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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강대학교 이름의 유래2. 캠퍼스 관련 이야깃거리3. 수많은 최초의 기록들4. 서강고등학교5.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6. 전설로 남은 광고, 헤이~ 하버드!7. 장영희 교수 이야기8. 감정가 9,999,999,999원9. 배구부의 전설10. 여러가지 물적, 금전적 지원 루머11. 총장 관련 이야깃거리12. Excuse me, can you speak Korean?13. 축제 관련14. 라이벌?15. 외국인 학생들16. 서강대 라면17. 캠퍼스 내 동물 친구들18. 서강 성탄 구유19. 가톨릭대학교와의 통합 떡밥20. 헤어초크 광장21. 길이니까 잔디를 심지 마시오22. 인지도에 관한 진실23. B관의 전설
1. 서강대학교 이름의 유래
서강대학 설립의 주역들. 좌측 하단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 헙스트 신부, 진성만 베드로 신부, 프라이스 신부, 데슬렙스 수사. |
길로련(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님께서 완강히 ‘서강’을 고집하셨다. 학교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였다. - 370호 서강옛집 '김인자 명예교수가 이우진(60 사학) 동문에게 들려준 이야기' 中 |
1960년 1월, 모교 이름이 ‘장안(長安) 대학교’로 잠정적으로 결정돼 대외적으로 쓰이고 있던 당시의 일이다. "학교 이름이 너무 평범하다"는 지적에 "학교 이름을 새로 정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장안(長安), 광화(光化), 성지(聖志), 성지(誠志), 명덕(明德), 명도(明道), 상지(上智), 진단(震旦), 진성(珍聖), 대건(大建), 명진(明珍), 경서(京西), 한성(漢城) 등 여러 후보 가운데 ‘서강(西江)’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당시 학교 이름을 정하는 데 관여했던 이들은 이해남 교수를 비롯한 예비 교직원들과 길로련, 게페르트, 김태관, 헙스트, 프라이스 신부 및 신학생 도일 등이었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은 ‘한강의 서쪽 줄기’라는 뜻을 가진 ‘서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강’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면, 그 시절 학교 근처에서 팔던 지독한 새우젓 냄새가 연상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로련 신부님께서 완강히 ‘서강’을 고집하셨다. 학교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였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보세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옥스퍼드란 ‘소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오늘날 옥스퍼드는 전 세계적으로 학구적인 명망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한참 동안 계속된 학교 명칭에 대한 토론은 ‘서강’으로 결론났다. 새우젓 냄새도 날려버린 ‘서강’이었다.
2. 캠퍼스 관련 이야깃거리
2.1. 결코 작지 않은 캠퍼스
정문에서 보이지 않는 캠퍼스 후문 쪽 |
"건국대학교 일감호에 서강대학교가 빠지고, 그 넘친 물에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잠긴다"라는 농담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어림도 없는 말이다. 건국대 일감호의 서류상 면적은 55,661㎡인데 반해 서강대의 면적은 무려 242,091㎡에 달한다.
사실 서강대학교의 캠퍼스 면적은 타 인서울 대학들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다. 대학알리미에 공시된 서강대학교의 교지 면적[1]은 209,509㎡인 반면,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182,960㎡,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82,291㎡, 광운대학교 75,836㎡, 세종대학교 111,676㎡, 명지대학교 55,792㎡, 숭실대학교 125,654㎡, 상명대학교 152,207㎡, 그리고 숙명여자대학교 65,009㎡ 등등 서강대학교의 캠퍼스보다 눈에 띄게 작은 대학들이 많다.
또한 서울에 있는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보다 크다. 서강대의 캠퍼스 면적에 학교 소유의 노고산 면적을 포함시키고 성균관대도 임야와 국가 소유 문화재를 모두 포함시킬 경우, 서강대의 면적은 242,091㎡, 성균관대 면적은 155,412㎡이다. 심지어 각 캠퍼스에서 활용하지 않고 있는 임야 및 문화재 면적을 모두 뺄 경우 서강대의 면적은 154,698㎡인 반면, 성균관대는 80,973㎡에 불과해 둘 간의 차이가 2배 정도로 확 벌어진다.[2] 성균관대 인사캠 재학자가 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1인당 면적 차는 훨씬 더 커진다. 다만 성균관대학교는 이원화 캠퍼스로 이공계열 주요 시설이 전부 수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서강대학교는 작은 캠퍼스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일까? 인근에 위치한 신촌의 두 거대한 대학(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덕분에 캠퍼스가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 때문일 수도 있다. 서강대를 정문에서 바라볼 경우 본관 뒤 넓은 부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고, 타 대학보다 적은 정원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2.2. 건축학도들의 성지, 서강대 본관
서강대학교 본관에서 김중업 |
"언뜻 보면 철 지난 1960년대 풍경처럼 보이지만, 두 건축가가 한국 현대 건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보나 두 건물 자체의 조형적 완성도로 보나 그리 간단하게 평가할 대상은 아니다. 최근 대학교 건물에 Office Building 양식이 유행하면서 Campus조형 환경이 점점 산업주의에 물들어 삭막해져 가는데, 이곳 서강대학교 본관과 예수회 교수회관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Modernism의 기하주의와 회화주의의 정수를 보여준다." -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임석재 |
서강대학교 정문에 입성하면 보이는 아담한 본관 건물을 보며, 재학생이라면 한 번쯤 "아니, 왜 J관이나 GN관은 삐까뻔쩍한데, 저 건물은 뭐하는 건물이길래 저렇게 낡아 보일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하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건축 관련 교양서적에 자주 등장하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서강대학교 본관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을 이끌었던 김중업의 작품으로, 김중업의 초기작 중 작품성 측면에서 그야말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보존 상태가 원형에 가까워서, 건물 안팎의 외관이라든지 인테리어를 하나라도 바꿀 때에는 건축계의 반발이 세다. 실제로 본관에 들어가보면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특이한 점을 여럿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관이 1959년에 완공된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재학생이 많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의 인식과 달리, 서강대의 본관은 타 대학들의 여러 석조 양식 본관과 거의 비슷한 연식을 자랑한다.[3] 본관이 얼마나 앞선 디자인이었는지를 엿볼수 있는 부분.
본관은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인 설계를 자랑했는데, 이러한 설계를 본 적 없던 당국자들이 제출된 설계 도면의 일부분을 반려한 적도 있었다.[4][5] 본관 전체를 김중업이 꽤나 세심하게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본관 오른쪽의 격자 차양막이다. 단순히 장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건물이 서향인 것을 고려한 장치로, 오후에 햇빛이 지나치게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완공 당시의 서강대 본관은 최고급, 최신식 건물이었으며, 덕분에 당시 재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본관은 국내 대학 건물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구비하고, 다른 대학에서는 엄두도 못 내던 난방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그 시절에는 학생들이 화장실을 구경하러 오고, 또 그 당시엔 귀하던 화장지를 뜯어서 모셔가는(...) 일도 흔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간이식당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참고로 본관 바로 옆에 위치한 예수회 사제관도, 시대가 낳은 건축가라 불리는 이희태의 작품이다. 그는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을 설계한 인물이다.
서강대학교 본관 투어 1
서강대학교 본관 투어 2
서양건축 1대 유학파 김중업, 서울 곳곳 숨은 작품
2.3. 국내 최초의 완전 개가식 도서관, 로욜라 도서관
준공 직후의 로욜라 도서관 |
지금에 와서는 개가식 도서관이 일반화됐지만, 로욜라 도서관 개관 당시만 해도 폐가식 도서관[6]이 보편적이었다. 당시에는 책이 고가였던 데다가, 분실 방지 시스템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강대학교는 국내 최고의 도서관을 짓겠다는 목표 하에 개가식 도서관 운영을 시작했다.
로욜라 도서관의 준공 당시에는 책의 훼손이나 분실 우려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도 개관 이후 책 훼손이나 분실이 여럿 발생했다. 그러나 도서관 관계자들은 "비록 책 도둑이라 할지라도 '그대 서강의 자랑'이기에 훗날 훔친 책 가격 100배 이상의 기여를 도서관에 해주길 기대한다"라고 반응했다. 다른 대학들처럼 폐가식으로 바꾸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3. 수많은 최초의 기록들
서강대학교는 미국 위스콘신 예수회의 주도로 설립됐으며, 덕분에 개교 당시부터 다양한 선진 교육 시스템이 도입될 수 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의 전폭적인 도움 아래 당시로선 찾아보기 힘들던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미국에서 건너온 '선진적 교육 DNA'를 이식시키는 작업도 계속됐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서강은 수많은 최초의 기록들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를 모델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대학 (1960)
- 국내 최초로 외국인 영어 강의 시행 (1960)
- 국내 최초로 영어실습실(English Lab) 설치 (1962)
- 덕분에 당시 서강대는 동시 통역과 번역이 가능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학교였다.
- 국내 최초로 교수안식년 제도 도입 (1966)
- 국내 최초로 노사연구기관 설립(1966)
- '산업문제연구원'. 독일 정부의 원조를 받은 연구원이다.#
- 국내 최초로 텔레비전 강의 실시 (1967)
- 국내 대학 최초로 슈퍼컴퓨터 설치 (1968)
- 당시 도입된 기종은 유니박(UNIVAC)
- 국내 대학 최초로 전자계산연구소 설치 (1968)
- 국내 대학 최초의 시청각 스튜디오 준공
- 국내 대학 최초의 전문 공연장 - 메리홀 (1970)
- 국내 대학 최초로 장애인 입학 허용 (1971)
- 국내 최초 과학관 우주선관측소 건립 (1972)
- 국내 최초의 완전 개가식 도서관 - 로욜라 도서관 (1973)
- 한국 최초 대학 명의의 학파 - 서강학파
- 국내 최초로 복수전공 제도 도입 (1978)
- 국내 대학 최초로 '새터' 도입 (1981)
- 국내 대학 최초로 업무 전산화 통한 대출/ 반납 자동화 실시 (1986)
- 국내 최초로 학생소비자협동조합 도입 (1988) [7]
- 국내 최초로 평생지도교수제도 도입 (1996)
- 국내 최초로 연계전공 및 학생설계전공 제도 도입 (1998)
- 국내 최초로 지식융합학부 신설 (2012)
- 국내 최초로 메타버스 전문대학원 설립 (2022)
- 국내 최초로 교수겸직제도 신설 (2022)
- 국내 최초로 경제대학원 ESG경제 전공 신설 (2022)
4. 서강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붙은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은 오래전부터 쓰였고,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8]철저한 출결 관리 + FA 제도 + 지정 좌석 제도 + 수업 종소리 의 콜라보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은 빡센 서강대학교만의 학사 제도 덕분에 생겼다. 개교 직후부터 서강대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매우 엄격하게 학점을 매기고, 시간을 매우 중시 여겨 결석 처리도 칼같이 진행했다. 졸업생 인터뷰에 의하면 교수님들이 교탁에 시계를 올려놓고는 수업 시작 10분이 지나면 뒤늦게 들어와도 무조건 결석 처리를 했다고.[9] 게다가 FA 제도를 도입해, 결석이 일정 시수 이상 쌓이면 해당 수업이 자동으로 F 처리되었다. 이러한 엄격한 학사 관리는 당시 한국의 타 대학들과는 차별화되는 서강대학교만의 특징이었으며, 한국의 학생과 교수 사회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외에도 서강대학교만의 독특한 제도는 많았다. 고등학교처럼 매시간마다 수업종이 울렸는데, 90년대 중반까지도 매시간마다 "따르릉"거리는 종소리가 캠퍼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후 종소리는 음악으로 대체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정 좌석 제도 또한 독특했다. 고등학교 교실처럼 강의실의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하니 다른 대학교들과 달랐다. 또한 토요일 수업이 가장 늦게 사라진 대학교인 점도 이러한 별명에 한몫했다. 정규 수업들이 주 5일로 바뀐 후에도 실험이나 일부 교양과목은 토요일에 배정되었다.
빡센 학사 제도와 함께 구 리치관(구 R관)이 한몫을 했다는 설이 있다. 2010년까지만 해도 현재의 떼이야르관에서 정하상관 자리에는 구 리치관(구 R관, 자연대)이 있었는데. 그 외양이 흡사 고등학교 건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학교 밖에서 구 R관을 볼 경우, 길 건너 숭문고등학교와 비교되어 그 옆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학사 제도를 대표하는 독후감 제도 역시 이런 별명과 무관하지 않다. 독후감 제도는 대외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서강대학교의 특징으로, 타 대학에선 찾아보기 힘든 학사 제도였다.[10] 게다가 교내외를 통틀어 구 R관을 가장 잘 볼 수 있었던 곳이 (당시 학생들이 독후감을 제출하던) X관이다. 참고로 광주광역시에는 서강고등학교가 실제로 있다. 단, 서강대학교와 전혀 무관한 학교다.
5.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서강대학교의 표어 |
서강대학교의 표어는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이다. 처음 만들 당시에는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였는데, 이후 우리말로 번역해 지금에 이르렀다.
표어를 만든 사람은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60학번인, 안우규 명예 교수. 1964년 1월호 첫 <서강옛집>에서 최초로 공개됐으며,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학장이 같은 해 열린 제1회 졸업식 축사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빠르게 퍼졌다. 1964년부터 사용됐다는 점에서, 2000년대 가서야 표어를 확립하고 홍보하기 시작한 대부분의 대학들과 차별화된다.[11]
서강대학교를 대표하면서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표어. 굉장히 파급력이 컸던 덕분에, 여러 기관들에서 표절해 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강대학교/상징 참조.[12]
이말년 웹툰 작가는 4컷특급 <인생> 편에서, 서강대학교의 표어를 본뜬 표현을 실었다: "그대 ㄸㅌ의 자랑이듯, ㄸㅌ 그대의 자랑이어라."
6. 전설로 남은 광고, 헤이~ 하버드!
<rowcolor=#fff> 전설의 광고 3대장 | ||
헤이~ 하버드! | 이봐, 미스 왓튼! | MR. MIT! |
7. 장영희 교수 이야기
서강대학교 내에서 치러진 장 교수의 장례식 |
"당연히 입학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 J. E. 브루닉,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학과장 |
장영희 마리아 교수는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번역가, 영문학자이다.
장 교수는 어릴 때 병을 앓아 장애인이 되었다. 어렵사리 고등학교까지 마쳤지만, 장애인은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차별 탓에 대학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정 환경이 불우한 것도 아니었던 게, 장영희의 아버지는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인 장왕록 교수였다. 하지만 장왕록 교수가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교에 딸의 입학시험 여부를 문의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렇게 여러 대학교에서 거절당하는 중에, 장왕록 교수는 서강대학교의 영문과 학과장이던 미국인 브루닉 신부를 만나 "딸이 입학시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다른 대학의 반응과는 달리 브루닉 신부는 이런 말로 입학시험을 보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당연히 입학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장 교수는 아버지가 이 말을 두고두고 회자했다고 말했다.
무사히 입학시험을 통과한 장 교수는 1975년에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에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다만 당시 서강대에는 영어영문학 박사과정이 개설되지 않은 터라, 장 교수는 같은 신촌에 있던 연세대학교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면접장에서 "우린 학부생도 장애인은 안 받는다"라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결국 장 교수는 박사학위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으며, 1985년에 '19세기 미국 작가들의 개념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자아여행(Journeys between Real and the Ideal)'이라는 논문으로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모교인 서강대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나는 서강대 교수이며, 서강대 교수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께서 알아주셨으면 한다. 사실 나는 그냥 서강대 교수가 아니라 뼛속까지 "서강인"이다. 서강대 학부를 졸업했고 석사 학위도 서강에서 받았으며 지난 10여년 동안 서강에서 젊고 반짝이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반 가까이를 서강에서 보낸 셈이다. 과거의 어떤 추억을 되돌아보든지, 그 무대는 언제나 서강이다. 노고산, 로욜라 도서관, 알바트로스 탑, 그리고 그밖의 정겨운 건물들. 물론 캠퍼스보다는 서강이라는 이름의 그 의미가 내 삶을 뒷받침해준 것이겠지만 말이다. 서강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칼럼을 쓰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종교적인 이유에서 서강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서강대학교는 가톨릭 예수회 재단의 학교이다.) 사실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원시적이고 비문명화된" 70년대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는 신체 장애가 있는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했던 유일한 대학이었다. 학창시절의 내게 있어 상급 학교 진학이라는 것은 인생의 고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의 진학도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야했을 때에는 고등교육을 향한 모든 문이 굳게 닫혀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운 좋게도─아니, 아이러니컬하게도─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고, 실력으로만 보자면 원하는 학교를 마음대로 골라서 갈 수 있는 입장이었으나 그 어떤 학교도 신체 장애인 학생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대학에 원서를 낼지 결정도 하기 전에,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나의 아버지는 각 대학을 돌아다니며 입학처장을 만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모두 정중한 거절만이 되돌아왔다. 심지어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였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14]마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 딸을 당장이라도 받아주고 싶네만, 다른 교수들이 찬성하지 않을 거야." 몇 군데 다른 대학을 찾아가 똑같은 대답을 들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서강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영문학과 과장이셨던 브루닉 신부님께 똑같은 부탁을 드렸고, 신부님은 아버지의 말에 그 큰 눈을 경악으로 둥그렇게 뜨고는, "뭐라구요? 당연히 입학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하고 되물으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 때 상황을 회고하시며 신부님이 마치 아버지를 정신나간 바보 아니냐는 듯 반문하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신나간 바보라도 너무 행복하셨다고... 이렇게 나는 서강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었지만, 그래도 나의 대학시절은 좋은 사람들─특히 스승님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 때는 영문과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도 많은 미국인 신부님들이 교수로 계셨었다. 브루닉 신부님은 처음부터 서강을 내게 집처럼 포근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다. 신부님의 전공이 어느 분야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희곡 쪽이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 영어 연극을 공연하는데에도 열심이셨지만, 강의실에서의 신부님은 그야말로 "연극적"이셨다. 한번은 영문학 시간에 프랜시스 톰슨의 <천국의 사냥개>에 대해 강의하시다가 "나는 밤낮으로 그를 쫓는다/ 나는 시간의 복도를 따라 그를 쫓는다"하고 낭송하시며 온 강의실을 사냥개 흉내를 내며 킁킁거리고 돌아다니시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내 마음 속 미로와도 같은 길을 따라 눈물의 안개 속에서도" 나를 쫓아다니며 보살펴주는 사냥개의 모습이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언제나 밝은 미소를 띤 신부님은 학생들에게 인사할 때도 "연극적"이셨다. 연극 <라 만차의 사나이>에서 돈키호테 역을 맡았던 남학생을 부르실 때면 느닷없이 허공으로 창을 던지는 제스처를 쓰기도 하셨다. 브루닉 신부님은 나를 세례명인 마리아로 부르셨는데, 나를 보시면 두 팔을 벌리며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하고 당시 유행하던 패티 김의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신부님은 당시 우리말을 배우고 계셨지만 환갑에 가까운 나이라 많이 힘들어 하셨다. 한번은 강의하시다 말고 "한국어에는 도저히 발음이 불가능한 단어가 2개 있다"고 하셨다.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 그리고는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나 당신이 생각하시는 욕심꾸러기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다. 부와 권력을 탐하는 욕심꾸러기는 나쁘지만 배움과 사랑과 꿈을 탐하는 욕심꾸러기는 좋은 욕심꾸러기라는 것이었다. 브루닉 신부님은 온화하고 다정하신 분이었지만, 나는 딱 한번 신부님이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해에 체육이 전교생 교양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는데 (하반신 장애인인 나는 체육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으므로) 담당 체육 교수님은 내가 한 시간도 빠짐없이 수업을 참관해야만 학점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체육관은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하는 캠퍼스 외곽에 있어서 사실 나에게는 체육관까지 가는 것이 "체육"을 넘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비가 오기라도 하면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마침내 교수님께서는 비오는 날에는 체육관에 오지 않아도 결석으로 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은 장마가 일찍 시작한데다 1달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가 왔다. 나는 3번 수업 참관을 빠졌는데 그 때문에 FA를 받았다. (FA는 출결불량 F로 서강에 아직도 존재하는 학점제도이다.) FA 학생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나는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성적표에 F학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신부님은 너무 화가 나서, 앉아 있던 의자에서 튀어오르다시피 하셨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How could he…" 만 연발하셨다.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어쨋든 신부님은 나중에 개인적으로 나의 체육 교수님을 만나 말씀을 나누셨고, 교수님은 내게 F 대신 D를 주셔서 결국 무사히 마무리가 지어졌지만, 나는 아직도 신부님 눈에 고여 있던 그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 장영희 교수의 <코리아 타임즈> 기고문 |
8. 감정가 9,999,999,999원
문화재청 보물 제745-1호로 지정된 '월인석보' # |
TV쇼 진품명품 597회 방송분을 통해 서강대가 소장한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月印釋譜)>가 공개된 적이 있다. 당시 손병두 총장이 직접 가지고 나간 자리에서 감정가는 무려 9,999,999,999원으로 책정되었으며 전광판이 표시할 수 있었던 최고 금액이었다. 감정단은 “정말 소중한 우리 자산이기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해서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 대장경으로, 조선 전기 훈민정음 연구와 불교학 및 문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다. 15장 30쪽으로 이루어진 <훈민정음 언해본>은 여러 판본이 현존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서강대가 소장하고 있는 <월인석보> 첫머리에 실려 있다. 조선 전기의 임금이 2대에 걸쳐 편찬·간행한 <월인석보>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월인석보> 이외에도 서강대는 1,6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아루페관(동문회관) 6층에 자리한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출처
9. 배구부의 전설
서강대학교 배구부의 경기 모습 |
한국 학원 스포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그러나 학교 수뇌부에 의해 안타깝게 쓰러진 전설
서강대에 정식 운동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서강대 출신 중에서도 배구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하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에는 정식 운동부로서 배구부가 있었다. 돌연 해체되면서 전설로만 남아버렸지만, 당시 서강대 배구부는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했을 정도로 우수한 기량을 뽐냈다.
제3~4대 총장으로서 재직 중이었던 스킬링 스태드 신부는, 재학생들의 애교심과 자부심을 고취하고 서강인의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구부 창단을 결심했다. 감독에는 이근삼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코치에 이용관 前 국가대표[15]를 임명했다. 창단 당시 일부 학생들은 서강대에 운동부가 창단됨으로써 기존 대학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병폐가 서강대에도 전염돼 서강대의 학문 전통에 누를 끼칠까 우려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거액을 들여 선수를 스카우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들은 교칙에 의한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학사규정을 지켜야 했다. 덕분에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대학원에 재학 중인 선배들로부터 공부 지도를 받아야 하고, FA를 걱정하거나 독후감을 쓰느라 낑낑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배구부 학생들이 졸업장을 받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서강배구부 출신인 박주점(경영학과) 現 KOVO 경기감독관[16]은 "당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고 회상하며 "팀을 운영하고 선수들은 지도하면서 그 당시 경영학을 공부한 덕을 보고 있다. 모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오늘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발편이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었다.
학업과 운동 모든 면에 충실할 것을 강요받은 서강 배구부는 창단 첫해부터 좋은 성적을 올렸다. 제36회 전국 종별 배구선수권 대회 대학부 3위 수상을 시작으로, 1983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8회 전국남녀종별 배구연맹전에서 다시 3위를 차지했다. 서울대 배구부와의 친선경기는 학생들의 열띤 성원 속에서 치러졌고, 해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기량은 향상되어갔다.
마침내 배구부는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1983년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 11회 체육부장관기쟁탈 전국대학배구선수권대회에서 4전 전승으로 우승한 것이다. 지적 활동과 스포츠 활동을 조화시켜 대학스포츠의 새로운 풍토를 조성한다는 취지 아래 창단된 서강대 배구부의 우승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서강대 배구부의 전설은 어이없게 사라지고 말았다. 기량이 향상되어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자 점차 배구부원들은 "우리도 다른 학교처럼 좀 예외로 쳐주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요구[17] 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 학교 측에서는 "그래, 그런 소리 할 거면 아예 사라져라"라고 하며 없애버린 것이다.
위와 같이 간단히 해체된 것은, 당시 외국인 신부들의 학내 입지가 약화되면서 그 지원 아래 운영되던 배구부의 입지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선수들은 다른 대학으로 이적했으며[18], 나머지 선수들은 너무나 어이없고 안타깝게도 배구선수의 꿈을 접은 채 학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19]# 지금의 후문 쪽 국제학사 자리가 이전에는 생활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배구부 숙소였다.
결국 서강대의 자랑이자 대학 운동부의 특이 케이스였던 서강대 배구부는, 공부와 운동 모두에 능한 운동부가 있었다는 전설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10. 여러가지 물적, 금전적 지원 루머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가 서강대에 입학하자, 서강대 이사장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는 제안에 직원 통근 버스만 요구한 일도 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신촌을 달라고 했으면 주려 했다고 한다. 또 면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신촌 지역 지도[20]를 꺼내며 대흥동과 창천동을 아우르는 동그라미 친 자리에 캠퍼스 부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사장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때 총장이 지나치게 긴장하여 손을 떨다 펜을 떨어트려 생긴 점[21]만큼이 서강대의 부지가 되었다는 농담도 있다.[22]#
그 외에, 정문 앞 도로가 비포장도로였는데 박근혜 대통령 졸업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군부대를 동원하여 3일 만에 도로를 포장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또 다른 '카더라'도 있는데, 원래 알아보던 대학은 숭실대학교였다고 한다. 그런데 숭실대에서 거부하고 서강대에서 받아주자, 서강대에는 서울시장과 군부대가 직접 나서서 도로포장을 해 주고 동시에 숭실대는 학교 부지 한가운데로 도로[23]를 뚫어버렸다는 '카더라'이다. 물론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 박근혜는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가톨릭 학교만을 진학해 왔다.[24] 때문에 당시부터 박근혜는 성심여자대학교나 서강대학교로 진학할 거라는 관측이 대부분이었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통근버스는 실제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툭하면 시위대와 데모대의 표적이 되었기에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 치워두었다가, 결국 폐기 처분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준 차가 1대 더 있었다. 번호판을 떼고 학내 관리실에서 쓰는 작업 및 화물 운반용 코란도가 1대 있었는데, 그 차가 박정희 대통령이 준 차라는 소문이다. 해당 차량은 2000년대 초에도 돌아다녔으나 지금은 운용되지 않는 듯하다가, 2013년에도 목격담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쌍용 마크가 붙은 '코란도'라는 자동차 모델이 생산되기 시작한 연도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코란도가 실제 생산된 시기를 언급하며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돌아다니던 차량은 쌍용 마크가 붙은 코란도였다. 쌍용에게 인수된 후에 생산된 차량이라는 거다. 상식적으로 그 시절 생산된 차량을 곱게 사용한 것도 아니고 작업용으로 굴렸는데, 2000년대까지 버틸 리가 없다.
그 외에도 롯데에서 학교가 위치한 곳이 교통면에서 호텔 자리로 최고의 입지라며, 강남의 땅 10만평을 주고 새로 학교를 세워준다고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거절. 결국 롯데는 가까운 위치인 공덕에 '롯데시티호텔 마포'를 오픈하고야 만다.
또한, 옛날에 삼성그룹에서 서강대학교에 여러 번 러브콜을 보냈지만 '우리 학교는 주님의 학교다'[25]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병원(+의대 건물)을 지어주겠다는 제안도 '서강의료원'이라는 이름으로 짓지 않을 거면 관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역시 파워거절. 그때는 삼성그룹이 지금처럼 잘나가던 기업도 아니었고, 신부님들의 신앙적 신념이 워낙 강하니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진실 혹은 거짓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1990년대에는 삼성의 지원을 받긴 해서, 삼성 가브리엘관이란 이름의 건물이 지어졌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왼쪽에 크게 보인다. 가브리엘관이 완공된 것은 1997년이다. 과거 신방과에서 사용하던 가브리엘관을 삼성에서 지원한 이유를 추측해보면, 당시 신방과에 오래 재직한 김규 교수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3녀 이순희의 부군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1년도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서강대학교를 후원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현대자동차그룹은 삼성이 성균관대학교 기존의 재단을 대체한 것과 달리 예수회 재단을 대체하지 않고, 예수회 재단을 통해 서강대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현대차그룹이 가진 사업과 서강대 공대를 연계하는 등의 막강한 지원을 해주려 하였으나, 재단에서 '우리 예수회는 그런 재벌의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라며 거절했다카더라. 이 썰을 수업시간에 들은 학생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고.
11. 총장 관련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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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920d14,#f16d7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서강대학 학장 | |||||||
초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 2대 존 피 데일리 | |||||||
서강대학교 총장 | ||||||||
초대 존 피 데일리 | 2대 존 피 데일리 | 3대 델마 스킬링스태드 | 4대 델마 스킬링스태드 | |||||
5대 존 D. 메이스 | 6대 서인석 | 7대 박홍 | 8대 박홍 | |||||
9대 이상일 | 10대 이한택 | 11대 류장선 | 12대 손병두 | |||||
13대 이종욱 | 14대 유기풍 | 15대 박종구 | 16대 심종혁 |
제8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27]와 제12대 총장 손병두 요한 보스코[28] |
2021년 취임한 제16대 총장 심종혁 루카 신부 |
과거에는 총장이 모두 예수회 신부였다. 초대 총장(학장)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길로연)은 예수회 신부였지만 퇴임 이후 평신도가 되었는데, 서강대 재직 중에 만난 학생 조안 리와 사랑에 빠져 환속하여 결혼했기 때문이다. 케네스 신부와 조안의 사랑과 결혼은, 당시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평신도 교수도 총장이 될 수 있도록 바뀌었다. 다만 일단은 가톨릭 신자여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서강대학교는 가톨릭 미션스쿨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제12대 손병두 요한 보스코 총장이 최초의 비성직자 출신 총장이다. 손 총장은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출신으로, 삼성그룹 퇴사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을 시작으로 각종 사회단체 이사, 자문위원 직함을 수십 개씩 수집한 인물이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총장과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으로 사립학교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개정 반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최초의 기업인 출신 대학 총장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서강주식회사식' 운영으로 인한 내부 반발로 총장 연임을 포기하였다. 2009년부터는 KBS 이사장을 거쳐서 삼성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이후 13대, 14대 총장까지 내리 비성직자 출신이 총장직에 올랐으나, 15대부터 현재(16대)까지 다시 예수회 신부 출신이 총장을 맡고 있다.
역대 총장 중애는 자칭 하느님의 안기부장 박홍 루카 신부가 가장 유명하다. 초기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학생운동에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이후 반공주의 운동가로 그 노선을 비틀었다. "대한민국에 주사파가 5만 명 있다."와 같은 발언으로 뉴스에도 여러 번 오르고 내리길 반복했다.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박홍 신부가 워낙 반공 정신을 투철하게 홍보해서 그런지 서강대학교를 부정적으로 보며, 서강대학교의 총장을 아직도 박홍 신부라고 안다고 카더라.
12. Excuse me, can you speak Korean?
1999년 X월 X일 서강대학교 XX관 1층의 영어회화 강의실. 중간고사 대신 상황설정에 따른 영어실력으로 점수를 준다고 했다. 교수: 다음… 김 군하고 최 군… 앞으로. 너희들은 미국에서의 있을 법한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의 실력을 발휘하도록. 아직 앞서 하던 몇몇 학생들이 버벅거리며 비지땀 흘릴 때, 자꾸 화장실 가고 싶던 최 군과 김 군. 중간고사 성적 직결인데… 교수: 김 군은 한국에서 미국에 관광차 찾아간 한국인, 그리고 최 군은 미국에 사는 현지인… 자, 시작해 볼까. 제한시간은 3분… 최 군과 김 군의 등은 이미 무너진 제방이었고, 머릿속에선 현기증마저 느낄때 김 군이 재치를 발휘했다. 김 군(한국인 관광객): Excuse me, can you speak Korean? 최 군(미국 현지인): Yes, I can. 김 군: 한국 분이시군요, 반가워요. 자유의 여신상 가려면 어떡해요? 최 군: 네, 저기서 녹색버스 타구 4정거장 가서 내리세요. 김 군: 감사합니다. 최 군: 타국에서 모국인에게 그정도는 해야죠. 안녕히 가세요. 교수: '있을 법한 상황'이므로 인정한다. 교실은 뒤집어졌고, 교수님은 이를 패러디할 경우 F에 처한다는 저작권보호성 경고까지 했다. 그후 최 군과 김 군은 A와 A+를 받았다는데, 성적이 다른 이유는 현지인의 한국어 실력이 이민자치고는 너무 능숙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
이미 인터넷에서는 전설이 된, 1999년에 있었던 영어회화 시험 에피소드가 있다. 김 군도 김 군이지만 교수님의 대인배적인 센스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네이버 웹툰 스쿨홀릭에서 시험 종류만 중학교 영어 수행평가로 바꾸어 나온 적이 있다.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단, 이 학생은 대화 소재를 잘못 잡아 김 군과는 달리 A+을 받지는 못했다. 문제에 "전화"라고 했는데 :|라는 이모티콘을 쓰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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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축제 관련
13.1. 서강대학교 50주년 기념식
2010년 4월 17일에 서강대 운동장에서 진행된 서강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행사. 미라클 거리성서극도 호평을 받았다.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에겐 기념품을 증정했다.
당시 인기 걸그룹(티아라)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마지막에 공연하겠지?"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맨 처음에 공연했다. 총 2곡을 부르고 빠르게 퇴장했다.
2AM에서도 출연했으며, 반응은 물론 좋았다.
서강대 출신 박하영 신인가수도 무대에 올랐다. 이후 신해철 마왕님과 방송인 이기상의 반응은 여기에
학교 동문인 마왕님도 공연을 하셨는데 첫 곡을 하는 동안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너흰 내가 학교 다닐 때랑 똑같구나', '너네 아직도 독후감 쓰냐'
하지만 당대 최고 가수가 와서 축제를 뛰어도 좌석이 남아도는[29] 서강대 행사답게 저 때도 운동장의 절반 이상은 빈 좌석이었다. 시작 전 모습은 이렇게 아주 (너무) 컸다. 행사 시작할 때 반 넘게 찼었다. 그러나 끝은 소수 정예답게 줄긴 줄었다.
<rowcolor=#fff> 시작 전 | 시작 직후 | 막바지 끝 (무대앞) | 막바지 끝 (좌석) |
13.2. 2012년도 서강대 축제 관련 논란
그전까지 서강대 축제 라인업의 기조는 적은 수 출연진이지만, 확실한 한방과 무대 장악력이 있는 출연진을 섭외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타 대학에 비해 축제 예산이 반도 안 되는 실정에서 축제 호응도가 낮은 서강대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저비용으로 양질의 무대를 제공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2007년부터 축제 라인업의 메인 게스트를 보면, 싸이[30], DJ DOC, 웃찾사팀, 애프터스쿨, UV+노브레인이었는데, 웃찾사팀이라는 쌩뚱맞은(?) 섭외를 했던 해를 제외하고는 나름 당대 최고의 공연팀을 섭외했고, 학생들의 호응도 괜찮았다.[31]그러나 2012년도 서강대 축제는, 학생들이 어우러져 노는 장으로서 축제가 작용하지 못했다(좀 더 직설적으로는 '축제가 재미없다')는 기존의 학생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는 평.
먼저 행사 진행 과정에서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버너 2개를 이용해 하나의 큰 판 위에서 요리하는 실책으로 인해 부탄가스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10여 명의 새내기들이 얼굴 등에 화상을 입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실 화기 관련 교육은 이전에 부재했던 것으로, 사고가 터지면서야 문제로 부각되어 결과적으로 축제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을 불렀다.
한편 축제 당시 초대가수 라인업이 전부 한국 인디밴드들이었는데[32], 다른 유명 대학교가 유명 가수, 아이돌을 모시려고 하는 것에 비하면 판이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인디팬들 입장에서 보면 밤섬해적단 등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이에서 유명한 밴드들이 많았지만, 비인디팬인 일반 학생 입장에서 보면 "아이고 저기 연세대학교는 소녀시대, 고려대학교는 원더걸스도 부르고 하는데 우리 대학교만 어디 듣도보도 못한 인디밴드들을 불러오나"라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밴드 중 상당수는 사회활동도 겸하고 있는 인디밴드들로, 정치 성향이 한쪽에 치우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여기에 더해 이 인디밴드 섭외 과정에서 총학 쪽의 강행이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서강대 사이트는 물론 음악을 다루는 커뮤니티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동아리 연합회와도 마찰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아리 공연과 인디밴드 공연을 함께, 2곳에서 나눠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축제의 인기가 낮은 서강대학교 입장에서는 그만큼 부담을 져야 했다.
그러나 이런 인디밴드의 섭외 시도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도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시사in기사 다만 대학 축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축제'에 대한 모색은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인터넷 상에서는 정치성 논란으로 축제에 대한 시각이 어지러워지고, 오프라인에서는 어차피 축제에 관심이 적었는데 장소도 둘로 나뉜 데다 인디밴드 팬층을 제외하고는 결과적으로 관심을 많이 주지 않는 장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런데 유명 연예인 섭외를 하지 않음으로써 축제 예산이 1/3이 되는 기적을 행했고(…)
축제 마지막 날 학교 주변에 밤 늦게까지 울려펴지던, 97년대 전후의 아이돌 노래가 그렇게나 학우들의 향수를 자극했다고 한다.
이때 42대 총학생회 <와락>은 25대 동아리연합회와 마찰을 빚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축제 때 동아리 공연이 거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이 축제는 인디밴드의 길거리 공연이 컨셉이었으므로, 동아리 공연에 필수적인 무대 설치를 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대를 짓는 것 자체만으로도 크게 예산을 잡아먹는 데다가 총학생회가 길거리 공연을 컨셉으로 잡은 만큼, 한 곳에 시선이 쏠리면 인디밴드는 그야말로 찬밥이 되므로, 이로 인해 두 단체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축제를 각각 따로따로(날짜도 다르게) 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동아리연합회의 축제 예산은 동아리연합회 자체 예산과 학창시절 동아리에 애정이 많으신 교수님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동아리연합회의 축제가 더 인기가 좋았다.[33] 게다가 이때 총학생회는 축제 예산을 저렴하게 했는데, 그 남은 돈을 어디다가 썼는지 출처를 밝히라며 큰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다.[34] 42대 총학생회는 1년 내내 비판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총 비판의 절반 이상을 이 당시 받게 되었고 그나마 있던 지지기반조차 깡그리 무너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13.3. 2012년 이후의 축제들
2013년 열린 축제에서는 NS윤지가 오후 3시의 이른 시각에 찾아와서 직접 그녀를 영접하지 못한 학우들의 한탄이 쏟아졌다. 메인 게스트로는 아메바컬쳐 소속의 랩퍼들이 공연을 펼쳤으나, 수장인 다이나믹 듀오는 더 큰 페이를 부른 지방대로 가 버렸고… 어쨌든 2012년의 제대로 망한 축제 때문이었는지, 2013년 공연은 학생들의 만족도가 꽤 높았다고 한다. 서강TV에서 촬영한 NS윤지 공연 |
서강TV에서 촬영한 슈프림팀 공연[35] |
2015년에는 San E, 걸스데이, 울랄라세션의 라인업을 보여주었는데, 산이와 걸스데이는 소위 "먹튀"였다고 불릴 정도로 핵노잼의 정석을 보여줬지만, 울랄라세션이 왔을 때는 거의 락페급의 호응을 보여줘 울랄라세션이 거의 10곡을 부르고 갔다.
2023년 9월 22일 축제에서 AKMU의 무대 때 대학원생과 교수도 무대를 구경하며 즐기는 모습이 포착됐다. #
13.4. 서강-죠치 한일 정기전 (SOFEX)
서강대학교와 일본의 조치대학이 개최하는 대학교 정기전.자세한 내용은 SOFEX 문서 참고하십시오.
14. 라이벌?
서강대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SOFEX(서강 - 죠치 스포츠 교류전)을 통해 일본의 조치대학과의 정기전을 진행하고 있다. 조치대 역시 서강대처럼 예수회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가톨릭 미션스쿨이다.하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은, 죠치대를 라이벌이라기보다는 '물 건너 친구들'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연고전과는 다른, '자매대학 사이의 교류'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강대생들은 타 학교와의 비교 자체에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다. 풍토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15. 외국인 학생들
상당히 많은 재외국민과 북한이탈주민이 재학하고 있다. 또한 서강대 부설 한국어 교육원이 외국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 보니, 여기를 졸업한 후 곧바로 유입되는 외국인 학생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한국어 교육원은 여타 교육원들이 그렇듯 면접 정도만 보면 입학이 가능하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한국어 습득이 상대적으로 쉬운 동아시아권 학생들이 주류. 그러다 보니 한국어로 능숙하게 대화하는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더니 중국인이거나 일본인인 경우도 잦다.16. 서강대 라면
자세한 내용은 알통통 스마트면 문서 참고하십시오.
서울대에 초콜릿, 연세대에 우유, 고려대에 빵이 있다면 서강대에는 라면이 있었다. 원래는 다른 기업에 100억 정도에 팔아 넘기려고 했으나 결국엔 직접 발매했다. 개발 단계에선 '서강라면'으로 불렸는데 알통통 스마트면이란 아스트랄한 이름으로 출시됐다. 서강대 화학공학과가 개발한 기술로 지방함량을 낮췄다고 한다. 하지만 2015년에 단종됐다. 자세한 사항은 알통통 스마트면 항목을 참조.
17. 캠퍼스 내 동물 친구들
17.1. X관 고양이
로욜라 도서관 앞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는 X관 고양이의 모습. X관의 공사로 거처를 옮긴 이후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
2006년 촬영된 X관 고양이의 새끼 시절 모습. 이때부터 X관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
서강대학교의 상주 고양이. 캠퍼스 내 X관(하비에르관) 앞에서 수년간 자주 머물러 X관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36] 그 외에도 엑스묘(猫), 저스틴, 엑뚱이, X냥이, 로욜라 냥이, 로냥이, 고얌이 등등의 다양한 애칭이 존재했다. 사실 상주하는 동물로 무섬이라는 거대한 토끼도 있었지만, 인지도는 X관 고양이가 독보적. 대략 2006년부터 새끼의 모습으로 학교에 출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이는 2012년 기준으로 6살 전후로 추정되었다. 수컷이었지만, 중성화수술을 거쳤기 때문에 남자 구실은 못 하게 되었다.
짬타이거스러운 포스를 풀풀 풍기며 교정을 활보하는 것이 일상으로, 귀찮을 때는 그늘 한켠에 식빵자세를 취하며 시크하게 그윽한 눈빛만 보내지만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이 고양이 외에도 교정을 거니는 고양이는 많지만, 대개 사람이 오면 도망가고 사람들을 피해 노고산을 끼고 다니는 반면에, 이 녀석은 대로 한복판을 제 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게다가 사람이 엄청나게 지나다니는 로욜라 도서관 앞에서 배를 내고 훌러덩 드러눕는 잉여로움의 극치를 보여준 덕에 팬층(?)을 형성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료를 깔아놓고 집을 마련해주고 하는 여러 노력도 있었고, 페이스북 계정도 만들어졌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양이도 저리 이쁨 받고 사는 데 내 팔자는 뭐냐'는 비아냥도 있었을 정도.
2011년 들어 X관 공사로 거처를 로욜라 도서관 앞으로 옮겼다. 그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여름 방학 동안 로욜라 도서관 앞도 공사가 진행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지나간 이후 사라져 버렸는데, 그 뒤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며 행방이 묘연해져버렸다.
서강대 출신인 듯한 인턴 기자가 기사를 내기도 하고, 고양이의 행방불명을 알리는 정식 기사도 나왔지만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확정적인 듯.
학교 어딘가에서 X냥이와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를 봤다는 간헐적인 소식이 있으나 유사한 줄무늬를 가진 다른 도둑고양이를 착각했다는 의견이 다수다. 무엇보다 목격자들이 본 고양이는 X관 고양이처럼 살 찌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 가까이에 오려 하질 않았다. 이 고양이가 X냥이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X냥이는 06년도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중성화가 되어 있었으니 신빙성은 없다.
이외에 '노랑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고양이 가족이 있었으나 2011년에 잠깐 보이다가 X관 고양이가 사라진 같은 해에 종적을 감췄다. 한때 X관 고양이와 싸워서 X관 근처를 잠시 점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족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에 행방을 알 수가 없다.
2015년, 교내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이 늘면서, 서강고양이모임이라는 동아리형 애묘가 모임이 생겼다. 교내 고양이들의 먹이와 건강과 집을 챙기고 있다.
17.2. 서강대 황제, 킹 레오
S.G.B.S. 다큐멘터리 서강대 貓학번[37] |
"진인사대천명"[38] |
2012년 사라진 X관 고양이의 뒤를 이은 서강대의 네임드 고양이로, 2013년 가을 출생했으며, 본격적으로 캠퍼스에 눌러앉은 시기는 2014년 가을 즈음으로 추정된다. 서강대 커뮤니티 서담이나 페북 커뮤니티 Sogang Univ.에서 킹갓엠퍼러레오로 추앙받고,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캠퍼스 내에서 마치 연예인과 같이 팬미팅을 벌였던 고양이였다. 냥봉꾼이라 불리웠으며, 교내에만도 그의 아내가 3~4마리 있었고, 학교 바깥에도 그의 처자식들이 있을 거라고 추정되었다. X관 고양이와 마찬가질로 남학우들보다는 여학우들에게 더욱 친절했다. 이 때문에 서담에서 여자한테만 잘해준다고 비난 받기도 했다.
레오라는 이름이 붙게 된 계기는, 예전에 한 학생이 레오몬을 닮았다고 해서 '레오야' 하고 부르다가 점점 퍼졌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어찌나 인기가 좋았는지 페이스북 팬페이지가 개설되었다. 마스킹 테이프 등 굿즈까지 제작되었고, 2018년 가을 서강문화제에서는 레오 에코백을 판매하는 부스가 운영되기도 했다.
언론 보도도 탔다. 서강 길고양이 대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났고, 서강대 안팎의 고양이들을 자세히 다룬 르포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8년 7월 초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상기한 서강고양이모임에서는 레오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모아 2019년 10월 초에 로욜라 도서관에서 '레오대왕실록'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재학생들 사이에서는 "레오가 유학을 갔다"라는 농담이 많이 퍼져 있다.
17.3. 로욜라 토끼, 로토
로토 |
과거엔 '토익', '토플', '로끼', '욜라토낌' 등의 기괴한 이름들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그냥 무난한 로토로 굳어졌다.
이 로토들은 서강대 구성원들이 풀어놓은 집토끼이다. 노고산에서 내려왔다는 소문도 있으나 털의 무늬와 생김새를 보면 절대 멧토끼가 아니다. 사람이 가까이 와도 도망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과거에는 많은 수의 로토들이 살고 있었으나 인접한 노고산에 토끼의 천적들이 많이 살고 있어 여러 마리의 로토들이 희생되었다. 당장 상단의 검은색, 흰색 조합의 로토도 2019년 9월 7일 0시 20분경에 노고산에서 내려온 족제비에게 물려 큰 부상을 당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 그러니 언젠가 로토를 또다시 보게 된다면 천적의 습격을 받아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 좋다.
죽기 전, 로토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열리기도 하였으며 서담에선 로토 굿즈가 절찬리에 판매되기도 하였다. 판매 수익으로 로토에게 군고구마를 사 주었다.[39] ##
뉴 로토 |
17.4. GN관 부엉이
GN관 부엉이와 기념 이모티콘 |
사실 부엉이는 아니고 소쩍새라고 한다.
17.5. 로욜라 삼냥이
로욜라 삼냥이들 |
18. 서강 성탄 구유
서강대학교 2018 성탄 구유 |
매년 11월 말이 되면 서서히 지어져서 대림 시기[42]에 정문 앞에 등장하는 서강 성탄 구유. 밤에 보면 조명 덕분에 엄청 예뻐 보인다. 다른 크리스마스 기념 조명 장식들과 어우러져 서강대 크리스마스 풍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성탄 구유란 오늘날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때 예수 탄생 장면을 각 문화권의 특유 풍습과 민속 의상을 동원하여 갖가지 모양의 구유를 꾸미는 것을 말한다.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성 요셉, 동방박사, 소, 말, 양 등으로 꾸며진다. 성탄 무렵이면 모든 성당 및 가톨릭 관련 기관에서 반드시 성탄 구유를 아름답게 꾸며 놓는다. 가톨릭 미션스쿨인 만큼 서강대학교에도 성탄 구유가 있는 것!
성탄구유는 그 재료와 방법 또한 다양하며, 오늘날에는 성탄 구유를 위한 조각이 하나의 예술로까지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매년 구유의 모양 뿐만 아니라 속의 배경이 달라진다. 일례로 2015년 구유의 경우 세월호가 연상되는 배경을 찾아 볼 수 있었다.
19. 가톨릭대학교와의 통합 떡밥
서강 사랑방 커뮤니티 시절에도, 그리고 2017년까지 커뮤니티 서담에서도 끊이지 않았던 가톨릭대와의 통합 떡밥. 두 학교 모두 가톨릭 미션스쿨이지만, 가톨릭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고 있고, 서강대는 수도회인 예수회에서 운영하고 있다.가톨릭대와의 협정이나 공동연구 같은 성과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루머이다. 실제로 가톨릭대 의대와 서강대학교 상호 간에 학생 교류와 학점 인정이 이뤄지고 있고, 공동학위 프로그램이나 공동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통합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데, 재단의 문제로 통합은 힘들 거라는 예상이 많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1993년 즈음에 서강대와 가톨릭대는 통합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 당시 전문대학으로서 종합대학으로 성장하고 싶어 하던 가톨릭대 측이 먼저 서강대에 학교 통합을 제의한 것. 그러나 1994년 성심수녀회 측에서 성심여자대학교를 운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서울대교구에 기증하고 가톨릭대로의 통합을 갑작스럽게 선언하면서, 서강대와 가톨릭대 간의 통합이 물 건너가게 되었다. 그 이후 2006년에도 가톨릭대와 서강대 사이에 통합 논의가 있었으나 , 서강대는 가톨릭대 의대만 가져가고 싶어 했다.
두 학교의 통합 떡밥은 가톨릭 교황청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큼 큰 사건이다. 가톨릭대는 서강대의 명성(네임벨류)을 득하고 예수회의 오랜 교육기관 역사의 노하우를 살릴 수 있으며, 의대와 약대가 없는 서강대는 가톨릭대 의대와 약대를 비롯한 생명과학과 의학 분야를 가져올 수 있어 서로 윈윈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 가톨릭대학교와의 교류전 (일명 서가전)을 2018년 가을 기획했으나 교내의 엄청난 반대 여론으로 무산되었다. 특징이라면 가톨릭대학교에서는 이 교류전에 매우 기대가 컸지만 반대로 서강대에서는 교류전 자체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43]
20. 헤어초크 광장
청년광장에는 1998년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방문해서 연설했다는 이유로 대통령의 이름을 따 "헤어초크 광장"으로 개명당했던 흑역사가 존재한다. 당시 재학 중이던 학생들조차 코웃음을 쳤고 지금 재학생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흑역사. 지금도 청년광장을 지나다 보면 '헤어초크 대통령이 다녀가시다.'라고 쓰인 검은 비석을 확인할 수 있다.덤으로 로욜라 도서관 벽의 빨갛고 파란 페인트칠도 이때 한 것으로, 그 전에는 다른 부분과 같은 황색이었다. 처음 도색했을 때 반응이 '서강고등학교란 별칭도 모자라 이젠 서강유치원이냐'였다. 또한 2013년 경 사라진 마치 노란 강정 같은 캠퍼스 내 인도의 노란 돌포장도 이때 했다. 그 전에는 그냥 시멘트였다. 현재는 평범한 돌포장.
21. 길이니까 잔디를 심지 마시오
1970~80년대 즈음, 삼민광장에는 길이 없어서 후문으로 나가려면 잔디와 한바탕 사투를 벌여야 해서 학생들 사이에 불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제발 길 좀 만들어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학교는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박아놓은 채 학생들의 잔디밭 출입을 통제하는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때 어느 용감한 학생 한 명이 삼민광장의 잔디를 길 모양으로 죄다 뽑아버려서 길을 만들어 버린 다음, 팻말의 글귀를 "길이니까 잔디를 심지 마시오"라고 바꿔버렸다.
22. 인지도에 관한 진실
비슷한 급간의 대학교에 비해 서강대의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특히 남부 지방에서 이런 이야기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개교 시기가 경쟁 대학에 비해 늦었던 데다가 타 대학에 비해 졸업생 수가 월등히 적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강대의 전체 학부생은 약 8,000여 명으로, 국내 주요 대학에 대비해 졸업생은 1/5~1/6 수준, 현재 학부생은 1/2~1/3 수준이다. 이는 서강대학교는 개교 초기부터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위시한 소수 정예 교육을 추구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과거에도 중부권에선 상당히 잘 알려진 대학이었다. 애초에 '예수회가 한국 땅에 세운 대학교'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개교 당시부터 각계각층의 관심을 받기 충분했다. '서강고등학교'로 불리던 빡센 학풍도 상당히 유명했으며, 70~9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선 '독서록'이나 '지정좌석제' 같은 서강대학교만의 학사 제도가 꽤나 널리 알려졌었다.
수도권 대학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전국적인 인지도도 경쟁 대학 못지 않게 올라갔다. 특히 서강대 출신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인 층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적은 졸업생 수와는 별개로, 학계에서의 존재감은 상당한 편. 서강학파로 대표되는 상경계열(경제학·경영학)과 여러 저명 교수를 배출한 물리학은 학계에서 상당히 존재감 있다. 이종욱 전 교수를 중심으로 서울대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학 역시 유명하다. 반면, 법학은 존재감이 별로 없는 편이다. 법학과 개설이 상당히 늦었던 게 가장 큰 원인.
23. B관의 전설
B관은 본래 운동장 자리에 있던 건물이다. A관, C관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박정희 정권 때 핵무기 개발을 위해 이용되었다고 한다. 지상 서강역은 핵무기를 이동시키기 위한 통로로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핵무기 개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B관은 운동장으로 바뀌게 되었고, 지금도 운동장 내부에는 핵무기 개발 시설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학교에 남아 있는 핵무기 개발 시설의 잔해> 1.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출입구가 1층인 경우가 거의 없음. B관을 흙으로 덮었기 때문. 2. 도서관 2관에 2층이 없음. 1층 다음 바로 3층임 3. 도서관 2관 앞에 과거 '폭발음 주의'라는 경고문이 있었음.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핵 개발의 근거. |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문의 시작은 "A관(본관)과 C관(학생회관)[44]은 있는데, 왜 B관은 없을까"라는 의문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사학과의 모 교수에 따르면 B관은 원래부터 계획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 건물의 약칭은 알파벳 순으로 지은 게 아니라 명명된 건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 C관의 2014년 당시 영문 명칭은 'Student Union Building'이었지만, 1969년 준공 직후에는 'Classroom Building'이 정식 명칭이었다. 고로 C관으로 지정된 이름이 폐쇄된 2014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 참고로 로욜라 도서관 2관 앞에 '폭발음 주의' 문구가 붙어있던 이유는, 그곳이 도서관 정전 시 작동하는 비상발전기의 배기구였기 때문이다.
[1] 교지 면적은 학교의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면적으로, 학교의 실제 면적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2] 참고로 노고산이 서강대학교의 소유인 것과 달리, 성균관대의 임야 및 문화재 부지는 상당수 성균관대의 소유가 아니다. 따라서 더 정확하게 비교하자면 서강대의 면적은 노고산을 일부 포함한 209,509㎡, 성균관대의 면적은 각종 면적을 제외한 80,973㎡가 될 것이다.[3] 경희대학교 본관, 동국대학교 명진관, 한양대학교 구 본관은 모두 1956년에 지어졌다. 서강대 본관과 3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4] 정확히는 캔틸레버 구조의 난간을 반려했다고 한다.[5] 그러나 설계도의 혁신성을 알아본 예수회 신부들이 이 부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건설을 진행했다. 다행히도 완공된 본관을 본 당국 관계자들이 본관을 크게 마음에 들어 하면서 무사히 사용 허가가 났다.[6] 이용자가 책을 신청하면 사서가 직접 책을 가져다주는 방식을 말한다.[7] 그러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1992년 해산되었다.[8] 1기 졸업생 선배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려 개교 직후부터 있었던 별명이라고 한다. 74학번인 심종혁 총장님의 말에 따르면 서강대 교포에 있는 IHS를 International High School의 약자라고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9] 이는 지금까지도 서강대에 내려와, 수업 시작 15분이 지나면 무조건 결석처리가 된다. 그나마도 10분에서 15분으로 시간을 늘려준지 오래되지 않았다.[10] 지금은 글쓰기 능력 함양을 목적으로 독후감 작성을 요구하는 대학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강대학교가 거의 유일했다.[11] 사실 대부분의 학교가 홍보하고 있는 표어는 2000년대, 그것도 후반 가서야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대학교는 2009년, 이화여자대학교는 2015년에 가서야 학생들의 요구로 표어를 확립했다.[12] 표어에도 엄연히 저작권이 있다. 실제로 서강대학교의 표어는 저작권이 등록되어 있는 상태이다.[13] [14] 한심석(1970.11.11~1975.05.26) 총장[15] 1989년 명지대 배구부 재창단 시 합류해 1999년까지 초대 감독을 지냈다.[16] 前 한국도로공사 여자배구단 감독(2007~2009), 고려증권 배구단 선수.[17] 특히 FA 제도로 대표되는 빡쎈 출석 규칙을 완화해 달라는 요구가 가장 컸다고 한다. 독후감까진 안 바랍니다. 경기 출전하게 출석만이라도 빼주세요[18] 대표적으로 경기대학교로 간 북두 이상렬(금성. 前 KB손해보험 감독)과 김은석(고려증권), 한양대로 간 최영준(금성).[19] 홍성진 前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前 현대건설 감독)이 이때 일반 학생으로 남은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박주점 前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감독은 서강대에서 학업을 마친 뒤 고려증권 배구단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20] 혹은 서울시내 지도로 과장되기도 한다.[21] 연필로 그리려다가 부러져 생겼다는 버전도 있다.[22] 그렇다고 서강대가 땅 욕심이 아예 없지는 않다. 교문 옆 유명 식당인 거구장을 매입해서 부지를 좀 넓히려고 했는데, 도리어 거구장 주인이 "서강대 얼마냐"고 했다는 소문이 90년대 이전부터 있었다.[23] 지금의 숭실대입구역-총신대로 넘어가는 고갯길[24] 그 당시의 가톨릭 학교는 귀족 학교의 이미지가 높았기 때문에 고위층이 딸들의 학교로 특히 선호했다. 지금은 없어진 성심여자대학교가 대표적.[25]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한다.[26] 정주영 회장은 국내에서 명예박사학위를 가장 많이 받은 기업총수이기도 하다. 서강대학교 외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경희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 7개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27] 왼쪽에서 2번째[28] 왼쪽에서 4번째[29] 심지어 싸이 재입대 전 마지막 공연에서도 객석의 공간이 남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싸이 노래 들려서 나갔는데도, 무대서 10m쯤 떨어진 곳에서 관람했었다.[30] 병역 문제로 재입대 직전의 싸이였다. 당시 축제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정말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다. 즉석에서 관객이 준 소주 1병을 나발 불었다! 그러면서 '솔직히 서강대 조용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노는 사람들인지 몰랐다'라며 음주가무를 즐겼다. "연세대보다 잘 노시네요"는 덤[31] 애프터스쿨은 유이가 오지 않아 뭇 남학생들의 원성을 샀지만, 유이가 오지 않는 조건의 게런티가 이미 3,00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는 서강대학교 50주년 기념식이 축제와는 따로 열린 해라 그 기념식에 2AM과 티아라가 초청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특A급의 게스트를 축제 무대에 세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2] 라인업은 링크(@) 참고.[33] 당연한 결과다. 두 축제 모두 연예인이 오지는 않았지만, 동아리 공연들은 서강대학교 학생으로서 친구들이라도 보러 올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34] 예산에 관한 부분은 공개된 회계 내역을 참고하면 될 듯하다.[35] 그 외에 자이언티, 리듬파워, 프라이머리가 공연에 참여했다. 이 공연 이후 불과 3개월만에 한국 힙합씬에 격동을 일으킨 대란이 일어났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36] X관 뒷편인 로욜라 도서관에서도 자주 머무르는 모습이 보이긴 했다.[37] 레오의 모습은 57초부터 확인할 수 있다. 더빙이 압권[38] 한 고시생이 레오에게 자신의 시험 합격 가능 여부를 묻자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39] [40] 남문쪽 도로 밖으로 탈출했다 카더라.[41] 평범한 재학생이 직접 그린 게시물을 서담에 올렸다가 인기를 얻고 이모티콘으로 재능 기부를 해준 것이다. 시험공부를 하던 와중에 부엉이가 나타났다는 글을 보고선 후다닥 그려냈다고.관련글[42] 주님 성탄 대축일 전 4주.[43] 사실상 학교의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점만 빼면 두 대학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입결도 다르고, 서강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의 운영주체는 각각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예수회이며, 학교의 위치는 각각 신촌과 부천시이다. 게다가 학교의 특성도 다르다.)[44] C관은 현재 철거됐다. 그 자리에 들어선 건물이 바로 GN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