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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페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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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54> 프랑스국 국가원수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 |
이름 | 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앙리 필리프 베노니 오메르 조제프 페탱 |
출생 | 1856년 4월 24일 |
프랑스 제국 파드칼레 | |
사망 | 1951년 7월 23일 (향년 95세) |
프랑스 공화국 일드외 섬 감옥 | |
신체 | 169cm |
배우자 | 외제니 아르동 페탱(1920년 결혼) |
복무 | 프랑스 육군 |
최종 계급 | 프랑스 원수(Maréchal de France)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역임 | 프랑스국 국가원수[1] |
1940년 7월 11일 ~ 1944년 9월 19일 | |
프랑스 제78대 총리[2] | |
1940년 6월 16일 ~ 1940년 7월 11일 | |
프랑스 국방장관 | |
1934년 2월 9일 ~ 1934년 11월 8일 | |
프랑스 국무부 장관 | |
1935년 6월 1일 ~ 1935년 6월 7일 | |
서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서명 |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군인, 정치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조제프 조프르, 페르디낭 포슈와 함께 1차대전 종전 당시 단 3명 뿐이었던 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파리가 함락되고 공화국 정부가 나치 독일에 무력화되면서 나치 독일과 협상을 통해 비시 프랑스를 건국하고 수장으로 있었지만 프랑스인들 사이에선 지금까지도 영웅과 반역자의 두 인생을 살았다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3]
2. 생애
2.1. 초기
1856년 4월, 파드칼레 지방의 작은 농촌 마을의 자영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큰할아버지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종군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이 무용담을 열심히 아들에게 전파하여, 페탱은 어릴 적부터 군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자라났다. 여기에다가 그가 자라나던 무렵 터진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참패와 그로 인한 제2제국의 붕괴, 독일에 대한 전국가적인 굴욕감까지 더해지면서 페탱은 인생의 진로를 군대로 결정, 1876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1887년에는 우수성을 인정받아 군사 부분의 그랑제콜에 진학할 수 있었다. 병과는 보병이었다.페탱은 프랑스군 참모대학인 에콜 드 게르의 보병전술 과정 교수장이 되었는데, 보병전술학 교수는 이 학교의 가장 영향력 강한 파벌이었다. 샤쇠르 아 피 부대의 전통과 프랑수아 오스카 드 네그리에의 이론적 영향을 받은 페탱은 이론 면에서 프랑스 육군 내부에 만연했던 공세주의를 유지했으나, 화력사살이라는 개념으로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또한 페탱은 '여러분이 임무를 완수하고 죽으면 기쁘겠지만, 완수하고도 살아있으면 더욱 기쁠 것입니다.' 라고 강의하는 등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의 문화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앙드레 부라쇼는 이러한 지배적 교리에 대한 열정 부족이 느린 진급의 원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 시기 페탱의 별명은 Précis-le-Sec였는데, 이는 메마르고 시니컬한 페탱의 성격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이론적 반대자와 충돌하는 대신 시니컬하게 조롱하며 빗겨가기를 선호했다.
그는 프랑스군 상임전쟁심의회가 보어 전쟁의 영향으로 화력중심 보병전술 교리를 마련하기로 결정하자 다른 보병전술 교수들과 함께 화력학파식 신 교범을 제작하는데 참여했다. 하지만 화력보다 충격을 중시한 장교들의 반감과 교리 자체에 무관심한 실전주의 환경 때문에 교리가 제대로 훈련되진 못했다. 또한 페탱은 이 시절에 군사사 및 전략, 대전술 교수였다가 교장이 된 페르디낭 포슈와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이상하게 잘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페탱은 에콜 드 게르를 졸업한 자신의 제자들이 단순한 공세주의를 넘어 정신론적 공세주의를 만들어 설파하자 청년 튀르크라는 멸칭을 붙여주며 조롱했다. 이러한 청년 튀르크들의 대장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랑메종이다.
페탱은 본토파 장교로 분류될 정도로 프랑스군을 비롯하여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 군대의 출세 루트라는 식민지 파견근무 기간이 매우 짧았다. 당시 식민지 파견근무가 출세 루트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공을 세울 기회이기 때문이다. 소규모이긴 해도 식민지에서는 늘 독립주의 세력들과 교전이 발생했고, 특별한 연줄이 없는 장교들에겐 이것이 곧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반면 유럽에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열강간 군사충돌이 전무했다.[4] 때문에 1890년에야 대위로 진급했고, 1900년에야 소령 계급을 달았다. 이후 대령까지 진급하긴 했지만 사실상 인생의 끝자락이나 다름 없었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는 퇴역 이후 노후를 보낼 준비와 함께 군 생활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면 1911년 그가 육군 제33보병 연대장이었을 때 연대에 소속된 젊은 장교 중에 샤를 드골이 있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 1926년의 페탱 |
프랑스군은 1914년 후반부터 초기 전선붕괴의 원인 중 하나로 장교단의 질적 붕괴를 분석했고,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 전쟁장관이었던 메시미의 동의를 얻어 리모자주 숙청 체계를 만들었다. 조프르는 이 체계 하에서 대부대 사령관의 75%를 숙청하는 등 그야말로 프랑스군을 갈아엎었고, 그렇게 생긴 지휘관 공백은 동시기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초고속으로 진급시키는 것으로 해결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페르디낭 포슈, 에밀 파욜, 프랑셰 데스페레다. 페탱 역시 이때 주목받은 장군 중 한 명으로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서 1915년 전역에 참가한다. 그리고 1915년 전역에서는 2차 아르투아 공세에서 페탱의 군단이 주공을 맡았고, 공세에 앞서 GQG가 제작하고 발표한 침투 전술을 통해 성공적인 공세를 펼쳐 3~4km 정도 진격을 해냈다. 페탱은 이러한 성과와 영국군의 뇌브 샤펠 공세를 근거로 돌파가 가능하다 믿고 수셰에서 서둘러 공세를 재개하려다 페르디낭 포슈에게 공격작전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며 가로막히기도 했다. 방어적인 성향으로 알려진 페탱과 공격적인 성향으로 알려진 포슈가 자기 성향과 다르게 행동하는 듯한 이 일화는 1915년 전역에서의 돌파 문제가 지금의 시선과는 달리 논쟁의 대상이었음과 동시에 포슈가 참호전의 조건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페탱은 1915년 그리뇨타주에서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으나 전술적 능력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투력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1916년에는 대장이 되어 제2군사령관까지 진급하였다. 그리고 1916년 독일군에 의해 개시된 대규모 공세인 베르됭 전투에서 마침내 전면에 등장한다.
페탱은 베르됭에 부임하자마자 진지를 잃는 즉시 이루어지는 반격과 주도권을 주지 않기 위한 공격을 명령했다. 또한 부아 사크헤와 르 뫼지앵으로 병참로를 확보하고, 차량화 순환체계인 노리아 체계로 전투에 지친 부대들을 뒤로 빼며 그 자리를 휴식을 취한 부대와 새 부대들을 투입해서 전력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포대 위치를 재조정하여 독일군에 최대한의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다. 그러나 노리아는 조프르와 페탱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베르됭 대신 솜에 집중하고 싶었던 조프르는 베르됭 전투를 멈추려면 솜 전투로 독일군의 관심을 북부로 돌려야 한다고 믿고 노리아를 위해 대량의 예비대를 유지하던 페탱에게 불만을 가졌으며, 예비대를 노리아에 사용하느라 독일군의 공격을 멈추기 위해 주도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 페탱에게 불만을 가지고 베르됭에 집착하고 있다면서 비난했다.[5] 한편 솜 대신 베르됭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은 페탱은 조프르가 베르됭의 정치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비난했고,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접근했다. 이는 조프르가 무엇보다도 혐오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페탱을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후임으로는 로베르 니벨을 임명하여 베르됭에서 빼냈는데, 당대 주변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다리 위로 걷어찬 조치였다. 그러나 베르됭에서 취할 전략과 공격작전 승인은 여전히 페탱의 소관이었다.[6] 조프르는 훗날 회고록에서 베르됭 전투의 승리는 페탱 덕분에 가능했다며 그의 공로를 칭찬했다.
당시 베르됭 전투에서는 패탱과 질긴 인연으로 엮인 샤를 드골이 중위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워낙 대규모 전투라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쪽에서 이 전투에 참가한 인물 중 훗날 유명해지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역시 중위였던 독일 육군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있다. 이때 드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프랑스군은 드골을 전사처리하였는데, 1909년부터 드골과 인연을 맺고 그를 각별히 아껴왔던 페탱은 드골의 어머니에게 직접 드골의 용맹함을 칭송하는 전사통지서를 써 보냈다.
해가 바뀐 1917년 페탱을 대신해서 베르됭에서 승리를 거둔 로베르 니벨 장군이 주도해서 벌인 니벨 공세가 대실패로 끝나자, 실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당한 니벨의 후임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개전시 퇴역을 준비하던 말년 대령이 전 프랑스군의 총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한편 공석이 된 참모총장 자리는 포슈에게 갔는데, 이는 당시 전쟁장관이었던 폴 팽르베의 의중에 페탱이 동의한 덕분이었다.[7]
당시 페탱은 내외부 양쪽으로 적을 두고 있었다. 외부의 적은 당연히 독일군이었고, 내부의 적은 전쟁의 장기화와 니벨 공세의 대실패로 인해 폭발한 프랑스 육군 장병들의 한계에 다다른 분노였다. 실제로 서부전선 곳곳에서 프랑스군은 집단항명과 탈영, 폭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페탱은 이런 항명 및 폭동을 정치인들의 요구를 묵살하며 총살형으로 다스리면서도[8] 엄벌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정확히 인지했다. 그리고 불만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전선의 장병들에게 좀 더 많은 휴가일수를 약속하고 실제로 이를 보장하였다. 또한 항명을 중단시킬 방법으로 '독일을 공격한다.'를 내세워 플랑드르 공세, 2차 베르됭 전투, 말메종 전투를 벌여 성공했다. 또 공격작전을 연속으로 실행하면서도 투입부대들을 순환시키며 전선에 투입된 부대가 전선에서 빠진 다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끔 해주었다. 후방에서도 페탱의 개혁은 계속되어 전 사병 1인 1침상이 바로 페탱에 의해 확립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조치는 훈련의 최적화였다. 프랑스군은 조프르의 조직력으로 전초에 연락장교의 망을 이용해 현대적인 교리 개발 체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그 교리를 실전에서 구현하기 위한 훈련체계는 미비했다. 조프르와 달리 참모대학을 나와 훈련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페탱은 조프르의 미완으로 끝난 교리개발 체계를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페탱은 니벨이 해임되기 전에 프랑스의 트럭 생산력에 힘입어 기동하는 포병을 구현하기 위해 조직했던 유산인 일반중포병예비대를 일반포병예비대로 개명하며 증편했다. 니벨의 미완으로 끝난 개혁 또한 페탱이 완성하여 프랑스군은 차량화포병연대로 춘계 공세를 견뎌낼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프랑스군은 장병들의 불만을 억누르면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1918년에 춘계 공세가 시작되자 헤이그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이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포슈를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인정했다. 헤이그와 페탱 둘 모두 춘계 공세 이전엔 피하려고 했던 일이다. 이후 제2차 마른 전투에서 다시 한 번 독일군을 저지했으며, 미군과 함께 대대적인 반격작전인 백일 공세에 나서 궁극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양측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0일이 지난 1918년 11월 21일, 페탱은 영예로운 프랑스 원수, 나아가 프랑스 국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2.3. 전간기
▲ 1930년의 페탱 |
대표적으로 그는 전차와 항공기 전력의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독립된 군종으로서 공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페탱의 후원으로 30년대 초 프랑스에 공군이 창설되었다. 전차 및 항공기 전력에 있어서도 20년대에는 예산이 부족하여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30년대에는 결국 실현되어 대대적 증강이 이루어졌다.[9] 그리고 훗날 있을지 모를 독일과의 전쟁에서 부족한 인구로 인한 병력 열세 및 1차대전의 전훈을 살려 강력한 요새지대를 구축하자는 제안에 적극 찬동, 마지노 선 건설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1925년에는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으로 리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이끌고 독가스를 퍼부어 리프 공화국을 멸망시키기도 했다. 1934년에는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1935년에는 뷔송 내각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1939년 3월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는 동쪽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남쪽에서는 스페인에 포위되어 매우 엄중한 전략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달라디에 내각은 스페인과 수교하여 남쪽으로부터의 압력을 줄이기로 결정, 페탱을 대사로 임명하였다.
프랑스 여론은 이에 대해 가히 쿠데타적인 천재적인 결정이라고 달라디에를 열렬히 칭송했고, 오로지 레옹 블룸만이 페탱 같은 고귀한 군인을 프랑코에게 보내기를 반대했다. 페탱의 군인으로서의 명망은 유럽 전역에 잘 알려져 있었고, 또 스페인과는 리프 전쟁을 공동으로 진압한 경력도 있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1926년 프랑스 유학을 왔을 때 페탱이 에콜 드 게레에서 그의 지도교수였다. 하지만 페탱이 외교관 업무를 수행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를 돕기 위해 많은 전문 외교관들이 조수로 같이 파견되었다.
비록 스페인-프랑스 관계가 경색되었으나 프랑코는 스승인 페탱을 크게 환영했다. 참고로 페탱은 개인적으로 프랑코 지지자였으며 자신의 대사임무를 '인민전선의 죄를 씻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프랑코는 페탱이 스페인 내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페탱은 스페인과 프랑스 관계 개선에 상당한 공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로부터 전시내각 참여를 제안받았으나 나이를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대해서는 달라디에 총리의 내각이 좌파연합 내각이어서 우파였던 페탱이 이에 반감을 가져 불참했다는 의견도 있다.
2.4. 비시 프랑스
1940년 10월 24일,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는 페탱[10] |
"영광의 날에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려운 날에도, 저는 여러분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 안에는 우리가 존경하는 1차 세계대전의 영웅과 우리가 따르기를 거부하는 부역자, 두 사람이 있다.
<콩바>[11], 1941년 12월 제2호.[12]
1940년 6월, 나치 독일의 전격적인 프랑스 침공으로 패전 직전에 몰린 폴 레노 총리는 수습을 위해 페탱을 급히 본국으로 소환한다. 프랑코의 만류를 뿌리치고[13] 귀국한 페탱은 드골 등 항전파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레노의 뒤를 이어 새 총리가 된 후 독일에 항복한다.<콩바>[11], 1941년 12월 제2호.[12]
이후 독일 군정지역이 된 파리 대신 비시를 수도로 하는 정통정부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패전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를 빠르게 안정시키려 했다. 의회는 스스로 모든 권리를 페탱에게 넘겼고 프랑스의 입법, 사법, 행정권은 모두 페탱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페탱은 평소의 보수적 신념을 바탕으로 패전은 나약한 좌파 탓이며 1차대전 이후 약해진 프랑스 전통사회와 국가를 이전으로 복원시키고 다시 한 번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의 '이전'은 패전 이전이 아니라 1936년의 인민전선 집권 이전, 1870년의 프랑스 제3공화국 이전, 1791년의 프랑스 혁명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흔해빠진 남 탓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피점령국의 지도자인 페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반독 저항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달라디에 전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북아프리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 항전을 계속하려 하자
공식적으로는 비시 프랑스의 관할 지역은 독일의 간섭과 수탈 없이 비시정부의 통제 하에 안정된 상태였다. 실제로 수탈은 없었다. 독일군의 협조 문서가 들어오면 페탱은 군말없이 사인하고 그 문서에 의해 독일군이 물자를 넘겨받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요구로 유대인들을 넘겨주었고 자원병들을 모아 독소전쟁에 파병하기도 했다. 이렇듯 페탱의 비시 프랑스는 적극적인 대독 협력정책을 펼쳤다.
페탱은 유대인 탄압에도 적극적이었다. 1940년 7월 11일(페탱 취임에서 한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유대인 법이 발효되어 유대인들을 모조리 공직에서 내쫓고 프랑스계 유대인들의 국적을 박탈했다. 페탱은 나중의 재판에서 이 법이 독일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정된 법임을 인정했다.
이는 페탱의 신념과 가치관이 전통적 보수주의였음과 동시에, 히틀러와 나치를 그냥 강성한 이웃국가 정도로 인식했음에서 일어난 문제였다. 오히려 페탱이 보기에는 전간기동안 3공화국을 혼란으로 빠트린 좌파야말로 프랑스가 약해지는데 일조한 패배의 원흉이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과 힘을 합쳐 좌파들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강력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프랑스를 재건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14][15]
그렇게 페탱은 친독 독재자가 되어갔고, 패전의 책임을 3공화국 시기 좌파 정치인들에게 돌렸다. 가장 큰 책임전가의 대상은 역시 프랑스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독일군과 함께 진군했다'거나 '공산당의 사보타주로 군수공장이 마비되어 패전했다'는 프로파간다가 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소 불가침조약은 완전한 동맹협정이 아니었고 소련에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공멸을 바랐지 독일을 지원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2차대전 발발 시점에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를 폐간하고 공산당 관련 인물과 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고, 당 역시 찬전파와 반전파로 나뉘어 아예 분열된지라 조직이 박살났으며 당수 모리스 토레즈를 비롯한 당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한 상태라 당시의 공산당은 내부 사보타주를 펼칠래야 펼칠 수 없었다. 국내 반전파 일부가 평화주의 프로파간다를 뿌리거나 파업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노조 조직이 박살난 상황에서 벌어진 단발적인 사건에 불과했기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은 더 이상 2차대전 시기 프랑스의 패망에 있어서 공산당의 역할을 그다지 크게 보지 않는다.[16]
다른 좌파 정당들 역시 페탱의 책임전가를 피하지 못했다. 좌익 계열의 거물 정치인인 에두아르 달라디에, 레옹 블룸, 조르주 망델,[17] 모리스 가믈랭[18] 등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이름뿐인 재판인 리옹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판사측의 논리가 하도 한심해서 보다못한 히틀러가 중단했을 정도의 촌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42년에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비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면서 끝나버렸고, 이후 비시 프랑스는 이름뿐인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페탱이 일방적으로 독일에 끌려다닌 것만은 아니었다. 페탱은 지속적인 히틀러의 참전 요구를 거절했고 비시 프랑스는 끝까지 중립국으로 남았다. 히틀러는 노동자 200만 명을 요구했지만 페탱은 프랑스인 전쟁포로 11만 명을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지원자 64만 1천 명만 보내었고, 프랑스인 포로 100명을 사살하겠다는 통보에 "나를 먼저 죽여라."라고 뻗대고 나와 철회시킨 적도 있었다. 거기다 페탱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런 문제를 횃불 작전에서 비시 프랑스의 소극적인 저항과 연결짓기도 한다.
이는 페탱이 19세기적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관점에서 독일과의 정전협상을 맺은 다음에는 굳이 독일의 요구를 모두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에서 뻗대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훗날 괴링은 히틀러 최대의 실수는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맺은 것이라고 평했고, 처칠 역시 정전협정으로 인해 북아프리카를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패전국이 주권을 잃는 것을 예상 못했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7년 전쟁이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 근세 유럽의 전쟁 양상들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키려고 총력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협상을 유리한 국면으로 끌고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1차 대전 역시 총력전이었다고는 하나 결국 패전국들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합병되지는 않았고 영토가 할양되는 선에서 끝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대 시각으로 보면 페탱의 판단은 상식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프랑스가 독일을 찢어버리지 않은 건 의지가 아니라 능력 부족이었다는 점, 진짜 망한 나라들도 많다는 점, 독립을 외치던 이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점 등은 간과되었다.[19]
즉 독일에게 패하고 정전협상을 맺어 전쟁은 끝났고, 이후 아무리 괴뢰국 수준이라지만 어쨌든 이전의 프랑스를 계승하는 독립 정부를 수립했으니 독일에게 굽힐 건 굽히고 강하게 나갈 건 강하게 나간다는 논리는 이상하지 않았다. 독일로서도 상술했듯 고분고분하게 물자 주고 노동력 주는 현지의 하청 정권을 갈아버리면 자기 행정력을 일일이 동원해서 직접 수탈을 해야하는데 한창 독소전쟁을 하는 중이라 병사 하나하나가 아까우니 짜증나도 적당히 눈감아줄 필요는 있었다. 횃불 작전 전까지는.
결과적으로 노쇠한 페탱은 피에르 라발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페탱은 스스로가 잔 다르크 덕분에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샤를 7세 꼴이라고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수모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히틀러는 횃불 작전 당시 비시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안톤 작전을 실행,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다. 페탱은 마지막 순간에 저항을 포기하고 프랑스를 순순히 내어줬는데,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 "죽은 프랑스의 시체를 지켜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어떻게든 프랑스의 숨을 붙여놓으려고 했다"라고 항변했다. 저항해 봤자 이길 수 없다는 게 자명했고, 저항을 짓밟은 독일은 프랑스를 철저히 파괴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이다. 1943년, 무솔리니가 축출되자 페탱은 이를 모방하여 피에르 라발을 체포하고 드골을 싫어하는 루스벨트와의 단독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이 시도는 독일에 발각되었고 실패로 돌아갔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은 페탱에게 만약 라발이 해임될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편지를 페탱에게 보냈다. 페탱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잃었으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쨌거나 비시 프랑스의 수반으로 남았다. 이후 페탱은 독일 측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그의 고문들도 모두 해임되었다. 페탱은 자신을 감시하는 독일 외교관 세실 폰 렌테-핀크를 자신의 간수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이 빠르게 프랑스 전역을 차례로 해방시키자 1944년 8월 17일, 독일 측은 페탱에게 그의 보호를 위하여 비시를 떠날 것을 '권고'했다. 페탱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으나 인질에 불과한 페탱이 반대하든말든 눈곱만큼 알바도 아니었고 페탱은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페탱은 히틀러에게 친전을 보내 프랑스의 국가수반인 자신을 1940년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이렇게 대하는 것에 엄중히 항의한다고 하였으나 이 역시 독일 측에겐 코웃음칠 거리도 되지 않았다. 8월 19일, 렌테-핀크가 페텡을 예방하여 좋은 말 할 때 따라오라고 최후통첩을 보내자 페탱은 교황청과 스위스 대사를 증인으로 소환하여 그를 맞이했다. 렌테-핀크가 무례하게 누구 맘대로 외교 사절들을 불렀냐고 페탱을 윽박지르자 페탱의 마지막 측근이었던 데베네이 장군이 마주 고함을 지르는 등 사태는 개판으로 치달았다. 독일 측은 외교관들 앞에서 일단 물러섰으나 8월 20일 오전 6시에 전차를 앞세우고 호텔을 포위한 후 군홧발로 페탱의 침실로 쳐들어왔다. 페탱의 부관 페티 중위가 맨몸으로 이들을 막아섰지만 소용이 없었고, 페탱의 주치의 베르나르 메네트렐 박사는 독일군이 페탱을 핍박하는 광경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 테이프 레코더로 녹화하였다. 더 이상 수가 없음을 알게 된 페탱은 제복으로 갈아입었고, 마지막 자존심으로 아침을 먹기 전엔 떠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페탱은 피난길에 오르면서 프랑스 국민들에게 최후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들에게 전해질 쯤이면 저는 자유의 몸이 아닐 것입니다. (...) 제가 여러분들 옆에 남기로 한 지 4년이 넘게 지났으며 매일같이 저는 프랑스의 항구적인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해왔습니다. 충성스럽게, 하지만 타협없이 저는 오로지 한가지 목표만을 가졌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을 최악의 상황에서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받아들인 모든 것, 제가 동의한 모든 것, 제가 따랐던 것들은 저의 의사이건 강제로 행해진 것이건 모두 여러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더 이상 여러분들의 검이 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의 방패라도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라디오에 방송할 힘도 없던 페탱은 측근들을 시켜 복사한 메시지를 창문 밖에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독일로 압송된 페탱은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최고 재판소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1945년 4월 5일, 재판정에 출두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려보내달라고 히틀러에게 탄원하였다.
1940년 6월, 보르도 정부의 수반이었던 저는 프랑스를 떠나길 거부했습니다. (...) 제국정부는 저를 1944년 8월 20일 강제로 프랑스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 오로지 프랑스에서 저는 저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제 나이에 이른 사람들은 오로지 의무를 행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는데, 저는 저의 의무를 수행하고 싶습니다.
자기 코가 석자였던 히틀러는 답장조차 보내지 않았다. 연합군이 페탱이 감금되어 있던 지크마링겐 성으로 접근하자 독일 측은 페탱을 강제로 스위스로 망명보냈다. 비시 프랑스와 스위스는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스위스는 페탱의 망명을 일단 받아주었으나 상당히 곤혹스러워하였는데, 페탱은 스위스에 도착함과 동시에 프랑스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요청했고, 스위스 당국은 매우 기뻐하며 페탱의 요청을 프랑스 정부에 전달하였다. 자유 프랑스 측이 페탱의 신병을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페탱은 4월 26일, 즉시 프랑스로 보내졌다.
2.5. 재판
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내 삶은 이미 프랑스에 봉헌된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단죄하려 한다면, 나를 그 단죄의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 그러나 나는 세계를 향해 말하려 한다. 여러분은 정의의 이름으로 죄없는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결 후에는 하느님과 후손들의 심판이 올 것이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페탱의 변론. 페탱은 재판이 시작되던 날에 처음으로 이 발언을 한 후 아무런 변호를 하지 않았다.
페탱의 변론. 페탱은 재판이 시작되던 날에 처음으로 이 발언을 한 후 아무런 변호를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재판은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재판 중 하나입니다. 이는 반드시 신성하고 존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 오늘, 이 법정에 서있는 피고인은 오랫동안 가장 다양한 국민감정을 촉발시킨 장본인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 그는 정열적인 찬미와 국민적인 사랑을, 다른 한편 이에 반해서 극단적 증오와 적대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피고인을 재판한 뒤, 후일 어느날 역사가 다시 이 재판부를 심판할 것이며 또한 재판의 과정에 따라서 이 재판의 분위기 역시 평가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몽지보 재판장이 재판을 시작하면서 한 발언.
몽지보 재판장이 재판을 시작하면서 한 발언.
사실 1944년까지만 해도 페탱의 인기는 굳건했다. 사람들은 드골을 프랑스 바깥의 '창의 영웅', 페탱은 프랑스 안의 '방패의 영웅'이라 부르면서 두 사람의 합작이 프랑스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했다고 보고 있었다.[20] 하지만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공산당, 사회당계 레지스탕스와 드골이 힘을 합치면서 드골은 친페탱 세력과 확실히 선을 그었고, 자신과 페탱이 합작한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페탱 처벌 여론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페탱의 재판은 전후처리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드골파 입장에서는 페텡을 사면한다는 것은 부역자들 중 가장 고위직인 페탱을 처벌하지 않았다간 다른 부역자들을 처벌할 근거가 희박해진다는 점, 또 아직 페탱파[21]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사형선고를 내릴 경우 페탱에 대한 동정여론이 강해져서 역시 나치 청산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드골은 페탱에게 스위스로의 망명을 권유했지만 페탱은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로 출두한다. 이에 자유 프랑스 지도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선 1940년의 패배 당시에 80대 중반이던 페탱이 독일이 패망하던 순간까지 살아있으리라곤 아무도 기대를 안했는데, 그런 페탱이 죽지도 않고 제발로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프랑스 지도자들은 이제 드레퓌스 사건보다 더 거대한 재앙이 펼쳐질 것이라고 사색이 되었다. 연합국도 대부분 떨떠름한 반응이었는데, 미국과 영국은 비시 프랑스와 공식적으로 단교하기 이전까지 있었던 외교적 거래들을 페탱이 실토할까봐 두려워했으며, 퀘백인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한데다 특히 페탱을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이며 영국에 대한 항쟁의 상징으로 여기며 숭상했던 캐나다는 페탱의 재판이 캐나다의 정치적 대혼란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독일에 인질로 잡혀갔던 프랑스 정치가들 및 독일로 달아난 프랑스 부역자들의 귀환 및 새로운 정부의 선거를 핑계로 페탱의 재판은 최대한 미뤄졌으며 다들 페탱이 제발 재판 전에 죽어주기를 바랬지만, 90세의 페탱은 적어도 신체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했고 살아서 재판에 회부된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치매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훗날 드골은 회고록에서 페탱은 용감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하면서 페탱에 대해 "우리 조국과 군에 그토록 큰 승리, 영광을 안겨주었고, 나의 우상이자 상관이셨던 각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페탱이 스위스 국경을 떠날 때 스위스 의장대가 도열하여 페탱에게 경례하면서 그를 정중히 떠나보냈으나, 페탱이 프랑스에 도착하여 자신을 맞이한 헌병대에게 경례했을때, 헌병대는 명령받은대로 이를 무시하였고, 페탱은 큰 충격을 받았다. 페탱은 드골의 명령을 받고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여 그의 신병을 인수하기 위해 온 마리피에르 쾨니그(Marie-Pierre Koenig) 장군[22]과 만났다. 쾨니그 장군은 페탱에게 경례함으로써 최소한의 예우는 하였으나, 페탱이 악수를 청함에도 이를 거절했다. 다만 쾨니그가 경멸을 표한 것이 아니라, 페탱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의 예우를 보여야 할지에 대한 사전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쾨니그 스스로도 당황하면서 즉석에서 한 행동이었다. 이후 프랑스 경찰이 페탱을 일반 범죄자를 취조하듯이 이름과 직업을 말하라고 하자 페탱은 "난 아직 프랑스 원수다."라고 답변했다.
페탱은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여전히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미군의 폭격과 안톤 작전 이후 독일 점령정책이 더욱 가혹해지면서 비시 프랑스의 인기는 땅을 치게 되었고 처음에는 라발과 다를랑을 욕하던 민심도 페탱을 직접 원망하게 되었으나, 1944년 페탱의 파리 방문 당시 엄청난 수의 인파가 몰려와 삼색기를 흔들고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그를 환영했으며 페탱이 독일로 압송되었을 때도 군중이 몰려와 페탱에게 꽃을 던지며 그를 환영했다. 하지만 그는 파리로 돌아오는 도중, 프랑스 공산당에서 동원한 1500~2천여 명의 시위대를 만났고 그들은 페탱을 사형시키라고 외치면서 그가 탄 객차에다 돌팔매를 던졌다. 페탱은 파리교외 몽루주의 감옥에 구속 수감되었으며, 그의 재판이 열리기까지 3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미 89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있는 상태로 법정에 들어섰다.[23] 상술했듯이 페탱 옹호 여론은 순식간에 바닥을 치게 됐고 페탱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페탱을 벌해선 안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페탱의 행동 자체를 변호하기보다는 이미 다 늙은 페탱을 굳이 벌할 필요는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는 독일로 압송되었던 프랑스 인질들 중 상당수가 죽었다는 점, 그리고 독일 수용소에서 겪은 참상이 살아돌아온 수용자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 한몫했다.
한달간의 심문 및 배심원단과 변호인단, 검사단을 선정한 후 재판장으로는 66세의 몽지보가 임명되었는데, 몽지보 앞에 무려 7명의 재판관들이 먼저 선임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페탱을 심판하는 독이 든 성배를 마시지 않겠다고 자리를 팽개쳤다. 매우 무난하고 무색무취한 경력을 밟아온 몽지보는 자신의 경력을 큰 사건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개인적 영예 + 페탱의 재판을 맡아주면 파리 시내의 고급 아파트와 관용차를 제공하겠다는 물질적 회유에 응해서 재판장을 맡았다. 역사적인 첫 재판의 날, 재판정은 600명의 경찰들이 엄중하게 경호했으며, 페탱은 프랑스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재판정에 들어섰고 좌중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페탱이 그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착석했음에도 재판정 전체가 기립하여 그에게 예우를 표했고, 이 사실은 언론으로는 보도되지 않았다. 페탱이 원수 정복을 입은 것은 변호인단의 조언이었는데, 페탱은 양복을 입고 출석하고 싶어 했으나 변호인단이 제복을 입을 것을 강권하였다. 하지만 페탱은 원수봉을 들고 입장하라는 제안은 끝내 거부했다.
재판에서 페탱의 변호인들은 페탱의 완전한 무죄를 주장했지만, 페탱에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좌익 계열 레지스탕스가 주된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 이는 달성 불가능한 전략이었다. 레지스탕스가 다수 존재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24] 프랑스 국내에서는 독일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상당했으나, 이들 역시 페탱의 무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페탱을 처벌해 자신들의 과거를 가리고 싶어했다.[25] 그리고 드골을 비롯한 자유 프랑스 지도부에게 페탱은 본인이 원치는 않았지만 결국 반역자로 볼 행동을 한 인물이고, 또한 제3공화국을 파괴한 명목상 괴뢰정부의 지도자였기에 어쨌건 그 정통성을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매국노로 간주해야 할지 부역자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와 처벌 수위에 대해 논란이 있는 정도일 뿐 대체로 처벌 자체는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페탱 측은 재판을 상당히 불공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변호인들은 증거를 모집할 시간도 얼마 주어지지 않아 밤을 새가며 자료를 모았고, 재판부에 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지금까지 페탱의 모든 행위가 곧 증거자료이니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입장을 밝히며 요청을 거부했다. 이때 페탱에게 유리한 증언을 끊었다거나 증인에 대한 질문을 불공평하게 배정했다는 클레임 역시 제기되었다. 처벌에 대한 투표는 오직 즉각적인 사형에 대한 찬반투표만 시행했다. 몇몇 배심원들은 사형선고에는 동의하지만, 그 집행 시기는 따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대해 배심원 중 한 명이었던 페트뤼스 포레 의원[26]은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치재판의 전형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의 영웅 페탱의 권위는 아직 남아있었고 유죄임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형에 반대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실제로 증인들 중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폴 레노는 1940년의 항복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어느 정도 옹호하는 증언을 하는 등[27] 재판의 분위기가 동정론으로 기울었을 때 레옹 블룸[28]이 다하우 수용소에서 막 해방되어 돌아와 재판정에 서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블룸은 "전쟁영웅이자 승리의 상징이던 그가 맺은 굴욕적 휴전협상이야말로 거대하고 잔인한 도덕적 배신, 이것이 국가반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운을 떼며 통렬한 비판을 가했고 이를 시작으로 페탱에게 탄압받은 이들이 하나둘씩 증언하며 분위기는 결국 엄벌론으로 기울게 된다.
결국 치열한 재판 끝에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29] 사실, 페탱은 1940년에 정권을 잡고서 정치적인 재판을 통해서 이전 정권과 반대파에게 패전 책임을 뒤집어 씌운 적이 있는데 인과응보로 자신이 이제 그 재판을 돌려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배심원단 대다수가 사형에 동의한 것과 별개로 이들은 89세나 되는 페탱에 대한 사형이 실제로 집행될 것으로 예상하진 않았다. 다 늙은 원수를 끌어내서 총살한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의 위신을 심각하게 실추하는 것이었고, 요는 페탱이 공식적으로 반역자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슬아슬하게 공식적으로 반역자로 선언되긴 하였으나, 배심원단 대다수는(17~20명)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판결이 집행되선 안된다는 탄원서를 드골에게 제출했고 공식 판결문에도 페탱에 대한 선고가 실제로 집행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방청객과 기자들은 페탱의 사형 자체는 예상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지막에 덧붙여진 탄원에 더 놀랐다. 한편 페탱은 판결을 듣고 기절했다는 야사가 있으나, 실제로는 의자에 앉아서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무덤덤한 반응을 보여서 사람들은 그가 과연 판결을 알아듣긴 했는가 의심스러워했다. 판결문 낭독이 끝난 후 경위들이 페탱을 잡고 퇴정시켰다.
드골은 당연히 배심원단의 탄원을 받아들였다. 사형 판결은 나왔지만 집행만큼은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다들 주저하고 있었다. 페탱은 부역 행위와는 별개로 1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장군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 1차대전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반대여론이 굉장히 거세게 나타났다. 또한 '부역'에 대해서도 흡사 드레퓌스 사건처럼 뜨거운 찬반 논쟁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1944년까지 비시 프랑스든 나치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 국토 내에서든 페탱의 취급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당대 프랑스 국민들이 페탱을 빼도박도 못하는 '반역자' 취급을 했다면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된 시점부터 맹렬한 비난에 휩싸였겠지만 당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페탱에게는 '페탱파'라는 명백한 지지 세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한 세력이 남아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대 프랑스 국민들이 페탱의 행적을 완전한 '부역 행위'로 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30] 온 국민의 적으로 낙인찍혔으면 지지 세력 자체가 있을 리 없기 때문. 이들은 '정권을 잡은 드골파가 페탱파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저지른 '정치적 암살'이라고 표현했다. 당연하겠지만 사형찬성파들은 나치 독일의 집권 때문에 억눌려 있었던 여론이 제대로 드러난 것이고 정당한 '부역 행위자 처벌'이라며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서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극심한 대립처럼 페탱에게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간신히 재건의 길을 걷는 프랑스를 1차 대전 세대와 2차 대전 세대 간 극심한 대립, 온정주의자들과 엄벌주의자들 간의 대립으로 치닫게 해 간신히 나라를 되찾은 프랑스를 분열시킬 도화선이 될 위험이 컸다.
2.6. 최후
결국 당시 임시정부 수반 드골이 총대를 메고 나서서 과거의 상관에 대한 연민의 정이자 베르됭의 영웅에 대한 예우로서 사형만은 피하게 해주자고 하면서 종신형으로 직접 감형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페탱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드골로서도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또한 청산 과정에서 부역자들에 대한 처분을 행위에 따라 달리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페탱의 행위는 가장 엄격한 시선에서 봐도 사형에 해당한다고 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육체적' 죽음은 피했지만, 사회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끝장난 페탱은 정치적인 제스처에 따라 폴 레노와 조르주 망델이 수감되었던 포탈렛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망델이 갇혔던 감옥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늙은 페탱이 도무지 여기서 지낼 수 없다고 하도 징징대서 1949년에 방데 주에 있는 일드외 섬(l'ile d'Yeu)의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페탱 지지자들은 페탱에 대한 대우가 가히 악마의 섬에 갇인 드레퓌스 꼴이라고 울부짖었으나, 실제로 페탱은 방이 2개나 있는 넓은 감방에서 지냈으며, 교도소 주변을 자유로이 산책할 자유도 있었고, 레지스탕스 출신인 지역 의사를 주치의로 두고 잘 보살핌을 받아 이후로도 몇년이나 더 살았다. 참고로 이 주치의는 게이였는데 의외로 페탱과 대단히 죽이 잘 맞았다고 전해진다.1951년 7월 23일, 페탱은 일드외 섬에서 사망했다. 이때 베르됭 전투의 참전용사들과 그때까지도 공화국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방데 주민들[31]로 이루어진 수백명의 조문객들이 찾았으며, 7월 25일에는 막심 베이강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력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파리에서도 장례 미사가 열렸으며 개선문에서 페탱을 위한 헌화도 이뤄졌다. 시신은 일드외 섬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위키백과 영어판에 따르면, 1973년 2월 경에 베르됭 전몰자 묘지로의 이장을 주장하는 극우파에 의해 관을 도난당했으나, 프랑스 경찰이 이를 되찾은 후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르주 퐁피두 명의의 화환과 함께 일드외 섬에 재매장했다고 한다. 위키백과 프랑스어판에 따르면, 페탱의 무덤엔 퐁피두 이외에도 드골, 지스카르데스탱, 미테랑 명의의 화환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3. 사후 평가
페탱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근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페탱이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모임이 결성되었으며 그에 대한 재심이 여러 번 청구, 기각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치 청산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1950년대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적극 탄압하는 과정에서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악질 매국노와, 좌파 탄압을 위해 나치에 협조한 일반 우익 성향 부역자를 분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페탱은 명백한 후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32] 현대 프랑스에서도 일단 페탱이 매국노[33]는 아니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고, 단순한 나치 부역자 평가를 내리는 데도 상당히 신중한데 아래의 사진을 보면 알 수가 있다.죽은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심지어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도 그의 무덤에 헌화를 할 정도.
프랑스 내에서 페탱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유보적이며, 상당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감자 같은 주제이다.[34] 순수하게 1차 대전의 영웅이자 '반쪽만이라도 남았던 프랑스를 지탱했던 지도자'로 평가하자니 나치 부역이 걸린다. 어찌됐건 비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협조했고 독일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가 겪은 희생과 피해는 비시 프랑스 정부의 지도자였던 페탱에게 명백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공인들은 아예 유보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피하기도 하는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18년 11월, 1차대전 종전 100주년 추모에 즈음해 페탱을 "위대한 군인"[35]이라고 언급했다가 유대인 협회와 야당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등 상당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치 부역자 중에서도 수괴급이지만 열렬한 나치 동조자라기보다는 시대를 잘못 읽은 사람이고 적극적인 매국 행위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자국민[36]을 나름 보호하려 들다가 나치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단지 오판으로 나치에 협조하여 결국 많은 프랑스인들을 희생시킨 죄가 있을 뿐인데, 주력군이 궤멸된 상태에서 나치군과 계속 싸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름 프랑스를 건지겠다는 생각과 히틀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군사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오고 가는 중인데, 페탱의 선택이 바람직하다는 학자들의 의견은 적색 상황(독일군의 파리 진격, 프랑스 내륙 진출)과 파리 점령 이후 상황에서 '프랑스 병력의 대다수가 자제력을 잃고 와해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감수하기 전에 독일에게 항복한 페탱의 선택이 바람직했다.'이고, 반대 학자들의 의견은 '충분히 병력들을 재집결하여 프랑스 중부에 전선을 만들거나 리옹-보르도-마르세유 축선으로 전선을 축소시켜 저항할 기회가 있었다.'이다. 어느 의견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적색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후퇴할 때 모리스 가믈랭이 사령부 야전군이 사용하던 장비들을 센 강 북부에 죄다 버려두고 와서 막상 반대 의견 학자들의 의견을 따른다고 해도 연합군이 지원 올 때까지 지구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확실한 건 프랑스군은 이미 낫질 작전 때 주력부대를 전부 잃어버렸고, 2선급 부대와 예비군만 남은 빈 껍데기 상태였다. 연합군이 증원 올 가능성도 낮은 게, 영국군은 됭케르크에 장비를 몽땅 버려두고 철수한 탓에 영국 본토 방어도 힘든 상태였고, 미군은 애당초 올 생각도 없어서 전쟁 준비도 안 되어있었으며 대서양을 건너와야 하니 개입하고 싶어도 이미 늦은 시점. 그리고 프랑스의 상대는 독일 말고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탈리아가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37]
찬반 의견을 떠나서, 페탱의 행위에 매국노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대해 프랑스의 다수의 국민들은 조심스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내에서는 과거 부역자 재판 당시 반감적 국민정서와 지금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평가가 새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명확한 답안[38]을 정해놓고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39]
페탱이 1940년부터 인지력 상실 등의 증상을 보였음을 토대로 그가 치매환자였다는 주제의 논문도 나왔다. 프랑스가 항복했을 당시 페탱의 나이는 무려 84세였다.# 페탱이 점점 인지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논란이 가세되면서 현재 페탱의 정신문제에 대해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가 치매라면 그 치매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했는지가 일부 논쟁의 핵심이 되는데, 일각에서 주장하는 페탱의 과도하다고 느껴졌던 부역행위에 대해서도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라고 설명이 가능해진다.
4. 기타
- 페탱과 그의 재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은 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 주섭일의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존 레프런드의 <나는 죄 없이 죽는다>[40]를 참고하면 된다.
-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세계사 산책> 단행본 수록 에피소드 '애국자와 매국노' 편에서 그를 다뤘는데, 작가는 페탱의 행보를 통해 "지도자들은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뼈 아픈 교훈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앞선 각주에도 나오듯이, 프랑스인과 이야기할 때 페탱에 대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 마라고 언급했다.
- 1차 대전기 연합군의 동료 장성이며 미국의 영웅인 존 조지프 퍼싱과 친하게 지냈다. 1944년 미국을 방문한 드골은 옛 전우인 페탱의 안부를 묻는 퍼싱의 질문에 당혹해했다. 드골이 어떻게 답했냐면 '마지막에 뵈었을 땐 잘 계셨다고.'
침공 때 악수하고는 만난 적 없으니까
- 아내 외제니 페탱(Eugénie Pétain, 1877 ~ 1962)과의 관계도 유명하다. 페탱보다 21년이나 연하인 1877년생으로, 본래 젊은 시절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려 했으나 외제니의 부모가 "진급할 싹수도 없는 놈에게 내 귀한 딸 못준다!"고 하여 무산되었다.[41] 페탱은 그렇게 평생을 독신으로 살 뻔 했으나, 1차대전 중 외제니가 부모의 강요로 결혼했던 남편 프랑수아 에렝(1877 ~ 1962)과 이혼한 후 아직 연락을 주고받았던 둘이 다시 결합했다. 전쟁이 끝난 후 둘은 64세와 43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결혼하여 아름다운 황혼기를 맞이했다. 아내 역시 결혼 당시 이미 43세나 되었기에 친자녀는 없었고, 아내와 전남편 사이의 의붓아들 피에르 에렝(1904 ~ 1972, 영화감독)을 두었으나 페탱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외제니는 2차대전 후 남편이 일드외 감옥에 갇혔을 때도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여 페탱을 정기적으로 면회했으며, 페탱의 병세가 악화되자 특별허가를 받아 아예 감옥 내로 거주를 일시적으로 옮겨 남편의 수발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특혜이긴 했지만, 페탱이 대독부역혐의가 걸린 역적이면서 동시에 베르됭의 영웅이라는 포지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특혜. 외제니는 남편 사후 조용히 은거하다 1962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5. 대중매체
유럽전쟁 6:1914에서 현질 4천왕 중 하나이다. 보병 병과에서 최강자.세계 정복자 4에서 1939년도 프랑스 정복에 등장한다. 독일 전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성능은 그닥. 비시 프랑스가 구현되어있지 않아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Hearts of Iron IV에서 역사대로 비시 프랑스 지도자로 등장한다. 가지고 있는 지도자 효과는 매일 정치력 획득량을 0.5씩 늘려주는 '비상대권'.[42] 그냥 주는건 아니고 비시 프랑스 첫 중점인 '패탱에게 비상대권을'을 완료해야 준다.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생디칼리슴 혁명을 피해 아프리카 식민지로 도망친 프랑스 공화국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유저의 선택에 따라 계속 권력을 쥐고 있을 수도 있고, 앙리 모르닥이 권력을 넘겨받아 민주적인 군정을 수립하거나 아예 민주주의를 재건할 수도 있고, 드골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이끌고 권력을 장악해 오를레앙 왕조를 복고할 수도 있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세계 대전 이후 패배한 자국의 혼란상에 대해 고심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 후 나름대로 프랑스를 살리려고 군사정부를 만드나 프랑수아 드 라 로크에게 권력을 물려준다. 생각보다 잘 다스리고 라로크에게 평화적으로 물려줘서 그런지 라로크도 그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았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프랑수아 드 라 로크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등장하고 라로크 실각 후 프랑스 지도자가 된다. 이쪽은 영국과 독일을 동맹까지 깨면서 '먼저' 때린 게 프랑스라 라 로크가 욕을 먹고(그래도 언론플레이 덕에 프랑스 국내에서의 욕은 적었다) 종신형 신세에 처해진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원 역사처럼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여 새 총리로 선출되고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그나마 원 역사보다는 프랑스가 받은 처분이 관대하였고,[43]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도 영국의 식민지를 대거 할양받는 등 떡고물을 나눠 받고, 계속해서 프랑스의 지도자로 남는다. 그 뒤 원 역사보다 2년을 더 살다가 낮잠을 자던 도중에 사망한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해 해군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잃긴 했지만, 해군 함선이야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이고 알자스 로렌보다 훨씬 광대한 영국의 식민지를 받았기에 원망은 덜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무솔리니가 캐리하는 2차대전?!에서는 프랑스군 사령관, 드골의 쿠데타 이후 프랑스 국방장관으로 등장. 샤를 드골이 소극적이던 피에르 라발을 끌어내리고 항전파를 각성시켜 항전에 나서고 이탈리아의 기갑군단이 난전 중에 난입해서 프랑스군을 도와준 덕분에 파리 함락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프랑스도 저지대 집단군 150만 명을 포위당해 손실하는 등 엄청난 피를 치르며 알제리인 시민권 부여라는 카드를 고심하던 샤를 드 골에게 자신이 알제리 시민권 부여 선언을 발표하겠다고 한다. 원 역사처럼 욕 먹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물리지 않는 성격을 보여주었으며, 프랑스가 항복하는 일도 없었기에 구국의 결단을 내린 탈식민주의자 전쟁영웅으로 평가가 바뀔 듯하다.
6. 둘러보기
[1]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2] 항복 이후인 7월 10일, 프랑스 상하 양원은 내각에 헌법개정의 전권을 부여하는 총투표를 실시, 찬성 569표, 반대 80표로 압도적 지지로 내각, 정확히는 내각 수반인 페탱 총리에게 헌법개정의 전권을 부여한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이 헌법개정권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페탱의 합법적 총리 임기를 헌법이 개정되는 7월 11일까지로 국한하고 그 이후를 불법내각으로 규정하고 있다.[3] 한국에서의 김원봉에 대한 평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4] 이런 식으로 고속출세한 대표적 케이스가 페탱의 제자이기도 한 스페인 육군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다. 무려 33세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는데 이는 전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된 케이스였다. 또다른 예시는 조제프 조프르인데, 마다가스카르 식민지 복무에서 갈리에니의 눈에 띈 덕분에 프랑스군 최연소 준장이 되고 장성급으로도 빠르게 진급했다.[5] 페탱이라고 주도권을 빼앗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거기에 필요한 물자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음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다.[6] 즉. 베르됭 전투의 책임은 조프르에게 있다. 현지 지휘관들이 1915년 말엽부터 베르됭 방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며 아군의 방비태세는 허술하다고 직보했으나 이걸 다 씹은게 조프르였다. 결국 조프르는 베르됭 전투 종료 후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7] 팽르베는 조프르의 해임이 확실시되었을 때 총사령관으로 포슈와 페탱을 추천했고 니벨을 비판했다. 페탱이 총사령관, 포슈가 참모총장이 되며 그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페탱과 포슈는 상반되는 성격과 1915년 이래 쌓아온 갈등, 업무 충돌 등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팽르베가 이를 중재하느라 고생해야 했다.[8] 페탱은 전초부터 에밀 파욜에게 도살자라고 불렸을 정도로 병사들을 적극적으로 총살했다. 당대 프랑스군은 군법위반에 대해 최고형을 남발하면서 절대 감형과 집행연기를 해주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정부가 보르도로 피난가며 권위가 떨어져 군부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페탱을 처형 남발 때문에 도살자라고 불렀던 파욜조차 꼭 필요한 조치였다며 그를 옹호했고, 페탱이 병사 사이에서 누렸던 인기만 봐도 알겠지만 이런 성향이 당대엔 심각한 문제도 아니었다.[9] 의외인 사실이지만 프랑스군은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기갑 및 항공전력이 독일군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공군은 신형기가 부족했고 장기전을 대비한답시고 그마저도 후방에 쟁여두고 있던 실정이라 정작 최전선에 투입된 기체는 질을 따지지 않고 양적으로만 따져도 심하면 비율이 1:3까지 벌어져 각개격파당했고, 전차는 하나같이 둔중한데다 무전기가 없는 경우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항공전과 전차전에서 특히 란체스터 법칙이 강하게 작용하는 걸 감안할 때, 결국 프랑스군은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고도 이를 보병 화력 지원에 국한시키는 우를 범한건데, 페탱 본인도 충분한 화력을 제공한다는 원칙으로 전차와 항공기 전력 증강을 지원했던 것이니 페탱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10] 페탱과 히틀러 사이에는 통역가이자 친위대 연대지도자 파울 슈미트, 맨 오른쪽에는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및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있다.[11] Combat, 영단어로 전투인 그 Combat이 맞다. 대표적인 레지스탕스 언론으로 알베르 카뮈가 편집장으로 있었다.[12] Combat, n° 2, décembre 1941: Kedward, Resistance in Vichy France, p. 146.[13] 프랑코는 "장군님, 가지 마세요. 저 자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모두 장군님께 떠넘길 작정입니다. 여기에 계세요. 귀국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페탱은 "알고 있소, 장군. 하지만 이것이 내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오."라 대답하고 끝내 프랑스로 돌아갔다.[14] 유대인 탄압 역시 유대인을 프랑스를 약하게 만든 원흉 중 하나로 판단함에 따라 일어난 일이었다. 그 외에 외국인(망명객, 식민지인 등), 프리메이슨 역시 이 원흉의 일원으로 지목했다.[15] 말할 것도 없이 드레퓌스 사건 또한 페탱이 이런 멍령을 내리는 데 큰 일조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애시당초 드레퓌스 사건 당시 가장 앞장서서 드레퓌스를 목매달려고 한 자들이 군부였다.[16] Jean-Pierre Azéma, De Munich à la Libération, 1938–1944, Points Seuil, 1979, p. 46[17] 좌파가 아니었지만 적극적인 반독파였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친독 민병대에게 처형.[18] 피고 중 유일한 군인이었다.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페탱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 사실 가믈랭은 1940년 프랑스의 패전에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맞았지만 다른 군인들은 패전에 책임이 있었어도 페탱을 지지했기에 재판에서 빠졌다.[19] 독일이 프랑스를 완벽하게 합병하지 못한 것은, 프랑스를 다 먹어버리면 전세계에 있는 프랑스 해외 식민지들이 연합국에 붙어버릴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시 프랑스를 정통 프랑스 정부로 세워놓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편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쟁 내내 프랑스 식민지 정부들은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경우가 많았고 횃불 작전이나 캐터펄트 작전처럼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연합국과 싸운 경우도 많았다.[20] 당시 페탱과 드골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드골은 페탱의 부하였고, 드골이 당시 전시 내각에 합류하면서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드골이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에 보르도에서 페탱과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우연이 겹쳐 둘이 말없이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이 만남이 6월 14일에 있었고, 드골은 15일편 비행기가 없어 16일에 영국에 도착한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드골이 영국으로 가기 직전에 의기투합한 페탱과 말없이 이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즉 드골의 무장투쟁과 페탱의 항복이 연계되었다고 본 것인데,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21] 주로 1차대전 참전용사들로 구성되었다.[22] 쾨니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서 활약했던 주요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전후에 북아프리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제 2차 세계대전 초 노르웨이와 프랑스 전선에 참가했으며 1940년 6월 영국으로 철수한 그는 드골 운동에 가담해 자유 프랑스군에서 계속 진급했으며, 1940년 가봉 점령과 1942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에 맞서 비르하케임을 방어하여 유명해졌다. 그 뒤 프랑스가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부에 파견한 보조 군대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4년 6월에는 점령된 프랑스의 반(反)독일 게릴라 부대인 프랑스 국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말기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던 쾨니그는 1949년 북아프리카 검열관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전시비상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곧 은퇴해 국민의회에서 드골파 대표로 뽑혔고, 1954~55년의 짧은 기간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23] 평범한 젊은 사람도 갑자기 감옥에 3달이나 갇혀 있으면 심적 고통이 크다. 헌데 페탱은 당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을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태에서 갑자기 '죄인'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니 심적인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24] 세간의 인식대로 레지스탕스가 많았다면 소탕 작전에 독일군 병력이 분산되면서 전쟁이 더 일찍 끝났어야 맞다. 현재 돌아다니는 세간의 인식은 자존심 때문에 국내에서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이 극소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전후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를 과하게 띄워준 결과다.[25] 전쟁 직후와 종전 이후의 여론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해방 직후인 1944년 9월엔 페탱이 사형이나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3%, 무죄거나 재판 자체가 부당하다고 응답한 이가 58%였으나 1945년 8월엔 사형 혹은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37%, 무죄를 주장한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이는 전쟁 직후 나치 부역자 청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6] 1940년 페탱에게 정권을 넘기는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이력이 있다.[27] 물론 두 사람도 항복 이후의 결정에 대해서 페탱을 비판했으나, 매국행위라고는 볼 수 없으며 엄벌에 처할 사유는 아니라는 입장이었다.[28] 유대인이자 사회주의자였고 덕분에 프랑스 함락 이후 숱한 죽음의 위기를 넘겨왔다. 사회주의자+유대인이라는 이중 콤보가 터지면서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 모두 탄압했기 때문. 동생인 르네 블룸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참고로 페탱은 레옹 블룸이 자신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한다는 사실에 그가 자신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러냐고 불평했는데, 이는 치매가 심해진 페탱이 자신이 블룸을 감옥에 처넣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29] 몽지보 재판장은 5년형을 제안했으나, 배심원단이 이를 거절한다. 몽지보 재판장이 기권한 1차 공개투표에선 18대 8로 사형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수시간의 격론으로 날카로워져 있던 배심원단에게 적절히 식사가 배달되자 배불리 먹고 마시고 담배까지 피운 후에 행해진 2차 비밀투표에선 그 격차가 13대 14로 줄어들었다. 그외에 레지스탕스 배심원단이 페탱의 프랑스 원수 계급을 박탈한다는 모욕적 부관참시를 판결문에 넣자고 제안했으나 20 대 7로 부결되고 페탱의 재산과 서훈을 압수한다는 온건한 표현으로 대체되었다.[30] 이와 비교되는게 대한민국의 광복 이후 복벽주의자 왕당파들이다. 당대 국민들 사이에서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황실 복원은 정식 논의는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미 한국에서 1910년대 황실 복원을 원하는 왕당파들은 거의 뿌리가 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31] 당연하지만 방데 전쟁 때문이다.[32] 사실 페탱은 전쟁 직전 스페인 대사로 나가 있었고, 프랑코와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에 남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프랑코 역시 "지금 프랑스로 귀국하시면 매국노가 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페탱은 결국 프랑스로 귀국하는 길을 택했다. 상황을 잘못 읽었을 뿐, 자기 나름대로는 나라를 위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본인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스페인에 남는 게 최선이었기 때문.[33]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와 국민을 적극적으로 나치에 팔아넘긴 피에르 라발 같은 자들을 의미한다. 페탱은 당연히 이런 자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비시 정부의 핵심 지도자들 중에 그에 대한 재판만이 유일하게 논란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34]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 후반부(1998년판부터 추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 프랑스 사람이랑 역사 얘기를 하려면 페탱이나 비시 프랑스에 대한 언급은 꺼리는 게 낫다고 언급했다.[35] 정확히는 1차 대전기 동안은 훌륭한 군인이었으나 2차 대전기에 그가 내렸던 결정은 재앙이라고 언급하며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평했다.[36] 유대인과 좌파 제외. 특히 비시 프랑스는 헝가리와 불가리아도 거부했던 독일의 유대인 송환 요구를 수용했고 비시 프랑스의 유대인 탄압정책이 자발적이었음을 페텡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했다.[37] 이탈리아가 약체이건 아니건, 정규군의 공세는 그 자체만으로 경계의 대상이기에 독일군을 방어할 부대 일부를 이탈리아 전선에 돌려야 한다. 이는 그만큼 대독일 전선이 힘겨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38] “패탱은 매국노다” 또는 “패탱은 국익을 수호했다.”와 같은 규정.[39] 다만 이 의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단체 및 사학계에서의 논쟁은 예외로 하는 경우가 많다.[40] 책제목이 정말 선정적으로 번역된 경우다. 원제는 정치적 재판의 역사인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나는 죄 없이 죽는다가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되는 사람들이 나치 전범들, 일본 제국 전범들.(루이 16세, 찰스 1세, 에리히 호네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비롯하여 다른 케이스도 많다.) 이 책도 전범들 변호가 아닌 전범들을 다루던 재판 과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법률적인 문제인데 제목 한번 예술적으로 번역한 셈이 되겠다.[41] 실제로 페탱의 진급은 매우 느려서 40살을 넘긴 나이에도 소령을 달지 못 했다.[42] 원래는 '긴급조치'로 번역되었으나 변경되었다.[43] 알자스-로렌만 할양, 프랑스 군정청 계획 취소, 프랑스령 식민지 유지, 포로 석방, 재무장 허용 등 독일이 1차대전 때 당한 것보다 훨씬 관대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게 관대한 조건 때문에 자유 프랑스의 결집력도 약해진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