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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31F20,#FFF | 개요 | <colbgcolor=#d00027> 산하 구단 | 리버풀 FC|리버풀 FC 아카데미 |리버풀 FC 위민 | |
선수단 | 스쿼드|스쿼드(간략)|아카데미 스쿼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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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시즌 | 2004-05|2005-06|2006-07|2007-08|2008-09|2009-10|2010-11|2011-12|2012-13|2013-14|2014-15|2015-16|2016-17|2017-18|2018-19|2019-20|2020-21|2021-22|2022-23|2023-24|2024-25 | |||
우승 기록 | 1부 : 19회 | 1900-01, 1905-06, 1921-22, 1922-23, 1946-47,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2019-20 | ||
2부 : 4회 | 1893-94, 1895-96, 1904-05, 1961-62 | |||
FA컵 : 8회 | 1964-65, 1973-74, 1985-86, 1988-89, 1991-92, 2000-01, 2005-06, 2021-22 | |||
EFL 컵 : 10회 | 1980-81, 1981-82, 1982-83, 1983-84, 1994-95, 2000-01, 2002-03, 2011-12, 2021-22, 2023-24 | |||
커뮤니티 실드 : 16회 |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2001, 2006, 2022 | |||
UEFA 챔피언스 리그 : 6회 | 1976-77, 1977-78, 1980-81, 1983-84, 2004-05, 2018-19 | |||
UEFA 유로파 리그 : 3회 | 1972-73, 1975-76, 2000-01 | |||
UEFA 슈퍼컵 : 4회 | 1977, 2001, 2005, 2019 | |||
FIFA 클럽 월드컵 : 1회 | 2019 | |||
서포터즈 | The Kopite | |||
응원가 | 응원가 목록|You'll Never Walk Alone|Allez, Allez, Allez | |||
관련 정보 | 더비 매치 | 노스웨스트 더비| 머지사이드 더비 | ||
사건 사고 | 힐스버러 참사|헤이젤 참사 | |||
기타 | 이스탄불의 기적|안필드의 기적|붉은 제국|부트 룸|제토 라인|마누라 라인 | |||
구단 시설 | 경기장 | 안필드(1892~현재) | ||
훈련 시설 | AXA 트레이닝 센터|AXA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 | |||
기타 | 연고지 | 리버풀 | ||
스폰서 | 스탠다드차타드(메인 스폰서)|나이키(킷 스폰서)|익스피디아(슬리브 스폰서)|AXA(트레이닝 스폰서) |
1. 개요2. 창단과 초창기
2.1. 리버풀 FC의 출발(1892~1896)2.2. 왓슨 시대(1896~1915)2.3. 전간기 리그 2연패 이후의 긴 침체기(1919~1939)2.4. 전후 챔피언, 그리고 이어진 강등(1946~1959)
3.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4. 영광의 시간 뒤에 찾아온 비극5. 침체기6. 중흥기7. 암흑기8. 몰락한 명가의 부활9. 새로운 시작1. 개요
잉글랜드의 프로 축구 클럽 리버풀 FC의 역사에 관한 문서.
2. 창단과 초창기
2.1. 리버풀 FC의 출발(1892~1896)
리버풀 FC의 창립자 존 하울딩 |
창단 당시의 리버풀 FC[1] |
리버풀 FC는 1892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지역의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존 하울딩에 의해 창설되었다. 하울딩은 원래 1878년 창단한 지역의 축구팀 에버튼 FC의 공동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에버튼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당시 리버풀 시내 스탠리 파크[2] 공터에서 경기를 진행하던 에버튼은 새로운 구장을 찾고 있었고 회장이었던 하울딩은 1884년 안필드 부지에 새로운 피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이 안필드 부지는 하울딩의 동료 양조업자 존 오렐의 부지였는데, 하울딩의 주도 아래 에버튼은 약간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홈 그라운드로 안필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91년 존 오렐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안필드 부지에다가 자신이 보유한 다른 토지로 이어지는 진입로를 놓겠다고 선언하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진입로는 안필드의 메인 스탠드를 통과하여 지어질 예정이었는데, 이 당시 영국에서 프로 축구 구단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경기장과 바깥 구역을 구분할 수 있는 제반시설[3]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진입로에 의해 메인 스탠드가 사라진다는 것은 안필드가 프로 축구 경기장으로서 활용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결국 이 상황을 막기 위해서 하울딩이 직접 안필드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하울딩과 에버튼 구단 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울딩은 경기장을 본인의 소유로 직접 구입했기에 수익을 위하여 에버튼의 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버튼 구단측에 대폭 상승한 경기장 임대료를 청구했고, 경기장의 소유권을 통해 구단 내에서 본인의 입지를 올리고자 했다. 당시 에버튼은 수 많은 주주들과 이사진의 회의를 통해 집단 운영되고 있었는데 하울딩은 이러한 구조 때문에 회장으로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적다고 느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러나 에버튼 이사진 또한 불만은 마찬가지였다. 구단 이사진들은 에버튼 선수단에게 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한 호텔을 이용하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하울딩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하울딩은 보수당 정치인이었고, 에버튼 이사회 인사들은 영국 노동당 정치인들이 많았으며, 하울딩은 양조업자인 반면 에버튼의 핵심 이사진들 중에선 성공회 목사 등의 종교계 인사들이 있어와 구단 내부에서는 껄끄러움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어져오던 갈등은 임대료 문제를 계기로 폭발하고 말았고, 하울딩과 에버튼 측의 의견 다툼은 봉합되지 못했다. 결국, 에버튼의 주주 279명은 1892년 1월에 회의를 열어 하울딩과 결별을 선언하고 홈구장 이전을 결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에버튼은 1892년 3월 15일 안필드를 떠나 구디슨 파크로 옮겨갔다. 에버튼이 안필드를 떠나자 하울딩은 직접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에버튼과의 결별 과정에서 존 맥케나를 비롯해 몇몇 인물들이 하울딩의 편에 남았고, 하울딩에게는 윌리엄 바클레이와 같은 조력자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합심하여 새 구단 창단 과정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1892년 6월 3일 리버풀 FC가 협회의 승인을 받아 탄생했다.[4]
1892-93 시즌 리버풀 선수단 |
새 구단은 원래 '에버튼 FC & 애슬레틱 그라운즈'라는 이름으로 축구협회에 창단 신청을 했으나 협회는 에버튼과 이름이 겹친다 하여 이를 불허했고 결국 리버풀 FC[5]로 구단명이 결정되었다. 하울딩은 리버풀의 초대 회장직에 앉았고, 구단 창립을 도운 바클레이는 초대 감독을 맡았다.[6] 에버튼이 갈등 과정에서 대다수의 인사들과 함께 떠나는 바람에 리버풀에는 달랑 3명의 선수만이 남아 있었고, 바클레이와 맥케나는 선수 수급을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수단은 맥케나가 스코틀랜드에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와[7] 몇몇의 잉글랜드 선수들과 함께 구색을 갖추었고 당시 지역 리그였던 랭커셔 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다.[8] 창단 첫 경기 상대는 1892년 9월 1일 로더럼 타운 FC와의 친선 경기였는데 200여명이 보는 가운데 7-1 승리를 거두었다. 첫 골의 주인공은 말콤 맥빈. 리버풀은 창단하자마자 랭커셔 리그에서 블랙풀 FC에 득실률(Goal Average)에서 앞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잉글리시 풋볼 리그 참가 신청을 했는데 리버풀 옆 동네의 부틀 FC가 재정 문제로 풋볼 리그에서 기권하면서 자리를 얻었고, 1893-94 시즌 디비전 2에 참가하며 본격적인 잉글랜드 리그에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리버풀은 1893-94 시즌 디비전 2에서 첫 해부터 맷 맥퀸, 해리 브래드쇼 등 당대 주축들의 활약에 힘입어 무패로 우승을 달성하면서 디비전 1 최하위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신 뉴튼 히스(Newton Heath)와 승강 플레이오프 격인 테스트 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창단 2년 차에 처음으로 1부 리그에 진출하게 된다.[9] 그러나 첫 1부 리그 시즌은 혹독했는데, 리버풀은 30경기에서 단 7승만을 거두며 16개 팀 중 16위로 디비전 2 1위였던 베리 FC와 테스트 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서 0-1로 패하며 한 시즌 만에 다시 강등되고 말았다.[10] 이후 초대 감독 바클레이는 감독직을 공식적으로 맥케나에게 넘기고 완전히 이사진으로 합류했으며, 맥케나가 이끄는 리버풀은 1895-96 시즌 디비전 2에서 마지막 14경기 12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스몰 히스[11],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와의 테스트매치를 통해 1년 만에 디비전 1 복귀에 성공했다.
2.2. 왓슨 시대(1896~1915)
톰 왓슨 감독 |
리버풀은 1년 만에 1부 리그로 복귀하였으나, 2대 감독 존 맥케나 또한 감독직을 사임하고 이사진으로 합류하게 되어 선덜랜드 AFC로부터 톰 왓슨(Tom Watson) 감독을 데려오게 되었다. 당시 왓슨은 감독으로는 젊은 36세였으나 이미 3번의 1부 리그 우승과 더불어 FA컵에서도 준결승에 3회 진출한 능력있는 감독이었다. 리버풀은 그를 데려오기 위해 그가 선덜랜드 시절에 받았던 연봉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을 제시했으며, 연봉 300파운드라는 당대 잉글랜드 최고 연봉으로 그를 대우했다.
왓슨 감독은 리버풀에 입성하여 초창기 구단의 시스템을 차근차근 구축했다. 특히 그는 선수들의 식생활과 컨디셔닝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왓슨 감독의 철학 아래 리버풀 선수단의 아침 식사는 8시 30분을 지켰고 차, 계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빵이나 숙성된 빵 위주의 식단이 제공되었다. 버터, 설탕, 감자, 우유 등은 금지되었다. 음주는 저녁에만 허용하고 훈련은 하루 두 번, 오전 9시 45분과 오후 3시 30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저녁 7시 반에는 팀 동료들과 한 시간씩 산책을 하게 했다. 이러한 섬세한 선수단 관리에 의해 왓슨의 선수단은 체계적인 조직력과 컨디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1896-97 시즌부터 리버풀은 붉은색 상의와 흰색 하의를 입고 경기에 나가기 시작했다.[12]
왓슨의 리버풀은 1896-97 시즌 리그에서 초반 1위에 오르며 승격팀임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돌풍을 선보였다. 팀은 다음해 초반까지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페이스가 떨어지며 결국 순위를 5위로 마쳤다. 그러나 왓슨의 훌륭한 지도력에 의해 리버풀은 그 시즌 FA컵에서 준결승에까지 진출하는 호성적을 달성했다. 당시 FA컵 결승에서 사상 첫 머지사이드 더비가 치러질 수도 있었으나 아스톤 빌라 FC에 0:3으로 패하며 결승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1897-98 시즌에는 이전 시즌 15골을 득점한 핵심 공격수였던 조지 알란(George Allan)이 셀틱 FC로 이적하여 공백이 발생하는 바람에 이전 시즌보다 더 떨어진 9위의 성적표를 받아야했고, 해당 시즌 구단 역사상 첫 머지사이드 더비 승리에 위안을 삼아야했다.
떨어진 순위를 만회하기 위해 리버풀은 다수의 선수들을 영입해 팀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구단 역사상 첫 슈퍼 스타라고 할 수 있는 19세의 수비수 [[
알렉스 레이스백]](Alex Raisbeck)이 안필드에 입성했고, 셀틱에서 조지 알란을 1년 만에 다시 데려왔다. 또한 우측 윙어 톰 로버트슨(Tom Robertson)과 공격수 존 워커(John Walker), 그리고 잭 콕스까지 폭풍과도 같은 영입이 이어졌다. 로버트슨은 첫 2시즌간 1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출장하며 리버풀에서 4시즌간 총 141경기 34골로 활약했고, 워커는 4시즌간 총 120경기 31골을 득점하며 팀을 이끌었다. 레이스백은 후에 풋볼 리그의 스타 플레이어로 발돋움하며 전설적인 커리어를 남겼으며 콕스는 리버풀에서 12년을 보내면서 361경기 80골을 득점하는 레전드가 되었다. 좋은 선수들을 수급한 왓슨호는 1898-99 시즌 영입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개막전에서 셰필드 웬즈데이 FC에 4-0 대승을 거두더니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창단 첫 더블을 거두는 등 창단 첫 1부 리그 우승을 겨냥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최종전 전까지 리버풀은 아스톤 빌라와 승점이 같았는데 득실률에서 0.2로 밀려 2위의 순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최종전 상대가 아스톤 빌라였기에 경기에서 이기면 우승이 가능했지만 사실상의 결승전에서 0-5 대패를 당하며 아쉽게도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같은 시즌 FA컵에서는 2년 전에 이어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셰필드 유나이티드 FC를 만나 재경기만 2번 치른 끝에 0-1로 패해 결승 진출은 또 다시 좌절되었다.
1899-00 시즌에는 직전 시즌 아쉽게 모든 대회의 문턱에서 좌절한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개막하자마자 8연패라는 충격스러운 성적을 기록하며 부진의 늪에 빠졌다. 게다가 팀의 핵심 공격수인 조지 알란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져 팀이 흔들렸으며, 전력 또한 약화되고 말았다. 다급하게 리버풀은 시즌 중 샘 레이볼드, 찰스 새터스웨이트(Charles Satterthwaite)를 영입하며 전력을 다졌고, 이에 후반기 상승세를 탔으나 전반기를 망친 탓에 리그 10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리버풀의 첫 1부 리그 우승 | 첫 1부 리그 우승 당시 '리버풀 에코'에 실린 포스터[13] |
이미 지난 시즌 중반부에 스쿼드를 다잡았기에 1900-01 시즌 리버풀은 별다른 보강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이후 지난 시즌 후반기의 기세를 이어가며 샘 레이볼드가 시즌 초 맹활약했고 중반부 페이스가 떨어져 1위 노팅엄 포레스트 FC에 승점 9점 차 뒤진 8위까지 떨어지기도 했으나 막판 12경기에서 9승 3무에 단 4실점 만을 기록하며 결국 역사적인 첫 번째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왓슨 감독 부임 이후 5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그러나 첫 1부 리그 우승의 영광도 잠시 그 이후 왓슨호는 부진에 빠져 두 시즌을 11위와 5위[14]로 마무리했다가 1903-04 시즌엔 급기야 18팀 중 17위로 시즌을 마쳐 우승한지 불과 3년 만에 두 번째 강등의 아픔을 겪고 말았다. 직전 시즌 31골을 득점한 간판 공격수 샘 레이볼드와 핵심 수비수 윌리엄 골디의 포츠머스 FC 이적 파동으로 인한 출장 정지 징계가 이 충격적인 강등의 원인이었다.[15] 그러나 다행히 리버풀은 첫 강등 때 그랬듯이 디비전 2에서 빠르게 전력을 회복했고, 볼튼 원더러스 FC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경쟁 끝에 우승하며 1년 만에 디비전 1에 신속하게 복귀했다.
절치부심하여 승격한 리버풀은 1905-06 시즌 초반 3경기에서 울리치 아스날 FC-블랙번 로버스 FC-아스톤 빌라 FC에 3패 11실점으로 최악의 출발을 했고 8라운드까지 5패를 당해 16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후 14경기에서 11승을 거두며 엄청난 상승가도를 달렸고 새해 첫날에는 결국 1위까지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16] 이후 리버풀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추격을 뿌리치며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 잉글랜드 최초 2부 리그-1부 리그 연속 우승의 대기록 수립에 성공했다. 해당 시즌 FA컵 준결승에도 진출했지만 숙적 에버튼에 0-2로 지며 더블에는 실패했다. 이 시즌 리그 우승 이후 그 유명한 콥 스탠드가 안필드에 세워졌다.[17]
그러나 두 번째 우승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리버풀은 아서 고다드와 잭 파킨슨[18]이 화력을 발휘하며 준우승을 차지한 1909-10 시즌을 제외하고 중하위권을 전전했다.[19] 1913-14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결승에 오르지만 번리 FC에 0-1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한편 1915년에는 맨유에 2-0으로 진 경기에서 양 팀 7명의 선수[20]가 1915년 영국 축구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려 해당 선수들은 리그 영구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21] 그리고 같은 해, 19년간 팀을 이끌던 톰 왓슨 감독이 폐렴으로 타계했다.[22]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리그는 4년간 중단되었고 참전했던 리버풀 선수들도 몇 있었으며 그중 윌프레드 바트롭은 전사하기도 했다.
2.3. 전간기 리그 2연패 이후의 긴 침체기(1919~1939)
엘리샤 스콧 | 고든 호지슨 |
폐렴으로 타계한 톰 왓슨 감독의 후임자는 데이비드 애시워스(David Ashworth)였다. 애쉬워스는 구단의 어려움을 빠르게 수습해 절륜하게 팀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전력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이에 리버풀은 에프라임 롱워스와 도날드 맥킨리로 이어지는 황금 풀백 라인을 앞세워 전쟁 후 첫 시즌이었던 1919-20 시즌 10년 만에 상위권인 4위로 리그를 마쳤고, 그 다음시즌에도 4위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애쉬워스호는 이어지는 1921-22 시즌에 마침내 세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후 1922-23 시즌에 기념비적인 리그 2연패에 성공하며 강자의 위치를 회복했다. 그러나 1922-23 시즌 중에 애시워스가 급작스럽게 팀을 떠나는 해프닝[23]이 발생했고, 그의 뒤를 이어 맷 맥퀸(Matt McQueen)[24]이 감독으로 부임, 위기가 생길 수 있었으나 팀을 잘 수습하여 첫 연속 우승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 당시 리버풀에는 롱워스와 맥킨리 듀오와 더불어 골키퍼 엘리샤 스콧(Elisha Scott)이 절대적인 에이스이자 스타 플레이어로 꼽혔다.[25] 그는 42경기 31실점으로 당대 42경기 체제 최소 실점으로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22-23 시즌 이후 리버풀은 전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또 다시 무관의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1928년에 콥 스탠드는 입석으로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수용인원을 가진 스탠드로 명성을 알렸다. 그러나 리버풀은 성공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결국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맥퀸 감독은 사임했고[26] 클럽 비서였던 조지 패터슨(George Patterson)이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감독이 바뀌었음에도 리버풀의 전력은 여전히 중위권에 머무를 뿐이었다. 팀 내에선 스코틀랜드산 전천후 플레이어 지미 맥도걸(Jimmy McDougall)과 함께 엄청난 득점력을 뽐내던 고든 호지슨(Gordon Hodgson)[27]이 아이코닉한 커리어를 쌓았으나 우승 없는 세월에 빛이 바랬다. 1933-34 시즌엔 승점 4점 차이로 겨우 강등을 면하기도 했다.[28] 1936년에는 패터슨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조지 케이(George Kay)가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팀은 계속해서 중위권 이하로 저조한 시즌을 보냈고 주축 선수들을 상위 구단에 넘겨주는 일이 발생하게 되며 전력을 지속적으로 잃고 있었다. 리버풀에서 리그 358경기 233골을 득점했던 고든 호지슨은 1936년 아스톤 빌라로 이적했고 그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서 리버풀은 1936-37 시즌 18위로 가까스로 강등을 모면했으며 그 다음 두 시즌도 11위에 그쳤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7년간 리그가 중단되었다.
2.4. 전후 챔피언, 그리고 이어진 강등(1946~1959)
전쟁은 리버풀을 비롯해 축구계 전체에 혼란을 야기했으나 조지 케이 감독은 절치부심하여 이 기간에 선수들을 결집시켰다. 징집으로 인해 선수들이 흩어지고 간헐적인 전시 리그만 가동될 뿐 제대로 된 클럽 축구가 작동하지 못했으나, 케이는 전쟁 이전에 빌리 리델, 밥 페이즐리, 잭 발머, 필 테일러 등 잠재력이 뛰어난 유망주들을 직접 팀에 수집한 상태였기에 직접 선수들에게 편지를 써 상황을 독려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했다.1945년에 길었던 전쟁이 끝나자 케이와 당시 팀의 회장이었던 W. H. 맥코넬은 전후 리그를 파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전쟁 직후 전국적인 식량난을 겪고 있었고 이는 선수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에, 리버풀은 프리시즌에 북미 투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는 맥코넬 회장의 결단으로, 영국보다 보급 상황이 나았던 북미에서 선수단에게 양질의 영양 섭취를 제공함과 더불어 새로운 시즌을 위한 전환점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리버풀은 뉴캐슬로부터 알버트 스터빈스(Albert Stubbins)를 영입해오면서 선수단의 전력에도 방점을 찍었다. 결국 드디어 재개된 1946-47 시즌, 리버풀은 24년 만의 우승이자 통산 다섯 번째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우승의 공신은 엄청난 화력을 뽐낸 스터빈스-발머의 투톱 듀오와 그 뒤를 지원한 빌리 리델(Billy Liddell)이었다. 스터빈스와 발머는 각각 24골씩 득점했으며 발머는 3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대와 192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승 이후 리버풀은 두 시즌 11위와 12위에 그치며 또 다시 추락했다. 1949-50 시즌에는 개막 19경기 무패로 새해 첫날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1950년 새해가 밝은 뒤 급추락하며 결국 8위에 그쳤다. FA컵에서는 35년 만에 사상 두 번째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스날 FC에 2-0으로 석패하며 다시 준우승에 그치는 아쉬움을 삼켰다. FA컵 준우승 이후 리버풀은 본격적으로 침체기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신임을 얻으며 그나마 전력을 결집하던 케이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1951년 사임한 이후, 돈 웰시(Don Welsh)가 새 감독이 된 것이 계기였다. 웰시 감독 체제 하에서 리버풀은 세 시즌 연속 중위권에서 버티다가 1953-54 시즌 꼴찌로 50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한편, 1952년을 기점으로 리버풀은 안필드에서 훈련하던 체계를 떠나 시내 웨스트 더비 지역의 멜우드 부지를 매입하여 구단의 전용 훈련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50년 만의 디비전 2 첫 시즌인 1954-55 시즌 리버풀은 역대 최악의 성적인 2부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 시즌에 버밍엄 시티를 상대로 구단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9-1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 다음 시즌인 1955-56 시즌에는 3위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2위까지만 승격이 가능해 승격의 꿈은 무산되었고 웰시는 결국 경질당했다. 이어서 과거 팀의 주장이었던 필 테일러(Phil Taylor)가 감독을 맡았다. 테일러는 구단에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팀을 다시 영광의 자리로 복귀시키겠다는 강한 일념을 가졌고, 이에 전력 강화를 위해 로니 모란(Ronnie Moran), 앨런 에이코트(Alan A'Court), 지미 멜리아(Jimmy Melia) 등을 영입하였다. 테일러호는 괜찮게 리그에서 순항하며 전력을 다잡기는 했으나 계속해서 아쉽게 3위-4위-4위로 한 끗이 모자란 성적을 이어갔고, 리버풀을 다시 디비전 1에 올려놓는 데 결국 실패했다. 구단 수뇌부는 1959년 1월 FA컵 3라운드에서 논리그의 우스터 시티에게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도 끝까지 그를 감독으로 신뢰했으나 1959-60 시즌 중반 저조한 성적을 내자 필 테일러는 자진해서 감독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당시 회장이던 T. V. 윌리엄스는 구단의 위기를 타개할 감독을 고심하게 되었고, 마침 허더즈필드 타운 AFC에서 보드진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빌 샹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3.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
10년 가까이 2부 리그를 전전하던 리버풀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최강자의 타이틀을 연속적으로 제패하는 장대한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들로 불리는 빌 샹클리 감독과 밥 페이즐리 감독이 팀을 이끌었다. 붉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제패하던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의 리버풀은 축구 역사상 가장 강한 팀 중 하나로 꼽힐정도로 위력적인 전성기를 과시했다.3.1. 샹클리 시대(1959~1974)
빌 샹클리 감독 |
리버풀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
빌 샹클리
빌 샹클리
He made the people happy.(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안필드 앞에 세워진 샹클리의 동상에 새겨진 문구.
안필드 앞에 세워진 샹클리의 동상에 새겨진 문구.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샹클리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리버풀의 역사는 빌 샹클리 감독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샹클리 감독은 1959년 12월, 윌리엄스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2부 리그에 있던 리버풀에 취임하자마자 리버풀을 세계 최강 무적의 요새로 만들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부임 당시 2부 리그에서 고전하던 팀의 구조를 혁신해 팀의 체질을 개선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샹클리는 직접 경기장과 훈련장의 인프라[29]를 개선하고 팀 내 운영 시스템[30], 훈련 방식[31] 등 구단 내, 외부적인 문제들을 모두 뜯어고쳤으며,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선수들은 과감히 방출하며[32] 스쿼드를 리빌딩하였고, 부트 룸(Bootroom)[33]을 만들고 코치진의 결속[34]을 강화했다. 그 결과 샹클리의 리버풀은 빠르게 2부 리그에서 벗어나 1960년대 이후 3회의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으며, 총 10개의 트로피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샹클리는 재임 기간 동안 구단의 정체성을 모조리 재창조하며 리버풀이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하는 데 실로 절대적인 공헌을 남겼고, 그의 코칭 스태프로 헌신했던 밥 페이즐리와 조 페이건이 샹클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감독으로 그 못지 않은 엄청난 성적을 거두게 되는 등, 구단 역사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리버풀의 위대한 '부트 룸' 코치진들 ,좌측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랜, 루벤 베넷, 톰 손더스, |
샹클리의 첫 두 시즌은 리빌딩 작업이 이어지며 3위의 성적에 그쳤다. 승격에는 실패했지만 샹클리의 지휘 아래, 팀의 현황은 세세하게 점검되었고 두 시즌에 걸쳐 리버풀은 24명을 방출하고 이안 캘러한, 로저 헌트 등 장차 팀의 주축이 될 선수들을 선발하여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1-62 시즌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론 예이츠, 이안 세인트 존을 영입하면서 팀의 전력을 더 강화시켰다. 결국 그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세 번째 시즌인 1961-62 시즌, 리버풀은 초반부터 개막 6연승에 11경기 10승 1무로 리그를 독주하더니 안필드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결국 62점의 승점으로 여유롭게 디비전 2 우승을 차지, 8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하였다.
8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한 1962-63 시즌, 샹클리는 초반 15경기에서 8패로 하위권으로 팀이 처지며 어려움을 겪자, 왼쪽 미드필더 윌리 스티븐슨을 영입하였고 그 효과로 9연승과 함께 하위권에서 5위까지 뛰어오르며 팀을 절륜하게 이끌었다. FA컵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저력을 보였다. 60년대 리버풀의 골문을 책임지는 전설적인 수문장 토미 로렌스도 이 시기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FA컵 준결승에서 레스터 시티 FC에 0-1로 지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고 리그에서는 당시 2위팀 토트넘에 7-2로 지는 등 막판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최종적으로는 아쉬운 8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2부 리그의 수렁에 오래 빠져 있던 팀을 1부 리그에 안정적으로 안착시켰기에 상황적으로는 훌륭한 성과였다.
로저 헌트 | 론 예이츠 | 이안 캘러한 |
1960년대 리버풀의 주축 선수들 |
1963년 여름에는 왼쪽 윙어인 피터 톰슨을 영입해 더 단단한 전력을 구축했다. 이어진 1963-64 시즌의 출발은 9경기 승점 9점 획득으로 느렸으나,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2-1로 승리하며 1950년 이후 첫 승리에 성공한 뒤 성적은 상승 무드를 타기 시작했고 30경기에서 승점 47점을 따내면서 17년 만에 6번째 리그 우승과 함께 유러피언 컵 출전권 획득으로 클럽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리버풀의 유명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안필드에서 불리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 시기인데, 암흑기를 극복하고 잉글랜드 최강의 위치에 복귀한 팀의 호성적에 대중 가요가 결합되고, 또 교통의 발달로 원정 응원이 시작되자 리버풀 특유의 열광적인 팬덤이 형성되었다.
1964-65 시즌에는 리그에서 비록 7위에 그쳤지만 유러피언 컵과 FA컵에서 기념비적인 결과를 냈다. 유러피언 컵 2라운드 RSC 안데를레흐트와의 경기에서부터 유니폼이 기존의 상의 레드 하의 화이트가 아닌 상하의 모두 지금의 형태인 올레드로 바뀌며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했고, 리버풀은 첫 유럽 대항전에서 준결승까지 올라갔으나 우승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석연찮은 골로 실점하며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처음 출전한 유럽무대에서 리버풀은 유럽 대륙에 강렬한 인상을 전해줬으며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구단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FA컵에서는 15년 만에 결승전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 로저 헌트의 선제골과 이안 세인트 존의 연장전 결승골로 리즈 유나이티드 FC를 2-1로 꺾으며 드디어 첫 번째 FA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65-66 시즌에는 2위 리즈에 승점 6점 차로 2년 만에 7번째 리그 우승을 탈환했다. 이 시즌 로저 헌트는 리그 29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라 시즌이 끝난 이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했고 리버풀 출신 최초의 FIFA 월드컵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첼시 FC에게 패하며 일찍 떨어졌으나, UEFA 컵위너스컵에서 첫 유럽 대항전 결승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결승전에서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석패하며 아쉽게 더블에는 실패하고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3시즌 연속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는 아이코닉한 전성기의 시작 이후 샹클리호는 단계적인 리빌딩을 거치며 6년간 무관의 세월을 보냈다. 1966-67 시즌 에버튼을 꺾고 채리티 실드에서 우승하기는 했지만, 유러피언 컵 2라운드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AFC 아약스에 7-3으로 무릎을 꿇었고 리그에서는 마지막 11경기에서 2승만을 기록하며 라이벌 맨유가 우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음 시즌인 1967-68 시즌에는 챔피언 맨체스터 시티에 승점 3점이 뒤진 3위로 아쉽게 리그를 마감했고 FA컵과 리그컵, 인터-시티 페어스컵에 모두 출전했으나 타이틀 사냥에는 실패했다.
1968-69 시즌에도 리그에서는 리즈에 승점 6점이 부족한 2위, 3개의 컵대회 모두 조기 탈락으로 여전히 무관에 그쳤다. 해당 시즌에는 12시즌간 333경기에 나선 레프트 백 게리 번(Garry Byrne)이 은퇴했는데 샹클리는 그의 은퇴를 대비하여 미래의 주장이 되는 엠린 휴즈를 블랙풀에서 데려와 등용하고 골키퍼 토미 로렌스의 후계자로 레이 클레멘스를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영입하여 컵대회에서 중용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2차 리빌딩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1969-70 시즌에는 리그 초반 9경기에서 7승2무를 기록했지만 최종 순위는 5위에 그쳤다. 챔피언은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튼이었다. 나머지 컵대회들도 조기 탈락하며 4시즌 연속 무관에 그쳤고 FA컵 8강에서 디비전 2의 왓포드 FC에 패하자 샹클리 감독은 과감한 리빌딩을 결심하여 가차없이 이안 세인트 존, 론 예이츠, 토미 로렌스 등 노장 선수들 대신 레이 클레멘스, 레리 로이드, 알렉 린제이 등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에서 286골을 넣으며 당시 기준으로 리버풀 최다 득점자였던 전설적인 공격수 로저 헌트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시즌 중반에 볼튼으로 이적하며 리버풀 커리어를 종료했다.
1970-71 시즌, 전 시즌부터 기용하기 시작했던 새로운 젊은 선수들 덕에 평균 연령이 고작 22세인 엄청나게 젊은 스쿼드가 가용되었다. 샹클리는 21세의 공격수 존 토샥을 카디프 시티 FC에서 11만 파운드 금액으로 데려오며 클럽 레코드 딜을 성사시켰고, 윙어 스티브 하이웨이를 아일랜드에서 데려왔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샹클리의 리버풀은 FA컵 결승전과 인터-시티 페어스컵 준결승에 오르지만 각각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한 아스날과 리즈에 무릎을 꿇으며 다시 한번 무관의 아쉬움을 삼켰다. FA컵 준우승 이후 샹클리는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에서 20세의 케빈 키건을 영입하며 리빌딩의 방점을 찍게 된다. 애당초 키건은 미드필더였기에 30줄에 접어드는 이안 캘러한의 대체자로 여겨졌으나, 샹클리 감독은 그의 빠른 스피드와 다재다능함을 알아채곤 토샥과 함께 스트라이커로 그를 안필드에 데뷔시키며 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케빈 키건 | 존 토샥 |
1970년대 리버풀의 공격 듀오 |
1971-72 시즌, 새로 영입된 키건은 데뷔전이었던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홈 경기에서 전반 12분 만에 선제골을 기록하며 홈 팬들 앞에서 인상깊은 데뷔전을 가졌다.[35] 리버풀은 키건과 토샥의 맹활약에 힘입어 시즌 중반 이후 5연승과 8연승을 기록하며 더비 카운티,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와 치열한 우승경쟁을 펼쳤다. 시즌 후반부에는 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끌던 더비 카운티와의 41라운드 단두대 매치에서 0-1로 지며 덜미를 잡혔는데, 더비가 리그 라운드를 모두 치르고 리즈와 리버풀이 1경기씩을 남겨둔 가운데 울버햄튼이 리즈를 2-1로 잡아주며 리버풀은 아스날과의 원정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더비를 제치고 극적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후반 43분 존 토샥의 득점이 취소되며 0-0 무승부를 기록, 결국 더비에게 1점 차로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컵위너스컵과 FA컵, 리그컵 모두 조기 탈락하며 해당 시즌까지 샹클리호는 6시즌 연속 무관에 그쳤으나 이 시즌, 18세의 센터백 필 톰슨이 데뷔하는 등 왕조를 세우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샹클리의 오랜 작업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72년 여름에는 노팅엄에서 피터 코맥(Peter Cormack)을 토샥의 이적료와 똑같은 11만 파운드로 영입했는데 샹클리는 이를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어진 1972-73 시즌, 샹클리호는 6시즌 연속 무관이라는 인고의 리빌딩 작업 끝에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지난 시즌 눈앞에서 놓친 리그에서 2위 아스날을 승점 3점 차로 따돌리고 7년 만에 통산 8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UEFA컵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토트넘 홋스퍼 FC를 준결승에서 원정 다득점 끝에 승리한 뒤, 결승에서 당대 분데스리가 최강팀이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1차전 홈에서 키건의 2골로 3-0 승리, 2차전 원정 0-2패, 합계 3-2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잉글랜드 팀 최초의 리그-유럽 대항전 동시 우승이기도 했다. 또한 리버풀 역사상 첫 더블이었다.
1973-74 시즌, 리그에서는 개막 29경기 무패라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낸 돈 레비의 리즈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밀려 2라운드에서 탈락했으나 FA컵에서 결승전에 진출하여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를 만나 키건의 2골과 하이웨이의 골로 3-0을 만들며 9년 만에 2번째 FA컵 우승을 이룩하게 되었다. 빌 샹클리 감독은 FA컵 우승을 들어 올린 뒤, 1974년 여름에 마지막으로 레이 케네디를 아스날에서 데려오는 리빌딩 작업을 끝으로 이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팔인 수석 코치 밥 페이즐리에게 자신이 완벽하게 리빌딩시킨 찬란한 유산을 물려주고 명예롭게 은퇴하여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3.2. 페이즐리 시대(1974~1983)
밥 페이즐리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페이즐리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샹클리 감독이 은퇴하고 수석코치였던 밥 페이즐리가 감독이 되면서 본격적인 붉은 제국 전성기가 시작된다. 70년대에는 당시 간판 공격수이자 탁월한 피니셔, 케빈 키건과 그와 함께 했던 크랙 성향의 스티브 하이웨이, 이 둘을 뒤에서 받쳐주며 킬링 패스를 뿌려주던 테리 맥더모트로 구성된 공격 트리오가, 80년대에는 감히 세계 최고의 조합이라 해도 손색없는 그레이엄 수네스-케니 달글리시-이안 러쉬 스코티시 공격 트리오가 리버풀의 위용을 전 유럽에 떨쳤다.
15년의 위대했던 샹클리 체제가 끝나고 페어즐리호가 출범한 1974-75 시즌, 리버풀은 필 닐과 테리 맥더모트를 영입해 공수의 전력을 더 강화했다. 페이즐리는 시즌 초반 리그에서 5승1무로 순항했지만 1위부터 10위까지 승점 8점 차에 불과한 치열한 레이스에서 우승 팀 더비에 승점 2점 부족한 아쉬운 준우승으로 리그를 마쳤고, 컵위너스컵에선 2라운드에서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를 만나 조기 탈락했다. FA컵과 리그컵에서도 모두 4라운드 조기 탈락하며 리버풀은 3년 만에 다시 무관으로 시즌을 마쳤다. 컵위너스컵 1라운드에서 노르웨이의 스트룀스고세 IF를 11-0으로 대파하여 클럽 역사상 최다 점수 차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75-76 시즌, 페이즐리호는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개막전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 0-2로 패하며 불안하게 리그를 시작했다. 하지만 리버풀은 후반기 승점을 무섭게 쌓기 시작했고 마지막 9경기에서 8승 1무를 기록하며 QPR을 승점 1점 차로 제치고 페어즐리 감독의 첫 우승 트로피인 9번째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우승하려면 반드시 이겨야 했던 최종전 울버햄튼 원정에서 후반 31분까지 1-0으로 끌려가다가 막판 14분 동안 3골을 몰아치며 짜릿한 역전 우승이 만들어졌다. 국내 컵 대회에선 조기 탈락했지만 이어 리버풀은 UEFA컵에선 결승전에 진출했는데 클뤼프 브뤼허 KV와의 결승전은 극적인 승부가 연출되었다. 안필드에서 열린 1차전에서 전반에 2골을 먼저 실점했으나 케네디와 케이스, 키건의 3골이 6분 만에 나오며 3-2 역전승에 성공했고, 2차전 원정에서는 이른 시간 실점했으나 키건이 동점 골을 넣으며 1-1 무승부, 합계 4-3 승리로 3년 만에 두 번째 UE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3년 전에 이어 더블에 성공했다.
'''''' | ||||||||||
리버풀 | 팀 | 묀헨글라트바흐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크루세이더스 | 7:0 승 | 2:0 승 (홈) | 5:0 승 (원정) | 1라운드 | 아우스트리아 빈 | 3:1 승 | 0:1 패 (원정) | 3:0 승 (홈) | ||
트라브존스포르 | 3:1 승 | 0:1 패 (원정) | 3:0 승 (홈) | 2라운드 | 토리노 | 2:0 승 | 2:1 승 (원정) | 0:0 무 (홈) | ||
생테티엔 | 3:2 승 | 0:1 패 (원정) | 3:1 승 (홈) | 준준결승 | 클뤼프 브뤼허 | 3:2 승 | 2:2 무 (홈) | 1:0 승 (원정) | ||
취리히 | 6:1 승 | 3:1 승 (원정) | 3:0 승 (홈) | 준결승 | 디나모 키예프 | 2:1 승 | 0:1 패 (원정) | 2:0 승 (홈) | ||
6승 0무 2패 (19득점 4실점) | 합계 성적 | 4승 2무 2패 (10득점 4실점) | ||||||||
◀ 1975-76 | 결승 | ▶ 1977-78 |
'''''' | ||
스타디오 올림피코 (로마) | ||
주심: 로베르 부어츠 (프랑스) | ||
관중: 52,078명 | ||
리버풀 | 묀헨글라트바흐 | |
3 | 1 | |
<rowcolor=#000,#fff> 28' 테리 맥더모트 65' 토미 스미스 83'(PK) 필 닐 | | 51' 알란 시몬센 |
- | ||
◀ 1976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78 유러피언컵 결승전 |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달성한 리버풀 [36] |
1976-77 시즌, 시즌 시작 전 키건이 유러피언 컵 우승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가운데 리그에서는 초반부터 가뿐하게 선두에 올랐고 리그 2연패를 기록하며 리버풀은 통산 10번째 리그 우승에 선착하는 데 성공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승승장구한 끝에 로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4년전 UEFA컵 결승 상대인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를 만나 맥더모트와 스미스, 닐의 득점으로 3-1 승리를 거두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아쉽게도 유러피언 컵이 열리기 며칠 전 FA컵 결승전에서 아쉽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1-2로 패배해 준우승하며 잉글랜드 첫 유러피언 트레블 달성에는 실패했고 리그와 유러피언 컵 더블에만 만족해야 했다.[37] 시즌이 끝난 뒤 유러피언 컵의 우승 꿈을 이룬 케빈 키건은 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남기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함부르크 SV로 이적하게 되었다.
케니 달글리시 | 그레이엄 수네스 |
'''''' | ||||||||||
리버풀 | 팀 | 클뤼프 브뤼허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 | 1라운드 | KuPS | 9:2 승 | 4:0 승 (원정) | 5:2 승 (홈) | |||||
디나모 드레스덴 | 6:3 승 | 5:1 승 (홈) | 1:2 패 (원정) | 2라운드 | 파나티나이코스 | 2:1 승 | 2:0 승 (홈) | 0:1 패 (원정) | ||
벤피카 | 6:2 승 | 2:1 승 (원정) | 4:1 승 (홈) | 준준결승 | 아틀레티코 | 4:3 승 | 2:0 승 (홈) | 2:3 패 (원정) | ||
묀헨글라트바흐 | 4:2 승 | 1:2 패 (원정) | 3:0 승 (홈) | 준결승 | 유벤투스 | 2:1 승 | 0:1 패 (원정) | 2:0 승 (홈) | ||
4승 0무 2패 (16득점 7실점) | 합계 성적 | 5승 0무 3패 (17득점 7실점) | ||||||||
◀ 1976-77 | 결승 | ▶ 1978-79 |
'''''' |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 ||
주심: 찰스 코르버르 (네덜란드) | ||
관중: 92,500명 | ||
리버풀 | 클뤼프 브뤼허 KV | |
1 | 0 | |
<rowcolor=#000,#fff> 64' 케니 달글리시 | | - |
- | ||
◀ 1977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79 유러피언컵 결승전 |
1977-78 시즌에는 키건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예상을 뛰어넘는 역사적인 영입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페이즐리는 키건의 대체자로 셀틱 FC의 케니 달글리시를 낙점했고, 영국 클럽 간 레코드 금액인 44만 파운드에 그를 안필드로 데려왔다. 여기에 더해 수비수 앨런 한센을 스코틀랜드의 파틱 시슬로부터 데려왔고, 겨울에는 미들즈브러에서 그레이엄 수네스를 영입했다. 달글리시는 적응기 없이 첫 시즌부터 리그 20골 포함 전체 대회 31골을 기록하며 키건의 기억을 팬들에게서 지웠고,[38] 중원의 수네스, 후방의 한센으로 이어지는 스코티시 라인은 즉각 리버풀을 다시 최강의 전력으로 발돋움시켰다.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이 시즌 리그와 리그컵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우승을 내줬고, FA컵에서도 첫 경기에서 첼시에 탈락했지만 2년 연속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다.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에 나선 리버풀은 2년 전 UEFA컵 결승전 상대였던 클뤼프 브뤼허를 만나 이번에도 1-0 승리를 거두며 2년 연속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우승으로 유러피언 컵을 연속으로 우승한 최초의 잉글랜드 팀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레이 클레멘스 | 필 닐 |
1978-79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3연패에 도전했으나 1라운드에서 디비전 1 우승팀 노팅엄 포레스트를 만나 2-0으로 패배하고 말았다.[39] 리그컵에서도 3라운드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게 조기 탈락했다. FA컵에서는 준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재경기 끝에 탈락했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역대 최고의 시즌을 보냈는데, 개막 6연승에 이어 초반 11경기 10승1무를 기록하면서 초반부터 멀찍이 앞서나간 리버풀은 12라운드 에버튼 원정에서 0-1로 패하며 무패가 깨졌으나 최종적으로 42경기 30승 8무 4패를 기록하며 승점 68점을 기록, 1968-69 시즌 리즈가 만든 67점의 기록을 경신하며 당대 역대 최다 승점으로 통산 11번째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더 놀라운 기록은 실점 기록이었는데 리버풀의 수비진은 42경기에서 단 16실점만 내주며 42경기 체제 잉글랜드 리그 역대 최소 실점 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안필드에선 무패와 함께 단 4점 만을 실점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1979-80 시즌에는 리그 초반에 사우스햄튼과 노팅엄 포레스트에 패배하며 흔들렸으나 1월에 선두에 올라간 뒤 끝까지 1위를 지키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승점 2점 차로 따돌리며 통산 12번째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홈에서는 2년 연속 무패를 기록했고 단 8실점 만을 허용했다. 아쉽게도 유러피언 컵에서 2년 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이번에는 소련의 디나모 트빌리시에 덜미를 잡혔다. FA컵과 리그컵에서는 모두 준결승에 올라갔으나 각각 아스날과 노팅엄 포레스트에 탈락했다. 1980년 4월에는 체스터 시티로부터 18세의 공격수 이안 러쉬를 영입하며 새로운 역사의 한 챕터를 펼쳤다.
1980-81 시즌, 리그에서 흔들리며 8번의 패배[40]와 17번의 무승부를 기록하며 16년 만의 최악의 성적인 5위로 리그 레이스를 마쳤지만 리그컵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재경기 끝에 통산 첫 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 | ||||||||||
리버풀 | 팀 | 레알 마드리드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OPS | 11:2 승 | 1:1 무 (원정) | 10:1 승 (홈) | 1라운드 | 리머릭 | 7:2 승 | 2:1 승 (원정) | 5:1 승 (홈) | ||
애버딘 | 5:0 승 | 1:0 승 (원정) | 4:0 승 (홈) | 2라운드 | 혼베드 | 3:0 승 | 1:0 승 (홈) | 2:0 승 (원정) | ||
CSKA 소피아 | 6:1 승 | 5:1 승 (홈) | 1:0 승 (원정) | 준준결승 |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 2:0 승 | 0:0 무 (원정) | 2:0 승 (홈) | ||
바이에른 뮌헨 | 1:1 무 (원정 다득점) 승 | 0:0 무 (홈) | 1:1 무 (원정) | 준결승 | 인테르 | 2:1 승 | 2:0 승 (홈) | 0:1 패 (원정) | ||
5승 3무 0패 (23득점 4실점) | 합계 성적 | 6승 1무 1패 (14득점 3실점) | ||||||||
◀ 1979-80 | 결승 | ▶ 1981-82 |
'''''' | ||
파르크 데 프랭스 (파리) | ||
주심: 카로이 펄로터이 (헝가리) | ||
관중: 48,360명 | ||
리버풀 | 레알 마드리드 | |
1 | 0 | |
<rowcolor=#000,#fff> 82' 앨런 케네디 | | - |
- | ||
◀ 1980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82 유러피언컵 결승전 |
파리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도 앨런 케네디의 결승골로 통산 세 번째 우승에 성공했다.[41] 이 시즌을 끝으로 주전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가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클레멘스의 대체자로 브루스 그로벨라가 영입되었다.
1981-82 시즌엔 승점 3점제가 도입된 리그에서 박싱데이 시점 17경기 6승만을 거두며 충격적인 12위의 성적으로 처졌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분위기 환기를 위해 주장직을 톰슨에서 수네스로 넘겼고 이후 후반기에 11연승으로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팀은 2년 만에 다시 리그 우승을 탈환했다. 통산 13번째 리그 우승이었다. FA컵에서는 당시 디비전 2였던 첼시 FC에 덜미를 잡혀 5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디펜딩 챔피언 자격이었던 유러피언 컵에서도 8강에서 PFC CSKA 소피아에게 떨어졌지만 리그컵에서는 2년 연속 결승전에 올라갔다. 토트넘과의 결승에선 로니 웰란이 종료 3분 전 극적인 동점 골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간 뒤 역전 골까지 넣으며 경기를 뒤집었다. 러시가 이후 쐐기골을 넣으며 3-1로 승리, 리버풀은 리그컵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 인터콘티넨탈컵에서 지쿠의 대활약으로 인해 브라질의 CR 플라멩구에 0-3으로 지며 우승에 실패했다.[42]
밥 페이즐리가 은퇴를 예고한 1982-83 시즌에는 리그에서 2위 왓포드 FC에 11점 차로 넉넉하게 앞서며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통산 14번째 리그 우승이었다. FA컵과 유러피언 컵은 각각 브라이튼 호브 알비온과 폴란드의 비제프 우치를 만나 5라운드와 8강에서 탈락했지만 리그컵에서 3년 연속 결승에 올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연장전 끝에 웰란의 결승골로 2-1로 꺾고 3년 연속 리그컵 우승을 거두었다.
페이즐리 감독은 9년의 재임 기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조직력을 팀에 이식하며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UEFA컵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3회, 채리티 실드 우승 6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라는 경악스러운 성적을 구가했다. 그는 전임자인 샹클리보다 더 월등한 모습으로 팀을 이끌어 잉글랜드의 어떤 팀도 리버풀의 위상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총 20개의 우승 기록으로 9년의 시간 동안 시즌마다 트로피 한개씩은 꼭 따내는 저력을 보였다. 유일하게 따내지 못한 우승컵은 FA컵 하나였다. 이후에는 수석 코치이자 부트 룸을 함께 이끈 리버풀의 터줏 대감 조 페이건이 감독직을 잇게 되었다.
4. 영광의 시간 뒤에 찾아온 비극
4.1. 페이건 시대(1983~1985)
조 페이건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페이건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1983-84 시즌 이후, 페이즐리 감독이 떠나고 수석 코치였던 조 페이건이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리버풀은 리그-리그컵-유러피언컵 우승으로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 달성을 이뤄냈다.[43] 이 시즌 팀은 리그 3연패를 만들며 허더즈필드 타운 AFC와 아스날만 기록했던 리그 타이틀 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으며 이안 러시는 리그 32골을 포함해 전 대회 47골을 득점해 유러피언 골든부츠를 거머쥐었다. 리그컵 우승은 잉글랜드 역사상 최다인 4년 연속 우승이었으며,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튼을 상대로 재경기 끝에 수네스의 결승골로 우승을 이룩해 그 의미를 더했다.
'''''' | ||||||||||
로마 | 팀 | 리버풀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예테보리 | 4:2 승 | 3:0 승 (홈) | 1:2 패 (원정) | 1라운드 | 오덴세 | 6:0 승 | 1:0 승 (원정) | 5:0 승 (홈) | ||
CSKA 소피아 | 2:0 승 | 1:0 승 (원정) | 1:0 승 (홈) | 2라운드 | 아틀레틱 빌바오 | 1:0 승 | 0:0 무 (홈) | 1:0 승 (원정) | ||
디나모 베를린 | 4:2 승 | 3:0 승 (홈) | 1:2 패 (원정) | 준준결승 | 벤피카 | 5:1 승 | 1:0 승 (홈) | 4:1 승 (원정) | ||
던디 유나이티드 | 3:2 승 | 0:2 패 (원정) | 3:0 승 (홈) | 준결승 | 디나모 부쿠레슈티 | 3:1 승 | 1:0 승 (홈) | 2:1 승 (원정) | ||
5승 0무 3패 (13득점 6실점) | 합계 성적 | 7승 1무 0패 (15득점 2실점) | ||||||||
◀ 1982-83 | 결승 | ▶ 1984-85 |
'''''' | ||
스타디오 올림피코 (로마) | ||
주심: 에릭 프레데릭손 (스웨덴) | ||
관중: 69,693명 | ||
로마 | 리버풀 | |
1 | 1 | |
<rowcolor=#000,#fff> 42' 로베르토 프루초 | | 13' 필 닐 |
- | ||
◀ 1983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85 유러피언컵 결승전 |
승부차기 | ||||
로마 | <colcolor=#000,#ddd> 2 : 4 | 리버풀 | ||
후축 (GK: 프랑코 탄크레디) | 선축 (GK: 브루스 그로벨라) | |||
아고스티노 디 바르톨로메이 | 1 | 스티브 니콜 | ||
브루노 콘티 | 2 | 필 닐 | ||
우발도 리게티 | 3 | 그레이엄 수네스 | ||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 | 4 | 이안 러쉬 | ||
- | - | 5 | 앨런 케네디 |
유러피언컵은 AS 로마를 상대로 로마의 홈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렸는데, 연장전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나 승부차기에서 브루스 그로벨라의 활약에 힘입어 승부차기 결과 4-2로 승리, 통산 4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거둔다.[44]
그러나 이후 중원의 사령관 그레이엄 수네스가 UC 삼프도리아로 이적하는 바람에 팀 전력에 구멍이 생겼고 1984-85 시즌에는 라이벌인 에버튼에게 밀려 리그 우승을 내주어야 했다. 4연속 우승을 기록한 리그컵에서도 조기 탈락했으며 FA컵에서도 준결승에서 1921년 이후 해당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지 못하고 탈락했다.
'''''' | ||||||||||
유벤투스 | 팀 | 리버풀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일베스 | 6:1 승 | 4:0 승 (원정) | 2:1 승 (홈) | 1라운드 | 레흐 포즈난 | 5:0 승 | 1:0 승 (원정) | 4:0 승 (홈) | ||
그라스호퍼 | 6:2 승 | 2:0 승 (홈) | 4:2 승 (원정) | 2라운드 | 벤피카 | 3:2 승 | 3:1 승 (홈) | 0:1 패 (원정) | ||
스파르타 프라하 | 3:1 승 | 3:0 승 (홈) | 0:1 패 (원정) | 준준결승 | 아우스트리아 빈 | 5:2 승 | 1:1 무 (원정) | 4:1 승 (홈) | ||
보르도 | 3:2 승 | 3:0 승 (홈) | 0:2 패 (원정) | 준결승 | 파나티나이코스 | 5:0 승 | 4:0 승 (홈) | 1:0 승 (원정) | ||
6승 0무 2패 (18득점 6실점) | 합계 성적 | 6승 1무 1패 (18득점 4실점) | ||||||||
◀ 1983-84 | 결승 | ▶ 1985-86 |
'''''' | ||
헤이젤 스타디움 (브뤼셀) | ||
주심: 안드레 다이나 (스위스) | ||
관중: 58,000명 | ||
유벤투스 | 리버풀 | |
1 | 0 | |
<rowcolor=#000,#fff> 58'(PK) 미셸 플라티니 | | - |
- | ||
◀ 1984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86 유러피언컵 결승전 |
그래도 새로 영입된 덴마크인 선수 얀 몰비와 존 워크의 활약으로 그 해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유벤투스 FC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미셸 플라티니의 결승골에 의해 1-0 유벤투스의 우승으로 끝났고, 더 거대한 문제는 관중석에서 발생했다. 경기 도중, 리버풀 훌리건들이 유벤투스 서포터들에게 충돌해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던 것. UEFA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리버풀은 7년간 유럽 대항전[45]에 출전이 금지되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46] 리버풀은 참사의 영향으로 흔들리게 되었고 심지어 결승전이 열리기 전 조 페이건 감독이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일찍이 사임 의사를 표했기 때문에 위기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후임으로 붉은 제국을 이끌던 팀의 중심 케니 달글리시가 플레잉 코치로 형식으로 감독을 맡아 팀을 수습하게 되었다.
4.2. 달글리시 시대(1985~1991)
케니 달글리시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페이건 감독의 이른 은퇴로 인하여 플레잉 코치 형식으로 새 감독이 된 달글리시는 오랫동안 활약한 필 닐과 앨런 케네디 대신 스티브 니콜과 짐 베글린을 기용하며 새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적응 기간을 거친 후 달글리시호는 후반기 11경기 10승을 기록하면서 에버튼을 제치고 2년 만에 통산 16번째 리그 우승을 탈환했고 머지사이드 더비로 열린 FA컵 결승에서는 에버튼에게 3-1 역전승을 거두며 12년 만의 FA컵 우승이자 역사상 첫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했다.
1986-87 시즌, 이안 러시가 유벤투스와 계약을 마쳤으나 리버풀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밝혀 1년 임대로 곧바로 돌아와 활약했지만, 리버풀은 그의 맹활약에도 무관에 그쳤다. 리그에서는 에버튼에 9점 차로 뒤진 준우승에 머물렀고 FA컵은 3라운드에서 루튼 타운에 재경기 2차례 끝에 탈락, 리그컵에서는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아스날을 상대로 러시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2-1 역전패를 당했다. 러시가 떠나는 때를 대비해 리버풀은 존 올드리지를 영입하며 전력을 다지게 되었다.
1987-88 시즌에는 러시가 임대 복귀로 다시 유벤투스로 떠난 가운데 공격력 강화를 위해 피터 비어즐리와 존 반스를 이어 영입했다. 리버풀은 개막 28경기 무패를 기록한 끝에 리그에서 단 2패만 허용하며 2년 만에 리그 17번째 정상을 탈환했다. 여기에 더해 2년 전에 이어 FA컵 결승에 올라 더블에 도전했으나 풋볼 리그 진입 11년 차의 윔블던 FC에 0-1로 충격패를 당해 리그 우승 하나에 만족해야 했다.
1988-89 시즌 유벤투스로 떠난 이안 러시가 향수병을 호소하며 리버풀로 컴백했다. 리버풀은 1989년 1월까지 리그에서 고전하며 1위 아스날에 승점 9점 뒤져 있다가 4월 들어 아스날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즌 1989년 4월 15일, 셰필드 웬즈데이 FC의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FA컵 4강전을 치렀는데 경기는 3-1로 이겼지만 앞서 헤이젤 참사와 더불어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인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하고,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달글리시와 선수단 또한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 참사로 인해 97명의 콥이 운명했는데, 영국 대표 황색 언론인 더 선에서는 당시 콥들이 사고를 유발했고 심지어 노상방뇨, 갈취, 폭행을 했다는 수많은 허위 기사를 게재하며 근거없는 비난을 유포했고,[47] 경찰 당국과 정부 또한 사건에 대해 석연치 않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리버풀 팬들을 비롯한 수 많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후 오랜 기간이 지나 정부의 사과와 정정으로 사실 관계는 바로잡혔으나 현재도 콥들은 이런 과거 때문에 정부와 더 선에 여전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후 리버풀에서는 오랜 기간 'Justice for 97'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으며,[48] 리버풀 구단과 리버풀의 선수단은 더 선과 일절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는다.[49] 자세한 사항은 힐스버러 참사 참고.
이후 충격적인 힐스버러 참사에도 불구하고 1989년 5월 20일 결승에서 리버풀은 에버튼에게 연장전 끝에 러시의 2골로 3-2로 승리를 챙기며 통산 4번째 FA컵 우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참사로 인해서 연기되었던 리그 경기를 치렀는데 최종전 전까지 리버풀은 아스날에 승점 3점과 골 득실 4골로 앞선 1위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5월 26일 안필드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두 팀이 만나게 되었다. 리버풀은 2점 차로 지지만 않으면 우승을 할 수 있는 상황. 여기서 우승하면 지난 시즌에 이루지 못했던 더블이 가능했다. 그러나 리버풀의 홈 경기임에도 아스날은 후반 7분 공격수 앨런 스미스의 선제골로 우승에 대한 불씨를 살렸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리버풀은 0-1 스코어를 유지하며 우승을 눈앞에 두었지만 후반 추가 시간 아스날의 마이클 토마스가 추가골을 득점하며 경기는 아스날의 2-0 승리로 끝났고 리버풀은 아스날에 골 득실은 같았으나 다득점에서 뒤져 결국 통한의 준우승을 기록하고 말았다. 백패스를 골키퍼가 손으로 잡는 것이 허용되는 시기에 리버풀의 존 반스는 무리하게 공격에 나갔다가 역습을 허용하여 통한의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1989-90 시즌, 존 올드리지가 레알 소시에다드로 떠난 가운데 이안 러시가 주전 공격수로 복귀했고 11월까지 리그 4패를 기록했으나 그 이후 단 1패만 허용하며 여유롭게 리버풀은 18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FA컵에서 준결승에 올라 다시 한번 더블에 도전했으나 리그에서 9-0으로 깔아뭉갰던 크리스탈 팰리스 FC에 연장전 끝에 4-3으로 지며 탈락했다.[50]
그러나 구단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헤이젤 참사로 유럽 축구 연맹 주관 대회 출전권을 일시 박탈 당했음에도 리그에선 1, 2위만을 다투며 잉글랜드 최강의 위치를 유지하던 리버풀이었으나 힐스버러 참사까지 터진 이후에는 감독도, 선수들도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고통을 겪기 시작했던 것. 이에 한 두명씩 점점 팀을 이탈하며 리버풀은 전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어진 1990-91 시즌에 그 문제가 드러났다. 리버풀은 개막 8경기에서 전승을 거두며 기분 좋게 시작했고 12월 아스날에 3-0으로 지기 전까지는 무패 행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패가 깨진 이후 팰리스에게 패배를 기록하는 등 좋지 않은 성적으로 선두 자리를 1991년 1월에 내주자 팀이 전체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2월 FA컵 에버튼과의 재경기에서 4-4로 팀이 무승부를 거두자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에 시달린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자진 사임을 선언했다. 이후 팀을 오래 이끌어온 부트 룸 코치였던 로니 모란이 달글리시 대신 감독 대행을 맡았지만 결국 리버풀은 리그에서 아스날을 추격하지 못하고 7점 차 뒤진 2위로 마감했다. 찬란하게 빛났던 붉은 제국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5. 침체기
5.1. 수네스 시대(1991~1994)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수네스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1990-91 시즌, 리그 5경기를 남겨놓고 리버풀의 주장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새 감독이 되었다. 이후 시즌을 수습해 마무리한 뒤 1991-91 시즌 수네스는 본격적으로 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수네스호는 선덜랜드 AFC를 2-0으로 이기고 첫 시즌부터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리그에서는 6위에 그쳤고 헤이젤 비극 이후 처음으로 출전한 유럽 대항전 UEFA컵에서도 제노아 CFC에 16강에서 조기 탈락하며 전처럼 강팀으로서의 리버풀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또한 수네스는 더 선과의 인터뷰 논란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빌 샹클리가 남긴 최대의 유산 중 하나인 부트 룸도 유로 대회 개최를 위해 스탠드를 개축하며 기자 회견실을 만든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1992-93 시즌에는 3월 무렵에 15위를 찍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안 러시의 분전으로 간신히 6위로 리그를 마감했다. UEFA컵과 위너스컵, 리그컵, FA컵에서도 모두 조기 탈락했다. 유럽 대항전에도 당연히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1993-94 시즌에는 노팅엄에서 나이젤 클러프를 사며 초반에는 3연승으로 잘 나가는 듯했지만 로테이션의 부재로 시즌 중반에 추락했으며, FA컵에서 하부 리그의 브리스틀 시티에 충격패를 당했다. 결국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수네스는 상호 협약 해지를 통해 사실상 경질당했다. 이후 부트 룸의 명맥을 잇는 로이 에반스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수네스가 남겨놓은 짐을 치우지 못하고 1962년 승격 이후 최악의 순위인 8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안전을 위한 권고 조치에 의해 입석 콥 스탠드는 막을 내리고 스탠드 전체가 좌석으로 바뀌게 되었다.[51] 그래도 이 시즌 그나마 유스에서 배출한 로비 파울러가 리그컵 3라운드 1차전 풀럼을 상대로 한 데뷔전에서 골을 넣고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암울한 콥들의 새 희망이 되어주었다.
5.2. 에반스 시대(1994~1998)
로이 에반스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에반스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1994-95 시즌, 에반스는 본격적으로 첫 풀 시즌을 준비했고 로비 파울러, 존 반스, 이안 러쉬, 롭 존스,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등을 앞세워 리그 4위의 성적을 구가해 달글리시 이후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또한 2부 리그 볼튼을 맥마나만의 2골로 2-1로 꺾고 풋볼 리그 컵에서 우승했다. 이 시즌을 끝으로 로니 웰란과 브루스 그로벨라, 스티브 니콜이 팀을 떠났다.
1995-96 시즌에는 노팅엄을 3위로 이끈 스탄 콜리모어를 85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프리미어 리그를 3위로 마친 뒤 FA컵 결승에 올랐지만 이번에도 맨유에게 후반 40분 칸토나의 결승골로 1-0으로 패배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그리고 이 시즌이 이안 러시의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1996-97 시즌에는 UEFA 유로 1996에서 체코의 준우승을 이끌고 스타덤에 오른 파트리크 베르게르를 영입했고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리그 1위에 오르며 간만에 리그 우승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며 결국 순위는 3위로 마감했다. 컵위너스컵에서는 준결승에 오르지만 파리 생제르맹 FC에게 밀려 탈락했다. 이 시즌에 리버풀 유스인 마이클 오언과 제이미 캐러거가 데뷔했고 오웬은 득점까지 기록하며 팬들의 기대를 부추겼다. 이 시즌을 끝으로 존 반스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떠났다.
1997-98 시즌 반스의 대체자로 맨유 출신의 폴 인스가 합류하여 세간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프리시즌에 주전 공격수 로비 파울러를 무릎 부상으로 잃어 팀 전력은 크게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마이클 오언이 혜성같이 난세영웅으로 등장하여 36경기 18골을 득점하며 공동 득점왕이 되는 활약을 펼쳤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순위를 3위로 마감했으나 여전히 우승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이 에반스 체제의 리버풀은 전임 수네스와는 달리 꾸준히 리그 상위권을 기록했지만 당시 EPL에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맨유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에반스는 감독으로서의 리더십 부족 문제를 겪어 당시 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맥마나만, 파울러 등 주축 선수들은 훈련 대신 머리, 여자, 클럽 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선 리버풀 선수들을 당시 영국 최대 인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본떠 '스파이스 보이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단은 1998-99 시즌을 앞두고 공동 감독으로 구단 최초 유럽 대륙 감독인[52] 프랑스 출신의 제라르 울리에를 데려와 세계적인 수준의 팀을 만들고자 전환을 시도했다. 울리에는 선수 훈련과 관리 등을 맡고 에반스는 경기 지휘를 맡는다는 계획이었으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공동 감독 체제는 리버풀에 악재로 작용했다. 공동 감독 체제에서 리버풀은 중위권으로 내려앉았고 급기야 UEFA컵에서 셀타 비고에 충격패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로이 에반스는 1998년 11월에 공동 감독직을 내려놓고 사퇴했고 제라르 울리에가 단독으로 감독이 되었다. 잔여 시즌은 7위로 마감하며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6. 중흥기
6.1. 울리에 시대(1998~2004)
제라르 울리에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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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울리에가 취임한 이후 로이 에반스와 공동 감독을 이뤘으나 팀은 부진했고 선수들은 축구 외의 요소에 빠지며 선수 관리가 개판이었다. 울리에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단독 감독이 된 후 해이해진 팀 기강을 강화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주축 선수들을 과감히 방출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에 사미 히피아, 디트마 하만,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지미 트라오레, 에릭 메이여르, 에밀 헤스키 등 당시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영입되었고 마이클 오언, 제이미 캐러거, 스티븐 제라드 등 유스 출신 선수들이 중용되었다. 새로운 팀으로 탄생한 울리에의 리버풀은 1999-00 시즌에 최종전에서 브래드퍼드 시티에 덜미를 잡혀 3위에서 4위로 미끄러지긴 하였으나,[53] 이후 리빌딩의 결과가 빛을 발해 2000-01 시즌에 제라르 울리에 감독의 지휘아래 리버풀은 미니 트레블을 기록했다. 해당 시즌의 미니 트레블은 FA컵과 UEFA컵, 리그컵을 들어 올린 것으로 정식 트레블에 비해서는 다소 무게감이 떨어지는 우승이었고, 가장 중요한 리그와 챔스에서는 오랫동안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팀 외부에서는 대단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어쨌든 침체기에 돌입한 이후에 내부적으로는 중흥기의 분기점을 맞이하는 상징적인 우승이 되었다. 또한 세 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단일 시즌에 들어 올린 것은 웬만한 강팀들도 쉽게 세울 수 있는 업적이 아니기에 팬들이 새로운 전성기에 대한 기대감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일명 울리에 3종 세트(엘 하지 디우프, 브루노 셰루, 살사프 디아포)로 대표되는 수 많은 영입 실패작들이 성공작들의 반대급부로 이후 쏟아져나왔기에 이어진 2002-03, 2003-04 시즌은 콥들에겐 악몽의 시절로 기억된다. 울리에의 리버풀은 2001-02 시즌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호성적을 올렸고, 이후 2002-03 시즌 초중반에 9승 3무로 12경기 무패를 달성하며 리그 1위를 일시적으로 차지했으며, 동 시즌 리그컵에서 라이벌 맨유를 결승에서 2-0으로 꺾고 우승하는 파란을 선보였다. 이때까지 울리에호는 다시금 리버풀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울리에 감독이 심장 문제에 의해 수술을 받고 다시 돌아온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울리에는 복귀 이후 일정한 경기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스트라이커인 오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 경기 흐름을 너무 단조롭게 만들었다. 또한 수비 전술이 부실해 외부적으로 비판을 사기 시작했다.
이에 이어진 2002-03 시즌 개막 12경기 무패 이후 4연패가 포함된 11경기 5무 6패의 무승으로 7위로 상적이 추락하고 말았다. 이후 29라운드에서 36라운드까지 7승을 거두며 4위 첼시와 승점 동률을 이뤘고 상위권을 추격했으나 마지막 홈경기였던 37라운드 승격팀인 맨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지난 시즌까지 임대로 활약했던 니콜라 아넬카에게 동점 골과 역전 골을 연거푸 실점하며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해[54]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 패한 첼시를 역전하는 데 실패했다. 반드시 이겨야 했던 첼시와의 최종전 단두대 매치에서도 예스페르 그룅키에르의 대활약으로 또 다시 2-1 역전패를 당하며 첼시에 4위를 내주며[55] UEFA컵으로 밀려났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발렌시아 CF에 2번 모두 패한 것 때문에 FC 바젤에 밀려 조 3위로 UEFA컵으로 갔고 8강에서 셀틱 FC를 상대로 홈에서 0-2로 무기력하게 져 탈락했다.
2003-04 시즌에는 측면 윙어 보강을 위해 리즈로부터 해리 큐얼을 영입해 4위로 챔스 진출권은 얻었으나 우승팀 아스날과의 승점 차가 무려 30점이나 됐고, 아스날-첼시-맨유 3강을 제외하고는 매 라운드마다 순위가 바뀌던 혼돈의 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아스톤 빌라 FC, 찰튼 애슬레틱 FC 등과 함께 서로 진흙탕 싸움을 시전한 끝에 겨우 얻어낸 4위였기에 팬들에게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우승팀 아스날보다 최하위 울버햄튼과의 승점 차가 더 적었다.[56] FA컵과 리그컵 역시 조기에 각각 포츠머스와 볼튼에 패해 떨어졌고, UEFA컵에서도 16강에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상대로 디디에 드록바에게 1,2차전 1골씩 실점하며 합계 2-3으로 패해 탈락했다.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마친 탓인지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울리에는 결국 상호 협약 해지를 통해 사실상 경질되고 말았다.
6.2. 베니테스 시대(2004~2010)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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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에의 후임으로 2004년 여름 발렌시아 CF를 두 차례 라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이끌었던 라파엘 베니테스가 선임되었다. 라파가 재임한 6년은 붉은 제국 시절 이후 위르겐 클롭 부임 전까지 리버풀이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높게 빛났던 중흥기로 꼽힌다. 부임 첫 해 리그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회자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21년 만에 5번째 빅 이어를 들어 올리면서 리버풀을 다시금 유럽 최정상급 클럽으로 복귀시켰던 시기였기 때문.[57] 그러나 2007년 초 미국 출신의 자본가 조지 질레트 주니어와 톰 힉스의 클럽 인수 이후 구단주 이슈로 인해 팀이 재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선수들을 팔아 자금을 충당해야 했고 팀의 기반은 갈수록 점점 약해져갔다. 그리고 2009년 샤비 알론소의 레알 이적 이후 대체자 물색에 실패해 베니테스의 리버풀은 급격한 전력 악화를 겪으며 2위에서 7위로 추락해버렸고 그렇게 아쉬웠던 베니테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6.2.1. 2004-05 시즌
베니테스는 부임하자마자 리버풀의 주축 선수 두 명인 스티븐 제라드와 마이클 오언을 팀에 잔류시켜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제라드의 경우 돈으로 무장한 주제 무리뉴의 첼시 FC의 러브콜을 받는 와중에 어떻게든 팀에 잔류시킬 수 있었으나, 오언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희망하고 있었고 갈락티코스 군단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58] 대니 머피와 마르쿠스 바벨도 팀을 떠난 가운데 베니테스는 자신의 모국인 스페인에서 대거 선수를 수급해왔다. 사비 알론소와 루이스 가르시아, 호세미, 안토니오 누녜스를 데려왔으며, 오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리그 1 득점왕의 프랑스 대표 공격수 지브릴 시세를 14.5M 파운드에 영입하며 과거 오언의 역습에 의존했던 공격 전술을 갈아치우고자 했다.활발한 이적 시장을 보냈음에도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제라드, 리세, 피넌, 캐러거 등 좋은 선수가 남아 있고 알론소와 가르시아가 적응기 없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키웰, 시세 등등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에 시달렸고 하만과 스미체르는 노쇠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트라오레, 누녜스, 호세미, 디아오, 비스칸, 시나마-퐁골르, 워녹, 멜러, 포터, 르탈렉 등과 같은 1군 검증도 제대로 안 된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는 경기가 허다했다. 제이미 캐러거의 경우에도 이전에는 멀티 수비수로 나왔지만 이때부터 스티븐 앙쇼의 노쇠화로 인해 전력 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주전 센터백으로 사미 히피아와 듀오를 이루던 시즌이었다.
골키퍼 포지션도 혼란이 심했는데 예지 두덱이 예능감을 뽐내며 두덱과 크리스 커클랜드, 스콧 카슨이 번갈아 골키퍼 장갑을 꼈다. 같은 시기 자금난에 시달리던 터라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팀을 인수하려 하자, 리버풀 지역사회는 물론 각종 언론에서도 해당 문제를 거론하며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구단 측은 팀은 진정으로 그 팀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며 매각을 거부했다. 탁신은 이후 맨시티를 인수하게 된다.
리빌딩 과도기라 리그에서 팀은 크게 고전했고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며 지난 시즌보다 낮고 에버튼에도 밀린 5위를 기록했다. 리그에서 최다 골을 기록한 선수가 밀란 바로시의 9골일 정도로 득점력 부재로 고전했다. 리그에서의 기복 있는 성적과는 별개로 리그컵에서 결승에 오르며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릴 기회를 얻었고 결승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종료 10분 전까지 1-0으로 앞서갔지만 제라드의 자책골로 통한의 동점을 내준 뒤 연장전에서 2-3 분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FA컵에서도 3라운드에서 2부 리그 번리 FC에 1-0으로 패배하며 일찍이 떨어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베니테스의 리버풀은 초라하게 첫 시즌을 보내는가 싶었지만 후술할 챔피언스 리그에서 놀라운 반전의 연속을 만들어내며 04-05 시즌은 역사적인 시즌으로 장식되었다.
6.2.1.1. 이스탄불의 기적
베니테스의 리버풀을 설명하는 데 빠지면 안 될 것이 바로 04-05 시즌 챔피언스 리그. 베니테스는 부임 첫 해인 04-05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로도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줘 팀의 중흥기를 견인했다. 이때 챔스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전반에만 3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전에 주장 스티븐 제라드의 활약에 힘입어 3골을 따라잡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승리하는 엄청난 역전 승리가 이루어졌다. 당시 결승전 장소가 이스탄불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는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불리며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콥들에게는 바이블 격인 경기.자세한 내용은 2005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6.2.2. 2005-06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05-06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6.2.3. 2006-07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06-07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6.2.4. 2007-08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07-08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6.2.5. 2008-09 시즌
08-09 시즌을 앞두고 리그 우승을 위해 다시 한번 보강에 나섰다. 키웰과 리세, 피넌, 크라우치가 떠난 자리를 측면 자원으로 도세나, 데겐, 리에라를 데려왔고 백업 공격수로 다비드 은고그를 영입했다. 그리고 1930만 파운드를 들여 토레스의 고립을 막고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토트넘으로부터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던 로비 킨을 영입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측면과 공격을 보강해서 좋은 영입이 되었나 싶었지만 베니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킨보다 가레스 배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배리의 이적료는 1,800만 파운드 정도.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제라드와 배리가 만났을 때 좋은 조합을 이뤘던 것을 보고 배리의 영입을 바랬다. 하지만 질힉은 킨과 배리를 모두 사는 것은 부담이 된다며 영입하려거든 현 스쿼드에서 선수를 팔아 재정을 충당할 것을 베니테스에게 전했다.사실 배리 없어도 중원은 굉장히 잘 돌아갔지만 안타깝게도 베니테스는 주축 선수를 팔아 배리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베니테스는 선수단과 친밀하게 지내는 감독이 아닌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팀을 운영하는 감독이었고 슬슬 내리막길의 조짐이 보이면 가격대가 떨어지기 전에 가차없이 정리하여 이적료를 받아내곤 했다. 그랬던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선수는 바로 사비 알론소였다. 07-08 시즌에 알론소는 잔부상과 함께 다소 부진하며 27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 사이 마스체라노는 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성장했고 브라질에서 500만 파운드를 주고 사온 초특급 유망주였던 루카스 레이바가 알론소의 공백을 어느 정도 잘 메워준 상황이었다. 베니테스의 입장에서는 알론소가 없더라도 잘 돌아갈 것이며 그 자리는 배리로 메워버리면 그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가 알론소를 팔 적기라고 생각한 셈. 그러면서 베니테스는 알론소에게 직접 이적자금을 위해 이적 명단에 올릴 것임을 전달했고 알론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스날과 유벤투스에 알론소를 사갈 것을 제안했지만 두 팀 모두 리버풀이 원하는 수준의 이적료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알론소는 팀에 잔류하게 되고 배리의 영입은 무산되었다. 구단주에 대한 불만으로 베니테스는 로비 킨을 홀대했고 결국 이적한 지 반년 만에 토트넘으로 반품되었다.
리그에서 제라드-알론소-마스체라노의 강력한 중원 조합을 형성하게 되었고 제토라인의 파괴력은 여전했다. 08-09 시즌 리버풀은 리그에서 리그 최다 득점, 최다 골 득실, 최소 패배를 기록하며 승점 86점을 기록했지만 승점 90점을 기록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4점이 뒤져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두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59] 첼시와의 리그 맞대결도 두 차례 모두 승리를 가져갔다. 특히 첼시 원정에서는 스탬포드 브리지 86경기 홈 무패 기록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부에 중하위권을 상대로 기록한 너무 많은 무승부가 결국 리버풀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60]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레알을 상대로 1, 2차전 합계 5:0으로 대파한 후 8강에서 첼시를 만나게된다. 하지만 1차전에서 원정 팀의 무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3:1로 패배, 2차전 첼시의 구장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전반 2:0의 점수를 냄으로써 이스탄불의 기적을 재현할 뻔했으나 후반에 4점을 내주고 2골을 추가함으로써 4:4가 되며 1, 2차전 합계 7:5로 첼시에게 4강행 티켓을 내주고 만다. 경기 자체는 엄청나게 재밌었다. 4월 22일 프리미어 리그 아스날 FC와 경기를 치렀다. 이날은 하필 안드레이 아르샤빈의 인생 경기였는데 아스날의 아르샤빈이 4골 폭풍을 몰고 와 4:4 무승부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날 아스날의 유효 슈팅은 단 4개였다.
08-09 시즌 리그는 아쉽게도 2위로 끝을 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팀워크와 실력이 차차 나아지고 있어서 다음 시즌에도 훌륭한 순위로 끝낼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열심히 영입하려고 했던 가레스 배리가 결국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을 해버리면서 베니테스 감독만 바보가 돼버렸다. 거기다가 팀의 플레이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사비 알론소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배리가 왔다면 알론소가 떠나도 상관없겠지만 배리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알론소의 이적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되는 입장. 하지만 09-10 시즌부터 레알이 갈락티코스 정책이 부활했다며 돈지랄(...)을 쳐대는 바람에 결국 알론소가 레알로 이적하였다. 대신 AS 로마에서 알베르토 아퀼라니를 영입했지만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퀼라니의 부상이 많다는 이유로 모두 의구심을 품었다. 리버풀 팬들은 아퀼라니의 포텐이 터지길 바랄 뿐이다. 문제는 2009년이 다 되어가도록 10분 이상 출전한 정규 경기가 한 번도 없다는 것. 이제 좀 뛰나 했더니 또 부상.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지만 부상 고치러 베오그라드까지 날아갔다면... 거의 주급 도둑 수준이다.
6.2.6. 2009-10 시즌
맨체스터 시티 FC나 아스톤 빌라 FC, 토트넘 홋스퍼 FC 등의 팀의 약진과 사비 알론소의 부재로 힘든 시즌을 보내며 챔스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광탈, 리그에서는 7위에 그쳤다. "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전통의 문구는 "You'll Walk Alone", "You'll Never Walk Again", "You'll Never Win Again" 등으로 패러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베니테스 감독은 여전히 "토레스만 있었으면..." 하고 있으니... 하지만 토레스, 제라드 모두 복귀하고도 포츠머스에게 0:2로 패배하면서 계속 나락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패배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기 때문에 로또풀이라는 별명을 대신하여 예능풀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떠오르고 있다. 가령 골대 근처에서 팬이 던진 풍선에 공이 맞고 골이 들어간다든지.09-10 시즌 리버풀의 진짜 문제는 수비라인이다. 시즌 첫 경기 토트넘전에서 선발로 나왔던 슈크르텔과 캐러거 두 센터백이 서로 팀킬...을 해버리는 사고가 있었고, 이후 15경기가 넘도록 부상과 출장정지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폼을 갖춘 수비라인이 선발 라인업에 뜬 일이 없었다. 잊지말자. 언제나 리그든 토너먼트든 우승하는 팀은 수비가 탄탄하다.
그래도 토트넘, 에버튼 등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지긋지긋한 아퀼라니의 포텐이 드디어 터져서 각 경기당 한 도움을 꾸준히 주면서 이김으로서 토레스가 부상으로 빠지는 중이었음에도 다시 재기를 하나 싶었지만...아스날을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토레스가 복귀하고도 결국 강등권을 기어다니는 위건을 상대로 졌다. 게다가 그나마 될 것 같은 유로파마저 릴에게 얻어터지면서 슬슬 베니테스 감독 경질설이 부각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토레스가 있어서인지 릴을 이기면서 유로파 통과는 해냈다. 하지만 맨유에게 1-2 역전패하며 6위로 내려앉았다. 5위 맨시티와 7위 아스톤 빌라 보다 2경기, 4위 토트넘보다 1경기를 더 치른 상태로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감독부터 4위권이 힘들어졌음을 인정했을 정도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는 중. 게다가 유로파 리그 8강 1차전 벤피카 원정에서는 1:2로 역전패. 그래도 홈에서는 관광보내고 4강에 진출했다.
베니테스 감독은 내년의 팀의 리빌딩이 필요하다면서 많은 이적 예산을 바라는데... 일단은 저 미국인 공동 구단주, 조지 질레트-톰 힉스 두 명이 이적 자금을 그 정도로 많이 내줄 것 같지는 않지만 회장도 당장 바뀌는 데다가 구단이 인수되어가는 와중이라 모르는 일이다. 일단 베니테스 감독은 돈만 주어진다면 리버풀에 남겠다고 선언.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유벤투스가 베니테스 감독을 거액의 이적료가 있다면서 꼬드기고 있었다. 베니테스 감독은 물론 토레스나 마스체라노 같은 주전 선수들도 노린다던데...
토레스가 시즌 아웃 선고를 받은 가운데, 월드컵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지자 리버풀 때문에 페르난도 토레스를 월드컵에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세계 축구 팬들에게 까였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친 시즌이다.[61]
결국 첼시 FC에게 홈에서 0-2로 완패하면서 4위 진입은 실패했다.
09-10 시즌 마지막 경기. 모든 시선이 첼시와 맨유로 쏠렸을 때, 헐시티랑 비겼다. 결국 7위로 시즌 마무리. 풀럼이 유로파 리그 우승이라도 하면 우승자 진출권으로 인해 까딱하면 유로파 리그도 못나가게 생겼지만, 아틀레티코가 우승을 하여서 못나가진 않게 되었다.
결국 이적 예산이 영 시원찮았는지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과의 계약이 해지되었다. 베니테스 감독이 떠난 이후부터 위르겐 클롭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리버풀은 트로피 걱정보다 프리미어 리그 빅 4의 위상을 지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깊은 슬럼프에 빠져버리고 만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유럽 최고의 미드진을 보유하고 있다던 응원가는 허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라드만 남고 알론소는 레알로, 마스체라노는 바르사로 가버린 상황에서 아무리 제라드라도 혼자서 팀을 구원하기에는 어쩔 수 없이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감독이 문제였냐, 선수들이 문제였냐 그런 문제보다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받는 부류는 바로 질-힉 구단주에게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구단주가 제대로 구단을 운영하고, 필요한 만큼 투자를 지원했어도 성적이 곤두박질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문제는 이 구단주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성적이 갑자기 곤두박질 치기 전의 08-09 시즌의 리버풀은 분명 완벽한 팀이었다. 다른 빅클럽들의 구단주들처럼 구단에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을 해줬으면 리버풀이 암흑기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주축 선수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상황에서 아무리 베니테스라도 방법이 있었을까. 이후 위르겐 클롭 사단을 지원하는 펜웨이 스포츠 그룹의 운영 모습을 보면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리고 이후의 로이 호지슨-케니 달글리시-브렌던 로저스로 이어지는 암흑기 콤보를 겪으면서 그나마 라파 법사라는 리버풀 팬덤의 반응이 강해졌다. 애초에 영국 내에서는 오래전부터 베니테스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구단주가 새롭게 바뀐 상황에서 베니테스 감독이 투자만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면 전과 같은 실패를 겪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7. 암흑기
7.1. 호지슨 시대(2010~2011)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호지슨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0-11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
풀럼 FC에서 강등권 팀을 중위권 팀으로 끌어올리고 그 팀을 UEFA 유로파 리그 결승까지 끌고 간 업적을 높이 사 베니테스 후임으로 낙점받았다. 비록 풀럼 시절 동안 명장 소리를 듣던 감독이나 경력을 보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제외하고 별 볼일 없는 클럽들을 맡은 게 전부인 감독에게 리버풀 감독직을 맡기는 것에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의심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고 그가 지휘했던 프리미어 리그 20경기에서 단 7승만을 기록하는 처참한 기록을 세운다. 정확히는 7승 4무 9패. 붉은 제국 시절의 레전드들이 보면 피눈물 쏟을 기록이다. 심지어 승격 팀 블랙풀 FC에 안방에서 패배하고 몇 주 동안 잠시 강등권으로 추락해 '강등풀'이라는 멸칭을 얻기도 했다. 그나마 잘한 것은 첼시를 홈에서 2-0으로 꺾은 것뿐이다. 또한 리버풀은 리그에서 12위로 내려앉았다. 새롭게 영입한 자원들인 하울 메이렐레스, 조 콜, 크리스티안 폴센, 폴 콘체스키, 밀란 요바노비치 등은 대부분 철저히 실패했다. 전술도 중하위권 팀들이나 쓸 법한 뻥축구나 선제 득점 후 잠그기 전술 같은 것을 썼으니 부진한 성적은 당연한 얘기였다.
결국 시즌 도중에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며 리버풀 감독직을 떠나게 된다.
이 기간에 좋았던 점은 드디어 만악의 근원인 질힉 구단주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2010년 10월 미국의 펜웨이 스포츠 그룹이 전격 구단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7.2. 달글리시 2기(2011~2012)
케니 달글리시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달글리시 2기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선수로서는 리버풀 전성기의 주역이었으며, 감독으로는 1991년에 물러나기 전까지 리버풀을 위해 3회의 리그 우승과 2번의 FA컵 우승으로 붉은 제국의 황혼기를 장식한 레전드가 20년 만에 다시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많은 리버풀 팬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2000년에 셀틱 감독직에서 물러나온 후 10년 만에 감독직을 맡는 것이라 오랫동안의 공백 기간에 우려를 표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시즌 도중에 팀을 떠난 호지슨 대신 팀을 임시로 지휘하던 10-11 시즌에는 확실히 팀을 전보다 달라진 모습으로 바꿔놓으며 10위권 아래로 처졌던 팀 성적을 시즌 마지막에는 6위로 마치게 했다. 리버풀에게는 만족할 수 없는 성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달라진 팀의 모습에 기대감을 나타냈으며, 3년 계약도 체결하며 정식 감독으로 11-12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즌 전의 기대와는 완전 딴판으로 이적 시장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서 새로 데려온 선수들이 좋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고, 형편없는 경기력에 시대에 뒤떨어지는 전술을 쓴다는 비판에 시달렸으며, 루이스 수아레스의 인종 차별 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문제에 시달리면서 리그에서 경악스러운 성적을 내고야 말았으며, 비록 리그컵 트로피를 들어 6년 만에 무관을 탈출하기는 성공했으나, 리그에서는 8위라는 끔찍한 성적을 내고 결국 케니 달글리시도 실패하고 말았다.
7.2.1. 2010-11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0-11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7.2.2. 2011-12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1-12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7.3. 로저스 시대(2012~2015)
브렌던 로저스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로저스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로이 호지슨과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모두 끝이 안 좋게 떠나게 되자, 구단 보드진들은 장기적으로 팀을 변화시킬 감독을 찾게 되었으며, 많은 리버풀 팬들이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의 복귀를 간절히 바랬으나 보드진의 선택은 스완지에서 짧은 패스 위주의 플레이 색깔로 '스완셀로나'라는 이름의 돌풍을 일으키던 브렌던 로저스에게 리버풀 감독직을 맡기는 것이 되었다.
브렌던 로저스는 팀의 암세포나 다름 없는 주급 도둑들을 처분하고 현대적인 전술을 도입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나 항상 무언가 2퍼센트 부족한 모습을 보여왔는데, 특히 수비 쪽의 문제가 정말 심각하였다. 로저스 재임 기간 동안 마마두 사코, 콜로 투레, 데얀 로브렌, 알베르토 모레노 등을 영입하며 수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을 보여주긴 했으나, 저 새로운 수비수들은 오히려 수비에서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만 낳게 하였다.
그외에도 이아고 아스파스, 마리오 발로텔리, 라자르 마르코비치 등 흑역사나 다름없는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했으나, 필리페 쿠티뉴, 다니엘 스터리지[62] 등 알짜 영입도 없지는 않았다.
13-14 시즌에는 개막 3연승으로 최고의 스타트를 끊었고 지난 시즌 막바지 핵이빨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지난 시즌 리그 득점 2위 루이스 수아레스가 징계에서 돌아오자마자 엄청난 득점력을 뽐내며 다니엘 스터리지, 라힘 스털링 공격진을 앞세워 빅 4 진입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유럽 대항전에 나서지 않으면서 국내 컵 대회에서도 조기 탈락해 리그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25라운드부터 35라운드까지 11연승을 거두면서 단순히 빅 4 진입을 넘어 24년 만의 리그 우승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마지막 고비로 여겨졌던 36라운드 첼시와의 홈 경기에서 주장 제라드의 뼈아픈 실수가 빌미가 되어 2-0 패배를 당했고 37라운드 크리스탈 팰리스 원정에서는 수비수들의 호러쇼로 3-0 리드를 걷어차고 3-3 무승부에 그치면서 막판 엄청난 뒷심을 발휘한 맨체스터 시티의 최종전 끝에 우승을 내주게 됐다. 그래도 챔피언스 리그 복귀만 해도 성공이었던 시즌에 리그 준우승은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였다. 다만 101득점으로 팀 역대 한 시즌 최다 골을 기록하고도 50실점이나 내주는 불안한 수비는 끝내 팀의 발목을 제대로 붙잡았다.
그리고 14-15 시즌을 앞두고 루이스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로 떠나고, 시즌이 시작하고 나선 다니엘 스터리지가 부상에 시달리면서 오랜만에 진출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물론, 리그에서도 졸전들을 펼치며 타 팀 팬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다. 이적생 리키 램버트와 마리오 발로텔리, 그리고 임대 복귀한 파비오 보리니의 경기력은 너무나도 처참하여 '램발보'를 형성해 떠난 수아레스와 부상중인 스터리지가 그리울정도로 답이 없는 공격력을 선보였다. 시즌 도중에 쓰리백 전술을 들고 나와 리그 13경기 무패 기록을 세우며 반등하기도 했으나 결국 시즌 막판에서 무너지며 리그 6위로 마친다. 리그컵과 FA컵에서도 4강에서 떨어지면서 무관 모면도 실패하고 리버풀의 정신적 지주인 스티븐 제라드의 마지막 시즌을 트로피로 장식하지도 못했다. 그의 고별경기였던 스토크와의 최종전에서 6:1로 대패하는 대참사까지.
2015-16 시즌은 팀의 정신적 지주인 스티븐 제라드도 없고, 저번 시즌 에이스였던 라힘 스털링은 팀 분위기를 완전히 개판으로 만들고 맨체스터 시티로 튄 상태였다. 보드진으로부터 이번에 챔스 진출에 성공 못 하면 미래를 장담 못 한다는 통첩을 받고 절치부심한 모습으로 제임스 밀너, 호베르투 피르미누, 크리스티안 벤테케, 나다니엘 클라인 등을 영입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도 역시나 약팀과의 경기에서 졸전을 거듭한 끝에, 보드진들조차 인내심의 한계가 도달하여 리그 전반기 머지사이드 더비를 끝으로 브렌던 로저스를 경질시키고 만다.
7.3.1. 2012-13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2-13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7.3.2. 2013-14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3-14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7.3.3. 2014-15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4-15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7.3.4. 2015-16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5-16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 몰락한 명가의 부활
8.1. 위르겐 클롭 시대(2015~2024)
위르겐 클롭 감독 |
우리는 의심하는 자에서 믿는 자로 변해야만 한다.
위르겐 클롭
위르겐 클롭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클롭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브렌던 로저스 감독이 불명예스럽게 퇴장하고 난 후, 리버풀 보드진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성공을 거둔 위르겐 클롭 감독에게 리버풀의 지휘봉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베니테스 감독 퇴장 이후, 로이 호지슨, 케니 달글리시, 브렌던 로저스 감독으로 이어지는 잔혹사를 몇 년 동안 아주 호되게 당해왔던 리버풀 팬덤은 드디어 분데스리가와 유럽에서 검증된 감독이 온다는 소식에 좋아라했다.[63]
당시 리버풀 팬덤은 클롭 감독의 장점들 중에서도 선수들을 보는 안목에 기대를 많이 걸었다. 클롭 감독은 도르트문트 재임 당시에 카가와 신지,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일카이 귄도간, 마츠 후멜스 등을 정말 저렴한 가격에 사들여 포텐을 터뜨리고 우승까지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리버풀 팬들이 기대를 걸 만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클롭 감독이 도르트문트에 있었던 인맥을 이용해 도르트문트 출신 선수들을 리버풀로 데려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는데 클롭은 리버풀로 온 지 5년째가 넘어가는 지금도 예전 클럽의 제자들을 단 한 명도 영입하지 않았다.
클롭 감독은 2015-16 시즌 도중에 맡은 팀을 EFL컵 결승,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으로 인도했다. 유로파 리그 결승까지 가는 동안 토너먼트에서 강팀들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비야레알 CF를 차례대로 만났지만 모두 격파하였다. 특히 도르트문트와의 8강 2차전은 명경기였는데 이 항목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면 새로운 영입 없이 충분히 리그 4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는 팀이라는 클롭의 평가가 무색하게 비록 리그에서는 8위라는 안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클롭 감독 특유의 게겐프레싱 색채를 입힌 팀은 아직은 어설퍼도 확실히 전보다 달라져 있었고, 몇 가지 약점만 보완한다면 충분히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팀이 되어 있었다.
2016-17 시즌의 클롭 감독은 리버풀에서의 첫 이적 시장에 뛰어들어 사디오 마네, 조르지뇨 바이날둠, 조엘 마팁, 로리스 카리우스 등을 영입했다. 그동안 리버풀의 위상이 많이 추락한 관계로, 소위 말하는 빅네임 영입은 없었으나 이때 영입한 마네, 바이날둠, 마팁은 이후 팀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다. 특히 마네는 주로 오른쪽 날개에서 공격을 책임지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리버풀은 이 시즌 필리페 쿠티뉴, 호베르투 피르미누, 사디오 마네, 아담 랄라나를 앞세워 전반기에는 리그 1~2위를 다투기도 했으나 후반기에는 마네의 네이션스컵 차출, 랄라나와 헨더슨의 부상, 게겐 프레싱으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승점을 뺏기는 빈도가 많아지면서 순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막판에 꾸역승을 반복한 끝에 애초의 목표였던 리그 4위, 챔피언스 리그 예선 출전 티켓은 획득할 수 있었다. 수비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이 안 되는 등 아쉬운 점이 많은 시즌이었으나 프리미어 리그 빅클럽들을 상대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클롭 감독이 리버풀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2017-18 시즌은 리버풀이 챔스에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전보다 더 퀄리티 있는 영입 자원들이 리버풀의 러브 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떠오르는 센터백 신성이었던 버질 반 다이크가 대표적이었는데,[64] 결국 반다이크 이적은 여름 이적 시장에서 불발되었지만 겨울 이적 시장에서 7천만 파운드가 넘는 거액으로 영입이 성사되었다. 이후 판데이크는 리버풀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선수로 발돋움 하였다. 이 시즌에 영입된 모하메드 살라, 앤드류 로버트슨,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도 팀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며 리버풀이 강팀으로 변모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해줬던 필리페 쿠티뉴가 FC 바르셀로나의 영입 구애에 이적 신청서를 제출하는 청천벽력 같은 사태가 터져버렸다. 태업 논란까지 불거진 선수를 다행히 여름 이적 시장에서 어떻게든 팀에 잔류시키긴 했지만, 겨울 이적 시장에서 결국 바르사로 떠나버렸다. 팀 최고의 에이스가 떠나버리면서 리버풀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축구 팬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 시즌에 처음 선보이게 된 마네-피르미누-살라, 이른바 마누라 라인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겨울에 영입한 판데이크 덕분에 수비가 안정화 되면서 쿠티뉴의 공백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65]
이 시즌 리버풀은 리그 전반기 때 맨시티에게 5-0, 토트넘에게 4-1로 털리는 악몽을 겪기도 했으나, 후반기에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이번에도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치는 데 성공한다. 시즌 무관에 리그 4위가 전부인 리버풀은 유독 이 시즌에 전세계 축구팬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는데, 그동안 몰락한 클럽으로 취급받던 리버풀이 06-07 시즌 이후 오랜만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결승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 CF였다. 리버풀보다 한 수 위의 팀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리버풀은 지난 토너먼트 8강전에서 당시 유례없는 막강함을 자랑하던 맨체스터 시티를 홈, 원정에서 모두 떡실신 시키고 올라왔으며, 공격진에는 당시 팀과 리그의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며 폭발적인 활약을 보여주던 모하메드 살라가 있기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나 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알의 세르히오 라모스가 고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살라의 팔을 부상입혀 아웃시켜 버린다. 비록 팀의 주포가 전반전에 아웃되었지만 리버풀은 판데이크를 위시한 수비진들이 레알 공격진들을 안정적으로 틀어막으며 레알을 상대로 꽤 잘 싸우고 있었는데, 당시 골문을 지키던 로리스 카리우스가 문제였다. 골키퍼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두 번의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으며 결국 리버풀이 3-1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패배의 원흉, 카리우스는 결국 다음 시즌에 베식타스로 임대되어 버린다. 비록 원통한 패배를 당한 리버풀이지만, 몇 년간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유럽 대항전 진출도 간당간당했던 팀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선수들도, 감독도, 팬들도 모두 자랑스러워 할 만한 사실이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많은 타 팀 팬들조차 리버풀을 강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2018-19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
2018-19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서 클롭은 팀의 약점을 메꾸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약점이었던 골키퍼 자리를, 유럽 무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로마의 알리송 골키퍼로 채웠으며, 파비뉴와 나비 케이타, 제르단 샤키리를 영입하며 미드필드진의 두께를 늘렸다. 이로서 클롭의 팀은 전보다 완벽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저번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올라간 경험이 보약이 되었는지 리그에서 파죽지세의 성적을 보여줬다. 30승 7무 1패, 97점으로 클럽 최다 승점 기록을 갈아치웠으나, 당시 크레이지 모드였던 맨체스터 시티에 승점 1점 차로 밀려 준우승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맨시티를 상대로 1무 1패의 성적을 거둔 것이 부메랑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리그에서의 막강한 모습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보여줘, 토너먼트에서 레바뮌 중 뮌헨과 바르사를 만나 다수의 예상을 깨고 차례로 털어버렸다. 특히 4강 1차전에서 0:3으로 패했던 바르사와의 4강 2차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스코어인 4:0으로 승리, 이른바 안필드의 기적이라 불리는 챔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지난 시즌에 이어 2연속 챔스 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고, 마침내 결승에서 토트넘 핫스퍼를 2:0으로 꺾고 14년 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6번째 빅 이어를 들어 올리고야 만다. 이로써 리그 2위, 챔스 우승을 기록하며 연이은 감독 잔혹사와 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기의 종지부를 찍고, 클롭은 몰락했던 명가의 새로운 전성 시대를 열게 되었다.
2019-20 프리미어 리그 우승 |
2019-20 시즌에는 영입보다는 기존 선수단을 지키는 데 중점을 두고 시즌을 시작하였다. 전 시즌 챔스 우승 자격으로 타 국가에서 슈퍼컵, 클럽 월드컵까지 소화해야 하는 지옥 일정을 앞두고 우려가 상당했지만, 클롭과 선수단은 엄청난 정신력과 체력으로 이를 견뎌내고 결국 UEFA 슈퍼컵과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한 해에 챔피언스 리그 - 슈퍼컵 - 클럽 월드컵을 모두 석권하는 컨티넨탈 트레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역대급으로 남을 만한 압도적인 페이스를 선보이며 리그에서 무패로 전반기를 마무리 하였다. 이후 후반기에도 리그에선 그 기세를 이어 갔으나 겨울 휴식기 후 조금 주춤하며 결국 무패가 깨졌고, 챔스와 FA컵에서도 아쉽게 16강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전 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해 우승을 코 앞에 두고 리그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약 3개월 만에 리그가 재개되었고 결국 리버풀은 31R에 조기우승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프로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2020-21 시즌에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시즌을 보냈는데, 전반기에는 1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유지했으나 시즌 중반부터 센터백 포지션을 비롯해 주축 선수들의 역대급 줄부상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홈 6연패의 늪에 빠져 한때 8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도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8승 2무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며, 끝내 리그 3위로 선방하였다. 비록 이전 시즌처럼 우승을 거두진 못했으나, 소위 하늘이 버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불운했던 시즌을 어떻게든 수습하여 챔스권 수성에 성공한 점은 클롭과 리버풀 선수단이 오히려 박수를 받을만한 성과였다.
2021-22 시즌에는 지난 시즌의 여파로 축구 전문가들과 언론에서 예측했던 성적보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때 승점 14점 차까지 벌어졌던 격차를 1점 차까지 추격하면서 맨시티와 치열한 리그 우승 레이스를 펼쳤고, 잉글랜드 클럽 중 역대 최초로 단일 시즌에 EFL컵, FA컵,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모두 진출하기도 했다. 비록 리그와 챔스에서 한 끗 차이로 준우승을 거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동안 스쿼드 뎁스 문제로 거의 던지다시피 해왔던 자국 컵 대회에서 마침내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내었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두 번의 자국 컵 대회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첼시를 연달아 잡아내며, 10년 만에 EFL컵 우승과 16년 만에 FA컵 우승까지 차지하게 되었고, 클롭은 리버풀 역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를 모두 제패한 감독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2022-23 시즌 초에 맨시티를 상대로 승리하여 FA 커뮤니티 실드에서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클롭 체제하에 리버풀은 7개의 주요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좋은 출발을 알리는 듯했으나 이후 전 시즌 쿼드러플을 노리던 팀은 어디 가고 없고 리그에서 부진을 거듭하며 최종 순위 5위로 6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였다.[66] 자국 컵 대회 역시 빠르게 탈락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작년 시즌의 리벤지 매치를 가졌지만 탈락하였다. 결국 고여버린 선수단 스쿼드와 이에 따른 전술적 한계를 견디지 못했다. 이에는 여러 이유들이 종합된 문제였으며, 클롭 부임 이후 가장 부진한 성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여전히 콥들을 비롯한 선수단의 전격 지지를 받고 있는 클롭인 만큼 새 시작이 필요한 시점이며, 시즌 후반기 라이벌 맨유를 상대로 역사적인 7-0 대승을 거두기도 하고 마지막 10경기에서 8승 2무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위르겐 클롭의 마지막 시즌인 2023-24 시즌 EFL컵 결승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해 통산 10번째 우승(최다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뒀다.
8.1.1. 2015-16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5-16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2. 2016-17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6-17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3. 2017-18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7-18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4. 2018-19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8-19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4.1. 안필드의 기적
자세한 내용은 UEFA 챔피언스 리그/2018-19 시즌/4강 2경기 2차전 문서 참고하십시오.8.1.5. 2019-20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9-20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6. 2020-21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0-21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7. 2021-22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1-22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8. 2022-23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2-23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8.1.9. 2023-24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3-24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9. 새로운 시작
9.1. 아르네 슬롯 시대(2024~ )
아르네 슬롯 감독 |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슬롯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9.1.1. 2024-25 시즌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4-25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1] 하단 정중앙의 인물이 리버풀의 창립자 존 하울딩. 왼쪽은 존 맥케나, 오른쪽이 윌리엄 바클레이.[2] 현재의 안필드와 구디슨 파크 사이에 있는 공원이다.[3] 광고판, 개찰구, 스탠드 등의 시설이 필요했다.[4] 리버풀의 창단일이 3월 15일과 6월 3일로 갈리는데, 3월 15일은 하울딩과 바클레이가 구단 창단을 결의한 날이고 6월 3일은 리버풀 FC가 협회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날이다. 이에 공식적으로는 6월 3일이다.[5] 바클레이가 하울딩에게 처음 이 이름을 제안했다.[6] 당시에는 현대 축구의 구단 체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Coach)직과 단장(Director)직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리버풀의 경우 바클레이가 초대 감독(Manager)으로 인정받지만, 함께 구단을 창단한 존 맥케나가 실질적으로 선수단을 지도하고 라인업을 선발하는 코치로서의 감독 역할을 맡았었다. 바클레이는 당시 사실상 현대의 디렉터 혹은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7] 글래스고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수들을 많이 데려왔는데 이때, 이름이 맥케나와 같이 'Mc'으로 시작되는 선수들이 많아서 맥케나의 리버풀은 'Team of Macs'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던컨 맥린, 제임스 맥브라이드, 말콤 맥빈, 휴 맥퀸, 맷 맥퀸, 존 매카트니, 빌 맥오웬, 조 맥퀸 등의 선수들이 리버풀에 입단했다.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특유의 'Mc'가 이름에 포함된다.[8] 처음 리버풀은 풋볼 리그에 즉각 합류하고자 협회에 참가 신청서를 냈으나 행정적인 문제가 발생해 거절당했다.[9] 공교롭게도 후에 지독한 악연으로 엮이는 노스웨스트 더비 라이벌 맨유가 될 클럽을 꺾고 처음으로 1부 리그에 오른 것이다.[10] 이 경기에서 베리는 골키퍼가 퇴장당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10명으로 경기했다.[11] 버밍엄 시티 FC의 전신.[12] 이전에는 에버튼과 같이 리버풀 지역의 대표색인 파란색을 활용해 파란색-흰색 조합의 유니폼을 사용 중이었으나, 이후 또 다른 지역 대표색인 붉은색상을 차용해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했다.[13] "누가 다음 차례가 될까요?"의 질문의 답은 이 포스터에서 왕관을 수여받은 남자가 있었던 팀 선덜랜드였다. 1900-01 시즌에 리버풀에 밀려 준우승했던 선덜랜드는 1901-02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14] 샘 레이볼드가 잉글랜드 풋볼 리그 첫 단일 시즌 30골을 기록하며 31골로 리버풀 역사상 첫 득점왕에 올랐다.[15] 당시 포츠머스는 풋볼 리그가 아닌 런던 포함 남부 축구 팀들이 참가하는 서던 리그에 속해 있었는데 포츠머스는 레이볼드와 골디를 영입하려고 접촉했으나, 접촉 자체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포츠머스로의 이적 금지와 함께 레이볼드와 골디는 나란히 7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전력의 핵심의 둘이 빠진 리버풀은 5위에서 강등권으로 추락했다. 출장 정지가 끝난 뒤 골디는 서던 리그의 풀럼으로 이적했고 레이볼드는 팀에 남았으나 실전 감각 부족으로 인해 15경기에서 4득점에 그쳤다.[16] 이 상황에서 난세의 영웅이 있었으니 22세의 샘 하디 골키퍼였다. 1905년 체스터필드에서 이적한 하디는 당초 네드 도이그 골키퍼의 백업이었으나 도이그가 류머티즘 증세로 인해 출장에 제한을 받자 대신 출장하게 되었고 하디는 그의 공백을 뛰어나게 메우며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17] 보어 전쟁 때 많은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전사한 곳의 지명인 스피온 콥(Spion Kop)을 추모의 의미로 붙인 것에서 유래한다.[18] 1909-10 시즌 리그 30골로 득점왕에 올랐다.[19] 06-07 15위, 07-08 8위, 08-09 16위, 10-11 13위, 11-12 17위, 12-13 12위, 13-14 16위, 14-15 13위[20] 리버풀 4명, 맨유 3명.[21] 징계를 받은 선수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공로로 1919년 징계를 해제받았으나, 토마스 페어폴의 경우 전후에 곧바로 은퇴했다.[22] 역대 최장 기간 재임 감독이다.[23] 가족 문제가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그 이유가 불분명하여 세간에 논란을 일으켰다. 향간에는 그가 가족 문제에 의해 리버풀의 감독직을 갑자기 그만둬야 했다고 전해졌지만 곧바로 올덤으로 복귀한 것으로 보아, 친정팀인 올덤에 대한 충성심과 더불어 리버풀에 올덤에서와 같은 애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왔다.[24] 맥케나 감독의 지휘아래 1892년 리버풀 최초의 선수단을 구성했던 레전드이며, 리버풀 역사상 첫 리버풀 선수 출신 감독이다.[25] 에버튼의 전설적인 공격수 딕시 딘과 당대 라이벌리를 형성하며 머지사이드 축구계를 양분했으며, 리버풀에서 개인 응원가가 최초로 만들어진 선수로 유명하다. 리버풀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26] 사임한 뒤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자 그 해 은퇴한다.[27] 378경기 241골로 구단 역대 득점 3위를 기록했으며, 역대 리버풀 선수 중 가장 많은 경기당 득점을 뽑아낸 전설적인 공격수다.[28] 1913년부터 22년간 리버풀에서 활약했던 엘리샤 스콧은 이 시즌에 아서 릴리에 의해 주전에서 밀리자 고향팀 벨파스트로 떠나 리버풀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현재까지도 최장 기간 리버풀 FC 소속 선수로 남아 있다.[29] 당시 안필드와 멜우드 훈련장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으나, 샹클리가 부임한 이후 보드진의 투자를 끌어와 잉글랜드 내 최고의 시설을 가진 경기장과 훈련장으로 거듭났다.[30] 톰 손더스, 제프 트웬티맨 등의 전설적인 스카우터들을 직접 영입해 스카우팅 시스템을 일신하였으며, 리저브 팀을 개혁하여 팀 내 선수 수급을 활발히 만들었다.[31] 기존의 고전적인 훈련 방식을 버리고, 세분화되고 기술적인 현대식 훈련을 도입했으며, 선수단 컨디셔닝과 부상 관리를 위해 경기 전후 동선에서부터 처치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개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무려 24명의 선수들을 방출 명단에 올려놓고 1년 동안 모두 방출시키는 조치를 했다.[33] 선수들의 탈의실 옆 신발을 놓는 좁은 공간이었으나, 빌 샹클리는 이 공간에 코치 스태프들을 불러모아 함께 차를 마시며 전술 구상과 구단 계획 같은 것들을 상의했다. 이 부트 룸 멤버였던 당시 코칭스태프 밥 페이즐리와 조 페이건은 훗날 서로 합해서 빅 이어 4개를 리버풀로 가져와 붉은 제국을 꽃피웠다.[34] 팀에 부임하자마자 기존의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루벤 베넷 등의 코치진들에게 자신의 사단을 데려오지 않고 원래 있던 코치들과 함께할 것임을 천명하였다.[35] 이 경기는 리버풀의 장내 아나운서 조지 셰프턴이 안필드의 목소리가 된 첫 경기이기도 했다.[36] 첫 번째 사진은 1977년 첫 우승, 두 번째 사진은 1978년 두 번째 우승이다.[37] 얄궂게도 리버풀의 트레블을 저지한 맨유가 이후 98-99 시즌에 잉글랜드 첫 트레블을 달성한다.[38] 재미있게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키건이 이적한 함부르크와 만났는데, 1차전 원정에서 1-1로 비긴 뒤, 2차전 홈에서 6-0의 스코어를 만들어버리며 리버풀은 키건을 머쓱하게 했다. 이때 달글리시도 한 골을 넣었다.[39] 해당 시즌 노팅엄 포레스트는 첫 유러피언 컵 우승에 성공했다.[40] 1978년 1월부터 이어온 63경기 연속 홈 무패 기록을 마감했다. 이 기록은 2007년 첼시의 86경기 홈 무패로 경신되었다.[41] 참고로 이 경기가 2024년 현재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마지막 챔스 준우승 경기이다. 이 이후로 레알 마드리드는 챔스 결승전에 올라가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중 두 번은 리버풀을 상대로 우승했다.[42] 당시 리버풀 선수단은 남미 팀과 해당 대회를 만만하게 보고 경기 시작 전까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43] 사실, 정식 트레블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 원래 트레블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려면 유러피언 컵 우승과 리그 우승, FA컵 우승까지 총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리버풀이 들어 올린 3개의 우승컵 중에서 유러피언 컵과 리그 우승 트로피 2개는 트레블의 조건을 만족하고 있으나, 리그컵의 경우 FA컵과 달리 정식 트레블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기때문에 잉글랜드 구단 내에서의 정식 트레블을 최초로 이룬 클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보고 있다.[44] 승부차기에서 보여준 브루스 그로벨라의 현란한 춤 장면은 훗날 이스탄불의 기적 때 예지 두덱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45] 유러피언컵, UEFA컵, UEFA 컵위너스컵 등[46] 이 헤이젤 참사로 인해 리버풀 말고도 잉글랜드의 모든 팀이 5년간 출전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징계 후 리그 우승은 다름이 아니라 라이벌인 에버튼이 출전 금지 때문에 유러피언컵 출전이 무산되면서 두 팀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47] 물론 이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48] 지역 라이벌인 에버튼 또한 마찬가지. 같은 지역 사람들이 희생당했기 때문이다.[49] 리버풀 지역에서는 'Don't but the Sun'이라는 문구가 유명하다. 웬만하면 머지사이드 지역 내에서는 힐스보로 참사 이후 더 선을 소비하지 않는다.[50] 여담으로 크리스탈 팰리스는 결승에서 재경기 끝에 맨유에 패해 준우승했다. 이때 맨유는 리그에서 큰 부진을 겪었었고 FA컵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여기서 경질당할 뻔했다.[51] 입석 콥 스탠드의 마지막 경기였던 노리치와의 홈 최종전에서 0-1로 패했다.[52] 구단 초대 감독인 바클레이와 맥케나가 아일랜드 출신이라 최초의 외국인 감독은 아니다.[53] 이때 3위로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리즈 유나이티드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 진출했다.[54] 이후 맨시티는 18년이 지난 2021년이 돼서야 코로나로 인한 무관중 상태의 안필드에서 승리를 따낸다.[55]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빚더미의 첼시를 인수하여 강팀으로 만들게 한 결정적인 경기가 됐다.[56] 아스날은 승점 90점, 리버풀은 60점, 꼴찌 울버햄튼은 33점이다. 아깝게 5위를 차지한 02-03 시즌보다도 승점이 4점 적었다.[57] 이후 리그에서 꾸준히 빅 4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챔피언스 리그에서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어내며 이때 리버풀에 입문한 국내 팬들이 많다.[58] 아이러니하게도 오언이 이적하자마자 리버풀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반면 오언은 레알에서 슈퍼 서브에 그쳤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16강에서 유벤투스에게 탈락하고 말았다. 16강 마드리드의 시작이었던 시즌.[59]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지금도 회자되는 4:1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레알을 4:0으로 꺾은 지 3일 만에 또 빅클럽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60] 토레스가 유로 2008 출전의 영향으로 잔부상에 시달릴 때 승점을 많이 잃었다.[61] 다행히도 토레스는 월드컵 전에 회복하여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결과는...[62] 이 선수는 부상을 자주 당하는 것만 아니면 정말 월드 클래스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던 선수였다.[63] 당시 클롭 감독은 암흑기에 빠져 있던 도르트문트를 일으켜 세워 FC 바이에른 뮌헨이 버티는 분데스리가에서 두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을 경험한 사람이다.[64] 당시 판데이크의 소속팀이 리버풀로부터 여태까지 아담 랄라나, 데얀 로브렌, 사디오 마네, 나다니엘 클라인 등 핵심 자원들을 빼앗겨 왔던 사우스햄튼 FC였기에 이번에는 쉽게 내줄 것 같지 않아 보이더니, 역시나 사우스햄튼이 리버풀의 접촉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급기야는 불법 접촉으로 협회에 제소하겠다는 초강수를 둔다.[65] 이와 반대로 쿠티뉴는 바르사 2년차 때 팀 적응에 완전히 실패하면서 결국 19-20 시즌에 뮌헨으로 임대 가게 되는 초라한 행보를 보이고 만다.[66] 시즌 중 한 번도 리그에서 4위 이상 올라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