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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5:37:29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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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安重根義士哈爾濱義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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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중근 의사 의거 기록화.png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다룬 민족기록화 (박영선作)
<colbgcolor=#000><colcolor=#fff> 일시 1909년 10월 26일
장소 러시아령 만주 하얼빈
(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난강구 푸순가)
목적 이토 히로부미 처단
대한제국의 독립·평화
원인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자주 독립 요구
결과 이토 히로부미 사살 성공
영향 안중근 사형 선고 및 집행

1. 개요2. 명칭
2.1. 요약 및 분석
3. 과정4. 결과5. 의의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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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캡션


1909년[1]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하얼빈(Харбин)[2]하얼빈역(Харбинский вокзал)에서 대한제국 출신 안중근일본 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추밀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권총으로 사살한 사건.

2. 명칭

이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에서는 의거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는 단순히 사살(射殺), 저격, 암살, 그리고(꼭 극우가 아니더라도 사전적 의미 그대로) 종종 테러[3][4]라고도 한다.[5]

훙커우 공원 의거 등 무장 독립투쟁도 그렇듯 위키백과처럼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치 않는 위키에서는 '테러'냐, '독립투쟁'이냐를 두고 유저들이 싸우는 일이 잦다.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지화가 적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시엔 그게 세계적으로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일본 입장에선 "자기들의 수뇌부를 테러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항일 의병일본군이 이미 수 년 전부터 교전 상태였으므로 교전 중인 적국의 수뇌부 인물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은 특수부대의 전형적인 특수 작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안중근은 한때 '항일 의병장'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에는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교전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국의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 요인 암살 등을 주된 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는 현대에도 존재하며 교전 중인 적국에 대한 매우 유효한 전술이다. 이미 수 년 전부터 항일 의병과 일본군교전 상태였으므로 안중근의 암살은 항일 의병의 일원으로서 교전 중인 적국의 수괴를 사살한 특수 작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요인 암살을 위한 특수작전 전문 의병부대를 창설한 뒤 거사에 임했다고 보면 된다.[6]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는 구한말 조선을 침략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 출동을 통한 농민군 학살 및 진압, 1895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 7조약대한제국군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 등을 주도하였던 침략의 원흉으로 평가받았지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봉건 막부 정치를 타파하는 계기인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서양과의 교류와 문호를 개방한 주역이자 일본 근대화의 조상이자 아버지로 오늘날의 일본 경제를 부강하게 이끌어 왔던 선구자로 불릴 정도로 칭송받아 왔고 동시에 근대 일본 제국의 초대 총리대신이라는 점에서도 국가적인 의미를 가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일 양국이 이 의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서로 상이할 정도로 각각 안중근과 이토가 가해자와 피해자로 뒤바뀌어서 엇갈린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근대화 및 번영을 이끌었다고 해서 그의 강제적 혹은 불법적인 조선 침탈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토가 피해자이고 안중근이 가해자라는 시선은 하얼빈 저격 사건을 단순 살인 사건으로 바라본 지극히 좁은 시선에서 봤을 때의 얘기일 뿐 거시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경우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조선인의 의지 표명으로 볼 수 있다.

2.1. 요약 및 분석

3. 과정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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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캡션

1905년 초대 한국통감을 지냈다가 막후로 물러나 일본 제국에서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과의 철도 문제, 경제 현안, 러일전쟁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재무대신인 코코흐체프와 회담을 갖기로 했고 러시아가 청 제국에게 조차한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각자 목표를 정하면서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써넣어 각자 암살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며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 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했다. 25일 안중근은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났는데 그는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蔡家具/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신문 기사에 이토의 특별 열차도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客舍)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8]인 차이자거우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 러시아 육군 병력이 보안을 이유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숙소 문을 잠가 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던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도 무사히 경제 회담을 마치고 살아서 일본으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이 객사에 갇힌 게 다행인 게 이들이 기차에 억지로 난입해 의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면 이토는 회담 장소를 옮기거나 연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이자거우에서 거사에 실패한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 육군 헌병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했다.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도 서로를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든데 인종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러시아인, 중국인[9]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육군 헌병 및 청 육군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제국 국기일장기를 흔들면서 양국 수뇌를 환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이토임을 인식했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10]을 준비하여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가 러시아 육군 병력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11]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 중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 발을 남겼다.[12][13] #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다.[14][15][16]

한편 이토는 총탄을 맞은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져 자신을 수행하던 의사 고야마 젠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20여 분 만에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었던 일본 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렸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덤덤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관련자 3명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말했다.[17]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18]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罪惡)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19]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20]
둘. 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시살한 죄.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폐위시킨 죄.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죄.
여섯.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21]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22]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義士)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일천구백영구년 또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통감부 문서 7권[23] /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라고도 항변하였다.

이후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24] 동년 3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거사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얼빈역 개보수로 저격지점에 화단 등이 배치돼 실제 저격 지점을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야 하얼빈시 철도국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설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이 배치돼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비 설치 제안에 일본이 반발하자 중국은 아예 안중근 기념관을 건설하였다.

5. 의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 보호론 실현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보호국화의 국제법불법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일부 한국인들의 강력한 항일 투지와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25]

한편 일본에서는 의거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뤼순 감옥의 간수들 가운데 그의 전담 간수이던 지바 도시치를 비롯해 여러 일본인들이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26][27]

6. 여담



[1] 경술국치 이전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을사조약 등으로 주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다.[2] 지금은 중국의 헤이룽장성에 위치한 지역이지만 당시에는 러시아가 조차하고 있었다.[3] 테러의 의미는 '무력을 통해 정치적인 의사를 표출하는 행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 행위'다. 따라서 행위의 형식만 보면 사전적 의미의 '테러'지만, 이러면 전쟁도 테러고 적성 국가 요인 저격도 테러다. 즉,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는 귀걸이식 논리가 되어버리므로, 일반적으로는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 행위를 테러로 지칭한다. 사실 정치적 의도의 여부보다는 이러한 방식(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불법적, 무차별적)이 테러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큰 기준인 편인데, 이를 무시하고 무력을 동원하였다고 모두 테러라고 지칭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4] 따라서 독립운동을 테러라 지칭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2차 대전기 레지스탕스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열(義烈) 투쟁'이라고 한다. 물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독립운동과 이를 지원하고 명령한 상해임시정부의 행보까지 의열 투쟁이라고 칭한다.[5]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전인 코지엔(広辞苑)이나 macOS에 기본 탑재되어 사용율이 꽤 높은 다이지린(大辞林) 같은 사전에서는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코지엔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 조선의 독립운동가. 가톨릭교도이며 학교를 설립. 또한 의병을 조직. 1909년 10월 26일 전(前)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하여 사형. 한국 / 북한에서 의사로 칭해진다. (1879년 ~ 1910년)[6]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체코 군인들이 나치 독일 최고위층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유인원 작전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유인원 작전의 주동자들을 테러리스트라 우기는 자들은 네오나치를 제외하면 지구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7] 구 일본 헌법 제정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다. 당시 총리는 구로다 기요타카.[8] 지방에 위치한 시골 역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작아 경비 인력이 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9] 사실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비록 러시아의 조계지이긴 했어도 엄연히 청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영국령 홍콩이 영국 조차지였지만 한족 홍콩인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다.[10] FN M1900 자동권총을 사용했으며 S&W M2 리볼버(육혈포)는 소지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11]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이토는 이전에 원태우 의사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사진이 나도는 걸 막았다.[12] 이걸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니다. 안 의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에서 자살은 과거에는 장례 미사도 치러 주지 않았을 정도로 큰 죄악이다. 당시 자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총알 한 발을 남긴 건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3] 이 총알 한 발을 하나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히로부미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14] 당시 안중근이 과연 어느 언어로 이 말을 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통상적으로는 러시아어라고 받아들여지나 서로 충돌하는 1차 사료가 많아 해석이 난해한 편이다. 에스페란토라는 설도 있으나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신현규 교수가 낸 관련 논문(PDF 자동 다운로드 링크), (KCI 등재)을 참고해 보면 좋다.[15] 흔히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생각하지만 암살 시점은 아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기기 10년 전이었으므로 대한국 만세 혹은 대한제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보는 게 옳다. 사실 임시정부 수립 시도 중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지을 때조차도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이 대한민국이란 어휘를 미리 알았을 리가 없다. 임시정부 수립 논의 당시 20여년 잠깐 썼던 대한제국을 따서 만든 대한민국이란 말 대신 500년짜리 전통이 살아 있고 해외에도 기록이 많이 남은 국호인 조선임시정부로 하자는 의견이 꽤 있었다.[16] 최소한 그냥 대한이거나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안중근이 공화주의자인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의거 이후의 모습을 보면 근왕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17] 안중근의 의거를 주제로 한 뮤지컬 영웅의 넘버 중 가장 유명한 누가 죄인인가의 가사 내용이기도 하다.[18] 이 사람은 아래의 15가지를 듣고 그대는 정말 깊은 뜻을 품고 행동했다면서 사형을 선고받는 일은 없게 해 보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7번째 심문까지는 점잖았던 태도가 안중근을 살인범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8차 심문부터는 고압적이고 험하게 바뀌었다.[19] 메이지 덴노가 붕어하고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해는 1912년이므로 의거가 일어난 1909년에는 연호를 붙인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현임 군주라는 의미의 '금상 폐하'로 불렸다. 연호를 붙인 건 죽은 이에게 붙이는 시호에 해당하여 생존 덴노에게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원문을 적어 놓은 공사관 기록 홈페이지에는 메이지 덴노로 적혀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20]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 사인은 천연두지만 에도 막부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다만 이는 심증 내지 카더라 뿐이지 사실로 밝혀진 바 없는 부분이므로 주의.[21]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은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민사관과 일본 학자들이 소수 존재하지만 삼국 화폐 통합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유로처럼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진 상태였다.[22] 각종 불평등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 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23] 안중근 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24] 하얼빈이 러시아 조차지였기 때문에 원래는 베이징을 거쳐 러시아모스크바이르쿠츠크로 넘겨야 했다.[25] 애초에 일제는 한국을 최종적으로 식민지배할 계획이었지만 그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외교권을 강탈하고 친일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배의 연착륙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헤이그 특사 등의 저항과 정미의병13도 창의군 등의 대대적인 의병 저항에 직면하여 일제는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고 조기합병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이미 이 시기의 이토는 본인의 정책실패를 인정하고 한국 병합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한 뒤 조선 통감에서 내려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토의 사망과는 별개로 어차피 한일병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26] 의외로 안중근은 일본의 우위를 인정했다. 그는 열렬한 한민족주의자였다기 보다는 아시아주의자임을 그가 저술한 동양평화론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를 성공한 일본이 모범이 되어 한중일이 연합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이토를 살해한 것은 이토가 동양평화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뿐 특별히 반일주의로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강진구,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본 아시아연대론, 2013[27] 게다가 일본도 안중근의 의거를 폄하하면서도 안중근의 인품에 많이 놀랐는지 안중근을 회유하려고 엄청 노력할 정도였다고 한다.[28]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차지철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포함)을 으로 쏜 사건인데 둘 다 총으로 벌인 암살이고 같은 탄약(.32 ACP)이 쓰였으며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근데 명량 해전이랑 병인양요랑 청산리 전투도 사람이 죽은 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