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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6:42:51

고려의 여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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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4군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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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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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정벌
女眞 征伐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1차 정벌: 1104년 (숙종 9년) 1월 ~ 3월
2차 정벌: 1107년 (예종 2년) 10월 ~ 1109년 (예종 4년) 7월 3일
장소 한반도 북부 및 두만강 이북(?)[1]
원인 여진의 발호와 고려의 고토 수복 이념 및 북진 정책
교전 세력 여진
(수세)
<rowcolor=black> 고려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금나라|
女眞
]] 완안오아속 (추장)
[[금나라|
女眞
]] 완안아골타
[[금나라|
女眞
]] 완안알새
[[금나라|
女眞
]] 사묘혼탄[2]
[[금나라|
女眞
]] 사묘아리
[[금나라|
女眞
]] 사묘골모파
[[금나라|
女眞
]] 석토문
[[금나라|
女眞
]] 사갈
[[금나라|
女眞
]] 아로환
[[금나라|
女眞
]] 거위이
[[금나라|
女眞
]] 온적흔아도한
[[금나라|
女眞
]] 완안알로
[[금나라|
女眞
]] 완안출로
[[금나라|
女眞
]] 오도본
[[금나라|
女眞
]] 핵고활니줄
[[금나라|
女眞
]] 포찰적고내
[[금나라|
女眞
]] 석적환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윤관 (원수)
파일:고려 의장기.svg 오연총 (부원수)
파일:고려 의장기.svg 문관 (좌군병마사 좌상시)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한충 (중군병마사 좌복야)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덕전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파일:고려 의장기.svg 임언 (병마검할)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관진 (병마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부필 (병마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홍정 (병마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의원 (병마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허재 (병마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척준경 (병마녹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척준신 (낭장)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자지 (권지승선)
파일:고려 의장기.svg 임간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일숙
파일:고려 의장기.svg 양유송
파일:고려 의장기.svg 정숭용
1차 병력 60,000명 ↑[3] 병력 규모 불명
2차 병력 178,000명 ↑
결과 여진의 승리
- 고려와 여진 막대한 전비 손실 발생 및 여진 영토 초토화.
- 동북 9성 개척 후 3년만에 갈라수 전투를 계기로 여진에 반환.
영향 금나라의 건국
고려금나라 간의 군사 충돌 자제
- 고려와 여진의 전략적 목표 달성

1. 개요2. 여진의 성장3. 제1차 여진 정벌(숙종 시기)4. 제2차 여진 정벌(예종 시기)
4.1. 17만 명의 별무반4.2. 동북 9성의 위치?4.3. 고려의 대규모 사민 정책4.4. 여진의 맹공, 척준경의 활약4.5.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 동북 9성의 반환
5. 평가와 영향
5.1. 점령 실패5.2. 외교적 성패5.3. 한민족-여진족 간 균형의 역전5.4. 조선시대에 남은 교훈
6. 대중매체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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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B2%99%EA%B2%BD%EC%9E%85%EB%B9%84%EB%8F%84_3.jpg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4]
"옛날 주나라 왕이 험윤(玁狁)을 친 일과 한나라 황제가 흉노(凶奴)를 정벌한 것은 강토를 개척하고 백성의 피해를 없앴던 쾌거였으나 그것조차 오늘의 승리 (고려의 여진정벌) 에 비교하면 하찮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가 어찌 보잘것없는 신의 얕은 지혜와 둔한 재질에서 이룩된 것이겠습니까? 이야말로 폐하 (고려 예종) 의 거룩한 계책과 신령스러운 전략으로 조정에 앉으신 채 먼 변방을 안정시키신 결과이니 진실로 그렇지 않았으면 누가 이 일을 이루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사에 기록함으로써 청사에 그 업적이 빛나게 하옵소서"
《고려사》 열전 윤관

고려 숙종 때부터 준비해 예종 때까지 진행된 고려의 '고토 수복 이념' 및 '북방 원정'이다. 교과서에서는 주로 동북 9성과 관련된 내용으로 배우고 오늘날 일부 네티즌들에겐 척준경의 활약으로 제법 유명해진 전쟁이기도 하다.

고려가 여진이 점거하고 있던 갈라전(曷懶甸) 일대[5]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에 완안부의 추장 완안오아속(完顏烏雅束)[6]을 중심으로 모인 여진의 군대가 여러 차례 고려를 공격하였다. 고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9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정적 패배를 겪은 데다가, 때마침 완안부에서 화친을 요청하자 윤관의 반대에도 결국 여력 부족으로 9성을 포기하고[7] 여진에게 돌려주며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후 통일된 여진은 이때의 자신감과 9성 반환을 발판으로 성장하여 몇 년 후 금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막대한 군대와 물자를 동원하고도 결국 고토 수복 및 영토 확장에는 실패했다. 다만 강성해지는 여진을 견제한다는 목적은 일부 달성해, 결과론적으로 금나라가 불과 몇 년 사이 거란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킨 뒤에도 고려로 쳐들어오는 사태는 막는[8]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 먼 훗날 이를 반면교사로 활용한 세종4군 6진 개척에도 도움이 되었다.

2. 여진의 성장

고려의 동북쪽,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는 여진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발해 전성기에 간접 지배를 받다가 한반도 북부는 발해가 통치권을 잃어 일부 말갈 세력들이 9세기 말에 '흑수국', '보로국'으로 자립해 신라와 교섭하기도 했고,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윤선을 따른 '흑수번중'을 거쳐서 이후 여진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동해 해안을 따라 경상도우산국, 일본까지 해적질을 하러 갈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고 고려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골칫덩이였다.

귀주대첩을 끝으로 고려거란과 군신 관계를 맺으며 기나긴 전쟁을 종식시킨다. 이후 현종 시대를 시작으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영토를 들어 귀부하기도 하였는데 수많은 여진 부족이 고려의 제후가 되어 그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다 11세기 말 여진 완안부의 6대 추장인 완안오고내(烏古迺)의 등극 이후 눈부신 기세로 성장하기 시작한 완안부 여진(完顔女眞)은 그 아들 완안영가(盈歌) 시기에 천리장성 인근까지 세를 넒히면서 여진족 내부의 갈등이 촉발된다.[9]
파일:완안부 여진의 팽창.jpg
여진은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체였는데 이 중 완안부의 편에 선 부족들과,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부족들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3. 제1차 여진 정벌(숙종 시기)


이들 간의 갈등은 고려에게로 불똥이 튀는데, 숙종 9년(1104년) 1월에 동여진 사람 1753명이 귀부해왔고 이와 동시에 완안부의 추장 완안오아속이 여진의 또다른 부족장인 부내로(夫乃老)와의 갈등으로 인해 부내로를 쫒아 기병을 이끌고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는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이 여진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물어본 결과 완안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침공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급히 허정과 나불을 감금하고 이 소식을 개경에 알렸다.

완안부가 침공할 것이라는 급보를 전해들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임간(林幹)에게 부월을 하사하며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정주성으로 보내 대비토록 함과 동시에 여진족이 오고가는 마천령 일대에서 차차 점령해 남하해오는 완안부를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임간은 공에 눈이 먼 나머지 완안오아속의 완안군을 자기 마음대로 선제 공격했고, 오히려 완안부의 석적환에게 크게 패하며[10] 조정에서 그들의 패전을 물어 파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교련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 7, 숙종 9년 2월.}}}
임간의 참패에 고려는 급히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며 정주성에 위치한 완안부를 치게 했다. 벽등수(闢登水)에서 마주친 고려군과 완안군은 소규모 결전을 치렀으나 고려의 패배로 끝났고[11] 승리를 거둔 완안부는 일대를 약탈한 후 유유히 돌아가버린다.

결국 완안부가 1104년 6월에 형식상으로 사절단 68명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청했고, 고려는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려에 귀화했던 (친고려파) 6명의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내주면서 당장의 갈등은 어찌어찌 봉합하였다.
그러나 선제 공격을 하고도, 이전까지 자신들의 제후국이자 야인 정도로만 여기던 여진 무리 따위에게 어이없이 깨진 충격은 컸다. 숙종은 이때의 패배에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천지신명이시여. 만약 저들을 치게 되면 그 땅에다 사원을 짓겠습니다"라고 할 정도였고 당시 수도 천도의 실패[12] 이후 자신의 분노를 여진정벌에 쏟아 부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임금이 분노하여 천지신명에 고하니, 음덕을 빌려 적경을 소탕해 그 땅에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王發憤告天地神明, 願借陰扶 掃蕩賊境 仍許其地創佛宇.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제후 부족들 정도로만 생각했던 여진족의 군사력이 완안부를 중심으로 강성해진 것을 알게된 고려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윤관은 이 패배를 바탕으로 "고려는 기병을 상대로 불리한, 수성 중심의 보병 편제로 이루어져있는 것이 문제다."라며 이전까지는 없었던 국민의 직위에 상관없이 차출하며, 능력 위주의 부대를 만들자는 건의를 하게되고 숙종이 승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별무반이다.
"신이 적세를 보니 아주 강해 측정하기 힘드니, 쉬면서 생도와 병사를 길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신이 보기에 패인은 적은 기병인데 우린 보병이니,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윤관조.}}}
별무반은 매우 강력한 군기와 군법을 적용한 정예병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여진 정벌을 보지 못하고 서경 순시 이후 돌아오던 중 세상을 떠났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게 된다. 별무반은 그대로 유지하고, 1105년 11월에 동북면 방향에 지형 정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정벌이 숙원 사업이었던 숙종과는 달리 예종은 내치와 왕권 강화에 힘을 쏟게 된다. 또한 1106년 3월에는 동여진 추장이 화친을 청하며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예종은 그곳에 파견했던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김덕진(金德珍)과 부사(副使) 임신행(任申幸)을 개경으로 복귀시킨다.

4. 제2차 여진 정벌(예종 시기)


이렇게 평화가 이어지는 듯 했으나 불과 1년 후인 예종 2년(1107년) 국경 지역 여진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전방의 소식을 들은 예종은 고민 끝에 1107년 12월,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13]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한 후 17만명의 별무반을 갈라전(曷懶甸)으로 출정시키며 여진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신이 성고(聖考)[14]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또 엄명을 받드니 감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진을 파하고 우리 강토를 넓혀 나라의 수치를 씻을 것이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윤관. 오연총의 걱정에 답하며}}}
고려의 단순히 길목만 막고 대치하자던 1차 정벌 때와는 달리, 2차 정벌 당시 1단계로 기만 전술을, 2단계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속전속결로 여진이 차지하고 있는 부락을 파괴, 성을 접수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전투를 진행한다. 속전속결로 한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완안부에서 원군이 오기 전에 모든 성을 점령하자라는 군사적 이유와 함께 장기전으로 가면 국력이 휘청거릴수 있다는 행정적 이유 때문이었다.

4.1. 17만 명의 별무반[15]

좌군 병마사 문관, 중군 병마사 김한충, 우군 병마사 김덕진이 육군을 담당했으며, 병선 별감 양유송과 원흥도부서사 정숭융이 수군을 담당했다. 고려가 이토록 대규모 전쟁을 불사한 이유는 여진의 굴기 앞에 나라의 근간이 되는 해동천자 세계관이 붕괴될 위기를 직면한 고려 정부가 이전까지 여진 지역에 고려식 성을 쌓고, 기미주(覊縻州)를 설치한 뒤, 고려의 지방으로 편입하는 형태의 간접 영토로 지배하던 영역을 비로소 완전한 직접 통치 구역으로 전환 (영토에서 여진을 몰아내고 자치권을 박탈)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려군은 출전 이후 우리 20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간다!라는 소문을 퍼트림과 동시에, 최홍정, 황군상을 장주와 정평으로 보낸 후 여진족에게 "우리가 예전에 사로잡았던 허정과 나불을 돌려보내 줄게. 이 참에 환송식이나 거하게 해줄 테니 다들 오세요."라는 말을 전한다. 여진은 이 말을 듣고 400여 명의 추장들[16]이 달려왔고 장춘역에서 윤관은 이들을 환대했다.
파일:여진 정벌 당시 추장 초대 파티.png
그리고 즐겁게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틈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金富弼)[17]과 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이 이끄는 고려군이 이들 추장을 기습해 모두 암살하고, 막사에 들어오지 않았던 여진족들도 최홍정이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몰살 시켜버린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러한 기습 몰살 작전이 실제로는 되려 이후 전쟁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어,[18] 동북 9성을 취하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19]

허정과 나불을 데리러 온 자들은 위치상 친고려파거나, 최소한 완안부 여진과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자, 아군으로 만들 수도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것인데, 이후 여진족들이 결집하여 소모전 양상이 되어버린 전쟁에서 이러한 작전은 결과적으로 아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20]까지 적으로 만들어 종족적 결집을 일으켜버리는 엄청난 실책으로 볼 여지가 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c1e2a5b4030be197fb1a12daf6f8781.jpg
※출처: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님 블로그
여진족의 추장들을 모조리 제거한 고려군은 총 4갈래로 나누며 동시 타격을 시도한다. 이때의 위용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고려사》에는 군대가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먼지 구름을 만들어 냈고 이를 보고 도망간 여진인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별무반 행영 군단
대원수(大元帥)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부원수(副元帥)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판관(判官)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기타 지휘관
녹사(錄事) 척준경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병과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발화군(發火軍)
도탕군(跳盪軍) 경궁군(梗弓軍) 정노군(精弩軍)
항마군(降魔軍)
도합 170,000 명
편제 지휘관 병력 이동
본군 원수 윤관, 부원수 오연총 53,000명 정주 대화문 → 대만파지촌 → 동음성
좌군 좌군 병마사 좌상시 문관 33,900명 정주 홍화문 → 심곤
중군 중군 병마사 좌복야 김한충 36,700명 안륙수 → 함흥 평야 → 함관령 → 홍원 → 석성 → 북청
우군 우군 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전 43,900명 선덕진 → ?
수군 양유송, 정숭용 미상 도린포 → ?

최초의 전투는 본군이 마주했던 문내니촌에 있던 동음성이었고 병마검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최홍정의 활약으로 함락한 윤관의 본군은 석성(石城)으로 곧바로 이동한다. 석성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진족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우리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여진의 답을 들은 고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예상 외로 고전하게 되자 윤관척준경을 부르게 된다. 척준경은 "과거 저의 과오를 용서해주셨으니, 오늘이야말로 그 도움에 보답할 것입니다."라는 발언과 함께 칼 한자루와 방패 하나를 둘러매고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병 수명을 죽였고 이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석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윤관이 척준경더러 “해는 저물고 전황이 위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적을 공격하라.” 하고 지시하자, 그는,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21]에서 공의 부하로 일하면서 실수로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는 저를 장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조정에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하셨으니 오늘이야말로 제가 몸을 던져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하고 다짐한 후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윤관}}}
석성 전투가 종료된 후 최홍정·김부필·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에게 병력을 주어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며 여진 정벌은 마무리 되었다. 여기까지 본군, 중군, 좌군, 우군이 사살한 여진족만 4,940명이며 파괴한 부락은 135개, 여진족 포로는 1,030명이었다. 그 후 수 천명의 포로를 추가 포획한다.

별무반의 뛰어난 전투 능력과, 고려 지휘부의 적절한 판단력, 그리고 척준경을 비롯한 무장들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고려는 단 한 달 만에 예상했던 목표를 완료하고 영주, 웅주, 길주, 복주에 성을 쌓게 된다.

4.2. 동북 9성의 위치?

"이지형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형세는 남방 열읍(列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마치 긴 뱀과 같은 모양으로 곧장 2천여 리에 뻗어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 윤관(尹瓘)이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무수한 전투를 벌인 뒤에 겨우 옛 강토를 개척하고 경계를 정하여 푯말을 세웠는데, 북쪽은 선춘령(先春嶺)에 이르고 남쪽은 소하강(蘇下江)에 닿았습니다."
『효종실록 12권, 효종 5년 6월 4일 임술 3번째기사』

현재 정확한 위치는 미정이다. 통일이 되어서 발굴 조사를 통해 힌트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북 9성 문서 참조) 다만 함주와 길주는 각각 오늘날의 함흥길주군으로 보는 건 대부분 견해가 일치하는 편이다.

4.3. 고려의 대규모 사민 정책

척준경, 오연총 등 여러 장수들과 고려군의 활약으로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9성을 짓고 일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윤관은 1108년 4월 9일 지휘부와 별무반과 함께 개경으로 귀환한다.
윤관(尹瓘)이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백여 두를 바쳤다. 윤관이 또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의 세 성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새로 수축한 9성으로 이주시켰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권 7, 예종 3년 3월}}}
이때 고려에서는 무려 7만 5천호가 넘는 주민들을 사민정책에 동원한다.[23]

그러나 사민 정책이 다 그렇듯 고려군 지휘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는데,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김한충 열전에 의하면 당시 윤관은 각 부대에 9성 지역의 내성의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에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 계획을 들고 나왔다. 당시 9성 지역은 민간인이 많이 거주하지 않아서 부대가 주둔할 만한 요새는 있어도 마을 전체를 보호할 만한 외성이 없었기 때문에 윤관은 사민 정책과 함께 마을을 보호할 만한 외성을 먼저 축조하려고 내성을 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성이라는 시설의 특성상 마을 전체를 넓게 둘러야 하다 보니 건설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한충은 이 계획에 대해 "만약 외성 다 쌓기도 전에 무슨 일이 터지면, 내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키려고 저러시나? 아무리 원수의 명령이지만 이건 따를 수 없다"라고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한충이 반발하면서 나타낸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김한충은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힘껏 싸워 전공을 세웠다.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가 되었을 때 윤관 등이 모든 부대에 명령을 내려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둬서 9성을 쌓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성민의 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한충은, “만약 외성(外城)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채로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안에는 완전한 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원수께서 명령했지만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고 굳이 반대했는데,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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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김한충}}}

4.4. 여진의 맹공, 척준경의 활약

파일:윤관의_여진정벌.jpg
《여진 정벌 기록화》 (안재후 作. 1975년)

고려군이 9성을 개척하자 삶의 터전을 통째로 상실하게된 여진족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완안부의 추장 완안오아속은 사냥 도중에 17만 고려군이 자신의 동포들을 몰아내고 9개의 성을 축성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급히 지도자들을 소집해 대처를 논의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힘으로 짓누르던 강대국인 요나라를 격파했던 고려인데다 이번에 정벌로 동원된 17만 명 병력의 수준은 전부 최정예였기 때문에 승승장구하던 완안부가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던 상황이었고, 요나라가 고려 편에 서서 자신들의 뒤를 친다면 진퇴양난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여진의 모든 대신들은 무모하다 여기면서 싸움의 불가함을 말하였다.[24] 이때 오아속의 동생 아골타만이 "겁에 질려 있다면 다른 부족들도 우리를 얕보게 될 테고 결국 여진 제부(諸部)가 모두 고려로 편입될 것이니 결사항전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주창하자 별다른 수가 없었던 완안부는 갈라전 탈환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때 고려군은 큰 오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점령전 계획을 세울 때 갈라전 일대 지리를 숙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해당 지역이 병목 지역이란 첩보를 가지고 9성을 쌓아 순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실제로는 우회로가 너무 많아 9성이 동시다발적으로 공략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방과 후방을 구분해 세워 놓은 기지들이 전부 전방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1년간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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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윤관 열전}}}
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길주로 추정)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므로 관성을 설치하여 그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빼앗은 뒤 보니 수륙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듣던 바와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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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권 7, 예종 3년 5월}}}
점령 이후의 역사는 고려와 여진의 끊임없는 전투로 점철된다.[25]
동북 9성 점령 이후 전투 목록
년도 일자 전투가 벌어진 장소 내용
1108년 1월 가한목 병천 전투 고려군 8천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패전. 이후 영주성을 여진군이 포위 했으나 전투 여부는 분명치 않음
1월 공험진과 영주성 사이 고려군이 영주성으로 이동 중 여진의 기습을 받았으나 패퇴 시킴
2월 웅주성 전투 여진족 수만이 웅주성을 포위하며 함락 위기를 맞으나 구원군이 도착하며 격퇴
2월 길주 전투 정주성을 출발한 웅주성의 구원군이 길주에서 여진을 격퇴
3월 영주성 전투 여진의 대군이 영주성을 포위했으나 격퇴함
4월 ~ 5월 웅주성 전투 여진족 수만이 웅주성을 포위하며 함락 위기를 맞으나 구원군의 도착으로 격퇴
5월 오음지 전투, 사오 전투 웅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개경의 중앙군이 웅주로 향하던 중 오음지와 사오에서 승리
8월 함주 전투, 영주 전투 왕자지척준경이 여진족을 격퇴
8월 길주 전투 여진과의 교전에서 유익, 송충, 박회절 등 지휘부가 전사
1109년 1월 함주 전투 여진의 기습에 왕사근, 하경택이 전사
3월 숭녕진 전투 장문위가 이끄는 수군이 숭녕진에 도착해 여진군 38명의 목을 벰
3월 길주 전투 허재, 김의원이 길주성 밖에서 여진군 30명의 목을 벰
5월 선덕진 전투 여진이 선덕진을 공격해 물자를 침탈하고 퇴각
5월 ~ 7월 길주성 전투 여진군 6만이 성을 포위, 130일 간의 격전 끝에 물리침
5월 공험진 전투 / 갈라수 전투 오연총이 이끄는 개경 중앙군이 길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올라갔으나 공험진과 갈라수에서 대패
5월 타길성 전투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이 갈라수 전투 이후 타길성을 공격해 점령
1108년 1월에는 윤관이 오연총과 함께 정예 병력 8천을 이끌고 여진족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지나가던 중 매복한 여진의 공격에 지휘부까지 궤멸되어 윤관 주위에 단 10여 명만이 남아 전멸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척준경이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해 1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최홍정, 이관진이 병력을 수습해 여진을 겨우 격퇴한 일도 있었다. 또한 같은 달, 여진의 알새가 이끄는 보기 2만 명이 영주성 앞에 진을 치고 무력 시위를 하자 윤관을 비롯한 지휘부가 수성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나 척준경이 "나가 싸워야 이길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해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나서 여진족 수십 명의 수급을 베고 19개 부락을 점령하기도 했다.

윤관은 전 병력의 집중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영주성으로 모든 병력을 집결 시켰는데 이때 공험진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던 권지승선 왕자지가 도중에 여진군과 만나 대패하고 말까지 잃어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척준경이 급히 왕자지를 구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철갑 기병이 타고 다니는 말 한필을 빼앗아 왕자지에게 주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11일에는 여진의 알새가 이끄는 병력 수만이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포위했고, 최홍정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기습 공격을 감행해 한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세는 서서히 불리해져가 성이 점령되기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최홍정은 척준경에게 "그대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오."라며 원병 요청을 지시하자 척준경이 허름안 옷을 입고 야밤에 줄을 타고 성벽 밖으로 나가 혈혈 단신으로 여진족 진영을 돌파하고 정주성까지 달려가 병력을 요청하는데 성공한다. 척준경과 구원군은 통태진(通泰鎭)과 야등포(也等浦)를 거친 후 길주에서 여진군을 크게 격파하며 웅주성의 포위를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웅주성을 포위했던 여진은 어쩔수 없이 영주성을 공격했으나 이곳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게 된다.

같은 해 4월 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에 도달한 여진은 성 일대를 목책으로 둘러쌓아 겹겹이 포위하기에 이른다. 임언과 최홍정이 이끄는 웅주성의 고려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고, 4월 23일에 웅주성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오연총에게 1만의 병력을 주며 급히 지원을 보내게 된다. 여진은 이 소식에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병력을 배치해 고려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려군은 두차례 접전 끝에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웅주성 일대를 둘러싼 여진의 목책 뒤에 진지를 구축, 앞뒤로 공격당할 위기에 빠진 여진은 웅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같은 해 7월에는 행영병마판관어사(行營兵馬判官御史) 신현(申顯)이 고려 수군을 이끌고 영인진(寧仁鎭)[26]에서 적을 공격해 20명의 목을 베는 승전보를 보내온다.

척준경의 엄청난 활약상에 완안부 여진은 전략을 바꾸어 전면전이 아닌, 소수 병력으로 지속적인 소모전을 펼치는 방식을 선택했고, 고려는 이에 맞서기 위해 척준경왕자지에게 별동대 역을 맡겨 여진의 기습 공격을 방비토록 했다.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영주(英州)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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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 7, 예종 3년 8월}}}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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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 7, 예종 3년 9월}}}
문제는 이런 지속적인 공격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수 없던 농민들의 신음은 깊어 갔고, 자급자족이 되지 못하니 물자들도 머나먼 고려의 영토에서 끌어 와야 했다. 그러나 상인들 마저 도적이 들끓고 여진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뜻 나설 리 만무했고 결국 고려는 동북 9성의 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나라에서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기근, 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다. (중략) 적이 (동북 9성을 잇는 도로마다)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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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

4.5.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 동북 9성의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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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

여진족이 길주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당시 부원수였던 오연총은 병력을 소집해서 길주성 구원에 나섰다. 오연총이 이끄던 고려군은 공험진과 갈라수에서 여진족을 맞아 한바탕 큰 전투를 펼친다. 하지만 이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 총합 7만의 고려군이 여진족들에게 대파되는 엄청난 참극이 발생함에 따라 고려의 여진 정벌 또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갈라수 전투 문서를 참조. 그 후 고려 조정은 다시 윤관 휘하 군단을 편성한 후 재파병을 하려 했으나 출정 직후 여진이 화친을 요청해왔고 이에 정벌 과정에서 예상한 것 이상으로 피해가 컸던 고려도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여진족의 화친 요청에 응함에 따라 전쟁이 종결되면서 추가 파병 또한 결국 중단되게 된다.

한편 구원군이 끊긴 길주성은 독자적으로 항전을 지속해 나가는데 여진족은 눈엣가시 같았던 길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고려와 화친 협상을 하는 동안 수만 대군을 동원해 총공격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수비 병력이 2,000명 밖에 되지 않는 길주성은 성이 무너져 함락 직전까지 갔으나 날이 저물어 여진족은 물러났고, 성을 지키던 허재와 이관진은 밤 사이 내성을 새로 쌓았다. 다음날 새롭게 만들어진 성벽을 본 여진군은 공격 의지가 떨어져 길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까지 길주성이 버틴 게 무려 130일.[27]
김인존이 말하기를, “땅이라는 것은 본디 민(民)을 기르는 것인데 지금 성을 다투다가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돌려주고 민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그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벌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김인존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민들도 역시 우리의 편맹(編氓)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변방을 노략질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복하고 그 성을 쌓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표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으나 궁한리의 추장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에 거란이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서 회답하는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멀리서 글을 올려 일의 형편에 대하여 대략 아뢰었으나, 그 사이에 토지의 소속과 호구(戶口)의 귀속은 이미 담당 관리에게 칙서를 내려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으니, 순서대로 별도로 지휘(指揮)를 내릴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나라에서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만약 동쪽으로는 여진에 대비해야 하고, 북쪽으로는 거란에 대비해야 한다면, 즉 신은 9성이 삼한의 복(福)이 아니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겼다.
《고려사》, 김인존 열전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란이 고려의 9성 개척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거란은 고려가 여진의 침략에 대응하여 정벌을 단행한 것은 수긍하지만 토지와 인구의 고려 귀속은 용인하지 않았다. 고려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옛 땅임을 명분으로 9성을 설치했지만, 거란은 이러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講和, 非兵馬使所得專, 宜遣公兄等, 入奏天庭.

강화는 병마의 관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형(公兄)[28] 등을 천정(天庭)[29]으로 들어와 아뢰게 하라.
《고려사》, 열전, 윤관,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다. 中[30]
"요불 등이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여진]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大邦]으로부터 나와서 자손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父母之國)​로 삼고 있습니다. 근자에 궁한촌(弓漢村) 사람이 스스로 소란을 일으킨 것이었지 본디 태사가 지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국에서 변경을 범한 죄를 들어 토벌하였다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하게 여기시고 9성(九城)을 되돌려 주셔서 편안히 살게 해주신다면,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건대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조공(世貢)을 바치고 또한 감히 국경에 기와 조각도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예종 4년 6월 27일 기사』
"신유(1109)... 여진(女眞)의 추장(酋長) 거위이(居熨伊) 등에게 선유(宣諭)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9성(九城)을 돌려달라고 청한다면 마땅히 이전에 맺었던 약속처럼 하늘에 맹세하여 고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이 함주문(咸州門) 밖에서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지금 이후 대대손손(九父之世)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 만약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제후의 땅(蕃土)은 멸망하여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예종 4년 7월 18일 기사』
이때 국가는 새롭게 동여진(東女眞)을 격파하고 9성을 두었으나, 오랑캐가 상시로 내려와 싸우게 되었다. 우리 군사가 여러 차례 패배하자 원수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나란히 파면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오랑캐 또한 화의를 청하였다. 건통 9년(예종 4년, 1109) 7월에 공에게 절월(節鉞)을 주고, 지금의 상국(相國)인 김연(金緣)을 그의 부사로 하여, 가서 여진을 타이르고 빼앗은 땅을 돌려주게 하였다. 여러 장수가 밖에 있으면서 힘겨운 싸움을 한 것이 오래되었으므로, 병사를 거두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듣자 곧 기장(器仗)을 뒤섞어서 불태워버렸고, 성을 버리고 나와서 돌아가려고 하였다. 공이 도달하여 그것을 그치라고 명령하며 이르기를, “오랑캐가 비록 승세를 탔지만 우리를 헤아리지 못하므로, 지금 우리가 만약 군사를 거두어들이기를 도모하고, 강함을 보여줌으로써 타이르지 않는다면 훗날 반드시 근심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은 오랑캐 추장을 불러 거스르면 화가 미치고 따르면 복이 온다[逆順禍福]는 말로써 타일렀으니, 몹시 조리가 있었다. 오랑캐가 모두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맹세하여 이르기를, “다시 옛 땅을 얻을 것으로 만족하니, 어찌 감히 그릇된 마음이 들겠습니까, 바라건대 대대로 침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군사를 내어 싸움을 단속하고 군량[資糧]을 갖추고, 성을 비우고 그것을 부수고 허물었다. 이후에 그 땅을 오랑캐에게 돌려주고, 노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옴에 이르렀는데, 감히 그들을 침탈하는 자가 없었으며, 지금에 이르러 나라가 이에 힘입어 평안하게 되었다.
《고려묘지명집성》, 임의 묘지명
강종(康宗) 4년 병술(丙戌)(1106)에 고려(高麗)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와 왕위(嗣位) 계승을 축하하자, 강종(康宗)은 배로(杯魯) 하여금 보빙(報聘)하도록 하고 또 예전의 약속을 들어 망명(亡命)한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고려(高麗)가 허락하며 말하기를,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고 하니, 강종(康宗)은 이를 믿고 완안부(完顏部), 아괄(阿聒), 오림답부(烏林荅部), 승곤(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강종(康宗)은 마기령(馬紀嶺) 을척촌(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아괄(阿聒)· 승곤(勝昆)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高麗)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曷懶甸)으로 출병(出兵)시켜 9성(城)을 쌓았다.

강종(康宗)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요(遼)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를 탓하여 죄를 물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태조(太祖)만이 홀로,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갈라전(曷懶甸)만 잃어버릴 뿐이겠는가? 여러 부(部)가 모두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종(康宗)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알새(斡塞)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도록 하여 고려군(高麗軍)을 크게 쳐부수었다. 6월에 고려(高麗)가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 도전하자, 알새(斡塞)가 이들을 패전시키고 진격하여 그 성(城)을 포위하였다. 7월에 고려(高麗)가 다시 강화(講和)하자고 요청하니 강종(康宗)은, “조건이 맞으면 강화(講和)하라.”고 하였다. 고려(高麗)가 망명해 들어간 백성의 송환을 허락하고 9성(城)의 병사도 철수시키며 침략한 옛 땅도 반환하겠다고 하자, 마침내 그들과 강화(講和)하였다.
금사》, 외국열전, 고려

거란의 압박으로 인한 양면전선 강요 및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의 충격적인 대패로 인해 어떻게든 동북 9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려 조정의 여론은 180도 달라져서 여진 정벌을 주도했던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는 여론이 빗발치게 된다. 때마침 여진 측이 먼저 화친 요청[31]을 보내왔고[32] 이를 받은 고려 역시 화친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동북 9성을 모두 여진족들에게 반환하게 된다.

5. 평가와 영향

고려의 여진 정벌은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목적이었던 동북 9성의 획득고토 수복이라는 목표의 달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진 정벌은 한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대규모 고토 회복 운동이자 북방 원정이었다. 그 정도로 고려는 대군을 동원하고 정예 지휘관을 파견하는 등 여진 정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리한 지형과 여진족의 극심한 저항, 오랜 군사 원정으로 인한 국력 고갈로 인해 끝내 물러나야만 했다. 그나마 이 시기에 여진족에게 고려의 힘을 보여주어 차후 더 큰 침공을 막은 예방 전쟁에 성공한 것이 소기의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바야흐로 욱일승천의 전성기를 맞은 여진을 상대로 고려가 그들 본거지의 지역 생민들을 전부 축출하고 직접 통치하겠다는 구상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다.

5.1. 점령 실패

군사적인 부분을 보자면, 앞서 고려사절요에서 언급된 내용대로 동북 9성은 애당초 고려의 전략 목표인 여진족의 위협 완화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지형 자체가 아니었다. 병목을 틀어막겠다는 윤관의 전략 자체가 지형 파악 미비에서 비롯된 잘못된 전략이었던 것. 다시 말해 처음부터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지속적, 산발적인 공격을 허용했으며 여진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 점령지가 안정적이지 못하니 사민 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가게 되며 백성들이 살려 하지 않으니 정벌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보자면 발해 멸망으로부터 5~6세대가 지나자 북방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발해 멸망만 놓고 보면 170~180년 정도고 압록강 중부나 동북방의 후발해 계통 발해인들은 1000년대 중반까지도 버티다가 고려로 넘어오는데, 그로부터 약 2세대 만에 압록-두만강까지의 동북권에 대한 지리정보가 완전히 소멸되다시피 한 것이다. 어쩌면 이들 발해계를 믿고 초장부터 여진족들을 친고려파마저 쓸어버리고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한민족 군사사를 통틀어 손꼽힐만한 졸속 작전이었다.

다만 일각의 윤관이 기껏 얻은 땅을 매우 무능한 문관들이 돌려줘버렸다 식의 인식은 완전히 잘못된 이해다. 당시 고려는 사회 시스템상 여진과의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 여러모로 무리였는데, 이는 한 시대 뒤인 조선만큼의 지방 행정망을 고려가 갖추지 못해 국력의 완전한 동원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의 사회 구조는 봉건제에 가까워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이뤄지는게 아니라 일일이 지방 토호들과 합의를 봐야 했다. 그런 조건 하에서는 뽑아 낼 수 있는 저력이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무려 4년이나 했다. 하물며 이건 방어전도 아니고 국력의 소모가 훨씬 큰 원정이었다.

사실 국가 시스템을 논할 것도 없이, 당시 17만 대군을 그것도 정복전에 투입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 역량을 총동원한 것이었다. 5세기가 지난 1500년대 말 조선조차 17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은 버거워 차라리 명군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던 걸 보면 1100년대 초의 고려가 이런 과업을 만 2년이나 끌고 간 것이 용한 일일 따름이다. 즉, 문관들이 여진과의 화친을 주장했던 것은 단순히 국가의 대계를 보지 못했거나 이상만 외치는 멍청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 전쟁 치르다 나라가 망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려 조정은 1107년과 1108년 초반까지는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동북 9성을 유지하는 것에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여진 정벌을 망설이던 예종에게 숙종이 남긴 유언장을 보여주며 설득한 것이 바로 고려 조정의 문관들이었다.[33] 그랬던 문관들조차도 막대한 피해들이 누적이 되며 나라가 휘청거리고, 마침 여진이 고개를 숙이고 화친을 해오자 이를 찬성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활약한 척준경이 훗날 금에 대한 사대를 수용한 것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당시 문벌세력이 서경천도를 무산시킨 것도 이 당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즉, 전쟁을 통해 고려의 한계와 여진의 국력을 인식한 척준경과 문벌세력이 금과의 전면전보다는 사대라는 외교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2. 외교적 성패

이 전쟁 이후 친 고려파 여진족은 사실상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완안부를 비롯해 여진족들이 고려에 공물을 바쳐오면서 형식적 제후국 관계를 이어가고는 있어서 겉보기론 큰 차이가 없어보였지만 내부적으론 이전과 많이 달라졌는데, 완안부 여진족과 대립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동여진족들은 사실상 고려가 간접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악력이 강한 상태였고, 특히 11대 문종 재위 시절 동안 여진족의 추장과 부족들 사이에선 고려에 귀순주, 기미주,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켜달라는 요청이 폭증하여 실제 11개 주를 설치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 전쟁에서 친 고려파[34]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동여진족이고 완안부 여진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여진족들을 몰아내버린 상황에서 터전을 빼앗긴 찰나 고려의 대군에 결국 승리한 완안부의 모습을 보고는 결국 고려에 등을 돌리게 된 것.

사실 이 전쟁 과정과 결과를 생각한다면 동여진족들 입장에선 믿었던 고려는 자신들을 배신했고 자신들을 치고 있던 완안부 쪽에서 오히려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결국 고려와 화친을 이뤄내면서 9성 전부를 반환받고 부하들을 돌려받는 것을 직접 지켜본 것이다. 힘도 자신들보다 강한 데다가 고려는 배신, 심지어 고려쪽에서 자신들의 관리를 완안부에게 떠넘긴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완안부를 버리고 고려에게 붙는 것은 실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힘든 선택인 것이다. 괜히 근대 학자 때부터 이 동북 9성 반환으로 여진은 더 커졌다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이 반환으로 여진족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영토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심점과 위상, 명분 그리고 민족의식[35]을 얻어서 커졌다는 의미도 된다. 이후 완안부를 중추로 1115년 금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안현은 아뢰기를, "지금 니마차(尼亇車)가 많은 부락을 불러 모으고 부락 사람들 또한 그를 믿고 따르니, 그는 필시 호걸일 것입니다 ... 고려 때 윤관(尹灌)이 1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여진(女眞)을 쳐 곧장 그 부락을 짓밟고 돌아왔기에 군사의 위엄이 멀리까지 떨쳤습니다. 때문에 아골타(阿骨打)가 고려의 침범을 감히 도모하지 못하고 드디어 중국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만일 어진 장수를 얻어 맡긴다면, 비록 아골타 같은 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변방을 침범하여 노략질할 수 없을 것인데, 시시한 오랑캐야 무어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2월 26일 신유 1번째기사』

다만 정치 외교적으로 보자면 동북 9성을 반환하기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전략적 목적은 달성했다고 자평할 여지는 있다. 이후 금나라의 본격적인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36] 이 전쟁을 개전한 고려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여진 두 나라는 치열하면서도 처절히 싸웠다. 특히 여진 입장에서 보면, 일시적이긴 하나 자신들의 살아갈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가기도 했고 이것을 되찾기 위해 말 그대로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으며 험한 지형에서 정말 생사를 건 악전고투를 몇년 간이나 치러야 했다.

고려가 여진족에게 굴욕을 당했던 만큼 여진 역시 고려를 잘못 건드리면 좋을게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9성 반환 협상을 통해 양국 관계가 거의 평화적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뒷날 건국된 금은 중국의 이민족 왕조들이 후방 정리 차원에서 자행한 한반도 침공을 하지 않고 군신 요구에 그쳤다. 서로간에 친다고 해봐야 고생스럽기만 한 걸 이해하고 있으니, 딱히 예방전쟁 같은 게 필요 없어진 것. 이후에도 두 국가는 서로의 우호 관계에 해가 갈 일이 생기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훗날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청나라조선을 예방전쟁으로 완전히 제압한 후 조선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력한 상국으로 군림한[37] 것과는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서경 천도 및 금나라 정벌을 요구한 묘청의 의견을 고려 정부가 내란을 각오하고 묵살한 것이나, 무신정권 초기 서경유수 조위총무신정권을 혁파한다는 이유로 금나라에 사람을 보내 "서경 이북 40여 개의 성을 바칠테니 병사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부담을 느낀 금나라에서 씹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요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보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훗날 금나라로 성장한 후 고려에게 넘겨주게 된다.[38] 다만 그냥 넘겨준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금나라 항목의 고려와의 관계 항목 참조.
(아무런 소득이 없는거 아니냐는 말에)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9성을 돌려주면서 약속을 받아내죠. 동북면 여진이 대대로 조공을 계속 바치겠다는 것은 그 지역의 여진을 책봉함으로써 고려가 얻을 수 있는 황제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기왓장 하나도 던지지 않겠다, 여진이 고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동북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여진이 고려가 경험했던 것과 아주 다른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때 금나라가 건국되는데요. 계속 금은 9성 환부라고 하는 부채를 진정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이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을 멸망시키면서도 고려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 정책을 일관합니다.
이익주. 역사저널 그날 -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중

5.3. 한민족-여진족 간 균형의 역전

고구려발해는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족의 제어가 충분히 가능했으나 고려는 동북 9성 반환을 계기로 여진족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39] 특히 회전에서 고려를 크게 패퇴시킨 갈라수 전투는 여진족의 역량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드러내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말갈족에서 여진족으로의 명칭 변경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말갈 제부족이 여러 유목민족과의 이합집산을 통해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발해와 요나라의 유산을 물려받아 성장한 여진족은 이전의 말갈족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각각 고려 중기[40]조선 중기[41]에는 한민족의 통제에서 사실상 벗어나게 된다.

다만 역으로 생각하면 금나라 역시 사대를 맺은 이후로는 함부로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들 역시 고려와의 전쟁에서 삶의 터전을 통째로 잃거나 심지어 부족 단위로 전멸당하는 참화를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동북 9성도 겨우 사정한 끝에서야 반환받을 수 있었다. 금나라 역시 고려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단, 기본적으로 금나라는 재정이 워낙 부실해 장기전을 치를 역량이 없는 나라였기에 전쟁이 장기전으로 간다면 고려가 무섭든 안 무섭든 전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42] 이를 역으로 말하면 요나라북송이 금나라를 이겨내지 못하고 멸망당한 것에 비해 그들과 혈전을 치르고 영토를 수복해 동북 9성을 세운 고려가 상당부분 선방했다고 볼 수 있다.

중원에서도 사정은 비슷해서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로는 대부분의 유목 민족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날뛰게 된다.[43] 심지어 유목민계 정복왕조였던 요나라와 금나라조차도 각각 여진족과 몽골족을 완벽히 제어하는 데 실패하여 멸망당했다.[44][45] 이 시대 이후로 그나마 유목 민족을 제어했던 농경 국가는 거대 제국이었던 명나라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여 결국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에 먹혀버리고 만다. 청나라는 아예 본인들 자체가 뿌리는 반농반목의 민족이었고, 따라서 유목민족들을 억지로 중화제국의 일부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몽골의 칸위를 겸하는 방식으로 다스렸고, 그래도 준가르처럼 반항하면 아예 제노사이드를 벌여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등[46], 기존 한족 제국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제했다.

5.4. 조선시대에 남은 교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하였는데, 이때는 바야흐로 파저강 정벌에 뜻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3월 20일 계유 1번째기사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의 함경도 일대 6진 지역을 차지한건 결국 조선 때에요. 윤관의 여진 정벌, 동북 9성 설치를 개척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고토 회복 의지와 가능하다는 단계를 만들어준거에요. 그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치밀하게 6진 지역을 개척했고 이제 반환하지 않고 관리할 수 있는 지혜까지 받았다는 점에서는 윤관의 동북 9성 설치가 지금 한반도 확보에 선구적 개척 작업이었죠. 이 지역이 항일 독립 운동에서 주요한 전진 기지가 되었고요. 이런 점까지 고려한다면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병주. 역사저널 그날 -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중


한편 동북 9성은 고려의 최대 영토로 인정받아 명나라에서도 조선이 공험진 이남까지 확장하는 것을 눈감아 줬다. 즉 9성(九城)의 환부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이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철회하고 다시금 간접 지배[기미주]로 환원했다는 의미이며, 이는 그 후 1111년에 점령지역 북쪽인 길주(吉州) 중성과 공험진(公嶮鎭) 산성 등은 고려가 직접 장악하고 있었던 사실로 증명된다. 또한, 9성은 세종대왕4군 6진 개척에 바탕이 되었다. 세종대왕 역시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함경산맥을 경계로 쳤다가 낭패를 당한 고려의 선례를 교훈삼아 어설프게 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이 훨씬 안정적인 국경선과 방어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47] 조선은 확고한 국경선의 확보를 위해 압록강-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4군 6진만이 아니라 윤관의 여진정벌과 북진 정책은 조선시대 내내 여진정벌과 북쪽 영토 관련만 되면 자주 언급이 되었는데 심지어는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간도 분쟁 때도 재차 언급되었을 정도.

6. 대중매체

7. 같이보기


[1] 자세한건 동북9성의 위치 참조.[2] 사묘아리父[3] 길주성 전투 동원 병력[4] 출처.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일부로, 동북 9성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비석을 세우는 고려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만약 비석이 발견된다면 동북 9성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 될 것이나, 파괴된건지 발견을 못한건지 오늘날엔 얘기만 전하고 있다.[5] 동북 9성이 위치한 지역을 일컫는 말.[6] 훗날 금나라를 건국하는 완안아골타의 형이다.[7] 직접통치→기미주 환원[8] 물론 여진 입장에선 그냥 침략이긴 하다.[9] 완안여진은 오고내의 손자 아골타(阿骨打) 시대에 이르자 부족의 우두머리를 도발극렬 (전부를 다스리는 자) 이라 칭하고 주변 여러 부족을 제압하면서 여진제국(女眞帝國)을 건립하는 등, 가히 동아시아 전체에 위협이 될 만한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10] 이때 크게 밀리던 상황에서 지휘관인 임간의 앞에 품계도 없는 무관이 와서 다짜고짜 "말 한마리와 칼을 주시오"라고 요구하자 결국 내어 주었는데, 이 무관이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가고 여진 병사 두 명의 수급을 베어왔다고 한다. 이 무관이 바로 고려의 인간 흉기로 불리는 척준경이다.[11] 고려사에는 여진족 30명의 목을 베었으나, 아군의 사상자 및 실종자 수가 전체 병력의 절반이 넘었다고 두리뭉술하게 표현했으나 금사에서는 "우리 장수였던 석적환이 고려군 500명과 벽등수에서 마주쳤는데 개털어버렸음"이라고 기록했다.[12] 왕권 강화를 위해 재위 원년부터 남경으로의 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나 기득권 세력이었던 문벌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했다.[13] 신하들이 여진 정벌을 망설이던 예종에게 불상 속에 담아두었던 숙종의 유언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14] 임금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 여기선 숙종을 의미한다.[15] 고려사에선 상당한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을 하는데 정말로 17만을 동원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고려의 인구를 3~400만으로 추정한다면 인구의 4퍼센트 이상을 동원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17만 명 전부가 전투 및 보급 부대였다라기보단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된 총 인원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단,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후삼국 통일 직후의 고려 인구를 78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최전성기 고려의 인구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사 윤관 열전에서는 그 수가 30만 명의 정병(精兵)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로 보아 별무반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16] 이들은 100호 미만의 소규모 부락의 추장들로 추정된다.[17]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큰형이다. 김부식은 4형제 중 셋째.[18] 고려의 입장에선 9개의 성을 빠르게 공격해야 하는 기습의 조건과 완안부 세력의 지원을 사전 차단, 그리고 지휘부를 제거해 9성에 위치한 부족들의 혼란을 유도 후 방어 기재 구축을 하기 위했던 것인만큼 어떻게 보면 필요한 조건이었지만 9성 점거 문제에 차질이 생기며 그 상황들이 계속 지연되자 빠르게 정리하면 적었을 여파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19] 고려가 처음에 계산한 지리적 위치와 이점을 철저히 분석했고, 그 분석 결과대로만 진행됐다면 족장들의 암살은 큰 문제가 될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가 확인하고 검토한 지리보다도 더 많은 차이가 있었고. 그것이 틀린 시점에서 이제 여진족의 협력이 필요한데 기습 몰살 작전으로 인해 그 선택지가 제외되게 된 것.[20] 고려는 고려말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당시 여진족을 동원해 적들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며 고려의 전신인 고구려는 수당과의 전쟁에서 말갈족을 동원하기도 했다.[21]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22] 참고로 목조(조선)가 고려 조정으로부터 수여받았다는 의주병마사는 평안도 의주가 아닌 여기를 말하는 것이다.[23] 훗날 조선 정부가 두만강 유역 6진에 사민 시킨 가구는 총 2천8백 호 내지 3천여 호에 불과하였다.[24] 실제로 요나라 황제 천조제는 고려에 협공을 제안하긴 했는데 문제는 이미 고려군의 공세가 한계에 달해 종전협상까지 끝난 뒤였다는 것이다. 이후 승기를 타고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는 요나라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게 되며 천조제는 그대로 탈탈 털려 마지막 황제가 돼버린다.[25] 1108년 기록된 고려 - 여진 간의 전투는 총 19번이 벌어졌다. (출처: 최창국. 공험진(公嶮鎭)과 통태진(通泰鎭) - 고려와 여진의 후기 전투를 중심으로 -)[26]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27] 여진족이 금을 건국한 이후에도 되도록 군사적 마찰을 피했던 것은 이때의 길주성 공성전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28] 여기서는 여진의 관리들. 고려 내에서는 아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29] 하늘의 조정, 즉 고려의 조정을 의미한다.[30] 참고로 이 기록은 1109년, 윤관이 화친하자는 여진 장수 오사에게 직접 전한 말이다.[31] 여진 측 기록에선 고려가 먼저 화친하자고 했다 나오나 여러 정황상 여진 측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32] 비록 동북 9성 중 2개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여진도 막대한 인적 피해를 입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진은 고려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부족을 총동원해 10개 부대로 나누어 축차 투입하는 전략을 썼는데 문제는 병사들이 곧 백성이던 유목민이었기에 만약 장기전으로 가게 된다면 그들도 말라 죽을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동시에 이 지긋지긋한 소모전을 빨리 끝내기 위해 화친을 먼저 요청한 것이었다.[33] 사실 윤관 본인부터가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다.[34] 숙종 때 고려가 완안부에 패하면서 완안부에 붙어버린 추장들이니 친고려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건 반만 맞는 소리로 이들은 본래 숙종 때까지는 고려에 붙었던 동여진족 추장들이었다. 고려는 여요전쟁 이후 여진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는데 특히 숙종 시기에는 세력을 키워가던 완안부의 위협에서 살아남으려고 고려에 붙게 된 여진 부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완안부에 붙게 되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고려가 우세를 점하면 다시 고려에 붙을 가능성이 큰 추장들이었으며, 장성 밖의 추장들이란 점에선 문종 시기부터 있었던 기미주 여진도 있었다고 봐야 한다.[35] 보통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을 때 내부가 결속된다.[36] 물론 냉정하게 보면 결과론적 해석일 뿐으로, 긴 평화기 동안 실전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국력을 비축해온 고려가 그것을 한데 모아 대규모 원정을 떠난 것치곤 성과가 빈약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37] 다만 몽골족의 원나라에 비하면 그 군림의 정도는 덜했다. 원나라는 고려 왕까지 맘대로 갈아치울 정도로 꽤나 심한 내정간섭을 했다.[38] 여담으로 보주성 반환시 금나라에선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선 이미 다 죽었다고 반대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39] 그 이전 고려는 여요전쟁에서의 승전을 계기로 동여진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여진 부족들이 스스로 귀부 하는 등 해동천자를 자처하는 외왕내제 국가를 표방하였으며 더불어 여진 일대를 간접 통치할 정도로 강성했었다.[40] 갈라수 전투와 동북 9성의 반환 이후.[4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42] 무엇보다 서하, 남송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심심하면 거란, 몽골 같은 휘하 유목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중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오히려 나라의 멸망을 앞당기는 짓이나 다름없었다.[43] 이에 관해서는 유목민족들의 민족의식이 성장해서 더 이상 중원제국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 것으로 꼽기도 한다.[44] 애초에 이들을 통제하기 이전에 내부 체제가 막장화되어서 통제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있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체제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순간 이들이 들고일어날 만큼 애초부터 완벽한 융화나 통제에는 실패했었다고 볼 수도 있다.[45] 요나라와 북송을 집어삼켰던 금나라는 오히려 이 둘보다 더 처참히 멸망당하는데 자세한 사항은 금애종 항목 참조.[46] 실제로 건륭제 시기 청군이 벌인 제노사이드와 때마침 번진 천연두가 겹쳐 준가르인의 80~90%가 사망했고 생존자들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로 도망쳐 현지인에 동화되거나 청나라에서 노비로 전락하여 민족 전체가 아예 족멸에 이르렀다. 다만 이들이 이때 완전히 멸족해버린 건 아니었고 러시아까지 피란 갔던 일부는 자치공동체의 유지에도 성공했으며, 현대에도 자치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유럽의 유일한 불교국가다). 또한 사태가 진정된 뒤 다시 중국이나 몽골로 돌아가 소수민족으로 유지된 인구(대표적으로 토르구트부)도 있으며, 아예 처음부터 준가르에 포섭되지 않은 오이라트계도 있었기 때문에 준가르계뿐만 아니라 범 오이라트계 자체는 아직도 꽤 남아 있다(몽골의 독재자 욤자깅 체뎅발도 오이라트계였다).[47] 물론 추운 북방에 위치한 강이라 겨울에는 얼어붙어 아무 장애물도 없는것이나 다름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만 빼고보면 기병이 주력인 여진족을 상대로는 매우 확실한 방어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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