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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7:44:37

교정주의

특수예방주의에서 넘어옴

1. 개요
1.1. 특별예방주의
2. 입장
2.1. 개별2.2. 형량 강화를 반대하는가?2.3. 사이코패스에 대한 태도
3. 관련 어록4. 평가
4.1. 장점4.2. 회의적 시선 및 반론4.3. 한계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교정주의()란 형벌이 범죄인의 반사회성을 교화·개선할 수 있는 내용과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보통 '법률적 온정주의', '교화주의', '교도주의' 등으로 불린다. 종종 '특별예방주의(특수예방주의)'[1]와도 혼용된다.

1.1. 특별예방주의

학술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교정주의와 종종 혼용되는 개념으로는 특별예방주의가 있다.

특별예방주의는 특별예방을 중시하는 법철학이데올로기이다. 특별예방이란, 형벌이 범죄자의 반사회성을 교화·개선하는 것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범죄율의 감소(범죄의 예방)를 이루어내려는 것을 말한다. 일반예방주의가 형벌로 위하력을 주어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의 범행을 예방하려고 한다면, 특별예방주의는 역으로 이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교정시켜 재범을 예방하려고 한다.

특별예방주의와 교정주의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특별예방주의는 목적형주의[2]인 예방주의[3] 중 하나로서, 범죄를 예방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두고 있다. 반면, 교정주의는 범죄인에 대한 교화를 중시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틀어서 지칭할 수 있다. 즉, 범죄의 예방이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인에 대한 교화를 중시하는 경우가 특별예방주의를 강조하지 않는 교정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4]

또한 특별예방주의라는 명칭은 교정주의와는 달리 학술적으로도 매우 공신력이 있는 표현으로, 형법 교과서나 논문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반면 교정주의(또는 교화주의)는 일반적인 담화 과정에서 명명된 일상어, 혹은 외국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번역하면서 퍼진 용어이므로 특별히 학술적으로 인정받는 표현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특별예방주의는 교정주의와 사용되는 맥락 또한 다르다. 특별예방주의는 형벌론에서의 근대학파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개념처럼 사용되는 용어이다. 즉, '범죄인의 교화를 통해 범죄를 예방하려는 특성'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취급받기 보다는 근대학파라는 집단이 가진 경향성이나 특성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반면, 교정주의는 엄벌주의와 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의 일종으로 취급되며, 보수주의진보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처럼 특정인의 정책적 지지 성향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범죄인의 재사회화를 강조하는 이들을 교정주의자 혹은 교화주의자라고 부르는 반면, 특별예방을 중시한다고 하여 특별예방주의자와 같은 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정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라는 표현은 쓰일 지언정, '특별예방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라는 표현은 그리 쓰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교정주의자는 범죄율 감소를 고려하며, 만일 특별예방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명분이나 근거로는 사용하기 마련이다. 또한 범죄자의 재사회화라는 공통된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특별예방을 주목적으로 두는 교정주의자와 아닌 교정주의자의 구분은 크게 유의미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종종 교정주의자들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곤 하는데, 이때는 범죄자의 재사회화를 범죄율 감소에 더 무게를 두고 강조하느냐, 윤리적인 의미에서 더 강조하느냐로 갈리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교화가 훨씬 오래 걸리는 범죄인의 경우, 저지른 죄의 죄질 이상으로 오랜기간 구금하여 다소 인권을 침해하더라도 교육시켜야 하는가?'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범죄 예방에 더욱 중점을 둘 경우에는 찬성, 윤리적인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둘 경우에는 반대를 하는 경향이 있다.

2. 입장

형벌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오랜 기간 논의되어 왔다. 개중에는 형벌이 죄값에 대한 적절한 응보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견이나 범죄율의 감소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견[5] 등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교정주의는 그중에서도 "범죄자의 재사회화를 통한 사회복귀가 바로 진정한 형벌의 목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관점을 뜻한다.

똑같이 교정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견해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는 개개인마다 교정주의를 선호하는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의 교정주의자들은 사회 안정과 범죄 예방을 주목적으로 하며, 그 수단적인 의미에서 범죄자의 재사회화를 강조한다. 또한 윤리학적인 관점의 교정주의자들은 천부인권 사상에 따른 인간의 존엄성를 위해서 엄벌주의에 대한 대안의 목적으로 교정주의를 지지한다. 물론 실용주의적이라고 해서 인권을 배제하거나, 윤리학적이라고 해서 범죄 예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교정주의자의 대다수는 현실주의적 이점과 이상주의적 이점을 모두 고려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현실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교정주의가 옳다'라는 식의 스탠스를 주로 취한다.

2.1. 개별

2.2. 형량 강화를 반대하는가?

교정주의의 목적은 범죄인을 재사회화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정주의자들이 엄벌주의공리주의적 태도에 입각한 맹목적인 형량 강화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교정주의 자체가 형량의 무조건적인 약화 내지 형량 유지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현재의 형량이 범죄인의 재사회화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형량을 높이자고 주장하며, 그러한 입장이 교정주의의 본질적인 취지에 보다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범죄를 저지른 상황, 맥락에 따라 교화 가능성이 달라진다. 교화 가능성이 달라진다는 건, 그 사람을 교화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정주의적 관점에 따르자면, 어떠한 사람에 대한 형량은 "그 사람이 얼마의 기간이면 충분히 교화될 수 있는가"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여되어야 한다. 교화를 시키는 것이 목적이므로 교화가 될만큼 수감된 사람들은 더이상 감옥에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인에게 그 사람을 교화시키기 턱 없이 부족한 기간의 징역이 선고된다면, 아무리 범죄인의 권리를 고려하는 이데올로기라 하더라도 형량 강화에 옹호적일 수밖에 없다. 목적이 범죄인의 교화인 이상, 교화에 도움되지 않는 제도는 개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아 기호형 아동성범죄, 원한에 의하지 않은 쾌락적 연쇄살인 등 재범 위험성이 극도로 높은 범죄인들은 그만큼 교화에 걸리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형을 선고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고작 몇 년의 기간으로는 해당 범죄자들의 재범 가능성을 제거하기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렇다고 사형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사형은 교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해버릴 뿐더러, 그 정도의 악인은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즉, 교정주의라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형량 강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교화에 필요한 수감 기간이 부족하다면 충분히 형량을 늘리자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형량 논쟁에서 교정주의가 형량 강화 반대에 치우처져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만약 지금과 같이 교정 시설에 대한 예산과 지원이 미비한 상태에서 형량을 강화할 경우, 사회의 돈을 아끼면서 교정은 교정대로 추구하고 범죄인들의 수감 기간만 부당하게 증대시키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교화 프로그램을 충분히 지원하면서도 그 기간이 모자라 형량을 늘리는 거면 모를까, 예산은 예산대로 부족한데 교화 기간을 늘리겠답시고 범죄인을 오래 가둬 놓자는 건 정당하지 않다. 그렇게 될 경우, 범죄인이 더 오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단지 국가 예산을 아끼기 위함 때문 뿐인 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예산을 사용하여 범죄인이 더 빨리 교화되면, 더 빨리 감옥에서 나올 수 있으나, 그저 그 교화 프로그램 투자가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형량 강화로 교화를 퉁치는 게 되는 것이다.[14]

이와 같은 이유로 간혹 엄벌주의자들보다도 강한 형량을 주장하는 교정주의자들도 존재하는데, 이는 죄값은 제대로 치르되 그만큼 치료도 해주면 된다는 논리에 근거한다. 반면, 이에 대해서 형량 강화에 부정적인 교정주의자들은 '다른 의도를 배제하고 오로지 치료와 교화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굳이 형량을 그렇게 높일 필요가 없다', '과도한 형량은 범죄인의 재사회화에 장애가 될 수 있다'와 같이 반발하기도 한다.

2.3. 사이코패스에 대한 태도

사회상규상, 반사회성 성격장애와 품행장애를 가진 이른바 사이코패스들은 일반적으로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일말의 양심이나 죄책감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을 어떻게 새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냐는 반응이 보통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교정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의견이 갈린다.

일단 사이코패스라고 하더라도 교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때 말하는 교화란, 도덕적 의미에서의 양심, 죄책감 등을 느끼게끔 교육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단순히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끔 범죄인의 반사회성을 억제시키는 것에 더욱 가깝다. 사이코패스들이 타인에 대해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우나, 친사회적인 사이코패스로서 사회화를 시켜서 범죄 등의 일탈적 행위를 하지 않게끔 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사회적 사이코패스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괴물의 심연 저자이자 사이코패스 뇌신경학자로 잘 알려진 제임스 팰런의 경우가 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교화는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교화를 포기하거나 엄벌에 처하게끔 하면 안 된다는 입장도 있다. 사이코패스의 범행은 본인들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들의 범죄는 전적으로 사회에게 책임이 있다는 관점이다. 이들을 일종의 정신병 환자로 간주함으로서, 그들이 성격장애를 얻게 된 뒤에 벌이는 범죄 행위는 이들의 자유 의지에 의했다기 보다는, 신경적이거나 물리적인 장애라고 봄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 채 판단의 착오로 범행을 저지르는 것과, 사이코패스가 일반적인 인간의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끔하는 뇌의 작용에 의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에는 도덕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내용이다. 즉, 이들의 범행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그들의 책임이 아닌 일로 당사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그 책임을 사회가 부담하여 이들에 대한 적절한 격리와 인권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15]

이처럼 교정주의자들 내에서도 관점은 갈리나, 기본적으로는 사이코패스에게도 교화를 시도는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부분이다.

교화가 되지도 않을텐데 왜 교화를 시키려하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사이코패스에 대한 태도가 교화와 엄벌의 양자택일이라고 한다면 사실 교화 방향성이 합리적인 것은 맞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교화는 꽤나 어려울 뿐, 사회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증명은 없으며 오히려 성공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반면, 사이코패스를 엄벌을 한다고 해서 추후의 범죄가 예방되는 것도, 다른 사이코패스에게 위하력이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정상인들에 비해서 사이코패스의 교화 프로그램의 효율이 떨어질 수는 있겠으나, 애초에 엄벌 자체가 교화보다 효율이 안 좋기 때문에, 대상이 정상인이든 사이코패스든 상관없이 그냥 교화를 하는 게 최선전략일 수 있다는 것.

3. 관련 어록

사람은 강물이 아니기에 돌이킬 수 있다.
이탈리아 속담
자비는 정의를 뛰어넘는다.
제프리 초서
몽둥이는 등을 건드릴 뿐 악행을 고치지는 못한다.
나이지리아 속담
몽둥이로 선한 사람은 악인이 되고, 악인은 더 나빠진다.
스페인 속담
눈에는 눈을 고수한다면 세상에는 장님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피는 피로 씻기지 않는다. 피는 물로 씻긴다.
터키 속담
정치로 백성을 이끌고 형벌로 억제하면 처벌을 모면하려고 하지 부끄러움은 없다. 덕치로써 이끌고 예로써 백성을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워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바로잡는다.
논어 위정 편

4. 평가

4.1. 장점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교정주의는 응보주의를 상대로 절대우위를 갖는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권을 부여받은 채 태어난다. 천부인권 사상에 따르면 인권을 갖는 사람에 최소조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권에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인권의 정의 자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권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권에 예외를 둔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심각한 폐해를 불러왔기 때문에 인권이 절대적으로 중시받아야 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권이라는 건 시대와 장소에 제약받지 않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이며,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마땅히 추구되어야 할 개념이다.

상술된 인권의 개념에 비춰 볼 때, 교정주의는 응보주의에 비해 인권지향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교정주의는 "가해자의 인권을 최소한만 제한하자"라는 방향성을 잡고 "가해자도 인권이 있다"라는 학계 정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반면 응보주의는 "피해자가 훼손당한 인권만큼 가해자의 인권을 훼손하자"라는 마인드기에, 그 뿌리부터 인권 보장에 적합할 수 없다. 응보주의에 따라 가해자를 응징한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인권이 회복될 수는 없다. 가해자의 인권이 침해당할 수록 피해자의 인권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16], 응보주의를 충실히 따른다면 인권을 잃는 사람만 늘어날 뿐인 것이다.[17] 반대로 교정주의가 적용된 정책들은 범죄자들의 인권을 최소한만 제한한다. 범죄자들을 일시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전과자들을 방치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수감수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교육적 노력을 퍼부어 범죄자들이 재사회화될 수 있도록 국가의 의무를 다한다. 만약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한 명의 범죄자라도 교화가 성공한다면, 그건 그 한 사람의 인생을 구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18] 따라서 교정주의는 응보주의에 비해 인권지향적이다.

범죄율 감소의 관점에서도 교정주의는 매우 효과적이다. 흔히 범죄에 대해 형량을 높이거나, 범죄자에 대한 가학적 제도를 설립할 수록 그 처벌의 위하력에 의해 범죄가 줄어들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형량을 높임으로써 낮출 수 있는 범죄율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고[19], 그 때문에 엄벌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재범률이 나오는 것이다. 반면 치안 상위권을 기록하는 국가들 대부분을 살펴보면, 그 상당수가 범죄자의 교화를 인정하고 중시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형량을 높이더라도 어느 선을 넘는 순간 범죄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교정주의적 국가들은 어쩔 수 없는 이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대신, 한 번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교정주의의 범죄율 감소 효과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교정주의자들의 논리는 명료하다. 엄벌주의적 처벌로 인생이 이미 망가진 사람은 사회로 돌려보낸다 할지라도 다시 범죄의 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도소에서 몇 십년간 인생을 버린 사람은 그 세월동안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 쇠약해지고, 같은 연령대에 비해 쌓은 커리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전과자 딱지까지 달고 나오기 때문에 사회로 돌아가도 살아남을 경쟁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생계를 버티기 위해서, 혹은 이런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서라도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교정주의에서는 이들이 교도소에 있는 동안 충분한 교육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전과자들은 사회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과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사회에 대한 분노, 반사회적인 가치관도 사그라든다. 그렇게 사회에 복귀한 전과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사회 발전에 가담하고, 그 구성원들의 힘까지 모아 사회를 통합시켜 더욱 성장시키는, 일종의 선순환을 형성하자는 것이다.

실제 통계가 보여주는 여러 지표들을 살펴보면 교정주의적 정책이 실질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데에는 보다 효과적이라는 걸 알 수 있고, 따라서 현대의 대다수 국가가 교정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4.2. 회의적 시선 및 반론

현재 대한민국은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으로 지정되어있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범죄자들 또한 이미 의무교육을 통한 사회화 과정을 거쳤을 터인데, 결국에는 범죄를 저지른다.

교정주의를 회의적으로 보는 일반 대중들은 보통 그들을 '애초부터 교화가 소용없는 인간'으로 해석한다. 그 사람 자체가 '애초에 교화가 불가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사회화 교육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학교에서 받은 교육도 소용이 없었는데 교도소 내에서 이뤄지는 교정교화는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실제로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 대다수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기는커녕 범죄가 발각된 것을 아쉬워하고, 악행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는 자신의 범죄를 자랑스러워 하며 무용담인 것처럼 떠들어댔다가 자신이 저지른 밝혀지지 않은 범죄를 실수로 자백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이를 보건대 과연 교정주의적 정책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가에 강한 의문이 들게 된다. 이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교정주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교정주의자들에게는 이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정주의는 단순히 '성공시키지 못할 교화는 의미가 없다'라는 결과주의적 관점이 아닌 '누구에게나 교화는 시도해봐야 한다'라는 의무론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입장에서 교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교도소에 이르게 된 이들은 학교에서의 사회화 교육이 안 통할 정도로 뒤틀린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 개인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것이 교정주의의 주장이다.

학교에서의 사회화 교육이 안 통했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학교의 교육이나 정책이 미비해서 발생하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선천적인 성격에 따른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회적 차원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화가 실패한 것은 교사나 정치인을 포함한 기타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이므로, 이 책임을 온전히 범죄자 개인에게만 물어 엄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범죄의 책임에 사회의 책임은 없이, 개인의 책임만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해결과제도 뒤따른다. 물론 개인이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사회의 책임은 아니다. 하지만 교정주의자들은 그 경우에도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선천적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나 폭력적인 성격을 가진 채 태어난 사람을 교화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천적인 여건'을 모두 그 사람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과 같다. 때문에 그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사회의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교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교화의 성공 확률과는 전혀 무관하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보다는 사회가 그 짐을 부담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20] "교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범죄자에게 교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한 치의 예외도 없는 원칙이다"라는 것이 교정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를 좀 더 이념이 덜 들어간 대중적인 관점으로 풀어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책 방향성의 선택지를 흑백으로 갈라 '모든 사람에게 교화를 시도하는 것'과 '모든 사람의 교화를 포기하는 것' 중의 양자택일로 축소시켜볼 수 있을텐데,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가정해본다면 전자의 경우는 지금의 안정적인 사회와도 같겠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형무소 인원 과밀과 재범율이 들끓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교화가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을 구분하여 처분하자'와 같은 선택지는 왜 없냐고 물을 수 있는데,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조차 교화 성공 사례가 있는 마당에 누군가의 교화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판단하는 것자체가 근본적인 불명확성을 품고 있으므로 배제해야 하는 선택지 취급을 받는 것이다.

물론 이런 윤리학적 반론이 아니더라도 답변은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흉악범에 대한 갱생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교화되어 다시는 재범을 저지르지 않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영위한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여론이 과거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에 관심이 없고, 언론에서 재범 사건만 보도하고 있을 뿐 실제로 상당수의 흉악범들이 출소 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즉, "전과자들을 사회에 풀어두면 반드시 재범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일각의 통념은 근대적 형벌제도가 구비된 이래 이미 무수히 반박되어 온 것이나 다름 없다. 전과자들을 사회에 풀어둬도 국가가 교화만 제대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이는 재범율 최하위권 국가들 중 교정주의적 정책 성향의 선진국들이 즐비하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4.3. 한계

교정주의 체계에서는 교도소나 교정시설 설치와 보수에 많은 돈이 든다.[21][22] 얼핏 생각해도 교정시설을 추가적으로 짓는 비용과 유지비, 교정교화를 시키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 등이 들어갈텐데 이건 모두 국민 세금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23] 즉, 재정상 어려움을 겪을경우 우선적으로 빠지는 세금이 될 수 있으며, 교화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상, 본인의 돈을 범죄자의 복지에 사용한다는 데 동의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교정주의는 그 본질상 엄벌주의에 비해 형량이 낮을 수밖에 없다.

반면 현재의 대다수 국민 여론은 지금의 형량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국민 여론과 교정주의가 합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의사에 따라 만들어져야 할 법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주의의 본질이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데 있는 한, 소수의 엘리트들이나 전문가들이 교정주의를 밀어붙이는 것이 옳다고 보기 매우 어렵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를 마냥 다수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24] 문제는 복잡한 현실의 환경과 시행 이후에 여파를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 구체적인 이유나 결과로 대중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옳은 판단이 되든 틀린 판단이 되든 결정에 대한 가치 판단을 뒤로 제쳐 두고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그 결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현재 대중이 일생 동안 느껴왔거나 보편적인 가치와 다르기에 부정적인 여론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5. 관련 문서


[1] 형법 교과서 및 논문에서는 '특별예방주의'로 표기되는 것이 보편적이나, 고등학교 교과인 생활과 윤리에서는 '특수예방주의'로 소개되고 있다.[2] 형벌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이념. 목적형주의와는 반대로, 형벌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그 과정 자체를 정의구현으로 여기는 이념인 응보주의가 있다.[3] 형벌이 '범죄예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이념.[4] 범죄 예방이 목적이 아닌데도 교정주의를 강조하는 경우는 많다. 천부인권 사상을 중시하여 인권 보장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공리주의적인 이유로 범죄인에 대한 불필요한 고통을 터부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종교교리에 의해 관용이나 용서, 불살생의 가치를 중시하거나, 생물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성격에 따른 차별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범죄 예방이 주목적이 아닌 교정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도덕적 신념의 문제로 이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5] '형벌이 범죄율의 감소를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의견은 보통 공리주의로 분류된다. 또한 일반예방주의를 강조한다는 특징도 있다. 실제로 공리주의 이론가들은 형벌은 그 자체로 악이지만 필요하며, 형벌을 통해 해악 행위를 통해 얻는 쾌락보다 많은 고통을 주게끔하면 인간은 합리성에 따라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처벌의 두려움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는 위하력 논리로도 대표된다. 범죄율의 감소를 최우선 목표로 둔다는 점에서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파놉티콘도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되었다.[6] CCTV 등의 방범 장치가 미비되었거나, 경찰의 순찰이 없다시피 하는 등 사회의 부작위에 의해 범죄에 용이한 환경이 조성되었을 경우, 범죄자가 범행을 결의할 확률은 증가한다.[7] 예를 들어, 범행 동기가 극심한 가난에서 비롯된 생계 관련일 경우, 범죄가 일어난 것은 그 범죄자 개인의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8] 성격장애를 비롯한 정신질환을 가진, 이른바 사회의 적극적인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경우, 이들에 대한 충분한 상담이나 치료를 하지 못해 발생한 범죄는 사회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9]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폐지될 경우, 전과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공연히 퍼뜨려 대상의 재사회화를 저해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소지가 크다. 이는 그 상대방의 재범 또는 극단적 선택까지 유발할 수 있는 문제 행동으로서, 정의구현의 명목으로 남용될 위험성이 심각하다. 이는 사이버 렉카에 대한 비판과 궤를 같이 한다.[10] 정당방위의 범위가 폭 넓게 인용될 경우, 정당방위를 빌미로 상대방에 대한 도를 넘은 복수 행위까지 합법화될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피해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공격을 걸어온 가해자가 괘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죽여버리는 등 악용될 위험이 크다. 엄벌주의자들은 이를 보고 "죄값을 치렀다"라는 반응을 할 수 있겠으나, 법에 따라 교화를 거쳐 재사회화했어야 할 범죄자가 그대로 보복당해 끝맺음되는 것은 교정주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로 받아들여진다.[11] 사실 공소시효의 주된 존재의의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보다도 형사실무적 인력과 기술의 한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보통 이념적, 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한 경우는 공소시효에 부정적인 입장을 실용적,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한 경우에는 공소시효에 긍적적인 입장을 취한다.[12] 검사경찰공무원은 그 반대로 엄벌주의적 관점이 강하다.[13] 그러나 영미권의 판사교정직 공무원의 경우 엄벌주의적인 관점을 보인다.[14] 범죄인의 교화를 위해 세금을 사용하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도 있지만, 교화 프로그램에 투자한다고 하여 사회가 손해를 입는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빨리 교화시킬 수록 죄수들의 수감 시간이 줄어든다. 그럴 경우 당연히 수감에 드는 비용이 감소하고, 교도소 포화 문제 해결에도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제대로 교화된 범죄인의 경우에는 사회로 돌아가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생산 활동을 하기 때문에, 교화에 대한 투자가 아깝다고 기간으로 땜빵하는 건 비윤리적인 것을 넘어 비효율적일 수 있다. 또한 교화 프로그램의 질에 따라 범죄인들의 사회 적응력이 좌우되므로, 재범 방지를 위해서라도 교화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다.[15] 즉 사이코패스에 의한 범죄를 일종의 자연재해로 여기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연재해는 누구에 의한 책임도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회의 질서 유지 의무를 지닌 국가에서 책임을 진다. 이처럼 국가가 사이코패스의 교화 및 범죄 피해자 지원을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16] 복수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피해자의 복수심 해소가 형벌의 목적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피해자나 그 유족들이 복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아무리 강한 처벌을 내려도 피해자가 만족하지 못 한다면 그땐 더 처벌 수위를 올려야 할까? 그뿐만이 아니다. 피해자의 복수심 해소가 형벌의 목적이 된다면, 피해자가 없거나 피해자도 범행에 동의한 마약, 미성년자 의제강간, 성매매, 촉탁승낙살인죄, 자살방조 등의 범죄들은 모두 처벌할 필요가 없어진다. 즉, 피해자의 감정 해소를 형벌의 목적으로 전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고로 복수심을 비롯한 피해자의 감정 상태는 양형 정도에만 참작될 지언정 형벌의 목적을 결정지을 순 없다고 보아야 합리적이다.[17] 물론 그 인권을 잃는 사람이 범죄자라는 점에서 누군가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권이 제한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그게 누구의 인권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다.[18] 물론 그 과정에서의 비용과 시간은 응보주의에 비해 많이 들 테지만, 경제적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포기해버린다면 그런 가치관은 윤리적 논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19] 이는 우발적 범죄와 흉악범죄의 특수성때문이다. 우발적 범죄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이성을 잃고 범죄를 저지른 경우를 말한다. 이때 범행 직전에 이성을 잃었다는 것은,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 자신이 그 행위로 인해 받게 될 처벌, 형량, 사회적 시선 등을 모조리 무시해버리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겐 형량의 무서움을 통한 범죄 예방이 불가능에 가깝다. 형량을 통한 범죄 예방이 힘든 건, 흉악범죄도 마찬가지다. 흉악범죄를 저지를 수준에 이른 사람에겐 이미 "오늘만 산다"의 마인드가 박혀 있고, 그건 법적 처벌이 아무리 강해진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 그 정도의 악인들은 "사형당해도 어쩔 수 없지" 혹은 "안 들키면 상관 없겠네" 정도의 생각을 갖고 범행을 저지르기 때문이다.[20] 보통 범죄를 막지 못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건 그 범죄가 사회문제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전제에서 사회가 최대한의 치안 정책을 펼칠 의무를 갖기 때문이다.[21] 물론, 엄벌주의 역시 형량이 커질수록 교도소 시설 확충이 필요하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아니라면 언제가 출소하게 될 재소자들을 감시하는 것 역시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은 아니다. 출소한 범죄자가 교화되지 않고 재수감 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소 증축이 필요한 악순환적 문제가 반복되게 된다. 교도소를 특정 지역에 증축하거나 재소자를 중간에 선처하게 될 경우에 결국 국민 여론의 불만이 나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22] 사형제도의 경우에 OECD 국가 대부분이 폐지했거나 더 이상 집행하지 않고 무기징역으로 대체한다. 무기징역의 경우에도 재소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UN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청소년을 제외한 성인이 무기징역을 선고 받을 경우, 최대 80년 이상을 교도소에서 관리하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부지와 세금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노인이 된 재소자를 석방시키더도 갈수록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나이 들수록 재사회화할 수 있는 교육을 지원하지 않으면 노인층의 출소자는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더 큰 문제가 노인층의 범죄자는 재범률도 높다.[23] 그래서 미국의 일부 주들은 교도서 내에서의 식비나 관리비 일체를 재소자에게 부과한다.[24] 민주주의는 공리주의적인 방향을 목적으로 국가의 국민들이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투표를 하고, 그렇게 매번 선출된 정부에 정치인들이 국가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적절한 의사를 발생할 수 있는 다른 문제와 연관하여 최대한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반영과 결정을 하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