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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김정희 | 8월 장영실 | 9월 김소월 | 10월 세종대왕 | 11월 김홍도 | 12월 신재효 | |
1991년 | ||||||
1월 나운규 | 2월 정철 | 3월 한용운 | 4월 김정호 | 5월 방정환 | 6월 정약용 | |
7월 문익점 | 8월 안익태 | 9월 허준 | 10월 주시경 | 11월 윤선도 | 12월 이해랑 | |
1992년 | ||||||
1월 이황 | 2월 정선 | 3월 박지원 | 4월 우장춘 | 5월 신사임당 | 6월 류성룡 | |
7월 일연 | 8월 홍난파 | 9월 고유섭 | 10월 이윤재 | 11월 안창호 | 12월 윤동주 | |
1993년 | ||||||
1월 이이 | 2월 이인문 | 3월 장보고 | 4월 이천 | 5월 윤극영 | 6월 원효 | |
7월 지석영 | 8월 안중근 | 9월 박연 | 10월 최현배 | 11월 장지연 | 12월 윤백남 | |
1994년 | ||||||
1월 우륵 | 2월 황희 | 3월 김유정 | 4월 홍대용 | 5월 강소천 | 6월 이상백 | |
7월 안견 | 8월 박은식 | 9월 박승희 | 10월 이희승 | 11월 정도전 | 12월 신채호 | |
1995년 | ||||||
1월 강세황 | 2월 조식 | 3월 월터 정 | 4월 최무선 | 5월 이원수 | 6월 김병로 | |
7월 이육사 | 8월 김구 | 9월 채동선 | 10월 김윤경 | 11월 이수광 | 12월 곽재우 | |
1996년 | ||||||
1월 김만중 | 2월 최치원 | 3월 이순지 | 4월 서재필 | 5월 김명국 | 6월 유일한 | |
7월 도선 | 8월 심훈 | 9월 왕산악 | 10월 정인승 | 11월 전형필 | 12월 이제마 | |
1997년 | ||||||
1월 송석하 | 2월 성현 | 3월 최윤덕 | 4월 이중환 | 5월 초의 (의순) | 6월 한호 | |
7월 이세보 | 8월 박제가 | 9월 박진 | 10월 장지영 | 11월 왕인 | 12월 송진우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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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표준영정. | |
출생 | <colbgcolor=#fff,#191919>1804년(?)[미상] |
황해도 토산군 (現 황해북도 토산군) | |
사망 | 1866년(?)[미상] (향년 62세) |
한성부 성저십리 만리재 (現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 |
이름 | 김정호(金正浩·金正皡) |
호 | 고산자(古山子) |
자 | 백원(伯源) / 백온(伯溫) / 백지(伯之) |
본관 | 청도 김씨 (淸道 金氏) |
자녀 | 딸 김순심?[3] |
국적 | 조선 |
종교·이념 | 유교 (실학) |
직업 | 실학자, 지도학자, 측량학자, 지리학자 |
대동여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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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정호는 자신의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다. 본디 공교한 재주가 많았고, 특히 여지학(輿地學, 즉 지리학)에 깊이 열중하였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地球圖)’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인포했다. 세상에 그 정밀하고 상세한 것은 고금에 그 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 10권을 편집했는데 탈고하기 전에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이향견문록
조선 후기의 지도학자, 측량학자,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源), 백온(伯溫), 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이향견문록
서유럽에서 발로 걸어 측량지도를 확립한 지도학자의 대명사가 장 도미니크 카시니로 알려져 있듯이, 한국에서는 지도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다만 시기상으로는 카시니가 150년 정도 앞선다. 한편 김정호는 직접 지도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편찬된 국내외의 자료를 집약하여 새로운 지도와 도법을 고안하기도 한 학자였다. 한국의 지도 외에 세계지도 역시 제작한 바가 있다.
오늘날 김정호와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성부 종로 쪽에 살았던 듯하다. 강북 종로학원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석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읽어보면 김정호가 이쯤 살았던 것 같다고 시사하는 문장이 적혀 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고려대역~성동구 성수대교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으로 김정호의 호를 딴 고산자로가 있다.
2. 생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오늘날 현존하는 자료는 많지 않으며 김정호의 태생은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잔반이나 중인 출신으로 추정된다. 김정호는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실학을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호는 최한기와도 교류하였는데 최한기가 편찬한 세계 지도인 지구전후도를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맡았고 최한기는 김정호가 편찬한 청구도의 서문을 써주었다. 김정호를 후원한 인물로는 여도비지를 편찬한 최성환, 대동여방도 서문을 썼으며 김정호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한 신헌[4] 등이 있었다.야사에 따르면 김정호가 어릴 적 산세를 살펴보려고 산을 헤매다가 선인을 만났는데 선인이 대뜸 "산에 함부로 들어와 뭐하는 거냐"하고 호통을 치자 처음에는 겁을 먹었다가 슬그머니 심통이 나서 "대장부가 하려는 일을 어찌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선인이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김정호에게 '산의 뿌리를 찾는 자'라는 뜻으로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는데 '고산자'였다고 한다.
자신이 이전에 편찬한 지도인 청구도와 동여도, 이전의 각종 지도와 지리지를 참고해서 대동여지도를 편찬했다. 보통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정호 자신이 전 국토를 유람하며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로 김정호가 그러한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정호가 한반도를 3번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며 정확하게 실측 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설명은 '지도가 흥선대원군 때문에 사라졌다'고 당당히 사기를 쳤던 최남선의 글에 처음 등장[5]하기 때문이다. 이 최남선의 말이 퍼진 듯하다.
객관적으로 김정호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들은 모두 김정호가 실측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3가지인데 청구도에 대한 서문인 최한기의 '청구도 제'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하였다",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에는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며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였고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는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도 직접 답사했다는 기록은 없는데[6] 당연히 몇몇 부족한 곳은 직접 답사를 했겠으나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지 못했던 김정호가 전 국토를 답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도 안에 담긴 정보는 너무나 상세하기 때문에 직접 그 정보를 전부 스스로 모아서 지도에 담을 수는 없다. 대동여지도 실물의 크기는 높이 7미터에 가로 3미터 반인 만큼 거대하며 여러 판으로 나뉘어 있고 여러 판들을 펼쳐 놓아야 비로소 거대한 지도가 완성되기 때문에 지도 전체를 전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직접 보고 싶으면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국토지리정보원 내 국립지도박물관을 방문해 보라. 대동여지도 전체를 박물관 바닥에 전시해 놓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10리마다 표시를 해 두어서 실용적인 목적을 꾀하였고 여러 지방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삽입하는 등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조선 시대 당시의 생활상을 꼼꼼하게 알 수 있는 훌륭한 정보지이기도 하다. 10리는 직선 거리 10리가 아니라 실제 거리 10리이고 산이 험할수록 촘촘하게 찍혀 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라는 지리지도 서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도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목판 일부가 남아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목판 11매가 보관 전시되어 있는데, 이 유물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부터 소장해온 것이다.[7] 국립중앙박물관 목판은 초창기 해당 목판에 잘못된 기록을 수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호가 직접 만든 초판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더 많이 있었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대중들에게는 대동여지도만이 알려져 있지만 김정호는 그 외에도 <청구도>, <수선전도>, <지구전후도>, <대동지지>, <동여편고> 등 수많은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지를 편찬했다. 그야말로 지리덕후.
3. 기타
김정호가 지도 제작과 지리학에 재능이 많았으나 국가는 지도 제작에 전혀 뜻이 없어 김정호 자신이 직접 전 국토를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지만, 쇄국 정책을 취하던 흥선대원군이 이에 분노하여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며 대동여지도를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감옥에 가뒀고 결국 김정호는 옥사했다. 이후 조선어 독본에서는 일본에서 대동여지도를 입수 러일전쟁 때와 이후 토지조사사업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했다.(출처:#)
- 김정호에 대한 자료가 너무 적어서 떠도는 가짜 이야기가 많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김정호 항목(2011년 개정)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을 전부 취합해도 A4 용지 1장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흥선대원군의 눈 밖에 나 김정호는 옥 중에서 사망하고 대동여지도 목판본이 모두 불태워졌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거짓이다. 이 이야기의 근원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어 독본》이다.[8] 즉, 조선인들이 버린 김정호의 가치를 일본인이 발견해서 러일전쟁에 기여했다고 조선어 독본은 쓰고 있는데 일단 조선어 독본 자체가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위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관련 내용을 잘 정리한 역사 만화. 일단 조선어 독본에서는 김정호가 잡혀갈 때 딸도 같이 잡혀갔다고 쓰고 있는데 역모 같은 특별 범죄가 아니라면 연좌제를 적용하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김정호가 수감되었다는 기록 자체가 전무한데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어디에도 김정호가 투옥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고문당해 죽었다면 '물고'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 주변인들의(유재건-이향견문록) 기록은 모두 그냥 죽었다고만 나온다. 거기에 대동여지도 제작에 도움을 줬던 신헌[9]은 규장각이나 비변사에서 국가 중요 기록까지 내와서 김정호에게 제공했는데 만약 김정호가 지도 제작으로 투옥되었다면 신헌의 목도 날아갈 일이었다.
- 조선은 지도 제작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나라이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처음 부임할 때 해야 할 일을 정리한 부임육조에서 부임 첫날에 할 일로 관할 고을의 지도 작성을 말하고 있다. 이는 중앙 집권의 강화와 북방 개척 등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서였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과 국학자들을 통해서 경제적, 실용적 관심에서의 지도 제작도 이뤄졌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이런 실학자들의 실용적 관심에서의 지도 제작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군사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정확한 지도야말로 근대 군사학에서 꼭 필요했을터라 절대로 태웠을리가 없으며 흥선대원군이 분노해서 감옥에 갇힐 정도면 지도는 물론이고 목판까지 모조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그것도 단순한 목판이 아니라 여러 번 수정 작업의 흔적이 있는 그러니까 김정호가 처음 만들었던 목판이 말이다. 이런데도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지도를 불태워 없애고 목판을 도끼로 부쉈다'고 써 놓은 위인전까지 있었는데 당연히 "현대에도 남아 있는 대동여지도 목판은 뭐냐"는 질문이 나왔고 위인전 출판사들은 해당 목판을 "복원된 복제품"이라고 독자들에게 거짓말까지 했다.
- 2019년 서울시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도 "대동여지도가 완성되자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킬 우려가 있다고 하여 판목은 압수 소각되었다." 라는 지문이 나왔는데, 만약 이 낭설을 그대로 믿은 사람들은 꼼짝없이 틀릴 수 밖에 없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 김정호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기록은 최남선의 주장과 완전히 다른데 일례로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 강화도 총융사였던 신헌이 쓴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라는 기록을 보면 서문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김백원의 '백원'은 김정호의 자였고 대동여지도도 23권(22첩+색인1권)[10]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 신헌이 말하는 김백원은 김정호이고 그가 만들었다는 지도는 대동여지도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추측컨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이 만든 지도가 아니라 반대로 국가의 지시로 비변사와 규장각 등의 중요 자료를 수집해 만든 지도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를 증명하는 증거로서 국립중앙박물관 목판에는 조각 기법들이 여러 개가 발견[11]되어(출처:#) 대동여지도는 광범위한 지원을 받아 작성한 지도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당대 사람들의 평가와 남은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김정호는 지병 등의 사유로 인해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적어도 지도 제작 때문에 옥사한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김정호가 전국 8도를 직접 답사해서 실측으로 지도를 제작했다는 것도 반박되었다. 현실적으로도 변변한 장비도 없이 혼자서 조선 8도를 돌아다니며 처음부터 끝까지 실측한다는 건 19세기 중반 당시 조선의 치안, 교통, 통신 수준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존 자료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몇몇 지역을 직접 답사했을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속설의 그 수준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는건 조선어 독본의 내용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반박하고 옥사설, 소각설 등이 사실이 아님을 주장한 인물이 일본 식민사학자라고 근거 없는 비방을 많이 당하고 있는 이병도라는 것. 정식 학술 논문은 아니고 역사 에세이인 <한국의 명저>(현암사, 1969)의 "不滅(불멸)의 아틀라스 靑邱圖(청구도)·大東地志(대동지지)·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 金正浩(김정호)"라는 글이 원 출처이다.
- 최근에도 여러 관련 논문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동여지도가 직접 발로 다니면서 그린게 아니라는 연구 논문도 발표되는 한편 2009년 한국 사학계에서 19세기의 지도 제작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2010년대 이후에는 위인전이나 어린이/학생용 서적 등에도 김정호의 옥사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기도 하다.
- 2010년대에 들어서 특히 대동여지도가 영국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주 레퍼토리는 "우리나라 위인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영국에서는 지하철이 개통되었다"라는 이야기. 실제로 대동여지도 제작 2년 뒤에 영국 런던에서는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이 아닌 일반적인 기차는 훨씬 이전부터 영국에서 운행되고 있었으며 런던 도심의 심각한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개통한 것이 런던 지하철이다.참고 이는 결국 서양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조선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교가 논리적 사유와 자연과학 발전을 태생적으로 거부한 습성의 결과물이므로 뒤쳐진 만큼 더 열심히 발전에 힘써야 하고 동양 사상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4. 대중매체에서
- 1983년 11월 28~29일에 방영한 MBC 창사기념 특집드라마 <한국인 재발견> 제4탄 '고산자 김정호'도 총 2부에 걸쳐 그의 일대기를 다뤘는데, 당시 김정호 역은 배우 이대근이 연기했다.
- 2016년 개봉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는 배우 차승원이 연기했다. 예고편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퍼트린 흥선대원군에 의한 옥사설로 페이크 마케팅을 하였지만 실제 내용은 예고편이나 옥사설과는 또다른 형태의 역사 판타지이다. 김정호가 황해도 출신임을 감안하여, 김정호 역을 맡은 차승원이 황해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5. 관련 문서
[미상] 생몰년도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아 학계의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미상] [3] 조선어 독본에서 김정호에게 딸이 있었다고 기록하나 조선어 독본의 신빙성을 감안하면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4]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병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는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김정호가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신헌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5] "팔역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함을 사양치 아니하였으며 백두산 만을 닐곱 번 올라갓으며 이를 위하여 수십 년 과객질을 하얏다" -고산자를 회함-, "그동안, 팔도를 돌아다닌 것이 세 번,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라 한다." -조선어독본-[6] 전국을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마도 일본의 '이노 타다타카'를 모델로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에도 근방의 상인 출신이었던 이노 타다타카는 수차례 실측 여행을 떠났고 남쪽의 규슈부터 북쪽의 홋카이도에 이르는 지역을 직접 측량하여 일본 최초의 실측 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도>를 편찬하였다.[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판의 경우 1932년 경성제국대학 개교 기념전에 전시된 전력이 있고, 지하 보관소에 버젓이 남아 있었음에도 박물관 사람들조차 있는 줄 몰라서 한동안 공식적으로 '망실'로 처리됐고, 학계에서도 6.25 때 훼손된 것으로 봤다. 그러나 1995년 12월에 박물관 이전 작업 중에 유물을 정리하다 보니 그제서야 있다는 걸 발견한 것.[8] 사실 최초는 지도에 관심이 많았던 최남선이 1925년 <동아일보>에 투고한 '고산자를 회함'인데 최남선이 10년 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독본에 참여했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다.다만 목판이 불태워졌다는 주장은 조선어독본에도 없다고 한다.[9] 신헌은 나중에 판중추부사까지 올라 강화도 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등을 맺는 등 중요 관료로 승승장구한다.[10] 위스콘신대에서 소장 중인 대동여지도[11] 즉, 다수의 제작자들이 있었다는 말.[12] 극본은 오재호, 연출은 이기하 PD가 맡았다.[13] 며느리 역은 한혜숙이 맡았으며 그 외 역할들은 문오장, 이종만 등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