서 마누라 만나고 싶으면 북한 가야 된다고 했단다.[7] 당시 PC통신 서비스가 막 도입되고는 있었지만 시험서비스였고 컴퓨터 자체가 일부 사업장이나 학교에서 사무용품으로 쓰이거나 잘사는 사람들이 애들 교육용(혹은 게임용)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8] 이마저도 윤태식은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감옥에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9] 이 때는 필리핀으로 전근을 간 상태였다.[10] 이것으로 2001년 한국기자상 취재보도부문을 수상했다. 본상은 한국일보의 이용호 게이트 특종.[11] 최초 방송은 2000년 2월이었지만 국정원의 방해에 윤태식 본인의 방송중지 가처분 신청까지 겹쳐 결국 상당수의 장면을 자르고 윤태식의 이름도 문○○이라는 익명으로 처리했다. 검찰의 재수사에 의해 윤태식이 구속된 후인 2001년 11월에 와서야 완전판을 방송할 수 있었다.[12]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자 제3대 행정안전부장관이었다.[13] 윤태식 게이트가 나왔을 때 일부 언론에서 이상할 정도로 물흐리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4] 이는 한국 사법사상 최초 국제공조 사례다.[15] 이때 윤태식은 자신이 김옥분을 우발적으로 죽였다며 폭행치사를 주장했는데 폭행치사는 공소시효가 7년이라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살인으로 기소했기 때문에 윤태식의 주장을 무시했다.[16] 본인은 '자신은 오래전에 뉘우치고 후회했으며 진실을 밝히고 유가족들에게 사과하려 했으나 당시 안기부가 막았고 수지 김의 오빠와 만나 모든 걸 털어놓으려 했는데 도청당해서 도중에 안기부에게 납치되어서 고문까지 받았고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일 뿐 근거는 없다. 윤태식은 2003년 5월 6일 법정에 전문 감정인으로 출석해 홍콩 경찰이 보내 온 부검 보고서에 대한 인정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유죄 판결이 나는 것에 기여한 법의학자 이정빈 서울대 교수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으며 2012년에도 이정빈 교수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7] 죄질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형량이 낮아 유가족 및 네티즌들이 강하게 비판했다.[18] 당시 국가배상 청구 시효는 지나 버렸지만 유족들의 변호인을 맡은 전해철 변호사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안기부가 스스로 저지른 범죄에 소멸시효를 대는 것은 신의 성실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싸워 이겼다. 이 판결로 인해 이후 공안사건의 무고한 피해자들도 국가배상금을 받게 되었다.[19] 번호는 1992로 나왔는데, 이는 이 무덤이 1992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20] 당시 방영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취재진과 함께 묘지를 찾은 피해자의 여동생이 언니의 묘소 앞에 오열하면서 원망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묘소 방문 당시의 모습은 아래 꼬꼬무 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21] 피해자의 여동생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언니가 묻혀 있는 묘지에만 풀이 안났다"라고 밝혔다.[22] 드라마 자체는 1986년부터 방영했다.[23] 사실 해당 드라마에서 이 부분은 급조한 티가 난다. 김동현 작가 자신은 북한의 고급정보를 얻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밝힌 바에 의하면 안기부에서 주는 대로 받아 썼다고 한다. 중앙정보부 출신의 방송작가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김 작가는 반공드라마 전문 작가로, 이 작품을 끝으로 방송작가계에서 소외됐고 1990년대 들어 회비 미납으로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제명되었으며, 은둔하다가 2001년 사망한다.[24] 초창기 김재규를 고문하던 보안사 신동기 준위로도 등장한다. 윤용현은 이후 SBS의 자이언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을 연기하였다.[25] 아역배우 출신. 신성균으로 개명[26] 관련 고소가 3건이 있었는데 그 중 승소한 판례였다.[27] 노태우와 박철언의 대화 장면에서는 박철언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여간첩 마타 하리를 예로 들면서 "여간첩 사건은 여론의 이목을 끌기에 좋은 소재이므로, 안기부가 어떻게든 이슈화하려 들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노태우는 겉으로는 "생사람 잡는 일인데, 이대로 해도 되겠나?"라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지만 본심은 장세동이 차기 대권 경쟁에서 전두환의 신임을 더 얻게 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28] 이 사건을 다루기 전에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화에서는 "공수새끼들 쳐들어온다", "대가리들 박아 새끼들아", 삼청교육대를 다룬 화에서는 "여러분들은 개새끼들이다", "지랄하네!"같은 욕설이 나왔다.[29] 생존 중인 인물이라 명예훼손 방지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30] 가습기로 유명한 윤남텍(Youn Nam Tech)과는 전혀 다른 회사다.[31] 파이낸셜뉴스, 파이낸셜 타임즈와는 전혀 다른 회사다. 2017년 12월 18일자 기사[32] 월간조선은 지속적으로 윤태식의 회사인 윤엠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매체 중 하나다. 링크[33] 키프리스에서 윤태식이 출원한 관련 특허 4가지를 찾아볼 수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특허라고 해서 반드시 검증되었다거나 가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해당 특허 내용들이 기술적으로 현실성이 있는지와 경제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상용화되어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34] 연구비는 통상 비용으로 인식되며 개발비는 회계상 무형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으나 조건이 상당히 엄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