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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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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
羅禪征伐

雅克萨战役
Русско-цин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Sino-Russian border conflicts
파일:external/news.donga.com/39298512.1.jpg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652년 (효종 3년) ~ 1658년 (효종 9년)
장소 만주, 연해주, 아무르강 일대
원인 청나라루스 차르국의 국경 분쟁
교전국[1] 청-조선 연합
(공세)
루스 차르국
(수세)
주요 인물
청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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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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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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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연합군: 3,000명
- 청군: 2,740명
- 조선군: 260명
루스 차르국군: 800명
결과 청-조선 연합의 승리
영향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 개요2. 용어와 이에 대한 오해3. 발단
3.1. 유럽: 러시아의 상황3.2. 중원: 청나라의 상황3.3. 한반도: 조선의 상황
4. 양국의 목표
4.1. 청나라4.2. 루스 차르국
5. 과정
5.1. 샤르후다의 1차 토벌5.2. 실패한 마무리5.3. 샤르후다의 2차 토벌
6. 성과7. 평가8. 기타9. 미디어에서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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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 청 순치제 시기 연해주 아무르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여 조청 연합군이 벌인 전투.

2. 용어와 이에 대한 오해

나선(羅禪)은 러시아한자어로 음역한 것이다.[3] 따라서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는 표현은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뜻이 된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역사 용어로 '나선정벌'이 굳어지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서부터 '征羅禪'(나선 정벌) 등의 표현을 썼던 것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반면 중국러시아,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는 이 사건을 '청-러시아 국경분쟁'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주된 당사자였던 청과 러시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청-러시아 국경분쟁'이라는 명칭은 '나선정벌'보다 의미가 넓기도 하다. '나선정벌'은 보통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만을 의미하지만 '청-러시아 국경분쟁'은 1652년부터 1689년까지 지속된 양국의 충돌을 전부 통틀어 일컫는 용어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경우 '나선정벌'은 '청-러시아 국경분쟁' 문서의 한 항목으로 편입되어 있다.

현대 한국에서는 조선군의 실제 파병 규모와 그 전과에 비해서 '정벌'이라는 과장된 용어가 사용되었다며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에서 내린 평가다. '정벌(征伐)'이라는 단어는 본래의 뜻을 풀어 보면 쳐서 벌한다는 뜻이며 유교적 문화가 지배하던 전근대의 한국어에서는 적 내지는 죄 있는 이민족을 침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벌하고 자국의 정당한 의지를 표현하는 군사적 행동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현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의 영토를 점령하는 등의 행위는 정벌이 아니라 쳐서 복종시킨다는 의미의 정복(征服)이다.[4]

따라서 대마도 정벌여진정벌, 그리고 파저강 정벌까지 조선과 고려에서 추진한 수많은 대외군사작전들은 병력 규모와 영토 점령, 승패에 관계없이 전부 정벌로 불렸다. 나선정벌도 '청나라 동북의 안정을 해치는 오랑캐 무리를 벌하여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정벌'로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파견 나간 조선군은 결국 러시아인들을 격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성공적인 '정벌'에 해당한다. 청나라와의 연합작전도 딱히 정벌의 의미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이미 조선 전기 건주여진정벌도 명나라와 합동으로 실시한 군사작전이었음에도 정벌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다. 허나 건주여진정벌은 당시 건주여진이 조선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개중엔 조선에 우호적이지 않고 약탈을 하는 부족들도 많아서 자발적으로 참여할 시에 조선이 얻을 이익이 있었던 반면, 이 나선정벌은 청나라만의 문제였고[5] 조선군 포수들은 그저 청의 이익을 위해 끌려간 것이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우리 입장에서 정벌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는지는 한번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서구권에서 '나선정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조선군의 실제 전과와 정벌이라는 단어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주된 당사자가 아니었던 데다가 정벌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나치게 특정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이 사용하는 '청-러시아 국경분쟁'이라는 단어는 주된 당사자들을 전부 담으면서도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분쟁의 성격을 나타내는 중립적인 단어다. 서구권에서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을 가진 '임진왜란' 대신 중립적인 '임진 전쟁(Imjin War)' 내지는 '일본의 한국 침공(Japanese invasions of Korea)'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건에 대해 '정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실제 17세기 조선시대에는 의미적으로 합당한 표현이었으며, 비록 현대에 와선 '정벌'이란 단어의 뜻이 다소 바뀌었지만 당대 사용되었던 공식 명칭이기 때문에 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현대 국내 사학계는 전쟁, 분쟁 등과 같은 호칭을 근대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전근대 존재하였던 무력분쟁을 전쟁으로 호칭하는 것에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6], 나선정벌이라고 계속 부르는 것이다.

3. 발단

조선군이 먼 북만주 지역까지 원정을 나가 러시아를 상대해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루스 차르국, 청나라가 처했던 상황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3.1. 유럽: 러시아의 상황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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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00px-Russian_Tsardom_1500_to_1700.png
▲ 1500년, 1600년, 1700년의 러시아 영토.
1500년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2백 년만에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이반 4세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부국강병 정책을 착실히 추진하며 주변의 다른 루스 국가들을 병합했고 마침내 군주의 명칭을 차르로 개칭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로써 광대한 러시아 평원의 많은 지역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왔지만 이러한 급격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외교적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자그마치 네 개나 되는 강대국들이 러시아의 유럽 방면 출구의 대부분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쪽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이 강력한 기병군단을 바탕으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평원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최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와 흑해 연안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는 몽골-튀르크계 이슬람 국가인 크림 칸국이 툭하면 쳐들어와 노예사냥과 학살을 일삼았다. 서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핀란드에서는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서 독립한 스웨덴이 착실히 힘을 다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독일 북쪽 유틀란트 반도와 노르웨이의 덴마크-노르웨이 왕국도 강대한 해양력을 바탕으로 발트해의 입구와 도서지역을 틀어쥐고 그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당시 유럽에서는 덩치만 큰 변방국으로 받아들여졌다.
파일:18EA0F6D-D8CB-42EF-9C79-3E0C65E68629.png
▲ 검은 선 안이 1200년대의 리보니아 연맹. 현재의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지역에 해당한다. 청록색은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직할 영지, 그 외의 지역들은 주교령[7]들이다. 오른쪽으로 러시아의 전신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접한 모습이 보인다. 1500년대 중반에도 큰 변동은 없었지만 위의 에스토니아 공국 지역을 덴마크에게서 넘겨받아 포함하고 있었다.

비록 "뇌제" 이반 4세가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서유럽과의 무역을 크게 늘렸지만 마땅한 항구가 없는 러시아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무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유럽 세계로 나가는 좋은 출구를 얻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고 1558년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식민지였던 리보니아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가 유럽행 출구가 없었는가 하면 아니었다. 리보니아 전쟁 개전 시점에서 러시아는 북쪽 백해아르한겔스크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이반 4세의 치세에 와서는 핀란드만에 접한 이반고로드 항구도 추가로 건설했지만 두 항구 모두 그다지 좋은 항구는 아니었다. 아르한겔스크는 너무 북쪽에 있었던 데다 겨우내 얼어붙는 기간이 너무 길었고 이반고로드는 내륙으로 들어와 있어 수심이 너무 얕았다. 핀란드만에 접한 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될 잉그리아네바강 하구도 있었지만 당시 이 지역은 핀란드에 주둔한 스웨덴 군대의 위협을 받는 국경 지대의 미개발 늪지대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리보니아의 중심 도시들이던 리가[8]레발[9]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켰다. 리가와 레발은 북방 십자군의 정복 활동으로 이주해온 독일인에 의해 수세기 전부터 개발되어 한자동맹 회원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고 심지어 독일 본토의 웬만한 한자동맹 도시들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항구와 산업 시설들을 가지고 있는 알짜배기 도시들이었다.
파일:livonia_lopp.jpg
파일:Sw_BalticProv_en.png
▲ 16세기 리보니아 전쟁 전후 발트해 일대의 상황. 리보니아가 3분할 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덴마크(황갈색)가 사레마 섬을, 폴란드-리투아니아(보라색)가 리보니아 대부분을, 스웨덴(녹색)이 에스토니아 공국잉그리아[10]를 집어삼키고 러시아(분홍색)는 내륙으로 밀려나 있다. ▲ 나선정벌이 벌어지던 17세기 중반의 리보니아와 잉그리아. 러시아의 발트 해 출구가 여전히 스웨덴에 가로막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1620년대의 폴란드-스웨덴 전쟁으로 폴란드령 리보니아 대부분이 스웨덴에 넘어갔으며 1645년 덴마크는 스웨덴과 브룀세브로 조약을 맺어 사레마 섬을 스웨덴에 양도하고 철수했다.

1558년에서 1583년까지 20년 넘게 벌어진 이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리보니아 연맹을 해체시켜 버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곧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스웨덴, 폴란드, 그리고 덴마크의 합동 공격을 받아 전세가 역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사주를 받은 크림 칸국 군대가 남쪽에서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쑥대밭으로 만들고[11] 귀족과 농민들의 반란까지 속출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의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졌다. 러시아는 패배했고 리보니아는 승전국들에게 덴마크령 사레마,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 폴란드령 리보니아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삼등분되어 갈라먹혔다.

특히 스웨덴은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예테보리를 제외한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서부의 주요 항구들을 덴마크가 장악하고 있어 러시아처럼 항구 확보에 목숨을 건 상황이었기에[12] 에스토니아의 레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이반고로드마저 전리품으로 가져갔다.[13] 이로써 러시아는 완전히 패배한 걸로도 모자라 있던 항구마저 잃어버린 채 유럽 진출은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거기다 표도르 1세 사후 벌어진 일종의 왕위계승 다툼인 혼란 시대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가 개입해 모스크바를 급습해 차르를 갈아치우고 이후로도 수십년 간 러시아를 위협하면서 러시아는 더더욱 유럽 내로 진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서쪽으로의 팽창이 좌절되자 러시아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검은담비 가죽 같은 것들은 유럽 상류층의 사치품으로 고가에 거래되는 품목이었는데 러시아는 숲에서 잡은 많은 담비 가죽을 아르한겔스크를 통해 유럽에 수출하며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담비는 야생동물이라 사냥당할수록 개체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죽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리보니아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552년에 러시아는 동쪽의 카잔 칸국아스트라한 칸국을 먼저 병합함으로서 동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볼가강 수운 체계를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로써 러시아는 강한 적들이 버티고 서 있는 서쪽과 남쪽과는 달리 동쪽으로 마음놓고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튜멘 지역에 자리잡은 시비르 칸국이 우랄 산맥 서쪽에서 광산업을 하던 스트로가노프 가문[14]의 사업장을 약탈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확장은 더 가속화되었다. 열 받은 러시아는 예르마크가 이끄는 돈 카자크 부대를 고용해 시비르 칸국을 단숨에 밀어 버렸고 이후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영토를 확장했다.

시베리아 확장은 스페인이 신대륙을 정복할 때 콩키스타도르들과 계약해 하청을 굴렸던 것과 비슷하게 시베리아를 개척할 원정대를 적당껏 모집한 후 원정대가 알아서 개척(겸 침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원정대로 나선 자들이 전투민족 카자크여서 그런지 정말 비상식적으로 빠르게 시베리아를 평정했다. 덕분에 이전까지는 러시아에게 막대한 위협이었던 시베리아와 스탭 유목민들은 그야말로 씨가 마르는 수준으로 박살이 나버렸다.

1598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식민도시 톰스크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진출했다. 1647년 기어이 러시아는 북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이를 오호츠크 해라고 이름붙였다. 이후 러시아는 예니세이 강에 세운 식민도시와 레나 강 중류의 야쿠츠크를 바탕으로 1638년 남진을 시작해 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당시 아무르강에 도달한 탐험대는 포야르코프 원정대로, 이후 하바로프[15] 원정대가 1649년, 1651년 두 차례에 걸쳐 강 근처 원주민 부락들을 공격하고 부락의 물품들을 노획했는데 이때 주로 노획한 물품은 가죽이었다.

하바로프 원정대는 아무르강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남하해서 아예 대륙의 동쪽 끝까지 진출하고자 했지만 아무르강 너머는 청나라의 권역이었고 아무르강을 넘어서 대륙 끝까지 가겠다는 것은 곧 청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소리가 된다.

하바로프 원정대는 청나라의 권역 내로 침입해 청나라의 보호 하에 있는 현지 부족들을 열심히 약탈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본토이자 발원지이기도 한 만주는 북쪽 경계인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으로 별다른 자연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침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특히 만주 북부에서 아무르강과 송화강을 따라 이동하는 수로는 말뿐만 아니라 흑해에서 크림 칸국에 보복하기 위해 약탈을 일삼아 배에도 익숙한 카자크들에게 있어서는 장애물이 아니라 고속도로나 다름없었다.

3.2. 중원: 청나라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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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졸지에 후방의 국경 지대에서 이 코가 대단한 [웃자고] 정체 불명의 이민족들이 현지 부족들을 약탈하고 요새까지 정성들여 알박으며 남하하는 꼴을 보게 되었는데 이들이 엄청난 속도로 송화강을 넘어올 판이 되자 이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하바로프 원정대의 약탈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은 청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청은 이를 받아들여 1652년 닝구타(寧古塔, 영고탑)[17] 주둔 사령관 하이서의 지휘 하에 군사 2,100명을 아무르강에 파견했다. 당시 아무르강에서 열심히 행패를 부리던 하바로프 원정대는 고작 206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자그마한 부대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하이서가 손쉽게 이들을 무찌를 것처럼 보였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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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기이자 러시아의 침입이 벌어지던 1650년대 말, 반청복명파인 정성공 군대의 최대 확장 범위. 정성공이 중국 경제의 핵심이자 명나라 전기의 수도권이었던 장강 하류, 그리고 무역 거점들이었던 동남 연해를 점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침입 시점은 명청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따라서 청나라는 정규 병력을 본토인 만주에 배치해둘 수 없었다.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키고 산해관이 뚫린 이후 대세는 청 측으로 완전히 기울었으나 명나라 잔당과 부흥파의 군대는 여전히 강남 곳곳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가령 정성공의 군대가 난징을 포위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한 게 나선정벌이 벌어진 지 1년 뒤의 일이었을 정도로 중원의 전황은 여전히 매우 급박했기 때문에 청나라는 팔기군과 화기를 다루는 한인 녹영병 주력을 남명을 포함한 각지의 명나라 잔당과의 전투에 투입해야 했다. 만주 북방의 청군은 원주민들의 자경대뿐일 정도로 취약한 상태로 남겨졌다.

그리하여 하이서가 동원한 군사 2,100명 중 1,500명은 기껏해야 날붙이 조금 챙긴 현지 부족민이었고 청나라 정규군은 600명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청군 600명 중 포수는 30명뿐이었다. 대포를 동원하긴 했지만 고작 6문으로, 하바로프 원정대가 알박은 요새를 공략하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하바로프 원정대도 일확천금 노리고 극동으로 달려온 어중이떠중이 강도떼였기 때문에 이들을 제압하려는 시도는 처음엔 제법 그럴싸하게 굴러갔다. 하이서의 부대는 하바로프 원정대가 숨어든 요새의 벽을 무너뜨리고 요새 내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여기서 하이서가 이 강도떼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전투가 쉽게 풀리는 것을 본 하이서는 이대로 이 "나선" 나부랭이들을 싹 포로로 잡아서 바치겠다는 생각을 했고 따라서 나선 놈들을 해치지 말고 생포하라고 명령했는데 무너진 요새 벽을 넘어 들어가 보니 하바로프 원정대가 대포를 잔뜩 설치해 둔 상태로 농성 중이었다. 대충 날강도 놈들을 때려잡을 생각이었던 하이서의 병사들은 졸지에 눈 앞에서 포탄이 날아드는 사태에 직면했고 별다른 대처도 못 한 채 우왕좌왕 하다가 대포알에 볼링핀 마냥 쓸려나갔다. 결국 청군은 무려 676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참패한 반면 하바로프 원정대의 전사자는 10명이었다. 이 황당한 참사를 전달받은 순치제는 하이서를 처형해 버렸다.

이 나선 나부랭이들이 절대 우습게 볼 것들이 아니라고 느낀 청나라는 나선을 정벌하기 위해 좀 더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판단하였고 그에 따라 샤르후다를 나선 정벌 임무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샤르후다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장수 중 하나였는데 나선정벌 중의 활약을 보면 꽤나 유능한 장수임이 분명하고 당장 명나라를 끝장내느라 정신 없었던 청나라 입장에선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전력을 내보낸 셈. 샤르후다는 나선이라고 대충 이름 붙인 정체불명의 도적떼들이 실상 매우 강력하게 무장된 군사집단이며 그들을 절대 쉽게 쫓아낼 수 없으리라 판단해 2년에 걸쳐 신중하게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사르후다에게 줄 수 있는 지원이 너무 부족했는데 특히 사격 병과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요새에서 알박고 대포를 쏴대는 적군을 잡으려면 그들을 멀리서 쏴죽여 줄 총잡이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문제를 매우 걱정한 샤르후다는 총잡이들을 끌어오고 싶어했으나 그의 휘하에는 마땅한 총잡이가 없었고 팔기군에서 빼오려 해도 만주팔기나 몽골팔기에는 쓸 만한 포수가 드물었다. 그나마 총 좀 쏘는건 한족 포수였는데 상술한대로 이들은 대부분 녹영에 소속된 인력으로 만주의 소규모 적군 좀 해결하겠다고 빼서 보내줄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나선의 약탈을 크게 우려하던 청나라는 결국 사르후다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들어주기로 했는제 그 방법이란 조공국인 조선에서 포수를 파병 받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이미 10년 전의 송산 전투에서 조선군과 연합작전을 하면서 조선군 조총병의 지원사격에 많은 도움을 얻었던 바 있었다.

3.3. 한반도: 조선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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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조선에 새로 즉위한 국왕 효종은 그 지지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일단 청나라에 비굴하게 고개 숙인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하지 않겠다는 양반의 수가 전국적으로 매우 늘어났다. 재야의 여론을 장악한 이들 산당 세력은 한성과 조정 내의 사대부들에 비해 유교적 명분과 수에 있어 압도적인 우세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효종 본인도 본인의 것이 아니었던 왕위를 형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정통성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은 산당 세력을 확실하게 제어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북벌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명나라를 위한 복수라는 명분을 통해 거대한 산당 세력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권력을 바로 세울 수 있었으며 국방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임진왜란정묘호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을 거치며 박살이 나 있었던 조선군의 군제를 개편할 실질적인 필요도 있었다. 다만 그가 실제로 북벌을 통해 청나라를 칠 생각이 있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형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효종도 중원에서 천하가 뒤바뀌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 청나라에 전쟁을 다시 시도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북벌은 국가의 무너진 기틀을 다시 재확립하기 위한 내부 단속용 기치였다.

어찌되었건 북벌론에 따른 효종의 개혁 시도는 점차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총의 보급률을 대대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러던 1654년 2월, 조선에 청나라 사신 한거원이 도착했다. 한거원의 서신에는 "조창선수 100여 명을 보내시오. 나선을 정벌하려 함이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에 효종이 "나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며 한거원은 "닝구타 인근의 별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나선"의 정체가 러시아의 시베리아 원정대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중원에 파송된 가톨릭 선교사들 덕분에 청나라도 유럽 구석탱이에 모스코비아[18]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 선교사들이 유럽의 소식을 가져오는 데엔 큰 지연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는 유럽에선 변방 중의 변방인지라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평정하려 원정대를 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가능성도 낮았다.

따라서 청나라는 이들이 만주 너머 시베리아에서 남하한 정체 모를 유목 집단 같은 것으로 파악해 대충 "나선"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상식적으로 누가 그 먼 유럽에서 시베리아를 건너 만주까지 오리라 생각했겠는가? 심지어 러시아 본국에서도 자기네 원정대들이 극동에 가서 청나라의 권역을 들쑤시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나라는 나선정벌이 끝난 이후에야 나선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단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러시아의 사절단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는데 러시아는 이 항의를 받고 나서야 자기네 원정대가 시베리아 너머에서 적을 마주쳤다는게 사실 청나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이 얼마나 막무가내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체감할 수 있는 일화다.

어쨌든 이런 청나라의 요청에 효종이 호응하여 변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포수 100여 명, 초관, 통역들을 포함한 152명의 부대를 결성, 파병함으로써 조선도 나선정벌에 참여하게 된다.

4. 양국의 목표

4.1.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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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강 일대에 대한 지배권 유지 및 러시아군의 남하 저지가 1차적인 목표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미처 복속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넓히고 보호령으로 선포된 곳을 가능하면 청나라 조정의 직접 통치령으로 바꿀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4.2. 루스 차르국

아무르강 일대를 점령해 기존에 원주민들이 청나라에 바치고 있는 모피를 빼앗고 특히 농사짓기에 좋은 아무르강 남부를 점령해 본격적으로 식민화하길 원했다. 카자크들이 점령했던 시베리아 지역은 땅만 넓지 기후가 춥고 서늘하여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운 척박한 곳이어서 그곳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에게 공급할 식량이 모자랐다.[19] 이걸 모스크바 같은 본토에서 일일이 가져오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힘들었기 때문에 시베리아와 가까운 지역에서 곡식을 재배하고 추수하여 공급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마침 그나마[20] 농사가 잘 되는 곳이 아무르강 일대였다.

5. 과정

5.1. 샤르후다의 1차 토벌

조선의 조정에선 함경도 병마우후 신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조총병 100여 명을 선발하여 1654년(효종 5년) 3월 23일 두만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진입했는데 8일간 걸어서 행군한 끝에 닝구타 인근에 주둔하던 샤르후다 지휘하의 청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송화강과 무단 강이 만나는 합류점인 삼성까지 가기 위해 무단강벌 흐름을 따라 배를 타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결성된 조청연합군은 총 1천여 명 규모였다.[21] 청나라가 제대로 된 군함을 동원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배나 적당껏 징발해 이동했는데 대략 120척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하바로프는 공로를 인정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간지 오래였고 나선 정벌군이 마주치게 된 러시아 원정대는 그의 후임 스테파노프가 이끌고 있었다. 당시 스테파노프가 거느린 군사는 400여 명 규모였다. 스테파노프의 함대는 아무르강에서 송화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송화강 하구로 진입한 조청연합군과 마주쳤다. 이 때가 4월 28일이었다.

원래 샤르후다는 수상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해 조선 포수들이 선두에서 저격을 행한 후 청군 및 원주민 군대가 승선하여 마무리 짓는 방향으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예상과 달리 스테파노프의 원정대는 카라벨코르벳 같은 본격적인 군함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고 청군이 징발한 배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대충 만든 땟목 수준의 배인 '자피선'[22]들이었다. 적의 전력이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화된 상태인 것을 본 샤르후다는 작전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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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를 묘사한 러시아 측의 보고서에는 강변의 청군을 보고 '전투배치 훈련을 잘 받은 군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여러 종류의 깃발을 세운 채 각 깃발 아래 각각의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청군의 팔기 체계를 잘 파악해낸 티가 난다.

샤르후다는 수상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러시아 원정대가 요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밖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임을 노려 육상에서 급습하는 것으로 작전을 바꿨다. 단순히 러시아 원정대를 향해 냅다 들이박는게 아니라 참호와 토벽 등의 야전 축성물을 설치하고 그 뒤편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조선 포수들이 저격하여 지원하는 방안[23]을 마련했으며 이것이 나선정벌 승리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 원정대가 반응하기 전에 제빨리 축성물을 쌓고 그대로 조선군과 청군, 원주민 부대 전원을 투입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청군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조선군이 강변에서 러시아군을 내려다보며 저격을 하여 러시아군의 피해를 누적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선군은 수도 적었고 전원이 조총병이었기에 근접전에서 취약할 수도 있었으나 샤르후다가 설치해둔 야전 축성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그걸 넘어오는 적은 청나라 기병들이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사전에 야전 축성물을 쌓은 것에서 샤르후다가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군은 전투 중 강변에서 사격하는 조선 포수들의 저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대항해 맞사격을 가했으나 샤르후다가 미리 설치해 둔 토벽 때문에 별 성과를 볼 수 없었다. 총을 쏘는 족족 토벽 뒤로 후퇴해 버리는 조청 연합군을 공격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측은 강변에 상륙 후 조선군에게 돌격을 시도했으나 청나라 기병대에 차단당해 막대한 피해만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아무르강 상류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청군이 이를 추격했다. 청군의 선단은 4일 동안 쉬지 않고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재수없게도 동풍이 불어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돛을 올리고 빠르게 퇴각하여 아무르강 상류에 러시아 원정대가 세운 쿠마르스크 요새[24]에 들어가 버렸다.

샤르후다는 멍청하게 공성장비도 없이 요새에 들이박을 생각이 없었기에 병력을 물러 6월 13일 닝구타로 돌아갔으며 나선정벌군은 일단 해체되었고 샤르후다도 다른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조선군은 조선을 떠난 지 84일만에 돌아왔는데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5.2. 실패한 마무리

이후 청은 희한하게도 겨울 내내 쿠마르스크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충분한 장비 없이 요새화된 시설을 공격하는 것이 멍청한 짓이었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겨울 동안 요새를 포위하고 앉을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상황도 아니었는데 너무 오래 쿠마르스크 요새를 방치한 결과 스테파노프는 본국의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등 힘을 키워 나갔고 결국 이듬해 봄 완전히 세력을 회복해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러시아 원정대가 활동을 재개하자 청나라는 뒤늦게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다시 병력을 파견했다. 이 토벌군의 지휘관은 밍안다리였는데 밍안다리가 이끄는 군사들은 베이징 수도 방위를 맡은 군사 3,000명이었고 대포도 15문을 동원했다. 반면 쿠마르스크 요새의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원정 도중 만나 새로 합류한 베케토프 중위 휘하의 기병대를 합해도 5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청군은 또 패배했다. 밍안다리는 쿠마르스크 요새를 포위하고 3개월 간 공략하였으나 러시아군은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농성했다. 예상보다 공성이 너무 오래걸리게 된 탓에 식량 보급이 부족해지자 결국 밍안다리는 요새 공략을 포기하고 북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이라도 충분했다면 그냥 무한정 눌러 앉았겠지만 상술했듯 아직도 명청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기에 청나라는 전선에서 한참 뒤에 있는 만주 구석까지 보급을 제대로 보내줄 역량이 없었다. 이 와중에 스테파노프 원정대의 기습 출격을 맞고 대포 2문과 상당량의 화약을 노략당하는 굴욕까지 겪은 것은 덤.

청나라도 마냥 가만히 눌러 앉아서 항복을 기다린 것은 아니고 러시아 원정대가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한다는 것을 파악해 원정대의 활동 반경 내에 있는 원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남겨진 물품과 식량은 싸그리 회수하는 등 원정대의 보급을 말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청 측의 보급이 먼저 끊긴 바람에 요새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5.3. 샤르후다의 2차 토벌

결국 청나라는 1658년 대규모 토벌을 다시 계획했다. 이전 토벌에서 큰 전공을 올린 샤르후다를 총지휘관으로 선임했고 이번에도 조선에 파병을 요구해 포수를 지원받았다. 파병된 조선군의 지휘관으로는 혜산진첨사 신유가 임명되었다. 신유가 이끈 포수들은 지난번 1차 나선정벌 때의 2배인 200명이었지만 이전 정벌보다도 더 착실하게 준비한 것에 비해 샤르후다의 2차 정벌은 시작부터 뭔가 순탄치 않고 온갖 기이한 일이 생겨 큰 방해를 받게 되었다.

당장 조선군을 안내할 청나라 통역관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고 통역관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한 조선군은 발을 맞추려 급히 행군하느라 도중에 말이 쓰러저 죽고 물자는 진흙탕에 빠지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5월 6일에 가서야 닝구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간신히 닝구타에 도착한 신유는 그대로 샤르후다와 합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샤르후다는 이미 출동한 상태라 제대로 지휘를 받을 수 없었다. 신유는 적에 대해 제대로 설명도 못 받고 그저 아무르강과 송화강 근처의 오랑캐(왈가, 나나이족[25])들의 정세를 궁금해하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5월 10일에 가서야 샤르후다의 주둔지로 행군할 수 있었는데 이 행군길도 비가 잔뜩 내려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조청 연합군은 왈가족 사공이 모는 왈가족 배를 징발해 송화강 어귀까지 이동했는데 5월 15일에 가서야 도착했다. 5월 14일 왈가족 사람 4명이 청군과 조선군에게 러시아군이 아무르강 어귀에 도착했음을 알렸는데 이때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투입될 선박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북경, 선양, 닝구타에서 장수들이 파견되고 선양에서 지원군이 오며 북경에서는 잠수병이 온다고 해 놓고 막상 현지에 와 보니 아무도 안 왔기 때문에 신유는 토벌이 틀어지는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0일까지 조선군은 그곳에서 머물며 사격 훈련을 진행했다. 이때 나나이족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난번 전투에서 적군이 조선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보았습니다. 그 일 이후로 도적들은 말끝마다 머리가 큰 사람이 두렵다고 했습니다."라고 전한다.[26] 즉, 대두인은 나나이족이 벙거지나 전립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머리가 커보이는 조선군을 부르는 표현이었는데[27] 이들과 러시아가 교류하면서 러시아 역시 조선군을 대두인이라 칭하게 되었다.

5월이 다 지나고나서야 청나라의 후속 병력들과 작전에 필요한 선박들이 도착했다. 땟목 120척 타고 작전해야 했던 이전 토벌과 달리 2차 토벌에선 청나라도 제대로 된 군함을 동원했다.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전선은 총 42척으로 판옥선이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튼튼했으며 지붕이 없고 단청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형 함선은 36척이었고 소형 함선은 12척이었다. 코르벳카라벨로 구성된 러시아 원정대의 선단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규모로, 이전 원정에서 수상 전력 부실로 인해 육상 전투를 벌인 결과 러시아 원정대가 요새로 도망쳐 틀어박히는 상황이 벌여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예 수상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해 결딴낼 작정을 한 것이다.

샤르후다는 전선 한 척마다 조선 포수를 5명씩 탑승시키고 청나라 갑군을 한 척마다 25명씩 탑승시키는 식으로 부대를 정리한 뒤 6월 5일 진격했다. 갑군은 갑옷을 걸쳐 입고 창칼과 활로 무장했으며, 등패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며칠 동안 나아가 열벌마을에 도달했고 6월 10일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났다. 이들은 아무르강 어귀를 지나 20리쯤 가서 러시아 함대와 마주쳤다.

러시아 함대의 규모는 총 전선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러시아 범선들은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조청연합군의 함대가 다가오자 닻을 올리고 돛대를 세워 10리쯤 물러난 뒤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군은 그곳에 머물며 지붕 위로 올라가 조청연합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함대는 적선과 한 마장(400m) 정도로 가까워지자 포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러시아군도 응사했다. 이때 청군이 아직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던 전선까지 모조리 한번에 밀어넣어 러시아군에게 활, 대포, 작살[28], 총 등으로 공격을 가하자 범선 위에서 총을 쏘던 러시아군은 버티지 못하고 배 안이나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다.

이에 청 전선들이 러시아 범선들을 포위하고 쇠갈고리를 던져 배들을 끌어당겼고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타 배를 태우고자 했다. 이때 샤르후다는 러시아 배에 실린 많은 물건을 탐내 화공 대신 승선을 명령했다. 조선군이 적선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조선군들이 탑승했던 배의 포수와 사수들 모두가 러시아 배로 옮겨 탔다.

이때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빈 청 전선에 올라타 강가를 따라 상류로 끌고 갔는데 중국식 정크선을 처음 몰아본 탓에 조종하는 법을 몰라 일부 인원들이 강가에 상륙하여 뱃줄을 잡고 배를 끌고 가는식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면 사실 전원 뛰어내려 달리는 게 더 좋았겠지만 청군이 사전에 영곡성 일대를 소개시키고 청야전술을 펼쳐 둔 탓에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 원정대는 선박에 실린 물자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뒤에 있던 배들이 일시에 도주중인 러시아 원정대가 끌고가던 선박을 추격했는데 선두의 배에는 신유가 타고 있었다. 배 여러 척이 러시아군이 탈취한 청나라 배를 포위하자 뱃줄을 끌던 러시아군들이 숲 속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배 위에 갇혀 버린 나머지 러시아군은 청나라 갑군들이 뛰어들자 4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전멸했다.

그동안 청 전선 위에 있던 포수와 사수들은 풀숲으로 도망친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가했는데 러시아군이 응사, 청군과 조선군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화공을 위해 올라탔다가 샤르후다에게 저지당한 포수들도 아군 전선으로 돌아간 뒤 배 안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튀어나와 연달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사망자는 7명으로 이름과 출신은 길주의 윤계인과 김대충,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과 유복, 온성의 이응생이며 러시아군의 총격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후 청나라의 갑군과 사공들에게도 계속 사상자가 나왔는데 결국 샤르후다는 러시아 함선의 물자를 노략해 보급에 보태려던 생각을 접고 화공을 가해 러시아 함선 7척을 불태웠다. 이후 청군은 청 전선 3척은 닻을 내리고 적선을 감시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맞은편 기슭에 모이게 하고 밤을 샜다. 샤르후다는 괜히 보급품 다 태워먹었다가 러시아 원정대보다 먼저 굶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기어코 적선 4척만은 태우지 않고 나포하는데 성공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샤르후다의 2차 나선 정벌군의 러시아 원정대 선단 급습은 대성공이었다. 러시아 원정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선박도 전부 불타거나 나포당하는 등 그대로 풍비박산나 버렸다. 어찌어찌 구한 배 한 척에 생존한 사람들이 탄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생존한 군인 중 하나인 페트릴로프스키가 남긴 기록을 통해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페트릴로프스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했으며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80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을 실은 배 1척에 생존자 95명만 태우고 탈출했다고 한다. 페트릴로프스키가 연합군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중국 범선 47척이라고 했다.

야전 축성물의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했던 1차 정벌은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대신 러시아 원정대의 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원정대의 도주를 원천 차단하는데 성공한 2차 정벌은 성과는 훨씬 대단했지만 그만큼 조청 연합군에서도 사상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7명, 중상자는 25명으로 경상자까지 포함하면 상당한 피해를 봤다. 부상자 중 온성 출신의 이충인은 부상이 덧나 사망했다. 조선군뿐만 아니라 청군도 전투에서 총 80여 명이 전사했고 사공도 30여 명이 사망한 데다 부상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샤르후다는 전사자들을 화장할 목적으로 나포한 러시아 함선 1척을 내주었지만 신유는 거절하고 강가에 매장했다.

전투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 함선에서 부싯돌이나 러시아 총 등을 노획했는데 샤르후다는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던 담비 가죽을 모조리 챙긴 것도 모자라 조선군이 챙긴 총과 부싯돌도 싹 빼앗아 회수했다. 이때 나포한 러시아 함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신유의 표현에 따르면 러시아 범선은 몸체가 크고 갑판 위는 모두 널빤지를 둘렀으며 배 위에는 방을 세워 두었는데 넓은 널빤지로 서까래를 만들어 작은 나무 엮은 것을 얹었고 그 위에 벚나무 껍질을 씌운 뒤 그 위에 또 흙을 깔고 또 두꺼운 널빤지를 덮었기 때문에 "살림집도 이만큼 튼튼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어 배 위의 집이 이 정도로 튼튼한데 배 또한 바닥이 통나무에 홍이포로 공격해도 잘 부서지지 않는 데다 갑판 주위를 두꺼운 나무로 두르고 있어 만약 적이 배 속에 숨거나 육지에 내리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배 위에서 싸웠다면 승부를 가리기가 만만찮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 10여 명이 빠져나와 조선군과 청군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샤르후다는 이들을 배에 나누어 수용하고는 갑군과 포수들을 시켜 수풀을 뒤져 생존자를 찾아 보라고 명했으나 이들 외에는 모두 총알과 화살에 맞아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이때 조청연합군을 안내했던 왈가족과 나나이족은 러시아군의 시체에 칼질을 하면서 보복했다.

영곡성까지 오는 데도 큰 고생을 했던 조선의 파병군은 철수할 때에도 곤욕을 치러야 했는데 샤르후다가 사전 통보 없이 조선군의 주둔 기간을 연장해 버리는 바람에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이 바닥나 버렸다. 신유는 샤르후다에게 요청하여 군량미를 빌렸지만 샤르후다는 조선군이 원래 조선에서 들고 왔던 군량미의 절반 수준만 빌려준다. 여기까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군량미를 옮길 때 부주의했던 탓에 배에 새어들어온 물에 군량 중 30% 가량이 썩어 버렸다. 장작도 충분히 보급받지 못한 탓에 조선군은 떨어질 때마다 청군에게 사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유는 끊임없이 청나라 수석 통역관에 러시아 총을 전리품으로 들고 가게 해 달라고 샤르후다에게 요청했는데 샤르후다는 계속된 간청을 이기지 못해 러시아 총 한 자루를 내준다. 청군이 노획한 총기는 수백 정이었고 샤르후다는 이걸 전부 챙겨 청나라의 무기고를 불릴 작정을 하고 있었기에 전리품을 내주는데 굉장히 인색했다.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청군도 보급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차 정벌에 너무 많은 물자를 동원했고 피해도 상당했던 탓에 뭐라도 잔뜩 챙겨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해서 1차 정벌에 비해 인색한 대우를 했다. 그래도 모피 따위를 조금 챙겨줄 수는 있었을 텐데 그냥 묵살하고 맨손으로 돌려보낸 것은 너무한 수준이었다.

신유는 당시 러시아 총기가 수석식이었기 때문에 화승 없이 쇠붙이와 부싯돌로 일으킨 불꽃으로 사격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다고 적었다. 조선군은 8월 27일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2차 나선정벌이 종결되고 한동안 러시아 원정대의 패악질이 사라지게 된다.

6. 성과

1차의 경우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루스 차르국 소속 카자크들은 조선 포수의 위력에 놀라서 그들을 대두인이라고 말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머리 크다는거 아닌가[29]

2차의 경우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불화살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군은 조선군을 선봉으로 세우려고 했는데 조선군은 작은 자피선만 가지고 있어서 러시아의 큰 군함에 대응할 수 없어 취소되었다. 방심하고 배에서 대기를 하던 러시아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불을 저질러 큰 혼란을 주는 방법으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7명[30]을 냈는데 전사자가 나온 경로가 황당하다.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배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뻘짓을 해야 했다. 그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나포한 러시아 함선에 올려 화장하면서 강에 떠내려 보낼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진 못할 망정 이국에서 그것도 이국의 배와 함께 태워 가라앉게 할 순 없다고 하며 근처에서 매장을 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북방으로 밀려나 더 이상 조선군이 파병되지는 않았으며 한동안 북쪽에서 대치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7. 평가

효종의 북벌 정책 가운데 그나마 가시적인 성과이기도 하지만 당대에는 누구와 싸워 이겼는지도 불확실하고 소규모 전투였으며 청나라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점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결국 북벌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선정벌이 조선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 일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사실 조선은 나선정벌을 통해서 얻은 이익은 없었다. 실전경험을 얻었기는 했지만 알다시피 북벌론이 실제로 실현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의 퉁구스계 민족들에게는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 만주족은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고 나나이족·어웡키족 등 만주의 다른 퉁구스계 민족들은 나선정벌 당시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몽골계 민족들 중에서도 내몽골과 만주 서부의 차하르인들은 만주족에 이어 청나라의 제2의 지배민족이었기 때문에[31] 나선정벌에 대한 인식이 만주족 수준으로 좋은 편이며 다우르족도 조상들이 루스 차르국의 약탈에 시달린 역사 때문에 나선정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32] 오늘날 만주의 퉁구스계, 몽골계 민족들 중 친한 성향인 이들은 나선정벌을 자기 민족과 한민족의 좋은 인연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8. 기타

9. 미디어에서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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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어기를 제외하면 당시에 사용된 깃발들은 아니다.[2] 러시아의 극동도시 하바롭스크는 그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3] 따라서 현 북한 나선시(羅先市)와는 관련 없다. 나선시는 나진과 선봉의 행정구역 합병을 통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나진이란 이름은 벌나루의 훈독으로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명이다.[4] 국내의 반란 세력이나 외적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은 평화로운 세상이 부정한 적들로 인해 흔들린다는 의미에서 '난리' 내지는 '요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난(亂)'이나 '요(擾)'로 불렀다. 임진왜란이나 병인양요가 대표적인 예시.[5] 당시엔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지 않은 상태라서 조선은 러시아와 접경국이 아니었고 러시아가 뭔지도 잘 몰랐다. 조선이 러시아와 접경하게되고 본격적으로 신경쓰게 된 것은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이다.[6]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고치지 않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조청전쟁'으로 고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표현을 바꾸면 당대 사건에 대한 왜곡이 들어갈 우려가 있다는 뜻에 따라 바꾸지 않고 있다. 이렇다보니 당대 불렀던 정식 명칭이 없는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같은 경우 사람에 따라 매체에 따라 온갖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 부작용이 있다.[7] 주교가 다스리는 가톨릭 교회의 세속 영지. 교구들이 오늘날처럼 단순히 지역의 성당과 신자들만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영주로써 아예 일대를 통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교령을 다스리는 주교를 특별히 주교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8]라트비아의 수도.[9]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10]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와 레닌그라드 주 일대[11] 이때 모스크바 시민 수만 명이 크림 칸국에 노예로 잡혀갔다.[12] 스웨덴이 덴마크로부터 예테보리를 지키기 위해 들였던 노력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노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13] 단, 이반고로드 일대의 잉그리아는 1595년 테우시나 조약으로 반환했다. 대신 스웨덴은 핀란드의 사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14] 러시아의 대부호 가문. 요리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만든 그 가문이다.[15] 훗날 이 강변에 세워지는 도시 하바롭스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청은 이들을 조롱조로 "대비 달자"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달자는 타타르를 일컫는 한자어인데 원정온 러시아인들도 대부분 코사크라서 기마술에 능했고 또 서양인이라서 코가 높고 크다보니 큰코 타타르라고 불린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코사크들이 조선 북부까지 침입해서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는데 이때도 가살극이라는 음차명 말고도 조선사람들이 똑같이 대비 달자라고 불렀다고 한다.[17] 무슨 탑 이름 같지만 한자로 가차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고 만주어로는 6개라는 뜻이다.[18] 말할 것도 없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말한다.[19] 현대에 와서는 남시베리아에서 대규모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건 흐루쇼프 집권기인 1950~60년대에 대규모 인력과 농기계 등을 동원해서 대대적으로 개간한 결과로 화학비료, 농기계 온실농업 기술 등을 동원한 현대 과학의 승리다.[20] '그나마' 농사가 가능했다는 거지 곡창이란 소리가 아니다. 헤이룽장성 일대의 농경지는 근대 들어 과학의 힘으로 개간하기 전까지는 매우 험악한 늪지대였다. 중국도 이곳을 개발하기 위해서 수만 명의 목숨을 흩뿌려야 했다. 근대 러시아 제국대한제국과의 무역에 신경을 썼던 이유도 한국에서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극동 경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1] 단, 청군은 이번에도 현지 원주민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순수 청나라 정규군과 조선군만의 연합부대는 아니었다. 나선정벌의 무대가 되는 아무르강과 송화강 유역의 원주민들은 문명 발달 수준은 많이 뒤떨어졌지만 만주족처럼 기마민족인 경우가 많아 무장의 수준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22] 변급이 효종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자피선 중 작은 것은 너댓 명 밖에 탈 수 없었고 큰 것도 17인승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23] 여담으로 아까부터 조선 포수들이 청군과 떨어져 저격 임무만 맡는 이유는 청군과는 편제에 차이가 있어 따로 움직이는 것이 편리할 조선군의 수가 청군보다 작아서 최적의 효율을 내려고 한 이유도 있으나 약 30% 대의 명중률을 보이는 청군 조총병보다 약 6~70%라는 압도적 명중률을 보이는 조선군 조총병들이 저격 임무를 감행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청군도 당시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작전을 준비한 것이다.[24] 헤이룽장성 다싱안링지구 후마현(呼玛县). 후마라는 이름 자체가 쿠마르스크라는 이름에서 기원한다. 이곳은 아무르강 강변에 있는데 강 건너는 러시아 영토이고 강 건너에는 동일한 이름에서 기원한 '쿠마라'(Кумара)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25] 허저(赫哲, 혁철)족이라고도 한다.[26] 신유북정일기 중.[27] 실제로 조선 사람들을 만난 서양인 대부분은 조선 사람들이 쓰는 챙이 넓은 모자가 인상에 깊게 남았던 건지 유독 모자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28] 전투가 끝난 뒤 도착한 다른 러시아 원정대의 보고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피 묻은 작살이 나무에 박힌 것을 많이 발견했다고 한다. 투창이 사용된 듯하다.[29] 사실 진짜 머리가 크다는 뜻에서 붙인 별명인데, 조선인이 당대 러시아인에 비해 딱히 대두여서 붙은 건 아니고 조선군 특유의 전투모인 전립(흔히 사또 모자라고도 한다)의 생김새가, 멀리서 보면 머리가 엄청나게 큰 것으로 오인하기 쉽게 생겨서 그렇다.[30] 다음은 전사자 명단이다.
길주 출신 김대충, 윤계인
부령 출신 김사림
회령 출신 정계룡
종성 출신 배명장, 유복
온성 출신 이응생
+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상을 입었던 군기시 관헌 이충인이 숨졌기에 전사자를 8명으로 보기도 한다.
[31] 원나라로 치면 색목인과 비슷한 케이스다.[32] 중국의 다른 몽골계 민족인 부랴트인, 토르구트인(오이라트계 민족), 보안족, 둥샹족 등은 역사적으로 나선정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나선정벌에 대한 인식은 중립적인 입장에 가깝다. 현 몽골국의 전신은 외몽골의 할하인이기 때문에 역시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몽골과 러시아의 전체적인 관계부터가 좀 미묘하긴 하다.[33] 몽골어로 러시아가 오로스다.[34] 단, 1차 정벌을 다녀온 변급이 나선은 서양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하자 효종이 서양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나선이 서양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긴 하다.[35] 사실 카자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카자크는 해전에도 강했다. 잠깐이나마 흑해의 제해권을 잡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교외 지역까지 쳐들어가 방화를 했던 적도 있을 정도이다.[36]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조선군이 실시한 산병전이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몇 배나 더 많은 청군의 엄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애초에 유럽 국가들도 전열보병 이전 파이크 앤 샷 진형으로 전쟁할 때 다들 해 본 거다.[37] 끓였다는 표현을 보면 모주로 추정된다.[38] 당시의 플린트락을 조선의 조총과 비교해 보자. 아직까지는 동아시아(조선이나 청, 일본)의 수준이 유럽에 비해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는 수준이다.[39] 다만 그 작은 차이가 중요했는데, 더 빨라진 장전속도와 취급의 용이함은 보병의 화력이 더 강해지는 효과를 낳으면서 총검의 발명과 함께 전열보병 전술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40] 일반적으론 흑요석이나 플린트 등의 패각상 깨짐이 나타나는 광물들이 쓰였다. 한편 프로이센 왕국군은 이들 광물을 구하기 힘들어 대체품으로 마노를 사용했다. 깨지는 특성상 이들 부싯돌들은 여러 번 쓴 뒤에는 갈아줘야 하는 소모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 브라운 베스 머스킷은 대략 20발 쏘고 난 뒤에는 부싯돌을 교체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이런 질좋은 부싯돌은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병사들이 몰래 팔고 값싼 부싯돌로 바꿔끼우는 등 군기관련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중국엔 세계 주요 부싯돌 매장지 중 두 곳이 위치해 있고, 한국엔 부싯돌의 주요 성분 그 자체인 석영 광산이 있어 공급하기로 마음을 먹고 광산을 확대했다면 문제는 없었겠으나 정작 실행하지는 않았고, 일본에는 이런 좋은 부싯돌 자원이 거의 없었기에 플린트락을 도입하는 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41]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우방국이라 미국제 무기를 다량으로 구매하기도 했다.[42] 출처 '내가 본 조선 조선인' 中 카르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