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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6:06:53

이연걸

Jet Li에서 넘어옴
<colcolor=#fff> 이연걸의 주요 수상 이력
{{{#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홍콩 금상장 시상식
파일:Hong_Kong_Film_Award_Trophy.png
남우주연상
제26회
(2007년)
제27회
(2008년)
제28회
(2009년)
유청운
(아요성명)
이연걸
(명장)
장가휘
(비스트스토커)

}}}}}} ||
<colbgcolor=#202023><colcolor=#fff> 이연걸
李連杰|Jet Li
파일:05106c34fad4422ba8917c05b311ed01.jpg
본명 Jet Li (제트 리)
李連杰 (리롄제, Lǐ Liánjié)[1]
출생 1963년 4월 26일 ([age(1963-04-26)]세)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2]
국적
[[싱가포르|]][[틀:국기|]][[틀:국기|]][3]
신체 166cm[4], AB형
직업 영화배우, 무술가
언어 표준 중국어, 광동어[5], 영어
종교 티베트 불교
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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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자권
팔극권
우슈 장권
금나술
솔각
진식 태극권
학력 베이징 스차하이 체육학교 (수석졸업)
부모 부 리칭취안(1919 ~ 1965)
모 장펑란(1922 ~ 2002)
배우자 황추연(黄秋燕)(1987 결혼 ~ 1991 이혼)
이지(利智)(1999 결혼 ~ 현재)
자녀 슬하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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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李思)(1988~)(황추연 소생)
이태밀(1989~) (황추연 소생)
제인 리(2000~)(이지 소생)
제이다 리(2003~)(이지 소생)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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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
황비홍 시리즈
방세옥 시리즈
정무영웅
데뷔 1979년 영화 <소림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시나 웨이보 아이콘.svg

1. 개요2. 약력
2.1. 데뷔전: 엘리트 무술가2.2. 1980년대 초반 데뷔2.3. 1980년대 말: 거듭된 실패2.4. 1990년대 초: 서극과의 만남 및 배우로 성공2.5. 2000년대 초: 월드 액션 스타로의 도약2.6. 2010년대 이후: 액션배우에서 자선가로
3. 수련 무술4. 영화 목록5. 영화 리뷰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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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가포르 국적의 중국계 액션 배우.

원래 중국 본토 출신으로 중국 국적이었으나 1989년 중국을 떠나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이후에 다시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단독 싱가포르 국적이다.[6] 이연걸 입장에서는 200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에서만 거주하고 중국이 주 활동무대인데 굳이 세금을 더 내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약력

2.1. 데뷔전: 엘리트 무술가

1963년 베이징의 노동자 가정에서 3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2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197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후 베이징에서 이름난 무술가였던 오빈(吳彬)의 눈에 띄어 베이징 스차하이체육운동학교(北京市什刹海体育运动学校)에 전학하게 된다.

12세 이후 우슈 선수로 뛰며 대회에서 우승, 이후 5년 연속 우승[7]을 이룬다. 워낙 실력이 뛰어나 베이징 우슈 시범단에 소속되어 중국에서 열리던 국제대회 개막식에서 시연을 하기도 하고,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직접 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무협소설에 익숙한 팬들은 그가 무림에서 무술을 단련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이미 무림 같은 곳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모두 없어지고, 제도권의 체육학교 및 무술학교로 흡수되었다. 이연걸이 나온 베이징 스차하이체육운동학교는 한국으로 치면 체육영재학교 같은 곳이다.[8]

일단 당시 중국 무술 전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사사로운 무술 전수는 금지되고, 오직 정부 통제하의 무술학교나 체육학교에서만 무술을 익힐 수 있었다. 1982년이 되어서야 이 금지는 풀리고, 이후에 무술전수나 무술학원 설립이 자유화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정부에 의해 무술전수가 금지되고 무림이 없어졌다고 해서 (여기에 문화대혁명의 영향까지 더해서) 중국무술이 단절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국공내전 이후 각종 유파가 통합되어 무술이 표준화, 제도화되어 체육학교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무술 전수의 경로를 정부 통제하에 둔 이유는 이념상의 문제가 아니라 치안의 문제 때문이다. 이 당시 중국의 무림이나 도장은 거의 조폭급의 행태를 보였다. 20세기 중반 중화인민공화국 집권기의 엽문의 일생을 다룬 엽문 2일대종사를 보면 이들의 조폭이나 다름 없는 행태를 볼 수 있다. 원래 이런 무술 전수 금지는 공산당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 시기부터이다. 소수인 만주족이 한족이 무술을 익혀 반란세력이 될까 두려워하여, 사사로운 무술전수를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아편전쟁 이후 청조의 힘이 약화되면서 이런 금지령도 유명무실되었다. 그리하여 대륙에 우후죽순처럼 무림 및 유협집단이 생겨났다.

이어 모택동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거의 100여년간 중국 전토를 이런 집단이 할거하면서 공식적인 정부 이외에 또다른 정부노릇을 했다. 이렇게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무림 같은 곳은 쉽게 유협집단, 즉 우리말로 하면 조폭의 소굴, 더 나아가 반란 세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로집권한 공산당 정부가 철저히 규제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제도권으로 편입되지 않은 무술들이 소실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소실된 것은 아니며, 그 제도권에서 키워진 무술가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권 무술가들이 투로나 동작만 강조하여 수련을 쌓다보니, 실전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MMA와 같이 전문적으로 실전만 단련한 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당연히 그럴지 몰라도, 이렇게 동작 및 투로만을 수련한 무술가들조차도 일반인에 비해서는 넘사벽의 격투기 능력을 가진다. 게다가 그런 투로를 연습한다는 무술인들조차도 실전을 겸비하기 위해 격투기인 우슈 산타를 익히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다만 영화 출연에는 뽀대나는 동작을 보여주는 것은 투로 위주의 전통권이 더 낫기도 하기 때문에 이연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 무술은 문화대혁명보다는 무림이 한족부흥을 내세운 반란세력이 될 것을 우려한 청조 때 대부분 유실되거나 실전되었다.[9] 신해혁명 이전에 공산당과 무술단체들은 청조라는 공통된 적이 있어서 크게 대립하지 않았지만, 청조가 무너지고 나니 공산당은 자신들이 얻은 대륙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무술단체들을 규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원장의 난이 진행된 과정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이연걸의 얘기로 돌아와서, 이연걸은 우슈 대회에서 투로만 우승한 게 아닌 격투부문도 3연속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전 능력도 겸비했다. 우슈를 하는 이들 가운데서 산타를 익히는 이들도 의외로 많으며, 동문인 견자단 역시 산타를 익혔다. 의외로 중국정부 내에서 강건한 기풍을 장려하기 위해 무술인들을 많이 양성했는데, 이연걸과 견자단 외에도 남권 챔피언이었던 구건국 등이 있다.[10]

우리나라로 치면 김연아차범근과 같이 실제로 워낙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5인에게 일일이 그들의 비전을 전수받기도 했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게 견자단의 스승이기도 한 오빈 사부 밑에서 이연걸이 동문수학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11]

이연걸은 대륙의 엘리트 체육학교에서 우슈 장권을 비롯해 번자권, 진식태극권, 금나술, 솔각 그리고 팔극권사 왕식권으로 부터 팔극권을 배우는 등 우슈와 다양한 전통권을 체계적으로 배웠으며 투로 및 실전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무도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

1979년 전국운동회(중국판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딴 이후 무술계를 은퇴한다.

2.2. 1980년대 초반 데뷔

파일:jetli1986.jpg
소림사 시절의 이연걸 이연걸의 영화 《소림사》 출연시의 무술 시범 모습

1982년 제작된 중국・홍콩 영화 《소림사》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당시 기지개를 펴던 대륙-홍콩 합작 영화로 대륙이 무대와 배우를 제공하고 홍콩의 스탭이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소림사 시리즈도 배우들은 모두 대륙인이지만, 제작사는 홍콩의 대 스튜디오인 쇼브라더스였고, 감독 및 제작자도 홍콩인이었다. 홍콩에서 1982년 1월21일 개봉 했으며 한국에서는 1983년 신정특선프로로서 서울 명보극장, 부산 동명극장, 대구 대구극장, 광주 제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 당시 죽의 장막 뒤에 가려 있던 실제 소림사를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 그 이전만해도 홍콩영화는 북중국을 배경으로 한 사찰신은 한국에서 로케를 할 정도였는데, 이 작품은 실제 소림사를 배경으로 찍었기 때문에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1983년 《소림사 2》(원제 소림소자)에 출연했고, 1986년 《소림사 3》(원제 남북소림)가 나온다. 이 소림사 3은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그동안 베일에 가렸던 만리장성이 나온다고 화제가 되었다.

이 소림사 시리즈는 연작 같지만 배경이 소림사이고 이연걸이 주연, 호견강(胡堅强)[12]이 동료, 우해(于海)[13]가 사부로 나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연관성도 없다. 이연걸이 맡은 주인공의 이름도 1, 2, 3편 모두 모두 각원(覺遠), 삼룡(三龍), 지명(智明)으로 다 다르다. 세 작품을 별개 작품으로 보는게 속편하다.

소림사 시리즈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플롯은 너무 단순했다. 이연걸의 화려한 액션[14] 뿐만 아니라, 배경으로 진짜 소림사와 만리장성, 자금성이 나오고 수많은 엑스트라급 무술연기자의 집단 전투신 등,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들보다 볼거리는 훨씬 풍부했지만 "권선징악 및 복수"라는 무협영화의 클리셰를 그대로 반복했기 때문에 영화사적으로 이연걸의 데뷔작이라는 것 이외에는 크게 의미를 두기 어렵다. 그만큼 세 시리즈에서 이연걸의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한편《소림사 3》를 감독한 유가량(1934-2013)은 홍콩의 유명감독인데 그의 아버지 유심은 유명한 황비홍의 제자인 임세영의 제자였고 동생인 유가휘도《소림 36방》의 주연으로 활약 하는 등 무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수많은 액션영화에서 무술을 지도하거나 직접 출연해서 뛰어난 무술실력을 선보이기도 하며 홍콩영화계에서 무술감독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유가량이 무술지도를 맡고 직접 출연까지 한 마지막 작품은 서극의 칠검(2007)이었다.

2.3. 1980년대 말: 거듭된 실패

소림사 시리즈로 이름이 알려진 이연걸은 영화감독으로도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86년에 영화《중화영웅》(中華英雄)에서 주인공과 감독을 겸직하는 무리수를 던졌다.

이 영화는 중일전쟁후 막노동으로 연명하던 이연걸이 클럽의 불법 시합에 올라 싸운다는 내용인데 형편없는 스토리는 그렇다쳐도 액션장면이라도 멋졌으면 좋았을텐데 이연걸 답지 않은 어정쩡한 격투씬들로 인해 결국 영화는 망했다. 이때의 실패가 뼈 아팠는지 이연걸은 두 번 다시 영화감독을 하지 않았다.

1988년에는 주성치와 공동출연한《용재천애》(龍在天涯)를 찍었지만 다시 망했다. 이 영화에서 미스 홍콩 출신 여배우 리지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이연걸은 무술학교 동문이자 아내였던 황추연[15]에게 "당신에게 느낀 건 사랑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연민이었다"고 고백했고 그 얘기를 들은 황추연은 이혼을 해주었다. 황추연은 이연걸과 이혼 후 영화계를 은퇴했고, 중국웹의 썰에 의하면 이후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용실 사업을 하던 중 재혼을 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한국 화교 출신의 중국계 미국인 왕모씨라고 한다.

1989년 이연걸은 중국을 무단으로 이탈하였고, 서방에서는 이를 망명으로 보도했다. 천안문 사태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본인은 "좀 더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금전문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 초반의 중국은 원리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지배하던 나라였고, 소림사 시리즈를 찍을 때 배우들은 기본적인 숙식제공에 일당으로 하루 고작 1위안 정도의 푼돈을 받았고, 홍콩영화사와 합작으로 얻은 많은 수익들도 본인이 소속된 국영영화사가 모조리 가져갔다.[16]

만약 이연걸이 이때 홍콩에서 활동했었다면 수백만 위안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국영 영화사에 소속된 배우였기에 푼돈 정도만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을 무단이탈해 홍콩에 갔던 것이다. 1990년대 초 이연걸이 중국에 영화촬영차 다시 입국했을 때 체포되었다는 보도도 나왔지만 어떻게 잘 무마한 듯 하며 중국 당국으로부터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해도 중화권에서 조금 이름이 알려진 배우였을 뿐 월드 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서도 소림사 시리즈가 1, 2, 3편 다 극장개봉했으며 중고생 단체관람이 많아 1편의 경우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2, 3편의 경우 그냥저냥한 수준의 흥행성적을 내면서 더욱 이름이 없었다.

1989년에 중국 이탈 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단신 처리되었을 정도로 굴욕을 당했다. 당시 홍콩 영화의 가장 큰 고객이 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연걸은 성룡이나 주윤발이 중심이 되어 한국에서 분 홍콩 웨이브와는 무관했으며,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도 거의 없었다.

한편 이연걸이 한국에서 불법에 귀의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어릴때 불교가정에서 자랐으나, 본인은 한동안 배우를 하면서 너무 부귀영화만 쫓다가 무상함을 깨닫고 1997년부터 다시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언론에 나온 이연걸의 불교 귀의 경위

2.4. 1990년대 초: 서극과의 만남 및 배우로 성공

그러다가 1991년 홍콩의 명제작자인 서극과 정소동을 만나며 재기한다. 이후로 서극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게 되는데, 서극이 제작과 감독을 겸직한 《황비홍》이 히트를 치며 이연걸은 다시 한 번 흥행아이콘으로 떠오른다. 이연걸의 외모나 연기가 황비홍이라는 캐릭터속에 너무나 잘 녹아들었으며 황비홍 1편과 2편은 그를 중화권 액션스타로 만들어주는데 모자람이 없었다.[17]

서극과 정소동은 거칠고 날렵한 액션만을 구사하던 이연걸을 화려하고 우아한 동작을 구사하는 무협소설속 무림고수의 이미지로 재탄생시켰다. 때마침 김용과 고룡등의 '신무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홍콩 무협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이 무렵부터 이연걸의 인지도가 올라가며, 국내에서도 성룡의 인기를 서서히 따라잡게 된다.

이소룡이 길거리 싸움을 보는 듯한 액션을, 성룡이 코믹하고 기발한 액션을 선보였다면, 이연걸은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던 무공의 초식들을 멋지게 시전하는 무림고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이연걸은 배우 이전에 어린 시절부터 배운 전통무술의 동작들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무술의 예술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이보다 완벽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18]

이후 서극과 정소동이 제작한《동방불패》로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왕정 감독의 소림오조에서는 냉정한 무사역할을 잘 소화해 냈으며, 원규 감독의 코믹액션 방세옥 시리즈, 정무문, 태극권 등과 현대 액션물인《보디가드》등으로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와 같은 연속적인 성공으로 이연걸은 홍콩 영화계에서 이소룡과 성룡의 계보를 잇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액션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다만 이 당시 매년 2~3편 이상의 다작을 했고 과격한 액션장면이 많은 작품들에 연속적으로 캐스팅되어 활동하다 보니 몸이 성할 날이 없었고 훗날 신체적으로 부상후유증을 겪게 된다. 황비홍 1편에서는 찻집에서 사하파 악당들과 싸우는 장면을 찍다가 큰 부상을 당했고, 정소동 감독의 모험왕을 찍을 때는 발목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인력풀이 비교적 좁고 위험천만한 액션장면들이 난무하는 홍콩 영화계의 특성상 스타급 배우라도 쉬지 않고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다보니 부상후유증이 심한 편이다. 이런 면에서 데뷔 이후 꾸준한 몸 관리로 최상의 몸상태를 유지하며 활동했던 견자단 같은 경우는 홍콩 영화계 내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홍콩은 아니지만 역시 날렵하고 우아한 액션으로 이름난 여배우 유역비도 시대극에 출연하면서 잦은 와이어 연기로 인해 만성적인 요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반은 홍콩영화의 전반적인 침체기로 성룡과 주윤발로 대표되는 기존 배우들은 침체기에 있었지만 이연걸은 그 와중에도 홍콩 및 중화권의 확고한 액션스타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밑천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2.5. 2000년대 초: 월드 액션 스타로의 도약

1998년 《리썰 웨폰 4》에 캐스팅 되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하지만 악역으로 허무하게 죽는 배역이라 아시아 팬들은 무척 불쾌해했다. 이때는 영어 구사 능력이 딸렸는지 거의 중국어로만 대사를 했다.[19]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답게 압도적인 무술 실력으로 주인공들을 흠씬 두들겨 패지만 어이없게 AK-47에 벌집이 된다. 마지막에는 철근에 가슴이 꿰뚫린채로 수장된다.

그러다가 2000년에 주인공으로 나온 《로미오 머스트 다이》가 대박이 난다. 2,500만불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9,100만불의 수익을 냈는데 미국계 동양인이 아닌 중국 본토 출신의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 작품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얻은 이연걸은 할리우드에 안착하게 된다.

미이라 3: 황제의 무덤》이나 《더 원》 같은 범작영화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후로 《익스펜더블》 시리즈 같은 액션영화들에 꾸준히 출연했다.

이외에도 홍콩영화 대신 중화권 영화의 맹주자리를 차지한 중국영화에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장이머우 감독과 작업한 영웅(2002) 같은 경우는 화려한 액션이나 미장센은 볼만했지만, 주제면에서는 진시황을 미화하는 메시지가 강해 서방평론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2.6. 2010년대 이후: 액션배우에서 자선가로

다만 2010년대 들어서는 나이와 그동안의 부상 후유증 때문인지 액션강도는 낮아졌다. 2020년작 뮬란에서는 황제 배역을 맡았지만 액션장면은 딱 한번 나오고 출연하는 장면들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있거나 묶여있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2007년부터 "일기금(壹基金 / One Foundation)"을 설립하여 자선활동을 진행하고 있고, 해당 재단에 10086위안(당시 한화 약 1600만 원)을 기부한 박해진에게 감사패를 증정하기도 했다. #

3. 수련 무술

이연걸이 우슈 챔피언의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슈 외에는 그가 어떤 무술을 배웠는지 잘 모른다. 물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는 체육학교에서 우슈와 다양한 무술을 배웠다. 또한 ‘이연걸은 소림사 출신이며 소림무술을 배웠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그는 영화 ‘소림사’에 출연한 것이지 실제 소림사 출신은 아니다.

4. 영화 목록

※ 출처 - Daum 영화.
1982 소림사
1983년 소림소자(소림사 2)
1986년 남북소림(소림사 3), 중화영웅
1988년 용재천애
1989년 용행천하
1991년 황비홍
1992년 동방불패, 방세옥, 황비홍 2
1993년 의천도룡기, 황비홍 3, 태극권
1994년 소림 쿵후, 정무문, 보디가드, 소림오조, 황비홍 철계투오공
1995년 (이연걸의) 영웅, 모험왕, 탈출
1996년 흑협
1997년 황비홍 서역웅사 - 황비홍 6
1998년 히트맨, 리썰 웨폰 4
2000년 로미오 머스트 다이 - 한 싱
2001년 키스 오브 드래곤 - 류 건(劉健), 더 원
2002년 영웅
2003년 크레이들 2 그레이브
2005년 더 독 - 대니[20]
2006년 무인 곽원갑
2007년 , 명장 - 방청운
2008년 포비든 킹덤 - 손오공/목승, 미이라 3: 황제의 무덤 - 황제 한
2010년 익스펜더블, 해양천국 - 왕심성
2011년 백사전설, 용문비갑
2012년 익스펜더블 2
2013년 불이신탐
2014년 익스펜더블 3
2016년 봉신연의: 영웅의 귀환.
2020년 뮬란

5. 영화 리뷰

이연걸은 ‘소림사’시리즈 이후 홍콩 영화시장에서 한물 간 배우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서극의 눈에는 그의 가능성이 보였다. 그래서 영화를 준비하며 이연걸을 황비홍 역에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었다. 서극이 이러한 뜻을 제작사와 관계자들에게 전달하자 이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 왜냐면 그전까지 황비홍 역은 ‘관덕흥’[21]처럼 나이가 있는 배우가 맡는게 관례였기 때문에 제작사 입장에서는 당시의 이연걸이 너무 젊어 황비홍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기의 최고 인기배우들이 황비홍 역을 탐을 냈는데 특히 ‘유덕화’가 황비홍 역을 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극이 떠올리는 황비홍을 구현할 일순위는 ‘이연걸’이기 때문에 결국 그를 캐스팅했다. 그렇게 영화는 개봉했고 예상은 적중했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연걸의 외모와 연기가 황비홍 캐릭터속에 완벽하게 녹아들며 절대 깨지기 힘들었던 ‘황비홍=관덕흥’이라는 기존의 공식을 깨버리고 ‘황비홍=이연걸’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황비홍’은 홍콩 느와르, 코믹액션 그리고 천녀유혼 같은 판타지 무협이 유행하던 시절에 혜성같이 나타나 무협 영화에 또다른 방향을 제시했는데 중국 전통무술을 너무나도 멋지게 연출했다. 영화 주제가인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強)’에 맞춰 이연걸과 베이징 체육학교 후배들이 해변에서 펼치는 오프닝 연무장면, 특히 후반부 황비홍과 무술고수 엄진동의 ‘사다리 액션’은 무술액션의 다른 차원을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이연걸 액션에 열광했다. 인터넷 동영상도, 디지털 카메라도 없던 시절, ‘황비홍’을 상영 중이던 국내 극장가에는 이연걸의 멋진 액션이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지르고 연신 카메라 후레쉬를 터뜨려대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그 시절 ‘황비홍’의 국내개봉 포스터 중 하나는 다른 수식어 없이 곧은 자세로 그림자만 보이는 모습으로 서있는 이연걸을 담았다. 이 포스터의 구성이 또 걸작인데, 구름낀 황천을 배경으로 우뚝선 장포 무인의 그림자를 포스터 중하단에 작게-그러나 바로 그가 선 자리부터 구름이 물러가고 태양이 떠오르듯이- 배치하여 그야말로 "난세에 떨치고 일어선 정의한"이라는 이미지를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짧지만 인상적인 “바로 이 사내!"라는 다섯 글자의 문구만을 넣어서 영화의 인기를 나타냈다.
봉술 대 봉술, 장대봉술 대 봉술, 양손봉술 대 양손봉술, 봉술 대 천봉술 등 이연걸과 견자단의 다채로운 봉술대결이 눈을 즐겁게 한다. 영화상에서 두 명의 최종보스가 등장하는데 처음엔 사이비종교 교주가 최종 보스인 것처럼 상황이 진행됐다. 하지만 클리어 이후, 숨겨졌던 진짜 최종 보스는 견자단이었다는 설정 때문에 마치 두 편의 무술영화를 본 것 같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진짜 최종보스인 견자단이 사용하는 ‘포곤(=천봉술)’이라는 무기가 정말 매력적이다. 이것은 물먹인 천을 휘감아 채찍처럼 사용하는 독특한 무기로 견자단 본인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이후에 1995년 TV시리즈 ‘견자단의 정무문’에서도 이 무기가 잠시나마 다시 등장한다.
이 무렵 견자단은 영화계에 몸을 담았지만 흥행이 신통치 않고 좋은 평가를 못 들어서 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영화의 제작이 결정되고, 마침 극중 이연걸의 상대역을 찾던 서극 감독이 무술감독인 원화평에게 이연걸의 라이벌을 찾는다고 말하자 주저없이 견자단을 떠올리며 그를 추천했다. 결국 ‘납란원술’ 역으로 캐스팅된 견자단은 절대고수 ‘황비홍’이 고전할 만큼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이 후의 평가에서는 역대 황비홍 시리즈중 ‘가장 강한 최종보스’라는 평을 들었다. 원화평의 눈에 든 견자단은 이후 '철마류'에서 황비홍의 아버지 황기영 역을 맡아서 우영광과 함께 멋들어진 액션을 보여주며 이연걸 못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존의 무술배우들은 이소룡을 지나치게 똑같이 따라해서 비판받았던 반면, 이연걸은 특이하게도 이소룡과 지나치게 달라서 비판받았다. 그는 이소룡의 특징인 상의탈의, 괴조음, 쌍절곤을 따라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기존의 ‘정무문’은 중화민족의 자부심으로 일본을 절대악으로 묘사했지만, ‘이연걸의 정무문’은 일본을 절대악으로 묘사하지 않아 심하게 말하면 일본에게 아부하는 것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의상컨셉의 경우 이소룡은 상의를 탈의하거나 ‘흰색 중국 정장’을 착용했지만 이연걸은 ‘가쿠란’이라 불리는 ‘검은색 일본 교복’을 입었다. 원작에도 없는 최초의 설정인데, 원조 ‘정무문’을 좋아하는 팬들은 ‘중국인 주인공’이 ‘일본 교복’을 입고 대결한다는 설정을 싫어해 ‘이연걸의 정무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세부적으로 많은 부분을 각색해 ‘정무문’이라는 타이틀로 만들어진 영화중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리메이크작이라기보다 이연걸식 독자적인 정무문에 가깝다’, ‘원작과 너무 많이 다르다’는 평을 받았고 이때문에 원작팬들은 이연걸의 작품에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연걸의 정무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이소룡의 외형을 과하게 흉내내지 않으면서 이연걸 자신만의 개성을 잘 살린 점, ‘일본은 절대악, 중국은 절대선’이라는 관점이 아닌 ‘중립적인 시각’으로 등장인물들을 묘사해 중화주의를 약화시킨 점, 영화의 스토리가 탄탄하고 내용전개가 빠른점, 그리고 무술연출에 있어서 유술, 복싱, 킥복싱, 가라데, 태권도 등 이연걸이 동서양의 다양한 무술들을 구사하는 모습이 영화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유들로 ‘이연걸의 정무문’은 리메이크 작품들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반부에 정무문 관장 역의 전소호에게서 새로운 무술을 전수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상에서는 미종권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이연걸이 보여준 무술은 팔극권이다. 작중 등장하는 모든 액션들이 최고인 영화인데 특히 마지막 ‘최종보스전’은 실전을 방불케한다. 원래 최종보스 ‘후지테라오카’ 역은 ‘양사’라는 배우가 제안 받았다. 그는 영화 ‘용쟁호투’에서 ‘한’의 보디가드로 나왔던 배우로 본인의 촬영스케줄 때문에 부득이하게 불참의사를 밝혔는데 이연걸이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 역은 배우 ‘주비리’에게 돌아갔다. 또한 이연걸과 일본 최고수 ‘후나쿠시 후미오’의 결투직전 ‘가장 강한 주먹과 대결전략’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정권으로 돌을 부수고 손날로 종이를 베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연걸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여배우의 청순한 미모도 큰 화제였다. 그녀는 ‘나카야마 시노부’라는 이름의 실제 일본인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친동생이다. 나카야마 시노부는 언니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왔다가 미호의 소속사무소 스태프에 의해 캐스팅되어 1988년에 아이돌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 후 연기를 시작하면서 드라마나 영화의 조연을 오가다가 그녀의 나이 22세때 ‘이연걸의 정무문’에 출현하며 아시아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론 언니인 미호의 그늘에 가려 큰 빛은 못 봤다고 한다. 지금도 꾸준히 연기 활동 중이고 아직 미혼이라고 한다.[22]
사실 임청하는 ‘동방불패’ 역을 맡지 못할뻔했다. 왜냐면 그녀의 예쁜 이미지가 ‘동방불패’ 캐릭터의 기개넘치는 모습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작자 김용과 일부 제작진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극은 그녀의 캐스팅을 강행하였다. 동방불패의 주인공으로 임청하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가 오히려 동방불패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동방불패 개봉 당시 임청하는 38세였는데도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다.
그녀가 연기한 ‘동방불패’는 절대 무공을 가진 강력한 카리스마와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사에서 볼 수 없던 독보적인 캐릭터였다. 바늘이나 쇠구슬을 이용해 자신을 물리치러 온 무림 고수들을 제압하는 장면도 수없이 패러디된 명장면이며, 영화 음악도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샘플링되어 사용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동방불패 이후로 대부분의 배역이 중성적인 이미지의 여자로 고정되어 버렸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의 배역이 당시의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국내에서 임청하의 인지도는 ‘동방불패’ 개봉 전까지는 사실 매우 미미했는데 영화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간것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임청하 신드롬’이 일어났다. 결국 영화는 임청하를 대표하는 최고의 출세작이 되어 많은 매니아층을 확보했다. 이후 한국에서는 그녀가 주연한 전작들이 최신작인것처럼 늦깍이 개봉하며 무더기로 유입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또한 ‘동방불패’의 대성공은 영호충 역으로 출연한 이연걸의 공로도 컸다. 1980년대 ‘소림사’ 시리즈로 명성을 얻은 이연걸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다가 ‘황비홍’ 타이틀 롤을 맡아 무협의 활력을 일으켰고 ‘동방불패’에 출연하면서 무협 스타로서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1993년 3월 1일 서울 종로3가에 있던 피카디리극장에 ‘동방불패2 풍운재기’ 개봉에 맞춰 임청하가 내한해 팬 사인회를 했는데 청소년 팬들이 그녀를 보려고 현장을 앞 다투어 찾아와 서로 몸싸움을 해댔다. 극장이 아수라장이 될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이로인해 극장 유리창이 깨지고 의자가 부서지며 부상자가 나오는 등 소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동방불패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서는 ‘청우회’ 라는 팬클럽이 결성되었고, 내한했을 당시 임청하를 위해서 한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로 날아간 이연걸의 액션 영화로 할리우드 영화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영화는 프랑스 자본에 의해 일부 미국 배우들을 기용해서 프랑스에서 찍은 프랑스 영화다. 프랑스의 슬럼가, 암흑가를 배경으로 부패 경찰들의 비리와 첩보원들의 애환까지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홍콩 이외에 서양권에서 찍은 이연걸의 작품 중 재미 면이나 완성도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인데, 레옹, 테이큰, 13구역의 뤽 베송(제작, 각본) 특유의 히어로 액션 스릴러물과 이연걸의 무술 실력이 만나 걸작이 탄생했다.
이소룡의 정무문을 오마쥬해 원규 무술감독이 설계한 후반 경찰서 내부 도장 대결씬이 유명한데 이연걸이 뒤쫓는 형사들을 피해 도망친다는 게 하필이면 도복을 입고 톤파를 들고서 훈련을 준비하던 형사들이 즐비한 도장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연걸은 맨주먹으로 상대하다가 얼른 톤파 한두개를 뺏어서 모조리 때려눕힌다. 뒤늦게 문을 부수고 들어온 형사들이 이미 제압당한 형사들을 보고 짓는 넋나간 표정이 일품이다.
특히 마지막 사무실에서 쌍둥이와의 대결은 명장면. 쌍둥이 중에서 키가 큰쪽 배우는 ‘디디에 아줄레이’[23], 뛰어난 발차기실력으로 이연걸을 몰아 붙였던 키가 작은쪽 배우는 ‘시릴 라파엘리’로 이후에 유명한 파쿠르 액션영화 ‘13구역’에서 다미앙 역을 맡았다. 제시카 역의 여배우 ‘브리짓 폰다’는 "단지 뤽 베송, 이연걸과 작업하고 싶어서 각본도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는 침술도 사용한다. 작중에서 침을 최종보스의 목 뒤 급소에 꽂는 장면이 있는데, 작중 설명에 의하면 바로 그것을 키스 오브 드래곤(용의 입맞춤)이라 한다. 최종보스 역할인 경찰반장(체키 카료 분)은 이 침을 맞고 말과 생각은 할 수 있는데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기묘한 상황이 되며, 이연걸이 친절하게 이 침을 뽑으면 넌 이러저러해서 죽게 된다며 담담히 설명하자 "Kiss my ass!(개소리 집어쳐!)"라며 저항하지만 속수무책이다. 결국 이연걸이 갱생이 불가능한 인물임을 알고 침을 뽑고 돌아서자 경찰반장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바람에 칠공분혈하면서 끔살당한다.
신출귀몰하는 중국의 특수요원역과 이연걸이 잘 매칭되어 국내에서도 이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이 많아서, 급기야는 2014년 9월 4일 극장에서 HD 리마스터링 버전이 재개봉 했다.
‘천보’ 역을 맡은 전소호는 태극권뿐만이 아니라 이듬해 개봉한 정무문에서도 이연걸과 재회한다. 여기에서도 이연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형 역할이다. 그래도 결국 주인공 이연걸과 화해하고 선역인 조력자로 활약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이연걸과 합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무술실력이 있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전소호는 젊은시절 강시를 소재로한 퇴마액션 영화에 자주 출연했었다. 그가 오랜만에 찍은 영화 ‘강시: 리거모티스’의 경우 과거의 강시 영화를 즐겼던 세대들에게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또한 감독이 왕정인지라 무협영화치고는 섹드립(특히 장삼풍과 화산파의 대표 두명)과 개그가 섞인 것이 특징이다. 영화판은 드라마판과 달리 김용무협 유니버스의 액션을 역대급으로 훌륭히 구현해냈다. 이 점은 동방불패와 함께 양대산맥으로 꼽힌다. 특히 광명정 혈투는 이 영화만큼 재현해낸 드라마가 여전히 없을 정도로 뛰어난 퀄리티를 보여준다.
이연걸은 스승과 제자를 영화에서 모두 연기한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그가 장삼봉 역을 맡았던 영화 태극권도 의천도룡기와 연관짓기도 하나, 시대 배경이 겹칠 뿐 다른 작품이다. 이연걸의 장무기 연기 또한 드라마판의 양조위와 견줄 만한데 구양신공을 익히기 전의 모습이나 6대 문파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힌 모습, 그리고 명교 교주가 되었을때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부분은 양조위의 앳된 얼굴과 달리 잘 녹아든다. 아무래도 황비홍의 강직한 연기가 한몫한 듯 싶다. 또 감정연기 못지않게 중요한 게 무술연기인데 이연걸의 장무기 액션연기는 역대 모든 드라마판과 영화판 통틀어 최고라 할만큼 훌륭히 소화해냈다.
그 외에 홍금보의 장삼봉, 장민의 조민 등 연기부분에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장무기의 어머니인 은소소와 원나라의 공주 조민은 배우 장민이 1인 2역을 하였다. 원래 조민 역은 남결영이 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남결영이 TVB와의 갈등으로 인하여 홍콩 연예계에서 인지도 하락으로 놓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장민은 조민 역과 매우 잘 어울려서, 지금까지 영상화한 조민 중에서도 최상급에 꼽힐 정도로 성공적인 조민 연기를 하였다.
그리고 배우 구숙정이 소소로 나오는데 그녀 역시 역대 최고의 소소로 꼽히고 있다. 구숙정의 팬들은 대부분 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왕정 감독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배우로도 유명하며, 왕정과는 한때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정 감독은 구숙정이 홍콩 여배우들 중 빨간의상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걸 발견한 장본인이다. 그녀가 등장한 56편의 영화 중 22편이 왕정 감독의 작품이다. 귀여운 외모와 장난끼 가득한 발랄한 미소를 가진 구숙정은 연기 스타일도 악동같이 짖궂으면서 어설픔이 묻어나는 귀여운 캐릭터와 잘 맞는다. 국내 액션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이연걸과 함께한 3편의 영화에 등장하여 인지도가 높아졌다.
조민의 무당파 급습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 되는데 원래는 2부작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2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영화의 평은 좋았지만 제작비 기준 흥행수익이 손익분기점에 한참을 미치지 못해 제작사가 도산했기 때문이다. 제작사는 도산했지만 판권은 가지고 있었는데 후속작을 제작하겠다는 제작사가 없어서 무기한 중지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2022년 무려 29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왕정감독의 정식후속편 ‘의천도룡기 구양신공’이 개봉됐다. 하지만 엄청난 혹평을 받으며 끝장이 나 버렸다. 주인공 연령대 설정보다 많은 나이의 배우 캐스팅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미스캐스팅 논란이 컸다. 또한 어설픈 CG 남발 등 졸작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오랜기간 기다렸던 팬들의 기대는 무너져내렸다.
후반부에 용병단의 신체개조를 담당한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싸우는데, 독가스가 퍼진 방에서 최종보스의 방독면을 벗겨 살아남는 모습은 이연걸이 주인공의 페이스 모델 및 성우를 담당한 PS2 비디오 게임 "제트 리: 라이즈 투 오너 (Jet Li: Rise to Honor)"의 최종보스전에서 그대로 오마주되었다.[26] 이 독가스 방 결투는 상술한 영화이자 2년 전 작품인 보디가드에서 이미 나온 바 있다.
이제는 이런 류의 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영화개봉 당시만 해도 좀처럼 시도하지 않았던 신선한 소재의 영화였다. 특히 무협스타 이연걸이 홍콩판 수퍼히어로 영화에 출현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6. 여담


[1] 개명 전 이름은 李陽中 (리양중, Lǐ Yángzhōng)[2] 선양에서는 출생만 하였고, 유년기는 상하이에서 잠시 보냈으며, 줄곧 베이징에서 성장하였다.[3] 이전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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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홍콩에 진출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광동어를 하지 못해 표준중국어로 연기하고 전문 성우에 의해 더빙 처리 되었으나 나중에 영화 <히트맨>에서는 광동어로 연기했다.[6] 2009년부터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싱가포르 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싱가포르 여권은 중국 무비자 입국이 허용되는 반면, 미국 여권은 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미국은 해외 거주하는 미국인에게도 세금을 받으므로 세금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일부 팬들이 정치적 문제를 주장하는데, 2009년은 미중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으로, 이연걸의 싱가포르 국적 취득은 중국내 반미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싱가포르는 누진세가 없는 반면, 미국은 고소득자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다. 시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세금이 부자에게 유리하지만 싱가포르는 도시국가 특성상 누진세가 없을 정도로 미국보다 고소득자에게 더 유리하다.[7] 이연걸의 9살 때와 19살 때가 각각 나온다.(36분 50초)[8] 대학은 아니고 찾아보면 중-고교과정까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서 경희대 태권도학과나 용인대 유도학과 등에 엘리트 무술가들이 모이는 것과 똑같다.[9] 소림사 영화를 보면 대부분 청조 초반의 무술가 탄압이 배경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의화단의화단 운동 참조.[10] 중국무술도 엄연히 격투기이고, 전쟁기술로서 나온 무술이다. 당연히 강한 군대를 추구하는 중국공산당이 중국무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여 군대나 경찰 등에 보급하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11] 당시 중국의 5인의 고수들은 모두 산골의 한적한 곳에서 무도를 닦는 도인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체육영재학교기관들에 재직 중인 교수들이었다. 오빈(1937년생)조차도 산골에서 수련한 것이 아니라 베이징 체육대학에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무술을 익힌 엘리트 권법가였다. 오빈의 제자로는 이연걸, 견자단 뿐만 아니라 오경도 있다.[12] 이연걸과 마찬가지로 엘리트 권법가 출신으로, 90년대 미국으로 이민가서 사범으로 일한다고 한다.[13] (1942-2023) 이 배우는 전통적인 무림(칠성당랑권파)에서 무술을 연마한 배우다. 1942년생이라서 1950년대 무림이 아직 체육학교로 흡수되지 않았던 대라서 가능한것 같고 옌타이시에 무술학원을 세우고 당랑권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2010년대까지 무술영화에 출연했다. 2022년까지 10월까지 도장에서 직접 시범을 보일 정도로 정정했으나 안타깝게도 2023년 1월 16일 코로나19로 타계했다.[14] 무술을 익힌 엑스트라들의 봉술 수련장면이나 청나라 군사들의 추격장면에 나오는 집단 전투신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15] <소림사> 시리즈에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로 청순한 외모와 출중한 무술실력을 가진 배우로, 영화 내에서 이연걸 못지 않은 화려한 격투신을 선보였다. 소림사에서 이연걸 상대역으로 나온 여배우라고 하면 바로 아는 이들도 많다.[16] 이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때문에 국영영화사들도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스스로 수익을 내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사회주의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배우에 대한 대접은 옛날과 다름 없었다. 과도기의 중국기업의 행태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17] 이연걸이 서극과 함께 작업한 첫 영화는 1989년작인 <용행천하(龍行天下)>다. 미국에서 촬영하였으며 여담으로 극중 나오는 한약방 상호가 황비홍에 나왔던 그 '보지림'이다. <황비홍> 시리즈와 직접적인 연관이 1도 없는 작품이지만 <황비홍>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92년에 <용행천하>라는 제목 앞에 '황비홍 92'라는 어이없는 부제가 첨부되어 극장에서 개봉했다.[18] 이연걸의 등장 이후로 실전을 치르는 듯한 거친 액션이 아닌, 예술적으로 무술을 표현하는 배우들이 영화계에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양자경, 장쯔이, 견자단, 우영광 등이 있다.[19] 그래도 키스 오브 더 드래곤, 크레이들 2 그레이브에선 영어를 잘 구사했다.[20] 북미 제목은 Unleased[21] 관덕흥은 60년 동안 영화계에 종사하면서, 130편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그 중 87편이 황비홍 역할이었다. 황비홍 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리즈가 나온 영화이며, 관덕흥은 한 시리즈 영화에 가장 많은 주연을 한 배우이다.[22] 특촬물 초전자 바이오맨 7화에서 피포의 친구인 조이 역으로 등장했다.[23] 프랑스의 무술가이자 액션 배우. 전직 보디가드 출신으로 보디빌더와 킥복서로써도 활동한 적이 있다.[24] 원제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給爸爸的信). 영문 제목은 "My Father is a Hero (우리 아빠는 영웅)"인데 여기서 국내 개봉명을 따온 듯하다.[25] 참고로 우영광은 철마류, 국내영화 무사, 성룡의 뉴 폴리스 스토리에서 경찰반장 등으로 나온 바 있는 액션배우로, 2010년작 드라마 삼국관우 역으로 가장 익숙할 듯하다. 의외겠지만 우영광도 전국 무술대회 우승자 출신으로, ‘목면가사’라는 영화를 보면 전성기 때 무술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쿵후 기반으로 리메이크된 베스트 키드(2010)의 편집된 엔딩에서도 성룡상당한 싸움 실력을 보여준다. 다만 영웅에서는 본문에 있다시피 사나 죽으나 선글라스를 껴서 우영광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알기 쉽지 않다. 자세한 것은 우영광 문서 참고.[26] 정확히는 원작 영화에서는 최종보스의 방독면 호스를 독가스 분출구에 꽂아서 강제로 독가스를 흡입하게 하는 약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는데, 게임에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버티기 위해 최종보스의 방독면을 벗겨 살아남는 걸로 바뀐 것이다.[27] 실제로 더독은 주인공 대니를 인간투견으로 만든 양아버지(밥 호스킨스)와 인간성을 가르치는 맹인 조율사 샘(모건 프리먼)의 대비가 크게 두드러지며, 엔딩에서는 샘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열리는 빅토리아의 피아노 연주회를 감상하며 우수에 젖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마무리된다.[28] KBS에서는 초기에 홍성헌이 더빙하다가 갑자기 김승준으로 바뀌었는데 나중에 황비홍3에서는 다시 홍성헌이 더빙하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 KBS와 SBS에서 모두 주성치 역을 맡았던 김환진도 정고전가 이후 KBS에서는 김승준으로 교체되었다.[29]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 초기로서 출국이 자유롭지 않았다.[30] 실제로 2021년 9월 이연걸과 비슷한 싱가포르 국적인 공리(배우)는 북경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했음이 확인되었고, 중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다만 이연걸과 공리는 경우가 좀 다른데 공리는 결혼을 통해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했고, 이연걸은 과거 공산권 예술가들이 해외 공연을 마치고 귀국을 하지 않아버리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31] 해당 영상은 삭제 혹은 비공개 처리됐으나, 이경규가 킬링무비에서 직접 언급한 영상이 남아 있다. #[32] 이연걸보다 2살 연상으로 어렸을 때부터 함께 무술을 배운 사이이다. 소림사2, 소림사3에 이연걸과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이다.[33]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중국어권에서는 이 이혼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전처 황추연이 무명시절의 이연걸과 그 어머니에게 무척 잘 했는데, 이연걸이 스타가 되고난 후 리지에게 반해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혼 후 낳은 딸들에게는 해외의 비싼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고 자신의 영화계 인맥을 이용하여 일찌감치 상류사회에 진출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전처의 딸들은 자기 어머니에게 맡겨 키우게 하면서 학비 및 생활비만 대주었을 뿐 10년 이상 만나보지 않는 등 차별대우를 했다.[34] 제인 리, 제이다 리[35] 1994년에 방송된 오시마 유카리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에서, 정무문 촬영장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이연걸을 만난 오시마가 "현재 가장 핫한 액션배우"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냥 인사만 하고 끝나는 수준으로, 오시마와 동료나 상대역으로 많이 엮였던 주비리와 거의 비슷. 반대로 일본에서도 유명한 홍금보와의 인터뷰 장면은 상당히 비중있고 길게 나온다.[36] 그 자료들의 저작권은 모두 제작사가 가지기로 되어있었다.[37] 2000년대 영화들에서 잠깐 잠깐 나오는 화면으로 문신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38] 10분도 채 안 되는 영상이지만 무술감독에 정소동, 홍금보, 원화평이 들어갔고, 토니 쟈, 오경, 견자단, 향좌, 황효명 등 잘나가는 액션배우들 다수가 출연하는데 이연걸은 가장 마지막 상대로 나온다. 연습하는 영상에서 배우들에게 지도를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성기급은 아니지만 움직임이 여전히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