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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 쾨로을루 신화 | 텡그리 신앙 | |||
외교 및 사상 | 범튀르크주의 (튀르크어권 국가 기구) | 범투란주의 |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 남아제르바이잔 분리독립 | }}}}}}}}} |
1. 개요
크림 타타르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심페로폴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 크림 타타르인의 민족기[1]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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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 타타르인들이 볼가 강을 중심으로 한 과거 불가르 칸국 주민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것처럼 크림 타타르인들은 몽골의 침공 당시 헝가리 및 중부 유럽으로 이주하지 않고 중세 흑해 근방에 잔존하다 킵차크 칸국의 이슬람화 이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쿠만인과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에 정착하여 무슬림이 된 몽골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친척으로는 노가이인이 있는데 노가이인은 크림 타타르인이나 볼가 타타르인들과 다르게 몽골계 혈통이 강하다. 첼라빈스크의 나가이바크인은 제외한다.
2. 규모
위키백과의 크림 타타르인 문서에 명시된 인구수는 크림 반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각각 24.6만명, 23.9만명이고 크림 반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만명부터 최대 9만명이다.튀르키예에 거주하는 크림 타타르인들은 정식 집계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 15만명에서 최대 600만명으로 추정된다. 튀르키예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의 숫자에 대해 최대 600만명이 추정이 아닌 사실일 경우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들보다 튀르키예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의 수가 많은 셈이 된다. 그러나 튀르키예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18~19세기 크림 칸국에서 아나톨리아로 건너온 크림 타타르인들의 후손들이고 이 600만여 명이라는 수치도 오늘날 튀르키예인들 중 크림 타타르인 혈통을 이어받은 경우까지 포함하면 600만여 명 정도 될 것이다 라는 가정이지 튀르키예에 따로 크림 타타르어를 고집하는 크림 타타르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발달한 것도 아니다.[2]
독일군이 소련에서 물러난 1944년 5월 18일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행위에 대한 보복조치"를 운운하면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전부 저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켜 버렸다.[3][4] 사족이지만 이 때 크림반도 전체에 흩어져 있는 20만 명에 달하는 타타르인들을 전부 화물열차편에 잔뜩 쑤셔 넣어서 출발시키기까지 딱 3일 걸렸다고 한다. 기차 안에서만 최소 7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2천 4백여 가구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는데, 그 과정에 굉장히 의심쩍은 구석이 있어서 가족끼리 생이별하라고 고의적으로 찢어놓았다는 음모론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사람들은 1980년대가 다 돼서야 고향 땅으로 돌아올 권리를 되찾게 된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크림 칸국 문서 참고하십시오.수세기 동안 이들 크림 타타르의 주요 수입원은 다름 아닌 노예무역이었는데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신종하면서 오스만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크림 타타르들은 동유럽 일대를 휘저으며 마음껏 노예 사냥을 벌여 잡아온 노예들을 카파의 노예시장을 통해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나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들로 팔아치웠다. 크림 칸국에서는 약탈자들에게 군마를 빌려준 후에 약탈자들이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받는 비즈니스가 번성했었다 한다. 밑천을 '투자'하고 배당금을 받는 것.[5]
크림 칸국이 러시아한테 멸망할 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수백만 명이 노예로 잡혀갔는데 당시 노예 사냥의 주요 피해 지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연 평균 2만 명이 노예로 잡혀갔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비옥한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이 이들의 노예 사냥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말 그대로 공백 지역이 되는 바람에 일부 농노들이 영지를 탈출하여 이 공백 지역으로 들어오고 노예 사냥을 하는 크림 타타르에 대항할만한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면서 카자크가 성장하고, 이중 자포리자 코자키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다만 타타르계 코사크들도 존재했고, 정교회를 믿는다 할지라도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은 경우도 존재 했는지라 당시 카자크와 타타르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굳이 기독교 국가만 약탈한 것이 아닌 무슬림 체르케스인들도 자주 노예로 납치하였는데 이는 체르케스인 노예들이 군인 노예 혹은 하렘의 첩실로 비싼 값에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슬람 율법에 의하면 무슬림이 다른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지만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지불하던 관습과 마찬가지로 크림 타타르 사회 내에서 용인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슬픔에 잠겼네, 어디에도 살 곳이 없어서
유목민 군대는 작은 아이를 말발굽으로 짓밟고
아이고, 아이들은 짓밟고 어른들은 끌고 갔네
손을 뒤로 돌려 묶고 칸에게로 몰고 갔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마찬가지로 주요 피해국이었던 러시아 역시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크림 타타르의 노예 사냥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1574년에는 수도인 모스크바가 털리고 10만 명의 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사태도 벌어졌다. 러시아에게 있어서 크림 칸국은 반드시 멸망시켜야 할 철천지 원수였지만 뒤를 봐주고 있는 오스만 때문에 이만 뿌득뿌득 갈고 있었는데 18세기경부터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크림 칸국의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둘 사이의 국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크림반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크라이나 초원부터 병탄해야 했기에, 당시 러시아에 적대적이었던 자포리자 코자키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막고자 단 한 번 크림 타타르와 연합하기도 했다.유목민 군대는 작은 아이를 말발굽으로 짓밟고
아이고, 아이들은 짓밟고 어른들은 끌고 갔네
손을 뒤로 돌려 묶고 칸에게로 몰고 갔네
러시아에게는 그동안 크림 타타르에게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할 겸 흑해의 부동항을 얻고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1768년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고 여기서 승리한 러시아는 1774년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과의 봉신관계를 단절시키고 1783년 전적으로 크림 칸국을 합병시켰다. 이때 자포리자 코자키가 러시아 진영으로 크림반도 공격을 주도하면서 수백 년에 걸친 이들과의 싸움은 코자키의 판정승으로 끝난다.
크림 칸국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숙적의 앞잡이이자 수 세기 동안 자국민을 사냥해 노예로 팔아치운 철천지 원수인 크림 타타르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수많은 크림 타타르인들이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오스만으로 피난갔고 러시아는 이들이 떠난 빈자리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을 정착시켜 1783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 직후 98%[6]였던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인 비율이 100여 년 후인 1897년에는 34%까지 폭락했다. 크림 타타르의 친척뻘인 볼가 타타르가 러시아 질서 아래에서 나름대로 대우[7] 받으며 산 거에 대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합병 이후인 1784년부터 1790년까지 전체 크림 타타르인 백만 명 중에 약 30만 명이 옛 크림 칸국의 영역을 떠나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8]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합병 이후부터 소련 건국까지 1783-192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러시아화 정책과 탄압으로 180만에 달하는 크림 타타르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근현대의 오스만 제국은 물론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에 상당한 수의 크림 타타르인 난민 출신과 그 후손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튀르키예 당국에서 인구조사 시에 크림 타타르인을 따로 통계내지 않으나,[9] 현 튀르키예 공화국 내에서 살아가는 크림 타타르계를 최대 600만 가량까지 보기도 한다. Crimean Tatars and Noghais in Turkey 링크된 기사에서도 크림 타타르인 인구가 400~600만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통계가 과장이라는 지적이 소개되어 있다. 즉 튀르키예 내 크림 타타르인들이 600만여 명이다 주장은 튀르키예 내에서 백년 넘게 계속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혼혈을 포함한 그 후손이 600만여 명 정도 되지 않을까 하는 추정치일 뿐이지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원래 민족주의 계에서는 발언권 문제로 인구를 최대치로 추산해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동유럽에서 무자비한 노예 납치 및 약탈을 일삼았던 크림 타타르인들의 후손들은 통혼 등의 이유로 현재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외모 차이가 별로 없는 편이다. 크림 타타르 가운데 슬라브계 외양을 가진 사람도 흔하지만 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도 튀르크계 유라시안 외양을 가진 사람들도 결코 적지는 않다.[10]
오늘날 우크라이나인들은 크림반도와 함께 이들 역시 우크라이나인이라 여기고는 있지만 과거 크림 칸국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체르케스인들을 약탈한 과거가 있기에 이들이 여러모로 유명해질수록 과거사 문제가 크든 작든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체성이 본래 이들과 싸우느라 생긴 것이라서 2014년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의 상당수는 크림 타타르인은 신뢰할 수 없는 불온분자, 이방인으로 여겼다.
3.1.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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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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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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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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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알제리 학살 ,1954 ~ 1962, | 발생 위치 프랑스령 알제리 전역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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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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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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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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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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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열차를 묘사한 작품 |
“낯선 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고/그들은 모두를 죽였다/그들은 정당하다고, 죄가 없다고 말했다/휴머니즘은 통곡한다/그대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모두가 죽었다…”
자말라, 1944[11]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져 나라 전체가 혼돈에 빠지자 크림 타타르인들 역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국가가 바로 크림 인민 공화국으로 비록 볼셰비키에 의해 건국한 지 약 2개월만에 강제로 해체당한 단명 국가이긴 하지만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보다 5년 앞선 튀르크계 세속주의 공화제 국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1917년 12월 13일 건국 선포와 동시에 노만 첼레비지한(Noman Çelebicihan / Номан Челебиджихан, Номан Челебіджіхан)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내각을 구성했지만 1918년 1월 말,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 해군보병들의 공격을 받아 의회와 내각이 강제해산 당하고 대통령이었던 노만 첼레비지한은 볼셰비키 해군들에게 붙잡혀 세바스토폴로 끌려가 2월 23일 군함 위에서 총살형에 처하고 무덤이 만들어져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체를 흑해 한가운데에 수장시켜버렸다.[12]자말라, 1944[11]
크림 타타르의 처우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소련이 들어선 후 더 악화되었다. 1920년대 초반 전시경제체제로 인한 기근[13]과 1920년대 후반의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 15만 명 이상의 크림 타타르인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독소전쟁 후반부에 소련이 크림반도를 수복한 1944년 5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행위에 대한 보복 조치" 운운하면서 크림 타타르인 전체를 중앙아시아(특히 우즈베키스탄)로 강제이주(sürgünlik / сюргюнлик)시켜 버렸다. 이 때 20만에 달하는 크림 타타르인을 전부 기차 화물칸에 집어넣는데 딱 3일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8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불귀의 객 신세가 되어버렸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유배지에서 대부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시당하며 살던 이들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혐의를 벗긴 했지만 소련 당국은 배상이나 귀향 지원 같은 조치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강제이주당한 타타르인들의 빈 거주지는 러시아인과 오세트인들을 이주시켜서 채웠다. 크림반도의 인구통계 자료를 보면 이주 제한이 풀리면서 1960년대부터 크림 타타르인들이 크림반도에 재정착하기는 했지만, 198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몇만 명 정도가 되돌아온 수준이었고 크림 타타르인들의 다수는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가 되어서야 크림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4. 현황
1991년 소련 붕괴 당시 러시아가 크림반도 귀속 의향을 보였지만 러시아에 학을 뗀 크림 타타르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해 막았다. 소련 해체를 전후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의 크림 타타르인들 상당수가 이 시기에 크림반도로 돌아왔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자국 내 타지크인들을 반강제로 우즈베크인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림 타타르 민족주의 운동을 막았으며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경제 발전이 지체되는 이유도 있었고, 이 당시에는 우즈베키스탄이나 우크라이나나 경제사정이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지만 크림반도가 인프라가 더 좋았던지라 크림 반도 고향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 것.[14] 돌아온 크림 타타르인은 크림반도에서 모스크를 새로 짓거나 복원하고 자신들의 고유 정체성, 문화, 언어와 종교의 가치를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며, 타타르 전통 이슬람 대학 등의 교육기관을 세웠다.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과거로의 회귀를 두려워한 크림 타타르인들이 대규모의 반대 시위를 벌였지만 강제 진압되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에 있는 非러시아인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벌였고, 여기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크림 타타르인이었다. 이들이 두려워한 일이 결국 다시 일어난 것이다. 제일 먼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타타르인의 정체성, 언어, 문화 보존에 노력하던 지식인들과 남자들을 불법으로 구금, 고문하며, 심각한 박해와 인종청소가 시작됐다. 형식적 재판을 통해 2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일부 타타르 남자는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본토로 도망쳤지만, 여자와 어린이들은 크림반도에 남으면서 많은 이산가족이 형성되었다.
2014년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자 본토로 피신한 크림 타타르인들은 크림반도로 돌아가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편을 들어 싸움에 뛰어들었다. 최초의 크림 타타르인 의용군 부대인 노만 첼레비지한 대대(Батальйон імені Номана Челебіджіхана)를 거쳐 크림 타타르 대대(Батальйон Крим)라는 특수부대가 창설되었으며, 마즐리스(이슬람 의회)는 크림은 우크라이나에 돌아가야 한다며 이슬람 국가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맹렬히 싸웠으며 8년 동안 공공의 적과 함께 맞서면서 우크라이나인들과의 관계가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크림 타타르인들의 강제 이주를 추모하는 기념일이 존재한다. 2014년 5월 16일에는 대통령령으로 5월 18일이 '크림 타타르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날(День боротьби за права кримськотатарського народу)'로 제정되었으며, 2015년 12월 12일에는 우크라이나 의회가 5월 18일을 '크림 타타르인 집단학살 추모일(День пам'яті жертв геноциду кримськотатарського народу)'로 제정한 바있다. 관련 기사 다만 기념일이 성립된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크림 타타르인들이 탄압받는 것을 동정한다기보다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한 것을 항의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튀르키예의 경우 위구르 난민들이 중국의 신장 재교육 캠프 관련하여 강경한 항의시위를 이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튀르키예 내 크림 타타르인 인구는 사실상 튀르키예인 일반에 완전히 동화된 상황이라, 별다른 액션이 없다. 이는 상술한 것처럼 튀르키예 내에서 크림 타타르어가 촌스러운 사투리 취급을 당하면서, 튀르키예 내 크림 타타르인들이 따로 자신들이 크림 타타르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점에서 기인한다. 오늘날 튀르키예 내 크림 타타르인 후손 중 청년층 대다수는 크림 타타르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튀르키예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상황이다.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전면전이 일어나자 적지 않은 크림 타타르인들이 크림반도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후신인 튀르키예와의 우호관계도 남아있어 전쟁 초반부터 튀르키예에게 협력을 꾸준히 요청했고, 튀르키예도 명분상 크림반도의 선주민인 크림 타타르를 위해서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 이것도 명암이 존재하는데 지원을 대가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아흐메트 다우트오을루 총리가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튀르키예의 치부이자 민감한 과거사 문제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을 부정해 달라고 꾸준히 딜을 넣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5월 18일 우크라이나 정부 홈페이지에 크림 타타르인 집단학살 추모일을 기념하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연설 영상을 게시했다. 1944년 크림 타타르인 강제 이주의 역사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설명하면서 크림 타타르인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고 우크라이나인도 이에 동정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같은 원주민이자 공공의 적을 둔 우크라이나로서 연대를 통해 러시아로부터 크림 반도를 되찾을 것을 천명하였다. #
크림 타타르인의 민족회의기구인 크림 타타르 밀리 메질리스(Къырымтатар Миллий Меджлиси / Qırımtatar Milliy Meclisi)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크림반도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은 불법체류자라며 크림반도를 되찾으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5. 같이 보기
[1] 고대 튀르크인의 고유 문자인 '탐가(tamğa)'에서 따 온 것이다. 크림 칸국을 통치한 게라이 가문(Geraylar)의 상징이기도 하다.[2] 크림 타타르어는 오늘날 튀르키예어와 밀접하게 관련돼있고 매우 가까운 언어인 건 사실이다.[3] 오늘날 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시켰고 대부분의 크림 타타르들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있다.[4] 사실 동유럽의 기독교도들과 크림 타타르들과는 매우 나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크림 타타르들이 기독교도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5] 출처: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허승철 역)[6] 나머지 2%는 노예 무역에 참여하던 외국인 혹은 크림 칸국의 딤미로 살던 우룸인이나 카라임, 크림차크 유대인 등등[7] 물론 볼가 타타르인들도 항상 좋은 대우만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1921~22년도 당시 볼셰비키가 타타르스탄 일대의 식량 공급을 먼저 끊어서 수십만여 명이 기아로 사망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볼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에서 좋은 대우를 받은 이유는 크림 타타르인들이 비방하듯 이들이 얍삽하게 러시아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와의 무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의 세수를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8] Ismail Audingun & Aysegul Audingun, Crimean Tatars Return Home:Identity and Cutural Revival, (Jounal of Ethinic and Migration Studies, 2007) pp115.[9] 한동안 튀르키예 공화국에서는 크림 타타르어를 소수민족의 고유 언어가 아닌 튀르키예어의 사투리로 여기던 편이었고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인구를 따로 소수자로 분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10] 코사크들이 크림 타타르족들을 포로로 잡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노예로 붙잡혔다 돌아온 우크라이나인 부녀자들이 크림 타타르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11] 증조할머니가 겪은 강제이주와 소련 붕괴 후에도 중앙아시아와 튀르키예에서 돌아오지 못한 크림 타타르인의 애환을 가수 자말라가 담아서 부른 노래다. 가사 중간에 튀르키예어가 들어가는 건 그 때문.[12] 지금도 크림 타타르인들에게 노만 첼레비지한은 국부 겸 순교자로 칭송받는 존재이다. 돈바스 전쟁 당시 크림반도 합병의 여파로 인해 난민이 된 크림 타타르인들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크림 타타르인 의용군 부대의 이름부터가 노만 첼레비지한 대대(Батальйон імені Номана Челебіджіхана)이다.[13]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인한 희생자들도 상당했다.[14] 같은 맥락에서 카자흐스탄 일대로 강제이주당했던 메스케티 튀르크인(조지아 일대에 살던 튀르키예인)이나 햄신인(아르메니아인들 중 순니파 이슬람을 믿는 민족 그룹)들 역시 소련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일대로 대거 이민하였다.[15] https://www.president.gov.ua/en/news/zvernennya-prezidenta-ukrayini-z-nagodi-dnya-pamyati-zhertv-75129 러시아의 침공이 한창이던 2022년 5월 18일 크림 타타르인 집단학살 추모일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게시한 연설 중 한 문장.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수복 의지와 크림 타타르인 공동체와의 연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