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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6 14:35:33

참봉김홍연(삼척김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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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김씨 김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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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colbgcolor=#fff,#191919>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
시조 김추(金錘)
字자 수일(壽一)
號호 운포(雲圃)
외부 링크 삼척 김씨 대종회



1. 김홍연의 생애(金弘淵 生涯)2. 김홍연의 업적(金弘淵 業績)3. 김홍연과 그의 영향(金弘淵과 그의 影響)4. 參奉三陟金公弘淵施惠碑
4.1. 원문4.2. 번역문
5. 운포 김홍연의 묘소 비문(雲圃 金弘淵 墓 碑文)
5.1. 원문5.2. 번역문
6. 註7. 대종회 및 연락처8. 관련 사이트

1. 김홍연의 생애(金弘淵 生涯)


김홍연(金弘淵, 1875.6.2.∼1944.12.11.)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생존하며, 흉년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소작인들을 위해 많은 양곡을 기부하고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선행은 1943년에 소작인 김종호 외 30여명에 의해 세운 '참봉삼척김공홍연시혜비'를 통해 기리어졌다. 비석은 현재 동해시 북평동 내리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김홍연은 삼척의 지주로서, 불우한 이웃과 소작인들에게 큰 사랑과 배려를 베풀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시키는 데에도 힘썼다. 이 비석은 그의 인덕과 공로를 기리고 그의 자선 활동이 현재까지도 기억될 수 있도록 한다
김홍연은 평소 가정과 마을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도에서도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병환 기간 동안 끊임없이 간호하였으며, 애통함 속에서도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농업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평소에는 선한 일을 행하며, 그의 행동은 후세에 모범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관직에 오르며 삼척에서 명망 높은 집안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의 가계는 5대에 걸쳐 이어지는 높은 품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이룬 가정 또한 존경받았다.
김홍연은 평생 동안 실천한 선한 일들이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업적은 "하늘의 품격을 닦으면 사람의 품격이 따른다"는 말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2. 김홍연의 업적(金弘淵 業績)


김홍연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지역 사회의 안정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민들을 위한 도덕적 행동을 보여주면서,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지역 사회의 화합을 이루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지역 주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소작농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실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졌다.그를 기리기 위한 비석도 세워져 있어,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도덕적 가치관을 후세에 전하는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은 김홍연의 생애와 그의 덕행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김홍연은 평소 가정과 마을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도에서도 본보기를 보였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간호에 철저했으며, 슬픔의 절제 속에서 가족을 위해 힘쓰는 모습은 그의 개인적인 신념과 함께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그의 덕행은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3. 김홍연과 그의 영향(金弘淵과 그의 影響)

김홍연과 그의 영향
결론적으로, 김홍연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생애와 활동은 특히 가난한 소작인들 및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업적은 지역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덕행은 다음 세대들에 의해 계속 기억되고 기려질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가르침과 행적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김홍연의 손자들은 그를 기리며 그의 가치를 알리고, 그의 삶의 원칙을 따르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존재는 단순히 개인의 업적에 국한되지 않고, 커다란 사회적 흐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參奉三陟金公弘淵施惠碑

4.1. 원문

參奉三陟金公弘淵施惠碑
恤貧周急 特置田匠 厥土稅斂 自己擔當
耕斯穫斯 情所難忘 懿歟我公 終焉允藏

4.2. 번역문

參奉三陟金公弘淵施惠碑
참봉삼척김공홍연시혜비
恤貧周急 휼빈주급 : 곤궁한 사람들 두루 구제하려
特置田匠 특치전장 : 특별히 농장을 두어
厥土稅斂 궐토세렴 : 그 지역 세금을
自己擔當 자기담당 : 당신이 담당 하셨네
耕斯穫斯 경사확사 : 경작하고 수확하면서
情所難忘 정소난망 : 진정으로 잊을 수 없으니
懿歟我公 의여아공 : 아름다우신 우리 공이여!
終焉允藏 종언윤장 : 마침내 아름답게 되셨도다.

5. 운포 김홍연의 묘소 비문(雲圃 金弘淵 墓 碑文)

5.1. 원문

從仕郞慶基殿參奉三陟金公墓碑銘 竝序
陟治北 內里 聖智山下 有義隱不市者曰 金公弘淵 字壽一 號雲圃 性稟純粹 氣宇宏遠 年自幼丱 務悅親 意 左右服勤 志物之養 靡不畢具 父有遘疾 十朔救療 其迎醫侍湯 罔以代人扶按臥起 嘗糞驗症及喪哀 毁幾滅性 棺槨斂具 遵禮无感 三年持制 不脫衰經 不御酒肉 晨夕展墓 不以風雨艱險少弛 一夜雪深 失 路彷徨 忽聽父親音聲 乃勵心增力 跬步以進 則睾如墳壟昭視 無疑赤手拓雪 拜省而還 後値內艱儀禮 一如前喪 每哭諱痛 若含璲之日 蘋藻之薦 務克蠲潔 日以明農訓子爲事 家勢優饒 周恤窮乏 佽助婚喪 與人論事 但擧善端而導之 有不是處 聞之如聾 嘗曰 天監孔昭 人何務辨 平日素養 槪可知 若晻昧而無 傳 爲善者 何勸焉 是以其實行 著於明倫錄 又有佃戶施惠碑 仁善德義之不泯 於斯可徵也 金氏之望三陟 悉直郡王諱渭翁爲鼻祖 是後冠冕簪組 繼世承襲 迪順副尉諱終淳 修義副尉諱璫 爲公之中祖 五傳而 諱樞亨通訓 諱聖淳左承旨 諱重球嘉善 諱斗錫通政爲公之高曾祖禰也 妣全州李龍和女 高宗乙亥六月 二日生 甲申十二月十一日卒 享年七十 墓同面防阿達上峯負艮原 配宜人密陽朴文秀女 癸酉三月十三日生 孝奉姑舅 善事所天 己酉二月二十二日卒 墓虎峴里造井谷坤坐 生一男一女 男永鎬 女延日鄭吉和 后配 宜人密陽朴受根女 柔婉慈惠 可謂有壼德 而閨闈之內人 无間言 生一男二女男曰 尙鎬 女延日鄭珏永 江陵 金國振 孫曰 源坤源千源三 餘蕃不錄 噫究其生平履行 則萬善俱美 百行拔萃 實皆孝悌之推 而一命之啣 不求而自至衆口之頌 不謀同辭 如孟子所云 天爵修之 人爵從之者 果其不誣也歟 其長允永鎬 手抄行錄 請余以誌陰 固不敢辭爲之銘 銘曰
聖智之麓
防阿之陽
睾如四尺
哲人攸藏
盛朝恩啣
階及一郞
佃客之頌
珉刻道傍
後人像想
視此銘章
檀紀四二七九年 丙戌十二月 日
江陵 咸鍾浩撰
眞珠 沈之湟 書幷篆
族從 宗鎬銘 子永鎬謹竪

5.2. 번역문

1)종사랑(從仕郞) 경기전 2)참봉(慶基殿參奉) 경기전 삼척(三陟) 김공(金公) 묘비명(墓碑銘), 병서(竝序)
삼척부(三陟府) 치소의 북쪽 내리(內里) 성지산(聖智山) 아래에 의리로 숨어 지내며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김홍연(金弘淵)이고 자는 수일(壽一), 호는 운포(雲圃)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기국이 매우 커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뜻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힘써, 곁에서 부지런히 부모님을 섬기며 물심양면으로 봉양하면서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병에 걸려 열 달 동안 치료에 매달리고 의사를 맞이하고 곁에서 병간호하면서 아버지를 부축하거나 눕히거나 일어나는 일들을 남에게 대신하도록 하지 않았다. 변을 맛보며 병의 증세를 증험하였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애통한 슬픔에 거의 병을 얻어 죽을 지경이었다. 관곽(棺槨)과 염구(斂具)는 예(禮)에 따라 유감이 없도록 하였고 3년 동안 상제(喪制)를 지키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새벽과 저녁때마다 산소를 둘러보았고 비바람이 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도 마음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
하루는 눈이 많이 와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와 이에 마음을 다잡고 힘을 내어 발걸음을 내디디며 나아가니 우뚝한 무덤이 분명하게 보여 아무런 의심 없이 맨손으로 눈을 쓸어내고 절을 하고 돌아왔다. 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의례(儀禮)를 한결같이 앞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하였으며 매번 곡(哭)을 할 때마다 애통해하기를 마치 장례를 치르던 날과 같이하였고, 제사를 모시는 날에는 힘써 정갈히 하였다. 매일 자식들에게 농사에 관하여 밝게 가르치는 것으로 일삼아 가세가 넉넉해지자 두루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 하면서 혼례와 상례를 도와주었고, 사람들과 일은 논할 때는 다만 선(善)한 일인지 거론하며 그들을 인도하였다. 혹시라도 옳지 않은 처사가 있어도 듣고도 귀머거리처럼 못들은 척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보는 것은 매우 밝으니, 사람이 무엇 때문에 애써 잘잘못을 분별하려 하는가?”라고 하였으니, 평소 공의 소양을 대개 알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묻혀버리고 전해지지 않는다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권면하겠는가? 이 때문에 그의 행실을 3)《명륜록(明倫錄)》에 드러냈고, 또 소작농들에게 은혜를 베푼 비석이 남아 있으니 어질고 착하며 덕스럽고 의로운 행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김씨가 삼척(三陟)에서 명망 있는 집안이 된 것은 4)실직군왕(悉直郡王) 5)휘(諱)위옹(渭翁)이 비조(鼻祖)가 된다. 이후로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 휘종순(諱終淳)은 6)적순부위(迪順副尉)이고, 휘당(諱璫)은 7)수의부위(修義副尉)이니 공의 중시조이다. 5대가 전해져 내려와 휘추형(諱樞亨)은 통훈대부(通訓大夫)요, 휘성순(諱聖淳)은 좌승지(左承旨)요, 휘중구(諱重球)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고, 휘두석(諱斗錫)이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니 공의 고조, 증조, 조부, 아버지이시다. 어머니는 전주(全州) 이용화(李龍和)의 따님이시다. 고종(高宗) 을해년(1875) 6월 2일에 태어나 갑신년(1944) 12월 11일 향년 70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묘는 같은 북삼면 방아달(防阿達) 윗 봉우리(동해시 내동 산39-2번지) 간좌(艮坐)의 언덕이다. 아내 8)의인(宜人)은 밀양(密陽) 박문수(朴文秀)의 따님으로, 계유년(1873) 3월 13일에 태어나 시부모님을 효도로 잘 섬기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삼았고, 기유(1909) 2월 22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호현리(虎峴里) 조정곡(造井谷 : 동해시 호현동 산23번지) 곤좌(坤坐)에 있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호(永鎬)이고, 사위는 연일(延日) 정길화(鄭吉和)이다. 후배(後配) 의인(宜人)은 밀양(密陽) 박수근(朴受根)의 딸로 부드럽고 자혜로워 아녀자의 덕을 갖추어 집안사람들이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상호(尙鎬)이고 사위는 연일(延日) 정각영(鄭珏永), 강릉(江陵) 김국진(金國振)이며 손자는 원곤(源坤), 원천(源千), 원삼(源三)이다. 나머지의 많은 자손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 평생 그의 행적을 궁구해보면 온갖 착한 일들이 모두 아름답고 행실이 빼어나 실로 모두 효제(孝悌)로 추천되어 9)일명(一命)의 벼슬을 받았다. 이는 구하지 않았는데 절로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니, 마치 맹자(孟子)가 10)“천작(天爵)을 닦으면 인작(人爵)은 따라 온다.” 라고 했던 말과 같으니 과연 속임이 없는 것이다. 그의 큰 아들 영호(永鎬)가 손수 기록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銘)에 말하기를,
성지산(聖智山) 기슭 (聖智之麓)
방아달(防阿達) 남쪽에 (防阿之陽)
우뚝한 4척의 무덤은 (睾如四尺)
철인이 잠드신 곳이네 (哲人攸藏)
조정에서 은혜롭게 (盛朝恩啣)
1랑(一郞)의 품계를 내렸고 (階及一郞)
소작농들 칭송하며 (佃客之頌)
길가에 비석을 새겼으니 (珉刻道傍)
후세 사람들아 이를 상상하며 (後人像想)
이 새긴글을 볼지어다 (視此銘章)
기축(己丑 :1949년) 10월 2일 방아달 양지 건좌 손향(防阿達 陽地 乾坐巽向 : 동해시 내동 87번지))으로 이폄(移窆 : 移葬)하였다.
단기 4279년 병술년(1946) 12월 일
강릉(江陵) 함종호(咸鍾浩)가 글을 짓고,
진주(眞珠) 심지황(沈之湟)이 글씨와 전서(篆書)를 쓰고,
족종(族從) 종호(宗鎬)가 새기고,
아들 영호(永鎬)가 삼가 비석을 세우다.

6.

1) 종사랑(從仕郞) : 조선시대 때 문음관(文蔭官)의 정9품 벼슬이름이다.
2) 참봉(慶基殿參奉) : ‘경기전’은 조선시대 태조(太祖)의 영정을 모시던 곳으로, 세종 24년(1442) 시조의 출생지인 전라북도 전주에 건립하였다. ‘참봉’은 조선시대의 원(園)·능전(陵殿) 및 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예빈시(禮賓寺)·군기시(軍器寺)·군자감(軍資監)·소격서(昭格署) 등 많은 관서에 속해 있었던 관직이다.
3)명륜록(明倫錄) : 광무 2년(1898)에 정광내(鄭光迺)가 인륜을 밝히기 위하여 사람들의 도덕과 선행을 기록한 책이름이다.
4)실직국(悉直國) : 강원도 삼척(三陟)의 신라시대 이름으로, 본래 진한(辰韓)의 한 속국이었는데, 신라 파사왕(婆娑王) 23년(102)에 신라에 합병되었다. 자비왕(慈悲王) 전후 시기에 실직성(悉直城)이라 일컫다가 지증왕(智證王) 6년(505)에 실직주(悉直州)로 되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 삼척군(三陟郡)으로 개칭되었다.
5)위옹(渭翁) : 신라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65~?)의 후예이다. 김위옹의 아버지 김추(金錘)는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978)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다.
6)적순부위(迪順副尉) : 조선시대 무신 정7품 품계의 이름이다.
7)수의부위(修義副尉) : 조선시대 무신 종8품 품계의 이름이다.
8)의인(宜人) : 조선시대 정·종육품(正·從六品) 문무관의 아내의 봉작(封爵)이다.
9)일명(一命) : 주관(周官)의 9명(命)에서 나온 것으로, 최하위 품계인 종9품의 관직을 말하는데, 보통 처음으로 관직에 출사하는 것을 말한다.
10)천작(天爵)을……온다 : 천작(天爵)은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자연스러운 존귀함을 말하고, 인작(人爵)은 사람이 만든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천작이요, 공경대부는 인작이다. 옛날 사람은 천작을 닦아서 인작이 뒤따랐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 古之人 修其天爵 而人爵從之]”라는 구절이 있다.

7. 대종회 및 연락처

강원도 삼척시 월계안길 9-24(당저동 77번지)
전화 : (033) 574-1731~2
FAX : (033) 574-4006
E-Mail : [email protected]

8. 관련 사이트

삼척 김씨 대종회회
삼척 김씨 종사 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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