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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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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초대 황제
프란츠 1세
Franz I
파일:Martin_van_Meytens_006.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프랑수아 에티엔
(François Étienne)
출생 1708년 12월 8일
로렌 공국 낭시
사망 1765년 8월 18일 (향년 56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인스브루크 궁전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1745년 9월 13일 ~ 1765년 8월 18일
오스트리아 대공
1740년 11월 21일 ~ 1765년 8월 18일
토스카나 대공
1740년 11월 21일 ~ 1765년 8월 18일
로렌 공작
1729년 3월 27일 ~ 1737년 7월 9일
서명 파일:프란츠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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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마리아 테레지아 (1736년 결혼)
자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1], 막시밀리안 프란츠[2]
아버지 로렌 공작 레오폴드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
형제 레오폴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루이즈 크리스틴, 마리 가브리엘 샤를로트, 루이, 조제핀 가브리엘, 가브리엘 루이즈, 레오폴드 클레망, 엘레오노르, 엘리자베트 테레즈, 샤를 알렉상드르, 안 샤를로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초기 생애3. 허수아비 황제
3.1. 합스부르크로트링겐
4. 기타5. 죽음6. 가족
6.1. 조상6.2. 자녀

[clearfix]

1. 개요

로트링겐/로렌 공작(1729~1737), 테셴 공작(1729~1765), 토스카나 대공(1737~1765), 오스트리아 대공(1740~1765), 신성 로마 제국 황제(1745~1765). 기타 칼라브리아 백작, 팔켄슈타인 백작[3] 등의 작위도 있으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작위가 적다. 그나마도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인 아내의 부군 자격으로 얻어서 아내와 공동 재위였다.

결혼 전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최서쪽에 위치한 로트링겐/로렌과 바(Bar)의 공작 프랑수아/프란츠 3세(François III Étienne de Lorraine / Franz III. Herzog von Lothringen und Bar)였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딸이자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담이 오가면서 단숨에 인생을 역전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로트링겐/로렌 공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가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어떻게 해서든 딸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주고자 했던 카를 6세는 로렌 공국을 프랑스 왕국에 넘겨주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획득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 프란츠와 마리아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타이틀이 차례로 그에게 주어진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 그리고 그 유명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버지다.

2. 초기 생애

파일:external/6298528134a584e2720848f83c3544682405a6b6aac2bfa2627808bb6a0bf033.jpg
15살 때 모습.

현 프랑스 동부 로트링겐/로렌과 바(Bar)의 공작[4] 레오폴드 1세(1679~1729)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뒤 불리게 된 독일식의 프란츠(Franz)가 아니라 프랑스식인 프랑수아 에티엔(François Étienne)이었다.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으로 공국이 프랑스에 합병되기 전의 로트링겐 공작 가문은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공령을 보호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30년 전쟁 때 프랑스가 로트링겐 공국을 일시 점령했을 때 당시 로트링겐 공작 카를 4세[5]는 오스트리아 으로 피신하여 일종의 임시 정부를 구성했고 30년 전쟁 이후에도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공국을 보호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더욱 친밀하게 지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오스트리아군에서 충실히 복무했다. 프랑수아 에티엔의 친할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부터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차녀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프랑수아의 어머니인 로렌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조카였기 때문에, 외가가 프랑스의 제2왕족인 오를레앙 가문이었고 혈연상으로는 유럽 양대 강국인 프랑스의 루이 15세나 훗날 아내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모두 친척 지간이다.[6]

파리 출신인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영향으로 프랑수아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했고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취미생활로 자연과학에 흥미를 보였으며 독학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 언어 교육도 많이 받았다. 다만 독해나 작문, 라틴어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아버지에게 타박을 받았다고 한다. 위로 형이 둘이나 있었지만 모두 요절하거나 자녀없이 죽어서[7] 1723년 로렌 공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친동생으로는 아버지 레오폴드의 4남 샤를 알렉상드르, 장녀 엘리자베트 테레즈(1711 ~ 1741), 차녀 안느 샤를로트(1714 ~ 1773)가 있으며, 이중 엘리자베트 테레즈는 사르데냐 왕국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결혼했다.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연애결혼으로 맺어진 것으로 잘 알려져있으나 100%는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버지 로렌 공작 레오폴드가 공공연히 프랑수아[8]를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장가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그의 처가인 프랑스가 긴장을 하고 경고를 할 정도였다.

로트링겐 공작가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조상대부터 끈끈한 사이로 프랑수아의 할아버지 카를 5세는 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호프부르크 궁정에서 활동했고 17세기 후반 대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 맹활약했다. 이런 인연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에게 시집갔다가 나이 스물에 청상과부가 된 페르디난트 3세의 차녀 엘레오노레[9]와 결혼했다. 참고로 프랑수아의 진외증조부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증조부가 페르디난트 3세[10] 이를 통해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부이자 6촌 지간이 된다.

로트링겐 가문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으로, 중세 전기 독일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로 무척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이후 로트링겐 공국을 7~800년 동안 지배하며 내려온 유서깊은 가문인데다 모계로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을 통해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피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의 배필로 적합할 정도로 적당히 지체가 높고 고귀하면서도 너무 세력이 강하지도 않아 데릴사위감으로는 그야말로 만점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진작부터 데릴사위 집안으로 레오폴트의 로트링겐 가문을 점찍었고, 레오폴드 공작의 장남인 레오폴드 클레멘트(클레망)를 빈으로 데려와 신랑수업(?)을 시켰다. 하지만 1723년 클레멘트가 사망했고, 그의 동생이었던 프랑수아가 로트링겐 가문의 후계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위감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형의 사망 직후 프랑수아는 즉시 빈으로 보내져 아버지 레오폴드 공작과 카를 6세의 지지 아래 신랑수업(?)을 받았다. 빈과 호프부르크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가 1729년 아버지 레오폴드 공작이 사망하자 귀국하여 로렌 가문을 물려받은 후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 또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받았던 테셴 공국[11]의 계승을 승인받았다. 프랑수아가 갓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을 무렵 빈에서 9살 연하인 카를 6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수아에게 플래그가 꽂혀버렸다. 이제 빼도박도 못 한다 카를 6세는 당시까지도 아직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12] 가문의 상황이 합이 맞고 프랑수아의 인성이나 지성이 쓸 만하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의 계승자가 될지도 모를 맏딸의 배우자로 최종 승인했다. 결국 이런저런 혈연과 국제정세와 동맹 등의 사정으로 양가의 승인과 주변 열강의 양해를 얻어[13] 1736년 2월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이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러시아 제국과 연합해 스페인-프랑스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로렌 공국은 당연히 전통적인 동맹에다 친인척인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그런데 전쟁 중 오스트리아는 라인란트, 로렌 지역 일대 및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에서 스페인에게 패배해 이곳들을 빼앗겼다.[14] 한편 그 와중에 스페인-프랑스가 밀고 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그단스크에서 포위되어 러시아의 공세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프랑스가 해상에서 그를 구원하는 데 실패하면서 결국 프로이센 왕국으로 탈출했다. 이쯤 되자 결국 전쟁의 향방은 안드로메다로 가기 시작했고, 영국네덜란드가 상대편인 오스트리아 편에 붙을 것을 우려한 프랑스가 결국 수세에 몰려있던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기로 타협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 선출을 승인하고, 오스트리아는 각국이 승인한 국사조칙을 재확인했고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승인받았으며, 미래의 사위 프랑수아가 로렌과 바 공국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파르마-피아첸차 공국을 얻으면서 영토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밀라노 공국과 연속된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스페인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사르데냐 왕국롬바르디아의 일부인 노바라와 토르토나를 얻었다.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로렌 공작이 되는 대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고 아우구스트 3세를 인정했으며 대신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의 칭호를 유지하는 것까진 허용(…). 폴란드령 리보니아[15]쿠를란트-젬갈렌에 대해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직접적 지배권이 인정되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토로 남았고 이곳은 이후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게 된다.[16]

그래서 800여년 간 내려온 로렌과 바 공국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인인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17]에게 반납하고[18] 대신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어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대공으로 영지를 이전하는 빈 협약에 서명하게 되었다.[19] 이 협약에 프랑스의 방계 왕족 오를레앙 가문 출신인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20], 프랑수아 본인도 해당 문서를 앞에 두고 결단을 내리지 못해 여러 차례(3차례란 얘기가 있다) 펜을 내던진 것을 약혼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매번 주워다 주어 결국 마지못해 서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사실상 갈굼을 당하며(…) 어거지로 조상에게 물려받은 영지이자 고향인 로렌 공국이랑 맞바꾼 '꿩 대신 닭' 토스카나에 전혀 애착이 가지 않았던 프랑수아는 1739년 딱 한 번 피렌체를 방문한 게 전부이고 대리인을 보내 대신 다스렸다. 때문에 그는 토스카나의 수도 피렌체 시민들의 경멸을 받았다.[21]

한편 로렌의 샤를이라 불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 남동생이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하는 바람에 겹사돈 관계가 되어버렸다.[22]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은 20대 때 출산 중 사망,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후손은 프란츠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만 이어진다.[23]

3. 허수아비 황제

173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을 한 프란츠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자의 부군이 되었지만 궁정 사람들은 프란츠를 그리 존경하지 않았다. 극장에 들어갈 때 궁중법도에 따라 서열 2위의 대우를 받는 등, 어딜 가나 부인의 아랫서열, 심하면 하인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전하라는 호칭으로 불리지조차 못했다. 그때만 해도 아들 못 낳는 것은 여자의 잘못이었지만 이 부부는 셋째 아이까지 딸이 태어나자 온 궁정이 프란츠 1세 탓을 했을 정도니…

프란츠가 궁정 신하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로 무시당하고 허수아비 왕 신세로 전락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노력 부재 탓도 있다. 프란츠 슈테판은 10대 중반부터 빈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지만, 끝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고 평생 프랑스어만을 사용했다. 그는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은 최초이자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24] 이렇게 프랑스어 사용을 고집하는 프란츠에 대해 빈의 시민들은 그를 외국인이라며 비난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반프랑스 정서가 있었다. 프랑스와의 적대감은 단순히 유럽 내에 경쟁하는 라이벌의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적은 발칸 반도를 점유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었다. 16세기 이래 오스트리아는 오스만과 오랜 적대 관계를 이어오며 국운을 건 전쟁도 여러차례 했고, 그 와중에 빈 포위라는 절체정명의 위기도 두차례나 겪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같은 기독교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기독교 유럽의 최전선에서 직접 이슬람의 맹주 오스만을 막아내며 기독교 세계를 지켜내는 수호자의 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차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전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오스만과 그 동맹국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동맹(Holy Alliance)을 맺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은 기독교 세계의 배신자 프랑스는 번번히 오스만과 협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을 공격하였다. 프랑스와 오스만의 양면 공격으로 오스트리아는 여러차례 위기를 겪었다. 프랑스는 기독교 세계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프랑스하면 치를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츠가 프랑스어를 썼으니 국민들의 비난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카를 6세가 죽은 1740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명목상으로 공동통치했으나, 이것은 남편의 체면을 고려한 의전상의 명목이고 사실은 실권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허수아비 신세였다. 중요한 건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부 결정했다. 뭐, 사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도 아닌 외지인을 공동 통치자라고 불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부부간에 트러블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고 상속령을 승계했지만 주변국들이 여성 승계를 트집잡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오스트리아와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위기를 겪었다. 카를 6세 생전 국사조칙을 승인했던 나라들이 일제히 뒤통수를 쳤던 것. 먼저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은 국사조칙 승인과 프란츠의 황제 선출을 대가로 슐레지엔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여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로렌이라는 소국의 군주로 처신하면서 국제 정세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던 프란츠 1세는 카를 6세가 물려준 허약한 병력으로는 강력한 프로이센 왕국군을 상대로 전쟁을 이기기 어려우므로 일단 강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반대했다.[25] 그 후로도 막후에서 꾸준히 교섭을 시도해보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꾸준히 프란츠를 압박했다. 방문이나 커튼 뒤에서 회담을 엿듣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프란츠가 양보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강아지 부르듯이 남편에게 신호[26]를 보냈다고. 결국 이 사건 이후 절대로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드러워서 안 한다 안 해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해 술레지엔을 뜯긴 걸 보면 프란츠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런 데서 보이듯 프란츠도 국사에 재능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27]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1년 6월부터 헝가리-크로아티아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헝가리인 귀족들은 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설에 감동 먹은 것과 별개로 남편과의 공동왕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왕비도 아니라는 이유(…)로 프레스부르크에서 열린 아내의 대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마차 안에 앉아 아내의 대관식을 지켜보았다.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외국 군주의 자격으로 참석하면 여왕의 부군 정도는 아니어도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쿨하게 넘긴 걸 보면 애초에 오스트리아고 토스카나고 별 관심도 없는 터에 헝가리크로아티아에는 더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프란츠 1세는 이후 헝가리 의회에도 당연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28]

한편 당시 돌아가는 상황은 오스트리아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헝가리를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왕권 승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 제국에서 이탈하려 했다. 보헤미아 왕국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보헤미아 왕위[29]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 데다 합스부르크 영지의 독일인 귀족들도 대거 이탈해 바이에른에 붙어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카를 알브레히트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대관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단 남편이 원래 하자고 했던 대로 일단 프로이센과 타협해 한숨 돌리는 동시에 바이에른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뮌헨을 포함한 바이에른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3년 후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알브레히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와의 타협을 통해 황제선거에서 남편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30]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이 아닌 남편이 황제로 선출된 이유는 살리카법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여성으로서는 전혀 비벼볼 방법이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란츠 1세가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먼저 죽자 후임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맏아들인 요제프 2세가 이어받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다시 되찾은 것은 이 자리가 동남쪽에 치우친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필수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같은 영방내 강대국도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고, 다른 선제후들은 권력이 강하니 내버려두더라도 제국내 수많은 주교령과 기사령, 제국도시에 대해 황제로서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었다. 나머지 소국들도 마찬가지였고. 아울러 가톨릭 교회나 교황에 대한 영향력에서 '황제'로서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수장'으로서 발휘하는 힘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1744년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쟁에 참가하려 했으나 아내의 제지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동생이자 동서지간이 되는 카를 알렉산더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믿었던 동생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연신 털렸다. 그래도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남편의 동생, 그리고 자신의 동생의 체통을 고려해 계속 묻지마 기용을 해줬다. 카를은 절치부심해서 뒤이은 1756년 7년 전쟁에서는 몇 번 정도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지만, 또 결정적일 때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하였다.[31]

3.1.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안쓰러운 허수아비 생애 때문에 얄짤없는 데릴사위로 보이지만 자기 가문도 명목상으로는 물려줬다. 결혼하면서 자신의 가문인 로트링겐과 부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합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성립했기 때문.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마리아 테레지아에서 끝났으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부터는 일반적으로 로트링겐 가문[32]으로 불러야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워낙 대단한지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되었다. 프란츠 1세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모데나 공국 에스테 가문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여 성립된 분가 역시 유사한 이유로 로트링겐에스테 가문이 아니라 합스부르크에스테 가문[33]이 되었다.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로트링겐 가문이 모두 에티호넨 가문[34]을 뿌리로 둔 가문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은 에티호넨 가문끼리의 결합이라고 인식되었다. 실제로 로트링겐 가문이 에티호넨 가문의 분파인지는 논란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가설도 존재하지만 당대 사람들의 인식 상으로는 어쨌든 에티호넨 가문의 범주 내에 들어갔다.

현대에 와서는 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도 로트링겐 가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혈통이지만, 유럽 최고 가문 중 하나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상이 대단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로트링겐 가문보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후계자들이 로트링겐 가문의 영지와 작위보다는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작위에 기반을 두기도 한 탓에[35] 일반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프레더릭 모턴이 쓴 글을 봐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을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칭한다.

어쨌든 양자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친가와 처가나 입적 가문의 성을 같이 붙여 쓰는 게 유럽의 전통이라[36] 정식으로 칭하자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으로 부르는 게 맞다. 페드루 5세부터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이 되었던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가문이나 표트르 3세부터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이 된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가문이 비슷한 사례인데, 이 가문들 역시 부계 가문인 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이나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보다는 주요 영지 및 작위와 연관된 모계 가문인 브라간사 가문, 로마노프 가문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4. 기타

그래도 가정에서는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금슬이 좋아[37] 슬하에 자식이 무려 16명이나 되었다. 자식들에 대한 내용은 마리아 테레지아/가족 관계 항목 참조. 엄격하고 깐깐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으나 아이들의 어리광만 받아주고 교육이나 장래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와 다른 남매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장녀 마리아 안나[38] 총명함과 성실함을 거의 유일하게 알아주며 무척이나 아꼈다. 때문에 자신이 죽기 전까지 큰딸이 궁전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으며 보호해주었다.[39]

경제에도 일가견이 있어 7년 전쟁 이후 피폐해진 오스트리아의 재정[40]을 부유하게 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장사 수완을 발휘했는데, 7년 전쟁 당시에는 적국이었던 프로이센에게 말사료, 식량 등의 보급물자를 엄청난 가격에 팔아 막대한 폭리를 취했고,[41] 한편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42] 환전과 송금, 융자, 예금 등의 업무를 맡는 기관을 설립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도 했다. 이 당시 그가 벌어놓은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냐면, 다른 나라들은 국가 예산 중 왕실 예산을 편성했으나[43] 오스트리아 황실은 별도의 왕실 예산이 없었는데도 후대의 자손들이 그가 쌓아놓은 재산의 이자만으로 지내고도 돈이 남았다고. 7년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을 때 프란츠 슈테판이 보증을 서서 국채 발행에 성공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재정적자로 파산상태라지만 유럽 대륙의 양대 강국 오스트리아 국가 신인도보다 프란츠의 개인 신용도가 높았다는 말.

자연 과학과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쇤부른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44]하고 곤충과 광석 컬렉션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당시 자연과학과 식물, 동물 연구를 하는 것은 학자나 지성인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모계로나마 섞여 있게 만든 인물이다. 몬페라토 후국의 혈통을 계승했기 때문.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후작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버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후작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후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는데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도 남계 후손이 끊겨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곤차가와 혼인하여 몬페라토 후작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 페데리코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역사의 로마 최후의 황제가 혈통은 다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엄청난 유산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왕가들은 통혼이 잦은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혈통상으로 연관이 있는 경우가 흔한데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동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5. 죽음

1765년 8월 18일에 차남 레오폴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갔다가 인스브루크에서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궁전에 남편을 위한 방을 만들었고, 이후로는 내내 상복만 입으며 남은 평생동안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자 문제로 자신을 마음고생시키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남편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던지 프란츠 1세의 사후 망가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듦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식욕으로 풀면서 급속도로 살이 찌기 시작했고, 성격도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바뀌었다.

6. 가족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란츠 1세
(Kaiser Franz I. Stephan)
<colbgcolor=#fff3e4,#331c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éopold, duc de Lorraine)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c de Lorraine)
로렌 공작 니콜라스 프랑수아
(Nicolas François, Duke of Lorraine)
로렌의 클로드 프랑수아즈
(Claude-Françoise of Lorraine)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von Österreich)
페르디난트 3세
(Kaiser Ferdinands III.)
엘레오노라 곤차가
(Eleonora Gonzaga)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Charlotte d'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duc d'Orléans)
루이 13세
(Roi Louis XIII de France)
오스트리아의 안나
(Ana de Austria)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Prinzessin von der Pfalz)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
(Kurfürst Karl I. Ludwig von der Pfalz)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Charlotte von Hessen-Kassel)

6.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Maria Elisabeth)
1737년 2월 5일 1740년 6월 7일
2녀 마리아 안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nna)
1738년 10월 6일 1789년 11월 19일
3녀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Karolina)
1740년 1월 12일 1741년 1월 25일
1남 요제프 2세
(Joseph II.)
1741년 3월 13일 1790년 2월 20일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
슬하 2녀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45]
4녀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Herzogin von Teschen)
1742년 5월 13일 1798년 6월 24일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슬하 1녀
5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Maria Elisabeth)
1743년 8월 13일 1808년 9월 22일
2남 카를 요제프 대공
(Erzherzog Karl Joseph)
1745년 2월 1일 1761년 1월 18일
5녀 파르마 공작 부인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Duchessa di Parma)
1746년 2월 26일 1804년 6월 18일 페르디난도 1세
슬하 1남 3녀[46]
3남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1747년 5월 5일 1792년 3월 1일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슬하 10남 4녀[47]
6녀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Carolina)
1748년 9월 17일 1748년 9월 17일
7녀 마리아 요하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Johanna)
1750년 2월 4일 1762년 12월 23일
8녀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
(Erzherzogin Maria Josepha)
1751년 3월 19일 1767년 10월 15일
9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Regina di Napoli e Sicilia)
1752년 8월 13일 1814년 9월 8일 페르디난도 1세
슬하 6남 9녀[48]
4남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Ferdinand Karl, Erzherzog von Österreich-Este)
1754년 6월 1일 1806년 12월 24일 마사 여공작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슬하 4남 3녀[49]
10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Reine de France)
1755년 11월 2일 1793년 10월 16일 루이 16세
슬하 2남 2녀[50]
5남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
(Maximilian Franz, Erzbischof und Kurfürst von Köln)
1756년 12월 8일 180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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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어로 마리 앙투아네트[2] 쾰른 선제후.[3] 팔켄슈타인 백작의 이름은 나중에 이 작위를 물려받은 장남 요제프 2세가 가명으로 활용했다.[4] 로렌(독:로트링겐)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고, 바 공국은 프랑스 왕국의 권역이다. 로렌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동프랑크 왕국이었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부족 공국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왕족과 동등 혼인이 가능한 동시에 프랑스 궁정에서도 발루아 왕조 시절부터 로렌 가문 분가인 기즈 가문,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가문들,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 공작가와 더불어 준왕족 취급을 받았다.[5] 프랑스식으로는 로렌 공작 샤를 4세.[6] 루이 15세와는 7촌이며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6촌이다.[7] 부모인 로렌 공작 레오폴드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장남 루이(1704 ~ 1711), 차남 레오폴드 클레망(1707 ~ 1723). 루이와 레오폴드 클레망 외에도 유아기에 죽은 형이 한명 더 있다.[8] 1723년 이전에는 당연히 그때까지 살아있던 자신의 상속자인 프랑수아의 형 레오폴드 클레망(1707-1723)을 합스부르크의 신랑감으로 밀었다.[9] 레오폴트 1세의 이복누이이다.[10] 프랑수아는 페르디난트 3세의 차녀 엘레오노레의 친손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페르디난트 3세의 차남 레오폴트 1세의 친손녀다.[11] 본래 폴란드 왕국 영토였지만 1335년 트렌첸 조약으로 보헤미아 왕국에 양도했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게 된 땅이다. 프랑수아의 부친 레오폴드는 가까운 친척이었던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공작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 계승권을 요구했는데, 이 지역은 카를 6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동맹의 대가로 사보이아 공국에 양도하기로 이미 약속한 뒤였으므로 대신 자신의 테셴 공국을 떼어주었다. 어차피 로렌 가문은 합스부르크의 친척이기도 했고. 이후 현대엔 폴란드체코가 모두 영유권을 주장해 오늘날 체코의 체스키테신(Český Těšín), 폴란드의 치에신(Cieszyn) 지역으로 나뉘었다.[12] 국사조칙은 아들을 못 낳을 것을 대비한 보험용이었다. 1713년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공표했는데, 마침 유일한 아들이 태어났으나 요절하고 그 후 맏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고 이후 카를 6세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13] 동맹국 영국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유럽의 다른 왕국의 군주와 혼인해 동군연합이 되는 것에 반대했고 프랑스는 로렌 공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합쳐지는 걸 밥통 싸들고 반대, 그 결과 한 판 붙는다.[14] 다행히도 상대편이었던 스페인-프랑스 역시 이탈리아 원정에서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15] 현재의 라트비아 라트갈레 지역.[16] 1738년 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토스카나 대공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생각보다 오래 살아서(?) 1738년에야 사망해서 발효된 것이지 1735년에 빈에서 이미 예비조약으로 조건은 합의되었다.[17]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는 결국 오스트리아-러시아가 지지한 아우구스트 3세가 다시 회복, 유지했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트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루이 15세의 장인이다(…).[18] 하필이면 로렌 공국을 프랑스 국왕이 아니라 국왕의 장인에게 돌렸느냐 하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위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사위가 장인에게 여생이나 보내란 식으로 준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의 사후 로렌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19] 토스카나는 메디치 가문의 혈통이 끊어진 후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돈 카를로스 왕자(훗날의 카를로스 3세)가 소유권을 주장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전쟁 중 점령하고 스스로 즉위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그대로 갖는 대신 토스카나의 소유권 주장을 포기하며 어머니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상속분이었던 파르마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넘겼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결국 파르마 공국은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펠리페 왕자에게 넘어갔다.[20] 어머니와 달리 동생 샤를은 야심가에 출세지향적인 성격이라 형의 결혼과 조상 땅 팔아먹는 것을 적극 찬성(?)했다.[21] 더구나 오스트리아군이 토스카나를 장악하고서 곧바로 피렌체 내의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상징들을 떼어놓았기 때문에 민심이 더욱 떠나갔다.[22] 장인 카를 6세는 로렌 가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경계해 이 결혼을 반대했다. 때문에 그들은 카를 6세가 죽은 후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23] 로렌의 샤를은 7차 대튀르크 전쟁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활약하고 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형 빽으로 장군이 된다. 그리고 로렌과 바의 공작 칭호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는데 그냥 명목상 타이틀이고 실제 로렌 공국은 1766년에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진 게 맞다.[24]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니었던 황제로는 네덜란드어(플란데런어)가 모국어였던 카를 5세와 스페인어(카탈루냐어)가 모국어인 페르디난트 2세 형제가 있다. 하지만 카를 5세도 독일어를 알아듣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독일어를 말할 수 있었기에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독일어로 진행되는 토론에 참석했고, 페르디난트 2세는 스페인 태생이지만 열심히 독일어를 배워 나중에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25] 마리아 테레지아 항목에도 나오지만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려고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않는 바람에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했던 데다, 10대 때부터의 임신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군대에 대해 남편만큼 잘 알지는 못 했다.[26] 야사에서는 외교관을 통해 내용을 듣게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란츠 1세를 동정했다고...[27]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위기간 내내 별다른 수완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아까운 능력을 썩힌 비운의 부군이라던가하는 평가받을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를 뻔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도 경험이 쌓이면서 각성했기 때문에 프란츠가 정무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28] 몇 년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요청해 헝가리 의회에서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긴 했다.[29]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자리이기도 했으며 페르디난트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몇백 년간 독점했다.[30] 막시밀리안 3세의 숙부 클레멘스 아우구스트가 쾰른 선제후였기 때문에 2표를 확보하였고 보헤미아 여왕으로서 자신의 1표, 동맹인 영국 국왕 조지 2세하노버 선제후 1표, 전통적인 지지자 마인츠 선제후트리어 선제후의 1표씩,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1표 총 7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는 본인에게 셀프투표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끝까지 엿이나 먹으라면서 카를 테오도어에게 투표했다.[31] 대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해서 선정을 베풀었다. 애초부터 군대가 아니라 행정이 체질이었을지도.[32] 프랑스어로는 로렌 가문이다.[33] 이탈리아어로는 아스부르고에스테 가문이다. '합스부르크에스테의' 라는 뜻으로 d'Asburgo-Este로 표기하면 다스부르고에스테로 발음된다.[34] 7세기에 알자스 공작 아달리히 혹은 에티호가 세웠다고 알려진 가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 로트링겐 가문, 슈바벤 지역을 다스렸고 나중에 바덴을 통치하는 체링겐 가문 등이 에티호넨 가문의 분파라고 추측된다.[35] 기존 로트링겐 가문이 차지했던 로트링겐 공작 작위는 루이 15세장인에게 넘어갔다가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졌고, 로트링겐 지방은 프랑스에 뺏겼다.[36] 여러 대에 걸쳐서 가문이 합쳐지거나 양자로 가거나 하면 가문명이 엄청나게 길어져서, 가문명이 길수록 가문의 역사 추정이 가능할 지경이다.[37] 사실 바람을 숱하게 많이 피웠다. 전근대 사회였으니 남자가 바람피우는데 뭐라 할 만한 명분도 없었고. 자존심 강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내연녀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녀도 당시 남편의 이례적인 위치를 고려해서 어느 정도의 바람은 눈 감아줬다. 당장 16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낳은 것만 봐도 부부관계가 소원한 건 절대 아니었다.[38] 사실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녀는 마리아 엘리자베트였지만 고작 3살 때 요절했기 때문에, 마리아 안나가 사실상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의 장녀이자 맏이였다.[39] 마리아 안나는 거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고, 특히 남동생 요제프 2세와 그의 아내인 이사벨라와는 원수지간이였다. 한때는 프란츠 1세마저 마리아 안나를 외면했을 정도. 그래도 아버지 프란츠 1세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해하며 잘 지냈지만 남매들간의 관계만은 개선의 여지가 없어서, 결국 마리아 안나는 프란츠 1세가 죽고 요제프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함께 수녀가 된 여동생 마리아 엘리자베트(장녀 마리아 엘리자베트와는 동명이인)와는 화해해서 평생 절친하게 지냈고, 나중에는 요제프 2세도 누나와의 사이가 회복되어 마리아 안나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40] 7년 전쟁 비용으로 국가 수입의 11년치를 꼴아박았다.[41] 매점매석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적국에게도 대출을 해준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이적행위보다는 오히려 적국에 대한 트롤링에 가깝다. 더군다나 깊게보면 적국에 경제적 부담을 주면서 자신의 국가를 부유하게 만드므로 오히려 고도의 방책.[42] 정확하게는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된 신용을 담보로 한 거다.[43] 예컨대 18세기 프랑스는 국가예산의 3%가 왕실 예산이었다.[44] 지금도 빈 쇤부른 궁전의 정원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궁전 내부를 보고 난 후 구경한다. 동물원이 조성이 된 지 2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동물원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으며, 특히 최우수 등급을 받은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자이언트 판다와 코알라를 사육하고 있다.[45] 카를 7세의 막내딸.[46] 루도비코 1세[47] 프란츠 2세, 페르디난도 3세, 테셴 공작 카를 대공[48]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체스코 1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아멜리[49]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50]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 테레즈, 루이 1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