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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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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파일:Franz_Schubert_by_Wilhelm_August_Rieder_1875_larger_version_crop.png
본명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출생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사망 1828년 11월 19일 (향년 31세)
오스트리아 제국
직업 작곡가
가족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
어머니 엘리자베트 슈베르트
첫째형 이그나츠 슈베르트
둘째형 페르디난트 슈베르트
셋째형 카를 슈베르트
여동생 마리아 테레지아 슈베르트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Franz_Schubert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음악가가 된 이후2.3. 죽음
3. 평가
3.1.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음악 덕후?3.2. 가곡의 왕 슈베르트
4. 주요 작품
4.1. 교향곡4.2. 협주곡&관현악4.3. 실내악4.4. 피아노4.5. 가곡4.6. 오페라
5. 기타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며, ‘가곡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가곡들을 작곡했다.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시대적으로 바흐 - 모차르트 - 베토벤의 계보를 잇는,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음악가이다.

2. 생애

그의 생애는 가난하고 매우 고달팠다. 음식을 살 때 밤에 떨이로 파는 음식(소금을 뿌려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사서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전해진다. 요즘으로 치자면 저녁 늦게 대형 할인마트에 가서 유통기한 임박한 음식들을 사먹는 셈. 그의 모습이 퉁퉁 부은듯한 것도 이 때문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2.1.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어 슈베르트[1]는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1756~1812)는 장인의 딸로 요리사였다. 무려 16명, 9남 7녀인데 이 가운데 9명[2]은 그야말로 10살도 살지못하고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의학이 그다지 발달되지 못하던 시절에는 흔한 일이긴 했다. 당시에는 평균수명이 40살도 채 되지 않았고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19세기 중순, 유럽이나 미국조차도 평균수명이 이러다보니, 서민층에서 대가족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그나마, 오래 산 형제자매들은 큰 누나인 안나 슈베르트(1783~1860), 큰 형 이그나츠(1785~1844), 페르디난트(1794~1859),칼 (1795~1855), 마리아 테레지아 슈나이더(1801~1878),막내인 린나(1804~1861)가 있다. 이 가운데, 페르디난트는 결혼을 2번하면서 무려 29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낳은 29명 가운데서 40살 이상 산 사람은 12명이었다. 아무튼, 페르디난트가 낳은 자식들 후손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13번째로 태어난 페터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즐겨하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6살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큰 형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테오도어는 어디까지나 취미나 여가활동, 향후 학교 교사로서의 교육 수업 차원에서 음악을 가르친 것이었지 페터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고 학교 선생을 시키려고 했었으나, 그는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부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3].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탁월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다. 11살 때(1808년)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빈 궁정예배당의 아동 합창단에 뽑혔다. 슈베르트는 그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는데 특히 모차르트베토벤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악보를 볼 때 너무 가까이서 본다는 것이었다. 이에 부모님은 그의 시력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채고 안경을 맞춰 주었고, 이 때문에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안경을 쓰고 음악 공부를 했다.

학창시절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루치카와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4]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제1 바이올린 주자(콘서트 마스터)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탁월한 미성으로 독창회에 나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급히 집으로 갔으나, 엘리자베트는 이미 숨진 뒤였고, 그제서야 아버지는 그에게 원한다면 음악가가 돼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게다가 13세(1810년)에 변성기가 도래하여 특유의 미성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합창단에 머무를 수가 없었는데다 수학과 라틴어 성적도 나빠서 결국 학교를 나와야 했다.

2.2. 음악가가 된 이후

당시 오스트리아 법은 징병제였기 때문에 일정 연령이 된 남성은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 했다.[5] 당시 슈베르트는 군대에 정말 가고싶지 않았고, 이를 한 방에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손쉬운 방법은 교사가 되는 것뿐이었다[6]. 음악 쪽으로 진로를 삼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교사라는 직업이 내키지 않았으나, 군대만큼은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아서 결국 17세 때이던 1814년,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하면서 저학년의 수업을 담당했다. 처음에 그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한 후 자신은 작곡에 전념하려 했으나 학생들이 선생 말 안 듣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서 수업이 다 끝난 후에야 작곡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해에 슈베르트 최초로 발표된 큰 작품인 F장조의 장례미사곡을 작곡했는데, 이때 독창을 맡았던 한 살 아래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7].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수의 가곡들을 작곡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한 유명한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 '마왕' 등이 작곡되었다. 특히 마왕을 작곡할 때 집중력이 아주 대단했는데, 한밤중에 2층에서 슈베르트가 마왕에 나오는 대사[8]를 연극조로 외치자 깜짝 놀란 부모님이 뛰어올라왔다가 작곡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적도 있었고, 심지어 친구들이 와서 슈베르트에게 인사할 때 그들이 자기 바로 옆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필을 받아 악보에 작곡을 하고 이 선율을 본 친구들이 아주 좋다고 외친 후에야 슈베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고 한다.[9]

이듬해인 1815년에는 무려 145개의 가곡과 2개의 교향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소수의 친구들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친구들과 연주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얼마 되지 않던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그와 친했고 서로를 아꼈으며 도움을 주고 받았다. 쇼버와 슈빈트를 비롯하여 법률가 요제프 폰 슈파운(1788 ~ 1865), 법률을 전공한 시인 요한 마일호퍼(1787 ~ 1836), 화가 레오폴트 쿠펠비저(1796 ~ 1862), 극작가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펠트(1802 ~ 1890), 작곡가 안젤름 휘텐브렌너(1794 ~ 1868), 그리고 친구가 아닌 아버지 또래이지만 그를 후원하던 성악가 미하엘 포글(1768 ~ 1840) 같이 죄다 살아생전 인정받던 예술가들이 많았다.[10]

19살이던 1816년, 초등학교 교사 일에 신물이 난 슈베르트는 마침 라이바흐의 초등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 자리가 비자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친구 슈파운이 몇 개의 가곡을 출판할 것을 제안하고 그중에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 몇 개를 추려서 괴테에게 보낼 것을 제안하자 슈베르트는 고심 끝에 승낙했다. 하지만 괴테는 슈베르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악보를 되돌려보내자 슈베르트는 실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작곡은 계속되어서 가곡 '방랑자', '자장가' 등이 작곡되었다.

결국 슈베르트는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빈으로 나와서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버(1798 ~ 1882)와 함께 살면서 작곡에 열중했다가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18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여름 동안 음악 가정교사를 구했는데,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음악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고향집을 완전히 떠나 개인 레슨을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23년,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를 작곡했고 가곡 '방랑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피아노용으로 작곡한 '방랑자 환상곡'을 내놓기도 했다.

1827년, 슈베르트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이 해에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때 자신이 작곡한 작품 중 몇 곡의 악보를 베토벤에게 소개하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의 우상이 병들고 초라해진 모습에 더일찍 베토벤을 만나러 오지 못한것을 많이 후회해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베토벤과의 만남을 끝내고 말았다. 이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는 베토벤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다. 바로 1주일뒤에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슈베르트는 크게 슬퍼했고,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는 음악가들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베토벤 사후 슈베르트의 음악가로의 진로를 반대하며 학교 교사를 강제로 시키려던 아버지와 슈베르트의 관계도 마침내 개선되었다. 집안의 형제들과 슈베르트의 주변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칠 무렵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설득하자, 아버지는 아들이 작곡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용서하면서 마침내 두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화해도 잠시,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형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요양 치료를 받았다. 병명은 티푸스, 매독, 식중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 그 뒤 슈베르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말년에 슈베르트는 헨델의 '메시아'의 악보를 구해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죽기 불과 1년 전에야 피아노를 장만했다.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는 피아노도 없이 작곡을 했다는 얘기. 이것을 두고 악기를 전혀 연주해 보지 않고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쓴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다른 악기인 기타를 갖고 있었고, 이걸로 악상을 연주해 가며 작곡했다고 한다.

2.3. 죽음

하지만 슈베르트의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했고[11] 결국 1828년 11월 19일에 혼수상태에 빠진 슈베르트는 공무원이자 교사이자 역시 음악가이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12]의 집에서 31살이라는 너무나도 한창의 나이에 위대한 작곡가의 삶을 마감했다. 혼수상태였을때 슈베르트는 "묻혀지는...... 건... 싫어... 홀로 있는 건 싫어......" 라고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페르디난트가 "프란츠, 모두 널 걱정하여 모였단다. 걱정마라."고 말하자 갑자기 그는
하지만, 여긴 베토벤이 없어!
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존경하던 이의 이름을 외친 모양. 그리고 그렇게 숨을 거두면서 저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임종을 지켜본 친구 슈빈트는 형 페르디난트가 갓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만지며 한참을 울었으며 "너무 일찍 갔구나, 프란츠. 너무나도 일찍 갔어!" 라며 슬퍼했다고 회고했다. 형 페르디난트가 바로 슈베르트 무덤 비석을 디자인했으며 그도 아우 근처로 나중에 이장되었다.

사후 슈베르트의 바람대로 형 페르디난트와 친구들이 시신을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이 묻힌 빈 벨링크 공동묘지[13]에서[14] 영면할 수 있도록 손을 써주었고, 베토벤의 바로 옆에 안장했다.슈베르트 및 여러 유명 음악가들의 묘비석. 처음에는 웬 듣보잡을 감히 베토벤 곁에 묻느냐는 반대도 있었으나, 슈베르트의 후원자이자 당시 빈 음악계의 큰손이자 슈베르트와 동갑내기이던 레오폴트 폰 존라이트너[15]가 '20년 아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베토벤 못지않게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을 위대한 인물.' 이라고 적극 옹호하고 생전의 베토벤 씨도 잠깐 만났음에도 그를 인정했던 만큼, 곁에 묻히면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쇼버에게 생을 마감하기 1주일 전인 1828년 11월 12일에 보낸 편지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여길 봐도 그의 마지막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잘 있었어? 나는 너무나도 아프다네. 고열과 어지러움이 계속되고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드네. 먹을 것을 먹는 즉시 토해버리고 열하루째 물만 마시고 있어.

그나마 페르디난트 형과 린나(누이동생)가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있어줘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간혹 좀 낫기도 하고 그러면 책을 읽고 있다네, 지금 모히칸족의 최후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네. 이거 작가인 쿠퍼가 쓴 다른 책이 있으면 좀 빌려줄 수 있겠나?

자네의 친한 친구인 프란츠가

1828년 11월 12일.

이 편지는 빈에 있는 슈베르트 생가 박물관에 벽에 걸려 액자로 전시되어 있다.

3. 평가

슈베르트는 겨우 31살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무려 998개의 작품들을 작곡할 만큼 다작가였다. 작품성을 떠나 그의 작품 대다수가 매우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는데, 당시 슈베르트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말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멜로디가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만 슈베르트의 작품은 감미로운 선율이 넘쳐 흐르는 대신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곡은 많지 않다. 그는 31년의 짧은 생애 동안 가곡 외에 피아노 소나타나 교향곡 실내악 등 규모가 큰 작품도 다수 남겼는데 대부분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대작곡가들이 큰 규모의 작품에서 보여준 탄탄한 형식미와 구축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나름 구성이 훌륭한 작품들도 독자적인 구성의 묘미를 보여주기보다는 베토벤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래서 일부 전문가는 이런 작품을 베토벤의 아류작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16]

그래서 슈베르트의 음악은 듣기 아름답고 서정성이 넘치지만 연주자 및 평론가들에게는 그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뜬금없는 전개가 자주 등장하고 악기의 표현력에 대한 이해가 없이 착상된 선율이 많기 때문에 곡의 해석이나 테크닉 측면에서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17][18] 또 대규모의 작품에서는 곡을 전개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단순히 반복되는 패턴이 많고 화성적 발전이나 음형을 만들어내는 스킬도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슈베르트가 과대평가된 작곡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19][20]

하지만 20세기 후반기부터는 슈베르트 음악에 나타나는 느슨한 구성을 굳이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 비교해서 약점이라고 깎아내릴 것이 아니라 나름의 슈베르트만의 음악적 특징으로 이해하자는 의견이 강해지고 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처럼 짧은 악상을 견고한 구축력의 토대 위에서 계속 변화 발전시키는 유형의 작곡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악상을 계속 풀어놓는데 능한 작곡가이기 때문에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슈베르트식 작법이 더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베토벤은 거시적인 구조 속 미시적인 변화를 배치하는 반면, 슈베르트는 미시적인 요소들을 배치해 가면서 거시적인 구조를 완성시킨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주제가 너무 완벽하고 아름답다면 그것을 굳이 변화시키고 전개시켜봐야 오히려 다운그레이드된 소리만 나올 것이다. 실제로 슈베르트가 구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곡들은 슈베르트 특유의 유창함과 선율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악기와 음악형식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오히려 자신의 음악적 장점을 돋보이게 하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았던 것.[21]

이런 재평가 덕분에 그간 묻혀 있던 슈베르트의 기악곡 상당수와 미사곡등이 20세기 후반기부터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최근에는 슈베르트의 기악 음악이 A급 연주자들의 레퍼토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고 음반도 많이 나오고 있다. 아예 슈베르트의 곡만으로 연주회를 개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만 연주회 레퍼토리에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넣는 연주자는 아직 많지 않은 편.[22]

3.1.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음악 덕후?

전술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알겠지만 슈베르트를 진정한 전업음악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어린시절 살리에리같은 훌륭한 스승 밑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찍 공부를 중단했기 때문에 작곡에 대한 기초가 튼튼한 편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대위법적인 수법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23] 화성도 평범한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말년에 병상에서 만약 이 병이 낫는다면 대위법을 다시 공부해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음악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후에도 생전에는 대중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생전에 출판된 슈베르트 음악은 그 수가 매우 적고 청중들 앞에서 연주된 경우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생활고로 인해 집에는 변변한 악기 하나 없었고 당연히 연주자로서의 역량도 갖추지 못했다.[24] 선배 대작곡가들이 기본적으로 당대 1급의 연주자였던 것과 대조적.

그나마 슈베르트의 재능을 아꼈던 주변의 지인들의 후원으로 간신히 음악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데, 한마디로 슈베르트는 전업 음악가라기보다 재능이 뛰어난 음악 덕후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이자 장점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데, 직업정신보다 매니아기질로 작곡했던 슈베르트는 역사상 어떤 대작곡가보다도 자기 내면에 충실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음악인생 내내 윗사람의 지시와 명령을 견뎌내야 했던 바흐, 항상 의뢰인이나 청중들의 기호와 반응을 의식해야 했던 헨델/모차르트/베토벤[25] 등의 선배 대작곡가들과 달리 슈베르트는 남에게 팔기 위해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남의 이목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고 악기의 연주 효과나 공연의 화려함에 집착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연주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화려한 기교나 복잡한 전개수법이 나타나지 않는대신[26] 풍부한 서정성과 넘치는 감성이 바탕에 깔려 있는데, 높으신 분이나 청중들의 반응을 의식할 필요가 없이 오직 자신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비록 요절했지만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펼쳤고, 후세에 이름을 알렸기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그가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으며 당대에는 크게 이름을 알리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실 음악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더욱 어려웠기에 슈베르트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성공한 작곡가가 맞긴 하다.[27]

3.2. 가곡의 왕 슈베르트

음악사적인 측면에서 슈베르트를 평가하자면 뭐니뭐니 해도 가곡분야에서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슈베르트의 1천여 곡에 가까운 그의 작품 중에서 3분의 2에 가까운 632곡이 바로 가곡인데(미완성곡 포함), 바로 가곡처럼 짧고 복잡한 구성이 필요하지 않은 작품에서 슈베르트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렇게 가곡을 중점적으로 작곡했고 상당수가 오늘날에도 자주 불리워지는 명작이기 때문에 음악사적으로 슈베르트를 기점으로 독일가곡(lied)이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잡았다고 평가받는다. 슈베르트 이전에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독자적인 아리아나 가곡을 많이 작곡하긴 했으나 하나의 장르로 간주될 만큼 음악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슈베르트 이전에 베토벤이 이탈리아식 오페라 아리아의 영향을 벗어난 독자적인 독일가곡의 영역을 개척한 바가 있다. 베토벤은 가곡 아델라이데를 최초로 연주회의 공식 레퍼토리로 올리기도 했으며 성악과 피아노 반주를 연주 방식으로 확립하고 피아노의 역할을 확대했으며 가사의 내용에 맞춰 좀더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도록 했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가곡은 베토벤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서 가사의 내용과 운율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선율과 리듬, 좀더 섬세하고 세련된 악상을 추구했다. 한편으로 반주에도 생명력을 부여해서 단순히 성악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곡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고 성악과 일체를 이뤄서 가사의 내용을 완성하고 있다.

낭만주의 시기에 연가곡을 본격 유행시킨 것도 슈베르트이다. 슈베르트가 최초의 연가곡 작곡가는 아니지만[28] 연가곡이라는 장르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본격 확인시켜준 작곡가가 바로 슈베르트.

즉, 베토벤이 독일가곡의 개척자였다면 슈베르트는 완성자였던 것. 가곡 분야 한정으로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등이 슈베르트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한편으로 후고 볼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낭만주의 후기의 독일 가곡 작곡가들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서 슈베르트와는 상당히 다른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의의나 음악성을 떠나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아름답고 인상적인 선율 덕분에 귀에 착 감기는 매력이 있다. 결코 부르기 쉽고 단순한 노래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듣다보면 민요나 유행가처럼 절로 흥얼거리게 되는데, 이게 바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슈베르트만의 매력일 것이다.

4. 주요 작품

4.1. 교향곡



슈베르트는 생전에 교향곡을 여섯 곡 발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38년, 슈만이 교향곡 C장조(그레이트)를 발견했고 이 곡은 7번 교향곡이 되었다. 그 뒤 1865년에 또 다른 교향곡이 발견됐는데, 두 악장만 완성된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작곡 순서로는 '그레이트'보다 앞선 곡이었으나 이미 7번이 있었기에 8번 교향곡이 되었다.

여기에 스케치 상태로만 남아 있는 E장조 교향곡(1821)도 있었는데, 이 곡을 몇 번으로 할건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1951년 영문으로 발간된 도이치 카탈로그[33] 초판에서는 E장조를 7번, 미완성을 8번, 그레이트를 9번으로 하는 것으로 정리되었고, 이러한 번호가 대중화되었다.

위와 달리 미완성을 7번, 그레이트를 8번이라고 하고, E장조 교향곡에 번호를 붙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1978년 독일어로 출간된 도이치 카탈로그 개정판에서 E장조 교향곡을 작품 목록에서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빈 필하모닉이나 베를린 필하모닉 홈페이지에서는 미완성을 7번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도이치 카탈로그 초판이 아닌 개정판에 입각하여 표기하고 있다. 국제슈베르트협회에서 베렌라인터 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고 있는 Neue Schubert-Ausgabe(새로운 슈베르트 에디션)에서도 도이치 카탈로그 개정판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참고로 새로운 슈베르트 에디션은 슈베르트의 서거 200주년을 1년 앞둔 2027년에 완성될 예정이다.
조성 도이치번호 작곡연도 발견연도 비고
E장조 D729
B단조 D759 1822 1865 미완성
C장조 D944 1826 1838 그레이트
D장조 D936A 1828

4.2. 협주곡&관현악

4.3. 실내악

4.4. 피아노

4.5. 가곡


4.6. 오페라

피에라브라스 D.796
징슈필 쌍둥이 형제 D.647

5. 기타




[1] 1763~1830. 가운데 미들네임만 빼면 넷째아들의 이름과 똑같다.[2] 2째딸 엘리자베트(1786~1788),칼(1787~1788),프란체스카 막달레나(1788년생, 9주만에 사망), 막달레나(1789~1790), 프란츠 칼(1790년생,5주만에 사망),안나 카롤리네(1791년 18일만에 사망),페테르(1792~1794),요제프(1793~1798),알로시아 막달리아나(1799년 이틀만에 사망...[3] 한 번은 콘빅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심하게 떨어진 성적을 보고 아버지가 꾸짖었고, 그는 본인은 음악가가 되겠다고 맞섰지만, 평소 아들이 교사가 되기를 원한 테오도어는 이에 아들을 더 꾸짖으며 내쫓았고, 그러나 어머니 엘리자베트만큼은 언젠가 아버지가 재능을 인정해 줄 것이라면서 격려해 주었다.[4]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살리에리다. 그는 슈베르트의 우상이었던 베토벤 등 후세에 알려진 여러 음악가들을 가르쳤다.[5] 오스트리아는 현재도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다.[6] 사범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특별히 병역면제였다.[7] 반대의 이유는 슈베르트가 경제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이유는 사실이었다. 이후 테레제는 베르그만이란 부유한 빵집 주인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후일 슈베르트는 그의 일기에서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나의 마음은 극도로 상했다.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녀를 사랑해. 그 후 테레제와 같이 나를 기쁘게 해주는 여자는 만날 수 없었다'라고 적어 실연으로 인한 상심을 나타냈다.[8] "아버지! 마왕이 나를 잡으러 쫓아오고 있어요!"[9] 지금도 이걸 연주하는 사람들은 마왕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유는 자비없이 계속되는 오른손 옥타브 연타 때문. 이 연타를 편법 없이 제대로 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정말 드물다. 슈베르트 본인도 이걸 쳐보라는 친구의 말에 '악마한테나 시켜봐'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으나 이는 방랑자 환상곡 C장조 D.760 Op.15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두고 한 말로,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곡 또한 무지막지한 연주 난이도를 자랑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10] 49살에 죽은 마일호퍼 빼고 다들 당시 평균 수명을 넘는 장수를 누렸는데, 그나마 일찍 죽은 마일호퍼조차도 오스트리아 황실에 반항하며 공화파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잡히게 되자 스스로 음독자살한 것이었다.[11] 얼마나 심각했냐면 기억력이 감퇴하여 기억도 못하고 만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려 거동이 힘들었으며 헛것을 보고 혼잣말을 하며 횡설수설하였다. 또한 심한 두통과 고열, 구토까지 하였다. 매독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12] Ferdinand Schubert, 1794~1859. 공무원이란 직업도 겸했지만 또한 오르간 연주자 및 작곡가이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인지도는 아우에 견주면 낮지만...교사라는 직업도 있었다. 그는 결혼을 2번하여 무려 29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어 슈베르트 집안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13] 1924년에는 베링거 슈베르트파르크 (Währinger Schubertpark) 라는 공원으로도 개장되었다.[14] 일명 음악가들의 공동묘지. 비엔나를 무대로 활약했던 음악가의 거장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15] 1797~1873.한국에는 흔히 백작으로 알려져있으나 한국어나 독일어로 레오폴트 폰 존라이트너를 검색하면 백작에 해당하는 Count나 Graf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존라이트너의 성명이 Leopold Graf von Sonnleithner가 아닌 Leopold Edler von Sonnleithner라는 것을 봤을 때 그는 백작이 아닌 하급 귀족(Edler는 오스트리아의 작위 중 가장 낮은 등급의 작위이다. 영어로는 단순히 Noble, Nobleman으로 번역한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출생 당시 레오폴트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존라이트너, 즉 평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더더욱이 백작과는 거리가 멀다. 여담으로 그의 할아버지였던 크리스토퍼 존라이트너는 오스트리아의 법학자이자 작곡가였다고 하며 그의 아버지인 이그나츠 폰 존라이트너 역시 변호사였다고 한다. 아버지 이그나츠 역시 슈베르트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며 아버지 이그나츠와 아들 레오폴트는 슈베르트를 비롯해 베토벤, 프란츠 그릴파르처 등 당대 유명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굉장히 유명했다고 한다.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겸 변호사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극작가였는데 프란츠 그릴파르처의 어머니가 레오폴트 폰 존라이트너의 고모였기 때문에 둘은 사촌지간이 된다. 어쨌든 슈베르트를 후원하던 이그나츠 폰 존라이트너 (아버지 존라이트너)와 아들 레오폴트 폰 존라이트너 (아들 존라이트너) 모두 백작이 아니었으며 존라이트너 가문은 법조인과 음악가를 배출하던 부르주아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16] 낭만주의 이후 작곡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곡에 여과없이 투여했기에 일반인이든 음악인이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슈베르트의 곡은 유독 심한 편이다. 다만 다작을 한 작곡가인 걸 감안하면 형식미가 헐거운 대신 선율미가 돋보이는 자신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곡의 수준이 급작스레 널뛰기하는 경우는 비교적 없는 편이다.[17] 한국의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이 난곡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8] 생애 항목에도 있듯이 슈베르트는 죽기 1년 전에야 겨우 피아노를 장만했다. 그 전에는 기타로 쳐보거나 그냥 머릿속 상상으로 작곡을 했다. 이처럼 악기를 제대로 접하지 못했으니 악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19] 대표적으로 에이드리언 볼트 경, 한스 켈러의 평론이 있다.[20] 이 문제는 슈베르트가 요절한 것이 정말 안타깝게 느껴지는 사안인데, 아무리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들일지라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대체로 30대 이후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도 일찌감치 신동으로 소문나기는 했지만 비인 후기시절, 즉 30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적인 명작들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며 베토벤이 선배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한 것도 30대가 된 이후였다. 슈베르트도 9번 교향곡이나 3개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등 생애 말년에 작곡한 작품들에서 선배들의 영향을 벗어난 슈베르트만의 음악성이 엿보이고 있는데, 아쉽게도 자신만의 음악을 본격 펼쳐보기도 전에 사망해 버렸다.[21] 이처럼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의 경우 통상적으로는 약점으로 불릴만한 사항이 역설적으로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무소륵스키인데, 그가 음악공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점이 오히려 그의 음악의 독창성을 배가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무소륵스키 항목 참조.[22] 슈베르트의 소나타는 연주시간이 매우 긴 반면 청중들을 열광시킬 요소는 부족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슈베르트의 곡 대부분은 딱히 콘서트 연주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 아니기 때문.[23] 다만 그의 초기작품에 속하는 방랑자 환상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꽤 인상적인 푸가토가 등장하는데, 아쉽게도 이후 작품에서는 이런 대위법적인 경향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24]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도 스스로 연주하지 못했다. 심지어 쉬운 수준의 가곡 반주도 버거워했을 정도.[25] 베토벤의 경우 말년에 들어서는 의뢰자가 아무리 명망있는 사람이건 쌩까고 자기 맘대로 작곡하는(...) 일을 자주 보였는데, 그만한 위상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베토벤조차도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할 적에는 마음에 안 드는 의뢰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대 푸가의 편곡 등[26]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슈베르트의 음악은 다른 의미로 연주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악기에 대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작곡을 했기 때문이다.[27] 진짜 성공한 사람은 펠릭스 멘델스존으로, 음악가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전에 거머쥐었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그 또한 오래 살지 못하고 요절했지만.[28] 18세기부터 연가곡과 비슷한 시도가 있었는데, 대작곡가급에서 작곡된 최초의 연가곡은 보통 1816년에 작곡된 베토벤의 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8)'로 보고 있다.[29] 이런 활용은 슈베르트만의 특징은 아니다. 슈베르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베토벤 역시 가곡 선율을 다른 작품에 활용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Op. 80의 합창환상곡인데, 25살경에 작곡한 가곡 Gegenliebe(Woo 118의 2번째 곡)의 선율을 활용했다.[30] 이 중 완성된 피아노 소나타는 단 11곡에 불과하며, 그 중 3곡이 유작으로서 Op.posth 번호가 붙어 있다.[31] 도이치 카탈로그 초판에 의한 번호 8번. 같은 카탈로그 개정판은 7번으로 표기.[32] 도이치 카탈로그 초판에 의한 번호 9번. 같은 카탈로그 개정판은 8번으로 표기.[33] 오토 도이치라는 음악학자가 정리한 슈베르트 작품 번호 목록. 도이치 번호(D)의 도이치가 바로 이 오토 도이치이다.[34]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야심차게 작곡한 현악 4중주이다. 다만 여러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곡을 작곡하는게 익숙지 않았을 때여서, 각 악장의 조성이 모두 따로논다. 1악장은 C단조-G단조, 2악장은 F장조-C장조(트리오 부분), 3~4악장은 B플랫 장조...[35] 단악장의 현악 4중주라는 뜻이다. 현악 4중주 11번을 작곡한 이후, 다른 곡들을 많이 작곡한 후 작곡해서인지 표현이 훨씬 원숙하다. 완전히 작곡되었다면 어떠하였을지 매우 기대되는데 단악장이라 아쉬움이 남는다.[36] 4악장의 "송어" 주제가 유명한 곡.[37] 피아노 3중주 구성이다.[38] 2악장이 특히 유명하며, 여러 CF 배경음악과 영화음악 등으로 쓰인 곡이다.[39] 부제를 'Grand Duo'라고 하기도 한다.[40] 바이올린+피아노 구성[41] 죽기 1년전인 1827년말의 작품으로 2악장 주제와 변주의 멜로디가 자신의 가곡 "Sei mir gegrüßt D.741"이다. 기교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바이올린, 피아노 모두 매우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42] 유작이다.[43] 이 곡은 2대의 피아노로 연주한다[44] 2악장의 주제가 가곡 "방랑자"에서 따왔다고 방랑자 환상곡이다. 총 20분가량의 단일곡이며, 구성에 따라 4악장으로 나뉘는 이 곡은 훗날 리스트가 연구하여[45] 슈베르트 사후 40년이 지나 발표된 유작으로 즉흥곡 D.899와 D.935를 잇는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는데 브람스가 악보를 정리해 출판했다. 2번 E플랫장조가 알려졌다.[46] 슈베르트의 소나타 중에는 미완성인 곡들이 많으며, 이 때문에 작품 번호를 붙이는 방식이 여러가지이다. 여기서는 IMSLP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취소선으로 된 곡들은 미완성된 곡.[47] 3~5악장만 모아서 D.459a가 된다.[48] 초판은 Db장조 D.567으로 미완성이다.[49] 부제가 'Reliquie(귀중한 유품)'가 된 것은 이 작품이 슈베르트 사후 30여년이 지나고 발견됐을 때 이 소나타를 그의 최후 작품으로 오해했던데에서 비롯됐다.[50] 오스트리아의 Bad Gastein에서 작곡되어 'Gasteiner'란 부제가 붙었다. 무라카미 하루키해변의 카프카에 이 곡에 대한 하루키의 깊은 생각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51] 이 곡을 출판한 토비아스 하슬링거가 환상적 분위기의 1악장을 염두에 두고 'Fantasie'라고 부른데서 유래됨.[52]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이자 생애 최후의 작품이다.[53] 모두 20곡 구성이다.[54] '겨울나그네'라고도 알려져 있다. 모두 24곡 중 5번째 곡이 널리 알려져 있는 보리수이다.[55]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에 작곡되어서인지 묘하게 암울한 곡이 많기도 하지만, 원래 시 자체가 암울한 내용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도 암울한 내용인 것을 보면 굳이 죽음을 예감하고 이런 곡을 작곡했다라기보다 그냥 슈베르트 개인 취향일지도 모르겠다...[56] 모두 14곡 중 4번째 곡이 그 유명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Ständchen)이다.[57] 제목이 약간 사망 플래그같지만, 이 연가곡집은 슈베르트가 직접 '백조의 노래'라고 이름붙여서 출판한 것이 아니라, 슈베르트 사후에 출판업자가 슈베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가곡들을 모아서 '백조의 노래'라 이름붙이고 출판한 것이다. 백조는 죽기 전에 한번 운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다만 슈베르트가 직접 연가곡집으로 만든 게 아니기에, 다른 연가곡집들처럼 스토리가 연결되지는 않는다.[58] An die Musik[59] '숭어'가 아니다! 번역 오류로 많이들 잘못 알고 있는 제목. 송어와 숭어는 전혀 다른 물고기이다. 모티브가 된 같은 제목의 가곡 '송어'는 강물 위를 헤엄치며 다니는 송어에 대한 가사인데, 숭어는 바닷물고기이다![60] D.929의 1악장은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에 필적할만큼 치밀한 구성과 아름다운 선율을 갖고 있어 상당한 인기를 갖고 있지만 2악장의 인지도에 밀려 현재는 1악장이라고 별도로 칭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61] 드라마 시작하면 머리가 간지러운 듯 긁는데 그야말로 대머리 수준 탈모가 되어 거울보고 경악하는 슈베르트가 나오며 시작했다..[62] Franz Anton Schubert (1768~1824), 이 문서에 나오는 슈베르트는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다. 차이라면 프란츠 페터는 오스트리아인, 프란츠 안톤은 독일인이었다.[63]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바가텔" 작품 13의 9번째곡으로 1분정도의 짧은 곡이나 왕벌의 비행보다도 세밀한 움직임을 잘 묘사했다.링크[64] 그게 하필이면 빵집주인이다.[65] 아시다시피 말년의 베토벤은 귀가 완전히 멀어서 말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글로 적어야 했다.[66] 당시 나폴레옹의 포격에 슈베르트의 모교도 피격되어 일부 부서져서 빡친 거라고 그런다.[67] 내성적인 것과 사교성이 있고 없고의 얘기는 별개라서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격인데도 주위에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다. <삼국지>의 주역들 중 1명인 원소만 해도 과묵하고 말을 아끼는 타입이라서 측근들조차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고 하지만, 늘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서 젊은 시절에는 자택 앞에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의 수레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조정에서 청류파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슈베르트도 이런 타입에 가까웠다.[68] 말년에 슈베르트는 연주회를 자주 펑크냈고, 친한 친구들은 그나마 이해해 줬지만 고용인이나 출판인 등 계약 관계에는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69] 우울감으로 인해 음주를 하고 취한 상태로 집창촌을 드나들다 또다시 우울감에 빠지고 앞의 과정을 반복했으니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70] 40년 이상 세월이 있기에 물가 차이가 있겠지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정음악가로 받은 첫 연봉이 600굴덴이었고 이전 궁정음악가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가 20년 넘게 연봉 2500굴덴을 받았다고 한다. 베토벤은 9번 교향곡 초연 때 420굴덴을 벌어들였는데 슈베르트가 받은 수입은 당대 거장이던 베토벤의 신작 발표회 수입에 버금가는 거금이었던 것.[71] 나중에는 뮌헨 아카데미 조각과 교수를 역임하고 유럽 유명 성당을 비롯하여 영국, 프로이센 등 유럽 각지 왕실에게도 조각이나 그림을 주문받을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