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김광석 사망 사건 | |||
▲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오열하는 노영심[1] | |||
<colbgcolor=#000> 발생일 | 1996년 1월 6일 3시 30분경 발생일로부터 [dday(1996-01-06)]일 | ||
발생 위치 | 원음빌딩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398-12)[2][3] | ||
유형 | 사망 (전깃줄에 의한 질식사) | ||
원인 | 평소 겪어오던 조울증으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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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6년 1월 6일 동아일보 30면 가수 金光石 숨져 자택서 부인과 술마신뒤 목매[4][5] |
가수 김광석 자살 (1996.01.06/KBS뉴스) | 가수 김광석씨 자살, 인기가수들의 잇따른 자살소동 (1996.01.06/MBC뉴스) |
1996년 1월 6일 가수 김광석이 사망한 사건.
2. 타임라인
2.1. 1996년 1월 5일
사망 하루(1996년 1월 5일 20시 추정)[7]7시간 전에 출연한 것이다. 유사 사례로 김성재와 hide가 있다. 김성재는 17시간, 히데는 12시간 전까지 음악 활동을 하였다. 오슨 웰스도 사망 12시간 전에 머브 그리핀 쇼에 출연하였다. 셋의 죽음의 차이가 있다면 김광석, 김성재가 여전희 의문사, 음모 등으로 계속 죽음이 정말 자살일까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반면 hide는 이후에 사인이 제대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전에 출연한 김광석 |
이날 김광석은 박학기, 장필순과 함께 음악 프로그램인 박상원의 '겨울나기'에 출연해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과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불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방송 활동이 되었다.[8]
방송 녹화가 끝난 후 김광석은 박학기에게 “홍대역으로 가자“고 했으나 박학기는 밤 12시에 공연 연습이 있어 갈 수 없었고, 결국 “연습이 끝나고 보던지, 내일 보던지 하자”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9]
이후[10] 백창우 시인과 홍대 블루스하우스[11]와 커피숍[12]에서 한국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운동의 일환으로 제작되던 '노래로 만나는 詩'라는 차기 음반의 편곡, 재킷 등 여러 계획을 논의했다.[13][14]
2.2. 1996년 1월 6일
백창우와의 논의가 끝나고 김광석은 백창우에게 자신의 집에 가서 술을 한잔 더 하자고 권했지만 백창우는 부인에게 민폐가 되고 자신도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거절했으며 김광석은 0시 30분에 본인 소유 원음빌딩 자택에 귀가하여 아내와 함께 새벽 3시까지 약 2시간 20분 동안 맥주 4병을 나눠 마시고[15], 몇 시간이 지난 새벽 3시 30분 아내이자 최초 목격자였던 서해순이 나와 보니[주의] 그는 거실 옆에 있는 옥상인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전깃줄로 목이 매인 채 발견되었다.아내는 김광석이 살아 있는 줄 알고 한동안 신고하지 않고[17] 20여분 동안 김광석의 귀에 피를 내고 인공호흡을 실시했으며 3시 50분에 119에 신고한다. 결국 발견된 지 1시간이 지난 새벽 4시 30분에야[18]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현장에서는 그가 죽기 전까지 마셨던 맥주와 안주들, 그리고 재떨이가 있었다. 김광석이 생전 피우던 말보로 골드(당시 말보로 라이트)의[19] 꽁초와 담배갑도 발견되었다.
이후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으나 '평소 조울증 증상을 보여왔다'는 아내 서해순의 증언과 1995년 8월 가수생활 11년을 맞아 라이브 콘서트 1천회 기록을 세운 뒤 "음악세계에 한계를 느낀다"며 심한 허탈감을 호소했다는 주변 동료들의 진술에 따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발표되었다.
3. 사후
3.1. 1996년 ~ 1999년
- 1월 8일에는 벽제 화장장에서 시신이 화장되었다.[20] 이날 인천광역시 남동구에서 평소에 좋아하던 인기 가수였던 김성재, 서지원, 김광석의 잇단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은 여중생이 똑같은 수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사망하였다.#
- 1월 25일에는 김광석, 서지원의 극단적 선택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선언[21]에 조직폭력배가 개입하였다는 소문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아무런 소식 없이 종결되었다. #
3.2. 2000년대
- 2001년 1월 27일 MBC 수요예술무대에선 김광석 추모 공연을 녹화해 방송했다.
- 그의 사후에 저작권 문제로 법적 분쟁이 이어졌다. 1996년 김광석이 사망하자 부인은 김광석의 딸이 상속하였음을 주장하였고 아버지는 자신이 김광석을 대리하여 킹레코드와 계약할 당시 김광석으로부터 권리를 양수하였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에 소송이 있었으나 법원이 중재에 나서 지적재산권을 나누어 행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아버지는 기존 4개 음반에 관한 권리를 갖고 부인은 라이브 음반에 관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상호 인정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자신이 사망하면 권리를 손녀(김광석의 딸)에게 상속하기로 명시하였다. 2004년 김광석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김광석의 어머니인 이달지와 형이 신나라뮤직의 합의가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부인 서해순과 딸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8년 대법원에서 패소하였고 판결 내용에 따라 저작권이 김광석의 딸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조정합의로 최종 종결되었다.##
- 2009년 독일의 언더그라운드 힙합그룹인 Die Orsons가 김광석을 추모하는 <Kim Kwang Seok>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 이 노래는 유튜브에 공개되었는데 가사는 죽은 김광석을 찬양하면서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보러가기[22]
3.3. 2010년대
- 2016년 정규 시즌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의 첫 경기에서 김광석의 일어나와 먼지가 되어가 울러퍼졌다.
- 2016년 12월 28일 KBS1의 교양프로그램 '감성과학프로젝트-환생'에서 김광석의 모습과 목소리를 6개월의 기간 동안 그대로 복원하였다.[23]
- 2017년 9월 19일 김광석의 음반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던 딸이 10년 전에 이미 사망했고 김광석의 부인이 상속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3.4. 2020년대
- 2021년 1월 29일 SBS 신년특집으로 기획된 세기의 길 AI vs 인간 4부작에서 AI 합성기술로 재현된 김광석의 목소리로 부른 노래들을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김광진의 편지와 김범수의 보고싶다[24]를 부르는 김광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 #2
- 2022년 6월 22일 그의 생전 마지막 공연인 1995년 10월 23일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에서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인 '못다 한 이야기'가 개봉되었다.
- 2022년 9월 20일 그의 데뷔 음반인 김광석 1과 김광석 2Nd가 재발매되었고 곧이어 10월 5일에는 김광석 3번째 노래모음이, 10월 24일에는 김광석 네번째가 재발매되었다.
4. 여담
- 그의 활짝 웃는 영정 사진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작품을 처음 생각하게 된 동기는 그 김광석 씨라고 가수가 자살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정 사진이 굉장히 제가 봤을 때 느낌이 있었어요. 영정 사진인데 이렇게 활짝 웃고 있더라구요. 거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게 됐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일상에서의 밝은 부분이 있을 거 같아요. 물론 고통도 있지만. 그런 밝음에 초점을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습니다."허진호 감독, Q채널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 <8월의 크리스마스> 편 인터뷰 중에서
5. 사후 논란
5.1. 사인 관련 음모론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의문사 음모론 문서 참고하십시오.타임라인에 서술되어 있듯이 김광석은 사망 전날까지도 이후의 일정들을 계획해 두고 있었고 갑자기 사망한 것에 대해 많은 추측이 돌아다녔는데 이는 이상호 기자가 동명의 영화를 만들면서 사망 관련 음모론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6. 둘러보기
- [ 정규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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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9. 20.{{{#!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1991. 2. 20.{{{#!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1992. 3. 20.{{{#!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1994. 6. 25.
- [ 커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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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3. 2.
1995. 3. 1.
- [ 사후 앨범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width=25%> ||<width=25%>||<width=25%>||<width=25%> ||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1996. 8. 13.{{{#!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1996. 8. 13.{{{#!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2001. 4. 1.{{{#!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2016. 12. 7.
[1] 김광석은 생전 노영심이 진행하던 ‘작은 음악회‘ 프로그램에 자주 나왔으며, 4집 앨범에도 그녀의 곡인 ’맑고 향기롭게’를 싣는 등 서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2] 도로명주소는 독막로7길 39[3] 현재 이정빌딩.[4] 유명인이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했을 경우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하여 '누가 어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까지만 언급하고 기사 말미에 자살예방상담소 등의 연락처를 기재하는 21세기의 뉴스 기사와는 달리, 당시에는 그러한 보도지침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위 기사처럼 자살 방법 등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5] 조선일보는 다음 날 올라온 '유명인들의 잇단 자살로 인해 젊은 팬들이 자살을 동경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취지의 기사에 김성재, 서지원, 김광석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이번 불상사가 생겼으니 가수의 자살 전염병이라도 있단 말인가? (= 유명 가수들이 줄줄이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했는데, 가수들한테는 무슨 자살도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나?)"라는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내용을 적기도 했다. #[6] 시를 노래로 만드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 음반에 넣기 위해 미리 만들어 둔 곡이 바로 부치지 않은 편지.[7] 다음날 새벽에 숨진 채 발견되었으므로 김광석이 자살하기 불과[8] 위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덥수룩한 머리를 거의 밀고 나왔다. 본인은 "복잡해서 털어버렸다"고. #[9] 본인의 증언. ’방송이 끝나고 박학기와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10] 백창우는 김광석을 만났을 때가 ’사망 10시간 전’이라고 증언했으나 김광석은 사망 7시간 전에 방송 녹화를 마쳤기에 시간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헤어진 시간은 아내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기에 만났던 시간을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11]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3-14번지에 있던 재즈바로, 현재는 합정동으로 옮겨갔다.[12] 블루스하우스의 음악 소리가 너무 커 근처 커피숍으로 이동하여 논의했다.[13] 이때 만들어진 노래 중 하나가 부치지 않은 편지. #[14] 백창우가 1995년 가을에 대학가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김광석을 만나고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운동에 앞장서 달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다만 1995년 가을에 유일하게 대학가에서 일어난 대형 시위는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며 일어난 시위인데 당시 김광석은 9월 29일에는 광주 동신대학교에서, 9월 30일에서 10월 1일까지는 전주대학교진리관에서 1000회 기념 콘서트를 진행하는 등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해당 시위의 여파로 일어난 소규모 시위 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15] 사망 이후 이루어진 부검에서 나타난 김광석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9%로, 현행 도로교통법상 운전면허 취소까지도 가능한 수치이다. 즉, 사망 당시의 김광석은 만취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주의] 아내의 1차 진술과 2차 진술, 그리고 김광석의 장모가 한 진술이 서로 다르다. 1차 진술에서는 안방에서 비디오를 보다 거실에 나오니 김광석이 계단에 누워 의식이 없었다, 2차 진술에서는 남편이 추울까봐 이불을 가지고 나와 보니 의식이 없었다, 인터뷰에서는 장난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장모는 김광석의 아내로부터 "자고 있는데 거실에서 '쿵'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의식이 없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17] 골든아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심정지 후 4분만 지나도 뇌에 손상이 가기 시작하고 10분이 지나면 사망, 기적적으로 살아도 영구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18] 홍대거리 상권에 상가가 빽빽하게 있었던지라 소방이 김광석의 자택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서해순이 직접 내려와서 같이 사건 현장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19] 2006년 미국 대법원 판결로 ‘라이트’ ‘마일드’ 등의 단어를 담배의 상표명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골드로 명칭을 변경했다. 대한민국에서는 2014년부터 골드로 판매하고 있다.[20] 이때 승려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사리가 아홉 과나 나왔다고 한다.[21] 1월 31일에 해체하였다.[22] 이 노래 덕분에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김광석이라는 가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도 유럽에서 가장 많이 김광석의 영상을 클릭한 나라는 독일이다. 2010년에는 일본에도 김광석의 영상이 인터넷으로 소개되었는데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넘어서서 넷상에서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후에도 종종 유튜브에서 김광석 영상을 찾아보면 "한국의 커트 코베인"이라든지 "한국의 밥 딜런" 같은 외국인들이 남긴 댓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23] 김광석의 모습은 홀로그램과 특수 분장으로 복원되었으며 목소리는 생전에 자신이 얘기한 내용을 따오거나 목소리가 매우 비슷한 사람이 더빙하였다. 모든 과정은 김광석의 유족들의 동의를 받았다.[24] 참고로 보고싶다는 2002년에 발매되었다.[25] 아무리 암흑같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노래가 희망이자 에너지가 되어 주겠다는 내용의 노래다.[26]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봄에 피어나는 새싹들처럼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겠다는 내용의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