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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20

초원복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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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3. 사건 당일4. 언론의 편파적 보도5. 영향6. 사건 이후7. 재판
7.1. 당시 판례7.2.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 변경
8. 배경이 된 초원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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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12월 11일 부산광역시(당시 부산직할시) 남구 대연동복어 요리 음식점인 '초원복국'에서 현지의 정부 기관장들이 모여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지역감정대놓고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도청에 의하여 드러난 사건. 이 사건에 대한 폭로는 대통령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둔 1992년 12월 15일에 터졌으며 국민당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고 있던 김동길이 언론에 발표하였다.[1]

2. 발단

1990년3당 합당으로 TK+PK+충청 vs 호남의 유리한 지역 구도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데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집권 여당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를 선출한 노태우 정부의 여당 민주자유당으로서는 손쉬운 선거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2년 3월에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또 다시 뒤엎고 친여 무소속+통일국민당의 선전으로 인하여 민자당은 의석 수가 대폭 줄어들어 의석 과반수(150석 이상)를 불과 한 석 차이로 확보하지 못하는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당시 민자당의 전국 득표율이 38.5%, 민주당은 29.2%, 통일국민당은 17.4%였고 기타 신정당·민중당 등이 3.3%를 기록했으며 이마저도 군인표 부정이 아니었으면 130석대로 의석수가 떨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올 판에 영남권에서조차 민자당의 득표율이 과반을 넘긴 곳은 부산 딱 한 곳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민자당을 탈당한 무소속 당선자 일부가 선거 이후로 민자당으로 복당하여 국회의석 과반을 겨우 채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민자당은 차기 대선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1992년 5월 김영삼이 당권 장악에 이어 대권 후보로까지 결정되었지만 민정계의 기반인 TK 지역에서 반(反)YS 정서가 퍼져 안심할 수 없었다. 1990년 3당 합당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는 사실상 민주계-민정계가 따로 논다고 봐도 될 정도로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으며, 14대 총선에서도 대구에서 민자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통일국민당이 28%의 득표를 획득하고 2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등 선전하였다. 서 갑에서는 친여 무소속 정호용이 과반으로 압승하면서 민자당 문희갑 후보는 30%에도 못 미치는 득표를 기록했으며 대구에서 얻은 민자당 득표율이 부산에서 얻은 득표율보다 낮았다. 그나마 경북에서의 민자당 득표율은 경남에서의 득표율보다는 다소 높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무소속이 상당히 선전하여 14대 총선에서의 민자당 참패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정호용, 강재섭, 김용태, 이상득, 김윤환, 금진호 등 김영삼을 지지하기로 한 민정계(이른바 민주계) 일부 인사들은 대선 때 대구, 경북 지역을 돌며 "유일한 대통령감은 김영삼뿐"이라며 같은 경상도 정서를 드러내며 유권자들에 지지를 호소했다. 사실 이때부터 민자당은 지역주의를 이용하여 영남권의 표 결집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PK 지역도 부마민주항쟁의 사례[2]에서 알 수 있듯이 정권 교체의 목소리가 언제 터질지 몰라 아무래도 불안했던 데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여러 불리한 조건에서도 지지율 1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오면서 김대중과 지지율 격차가 크게 줄어든 데다 울산(당시 경남 소속)과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정주영의 지지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3] 실제로 대구, 경북 지역의 반YS 정서를 간파하고 대선 구도 제3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정주영이었는데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후 김복동, 박철언, 유수호[4]를 위시한 민정계 인사[5]는 물론 심지어 김광일 같은 민주계 인사들까지 대거 영입하여 경상도 표심을 노렸다.[6]

3. 사건 당일

파일:external/imgdata.hoop8.com/295987978876.png

△ 참가자 명단

제14대 대통령 선거김영삼 - 김대중 - 정주영 등 사실상 3자 구도로 재편되어 치르게 되었다.[7] 대선 기간 내내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20% 초중반에서 초접전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정주영도 여론 조사상 지지율은 그리 높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부동층을 감안한다면 좀처럼 무시하지 못할 수치를 보여주었고, 박찬종도 7-8%를 오가는 지지율을 보이며 정말 안갯속 선거 구도였다.

그리고 대선을 불과 1주일 앞둔 12월 11일, 김기춘[8]현직 법무부장관이 관여한 사건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해 10월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한 후 현승종 총리를 중심으로 한 중립내각을 구성하였기에 김기춘은 자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었다.] 법무부장관이 부산에 내려가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직할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의 지역 주요 기관장 9명을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복어 요리점인 초원복국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남이가", "부산, 경남, 경북까지만 요렇게만 딱 단결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5년 뒤에는 대구 분들하고 서울 분들하고 다툼이 될는지... 그때 대구 분들 우리에게 손 벌리려면 지금 화끈하게 도와주고...", "지역감정이 유치할진 몰라도 고향 발전엔 도움이 돼.",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 일으켜야 돼." 등의 발언이 나왔다. 녹취록 전문.[9]우리가 남이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일:external/thesisaviewtimes.com/2049262339_VqgJ9prw_ECB488EC9B90EBB3B5EAB5AD.jpg

△당시 사건이 벌어진 장소인 부산 남구 대연동[10]에 위치한 초원복국. 수영구 남천동에 위치한 민주자유당(現 국민의힘)의 부산시 당사 인근의 복어 요리 전문점이다. 링크, 네이버 지도, 카카오맵.

이 발언은 정몽준 당시 통일국민당 정책위원회 의장 밑에 있던 선거운동원들이 초원복국에 미리 설치해 둔 비밀 녹음기에 각 인사들의 대화 내용을 녹음했고 이를 각 언론사에 전달하여 폭로되었다. 당시 최초 보도한 모 언론사는 회사 문 닫을 각오로 보도했는데 전혀 엉뚱하게 대통령 비서실에서 '잘했다'고 격려 전화가 왔다고 한다. 후술하듯이 언론 보도 후 사건의 프레임이 집권 세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 언론의 편파적 보도

해당 폭로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김영삼 후보 측을 곤란하게 만들 의도였지만 당시 주류 언론들은 집권 여당이 의도한 대로 핵심을 '공권력의 선거 개입'이나 '지역감정 유발 기획'이 아닌 '불법 도청'에 맞추고 연일 보도하여 김영삼의 당선을 도왔다.[11] 언론의 프레임 선정 전략과 의제 설정의 힘을 보여준 단적인 예였던 것. 당시는 인터넷도 없었고 대안 매체의 존재 자체도 미약한 시절이었다 보니 이런 몇몇 대형 신문들끼리의 권력과 영향력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공권력의 선거 개입'을 부정하고 불법 도청에 포커스를 맞추는 언론 플레이에 앞장섰던[12] 조선일보는 당시 사설에서 '기관장 모임을 도청함으로써 통일국민당은 선거 전략상 호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공 사회와 국민 생활에 미칠 정보정치의 악영향을 고려할 때 도청 행위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일보는 대선 당일인 12월 18일자 기사에서도 "'부산 사건'은 음해 공작, 기필코 승리"라는 제목으로 김영삼의 '나는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는 말을 대서특필하여 전했다.

심지어 소설가 이문열까지 자신이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소설 <오디세이아 서울>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독특한 해설을 내놓았다. 이문열은 그것은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었다는 점, 주재자가 현재의 내각과는 전혀 무관하고 모임의 형식도 아침 식사를 겸한 사적인 성질의 것이며, 내용도 사담 수준으로 전혀 어떤 결정력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 "장교 몇이 모여 아침을 먹으며 어떤 후보를 돕기 위한 사적인 논의를 했다고 해서 '군부회의'라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더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히 그 도청의 경위와 방법"이라고 적극 실드를 쳤다. 참고로 이문열은 훗날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1987년 대선에서는 노태우에게 표를 던졌으며 1992년 대선에서는 김영삼을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5. 영향

1992년 대선의 결과를 예상 외의 방향으로 규정 지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 이 때문에 정주영 후보 측이 오히려 역풍을 맞아 이후 경상도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하면서 결국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가 기관 관계자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해야 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음에도 경상도 유권자들의 표심이 그 당사자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여 울산을 제외한 경상도 전체가 김영삼 후보로 표심을 결집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폭로한 정주영 진영은 경상도 표를 잠식하지 못한 것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에서도 기대 이상의 표를 얻지 못하고 패했다. 안티 김영삼 정서로 인해 선전할 줄 알았던 TK 지역에서도 선거 막판 지역주의를 무기로 한 표심 결집으로 인해 김영삼 후보(TK지역 약 62%)에 밀려 2위(약 17%)를 기록했다. 특히 김영삼의 최대 지지 기반이자 사건의 발단이 된 부산에서 참패했는데 9개월 전 14대 총선 결과와는 달리 김대중 후보(12%)는 물론 PK 출신인 박찬종 후보에게조차 근소한 차(0.24%, 약 6천여 표 차)로 밀리며 6.3%를 얻는데 그쳐 4위로 마감했다.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전국 여론조사 결과 부동층이 무려 30%가 넘고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각각 24%와 25%의 지지율을 기록하여 각각 승리를 자신했던 특이한 선거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선거가 끝난 뒤 불법 도청한 정주영 후보 측 사람들은 전부 주거침입 등의 죄로 처벌 받았고 현대그룹의 자금줄이 2년간 묶였다. 훗날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가 되는 이해찬은 당시 민주당 선거기획 쪽에 있었는데 그는 후일 이 사건으로 정권 교체가 5년 뒤로 미루어졌다고 평하였다. 다만 PK가 군부독재 시절 비집권당 후보를 지지한 전력이 있더라도 YS가 3당 합당에 참여한 후 치른 14대 총선(1992년 3월 24일)에서는 경상도에서 민주당이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등 지역감정이 뿌리 깊었기에 이 사건만으로 모든 것이 뒤집혔다고 보긴 어렵다.

6. 사건 이후

초원복국에서 불법 선거운동 모의를 했던 사람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 받기는 개뿔이고 이후 다들 한 자리씩 해먹었으며 정권 주요 보직들은 PK 중심으로 도배되며 군부정권 종식과 민주화가 이뤄졌음에도 30년 가까이 이어진 영남 독식은 계속되었다. 물론 TK에서 PK로 바뀐 데다 문민정부의 성질도 이전 군부정권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TK는 상실감이 들었는지 여당 내 분쟁이 거세지긴 했으며 문민정부 출범 이후 대구에서는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이 한 번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다. 신한국 TK-PK"불화". 그나마 저항의 여파로 신민주계를 중심으로 TK 일부도 살아남긴 했기 때문에 득세하던 PK까지 더해 당시 기관들 내의 주요 보직 중 영남 전체 지분은 40~50%를 웃돌기도 했다. 수도권 편중 현상이 심화되던 당시의 인구 대비로 보면 많긴 하다.

처음부터 자기 밑에 있었던 검사들을 압박하여 참여한 부산시 지역 인물들을 김기춘이 주최한 사적 모임이라고 주장해 불기소처분하고 주동자인 김기춘만 기소되었는데, 김기춘은 이 사건에 적용된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했고 이에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자동으로 기소가 소멸되었다. 자신이 유신 시대에 수많은 정치인들을 옥죄었던 그 선거법을 자기가 걸리게 생기자 없앤 꼴. 전형적인 프레임 전환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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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김영삼 내각에 들어가는데는 실패했지만[13] 1994년에 나름 땡보직KBO 총재로 내려갔다가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김영삼의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그 후 3선 의원이 되었다.

사족으로 군부정권을 평생 혐오한 YS가 유신헌법을 만들고 독재 정권에 빌붙어 산 김기춘은 같은 장목면 출신경남고-서울대 후배라고 예뻐라 했다고 한다. 유신헌법 만든 줄 몰랐나 하여튼 이후 김기춘은 16대 국회 하반기 법사위원장이 돼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밀어붙이다가 실패했고 17대 국회를 끝으로 친박계 숙청에 따라서 은퇴할 것으로 보였지만...

이런 지역감정 조장 전력에도 2013년에는 윤창중 사건의 여파로 인하여 발생한 허태열 비서실장의 조기퇴진으로 인해서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2015년 2월 22일까지 재임했다. 하지만 비서실장 재임 시절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여론몰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등의 각종 공작 정치, 사건을 진두지휘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도 깊게 관여한 것이 드러나면서 결국 인생 말년에 구속수감되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사필귀정?

파일:external/www.ccourt.go.kr/img_judge12.jpg

정경식[14]은 사건 직후 초임 검사장이 주로 가는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으로 밀려났으나[15] 1993년 가을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1994년에는 무려 헌법재판관이 되었으며 임기 6년을 마치고 2000년에 무난히 법복을 벗었다. 정경식은 김기춘보다 나이가 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사법고시에 늦게 붙었기에 김기춘이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하는 동안에 부장검사와 검사장을 지내고 있었다.[16]

박일용은 중앙경찰학교장, 해양경찰청장,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거쳐 1994년 경찰청장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저 사건이 터진 게 1992년 12월이고 박일용이 경찰청장으로 승진한 게 1994년 12월이었으니 2년 동안 경찰에서 승승장구한 셈. 이후 박일용은 경찰청장에서 퇴임하고 안기부 1차장[17]으로 다시 영전했다. 이후 문민정부에서 동시기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 등과 함께 각종 정치공작에 관여했다가 총풍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게다가 이 사건 담당 수사 검사였던 김진태와 정홍원은 각각 검찰총장, 국무총리(2013~2015)까지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반면 이 사건을 사실상 기획한 주역인 정몽준은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강도 높은 정치보복[18]에 시달려야 했고 견디다 못해 현역 국회의원임에도 정치판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겠다는 제스쳐를 취해야 했다. 그 제스쳐로 정몽준이 택한 것은 바로 정치 대신 축구에 힘쓴 것. 김우중에 이어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취임한 정몽준은 침체 상태였던 한국 축구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2002 월드컵 유치까지 성공시키는 등 축구계에선 몽느님으로 등극했다. 월드컵 유치 효과로 인해 2002년엔 유력 대권주자 반열에까지 올라섰으니 문민정부 시절 몸 사리기가 나름 성공한 셈. 하지만 총리를 약속 받은 대선 하루 전 날에 노무현 후보와 갈라서는 뻘짓[19]을 저질렀고 덕분에 민주당과 척을 져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그리고 한나라당 대표로서 지휘한 2010년 제 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대권주자의 꿈은 날아갔다. 게다가 2014년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몽주니어와 정몽즙 건으로 웃음거리가 되었고 정계를 떠났다.

이 사건으로 경질된 김영환 부산시장은 이후 부산교통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수사기관과 언론이 비밀의 내용보다 비밀의 유출 경로에 주목하였고 결국 내용이 묻혀 버렸다는 점에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이러한 일련의 여론 흐름 자체를 김기춘의 작품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용의자들이 태블릿 PC를 계속해서 걸고 넘어진 것도 김기춘의 기획일 거라는 세간의 추측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7. 재판

7.1. 당시 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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刑事訴訟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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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1997. 3. 28. 선고 95도2674 판결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공1997.5.1.(33),1289]
【판시사항】
[1]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하여 음식점에 들어간 행위의 주거침입죄 성부(적극)

[2] 불법선거운동 적발 목적으로 도청기를 설치하기 위하여 타인의 주거에 침입한 행위의 정당행위 성부(소극)
【판결요지】
[1]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 하더라도,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하여 들어간 것이라면 주거침입죄가 성립되는바, 기관장들의 조찬모임에서의 대화내용을 도청하기 위한 도청장치를 설치할 목적으로 손님을 가장하여 그 조찬모임 장소인 음식점에 들어간 경우에는 영업주가 그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경험칙에 부합하므로, 그와 같은 행위는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

[2] 타인의 주거에 침입한 행위가 비록 불법선거운동을 적발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주거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행위는 그 수단과 방법의 상당성을 결하는 것으로서 정당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판례는 형사법상 구성요건해당성 배제사유인 '양해'가 결여되었다고 판단한 사례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 판례의 주문과 이유 부분에 대해서는 판결문 전문을 참조 바람. 판결문 전문.

이 판례에서는 불법 선거운동을 한 사람들이 아닌 도청을 한 정주영 후보 측 선거 관계자에 대한 형사 판례가 오히려 부각되었는데, 첫번째 이슈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 하더라도 영업주의 명시적 혹은 추정적 의사에 반한다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는 점이고 두번째 이슈는 도청 당사자는 도청 행위가 정당행위라고 주장하였지만 법원은 불법 도청 행위가 사회적 상당성을 결한 행위로 정당 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첫번째 이슈에 대한 판례를 비판하는 입장은 적어도 출입 당시 주인은 들어오는 손님을 쫓아낼 의사는 전혀 없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사실상 평온을 누리는 자의 승낙이 존재하고 이는 범죄의 위법성을 조각시키므로 주거침입죄는 무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학설의 대다수는 적어도 출입 당시 주인은 들어오는 손님을 쫓아낼 의사는 전혀 없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주거침입죄에서 사실상 평온을 누리는 자의 양해가 존재하므로 주거침입죄는 구성요건 해당성에 대하여 무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위법성 조각 사유로서 승낙과 양해는 구별되고 하자 있는 승낙은 효력이 없으나 하자 있는 양해는 효력이 있는 것이 원칙인데, 이 판례에서는 양해와 승낙의 차이를 무시하고 가정적 의사를 토대로 주거침입죄를 인정했기에 사건 이후에도 형법 교과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판례로 소개되면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미 유신시대에 경찰관이 야당의원들을 도청하기 위하여 음식점에 몰래 도청기를 설치한 사안에서[20] 동일 법리로 주거침입죄를 인정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된 승낙이라는 것도 오인에 의한 것으로 불법 목적을 알았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인에 의한 승낙은 효력이 없다.[21] 따라서 이 판결은 기존 취지에 하나도 어긋나지 않은 당연히 예상 가능한 판결이었다.[22]

또 도청이 큰 문제인 것은 맞고 수사기관이나 공권력의 헌법 제12조 3항의 영장 없는 위법한 도청은 통신비밀보호법 제정 이전에도 위법수사의 독수독과이론[23]에 따르자면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가 얼마나 결정적이던 간에 그 증거는 증거로써 인정될 수 없으나 공권력이 아닌 본 사건과 같이 수사 기관 아닌 일반인의 위법한 증거 수집은 그 사안이 중대하면 어느 정도 증거로 사용 가능하다는 게 현재에도 판례와 통설의 태도이다. 물론 위법한 증거 수집에 대한 민형사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24] 그러나 도청에 학을 뗀 YS는 집권 후 얼마 안 되어 통신비밀보호법[25]을 시행하여 최소한 사인의 증거 수집 중 도청에 관해서는 수사 기관이 일명 감청영장[26]을 법원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쳐 발부 받아 적법하게 실행하지 않는 한 수사 기관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수집하여도 민, 형사 기타 모든 재판에서 무조건 증거로써 인정될 수 없게 했다.[27]

7.2.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 변경

대법원 2021. 9. 9. 선고 2020도12630 전원합의체 판결
주거침입죄의 구성요건적 행위인 침입은 주거침입죄의 보호법익과의 관계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따라서 침입이란 '거주자가 주거에서 누리는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 행위태양으로 주거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침입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출입 당시 객관적ㆍ외형적으로 드러난 행위태양을 기준으로 판단함이 원칙이다.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 행위태양으로 주거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대체로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주거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거주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거주자의 주관적 사정만으로 바로 침입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
대법원 2022. 3. 24. 선고 2017도18272 전원합의체 판결
이와 달리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더라도 음식점의 방실에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들어간 것은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한다고 보아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인정한 대법원 1997. 3. 28. 선고 95도2674 판결을 비롯하여 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결들은 이 판결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 안에서 이를 변경하기로 한다.
2021년 9월 9일 전원합의체의 판결을 통해 주거침입죄에서의 "침입"의 기준[28]이 명확하게 변경되었다. 그리고 초원복집 사건과 비슷한 형태의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결되면서 초원복집 사건의 주거침입죄 판례도 함께 변경되었다.
상고이유에 대한 판단
이러한 사실관계를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살펴보면, 피고인들이 이 사건 각 음식점의 영업주로부터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방법에 따라 위 각 음식점의 방실에 들어간 이상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 행위 태양으로 음식점의 방실에 들어갔다고 볼 수 없으므로 주거침입죄에서 규정하는 침입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설령 피고인들이 다른 손님인 공소외 3과의 대화 내용과 장면을 녹음·녹화하기 위한 장치를 설치하거나 장치의 작동 여부 확인 및 이를 제거할 목적으로 위 각 음식점의 방실에 들어간 것이어서 음식점의 영업주가 이러한 사정을 알았더라면 피고인들의 출입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정이 인정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는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 행위 태양으로 위 각 음식점의 방실에 출입하였다고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주거침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심판결의 이유 설시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나, 이 사건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의 결론은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은 주거침입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

결론
그러므로 상고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기사.

8. 배경이 된 초원복국

이 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초원복국'은 사건 이후에도 성업 중이다. 1970년 일본에서 복어 조리 자격증을 취득한 재일교포가 1983년 부산직할시 동래구(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29]에 '초원즉석복국'이라는 상호명[30]으로 창업했다가 1986년 영도구 대교동 2가로 이전했고 1991년 남구 대연동으로 본점을 이동했다. 초원복국은 사건 당시에도 모범음식점 간판을 달고 저런 고위 공직자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정도로 나름대로 알려진 부산의 맛집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소로서 더욱 유명해져[31] 관광지화 되었다. 높으신 분들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친 바로 그 집[32] 당시 건물에 있었던 '복요리 전문 초원복국'이라고 적힌 네온 간판은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맵 등 지도 앱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는 쓰고 있다가 2012년 말에는 새로 바뀐 모습으로 나온다. 또 1992년 그때의 건물 앞에는 집 한 채가 있었는데 나중에 사라졌다.

참고로 이 가게로부터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지점에 민주자유당 부산시당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사건 이후에도 국민의힘 부산시당이 그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네이버 지도, 카카오맵. 어떻게 밥 먹으러 왔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부분. 육교를 건너서 걸어가면 된다. 정말 가깝다.

부산 남구 대연동 본점 외에 해운대구에도 분점이 있으며 서울에도 분점이 있는데 바로 인근에 검찰청과 법원이 있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사건의 배경인 대연동 본점은 주택가 안쪽에 있어 초행자가 찾아가기는 약간 어려운 편이다. 이 본점은 부산 시민들이 많이 가고 부산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보통 해운대점으로 많이 간다 카더라. 임시 공식 홈페이지 용도로 쓰던 블로그가 다음에 있었으나 다음 블로그가 서비스 종료되면서 사라졌다. 블로그 스샷.

사건이 벌어진 식당의 이름은 초원복집이 아니라 정확히는 초원복국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초원복국 사건'이 아니라 초원복집 사건 혹은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구글 검색 결과도 '초원복집' 쪽이 '초원복국'보다 더 많이 나오는 상태. 이는 서울 쪽 언론들이 처음 식당의 이름 혹은 호칭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름을 잘못 붙여 보도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이 가게의 상호도 그렇고 일단 부산에서는 '복집'이라는 말보다는 '복국'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초원복국이라고 하면 대부분 알지만 초원복집이라고 하면 대부분 모른다. 택시라도 잡아서 "초원복국 갑시다" 하면 데려다 주지만 "초원복집 갑시다" 하면 어디냐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 맥락상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복어 음식점을 '복국'이나 '복국집'이 아닌 '복집'이라고 부르는 부산 사람은 거의 없다.[33] 부산에서는 가게 상호를 단순히 음식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복국 외에도 @@밀면, $$돼지국밥 등의 이름을 쓰지 밀면집, 돼지국밥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반면 서울에는 복집이란 상호로 영업하는 식당이 부산에 비해 훨씬 많은 편이다.

부산 지역 언론 국제신문에서 인터뷰한 자료가 있다. 어두운 역사 오명 쓴 '초원복국'…30년째 묵묵히 그 자리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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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만 해도 김동길은 과거보다는 보수화되기는 했어도 넓은 의미에서 진보계 또는 민주당계 출신 인사로 분류되고 있었고, 특히 1992년 대선 국면에서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정주영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국민의 정부 이후부터는 급격히 보수적인 주장을 펼치며 보수로 전향했다.[2] 김영삼의 최대 지지 기반이었고 가장 믿을 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부동층, 민주 세력 지지층, 호남 이주민, 젊은 층들의 표심을 알 수 없었던 데다 3당 합당 후 여당 세력에 야합한 김영삼에 실망한 여론도 있었고 1992년 총선 당시 부산에서 민자당이 압승을 거두기는 했다만 득표율은 51.8%로 민자당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수준은 아니거니만 민주당과 국민당, 민중당을 합친 득표는 1/3에 육박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돌아갈 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사건 이후 여론이 결집하여 70% 이상 지지를 보내줬다.[3] 녹취록에서도 전통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해 온 전라도에서조차 정주영이 경제를 들고 오니 김대중의 인기가 시들하고 정주영 인기가 높다고 걱정하는 발언들이 많이 나오며 그 유명한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 드립은 만약 부산도 정주영을 지지한다면 그때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는 뜻으로 나온 말이었다.[4] 국민의힘 유승민 前 의원의 아버지다.[5] 민정계 인사들은 1992년 대선을 기점으로 행보가 갈렸는데 김복동, 박철언 같은 노태우의 친인척들은 통일국민당으로 갔고(다만 노태우의 동서 금진호는 민자당에 잔류해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김윤환, 정호용, 최병렬 등은 민주자유당에 잔류했다. 이종찬, 장경우 등은 새한국당을 창당했다가 이후 통합민주당을 거쳐 다시 김대중 중심의 새정치국민회의이기택 중심의 통합민주당으로 갈라졌다.[6] 대선 직전 김광일은 정주영의 당 운영을 비판하며 탈당했고 대선 후 민자당으로 되돌아가 YS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7] 김영삼과 경선 경쟁자였던 민정계 출신 이종찬이 민자당을 탈당하여 대선 후보로 나서게 되었고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한 박찬종 역시 대선 후보였다. 다만 이종찬은 이 사건 다음날인 12일에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정주영을 지지하였다.[8] 이 사건이[9] 그러나 의외로 세간에 알려진 녹취록 전문에는 그 유명한[10]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후문에 있다.[11] 여담으로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도청이 핵심으로 떠오른 사건인 건 맞지만 법리 문제나 전후 관계, 이득을 본 당사자가 좀 다른 문제는 있다. 오히려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과 더 유사하다. 둘 다 김기춘의 작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지만.[12] 물론 도청 자체도 비판 받을 행위긴 하다. 허나 문제는 공권력의 선거 개입은 눈 감고 도청만 문제 삼는 진영논리에 빠졌다는 것.[13] 하지만 이미 김기춘은 검찰총장법무부장관 자리를 거친 거물 법조인으로 변호사 활동만 해도 충분한 벌이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14] 공안통 출신으로 국보위에서 활동했던 검사. 김기춘보다 일을 저지른 수위는 낮지만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이다.[15] 당시 정경식의 나이는 56세로 퇴임까지 몇 년 안 남은 상황이었다.[16] 김기춘은 대학교 3학년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17] 이 시절에는 안기부장이 부총리급, 차장이 장관급이었다.[18] 한국은행 산하의 은행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을 통해 현대전자 등 현대그룹 계열사의 자금 흐름을 노골적으로 조사했다.[19] 대선 하루 전 최후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는 당시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추미애 후보의 존재를 언급하며 정몽준 후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대놓고 내비쳤긴 했지만, 낙선되면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고 당선되면 이후에 이야기가 다르지 않냐고 하면 명분도 입지도 챙길수 있는데 비해 전날 파토내면 당선되면 웃긴꼴이 되고 낙선되도 책임 덤터기 쓰는꼴인데 뻘짓이 맞다.[20] 대판 75도2665.[21] 대판 2003도1256, 대판 2006도5979.[22] 다만 유신 시대 도청 사건의 경우 훨씬 더 무거운 범죄인 직권남용죄를 무죄 만들고 대신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범죄인 주거침입죄 정도로만 처벌하는 선에서 그치기 위하여 구성한 법리이니 어쩌면 자승자박인 셈.[23] 毒樹毒果, the Fruit of the Poisonous Tree Theory.[24] 대표적인 경우로 공갈 목적 나체 촬영 사진 간통 현장 증거 사건(1997.9.30, 선고, 97도1230), 태전사 업무일지 절취 사건(2008.6.26, 선고, 2008도1584)이 있다.[25] 1993.12.27 제정.[26] 정식 호칭은 통신제한조치.[27] 다만 타인'간'의 대화를 엿듣거나 녹음하는 것이 금지될 뿐 자신이 대화 당사자면 몰래 녹음 가능하다.[28] 이전에는 "주거권자나 관리자의 의사에 반하여 들어가면 주거침입에 해당한다"고 보았지만 이 판례를 통해 "사실상의 평온 상태를 해치는 행위"여야 '침입'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거주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주관적인 사정만으로는 바로 침입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기준을 내놓았다.[29] 연제구 분구는 1995년이다.[30] 나중에 상호명을 '초원복국'으로 바꾸었다.[31] 의도치 않게 유명해진 것이기 때문에 노이즈 마케팅은 아니다. 한때 손님들이 전화로 욕설을 날리고 살해 협박을 해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32] 이는 30여 년이 지난 2023년 뉴욕뉴욕에서도 재탕되었는데, 전청조부정적인 효과로 인해 유명해진 곳이 되었다.[33] 네이버 지도 등에서 검색해 보면 부산 전체에 복집이라는 이름을 걸고 영업하는 복어 요리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국 쪽이 훨씬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