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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5:22:36

삼종신기

삼종 신기에서 넘어옴
신기 야타노카가미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야사카니노마가타마
실물 소재지
황거 검새의 방
대용품 소재지
황거 궁중삼전 현소
황거 검새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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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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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미쿠사노카무다카라/3sin.jpg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사진.[1]
신기는 청동거울, 청동검, 곡옥으로 구성된다.
파일:삼종신기.png
새로운 천황의 즉위예식 중
검새 등 승계의 의식([ruby(剣璽等承継の儀, ruby=けんじとしょうけいのぎ)]).
사진은 1989년 1월 7일, 황거 정전 마쓰노마(正殿・松の間)에서 당시 갓 황위를 계승한 아키히토 천황이 승계 의식을 행하는 모습. [2]
1. 개요2. 기기신화와 삼종신기3. 유물로서의 삼종신기
3.1. 복제품3.2. 진품과 즉위식3.3. 검새와 거울
4. 신기 유실·교체설5. 유행어 삼신기6. 해외의 유사 사례7. 창작물 속의 삼종신기

[clearfix]

1. 개요

삼종신기([ruby(三種の神器, ruby=さんしゅのじんぎ)], 산슈노진기) 또는 미쿠사노카무다카라([ruby(三種之神器, ruby=みくさのかむだから)])는 일본 건국 신화에서 천손 니니기 미코토가 천상계 타카마가하라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로부터 건네받았다는 세 가지 진귀한 보물을 말한다.

일본 황실궁내청은 신화 속 신기라 알려진 거울 야타노카가미(八咫鏡, 팔지경), 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天叢雲劍, 천총운검), 곡옥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 팔척경구옥)을 천황이 지닌 종교적 권위의 원천이자 증거로서 관리하고, 이들은 신령이 깃든 물건으로 숭배받는다.

이하 본 문서에서는 일본어 고유어 명칭의 장음절 문제로 '삼종신기'로 명칭을 통일한다.

2. 기기신화와 삼종신기

신화 상의 출처는 ≪일본서기≫ 2권, 신대(神代) 하 9단 일서 제1이다. 여기서 아마테라스는 아들 아메노오시오미미(天忍穗耳尊)를 내려보내 일본 땅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히오미미는 자기 아들 니니기가 태어나자, 자기 대신 그를 보내라고 요청하여 아마테라스가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마테라스는 손자 니니기에게 삼종신기를 하사하며 내려보냈다.

일본서기≫ 신대 하 9단의 본문에서는 타카미무스비 신이 니니기를 신성한 이불로 써서 내려보냈다고만 설명할 뿐, 아마테라스나 삼종신기를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고사기≫에는 니니기가 지상으로 내려갈 때 곡옥과 칼과 거울을 주었다고 짧게 언급된다.


3. 유물로서의 삼종신기

3.1. 복제품

파일:Three_Palace_Sanctuaries.jpg 파일:external/takaoka.zening.info/Dsc_9701_m.jpg
야타노카가미의 복제품을 모시고 있는 고쿄 궁중삼전 현소(賢所). 다이쇼 덴노쇼와 덴노의 즉위식 때 삼종신기를 보관했던 교토고쇼 춘흥전(春興殿). 원래 야타노카가미의 복제품을 모시는 현소가 있던 자리로, 메이지 시대에 철거됐다가 다이쇼 덴노의 즉위 때 춘흥전으로 부활했다.

삼종신기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하는 원본과는 별개로 복제품(形代, 카타시로)이 존재한다.

신토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원본의 신성함을 나누어 받은 대체품으로 보기 때문에, 원본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경의를 바치는 물건이다. 다만, 칼과 거울을 궁궐 외부로 반출할 때 만들었으므로 곡옥은 복제품이 없다.

현재 거울 야타노카가미이세 신궁에, 칼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나고야에 있는 아츠타 신궁에 신체(神体)로서 봉안되어 전한다. 곡옥 야사카니노마가타마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의 복제품과 함께 천황의 침실 한편에 있는 검새의 방(剣璽の間)에서 엄중히 보관한다. 또한 야타노카가미의 복제품은 고쿄 안에 있는 궁중삼전(宮中三殿)[3]의 현소(賢所, 카시토코로)에 봉안했다.

선황이 죽거나 양위하면 즉위 예정자는 먼저 '검새 등 승계의 의(剣璽等承継の儀)'라고 하여 검새의 방에서 보관하던 검과 곡옥을 넘겨 받는 절차를 밟는다. 검새 등 승계의 의를 치르면 이때부터 새 천황이 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리하여 검새 등 승계의 의, 그리고 이어지는 의례를 전통적인 용어로 천조(践祚)[4]라고 부른다. 즉위식은 새로 천황이 되었음을 세상에 공포하는 의미이다. 즉위식을 올리는 당일에 새 천황은 황색의 전통예복을 갖추어 입고 먼저 현소(賢所, 카시토코로)를 찾아가 야타노카가미 복제품과 아마테라스를 모신 앞에서 예를 올린 뒤 즉위식을 거행한다.

3.2. 진품과 즉위식

삼종신기는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를 지상에 내려보낼 때 들려보낸 이후 니니기의 자손들(천황 가문)에게 계승되어 왔다고 전한다.

너무 신성히 여겨서 대중들에게는 절대 공개하지 않고, 심지어 물려 받는 당사자인 천황도 공식석상에서 보지 않는다.[5] 1989년1993년아키히토 천황 즉위, 또 2019년 퇴위 관계로 검과 구슬이 공식석상에 등장한 적이 있는데, 모두 보물함 안에 넣은 채라 실물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황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삼종신기를 외부로 공개한다면 고고학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은 필연이고 이는 신비로움과 신성함을 떨어뜨려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일이 된다. 그리고 하술하듯 기록대로라면 삼종신기 중에 검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다.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는 쿠사나기노츠루기[6]이라고도 한다. 이는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가 사가미 호족들의 음모로 불길 속에서 갇혔을 때 칼로 풀을 후려쳐 베어 쿠사(草) 나기(薙) 검이라 부르게 되었다. 겐페이 전쟁 중이던 1185년, 타이라씨 일족이 단노우라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대거 물로 뛰어들어 동반 자살했는데,[7] 이때 안토쿠 덴노가 가지고 있던 삼종신기도 다 물 속으로 가라앉았는데, 거울과 구슬은 건져내었지만 검만은 끝내 찾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기록대로라면 삼종신기 중 검은 이때 소실되고 현재까지 모조품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인데, 일본 황실과 정부는 그 당시 안토쿠 덴노야말로 모조품을 가지고 뛰어내린 것이라는 공식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진실은 유물의 연대측정이라도 해보면 금방 나오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2016년 말, 당시 아키히토 천황이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히면서 일본 정부가 후속 조치를 마련할 전문가 회의를 구성했는데, 2017년 4월 21일에 제출된 최종 보고서에는 전임 천황으로부터 후임 천황이 물려 받는 삼종신기가 원칙적으로 증여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비과세로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8] 이게 지금까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119대 고카쿠 덴노1817년 아들 닌코 덴노에게 양위한 이래로 2백 년간 생전에 퇴위한 천황이 한번도 없었으므로 과세라느니 증여라느니 하는 현대적 법체계의 논의대상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9]

2019년 4월 30일 고쿄 마쓰노마에서 진행한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식에서 구슬은 진품이, 검은 대체품이 등장했다. 검의 진품은 나고야시아츠타 신궁에, 이번 퇴위식에서 등장하지 않은 거울은 미에현의 이세 신궁에 있다.[10] 원칙상 천황의 거처에서 검의 복제품과 곡옥이 있어야 하기에 2019년 5월 1일 오후 12시 30분 나루히토가 검새 등 승계 의식(剣璽等承継の儀)을 마치고 탄 차량으로 같이 실어 아카사카 어소로 이전했다. 칼과 곡옥을 아카사카 고쇼 내 전용 방에 보관하다가 나루히토가 정식으로 즉위한 뒤 다시 고쿄 검새의 방으로 옮겼다.

3.3. 검새와 거울

일본에서는 검과 곡옥은 검새(剣璽)라고 따로 부르며 관리한다.
검새는 늘 천황의 곁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천황의 침실 한편을 따로 꾸며 검새의 방(剣璽の間)이라고 부르고 거기에서 검의 복제품과 곡옥의 원본을 보관한다. 1869년 메이지 천황도쿄로 사실상 천도한 이래 1947년까지 따로 검새동좌(剣璽動座), 일본어로는 켄지도자(けんじどうざ)라는 제도를 두었다. 천황이 고쿄를 하루 이상 비우고 길을 떠날 경우에는 시종이 '검새의 방'에 있는 검의 복제품과 곡옥의 원본을 각각 모신 함을 들고 같이 다니게 하는 것이다. 이는 검새가 늘 천황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검새동좌 제도는 패전 이후 GHQ 시절이던 1947년에 사라졌다. 그러나 1971년 쇼와 천황이 유럽 순방을 떠났을 때 신토청년전국협의회(神道青年全国協議会)가 정부에 대고 검새동좌 제도 복구를 요구했다. 검새동좌 제도를 복구하자고 요구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어동좌복고운동(御動座復古運動)'이라고 부른다. 당시 일본의 신토계에서는 검새동좌 제도를 복구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1974년 11월 쇼와 천황이세 신궁을 참배할 적에 부활했다. 그래서 천황이 공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차량이나 기차에는 따로 검새를 넣은 함을 안치하는 공간을 갖춘다고 한다.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薗 進, 1948-) 교수는 검새동좌 복구를 두고 '건국 기념일' 제정과 함께 신토의 국가행사적 측면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의 일부라고 평가했다.[11]

한편 거울의 복제품은 같이 모시지 않고 따로 궁중삼전(宮中三殿)의 중심건물인 현소(賢所, 카시토코로)에 봉안했다. '검새'란 표현에 거울을 욱여넣을 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종교적 관점에서 신성한 것은 위험하기에 거처로부터 분리하여 따로 모셨을 수도 있다. 신성한 것은 또한 위험하다는 관념은 동서고금에 흔하다. 신성한 것은 부정을 타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하고, 만약 잘못하여 부정을 타기라도 하면 화를 입는다고 여겼다. 정말로 너무나 신성한 무엇이 있다면, 사람들이 쉬 오가거나 먹고 자는 곳에 두는 것은 자칫 부정타기 쉬우므로 위험하다. 신성한 물건을 신전 같은 별개의 건물 안에 모시거나 또는 금역을 지정함은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목적도 있지만, 또한 신성을 속세로부터 분리하여 행여 부정을 타 재앙이 일어나지 않게 안전장치를 씌운다는 의도도 어느 정도 있다.

4. 신기 유실·교체설

일본 정부, 또는 황실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삼종신기의 원본들은 신령들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소실되지 않고 잘 보관되어 내려왔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나 관리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심지어 천황조차 쉽게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 일본에서는 진품이든 복제품이든 확인하려고 하는 행위를 불경시한다. 2019년나루히토의 즉위와 관련하여 궁내청이 연 기자회견에서 궁내청 관계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공개적으로 즉위식을 거행한 뒤 황실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공개 즉위의식을 별개로 진행한다. 이때 천황이 실물을 직접 볼 수 있고, 궁내청 일부 관계자들도 유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실물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보수를 진행한다고 한다.

다만 다른 나라의 왕실 보물들도 고고학적 분석결과로 연대가 역사 기록과는 한참 차이나게 짧은 모조품으로 판정난 것들이 대부분이듯, 천황가의 삼종신기 또한 실제로 연대측정을 하면 길어봤자 기원후 몇 세기 물품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부러 안 하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황실의 신성성과 권위를 떨어트릴 테니 당연히 이를 꺼릴 것이라는 취지. 또한 중요한 종교적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메카카바 신전이 진짜인지 해체해 보자거나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무덤을 열어 보자는 말과 같다.[12][13] 어느 나라에서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상징물은 함부로 접하거나 현대적 조사를 하도록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예 허가하지 않거나, 허가하더라도 예외적인 경우에만 조심스럽게 해준다.

삼종신기 원본이 유실되었다는 주장 대부분은 1185년, 단노우라 전투를 원인으로 말한다. 현재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단노우라 전투에서 유실된 쿠사나기노츠루기는 원본이 아닌 대용품인 카타시로이며, 원본은 잘 보존되고 있다'이다. 그러나 원본이 유실되었다고 하더라도 정권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는 기록이 계속 전해질 리는 없고, 거꾸로 복제품이 남아있다면 그걸 진품으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노우라 전투는 황실을 둘러싼 세력 싸움이었으며 천황의 외가가 천황과 삼종신기까지 함께 갖고 도망칠 만큼 몰린 상황이었다. 몰릴 대로 몰려 천황과 함께 투신자살할 정도인데 과연 삼종신기를, 대용품 정도만 갖고 도망쳤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

이후 고토바 덴노 때는 삼종신기 없이 즉위해 이것이 평생 큰 약점으로 작용했는데, 그때마다 귀족들이 '천황이 삼종신기를 잃어버려서 그렇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단노우라 전투 때 삼종신기가 유실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매우 역사가 오래되었다. 단순 대용품만 잃어버리고 끝났다면 귀족들이 그걸 빌미로 천황을 압박할 수 있을 리 없으므로, 정황상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원본과 대용품 모두에 과학적 검증을 거치면 답이 나오겠지만 황실의 권위와 신성모독이 걸린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유달리 칼 쪽은 단노우라 전투 이후 고토바 덴노가 사람을 보내 회수하려 시도했고 본인도 칼을 직접 만들 만큼 미련을 못버렸으니 상대적으로 다른 두 신물에 비해 유실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다.

일본 황실이 긴 역사에서 정치와 난세에 엮이지 않고 유지되기 어려운 만큼, 그 상징인 삼종신기 마찬가지였다. 단노우라 전투 이후로는 아예 삼종신기란 보물이 있어야 천황이 아니라 천황이 가진 것이 곧 보물이란 논리로 이어졌다.

5. 유행어 삼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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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세간에서 유용하게 쓰이거나 히트한 상품을 세 종류 묶을 때 삼종신기, 삼신기라고 부르는 유행어가 존재한다.

6. 해외의 유사 사례

이러한 신기 신앙은 천손강림 신화소와 함께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계통의 타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신화에서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의 자손이 무언가를 받아 온다는 이야기가 보편적인 편이다. 이러한 신물(神物)로 단군 신화천부인이 있다. 최남선은 천부인이 검과 거울, 청동 방울이라고 주장했다(천부인, 팔주령 문서 참고). 비슷하게 3가지 특별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라신라삼보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충남 부여 연화리 유적에서는 거울, 칼, 옥제품이 함께 출토된 적이 있다.

동서고금 여러 나라에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물리적 증표라는 점에서 비슷한 유물이 있다. 중국의 전국옥새가 대표적이며, 오늘날 영국에도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상징하는 운명의 돌이 전해진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성 이슈트반 왕관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7. 창작물 속의 삼종신기

검을 잃어버린 일을 두고 만화 같은 데서 여러 가지 떡밥이 많다(만화 아자마루에서는 타이라노 카게키요가 쿠사나기의 검을 들고 복수를 획책한다든가).

일본 국보인 검, 거울, 곡옥의 삼종신기에 관련된 경우에만 여기에 적고 비유적인 3대 중요요소나 아티펙트인 경우는 별도의 삼신기 항목에 기술해 주세요.
1950년대 일본 흑백TV, 세탁기, 냉장고가 가정의 삼종신기로 여겨졌다. 이 세가지가 있어야 진정한 가정이란 의미.


[1] 일본 황실궁내청은 역사상 한 번도 삼종신기 실물을 대중에게 전면 공개한 적이 없다.[2] 옆에는 토모히토 친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그리고 황태자 시절의 나루히토 천황이 있다.[3] 고쿄 안에 있는 사당 3채(삼전)와 부속시설을 통칭하는 말. 천황가 전용 신사, 또는 종묘라고 해도 무방하다.[4] 천조(踐阼 또는 踐祚)라는 낱말은 '임금의 자리를 승계한다'는 뜻으로 '즉위'와 동의어이다. 한국의 고서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두 단어의 의미를 분리하여 실질적인 승계는 천조, 대외적으로 새 천황이 즉위했음을 알리는 예식을 즉위라고 지칭한다.[5]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선 단노우라 전투 중 겐지 측 병사가 야타노카가미가 든 상자를 회수해 열려다가 코피가 쏟아지고 어지럼증이 생기는 묘사가 있다. 지성소처럼 매우 신성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결로 이해할 수 있다.[6] 쿠사나기의 검, 초치검(草薙劍)[7] 안토쿠 덴노는 타이라씨가 외가댁이었는데 6살이다보니 친척들 손에 이끌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자살했다.[8] 기사.[9] 일본에서 서양의 영향을 받은 근대적 법률은 1882년(메이지 15년)부터 시작하였지만, 천황의 지위에 대해 법적으로 논하는 것을 신성모독/불경시했다. 근현대인 1933년(쇼와 8년)에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교수가 강의하며 천황의 헌법적 지위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저 강의하다가 천황이 헌법기관인지 아닌지 논의만 하였을 뿐인데, 특고가 강한 압력을 넣어 사표를 쓰는 바람에 다른 교토법대 교수들이 단체로 사표를 던지고 그만둔 사건까지 벌어졌었다.[10] 퇴위식에서 비단으로 싸여 등장한 함이 3개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삼종신기 전부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하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함 안에 든 물품은 검, 곡옥, 1874년 제작해 지금까지 사용하는 어새(御璽)와 국새(國璽) 각 한 과였다.[11] 출처: 島薗進 (최석영 번역), 근대 일본 국가 신도의 창출과 그 후, 소명출판, (2024), 12 \[国家神道と日本人, 東京: 岩波書店 2010\].[12] 현대에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서 진짜 베드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과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부장품들의 특성과 유골 감정 결과 1세기에 사망한 60대 남성의 유골로 밝혀져 진짜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말 과학적 자료가 다 공개된 것이 아닌 비오 12세의 감정 결과 발표였기에 엄밀한 레벨은 아니라 논란의 여지는 있다.[13] 그래도 이 쪽은 가능성이 높은 게, 당대(서기 1세기경)에 '베드로가 여기 있다'고 쓰여진 것으로 감정된 글귀가 발견되기고 했고, 유해에 교황(알다시피 베드로는 사도전승에 따른 초대 교황이다)쯤 되어야 부장될만한 부장품도 발견되었다.[14] 단, 정작 아츠모리 루트에서는 해당 설정 때문에 아츠모리에게 건네주게 되므로 노조미가 실제 루트에서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왜 하필 아츠모리에게 건네주는가는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15] 근데 중요한 건 주인공도 딱히 자진해서 내 놓을 생각도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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