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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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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영국의 주요 도시권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0px;margin-bottom:-11px"
<rowcolor=#fff> 순위 이름 중심 도시 구성국 인구
1 그레이터 런던 런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10,558,797
2 그레이터 맨체스터 맨체스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2,720,316
3 웨스트 미들랜즈 버밍엄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2,590,363
4 웨스트요크셔 리즈/브래드포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1,860,546
5 그레이터 글래스고 글래스고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코틀랜드 1,026,688
6 리버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891,211
7 사우스 햄프셔 사우샘프턴/포츠머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888,145
8 타인사이드 뉴캐슬어폰타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790,636
9 노팅엄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762,786
10 셰필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688,981
11 브리스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680,981
12 벨파스트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북아일랜드 622,000
13 레스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559,017
14 에든버러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코틀랜드 529, 580
15 브라이튼 앤 호브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518,745
16 본머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485,976
17 카디프 파일:웨일스 국기.svg 웨일스 464,635
18 코번트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88,758
19 티사이드 미들즈브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83,613
20 스토크온트렌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80,351
21 레딩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55,514
22 선덜랜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32,932
23 버컨헤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31,588
24 프레스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28,924
25 킹스턴어폰헐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323,634
출처: 2021년 인구조사
틀 바로가기 }}}}}}}}}
{{{#!wiki style="margin: -14px -10px; color: #000"<tablebordercolor=#fff,#1f2023><tablebgcolor=#fff,#1f2023><tablewidth=100%> 머지사이드 주도 최대도시 }}}{{{#!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tablebordercolor=#ffffff,#1f2023><tablebgcolor=#ffffff,#1f2023>
파일:리버풀 시 문장.svg
리버풀
Liverpool
}}}
Deus Nobis Haec Otia Fecit
신이 우리를 위하여 평화를 창조하셨다
<colcolor=#fff><colbgcolor=#532F90> 지역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설립 년도 1207년
시청 소재지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하이스트리트 8403
면적 111.8 km²
광역 면적 731 km²
인구 <colcolor=#fff><colbgcolor=#532F90> 도심 498,042명
교외[1] 864,122명
광역권[2] 2,241,000명[3]
인구
밀도
도심 4,442/km²
교외 4,329/km²
광역권 2,148/km²
인종 구성 88.8% 영국인, 4.1% 아시아계, 2.6% 아프리카계, 2.5% 혼혈, 1.8% 기타[4]
시장
조앤 앤더슨
(Joanne Anderson)
시장경
안나 로서리
(Anna Rothery)
시의회 여당
70석
야당
12석

4석

3석


[[무소속(정치)|
무소속
]]
1석
국회의원
5석
시간대 UTC+0 (GMT)
GDP $51,500,000,000
1인당 $34,082
지역 전화번호 0151
ISO 3166-2 GB-LIV
GSS 코드 E08000012
NUTS 3 코드 UKD72
교통 국도 M62
철도 리버풀 센트럴, 리버풀 라임스트리트, 리버풀 모어필즈, 리버풀 제임스스트리트, 리버풀 사우스파크웨이
공항 리버풀 존 레논 공항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리버풀 비틀즈 동상.jpg
파일:anfield2024.webp
중심지 광장에 위치한 비틀즈의 동상과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

1. 개요2. 상징3. 역사
3.1. 지명 어원
4. 지리
4.1. 기후4.2. 인구
5. 경제6. 교통7. 생활·문화
7.1. 음악7.2. 스포츠7.3. 방언7.4. 음식7.5. 교육7.6. 방송/언론
8. 관광지
8.1. 도시 경관
9. 정치10. 매체11. 출신 인물12. 자매결연 지역우호 교류 지역13. 여담

[clearfix]

1. 개요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All my life
살면서 추억할 장소들이 있어요
Though some have changed.
몇 곳은 변해 버렸지만
Some forever not for better,
몇 곳은 영원하죠, 더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몇 곳은 사라졌지만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죠

All these places have their moments
이 모든 곳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지금도 생각나는 친구들과 연인들의 기억과 함께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몇 사람은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했어요
비틀즈, In My Life[5]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머지사이드주에 위치한 항구 도시.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286km, 맨체스터에서는 서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6], 머지강 하구의 동쪽에 위치하여 아일랜드해와 인접해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도시권[7]의 중심 도시이며, 사실상 머지사이드주의 주도 역할을 하는 도시다. 리버풀 도심 인구는 약 50만명이나 주변 광역생활권을 합하면 약 200만명 가량의 인구가 리버풀 도시권에 상주한다.

18세기부터 대서양 무역의 핵심 항구로 성장하여 19세기 산업혁명의 최전선에서 세계 경제의 요충지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전쟁과 경제 불황으로 쇠퇴기를 겪었고, 현재에는 활발한 도시재생 사업으로 부활하여 문화 관광 도시로 거듭났다. 현재에도 영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를 가지고 있다.

2. 상징

파일:리버풀 시 문장.svg
리버풀 시의회의 문장
파일:Liver_bird.svg.png
리버풀의 시조(市鳥) 라이버 버드

바다와 인접해 있는 도시인만큼 그리스 로마 신화속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바다의 전령 트리톤이 시의회 문장에도 자리잡고 있으며, 리버풀 전설속의 새 라이버 버드도 묘사되고 있다. 문장 하단의 라틴어 문구 'Deus Nobis Haec Otia Fecit(신이 우리를 위하여 평화를 창조하셨다)'는 리버풀 시의 표어이다.

라이버 버드는 리버풀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새로, 리버풀의 다양한 요소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리버풀의 대표 건물인 로얄 리버 빌딩 꼭대기에 라이버 버드의 동상이 있으며, 리버풀 FC의 엠블럼에 있는 새도 라이버 버드이다.

3. 역사

중세시대 중반까지 리버풀 지역은 대부분 농지였으며, 소규모 어촌이 들어서 있던 곳이었다. 그러다 1207년 존 왕에 의해 리버풀 자치구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아일랜드 침략을 위한 해안 군사 기지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1235년에는 리버풀 성[8]이 건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버풀 남쪽에 로만 브리튼 시대부터 주요 항구이자 요충지로 활용되던 체스터 지역이 계속 번영을 누리며 존재했고 전염병도 자주 창궐해 리버풀은 17세기까지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9]

17세기로 들어서 1644년에는 잉글랜드 내전 당시 리버풀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10]가 벌어졌으며, 이후 잉글랜드 연방이 탄생하자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걸쳐 리버풀은 본격적으로 도시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체스터가 오랜 기간 아일랜드해를 거치는 물동량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체스터의 디강[11]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머지강에 위치한 리버풀이 자연스럽게 체스터를 대체하기 시작했던 것. 이에 1695년 의회법에 의해 리버풀은 사목구로 지정되었고, 노예 무역선이 리버풀을 통해 아프리카로 출항하기 시작했다. 1715년에는 최초의 상업용 습식 과 부두가 건설되며 본격적으로 리버풀이 항구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18세기 담배와 설탕 등의 수요가 늘어나며 서인도 제도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자 체스터를 누르고 리버풀이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로서 엄청난 성장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리버풀은 당시 흑인 노예 무역의 메카로 여겨졌으며,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의 성황에서 흑인 노예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12] 노예 무역으로 인해 리버풀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리버풀 출신의 지식인 및 정치인들[13]이 노예 폐지 운동의 선두에 서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에 현재에도 '국제 노예 박물관'이 리버풀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자 산업혁명을 통해 리버풀을 거치는 무역 물동량이 한번 더 탄력을 받아 성장하며 도시가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을 이끈 공업 도시 중 하나인 인접 도시 맨체스터면직물을 시작으로 기계, 식품, 화학, 전자 등 전 세계 상공업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고, 리버풀이 그 외항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두 도시 간 공업 물자의 수송을 담당한 것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였는데, 1830년에 만들어진 이 노선은 세계 최초로 전 구간에 기관차를 이용한 여객 및 화물 운송을 수행했고, 근대적인 철도 운송 시스템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에 리버풀과 맨체스터는 도시 간 상용 철도 연결이 이루어진 최초의 도시들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세계 물동량의 약 40%가 리버풀 항구를 거쳤을 정도로 리버풀은 세계적인 무역항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 당시 유럽 내에서 리버풀의 물동량은 21세기 현대 유럽 최대 물동량 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유럽 내 물동량 2위인 독일 함부르크의 물동량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에 19세기 리버풀은 런던보다 부유했으며 "리버풀이 런던을 먹여살린다", "대영제국은 리버풀 덕에 가능했다"라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로 찬란한 역사를 누렸다. 실제로 당대 리버풀의 세관은 영국 재무부에 가장 많은 세금을 가져다주는 기관이었으며, 리버풀은 영국 내에서 유일하게 화이트홀 시설을 가지고 있는 런던 외 도시이기도 했다. 또한 리버풀은 대영제국의 수출 전진기지임과 동시에 수입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도시였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 수입된 면화[14]가 리버풀을 통해 들어와 영국의 섬유 산업을 먹여 살렸고[15], 전 세계에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 문화와 종교가 리버풀을 통해 유입되었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의 거대 해운사였던 화이트 스타의 본사가 리버풀에 위치하여 조선 및 여객 사업도 활발히 이루어졌었는데, 미국뉴욕시로 첫 출항했다가 빙산과 충돌해 대서양에 침몰하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RMS 타이타닉의 모항이 리버풀이기도 하다. 이에 19세기가 배경인 문학 작품들이 배로 이동할 때 리버풀을 거치는 상황을 많이 연출하곤 한다.[16] 그 외에는 남극물개 사냥과 관련 산업의 중심지로도 많이 여겨졌다.[17] 이에 남극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에는 리버풀의 이름을 딴 리버풀 해변(Liverpool Beach)이 있기도 하다.

무역과 산업혁명을 통해 선구적인 기술들이 도시에 모이며 19세기 리버풀의 도시 인프라와 문화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당대 리버풀의 핵심 항구였던 알버트 독(Albert Dock)[18]과 리버풀 시내 중심에 위치한 영국 최초의 마천루이자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로열 리버 빌딩(Royal Liver Building) 외에도 세인트 조지 홀, 워커 미술관, 카운티 세션 하우스, 노스 웨스턴 호텔 등의 리버풀 대표 건축물들이 이 시기 건축되었다. 1840년대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에 의해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도시에 많이 유입되어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했고[19], 20세기 초반까지 리버풀은 세계 전역에서 많은 이민자들을 끌어들이며 다문화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실제로 리버풀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커뮤니티가 지금까지도 존재하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 영국 최초의 모스크가 있고, 독일,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폴란드 정교회와 유대인 교회 등의 다양한 종교 시설이 일찍이 자리잡고 있다. 이에 1851년에 한 금융 무역 잡지사는 리버풀을 "유럽의 뉴욕"이라고 묘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리버풀의 도시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생산을 담당하던 맨체스터가 리버풀 항구의 물류비용이 비싸지자 공산품을 직접 수출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곧바로 아일랜드해로 연결되는 운하[20]를 건설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21][22] 맨체스터 운하로 인해 무역에 경제를 의존하던 리버풀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고, 덩달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며 국제 무역 자체가 많이 봉쇄당하는 바람에 도시 경제는 계속해서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더하여 193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세계 무역이 위축되고 영국 내 중공업 생산량이 3분의 1로 떨어지는 바람에 리버풀의 실업률은 30%에 달했고[23] 극심한 침체를 겪어야 했다. 도시 인구 또한 1931년 84만 명을 기록한 이후 계속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간기에 영국군과 함께 복무했던 수많은 식민지 군인들[24]과 선원들이 리버풀에 정착하는 바람에, 도시에 인종 갈등이 타올라 많은 폭동과 폭력 사태들이 발발했다. 또한 19세기 산업혁명의 반대급부로 노조 파업 또한 정점에 달해 리버풀 시 경찰들까지 파업을 하는 바람에 도시 치안 또한 다소 불안정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와중에도 1920년대와 1930년대 대규모 주택이 공급되었고, 1933년에는 스피크 공항[25]이 들어서면서 나름 계속해서 도시 발전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리버풀의 도시 기반까지 많이 파괴되는 바람에 완전히 도시의 성장 동력은 끊기고 말았다.[26] 당시 리버풀은 대서양 전투의 군사적 요충지로, 영국의 대표 국제항이자 공항 시설까지 있던 곳이었기에 특히 폭격이 집중되었고[27], 런던에 이어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타격을 입었다.[28] 이후 경제 불황으로 전후 복구도 더뎠던지라 당시 리버풀의 아이들이 폭격 후 박살난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뛰어 놀 정도였다.[29]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업의 대세 또한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갔기에 20세기 중반부터는 더 급속한 경제 쇠퇴를 맛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 이러한 어려운 도시 사정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리버풀에서는 위대한 문화적 아이콘들이 튀어나왔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머지사이드와 리버풀을 중심으로 '머지 비트'라고도 불리는 비트 음악 장르가 탄생했는데[30], 이 머지 비트를 이끈 선두 주자가 바로 리버풀의 로컬 그룹이자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밴드 비틀즈다. 또한 1960년대는 전설적인 축구 감독 빌 샹클리리버풀 FC를 이끌고 붉은 제국의 초석을 다지며 엄청난 로컬 축구 서포터들의 결집을 만들어 낸 시기이기도 했다.

1974년, 리버풀은 대대적인 행정 구역의 개편에 의해 신설된 머지사이드주에 편입되었다.[31]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리버풀의 절망적인 암흑기가 시작되고 말았는데,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해운 산업과 중공업 산업의 명맥이 끊기면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되었고,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리버풀의 항만 산업이 크게 주저 앉아 엄청난 실업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80년대 초반까지 리버풀의 실업률은 영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1982년 1월까지 17%에 달했다. 당시 리버풀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32]의 경제 불황은 대처 정부가 내새운 신자유주의대처주의에 의한 것이었기에 리버풀 지역민들은 이 때부터 대처와 보수당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덤으로 리버풀 FC의 서포터들이 희생된 힐스버러 참사도 이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특히나 리버풀 FC 팬덤[33]은 독보적으로 대처를 싫어한다.[34] 이에 심지어 2013년 마가렛 대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녀가 죽었다!"'라며 리버풀 시민들이 환호했을 정도였다. 리버풀 시 의회가 현재 대부분 노동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처 이후로 잉글랜드 북부에서 보수당 지지세는 완전히 꺾였으며, 특히 리버풀은 현재까지도 극심한 좌파 성향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까지 리버풀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쇠락한 도시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처량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35], 도시가 쇠락하며 슬럼가도 이 때 많이 생겨났다.[36] 그러나 당시의 리버풀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오지, 미국의 후드 마냥 엄청나게 낙후된 지역이였던 것은 아니다. 1970~80년대의 도시 경제 암흑기도 19세기의 찬란했던 과거에 비해 쇠퇴했던 것이지 결국 영국 내 6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했다. 실제로 1980년대를 벗어나 1990년대 준반부터는 전국 평균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경제가 회복세를 보였다.[37] 1984년에는 원예박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는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며 도시재생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특히 문화 관광 도시로서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2002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리버풀에 방문하면서 영국 왕실과 중앙 정부가 리버풀의 재건에 뜻을 모았고, 이후 2004년에는 해양 무역 도시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지정되었다. 2008년에는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며 도시 성장에 박차를 가했고, 도심에 '리버풀 원(Liverpool One)'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복합 문화 공간 및 쇼핑 센터가 완공되어 도시 인프라가 급성장했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도 다양한 상업 시설이 재개발되었고, 해안 주변과 도시 중심에 큰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며 도시가 활력을 되찾았다.[38] 특히 과거에 영광의 역사를 자랑하던 부두들을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개발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그러나 2021년 7월 21일, 계속된 부두 재개발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는데, 리버풀은 지역 경제의 부활을 위하여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계속해서 대규모 도시 재생을 진행하는 중이다.[39]

이러한 대대적인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하면서 2000년대 이후 인구도 많이 늘었고, 경제도 대폭 성장한 상태다. 이에 현재에는 전통의 주력 산업이던 항만 산업에서 벗어나 문화 관광 도시로 자리잡았으며, 인프라 확충으로 영국 내에서는 치안도 손꼽힐 정도로 좋아졌다.[40] 2020년대 이후로는 다양한 컨퍼런스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으며, 지역 축구단인 리버풀 FC에버튼 FC가 대규모 경기장 증축 및 신축을 진행하면서 해당 지역의 주변 인프라도 개선되고 있다. 실제로 리버풀 FC의 홈 구장 안필드는 다년간 증축을 거쳐 안필드 지역 환경을 개선시켰으며, 2024년 여름 테일러 스위프트에라스 투어를 구장에서 개최하며 큰 경제 효과를 창출했다. 또한 브램리무어 부두에 새로 지어지는 에버튼 FC의 홈 구장 에버튼 스타디움 또한 대형 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는 시설로 지어졌다. 이외에도 2019년 넷볼 월드컵을 개최한 데 이어 2021년 12월 11일~12일 G7 외교 개발 장관 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202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3.1. 지명 어원

'두껍다' 혹은 '진흙탕 물'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lifer와 개울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pōl에서 유래되었다. 뜻을 풀이하자면 진흙이 있는 개울 정도의 의미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머지강 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지명이다. 1190년경에 처음으로 Liuerpul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역사가 있다. 1418년의 기록에 등장하는 Leyrpole이라는 지명도 리버풀을 지칭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때때로 리버풀의 지명이 웨일스 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는 검증을 통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리버풀의 웨일스식 표기는 Lerpwl로, 과거 영어 표기법인 Leerpool에서 유래된 것이다.[41] 19세기 일부 웨일스 출판물에서는 Lle'r Pwll 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나, 이는 지명을 발음대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4. 지리

파일:Map-of-the-Liverpool-City-Region-and-its-constituent-local-authorities.png

북위 53° 24′[42], 서경 2° 59′.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 머지강 하구의 동쪽[43]에 위치하여 아일랜드해와 맞닿아 있다. 북쪽으로는 세프턴, 남쪽으로는 부틀과 크로스비, 매걸, 동쪽으로는 노슬리와 커크비[44], 휴이튼, 프레스콧, 헤일우드와 인접해 있다. 머지강을 사이에 두고 버킨헤드와 마주보고 있다. 바다 건너 아일랜드와 상당히 인접한 지리 환경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평탄한 지형이지만, 일부 지역에 약간의 언덕이 있기도 하다.

해안선을 따라 항구와 부두가 발달해 있는데, 대부분 머지강 하구 근처에 형성되어 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편이고, 과거에는 범람 위험이 있는 지역이었으나 현재 방재 시설이 구축되어 있다.

도심 면적은 111.8 km²이며[45], 교외 지역[46]의 면적을 합하면 199.6 km²에 달한다. 리버풀 광역권을 구별하는 기준은 다소 다양하나 일반적으로 리버풀 도시권(Liverpool City Region)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머지사이드주의 리버풀, 할튼(Halton), 논슬리(Knowsley), 셰프턴(Sefton), 세인트 헬렌스(St Helens)와 체셔주의 위럴(Wirral) 자치구를 포함한다. 리버풀 도시권의 면적은 731 km²에 이른다.

4.1. 기후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간
일평균최고기온(℃) 7.5 7.9 9.9 12.8 15.9 18.4 20.0 19.7 17.7 14.2 10.5 8.0 13.6
일평균기온(℃) 5.2 5.3 6.9 9.2 12.1 14.9 16.7 16.6 14.5 11.4 8.1 5.6 10.5
일평균최저기온(℃) 2.8 2.7 3.9 5.6 8.3 11.3 13.5 13.5 11.2 8.5 5.7 3.1 7.5
평균강수량(㎜) 69.4 57.1 53.3 49.8 52.5 64.4 65.5 72.1 76.6 89.7 82.2 91.9 824.3
평균강수일수[47] 13.8 11.5 11.3 10.0 9.8 10.4 11.0 12.2 11.8 14.4 15.5 15.4 146.9
평균일조시간 56.0 70.3 105.1 154.2 207.0 191.5 197.0 175.2 132.7 97.3 65.8 46.8 1499.1

대부분의 영국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안 해양성 기후가 나타난다. 또한 일 년 내내 강우량이 상당히 고르게 분포하지만 가을(10~12월)이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며, 비는 가볍게 내리지만 상당히 자주 내린다. 영국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흐린 날이 많으며, 잦은 구름과 이슬비가 특징이다. 그리고 바다 근처에 있어 습도가 높고 바람이 굉장히 심하게 부는 지역이며, 특히 겨울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 때가 많다.

기온은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적고, 한여름에도 25°C를 넘는 경우가 드물다. 런던보다는 겨울에 약간 더 춥고 여름에 약간 덜 더운 편이다. 1867년 기온 측정이 시작된 이래, 최저 기온은 2010년 12월 21일에 기록된 -17.6°C(0.3°F), 최고 기온은 1990년 8월 2일에 기록된 34.5°C(94.1°F)였다. 일조량은 북부에 있다보니 런던에 비해 햇빛이 짧게 든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기도 하지만 폭설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눈은 일반적으로 11월에서 3월 사이에 내린다. 역사상 가장 이른 눈은 1908년 9월 10일에, 가장 늦은 눈은 1975년 6월 2일에 내렸다.

4.2. 인구

리버풀 인구 추이
(1797년~현재)
1797년 77,708명
1801년 85,000명
1811년 94,376명
1821년 118,972명
1831년 165,175명
1835년 에버튼, 커크데일, 톡스테스 일부, 웨스트더비 일부 지역 리버풀로 편입
1841년 286,487명
1850년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한 대규모 이민자 유입
1851년 375,955명
1861년 462,749명
1871년 539,248명
1880년 리버풀 시(City) 승격
1881년 648,616명
1891년 644,243명
1895년 웨이버트리, 월튼, 톡스테스 일부, 웨스트더비 일부 지역 리버풀로 편입
1901년 711,030명
1902년 가스턴, 애이그버스, 크레싱턴, 그라센데일 지역 리버풀로 편입
1911년 766,044명
1913년 울튼, 게이트에이커 지역 리버풀로 편입
1921년 821,000명
1937년 867,000명 (정점)
1941년 806,271명
1951년 768,337명
1961년 737,637명
1971년 607,454명
1981년 503,726명
1991년 480,196명
2001년 439,476명
2011년 466,415명
2021년 486,100명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00만 명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인구 만 명 이하의 소규모 자치구였으나,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며 인구가 만 명을 넘었고, 1820년 인구 10만명을 넘어선 후, 항만 및 무역 산업이 절정에 달하며 급속도로 인구가 증가했다. 특히 185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이 절정에 달하자 많은 이민자들이 넘어와 인구가 크게 늘어났으며, 1937년 역대 최다 인구인 86만명을 달성하기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인구가 상승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 교외 신도시 정책에 의해 인구가 점차 줄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 인구가 급속도로 빠져나가 1990년대엔 인구 50만명이 깨졌고 21세기에 진입하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인구 감소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지속적인 도시재생에 사업에 힘입어 다시금 인구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21년 영국 인구 조사에 의하면 약 48만명까지 인구를 회복해 잉글랜드 전체 도시 중 인구수로 5위에 올랐고, 2022년 리버풀 시의회 데이터에 따르면 인구수 50만명을 돌파했다.

인종 구성은 영국인 88.8%, 아시아계 4.1%, 아프리카계 2.6%, 혼혈 2.5%, 기타 인종 1.8%로, 계속해서 영국인과 백인의 비율이 높지만 21세기에 진입한 이후로는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전체 인구 중 아일랜드계 영국인은 단 1.4%에 불과한데, 이는 오랜 기간 아일랜드 이주민이 건너온 지역이기에 사실상 현재에는 혈통이 많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실제 아일랜드 혈통이 섞인 인구는 50%에 달하며, 75%에 이른다는 통계까지도 있다.

5. 경제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을 대표하는 항구 도시였으며, 한 때 세계 물동량의 약 40%가 리버풀 항구를 거쳤을 정도로 세계적인 무역항이었다. 이에 무역, 항만, 조선, 여객 산업으로 크게 번창했고, 상술했듯이 산업혁명을 통해 19세기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에는 대영제국의 관문 그 자체였으며, 런던을 초월하는 영국 최대의 부를 자랑했다. 잉글랜드 북부의 기술자들이 몰리며 상공업도 나름 발달한 편이었다. 실제로 도자기 제조업이 성행해 다소 무겁고 불투명한 연질자기를 많이 생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맨체스터 운하의 건설로 경제가 크게 위축되었고, 1980년대 마가렛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항만 산업이 몰락을 겪어 도시 경제가 큰 침체를 겪었다.

하지만 21세기 이후로는 경제를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특히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리버풀은 런던을 제외하면 영국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전통적인 항만 산업도 다시 우상향 중이다. 오늘날 리버풀의 항구는 화물 톤수 기준으로 영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이며, 2020년 기준으로 3천만 톤 이상을 물동량을 처리하고 있다. 리버풀은 현재에도 영국에서 가장 큰 대서양 무역 항구로, 영국-미국 간 무역에서 물동량의 45%를 담당하고 있다. 리버풀 항구에는 Mediterranean Shipping Company, MAERSK, CMA CGM, 하파그로이드를 비롯한 유수의 해운사들이 사업을 하고 있으며, 2022년에는 리버풀 제 2 컨테이너 터미널을 개장하여 인프라를 확장했고 세계 최대 규모 컨테이너 선박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23년에는 국제 상업 장려의 목적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지역 관세 혜택을 받는 항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현재에는 문화 관광 도시로서 재개발되어 새로운 경제 성장 동력을 찾았다. 21세기 이후 본격적인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도시 인프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에 2022년에는 해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한 상위 5개 영국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매년 약 4,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관광 산업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호텔, 레스토랑 등의 숙박-소매업도 동반 성장 중이다. 2022년, 리버풀의 관광 산업은 연간 총 35억 파운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발표되었고, 특히 비틀즈와 관련된 관광은 매년 리버풀 경제에 약 1억 파운드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부터 여객 사업이 발달한 지역답게 크루즈 사업도 발달해 있다. 리버풀은 세계에서 크루즈 여객선이 도심 근처로 정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이며, 2008년 이후 그랜드 프린세스와 퀸 엘리자베스 2호를 포함한 상당수의 대형 크루즈 선박이 리버풀 크루즈 터미널에 취항해 있다. 크루즈 사업 확장에 의해 새로운 크루즈 터미널 개장 계획도 검토되고 있다.

최근에는 과학, 디지털, 첨단 제품 제조와 같은 미래 첨단 산업 부문에도 힘을 쓰고 있다. 실제로 영국 정부의 주도 하에 리버풀은 영국의 바이오 산업 선도 지역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2023년에는 중앙 정부로부터 국내 두 번째로 제약-과학 산업 중심 지구 조성에 막대한 예산 투자를 받았다. 현재 영국의 3대 생물의학 중심지 중 하나이기도 하며, 노바티스, 시퀴러스 등의 유명 제약 회사 공장이 리버풀에 세워져 있다. 추가로 국립 해양학 센터(NOC)도 리버풀에 있으며, NOC는 영국 정부로 부터 혁신 연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받는 연구 센터이다. 통합 해양 과학 및 심해 연구 기술 개발로는 영국 최대의 기관이다. 또한 도심의 발트 트라이앵글 지구가 디지털 비즈니스 단지로 개발되면서, 소니를 비롯한 유명 게임 개발사와 소프트웨어 업체들도 자리잡고 있다. 이에 리버풀에는 유럽에서 몇 안되는 PlayStation 연구 개발 센터 중 하나가 위치해 있기도 하다. 리버풀 근교에는 사이테크 데어즈버리라는 과학 및 혁신 개발 연구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고성능 컴퓨팅, 데이터 분석 및 인공지능 산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조업도 나름 명맥을 이어가는 중인데, 헤일우드 지역에 재규어 랜드로버 공장이 있고, 과거 재규어 X-타입이 여기에서 제조되었으며, 현재에는 레인지로버 이보크 모델이 리버풀에서 생산되고 있다. 또한 유니레버도 리버풀에 공장을 두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도시가 활력을 되찾음에 따라 은행, 금융 및 보험 산업도 빠르게 성장 중이다. 2007년부터 금융 산업은 리버풀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였고, 바클리스의 대형 지사가 리버풀에 자리잡는 등 이 분야에서 일자리도 크게 증가했다. 실제로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자산 관리 산업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다.

의외로 영화 산업도 발달한 편이다. 산업혁명 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도시인지라 영국 내에서는 런던 다음으로 영화나 드라마 많이 촬영되는 도시다. 최근 도심과 가까운 곳에 영화 혹은 TV 컨텐츠 촬영을 위한 디포 스튜디오가 새로 생겼고, 여기에서 다수의 미디어 컨텐츠들이 제작되고 있다. 시 차원에서도 영화 산업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2021년에는 '북쪽의 할리우드를 목표로한다'는 야심찬 목표로 영화 및 방송 스튜디오 건립에 큰 투자를 했다.

6. 교통

고속철도의 중앙역으로는 1836년에 개통된 리버풀 라임가역있다. 라임가역은 현재까지 운용되는 역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본선 종착역이다. 여기서 런던을 비롯해 맨체스터, 리즈 등 잉글랜드 전역과 연결되는 도시간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다. 런던까지는 기차로 2시간 10분~20분 정도 소요된다. 맨체스터와는 철도교통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당연히 현재도 주요 교통편으로 쓰인다. 도시 남쪽에는 공항과 연결되는 리버풀 사우스 파크웨이라는 별도의 역이 있다. 참고로 리버풀은 세계 최초의 철도 터널이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

공항으로는 도시 남부에 위치한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이 있다. 1933년에 개항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영국 본토 항공전의 중심에 있었던 핵심 공항이었고, 전후 민항기를 운용한 뒤로는 한동안 잉글랜드 북서부 최대의 국제공항이기도 했다. 원래 스피츠 공항으로 개항했으나 2001년에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을 기리기 위해 리버풀 존 레논 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국 내에서는 처음으로 사람 이름이 공항에 붙은 사례라고 하니, 리버풀 사람들이 얼마나 비틀즈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전성기를 누린 이후에는 인접해 있는 맨체스터 공항에 승객들을 흡수당해 연간 승객 수가 100만 명도 넘지 못하는 공항이었으나, 민영화 이후 탑승객 수가 폭증해 개항 이후 처음으로 500만 명을 돌파하기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전 세계 60개 이상의 공항과 연결되어 있으며 100개 이상의 노선이 취항되어 있다. 다만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다시 200만 명대로 떨어져 1990년대 이후 가장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항구 도시답게 여객 페리도 잘 발달해 있다. 특히 아일랜드 해를 가로질러 아일랜드북아일랜드맨섬으로 연결되는 여객선이 많다. 바다를 건너가는 페리 외에도 머지강을 건너 버킨헤드와 연결되는 일명 머지 페리도 있다. 머지 페리는 20분 간격으로 상시 운영되며 관광용으로도 많이 이용된다. 과거부터 크루즈 사업도 성행한 도시이기 때문에 리버풀 크루즈 터미널이 있으며 연간 20만명 이상의 승객을 수용하고 있다. 호주, 프랑스, 아이슬란드, 북미, 스페인, 카리브해로 향하는 장거리 크루즈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여객 헬리콥터 서비스도 1950년에 리버풀과 카디프 사이에서 운행된 바 있다.

도시 내 대중교통으로는 도시철도와 버스가 있다. 리버풀의 도시 철도는 머지 레일이라고 불리며 머지사이드주와 체셔주, 랭커셔주 경계까지 총 69개 역을 지상으로 운행하여 리버풀 도시권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연간 약 3천만명이 이용 중이다. 도심에서는 버스가 대표적인 대중 교통인데, 라임가역 부근과 알버트 독 부근에 대규모 버스 정류장이 조성되어 있기에 접근성도 뛰어난 편이다. 다만, 인기 축구단인 리버풀 FC의 매치데이에는 도시 전체가 축구 관람객과 관광객으로 매우 붐비는 경향이 있으며 버스 교통도 마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국 최초의 순환 도로(A5058)와 도시 간 고속도로(이스트 랭커셔 로드)가 들어선 도시이다. 또한 리버풀과 머지강 건너 버킨헤드를 연결하는 수중 터널로도 유명한데, 머지 터널은 건설 당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묘사되기도 했으며, 이 터널은 24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긴 수중 터널이기도 했다. 현재에는 위럴 반도와 2개의 수중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터널의 이름은 킹스웨이 터널과 퀸즈웨이 터널[48]이다. 교통정체가 그다지 심한 도시는 아니지만 큰 축구장들이 주택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매치데이에는 교통난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에 리버풀 전역에 공유 스쿠터와 공유 자전거 서비스가 최근에 늘어나고 있다.

그 외에는 거리 이름에 노예 상인들의 이름이 붙어 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장 비틀즈의 명곡으로 유명해진 페니 레인 거리부터 노예 상인 제임스 페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는 리버풀이 과거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20년대 초 BLM 시위가 한창이었을 당시 리버풀 내에서도 거리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상당수 존재했다. 리버풀 시의회에서는 2000년대부터 이미 노예 상인들의 이름이 붙은 거리의 이름을 개칭하는 안건을 통과시키고 있는데, 페니 레인 거리는 상징적인 비틀즈 노래의 제목이다 보니 예외로 두기도 했다.

7. 생활·문화

전통적으로 리버풀 지역은 스카우즈(Scouse) 지역이라고도 불리며, 리버풀 출신은 스카우저(Scouser)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49][50] 과거부터 항구를 통해 성장해온 해양 무역 도시이기 때문에 아일랜드해 및 머지강의 환경과 밀접하게 생활 문화가 발달했다. 또한 18세기부터는 대규모 무역의 중심지로서 이민자들도 매우 많이 유입된 지역이기에 지역 문화가 꽤 특이하게 발달된 지역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팽창한 도시이기 때문에 노동 계급이 많고,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역사적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또한 활발했던 편이다. 특히나 1980년대 경제 위기와 실업 문제를 겪으며 지역 내 강한 연대감을 키워온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51], 현재에도 지역 행사나 자선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아일랜드웨일스 이민자들을 비롯해 노예 무역과 세계 대전을 거치며 많은 외국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어 발달한 편이다. 현재 리버풀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커뮤니티가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과 영국 최초의 모스크가 있기도 하다. 이에 다문화, 다종교적인 특성을 많이 띄고 있으며, 현재에도 인종, 성별, 종교 등 다양한 부분에서 진보적인 성향이 우세한 도시이다.

하지만 이렇듯 워낙 독특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타 지역을 무시하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내에서는 지역차별을 많이 당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치적 성향 때문에 보수 진영에게 조롱당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비슷한 성향의 잉글랜드 북부 내 타 도시들에서도 축구 라이벌리 등의 이유로 조롱을 많이 당하는 편이다. 허나 이는 리버풀의 로컬 축구단들이 워낙 잘 알려진 탓에 더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52]

7.1. 음악

파일:리버풀 비틀즈.jpg
1964년 리버풀 거리의 비틀즈
좌측부터 존 레논, 링고 스타,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53]

음악으로는 "세계 팝의 수도(World Capital City of Pop)"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구가하는 도시이다. 영국 내에서도 국내 차트 1위 싱글을 리버풀 출신의 뮤지션들이 가장 많이 차지했다.[54] 특히 1950년대 후반에 탄생한 '머지 비트'의 발상지이며, 머지 비트를 이끈 세계적인 밴드 비틀즈의 고향으로 특히나 유명하다.[55] 비틀즈 멤버들은 모두 전형적인 리버풀 노동 계급 가정 출신이며, 그래서인지 깔끔한 외모와 달리 성격은 마초적인 부분도 꽤 있는 등 리버풀 출신 특유의 성향도 많이 묻어나는 그룹이었다. 링고 스타의 경우 처음 밴드에 나타났을 때, 리젠트 머리의 테디 보이 패션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링고 스타 스스로가 말하길, "나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체구도 작고 싸움도 잘 못해서 강하게 보이지 않으면 리버풀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인기가 많아진 뒤에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수도권인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했지만 멤버 모두 리버풀 태생이라 세계적으로 리버풀의 이름을 알린 그룹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비틀즈가 최초로 라이브 공연을 했던 캐번 클럽 등을 위시한 비틀즈 관광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비틀즈 팬들로 인해 리버풀에서 제일 잘나가는 수익 산업 중 하나다. 심지어 2009년 '리버풀 호프 대학(Liverpool Hope University)' 석사 과정에 '비틀즈 학과'가 개설되기도 했다. 리버풀 도시 재생 사업 당시에도 비틀즈 관광 사업은 큰 도움이 되었으며, 노동 계급 출신의 하층민들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리버풀 내에서 비틀즈 멤버들의 위상은 지금도 대단한 편이다. 멤버들 모두 대중음악인으로써는 최초로 1965년 5등급 대영제국 훈장 (MBE)을 수여받기도 했다.[56] 오죽하면 영국 교통 시설 최초로 사람의 이름이 붙은 시설이 리버풀의 국제공항인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일 정도였으며, 2006년 리버풀 시의회에서 노예 상인들의 이름이 붙은 거리의 이름을 개칭하는 안건을 통과시켰을 때도 예외적으로 비틀즈 노래 제목 중 하나인 페니 레인가는 제외시켰다.

비틀즈 외에도 1960년대에 머지 비트가 전성기를 누릴 당시, 빌리 퓨리, 빌리 J. 크레이머(Billy J. Kramer), 실라 블랙(Cilla Black), 제리 앤 페이스메이커(Gerry & the Pacemakers)[57], 서쳐스(The Searchers) 등의 유명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이들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끈 영국식 로큰롤 음악의 태동기를 이끌었다. 이후엔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 빌리 퓨리(Billy Fury), 에코 앤 더 버니멘(Echo & the Bunnymen), 프랭키 본(Frankie Vaughan),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 어나스마(Anathema), 레이디트론(Ladytron), 주튼스(The Zutons), 캐스트(Cast), 아토믹 키튼(Atomic Kitten), 레베카 퍼거슨(Rebecca Ferguson), 엘비스 코스텔로, 사이먼 래틀, Dead or Alive, 더 라스(The La's) 등의 뮤지션들이 리버풀에서 배출되었다. 특히 더 라스는 영국 최초의 브릿팝 밴드로 불린다.[58] 스파이스 걸스멜라니 C도 리버풀 도시권 출생이다. 이에 리버풀은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보이밴드걸그룹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다만 근처의 맨체스터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브릿팝이 성행한 것에 비해, 리버풀은 머지 비트라는 특유의 장르가 지배한 1960년대 이후부턴 더 라스가 브릿팝의 태동을 알린 것 외에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주도해서 이끌지는 못했다. 실제 1970년대 초반 근처의 위건을 위시한 맨체스터 인근과 영국 북부 지역에서 소울 음악 열풍이 불어 영국 특유의 노던 소울(Northern Soul) 무브먼트가 일어났을때도 딱히 같이 흐름을 타지 않았다.

또한 리버풀은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였던 도시의 특성상 영국에서 가장 큰 아프리카 음악 페스티벌 아프리카 오예(Africa Oyé)와 브라질 음악 축제 브라질리카(Brazilica Festival)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리버풀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인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보유하고 있다.

7.2.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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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종주국 잉글랜드 중에서도 축구 열기가 가장 뜨거운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이며, 맨체스터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 축구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리버풀은 잉글랜드 명문 구단인 리버풀 FC에버튼 FC의 연고지이며,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리는 이 두 구단의 치열한 라이벌리에 의해 축구 리그의 태동기부터 상당히 발달된 축구 문화를 자랑해왔다. 양 팀은 20세기 초반부터 잉글랜드 리그의 강자로 떠올라 전국구급 명성을 쌓았으며, 1970~80년대에 엄청난 전성기를 달리며 잉글랜드 축구의 헤게모니를 리버풀로 가져오기도 한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전통 강호로, 현재까지도 리버풀 FC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구단이자 유럽 대항전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은 최고급 위상의 구단이며, 에버튼 FC는 잉글랜드 1부 리그에 최장기간 머무른 구단이자 강등 없이 가장 오랜 연속 잔류 시즌을 보내고 있는 역사적인 기록의 구단이다.

특히 1980년대는 리버풀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 도시들이 마가렛 대처 시절 중앙 정부의 엄청난 차별과 탄압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상당히 고통받고 있던 시기였기에, 두 로컬 구단들이 축구 리그를 지배하던 전성기는 도시의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리버풀에선 축구가 종교에 가까운 수준의 문화적 매개체로 자리잡았다. 축구가 상업화된 이후에는 두 구단의 명성에 힘입어 축구 관광이 많이 발달했으며, 실제로 전세계급 인기를 자랑하는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는 도시를 찾는 방문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이기도 하다. 이에 축구 문화는 현재까지도 리버풀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이자 도시의 원동력으로써 계속해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축구가 발달한 도시답게 수많은 로컬 축구 스타들을 배출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8번 문단을 참고. 또 다른 특징으로는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물론 북아일랜드아일랜드와도 인접한 도시의 지리적 특성상 잉글랜드 외 다른 영연방 출신 및 아일랜드 출신 스포츠 스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도시라는 것이다. 리버풀 FC에버튼 FC의 초대 감독인 윌리엄 바클레이가 아일랜드인이었으며, 양 팀의 레전드들 중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출신 인물들이 다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빌 샹클리, 케니 달글리시, 이안 러시, 알렉스 영, 네빌 사우스올, 그레이엄 샤프 등이다.

워낙 축구가 압도적인 열기를 보이는 지역이지만, 격투기도 꽤나 인기가 있다. 과거부터 복싱 역사가 깊은 지역이고, 실제로 도시 내에 많은 아마추어 복싱 클럽이 있다. 실제로 영국 복싱 국가대표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며, 리버풀 출신의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만 해도 지미 로이드, 조지 터핀, 토니 윌리스, 로빈 리드, 데이비드 프라이스까지 5명이나 있다. WBA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 칼럼 스미스도 리버풀 출신이다. UFC 파이터들도 상당수 배출 중인데, 대런 틸, 몰리 맥캔, 테리 에팀, 폴 새스, 폴 켈리, 크리스 피쉬골드, 제이슨 탄이 리버풀 출신이고, 최근에는 패디 핌블렛이 리버풀 출신 다운 외형과 억양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이외에는 선술하였듯이 넷볼 월드컵이 열린 바 있고, 럭비크리켓도 다른 영국 지역처럼 나름 즐기는 편이다. 골프테니스도 인프라가 갖춰져있기 때문에 디 오픈 챔피언십[59]이 열리기도 하며, 매년 6월에는 윔블던이 열리기 전 리버풀 국제 테니스 토너먼트가 열린다.[60] 경마도 유명한데, 리버풀 도시권 내 아인트리 경마장이 있고 매년 4월 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애물 경마 대회인 랜독스 그랜드 내셔널이 열린다. 이에 경마 애호가들도 시즌이 되면 많이 찾는 곳이다. 과거에는 그레이하운드 개 경주도 성행하여 네 개의 그레이하운드 경주 전용 트랙이 있기도 했다.

영국의 야구사와도 인연이 깊은 도시다. 사실 영국에서 야구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현재에도 거의 인기가 없는 스포츠지만, 리버풀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야구 클럽인 리버풀 트로이(Liverpool Trojans)가 존재하며, 리버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야구와는 형식이 약간 다른 전통 영국 야구[61] 경기를 개최하는 세 도시 중 하나이다.[62] 축구의 도시 리버풀에서 야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과거 리버풀 지역의 사업가로 많은 족적을 남겼던 존 무어스 경[63] 때문인데, 무어스 경은 에버튼 FC의 이사회에서 오래 활동하며 1960년대 에버튼의 회장직에도 오른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열렬한 야구 팬이기도 했다. 무어스 경은 1933년 리버풀에 첫 야구 팀을 만들고 리그를 창설했으며[64], 1938년 8월, 세계 최초의 국제 아마추어 야구대회이자 제 1회 야구 월드컵인 '존 무어스 트로피'를 개최한 인물이다.[65] 이러한 공로에 의해 2009년 10월, 무어스는 영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또한 과거 1862년부터 1867년까지 존 헐리와 찰스 피에르 멜리에 의해 매년 그랜드 올림픽 페스티벌을 개최한 역사가 있는데, 재밌게도 이 대회는 현재의 올림픽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아마추어 운동 대회[66]였다. 또한 1896 아테네 올림픽에서 열린 첫 근대 올림픽의 대회 방식은 앞서 열린 리버풀 올림픽 페스티벌과 거의 흡사했다. 1865년 존 헐리는 리버풀에서 영국 올림픽 협회의 전신인 국가 올림픽 협회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협회의 기초 헌장이 올림픽 헌장의 기초가 되었다. 이런 깊은 스포츠 역사 때문인지 리버풀은 영국 내에서 1인당 여가 시설 및 스포츠 센터가 가장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7.3.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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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토박이 4인방의 억양 들어보기[67]

리버풀 방언뉴캐슬어폰타인 방언과 더불어 괴이하기로 영국 내에서도 유명하며, 지역의 이명을 따서 스카우즈(Scouse) 악센트라고도 불린다. 영어지만 아예 외국인들은 못 알아듣는 경우도 많으며, 영국의 타지 사람들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다. 심지어 리버풀 사투리는 영어가 아니라 리버풀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68] CNN의 대표 기자 중 한 명인 리처드 퀘스트(Richard Quest)가 그나마 영어를 외국어로 쓰는 사람들도 쉽게 알아들을 만한 리버풀 억양을 구사하는데, 미국인들에게는 이조차도 굉장히 이질감이 심한 영어 취급을 받는다. 영화 리뷰어인 노스탤지어 크리틱배트맨과 로빈을 리뷰하면서, 극중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다 온 배트걸 역할의 앨리샤 실버스톤이 내뱉는 억양이 너무 강해서 "리버풀 출신인 게 틀림없네!"라며 평한바 있다.

리버풀도 원래는 주변 지역과 마찬가지로 랭커셔 방언을 사용하는 지역이었으나, 산업혁명 이후 인접한 아일랜드웨일즈 등지에서 유입된 이주민의 영향으로 19세기 중반 독자적인 억양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영어가 익숙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스코틀랜드 억양 수준의 신세계를 선사하는 매우 독특한 억양이 탄생했다.[69]

한국인 유튜버 KoreanBilly(채널)가 리버풀 억양을 관심 있게 다룬 바 있다. 국내에서는 리버풀 FC의 인기가 높기 때문에 리버풀 억양이 다소 알려진 편이다.

7.4.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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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스(scouse)

리버풀의 음식은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 요리의 산실인 그 영국에서조차도 맛없기로 유명하다.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이었기에 양을 늘리려다보니 밍밍한 맛의 음식이 대부분이었고, 항구 도시였던 탓에 선원들이 먹는 음식들이 그나마 대표적이었는데, 배에서 해먹는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 섭취할 수 있는 기한을 늘리고 단순한 조리법을 취하다보니 맛 따위는 잘 고려되지 않았다.

선원들이 자주 해먹던 리버풀 지역의 전통 요리로는 고기 스튜인 스카우스(scouse)가 있다. 원래 북유럽 선원들이 먹었다고 알려졌던 음식이며, 고기, 감자, 당근, 양파로 만드는데 고기는 소고기나 양고기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 스카우스 스튜가 리버풀 지역의 별칭 '스카우즈'의 유래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 선원들이 만들어 먹던 스카우즈는 물자가 부족한 환경 탓에 강한 양념이 없고 맹물같은 맛이었던지라 맛이 없다고 알려졌던 것인데, 사실 제대로 만든 스카우스는 고기로 만든 스튜인 만큼 맛이 아주 없기는 힘들다. 덩어리진 고기 대신 다진 고기를 넣은 버전의 블라인드 스카우스(Blind Scouse)가 있고, 해산물이 들어가는 랍스카우스(Lobscouse)도 있다.

이외에는 레몬 커드(Lemon curd)와 페이스트리 크러스트로 만든 리버풀식 파이가 있고, 건포도가 들어간 빵인 웨트 넬리(Wet Nelly), 완두콩과 고기, 감자를 넣고 끓인 전통적인 영국식 요리인 피즈 핫팟(Pease Hotpot) 등이 지역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리버풀의 음식이 맛이 없다고 알려진 것은 도시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었고, 그 때문에 값싼 재료로 만든 음식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리버풀 음식=가난한 음식"이라는 편견이 있었고, 이러한 점을 비하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런던은 고사하고 인접 도시인 맨체스터의 경우 최근 요리 문화가 발전하면서 많은 레스토랑이 들어선 것에 비해 리버풀은 아직도 전통적인 영국식 음식이 중심이 되는 도시라 상대적으로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한 몫한다.

7.5. 교육

1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러셀 그룹 소속 종합대학리버풀 대학교가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로널드 로스, 찰스 스콧 셰링턴코카콜라 컴퍼니의 CEO 제임스 퀸시 등이 주요 출신 인물이다. 리버풀 대학교는 잉글랜드의 붉은 벽돌 대학 중 하나로, 1881년에 설립되어 1903년 왕실 헌장과 의회법에 따라 독립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후, 영국 최초로 생화학, 건축, 도시 디자인, 수의학, 해양학 및 사회과학 학위를 수여한 대학으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세계 최초로 열대 지방의 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창설된 리버풀 열대 의학 학교가 리버풀 대학교의 산하 대학원으로 존재한다. 리버풀 열대 의학 학교는 말라리아 및 기타 곤충 매개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데 있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로, 1898년에 세계 최초로 설립되어 오늘까지 영국 내 가장 많은 열대 지방 의학 및 곤충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1902년 로널드 로스가 이 곳에서의 말라리아 연구로 영국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외의 종합 대학으로는 의 기타리스트였던 브라이언 메이가 총장으로 있었던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와 인문학 및 교육학에서 강세를 보여주는 리버풀 호프 대학교가 있다. 리버풀 호프 대학교는 1844년에, 존 무어스 대학교는 1823년에 개교해 상당히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특성화 대학으로는 공연 예술 및 창의 산업에 특화된 리버풀 예술 대학교, 교사 양성 대학교인 에지 힐 대학교 등이 있다. 특히 리버풀 예술 대학은 비틀즈의 폴 메카트니가 공동 설립자이다. 1518년에 설립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립 의과대학도 있다.

리버풀은 영국 최초의 암 연구 센터, 인수공통전염병 연구 센터, 시각장애인 학교, 기계학 연구소, 여자 고등학교를 세운 역사가 있는 도시이지만, 경제 불황 이후 교육 및 연구 발전이 다소 더딘 편이었다. 하지만 현재 최근 대학 연구 성과와 교육 개혁을 통해 꾸준히 교육 수준이 발전 중에 있다. 특히 공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음악이 발달한 지역 답게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및 창의 예술 분야에서 강점을 보인다. 바이오-의학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는 도시다. 지역 내 리버풀 대학교를 포함해 대학교들이 꽤 있기 때문에 학생 인구도 갖춰진 편이며, 특히 고등-대학 교육이 잘 발달되어 있어 리버풀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도 많다. 그러나 1980년대 슬럼화를 다소 겪다보니 도시 규모에 비해 초, 중등 교육의 성취도는 고르지 못하고 도시 내에서도 지역별로 편차가 큰 편이다.

7.6. 방송/언론

지역지로는 Reach plc에서 발행하는 리버풀 에코(The Echo)가 있다. 특히 지역 축구단인 리버풀 FC에버튼 FC의 소식들에 공신력이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70] 리버풀 데일리 포스트라는 지역지도 있었으나 2013년 이후 폐간되었다. 사우스포트 앤 머지 리포터(Southport and Mersey Reporter), 포스트(The Post), 너브(Nerve) 등의 지역 온라인 언론 및 잡지사도 존재한다. 머지사이드의 중심 도시인 만큼 지역지 이외에도 다양한 전국구 언론 및 출판물들이 소비된다. 특히 더 가디언과 같은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언론의 소비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영국의 대표 황색언론The Sun(더 선)은 리버풀에서 금기시되며 거의 소비되지 않는다. 1989년 힐스버러 참사 당시 더 선이 참사의 원인은 리버풀 훌리건에게 있으며, 리버풀 FC 팬들이 시체를 뒤져 금품을 갈취했다는 내용 등의 왜곡 보도를 냈기 때문이다.[71] 뒤늦게 2004년에 와서야 더 선은 사설란을 통째로 빌려 정정 보도를 냈고, 2012년 영국 정부에 의해 당시 사고가 재조사되자 다시 한 번 정정 기사를 냈다. 그러나 사고 보도 이후 현재까지도 리버풀에서 더 선에 대한 반감은 매우 극심하며[72], 심심찮게 'DON'T BUY THE S*N'이라는 문구를 신문 판매점이나 가판대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 리버풀 FC는 구단 차원에서 더 선 관계자의 경기장 및 훈련장 출입과 경기장 내 더 선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당연히 리버풀 FC의 감독이나 선수들, 관계자 또한 더 선과의 인터뷰는 금기시된다.[73]

지역 방송사로는 리버풀 도시권과 그 주변 지역까지 서비스하는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 리버풀 TV가 있고, 잉글랜드 북서부와 맨섬 지역 방송사인 ITV 그라나다가 리버풀 지역에 서비스된다. 과거에는 드라마 브룩사이드와 그레인지 힐을 제작했던 TV 제작사 라임 픽처스(구 머지 TV)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국으로는 BBC 라디오 머지사이드, 히트 라디오 리버풀, 그레이트 히트 라디오, 캐피탈 리버풀, 인 디맨드 라디오, 리버풀 라이브 라디오, 멜로디 디스트리션 등이 있다. 또한 리버풀 시내에는 라디오 시티 타워라고 불리는 유명한 라디오 타워가 있는데 정식 명칭은 세인트 존스 비콘(St Johns Beacon)이며 1969년에 지어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개관된 리버풀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138미터 높이로, 2008년까지 리버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다. 현재에도 리버풀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74]

8.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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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은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문화유산이 많은 도시이다. 이에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런던에 비할 정도는 못되지만 런던 외 잉글랜드 주요 도시권들 중에서는 상당히 많은 볼거리가 있는 도시이다. 심지어 도시 규모로는 더 큰 버밍엄이나 맨체스터가 오히려 리버풀보다 관광 포인트는 더 떨어지는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과거 찬란했던 해양 도시였던 리버풀을 상징하는'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알버트 독은 19세기 리버풀이 대영제국의 수출기지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건설된 부두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공습을 맞아 파괴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에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복구되어 현재에는 다양한 문화 복합 시설이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된 곳이다. 부두 창고나 공장 등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현재 아파트, 레스토랑, 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대부분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조성되어 있어 인기가 좋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보트 투어도 즐길 수 있다. 기념품 상점에서는 리버풀이나 비틀즈 관련된 기념품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알버트 독 근처에서 대관람차를 타고 높은 곳에서 전경을 둘러볼 수도 있다.

알버트 독 바로 옆에는 '피어 헤드(Pier Head)'가 있는데, 리버풀이라는 도시의 가장 대표적인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영국 최초의 마천루이자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로얄 리버 빌딩이 이 곳에 있으며[75], 머지강이 바로 맞은편에 있어 선셋 타임에 가면 예쁜 노을과 노을에 반사되어 주황빛으로 물든 윤슬을 감상할 수 있다. 일몰 이후에는 건물에 라이트를 쏘아서 야경도 훌륭하다. 피어 헤드에는 그 유명한 비틀즈 동상이 있는데, 근처에서 비틀즈 노래로 버스킹을 자주 연다.

알버트 독과 피어 헤드 사이에는 '리버풀 박물관'과 '비틀즈 스토리'[76], '머지사이드 해양 박물관(Maritime Museum)'이 자리하고 있는데, 리버풀 박물관은 국립 박물관[77]으로 리버풀의 역사적인 유물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고, 산업혁명 시대의 리버풀이나 세계 대전 당시의 리버풀에 대해 관람할 수 있다. 비틀즈 스토리는 비틀즈의 모든 것을 전시해 놓은 비틀즈 박물관이다. 머지사이드 해양 박물관에서는 항구 도시로 발전한 리버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테이트 리버풀'이라는 아트 갤러리도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독특하고 모던한 작품들을 많이 전시해놓고 있으며 종종 살바도르 달리피카소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한다.[78] 테이트 리버풀 1층에는 알버트 독 전경을 맞대고 있는 카페들이 있어 인기가 많다.

시내로 들어가면 비틀즈의 초창기 행적을 따라 관광지들이 형성되어 있어 소위 '비틀즈 투어'가 가능하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매튜 스트리트(Mathew Street)'인데, 여기에 비틀즈가 최초로 공연을 했던 '캐번 클럽(Cavern Club)'이 있기 때문이다. 맥주 등의 주류를 판매하는 라이브 펍이며 현재에도 비틀즈의 곡들을 위주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매튜 스트리트에는 캐번 클럽 외에도 비틀즈를 컨셉으로 하는 다양한 올드펍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외에 비틀즈의 곡 제목이기도 한 '페니 레인(Penny Ln)', 존 레논의 생가가 있는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 등도 비틀즈 팬들에게는 관광 포인트이다. 참고로 관광 버스를 타고 단체로 비틀즈와 관련된 명소를 둘러보는 비틀즈 매지컬 투어라는 지역 관광 상품이 있는데, 비틀즈 투어를 즐기고 싶다면 고려해보면 좋다.

역이 있는 라임 스트리트 부근에는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과 '워커 아트 갤러리(Walker Art Gallery)'가 있다. 세인트 조지 홀은 2021년 도시재생 사업으로 지위가 박탈되기 이전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었던 건물로, 리버풀의 역사적인 공연 홀이다.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일부 행정 기관이 입주해 있다. 아름다운 신그리스 양식을 감상할 수 있는 건물이다. 워커 아트 갤러리[79]는 잉글랜드 내 런던 외 지역 중 가장 큰 미술관이다. 국립 미술관이며[80] 상술한 테이트 리버풀이 모던한 스타일이라면 워커 아트 갤러리는 고풍스러운 미술품들이 많다.

축구로 유명한 도시이기 때문에 축구 관광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전세계적 인기를 자랑하는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가 유명하다. 워낙에 아이코닉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경기장이기 때문에 경기가 있는 날에는 수 만명의 관람객들이 몰리는 곳이며, 직접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주위의 펍에서 경기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경기장 투어와 오프라인 스토어를 방문하기 위해 팬들이 자주 찾는다. 또한 안필드 지역에는 경기장 근처에 리버풀의 전설적인 인물들을 그려놓은 벽화 골목이 조성되어 있기에 리버풀 FC 팬들에게는 인기가 높다. 에버튼 FC의 홈구장 구디슨 파크도 안필드와 굉장히 가깝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둘러보는 경우가 많았으나, 2025년 여름부터는 부두 근처에 에버튼 스타디움이 신축 개장하며 두 구단의 홈 구장 거리는 멀어지게 되었다. 머지강변에 위치한 새로운 에버튼 스타디움의 전경도 꽤나 멋있다는 평가가 많다.

이외에는 성공회 리버풀교구의 주교좌인 '리버풀 대성당'과 가톨릭 성당인 '리버풀 메트로폴리탄 대성당'도 자주 언급되는 관광지이다. 특히 리버풀 대성당은 영국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유럽에서 5번째로 큰 성당으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외관은 아주 거대하고 투박한 느낌이 드는데 내부는 정교하고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당 꼭대기에 올라가 리버풀의 뷰를 감상할 수도 있다. 음악 공연이나 전시 이벤트도 자주 열리는 공간이다. 또한 대성당 내에 있는 카페에서는 리버풀의 대표 음식인 스카우스(Scouse)를 먹어볼 수 있다. 리버풀의 관현악단인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또한 유명하며, 붉은 벽돌 대학으로 유명한 리버풀 대학교나 리버풀 시내를 언덕에서 내려다보거나 루퍼트 왕자의 탑[81]을 둘러볼 수 있는 에버튼 공원도 있다.

8.1. 도시 경관

리버풀의 경관
파일:external/www.slatergordon.co.uk/liverpoo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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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리버풀 비틀즈 동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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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순서대로 라이버 버드로 유명한 로얄 리버 빌딩과 피어 헤드의 전경, 구 리버풀 항구, 리버풀의 번화가인 빅토리아 스트리트, 중심지 광장에 위치한 비틀즈의 동상, 리버풀을 연고지로 하는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

9.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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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의회의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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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3석
무소속
1석
재적
9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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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맨체스터, 셰필드 등과 함께 손꼽히는 노동당 텃밭 도시로, 유럽으로 넓혀봐도 진보 성향이 매우 강한 도시 중 하나다. 이 지역에서 보수당은 15%만 넘겨도 대단히 선전했다는 평을 듣는다.[82]

지역 의식에 의거한 투표보다는 세대 의식, 계급 의식에 의거한 투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영국에서 80% 이상의 몰표가 나오는 지역은 리버풀의 몇몇 선거구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를 입증하듯 노동당 텃밭인 레드 월이 붕괴한 2019년 총선에서도 영국에서 가장 노동당 몰표가 많이 나온 지역구 4개가 모두 리버풀에 몰려있었다.[83] 거기다가 이 정도 나오는 것도 녹색당, 자민당 등 다른 진보 정당이 표를 빼앗아가서 그렇지, 범진보로 따지면 리버풀 선거구의 득표 비율은 무려 90%를 넘기도 한다. 그나마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이 위치한 가스턴, 스피크, 헤일우드 지역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이 지역 역시 보수당의 득표율은 13.04%에 불과하다.

리버풀의 정치 성향은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서 노동 계급이 중심이 되는 도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권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된 지역이었던 것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에 노동운동이 도시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노동당이 강세를 보였으며 사회주의적 이념이 많이 유입되었다.[84]

게다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대처주의 정책에 의해 극심한 경제 불황을 겪었고, 무수히 많은 실업자가 발생하는 등 도시 자체가 크게 몰락하는 일이 발생했기에 대처와 보수당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잉글랜드 북부가 대부분 그렇지만 리버풀은 당시 영국 내 최고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 특히나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이고, 심지어 당시 대처 정부의 인사들은 "리버풀은 계획적으로 방치해야 한다(Managed Decline)"는 발언을 할 정도로 리버풀을 의도적으로 외면하여 엄청난 비토 감정을 초래했다.

또한 이 당시 리버풀 FC의 서포터들이 희생된 힐스버러 참사를 정부와 경찰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아 리버풀 출신의 서포터들이 책임을 떠안으며 2차 피해를 입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리버풀 지역 내 보수당에 대한 반감의 정도는 어마어마하다. 이에 리버풀 도시권은 잉글랜드 내에서도 독보적인 반 보수당 정서를 가지고 있다. 2013년 마가렛 대처가 사망하자 리버풀 시민들은 "마녀가 죽었다!"라며 파티를 벌였을 정도다.

때문에 대처 이후 가뜩이나 약하던 리버풀 내 보수당의 입지는 완전히 몰락한 상태다. 1980년대에는 리버풀을 중심으로 노동당의 극좌파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현재에도 블랙풀, 브라이튼, 런던과 함께 노동당의 연례 전당대회가 가장 자주 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나마 보수당 당선자가 드물게나마 나오는 맨체스터 등의 다른 잉글랜드 북부 도시들과 달리 리버풀에서는 가끔 자민당과 의석을 나눠먹는 적은 있을지언정 상술하였듯이 보수당 당선자가 나온 적은 극히 드물다. 다만 시의회에서는 2000년대 자민당이 득세하기도 했다. 이는 2000년대 토니 블레어 내각 시기 노동당이 중도층을 사로잡기 위해 우클릭 행보를 보이며 진보 언론인 더 가디언까지 자민당을 지지하던 시절이라, 상당수 리버풀 시민들이 토니 블레어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리버풀은 자유주의 좌파보단 좀 더 정통(?) 사회주의 좌파에 가까운 정치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2007년 고든 브라운이 총리가 되고 다시 노동당이 좌경화하고, 자민당이 보수당과 연정을 맺는 리버풀 시민들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하면서 현재는 다시 노동당이 시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영국 왕실에 대한 이미지도 꽤나 좋지 못한 지역이다. 상술했듯이 전통적으로 영국 왕실에 대한 반감이 있는 아일랜드 혈통들이 인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리버풀에서는 종종 “우리는 잉글랜드인이 아닌 스카우저(Scouser)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공식 행사나 스포츠 경기 등에서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King도 제창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85][86]

10. 매체

11.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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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매결연 지역우호 교류 지역

12.1. 자매결연 지역

12.2. 우호 교류 지역

13. 여담


[1] Liverpool Built-up Area[2] Liverpool City Region[3] 2001년 기준 영국 5위.[4] 전체 인구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은 단 1.4%에 불과하지만 오랜 기간 아일랜드 이주민이 건너온 지역이기에 사실상 아일랜드 혈통이 섞인 인구는 50%에 달한다.[5] 존 레논이 어릴 적 살았던 리버풀의 향수를 다룬 곡이다. 그 외에 Penny Lane도 리버풀 교외의 거리를 묘사한 곡이다.[6] 지도에서의 위치만 본다면 맨체스터가 서울, 리버풀은 인천과 비슷한 입지에 있다.[7] 머지사이드주의 리버풀, 할튼(Halton), 논슬리(Knowsley), 셰프턴(Sefton), 세인트 헬렌스(St Helens)와 체셔주의 위럴(Wirral) 자치구를 포함하는 도시권으로, 리버풀 도시권(Liverpool City Region)으로 불린다.[8] 1720년대에 철거되었다.[9] 아일랜드-맨체스터 간의 소규모 무역을 중개하기는 했다. 특히 흑사병이 창궐했던 이유도 무역 때문이었다.[10] 찰스 1세의 조카 루퍼트 왕자가 왕당파 군대를 이끌고 리버풀을 포위하여 약 5일간의 전투끝에 리버풀을 점령했다.[11]웨일스체셔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이다.[12] 전설적인 소설이자 영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레트 버틀러가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이 리버풀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13] 대표적인 인물로는 거대 무역 상인이던 윌리엄 래스본, 영국 최초의 노예 폐지론자 윌리엄 로스코, 세계 최초의 맹인 학교를 만든 에드워드 러쉬턴 등이 있다.[14] 당시 미국 남부의 면화 생산량이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다.[15] 이에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리버풀은 세계 최대의 친(親) 남부 미연합국 도시로 불리기도 했다. 면화를 수입하는 리버풀 상인들은 북부 미합중국에 의해 봉쇄된 항구로부터 남부의 면화를 몰래 수입해오는 것을 적극 지원했으며, 리버풀의 조선 산업은 남부 미연합국을 위해 선박을 건조했고, 리버풀은 군사 장비와 자금을 남부에 밀수하는 중심지였다.[16]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예로 들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갈 때, 런던에서 더 가까운 브리스톨이 아닌 리버풀로 가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은 예다.[17] 남극으로의 사냥 출정을 리버풀에서 많이 했다.[18]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피폭을 받아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었고 현재는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개발되어 관광명소가 되었다.[19] 이에 현재 리버풀 인구 중 절반 가량이 아일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이러한 이유에 의해 아일랜드에는 리버풀 FC의 팬들이 굉장히 많기도 하다.[20] 당시 서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21] 맨체스터 운하의 등장은 리버풀에게 크나큰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 뻔했고, 맨체스터 상인들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맨체스터 운하 건설은 당시 리버풀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큰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엔 맨체스터 운하가 건설되게 되었고,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엔 갈등이 불타올랐다. 이로서 양 도시 사이의 지역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22] 리버풀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 리버풀 FC와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축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내 최고의 라이벌로 꼽히는 것도 운하 때문에 생긴 지역감정에 기반한 점이 있다. 물론 지역감정뿐 아니라 잉글랜드 최고의 빅클럽인 두 팀이기에 라이벌 의식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23] 영국 내 전체 실업자가 350만 명에 이르렀다.[24] 대부분 아프리카와 인도 출신이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영국 본토 항공전의 중심에 있었던 공항이었고, 이후에는 한동안 잉글랜드 북서부 최대의 국제공항이기도 했다. 2001년에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을 기리기 위해 리버풀 존 레논 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26] 상술한 알버트 독이 공습에 의해 파괴된 대표적인 도시 시설이다.[27] 독일 공군은 당시 머지사이드 지역에 80회나 공습을 가했고, 그 결과 2,500명이 사망하고 리버풀 도시권 주택의 거의 절반이 피해를 입었다.[28] 이에 당시 진영은 달랐지만 전쟁 중 심각한 공습 피해를 겪은 아픔의 역사를 공유하는 독일의 쾰른과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29] 1960년대 도시 계획가 그레임 샹클랜드에 의해 대규모 도시 재건 사업이 진행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기획으로 역효과를 봤다. 이에 샹클랜드는 '리버풀의 도살자'라는 오명을 얻었다.[30] 영국과 미국의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 전통 팝 음악 등이 서로 결합하여 탄생한 장르다. 당시 미국과의 무역으로 다문화가 번성했던 리버풀 지역의 특성에 의해 발달했다.[31] 1889년부터 랭커셔주로 속해 있었다[32] 주로 중공업에 경제를 의존해온 도시들이 많다. 리버풀 뿐 아니라 이 시기 맨체스터를 비롯해 북동부 공업 도시들도 크게 쇠락했다.[33] 물론 리버풀 FC의 지역 라이벌인 에버튼 FC도 마찬가지로 리버풀 지역 주민들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대처를 싫어한다.[34] 이 당시 정부와 경찰들이 참사의 원인을 관중들에게 전가하고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10년대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다시 사건을 재수사하고 리버풀 희생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35] 당시 리버풀에서 유학한 유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머리를 자를 돈이 없어 바리깡을 구매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제법 볼 수 있었다고 한다.[36] 리버풀에서 태어나 자란 축구계 악동의 끝판왕 조이 바튼이 회고하기를, 슬럼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있어야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리버풀의 로컬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억세고 파워풀한 스타일을 가졌다. 리버풀 FC의 레전드 축구 선수스티븐 제라드 또한 조이 바튼과 똑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고, 역시 로컬 출신인 제이미 캐러거가 태어나고 자란 부틀 지역이나 웨인 루니가 태어나고 자란 리버풀 교외 크록세스 지역 역시 치안 상태가 그닥 좋진 않았다.[37] 1980년대 후반 과거 폭격을 맞아 망가진 알버트 독이 재개발 되며 성장 동력을 만들었다.[38] 리버풀 원 완공에만 9억 2천만 파운드가 투입되었고, 이후 주변 상업 시설 재개발에 수십억 파운드가 투자되었다.[39] 세계유산 지정이 실제로 박탈당하자 리버풀 일부 시민들이 반발하는 기류도 있긴 했다.[40] 과거의 악명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환골탈태 수준이다. 다만 외곽 지역인 스피크(Speke)나 크록세스(Croxteth), 안필드(Anfield) 지역은 지금도 치안이 조금 불안한 편이다.[41] v를 생략해 Leverpool 형태를 축약한 것이다.[42] 비슷한 위도의 도시로는 더블린, 코펜하겐, 함부르크 등이 있다.[43] 머지강 하구는 리버풀과 위럴 반도를 가로지른다.[44] 리버풀 FC의 AXA 트레이닝 센터가 여기에 있다.[45] 수원시(121 km²)와 비슷한 정도이다.[46] Liverpool Built-up Area라는 이름으로 교외권을 묶는다.[47] 1.0㎜ 이상[48] 개통 당시의 이름은 머지 터널이었다.[49] 후술할 리버풀의 전통 요리 스카우즈(Scouse)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50] 리버푸디언(Liverpudlian)이라고도 불린다.[51] 이는 YNWA로 알려진 지역 축구단 리버풀 FC의 응원 문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52] 기본적으로 빅클럽일 수록 좋든 나쁘든 많이 언급된다.[53] 현재는 폴 매카트니링고 스타만 생존해 있다. 존 레논1980년에 정신병자 마크 채프먼에게 살해당했고 조지 해리슨2001년에 암으로 타계했다.[54] 총 58회로 기네스 기록에 등재되기도 했다.[55] 다만 비틀즈 멤버들이 리버풀에서 바로 성공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독일 함부르크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유명세를 탔다.[56] 생존 멤버인 링고 스타와 폴 매카트니는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 이름 앞에 Sir이 붙는다.[57] 리버풀 FC의 응원가로 유명한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른 원곡 가수이다.[58] 더 라스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으로는 대표적으로 오아시스노엘 갤러거가 있다.[59] 1860년에 창설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대회로 매년 7월에 열린다. 국내에서는 보통 브리티쉬 오픈이라고 한다.[60] 윔블던처럼 잔디 코트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윔블던에 참가하기 전 사전 점검 형식으로 선수들이 많이 참가한다.[61] 일명 브리티쉬 베이스볼인데, 소프트볼과 혼합된 느낌의 경기다. 웨일스 지역에서 주로 즐겼기에 웨일스 베이스볼이라고도 한다.[62] 리버풀 외에는 웨일스의 카디프, 뉴포트에서 돌아가며 국제 경기를 개최한다.[63]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이름에 들어가는 그 인물이다. 존 무어스 대학교의 설립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64] 당대 에버튼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딕시 딘을 야구 경기에 끌어들이기도 했다고 한다.[65] 영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이 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4승 1패로 우승했고, 재밌게도 영국이 최초의 아마추어 야구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66] 그 이전에도 올림픽이라는 이름의 몇몇 아마추어 대회들이 있으나, 국제성과 완전한 아마추어 참가자격을 내세운 대회로는 최초였다.[67] Yellow Submarine 영화 내의 장면이다. 참고로 비틀즈 멤버들은 전원 아일랜드계이기 때문에 아일랜드 억양도 약간 섞여있다는 점을 감안할 것.[68] 리버풀 출신 축구 선수인 제이미 캐러거의 선수 시절 인터뷰를 들어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처음 들으면 독일어네덜란드어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며, 랩하는 것처럼 들리는 빠른 속도 때문에 더 알아먹기가 힘들다. 방송인이 된 지금은, 선수 시절에 비하면 그나마 낫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나마다.[69]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스코틀랜드 억양은 매력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실제로 알아듣는 건 꽤 힘들다. 당장에 스코틀랜드 출신인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의 인터뷰를 유심히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70] 현재에는 주요 기자들이 이직하며 축구 관련 공신력은 많이 떨어진 상태다. 제임스 피어스가 에코의 리버풀 전담 기자였다.[71] 힐스보로 참사는 경찰의 무능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기에 말도 안되는 날조에 가까운 내용이었고, 이러한 악의적인 보도에 의해 많은 리버풀 팬들이 피해를 겪은 것은 물론 피해자들과 유가족들도 2차 피해를 겪었다.[72] 2008년 BBC가 촬영한 다큐멘터리에서는 리버풀 시민들이 얼마다 더 선을 증오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리버풀 시내에서 더 선을 무료로 배부하는 실험을 해 본 적 있는데, 대부분은 무료로도 신문을 받기를 거부했고, 일부는 받은 다음 눈앞에서 태우거나 찢어버렸다.[73] 만약 더 선과 인터뷰를 나눌 경우 팬들의 극심한 질타를 받게된다. 실제로 과거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수네스는 심장 수술을 받은 이후 병실에서 더 선의 사진 요청에 응했다가 리버풀 팬들의 격노를 샀다.[74] 꼭대기에 10m(33피트) 길이의 안테나가 있는데, 안테나를 포함하면 리버풀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75] 홈페이지에서 투어를 신청하면 빌딩에 올라가 뷰를 감상할 수 있다.[76] 관람기 1, 2.[77] 국립 박물관이라 무료 입장이다.[78] 역시 무료 입장이다.[79] 리버풀의 시장이었던 Andrew Barclay Walker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미술관이라 그의 성을 따서 Walker Art Gallery가 되었다.[80] 무료 입장이다.[81] 에버튼 FC의 로고에 있는 바로 그 탑이다.[82] 이 때문에 1:1로 들어맞는 건 아니긴 하지만 광역권 인구도 200만 정도이고 지역드립을 당하는 것 등 한국에서는 광주광역시와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 지역민들을 탄압한 특정 정치인을 증오한다는 공통점도 있다.(리버풀: 마거릿 대처, 광주: 전두환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링크, 링크 2. 심지어 리버풀 FC광주 FC의 로고가 서로 비슷하고, 유니폼이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조합으로 바뀌었을 때 광주 FC의 유니폼과 흡사해져서 관련 만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일대일로 들어맞는 게 아니다보니 후술하듯이 부산광역시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83] 리버풀 월튼(84.68%), 논슬리(80.77%), 부틀(79.44%), 리버풀 리버사이드(77.99%)[84] 지역 축구단 리버풀 FC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도 사회주의자로 유명한 인사였다. 또한 비틀즈의 멤버들도 리버풀 출신답게 상당히 좌파적인 성향을 보인 바 있다.[85] 특히 잉글랜드의 주요 축구 대회 결승전에선 경기 시작 전 국가 제창의 순서가 있는데, 리버풀 FC에버튼 FC이 결승에 진출할 경우 서포터들이 국가 대신 일제히 야유를 퍼붓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86] 리버풀 지역 출신의 운동 선수들은 심지어 국가대표에 차출되었음에도 경기 전 국가 제창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87] 현재의 퀸즈웨이 터널이다.[88] 1889년에 최초의 축구 골대를 만든 인물이기 하다.[89] 그러나 커리어의 대부분을 라이벌 도시의 구단에서 보냈다.[90] 세계 기록만 세 차례 경신했으며, 투르 드 프랑스에서 세 번의 스테이지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사이클 선수다.[91] 부산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인기가 대단하고, 광주에서도 KIA 타이거즈의 인기가 대단하다.[92] Robert Banks Jenkinson, 2nd Earl of Liverpool,(1770-1828). 수상 재임 기간은 1812년-1827년, 재임 기간 중에 노동 운동을 강경 진압한 사건인 피털루 학살 사건으로 유명하다.[93] 현재의 퀸즈웨이 터널이다.[94] 1902년 리버풀 대학교의 로널드 로스 교수가 여기에서 영국 최초의 노벨상을 받았다.[95] 면화 관련 선물 상품이었다.[96] 이 건물이 고층 빌딩의 원형이다.[97] 지식인들의 소셜 클럽이다.[98] 실제로 수도인 런던보다 부유했다.[99] 리버풀은 상술하였듯 축구 팬덤이 강력하고, 부산은 롯데 자이언츠를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