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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5-19 20:03:59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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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무슨 일이 있었는가?
2.1. 원인2.2. 내용2.3. 처벌
3. 관련자들
3.1. 피해자들3.2. 범죄자3.3. 그 외
4. 후일담5. 기타6. 관련 링크

1. 개요

小笠原事件, 父島人肉食事事件

1945년에 2월경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벌어진 사건. 오가사와라 사건, 치치시마 사건(chichijima incident)이라고도 부른다.

단순한 포로 살인 사건이나 굶주림에 시달리던 부대가 아사 직전에 시체에 손을 댄 사건이 아니다. 술자리에서 먹을 술안주가 없다는 이유로 산 사람을 일부러 살해하고 그 시신을 먹은 식인이다. 심지어 이 사건을 저지른 다치바나 요시오의 휘하 부대는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형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팔 작전무타구치 렌야 휘하의 일본군 식량 사정이 훨씬 더 열악했다. 특히 임팔의 경우 일본군 역사상 최초항명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서 문제는 저 항명이 정상적이었다는 것. 오죽했으면, 임팔에서 총 지휘를 맡은 15군 사령관도 항명을 한 31사단 사단장을 군법재판에 회부를 못 시키고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서 정신병원에 보내버렸다.[1]

전쟁 중 식인을 했던 부대는 이들 말고도 더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극도로 처참한 전황에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린 자들의 최후의 선택이었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역시 보급, 특히 식량이 너무나도 부족한 나머지 얼어죽은 전우의 시신을 녹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적어도 이들은 이미 죽은 시체들을 먹었지, 생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2]

2.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섬의 수비를 맡은 일본 육군 중장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와 그 부하들이 미군 포로를 살해해 인육을 먹고, 대대원들에게도 인육을 강제로 먹인 사건.[3]

2.1. 원인

사실 전쟁 중에 고립된 부대가 식량이 부족해서 식인을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4] 소련군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는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따로 식인을 막기 위한 임시 자경대를 만들어야 했고, 독일군 6군도 스탈린그라드에 갇혀서 보급이 안 되자 시신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문제는 소련군이나 독일군 같은 경우는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였고 식량 부족이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거지만, 일본군은 치치지마에 있을 당시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도 아니었던 데다가 살아있는 사람도 죽여서 먹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군은 열대 섬이라는 특수 환경[5]과 연합군이 보급선을 열심히 박살내버리는 작전의 이중 크리가 터지면서 결국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 이 나무위키에 등재된 밀리환초 학살사건도 같은 맥락. 실제 뉴기니 전선에서 육군 제18군사령부는 1944년 12월에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던 것이 전후 도쿄전범재판 때 밝혀졌다.(1946년 12월 11일.)

미군도 처음에는 식량 부족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나보다 생각했지만, 상술했듯 치치지마는 결코 식량 부족 때문에 식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치치지마의 식량 상황은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6][7]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추가 조사 결과 식인의 동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식인을 통해 수비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벌이 엄청나게 셌던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기 진작을 한답시고 한 행동이 고위 장교 몇명이 인육에 술파티를 벌인 것이 고작(?)이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국 식인 사건의 동기는 사기 진작을 위한 소(小)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식인종들을 재판한 괌에서의 재판 경과와 증언들을 보면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증언들은 괌에서 열린 이 식인종들에 대한 군사 재판을 참고하자.

2.2. 내용

파일:external/ogasawara-info.jp/env_0045.jpg
치치지마 섬(父島)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섬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치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 북쪽 200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였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 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모리 쿠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병력을 투입하던 미군으로서는 공격로 주위의 다른 섬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치치지마였고, 그를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했다.

이때 제51 뇌격대(VT-51)의 대원 중 한 명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격한 조지 H. W. 부시 중위의 애기(愛機) ‘바바라’[8]는 8천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버렸고 그 충격으로 비행기는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는 간신히 낙하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일본군은 함정 두 척을 파견해서 그를 생포하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군 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파일:o1ILS77.jpg
구조되는 부시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치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미군 가토급 잠수함 USS Finback에게 구조되었다.[9] 다른 미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 인원 여럿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다른 인원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전쟁 포로로 일본으로 보내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형되었다.[10]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치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다.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치치지마의 두 지휘관 중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다치바나였고, 모리와 해군부대는 사실상 육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 육군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대좌가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사실 한두 명의 정신이상자가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 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들의 처우가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군은 병영 악폐습,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미친 군대에서 정신이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 검증이 되지 않은 인원을 마구잡이로 뽑아왔던 데다, 군부 내에서도 명령권자들이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해 대량 학살을 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직접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치치지마를 제외하고는 달리 예가 없었다.

1947년 1월 13일 재판에 제출된 마토바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육 사건은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 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카토 타케무네 대좌가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육류와 술을 준비할 무슨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1되를 준비 시켰습니다. 인육은 카토 대좌의 방에서 요리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의 처리에 대해 구두 명령이 내려졌다.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11]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 소좌 마토바 스에오

발령 방법: 칸무리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2.3. 처벌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9월 2일 치치지마에 미군이 상륙해서, 9월 3일 다치바나 장군과 모리 제독이 대표로 미 해군 전함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했는데,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다.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 두었고,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함구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치치지마의 일본군의 본토 귀환도 순조롭게 이뤄져 다치바나 등은 안도했지만, 그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1946년 2월 들어 본격적으로 이 식인종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식인을 했다는 증언은 산더미처럼 나왔으나 증거가 나오질 않아 식인혐의의 입증이 좀 어렵게 되었으나, 그러나 처형된 미군 포로의 시신을 가지고 목베기 훈련을 시키는 등의 엽기적인 다른 행위들이 재판에서 확인되었고, 아서 로빈슨 미 해군소장의 지휘에서 열린 재판의 결과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 외 4명에게 포로 살해시체 훼손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졌으며, 치치지마 섬에 주둔한 해군 최선임 자였던 모리 쿠니조 제독을 포함한 다수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사형이 집행당하는 그날까지 두들겨 맞았다. 나카지마 노보루는 사형 당일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간다고 유일하게 유언을 남겼다.

모리 쿠니조 제독의 경우에는 종신형을 받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남방 전선 당시 포로 학살 사건 문제로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되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했다.

파일:7KTzsWD.jpg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왈, 쪽바리[12]들이 식인을 저지르다

그 와중에 cannabilism이라고 오타났다[13]

미군 신문인 <괌 뉴스>는 연일 '카니발리즘'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했으며, 일부는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됐다. 그런데...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는데, 희생된 미군의 어머니들이 탄원을 내서 군 상부에서 보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3. 관련자들

3.1. 피해자들

총 8명
기타(생존자)

3.2. 범죄자


그 외 하야시 미노루, 이소가이 군지, 키도 마츠타로, 마스타니 신이치, 마츠시타 카네히사, 모리 야스마스, 사사키 미츠요시, 카토 타케무네 등이 포로 살해의 지시 및 직접적인 포로의 처형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3.3. 그 외

4. 후일담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건지 그냥 단순하게 '오가사와라 사건'이라고만 부른다.[18]

일본 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외부 링크의 글을 보면 더 확실해지는데, 위키 내에서도 최소 2명 이상을 먹은 것으로 기록해 놓았음에도 정황 증언이 있는 츠치야 코우켄씨의 증언만을 들면서 물타기를 하고 있다.

츠치야 씨의 증언에선, 워렌 본 중위의 사형 당일 일직 장교였는데 저녁쯤에 병사 두 명이 본 중위의 시체를 먹으려 하는 걸 제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즉, 본 중위를 먹은 건 지휘관들이 아니라 배고픔을 못 이긴 병사 두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제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왜 워렌 본의 이야기를 들먹이는지는 위 항목에 나온 괌 군사재판에서 제시된 명령문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본 위키내에 등재된 내용으론 1번 항목에 "대대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으로 되어있지만 일본 위키에선 "미군 비행사 본 중위의 인육을 먹을 것"이라고 씌여있다는 점이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c0067880_571c5a552bc79.jpg
양측 항목을 대조해 보면 알겠지만 저 명령문은 3월 9일자이기(일본 위키에도 3월 9일자로 되어있다.)에 이 명령에 해당되는 인물은 같은날 처형된 플로이드 홀, 아니면 2월 28일 처형된 그레이디 요크의 시신에 대한 명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전 증언을 보면 2월 22일~2월 25일 사이에 인육 사건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때의 희생자는 기간 중에 살해된 마빈 머숀이나 제임스 다이로 봐야 할 텐데도 난데없이 명령문이 내려온 당시에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13일이나 지난 후에 피살된 워렌 본을 들먹이며, 그 워렌 본은 실은 먹히진 않았다라는 츠치야 코우겐의 증언을 개재하는 것은 ''식인의 대상이 되었다는 본 중위는 실제론 안 먹혔는데 미군이 누명을 씌운 거다"라고 주장하는 셈.

외부 링크로 등록된 "치치지마섬 진상의 일단"이란 글에서 이를 나름대로 자세하게 서술하며 "승전국이 자국에서 벌인 재판인 만큼, 반드시 공정한 처벌이 내려졌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라며 은근슬쩍 누명을 썼다라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저 글들을 종합해 봐도 피살된 8명의 조종사 중 워렌 본 중위는 식인의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있어도, 식인 사건 자체를 날조라고 할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주범인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은 에히메 현의 에히메 대학 바로 옆에 있는 호국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신다. 이 작자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모셔져 있으며, 수많은 일본인들이 참배하고 있다.

일본 넷 우익들은 이들이 처형당했다고 표기하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니, 법무사(法務死)라는 용어를 아예 새로 만들어서, 이들의 사인은 사형이 아니라 법무사라는 괴상한 어법을 쓴다. 한 마디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뜻.

사법살인이란 이미 있는 말 대신 법무사라는 (일본어로도) 법조인 직종 이름이랑 발음이 동일한 신조어를 만드는 저의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일단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해당 문서에만 안 썼을 뿐이지 이 법무사라는 단어는 등록되어 있다.

그나마 사가와 잇세이는 정신질환자로 취급받아 풀려났고, 지금 봐도 책임 능력과 별도로 정상인이 아니라는 점은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다치바나는 누가 봐도 명백한 100% 정상인이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미친 새끼일 뿐이지진짜 정신병자라면 미군도 정신병원에 넣었지 사형시키지는 않았다.

5. 기타

6. 관련 링크



[1] 당시 31사단장은 항명으로 군법재판에 회부되면 15군 사령관의 개념상실한 짓들을 낱낱이 다 폭로해버릴 예정이었다.[2] 전쟁·대기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식인 행위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식인은 생존을 위한 최후 행동으로 보며 이런 것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인상식(人相食)이란 말이 그것. 이런 형태의 식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식인 문서를 참고할 것.[3] 실제로 하급 장교들은 인육을 먹지 않았다고 상관들에게 얻어터졌던 일도 있다고 한다.[4] 사실 대기근 같은 상황하에서의 식인은 역사를 보면 거의 항상 있어왔다. 이것에 대해서는 식인 문서를 참고하자.[5] 열대우림은 결코 채집이나 둔전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녹색 사막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런 척박한 기후의 작은 섬에 2만 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한 적도 있으니...[6] 대충 소주 2병을 쌀로 채운 것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7]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이 정도만 돼도 식인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8] 당시 애인인 바버라 피어스(Barbara Pierce, 1925~2018)의 이름에서 따온 것. 다들 알다시피 전후 부시 중위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낳았고(둘째 아들은 4살 때 죽음),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영부인이었다.[9] 출혈과 구토 증세로 정신을 잃어가며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만약 잠수함이 부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현재 미국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래 '생존자들' 문단 참조.[10] 포로로 잡힌 9명 중 8명이 살해당했고, 그중 식인의 피해자는 5명이다. 일부 포로는 이때가 아닌 1944년에 잡혔다.[11] 여단 산하 육군 308대대의 군의관이었다. 하지만 명령과는 달리 본인 대신 하급자인 테라키 중위를 보내고 본인은 관여하지 않았고, 현장에도 없었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다.[12] Jap은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한국의 왜놈, 쪽바리와 뉘앙스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은 Japan을 JAP으로 쓰지 않고 JPN으로 쓴다.[13] cannibalism이 맞다. 신문사에서마저 오죽이나 충격이 컸으면 오타 확인도 못하고 내보냈을까 싶어진다.[14] 그래도 의외로 일본을 한국과 함께 미국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당시 1980년대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해야 할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니 사적으로는 어쨌든 대통령으로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일본이 미워 죽어도 어쩔 수 없이 일본과 협력하는 상황인 셈.[15] 본인의 자서전인 '출격 이오지마'.[16] 치치지마 사건을 다룬 서적인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17] "모욕을 줬다"라고 5글자로 넘길 만한 사항도 아닌 게, 그 당시 일본군을 생각해보자. 과연 구타가 없었을까?[18] 일본은 이런 사례가 상당히 많다.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한다든지.[19] Flyboys: A True Story of Cour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