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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아메리칸 항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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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27~1945 - 태동기
2.1. 창설2.2. 세계 최초 환태평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2.3. 세계 최초 대서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2.4. 2차 대전 속의 팬암
3. 1945~1950년대 - 전성기
3.1. 세계 최초 세계일주 정기 노선 운항3.2. 미국 최초 제트기 도입
4. 1960년대 - 최전성기
4.1. 아이들와일드 공항에 새로운 터미널 설치4.2. 팬암 본사4.3. 세계 최초 컴퓨터 예약 시스템 도입4.4. 팬암의 서베를린 루트(IGS, Internal German Service)4.5. 세계 최초로 초음속 여객기(SST)를 도입하려 했던 계획4.6. 세계 최초로 민간 우주 비행을 시도하려 했던 계획4.7. 세계 최초 광동체 도입
5. 1970년대 - 전성기 속의 쇠퇴의 조짐
5.1. 세계 최초로 보잉 747 운항 시작5.2. 세계 최초 남북극 민항기 세계일주
6. 1980~1990년대 - 몰락기
6.1. 부실 경영의 내막
6.1.1. 보잉 747 방만 경영 건6.1.2. L-1011 도입 당시6.1.3. 1984년 신도색 결정 건
6.2. 노선 확충을 위한 시도
6.2.1. 내셔널 항공의 인수와 위기
6.3. 위기 극복을 위한 조치6.4. 파산과 분해

1. 개요

1977년 제작된 팬암 미니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나오는 "The best chapters are yet to come!!!" [1]이 인상깊다.

미국의 여객항공산업이 아직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시절의 덕을 많이 본 항공사로, 국제선에 관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노스웨스트 항공과 함께 1950년대에 이미 태평양 노선을 보유한 항공사였다. 항공기의 항속거리가 짧았던 시절부터 태평양 노선을 가진 덕분에 도쿄홍콩에서의 이원권[2]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활용하여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각 도시에도 거미줄같은 노선망을 구축했다. 이것도 모자라서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럽 각지는 물론이고 서베를린으로 가는 항공편도 운항했다.[3]

1958년부터 장거리 대규모 수송이 가능한 보잉 707을 적극 도입하여 미국발 국제선에서 거의 독점이나 다름없었던 지위와 결합하여 최전성기에 도입하였으나, 이에 너무 자신감을 얻은 나머지 보잉 707의 2배 가량 되는 보잉 747의 개발을 의뢰하고 런치 커스터머까지 된 후,[4] 굳이 보잉 747까지 투입할 필요가 없는 노선에도 보잉 747을 투입하여 위용을 과시하려다[5], 지미 카터 정권기에 항공산업이 자유화[6]되면서 항공사 간의 항공권 인하 경쟁이 촉발, 거의 절반은 공기 수송이었던 보잉 747의 운용에 의해 수익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회사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인한 재정난은 새 CEO가 허리띠를 졸라매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1977년부터는 다시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CEO는 1980년 치명적인 결정을 하고 말았는데, 바로 미국 내 국내선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내셔널 항공을 인수한 것이다. 내셔널 항공은 당시 플로리다마이애미를 중심으로 운항하던 회사였는데, 이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한 국내 노선은 합병 이후 팬암의 수익성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적자만 엄청 냈고, 게다가 두 회사 간의 기종의 차이와 합병 비용으로 팬암은 다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기는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여기에 1980년대 중후반 두 차례에 걸친 팬암 항공기에 대한 테러 사건[7]으로 이미지가 급격히 실추, 급기야는 그동안 팬암의 자존심이던 대서양과 태평양 항공노선을 각각 델타 항공유나이티드 항공에 매각하면서,[8] 미국 국내선 규모의 항공사로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미국의 날개였다는 자존심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쌓여가는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1991년 12월 4일 최후의 운항을 끝으로 결국 망했다.

2. 1927~1945 - 태동기

2.1. 창설

창설은 군사적 목적에 의해 탄생했다. 1927년 3월 14일에 독일의 자본이 들어간 여객기 회사인 SCADTA가 미국-콜롬비아 간의 우편 배달 계약을 따내게 되는데 이 회사를 통해 독일은 미국의 상황을 손쉽게 얻을수 있다는 판단을 한 헨리 아놀드육군 항공대 대장[9]과, 그의 부관 칼 스파츠[10]가 이를 막기 위해 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이 이 회사의 시작이었다. 이 무렵에 미국 우체국은 1927년 10월 19일 이전에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에서 쿠바의 하바나 로 우편물을 배달하는 계약에 대한 입찰을 요청하게 된다. 다만 헨리 아놀드와 칼 스파츠는 설립자이긴 했지만 회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11]

한편 한때 금융 관련 일을 하던 투자가인 후안 테리 트리페[12]라는 28세 청년은 같은 해 6월 2일에 여러 금융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ACA(Aviation Corporation of the Americas)를 설립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뉴욕의 한 투자 은행가가 항공사 하나를 설립했다. 세 회사는 마감일이던 10월 19일로부터 불과 며칠 전에 파트너십을 맺기로 결정했고, 이 세 회사는 1928년 6월 23일에 공식적으로 ACA로 합병되었다. 이 합병 후 트리페는 새로운 회사의 주요 운영 자회사인 팬 아메리칸 항공의 운영 책임자가 되었고, 이후 40년간 팬암의 사장으로 일하며 팬암을 국제적인 항공사로 키웠다.

창업 당시 명칭은 'Pan American Airways'였으며, 창업한 해에 팬암은 미국과 쿠바 사이의 항공우편 업무를 미국 정부로부터 위탁받고, 같은 해 10월 19일부터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와 하바나를 잇는 항공편을 개설했다. 이후 팬암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카리브행과 남미행 비행정을 운항하기 시작하고,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비행을 한 찰스 린드버그를 고문으로 초빙하고 중남미의 여러 항공사를 인수하면서 세력을 넓히게 된다.

그리고 팬암의 첫 여객 비행은 창업 다음 해인 1928년 1월 16일에야 성사되었는데, 팬암은 포커사가 만든 F-7로 키웨스트와 하바나를 잇는 비행을 하며 미국 최초로 정기 여객 비행 노선을 성사하게 되었다.

또 1929년에는 미국과 중남미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운항하던 그레이스사와 함께 합작회사인 판아그라(Panagra, Pan American-Grace Airways)를 만들었으며,[13] ACA의 네트워크를 중남미 전역으로 확장할 계획이었던 트리페는 창업 초기에 중남미에서 쇠락한 항공사를 구입하고 이 지역에 대한 정부의 항공 우편 계약 대부분을 수주하기 위해 협상해가며 회사를 키웠다.

ACA는 Consolidated Commodore[14]과 시코르스키 S-38 등의 비행정으로 남미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했으며, 1931년에 사명을 Pan American Airways Corporation으로 바꾸게 된다.

2.2. 세계 최초 환태평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

팬암은 사실 1930년부터 알래스카를 경우하며 일본과 중화민국을 경유하는 태평양 횡단 노선을 만들려고 린드버그 부부에게 일본으로 조사 비행을 하도록 했으며, 1933년에는 상하이와 광저우를 운항하는 중국항공공사(CNAC)를 인수하는 등 태평양 노선의 확충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이후 팬암은 마틴 사[15]가 팬암이 요구한 사양을 맞춰 주문제작해준 여객기인 마틴 M-130[16]인 '차이나 클리퍼(China Clipper)'를 1935년 11월 22일에 있던 역사적인 세계 최초 환태평양 정기 노선에 투입했다.[17] 실질적인 정기 운항은 기재가 확보된 1936년부터 실시되었으며, 이후 제작된 3기는 모두 이 노선에 투입됐다.
첫 환태평양 서비스를 하는 China Clipper

이후 1937년에는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노선을 운항하며 미국 최초로 오세아니아 항로를 운항하기 시작하며 남태평양에도 그 위세를 펼치기 시작했으며, 이후 팬암은 여러 기재와 노선을 확보해가며 해상 여객선으로 최대 6주 걸리던 태평양 횡단을 '무려' 6일로 단축시켰다.

2.3. 세계 최초 대서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

팬암은 1937년에 대서양 횡단 노선을 운항했는데, 다만 이는 노르웨이의 DNL항공과 공동 운항한 것이었다.[18] 이후 동년 6월에는 미국과 영국을 연결하는 노선의 운항권까지 획득하고, 영국의 임페리얼 에어웨이스와 협업하며 S-42로 대서양 횡단 노선을 운항했다.

이후 팬암은 M-130의 대체를 위해 보잉에 주문 제작한 폭격기 프로토타입 XB-15를 바탕으로 개발된 보잉 314를 인도받은 후 동 기종으로 1939년 2월 23일 팬암의 샌프란시스코-홍콩간 환태평양 횡단 노선에서 시범 비행을 한 후, 양키 클리퍼(Yankee Clipper)가 1939년 6월 28일에 영국 사우샘프턴-뉴욕간 세계 최초 대서양 정기 횡단 노선을 개척했다. 이후 팬암은 양대륙간 비행이 가능한 유일한 미국 항공사로 한동안 위세를 자랑했다.
양키 클리퍼의 첫 대서양 횡단 당일 촬영된 필름

이 무렵부터 팬암은 원양 정기선과의 경쟁을 위해 승무원들에게 기존까지의 관행이던 가죽 재킷과 실크 스카프를 제복 대신 해군 스타일의 제복을 입혔다고 한다.

2.4. 2차 대전 속의 팬암

그러나 같은 해에 터진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정기 노선은 동년 10월 5일에 운항을 멈췄고,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며 팬암의 국제선 대부분은 군의 산하에서 운영되게 되었다. B-17을 기반으로 하여 만든 보잉 307도 운항 2년차였던 1942년에 미군에 인수당했다.

거기다가 태평양 전쟁 중에 팬암의 태평양 취항지 대부분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팬암은 미군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며 지리적 정보와 인재 등을 미군에 제공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팬암은 군사 작전을 지원을 목적으로 무려 9천만 마일(약 1억 4천만 km) 이상을 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3년 1월에 있던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팬암의 보잉 314인 '딕시 클리퍼(Dixie Clipper)'를 이용했는데, 이는 미국 대통령이 최초로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제 무대에 나간 사례였다.

3. 1945~1950년대 - 전성기

2차 대전이 종결한 후 오웬 브루스터(Owen Brewster, 1888~1961)라는 이름을 가진 상원의원이 팬암의 국제선 독점을 뒷받침하는 '커뮤니티 에어라인 법안'을 발의했지만, 당연히 미국의 여러 항공사들이 반대했던 데다가 브루스터와 팬암과의 유착관계도 발각되어 이 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물론, 브루스터도 의원직을 내려놓게 되었다.[19]

1946년 4월 3일에는 관광객 확보를 위해 인터콘티넨탈 호텔(InterContinental Hotel)이라는 다국적 호텔을 설립했는데, 팬암은 이 호텔을 모든 대륙에 설치하며 자사의 승무원과 승객들의 숙박처로도 활용했다.[20]

1949년에 중국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자회사이던 중국항공공사와 상하이 승차권을 잃어버린 팬암은 태평양 아시아 지역의 허브를 도쿄로 바꾸었고,[21] 팬암은 중남미의 여러 항공사의 설립과 경영에도 관여하게 된다. 동년 4월에 팬암은 '스트라토크루저(Stratocruisers)'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복층 여객기 보잉 377의 런치 커스터머가 되었고, 팬암은 반쯤 눕힐 수 있는 좌석인 슬리퍼리트(Sleeperette)를 메인 덱에, 라운지를 지하에 두면서 호화 여객기 활동을 이어나간다.[22]

1950년 1월에는 'Pan American Airways'에서 'Pan American World Airways'로 공식 사명을 변경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아메리칸 항공의 자회사였던 American Overseas Airways를 인수했으며, 이 무렵부터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승객의 국제화가 활성화되던 시대 상황에 맞추어 다민족의 객실 승무원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인 맥심 드 파리(Maxim's de Paris)[23]와 협업을 시작했고, 맥심은 이후 70년대 초까지도 팬암의 1등석 기내식은 물론, 일반석 기내식 제작과 제공에도 협력하게 된다. 참고로 팬암의 1등석 기내식은 당대 항공사들의 기내식 중 최상급으로 인정받았다고 하며, 1956년과 1961년에 있던 음식 전시회에서 여러 미식가들과 셰프들로부터 최고상까지 수상받기까지 했을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 거기다가 같은 해 5월 1일에는 DC-6B인 Clipper Liberty Bell(N6519C)이 운항하는 뉴욕-런던 노선에 '레인보우 서비스(Rainbow Service)'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의 이코노미 클래스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한다.

3.1. 세계 최초 세계일주 정기 노선 운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트랜스 월드 항공, 아메리칸 오버시즈 항공[24] 등의 미 내부 경쟁자와 BOAC 등의 미 외부 경쟁자가 생겨나자 팬암은 독보적 위치 확보를 위해 1947년 6월 17일에 세계 일주 노선을 개척한다.

DC-4로 운항한 PA001로 서쪽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호놀룰루, 미드웨이 환초, 웨이크 섬, 괌, 마닐라, 방콕을 거쳐 캘커타에서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로 갈아타[25] 카라치, 이스탄불, 런던, 샤논, 간더를 거치는 PA002편을 거쳐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하면서 팬암의 세계 일주 노선이 완성되었다.

이후 1975~1976년경에 보잉 747로 팬암은 마침내 '뉴욕-뉴욕'이라는 순수한(?) 세계일주 노선을 완성하게 되고, 세계 일주 노선은 1982년까지 운영되었다.

3.2. 미국 최초 제트기 도입

사실 팬암은 1952년 10월 말에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106 코멧 3을 총 10(3개 기본+7대 옵션, 총 630만 달러)[26]를 발주해서 1956~57년에 인도받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코메트기가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등의 여러 공중분해 사고를 겪으며 이 주문은 취소되었다.

첫 제트기 주문이 실패로 끝난 경험이 있던 팬암은 1955년 10월 20일에 2억 6900만 달러[27] 정도의 보잉 707 20대와 DC-8 25대[28]를 구매한다. 이후 팬암은 찰스 린드버그와 함께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잉 707을 개발하는 보잉에 수많은 요구와 주문 사항을 제공하며 현대식 제트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보잉 707의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팬암은 제트기 도입에 따라 '현대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해 항공사의 약칭도 'PAA'에서 'Pan Am'으로 바꿨고, 건축가였던 에드워드 L. 반스(Edward L. Barnes)와 찰스 포버그(Charles Forberg)는 날개를 모티브로 한 기존 로고를 대체할 새로운 '블루 글로브' 로고를 만들어 1957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인 노선망을 암시하는 지구 모양과 고속 비행의 기류 패턴을 본뜬 문양이 결합된 이 로고는 팬암 그 자체이자 제트기 시대의 상징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1973년에 로고의 글씨체가 변경되었고, 이 로고는 파산할 때까지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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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0월 26일, 뉴욕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N711PA
파일:보잉 707 최초의 항공편.jpg
1958년 10월 27일, 파리 르 부르제 공항에 주기한 N711PA

1958년 10월 26일에 Clipper America[29]는 122명[30]을 태우고 뉴욕 기준으로 오후 7시에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31]에서 이륙하며 팬암 및 미국 항공사의 제트기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물론, 본격적인 제트 여객기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 PA114편은 캐나다의 간더에서 급유를 위해 잠깐 정차했으며, 총 8시간 41분간의 비행(급유지 경유를 제외하면 7시간) 끝에 파리의 르 부르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파리 기준으로 오전 10시였다.

다만 707 운항 초기에 사용된 707-120은 항속거리가 짧아 대서양 횡단비행을 할 때에는 급유를 위해 전술한 첫 비행 사례처럼 아일랜드섀넌 등에 일시적으로 정착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지만, 1959년 8월 26일에 '인터콘티넨탈(Intercontinental)'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항속거리가 긴 보잉 707-320으로 런던-뉴욕 직항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하면서 중간 급유지 문제는 해결되었다.[32] 이후 1960년 3월 27일에는 DC-8의 운항도 시작하게 된다.

보잉 707은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당시 거리(36m)의 약 1.2배에 달하는 44m에 달하는 동체에다가 최대 163명을 태울 수 있던 당시 기준으로는 대형 기체였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스톤기와 터보프롭기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시속 600마일(약 960km)이라는 속도로 비행이 가능하면서도[34] 그 이전의 비행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진동이 없는(quiet, vibration-free) 편안한 기내를 자랑했기 때문에 이미 그 이전부터 세계 항공계를 지배하다시피 했던 팬암은 보잉 707 제트기를 대량 취항하며 다른 항공사들의 제트 여객기 도입을 활성화시킨 것과 동시에[35] 19세기부터 전성기를 누리던 대형 여객선의 시대의 종지부를 찍었다.

여담으로 707의 첫 운항 당시 이코노미 클래스 기준으로 런던 왕복 노선은 453.6달러[36], 파리 왕복 노선은 489.6달러[37], 로마 왕복 노선은 491.5달러[38]였다. 당시 미국 1인당 GDP가 2763달러[39]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707 유럽 왕복 노선은 미국인의 두 달치 소득 수준이었던 것이다. 첫 운항 당시 팬암의 707 일등석 왕복 운임은 노선에 따라 달랐겠지만 (당시 미국인의 세 달치 소득 수준을 뛰어넘는) 783달러[40][41]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2][43]
1959년 촬영된 팬암의 보잉 707 프로모션 필름

4. 1960년대 - 최전성기

파일:1966년 707.jpg
1966년 7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에서 찍힌 N717PA(B707-321).
파일:팬암 707의 1등석 라운지.jpg
팬암 보잉 707의 1등석 라운지 일러스트

이 시기가 팬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숙련된 항공사(World's Most Experienced Airline)'를 슬로건으로 삼던 팬암은 1967년에 전세계 90개국을 운항했을 정도로 방대한 노선망을 자랑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고가 코카콜라 로고라면, 두 번째로 유명한 로고는 팬암 로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브랜드였다.

1966년에는 당시로는 굉장히 큰 규모인 670만 명[44]의 승객을 수송했고, 1968년에는 남극을 제외한 6대륙 86개국 81,410마일(131,000km)의 노선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당시 흑자를 기록하던 팬암의 현금 보유고는 약 10억 달러[45]였다고 한다.[46] 이렇게 재력이 풍부했던 팬암은 심지어 남대서양에서 미사일 시험장을 만들거나 네바다에서 핵 엔진 테스트 연구소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프레지던트 스페셜(President Special)' 서비스를 이용하던 1등석 승객들을 위해서 미모의 승무원들이 하늘색 제복을 입고 미소를 지으며 로스트비프를 승객의 요청에 따라 카빙해주는 모습은[47] 60년대 항공여행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이 주로 짓던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는 아예 '팬암 스마일(Pan Am Smil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승무원들은 전 세계에서 다국어를 구사하는 대학 졸업자들 위주로 선발했다.

1967년 기준으로 팬 아메리칸 항공은 52기의 보잉 707과[48]과 15대의 보잉 727, 18대의 DC-8을 운용했는데,[49] 707과 DC-8은 주로 환태평양과 대서양 및 세계일주 노선 등 주력 국제선에 사용되었고, 720과 727은 주로 남아메리카 노선이나 후술할 서베를린 노선, 극소수의 국내선에서 사용되었다.

당시 비틀즈, 마리아 칼라스 등 많은 유명인사들은 팬암을 애용해서[50] 자연스럽게 텔레비전과 잡지의 지면을 차지하는 일이 많았고 특히 1964년 2월 7일에 약 4천명의 팬들이 모인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비틀즈를 태우고 도착한 N704PA(B707-331, Jet Clipper Defiance)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51]

다만 팬암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과 오키나와 등지에 미군 수송용 전세항공편을 많이 운항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맥도날드처럼 소위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52] 심지어 팬암의 여객기는 세계 각국의 수반들이 탑승하는 경우도 잦아서 'CIA가 수카르노 대통령 하의 인도네시아 정부가 전세한 팬암의 비행기에 도청장치를 붙인 후 매춘부들을 객실 승무원으로 위장시키는 작전을 짰다'는 등의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혹자는 "팬암은 비틀즈를 뉴욕으로, 군대를 전쟁터로, 음식을 베를린으로 가져왔다"는 재치있는 코멘트로 당시 팬암의 국제적 영향력을 요약했다.

4.1. 아이들와일드 공항에 새로운 터미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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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암 터미널 건설 현장. 팬암 터미널 개장 당시 광고.
1960년에 만들어진 팬암 터미널 홍보 영화.

팬암은 1950년대에 1960년 제트 시대를 맞이하여 마침 한참 건설 중인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에 새 터미널을 짓는다는 계획을 짰다. 문제는 팬암이 할당받은 부지가 6.9헥타르에 불과했고, 이에 건축가 발터 프로코쉬[53]는 1956년부터 팬암의 새 터미널을 설계하기 시작하고 1957년 4월 4일에 이 디자인을 공개하여 대중들과 전문가들에게 모두 호평을 받게 된다.

프로코쉬는 설계 과정에서 공항 지붕에 큰 지붕을 덮어 승객과 직원들, 화물이 기후 변화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항공기를 본관 바로 아래에 주차하게 했는데, 이렇게 하면 주기장까지 뻗어 있는 터미널 지붕 덕분에 천장이 없는 오픈 탑승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Saucer Roof'라고 불리는 이 지붕은 32개의 강철 와이어가 중앙 기둥에 연결되어 지지하는 1.6 헥타르짜리였는데, 비행기의 대부분을 덮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편히 탑승할 수 있도록 했으며, 보딩 브릿지가 채택되어 필요없을 듯 하였으나 이 점을 매우 잘 살리기 위해 보잉 747 도입 과정에서 새 보딩 브릿지가 들어올 때까지 탑승교에 천장이 없었다. 그러면서 제트 시대(Jet Age)에 걸맞은 편의시설(지붕)을 갖춘 터미널이라고 팬암은 홍보에 잘 써먹었다.

그리고 원래 터미널과 평행한 방향으로 비행기를 주기시키려던 계획은 제트기 폭발 위험과 공간 부족 등 여러 문제로 기각되었고, 비행기의 기수가 터미널을 향하는 방향으로 주기하는 방향으로 변경되었으며, 89피트*10피트의 개방형 출입구 '에어 커튼'이 정문을 대신하여 승객들을 반겨주는 것과 동시에, 건물의 냉난방도 조절했다. 심지어 항공편이 호출되면 호출된 항공편과 인접한 라운지가 어두워지는 것과 동시에 게이트 출입구가 밝혀졌다. 그리고 터미널 내부에는 '클리퍼 홀(Clipper Hall)'이라는 팬암 역사 박물관과 상용 고객들을 위한 '클리퍼 라운지(Clipper Lounge)'를 만들었으며, 중앙 상부에는 터미널 내부가 다 보이는 '파노라마 룸(Panorama Room)'이라는 식당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미널은 매시간마다 120인승 제트 여객기 8대를 완전히 적재할 수 있었고, 터미널에 설치된 8차선 도로는 2분마다 60여대의 차량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종 설계 결과 터미널은 9,446제곱미터로 아이들와일드의 터미널 중 가장 작았지만, 값어치는 1200만 달러[54]로 만들어져 반대로 아이들와일드의 터미널 중 가장 비쌌다.

팬암의 새 터미널은 원래에는 1958년 말에 운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설계 변경 때문에 1958년 6월까지 건설이 시작되지 않았고, 공사가 지연된 끝에 마침내 1960년 5월 24일에 원래 'Pan Am Terminal', 'Unit Terminal Building(UTB)'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팬암의 새 터미널은 팬암 터미널(Pan Am Terminal)이라는 이름으로 개장되었다.

미국 건축가 협회(AIA,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에서 쓴 뉴욕 여행 가이드는 팬암 터미널을 언제든지 편하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잘 설계한 건물이라고 칭송하면서도 쓸데없는 곳까지 신경 쓴 낭비의 산물이라는 조롱 섞인 평가도 했다. 실제로 팬암 터미널은 완공 후에는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 1910~1961)[55]이 설계한 후 1962년에 개장한 트랜스 월드 항공의 터미널인 'TWA Flight Center' 때문에 비평가들에게 별다른 호평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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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의 정면에는 유명한 청동 조각가 밀턴 헤발트(Milton Hebald, 1917~2015)가 만든 황도 12궁을 묘사한 거대한 조형물이 있었으나 1991년 팬암 도산 이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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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팬암 터미널은 보잉 747 수용을 위해 확장을 하며 팬암 월드포트(Pan Am Worldport)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는다.[56] 당시 팬암이 월드포트의 확장을 얼마나 해댔는지 전술한 것처럼 첫 건축 당시에는 JFK 공항에서 가장 작았던 터미널이 확장 이후 몇 년간 전세계 최대 터미널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될 정도였으며, 철거 직전까지 JFK 최대 터미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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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팬암이 파산을 신청하면서 팬암에 구호 자금을 투자한 델타 항공이 월드포트와 유럽 루트를 모두 가져온 후 월드포트의 이름을 '터미널 3(Terminal 3)'로 바꾸고 팬암의 장거리 루트를 터미널 3에 다 이관시켜 버린다.

2006년에는 제2터미널과 월드포트의 리모델링을 위해 1000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2007년에 리모델링이 끝나자 델타 항공의 수석 부사장 조앤 스미스(Joanne Smith)는 새 바닥과 조명과 전광판이 지붕을 더 돋보이게 해 '역사적인 공항'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2010년 8월 4일에 델타 항공은 새로운 국제선 터미널로 쓸 제4터미널 슬롯 확보와 주기장 확보를 위해 제3터미널을 철거하기로 했고, 실제로 제4터미널 확장 공사는 2010년 11월에 시작해 2013년 5월에 완료되었다.

철거 발표 이후 여러 시민단체들이 월드포트 보존 운동을 벌였고, 뉴욕주 역사 보존국(New York State Historic Preservation Office)에 미 근현대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라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2001년에 이미 월드포트에 대한 미국 국립 사적지 등록 자격을 취소한 전적이 있던 뉴욕주 역사 보존국은 1971년 확장으로 인해 지붕이 무의미해지는 등 건물이 과도한 수정으로 인해 역사적 온전성을 상당히 잃었다고 주장하며 2013년 5월에 델타 항공의 손을 들어줬다. 2013년 6월 25일까지 월드포트 철거에 대한 항의가 이루어졌지만, 이미 월드포트의 철거는 시작된 상태였다. 철거가 시작된 날에 이 일이 언론에 보도가 되자 유난히 미국 밖에서 월드포트 보전론이 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월드포트는 2013년 5월 23일 오후 11시 25분(현지 시간 기준)에 텔아비브로 떠나는 델타 항공의 보잉 747-400의 비행을 끝으로 개항으로부터 정확히 53년 뒤인 2013년 5월 24일에 모든 운영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2013년 11월 22일에[57] 그 유명한 지붕의 철거가 완료되었는데, 마침 동년 6월 19일에 '2013년 미국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11곳'에 월드포트를 등재시켰던 워싱턴 DC에 있는 비영리단체인 National Trust for Historic Preservation는 바로 이날에 월드포트를 '잃어버린 10대 역사적 공간'에 등재시켰다. 그리고 2014년 여름에는 전체 터미널 철거가 완료되었다.

월드포트의 건설사 관련 참고자료

4.2. 팬암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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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아메리칸 항공의 사옥, 팬암빌딩

유명한 그랜드 센트럴 역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팬암 사옥은 246.3m 높이, 연면적 26.4만 제곱미터의 59층짜리 건물이었는데, 2021년 3월 기준으로 마천루의 도시인 뉴욕에서 31번째로 높고 미국 전체에서 74번째로 높은 빌딩일 정도로 거대한 건물이다. 하물며 1963년에 완공되었을 당시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업 사무실 빌딩에 전세계에서 가장 넓은 사무실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랜드 센트럴 역 항목의 상단 사진 배경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이 팬암 빌딩인데, 그랜드 센트럴 역과 파크 가 도로를 원웨이로 두르고 있어 더 커보인다. 파크애비뉴 큰길 한중간을 막고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건물의 존재감이 상당히다.

설계는 발터 그로피우스[58]와 피에트로 벨루스키[59]가 맡았다. 다만 이런 거장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했음에도 당대의 수많은 건축 평론가들은 팔각형 모양의 팬암 빌딩이 '지나치게 크고 평면적으로 보인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고 한다.

1959년 11월 26일에 공사를 시작한 후 1963년 3월 7일에 완공되었으며, 남북면에는 'PAN AM'이라는 글씨가, 동서면에는 '블루 글로브'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60]

1970년대 후반에 경영이 악화된 팬암은 1981년에 이 빌딩을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 회사(Metropolitan Life Insurance Company, 메트라이프(MetLife)라는 약칭으로 유명하다.)에 매각했는데, 이후에도 팬암 로고는 한동안 유지되었지만 1991년에 팬암이 파산하자 메트로폴리탄은 곧바로 'PAN AM' 간판을 'MetLife'로 교체한 것은 물론, 빌딩 이름도 메트라이프 빌딩(MetLife Building)으로 교체했다. 이후 2005년에 메트라이프는 Tishman Speyer Properties의 합작회사와 뉴욕시 직원퇴직연금기금, 뉴욕시 교원퇴직연금기금에 이 빌딩을 당시까지 미국 사무실로써는 최대 금액인 17억 2천만 달러에 매각했다.

이곳의 옥상에는 헬리포트가 있었는데, 이곳은 팬암이 외부입찰 업체인 뉴욕 항공(New York Airways)에 운영권을 주어 1965년 12월 22일부터 1968년 2월 18일까지 헬리콥터 서비스를 운영했다. 이 서비스가 운영될 당시에는 탑승 40분 전에 팬암 본사에서 체크인을 하면 옥상 헬리포트부터 JFK 국제공항의 팬암 터미널까지 단 10분 만에 헬리콥터를 타고 팬암의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고 한다. 1966년 기준으로 팬암 빌딩의 헬리포트 서비스는 JFK 월드포트에 하루 23회 운항하였으며, 이외에도 하루 13회의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과, 5회의 JFK 제5 터미널인 TWA터미널 그리고 12회의 라과디아 공항에 취항하였으나 주말에는 운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위험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식과 승객 부족, 계약 문제 때문에 10년 가까이 헬리포트를 운영하지 않다가 1977년 2월에 헬리포트 서비스를 재시작했다. 당시 영국항공에어 프랑스콩코드 탑승객들은 팬암과 이들 항공사의 협약을 통해 팬암 본사에서 체크인하거나 JFK 착륙 직후 바로 뉴욕 맨해튼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 5월 16일에 헬리포트에서 일어난 시코르스키 S-61L(N619PA)의 착륙 후 탑승대기 중[61] 오른쪽 앞 랜딩기어가 부러지면서 회전중이던 로터가 사람을 덮쳐 4명이 사망한 사고에 의해 헬리포트는 운항 재개 약 3개월 만에 완전히 폐쇄되었다. 또 1979년 4월 18일에도 S-61L(N618PA)이 테일 로터 기어박스가 찢어진 후 추락하며 사망자 3명과 중상자 13명이 나오는 사고가 났고, 뉴욕 항공은 그날로 바로 운항이 정지되었다고 한다.

1975년 2월 3일에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회장 일라이 M. 블랙(Eli M. Black. 1921~ 1975)이 팬암 빌딩의 44층의 창문을 가방으로 부수고 투신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팬암이 망한 지 30년이 넘은 현재에는 팬암 이름이 붙은 채로 나오기는 어렵게 됐고 간판이 바뀐지도 오래되어 요즘은 보통 메트라이프 타워로 불리는데, 뉴욕 배경의 영상물에서는 운이 좋으면 뒷배경으로나마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작품들 중 가장 특이한 사례는 단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팬암 빌딩은 외면이 깎여 어벤져스 타워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건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4.3. 세계 최초 컴퓨터 예약 시스템 도입

팬암은 1964년 IBM과 함께 PANAMAC이라는 예약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 예약 시스템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예약 시스템이저 세계 최초로 민간에서 구축된 GIS 시스템이었다.

팬암 본사 4층에 서버가 구축된 이 시스템은 취항 도시에 관한 도시 정보, 국가 정보, 공항, 운항 기종, 호텔 및 식당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4.4. 팬암의 서베를린 루트(IGS, Internal German Service)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이 베를린을 오가는 자체적인 상업용 항공 서비스 제공을 금지했기 때문에 냉전이 끝날 때까지 루프트한자 등의 서독의 항공사는 동독의 하늘을 가로질러서야만 갈 수 있는 서베를린에 갈 수 없었다. 팬암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서독과 서베를린을 오가는 노선망을 운항했는데, 특히 1966년부터 보잉 727로 서베를린 노선을 운항할 무렵에는 팬암이 서베를린 운항은 지속적으로 서베를린 전체 상업 항공 교통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이 노선은 팬암의 여느 항공편보다도 더 많은 승객들이 탑승했다고 한다. 그리고 팬암은 주로 독일인 승무원과 미국인 조종사로 구성된 베를린 승무원 기지를 운영하여 IGS 항공편에 직원을 배치했다.[62]

4.5. 세계 최초로 초음속 여객기(SST)를 도입하려 했던 계획

팬암은 1963년 6월 3일에 아에로스파시알-BAC 콩코드BOAC[63]에어 프랑스와 함께 2대의 옵션을 포함해 총 8대의 콩코드를 각각 주문한다. 이는 브라질의 팬에어 도 브라질(Panair do Brasil)[64]의 1961년[65] 이후 첫 주문으로 팬에어가 도산[66]으로 인해 1965년 취소가 되면서 팬암이 실질적으로 콩코드를 첫 주문한 회사가 되었다.

이후 컨티넨탈 항공, 아메리칸 항공, 콴타스, 에어 인디아, 일본항공 등이 콩코드를 줄줄이 주문했지만, 1972년에 에어 캐나다유나이티드 항공이 주문을 취소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에는 오일 쇼크로 인해 팬암과 TWA가 1월 31일에 동시에 콩코드 주문을 취소하며 영국 항공과 에어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항공사들이 콩코드 주문을 줄줄이 취소해버린다.

그리고 팬암은 보잉이 만들 예정이던 초음속 여객기 보잉 2707도 처음으로 주문을 하는데 이는 팬암이 또한 B2707의 런치 커스터머가 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팬암은 B2707에 대한 관심을 먼저 보이며 B2707을 먼저 주문했지만 B2707의 프로젝트가 지연되자[67] 항공사들이 SST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콩코드를 추가로 주문한 것이었다.[68]

4.6. 세계 최초로 민간 우주 비행을 시도하려 했던 계획

팬암은 일찍부터 우주 여행에도 눈을 기울이며 닐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하기 1년 전인 1968년부터 1971년까지 'First Moon Flights Club'을 운항하며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우주를 여행할 승객들의 예약을 받기까지 했다. 실제로 팬암의 달 비행 예약이 시작된 1968년에 개봉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영화에서 팬암의 우주비행선 'Space Clipper'가 나오자 사람들은 팬암의 이러한 행동이 진지한 행동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당시 팬암의 달 비행 노선을 예약한 사람은 90개국에 거주하는 약 93,000명이었다고 하며, 그 중에는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과 전설적인 명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명사들도 있었다.[69] 팬암은 이 항공편이 2000년경에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70] 만약 이게 실현되었으면 팬암은 세계 최초로 민간우주비행을 운영한 항공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1971년 3월 3일에 재정에 부담을 둔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팬암은 프로그램 종료 18년 후인 1989년에도 팬암 대변인은 이 프로그램이 '일정이 조금 어긋나 있다'고 말하면서도 '목록을 아카이브에 보관하고 있으며 항공사가 정규 서비스를 시작할 때 그 목록을 꺼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팬암은 이로부터 2년 뒤인 1991년에 파산했고, 이 프로그램은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그리고 민간이 주도한 최초의 우주비행은 팬암이 파산한지 29년이 지난 2020년 5월 31일에야 크루 드래곤으로 성사되었다.

4.7. 세계 최초 광동체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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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암은 1967년 모든 주문한 기체들이 연구 개발 단계에 들어서자 대대적으로 보잉 747과 SST 기체들에 대해 홍보를 시작한다. 참고로 가장 위에는 콩코드, 가운데는 보잉 747-100이고, 아래는 보잉 2707이다.[71]

사실 팬암의 후안 트리페 회장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보잉에 '707의 2.5배 정도 되는 여객기를 제작해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대형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보잉은 1963년부터 시작한 미 공군의 초대형 수송기 프로젝트에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1964년 5월에 CX-HLS(CX-Heavy Logistics System)이라는 시제기 방안을 제시한다. CX-HLS는 기체 앞에서 적재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조종석이 있던 기수부에 도어가 포함되었는데, '그러면 조종석은 어떻게 할 거냐?'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겠지만, 보잉은 조종석을 화물 구역 위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미 공군은 1965년에 록히드가 설계한 C-5를 초대형 수송기로 채택하게 된다. 비록 CX-HLS의 개발은 실패했어도 전술한 아이디어들은 보잉 747 개발에 완전히 계승되게 된다.

1965년에 팬암의 후안 트리페 회장과 보잉의 윌리엄 M. 앨런(William M. Allen, 1900~1985) 회장은 1965년 여름휴가를 알래스카에서 함께 낚시하는 것으로 보냈고, 이때 이 둘은 미리 선약된 계약을 맺으면서 보잉 747을 본격적으로 처음으로 언급했으며, 팬암은 1966년 4월 13일에 보잉의 50주년 기념식에서 25대의 보잉 747을 5.25억 달러[72] 가격을 주고 주문했다.[73]

보잉은 당시까지만 해도 747만큼 거대한 여객기를 조립할 만큼 큰 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는데, 약 50개 도시를 검토한 결과 원래 보잉의 공장이 있던 워싱턴주 시애틀로부터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워싱턴 주 에버렛 근처 페인 필드의 군사 기지에 인접한 부지에 새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1966년 6월에 3.2제곱킬로미터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날에도 용적 기준으로 가장 큰 건물로 남아있는 새 공장을 짓는다. 이 공장은 팬암의 파산 후에도 보잉의 광동체 여객기를 제작하는 장소로 쓰이게 된다.

팬암은 이전에 보잉 707에서 그랬던 것처럼 항공계의 VVIP로서 보잉 747의 기본 외형부터 사양까지 모두 결정하는 등 개발에 깊게 관여했는데, 이후 항공 및 보잉 역사학자들은 이를 역사상 최대 단일 항공사가 한 항공기 설계에 관여한 사건이라 하였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잉 및 항공업계에 없을 일이라고 칭송하였다.[74] 그리고 팬암은 한때 보잉 747의 설계 팀장인 조셉 프리드릭 "조" 서터[75]와 잡음이 있어 알렌 회장에게 최고 기술자 교체를 요구한 적까지 있었다고 한다.[76]

그리고 보잉은 747 개발 초기에는 전술한 보잉 2707을 주력으로 밀고 747은 화물기 위주로 쓰려고 했기 때문에 전술한 CX-HLS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화물기 설계가 편하도록 화물을 기수부로 선적할 수 있게 콕핏이 있는 기수부만 2층 설계를 하게 되었고, 뒤쪽은 1등석 승객들을 위한 라운지로 설계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어퍼덱에도 탈출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어퍼덱도 창문의 수를 3개에서 10개로 늘리고 길이도 늘린 후 좌석(주로 비즈니스석)을 배치하는 식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프랫 & 휘트니도 팬암과 보잉과 협업하여 하이 바이패스 터보팬 엔진인 JT9D를 개발했는데, 이는 이전의 터보팬 엔진보다 연료를 1/3 적게 소모하면서 출력은 초기 터보제트 엔진의 2배나 달한 고성능 엔진이라 보잉 747의 크기를 키우는 데에 도움을 줬다.

거기에 1968년 기준으로 747 개발에 든 프로그램 비용은 1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89억 달러(약 12조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참고로 보잉 747 설계 시작부터 747이 처음으로 롤아웃되기까지는 통상적인 기간의 2/3인 28개월이 걸렸는데, 이 빠른 작업 속도에 당시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악스러운 반응까지 보였다고 한다. 여하튼 1968년 9월 30일에 세계 각지의 언론인들과 747을 주문한 26개 항공사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에버렛 공장에서 최초의 보잉 747인 N7470이 롤아웃되었고, 1969년 2월 9일에 N7470은 처음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후 동년 3월 5일에는 팬암 도장을 입은 최초의 양산 기체이자 2번째 생산기인 N747PA가 롤아웃되었고, 동년 6월 초에 있던 파리 에어쇼에서 보잉 747이 처음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최초로 팬암에 인도된 747은 1969년 12월 12일에 인도된 N733PA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잉 747은 전체 길이가 70m에 육박하는 거대한 비행기였고, 6m가 넘는 폭을 자랑하는 동체에는 2개의 복도와 9개의 좌석[77]을 놓을 수 있었으며, 최대 490명의 승객까지도 운송할 수 있었다.[78] 거기에 2층에는 전술한 것처럼 1등석 승객들을 위한 라운지를 설치했고[79], 일반석도 좌석의 폭을 이전보다 10% 넓히고 소형에 흑백이던 영화 스크린도[80] 대형 컬러 스크린으로 바꾸는 등 승객들의 편리함을 늘리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변화를 암시하듯 도색도 기체 중앙에 'PAN AMERICAN'이라고 적힌 도색도 기수 부분에 'PAN AM'이라고만 적는 것으로 바꿨다.[81][82]

그러나 보잉은 747 개발과 새 공장 건설에 너무 많은 돈을 써서 보잉은 기업의 존폐 위기까지 몰릴 정도로 엄청난 부채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보잉의 부채는 2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은행에 빚진 12억 달러는 당시 미국의 모든 기업의 은행 부채를 합친 기록을 능가했다고 한다. 앨런 보잉 회장도 후에 "(보잉 747 개발은) 우리에게 너무 큰 프로젝트였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5. 1970년대 - 전성기 속의 쇠퇴의 조짐

5.1. 세계 최초로 보잉 747 운항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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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월 15일, 세례식 당시에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N735PA와 포드 트라이모터[83]

팬암은 1970년 1월 공항의 호환성과 대중들의 체험을 위해 미국 내부의 공항에 747 시범운항을 했는데,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인 패트리샤 라이언 닉슨이 1970년 1월 15일에 팬암 보잉 747로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시범운항을 하던 중, 트리페 회장의 은퇴 후 팬암의 3번째 회장이 된 나집 할라비[84] 회장과의 만남에서 그곳에 있던 N735PA에 Clipper Young American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747의 첫 상업운항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이 세례식에서는 샴페인 대신 빨간색, 흰색, 파란색 물이 항공기에 뿌려졌다고 한다.
보잉 747 첫 상업운항 기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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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47 첫 상업운항의 승무원들

보잉 747 첫 운항 당시 실제 영상

보잉 747의 최초 상업운항은 N736PA(cn 19643/11, Clipper Victor → Clipper Young American → Clipper Victor)가 운항한 1970년 1월 22일자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런던 히스로 공항 노선 운항이었다. 이 비행에서 N736PA는 335명의 승객과 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오전 1시 52분(동부 표준시 기준)에 뉴욕에서 이륙하여 6시간 43분 뒤인 오후 1시 35분(GMT 기준)에 런던에 착륙했다. 이 비행의 승객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 여배우 라켈 웰치도 있었다.

이 비행에는 한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뉴욕에서 런던까지 원래 첫 상업운항을 하려던 기체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인 팻 닉슨이 친히 이름까지 부여한 N735PA(cn 19642/10 Clipper Young American → Clipper Victor → Clipper Spark of the Ocean)였는데, 이 기체가 이륙 전에 활주로에서 4번 엔진의 문제[85]가 발견되어 이륙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그래서 팬암은 6시간 동안 비행이 지연된 후 보잉과 팬암의 이미지를 위해 N736PA를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이름과 테일 넘버를 모두 N735PA의 것으로 변경해 상업운항을 한다.[86] 이후 N736PA는 참 운이 없게도 그해 8월 2일에 쿠바에 납치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87] 그래도 그 이후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잘 날아다니다가 무려 583명이 사망[88]테네리페 참사의 주인공이 되어 잿더미가 된다. 이 끔찍한 참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 뿐만 아니라, 박물관으로 모셔져야 했을 정말 역사적인 기체였던 이 N736PA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기에 두고두고 잊혀질 수 없는 항공기 참사로 기록된다.

팬암은 이렇게 세계 최초로 광동체를 인도받고 운항한 항공사로 전세계의 항공 산업을 또 한번 혁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팬암을 위시한 747을 도입한 각 항공사들은 "대부분이 빈 좌석으로 날아갈 정도라면[89] 조금 정도 운임을 낮춰도 자리를 메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며 항공권 가격을 낮췄고, 그 결과 이코노미 클래스의 운임이 단체 할인에 의해 이전보다 크게 저하되었고, 그 덕분에 일반 서민도 이전보다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용이해지며 해외여행 사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 기세를 틈타 팬암은 1970년에 1100만 명의 승객을 200억 마일(320억 km) 가량 운송하는 등 규모를 더욱 키웠다.

여담으로 747 운항 초기인 1970년 10월 기준 런던-뉴욕 왕복 노선 기준으로 1등석은 750달러[90], 이코노미석은 비수기/성수기 기준으로 각각 420/510달러[91]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1인당 GDP가 5234달러[92]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술한 707 운항 극초기에 비해 가격 문턱이 정말 많이 낮아진 셈이다. # 그리고 1970년 747기가 도입되었을 때 호주에서 런던까지의 왕복 티켓 가격은 평균적인 호주인의 24주치 수입 수준이었으나 1990년까지 5주치 수입으로 폭락했고, 2000년에는 2주치, 2010년대 후반에는 1주치 미만으로 더 떨어졌다. #

그리고 기존 항공기들로는 태평양 노선도 벅찼던 시절이던 1973년에 팬암은 이란이란항공과 함께 미국에서 대척점에 가까운 테헤란이나 도쿄, 시드니, 웰링턴, 홍콩 등에 취항 가능한 기체를 보잉, 맥도넬 더글라스, 록히드에게 설계를 요구한다. 그러자 3개 회사는 보잉 747, DC-10, L-1011을 기반으로 장거리 기체를 제안하지만 팬암은 보잉에게 개발하도록 요구하고 마침 중형기가 없었던 보잉은 1960년대 말부터 나왔던 중형 광동체 기종 설계도 할겸 수락했으나, 팬암과 이란항공이 더 빠른 속도를 원했고 당시 기술로는 쌍발기로는 이 항속거리가 불가능 했기에 747의 동체 길이를 줄여 보잉 747SB[93] 모델을 특수모델로 따로 냈는데, 이 비행기가 바로 보잉 747SP이다. 참고로 보잉은 보잉 747이 초도비행을 한 시점부터 당시 설계중이던 A300B와 경쟁하기 위해 프로젝트가 논의되기 시작한 보잉 767을 메인 중형기로 내놓았다.(참고로 보잉 767은 1969년부터 'B767 프로젝트'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팬암은 1976년 3월 5일에 Clipper Liberty Bell(N531PA)를 인도받았고, 동년 4월 25일에 Clipper Constitution(N532PA)이 로스앤젤레스-도쿄 직항 노선을 운항하는 것으로 747SP 운항을 시작하며 장거리 직항 노선이 가능한 시대를 열었다.

5.2. 세계 최초 남북극 민항기 세계일주

1977년 10월 28일에 팬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Flight 50'으로 기획됐다. 당시 사용된 기체는 보잉 747SP인 Clipper New Horizons(N533PA))였으며, '샌프란시스코→북극을 경유하여 런던→케이프타운→남극 대륙을 경유하며 오클랜드→샌프란시스코'를 54시간 7분 12초 기록으로 달성했다.
Flight 50 당시 기록영상

이후 남북극 민항기 세계일주 노선은 단 한 편의 여객편이 운항된적 없으나 최근 기획되고 있다.##[94]

6. 1980~1990년대 - 몰락기

팬 아메리칸 항공의 몰락에 관한 동영상이다. 특히 4분 37초부터 나오는 팬 아메리칸 항공의 마지막 순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잡한 마음까지 들게한다. Death of an American Dream

6.1. 부실 경영의 내막

사실 후술할 요인들 외에도 70년대 중반 이후의 팬암은 이런저런 문제에 시달렸다. 먼저 1973년에 미군 베트남에서 철군하면서 고수익이 전망된 군이나 정부의 전세편이 대폭 감소했으며, 같은 해에 있던 제1차 오일쇼크에 의한 연료값의 상승으로 돈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는데도 노동조합의 반대로 파일럿과 스튜어디스의 해고도 불가능하며 지출해야 할 돈이 줄지 않아 팬암은 만성적인 적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까지 팬암은 10년 동안 3억 6400만 달러의 적자와 10억 달러의 부채를 기록했고, 이 때문에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팬암은 80개국을 넘던 노선망의 25%와 직원의 30%를 잘라내며[95] 1977년까지는 일시적인 흑자를 냈다고 한다.

6.1.1. 보잉 747 방만 경영 건

파일:external/www.panam.org/Pan_Am_Ad_1976_747-4545-900-600-100.jpg
1976년 보잉 747SP 투입 이후의 신문 광고.

팬암은 개척자 정신으로 태평양 노선과 북대서양 노선에 보잉 747만 투입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며, 심지어 개인 수하물 무게가 기준을 초과할 시에도 추가 요금이 없다고 했다.

팬암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제트기 도입 초기에 보잉 707 같은 대형기를 노선에 투입하면 수요가 자동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에 따른 믿음이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아메리칸 항공에서 오일쇼크 이후 팔아버리거나 소형기로 교환한 보잉 747까지 가져와 투입하여 수요 증가를 도모하였지만 그래도 200명 남짓이 한계였다. 즉 좌석의 절반 가량이 빈 채로 운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의 국제선은 유럽이 압도적이고 그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에 한정되어 있다[96]. 게다가 아시아는 일본을 제외하면(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갈 만한 곳이 없었고[97], 따라서 그다지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만용 끝에 노선의 수익성이 악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위용을 자랑하려고 했으면 DC-10, L-1011이나 실제 역사 속에서 팬암이 파산한 뒤에 출시된 B777, A330으로 했어도 될 일이었다. DC-10, L-1011은 400명 정도의 수용 인원을 가져서 보잉 747보다 한 체급이 낮았기 때문이다.

6.1.2. L-1011 도입 당시

팬암은 운영비용 절감을 위해 1980년에 들어서 운영비도 절약할 겸 중대형 기종을 투입해 연료를 절약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선택한 기종은 L-1011-500 트라이스타.

그런데 팬암이 L-1011을 도입할 시점은 후술할 내셔널 항공이 인수된 직후의 시점이어서 이미 내셔널 항공 소속 DC-10이 팬암 소속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팬암이 따로 구입한 L-1011과 내셔널 항공 소속 DC-10이 동시에 팬암에 들어오는 상황이 펼쳐짐에 따라 팬암에는 당시에 취항하던 미국의 모든 광동체 기체들[98]이 혼비하게 되었으며[99] 유지비는 하늘을 치솟았다.

물론 경영진들도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고 DC-10은 1984년부터 순차적으로 매각되었다. 그러다 경영난이 심화되고 ETOPS 기준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돌자, 5년도 안된 L-1011은 ETOPS 때문에 록히드에서 1985년 생산 중단을 선언한 시점을 기하여 델타 항공이나 영국 공군에 헐값에 매각한다. 여기에 1986년 태평양 운항 이원권을 모두 매각할 때 보잉 747SP와 함께 남아있는 L-1011과 DC-10을 유나이티드 항공에 전량 매각한다. 정작 팬암의 L-1011을 인수한 델타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은 L-1011을 적절히 투입해 잘써먹었고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6.1.3. 1984년 신도색 결정 건

파일:external/www.airteamimages.com/41495_800.jpg 파일:external/www.aussieairliners.org/4635.066l.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n_Am_Boeing_747-121%3B_N748PA@ZRH,_July_1986_CAH_(5573637285).jpg
N740PA Billboard N735PA Hybrid Strips N748PA Low Strips

팬암은 1984년 이미지 쇄신을 위해 새 도색을 결정하여 채택하기로 한다. 이 도색을 결정하는데 팬암은 내부에 이 줄을 버리는데 잡음이 생겨 실제 평가를 위해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보잉 747에 3개안의 도색을 칠해버린다. 그리고 후술할 태평양 노선 매각 후 팬암은 보잉 707시절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Racing Strip"이라는 파란색 줄을 버리고 빌보드식 도색을 채택하게 된다.

6.2. 노선 확충을 위한 시도

팬암은 1930년대부터 국내선 확충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개설이 지연되었고,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알레스카나 하와이 같은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어떠한 국내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100][101] 이 기간 동안, 국내선의 4대 항공사였던 아메리칸 항공, 이스턴 항공, 트랜스 월드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의 인수가 거론되어 왔다.[102] 팬암의 마지막 항공사 인수는 1980년 내셔널 항공이었는데, 이 때까지 팬암은 30년 가까이 국내선 루트 개설과 국내선 업체 인수를 꾸준히 제한당해왔다.

특히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있던 17개의 국내선 항공사가 국회에 로비를 해 법령을 얻어냈는데 1항은 17개의 국내선 항공사가 점진적으로 해외 운항이 가능하도록 허가해주는 것이고 2항은 팬암이 점진적으로 국내선 운항이 가능하도록 허가해주는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시점부터 1항은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2항은 1978년 10월 24일에 지미 카터 정부의 항공규제 완화법(Airline Deregulation Act)이 발효되어 '항공노선 개설 자율화'가 되기 전까지 발휘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항공사들이 '팬암에게 국내선 운영권까지 줬다간 독과점이 발생하게 된다'는 논리로 팬암의 국내선 운영권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몇 건의 신규 개설 루트를 빼앗기는 사건이 있었다. 이 중 세 건이 팬암 도산 직후에 알려졌다. 당시에는 항공노선 개설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였기에 CAB가 노선의 수익성을 검토하여 정부에 개설 요청을 하는 방식이었다.
정부 제한이 풀리던 1978년에는 이전에는 국내선 외에는 북미 지역 등의 근거리 노선밖에 운항할 수 없던 유나이티드 항공, 델타 항공, 아메리칸 항공 등이 팬암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팬암은 국내선 확충에 더 다급해졌다. 이들 항공사들은 이미 국내선이 탄탄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의 주요 도시를 가려고 하면 환승을 하지 않고 간편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팬암은 국내선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JFK 국제공항으로 도착해 거기서 환승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6.2.1. 내셔널 항공의 인수와 위기

결국 1980년 10월 26일에 팬암은 국내선 확보를 위해 마이애미를 기반으로 동해안 위주 국제선과 유럽 노선을 운항하던 내셔널 항공을 4억 3700만 달러[103]에 인수한다. 그러나 후대의 많은 이들에게 이 인수는 보잉 747의 무리한 운용보다도 팬암이 망하는 데 훨씬 크게 기여한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이런 경영 악화의 책임을 지고 9년간 CEO로 일해온 윌리엄 T. 시웰(William T. Seawell) 회장은 내셔널 항공 인수 10개월 후인 1981년 8월에 사임하게 된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79년에서 1980년 사이에 팬암의 수익은 62% 증가했지만, 무리한 합병으로 인해 연료 비용은 제2차 오일 쇼크 와중에 무려 157%나 증가했고, "기타 비용"도 74% 증가했다고 한다.

6.3. 위기 극복을 위한 조치

팬암의 재무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팬암은 팰컨 항공의 전체 지분의 50% 정도의 주식을 매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업과 무관한 여러 자본들을 매각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팬암 빌딩을 4억 달러로 메트라이프에 팔았다.[104] 팬암 빌딩을 매각한 후에도 팬암은 1,890만 달러의 손해를 봤다.

이후 에어 플로리다 창업자이자 브래니프 항공의 외항부문 총책임자로 있었던 에드워드 애커(C. Edward Acker)[105]가 새 회장으로 취임하여 1981년 9월에는 팬암의 호텔 부문이던 인터컨티넨탈 호텔 체인을 매각한다. 팬암은 3건의 매각을 통해 9억 달러의 현금을 확보했다.

1982년 10월 31일에는 전술한 팬암의 세계 일주 노선을 단항시킨 것도 모자라 수익성이 나쁘다며 델리, 방콕, 홍콩 노선을 폐지했다. 1983년에는 성수기 수송인원을 늘리기 위해 팬암의 보잉 747-100SF 4대와 플라잉 타이거[106]보잉 747-200 3대의 상호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결국 1983년에는 IATA의 통계에 의한 여객, 화물 운송 실적 세계 제일의 자리를 일본항공에 넘겨주게 되었다.

6.4. 파산과 분해

1984년 팬암은 연비가 떨어지는 구형 여객기를 대체하기 위해 에어버스에서 A300, A310, A320을 주문했지만[107] 경영난으로 A300A310만 들여온다. 그리고 1985년 중형기들의 에어버스 계열 통일과 국내선 확충 자금 조달을 위해 보잉 747SP, DC-10, L-1011태평양 노선을 자신들을 추월한 당대 최대의 항공사 유나이티드 항공에 매각한다.

당시 태평양 노선은 국내외의 여러 항공사들의 성장으로 인한 가격 경쟁 심화로 수익이 악화되었지만, 이원권 등의 여러 이익 때문에 고수익이 예상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팬암의 운영진들 대부분은 태평양 노선 매각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팬암은 태평양 노선을 유나이티드 항공에다 팔아넘겼다.

하지만 이 결정은 사실상 팬암의 명줄을 잘라버린 어리석은 행위였는데, 당시 팬암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노선이 한창 수요가 증가하던 아시아/태평양 노선이었기 때문이다.[108] 이렇게 팬암은 750만 달러의 자금과 전 노선의 1/4을 맞바꾸게 되었다.

1986년 2월 유나이티드 항공은 팬암으로부터 넘겨받은 보잉 747들과 승무원들로 태평양 노선 운항을 시작했다. 이로써 팬암은 미국의 국제 항공사 지위에 금이 갔다. 이는 1989년 노스웨스트 항공의 인수 추진으로 이어지는데, NWA의 인수는 마이에미와 뉴욕발 국내선 강화와 수익성이 좋았던 태평양 횡단 노선 재진출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주주 중 한 사람이 NWA의 더 좋은 조건 제시로 팬암 대신 NWA의 지분에 바로 투자하면서 실패한다. 덤으로 1986년에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여파로 그 해 여름 유럽행 승객이 급감하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서비스의 질도 이전에 비해 급격히 악화되면서 당시 팬암을 탄 한 승객은 후에 '팬암이 파산했단 뉴스를 봤을 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는 조롱까지 할 정도였다.

1986년부터 팬암은 A310을 대서양 노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팬암은 다른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미국의 날개라는 옛 이미지 때문에 테러에도 시달렸다. 1986년에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팬암 73편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109]들에 납치된 뒤 총격전이 벌어져 20명 이상이 숨졌고, 1988년 12월 21일에는 팬암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로커비 테러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탑승자 259명 전원과 로커비 주민 11명이 사망했고, 연락편에서 오는 수하물 검사를 소홀히 한 사실이 발견되어 벌금을 물었을 뿐만 아니라 테러 피해자들의 유족들 100명 이상이 팬암에게 3억 달러의 소송까지 걸며 이미지도 추락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전부터 해온 적자체질 개선으로 나름 여유가 생기며 하려던, 사실상 팬암의 재부흥 계획이나 다를 바 없던 일본 노선 부활도 전부 백지화가 되었다. 로커비 테러 직전인 1988년 3분기는 항공기 인테리어 교체와 정시 발착 준수 프로그램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팬암 역사상 가장 수익성이 높은 기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수익을 냈지만, 이 테러로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팬암은 로커비 테러로 총 3억 5천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봤다고 한다.

1990년 걸프 전쟁으로 유가가 상승하고 대서양 노선 승객이 급감해 항공업계 전반이 적자를 기록했을 때, 가장 재정이 나빴던 팬암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그 해 유나이티드 항공에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노선을 매각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1991년 1월 8일 파산 보호 신청을 하게 되고, 델타 항공에 마이애미-파리 노선을 제외한 전 대서양 노선과 유럽 간 노선[110], 팬암 셔틀[111]과 월드포트 터미널, 45대의 제트기를 총합 14억 달러에 매각하게 되었다. 팬암의 자산 매각 조건은 델타에게 투자 비용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이제 팬암은 과거의 모든 영광들을 델타 항공에게 팔아넘긴 후 11월 1일에 본사를 뉴욕의 팬암 빌딩에서 마이애미 지역의 새 사무실로 옮기고, 약 60대의 항공기와 7,500명의 직원을 남긴 채 그나마 수익성이 있던 유럽 노선 2개[112]와 남미와 카리브 해 노선만 남은 채 1991년 10월부터 64년 전에 창업될 당시 본거지였던 마이애미 국제공항을 허브로 하며 사실상 새 출발을 시도했다. 이렇게 팬암은 90개국을 운항하던 거대 항공사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노선 2개만 운항하는 사실상 지역 항공사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팬암의 상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었고, 수익은 재편 계획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낮았으며, 이 때문에 당연히 델타 항공은 팬암에 큰 투자를 해주지 않았다. 당시 델타 경영진은 '팬암은 하루에 3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말까지 남겼을 정도였으며, 부족액이 1억 달러에서 2억 달러 정도일 거라고 추정했던 팬암의 이사진들은 1991년 12월 3일까지 TWA의 최대 주주였던 칼 아이칸에게 1,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아내려 애썼다, 당시 델타 항공의 CEO였던 론 앨런(Ron Allen)과 다른 고위 경영진들은 팬암이 추수감사절 이후에 받기로 했던 2500만 달러를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팬암의 자금 투자 요청을 받은 회사들은 팬암의 요청을 거부했으며, 심지어 1991년 12월 4일에 팬암의 사무실에는 꺼져.(Shut it down.)라는 전화까지 오는 등 팬암은 이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1991년 12월 4일 오후 2시(동부표준시 기준)에 바베이도스 브리지타운발 마이애미행 436편을 운항하는 Clipper Goodwill(N368PA, B727-221ADV)의 착륙을 마지막으로 항공 산업의 선구자 팬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13]. 팬암의 파산으로 7,500명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으며, 팬암의 파산 후에 팬암의 전 이사진들과 직원들이 델타를 고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1994년 12월에 미국 연방 법원은 델타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1992년에 'Pan American World Airways'의 상표권과 잔존 자산이 관재인에 의해 경매에 걸리며, 팬암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팬암은 1986년 태평양 노선을 유나이티드 항공으로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 IGS를 루프트한자로, 1991년 마이애미에서의 새 시작과 파산때 대서양 노선과 월드포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의 미니 허브와 셔틀 노선들은 델타 항공으로, 마이애미 허브와 노선은 1992년 유나이티드와 아메리칸 항공으로 매각되었으며, 리지널 서비스를 담당하는 자회사인 '팬암 익스프레스'는 TWA로 매각되었다. 이렇게 팬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당시 빅4 미국 항공사에 모두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다.[114]

다만 팬암이라는 이름만큼은 지금도 이곳저곳에 남아있다. 현재 팬암의 로고와 색상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사는 팬암 시스템즈(Pan Am Systems)와 그 자회사이자 미국의 클래스 2 철도회사인 팬암 레일웨이즈(Pan Am Railways)가 있는데, 길포드 운수회사가 팬암의 상표와 컬러를 사들이고 항공사업을 벌이면서 팬암 시스템즈(Pan Am Systems)으로 재탄생했다가 항공사업은 철폐되고 철도가 살아남은 상태다. 그러나 팬암 레일웨이즈도 CSX 교통에 인수합병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팬암의 부활을 자처하면서 지역 항공사로 다시 재출발하려는 시도를 한 회사도 많았으나, 이미 항공업계가 정글에 가까운 무한경쟁체제로 돌변한지 오래라 얼마 못 가서 망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가(Pan American World Airways, 1927~1991) 죽고, 살아났다가(Pan American Airways, 1996~1998) 다시 죽고, 또 되살아났지만(Pan Am Systems 산하 Pan American Airways, 1998~2004) 또 죽으며 사생아를 남기고, 또 살아났다가 (Boston-Maine Airway 산하 Pan Am Clipper Connections, 2004~2008) 죽었다가, 또 살아났다가 (World-Wide Consolidated Logistics, Inc 산하 Pan American Airways, 2010~2012) 또 죽었다가, 또 다시 살아났다가 (Pan American Airways Global Holdings 산하 Pan American Airways, 2012~2014) 죽은 미국의 항공사와 운영주체가 동일한, 두번째와 세번째 팬암의 도미니카 공화국 항로가 따로 떨어져 나온 Pan Am Dominica(2003~2012)와 그것이 2015년에 부활하며 생성된 PAWA Dominica(2015)까지 팬암의 부활을 꿈꾸는 시도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 파란만장한 죽음과 부활을 영문 위키에서는 '여섯 번의 부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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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역하면 "아직 최고의 장이 오지 않았어요!!!" 이다. 이로부터 14년 뒤에 그들이 예고한 장이 CHAPTER 11으로 밝혀질 줄은 누가 알았을까...[2] 두 나라 사이의 항공 협정에서 협정 상대국 내의 지점에서 다시 제3국으로 연장하여 운항할 수 있는 권리. 이 이원권은 1985년 말 팬암의 태평양 횡단 노선을 인수한 유나이티드 항공에 계승되었다.[3] 동독 영공에는 서독 항공기가 민항기 조차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루프트한자 대신 팬암이나 에어 프랑스 등의 외항사들이 서베를린서독 국내선을 운항하는 웃기는 일이 40년 간 이어졌다. 이 때 서베를린 서비스를 위해 미국에서 설립한 유령회사가 나중에 크게 성장하다가 39년 뒤에 파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4] 애초에 군 수송기로 개발되었다가 탈락한 747에 민간 여객기로의 전환을 권유했던 장본인이 바로 팬암 사장이었던 후안 트리페였다.[5] 만약 대서양 노선에 보잉 767을 도입하고 ETOPS에 걸려 4발기가 필요한 구간은 707, DC-10 등으로 버티다가 1990년대 들어 A330/A340을 도입, 747은 대량수송이 필요한 구간에만 최소한으로 투입하고 A330과 A340으로 위용을 자랑했었으면 망작의 길을 걷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767은 대서양 횡단 정도는 가능하고, A330은 미국 서부에서 태평양 횡단 정도는 가능하며, A340은 747과 같은 4발기이나 747보다 한 체급 작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했더라면 1995년까지는 망할 일도 었었으니 A330의 항속거리 문제는 충분히 보잉 777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고, A340과 767은 2010년대에 A350이나 보잉 787로 교체하면 되었을 것이다.[6] Airline Deregulation Act of 1978. 미국 항덕들에게 안 좋은 취급받고 있는 법인데 그 이유는 이 법이 생겨난 이후 치열해진 가격 경쟁으로 팬암을 비롯하여 트랜스 월드 항공(TWA), 이스턴 항공 등의 여러 메이저 항공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살아남은 유나이티드 항공, 델타 항공, 아메리칸 항공 등도 가격 경쟁으로 인해 서비스의 질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놈의 가격 경쟁으로 인해 옛날에는 DC-10, L-1011이 날아다니던 구간에 지금은 보잉 757, 보잉 767은 고사하고 보잉 737, A320, 심지어는 CRJ 시리즈가 날아다니고 있다. 물론 보잉 737, A320 등의 협동체가 들어가게 된 것은 이들의 항속거리가 나름 길다는 것도 있지만 A320 정도면 미국캐나다 전체는 물론이고, 미국발 중미 전체와 남미 북단까지 갈 수 있긴 하다.[7] 팬암 103편 폭파 사건(로커비 테러), 팬암 73편 납치 사건[8] 그래서 1986년에 유나이티드 항공이 팬암을 대신하여 서울에 취항했다.[9] 미 공군 역사상 유일한 원수 계급을 단 인물이기도 하다.[10] 이후 미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분리되면서, 초대 공군참모총장이 된다.[11] 이후 1940년 초반 나치즘의 등장과 국제 정세에 대비해 미국 정부와 콜롬비아 정부는 SCADTA의 오스트리아 기업인 지분을 팬암으로 매각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팬암은 이 지분을 인수한다.[12] Juan Terry Trippe, 1899.6.27~1981.4.3.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1644년에 매릴랜드에 정착한 북유럽인의 후손이었는데, 후안(Juan)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트리페의 어머니가 후아니타 테리(Juanita Terry)라는 이름의 베네수엘라인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의 고조부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외전쟁인 1차 바르바리 전쟁에 참전한 해군 장교인 존 트리페(John Trippe, 1785~1810)이었다.[13] 이후 1967년 2월 1일에 브래니프 항공에 인수되었다.[14] Consolidated Aircraft에서 1929년에 제작한 비행정[15] 후에 록히드와 합병되어 오늘날의 록히드 마틴이 된다.[16] 1934년 12월 30일에 초도 비행을 했으며, 대당 가격이 당시 기준으로 약 41.7만 달러였다. 2024년 환율로는 965.7만 달러.[17] 여기서 클리퍼(Clipper)는 19세기의 대형 범선을 의미하는데, 이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팬암은 폐업 시점까지 항공사 콜사인과 기체의 별명, 서비스명에다가 붙이게 된다.[18] 뉴욕-레이캬비크 구간은 팬암이, 레이캬비크-베르겐 구간은 DNL항공(Det Norske Luftfartselskap A/S. 해석하면 '노르웨이 항공 회사'로, 1933년부터 1951년까지 존속한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항공의 전신이다.)이 운항했다고 한다. 당시 기종은 시코르스키 S-43 비행정이었다.[19] 이후 브래니프 항공은 남아메리카, 노스웨스트 항공은 극동지방, 트랜스 월드 항공과 아메리칸 오버시즈 항공은 유럽 노선을 운행하게 되었지만, 전세계 운항권은 팬암만이 허용받게 되었다.[20] 이 브랜드는 1981년 8월 19일에 영국의 한 기업에 매각되었으며, 2020년 11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코엑스를 포함한 각국 도처에 210개의 호텔이 건립되는 등 아직도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21] 팬암은 이후 도쿄에 아예 기내식 공장까지 두었다고 한다.[22] 그러나 '슬리퍼리트' 좌석은 비행 시간을 이전의 절반 가량으로 줄인 제트 여객기가 도입되면서 20여년간 사라져버렸고, 1979년에야 보잉 747에 다시 도입된다.[23] 1893년 파리 8구 마들렌 지구 로얄 거리 3번지에 세워졌으며, 에드워드 7세, 마르셀 프루스트, 장 부가티, 장 콕토, 에드워드 8세 부부, 그레타 가르보,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마리아 칼라스 등이 이 식당의 단골이었고,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3막의 무대이기도 했으며, 독일 점령기에는 독일인 소유 식당으로 바뀌며 헤르만 괴링도 식사를 하기도 했다. 팬암과 협업했던 시기인 1950~70년대가 최전성기였으며(오늘날로 치면 폴 보퀴즈고든 램지 사이의 위상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고든 램지는 현재 최고의 항공사로 평가받는 싱가포르항공의 기내식 컨설턴트를 역임하기도 했다.),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길고 호화로운 공식 연회로 기록된 1971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샤가 주최한 페르시아 제국 2500주년 기념 연회(600명의 손님이 5시간 30분 동안 식사를 했다)에도 식사를 제공했다. 원래는 명성답게 미슐랭 가이드에 별 3개로 등재되었으나 1977년부터 '우리는 다른 식당과는 다르므로 특별한 표시가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미슐랭 가이드 등재를 거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성기 대비 레스토랑의 질이 떨어졌다고 한다. 식당 외관 공식 사이트[24] American Overseas Airlines,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존속한 아메리칸 항공의 자회사. 1950년에 팬암이 인수했다.[25] 팬암은 보잉 707 도입 초기인 1960년까지 세계 일주 노선에서 무조건 항공기 1회 환승을 했다.[26] 2024년 환율로는 7377.6만 달러다.[27] 2024년 환율로는 약 31억 1500만 달러다.[28] 그 중 DC-8은 자기들이 직접 개발에 관여한 보잉 707이 실패할 것에 대비한 '보험' 격으로 주문했다고 한다.[29] N711PA, B707-121. 후에 Clipper Mayflower로 개칭되었다.[30] 1등석 40명, 일반석 71명, 승무원 11명. 승객 중에는 당대의 유명 배우 그리어 가슨도 있었다.[31] 1963년 12월 24일에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개칭되었다.[32] 팬암의 707-320은 이로부터 10일 뒤인 동년 9월 5일에 있던 세계 최초의 제트기 태평양 직항 노선에도 투입되었으며, 707-320이 본격적인 국제선용 제트기로 도입된 이후 이전까지 쓰였던 707-120은 주로 카리브해 노선 등지를 운항하는 데에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33] 참고로 팬암의 당시 홍보물에서는 피스톤기의 1등석/일반석 단일 최대 좌석수는 56/104명이었고, 터보프롭기의 1등석/일반석 단일 최대 좌석수는 67/105명이었으나, 보잉 707의 1등석/일반석 단일 최대 좌석수가 86/163명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팬암은 707-120에 총 111명(1등석 40명+일반석 71명)의 승객을 태웠다.[34] 참고로 팬암은 707 도입 무렵에 '피스톤 비행기로는 11시간, 터보프롭 비행기로는 9시간 반이나 걸리는 유럽도 제트 클리퍼(Jet Clipper)라면 6시간 반밖에 안 걸린다.'는 선전을 자주 했다. 그래서 1958년 7월에 만든 보잉 707 홍보 영상의 제목도 '6 1/2 Magic Hours'이다.[35] 사실 1952년에 나온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106 코멧을 보잉 707이 운항을 시작한 1958년까지 6년간 운항한 항공사는 런치 커스터머인 BOAC를 제외하면 단 3곳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프랑스의 두 항공사(에어 프랑스, UAT)는 1A형만 잠깐 쓰는 것에 불과했고, 남아프리카 항공도 BOAC의 것을 잠깐 임대해 운항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이것은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등 기체 결함으로 인한 공중분해 사고로 인한 악영향이 컸다.[36] 2024년 가치로 약 4871.7달러[37] 2024년 가치로 약 5258.3달러[38] 2024년 가치로 약 5278.7달러[39] 2024년 가치로 29674.6달러[40] 2024년 가치로 약 8409달러[41] 1958년 4월 팬암이 뉴욕-런던 이코노미 클래스 노선 운항을 시작했을 때 일등석 가격. 해당 노선의 이코노미 클래스 가격은 453달러(2024년 가치로 약 4685달러), 이들의 중간 단계격인 '투어리스트 클래스' 가격은 567달러(2024년 가치로 약 6090달러)였다.[42] 참고로 1954년 기준 BOAC 소속 보잉 377의 뉴욕-런던 편도 티켓 가격은 퍼스트 클래스 400달러(2024년 가치로 약 4642달러), 이코노미 클래스 290달러(2024년 가치로 약 3358달러)로 당시 미국인의 1년치 소득(2578달러, 2024년 가치로 약 29852달러) 대비 2개월치/1개월치 수준이었다.[43] 사족으로 1958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한국은행 추계 기준) 80달러(2024년 가치로 870달러)였다.[44] 2022년 현재 가장 많은 승객을 수송하는 아메리칸 항공이 무려 2억 명의 승객을 수송하고 1억 명을 넘게 수송한 항공사가 5곳 더 있는 데다가 1000만 명 이상을 넘게 수송한 항공사는 셀 수 없는 수준이고, 1100만 멍을 수송한 대한항공은커녕 680만 명을 수송한 브뤼셀 항공에게조차 밀리는 수준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200명 이상의 승객을 나를 수 있는 광동체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이코노미석 가격조차 매우 비싸 웬만한 국가들의 사람들은 비행기를 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판이었다.[45] 2024년 환율로 환산하면 89억 달러다.[46] 당시 빈곤했던 한국의 GDP가 61억 달러,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던 중국의 GDP가 709억 달러, 막 자본주의권 GDP 2위에 들어온 일본의 GDP가 1470억 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당시 미국 GDP는 9425억 달러.[47] 다른 항공사들도 1등석 승객들에게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다가 9.11 테러 후에 카빙 도구가 테러에 악용될 여지가 있다 판단되었는지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48] 9대의 보잉 720B 포함[49] 참고로 당시 팬암은 비제트기도 19대(DC-6B 17대+DC-3 2대) 운용했다고 한다.[50] 한국인 중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9년 8월 21~22일 샌프란시스코로 한미정상회담을 하러 갈 때 팬암 소속 보잉 707(N407PA, B707-321B)을 전세기로써 탔다. 당시 사진 참고로 당시 박정희가 탔던 기체는 4년 뒤 1973년 로마 공항 습격·납치 사건으로 파괴되었다.[51] 참고로 N704PA는 아예 1964년 2월 22일에 있던 비틀즈의 귀국 비행 한정으로 기체의 이름을 'Jet Clipper Beatles'로 바꾸기까지 했다. 참고자료 그리고 N704PA에 붙은 BCC가 팬암의 BCC인 21이 아니라 TWA의 BCC인 31인 이유는, 원래 N704PA는 TWA로 인도될 여섯 기체(N701PA~N706PA) 중 하나였지만, 이들이 TWA로 인도되지 않아 팬암으로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52] 실제로 1970년에는 네덜란드 팬암 사무실 앞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53] Walther Prokosch, 1911~1991. 후술할 팬암 터미널의 확장에도 참여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팬암이 파산한 해에 사망했다.[54] 1960년 기준으로 놓고 보면 2024년 가치로는 1억 2600만 달러다.[55]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의 설계자이기도 하다.[56] 그리고 이 확장은 미 근 현대 유적에 등재되지 못하게 되는 결격 사유가 된다. 후술할 내용 참조.[57] 공교롭게도(?) 이 날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50주기였다.[58] Walter Gropius, 1883~1969, 독일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이기도 하며, 한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 결혼 생활을 하기도 했다.[59] Pietro Belluschi, 1899~1994,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건축가[60] 참고로 1930년대부터 팬암 사옥 완공 이전까지 팬암의 본사는 크라이슬러 빌딩에 있었다.[61] 랜딩하면서 랜딩기어가 부러진 것이 아니다.[62] 이들 중 독일인 승무원은 나중에 루프트한자가 팬암의 베를린 노선을 인수하면서 그대로 가져갔다.[63]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영국해외항공. 1939년~1974년에 존속했던 영국의 옛 플래그 캐리어이자, 현 영국항공의 전신.[64] 원래는 NYRBA(New York, Rio and Buenos Aires Line)이라는 남미에서 뉴욕을 운항하는 항공사였는데 팬암이 1930년에 동남미 노선을 확충하기 위해 이들 노선을 사버리면서 생긴 나머지를 자회사로 묶어 Panair do Brasil이라는 항공사로 묶어버린다. 그래서인지 팬암의 블루 볼 이전 로고인 하프 윙 로고위에 팬에어를 써서 사용했다. 그리고 1961년에 브라질 정부에 매각한다.[65] 팬암에서 막 떨어져 나온 지라 팬에어의 브랜딩을 위해 한 주문이다.[66] 브라질 군부의 사정으로 인해... 이후 군부랑 유착했던 바리그가 유럽 노선을 넘겨받아 브라질의 플래그 캐리어로 자리매김하지만, 이 회사도 브라질 민주화 이후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다가 2006년 공중분해된다.[67] 결국 B2707은 계획이 취소되며 나오지도 못하게 되었다.[68] 당시에는 B2707이 나오면 팬암이 콩코드 주문을 취소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물론 하나는 취소당하고 다른 하나는 취소했다.[69] 이에 경쟁심이 생긴 TWA도 달 비행 예약을 시작해 6천명의 예약을 받아냈다고 한다.[70] 정작 실제 팬암은 그들이 생각한 첫 달 비행 날짜 9년 전인 1991년에 파산했다.[71] 그러나 보잉 2707은 개발이 취소되었고, 콩코드는 주문을 철회하면서 팬암은 보잉 747만 도입했다.[72] 2024년 가치로는 50.28억 달러(약 6조 8000억 원)이다.[73] 이는 거의 반세기 동안 사상 최대 단일 주문이었지만, 2013년 11월 18일에 에미레이트 항공보잉 777X 150대와 A380 50대, 도합 200대의 비행기를 주문하며 이 기록을 손쉽게 깨버린다. 다만 도중에 24대는 보잉 787로 주문을 변경해서 실제로 구매한 B777X는 126대가 되었다.[74] 오일 머니로 인한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유명한 에미레이트 항공도 보잉의 VVIP이지만, 747 개발 당시의 팬암 수준으로 보잉 777X의 개발에 관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75] Joseph Frederick "Joe" Sutter, 1921~2016. 보잉 747-8까지의 모든 보잉 747의 개발에 설계 팀장으로 참여했다.[76] 그 일례로, 그 당시에 팬암과 서터는 '동체 설계를 2층 협동체(A380과 상당히 닮았다.)나 1층 광동체(A300-600ST처럼 조종석이 메인 덱 밑에 있도록 설계된 4발기와 보잉 727과 유사한 생김새의 3발기가 설계되었다고 한다.) 중 어느 것으로 제작할 것인가'라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비상시 안전 문제 때문에 후자를 원했던 서터는 팬암에게 광동체 설계를 밀어 붙이기 위해 자신보다 타협을 잘한다는 최고 내부 디자이너를 팬암 본사에 보내 동체의 너비와 같은 길이의 실을 가져오게 한 후 팬암에게 광동체로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목업으로 고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서터는 747의 2층 협동체 설계안을 '칠면조'라 부르며 조롱했다.[77] 당시 747의 좌석 배열은 3-4-2였다.[78] 당시 팬암의 보잉 707-320B에는 145명(1등석 18명, 일반석 127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지만, 보잉 747-100에는 362명(1등석 58명, 승객 304명)을 태울 수 있었다.[79] 1973년에는 1등석 승객용 식당도 겸할 수 있도록 교체되었으며, 후술할 보잉 747SP에도 이와 비슷한 설정을 유지하다가 1979년에 어퍼덱에 1등석 좌석을 놓게 되면서 철거되었다.[80] 팬암이 1965년 5월 7일부터 보잉 707에 설치한 영화 스크린은 오늘날의 오버헤드 빈 자리에 소니가 제작한 소형 흑백 TV를 대량으로 놓는 방식이었다. 당시 사진[81] 타 항공사들도 보잉 747 도입 무렵 변화를 위해 도색을 바꾼 경우가 많다.(아메리칸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 델타항공, 컨티넨탈 항공, 에어 프랑스(정확히는 사명 위치만 바꿨다), 루프트한자, 알리탈리아, 일본항공 등.) 이들은 특히 기체 중앙에 있던 항공사 이름을 기수 쪽으로 옮기는 게 클리셰였다.[82] 이후 팬암 로고 글씨체가 1973년 변경되며 도색의 로고 글씨체가 변했고, 보잉 747SP를 도입한 1976년에는 기수 부분에 적힌 기체의 별명 'Clipper xxx'의 글씨체도 변경되었다.[83] Ford Trimotor, 1925년부터 1933년까지 포드 사에서 생산된 3발 여객기. 참고로 포드 트라이모터의 크기는 약 15.2m에 탑승 가능한 승객 수는 11명에 불과했다.[84] Najeeb Halaby, 1915~2003. 시리아-레바논계 미국인이었으며, 한때 요르단의 왕비를 지냈던 누르 알 후세인(Noor Al-Hussein, 1951~)의 아버지다.[85] 초기 JT9D-3A의 고질적인 엔진 파이핑 문제. JT9D-3A는 7A형이 출시된 이후로 모두 7A형으로 개조된다.[86] BBC의 2014년자 다큐멘터리인 'The Plane Changed the World (2/3) - Jumbo Jet'에서 보면 당시 팬암의 수석 정비사가 이야기하였고 이미 첫 상업운항이 끝난 후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당시 미국의 플래그십 캐리어였던 팬암과 제트 여객기의 최강자였던 보잉의 이미지를 위해 FAA가 허가한듯 하다.[87] 이 시점에 N736PA는 원래 이름으로 돌아오고 N735PA를 롤스로이스 엔진 문제로 인해 L-1011의 도입을 하지 못하던 이스턴 항공에 임차를 보내버린다.[88] PA1736에선 335명이 사망했고 61명이 살아남았으며, 가해자였던 KL4805에선 248명 전원이 사망했다.[89] 747 운항 초기에 747은 당시 여객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큰 기체였기 때문에 좌석을 다 채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90] 2024년 가치로 6000달러[91] 2024년 가치로 3360/4080달러[92] 2024년 가치로 41872달러[93] 'Short Body'라는 이름으로 출시하기로 했는데 길이에 비해 뚱뚱하여 불균형해 보이는 모습과 최고 기술자였던 셔터의 이름을 따 'Sutter's Ballon'으로 직원들에게 놀림받는 바람에 Special Performance로 출시[94] LATAM 항공의 시드니 ~ 오클랜드 ~ 산티아고 데 칠레, 산티아고 ~ 멜버른, 콴타스의 시드니 ~ 산티아고 데 칠레 노선만이 남극 쪽으로 운항하고 있다.[95] 이 무렵 맥심 드 파리와의 협업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96] 영국이나 프랑스는 당시로서는 미국인들의 최고 인기 유럽 여행지였다. 지금이야 독일, 스페인등 여러 나라에서 미국을 찾고 방문하지만..[97] 중국은 공산국가라는 점 때문에, 동남아시아는 너무 멀어서. 그리고 대한민국이야 워낙에 듣보잡이던 시절이었으니..[98] 보잉 747, DC-10, L-1011, 그리고 나중에 들어오는 A300A310까지. 보잉 767 빼고는 다 있었다고 보면 된다.[99] 이는 일본항공 역시 똑같았다. 심지어 여기는 국내선 전용 747을 특별주문하면서까지 굴렸다. 물론 이는 국내선 항공수요가 폭발적이었던 당시 일본의 교통체계와 관련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 것이지만, 그야말로 747에 환장하며 운영을 했고 결국 유지비 문제까지 겹쳐 이쪽도 파산 위기까지 가긴 했다. 물론 후에는 이를 겨우 극복하기는 했지만.[100] 상부에 첨부된 동영상에 등장하는 전직 팬암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팬암은 1980년까지 국내선 운행이 금지되었었다고 한다.[101] 다만 하와이 노선은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거의 제주도 노선급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미국 항공사들에게는 정말 필수적인 노선이었다. 애당초 팬암의 이사였던 빌 멀라헤이(William Mullahey, 1909~1981)는 하와이를 태평양의 다른 섬나라로 여행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102] 이 외에도 당시 화려한 도색을 이용한 마케팅과 효율적인 기재 운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브래니프 항공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규제 해제 이후 국내선 콩코드 같은 기행으로 몇 년 안 되어 망했지만, 만약 둘이 합병했으면 미국의 항공산업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103] 2024년 가치로 16억 4600만 달러다.[104] 팬암 빌딩을 인수받은 메트라이프는 빌딩명을 메트라이프 빌딩으로 바꿨으며, 이 때문에 지금은 팬암 빌딩 꼭대기에 'Metlife' 글자가 있다.[105] 처음에는 팬암이 수익을 낼 때까지 자기 월급을 올리지 않겠다고 해 직원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1985년에는 대규모 파업까지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거주하는 버뮤다에서 뉴욕으로 가는 회사 노선을 공짜로 타는 등 이래저래 행실이 좋지 않았고, 1988년 팬암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몸담은 에어 플로리다, 브래니프, 팬암 모두 사라졌다.[106] 1980년 전세계 최대의 화물 운송업체이기도 했던 팬암의 수송량을 눌러버렸다.[107] 참고로 팬암은 미국에서 에어버스를 구매한 두 번째 항공사였다. 참고로 첫 번째는 이스턴 항공.[108] 실제로 2001년 9.11 테러 이후 엄청난 적자와 과징금 그리고 유족 보상금으로 파산할 지경에 내몰린 유나이티드 항공이 그나마 수익을 계속 거둔 게 이 아태 노선이었다.[109] 여담으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사람은 몇 일 뒤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사건을 사주한 것으로도 의심되었다.[110]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을 이원지 삼아 아시아 노선을 굴렸던 것처럼, 팬암은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에서도 유럽 각지로 가는 환승편을 운항했다. 이 때문에 1997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이 델타 허브로, 동유럽과 인도 노선까지 운항했다.[111] 뉴욕 라과디아 공항과 보스턴, 워싱턴 내셔널 공항을 예약 없이 집중적으로 운항하는 항공편이다.[112] 마이애미 발 런던(개트윅 공항)과 파리 노선을 얼마 남지 않은 보잉 747로 운항했다고 한다.[113] 이게 더 쓰라렸던 점은 날짜 때문인데 미국의 소비가 절정에 달하는 블랙 프라이데이와 연결되는 기간인데다 크리스마스까지 있는 이른바 연말연시에 해당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남들은 실컷 돈쓰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면서 즐기는 시간'에 팬암 직원들은 '회사가 문을 닫고 직장이 없어져서 앞날을 고민해야' 하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114] 여담으로 팬암에 남아있던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파산 때부터 운영해온 항공교육기관인 팬암 아카데미는 2014년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전일본공수에 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