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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48:19

익산 이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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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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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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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전라북도 익산시
시조 이문진(李文眞)
집성촌 익산시 금마면
인구 1,970명(2015년)
1. 개요2. 상세3. 사실여부4. 인물5.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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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익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고구려 영양왕의 왕명을 받아 역사서 신집을 편찬한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을 시조로 삼고있다.

2. 상세

익산 이씨 대종회에 따르면 신집을 편찬한 공으로 공신후로 책봉되고 이후 백제의 공주와 결혼하여 백제왕으로부터 익산땅을 영지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 후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후손인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위(太尉)를 지낸 이의(李誼)를 1세조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익산군 성씨 조를 보면 익산의 토착 성씨로 이씨가 거론되고 있고[1], 더불어 성이 이씨면서 익산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시대 인물들도 여럿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최소한 고려 시대부터 익산에 이씨가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3. 사실여부

그러나 대종회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다르게 영양왕 때의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다. 백제 위덕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며 이 사실을 안 영양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를 직접 공격하기까지 한다.

즉, 이문진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면 저 내용은 성립할 수가 없다. 심지어 정말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제왕이 망명한 적성국의 귀족에게 자신의 공주까지 내어주었다는 것은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물론 다른 사서와 교차검증도 안 되기 때문에 사실상 백제와 관련된 부분은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2]

익산 이씨가 정말 이문진의 후손이라면 고구려부흥운동을 하다가 당나라군에 밀려 본토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이후 신라왕의 배려로 구 백제령에 정착한 보덕국의 유민이라는게 훨씬 설득력이 있다. 부흥운동을 전개하던 고구려인들 중에는 필시 이문진의 후손도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가문의 본관도 옛 보덕국이 있던 익산 지역이다.

4. 인물

5. 외부링크


[1] #[2] 다만 이런 일이 진짜로 있었다면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왕권과 왕실의 권위가 몹시 떨어져 있던 위덕왕이 외국의 저명한 인사의 망명에 크게 반가워하며 선전을 위해 이례적으로 후한 대우를 해준 것일 수도 있다(그래도 공주까지 내준 건 너무 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공주 중에는 후궁 출신의 서녀도 있었기에 적녀인 공주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또한 이문진은 정치에 관여한 관리보다는 학자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딱히 배신 같은 게 아니라 사직을 하고 그냥 당대 지식인이었던 승려들처럼 학술적인 목적으로 떠돌았던 것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고구려의 내부 학술정보를 알고 있던 이문진이 적국 백제로 간 걸 고구려측에서는 썩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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