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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1:35:06

삼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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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35호
보은 삼년산성
報恩 三年山城
Samnyeonsanseong Fortress, Bo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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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어암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232\,655㎡
지정연도 1973년 5월 25일 ([age(1973-05-25)]년)
제작시기 삼국시대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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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4c3c><colcolor=#fff>
파일:1651673.jpg
삼년산성 전경[1]
1. 개요2. 역사3. 구조4. 고분군5. 관련 유적6. 외부 링크7. 사적 제2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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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은 삼년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에 있는 점판암으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 마립간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烏頂山城)이란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북서쪽으로는 청주와, 동쪽으로는 상주와 접하고 현재 서산영덕고속도로와 가까운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영월 정양산성과 형제뻘이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재료,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5호로 지정됐다.


2. 역사

삼국시대신라가 삼국전쟁의 전초기지로 쓰려고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요새였다. 판 형태로 잘 쪼개지는 점판암의 특성을 이용하게 납작하게 가공하여 정교하게 성을 쌓았다.[2] 삼국사기에 따르면 3년간 노동하여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완공했다.

축성된 때가 나제동맹이 맺어진 시기로 알려졌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쌓았다고 봄이 오래된 설이지만, 21세기 연구에서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협력이 나타나는 시기가 한정되어 나제동맹이 기능한 시기를 동성왕 대 전후와 성왕 대 전후로 축소해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런 맥락에서 삼년산성의 위치가 백제 방면으로 신라가 침투하는 양상이라, 그러한 상식을 깨고 실제로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관계가 굉장히 복잡했으리라 보는 실마리로 인용되기도 한다. 잘 알려졌듯이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켜서 대대적으로 남진한 때는 이보다 늦은 475년이다. 이를 고려하면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았음은 오히려 백제의 후방을 노리는 형국이기 때문이다.[3](2022년 역사저널 그날 388회의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의 설명)[4]

삼국사기는 삼년산성이 3년에 걸쳐 만들어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완공되었다고 할 뿐, 투입한 노동력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적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의 소지 마립간 8년(486)조에 일선(一善: 현 경북 구미)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해서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2020년대 이후 인터넷에서 이 삼년산성에 대해서 149승 1패라는 무시무시한 전적을 기록했다는 말이 퍼졌다.[5] 실제로는 이 서술은 거짓이다.[6] 삼년산성이 정사서에서 전투 장소로 언급되는 것은 단 두 차례이고, 승패는 1승 1패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 산성이 축조된 5세기 후반 무렵 적으로 상정했을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교전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누락된 기록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삼년산성이 비슷한 시기에 굴산성이 축조된 옥천을 먼저 거쳐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세종, 대전에 겨우 보루를 세운 것으로 나타나는 고구려나 성왕이 국운을 걸고 벌인 전쟁에서조차 옥천의 관산성을 뚫다 말고 대패해 버린 백제 모두 삼년산성에 닿지조차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백제의 공격까지 배송지연시켜 버린 옥뮤다의 위엄 또한 나당전쟁 시기에도 신라와 당의 사이에서 북방 전선은 훨씬 북쪽인 칠중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매소성(경기도 연천군 또는 양주시로 추정), 아달성(북한 강원도 이천군) 등지에서 형성되었고, 남방 전선은 백제의 영역보다 쪼그라든 웅진도독부를 신라가 숨 막히게 몰아붙이던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마찬가지로 당 또한 삼년산성에 접근조차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삼년산성이 군사 기지로서 기능한 사건은 한반도 내의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 김헌창의 난후삼국시대에 나왔다. 먼저 김헌창의 난 때는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위공과 제릉이 장웅의 군대에 합세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승리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822)

고 하여 김헌창의 반란군에서 거느리고 있던 삼년산성을 신라의 정부군이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보인다. 공주시를 주치(州治, 현대적으로 말하면 도청 소재지)로 하는 웅천주도독이던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상주시를 주치로 하는 사벌주도독이 동조했다고 기록되었으므로 사벌주 밑에 있었고 웅천주와 연결되는 경로에 있었던 삼년산성 또한 이때 김헌창의 반란군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지만, 함락 당시에 관해 전해지는 기록은 이게 전부라서 성이 함락된 기록이 남은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락되었는지는커녕 전투과정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원문의 '攻'하여서 '克'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문체에 따르면 분명히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에서 이겼음을 말하므로, 이때 변칙적인 요소가 있어서 함락당했을 가능성은 낮으며 그런 가능성은 기록으로도 전혀 입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냥 정공법으로 뚫렸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때 삼년산성이 뚫리면서 김헌창의 반란군은 속리산 방향을 경유해 신라군에 공격받게 되었으며, 곧 웅천주도독이던 김헌창의 본거지 웅진성이 공격받게 되면서 10일 간의 포위 끝에 김헌창이 자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때 삼년산성이 제 기능을 못한 것은 반란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이후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어느 순간 후백제의 영토가 되어 있었는데, 기록의 부족으로 경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918년 8월 계해일 친궁예 세력으로 추정되는 웅주(= 웅천주, 공주시), 운주(홍성군) 등 10여 개 군현이 견훤에게 투항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삼년산군 또한 이때 투항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태조는 927년 3월 운주를 쳐서 회복했지만 웅주는 회복하지 못했으며, 927년 11월 공산 전투에서의 참패와 이어진 강주(중심지는 진주시) 전역에서의 고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928년 7월 태조는 삼년산성을 공격했지만(삼년산성 전투) 함락시키지 못했다.
自將擊三年山城不克.
(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고려사》, 태조 11년(928) 7월 병진일

이것이 삼년산성이 실전에서 제 기능을 발휘한 것이 문헌으로 알려진 유일한 사례이다. 역시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전투의 양상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때 태조가 주둔한 곳을 '군장동(軍藏洞)'이라고 전해 왔으며, 이후 청주(淸州) 방면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후에 삼년산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려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유명세에 비해 전쟁사에 대한 문헌 기록에서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했어야 할 삼국시대에는 전투 기록이 아예 없고, 이후 시대에도 문헌에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고려는 거란, 몽골, 홍건적, 왜구 등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중남부 내륙 중심에 있는 삼년산성 인근에서 대규모 교전이 일어날 상황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아예 이름이 '오정산성(烏頂山城)'으로 나타나는데, 물론 실록에서 '삼년성'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고 해서 유지 보수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어쨌든 석성으로서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입지 자체는 방어성으로 좋았기 때문에 조선 성종 때 방어하기 좋은 성으로 언급되기도 했고, 임진왜란기에도 군량을 이곳으로 옮겼다든가 향교의 위패를 삼년산성의 서원에 옮겨 보전했다든가 하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의외로 그 장엄한 모습에 비해 삼년산성의 실전 전적은 초라한 편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는 애초에 고구려와 백제 등이 삼년산성으로의 경로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옥천 선에서 입구컷 당한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신라에서 이 지역에 막대한 공을 들여 방어 체계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석성을 축조한 사례 자체가 5세기까지는 매우 드물며, 5세기에 해자를 축조하는 등 꾸준히 보수 작업을 진행했던 월성조차 토성으로 쌓였다. 이와 비견될 만한 석성은 명활성이나 남산성이 있지만, 명활성은 551년, (경주 남산 신성비에 따르면) 남산성은 591년 이후에야 석성으로 개축된 듯하다. 그러니까 신라의 수도에서조차 투입되지 않은 공을 들여 변방의 전진 기지를 만든 셈이며, 이 때문에 신라 역사에서 삼년산성은 신라의 석축 산성 축조 개시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통한다.[7] 특히 486년 석성의 개축 당시 일선군에서 장정을 동원한 것으로 보았을 때 두 지역이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삼년산성이 위기에 처하면 경북 지역의 군대를 보낼 준비를 갖추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라가 들인 공은 5세기 후반 이후 신라가 점차 충청도 동쪽 지역에 뿌리를 박아가는 것으로 보답을 받게 된다. 그 때문에 삼년산성을 논할 때 학계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자비 마립간 대에 471년 모로성(芼老城, 군위군 효령면), 474년 일모성(一牟城, 청원군 문의면)ㆍ사시성(沙尸城, 옥천군)ㆍ광석성(廣石城, 영동군?)ㆍ답달성(沓達城, 상주시 화서면)ㆍ구례성(仇禮城, 옥천군?)ㆍ좌라성(坐羅城, 영동군 황간면)에 우루루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다. 이 성들의 위치는 기존에 신라의 영토였던 경북 내 방어성과 새롭게 신라가 진출한 충청 지역까지를 포괄하며, 이 성들은 고구려에 대한 방비는 물론이고 백제와 맞댄 전선에서도 두고두고 백제의 발목을 잡는 동시에 충청도로 수도가 밀려온 뒤에는 아예 목 밑에 들어온 칼날 노릇을 하게 되며, 백제 성왕의 목을 친 것이 바로 삼년산군의 고간(高干)으로 추정되는 도도(都刀, 일본서기에서는 고도(苦都))였다.

다만 새로운 지역으로의 진출이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5세기 후반에는 충청도에서 신라의 문화 침투가 생각보다 늦게 나타나나, 6세기 전반부터는 이 지역 곳곳에 신라 고분군이 조영되며 알박기를 굳히게 된다. 이처럼 신라가 뿌려둔 멀티 기지 중에서도 앞마당 노릇을 한 가장 중심적인 거점이 삼년산성이었기 때문에, 실전에서 직접 보여준 기능은 생각보다 미약했더라도 그 밥값은 충분히 한 셈이다. 한편 이처럼 안정적인 신라의 전진 기지였던 흔적이 의외로 백제 부흥군을 당과 신라가 제압할 무렵에 나타나는데, 660년 9월 28일 무열왕이 당의 사절 왕문도로부터 당 황제의 조서를 전해 받았다는 기록이다.[8] 이로부터 불과 5일 전인 9월 23일 시점에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 남쪽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고 열흘 남짓 뒤인 10월 9일에는 무열왕이 직접 태저(미래의 문무왕)까지 데리고 현재의 논산 일대에서 군사 작전을 벌였음을 생각하면, 충청도 일대에서 백제 부흥군이 한창이던 상황 속에서도 자그마치 국왕이 머물 만한 안정적인 전진기지로서는 충분히 인정받았던 셈.

3. 구조

파일:삼년산성1.jpg
파일:삼년산성2.jpg
<colbgcolor=#344c3c> 삼년산성 성벽

5세기 후반 신라의 축성기술을 대표하는, 한국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라고 평가받는다.

특별한 전적이 있지는 않지만, 엽기적인 방어력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의외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신라가 말 그대로 철옹성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드러나는 곳이다. 성의 둘레는 약 1.8 k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 m 이상으로 대단히 높다. 조선시대의 산성이 산 정상을 두르는 형태로 대체로 낮은 편인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요새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하중도 막대하므로,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고자 4중 계단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동쪽과 서쪽은 안쪽은 다진 흙으로,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을,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 방법을 이용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성문으로 상당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정문으로 사용한 서문은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진 위치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고, 남북으로 치성도 2개가 배치되어 공격하는 적에게 쉽게 반격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문 앞이 낭떠러지라 성벽 아래를 쭉 따라가야 진입할 수 있다. 성문 바로 뒤에는 큰 연못을 파뒀다. 공격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성문을 통과해도 연못이 또 가로막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동문, 남문, 북문은 치성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9] 동문은 현문식인 데다 내부에 옹벽을 만든 특이한 구조다. 서문만 현문식이 아닌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방어하기 쉬운 데다, 물자 보급 등의 이유로 멀쩡한 성문을 최소한 하나는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축성에 심취한 신라인들은 보급을 이유로 무조건 문 하나를 낮게 짓지는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재료, 비슷한 축조양식으로 지어진 정양산성에서는 동, 서, 북문 3개를 보급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부 현문식으로만 만들었다.

성내에는 연못 터와 우물 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을 새겼다.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 글씨를 오목새김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라고 전한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4. 고분군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5~6세기 신라의 고총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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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중심과 지방 세력
경주 대릉원 고분군 경산 임당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영천 완산동 고분군
대구 구암동 고분군 포항 냉수리 고분군
<colbgcolor=#fff,#000> 달성 고분군 영덕 <colbgcolor=#fff,#000> 괴시리 고분군
불로동 고분군 강릉 초당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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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 양리 고분군 예천 대심리 고분군
충주 누암리 고분군 영주 읍내리 고분군
청원 미천리 고분군 보은 대야리 고분군 }}}
파일:고총 분포도 사본.jpg
: 신라의 고총 고분군
: 고구려/백제/가야의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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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무덤 수천 기가 있는데, 행정명을 기준으로 '대야리 고분군'이라고 하지만 최근에는 '삼년산성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고총 고분군이 아니다보니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져 도굴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 지자체 대부분이 그렇듯 지역 내 역사문화 관련 유적의 정비 일환으로 삼년산성 고분군에 현황조사 및 발굴조사를 했다. #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삼년산성 고분군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경주 김씨 판도판서공파의 직계조상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법주사에는 이들의 족보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신라에게 산성+고분군 조합은 거점적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한다. 삼년산성과 삼년산성 고분군은 5세기 신라의 전통적인 활동반경인 경상도[10]에서 벗어나서 생겨나는 대표적인 사례로, 신라가 가야 지역에 지배력을 투사할 무렵부터 북방으로 진출을 꾀했다는 물적 증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5. 관련 유적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세계유산 잠정목록
중부내륙 산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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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상당산성

충주산성

장미산성

덕주산성

온달산성

미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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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는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었다.

6. 외부 링크

7. 사적 제235호

문화재청 소개글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삼년산성 → 보은 삼년산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항간에는 삼년산성 축성에 화강암 벽돌이 약 1천만 개가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나돌고 있으나, 화강암이 사용된 부분은 본래의 성돌이 아니며 오히려 졸속 복원된 부분이다.##[3] 다만 5세기 전중반에 이미 고구려가 충주 방면으로 침투했다고 본다면 이쪽에서 괴산을 거치는 방향으로 접근은 가능하다. 그러나 거리가 비교적 멀고 길이 많이 돌아가며, 이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열쇠가 되어 주어야 할 충주 고구려비의 연대가 연구자의 비정안마다 널을 뛴다.[4] 구체적인 학계의 연구로는 이부오(2007), 「5세기 후반 신라의 소백산맥 서록 진출과 지배형태」 『新羅史學報』 10, 新羅史學會를 참고.[5] 이런 내용은 관련 전공자면 단번에 간파할 수 있는 거짓말이다. 한국 고중세사의 정사 자료에서 150건이나 언급되는 장소 자체가 한성백제의 수도이자 삼국의 각축장이며 고려시대의 남경이었던 한성과 신라시대의 왕경(경주시) 및 고려시대의 개경, 그리고 고려시대에 왕경에 준해 다루어졌던 평양시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하다. 삼국사기고려사 모두 조선사의 기초 자료와 확연한 대비를 이룰 정도로 빈약한 자료이기 때문. 한 술 더 떠서 조선시대 이후 삼년산성은 그 자세하다는 실록에조차 '삼년성'으로 세 차례 등장할 뿐이다. 우습게도 149승 1패라고 서술한 그 어떤 매체에서도 아래의 두 전투 기록을 제외하면 그 148승이라는 장대한 전투 기록을 전혀 싣지 않는다. 당연히 기록이 없으니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 두 건의 기록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三年山城'으로 검색하면 확인해 볼 수 있다.[6] 이 서술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사례는 2018년 11월 16일에 쓰인 일개 블로그 글에 불과하다. 이후 2019년 6월 14일 KFN에서 업로드한 유튜브 영상에서 "대략 149승 1패라는 전무후무한 레전드 기록 갱신"이라는 자막이 나오며, 같은 날 나무위키 문서에도 해당 내용이 추가됐다. 이렇듯 근거가 불분명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2023년에는 제도권 언론에서 배기동국립중앙박물관장이 놀랍다며 인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7] 사실 이럴 수밖에 없다. 절대 연대와 비정이 완벽하게 갖춰진 7세기 이전의 석축성이 삼년산성 말고 거의 없다. 명활성과 남산신성은 삼년산성보다 늦는 것이 확실하다는 정도.[8] 좀 뜬금없고 어이없게도 이 왕문도는 이 날 삼년산성에서 당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례를 마치고 선물을 전달하다가 사망했다. 백제 부흥군과 전쟁 중인 상황이라 무언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으면 반드시 썼을 법한 데도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일로 사망한 듯.[9] 이러한 형태를 현문식(縣門式), 또는 현문식 구조라고 하는데, 신라의 성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전엔 성문이 모두 형식이 다르다고 조사되었고 흔히 커뮤니티에도 그렇게 알려졌지만, 2013년 2차 발굴조사 때 서문을 제외하면 전부 현문식이라고 밝혀졌다. 후대에 개축하며 형태가 바뀐 것.[10] 물론 경상도 말고도 영동 지방도 일찍이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편입시켰었다. 강릉이나 삼척 등지가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