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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25:32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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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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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 가야
,마두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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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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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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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 포상팔국 연맹
신라-왜 전쟁
,(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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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가야, 백제, 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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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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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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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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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新羅之 漢江 流域 占領
<colbgcolor=#4a2d5b,#0e0f37><colcolor=#fbe673> 시기 551년 (양원왕 7년) 3월 혹은 9월 ~ 553년 (양원왕 9년) 7월
장소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전역
원인 고구려의 남진 정책
교전국 백제·신라·가야
(공세)
<rowcolor=black> 고구려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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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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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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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야이차
[[가야|
伽倻
]] 참전자 불명[2]
참전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참전자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결과 백제·신라·가야 연합의 승리
영향 고구려의 남진정책 좌절
관산성 전투 발발
신라의 전성기 시작
1. 개요2. 배경3.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 - 한강 유역 탈환4. 백제의 한강 하류 철군과 신라의 점유5. 신라의 급격한 정권 교체6. 백제와 신라의 격돌, 관산성 전투7. 결과8. 여담

[clearfix]

1. 개요

6세기 중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한강 유역을 최종적으로 신라가 장악하게 되는 과정. 짧게는 551년 ~ 553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직후에 일어난 554년의 관산성 전투는 이 판도가 확정되는 사건이었다.

교과 과정에서는 이때부터 5세기 광개토대왕, 장수왕 대에 형성된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2. 배경

고구려광개토대왕을 거쳐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에 큰 위협을 느낀 남쪽의 백제신라나제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 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근근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475년 9월 장수왕은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하고,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함으로서 비로소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백제는 크게 약화되었고, 대가야에게 전라도 동부를 빼앗기기까지 하는 등 내외부로 혼란기를 거쳤지만 동성왕무령왕 대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 성왕 대에는 슬슬 고구려에 반격이 가능한 국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문자명왕 말기로 계속된 나제동맹의 압박으로 인해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다 안장왕 즉위 이후 양면 외교 정책과 북위의 용성을 공격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이후 본격적으로 백제와의 전선에 집중해 다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일시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즈음 백제는 전투를 위해 파병된 군대가 안장왕이 친정한 고구려군에 연달아 패배하고 큰 피해를 입는 등 꽤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안장왕의 승하 이후 급변하게 되는데, 545년 중부인의 추군파와 소부인의 세군파가 각각 자기 계파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려고 내전을 벌이게 됨으로써 고구려의 국력이 타격을 입고 쇠락하게 되었다. 북진 직전에 일어난 548년의 독성산성 전투 때는 가야의 사주로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에 쳐들어갔지만, 신라군이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고구려군이 대패를 당하는 등 나제동맹이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3.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 - 한강 유역 탈환

파일:나제동맹의 한강유역 탈환.png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28년(550년)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 성왕 #
백제 성왕은 550년 1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도살성(충북 증평)[3]을 점령했다. 그러나 두 달 후인 3월, 고구려는 반격을 개시하여 백제의 도살성과 인근의 금현성을 침공해왔다. 금현성의 함락에 뒤이어 도살성도 함락 위기에 처했다. 그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의 원군이 도착해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 고구려군의 퇴각 후 신라군은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독살성과 금현성에 방어 병력 1,000명을 주둔시켰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증축했다. 자연스레 이 두 성은 신라 영토에 귀속되었다. 백제 성왕은 이 두 성이 신라 영토가 된 것에 대해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12년(551년) 3월, (중략) 임금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

12년(551년) 봄 3월, (중략)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4](현 서울 한강 이북, 구리, 남양주 일대)을 토벌했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일본서기》 제19권 〈흠명기〉 12년 #

12년(551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
얼마 후 고구려군이 다시 금현성을 공격해왔다.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은 금현성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쫓아가 고구려 본토로 쳐들어갔다. 이에 발맞추어 백제도 현 경기도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551년은 마침 고구려가 북방에서 유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치던 돌궐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북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둘로 나뉘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일본서기》에서는 551년 3월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551년 9월로 나온다.

이 공격으로 백제는 한성과 남평양 일대를 점령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야의 병력도 참전했다고 한다.[5] 한편 신라는 한강 상류의 충청, 강원 지역을 공격했다.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돌궐(튀르크)의 침공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 남쪽에서 이루어진 신라와 백제의 협공에 잇따라 패주하며 강원도 북부와 경기도 지역을 내주고 말았다. 551년 나제동맹군의 북진의 결과, 신라는 고구려 남동부의 10군, 백제는 6군을 획득했다. 특히 백제로서는 76년 만에 옛 도읍과 고토를 수복한 것으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러나...

4. 백제의 한강 하류 철군과 신라의 점유

13년(552년) 백제한성과 남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과 니미방(尼彌方)[6]이다. 【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31년(553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
삼국사기성왕

14년(553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신라 진흥왕)이 백제왕(성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

551년 나제동맹군의 북진의 결과, 백제는 위례성을 비롯한 고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2년 후인 553년 신라의 진흥왕이 당초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그동안 진흥왕이 신라의 국익을 위해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차지했다는 추측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당시 문헌들은 “백제가 스스로 한강 하류를 포기했고, 신라가 그 영토를 차지했다.”고 써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한강 유역의 방어에 한계를 느낀 백제가 스스로 한강 하류에서 철군했고,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진흥왕의 신라군이 내려와 차지했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성왕 항목 참조)

요약하자면 신라가 멀쩡히 백제군이 주둔한 땅을 빼앗은 게 아니고, 백제가 관리 능력의 부족을 느껴 스스로 포기한 것을 신라가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문헌상으로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먼저 버린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553년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만약 신라가 동맹을 깨고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점령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한강을 방어하는 백제와 점령하려는 신라 간에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어야 한다. 만약 실제로 전투가 발생했다면 이는 후속전이라 할 수 있는 관산성 전투보다 훨씬 중요하고 파급력이 큰 대사건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무력 충돌을 벌였다는 기록은 국내외 어떤 사서에도 그 기록이 전무하다.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국내의 사서에 상당히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관산성 전투 관련 기록을 분석해 보면 오히려 당시 신라의 한강 점유는 아무런 군사적 충돌 없이 매우 평화롭게 이루어졌고 백제 또한 표면적으로 이에 대한 불만과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이후, 백제 성왕은 어떠한 항의나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또 얼마 후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면서까지 신라와의 나제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다. 결정적으로 554년 관산성 전투 출병 당시 백제 귀족층이 출병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점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당시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백제는 부여씨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심각한 대립 양상을 띄고 있는 상황이었다. 551년 나제동맹군의 북진으로 백제가 일단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점령 지역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했다. 그런데 당시 백제군은 지방 귀족들로부터 파견을 받아 구성되어 있었다.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개발하는 것은 왕권을 강화해 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은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고, 전쟁이 끝났으니 파견해준 군대를 다시 돌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 양측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외적으로 성왕이 철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7]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지 3개월 후 백제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다시 굳건히 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사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백제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근구수왕, 동성왕, 무령왕 시절에도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거나 한강 유역을 수복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후 별다른 전쟁 기록도 없이 곧 이를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군사적 진로를 개척한 후, 이를 영역화하지 못하고 다시 상실하는 현상은 근초고왕 대를 제외하면 의자왕 때까지 백제 시대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마치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비슷하게 지방 세력들로부터 파견받아 구성되는 백제군의 편제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475년 고구려의 침공을 받았을 때 백제 귀족 지원군이 신라 지원군보다도 늦게 출동해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과 부여씨 왕족들이 참수당하는 비극을 겪은 사실은 바로 백제군과 신라군 편제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라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의 한강 유역 진출을 둘러싸고 백제 귀족층의 분열과 의견 대립도 있었다. 한성백제 시절에는 왕족인 부여씨와 왕비족인 해씨, 진씨가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사택씨(사씨), 연씨, 목씨 등 충남 토착 세력들이 중앙귀족층에 편입되어 이른바 대성팔족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백제 왕들이나 한성 기반의 해씨, 진씨 등은 북진을 해서 한성을 되찾자고 주장했지만 충남계 신흥 귀족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번번이 북진을 반대했다. 북진을 하여 한성을 되찾으면 한성으로 환도할 것이 뻔하며 그렇게 되면 한성 출신 귀족들의 권세가 커지고, 충남계 귀족 세력은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 수복을 둘러싼 지배층의 분열은 나중에 관산성 전투를 앞두고 다시 한번 재현된다.

백제는 자신들이 한강에서 철군하면 비어있는 한강 유역은 고구려, 혹은 신라의 차지가 될 것은 뻔했고, 백제도 자신들이 한강에서 철군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에 대해 당연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백제는 한강을 둘러싸고 내심 신라와 고구려가 격전을 펼치기를 원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전에도 도살성·금현성 전투 등에서 고구려와 신라가 혈투를 벌이며 싸우는 동안 백제는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전력 부족을 핑계로 뒷전에 물러서서 관전만 하고 있다가, 이후 신라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어부지리를 취하며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했던 전례가 있다.

물론 백제가 이 전투에서 사실상 방관자에 있었던 것은 백제군이 초반에 고구려군에 박살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긴 했지만, 이후 신라군이 와서 반격을 할 때 백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사실상 방관하는 입장만 취했고, 결국 답답한 신라가 직접 나서 고구려와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도살성과 금현성은 지리적으로 백제, 신라에게 모두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성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이 성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의 충청도의 지배권을 양국이 고구려로부터 확보할 수 있느냐가 걸려 있었다. 백제 입장에서도 이 지역을 빼앗긴다며 다시 충남 수도권 일대가 고구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에 처하게 되지만, 신라 입장에서도 만약 금현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신라가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고구려로부터 확보한 죽력 이북 땅이 모두 위험에 쳐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 병력이 없다고 엄살을 피우며 출병을 미루었던 백제는 승전을 하자 없던 군사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오히려 신라를 부추기며 한강까지 치고 올라가자고 하게 된다. 신라로서는 백제의 이러한 불성실한 처사에 내심 상당히 불만이 있었을 법하지만, 어쨌거나 크게 내색은 안하고 백제와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라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550년대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항쟁은 기본적으로 나제동맹과 고구려가 대결하는 양상이긴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삼국 간에 게임이론 속에서 치열한 수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제동맹 사이에서도 서로 적은 희생으로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수싸움과 이에 따른 불신이 쌓여가고 있었고, 고구려 역시 나제동맹에 큰 위협을 느끼며 동맹의 균열을 꾀하기 시작했다.

한편 백제가 한강에서 철수한 것은 신라 입장에서 황당한 노릇이었다. 백제가 한강 하류에서 물러나면 고구려가 그 땅을 찾기 위해 밀고 내려올 것은 자명한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신라가 차지한 한강 상류 역시 위험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라는 철군하는 백제에 항의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백제가 철군을 강행한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신라가 대신 그 땅을 방어하겠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미 이전에도 그런 상황이 몇 차례 발생했는데,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도 백제가 방어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함락당한 이 지역을 몇 개월 후 신라군이 수복한 후 신라군이 산성을 쌓아 계속 주둔하며 방어했던 것이다. 금현성 자체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탈취 후 짧은 점유 기간을 거쳐 신라가 다시 차지하여 신라땅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백제로서도 큰 이득이었는데, 금현성 자체는 신라땅이 되었지만 인근 충청도 서부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성과에 고무된 나제동맹은 3년 후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해 다시 북진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라로서는 백제의 철군 이후 한강을 차지하게 되면서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신라가 전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백제 입장에서 자신들이 한강에서 철군한다면 신라가 차지하거나 고구려가 차지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고구려가 차지하는 것보다는 동맹국인 신라가 차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따라서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백제가 철군하면 신라가 그 자리에 들어와 방어를 하겠다는 사전 교감이 어느정도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상당하며, 그런 사전 교감이 없이 백제가 철군했다면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신라측이 항의 및 경고를 보낸 후 동맹의 방어를 명분으로 자연스레 한강 하류로 내려오는 시나리오대로 사건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당시 수세에 몰린 고구려가 나제동맹의 추가적인 북진을 막기 위해 나제동맹의 한 축인 신라에게 이쪽으로 오지 말고 저 백제 쪽을 대신 노려서 더 많은 땅을 얻으라는 제안을 했고, 신라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설이 있다. 고구려는 북쪽에서 돌궐의 급습으로 신성이 포위되었고, 수도 평양성이 위협받는 등 남방 전선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례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에게 고구려를 함께 치자고 했지만 거절 당했다.
承聖三年九月百濟兵來侵於珎城, 掠取人男女三万九千馬八千匹而去. 先是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高麗, 真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與羅通好. 而百濟㤪之故來爾.
승성(承聖) 3년(554년) 9월 백제 병사가 진성(珎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553년,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거하고 신주를 설치했다.

백제는 이에 대해 딱히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동맹의 방어 의무를 저버리고 철군한 것은 백제였기에 백제는 항의할 명분도 없었다. 이전 금현성 전투 등에서도 백제가 방어에 실패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땅을 신라가 수복한 후 영토화한 사례들이 있고 여기에 대해서도 백제는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백제가 방어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철군한다는 것은 지배권을 포기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백제 역시 자신들이 한강에서 철군한 이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적대 세력인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길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후 양국간의 합의 내지는 신라측이 항의하며 자연스레 한강을 신라가 접수하게 되었고, 백제는 이에 대해 어떠한 항의를 할 처지도 아니었고, 명분도 없었다. 오히려 적성국 고구려가 아닌 동맹국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며 고구려를 막아주는 것이 다행한 상황이다.

사실 백제는 이러한 상황을 노렸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한강에서 물러난 일차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하게 되면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지고 신라가 전적으로 고구려를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라와 고구려가 혈투를 벌이며 서로 국력이 약해지길 기대했을 공산도 있다. 당시 신라 조정의 정치적 과도기에 주목하고 있던 성왕은 내심 신라가 한강 유역을 오래 점유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 나와 있듯이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가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가 잠시나마 가까워지는 듯한 형국을 보이게 되었다.

신라 입장에서는 나제동맹으로 함께 차지한 땅인데 백제가 철군을 하니 고구려가 그 땅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신라가 방어하겠다는 논리로 그 땅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몇년전에 일어난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도 백제가 고구려가 패하여 빼앗긴 도살성 금현성 일대를 신라군이 격퇴하였고 그땅은 백제땅이 아닌 신라땅이 되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레 일어났는데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에 수천의 군대를 계속 주둔하며 방어성벽을 구축했고 자연스레 신라의 땅이 된 것이었다. 이때도 백제는 전혀 항의하기는 커녕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지역에서 고구려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동맹군인 신라군이 주둔하면서 인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도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회복한 백제와 신라는 3년 후 한강 점령 작전을 실행해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이후 어쨌거나 정세는 크게 달라졌다. 일단 위에 언급되었듯이 신라의 젊은 국왕 진흥왕이 급격한 정권 및 군수뇌부를 교체하며 신라가 자멸의 상황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고, 위에 언급된 삼국유사 등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는 정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이후 진흥왕은 대대적인 고구려 정벌을 했지만 553년 상황에서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가 화친을 맺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당시 복잡한 정세와 이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서는 백제 조정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중신들은 나제동맹의 지속을 주장했다. 하지만 성왕과 태자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백제 성왕은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맺었다고 생각하고 초조함을 느꼈으며, 가만히 있으면 고구려와 신라에게 눈 뜨고 코를 베일것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먼저 행동에 나서 신라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552년 5월 8일에는 왜에 몰래 목리금돈(木刕今敦)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와 고구려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백제와 가야를 노리고 있다"고 알리며, 군사를 요청한다.[8]

위 같은 백제의 주장을 긍정하는 측에서는 관산성 전투 직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통과해 백제를 공격한 사건을 두고 신라가 고구려군이 진격할 수 있도록 임시로 길을 내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 황초령 순수비에 인근 국가가 사절을 보내 강역 확정을 축하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고구려의 사절로 보기도 한다. 이후 백제와 신라가 대대적으로 맞붙었을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방어해야 할 군대까지 김무력이 데리고 내려가는데, 이러면 필히 원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빈집털이 공격을 받을 우려가 컸지만, 고구려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리 고구려와 밀약을 맺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신라와 고구려 간의 화친 또는 동맹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신라와 고구려는 당시 엄청난 적대관계를 이어갔다. 6세기 전반기 내내 고구려와 신라는 수많은 전쟁을 해왔고, 또 관산성 전투 이후에도 또다시 치열한 전쟁을 재개하였으며 이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5. 신라의 급격한 정권 교체

그간 신라가 한강 하류를 무력으로 차지했다는 주 근거는 관산성 전투였다. 즉 신라가 한강 하류를 무력으로 차지한 것에 대한 백제 성왕의 보복전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관산성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정황을 보면 이 전투가 딱히 보복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관산성 전투는 당시 신라 조정의 급격한 정권 교체로 인한 권력 공백을 틈탄 공격이라 볼 수 있다.

신라는 법흥왕 사후 그의 아들인 진흥왕이 보위에 올랐지만 진흥왕은 나이가 매우 어려 지소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현명한 지소태후는 진흥왕 즉위 후 대규모 사면을 통해 민심을 얻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했는데, 특히 법흥왕 대에 공석이었던 병부령(국방장관)[9]에 명장 이사부를 임명하여 군권을 안정시켰다. 법흥왕 사후 어린 진흥왕이 섭정을 받는 상황에서 병부령이 된 이사부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지소태후는 이사부를 신임하면서도 그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554년 병부령을 2명으로 늘려 이사부를 견제하기도 했다. 이미 우산국금관가야를 정벌하는 등 큰 무공을 세운 바 있었던 명장 이사부는 병부령에 임명된 후 548년 독산성 전투와 550년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 잇달아 고구려군을 격퇴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차에 551년 성년이 된 진흥왕이 드디어 친정을 행사하게 된다. 18세의 젊은 군주 진흥왕은 아버지뻘 이상되는 노장 이사부를 위시한 선대 법흥왕대부터 있었던 중신들을 대거 이선으로 퇴진시키고, 김무력 등의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진흥왕이 새로 기용한 김무력 등 신진 세력은 군을 이끄는 중책을 맞았으나 너무 젊고 경험이 없었고 관등도 아직 낮아 아찬에 불과했으며, 나라와 군을 이끄는 고위직에 오르기에는 턱없이 낮은 관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551년 진흥왕 친정 이후 순식간에 일어났다.

이러한 신라 조정의 급격한 세대 교체는 백제에게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백제가 보기에 젊고 객기에 넘치는 젊은 십대 국왕 진흥왕이 친정을 행사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지가 신임한 중신들을 대거 실각시키고 젊고 경력도 짧고 관등마저 낮은 젊은 신하들을 대거 요직에 앉히면서 신라가 자멸의 길로 빠지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한강 유역 전역을 553년 최종적으로 신라가 접수하면서 백제는 오랜만에 회복한 한강 유역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긴 게 억울하지도 않은지 성왕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10] 오히려 나제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이 기록은 백제 조정이 신라 조정의 내부 상황을 염탐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551년 진흥왕이 18세가 되며 친정을 시작하게 되면서 법흥왕 사후 11년간 이어지던 신라의 섭정 체제가 막을 내렸고, 직후에 신라 조정에서 발생한 급격한 권력 교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직접 살펴보는데는 딸을 시집보내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또 성왕이 신라를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같은 시기 《일본서기》에서도 정월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하여 일본은 6월에 전쟁 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고, 554년 초에도 일본이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었으며,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 문물을 일본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이 병력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 내부에서도 이 시기 전쟁준비를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결혼 동맹 1년 후인 554년, 성왕은 갑작스럽게 일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신라에 대한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는 대가야일본의 원군까지 합세하였다.

6. 백제와 신라의 격돌, 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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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과

한강을 점령한 신라는 이후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북으로는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했고, 진흥왕 본인이 이곳까지 순행하여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11] 한편 남쪽으로는 당대 사방군주를 집결시켜 이사부사다함의 지휘 아래 지난 400여 년간 불편한 동거를 이어온 가야멸망시켜 없애버린다. 가야가 멸망하고 있었지만 가야를 지켜줄 의무를 가진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위덕왕이 신라에 대해 공세를 561년,[12] 577년 등 두 차례에 걸쳐 반복하지만 병력 규모는 기천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두 격퇴당했다. 관산성 전투 때와 같은 수만 단위의 대군을 다시 일으켜 신라를 압박하기까지는 무왕의 시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구려 역시 신라에 대한 압박 기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온달이 나오는 590년까지 가야 했다. 신라가 한강을 점탈할 당시 고구려는 돌궐 전선에 치중하여 신라를 제어하지 못했고, 백제는 양면전선은커녕 관산성 한 곳에서도 제대로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 때에 오로지 신라만이 한반도 전체에서 전쟁을 치를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신라가 한강 하구를 점령한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재정비를 끝낼 때까지의 대략 30여 년 이상의 기간 동안 고구려도, 백제도, 왜도 한반도에서 신라를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라는 한강이라는 낮선 곳을 점거한 후 북으로 고구려, 서로 백제, 남으로 가야를 두고 삼면전쟁을 치렀지만 패한 곳이 결국 하나도 없었고 모든 곳에서 자신들이 거두고자 했던 성취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승세로 말미암아 삼국에서 가장 변방에 내몰려 있던 신라는 바야흐로 삼국통일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8. 여담


[1] 단양 신라 적성비에 의하면 중부지방 공략 초반에만 참전이 확인된다.[2] 일본서기 기록에서 한성 공략 당시 가야군의 참전이 확인된다.[3]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도서현(道西縣)과 같은 지명으로 추정된다.[4] 현재의 평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 일대를 일컫는 말인 '남평양'을 의미한다. 아차산에서 발굴된 고구려 보루들이 이 남평양을 방어하던 시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5] 《일본서기》 원문에는 임나로 나오는데, 임나는 가야의 다른 이름 중 하나다. 551년 당시 가야는 이미 백제와 신라 사이에 치여서 독자성을 잃고 있었다. 백제군이 가야 땅에 주둔하면서 가야 땅을 지켜주고 대신 내정에 간섭하는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에 가야와 별로 관련없는 전쟁이지만 억지로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이후 백제가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약화되면서 지켜줄 세력이 하나도 없게 되자 그로부터 10년도 안 돼 562년까지 신라에게 전부 항복하고 멸망했다.[6] 우두방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으며 니미방은 현재의 동두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7] 해당 주장은 상기한 신라의 한강 하류 탈취설의 근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한강 하류의 점령과 방어를 공고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가 이 지역을 털어가는걸 눈 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8]일본서기긴메이 덴노 13년(552년) 5월 8일 기사의 기록이다.[9] 병부령직은 법흥왕이 만들었지만 법흥왕 후기에는 법흥왕 본인이 군권을 장악, 행사하고 병부령을 공석으로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성왕과 진흥왕은 40살 이상의 나이차가 난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이 진흥왕보다 10살이 더 많다.[11] 신라가 함경도까지 진출한 건 이때가 유일하다. 통일 신라도 함경도 남쪽 끄트머리만 차지했다.[12] 삼국사기 진흥왕조에서는 56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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