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유대-로마 전쟁 라틴어: Expeditio Judaica[1] 그리스어: Τρίτος Ιουδαϊκός Πόλεμος [2]מֶרֶד בַּר כּוֹכְבָא :히브리어 영어: Third Jewish–Roman War | ||
시기 | 132년 ~ 136년 | |
장소 | 유대 | |
교전국 | 로마 제국 | 유대 반란군 |
지휘관 | 하드리아누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포블리키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하테리우스 네포스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 바르 코크바† 엘르아살 벤 모딤† 아키바 벤 요셉† 예수아 벤 갈굴라† 요나단 벤 바이인 마스벨라 벤 시몬 엘르아살 벤 키타 예후다 바르 메나쉬 시몬 벤 마타냐 |
병력 | 초기: 2개 군단 2만 명 중기: 5개 군단 8만 명 후기: 6~7군단, 5~6개 추가 코호트, 30~50개 보조병 부대 12만 명 | 바르 코크바 직속 1만 2천 명 유대인 20만~40만 명 남짓 |
피해 | 2개 군단 궤멸, 1개 군단 큰 손실 | 58만 명[3] |
결과 | 로마 제국의 승리.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가중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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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32~136년, 예루살렘의 페허 위에 신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고 유피테르 신전을 세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제3대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반유대 정책에 반발한 유대인들이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맞서 봉기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로마 제국은 이 전쟁을 치른 후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영구 추방하고, 유다이아 속주를 팔레스티나로 개명했다.
주도자인 바르 코크바의 이름을 딴 바르 코크바의 난(Bar Kokhba revolt)으로도 자주 불린다.
2. 배경
서기 115~117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으로 동방 로마군이 파르티아에 몰려 있는 틈을 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제2차 유대-로마 전쟁) 이 반란으로 로마 제국은 거의 성공할 뻔한 파르티아 원정을 중지해야 했고, 북아프리카의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 섬이 유대 반란군에게 짓밟히는 등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트라야누스가 실의에 빠진 채 로마로 귀환하던 중 사망한 뒤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 반란 진압 후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 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유다이아 속주로 도로 보내고, 그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못내도록 2개 군단을 상시 배치했다.하드리아누스는 헬라(그리스) 문화의 신봉자로, 그리스인들과 수시로 마찰을 벌이며, 다신교 세계에서 유일신교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극히 혐오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례를 금지하고 유대의 풍습을 모독하기 위해 고의로 중범자들에게만 할례를 실시하게 하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130년, 유다이아 속주를 방문한 황제는 폐허로 남아있었던 예루살렘의 터에 신도시인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고 유피테르 신전을 도시 중앙에 세우며, 제10 프레텐시스 군단을 배치하라고 명령했다.[4] 그는 유대인의 성전 역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대인들은 신도시에 이교의 주신인 유피테르의 신전이 들어섬 자체를 혐오했다.
이 무렵, 2세기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 중 한 명으로 손꼽히던 아키바 벤 요셉(일명 랍비 아키바)은 유대인을 구할 메시아가 될 적임자를 물색하다가 바르 코크바야말로 메시아라고 선언했다. 이 인물의 출신지, 계급, 봉기를 일으키기 이전의 삶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20세기에 유대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에 시몬 바르 코세바로 기재되었으므로, 그의 아버지 또는 출신지가 코세바(Koseva)이며 이름은 시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비유대인도 반란의 초기 단계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과중한 속주세에 시달리던 하층민들이 유대인들의 반란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경과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를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결함이 있는 무기를 일부 생산하여 로마군이 이를 거부하게 한 뒤 반란군의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반란군은 유대 지방의 여러 동굴에 작전 기지를 세웠다고 하며, 그 동굴의 좁고 낮은 입구는 내부에서 닫힐 수 있었고 안에는 저수지와 램프용 틈새가 있었다고 한다. 바르 코크바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실패와 마카베오 전쟁의 성공 원인을 분석해, 로마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기획하고 이를 위한 준비를 수년간 했던 것으로 보인다.서기 132년 여름 또는 가을, 반란군이 유대 각지에서 봉기했다. 그들은 유대 지방 전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보조병 부대 기지를 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10 프레텐시스 군단 역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반란군에게 섬멸당했다. 6군단 페라타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반란군의 거센 저항으로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이후 바르 코크바는 예루살렘의 탈환을 기념하는 주화를 주조했다. 다만 이 당시엔 예루살렘을 지킬 성벽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예루살렘 대신 지하 동굴 중 한 곳에서 정부를 수립했다. 유대인들은 이 성공에 고무되었고 랍비 아키바의 주장대로 바르 코크바가 참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만이 참 메시아이고, 그 이후의 모든 자들은 거짓 선지자라며 반란에 가담하는 걸 거부했다.[5] 이를 계기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유대 총독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는 랍비 아키바를 긴급 체포한 뒤 처형했으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다. 그는 132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는데, 아마도 반란군에게 죽었거나 경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로마 제국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포비키우스 마르켈루스가 3군단 갈리카를 이끌며 유대에 도착했고, 아라비아 속주 총독 티투스 하테리우스 네포스가 제3 키레나이카 군단을 인솔했다.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2 트라야나 포르티스 군단도 유대로 진군했다. 그러나 제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이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예루살렘)으로 진군하다가 매복에 당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5개 군단 8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유대 고원과 사막, 네게브 북부, 갈릴리, 사마리아, 요르단 계곡에 수많은 은신처를 마련하고 항전하는 바르 코크바에게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반란 진압이 잘 되지 않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서 활약하던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파견했다. 그는 133년 또는 134년 제10 게미나 군단,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과 5~6개 코호트, 30~50개 보조병 부대를 이끌고 유다이아 속주에 도착했는데, 이 군대는 도나우 강에서 차출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 투입된 로마군의 규모는 12만 명으로 당시 로마군 총 병력의 1/3에 달했다. 일부 학자들은 9군단 히스파나도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바르 코크바의 유대 반란군에게 궤멸되었다는 설을 제기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전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코크바가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로마군은 점령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초토화 전략으로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고 반란군을 차근차근 압박했다. 또한 베트셰안 시의 테 살렘 계곡 인근에 주둔했던 제6 페라타 군단의 진영으로 확인되는 곳 근처에서 개선문의 잔해가 발굴되었는데, 이 개선문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영광을 바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테 살렘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바르 코크바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아 벤 갈굴라가 지키는 헤로디움 요새 역시 134년 말에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135년 초에 함락되었고 예수아는 전사했다.
로마군의 총공세로 연전연패한 유대 반란군은 베테르 동굴로 숨어들었다. 135년 여름 제5 마케도니아 군단과 제11 클라우디아 군단이 이 동굴을 포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동굴에서 엄청난 학살이 벌어져 로마군이 타고 있는 말의 코까지 피에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바르 코크바가 어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산헤드린에서 그를 '거짓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벤 쿠시바(Ben-Kusiba)라고 규탄하고 처형했다는 설, 베테르 동굴에서 항전하던 중 뱀에 물려 죽었다는 설, 로마군에게 살해된 뒤 그 수급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전달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테르 동굴이 함락된 후에도 유대 반란 세력은 잔존했으나, 136년 초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4. 이후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유대 반란을 진압한 뒤 요새화된 도시 쉰 곳과 마을 985곳을 파괴했고, 유대인 58만 명이 살해되거나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었으며, 수많은 이가 노예로 팔렸다고 한다. 분노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이 세 차례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로마 제국을 혼란에 빠뜨림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보고,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그는 율법과 히브리력, 산헤드린을 금지시키고 산헤드린에 소속된 랍비 8명을 비롯한 여러 유대 학자들을 처형했다. 또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세워진 유피테르 신전에서 《토라》를 불태우는 의식을 감행했고, 유대인들이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방문하는 걸 엄격히 금지했다. 다만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8월 6~7일)에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성전의 마지막 흔적인 서쪽 담장 하나에 붙들고 통곡하는 것만은 허용했으니, 이 벽이 바로 통곡의 벽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다이아 속주의 명칭을 고대에 유대인들을 괴롭힌 대표적인 민족이었던 '블레셋인들의 땅'이라는 뜻의 '팔레스티나'로 개명했고, 나중에 시리아 속주와 합병되면서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가 등장해 7세기에 아랍이 정복한 후 '필라스틴'이 되어 현재 팔레스타인의 어원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서 축출되었지만, 갈릴리, 카이사리아, 골란 고원 및 유대 변두리 지역에서 여전히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 중 갈릴리는 4~5세기 경 《탈무드》가 집필될 정도로 유대교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이렇듯 유대인을 철저히 억압하여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던 하드리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한 지 2년 만인 138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그 후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유대인에 한해서 할례를 허용하고 유대인을 위한 축제를 로마에서 시행했으며,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온건 정책을 시행해, 그들을 다시금 로마 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의 유피테르 신전에 있는 유피테르 동상 옆에 하드리아누스의 동상을 세우고,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동방 개편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등 선제의 정책을 큰 틀에서 유지했다.
유대인들은 이후에도 로마 제국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고,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후에도 억압받았다. 351~352년에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부제에게 진압되었고, 5~6세기 사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동참하기도 했으며, 614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침공했을 때 적극적으로 호응해 동로마군 수비대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자체적으로 다스리다가 625년 또는 628년 사산 왕조군이 철수한 뒤 동로마 제국에게 항복했다. 그러다가 637년 아랍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하면서, 유대 지방에 눌러 살던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를 유대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높이 추앙하고 있으며, 로마군에게 처형된 랍비 열 명은 유대교에서 순교자로 떠받들린다. 대표적인 시오니즘 청년단체인 베테르(Betar)는 바르 코크바의 반란군이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베테르 동굴에서 이름을 따왔다.
[1] 유다이아 원정[2] 바르 코크바의 난[3]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4] 2014년 예루살렘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헌정된 제10 프리텐시스 군단 비문과 129/130년에 주조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기념 주화가 발견되면서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5] 《탈무드》에 의하면 바르 코크바는 유대 반란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