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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9:43:03

이상은(가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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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 이전2. 데뷔3. 아이돌 시대4. 뉴욕 유학5. 아티스트로의 길6. 리채 (Lee-Tzsche, リーチェ)7. 30대8. 40대9. 50대

1. 데뷔 이전

1970년 3월 12일생.[1] 당시 정말 흔치 않은 무남독녀 외동딸인 이상은은 건축가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예술 쪽 재능이 뛰어났다고.[2] 미술, 만화, 문예, 연극[3]은 물론 학교 행사 때마다 앞에 나가 춤추며 노래하는 끼 많은 아이였고, 공부 또한 잘하는 그야말로 엄친딸. 이미 창덕여자고등학교 시절 학교명물로 하이틴 잡지에도 소개되고 (고1 때 아래 빨강 털실가발 사진), 고2 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매스게임에 참가했는데, 당시 연습 대기 시간에 학교별 장기자랑이 있었을 때에도 잠실야구장을 들었다놨다 한 걸로 유명했고, 고3 때는 학교규정상 3학년생의 방송출연은 안 된다는 룰마저 깨버리고 MBC TV <젊음은 가득히>라는 청소년 프로에도 출연해 'Eurythmics - Sweet Dreams'를 불렀을 정도로 나름 인기도 많고 유명했었단다. 선생님들도 이뻐하는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은의 고교 동창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증언1, 증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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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여자고등학교 시절 이상은. 장기자랑 때 신디 로퍼, 마돈나 흉내를 많이 냈었다고 한다. 추가로 고3 때 박선주와 함께 잡지에 실렸던 희귀 사진(...) + 고교 졸업앨범 사진.

원래 부모님도 본인도 미대에 가기를 원했고, 서울대 미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화실도 다니던 고3 시절, 갑자기 화실비를 못 낼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4] 진로 고민을 하게 된다. 화실도 아버지 친구분이 원장이라 계속 다니려면 다닐 수는 있었지만, 화실비가 몇 달치가 계속 밀리니 왠지 부담스러워서 다닐 수가 없었다고. (훗날 인터뷰를 보면 입시미술이 갑갑하고 그림이 싫어질 정도로 질려버린 게 더 큰 이유였던 듯.) 결국 예체능계 중에 실기를 많이 안 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 입학원서 쓰기 1달 전, 과감히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로 바꾸어 지원하게 되는데, 부모님 반대가 심했지만[5], 어차피 노래, 연극 등 무대에 대한 꿈도 있었기에 강하게 밀어 붙였다고 한다.그래도 아버지가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그나마 동문이라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당시에 한양대 연영과는 다른 학교와 달리 실기 비중이 낮고 성적 위주로 선발하기로 유명하다. 특이하게도 2006년 이전까지는 연영과의 위상은 예체능이 아닌 인문과학대학 소속으로 타 대학보다 아카데믹한 분위기였고, 한양대학교답게 정말 공부를 잘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한양대 연영과는 전통적으로 유난히 연출 쪽에 특화된 곳이라 의외로 연예인들 자체가 많이 없었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로 타 대학에 비해 대중들에게 인지도 면에서는 상당히 피해를 보는 경향이 있다.

요즘은 실기로도 선발하고 연예인 전형도 있다지만, 당시에는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대학입시 성적이 나쁘면 당연히 쳐다도 못 보는 곳이었다.[6] 더욱이 이상은은 선지원 후시험이었던 학력고사 세대이고 4년제 연영과도 전국에 딱 5군데[7] 있던 시절, 입결성적도 제일 높았던 한대... 공부를 정말 잘하긴 한 모양.[8] 이상은이 대학입시 과정을 직접 쓴 글.

어쨌건 부모님은 귀한 외동딸이 고상하게 미술가로 진학하길 바랐지만, 뜬금없이 딴따라 가수가 되는 걸 보고 한동안 어이없어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의 보수적인 어른들은 물론이고 나름대로 진보적인 어른들도 다 그랬듯이 자녀들에게 가수를 하고 싶다고 하면 딴따라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매를 때리면서 반대하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대다. 양장점을 하셨던 어머니[9]가 빛이 쏟아지는 쇼윈도우를 들여다보다 귀를 후비는데 하얀 진주알이 나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는데, 뭔가 가수와도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귀에서 진주라니!

2. 데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1학년생 이상은은 1988년 8월 6일 춘천 남이섬에서 열린 <제 9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같은 과 선배가 만들어 준 '담다디'[10]란 노래로 대상을 차지해 그야말로 혜성처럼 가요계에 등장하였다.

강변가요제 '담다디' 본선 경연 모습

당시는 댄스가수들을 평가절하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발라드의 시대였기 때문에, 이상은은 당연히 세련된 발라드곡을 들고 나온 이상우가 대상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자신도 대상을 탄 것이 믿기지 않았던지 당시 MC였던 이수만 SM의 그분이 "TV를 보고 (생각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시죠"라는 질문에 (당연히 부모님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한 듯) "마이클 잭슨"이라고 말해버려(...) 전국민을 충격으로 몰아갔다.[11]


강변가요제 시상식 영상
(중학교 때 마이클 잭슨이 스릴러(Thriller) 앨범으로 그래미상 휩쓰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게 보여서, 그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이제 가수가 되면 마이클 잭슨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정도로 순진했었다고. Bad 커버영상)

홍석천이 강변가요제 이상은의 모습을 보고 반해서 한양대 연영과로 들어갔다고 한다. 관련기사 강변가요제 직후 바로 한양대 연영과 직속선배였던 박미선의 개그프로에 불려나가 갈굼(?)을 당하기도...당시 영상. 물론 실제로는 친했음.(#사진)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더 유명한 전수경은 강변가요제 예선 때 담다디 피아노 반주를 해줬었는데, 과후배 이상은이 대상을 탄 것에 자극받아 그해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동상을 수상했다. 관련기사 이상은의 성공은 다른 가수 및 가수 지망생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발라드의 홍수 속에서 눈과 귀를 사로잡은 담다디의 성공은 그 해 강변가요제 예선에서 탈락한 한 서강대 학생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았고, 이를 벤치마킹하여 강렬한 전주로 심사위원들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발상으로 새로운 곡을 썼다. 그렇게 태어난 곡은 그 해 말 MBC 대학가요제에서 담다디만큼 세상을 흔들어 놓았고, 이후 그 가수 역시 이상은과 같은 대한민국 음악사의 레전드 반열로 올라섰다.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 후크송 못지 않은 중독성 있는 가사와 흥겨운 리듬에 독특한 춤사위, 개구쟁이 같은 귀여운 컨셉으로 1988년에는 담다디 열풍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당시 전국민이 흥얼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관념적인 노랫말과 단조의 멜로디가 주류를 이루던 80년대에 아무런 뜻도 없는 '담다디'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고, 곡의 신나는 분위기는 당시 서울 올림픽 축제의 열기를 한층 고조시키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졌다.

담다디춤을 잘 볼 수 있는 영상. 담다디 활동 초기에 주로 보여줬던 춤이다. 담다디 부를 때는 깨방정 떨어줘야 제맛! 이덕화김청이 선장과 선원으로 분해서 식인종으로 분한 이상은한테 능욕당하는 모습도 충격이다. 아저씨 맛있게 생겼다!! 아티스트 이상은을 먼저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과거 모습들이 조금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전국의 각종 장기자랑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던 담다디와 그 춤. 어깨와 다리를 이용한 쉬운 동작으로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모두가 들썩였던 춤이다. 손목에 운동화 끈이나 손수건을 감고 나오는 등 이상은의 독특한 스타일링 또한 화젯거리였다.

도무지 무대에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탬버린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즐기듯 노래하는 중성적 매력의 꺽다리 여대생. 보는 이들의 눈길을 단번에 휘어잡은 이상은은 온갖 매체들의 전면을 도배하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폭발력으로 그해 각종 시상식 수상은 물론, 이 인기에 힘입어 '담다디'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연기까지 했지만... 팬이라도 절대로 보지 말 것을 권한다. 연영과 출신이라 캐스팅한 거 같은데, 상술했듯 실기 없이 성적으로 들어갔고 기본도 안 배운 1학년이었다. 전체적으로 영화내용도 부실하고 노래 한곡으로 급조한 티가 남. 이상은이 워낙 바빠 3일만에 촬영 다 끝냈다는 얘기도 들렸다. 심지어 이상은 본인 목소리도 아니고 더빙된 다른 목소리였다. 담다디 영화 편집영상

88년 강변가요제 대상에 이어서 연말에 상복이 터졌는데, 시상식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의상 역시 대단했다. 88년 KBS 가요톱10 연말 결산에서는 롱코트를 입고 선머슴 같은 간지를 뽑냈는데88년 가요톱텐 연말 결산 영상, 이와는 대조적으로 88년 MBC 연말 가요대제전에서는 드레스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88년 가요대제전 영상) 그리고 8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는 빨간 떡볶이코트를 입고 나왔다. 8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 이 3개 무대만 봐도 알 수 있듯 때론 남자같이, 여자같이, 아이같이 정말 무대연출이 변화무쌍 다양하게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1988년 보리텐 광고. - 이 광고에는 1988년의 이상은이 대중에게 보여주었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라보콘 항목의 CF에서도 이상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상은은 '진짜 물건'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수들의 전형적인 틀을 깨버린,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갑툭튀한 이제껏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캐릭터였고, 발빠른 어른들이 그걸 보고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딱 봐도 끼가 넘치는 시원 털털 유쾌 발랄한 이미지에, 어린 나이 답지않게 재치 있는 말솜씨와 똑똑한 대학생 이미지까지. 그렇게 이상은은 데뷔 하자마자 라디오 DJ[12]를 시작으로 쇼프로 MC, CF, 예능, 연기 등 여기저기 엄청 불려다니면서 소비되기 시작한다.[13]

일반적으로 가요제 출신 가수들이 정규 앨범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려왔던 것에 비해 이상은은 데뷔 앨범도 내기 전에 담다디 한 곡만으로 이미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14] 그 이상은의 '담다디 열풍'에 대해 당시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칼럼도 있었다. '담다디족(族)'에 관한 짧은 명상
강변가요제 사회를 맡았던 가수 이수만은 10년에 한번꼴로 등장할 비디오형 가수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사위원 및 가요계 인사들도 88년 가요계를 주도할 새 세대의 기수로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 1988년 8월 9일, 경향신문
"이른바 들국화김현식, 그리고 조용필이선희가 지배하던 80년대의 지형도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곡일 수도 있었다는 거죠. 새로운 어떤 감수성을 지닌 10대 엔터테이너의 등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역설적이게도 이상은은 강변가요제 방송 직후 쏟아진 폭발적인 인기 때문에 당시 기형적인 음반시장에서 가장 피해를 본 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강변가요제 정품 음반이 2주일이 지나서야 출시되었는데, 그전에 강변가요제 실황은 테이프로 불법 복제되어 그 다음날부터 리어카에서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당시 판매 열풍을 기억하는 한 음반 리어카 판매상은 “모르긴 몰라도 100만 장은 나갔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미 길보드(불법 복제시장)에서 수요가 완전 소화됐기 때문인지 정품의 판매량은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길보드에 망한 '담다디' (임진모 글) 참고로 담다디는 이상은의 정규 앨범에는 실려 있지 않다.

그리고 1988년에 가장 센세이셔널 하고 신드롬급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했듯이 당시에는 댄스곡보다 트로트나 발라드 가수들을 더 높이 쳐주고 여전히 보수적인 잣대가 존재하던 시절이었기에 조금은 저평가 당한 면도 없진 않았다. 실제로 가장 권위가 있었던 MBC 연말 시상식에서 드물게 신인상에다 10대 가수상까지 타고,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도 수상했던 거에 반해, KBS에서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88년 가요계 결산 때 최고의 신데렐라라며 이런 방송까지 내보내고, 심지어 당시 유일한 가요 순위 프로였던 KBS 가요톱텐에서 담다디가 4주 1위까지 했었는데도, 그해 1위곡이 없었던 이지연(본명 이진영)에게 신인상을 안겼던 것이다. 여러 신문 등 언론에서도 이상은을 가장 강력한 신인상 후보로 꼽았기에 이를 두고 뒷말이 많았고, 타 방송사 가요제 출신이라 견제당했다는 말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보기엔 이전에 이선희는 신인상을 받았었다. 훗날 인터뷰들을 보면 아이돌 활동 당시 방송사와 PD들의 갑질로 인한 상처도 많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자신이 부른 노래가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각종의 뒷거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몹시 서글프고 노래를 부르는 의미마저 상실한 기분이었다고. 시스템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고 어떤 PD는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길래 거부하고 인사도 안 하고 다녔더니 활동내내 괴롭혔다고 한다. 이후의 이상은이 점점 인기나 순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초연했던 데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던 것이다.

데뷔 4개월차 때인 1988년 12월 신문 인터뷰를 보면 벌써 연예계의 문제점을 다 파악하고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악잡지를 통해 당시 가요계를 회상하는 2017년 10월 기사를 봐도 이상은은 데뷔 때부터 이미 떠나고 싶다는 그 속내를 조금씩 비춰왔었다. 후에 한 인터뷰에서 이상은은 아이돌 시절에 대해 계약 때문에 '참는 기간'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15]

88년 연말에 아침 생방송 프로 출연영상을 보면 무대위 모습과는 180도 다른 차분한 모습을 보인다.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자기자신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른다고. 약물을 먹고 무대 오르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 진행자 수준(...).

3. 아이돌 시대

"처음 한 6개월은 정말 재밌었어. 그러다 문제가 어디서 발생했느냐면, 나는 그때 방송국에 우리 과 애들을 데리고 다녔다고. 매니저 아저씨들 너무 무서워, 계약하기 싫어, 집에서 전화 받고 스케줄 잡고 그랬어. 6개월쯤 지나니까 애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나는 어설프게 프로의 세계로 들어가야 했던 거지. 온통 뜯어먹으려고 덤비는 사람들. 아이돌 시스템은 상업적 이유로 구획된 인물들만 의도적으로 포진되어 있잖아. 사방이 그렇게 변해버리는 순간, 내 영감의 근원이랄까, 그런게 다 없어져버렸어." --- 이상은
" 가인(歌人)이고 싶었다. 가수라는 말은 기능적인 면만 드러내는 것 같아 왠지 싫었다. 더욱이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같은 나의 모습은 마치 혼이 빠진 허수아비처럼 느껴진다. ...사실 당황했다. 마치 큰 파도에 떠밀려 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담다디 담'이었다. 진지한 노래를 피 토하며 부르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갑자기 어릿광대가 돼버린 느낌이었고, 그런 괴리감은 나를 절망까지 몰고 갔었다. '보여지는 나', '보여주는 나', '보여주고 싶은 나'가 저마다 다른 얼굴에, 다른 곳을 가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 활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누가 뭐래도 가인(歌人)이고 싶다." --- 이상은
당시 이상은의 사무실(연습실) 이름도 '가인방'이었다.

1989년 1집을 발표할 무렵, 한 신문사의 스타스토리 코너에 직접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내용] 그녀의 성장 과정과 어떠한 사람인지를 대략 엿볼 수 있다.

1989년 1월에 강인원[17]이 프로듀싱한 1집을 발표하는데, 타이틀 곡은 의외로 느린 발라드 곡인 '사랑해 사랑해', 'Happy Birthday'를 선보였다. 하지만 담다디 같은 곡을 기대했던 대중들에게 발라드를 부르는 이상은은 낯설었고, 그래서인지 1집은 담다디의 폭발적인 인기에 비해 다소 실망스런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1집 활동 기간에 주연 영화 2편이 개봉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가수 활동은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1집 활동 당시 매니저와의 갈등과 학업 때문에 TV 방송 활동을 자제한 탓도 있다. 1집 때 활동 영상도 찾아보기 힘들다. 1집 '사랑해 사랑해' 영상 - 이 곡은 현재까지 라디오에서도 많이 나오는 명곡이다. 당시 팬들의 환호성으로 보았을 때 10대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훤칠한 키에 웬만한 남자가수보다 더 멋져보이는 미소년 같은 모습.

모르는 사람들이 사진만 봐선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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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걸 크러시라고도 불린다.[18] 풋풋함과 함께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영상 1집 'Happy Birthday To You'

당시의 이상은 굿즈들. 그때나 지금이나 애들 코묻은 돈 털어가는 건 똑같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갓 데뷔한 신인으로는 드물게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1집 첫 콘서트 날짜가 바로 이상은의 열아홉 번째 생일(1989. 3. 12.)이었다. 참고로 2집 콘서트는 1990년 3월 1일(2회)이었는데, 장소는 똑같이 63빌딩 국제회의장. 단독 콘서트를 통해 외적인 이미지보다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고자 했고,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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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제 출신이면서도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가수는 드물었는데 바로 이상은이 그런 케이스. 바꿔 말하면 태생 자체가 가요제 대상 출신의 이미 검증된 아티스트였던 건데, 10대 나이에다가 실력보다는 비주얼, 스타성이 더 부각되면서 대중은 물론 소속사나 음악 관계자들에게조차 아이돌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움짤들 입덕을 부르는 매력 포인트.

데뷔 당시 만 18세로 나이도 어렸고[19],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드문 톰보이스타일로 마치 순정만화의 보이시한 남장 여주인공 이미지[20]를 현실로 옮겨 온 듯한 판타지와 유쾌함에, 남자들이 아닌 소녀팬들의 열광적 추종을 이끌어냈던 한국가요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여자 아이돌 중 한명이었다. 1980년대는 세계적으로 유니섹스 코드가 유행을 했었는데, 실제로 이상은도 담다디 때의 보이시한 모습들은 단순히 당시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를 좋아하고 멋있게 보여서 그걸 따라했던 거라고 밝힌 바 있다. 학창시절부터 장기자랑할 때 팝스타들을 곧잘 흉내내곤 했는데 이상은의 자유분방한 무대 스타일 또한 그런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은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이선희바지삼총사로 불리며 바지를 고집하는 여성가수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은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외형적인 스타일뿐 아니라 자연스레 나오는 말투나 행동까지도 보이시해서 진짜 남자인지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에서 기존 여가수들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데뷔 때의 선머슴 같은 모습이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어버려서 그렇지 정작 이상은은 바지만 고집한다거나 보이시함을 고수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취향 자체는 지극히 소녀 감성에 가까웠는데 그게 겉모습에 의해 가려졌던 것이다.

머리가 짧았던 이유도 짜증이 나면 머리카락에 화풀이하는 습성 때문에 그냥 머리카락이 남아나질 않았던 거고(...), 당시에는 키 크고 마른 몸이 콤플렉스여서 헐렁하게 여러 겹 껴입고 다니고 치마를 입으면 마치 허수아비에 옷 걸쳐 놓은 것처럼 볼품이 없어서 바지를 더 자주 입는 것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인은 일부러 연출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웠던거고 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던 건데 나중에는 치마를 입고 싶어도 치마를 입고 나가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게 부담스러워 더 못 입었다고 했다. 게다가 머리를 기르려다 팬들 성화에 못이겨 다시 짧게 자른 일까지 있었다(...). 한마디로 이상은은 의도치 않게 스타 시스템에 의해 대중들에게 보이시함으로 소비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80년대 대표 두 여자 아이돌의 콜라보 무대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이상은의 보이시함은 요즘 아이돌처럼 컨셉을 정해서 나온 것이 아닌 데뷔 이전 학창시절 때부터 이어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신이 보이시한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이상은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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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같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사람들이 봐주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그것은 어떻게 말하면 내 보호막이었고, 여자들이 하기 곤란한 부분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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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젊은 시절 이종원과 같이 찍은 사진, 아래는 박상원과 찍은 사진인데 정말 잘 어울린다. 사진은 남자사람과의 케미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대략 저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보이시 스타일이지만 남자사람이랑 붙여(...)놓으면 의외로 케미가 좋아 팬들을 긴장시키는 소소한 루머들도 많았다. (아주 가끔씩 치마(!)도 입고 나타나고, 꾸미기에 따라 여성스럽고 차분한 모습도 많이 보였기에 더욱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좋았음.) 대표적으로 아래 젊음의 행진 남자 MC였던 이정현는 팬들의 감시(?) 대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젊음의 행진 PD가 이상은을 MC로 쓰고 싶은데 이상은이 워낙 장신이라 어울리는 남자 MC가 없어 고민하던 중, 단지 이상은과 키가 맞다는 이유로 신인 가수였던 이정현을 MC로 낙점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정현은 호주 교포 출신으로 한국말이 조금 서툴렀기에 초반에는 이상은이 주도적으로 진행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둘이 호흡도 잘 맞고 다른 방송에서도 여러번 커플로 묶여 나오는 바람에 사귄다는 소문까지 났었는데, 그런 소문을 의식해서인지 나중에는 티격태격 서로 갈구는 장면을 자주 연출하기도 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농구선수인 사촌 오빠가 이상은의 콘서트에 꽃다발 들고 찾아왔다가 그게 열애설로까지 번지며 극성팬들이 난리치는 해프닝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사촌이라고 해명하면서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튼 남자만 만나기만 하더라도 난리가 났었다.

젊음의 행진 MC 영상 1, 영상 2, 클로징

1989년 당시 인기 쇼 프로그램이었던 KBS '젊음의 행진' MC 시절. 발랄한 이상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상업성에 내몰렸던 이 시기의 이상은은 성대결절[21]로 목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활동을 계속 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고. 화면을 보다 보면 목이 많이 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상태로 2집 활동을 계속했으니 아마 속으론 이를 갈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인터뷰 영상에서도 목이 아프다는 말을 한다.

이 라이브 영상들을 보면 카메라를 보고 밝게 웃으며 노래하고는 있지만, 당시 목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22]
"담다디로 뜨고 나서 아저씨들이 이상한 곡을 채집해 오면, 나는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목이 쉬었는데 노래를 부르게 해서 그것을 팔아먹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때 당시 하도 울어서 베개가 누런색이었다."
"내가 만든 곡을 음반에 넣고 싶다는 주장을 계속 했지만 무시당했다. 너무 어리고, 남이 시키는 노래를 해야 하는 내 처지가 슬펐다."
"레코딩을 하고 있는 중에도 출연과 공연의 스케줄이 있었다. 지금처럼 레코딩에 들어가면 다른 스케줄을 전혀 잡지 않는 현실은 생각도 못했다. 지방 공연을 다녀와서 목이 쉰 상태로 녹음실에 들어갔어야 했을 정도다. 녹음실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약속이 돼 있으니 그 안에 무조건 녹음을 끝냈어야 했다.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표절이고. 뭐 그런 식으로 누군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시스템이 문제였다. 밖에서 보기엔 인기도 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 명의 ‘가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어두웠다."
"...목소리가 거의 안 나왔지. 근데 나는, 2집이 그런 식으로 내게 상처를 줬기 때문에, 다음이 가능해진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 녹음하다가 너무 화가 나서 다시는 이렇게 못하겠다, 이건 치욕이다, 다 정리하게 만들었으니까." --- 이상은

성대결절 상태에서의 무리한 레코딩으로 2집 앨범과 캐럴 음반, 후에 동요 앨범까지 이상은의 상당히 허스키하고 거친 쇳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개중에는 이 때 당시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본인에게는 상처였고, 그 때문인지 '아오아오아'와 '그대 떠난 후' 활동 시에는 새롭게 편곡, 녹음한 방송용 버전이 따로 있었다. 목을 충분히 쉬어줘야하는데 가수 활동 외에도 MC, DJ 등 목을 계속 혹사시켰으니... (나중에 유학가서 만든 3집 앨범에서는 어느 정도 회복된 목소리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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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1989년에는 MBC 추석특집 가족드라마에 최수종이랑 남매로 출연하기도 하고(자료), 이규형(영화 감독)이 직접 스포츠서울에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굿모닝 대통령>[23]허준호와 함께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굿모닝 대통령' 편집 영상

이 영화는 1989년 1월에 시행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에 발맞춰 배낭여행을 소재로 태국 및 유럽 여러나라 올 로케이션으로 찍었는데, 사전 허락도 없이 즉석으로 일을 진행하는 바람에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아 촬영 포기나 변경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고, 이상은은 유럽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데 이걸 보는 백인 현지인 및 다른 관광객들이 멍때리는 얼굴을 보면 처량하다. 이 영화는 서울관객 58,117명[24]으로 기대 이하 흥행을 거뒀고 평에서도 악평만 당했다. 당시 영화 잡지 로드쇼에 나온 한 평론가 평 -- 태국 가서 보트피플 약탈하는 해적과 싸우다가 죽은 친구를 위하여 애국가 불러준다? 그리고 담다디 이상은의 유럽 길거리 춤, 뭐하러 넣은 거냐?... 그나마 영화 주제곡(오, 장, 박- 내일이 찾아오면)[25]이 인기를 끌었고, 리즈시절 이상은을 볼 수 있다는 거 외엔 그다지 의미 없는 영화.(굿모닝 대통령 예고편[26])

배우들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연기력이지만 그래도 연영과 출신인지라, 어느 쇼 프로에서는 1인 3역 연기(...)까지 한 적이 있다. 젊음의 행진 MC 때는 연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마리아 분장하고 뮤지컬 연기도 했었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때로는 반항아 같은 연기도.

얼굴 표정 또한 변화무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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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활동을 하며 바쁜 와중에도 학업은 놓지 않았었다. 당시 활동 모습들을 봐도 무대의상조차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학생티 풀풀 나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고, 수업은 많이 빼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학생의 본분은 잊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나는 가수이기 이전에 학생이다. '이젠 옛날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거다'라고 겁주는 어른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내게 '이리 나와'라고 말한다면 옳지 못한 사람이다.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요즘 흔히 듣는 말처럼 '사람답게 살며' 음악을 하고 싶다. '반짝'하고 사라지는 이상은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는 진짜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팬들에게도 항상 '학생은 공부가 우선'이라며, '쫓아다니지 말고 공부해라'며 잔소리를 했다는 증언들이 많다.[27] 이러한 면들은 팬들에게 더 호감을 얻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무대 위에선 정신없이 뛰어다니지만, 무대 외의 이상은은 보기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지적으로 어필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를테면 퀴즈 프로그램에 나와 상품을 싹쓸이 해 간다든지, 저명 인사와의 요런 만남이라든지, 팬이었던 기자의 경험담까지(...). 유학을 떠날 무렵, 한 잡지 기사에서 한창 공부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수업까지 빼먹고 자신을 쫓아다니는 어린 팬들을 보며 '나는 혹시 사회악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아이돌 가수로서 얼마나 회의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발라드를 내세웠던 1집의 부진 때문이었는지 1989년 12월에 발매한 2집에서는 빠른 템포의 '사랑할거야'를 타이틀곡으로 하여 가요톱텐 1위 후보(2위)까지 오르며 인기를 얻었지만, 1993년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일본 록가수인 쿠와타 케이스케의 솔로 앨범 수록곡 悲しい気持ち(JUST A MAN IN LOVE)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흑역사가 되고 만다. 사실 도입부나 곡의 코드 진행이 거의 같기 때문에 누구든 들어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이지만, 당시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은 상태라서 발견 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듯.[28] 어찌됐든 이상은 본인의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단 별도의 작곡자 명의(최봉 작사, 원경[29] 작곡)로 되어 있기도 하고, 신해철이 잠시 거쳐가기도 했던 그룹 '아기천사'가 부른 '사랑할거야'의 리메이크 곡이라고 한다. 워낙 마이너한 그룹이라 대신 이 곡을 불러서 히트한 이상은이 덤터기를 쓴 꼴이 됐다. 이런 경험이 자신의 아이돌 활동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최근에 '사랑할거야' 고화질 영상이 올라왔다! 본인은 암울한 시절이었다고 얘기하지만, 당시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그 특유의 생글거림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듯.

당시 인기 유아 프로였던 '뽀뽀뽀'에 출연한 상은송아지. 쇼프로에서 트로트 부르는 영상(...), 팝송(뮤지컬 연기?)도 부르고 가곡까지 부르는 그야말로 전천후 아이돌.

일밤 예능출연 방송, 김흥국과 콜라보 무대 친근하고 유쾌한 대중적 이미지 때문인지 당시 저런 코믹한 무대 연출도 많았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유딩, 초딩을 비롯한 남녀노소 누구나 알아보는 그야말로 전국민에게도 친근한 스타였다. 한 에피소드로 이상은이 지방 공연 갔다가 '여기서는 못 알아보겠지' 하며 시골 마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밭 매던 할머니들이 '담다디 아니여?'하고 알아 보시더라는. 그때 이상은은 그런 상황이 기쁘다기보다는 일종의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자고 있는데 아파트 2층 베란다로 군인이 넘어 들어와 너무 무서워서 높은 19층으로 이사를 가야했으며, 집 앞엔 항상 팬들이 진을 치고 있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좋아하는 떡볶이도 자유롭게 못 사먹어서 슬펐다고.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유명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주로 여행은 좀 더 자유로운 외국으로...

아이돌로 인기를 얻었던 1989년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캐롤 음반을 내기도 하고, 1990년에는 동요(...) 음반도 나왔었다. 하지만 이상은은 음반 기획사의 '상품'에 지나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2집 앨범에 수록된 첫 자작곡이기도 했던 다소 유치한 느낌의 '아오아오아'에서는 스타 시스템에 의해 조종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노래하기도 했다. 페이크 타이틀처럼 2집 발매 전 잠시 활동했었던 곡으로 신나는 분위기지만 속뜻을 알고나면 마냥 즐겁게 들리지만은 않는 곡이다. 그 가사를 보면 '빨간 꽃 단 저 아가씨 숲에 숨어 또 우네. 달빛 아래 저 아가씨 몰래몰래 또 우네. 사람들은 모두 불가에 마주앉아 떠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어릴 적 꿈꿔오던 가수 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 많았다. 나 스스로가 음악보다는 형식적이고 꾸며지는 것에 길들여지다 보니 슬플 때도 많았다."
"당시 그런 시스템 문제만이 아니라, 팬들 역시 아이돌 스타로서의 이상은만을 원했다. 대중과 나 사이에 인기는 존재했지만 음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상은
그 당시 이상은의 매력을 분석한 기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아이돌(Teen idol)로서 노래보다는 가수 자체의 인기가 더 높았다고 볼 수 있겠다.

가요제를 통한 갑작스런 데뷔이기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새내기에 불과했던 이상은은 오직 돈만을 쫓는 쇼 비지니스 세계에서 그 나이 또래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노래 외에도 영화와 드라마에 정신없이 휘둘리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인기도 많고 재능이 보이니 혹사시킨 거였겠지만, 다른 가수들에 비해 유독 이상은은 외도가 잦은 편이기도 했다. MC, DJ, CF,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데뷔하고 2년이란 기간 동안 연예인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면의 활동을 다 해본 셈이다. 사기캐릭터 또한 1, 2집의 곡들이 꾸준한 사랑을 받기는 했었지만, 점점 예상과 달리 대중성에서 벗어나 열렬한 극팬덤형 아이돌로 가는 상황이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던 일인데, 대중적 인기의 결과가 결국 표절 시비와 광적인 아이돌 스타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 나타난 것에 대한 회의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막장사태까지 벌어졌었으니...


스스로 막을 내렸던 아이돌 시대의 마지막을 불살랐던 노래. 당시 저 20살 여자애의 무대장악력을 보시라. 자유분방하고 개성 강한 정말 매력적이였던 아이돌. 요즘 저런 스타일로 나왔어도 인기 쩔었을 듯. 탬버린과 선글라스, 스탠딩 마이크로 멋들어지게 연출한 색다른 무대도 있다. 앞서 블랙 버전에 이어 화이트 버전도 있다.#

과연 여덕들이 환장할 만하다. 이게 무려 30년 전 무대이고, 그 이후로 저런 보이시한 매력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던 여성 솔로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일단 기럭지부터가... 정말 시대를 앞서간 듯한 패션과 퍼포먼스. 여러 무대들을 봐도 알겠지만 정해진 안무 없이 그냥 프리스타일이다. 락카 스프레이 버전, '그대 떠난 후' 라이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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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니진, 찢어진 청바지, 머리염색, 모자.. 이게 거의 30년전 모습들인데... 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

80년대 인기 있었던 생방송 전화연결 쇼 프로 출연 무대. '화요일에 만나요'- 그대 떠난 후 뭔가 오글거리는 파파라치 무대 연출과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아이돌스러운(?) 몸짓이 인상적이다. 저러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팬들은 멘붕...

그대 떠난후 라이브 Stage Mix '이상은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 음원으로 유학 떠나기 3개월쯤 전 상황이다. 이때만해도 팬들은 DJ까지 그만두고 유학을 떠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학설은 예전부터 나오기는 했으나 대학교 졸업 후 간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양대 연영과 3학년 재학중이었다.

1990년 늦가을. 2집 '사랑할거야' 후속곡으로 자신이 작사[30]한 '그대 떠난 후'[31]를 마지막으로 라디오 DJ 등 모든 활동을 중단, 학교까지 휴학하고 훌쩍 미술 유학을 떠난다.

2019년 7월 온 스테이지 디깅클럽서울 프로젝트로 '그대 떠난 후'가 리메이크 되었다. 최근 뉴트로 유행과 함께 30년 전 이상은의 무대 매너가 요즘 젊은 세대에게 회자되면서 리메이크로까지 연결되었는데, 인디 듀오 1415가 신스팝 스타일로 재해석하였다. 관련자료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내가 상상을 한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그래서 좀 답답했던 것 같다. 가수가 된 계기가 고등학교 때 듀란 듀란, 컬처 클럽, U2, A-ha 등의 팝송을 좋아했다.[32] 그렇게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데 나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이게 뭘까? 사람들이 좋아해 주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닌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상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래를 한다는 것은 유쾌한 상상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곡가들의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것 뿐이었어요. 녹음실에 가면, 엔지니어들은 가수를 음악하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그저 매니저가 키우는 스타였죠. 가수가 명예로운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까, 이유가 뭘까’라고 고민하게 됐죠.” --- 이상은
"그때 동아기획이란 음반사가 있었다. 나도 동아기획이란 음반사에 너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동아기획엔 못 들어간다는 거다. 나 같은 아이돌은 동아기획에 못 들어간다. 그때 동아기획의 유명 뮤지션이 '시인과 촌장'이었다. 난 안된다는 거다. 넌 아티스트가 아니야. 그래서 엄마한테 그랬다. 나 공부할래.” --- 이상은
"데뷔하고 1년쯤 지나니까 ‘이게 아니다’ 싶더라고요. 과로가 계속되니까 마음도 우울해지는 거죠. 음악에 대한 욕심도 있었어요. ‘담다디’를 무척 좋아해 주셨지만 그게 제 곡은 아니었거든요. 당시 모 대학 교수님이 캐롤 킹 음반이랑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제가 아이돌 하지 않았으면 좋겠대요. 캐롤 킹은 자기 인생을 노래하는 아티스트인데 당신이 이 사람처럼 됐으면 한다고 꼭 들어보래요.[33] 음악 프로그램 피디 분들도 아이돌은 반짝스타니까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사실 어린 나이니까 콧방귀도 안 뀔 수 있는 건데, 전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중요한 시기에 주위 어른들한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예뻐해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처음에 아무 고생 없이 스타가 딱 됐던 거잖아요. 근데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자기 길을 0부터 걸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도 다 내려놓고 0부터 시작한 거죠." --- 이상은
“(1990년) MBC 라디오 ‘밤의 디스크쇼’를 진행하며, 저쪽 세계에 있는 선배 가수들을 많이 만났다. 신촌블루스, 어떤날[34], 한영애 등. 그들 앞에서 난 초라했다. 그들은 음악인이지만, 나는 가벼운 연예인이었다. 지금처럼 살다가는 한영애 같은 가수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노선 변경을 결심했다.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당시 그런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랑할거야’ 표절 파문도 약이 됐다. 내가 곡을 직접 쓰면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 이상은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었던 거 같다. 모든 방송 체계가 폭력적으로 보였고, 가식적이고 거품으로 가득 찬 허상의 세계가 정말 싫었다.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음악을 하는 선배들이 눈에 띄었다. 한영애 선배님도 그렇고 들국화[35]어떤날도 그렇고, 근데 그 계보에 들어가려면 아주 오랜 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는걸 알게 됐다. 유학을 결심한 것도 바로 그때 였다.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에 매달리는 것 보다 미술이나 문학 같은 다른 장르의 공부를 하는 것이 음악적인 상상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다. 미술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고, 언젠가는 그림도 그릴 것이다." --- 이상은
"저는 인기스타 자리에 있는 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더라고요. 막상 그런 것들을 맛보고 나니까 무척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고 인기나 돈이 사람이 목표로 삼아서 살아 갈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유학 자금이 모였을 때 부모님하고 의논해서, '이대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는 것은 너무 후회할 거 같다. 지금도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고 말씀드렸죠. 보통 친구들은 길거리에서 떡볶이 먹고 만나는데 저는 바깥에도 잘 못 나가고. 아무튼 인생의 의미에서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 이상은

당시의 이상은이 밝혔던 발언들을 통해 그녀의 아이돌 시대를 종합해 본다면 가수 데뷔 전에는 외동딸에 자존감도 높고 자기 뜻대로 하며 자유분방하게 자라왔는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어른들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하는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체질적으로도 맞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4. 뉴욕 유학

1993년 4집<너와 함께있는 이유> + 5집 <언젠가는> (립싱크)


93년 당시 KBS 가요톱10 <언젠가는> 라이브. 가요톱텐에서는 5위권, MBC에서는 1위까지 했던 곡이다. 참고로 당시는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댄스곡들이 가요계를 점령하던 시기였다.

여러가지로 연예계 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이상은은 1990년 높은 인기를 뒤로 하고 돌연, 그간 꿈꿔왔던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었다가, 1991년에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다. 제발 멀리 가지 말라는 부모님의 부탁도 있었고, 처음엔 일러스트레이션 쪽에 관심이 있어 가까운 일본으로 갔다가, 순수 미술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뉴욕으로 간거라고.

뉴욕에서 미대 입학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어, 1991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제작한 셀프 프로듀스 앨범 3집 <더딘 하루>를 발표한다. 당시 뉴욕에서 매주 발간되는 정보지 '빌리지 보이스'를 통해 만나게 된 발레 음악하는 편곡자 톰 세만스키와 줄리아드 스쿨에 다니는 친구들이 세션으로 참여했는데, 클래식 악기가 많이 쓰여서인지 앨범이 정갈한 소품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이때 치고는 굉장히 음악적으로는 세련되었으며 기존의 이상은 노래와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부터 싱어송라이터 뮤지션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음반이라 할 수 있다. 더딘하루 당시 출연영상

미국의 명문 미대인 프랫 인스티튜트[36] 유학시절에도 틈틈이 음반을 만들어 방학을 이용해 활동하게 되는데, 1992년 6월에는 흑인음악 프로듀서 김홍순과의 공동작업으로 힙합, 하우스풍의 4집 <Begin>을 발표하였다. 김홍순은 한국대중가요에 흑인음악의 작법을 거의 최초로 접목시킨 작곡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당시 뉴저지에 살고 있던 양희은의 소개로 그의 아파트에 찾아갔는데 처음 보는 컴퓨터 장비와 시스템에 놀랐었다고 한다. 그때는 학교생활에 집중하느라 미리 써둔 곡이 없어서 김홍순이 리듬을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맞춰 이상은이 가사와 멜로디를 붙여나가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미있게 작업했다고 한다. 그래서 4집의 모든 곡은 공동작곡으로 표기되었다. 학교수업과 앨범작업을 병행하느라 코피 마를 날이 없었다는데, 4집앨범 쟈켓이 빨간색인 이유는 자신이 흘린 코피를 상징하는 거라고 장난스레 얘기한 적이 있다. 지금 들으면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앨범 발매 이후로 대세가 되었던 하우스, 힙합 장르의 초창기 명반으로 뒤늦게 재평가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는 한국이 아닌 일본의 'JAZZ LIFE'에 추천음반으로 소개 되는걸 보고 참 신기했었다고 한다. 뉴욕에서 4집작업 당시 이상은의 그림편지 결과적으론 짧은 활동 기간과 다소 아쉬운 무대 퍼포먼스로 임팩트 없이 묻히긴 했지만 당시 방송에서 시대를 앞선 힙합 패션스타일을 보여주었고, 립싱크였지만 헤드셋형 마이크를 끼고 노래한 최초의 여가수이기도 하다.참고로 남자가수는 현진영. 현진영 데뷔전 이상은이 먼저 끼고 나온적이 있다. 영상

92년 <너와 함께 있는 이유> 영상 노래만 듣고 춤은 신경 쓰지말자(...)
92년 <솔직히 말해줘> 영상 (목에 걸고 있는게 미대 학생증이다.) 솔직히 말해줘 2
92년 예능 출연 방송 (with 신동엽)

이상은은 여름 방학이 되자 귀국하여 '너와 함께 있는 이유'를 타이틀로 4집 활동을 시작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솔직히 말해줘'로 곡을 바꾸게 된다. 같은 시기에 변진섭이 똑같은 제목의 발라드곡 '너와 함께 있는 이유'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 방송에서 곡제목 얘기가 나오자 이상은이 외국에 있어서 잘 몰랐다며 미리 알았으면 타이틀을 그 곡으로 안했을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차피 짧게 활동하고 갈거라서 도의상 중간에 활동곡을 바꾼듯 하다. 그리고 데뷔 이후로 처음으로 머리를 길러 단발로 귀국을 했는데, 짧은 머리를 원하는 팬들의 등쌀에 절충형으로 한쪽만 짧게 자른 언밸런스 스타일을 선보였다가 결국은 숏컷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하도 말들이 많아 그것도 다 자신에 대한 관심 표명이니까 요구대로 자르긴했는데, 머리도 마음대로 못기르냐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헤어스타일 사진
(4집 활동때 이문세 별밤 라디오 공개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당시 들려줬던 진솔한 이야기와 노래를 부르다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팬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던.. 팬들사이에 두고두고 회자 되던 방송이 있다. 한번쯤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Moon River 외)

1993년 1월에는 편곡자 안진우와 뉴욕에서 작업한 어쿠스틱 음반인 5집 <LEE SANG EUN>을 발표하였다. 특히 5집에 수록된 '언젠가는' 이라는 노래는 당시에도 히트를 했었지만, 나얼, 싸이, 슈퍼주니어, 티에이피(결혼의 여신 OST), 핑크토끼, 더 넛츠, 송하예(막영애15 OST) 등 후배들에 의해 꾸준히 리메이크 되며 아직까지도 불려지는 명곡이다. 2017년 9월부터 방영되는 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 연출을 맡은 남건 PD는 "이상은의 '언젠가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혔다. 기사 작가와 드라마 방향에 대해 논의할 때도 '언젠가는' 노래 가사 전문을 모바일메신저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 언젠가는 -

1.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2.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23살 짜리의 흔한 감성(...)
(93년 1월초 발매면 92년에 녹음을 했을테니, '언젠가는'의 그 깊이 있는 가사가 23살때 나온거..더 정확히 말하면 만 22살에 만든거다. 애늙은이?)

93년 대학로 소극장공연 '언젠가는'MV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항상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이돌을 거부한 후, 소극장 공연을 시작하며 비로소 팬들과 진정으로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이상은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한 감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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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집 언젠가는 활동 당시 모습.

이상은 5집은 작품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맞춘 명반으로 평가 되고 있다. (워낙 괴물 같은 명반 6집<공무도하가>에 묻혀서 그렇지..) 참고로 5집 당시 제작자가 서세원이었다고 한다. 이상은이 어느정도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게 된 배경도 그의 영향이 있는듯 하다.[37] 앨범만 던져놓고 가버렸던 3, 4집때와는 달리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콘서트와 방송 활동을 많이 하는 등 홍보도 잘 되어서 타이틀곡 '언젠가는'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만,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했고 나중에는 계약 연장하자고 엄청 시달리기도 했다고 카더라. 서세원이 어떤 인간인지는 말안해도.. 어쩌면 이후의 이상은이 주류 연예계로는 아예 눈길도 안주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중성 보단 예술성에 치중하게 되었던 원인일 수도 있겠다.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한다.
" ...한국에 왔더니 이미 서세원씨가 세팅을 다 해놓은 거야. 주요 프로그램 PD 다 구워 삶아놓고, 매니저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 뽑아 놓고, 코디네이터 붙어있고. 그런데 정신차려보니, 내가 정말 이런 환경이 갑갑해서 떠났는데, 내가 코미디를 (하기 싫은데도) 막 하고 있는거야.."

'언젠가는' 활동 당시 예능프로그램 출연도 많았는데, '특종 TV연예' MC였던 임백천과 같이 코믹무대를 선보인 적도 있다. 천이와 은이 '너는 왜' 93년 일밤 출연방송을 봐도 아이돌 이미지가 싫어 유학까지 갔다왔음에도 불구하고 5집 활동때까지는 기존의 밝고 귀여운 대중적 인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걸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 쇼프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였던 이문세는 당시 출연했었던 이상은의 말 한마디에 자극받아 이후에 예능을 그만두고 다시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선배도 깨우치게 만드는 후배 관련영상

5. 아티스트로의 길

"제가 자라면서 느껴지는 성장의 아픔 같은 것들도 음악으로 표현을 하면 진실하기 때문에 함께 커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공감해 줄 것이다, 대중음악이라 하더라도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아티스트로서의 생각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게 훨씬 값어치 있는 일일 것이다, 라고 믿었을 뿐이에요." --- 이상은
"저는 모든 예술분야에 있어서 시대나 유행을 초월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뭔가 근본적인 것을 보려고 해요. 인간은 살아있으면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작품을 하면서도 자꾸 여기에 살아있는 나만이 아닌 무엇인가를 다 초월해 있는 나의 존재, 나를 내려다보는 내자신, 그런 것들이 있다는걸 느끼게 되거든요. 바로 그런 나자신과 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또 사람들을 보고 세상을 보고 그럼으로써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 이상은


1995년 6집 '공무도하가' 라이브.
얼마전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우리 다시~만나리~'를 외치던 이상은이 갑자기 기괴한(?) 음악을 들고 돌아왔을때 대중들은 또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로는 아예 아티스틱하고 매니악한 음악스타일로 갔다.
95년 당시 토크쇼 출연방송 - 이상은의 '공무도하가' 앨범에 대한 설명과 라이브도 들을 수 있다.
96년 방송(변신의 귀재 이상은)을 보면 머리를 기르고 그림 전시회를 하고 패션모델 활동도 하는 등 음악적 변화 못지않게 외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까지 확 변화를 주었다.

6집 '새' MV
6집 'Summer clouds' MV - 뉴욕에서 학교 다닐때 찍은 뮤비인듯.
마지막에 같이 나오는 키작은 사람이 이상은의 동갑내기 절친인 황보령이다. 지금 현재 SMACKSOFT(스맥소프트) 밴드로 홍대 인디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상은이 뉴욕 유학시절 알게 된 같은학교(Pratt) 친구라고 한다.
('언젠가는' 활동 당시 황보령과 같이 서울 혜화동에 Recyclism카페 겸 복합문화공간 'Sun&Fish(해와 물고기)'를 만들어 운영한 적도 있는데, 미성년자 출입금지에 여러 소모임(독서, 여행, 어학..) 회원제로 운영되다보니 1년도 안되어 문 닫았다.)

이상은은 '한류'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인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 활동(논노에 실렸던 사진, 그걸 또 기사화한 한국잡지)을 꾸준히 해왔었는데, 싱어송라이터로서 이상은이 만든 음악들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인정을 받게 된다. 사실 이상은은 일본에서 활동할 생각은 크게 없었는데, 재일교포 저널리스트 강신자씨[38]와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집 앨범을 들고 한국에 잠시 나왔을 때, 인터뷰 건으로 만나서 친해진 그 언니의 초대 편지를 받고 일본 시골에 놀러갔다가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가수라고 하니 노래 듣고 싶다해서 맨 처음 가라오케 가서 팝송을 불러줬던게 일이 점점 커져 버린거라고. 그 친구들이 주로 방송국이나 문화기획사 쪽에서 일하고 있어 주변으로 이상은의 앨범을 들려줬는데 그게 의외로 반응이 좋았단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었는데, 당시 일본 신문에서 '마음을 치유하는 목소리[39]' 라며 소개되는 걸 보고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기존의 아이돌 이미지에 가려 한국에서 외면받았던 3집, 4집은 구마모토라는 일본의 한 지방도시에 팬클럽이 생겨나게 하였고, 이 팬들을 위한 작은 공연이 불씨가 되어 나중에는 '크로스비트 아시아'라는 아시아 민간 문화교류 단체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틈틈이 소규모 공연을 하며 문화운동을 벌이던 것이 점점 입소문으로 번져 결국엔 도쿄에 있는 회사와 계약하게 되고, 이에 본격적으로 일본인 아티스트들과 손잡고 1995년 6집 <공무도하가>를 발표한다. 당시 일본 공연모습이 담긴 영상

6집은 '공무도하가', '삼도천', '새' 등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인 앨범으로, 뉴욕도쿄를 오가며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음악 감독으로서 일본 스텝들을 이끌며 만든, 그녀의 이미지를 새롭게 인식시킨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가사에서는 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보이면서, 동양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자켓과 타이틀곡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오리엔탈 스타일을 추구하면서도 영어 가사의 곡을 5곡이나 넣는 등 동서양의 문화적 접촉을 시도한 앨범. 우리는 이 앨범을 통해 과거와 현재, 국악과 양악, 한국어와 영어, 한국인과 일본인, 전통과 현대음악이 산재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되어 만들어지는 새로운 경지를 만날 수 있다. (작품을 이루는 소재들은 하나같이 ‘흐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진정 이상은의 보헤미안 기질과 미술적 감각, 뮤지션으로서의 예술적 영감이 황금비율로 결합된 최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어로 노래하지 않았기에 세일즈가 잘 되거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건 아니지만, 이 앨범은 일본내에서도 신선한 충격이었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개자」, 「아시아의 가희」, 「섬세하고 폭넓은 표현을 가진 가수」등등 평론가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여러 신문과 잡지에 주목할 만한 앨범으로 누차 소개 되기도 했던 이 앨범은 일본에서 먼저 발매가 되고, 우리나라에는 라이선스(Polydor / PolyGram) 되어 역으로 수입된 보기 드문 케이스다. 이 음반은 2007년 가슴네트워크에서 선정하고 경향신문과 네이버뮤직 스페셜을 통해 공개 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10위[40]를, 100Beat 선정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발매 당시에는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기도 했었지만, 희대의 명반으로 재조명 되면서 꾸준히 재발매 되는 등, 이상은의 대표적인 앨범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코미디언 김신영은 이상은의 "공무도하가"가 소름끼치는 곡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김현철은 라디오 방송에서 공무도하가를 선곡하며 이 곡을 채보하고 함께 연주해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대단한 곡이라고 말했었다.[41])

7집 '어기여디어라' MV
(이상은 뒤에서 퍼포먼스 하고 있는 남자가 어어부프로젝트의 백현진이다. 7집 앨범자켓에 있는 꽃그림도 그의 작품.)
이 노래 한곡으로 7집 앨범 전체를 판단하면 큰 오산. 앨범 마지막곡으로 일종의 '치유'곡인데, 그전까진 사람의 감정을 마구마구 헤집고 뒤흔들어 놓는다고 보면 된다. 이상은이 Mars로 이사를 가서 만든 앨범이라 카더라[42] 록 음악 성향의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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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루는 악기가 없다는 '다케다 하지무(竹田 元)[43]' + '이상은' = Penguins
둘의 팀 이름을 지으려고 사전을 딱 펼쳤을 때 '펭귄'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마치 연미복을 입은 것 같이 예의 바른 펭귄의 모습이 자신들이 음악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와 닮아 있는 것 같아 '펭귄즈'라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다케다는 6집부터 14집까지 이상은의 모든 앨범에 참여하였다.

일본의 화려한 세션들이 대거 등장했던 6집과는 달리, 1997년 3월에 발표한 7집 <외롭고 웃긴 가게>는 이상은이 다케다 하지무와 '펭귄즈'라는 팀을 결성해 1인 세션으로 작업한 음반으로, 로우파이 녹음을 통해 독특한 세계관을 표현하였다. 이는 한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치유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6집에서 7집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상당히 반항적이고 시니컬한 모습들을 많이 보였는데, 외국과는 다른 한국의 척박한 음악 환경에 절망하여, 어깨 밑으로 곱게 길렀던 머리를 완전삭발(...)하고 퍼포먼스 공연도 하고 다녔다. 삭발사진 이상은 본인도 '가장 정신상태가 안좋을 때 만든 음반'이라고 자평할 정도. 그런데도 명반.)
"일본에서는 귀족적인 미가 담긴 음악을 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한국에서 내가 느낀 현실은 '외롭고 웃긴 가게'였다. 그리고 상당히 가슴이 아팠다. 예전에는 '아저씨들 싫어 싫어. 나 도망 갈래' 였다면, 지금은 '내 눈에는 현실이 이렇게 보이는데요' 이다. 다들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꼬집어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보였고, 내 내면에서도 나 자신의 모순과 더러움까지도 끄집어 내고 싶었다. 그것들을 표현하려면 로우파이 사운드가 어울렸다. 한국의 현실은 하이파이 사운드가 안 어울렸다. 필연적이었다" --- 이상은
"6집은 옴니버스 영화 같은 보이는 그림이었구요, 7집은 보이지 않는 그림, 내면의 그림, 상상속의 세계..라고까지만 말씀 드릴께요." --- 이상은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은 7집 앨범이 발표된 후 "우리는 브라운관의 스타 한 사람은 이미 잃었지만, 고요한 시인 한 사람을 이제 얻은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7집에 실린 곡들은 원래 모두 영어가사로 썼던 곡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7집 공연 중에 '외롭고 웃긴 가게'를 아무 설명없이 영어버젼으로 불러 제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이들 곡중 6곡은 후에 8집앨범에 영어가사로 다시 실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8집을 한국에서 못들을 했다.)

7집 앨범 역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99위)과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 (33위)에 포함되는 명반이다. 이제 이상은은 '담다디'의 귀여운 소녀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진정한 뮤지션이 되어버렸다.
7집 앨범 발매기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외롭고 웃긴 가게> 항목 참조.

6집 <공무도하가> 앨범과 7집 <외롭고 웃긴 가게> 앨범은 서울 레코드페어에서 LP 한정반으로 제작, 판매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7집 앨범 나왔을 무렵, 윤상신해철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서 이 앨범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둘이서 막 '여러분~상은이가 해냈어요! 한국 남자 뮤지션들은 다 나가 죽어야해~ 흑흑..' 이렇게 장난스레 얘기하며 이 앨범을 극찬했었다.)
"그녀는 이 땅에서 음악의 한 유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상은과 비슷한 성향의••• '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 박준흠 (대중음악 평론가)
이 시기에 평론가 박준흠과의 긴 인터뷰가 있는데 그녀가 어떠한 생각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어깨에 힘이 빠졌지만 당시에는 열렬히 예술을 추구하던 때라 그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6. 리채 (Lee-Tzsche, リーチェ)

“너의 음악이 우리 일본 사람들 마음에 와 닿고 또 음악 관계자들이 들었을 때 다 좋다고 한다. 넌 순수하게 무엇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음악인지 고민해봐라. 그러면서 너의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고 갈 수 있는 음악을 그려라."
이상은이 일본에서 서포트를 받으며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1997년 12월에 발매된 8집부터는 이제 아예 이름을 바꾸어 리채(Lee-tzsche)[44]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리채의 '리'는 아버지의 성을, '채'는 어머니의 성을, 부모님 성씨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란다. 'tzsche'라는 표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상은은 영국의 유명 레코드사인 버진(Virgin)의 일본지사와 음반계약을 맺어 리채라는 이름으로 영어앨범 8집 < LEE-TZSCHE >9집 < Asian Prescription >(1999년)을 일본에서 발표한다. 8집은 일본에서 발매된 후 한국에 라이선스가 되지 않아 한국팬들은 이상야릇하고도 어려운 유통구조로 겨우 구해 듣는 아이러니를 먼저 선보였었는데, 그나마도 음반을 못 구한 많은 매니아들이 한국 EMI측에 발매 서명운동까지 벌이는 악착같음을 발휘, 일본에서 발매된지 3년만인 2000년 8월에야 한국에서 발매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국에서 9집 보다 8집 발매일이 늦은 이유다.)

이들 앨범은 6집 이후로 함께 작업했던 다케다 하지무 등 일본 스탭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이상은의 음악은 그 자체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지만, 오리엔탈리즘에 천착했다는 비평을 피하지 못한다. 지난 20세기 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에 덮어씌운 '신비롭고 여성적인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동양인인 이상은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해외 지향 앨범인 8집과 9집에서 주로 이런 경향을 보였는데, 특히 9집은 대놓고 제목이 '아시아식 처방전'. 아시아를 그들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타자로서 치유를 얻고 오는 대상으로서만 보는 서양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재는 없어진 웹진 컬티즌에 이런 시각의 비평이 실린 적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녹차에 버터가 섞인 듯 이질적이라는 것인데, 오리엔탈리즘 비판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이에 대한 팬들의 반발도 있었다. 저 주장대로라면 이상은의 음악을 듣고 감동한 청자들은 매국노이며, 뷔욕도 타국인들이 막연히 상상하는 아이슬란드의 이미지를 파는 뮤지션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도 사실 당시 음악 평론은 음악의 구성 요소를 분석하여 그 짜임새나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평가한다기보다는, 음악이란 소재를 빌린 사회 평론에 가까웠음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당시 이상은이 라디오 등에서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차이에 빗대 자신의 음악을 설명한 적은 있으나, 이러한 생각은 동양의학, 특히 한의학을 높게 평가하는 어르신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과 차이가 없으므로 이것만으로 이상은이 오리엔탈리즘에 물들었다 보기는 어려웠다. 팬들은 그런 이유에서 당시의 비판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는 이상은 개인의 의도였다기 보다는 메이저 레코드 회사와의 계약에 따른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주로 해외음반 수입을 해오던 도시바EMI가 동양에서 서양 음반시장으로 수출을 해보자는 목표로 세계적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Virgin 레코드와 합작, 버진재팬(VJ)을 런칭하고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아티스트가 바로 이상은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일본이 대인배스러움. 소속사가 아닌 음반사에서 직접, EMI내에서도 전례가 없었다던 아티스트 육성비까지 책정, 지원하고 이상은에게 애정을 쏟으며 외국진출을 타진해 보지만, '아직 이르다. 독창적이고 음악성은 뛰어나지만 시장성이 없다. 아깝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넌 고흐처럼 될거다 죽고 나서 뜰거다' 라는 악담(?)까지 들어봤다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반응을 살펴보다 결국은 자국에서 대박난 아티스트인 우타다 히카루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역시 높은 진입장벽만 확인 했을뿐 초기의 그들 꿈은 좌절되었고, 시이나 링고 등이 들어오게 되면서 레이블 성격도 점점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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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집활동 당시 리채.
8집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Actually, Finally'는 버진 영국본사에 가서 폴 매카트니, 펫 샵 보이즈, 앨라니스 모리셋 등과 작업했던 영국의 유명 프로듀서 리차드 나일스(Richaed Niles)와 작업한 곡(1번과 11번트랙 2곡)으로 상당히 팝적인 분위기의 편곡이었는데, 이는 6집과 7집으로 이어지는 '이상은 풍'에 위배되는 팝 성향의 곡으로 지금까지 그녀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팬들에게는 '앨범의 컨셉에 맞지 않는다' 라는 얘깃거리를 만들었던 곡. 한번 들어보자. (이 곡은 후에 옴니버스 앨범 '도시락특공대 2집'에 다케다하지무 편곡의 오리지널 버젼으로 실린 적이 있는데, 팬들은 당연히 이상은과 함께 작업을 해왔던 다케다의 편곡을 맘에 들어 했다. 일본 음반사측에서도 이를 의식했는지 나중에 발매된 'Lee-tzsche 베스트 앨범'에는 8집 버젼이 아닌 오리지널 버젼을 싣기도 했다.) 사실 타이틀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상은풍(?) 노래들이다. 대략 요런 느낌의..

참고로 8집과 9집은 그 이전에 국내에서 발표했던 3~7집의 곡들을 영어로 번안, 편곡하고 거기에 영어로 만든 신곡 네다섯곡을 덧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해외 1집, 해외 2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실제로 이 두 장의 음반은 Virgin Japan-도시바EMI를 통해 일본에서 먼저 발매되고 그 후에 한국으로 수입되는 형태로 발매되었다. 이상은은 이에 대해 그냥 '일본에서 활동한 게 한국으로 유출된 것'이라 말하더라(...). 당시 한국에서는 이상은의 일본활동 소식을 전하며 앨범만 덜렁 나왔을 뿐, 8, 9집과 관련한 국내활동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99년 당시 한겨레 신문기사 , 일본 아사히 신문기사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일본에서 리채로 발매했던 8,9,10집은 현재 국내 음원사이트에서 서비스가 안되고 있다. 물론 음반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 유튜브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은 검색하면 나오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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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집때 리채. 몽환적 이미지가 컨셉이었던 듯. 노래도 명상음악 같다.
< Asian Prescription > 앨범은 베스트음반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공을 많이 들인 작품으로, 완성도가 빼어나다는 평을 받았으며 리채음악의 정수로 꼽힌다. 후에 이상은 본인도 사람들이 다시 들어봐줬으면 하는 음반으로 9집을 얘기하기도 했다. 9집 'A Path' MV (배경은 중국?)

일본에 진출한 대부분의 한국 가수가 그랬듯 보통은 현지화 작업을 거치게 마련인데, 이상은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도 일본어로 노래 부르지 않았고, 영어나 한국어로 불렀다. 영어 보단 일본어를 더 잘 하지만, 공식적인 인터뷰들은 주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이는 이상은이 얼마나 고유의 음악성으로 인정받고 아티스트로 대우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자국 출신이 아닌데도 자기들이 나서서 세계시장에 선보이고 싶어 했을 만큼 욕심이 나고 좋긴 했던 모양. 어느 인터뷰에서도 일본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공주처럼 지냈다고 말함. 덕분에 공주병도 덤으로.. 이상은은 처음부터 인기를 목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닌 문화교류 운동을 해 오며, 트로트 장르 외에 다양한 한국의 음악을 좀 더 세련되고 멋지게 자랑하고 싶은 '외교관스러운’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런 고집이 가능했던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일본에서 한국말로 노래하고 영어로 앨범 내는 건 미친 짓이었고, 그런 미친 사람도 자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송에 나가기 보다는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었단다. 그렇다보니 당시 활동 영상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일본 사람들이 은근 한국을 무시하는게 싫었다던 이상은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고,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일반 대중들 보다 음악을 좀 깊이 있게 듣는 마니아들이나 크리에이터, 평론가 또는 기자, 변호사 등 소위 식자 계층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걸 보고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었다고.[45] 공연을 본 어느 일본의 노부부가 이상은의 숙소까지 찾아와 편지를 주고 갔는데,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라는 글을 보고 정말 기뻤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한국 음악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영화 '간밧떼 이키맛쇼이 (がんばっていきまっしょい, 화이팅 에츠코)'의 영화 음악을 맡았다.
7집의 '어기여디어라'[46] 영어버전인 'Ogiyodiora'가 주제곡으로 쓰이며 화제를 모았고[47], 이 곡을 포함한 이상은의 OST앨범 < Give it all >(1998년)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상은의 곡 중 거의 유일하게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대중적으로 히트한 노래로, 유튜브에 'Ogiyodiora (オギヨディオラ)' 검색 하면 커버영상이 꽤 나온다.

비슷한 시기에 박철수 감독의 영화 '봉자'(2000년) 음악도 맡았었다. 일본영화가 교육적인 내용이었던 것에 반해, '봉자'는 성(性)에 대한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상은이 그 음악을 담당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이상은은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안하고 싶었는데 (관련 발언영상), 성도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데 예술한다는 사람이 편견을 갖고 있어서야 되겠냐며 계속 설득 당해 결국은 하게 됐다고(...). 결과적으로 음악 이외에는 혹평만 당한 영화지만, 봉자 OST 'She Wanted'는 오랜만에 국내에서 나온 앨범이라 이상은의 정규앨범 못지 않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었다. 이 앨범은 또 다른 의미로 소소한 화제를 모았었는데, 앨범쟈켓을 유심히 보면... 근데 별로 놀랍지도 않은게 외국 나가서는 항상 저런 차림이라, 아주 오래전 영화 '굿모닝 대통령'에서도 저렇게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나왔었다.

후에 한 인터뷰에서 리채활동 당시 회사내에서 '누구를 더 밀어줄 것인가' 하고 어느 일본가수와 경합이 붙었는데, '이애는 한국애니까' 하고 밀려났었고 그때 '내가 남의 나라에서 뭐하고 있지?'하며 서러웠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48] 이국 땅에서 자신은 결국 이방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고. 또한 8, 9집 이후로 버진재팬의 모회사인 도시바EMI로 이적하게 되는데, 실력도 인정 받고 좋은 일이긴 했지만, 원래 자신의 팀들이 아닌 대기업 사람들이랑 일하다보니 상업성에 대한 압박도 심해지고, 계약 때문에 자발성 없이 의무감으로 하게 되는 (훗날 어느 인터뷰에서 '어서 재주 부려봐'하고 꼬챙이로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말함), 그러면서 점점 일본 활동에도 흥미를 잃고 슬럼프에 빠져서 2000년도에 잠시 런던으로 미술유학 도망?을 떠나기도 했었다고 한다.

한창 팔팔한 20대 나이에 '담다디'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강박으로 예술적인 음악을 추구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 '공무도하가' 이미지 또한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공연에서는 고상하게 앉아서 노래를 부르지만, 공연 끝나고서는 클럽가서 춤추고 노는 이중생활도 점점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데뷔때나 최근까지 무대위 모습을 봐도 그렇고..알고보면 원래부터 흥이 많은 사람임. 공연에서 이러고 노는거 좋아함, 떼창도 즐김. 그러니 얌전히 노래만 부르는 것도 답답했을 듯.) 이후로는 서서히 어깨에 힘을 빼고 스스로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2001년 이상은은 30대로서의 첫 앨범인 10집 <Endless Lay>를 발표한다.
(위 뮤비는 도시바EMI 소속 아티스트로 프로모션차 내한(?)했을때 쇼케이스 영상. 뭔가 묘한 상황이다..)
< Endless Lay > 역시 일본에서 발매되고 한국에 라이선스 된 음반으로 지난 앨범들에 비해 한층 힘을 빼고 편하게 만든 곡들로 구성되어, 30대로 접어든 그녀의 심리를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앨범은 팬들과 평단 사이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반응을 얻고 만다. 자신의 심리를 노래한 것은 좋지만, 이게 과하다보니 자뻑으로 흘러갔다는 평이 많았다. 새로운 시도가 없이 정체되었다는 평도 있었는데 이상은도 그에 대한 평을 인정했었다. 변화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새로운 자극이 없었던 것도 원인이 되었지만 상업성을 맞추라고 회사에서 요구한 것도 음악의 발전을 낳지 못하게 한 원인이라며 일본의 메이저 레코드회사와 작업을 하면서 정체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상은은 10집앨범 이후 2002년 < Asian Breeze >라는 스튜디오 라이브 베스트 앨범 발매를 끝으로 일본 계약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홍대 인디씬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훨씬 전부터 일본 왔다갔다하며 홍대에서 활동을 해 오긴 했었다.

이상은이 오랜 일본 활동을 접고 돌아왔던 이유를 알 수 있는 인터뷰.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음반들은 일본에서 발매했던 것이 역수입된 형태였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일본측과 일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고 많은 것들을 배우기도 하지만, 이렇게 계속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하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오히려 외화를 계속 낭비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일본의 음반사(EMI)와 마지막 앨범을 낼 때,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 그때 당시에는 심하게 모욕 당하는 것 같았어. 대중성에 관한 문제 때문에 나를 닦달했던 마케팅부의 한 담당자가 있었는데, 진짜 강적이었어. 나는 인디적인 사람이었고, 그사람은 자본주의적인 논리가 강한 사람이어서 부딪치는게 많았지."
그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일본에서만 발매되었던 < Asian Breeze >라는 앨범에 신곡 한곡이 들어갔는데, 일본어가사 노래였다. 9번트랙 'En'은 이상은이 만든 유일한 일본어 노래로 1절은 일본어, 2절은 한국어로 불렀다.
그 가사를 보면..
En (縁) - 인연

1. .永遠にとなりに住む不思議な縁だから
(영원히 마주하며 사는 놀라운 인연이기에)
あの海は時間のように踊っている
(저 바다는 시간처럼 춤추고 있네)
未来の子供に平和を教えてる
(미래의 아이에게 평화를 가르치고)
良い友達にきっとなれると思ってた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兄弟みたいな顔でこれからおもしろく過ごせるように
(형제 같은 얼굴로 앞으로 재미있게 지냈으면..)

空からあなたの窓に届く白い太陽は今
(하늘에서 너의 창문에 와 닿는 하얀 태양은 지금)
となりの国の私の目にも光っているよ
(이웃나라 나의 눈에도 빛나고 있어)


2. 사람이란 모두 똑같다고 생각했어
누구나가 행복을 원하고 있으니까
허나 그리 단순한 세계는 아니지만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사는 것
언제 깊은 상처가 나을 날이 올 것인지..

하늘에서 우리 동네에 와 닿는 투명한 별들은 지금
이웃 나라 너의 고운 눈에도 빛나고 있겠지

시간 같은 건 똑같으니까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에
사람들의 가슴의 고동 소리를 들어봐요
時間なんか一緒だから (시간 같은 건 똑같으니까)
同じ黒い髪と瞳の (같은 검은 머리와 눈동자의)
人々の胸の鼓動を聞いてみて (사람들 가슴의 고동소릴 들어봐)
노래가사는 참 평화롭다. 하지만..
결국은 일본어로는 노래 안하려고 했는데 (일본활동 당시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문제도 신경쓰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진짜 강적을 만나 계약이 남았으니 어쩔수 없이 만들어 불러야 했고, 비록 곡 절반 정도였지만 아무튼 자존심 상하는 일이여서, 그런 압박들이 싫어 돌아왔다는 얘기로 들린다. 참..어찌보면 남들은 죽어라 노력해도 될까말까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들을 쉽게 해내고, 또 다들 못가져서 안달인 돈과 인기를 피해 다녔던 정말 특이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리채시절 출연한 방송에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반항아로 찍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터뷰(관련내용은 14분쯤부터)
당시 아티스트 이상은에 대해 집중 조명한 방송 2001.The Artist 방송

7. 30대

"한국에서 음악을 하니까 내가 동양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작업할 필요가 없어져서 편해요.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뭔가 동양인,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드러내야 했거든요." --- 이상은
"한국에 돌아와 고생을 하면서 철이 좀 든 것 같다. 일본에서 일할 때는 공주처럼 대해주고 하니까 정말로 철이 없었다." --- 이상은
"20대 때는 '20대스러운', 30대 때는 '30대스러운' 음악이 나온것 같아요. '공무도하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한 앨범이었거든요. 가장 먼 곳에 가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고, 가장 깊은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서른살 때부터 생각이 바뀐것 같아요. 새로운 것들에 눈이 뜨이는데, 저의 경우에는 일상이었어요.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즐겁게 견뎌나가는 힘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멀리 가고 높이 날아간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이상은
11집 '비밀의 화원' 영상
2003년 11집 <신비체험>에서는 일렉트로니카/IDM 프로듀서인 KAYIP(이우준), 장영규, 달파란(강기영) 등과 동업, 일렉트로니카의 작법을 도입하여 파격을 더했다. 이 앨범에서는 리드 싱글격이자 밝은 팝 곡인 '비밀의 화원'이 배스킨라빈스CM에 사용되는 등 간만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마음만 먹으면 히트곡을 쓰는 여자,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여자가수상'을 수상하였다.[49]
11집 당시 인터뷰. 사고의 변화와 성장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비밀의 화원'은 런던에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2017년 9월 발매된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에 '비밀의 화원'이 수록되었다.

파일:attachment/이상은(가수)/lse-008.jpg
연애모드.. (2004~2006) 앨범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언급을 안할 수가 없다.
2005년 12집 < Romantopia >에서는 라운지 음악을 중심으로 전작들보다 포근한 느낌의 팝을 시도했다. 한창 연애 중에 나온 앨범으로 앨범타이틀이 말해주듯, 이상은의 로맨틱한 이상향을 담은 앨범이다.(12집 인터뷰 영상) 대중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이 앨범에서도 다케다 하지무와 함께 작업했는데, 작업 당시 수록곡의 방향성을 놓고 다케다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당시 12살 연하 남친과 공개연애 중이던 말랑해진 이상은을 팬들은 낯설어 하기도 했다. 이 앨범으로도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여자가수상'을 수상했고, 타이틀곡 '돌고래 자리'로 '제7회 KBS 바른언어상- 아름다운 노랫말 부문' 상도 수상했다. 또한 GQ Korea 매거진에서 별 다섯개 평점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지큐 창간이래 만점을 받은 최초의 앨범이었다고 한다. 별 다섯개!


2007년 13집 < The Third Place >는 일본 오키나와 바다에 머물며 만든 앨범으로, 남친과 헤어진 후 만들었다는 '삶은 여행'이 실려있다. 이 노래는 후에 '꽃보다 누나'에 엔딩곡으로 삽입되어 뒤늦게 더 인기를 끈 곡이기도 하다. 이 앨범은 6집 <공무도하가>의 일본 프로듀서(와다 이즈미[50])와 다시 작업한 앨범으로(13집 인터뷰 영상), 뛰어난 완성도에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종합), 올해의 음악인(종합), 최우수 팝 음반(장르), 최우수 팝 노래(장르) 등 4개부문에 후보에도 선정됐지만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했다.
위 영상을 보면 데뷔시절에 비해 상당히 여성스러워 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데뷔때도 스타일이 보이시해서 그렇지 원래부터 얼굴은 나름 이쁘장했다.)

2014년 새롭게 편곡된 '삶은 여행' 라이브 영상도 있다. (윤상의 프로듀싱 그룹 'OnePiece' 멤버인 Davink와의 콜라보)

8. 40대

"20대 시절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터널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뿜는 빛이 너무 밝아 나 자신도 눈이 멀었던 시간이었다. 20대는 그렇다. 인생의 불이 가장 활활 타오를 때라서 그 빛에 눈이 머는 것이다." --- 이상은
"20대와 30대는 전 너무 달랐어요. 20대 때는 너무 어두웠죠. 고민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굉장히 부정적인 아이였는데 30대 되면서 좀 밝아졌어요. 저의 경우에 20대 때는 부정적이었지만 장점은 꿈이 컸어요. 모든 20대들이 꿈이 클 거에요. 어마어마한 꿈을 가지고 있죠. 근데 20대가 가지고 있는 단점은 되게 부정적이라는 거에요. 꿈이 크면서 긍정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근데 삶을 알아가잖아요? 그럼 꿈이 점점 줄어들어요. 하지만 부정적이었던 게 점점 긍정적이 되긴 하죠. 꿈을 크게 가지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니는 것은 40대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가봐요. 30대 까지는 부정적인 것들을 고친 거죠. 하지만 그 덕분에 꿈이 줄어든 거에요. 다시 모험을 떠나야하고 다시 열려야 되고 두려움과 싸워서 이겨야 하고 20대의 열정을 되찾아야 하는 거죠. 긍정적인 마음으로 작아진 꿈을 늘리는 게 40대의 과제라 생각해요." --- 이상은
14집 타이틀곡 'Something in the air' 귀염 돋는 MV, 라이브
(이 곡은 뉴욕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데이빗 보위 트리뷰트 파티에 갔을때 영감을 받아 쓴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위 노래와 곡제목이 같다.)

파일:attachment/이상은(가수)/lse-009.jpg
14집 미래지향적 이미지...
2010년 14집 < We Are Made of Stardust >뉴욕에서 작업한 음반으로 이상은 11집, 클래지콰이, 윤상의 음반과 브라이언 이노의 공연세션으로도 참여했던 프로듀서 KAYIP(이우준)과 함께 글리치 음악을 시도하여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Stardust 곡 후반부에 글리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실제로 이상은은 케미컬 브라더스 직접 만난 적까지 있는 비요크도 좋아하고, 네이버 뮤직과의 인터뷰에서 추천 음반으로 다프트 펑크[51]의 음반을 거론했을 정도로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사실 이상은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일렉트로닉이 대세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일렉트로니카 요소들을 선구적으로 사용해 왔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음반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특히 멜로디 메이킹과 가사가 난해하고 작위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2015년 KBS 라디오의 김홍범 PD는 방송에서 히든 베스트곡으로 14집의 'Cosmic Nomad'를 추천하며 이상은의 노래를 듣다보면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지구인지 우주인지, 내가 나인지 너인지, 난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릴 수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 참고로 14집부터는 'Breeze Music <브리즈뮤직>[52]'이라는 인디레이블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앨범까지 제작하고 있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고, 컴퓨터 음악을 배워서 음악을 직접 만들어 보고도 싶었어요. 물론 곡을 예전에도 제가 만들었지만 그것은 곡의 원형인거고 같이 작업하시는 분들이 편곡을 하게 되거든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음악을 만들면 시작단계부터 편곡을 해나가면서 만들게 돼요.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전 방식으로 작곡을 한다면, 가사를 만들고 거기에 멜로디를 붙이고, 다케다 상과 함께 코드를 붙이고, 이런 식으로 아주 클래식한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갔었죠. 근데 이건 그냥 처음부터 완성단계가 그냥 나와요. 그게 재미있었죠. 제가 누군가와 작업을 할 때는 눈치를 많이 봤었어요. 알게 모르게 다른 분들과 작업을 하다보면, 표현도 조금 줄이게 되고. 물론 컴퓨터로 작업을 해도 모든 작업들이 제가 혼자 할 수는 없지만, 이번(14집)에는 아무도 없이 제가 생각하는 걸 그냥 그려낼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자유도가 훨씬 있고, 더욱 솔직하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표현할 수 있었죠." --- 이상은
(이상은은 진작부터 일렉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말렸다고 한다. 관련기사. 결국 본인이 하고 싶은 건 하는 성격?)

2014년 2월 15집 < LuLu >를 발표하였다. 전체적으로 음반의 분위기는 빈티지 컨셉의 포근한 팝으로 회귀한 듯 하다. 또한 기존 작업방식과 달리 편곡자와 세션연주 없이 이상은이 컴퓨터장비를 이용해 홈레코딩으로 홀로 만들어낸 앨범이기도 하다. 14집때는 독학으로 Ableton Live를 공부해 작업했었고, 15집때는 Logic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14집활동 당시 유희열 라디오천국에 나와[53] 로직은 뭔가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인데 반해, 에이블톤 라이브는 화면이 컬러플해서 좋다는 독특한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결국은 로직도 접수.) 곡이 없는 상태에서 데드라인을 잡고 작업을 해 완성까지 약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집에 틀어박혀 혼자서 앨범 한장을 그냥 뚝딱! (일부 믹싱과 마스터링 같은 마무리 작업 때만 3호선 버터플라이 멤버 김남윤의 도움을 얻었다고.) 처음 시도한거라 그런지 이전 앨범들에 비해서 앨범의 완성도는 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워낙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니..오히려 소박해져서 좋다는 사람도 많지만. 암튼 새로운 도전이었고, 이제 작사/작곡/편곡에서 더 나아가 사운드메이킹/믹싱 쪽으로도 발전 가능성을 열어둔 데에 의의를 두도록 하자.
“국내에 여성 편곡자가 별로 없어요.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편곡을 하면 이성적이면서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한 편곡에선 꼭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별로 없어요. 그래도 멜로디, 노랫말과 분위기가 맞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감성적으로 접근했어요. 컴퓨터랑 낑낑대며 씨름하는 석 달간 무지 힘들었지만, 꾸준히 개척하고 도전할 신세계를 발견해서 신나고 즐거워요.” --- 이상은
(15집앨범 속지를 보면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한 멘트가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15집은 아버지가 디렉팅을 하셨다고 밝혔다. "상은아, 음악이 너무 어렵다. 너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널 봤을 때는 80년대가 기억나는데 너는 왜 실험적인 것만 하니. 사람들의 그 마음을 읽고 좀 해주면 안되겠니?"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요번 앨범은 좀 쉽게 복고풍으로 만들어봐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하긴 전작 14집은 우주로(...) 너무 멀리 가긴 했었다.)


♪ 어둠은 빛을 이길 수가 없어요. 아무리 작은 촛불 하나라도~♪[55]
15집 타이틀곡 '태양은 가득히'. 데뷔 26년차 (2014년).. 요즘 노래하는 그녀는 참 편안해 보인다.
쉬운 길 놔두고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힘들었던 시간을 거쳐 이제는 여유와 내공이 느껴지는 듯하다.

2015년 7월에는 대중가수에게 무대를 잘 내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국립극장에서 이틀에 걸쳐 단독공연을 열기도 했다.[56] 국악축제의 일환으로서 이상은은 기존 자신의 곡들에 국악적인 색채를 가미해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국립극장 공연모습.
이렇듯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에 예술성까지 겸비한 아티스트로 인정을 받고 있다.

2015년 10월 월간 객석의 인터뷰에서 16집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객석 인터뷰 근데 여긴 클래식쪽 잡지인데??

2018년 데뷔 30주년을 맞아 한 잡지 인터뷰에서 30년이란 시간동안 계속 음악을 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원래 미술을 하다가 얼떨결에 음악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런 준비없이 시작하다보니 음악에 대해 잘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고, 나는 부족하다고 늘 생각하며 계속 공부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거 같다고 답했다. 그래서 대중의 반응보다는 평단의 평가가 자신에게는 더 중요했다고. 어느정도 음악성을 인정받고난 지금은 그런거 신경쓰지 않고 나답게 하고 싶은거 편하게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대중성에서 이후 작품성을 선택하여 걸어왔지만 그건 선택의 문제였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었다며 이제는 담다디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때를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라운드 인터뷰

음악 웹진 음악취향Y에서 이상은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19회에 걸쳐 이상은의 정규앨범을 비롯한 그간의 궤적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집 리뷰

9. 50대

2019년 10월 5년만의 신작 EP앨범 <fLoW>를 발표하였다. 15집에서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 했던거 와는 달리 이번에는 이규호, 강이채, 이능룡, 박성도 등 여러 뮤지션들이 편곡에 참여했다. 영화 '벌새'와의 콜라보 뮤직 비디오도 공개되었다. 넌 아름다워

사실 이상은이 처음 강변가요제를 통해 데뷔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될거라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 이상은이 보여줬던 놀라운 진화 과정을 혹자는 한국의 가요 환경에서 나오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변화의 스펙트럼은 우리 음악사에 거의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행보에는 전형적일 정도로 명쾌한 픽션 같은 면이 있어서, 어떤 식으로 요약하든 결국 하나로 정리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무지개 끝에는 보물이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무지개 건너 보물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상은
"다들 완성된 것을 보여주는데 저는 그 과정에서 실험했던 것을 보여줬던 것 같아요. 음악도 그렇고. 매끈한 것 보다 약간 아방가르드 한 것..제가 그런 것을 좋아하니까요. 음악의 질이나 수준을 높이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저는 예나 지금이나 진심이 담긴 것을 원했고, 그런 작업들을 해 왔다고 자부해요." — 이상은
"직접 자신이 곡을 쓰고 부르는 가수의 곡을 보면 그 가수 내면의 기록이 보인다. 나 역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땐 길을 헤매는 듯 방황하는 분위기의 노래들을 썼다. '외롭고 웃긴 가게' 같은 노래들이다. 이제는 삶을 직시할 여유가 생겨 그때처럼 우울하지 않지만, 대중은 그때의 음반을 명반이라며 좋아한다. 내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우울한 기억인데 말이다." — 이상은
"한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뭔가 묵직한 심지 같은 것이 생긴다. 그저 내 일을 해 나간다는 담담함이 좋다. 여전히 재료(사운드)를 연구하고 그들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아가야 하는 일. 그렇게 뭔가 알아간다는 게 행복하다." — 이상은


[1] 3월생이지만 조기입학했다. 한 방송에서 윤종신(1969년생)이 같은 88학번이라고 얘기하자 이상은이 원래는 89학번인데 학교 일찍 들어가서 88학번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키가 작아 앞쪽에 섰었는데, 졸업할 때는 거의 맨 뒷줄이었다고 한다.[2]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길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남자아이처럼 놓아(?)기르시는 바람에 무척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6학년 때까지는 성적표도 보지 않으시고 정말 아이답게 마음껏 뛰어놀게 했고, 실컷 즐기며 놀고 나니 나중에는 저절로 공부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쌓은 자유의 에너지들이 바로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준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얘기도 했었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고, 수많은 외국서적과 명화책, 가구들이 있던 아버지의 디자인 사무실은 방과 후에 자신의 놀이터이기도 했다고 한다. 사무실에 넓디넓은 원목 회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혼날 땐 그 밑에 숨기도 좋았고, 아무도 안 볼 때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배를 깔고 미끄러지는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창 외국 유학하며 돌아다닐 때에도 딸 걱정에 하루 빨리 결혼하거나 정착하길 바라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이해한다, 가라, 내가 못했던 거 니가 하렴" 하며 항상 응원해 주셨다고 한다.[3] 그림과 연극이 하고 싶었던 이상은은 원래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이 인문계 진학해서 우선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서 미술을 하길 원하셨다고 한다. 허나 인문계 진학 후에도 여전히 연극에 관심이 많아, 고2 때는 직접 연극부를 만들고 연극부장을 맡으며 <B사감과 러브레터>의 각본, 연출, 연기를 맡았고, 한양대 청소년연극제에 출품했던 <살로메>에서는 주인공 살로메역을 맡았는데, 자신이 아닌 후배가 우수연기상을 받는 걸 보고 이후로 연기는 포기했었다고... 그 외에도 글재주가 좋아 교지에 글을 싣기도 하고, 준(June)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음악 연습도 하고 했는데, 고3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화실 다니느라 자연적으로 해산되었다고 한다. 이상은은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에 학창시절 얘기 또한 입소문으로 많이 퍼지며 화제를 모았었다. 학창시절부터 인기 많고 튀는 아이였던 데다, 공부도 1등, 학급임원에, 다재다능함까지 알려지며 그것이 더욱 10대들에게 큰 인기 요인으로 작용했다.[4] 아버지 병환도 있었고, 고3 여름 때는 집이 수해까지 입었다고 한다. 실제로 1987년 7월 서울에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났었다. 신문기사 그때 물난리로 앨범이 다 젖어 어릴적 사진이 남아 있지 않고, 키우던 강아지도 하늘로 떠나 보내야 했다고. 물난리 당시 얘기. 중간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한창 방황할 때 담임 선생님이 빵집에서 사주시며 타이르고, 아버지가 냉면 사주시며 대학은 가야된다고 타이르시는 바람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5] 아버지에게 종아리에 회초리까지 맞았을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의 어른들이 다 그랬듯이 자식들이 딴따라가 된다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들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된다. 훗날 이상은이 아버지와의 갈등에 대해서 방송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다. 데뷔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출연한 라디오 방송이다. 1988년 9월 별밤 공개방송(29분부터 관련내용이 나온다.) 들어보면 이미 데뷔 이전부터 확고한 자기소신이 있었다.[6] 이 때문에 한양대 연영과는 타 대학에 비해 출신 연예인 비중도 적고 비주얼 면에서도 그다지... 주로 영화감독이나 방송국 PD 등 연출 쪽 유명인사와 유오성, 권해효, 설경구, 이문식 등 개성파 배우들이 많다. 박미선, 전수경, 홍석천, 조혜련도 이곳 출신이다.[7] 연영과 개설년도 순으로 당시에는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청주대(충북), 경성대(부산) 등 5개 대학, 2년제 전문대학으로 서울예전이 있었다.[8] 예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의 공부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수업시간에 항상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라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했었다고. 근데 이 방법의 단점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다보면 '쟤 뭐 좀 아나보다' 하고 발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결국 수업시간에 집중하라는 얘기.[9] 데뷔 직후 이문세 별밤 라디오 공개방송에 나와서 어린 시절을 묻는 질문에 어머니가 의상실을 하셨는데 부모님이 다 예술가, 아주 어릴 때는 못 돌아다니게 몸에 끈을 매어 재봉틀 다리에 묶어 놓았다는 얘기를 했었다. 어머니가 일을 하실 때 그렇게 혼자서 천쪼가리 가지고 놀거나 종이에 낙서도 하고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가만히 생각해보면 슬픈 그림이라며, 외동은 외로워서 안 좋다는 얘기도 했었다. 후술하지만, 아버지가 일찍(초등학교 때) 재혼했기에 이는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인 듯하다. 어느 인터뷰에선 어렸을 때 엄마랑 똑같은 옷을 만들어 입고 다녔는데 그게 너무너무 좋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92년 방송에서 한 얘기를 들어보면 엄마가 그립고, 어린 시절이 그립다는 얘기를 하는데, 당시에는 단순히 외국 생활로 인한 그리움 정도로 비춰졌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체를 나타낸 거라 볼 수 있다.# 다른 인터뷰를 보면 어린 시절 얘기에 6학년 때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면서 그때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어릴 때 겪었던 그런 상처의 영향도 있었을 듯.#[10] 원래는 〈그대는 정말〉이라는 제목의 슬픈 발라드 곡이었는데, 가요제를 준비하면서 이상은의 아이디어로 '담다디'로 제목을 바꾸고 곡도 빠르게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밝은 분위기에 비해 가사 내용은 슬펐던 것이다. 담다디는 ‘아리랑’이나 ‘아으 동동다리’와 같은, 의미 없는 여흥구라고 한다. 이 노래는 후에 태국에서 무단으로 번안되었다. 가끔 인터넷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은이 태국 담디(1989년)를 표절했니 어쨌니 하는 헛소리들이 보이는데 최근에 원작자 김남균은 태국의 담디가 담다디를 허락없이 무단으로 표절하여 발표한 곡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고로 태국에서 담다디를 표절한 것이 팩트다. 참고로 '담다디'는 1986년에 만들어져서, 1988년에 강변가요제를 통해 발표된 곡이다. 처음에 담다디 작곡자로 알려졌던 김남경 감독은 2010년에 사망하였다.(기사) 저작권 소송을 통해 '담다디'는 현재 김남경 감독의 동생 김남균으로 저작권 등록이 되어 있다. (기사)[11] 물론 그전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과 부모님, 함께 연습한 친구들 얘기는 했다.[12] 잘 언급되지 않는 얘기지만 이상은이 1988년 10월 MBC FM <FM은 내친구> DJ를 맡았을 당시 만18세로 이는 여성 단독 진행자로 최연소 기록이 된다. 태연이나 이수현이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 여성 DJ라고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들은 만19세 때이므로 사실을 따져보면 현재까지도 이상은이 최연소가 맞다. 참고로 최연소 남성 단독 진행자는 2004년 만17세 때 DJ를 맡았던 장근석. 2004년 이전까진 이상은이 지상파 라디오 최연소 단독 DJ였다.[13] 이상은이 당시 대단했던 점은 요즘 아이돌들이 각종 트레이닝을 거쳐 데뷔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반면, 이상은은 그냥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완전 생초보 상태에서 여러가지 활동들을 다 소화해 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상은은 MBC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 되었던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탄 직후부터 그야말로 아주 난리가 났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조차 할 새가 없었다. 당시는 TV 방송 채널이 KBS와 MBC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방송 파급효과가 요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다.[14] 유사한 경우로 이선희가 있다. 1984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부른 'J 에게' 단 한곡으로 가요계를 강타했고, 상이란 상은 다 휩쓸어 갔다.[15] 인기 절정 시점에 유학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갈등은 없었냐는 질문에 "참을 만큼 참았거든요. 한달만에 어떤 느낌이 있었고 그 나머지 기간은 제가 참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때 심야 프로그램 DJ를 하고 있었는데 딱 마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뭐... '아 지금 이때다'라고 생각했죠."[내용] 이상은의 신데렐라 스토리 #1, #2, #3, #4, #5, #6, #7, #8, #9, #10, #11, #12[17] 민해경(본명 백미경)의 히트곡들, '비오는 날의 수채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이상은의 1집 프로듀서를 맡았던 강인원은 "특이한 아이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상은은 선머슴 같은 느낌이고 발랄한 댄스 가수인지라 내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만나보니 착하고 맑은 심성을 가지고 있어 마음에 들었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재기발랄한 이상은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강인원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그녀의 여성성을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음악적 실험을 시도했다고 한다.[18] 실제로 이는 거의 30년이 지난 현재의 여초 사이트에서 댓글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1, #2 게다가 당시의 이미지는 요즘 젊은 연령층에게도 먹히는 모양. #3, #4[19] 당시엔 10대에 가수 데뷔하는 거 자체가 극히 드물었고, 특히 가요제 출신이 10대인 경우는 이상은이 유일했다. 참가 자격이 대학생이었던 가요제 특성상 아무리 빨리 데뷔하더라도 20대 초반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이 데뷔했던 이상우보다 7살이 어리고, 강변가요제 전년도 대상 수상자였던 문희경보다도 5살이 어렸으며, 같은 해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자인 신해철과도 2살 차이가 났다.[20] 성우 윤소라는 담다디 때 이상은이 선머슴 같았다고 추억한다고. #[21]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데뷔 초기의 허스키하고 볼륨감 있는 음색에, 힘 있고 시원시원한 보컬스타일에서 음악적 변화와 함께 서서히 목소리에 힘을 빼고 부유하는 듯한, 한층 맑고 담백한 창법으로 변화하였다. 타고난 성대가 약한지 아니면 성대결절 후에 관리도 없이 무리하게 활동했던 후유증 때문인지 무리하면 목이 잘 쉬기도 해서 컨디션에 따라 라이브 편차가 있는 편이다.[22] 지금 보면 짠한 모습이기도 한데... 돈에 눈먼 어른들 세계에서 어린 이상은은 심하게 상처 받고 부서지고 있었지만, 특유의 밝고 파워플한 외양 때문에 다들 전혀 그런 점은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카메라 앞에선 이렇게 귀엽게 잘 노는 모습으로만 보이는데, 그 실상을 알 수가 있었겠나...[23] 20년 후 장진이 감독한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년)와는 다른 영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꿈꾸는 여대생 역을 맡은 이상은은 배낭 여행 중 만난 외국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아침 인사가... 영문을 모르는 남자 주인공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황당해하는 장면도 나온다.[24] 당시 인기 가수들을 주연으로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는데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더군다나 데뷔한지 채 1년도 안된 여주인공 원톱 영화임을 감안하면 이상은은 그래도 양호한 편임. KMDb 자료를 살펴보니 당시 서울 관객 기준으로 이승철은 6649, 박남정은 28,900, 강수지 6792, 김흥국 131(...). 당시엔 대부분의 영화들이 단관 개봉되던 시절이었고, 지금처럼 전국 관객의 수를 측정할 수 없어서 서울 관객의 수가 곧 흥행 척도였다. 참고로 80년대 흥행작으로 불리던 전영록 주연의 액션 영화 돌아이 시리즈도 최대 서울 관객수가 98,600명 정도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가왕과 최고의 여배우 유지인이 주연한 영화도 서울관객 71,209명에 그쳤다. 전작 '담다디(서울관객 27,593명)'에 비하면 그나마 모았다.[25] 오석준, 장필순, 박정운. 참고로 당시 코러스의 여왕으로 불리던 장필순은 이상은 2집에도 코러스로 참여하였다.[26] 1980년대 영화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손발이 오글오글...[27] 비슷한 맥락으로..1989년도쯤 잡지 기사인데 팬들과의 만남 중에 한 얘기.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도 좋아하는데 내 생각에는 지구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해. 또한 단순히 좋아해서라기보다 배울점이 많아서거든. 그리고 난 여고시절 때까지만해도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연예인을 좋아했어. 그래야 나의 생활이 깨지지 않으니까. 이건 너희들에게도 하고픈 이야기야 알았니?"[28] 신기하게도 '사랑할거야' 이 노래는 표절판정 이후에도 박혜경, 서영은, 바다, 등이 리메이크 했고, 케이윌이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 이상은, 이상우> 편에 출연했을 때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다. 얀 사랑할거야 라이브[29] 신해철의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작곡자이기도 하다. 한양대 작곡과 출신으로 그룹 아기천사의 여성 키보디스트였다. 1988년 강변가요제에 아기천사도 참가했지만 본선 진출엔 실패했었는데, 가요제 때 신해철이 객원 보컬로 참여하면서 부른 곡이 바로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이다. 아기천사 데뷔 앨범에도 '사랑할거야'와 '슬픈 표정...' 두 곡 다 실려있다. 이상은이 방송에 나와서 '사랑할거야'가 같은 학교 선배의 곡이라고 소개까지 했었는데 알고보니...[30] '그대 떠난 후' 이 노래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미리 이별을 고하듯이 뭔가 의미심장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잖아[31] 이 노래는 '그대 떠난 후'로 얘기하면 잘 모르고 '똥꼬베이베'(...)라고 말해야 알 정도로 제목보다 후렴구가 더 유명한 곡이었다. 당시 이상은이 출연했던 드라마 내에서 할머니가 TV를 보다 이 노래를 듣고 "똥꼬베이베가 뭐야?"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똥꼬베이베가 아니라 영어로 Don't go babe"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영상), 그 강력한 똥꼬 한 방 때문에 팬들조차 그렇게 부르고 다녔었다(...). 참고로 이 노래 작곡자 박정원은 후에 그룹 '모노'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이상우의 곡들, 가을동화, 겨울연가의 OST를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32] 어렸을 때부터 AFKN(미군방송)을 즐겨 보고, 가요보단 팝송을 좋아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 같은 데에 나와서도 본인 노래 외에는 주로 팝송을 많이 불렀다.[33] 여러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수많은 팬레터 중에 글씨가 어른스러워서 열어봤더니 어느 지방대 교수님이 보낸 편지였다고. '캐롤 킹을 아느냐. 한번 들어봐라. 너 이대로 가면 뻔한 아이돌밖에 안된다.' 대략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 편지를 읽고 잠을 못 잤다고 한다. 근데 그런 편지들이 한두 통이 아니었고, 당시엔 많이 힘들었는데 오히려 그때 그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질책을 받았던게 남들보다 일찍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된거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34] 이상은은 자신의 SNS에서 창작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앨범이 '어떤날 2집'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참고로 어떤날의 조동익은 이상은 2집에서 편곡과 베이스 세션으로 참여했었다.[35] 고등학생 때 친구따라 들국화 콘서트에 갔다가 '우리나라에도 이런 음악이 있구나'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상은이 일본 방송에 출연해 한국 음악 소개할 때도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추천했을 정도로 팬이고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방송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 '사랑한 후에'를 부른 적도 있다. 참고로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은 이상은 2집에도 참여했었다. 이상은 캐롤 앨범에도 들국화의 노래가 실렸고, 이상은이 부른 '매일 그대와'도 유명하다.[36] 백남준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37] 당시 대중성을 잘 아는 전문 작곡가(안진우)를 뉴욕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상은은 작곡가에게 '마음대로 만들면 잘 안 팔린다. 한 곡정도는 같이 작업하는게 어떠냐'라는 말을 들었었고, 그래서 '언젠가는'은 만들어진 기타 코드를 듣고 이상은이 멜로디와 가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타이틀곡 '언젠가는'은 이상은•안진우 공동작곡이다. 그 외엔 단독작곡. 참고로 4집이 100% 컴퓨터 사운드였다면, 5집은 No 신디사이저, No 메트로놈의 전 곡 어쿠스틱 사운드이다.[38] 일본명 姜信子(쿄 노부코). 재일한국인 3세로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가장 보통의 재일한국인' 이란 책으로 1988년 아사히 저널상(논픽션부분)을 받은 저널리스트이다. 1989년에 공무원인 일본인 남편의 한국 파견근무로 잠시 한국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모습이 MBC TV 인간시대- 「쿄 노부코와 강신자」편을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1991년에는 한국에서 일본 및 모국 체험수기인 <두개의 이름>을 출간하였다. 이후 이상은이 일본에 있을때 음악생활을 이끌어주고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39] 이후 이 말은 이상은이 일본 활동할 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음반사 관계자의 인터뷰를 봐도 이상은의 호소력 있고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적인 목소리가 최대 강점이라고 말한다.[40] 여성 뮤지션의 앨범 중에서는 최고 순위. 또한 이상은의 7집 역시 99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41] 김현철은 이상은 2집에도 건반 세션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42] 7집 '사람은 다 사람' 가사중에 화성이 나온다. 참고로 원곡인 영어버전 'Simple Like People'에서는 화성이 아닌 목성으로 되어 있다. 'Why do people move to Jupiter?'[43] 1956년 오사카 출생으로 6살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한다. 70년대 말부터 나가부치 츠요시 등 일본 내 유명 뮤지션들의 세션으로 활동하였고, 1994년부터 이상은과 같이 작업하며 이상은의 음악 성장에 도움을 준 선생님이자 음악적 동반자로 불린다. 2009년 이상은의 노래들을 피아노로 연주한 음반 《Mono》를 발표했다.[44] 외국 활동이 많아지면서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해 만든 것.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서 착안해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리채란 이름을 씀으로서 본의아니게 팬들에게는 지금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란 것도 알려지게 되었다. 데뷔때부터 알려진 어머니는 '지'씨 성을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아주 어렸을때 헤어져서(언제인지 정확히 밝힌 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때 전학을 3번 정도하고(서울 홍은초- 서울 안산초- 충남 아산 탕정초- 4학년때 서울 재동초로 전학해 졸업함), 2학년때 잠시 시골에서 살았다고 한 점으로 미뤄볼때 그즈음으로 짐작) 친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고, 새어머니가 좋으신 분이고 어렸을 때부터 항상 옆에서 챙겨주시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분이라 거의 친어머니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데뷔 초기때부터 최근(2016년) 공연까지도 어머니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목격될 정도이다. 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집안에서 밀어 붙인 정략결혼이었는데, 이혼 후 원래 연인이셨던 지금의 어머니와 다시 합치신 거라는 얘기도 했었다. 비록 어릴때 상처는 있었지만, 무남독녀로 애지중지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어느 절친 정유희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은의 공주 부모님댁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아버님이 딸에게 해줄 음식 리스트를 직접 그림까지 그려서 짜놓은 것을 보고 상당히 인상깊었고, 또 바쁜 딸을 위해 책도 미리 읽어보고 좋은 책들을 골라 선물해 주시는 멋진 딸바보셨다고 한다.) 리채란 이름을 쓴 것도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새어머니 성씨를 붙인 '리지' 보단 친어머니의 성씨를 붙인 '리채'가 여러모로 나아보여서 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45] 백지연 피플인사이드 인터뷰에서 과거 일본활동 당시의 생각들을 얘기했었다.(25분쯤부터) 다른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가면 꼭 전사가 된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46] '어기여디어라' 곡에 대한 이상은의 코멘트 : "일본에서 만들었구요. 당시 제가 마음속으로는 일본을 미워했어요. 어떻게 하다보니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너무 짜증나는 거에요. 실제로 살아보니까 전혀 차별이 없다고 말할수 없고, 어렵고 힘들고 짜증내던 어느 순간 '아냐, 이렇게 계속 미워만 하면 안돼'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이랑 손을 붙잡고 함께 갔으면 좋겠다.. 사실 (가사) 배에 탄 두 사람이 한국과 일본이거든요. 화해를 하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혼자 스스로에게 심어주며 만든 곡인데 용케도 그걸 알았는지 일본에서 그 노래를 많이 좋아해 주었죠. 이 곡은 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만든 노래에요."[47] 영화제작사 알타미라 픽처스의 프로듀서가 우연히 NHK 방송에서 이상은이 한국어로 '어기여디어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뜻은 모르지만 왠지 자신들의 영화와 어울릴거라 생각하고 연락을 해왔는데, 배(고등학교 조정부)에 관한 영화에 배에 관한 노래여서 오로지 그 음악적 느낌만으로 이상은을 음악감독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일본 영화 관계자들은 '이건 대단한 우연의 일치'라며 놀라워 했었다고. '간밧떼 이키맛쇼이'는 1995년 '봇짱 문학상' 대상 수상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98년 소규모로 개봉되어 꾸준한 선전으로 평판을 불러, 이례적인 롱런 상영을 기록했고 각 영화상을 휩쓸며 인기작이 되었다. 2005년에는 동명의 TV 드라마로도 제작 되었다고 한다.[48] 그때 경합붙었던 가수가 우타다 히카루ㄷㄷ라고 한다.(관련 인터뷰) 결과적으로 회사입장에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밖에.[49] 당시 김광진과 이상은이 시상식 MC를 맡았는데, 사회를 보던 이상은은 수상을 위해 사회자석에 김광진만 남겨둔 채 무대로 나와야 했다.[50] 이상은을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한 6집 공무도하가의 프로듀서로 이상은이 음악적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미국 유학파에 독일에서 레이저 빛을 쏴서 그림 그리는 작업을 하고 ,영국의 록밴드 더 후핑크 플로이드 그리고 밴 헤일런 공연의 조명감독도 했던 인터내셔널한 레이저 아티스트 출신이라고 한다. 처음 이상은을 픽업했을 때도 고상한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며 친구인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들려줄 만한 음악 좀 만들어주면 안되겠니? 그랬었다고. 사실 공무도하가 앨범은 자신보다 그 분의 색깔이 더 많이 묻어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요구하는 수준이 높고 한번 작업하고 나면 다시는 같이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스파르타 식으로 몰아부치는 스타일이라 프로듀서는 같이 작업하길 원하는데 자신은 너무 힘들어서 계속 눈치 보며 피하게 된다고(...). 그래도 2015년 이상은의 국립극장 공연에서도 같이 있는 모습이 목격된 걸 보면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듯 하다.[51] 2002년 KBS2 FM '이상은의 사랑해요 FM' 진행할 때 DJ취향의 선곡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다프트 펑크의 'One more time'을 많이 틀어줬는데, 청취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면서 '교가'로 선정되며 수시로 춤판(...)을 벌렸었다. (청취자들에게 애칭으로 DJ는 쌤, PD는 교장쌤으로 불렸고, 간혹 방송에서 출석을 부르곤 했었다.) 이 곡은 몇년 후에 광고에도 쓰이며 국내에서 히트하기 시작했다. 뒷북? '제2교가'도 있었다. 역시나 들썩들썩! 근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이런 음악들을 틀다가 너무 시끄럽다며 윗선에 찍혀서 1년만에 짤렸다고 한다. 2015. 전설의 귀환 DJ라이브 (5분쯤부터 짤린(...) 얘기가 나온다.) 음악 외에도 파격적인 진행이 많았는데 방송 도중 갑자기 번개를 때려 여러 번 모였는가 하면, 만우절때 장난으로 뜬금없이 추억의 만화 주제가를 한곡 틀어줬는데 반응이 폭발하자,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라 만화절로 하자며 아예 즉석으로 청취자 신청곡을 받아 만화주제가만 쭉 틀어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심야 시간대도 아니고 초저녁에 지상파에서 더군다나 KBS에서 저런 짓(?)을 했으니.. 실제로 몇년 후 담당 PD의 이 글을 보면 초반엔 DJ랑 맨날 싸우고 중간에서 조율하느라 상당히 고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동갑에다가 싸우다 정들었는지(...) 지금까지도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2010년 KBS 언론 노조 총파업 때는 이 PD와의 의리로 응원차 이상은이 무대에도 올랐을 정도이다. 기사 여담으로 이후로는.. 특히 MBC FM '이상은의 골든디스크' 때는 국장, 부국장 등 높으신 PD들만 오는 바람에 개기지 못하고 비교적 차분한 선곡과 진행을 선보였다. 당시 인터뷰 MBC 총파업 사태때는 직접 콘솔까지 잡고 방송했었다.[52] 2009년에 만든 이상은의 1인 기획사. 14집부터 음반 제작은 Breeze Music, 유통/배급은 Sony Music으로 하고 있다. 14집 활동당시 자체진행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15집때는 브이엔터테인먼트와 따로 매니지먼트 계약(1년)을 맺고 활동하였으나, 2015년 재계약 없이 계약종료 한 것으로 보인다. 워낙 묶여있기 싫어하는 사람이라..[53] 이때 유희열이 자기에겐 아주 친숙한 분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바로 유희열 아내 이름도 이상은이었기 때문이다. 동명이인이다.[54]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성격상 자꾸 조급하게 진도를 건너뛰다가 나중엔 뒤죽박죽 되어 버려서 그만뒀다고 한다. 악기는 조금씩 다루기는 하지만 남들 앞에 보이기엔 민망한 수준이라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다는 말로 짐작해 보건데, 악기 연주와 같이 꾸준히 반복 연습을 필요로 하는 것엔 약한 모습을 보이고 또 쉽게 싫증을 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운동도 별로 안좋아하는 편이고, 유일한 운동이 춤추는 거(...)라고 말했었다.[55] 2014년 발표한 곡인데, 2016년 겨울 촛불집회 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라는 말이 많이 쓰이면서 한 기자는 이상은의 노래 가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기사. 조성모도 라디오 방송에서 이상은에게 미리 어떻게 알고(...) 그런 가사를 썼냐며 감탄하기도 했었다.[56] 이 공연은 단순 대관공연이 아닌 '여우락(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이라는 국립극장 기획공연이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전통예술을 중시하는 국립극장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과 더불어 일반 대중가수에게는 대관 조차 쉽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 2009년에는 김장훈이 대관신청했다가 '대중가수 공연은 대관규정에 없기 때문에 접수 자체가 안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한바탕 논란 끝에 대관이 성사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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