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징비록(드라마)
1. 임진왜란 발발 전
1.1. 제1회1.2. 제2회1.3. 제3회1.4. 제4회1.5. 제5회1.6. 제6회1.7. 제7회1.8. 제8회1.9. 제9회1.10. 제10회1.11. 제11회1.12. 제12회
2. 임진왜란 발발 후2.1. 제13회2.2. 제14회2.3. 제15회2.4. 제16회2.5. 제17회2.6. 제18회2.7. 제19회2.8. 제20회2.9. 제21회2.10. 제22회2.11. 제23회2.12. 제24회2.13. 제25회2.14. 제26회2.15. 제27회2.16. 제28회2.17. 제29회2.18. 제30회2.19. 제31회2.20. 제32회2.21. 제33회2.22. 제34회2.23. 제35회2.24. 제36회2.25. 제37회2.26. 제38회2.27. 제39회2.28. 제40회2.29. 제41회2.30. 제42회2.31. 제43회2.32. 제44회2.33. 제45회2.34. 제46회2.35. 제47회2.36. 제48회2.37. 제49회2.38. 제50회
1. 임진왜란 발발 전
1.1. 제1회
- 첫 장면에서 류성룡이 피를 토하면서 징비록을 저술하는 집이 실제로 류성룡이 말년에 징비록을 저술한 장소인 경상북도 안동의 옥연정사다.
-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문제로 조정 대신들과 의논하는 장면에서 류성룡이 신숙주의 예를 언급하는데, 이는 실제로 징비록 도입부에서 신숙주가 언급되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숙주의 유언인 "앞으로 일본과의 화친을 잃지 마십시오"라는 말도 인용하고 있다. 신숙주는 대명 외교, 대여진 외교, 대일 외교에서 모두 활약한 인물이었는데 특히 일본의 역사와 지리, 문화 등 일본에 대해 상세히 서술된 해동제국기를 저술할 정도로 조선 전기 최고의 지일파 인사였다. 뒷날 징비록이 일본에도 널리 퍼졌기 때문인지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가 조선 통신사에게 신숙주 이야기[1]를 꺼내거나 (해동)제국기라는 책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거나 했을 정도[2] 로 일본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역모의 주동자로 몰린 정여립이 칼을 거꾸로 세우고 자살한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1.2. 제2회
- 기축옥사 와중에 류성룡이 제발로 추국장을 찾아가고 선조가 이를 용서하는 것은 기축옥사 당시 죽은 백유양이라는 사람의 진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이유로 류성룡이 직접 자신을 체직시켜 달라고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을 각색한 것이다. 기축옥사 때 류성룡과 이산해가 서인계 유생들에게 자주 탄핵되었지만 선조는 끝내 이들을 비호해 주었는데, 이는 사실 선조의 정치적 안배라고 보는 해석이 유력하고, 드라마에서도 송익필의 입을 통해 류성룡을 보호하는 선조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쓰루마쓰(츠루마츠)를 위해 전국 다이묘들이 선물을 보내온 장면에서, "시네마 현이 보내 온..."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일본사에서의 '폐번치현'(廃藩置県, 행정구역으로서의 '번'을 폐하고 '현'을 둔다)이 메이지] 4년(1871)에 단행된 먼 훗날의 일이므로, '시네마 현 '이라는 대사는 고증 오류. 거기다 '시네마'가 아니라 '시마네'가 옳다. 더불어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은 분국제였으므로 시마네도 틀렸다. 옳은 명칭은 이즈모 국. 보다 정확하게 따지면 현 시마네 현의 동부가 이즈모 국이고 시마네 현의 서부는 이와미 국이 되지만…, 사실 이즈모, 이와미 양쪽 지방 모두 모리씨를 다이묘로 섬기고 있었으므로, 더 적절한 대사가 되려면 모리씨의 본거지인 "아키 국(현 히로시마 현)으로부터의 진상품", 혹은 "아키 모리씨로부터의 진상품"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즈카타케를 시즈카케타라고 잘못 말했다. 그런데 처음에만 잘못 말하고 배우들은 시즈카타케라고 잘만 말한다(...).
- 위 장면에서 묘사된 시바타 카츠이에의 전 가신이 벌인 암살 시도 역시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다. 소설에서는 다루어진 적이 있으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아마도 히데요시의 주도 아래 이제 막 통일이 된 일본의 불안한 내부 사정을 표현하기 위해 삽입된 장면인 듯하다.
1.3. 제3회
- 고니시 유키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오다와라성의 호조 우지나오[3]가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성 전투(1590년)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오다와라성은 호조 가의 4대 당주 호조 우지마사[4]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성은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공격도 막아낸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시가키성을 건축하고 식량을 공급하는 교통로를 봉쇄하여 호조 우지마사의 항복을 받아낸다. 극에서는 고니시의 계책을 받아들여 지구전을 택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아직도 키리시탄(천주교)을 믿나?"라고 질문하고 "전하께서 버리라고 명하셨을 때, 그 순간 제 마음 속에선 말끔히 지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금교 정책을 폈고 반대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갈등 원인 중 하나가 가토의 영지에서 도망친 신자들을 고니시가 받아 준 일일 정도. 전쟁을 반대한 이유도 신앙과 관계 있으며[5], 고아원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요양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후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했을 당시 할복하지 않은 이유도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6]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로 마음을 숨기는 것에 대하여 보복을 다짐하는 장면은 사실과는 다르다. 애초에 당시 동북의 강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 굴복시킨 히데요시가 고니시에 대해서 그 정도의 의심을 가졌다고 한다면 굳이 조선으로 보내어 전공을 쌓게 하는 것보다 간단하게 다이묘들 앞에서 할복을 명하고 난 이후 다른 인물을 보내는 게 실질적인 이치에 들어맞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기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같은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유력가문의 다이묘가 배반을 할 때 끝까지 서군의 편에서 맞서 싸웠던 충신이다.[7]
- 광해군과 의인왕후 사이가 굉장히 가깝게 묘사되는데 이는 <의인왕후 행장>에서 왕비가 광해군을 지극히 총애했다는 대목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례적인 상찬에 가깝다. 중전은 모든 왕자녀들의 어머니로 대우받는데 의인왕후는 드라마 속에선 껄끄럽게 묘사된 인빈 김씨의 자녀들도 어머니 입장에서 잘 돌봐준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별히 광해군을 총애했다 볼 근거는 희박하다. 그래도 생모가 살아있는 신성군이나 정원군보다는, 광해군을 지원하는 편이 왕비로서의 실권과 입지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 그러므로 광해군과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리라 보는 것도 자연스럽고 무리없는 전개이다.
1.4. 제4회
- 가토 기요마사가 "야마나카성을 함락시켰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호조 가의 서쪽 방어 요새 야마나카성을 말한다. 이 성은 마츠나가 고우슌이 지키고 있었고 난공불락의 산성이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3시 경부터 공격을 시작해 6만 8천의 군사로 불과 2시간 만에 함락시켰다.
-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선과 일본, 양쪽에 벌인 국제적 사기극은 놀랍게도 사실이다. 후일 심유경과 벌이는 국제적 사기극과는 별개의 사건으로, 전쟁을 막아보려는 시도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지속시키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게 된다. 덧붙여 연회장에서 도요토미의 아들이 도요토미의 옷에다 오줌을 눈 것(...)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등장하는 기록이다.
- 울지 않는 두견새 이야기와 오다 노부나가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에도시대 시가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통신사와의 접견 자리에서 히데요시가 춤을 출 때 들고 있는 부채를 유심히 보면 조선, 일본, 명 삼국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실제로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었던 부채다.
- 세자 책봉 건으로 류성룡이 대제학 이성중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쫓겨나는 일을 언급하는데, 실제로는 단독으로 올린 적이 없고 정철 등과 함께 건의할 때 올렸다.
1.5. 제5회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답서에 썼던 태몽 이야기는 사실이다. 그의 어머니 오만도코로는 태양이 아기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는데, 이것을 조선에 보내는 답서에 그대로 썼던 것이다.
- 이항복이 이덕형을 죽마고우라고 칭하고 이덕형이 이항복을 자네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이항복과 이덕형은 어린 시절부터의 죽마고우가 아니라 과거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고 이덕형은 이항복을 격식없이 형이라고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8] 또한 이항복과 이덕형의 당파가 서로 다르다고 표현되는데, 실제로 이덕형은 극중에도 등장하는 동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인 데 반해 이항복은 기축옥사에서 정철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실무형 관료에 가까워서 당색이 강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정철이 류성룡과 선조에게 세자 책봉 문제에 대해 건의하러 갈 때 이산해가 감기로 나오지 않은 것은 실제로 이산해가 병을 이유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던 일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1.6. 제6회
- 세자 책봉 건으로 상소할 때 자막으로 표시되지 않았지만 정철, 윤두수 뒤에 이성중, 이해수가 나왔다.
- 류성룡이 천거한 장수로 이순신, 권율, 송상현이 언급되었다.
- 여진족 관련 건으로 누르하치가 언급되고 이를 보고한 장수로 부령부사 원균이 언급되었다. 다만 극중에서 묘사되는 일본 측 인명과 달리 조선에서 누르하치를 노추(奴酋)나 노을가적(奴乙可赤)이라 부른 게 재현되지 않은 건 아쉬운 부분.
- 극중에서 이순신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의 편지를 통해 이순신의 조카들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정의 3남이었는데, 형들이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남은 조카들을 맡아 키우게 되었다. 특히 정읍현감으로 부임하면서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이들을 데려간 점이 극중 장치로서 잘 고증되었다.
- 이일이 말했던 이순신의 청탁 거절 사례들은 실화이다.
- 일본 조정에 류큐국 왕자가 입조했고 루송(루손)이 언급되었다. 실제로는 히데요시가 1592년에 조선 침공을 하자 출병을 요구하긴 했지만 거절했을 뿐 류큐가 굴복하지 않았으며, 조선 침공에 앞서 루손에 두 세 번 협박을 가했다.
1.7. 제7회
- 히데요시가 술을 마시면서 자기 때문에 고생만 하다 죽었다며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실제로 전쟁 전인 1591년에 사망했다. 또한 히데요시가 자신이 해외를 정벌하려는 이유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 칭기즈 칸 등을 언급했다.
- 주균왕이 석성에게 보고할 때 자신에게 정보를 알려준 허의후에 대해 언급했다.
- 마지막에 일본군 함선이 한 척이라도 침입할 시 자신이 직접 '쓰시마'를 정벌하러 가겠다고 선조가 선언하는데, 다음 회 맨 처음에 이 장면이 다시 방영되었을 때에는 '대마도'를 정벌하러 가겠다는 말로 수정되었다. 처음에 찍고 난 뒤 아차 싶어서 배우로 하여금 올바르게 수정된 대사로 재차 연기하게끔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제작진이 그래도 고증에 나름의 신경을 쓰고 있다는 대목.
- 임진왜란 직전 하삼도 민심을 이반케 한 것은 전쟁 난다는 소문에 다 피난간 탓이 아니라 이 평화로운 시대에 무슨 전쟁이 난다고 성 쌓고 훈련해서 농사도 못 짓게 하냐는 불만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조정도 전쟁준비 과정에서의 민심이반 문제를 통감했다. 선조는 개전 후 교지를 내려 성을 높일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깊어지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언급했으며 경상감사로 특히나 축성작업에 열을 올려 원망을 산 김수는 전쟁 중에 감사 시절 인심을 잃어 일을 그르치게 했다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합천사람 이노가 자신에게 보내온 서신을 인용했는데 이를 통해 축성작업이 남부 전역에서 진행되었으며 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음을 짐직할 수 있다.
1.8. 제8회
- 고니시가 히데요시의 필적을 위조하기 위한 샘플로 히데요시가 쿠로다 칸베에에게 보낸 편지를 사용했고, 조선을 정벌하기 위한 선봉을 추천하는 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언급했다. 여담으로 이에야스는 이때 쿠노에의 난을 진압하고 있었다.
- 류성룡이 진관체제 회귀를 주장한 건 사실이다. 극중에서 류성룡과 신립이 진관체계와 제승방략체계에 대해 설전을 벌인다. 제승방략체계는 지방의 각 진에서 군대가 한곳으로 모이고, 중앙에서는 통솔할 장수를 해당지역으로 파견하는 것이다. 군대의 수가 적을 때 한 곳으로 군대를 모아 숫적인 열세도 극복하고, 이에 따른 효율적인 통솔도 할 수있는 것이 제승방략체계의 장점이다. 하지만 군대가 정예병이 아닐 경우는 무용지물이고, 한 번 패배로도 대량실점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이에 반해 류성룡이 주장한 진관체계는 해당장수가 각 진에서 병력을 조련하고 굳건히 지키면, 다른 곳에서 패배해도 각각의 다른 진들은 무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병력의 수가 적고 다른 진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극 중에서는 진관과 제승방략에 대해 자막과 함께, 류성룡과 신립의 설전을 제시해 각 제도의 장단점을 자세히 비교했다. 임란 발발 후에도 종종 극 중에서 관련 논쟁이 이어진다.
1.9. 제9회
- 선조가 정철에게 은잔을 하사하고 이 잔으로 한 잔만 마시라고 명했으나 정철이 술을 더 마시고 싶은데 어명을 어길 수도 없어 은잔을 망치로 넓혔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참고로 비슷한 야사가 세종과 윤회, 성종과 손순효 사이에서도 전해진다.
- 히데요시가 자신이 직접 조선을 정벌을 하겠다면서 이에야스가 자신을 따라오게 하려고 했는데, 마에다 토시이에가 이에야스에게 군사를 주면 관백 합하를 공격할 것이라면서 노부나가가 아케치(아케치 미츠히데)의 공격을 받고 죽은 것을 이야기한다.
- 성절사로 파견되었던 김응남이 돌아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1591년에 김응남이 명나라에 성절사로 파견되어 돌아왔다가 명나라에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는 것을 의심했다. 이로 인해 김응남이 성절사로 다시 파견되어 이에 대해서 해명했다.
- 류성룡이 군정이 문란하여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병사가 많다고 하는데 군정폐단, 규정에 미달하는 군사, 병기 문제 자체는 실록에 많이 등장하지만 적어도 1591년에는 아니었다. 선조는 선대왕 중종, 명종에 비해 군사문제에 관심이 많았고(참형같은 극약처방을 즐겨쓴 탓에 그러한 관심이 꼭 긍정적으로만 작용한건 아니지만) 전쟁 한참전인 1570년대부터 장부와 실동원력의 괴리를 파악하고 이를 보충하는데 주력해 적어도 임진왜란 직전에는 장부와 실제 군사수가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발포만호 시절 불시 인원점검에서 결원 3명 나온걸 빌미로 처벌 당할뻔 했을 정도로 선조때는 군액 관리가 잘 된 편이었다. 물론 발포진의 결원이 제일 적었고 이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순신을 몰아내려는 핑계에 불과했다. 이순신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진포의 결원명단을 들이대며 조목조목 반박했고 오히려 본인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진 전라좌수사 이용은 장계를 되돌린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동원된 군사숫자와 계사년 1월 보고된 각도의 병마숫자를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애집》에선 1589년 병조판서를 겸할 때 팔도의 군안을 작상해 보니 이런저런 병종을 합쳐 총 35만이었다고 적고 있다. 임란 발발이후 전투력에서 문제점을 노출시켰지만 이는 제대로 된 전투력을 담보할 수 없는 편제와 운용(숙련된 부사관 계층전무, 훈련도감같은 급료병 없이 번상제로 돌아가는 중앙군, 전쟁 이전까지 정해지지 않는 총사령관)의 문제였지 동원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담으로 임진왜란때 군역 문란으로 실 동원 병력이 적었다는 설은 원균 옹호론에서도 곧잘 주워섬기는 주장으로 동원체계에 문제가 있어 수군을 동원할 수 없었다며 원균을 옹호한다.
1.10. 제10회
- 홍여순과 김공량의 대화에서 홍여순의 조카딸인 정빈 홍씨가 언급된다.
- 1591년 시점인데
파업왕만력제가 일을 한다. 실제 '조선 황제(…)'는 스승이었던 장거정이 죽은 1582년부터 배째고 10년째 파업 중이었다. 따라서 한응인은 황제를 배알하지 못했고 조정 실무는 내각과 6부의 고관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 게다가 해명을 하려 찾아온 한응인에게 일본과 연합하여 조선을 치려는 것이 아니냐며 의주에서의 성곽 축조를 문제 삼으며 모든 성곽 축조 등의 군사 활동 금지와 의주목사의 파직, 은 1만 냥을 내놓을 것을 명하고 류성룡이 선조에게 군사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선조가 류성룡이 내놓은 의견에 대해 반박하면서 명나라의 요구 중에 의주목사 김여물을 파직한 것을 언급한다. 실제로는 이런 요구를 한적도 없으며 김여물은 그 전에 일어난 건저 문제에 엮여서 쫓겨났다. 이 당시의 의주목사는 권율이었다.
- 조선은 세종 때 금은이 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조공 품목에서 금과 은을 제외시켰다. 명이 조선에서 은이 생산됨을 알게 된 건 임진왜란 발발 후 원군을 파병하면서부터였고, 은 상납 요구가 극심해진 건 광해군 때부터였다.
- 거북선 제조를 위한 재원을 마련코자 류성룡이 동분서주하고 선조가 거북선을 몰래 제조했다고 류성룡에게 호통을 치는 일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거북선이 신형함이었는지 기존 판옥선의 개량형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철저한 관료제 국가인 조선에서 군함을 규정된 척수 이상으로 건조하려면 상부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 거북선과 엮어 비장의 신무기로 등장시킨 비격진천뢰 역시 이미 북쪽 지방 무기고까지 배치되어 있다는 《진사록》임진년 10월 기사와 용인전투(임진년 6월) 수년 전부터 만들어 쏘고 했다는 《정만록》의 기록, 임진왜란 초기부터 육군과 수군, 의병과 관군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운용한 전훈을 고려하면 작중 시간대인 1591년에 이미 개발을 완료하고 양산까지 다 끝냈을 확률이 높다. 설사 임진년에 개발되었다 해도 병조에서 지원을 끊어서 개발을 마치지 못했다는 드라마의 묘사는 각색이다.
- 조선이 축성을 비롯한 전쟁 준비를 하다가 만 걸로 묘사했는데, 남쪽 지방의 축성을 비롯한 전쟁 대비는 백성이 원망을 감수하고 꿋꿋하게 진행했다. 또한 사대부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백성에게 전가해 국고가 텅텅 비어 전쟁 대비를 할 수가 없다는 서술이 나온다. 당시 군역과 축성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전공자들 사에에 저술과 논문에서 극도로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많으니, 한 이론만 일방적인 지지를 할 수는 없다. 극 중에서는 관련 이론을 종합해 인용한 것이다.[9]
- 임진왜란 직전에 수군 폐지론을 거론하는 장면은 윤휴의 저서인 《백호전서》에서 '순변사 신립의 건의로 수군을 폐지하고 육전에만 전념하게 하였다.'고 한 기록을 따른 것이다. 윤휴의 주장에 따르면 철폐령은 실제로 하달되었고, 이를 강력하게 반대해 저지시킨 인물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다. 다만 남인에 속하는 윤휴가 직접 이순신의 전기문(통제사이충무공유사)을 지었을 정도로 남원 윤씨와 덕수 이씨 집안 간의 밀접한 관계(사돈)와 윤휴가 일생 동안 보여주었던 강한 당파성을 감안하면 이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성이 있다. 아무리 왜란기 사초 분량이 소실로 날아간 게 많았다 하더라도 수군 폐지를 논의하는 기사가 왜란 직전 시점의 선조실록 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만큼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신빙성 면에서는 큰 약점이라 지적할 수 있다. 아무튼 수군 해체론이 왜란 전 제기되었다 하더라도 극중에서 처럼 거북선 건조 비용이 문제되거나 국고 거덜 난 참에 육군에 집중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었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한 효율적인 방어전략을 놓고 벌어진 군사적 논의의 일환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옳다. 윤휴가 수군폐지론을 주도한 사람이라 지적한 신립 역시 왜군이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예측을 따른 셈이다. 드라마에선 왜적이 수군에 강하니 육군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선조가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1.11. 제11회
- 히데츠구가 임시로 후계자가 되자 요도가 히데요시에게 이 사태에 대해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히데요시가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은 자신의 혈통 뿐이라면서 요도가 아들을 태어나게 하면 된다고 한다. 실제로 요도는 츠루마츠 이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 만력제가 돈을 세던 중 석성이 영하에서 몽골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수십 만의 농민들이 가담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때 영하에서 보바이(발배)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만력제는 짐의 재산은 반란진압에 쓰지 말것을 주문하는 무개념스러운 행보를 보이는데, 이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 극중에선 수군폐지론이 하루 반나절만에 영의정 이산해 주도로 취소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왜란 발발 후 해전이 각 수영간 연계를 통해 원활히 이뤄진 것을 보아 수군 철폐령은 실제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철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처럼 한순간에 끝나진 않았을 것이란 게 중론. 개전 전후 경상좌수영의 교전 양상을 보면[10] 경상좌수영만은 지상군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적의 대규모 상륙으로 정상적인 병력동원과 함대집결이 불가능한 상황에선 전선을 자침시키고 지상전에 임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경상좌수영의 개전 전 개편상황을 보면 전쟁 준비를 하다 말았다는 드라마의 내용이 사실이 아님이 잘 드러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92년에 경상좌도 각지에 분산 배치된 진포들 중 두모포(기장), 감포(경주), 개운포(울산), 칠포(포항 흥해), 포이포(포항 장기), 축산포(영덕 영해), 서평포(다대포진 위치로 통합)를 모두 남동해안 주 방어선인 동래부, 부산진 인근으로 재배치했다. 종래의 왜구는 섬을 전진기지로 삼아 이동했기에 대마도에서 출발해 남해의 작은 섬들을 경유하여 경상우도나 전라도로 침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섬이 거의 없고 해안선이 단조로운 경상좌도는 왜구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이런 곳에서조차 일련의 재배치 조치로 방비를 강화했다는 것은 조선조정이 전쟁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1.12. 제12회
- 류큐국 왕자가 명나라에 가서 히데요시가 명을 치겠다면서 군량미를 요구하고 1년 안에 정벌하겠다고 장담한 것을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류큐국은 히데요시의 군량미 요구를 무시하고 이를 명나라에 알려 줬다.
- 만력제가 류큐국 왕자로부터 일본이 명나라를 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자 분노하면서 조선, 섬라국 등에 칙사를 보내 왜국을 정벌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 실제로 1591년부터 일본 본토의 정벌에 대해 논의가 되었으며, 1592년에 타국의 병력을 이용하기 위해 섬라국의 병력을 이용하려 했다. 1594년, 1598년에도 일본 정벌에 대해 제기되었다.
- 석성이 재정의 어려움이나 보바이(발배)의 반란 등을 이유로 일본을 정벌하기 전에 명나라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였다.
- 유성룡이 선조에게 축성을 재개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이산해가 이를 반대하고 나서자 다시 품삯을 주고 부리면 된다고 제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록을 보면 특정한 물건을 운반하거나 특정한 공방에서 왕실에 바칠 도자기를 만들게 하거나 왕릉 하나를 수리하는 등 비교적 작은 공역에는 품삯을 주고 부리는 대목이 있으나 성 하나도 아니고 여러 채를 동시에 쌓는 대규모 공역에 품삯을 주었다는 내용은 없다. 21세기처럼 실시간 계좌 이체 같은 것이 없었던 조선 시대. 그것도 상업이 발달하기 이전인 16세기에 품삯이라 하면 결국 쌀이나 베 등인데, 이걸 운반, 보관하고 분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 전근대 시대의 세금 가운데 요역이라는 게 있었던 것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가을에 풍년이 든 이후에나 검토해 보자는 선조의 말이 오히려 타당하다.
- 종의지가 개전 직전 조선에 와서 왜침을 경고하는 걸 조정이 무시했기에 종의지는 씩씩거리며 돌아가고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전개가 나오는데,
요시토시 : 바보 같은 조선놈들!실제 징비록의 다음 서술을 바탕으로 한 장면인 듯하다.신묘년(1591) 여름에 소 요시토시가 다시 부산포에 와서 변경을 지키는 장수에게 "일본은 대명국과 소통하고 싶으니 만약 조선이 이러한 뜻을 명나라에 전하여 준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두 나라(일본과 조선)는 장차 화의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와서 고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하였다.그 장군이 들은 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지만, 당시 조정은 일본과 사신을 주고받은 것을 꾸짖고 일본 측의 언동이 거칠고 거만한 데 분노한 터여서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 소 요시토시는 십여 일간 부산포에 정박하면서 답신을 기다리다가 불쾌해하면서 돌아갔다. 이 뒤로는 왜인들이 다시 오지 않았고, 부산포의 왜관에 늘 머물러 있던 왜인 수십 명도 조금씩 귀국하여 왜관이 거의 텅 비어 버리니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辛卯夏, 平義智又到釜山浦, 爲邊將言: "日本欲通大明, 若朝鮮爲之奏聞, 則幸甚. 不然, 兩國將失和氣, 此乃大事, 故來告."邊將以聞, 時朝議方咎通信, 且怒其悖慢, 不報. 義智泊船十餘日, 怏怏而去. 時後倭人不復至, 釜山浦留館倭, 常有數十餘人, 稍稍入歸, 一館幾空, 人怪之.) ─ 징비록
2. 임진왜란 발발 후
2.1. 제13회
- 송시열이 1666년(현종 7)에 지은 정발의 묘갈명에선 왜군이 정발을 흑의(黑衣)장군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하는데, 이때문인지 정발이 검은 갑옷을 입고 등장한다.
- 일본군의 상륙과 부산진 전투 당시 해무가 낀 것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일본군의 공격 당시 안개가 낀 것은 사실이다.
- 부산진 전투 장면에서 일본군이 성문으로 접근하자 정발의 명에 따라 화포를 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선 조선군이 각종 총통을 사용하였다고 적었다.
- 부산진성내로 진입한 일본군을 향해 백성들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래성순절도에서 기와를 던지며 저항하는 부녀자들의 모습을 딴 것이다. 부산진성 시가전씬 자체는 한국사극의 악습인 무전술 개판난전이지만 시가전 자체는 실제로 있었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성내에 진입한 후 2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였다고 적었다.
- 부산진 전투 이후에 깔린 나레이션에서 임진왜란을 조선 건국 2백년 만에 처음으로 겪는 '외침' 이라고 소개했는데, 왜구의 침략이나 여진족의 침공은 '외침' 이 아니라는 말인가? 바로 아래에 쓰인 바와 같이 극중에서도 삼포왜란이나 니탕개의 난 등이 언급되는데, 이것들은 외침이 아니고 임진왜란만 외침이라 볼 수 있는 이유를 모를 일이다.
- 왜군이 조선을 침공하자 인빈 김씨가 왜군의 규모가 1만이라 걱정하자 김공량이 중종 때 삼포 지역에서 왜적들이 난을 일으켰지만 보름 만에 진압되었다거나 신립이 여진족을 격파한 것을 언급하는데, 왜적들의 침입을 막은 것은 삼포왜란, 신립이 여진족을 격파한 것은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일을 말한다.
- 비변사에서 왜군 침공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는 것에 대해 논의하면서 성응일, 조경, 유극량, 변기 등을 언급하며,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 좌방어사 성응일을 동로, 우방어사 조경을 서로로 보내면서 유극량,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각기 죽령, 조령을 지키게 했다.
- 동래성에서 왜군을 상대하기 전에 송상현, 이각이 작전을 논의하며 다대포와 서평포가 함락당했다는 말을 한다. 서평포는 1592년 경상좌도 진포이동조치에 의해 다대포와 통합된 상태였다.[11]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4월 14일 적의 1차 공격을 격퇴시켰으나 이튿날 재차 공격해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평포 병력 역시 이곳에서 함께 싸우다 전멸했다.
- 동래성 전투를 앞두고 고니시는 적장 송상현에게 그 유명한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라는 전서를 보내며, 이를 본 송상현은 답서로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는 유명한 구절을 보내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단, 이건 전쟁이 끝난 뒤에야 나온 야사로 실제로 이랬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당대사료에서 확인되는 송상현의 인상적인 모습은 그가 죽기전 부채에 써남겼다는 16자의 시다.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 고성월훈 대진불구 군신의중 부자은경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매, 큰 진(鎭)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
이 시는 난중잡록을 비롯한 왜란기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 히데요시가 고니시와 가토가 조선을 공격하는 것을 경쟁하면서 공을 두고 다툴 것을 우려해 고니시에게는 오타 카즈요시, 가토에는 모리 시게마사를 감시역으로 보내는데, 감시역으로 언급된 두 사람 모두 실제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 송상현의 최후를 묘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역사대로라면 조복을 차려입고 임금을 향해 북향사배하고 마지막 저항을 하다 전사했다. 드라마에선 갑옷 위에 조복을 걸치고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뒤(한번만 절하는 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러닝타임을 의식해 간단히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저항을 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송상현이 전사한 뒤 고니시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시체를 고이 장사지내라는 명을 내리는데, 실제로도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심에 감복해 그의 시신을 온전히 보전해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고 하며, 부하들에게도 그의 충절을 본받으라 훈계했다고 한다.
- 동래성이 함락된 무렵에 홍여순의 비리를 빌미로 김응남을 병조판서로 교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홍여순이 무능해 병사들의 원성을 산다는 류성룡의 청으로 병판에서 물러났다. 이는 서애집, 재조번방지, 기재사초 등에서 교차검증된다. 병판에서 물러난 후에도 홍여순의 무능함은 여전해 북로를 파수해 막으라는 명을 받고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아 임진년 7월 25일 양사의 탄핵을 받는다. 여담으로 홍여순은 탐욕스럽고 무능해서 파천 후 그의 집은 백성들이 불을 질러 태워버렸고 간관들의 탄핵도 여러번 당했으며 실록, 서애집, 기재사초, 재조번방지, 백호전서 등등 다 털어봐도 좋게 서술한 사료가 없다.
- 부산진이 함락된게 13일 혹은 14일 새벽인데 조정은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동래성이 함락된게 14일 저녁임을 감안하면 경상도 파발마가 죄다 적토마라도 이건 불가능하다. 전라도에 있던 이순신조차 15일에 왜적 침입을 전해들었으며,(난중일기) 조정이 경상좌수사 박홍과 우병사 김성일의 장계를 통해 왜침을 파악한 것은 17일 이른 아침이었다.(징비록, 재조번방지 등) 이게 중요한 이유가 이일이 대구에서 경상도 지방군을 장악하지 못하고 상주에서 현지모병을 해야했던 이유가 아무리 신속하게 전하려해도 며칠의 텀이 생길수밖에 없는 전근대 정보전달의 한계, 일본군의 빠른 진격, 그리고 홍여순으로 대표되는 관료주의적 폐해가 맞물렸기 때문이다.이일이 날랜 군사 300여 명을 뽑아 거느리고 떠나려고 하였다. 이때 홍여순이 병조판서로 있었는데, 성질이 사나우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무슨 일이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그가 민간의 잡인들을 병적에 등록시켜 군대를 편성하도록 하니, 모두 시정의 서리들뿐이었고 신지어 유생까지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내가 비변사에 나가서 군사를 점검하여 보내려고 하였는데, 유생으로서 나이 겨우 10여세밖에 되지 않았으며, 머리에 유건을 쓰고 손에는 시권을 가지고 병역을 면제해달라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들이 뜰과 섬돌 위에 가득차 도성 안이 크게 소란하였다. …… 잠시 후에 여러 고을에서 잇따라 정세의 위급함을 알렸으나, 이일은 병조에서 군사를 뽑아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흘을 지체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잠시 후에 대간이 대신을 체찰사로 임명하여 현지로 보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도록 계청하니 이를 허락하시었다. …… 내가 곧 길을 떠나려고 하여 대궐 문 밖에 나가서 군사를 불러 모집하니, 무사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었다. 조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벌써 상주에 육박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 이에 또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이 일을 후원하도록 하였다. 신립이 대궐 문 밖으로 나가서 친히 군사를 불러 모집하니, 무사들 중에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따라가려는 사람은 뜰에 가득히 있었다. 이때 내가 비변사에서 김응남과 같이 앉아 있었다. ─ 류성룡, 임진호종기
- 왜군이 사전에 봉수대를 무력화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실제 가덕도의 응봉 봉수[12]를 비롯한 조선군의 전파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경상도 전역에서 전쟁에 대비하여 정해 놓았던 지침에 따라 병력이 신속하게 동원되었다. 전파 체계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일본군 침입 이틀 만에 이 소식을 전해받았을 정도로 제몫을 했다. 여태껏 임진왜란 사극에서는 전쟁이 발발할 때 봉수대에서 연기가 다섯개가 올라왔는데 이거 전쟁 아니냐고 조정이나 백성들이 당황하는 게 클리셰였다.
- 부산진 전투에서 박홍이 합류하여 같이 전투를 치른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홍은 개전 첫날 경상수병영에서 병력을 소집했고 동래성으로 향했다.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서 경상좌병사 이각과 합류해 동래성으로 접근했으나 이내 군사를 물렸다. 그리고 전선과 군량을 왜군이 사용할 수 없게 불태운 다음[13] 언양을 거쳐 경주로 이동한다.
-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며 당시 조선군은 가죽흉갑과 철투구로 썼다고하며, 실제 동래성 해자유적 찰갑이 출토된 바 있는데 반영 안 되고 불멸의 이순신에서 사용되었던 포졸복 형태의 군복을 입고 있다. 아무래도 제작비가 부족한 점도 있다. 하지만 프로이스의 기록은 육전관련이고, 실제 해전에서는 민첩치 못하고 해상에 빠졌을 때 구조가 어려워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 동래성 전투가 대낮에 벌어지는데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동래성 공격은 저녁에 이뤄졌다.
- 동래성 함락된 날 밤 밀양부사 박진이 이끄는 500 군사를 중심으로 소산역(동래성 북쪽 15리)에서 방어전이 벌어졌으나 생략되었다.
- 류성룡이 감옥에 갇힌 전 의주목사 김여물을 풀어주어 중히 쓰겠다고 하는데, 실제 김여물을 풀어준 주체는 선조다. 류성룡은 그때까지 그를 잘 알지도 못했다. 출옥한 김여물과 대화를 나눈 류성룡은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여 막하에 두고 중히 쓰고자 했다. 그러나 신립이 역시 김여물이 재주가 있다며 자신에게 딸려줄 것을 청해 함께 내려가게 된다.
2.2. 제14회
- 선조가 쓰러진 후 어의가 진료하러 오는데 자막으로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허준이 어의가 된 건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이후이므로 당시의 어의였던 양예수일 가능성이 높다.
- 류성룡이 안집사, 초유사 등을 파견할 것을 주청하자 김늑을 좌도안집사,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했는데,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김성일이 직산에 이르자 임금께서 노여움이 풀려 김성일이 경상우도의 사민의 인심을 얻은 것을 알고서 그 죄를 용서해 우도 초유사로 삼아 도내 인민을 효유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도록 했다. 또한 김수가 우도에 있었지만 적병이 중로를 가로질러 꿰뚫어서 좌도와 소식이 통하지 않아 수령들이 관직을 버리고 달아나 흩어졌는데,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김늑이 영천 사람이라 경상좌도의 민정을 잘 알테니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임금께 아뢰어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 상주 전투에서 사로잡았다고 언급되는 역관의 이름은 경응순이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서계를 건네며 강화를 하려거든 이덕형으로 하여금 충주로 오게하라고 전했다. 조정에서는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볼까 하여 이덕형을 파견했으나 내려가던 도중 충주가 함락되어 고니시를 만날순 없었다. 경응순은 이덕형을 남겨둔채 홀로 정탐에 나섰다가 왜군에게 잡혀 죽었다.
- 신립의 관모가 떨어지는 것은 극의 각색이 아니라 징비록 기록이다.
- 신립이 조령을 방어진으로 사용하지 않은 이유로 4가지(기병위주 조선군, 아군 훈련 미흡, 적의 진격속도, 적의 경로 우회 가능성)를 거론하는데, 이 4가지는 신립이 왜 조령을 방어진으로 삼지 않았는지에 대한 사학계의 해석을 인용한 것이다. 다만 이것들 모두 의혹제기하고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라 제작진이 신립을 상당히 관대하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기병 위주라서 그랬다는 주장은 문종 시절까지만해도 전체 기병의 절반에 가깝던 창기병이 세조때부터 사라지고 철저히 궁기병 위주로 개편된 조선군의 상황과 탄금대 전투 '참전자'인 신흠의 상촌집에서 길이 비좁고 논밭이 많아 기병운용하기 불편한 지형이었다는 언급(재조번방지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을 고려하면 설득력을 잃는다. 애초 배수진이면 궁기병의 장점인 치고 빠지기나 우회공격이 힘들게 뻔하다. 게다가 군 선배이자 왜군과 경험해본 이일의 조언도 대놓고 무시했다. (이순신과의 일화때문에 곧잘 폄하되지만 이일은 북방에서 신립에 버금가는 무훈을 쌓았고 북도 제승방략을 정리한 인물이다. 결코 겁쟁이가 아니었고 군사적 식견도 있었다.) 아군훈련 미흡 대목은 그 미흡한 병사들이 2~3차례 왜군에 공격을 가하며 반나절가까이 싸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없어진다. 적의 진격속도는 그렇게 적의 진격을 신경썼다는 사람이 적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미친소리라며 성내고 죽여버리는 게(선조수정실록) 가당키나 하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게다가 상촌집에 의하면 신립은 26일 충주에 도착했고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에 의하면 왜군은 28일에야 조령을 통과해 쉬지도 않고 그대로 신립군과 교전했다. (이는 상촌집과 교차검증된다.) 유일하게 남는 건 적의 우회가능성을 고려했다는 주장과 신립이 가지는 정치성이다. 신립은 도순변사이며 신성군의 장인이라 그가 패배하거나 제 역할을 못하면 그게 고스란히 선조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더 자세한 것은 탄금대 전투 항목 참조.
- 실제 제승방략은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아직 연구할 부분도 많긴하지만) 훨씬 정교하고 유연한 체제였다. 동남지역 방어 제1선인 동래성으로 출동한 양산군수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의 병력, 경상우도와 인접한 김해를 구원한 초계군수 이유검의 병력,[14] 경상도 중심부로 넘어가는 황산잔도와 작원잔도를 방어한 밀양부사 박진의 병력, 4월 21일 울산의 경상좌병영으로 모인 13읍 병력 등 각각의 전담 지역과 대응메뉴얼이 세심하게 짜여있었고 방어선도 여러겹이다.[15] 게다가 장수가 늦어 흩어진 사례는 있어도 동원자체는 정상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경장이 지휘하는 병력과 지방관이 지휘해 방어하는 병력도 나뉘어져 있었다.[16] 또 드라마에선 김수가 동원령을 내렸으나 왜적때문에 길이 끊겨 다 전달하지 못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개전 나흘째인 16일 김수가 밀양에서 경상도내 총동원령을 내렸고 소집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4월 27일에는 김수의 요청을 받고 전라방어사 곽영의 병력이 경상도 지원에 나선다.
- 류성룡이 파견한 이천리가 대구 군영으로 향했는데, 병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흩어졌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비오고 양식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기술했는데 그보다는 4월 16일(기재사초, 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 혹은 17일(난중잡록, 상촌집)에 밀양부사 박진의 밀양강 방어선이 무너진게 결정적이었다.[17] 본래 이들을 장악했어야 할 이일은 비정상적으로 빠른 적의 진격때문에 도저히 기한을 맞출수 없었다. 밀양지나면 청도고 청도에서 넉넉잡아 하루면 대구다. 조정에 왜침 사실이 보고된게 4월 17일이었고 방어논의 및 지휘관 인선을 얼추 끝나고 이일이 궐에서 나온게 4월 18일 새벽 2~4시 사이였다. 이일은 빨라도 19일에나 출발할 수 있었으니 도저히 제 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일이 명을 받고 3일이 지나도록 출병하지 못했다고 적었으나 기재사초에선 4월 21일 이일이 문경에서 장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신립은 상주 패전후 합류한 이일을 목을 베야 마땅하다며 죽이려 들었는데 작중에선 반대로 살아서 다행이라며 반갑게 맞이들인다. 조령방어를 주장한 김여물, 이일과의 의견대립도 간략하게 넘어갔으며 적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미친소리라며 베어 죽이고 적이 아직 상주에 있다고 장계를 올린 일이 나오지 않는다.
-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군과 고니시 군이 조총 사거리 내에서 대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저 거리에서 대치를 하면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기전에 벌집이 된다. 고니시 곁에서 종군한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신립군은 왜군의 중앙을 공격하며 포위하려 들었으나 왜군의 화력에 밀려 퇴각했고 이후 1~2차례 더 공격을 시도하다가 와해되었다. 사실 한국 사극에서는 카메라에 모든 군대를 다 몰아서 잡으려는 강박증이 있는지 실제 배치보다 훨씬 더 양 군의 배치가 가깝게 묘사된다. 극중 허용이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는 전개이다.
2.3. 제15회
- 탄금대 전투의 묘사는 총체적 난국 수준.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대표적인 대규모 회전인데 양군이 부딪치는 장면 바로 다음에 선조의 얼굴이 나오고 곧바로 신립이 강물에 몸을 던지는 장면으로 이어지니 시청자들로서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료를 보면 당시 양 측 군사의 수는 모두 합하여 3만이 넘는 반면 동원된 엑스트라는 100명이 될까 말까 한 수준. 더군다나 이 전투에서 고니시군 사상자가 8천에 달했다고 나오는데, 실제 전사자는 많아야 수백이고 부상병까지 모두 합해도 2천이 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8천이면 고니시군 전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데, 현대전 기준이기는 하지만 전 병력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면 그 부대는 전멸로 간주된다[18]. 더군다나 1593년 3월 20일 한성으로 철수한 왜군 부대가 인원을 점검했을 때 평양성 전투와 행주 대첩을 거친 고니시군은 18,700명에서 6,629명으로 줄어 있었다. 만약 탄금대에서 8천이 죽었다면 평양성 전투와 행주 대첩 두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가 2천에 불과했다는 소리며, 설령 8천에 부상병까지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사상자가 많았다면 한양까지 빠르게 진군한다는 것은 무리다[19]. 이 때문에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앞으로 드라마의 고증이 걱정이라는 소리가 높았다.
- 선조가 파천을 위한 준비를 위해 이원익, 최홍원을 각각 평안도와 황해도로 파견한 것은 사실이다. 일찍이 이원익은 안주 목사, 최홍원은 황해 감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펼쳐 해당 지역의 민심을 얻고 있었기에 먼저 가서 임금의 피난길을 미리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접수된 당일 시행된 것으로 선조는 한양을 사수하겠다 말했다가 나중에 다시 말을 바꾼 적 없다.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한 직후 강경하게 파천 계획을 밀어붙였고 한양 사수는 4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 종실 수십명이 몰려와 통곡했을 때 달래느라 한 마디 한 게 전부다.
- 중간에 류성룡이 이광이 근왕병을 이끌고 온다는 보고를 받는데,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전라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 도우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서쪽으로 피란해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전주로 돌아오자 도내 사람들이 이광이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것을 탓하면서 분개하고 불평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부담을 느낀 이광은 경상감사 김수,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과 연합해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하는데 이때 벌어진 전투가 그 유명한 용인전투다.
- 이일이 갑옷을 벗어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평양에서 류성룡 등을 만났을 때 이일은 베적삼에 패랭이, 짚신을 신은 초라한 행색에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류성룡은 남색 철릭을 건네주고 다른 사람들도 종립과 은정자 등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 고니시 유키나가가 요시토시와 시게노부에게 명을 내리는데, 만약 드라마 속의 창작인물이 아니라 마츠우라 시게노부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마츠우라 시게노부도 석고는 유키나가보다 덜하지만 다이묘이고[20]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유키나가가 경칭도 없이 그냥 이름만으로 부를 상대가 아니다. 한국 드라마 작가들은 일본 다이묘들의 수평적인 관계를 제대로 이해 못해서 조선과 마찬가지로 수직적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그런 케이스. 야나가와 시게노부로 추측
- 대부분의 신하들이 파천에 반대하는 가운데 이산해가 파천을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접견자리에서 말한 게 아니다. 선조 앞에선 그저 눈물만 흘리다 나왔고 이후 우승지 신잡(申磼)과 이야기하던 도중에 과거에도 피난한 사례가 있다며 조심스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작중 집에 80 노모가 계시니 자결 할 지언정 파천은 불가하다 말하는 신하가 나오는데 이 사람이 신잡이다. 사실 대신들이 파천에 반대 한 건 형식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만 이틀이 안되는 짦은 기간에 파천이 이루어 질 수 없다. 그저 입밖에 내기엔 정치적 부담이 컸기에 몸을 사린 것이다. 열심히 파천 계획 수립하고 있던 류성룡도 파천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고 파천을 처음 입밖에 낸 이산해도 선조 앞에서는 말없이 우는 것외에는 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산해는 파천을 주장한 게 빌미가 되어 몽진 중에 탄핵받고 삭탈관직 당한다.[21]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금방 복직하긴 했지만, 탄핵 당시 이산해가 당시 받은 온갖 비난을 보면 왜 신하들이 파천이란 말 한 마디 하기가 그리 힘들었는지 금방 이해 할 수 있다.
- 류성룡이 용감히 싸운 장수로 정발과 송상현을 언급하는데 이 시기 조정에선 이들도 다른 이들처럼 도망쳤으리라 지레짐작 하고 있었다. 1592년 5월 10일 실록기사를 보면 개전 한달이 지난 시점까지 조정이 파악한 왜란 초기 접전지역은 김해(서예원, 이유검), 밀양(박진), 상주(이일), 충주(신립) 뿐 이었다. 1592년 8월 7일 기사에 선조가 김경로에게 정발이 정말 죽었는지 묻는 대목이 있으며 11월 25일 기사에서도 선조가 김수에게 정발과 송상현이 정말 죽었냐고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대화 내용을 보면 송상현은 심지어 투항하여 왜장이 되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음을 알 수 있다. 이둘의 전사가 공식화된건 아무리 빨라도 임진년 말이다.
- 작중에선 파천가느냐 마느냐로 한화를 다 잡아먹지만 실제 파천 계획은 굉장히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탄금대 전투가 4월 28일, 신립의 패전소식이 한양에 널리 퍼진게 4월 29일 오후이고 선조가 파천한 게 4월 30일 새벽이다. 이틀이 채안되는 짧은 시간안에 이원익과 최홍원의 평안도, 황해도 파견, 광해군의 세자책봉, 어가와 함경도와 강원도로가 근왕병을 모집할 임해군, 순화군의 호종인원 배치 등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 선조가 파천을 반대하는 류성룡에게 역정을 내며 하는 말은 얼핏 듣기에는 정신승리처럼 들리지만 실은 이게 오히려 올바른 판단이다. 전근대국가, 그것도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에서 왕이 적에게 사로잡힌다는 말은 국가의 멸망을 의미하므로 왕의 안위만큼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22] 파천관련 부분은 당시 왕조국가의 특수성도 고려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 류성룡이 파천을 강경반대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록이나 본인이 쓴 징비록이나 특별히 강경하게 반대한 기색은 전혀 없다. 오히려 파천에 암묵적으로 찬동해 파천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이산해를 제외한 대신 이하 전원이 입시할 때마다 파천은 부당하다며 반대했고 파천을 긍정하는 말을 한 이산해는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는 실록 기록을 보면 대놓고 파천을 말하지는 않은 듯하나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한성을 지켜야한다 소리친 사헌부 장령 권협에게 군신간의 예의도 모르냐, 할말 있으면 장계를 올리라 말하고 선조에게 이런거 따질때가 아니니 왕자들을 지방으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하고 세자는 선조를 따르게 하라 말했다고 본인이 쓴 징비록에 적어 놓았다. 진짜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전술한 권협이나 차라리 죽겠다고 나선 우승지 신잡, 인심을 잃어 왕의 연을 멘 인부도 도망갈것이라 절규해 선조의 낯빛을 변하게 만든 수찬 박동현, 선조가 의례적으로나마 한양 사수를 말하게 만든 해풍군 이기 등이다[23].
신립이 패전한 보고가 이르자, 날은 벌써 어두워졌는데 사약(司鑰)이 나와 빈청으로 달려와서 상께서 대신들을 만나고자 하신다고 말하기에 나는 수상과 함께 따라 들어갔다. 몇 겹의 문을 지나서 어느 빈 행랑에 이르렀는데, 상께서는 호롱불을 켜놓고 바닥에 앉아 계셨으며 종친인 하원군(河源君)과 하릉군(河陵君)이 곁에 있었다.
대신이 아뢰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가가 잠시 평양으로 가시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
장령 권협(權悏)이 임금의 무릎 가까이까지 나아가서 임금의 옷깃을 당기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도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나는 사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아뢰었다.
"여러 왕자들을 각 도로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군사를 불러모아 나라의 회복을 도모하고, 상께서는 동궁과 잠시 서도(西道)로 가셔서 적군의 예봉을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권협은 잇달아 외쳤다.
"좌의정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경성을 버려도 된다는 것입니까?"
나는 아뢰었다.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 징비록, 임진호종기
대신이 아뢰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가가 잠시 평양으로 가시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
장령 권협(權悏)이 임금의 무릎 가까이까지 나아가서 임금의 옷깃을 당기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도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나는 사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아뢰었다.
"여러 왕자들을 각 도로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군사를 불러모아 나라의 회복을 도모하고, 상께서는 동궁과 잠시 서도(西道)로 가셔서 적군의 예봉을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권협은 잇달아 외쳤다.
"좌의정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경성을 버려도 된다는 것입니까?"
나는 아뢰었다.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 징비록, 임진호종기
- 가토가 탄금대 전투의 결과를 전령에게 듣는데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가토는 탄금대 전투 당시 충주 인근에 도착해 탄금대 전투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 류성룡이 한강을 이용한 한양 방위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조선 한양 도성의 수성능력은 극도로 떨어진다. 성이 너무 넓어 방어에 필요한 인원이 너무 많고 성곽도 낮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수성측에 불리한 평지로 둘러 싸여 있다.[24] 이는 조선 조정에서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문제였기에[25] 파천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며 후일 한성을 점령한 왜군도 수세로 몰리자 아무 미련없이 한성을 포기했다. 그런고로 류성룡이 한양 지도까지 펼치며 한양 방위전을 계획하고 있는 장면은 고증 오류. 사실 체찰사가 되어 한성의 상태를 모를리가 없는 류성룡이 파천을 적극 반대하고 한양 수비를 준비하는 등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부터 오류이긴 했지만(...). 류성룡이 성을 사수하려 했던 건 한양이 아니라 평양에서였다. 여담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란 종결 이후 남한산성이 세워졌다.
성 안의 백성들과 공사노비나 서리, 내의원 · 전의감 ·혜민서 관리들을 뽑아 성가퀴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성가퀴는 3만여 개인데 성을 지킬 사람은 겨우 7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26] 모두 오합지졸이어서 성벽을 넘어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번해 있던 병사들도 비록 병조에 소속은 되어 있었지만, 아전들이 결탁하여 농간하며 뇌물을 받아 사사로이 달아나게 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관원들은 그들이 갔는지 남았는지를 따지지 안았으므로 급한 상황을 맞아 전혀 쓸모가 없었으니, 군정의 해이함이 이에 이르렀다. ─ 징비록
2.4. 제16회
- 선조가 파천 준비를 하면서 유도대장을 임명하려는 과정에서 변언수, 이양원 등을 거론하는데, 월파집에 따르면 이양원을 수성장, 이즙, 변언수를 좌우위,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게 했다.
- 광해군의 세자 책봉식이 허전하게 진행되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적들이 오느라 급하게 책봉해서 이런저런 예식을 하지 못했다.
- 선조의 첫날 양위쇼는 징비록 초본에 나온다.
- 류성룡이 잠깐 유도대장을 맡았다가 이항복의 설득으로 바뀌는 장면은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 이항복이 선조에게 류성룡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하는 일이 아닌 파천 이후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파견해야 한다면서 류성룡을 기사년에 사신으로 보낸 일을 언급하는데, 1569년에 성절사 서장관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파견된 일을 말하는 것으로 이원익과 함께 글재주를 선보여 명나라 관리의 존경을 받았다.
- 선조의 파천 이후 한양 도성에 백성들이 불을 지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 대해 나레이션을 통해 도성 방화에는 '왜군이 불을 질렀다' 와 '난민이 불을 질렀다' 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언급을 해준다. 또한 극 내에서도 백성들이 궁에 불을 질러 광화문이 타버린 장면과 고니시가 한양에 들어왔을 때 전각이 온전히 남아있는 장면을 보여주어 양쪽 견해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 징비록과 실록을 종합하면 이산해는 5월 2일 오전에 파직되었고 류성룡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가 그날 저녁 파천 및 전쟁대비에 관한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보직 없이 선조를 수행하다 6월 1일자로 복직된다. 징비록에선 이때 왜적이 그때까지 한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파천길에 오르게 한 죄로 탄핵받았다고 적고 있어 류성룡이 파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더불어 이날 정철이 복직된다.
- 일본의 회의 장면에서 걸려있는 세계지도에 호주가 표현되지 않은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별거 아닌거같지만 동 시기를 다룬 10년 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18세기에 발견된 호주가 그려진 지구본이 나왔었다. 그러나 지도 자체가 200년후에나 제작된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문제다.[27]
- 예고편에서 왜군이 조선 백성들에게 쌀을 배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왜군이 쌀을 지급하고, 명패를 발급해주면서 잠시나마 왜군을 따르는 백성들이 있었다고 난중잡록에 언급된다. 같은 맥락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도 약탈을 금하면서 조선인들을 포섭하려 했었고, 이걸로 어느 정도 재미를 보았었다.
- 류성룡이 파천 호종을 명 받자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백성을 버리는 어버이가 어디 있냐며 역정을 내며 울부짖는데 평시였으면 역적으로 몰릴 수 있는 논란이 될 위험한 발언들이 나오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류성룡은 군 말 없이 파천을 호종했다. 애초에 파천 찬성파였다.
- 선조 일행은 5월 1일 저녁에 개성에 도착해 김명원과 신할에게 임진강 방어를 명한뒤 5월 3일 바로 개성을 떠났다. 떠나지 않고 지키겠다며 개성 방어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적은 없다. 애초에 개성이나 한양이나 엎어치나 메치나다. 5월 2일 잠시 백성들 앞에 나가 위무를 했는데 그 장면에서 따온 모양. 사실 이 장면이 들어가야 했다면 평양에서 들어가는 게 더 낫다. 머무른 기간도 훨씬 길 뿐더러 백성들이 동요하자 선조가 처음에는 광해군, 그 다음엔 본인이 직접 나서 평양을 지킬것을 천명했으며 적이 대동강변에 이르러 어가가 떠나려 하자 주민들이 흉기를 들고 관원들을 폭행하는 소요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 승전 보고를 받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이어 명나라 침공 계획을 논의하는데 그 와중에 명은 요동에 힘을 쓰지 못하며 누르하치의 세력이 강대하다는 정황보고를 듣는다. 임진년 기준으로 누르하치의 세력이 강성하기는 했지만 요동은 여전히 명의 지배권에 들어가 있었다. 누르하치가 요동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갖게 되는 건 사르후 전투 이후의 일이다.
2.5. 제17회
- 사야가가 항복하는 부분에서 그가 임진왜란을 "풍신수길의 불법 침략 전쟁" 으로 여겼다는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불법이니 전범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근대적 개념이고, 16세기 동아시아 기준으로는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
- 만력제가 정귀비와 태자 책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귀비와 그의 아들 주상락, 정귀비의 아들인 주상순을 언급했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쟁국본의 당사자들이다. 명을 동림당과 반동림당간의 30년간의 당쟁으로 몰아넣은 파국을 일으켰다.
- 석성이 조선의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임세록을 파견하는데 6월 1일자로 복직한 류성룡이 평양에서 이 사람을 접견한다.
{경상우수영 구원 문제에 대한 논박}
*전라좌수사 수군 장수들이 세력이 약하니 전라도 방비에 주력해야 한다는 측과 경상도를 구원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다 이순신이 우리가 지켜야 할건 조선의 바다다 하고 경상 해역으로 출동하는데 이순신을 급하게 등장시키면서 전쟁 발발 이후의 행적을 압축시키느라 만들어진 장면으로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을 포함한 모든 조선 장수는 공무원이고 관할 구역 밖으로 넘어가려면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임진장초에 의하면 이순신은 4월 27일 선전관 조명을 통해 원균을 구원하라는 좌부승지의 서장을 받았다.(이 서장은 4월 23일 작성되었다.) 그래서 예하 장수들에게 29일까지 집결하도록 지시하고 30일날 출항하려 했으나 29일 자시(子時)에 우수영이 함락되었다는 원균의 공문이 도착한다. 이 시점에서 전라좌수영 장수들이 고심한 부분은 전라좌수영 단독으로 출동하느냐, 세력이 2배 가량 큰, 그러나 30일 출발한다는 공문만 보낸채 도착하지 않고 있는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을 기다려 함께 출동하느냐 였지 경상도로 출병하는 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이때 상황이 급하니 단독으로 출병해야 한다 가장 강하게 주장한 장수가 녹도만호 정운이다. 이순신은 이억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판단해 이억기에게 빨리 뒤따라오란 공문을 보내고 5월 3일 출항한다. 드라마에서는 분명히 김민진이 분한 수군 장수가 5월 시점에서 경상도 출병 자체를 반대한다. 위에 설명한 선조의 개성 도착 시점(5월 1일)과 정철의 복직시점(5월 2일)을 보자. 국조보감의 1차 출병 부분은 상기한 행적들을 요약, 정리해서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므로, 상세 행적은 날짜별로 정리된 임진장초와 난중일기가 우선되어야 하는 게 맞다. 작중에 이름은 표시되지 않으나 난중일기에서 소극적이었다고 언급된 낙안군수 신호를 모티브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론1}
*전라좌수사 수군 장수들이 세력이 약하니 전라도 방비에 주력해야 한다는 측과 경상도를 구원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다 이순신이 우리가 지켜야 할건 조선의 바다다 하고 경상해역 출동을 선언하는데 이는 국조보감에 그대로 나와있는 내용이다. 송희립과 정운의 대사도 국조보감에 서술된 그대로 이다. 김민진 배우가 맡은 배역은 국조보감에 이름은 안 나온다. 하지만 김민진 배우의 대사도 출정반대인물로 국조보감에 그대로 나온다. 국조보감도 엄연히 검증받은 공신력 있는 사료인 만큼 작가가 국조보감 내용을 그대로 극으로 옮긴다고 왜곡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조보감은 그 자체로 사실성을 갖춘 사료지, 임진장초와 난중일기를 요약한 책이 아니다. 국조보감이 요약본이라는 근거는 없다.
*사실 임진장초와 난중일기에는 제장들과 논박을 벌인 부분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경상우수영 구원문제관련 논박내용은 역사칼럼니스트 신호영과, 이순신 연구가 조성도가 이미 과거에 했던 분석내용이다.
*우선 해당내용을 난중일기 부터 살펴보면
*임진년 (1592년) 해당 일기
*4월 15일 ~4월 22일: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처음 보고받음~전투정황 및 경과 기록임.
*4월 23일 ~4월 30일: 일기가 없음
*5월 1일 :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모두 분격해 제 한 몸을 잊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5월 2일 : "3도 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하나같이 왜적에 대한 소문만 듣고 달아나 버렸고,
군기(병장기)도 버려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자고 약속했는데,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낙안군수만 피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
*5월 3일 : 경상우수사(원균)의 화답이 왔다.이억기도 전투에 오기로 약속했다. 첩입군이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이억기)가 온다고 기뻐 했으나 방답의 배였다. 녹도만호(정운)가 "우수사(이억기)는
오지 않고 왜적은 다가오니 분기를 이길 길이 없고, 기회를 놓치면 후회를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에 곧 이순신(입부, 무의공)을 불러 내일 떠날 것을 명하고 장계를 썼다.
*5월 4일 : 새벽에 출항해 미조항에 이르렀다.
*제장들이나 상관들과 의논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음 이순신과 제장들의 의지만 보여주고 있음
*우선 해당내용을 난중일기 부터 살펴보면
*임진년 (1592년) 해당 일기
*4월 15일 ~4월 22일: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처음 보고받음~전투정황 및 경과 기록임.
*4월 23일 ~4월 30일: 일기가 없음
*5월 1일 :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모두 분격해 제 한 몸을 잊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5월 2일 : "3도 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하나같이 왜적에 대한 소문만 듣고 달아나 버렸고,
군기(병장기)도 버려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자고 약속했는데,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낙안군수만 피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
*5월 3일 : 경상우수사(원균)의 화답이 왔다.이억기도 전투에 오기로 약속했다. 첩입군이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이억기)가 온다고 기뻐 했으나 방답의 배였다. 녹도만호(정운)가 "우수사(이억기)는
오지 않고 왜적은 다가오니 분기를 이길 길이 없고, 기회를 놓치면 후회를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에 곧 이순신(입부, 무의공)을 불러 내일 떠날 것을 명하고 장계를 썼다.
*5월 4일 : 새벽에 출항해 미조항에 이르렀다.
*제장들이나 상관들과 의논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음 이순신과 제장들의 의지만 보여주고 있음
옥포해전 출정전 임진장초 내용-너무 장문의 장계라서 해당사항만 발췌. 실제 임진장초를 보면 옥포해전 출정전 장계는 내용이 다 전황보고이다.
1592.4.27
주장으로서 홀로 처리할 수 없어 이광, 곽영, 최원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화답했다.
1592.4.30
소속 중위장들에게 지시사항을 분명히 했다.
1592.5.4
출전전 준비사항 상세보고 내용
이순신의 장계와 조정의 출전명령 유서는 임진장초와 선조실록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
제장들간 논박이나 설전한 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이 제장들에게 한 지시사항이나 상관에게 전황보고한 것을 선조에게 장계로 올리고 있다.
* 이산해가 류성룡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고 평하는데, 정작 극중에서 파천할 때 민본적이상의 명분을 내세우며 가장 반대하는 인물은 류성룡이다. 사실 이 부분 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이 류성룡을 평하는 장면들을 보면 류성룡의 극 중 행적과 극 중 평가가 일치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당대 왕의 파천에 대해 마냥 후일을 도모한다는 긍정하는 여론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방화범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이 전화를 입은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1592.4.27
주장으로서 홀로 처리할 수 없어 이광, 곽영, 최원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화답했다.
1592.4.30
소속 중위장들에게 지시사항을 분명히 했다.
1592.5.4
출전전 준비사항 상세보고 내용
이순신의 장계와 조정의 출전명령 유서는 임진장초와 선조실록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
제장들간 논박이나 설전한 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이 제장들에게 한 지시사항이나 상관에게 전황보고한 것을 선조에게 장계로 올리고 있다.
* 전주와 마찬가지로 류성룡이 자꾸 싸우자고 하고 왕이 백성들을 믿지 않고 도망가려고만 한다고 까는데 실제로는 파천 호종에 충실했던 이가 류성룡이었다. 오히려 윤두수가 더 현실주의자로 보일 정도. 게다가 류성룡의 발언들은 세자가 있으니 선조는 죽어도 된다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본인은 물론 세자의 안위까지 장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수위의 발언이다.
* 본래 5월 2일 개성에서 정철의 복직이 결정되었으나 드라마상에선 그보다 늦게 이뤄졌다.
* 한양에 입성한 고니시 소속 왜군들이 버려진 주막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국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쓰는데, 일본은 숟가락보다 젓가락을 주로 쓴다. 또 그 이전에 국밥은 조선 요리지 일본 요리가 아니다.
* 김충선은 김수가 아닌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귀순했다. 그리고 군사 3천을 거느리고 투항한 것으로 나오는데, 기록상으로는 그렇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3천 정도를 총지휘하려면 최소한 10만 석 이상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 급이어야 하고 이 정도 인물이 투항했다면 일본 측 기록에도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이 전혀 없기 때문.
2.6. 제18회
*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관할 구역인 전라도만 지키기 위해 합류하지 않은걸로 그렸다. 이억기는 기상악화와 이에 따른 연락두절로 옥포해전에 참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억기는 1592년 6월 4일 당포에서 이순신과 합류했다. 다음날인 1592년 6월5일 1차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억기가 옥포해전에서 안 나온 것은 맞다. '''이억기는 제 1차 당항포 해전 때 이순신과 합류하고 해전에 첫 참여했다.
* 이순신의 전술을 800보(1km 이상)안에 들어오면 화포로 공격한다로 정의했는데 조선 수군주력 화포는 지자와 현자, 그 중에서도 현자총통이며 해상에서는 롤링, 요잉, 피칭같은 온갖 흔들림이 일어나 육지보다 유효사거리가 짧아진다. 절강병법이나 이를 조선실정에 맞춰 받아들여 조선 후기 병서의 기본이 되는 병학지남에선 해상에서의 화포 사격거리를 200보로 잡았다. 그나마 이것도 왜란시기부터 시도한 새로운 화약 제조법을 중국에서 들여오는데 성공하고 동차가 개발된 조선후기 병서다. 즉, 동차도 없이 육전에선 흙을 쌓아 포를 거치하고 수전에선 아예 거치수단을 알 수 없으며 화약 제조법이 시간과 노력이 많이들었던 임진왜란기 화포 사격거리는 이 200보다 더 짧았으면 짧았지 길었을 가능성은 없다. 즉, 드라마는 사거리를 최소 4배가량 뻥튀기했다. 게다가 사통장치가 없이 인력에 의지해야 하는 총통류가 쏜 다고 맞을 수도 없고 조선군은 화약 보유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포격전 위주 해전은 불가능했다. 화약이 부족하니 실사격 훈련도 적을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포수의 숙련도의 한계로 이어져 최대 유효사거리를 살리는 것도 쉬운게 아니었다. 일본쪽 기록인 고려해전기의 안골포 해전 부분을 보면 조선수군은 왜선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대장군전을 쏴갈겼다. 철저하게 원거리에서 공격하다 끝난 부산포 해전조차 정운이 조총사거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 이순신이 옥포로 간 1차 출전은 5월 4일 새벽이 이뤄졌다. 17화에 날짜가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옥포해전전에 화포성능을 점검하며 군비강화를 다지는 과정을 행한 것이다. 화포성능 시험 및 강화 후 5월 4일 옥포로 출전한 것은 사료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 전라감사 이광이 근왕을 위해 북상하다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자, 도내에 비난 여론이 팽배해졌고 이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광은 김수, 윤국형(윤선각)과 함쳐 북상하다 용인 전투에서 궤주했다. 드라마는 이광의 2차 출병을 류성룡이 서찰을 보내 지시를 내린 걸로 꾸몄는데 가상 인물들에게 분량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 조정에서 신각의 처형을 결정한 게 5월 18일인데 임진강의 조선군은 5월 17일 야습을 걸었다 적의 계략에 넘어가 참패했다. 당연히 신각이 죽었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다음이다. 헌데 제작진은 시간선을 뜯어고쳐 신각 사후 임진강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묘사했다.
- 해유령 전투에서 김명원을 겁쟁이로 만들고 신각 참수의 책임을 떠밀었는데 신각 참수의 책임은 군기확립이란 명분으로 부원수급 장군을 너무 쉽게 처형시킨 조정과 지휘체계상 반드시 합류해야 한 도원수와 따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제대로 보고도 안한 신각에게 있다. 신각은 김명원에게 가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남병마절도사 이혼과 같이 움직였는데, 이양원, 이혼, 신각 셋 중 그 누구도 조정에 장계를 보내지 않았다. 아무런 장계도 안올라온 상황에서 전쟁중의 혼란한 상황까지 겹치니 조정이나 김명원은 신각이 어디서 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김명원은 주어진 상황을 취합해 (워낙 도망자가 많았으니까) 적전도주로 판단하고 보고를 올렸고 우의정 유홍이 주도해 신각은 참수된다. 작중에선 김명원이 신각의 소재를 파악하고 수차례 합류 지시를 내렸으나 신각이 김명원 지휘 안받겠다며 무시한 걸로 묘사했는데 진짜 그랬으면 항명이고 심각한 문제다. 다만 이것은 제작진뿐 아니라 현대에도 많이 오해받곤 한다. 신각과 김명원 항목참고.
- 김명원을 비겁한 졸장부로 묘사했는데 김명원은 지나치게 유순하고 실전 지휘능력이 떨어져서 문제였지 무능한 겁쟁이는 아니었다. 대동강 방어전이나 3차 평양성 전투 등에 의욕적으로 임했고 군정사무와 군수업무에는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스스로도 신각 사건으로 느낀게 있었는지 이순신때는 선조가 노골적으로 이순신을 쳐내려 함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2.7. 제19회
- 류성룡과 윤두수가 평양 사수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15화에서 류성룡이 강을 이용한 한양 방어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평양에서의 일이었다. 거기다 류성룡은 조선군 외에 명의 구원군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은 앞서 한양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한양에서는 군대와 백성들이 무너져 버려서 도성을 지키려 하여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은 강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민심은 매우 굳건합니다. 또한 중국과 가까우니, 만약 며칠만 굳게 지키면 명나라 군대가 반드시 와서 구원하여 줄 것이니 그 힘을 빌려서 적군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의지할 땅이 없으니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윤두수가 내 의견에 동의하였다.
(余曰: "今日時勢, 與前在京城時有異. 京城則軍民崩潰, 雖欲守之, 末由也. 此城, 前阻江水, 而民心頗固, 且近中原地方, 若堅守數日, 天兵必來救, 猶可藉以卻賊. 不然, 從此至義州, 更無可據之地, 勢必至於亡國." 左相尹斗壽同余議.) ─ 징비록
(余曰: "今日時勢, 與前在京城時有異. 京城則軍民崩潰, 雖欲守之, 末由也. 此城, 前阻江水, 而民心頗固, 且近中原地方, 若堅守數日, 天兵必來救, 猶可藉以卻賊. 不然, 從此至義州, 更無可據之地, 勢必至於亡國." 左相尹斗壽同余議.) ─ 징비록
- 정철은 실제론 개성에 있던 5월 2일 복직명령이 떨어지지만 드라마상에선 그보다 늦게 복직했다.
- 개천사람 이춘란이 쌀4천석을 바쳤고 이순신의 첫 승전장계가 접수된 것으로 19화 종료 시점이 임진년 5월 23일임을 알 수 있다.
- 옥포 해전 당시 녹도만호 정운이 맡았던 역할은 전라좌수군 돌격장이었다. 적이 코앞에 있는데 대장선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 옥포파왜병장에선 조선군이 주력으로 쓰고 왜선에 도선해 조선인을 구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기 해전에서 드라마가 묘사한거 처럼 전투 내내 화포만 쏘다 끝난 사례는 찾기 힘들다.
- 고증 오류라기보다는 연출 미스인데 임진강에 있는 한응인이 자꾸 평양의 선조앞으로 텔레포트를 한다...
- 이각이 지연전을 주장하며 먼저 공격하자는 한응인의 의견을 거부하다 참수되는데 실제 이각은 적전도주 혐의로 김명원에게 참수되었다.
- 임진강 전투 장면에서 한응인이 공격군을 직접 인솔하는데 실제론 신할과 유극량이 인솔했고 한응인은 김명원과 함께 강 건너에 남았다.
- 이일이 임진강에서 한응인의 지휘를 받는데 실제론 임진강 전투가 벌어질때 이양원과 함께 한탄강에 주둔하고 있었고(실록 5월 23일, 6월 7일 기사) 6월에 평양에 들어왔다.(실록, 징비록)
- 김충선이 곽재우 의병대와 함께 행동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게다가 작중 묘사된 곽재우 의병대의 전투는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드라마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전투다. 곽재우가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낸 보고에 의하면 창의 직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왜선에 매복 공격을 가하는 식으로 싸웠지, 일본군 부대와 직접적인 교전을 벌인 적은 없었다.
2.8. 제20회
- 용인 전투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면서 권율, 황진 등이 병력을 수습한 것이 언급된다.
- 류성룡이 조선이 일본과 손 잡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명 사신과 같이 대동강 건너 일본군 진영을 정탐한다. 실제론 임세록과 류성룡이 연광정에 가서 왜군의 척후를 보며 왜군의 전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 일본군 군영에서 전령이 우키다에게 전라도에 침공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에케이 부대가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 부대에게 전멸되었다고 전하는데, 에케이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말하는 것이다. (난중잡록에 의하면) 5월 26일 벌어진 정암진 전투에서 에케이는 곽재우에게 격파당했다. 단, 전멸당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안고쿠지 군은 이후 보다 북으로 올라가 창녕과 영산을 거쳐 경상우도를 통과하려다 재빨리 쫓아와 피난민을 수습하고 방어태세를 갖춘 곽재우군을 보고 포기, 마지막으로 현풍 쌍산역에서 배를 타고 경북 성주로 향했으나 곽재우군과 소규모 교전을 벌인후 여의치 않다고 판단해 물러났다.
- 정암진 전투를 묘사하며 왜군이 꽂아둔 표식을 몰래 바꿔놓아 늪지에 빠지게 만드는데 적어도 임진왜란 당대 기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정암진 전투 자체가 있었던 점은 분명하지만 당사자인 곽재우가 기록을 남겨놓지 않아 난중잡록과 실록에선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 단편적으로 전한다. 신흘의 난적휘찬에선 특유의 붉은 옷을 이용해 기만전술을 사용했다 기록하고 있고 이탹영의 정만록에선 붉은 옷을 활용한 기만전술에 유인 후 매복전술을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드라마에 등장한 정암진 전투 묘사는 곽재후 사후 73년뒤에 후손들이 편찬한 곽재우의 문집 망우선생문집에 수록된 용사별록이 출처다. 즉,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 조선군이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걸어서 야습을 하는데 징비록, 실록, 기재사초, 재조번방지 등 이때를 기록한 사료들은 100명(실록) 내지는 400명(기재사초)의 정예병사들이 배를 타고갔다고 적고 있다. 야습이 성공해 적 백여명 이상을 사상시키고 말 300여필을 노획하는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배를 지키던 사공들이 추격하는 왜적에 겁을 먹어 달아나는 바람에 30여명이 퇴각하지 못해 목숨을 잃고 남은 병사들은 별 수 없이 왕성탄 쪽으로 빠져나왔다.* 류성룡과 윤두수가 평양을 떠나는 것을 반대하고 윤두수가 정철을 보고 남송의 충신 문천상의 시를 읊은 일은 사실이다. 백성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신주가 땅에 떨어지는 등 혼란한 와중에 류성룡이 진정시킨 사실도 징비록에 나온다. 백성들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류성룡이 앞서 평양사수를 주장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으로 류성룡은 소요를 일으킨 사람중에 지역 유지를 불러 평양을 지킬 것이니 소란을 피우지 말라 타일렀고 그날 저녁 평안감사 송언신을 불러다 꾸짖어 주동자 세 명을 색출해 목을 쳤다.*{해당 기사에 대한 반론} 선조실록 선조 25년 무술일 기록인데 목을 친 주체는 류성룡이 아니라 선조다.
- 홍여순이 소요사태를 일으킨 백성들에게 봉변당한 일은 기재사초에 전하며 기재사초에선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승지가 행차하지 않을 것이라 크게 써붙여 놓고서야 진정되었다 적고 있다.
- 선조는 6월 11일 평양을 떠났고 이순신은 6월 10일 2차 출전을 마치고 돌아왔다. 드라마 마지막에 류성룡에게 보내는 서신에선 1차 출전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2차 출전에 관한 언급은 들어있지 않다.
- 이순신이 허내만을 부산에 보내 첩보임무를 시킨것은 사실이다. 단, 조선8도에 정보원 2명씩 보내서 정보를 수집한다는 내용은 각색.
2.9. 제21회
- 윤두수는 평양을 잃은 후 정주에서 류성룡을 만났다. 문제는 그 시점에 어가는 북으로 떠나고 류성룡만 뒤에 남겨 수습을 맡겼을 때라는 것. 즉, 고증을 제대로 했다면 21화 내내 윤두수는 선조옆에 있을 수 없었다.
- 어가를 보내고 정주에 남은 류성룡 곁에는 몽진중에 수습한 패잔명 19명과 군졸 6명이 있었다. 정주에서 관곡을 절도하는 백성들을 목격했을 때 이들을 시켜 주모자를 잡아들이고 조리돌림(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벗겨 길에서 끌고다녔다.)해서 소요사태를 막았다. 그리고 얼마후 평양에서 온 윤두수 일행을 만나게 된다.
2.10. 제22회
- 명이 준 은을 선조가 군자금으로 쓰거나 무장들에게 나눠지는 대신 자신을 호종한 신하와 관인, 금군들에게 당일부로 나눠준건 사실이다. 문제는 그 은 받을 사람 목록엔 류성룡도 들어간다. 징비록에선 억울하게 죽은 신각을 끌어와 명에서 신각을 포상하라고 준 은인데 조정에서 나눠주지 않은거라고 바꿔적었는데 안 받았다면 굳이 사실관계를 바꿔적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라면 이순신을 격파할 것이라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와키자카의 이름값이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보다 떨어짐을 언급한다. 즉, 와키자카가 칠본창 중에서 가장 듣보잡이기 때문에 더 공을 세우기 위해서 열의를 보일 것이라는 설명. 와키자카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띄우던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서는 그나마 징비록에서 인물 설명이 역사 고증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직전에 왜군이 온다는 정보를 받은 직후에 장수들과 상의하면서 김천수에게 받은 정보는 확인했냐고 묻는데, 이순신의 수군에 있던 사람은 김천수가 아니라 하천수이다.
2.11. 제23회
- 류성룡이 이일을 불러다 또 도망가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이 둘이 만난 건 6월 평양성에서의 일이며 이때 류성룡은 이일을 기꺼워하며 이것저것 챙겨줬다. 그리고 이일은 연장자고 아무리 왜전에서 전적이 안좋았다지만 류성룡이 자기 맘대로 죽이네 살리네 할 수 있는 위치의 인사는 아니었다.[28]
*1559년 6월 16일자 명종실록 기사에선 화포운용에 대해 적선가까이 다가가서 쏘라고 명시하고 있다. 고려해전기같은 일본 기록에서도 10m안쪽으로 접근해서 쏘았다. 애초 소구경(6~7cm) 현자총통이 주력 화포라 그걸로 적선을 격침시키려면 화약이 너무 많이 들었다. 1598년 흥양현감 최희량이 이순신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통제영에제조해 보낸 무기목록이 있는데 대형탄환보다 인명살상용 소형탄환이 절대적으로 많다. 마지막으로 조선군은 화약이 부족했다. 임진년부터 이순신이 열심히 제조해 원균에게 인계할 때 겨우 4천근 이었다. 그리고 조선수군은 조선인 포로 한명 구출을 적의 수급획득가 동일하게 여겨 왜선에 도선 후 수색, 전투를 벌였다. 임진장초를 보면 옥포해전부터 꾸준하게 도선 기록이 나오며 특히 한산도 해전은 사도첨사 김완이 직접 왜장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한 도선 백병전이 가장 잘 나타난 전투다. 정리하면 조선수군은 화약이 부족으로 대량사용이 불가능했다. 판옥선의 높은 선체를 성처럼 활용해 궁시류를 주력무기로 썼고 화포는 보조무기로 적선이 아닌 인명살상이 주된 용도였다. 궁시와 화포로 갑판위의 전투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도선해서 수색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잔존한 왜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는 세계해전사를 살펴봐도 자연스럽다. 대포가 해전의 주력이 되어 포격으로 적선을 두들기는 건 전열함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임진왜란 약 20년전에 벌어진 레판토 해전처럼 근접해 화살이나 화승총을 쏘면서 필요할 때 포격을 섞어주는 게 16세기의 해전이었다. 헌데 3분간 화포만 쏘다 끝내버려 원거리에서 화포로 다 해결했다는 조선 수군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나온다.
*군사들은 창, 칼, 활, 화살 등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살라 버린 뒤에, 짐짓 배 한 척, 남겨둔 채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개방해 두었으나, (중략) 왜선에 포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약속하였습니다. - 임진장초, 당항포해전
*여러 장수나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같아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순천 부사 권준이 제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광양 현감 어영담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쏘아 맞혀서 신의 배로 묶어왔는데, 문죄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12급을 베고, 우리나라 1명을 산채로 빼앗아 왔답니다. 사도 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6급을 베었고, 흥양 현감 배흥립이 왜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8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1척을 바다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깨뜨리고 일시에 불살랐습니다. [29]- 임진장초 한산해전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면서 천ㆍ지자 총통에다 장군전ㆍ피령전ㆍ장편전ㆍ철환 등을 일제히 발사하며하루 종일 교전함에 적의 기세는 크게 꺾였습니다. -임진장초, 부산포 해전
*화살 사거리 안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한 안골포 해전이나 위의 부산포 해전 전투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수군은 화포 운용시 궁시류와 사거리 차이를 크게 두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사통레이더도, 계산기도 없었다. 흔들리는 바다위에서 사격제원을 정밀하게 계산해서 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협차사격이라고 일단 쏴보면서 정확한 제원을 찾아야 했는데 초석이 나지 않고 염초 제조도 손이 많이갔던 16세기 조선의 수군은 화약이 풍부하지 않았고 주력 화포인 현자는 적선을 격침시키려면 명중탄이 굉장히 많이 필요했다. 그런 상태에서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려면? 적선이 아니라 적 전투원 무력화를 최선의 목표로 삼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쏜다.
{한산도 대첩 백병전에 대한 반론}
*한산도대첩에서 조선수군은 조선인 포로 한명 구출을 적의 수급획득가와 동일하게 여겨 대첩이 끝난 후 왜선을 나포해 도선했다. 임진장초를 보면 임진년 해전에서 도선 기록이 나오지만 이는 대첩이 끝나고 배를 나포하는 과정이었지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인것이 아니다.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지 않았음은 임진왜란 관련 논문 및 연구서에서 널리 인정받은 통설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란왜란해전사 권위자인 이민웅교수가 연구저서에서 자세히 밝혀 놓았다. 한산도 해전은 사도첨사 김완이 직접 왜장과 일기토가 잘 나타난 전투이기도 하다.[30] 거기다 조선수군의 함포거리는 200보로 정해져 있지 않다. 원거리포격인가, 200보내 포격인가는 아직 논란이 끝나지 않았고 이견도 많다. 총통과 화포는 그 기능에 따라 사정거리에 따라, 전투를 수행할 때 각 기능에 따라 함포를 사용해 효율적인 전투를 하였다.
- 경상우도 의병장인 김면이 뜬금없이 전주의 권율 진영에 나타나 작전을 논의한다. 임진년 7월초면 김면은 우척현 전투(6월)에서 승리하고 병력을 모아 거창 방면을 방어중이었다. 또한 당시 50을 넘긴 훨쩍 넘겼던 김면역에 젊은 배우를 기용했다.
- 전라방어사 곽영과 함께 금산으로 향했어야 할 고경명도 뜬금없이 전주에 나타났다가 이치에서 전사한다. 그러면서 나레이션은 금산에서 싸웠다고 언급한다. 실제 고경명은 유팽로, 양대박 등과 의병을 규합해 6월 22일 전주를 떠나 근왕을 위해 북상하다 충청도 은진에서 금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진로를 변경 전라도 진산을 거쳐 7월 9일 금산에 이르렀다. 이치 전투를 앞두고 권율과 만날 일이 없다.
- 이치 전투의 개시시점이 다르다.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가 7월 8일에 동시에 일어난걸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선조수정실록에서 이 두 전투를 7월 1일자 기사에 나란히 싣어놓은 탓에 생긴 착각이다. 웅치전투가 7월 8일이나 나란히 서술된 이치전투도 7월 8일이라 생각한 것 이다. 이 오해가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실리면서 오랫동안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그 달에 있었던 기록은 몰아서 적은 서술방식이 있어 수정실록 기사만 보고 시점을 추정할 순 없다. 이치와 웅치는 직선거리로 40km 떨어져 있고 방향도 웅치는 금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전주 동쪽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치는 금산에서 서쪽으로 가서 전주 북쪽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고바야카와 군이 그런식으로 군사를 분산시킬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7월 8일에는 금산과 이치 사이 진산에 고경명 의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치전투가 웅치전투와 동시에 벌어지려면 무조건 고경명 부대와 먼저 싸워야 했는데 고경명 의병대는 7월 9일 금산에 접근해 10일 금산성의 왜군과 교전했다. 황진과 의병장 황박은 웅치와 이치전투에 모두 참가했고 황박은 이치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거리와 시간을 고려하면 같은 날 두 전투에 참가하는 건 무리다. 또한 난중잡록에 의하면 권율은 웅치전투가 벌어지는 시점에 남원 수성장으로 임명받아 남원에 있었다.(난중잡록 7월 9일~10일조)
- 선조가 광해군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왕실신주를 들고 이천으로 갔다며 분조 관리들을 다 파직하라 이러는데 각색이다.
2.12. 제24회
- 평양성 전투가 끝나고 전사한 명군 장수로 사유와 장국충이 언급된다.
- 평양 주둔 왜군이 하루면 의주에 닫을 수 있었으며 고니시가 의주를 공격하지 않은 게 미스테리라고 나레이션을 까는데 왜군이 다 기마부대고 중간에 조선군이 아무도 없었으면 가능했을 거다. 왜군은 거의가 보병이고 2차 평양성 전투 후 겨우 2주 지나 벌어진 3차 평양성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이 2만이다.
- 선조가 누르하치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이려다 윤두수에게 저지당하는데 실제론 그런거 없다. 조선 조정은 1589년부터 누르하치의 발호를 경계해 왔고 상황이 급하다고 왜란 이전 최대 주적이었던 여진족을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조 역시 명쪽에서 수고를 덜려고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도우라는 칙령을 내릴 걸 경계했지 누르하치를 전혀 기꺼워 하지 않았다.(선조실록 9월 14일 기사 참조) 다만, 1595년 누르하치가 파병의사를 밝힌 것은 사실이다. 이전부터 경계하던 조선에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선조실록 9월 25일 기사 참조)
- 2차 평양성 전투 당시 조승훈은 자정 무렵 순안에서 출병해 동틀녁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류성룡이 전투에 따라가 훈수두는 일도 없었다. 류성룡은 그때 명군 보급문제로 안주에 머물고 있었다.(실록 7월 20일 기사, 징비록 참조)
- 조승훈이 조선군 척후부대를 보내자는 류성룡의 제안을 거부하는데 실제론 조선군 척후부대가 잘못 보고했다. 척후장이었던 순안군수 황원이 왜군이 거의 다 서울로 향했다고 잘못 보고했고 조승훈은 이걸 믿고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 가토가 임해군을 폭행하는데 조선측 기록과 일본측 기록모두 가토는 귀중한 인질인 두 왕자를 정중하게 대했다고 적고 있다.
- 2차 평양성 전투때 거짓 정보를 전한 순왜를 류성룡이 사로잡는 것도 드라마의 창작이다.
- 곽재우가 공휘겸이 왜군 장수들과 연회를 베푸는 걸 포착하고 습격해 참하는데 실제론 공휘겸과 동향으로 친분이 있던 훈련봉사 신초를 시켜 집 밖으로 꾀어낸 다음 매복시켜둔 병사들로 사로잡아 참했다. 공휘겸이 살던 영산 지역은 임진년 9월 중순에야 조선군에 탈환되었기에 7월에 소수 의병 부대로 대놓고 교전을 벌이긴 힘들었다.
2.13. 제25회
- 선조가 분조에 있는 장수들 중에 김우고, 이시언, 이일 등을 의주로 불러오라 한 대목이 언급된다.
- 심유경이 의주에 도착한 게 6월 29일. 조정이 임해군과 순화군이 사로잡혔다는 소문을 접한 게 8월에서 9월초, 가토 진영에서 경성판관 이홍업 편에 인질들과 가토의 서신을 광해군이 있는 성천으로 보낸게 10월이다.
-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을 적선을 유인하다 가슴에 총을 맞는 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임진장초를 보면 부산포 해전 당시 왜군은 맨 처음 돌격한 대선 4척이 손쉽게 격파되자 바다에서 싸우길 포기하고 산으로 올라가 6개 처에서 철환과 화살을 쏘며 반격했다. 정운은 육지에 근접해서 싸우다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 드라마에선 아직 곽재우가 벼슬을 받지 않은걸로 나오는데 공휘겸이 곽재우에게 죽은 게 임진년 7월. 조정은 임진년 6월 29일 곽재우에게 정6품 유곡찰방 벼슬을 내렸다. 즉, 이 시점에서 이미 의병의 관군 편입이 이뤄지고 있었다.
- 용맹하고 유능한 의병, 무능력하고 겁많은 관군이라는 종래의 편견을 완화시키긴커녕 강화하고 있다. 곽재우와 김수의 갈등은 왜란 이전 전쟁 준비 과정에서 경상 우도 지역의 토착사족과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의 파워게임이 벌어진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양쪽 모두에게 과실이 있었다. 결코 잘싸우는 곽재우를 김수가 시기했던 게 아니다. 더불어 25화 시점이 최소한 임진년 7월인데 김수와 곽재우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건 4월, 극대화되건 곽재우가 안고쿠지 에케이 군에게 승리하여 기세를 올리고 김수가 용인전투에서 패한채 돌아온 6월이다. 7월이면 김성일이 중재에 나섰고 그 정황이 모두 조정에 보고된 다음이다.
- 의병을 자처한 화적떼가 개전 직후인 임진년 4월부터 나타났고 의병의 병력과 물자가 본래라면 관군에 소속되어야 할 자원이란걸 고려하면 정식으로 관직을 줘서 중앙의 지시를 따르게 하거나 아예 관군에 편입시켜는 조치는 합당한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 조치를 무슨 희대의 망상쯤으로 왜곡하며 선조 까는데 써먹고 있다. 드라마에선 관군밑에 들어갈바에야 지리산으로 들어가겠다는 곽재우만해도 5월에 김성일로부터 정식으로 인증을 받으며 시작했고 6월에 벼슬을 받았으며 8월부터 관군과 협력해 창녕, 영산, 현풍 탈환전을 벌이고 10월에는 당상관이 되고 정유년엔 관군으로 종군했다. 참고로 김성일 중재와 수완덕에 관군과 의병의 협력 작전이 가장 원활하게 이뤄진 곳이 경상도다. 의병장들과 기존 무관들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이순신만 해도 여러 승병장들을 땡중이라 매도했던 일도 있다.) 이는 병력자원 문제와 의병장들이 이후 특채로 벼슬에 임명되면서 기존의 정식무관들과 특채무관들 사이의 파워게임에서 비롯된 일이지, 의병장들이 의병의 관군화를 거부해 일어났던 일은 아니었다.
2.14. 제26회
- 심유경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회담을 벌여 50일간 휴전을 한 것은 사실이다. 9월 1일을 기준으로 50일이었다.(보바이의 난이 토벌된 것은 9월 16일) 문제는 8월 1일에 벌어졌어야 할 3차 평양성 전투는 어디로 간 걸까? 병력 2만이 동원된 전투가 통째로 날아갔다. 이에 대해서 드라마상에서는 선조와 심유경을 꽤나 깠는데, 사실 조선군이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여력이 없었고 일본군의 전투력도 최상의 상태였으며 명군도 투입될 상황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심유경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 광해군이 선조의 서찰을 읽고 분개해서 그 자리에서 집어던지는데, 일단 禮에 철저하게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집어던진다는 건 '나는 사람임을 포기하겠다!' 라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선조는 양반 사대부 정도가 아니라 조선의 국왕이었고, 광해군은 왕자이기 이전에 왕의 신하였다. 즉 실제로 광해군이 선조의 서찰을 집어던졌다면 극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었다[31].
- 실록 기사를 보면 윤두수를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50일 휴전기간 동안 밖으로 나온 왜군을 칠 궁리를 하고 선조도 동조한다. 50일 기간을 어긴 장졸들에 대해 심유경이 알게 되었을 때도 처벌하겠다고 둘러대기만 하고 실제론 처벌하지 않았다.
- 이일이 우키다를 습격하는 내용은 9월 초 왕성탄에서 적선을 나포해 80여명을 사로잡은 일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순왜에게 첩보를 입수해 우키다를 습격하는 일은 없었다.
- 정운이 사망하고 교대하듯이 권준이 등장하는데 고증대로면 원래는 둘이 같이 공존했어야했으며 권준의 직책은 순천부사인데 당상관이 입는 빨강색 복장을 입었다 원래는 정운과 같은 파란색 복장을 했어야 옳다.
2.15. 제27회
- 왜군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것은 전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약탈과 방화의 일환이지 우키다가 기습을 받은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다. 경기도에 있는 그 많은 왕릉 중 선릉, 정릉만 도굴되고, 도굴 미수까지 합쳐도 강릉과 태릉이 추가될 뿐이다. 사실 조선 왕릉은 석관에 석회를 사용해 도굴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로 조성되었다. 일본군은 모든 왕릉을 다 도굴하고 싶었겠지만 4차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이 승리하고, 이순신 때문에 해상 보급이 막혀 한양에서 철군해야 했다.
- 전라좌수영 파트에서 새로운 화약 제조법에 관해 설명하는데, 실제와 많이 다르다. 작중에서는 민가의 부뚜막이나 뒷간의 흙을 채취해 염초를 재조하는 방법을 막 발견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훨씬 이전부터 알려진 방식이지 이순신히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에서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제조량이 많지 않고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고 무엇보다 민폐가 심하다는 문제가 있어 임진왜란 때 조정은 바닷물을 사용하는 명의 염초제조법을 들여오려 노력했다. 그러나 명이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염초 생산방법을 쉽게 알려줄리가 없어 여의치 않다가 숙종때에 역관 김지남이 민가의 흙이 아닌 평범한 길바닥 흙을 사용하는 방법을 들여와서 신전자초방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임진장초를 보면 이순신을 골머리 썩힌 물자는 염초가 아니라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유황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당시 조정과 연락이 쉽지 않았고 물자가 부족했기에 화약 제조에 쓰이는 다른 재료는 자급자족했으나 유황만은 구할 수가 없어 조정에 이를 지원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덧붙여 유황은 현종 대에 이르러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다.
- 임해군이 사로잡힌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선조가 광해군을 의주로 불러 힐난하는데 그런 일 없었다.
- 선조는 아버지로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구해주고 싶었겠지만 그렇다고 은자를 털어서 협상을 하느니 하는 말은 한적 없다.
- 이순신에게 적의 움직임을 전해듣고 왜군이 진주로 갈것을 예측한 류성룡이 광해군을 찾아가 선조에겐 보고하지 말고 격문을 띄워 의병과 관군을 진주로 집결시키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징비록엔 진주대첩 자체를 서술하지 않았다. 이무렵 실록 기록을 보면 류성룡은 민심을 수습하고 명군 군량마련 하느라 바빴다. 조정이 진주대첩에 대해 알게 된건 12월 김성일의 장계가 올라온 다음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내 의병부대를 진주로 집결시켜 방어케 한 것도 김성일이다. 그는 임진년 6월부터 조정에 진주의 중요성을 설명했고 흩어진 수령과 군사를 모아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진주 주변 고을에 있던 소규모 왜군부대에 대한 요격에도 나섰다. 진주목사 김시민도 이때 공을 세워 승진한 인물이다. 초반에는 김성일을 재조명할 것 같더니 김성일의 모든 공은 다루지 않고 넘기거나 류성룡에게 넘겼다.
- 이덕형의 부인이 왜적에게 붙잡혔다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덕형의 부인은 이산해의 둘째 딸이다.
-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우키다가 호소카와, 키무라, 하세가와 등에게 김해로 가라고 지시하는데, 호소카와 타다오키, 키무라 사다미츠, 하세가와 히데카즈를 말한다.
- 선조가 임해군이 일본군에게 붙잡힌 소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철이 대응하지 말라고 하면서 명나라에 일어났던 사건에서 포로로 붙잡힌 황제를 내버려두고 다른 황제를 세운 사건을 언급하는데, 이 사건은 토목의 변을 말한다.
2.16. 제28회
- 곽재우가 진주성에 들어가 김시민과 작전을 논의하고 왜군과 교전을 벌이는데 진주대첩 당시 곽재우는 진주성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실록 기록을 보니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에 의하면 곽재우는 진주성 구원지시를 받고 선봉장 심대승에게 200명의 군사를 주어 야밤에 횃불을 밝히고 심리전을 벌였을 뿐 숫적으로 압도적인 왜군과의 직접 교전은 피했다.
- 진주대첩에서 김성일의 공헌도가 통째로 날아가고 광해군과 류성룡이 공적을 먹튀했다.
- 나레이션으로 진주 대첩이 수성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라고 언급하여 연안 전투를 지워버렸다.
- 임진년 11월 7일 유생 남이순, 송희록 등이 선위하라는 상소를 올렸을 때 선조는 적을 물리친 다음에 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신하들은 전부 만류했다.
- 선조가 처음 선위이야기를 꺼낸건 파천 하기 직전 광해군을 세자로 삼은 직후였고(징비록 초본) 본격적인 선위파동은 남이순의 상소가 올라오기 한달전인 10월 17일이 처음이다. 이 때도 모든 신하들이 만류했다.[32] 이항복이 나중에 백사집에 대놓고 선위했어야 한다고 적은바있고 류성룡과 정철이 대간들을 이끌고 가서 선조에게 하야 요구를 하려다 눈치만 보고 물러 나왔다던가 하는 등 대놓고 한 건 아니지만 선조에게 선위하라는 압박이 간접적으로 가해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점 때문에 선조가 이 국면을 타개하고자 선위파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 신성군의 죽음(11월 5일)은 남이순의 상소가 올라오기 2일 전이다.
- 류성룡이 남이순의 상소를 올린 이유에 대해 조사하면서 남이순의 형인 남이공이 언급된다.
- 이여송이 조선에 당도하면서 5대조의 고향이라 언급하는데, 5대조는 이영으로 본래 조선에 살았다가 명으로 이주해 철령위지휘첨사를 지냈다.
2.17. 제29회
- 류성룡이 군량미를 전해주는 사람으로 김억추가 언급되었다.
- 고니시가 제4차 평양성 전투가 벌어지면서 오토모의 지원 병력이 언제 오냐고 묻거나 오토모가 봉산성을 포기하고 물러났다고 언급하는데, 이 오토모는 오토모 요시무네를 말하는 것으로 봉산성을 포기한 일로 히데요시의 진노를 사서 영지를 개역당할 뿐만 아니라 가문까지 폐문되었다. 다만 죽이지는 않았고 이후 12년을 더 생존한다.
- 평양성 전투에 대한 나레이션을 통해 김응서, 휴정 등이 언급되었다.
- 고니시가 토굴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한다 주장하고 진짜 굴속으로 들어가는데 왜군이 말하는 토굴은 땅에 판 굴이 아니다. 이 당시 왜군이 말하는 토굴은 땅위에 흙이나 돌을 쌓아올려 벽을 만든다음 총안을 뚫어 공격하는 방어구조물이었다.(선조실록 1593년 1월 26일) 전형적인 일본식 성채구조물인데 이걸 진짜 땅굴로 이해했다.
- 명군이 피해가 커질것 같자 고니시를 그냥 놓아보내는 걸로 묘사했는데 실제론 말로만 그랬을 뿐 추격해서 500여명을 살상했다. 지속적인 추격과 행주전투로 인해 고니시군은 1593년 3월 시점에서 18,700에서 6,600으로 줄어든다. 손실률 64.5%로 9개군 중에서도 독보적인 1위였다.
2.18. 제30회
- 전쟁 기간 내내 명을 괴롭힌건 보급 문제였다. 평양 이북까진 조선 점령지역이고 운송거리가 짧아 어떻게든 보급이 이뤄졌지만 평양 이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즉각적으로 보급 문제가 발생했다. 명군의 진격에 보급이 맞추지 못하는 일이 늘어났고(1593년 1월 20일, 23일 선조실록기사) 벽제관 전투 패전 원인 중 하나가 보급 문제로 군사의 절반 가량을 뒤에 남겨두고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한성 부근에 접근한 탓이었다.(2월 5일 선조실록 기사) 사람에 대한 보급만 보급만 문제가 된게 아니었다. 명군이 기병이 주력으로 군마 2만 2천여필을 보유했는데 말 한필이 하루 콩 5~7승에 마초를 따로 공급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퇴각하며 들판에 불을 지른탓에 벽제관 전투를 앞두곤 마초 보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는 군마의 집단 폐사로 이어져 벽제관 전투 직후 명군은 군마 1만2천 ~ 1만 4천 필을 손실했다.
- 명군은 평양성 전투 이후 미적거리지 않고 서둘러 움직였다. 평양 이남으로 내려가며 보급선이 길어지자 상술한 보급문제가 불거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양과 용산 일대에 있는 왜군의 군량을 차지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병과 낙오병을 노상에 방치하면서까지 진군을 서둘렀다.(선조실록 1월 27일 기사)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 군대란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보급소요를 감당못해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괜히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이 보급 문제로 머리 싸맨 게 아니다.
- 군령을 무시하고 왜군을 놓아보낸 김경로를 이여송이 싸고도는데 실록에 수록된 류성룡 본인의 보고에 명군이 대단히 노여워하며 처벌을 요구했다고 적고 있다.(1593년 1월 22일 기사.)
- 선조가 명군에게 특산품이나 보내라고 경기도 의병을 차출하는 걸로 묘사했는데 실제와 차이가 있다. 실제론 군량운송에 투입시켰다.(선조실록 1593년 1월 11일 기사) 정철 등이 의병을 군량운송이 쓰는 걸 옳지 않다 주장하는데 역시 왜곡이다. 5만에 달하는 원정군의 보급소요도 엄청났지만 이들의 주거점인 평안도 지역은 중앙으로 조세를 보내지 않는 지역이라 수운이 발달하지 않아 육상수송에 의지하는바가 컸는데 조선의 도로사정과 수레사용 실태는 형편없었다. 때문에 군량운송 문제는 왕 이하 대신들이 모두 매달려 고민하다 노이로제 걸리게 만들었고 인력이 부족해서 의병에 왕실 호위군, 관아의 말까지 죄다 동원해야 했다.
2.19. 제31회
- 벽제관 전투를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데 고니시는 평양성 전투의 손실 때문에 참전하지 않고 한양에 머물렀다. 실제 전투를 주도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증발했다.
- 명군이 기병대만 이끌고 급히 움직이다 벽제관에서 패한건 단순히 왜군을 얕봐서가 아니다. 이게 위험한 행동이란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급 문제를 더 늦기전에 해결봐야 했다. 이때는 강화를 논의하기 전이었던지라 한양을 점령해서 왜군의 물자를 빼앗는 거 말고는 수가 없었다. 또한 명군은 평양성 전투 시점부터 남병과 북병의 불화가 극심해서(선조실록 1593년 2월 20일 기사) 공조 자체가 힘들었다.
- 벽제관 전투 이전 수색대를 이끌고 왜군 소부대와 교전해 공을 세운 부총병은 조승훈이 아니라 사대수다. 마찬가지로 이때 당한 왜장은 본시 가토 미츠야스와 마에노 나가야스였는데 극중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들이 나온다.
- 벽제관 전투 전후로 보급문제와 전투손실, 전염병으로 폐사한 명군 군마가 최소 1만 2천~4천 필이다. 류성룡이 이여송에게 공격을 요청하는 시점에서도 수백마리씩 폐사하고 있었다. 이 손실분은 명군 전체 군마의 절반이 넘는다. 게다가 명이 조선원정군에 지원한 군량은 조선의 열악한 운송 체계탓에 대부분이 남쪽으로 이송되지 못한채 의주에 쌓여있었다. 명군이 왜군에 겁먹었거나 조선에 갑질하느라 진격 안한 게 아니다. 1593년 2월 27일 실록기사를 보면 명군은 사람이고 말이고 하루치 양식을 이틀에 걸쳐 나눠먹었다. 조선관리들은 개성에 4만석의 식량을 비축했다고 전했으나 평양에서도 조선의 장담을 믿었다 낭패를 본 바 있던 명군은 믿지 않았고 선조도 안믿었다. 자기나라 땅도 아닌데 밥도 안주면서 싸우라고 등 떠밀면 누가 좋은 소리를 하겠는가?
- 명 조정에서는 평양만 탈화하면 명 본토는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명군이 할 일은 다했으니 조선에게 맡기고 발을 빼자는 목소리도 지속적으로 나왔다.(선조실록 1593년 2월 17일 기사. 5월 23일 기사, 6월 1일 기사, 9월 19일 기사, 11월 19일 기사 등) 송응창 휘하 관리들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왔다.(계사년 3월 4일, 21일 기사에 수록된 유황상과 원황의 발언) 송응창이나 이여송이나 이런 분위기를 읽고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즉, 진격중지는 단순히 원정군 지휘부의 뜻으로 결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헌데 드라마는 이런 사정 다 집어치우고 현지 지휘관들이 조선에 갑질하는 걸로 그리고 있다. 다만 여기서도 명군은 왜군과 싸울 생각이긴 했다. 전적으로 이여송의 판단착오로 패전을 당한 역사와는 달리 침착하게 사태를 관망하겠다는 이여송을 류성룡이 쓸 데 없이 재촉하다가 송응창의 명령으로 억지로 출정시키다 낭패를 본 것으로 묘사되었다.
- 장세작이 발로 걷어찬 건 순변사 이빈이다. 평안도절도사 이일은 계사년 1월까진 순안현(順安縣)에 머무르다 이해 2월 함경도 방면 왜군과 싸우기 위해 이동한다.
- 전라순찰사 권율은 명군 이동에 맞춰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알아서 전라병사 선거이, 전라소모사 변이중 등과 발을 맞춰 이동했지 류성룡 말 듣고 이동한 게 아니다. 류성룡의 비중을 늘리기 위해 경주성 전투, 진주 대첩, 행주 대첩 등 모든 전투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묘사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다음회인 32회를 보면 명군이 남하하지 않아 권율이 고립되고 말자 류성룡이 패닉 상태에 빠진 걸로 나왔다.
- 벽제관 전투 패전 소식이 조정에 접수된 게 2월 5일, 행주대첩은 불과 일주일뒤인 2월 12일이다. 그 사이 조정에서 권율에 대한 논의한거라곤 명군 기다리지도 않고 독단으로 한강을 건너왔으니 파직시키자는 사간원의 탄핵을 비변사에서 거부한 일 뿐 이다.
- 자꾸 지휘권 문제를 들이미는데 이 당시 왕과 신하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보급 문제와 강화 협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지 지휘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 대한민국과 미국의 전작권 문제에 빗대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2.20. 제32회
- 심유경이 송응창과의 대화에서 벽제관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이야기하면서 전사한 마천총을 언급했다.
- 명군에 대한 묘사는 왜곡을 넘어 악의가 느껴지는 수준이다. 평양으로 퇴각 결정을 내릴때 콩이 다 떨어지고 마초도 부족해 군마는 며칠씩 굶고 전염병까지 돌아 집단 폐사했으며 군사들은 평양으로 물러난 후에도 군량이 없어 죽은 말을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송응창과 이여송이 강화를 추진하며 일본에 하삼도를 넘겨줄 궁리를 하는데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나설때는 반대하는 조선측에 영토보장을 약속했고(선조실록 1593년 3월 29일 기사)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강화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본측에서 히데요시의 서한을 들고오던 나이토 조안의 북상을 저지했다. 송응창은 히데요시가 책봉 이상의 조건을 제기할 가능성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 행주대첩에서는 산성이 일반적인 돌성이 아닌 산 위에 목책을 두른 형태의 요새임은 잘 표현하였으며, 각종 포격과 궁시를 퍼붓는 것은 물론, 한국 사극 사상 거의 최초로 화차를 이용해 적을 저지하는 것까지 표현했다. 그러나 산성의 지형이 지나치게 평탄해 공성이라기보단 녹각을 사이에 둔 회전처럼 보인다는 문제가 있으며, 양민들이 돌을 나르고 전투에도 참전했다는 오해를 답습했다. 물론 행주대첩이라고 하면 행주치마가 떠오르기 마련이기는 하지만,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하여 고증에 맞지 않는 장면이 나와도 좋은 것은 아니다.[34] 일본군이 퇴각한 실제 이유는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 보급선을 이끌고 나타난 것인데 드라마 상에서는 일본군의 마지막 공격 직전에 삼도도체찰사 류성룡의 지시를 받은 이빈이 화살을 보급하며, 일본군은 그저 우희다수가가 부상을 입은 끝에 힘이 달려 퇴각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실제로는 최후의 공격 도중 경기수사 이빈이 이끌고 온 화살을 가득 실은 보급선을 보고 조선군의 지원군이라 착각하고 여기서 지원군까지 자신들을 공격하면 대패할 것으로 예측, 이에 따라 퇴각한 것에 가깝다.[35] 더불어 그리고 우키타 히데이에는 부상을 입고 퇴각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멀쩡하게 퇴각한다.[36]
무엇보다도 권율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증발. - 탄금대에서 전사했던 김여물이 다시 살아나서 행주 대첩에 참가했는데, 심지어 극중에서도 전사했다는 나레이션이 나왔으니 꼼짝 없이 죽은 사람 부활시킨 격이 됐다.
명군이 정말 진지하게 할지를 조건으로 협상하고 발을 빼고 싶어했던 때는 아무리 일찍 잡아도 극에서 묘사하고 있는 임진왜란 초반부까지는 안 내려온다.[33] 정유재란 시기에는 아예 명군이 조선땅에서 조선군 대신 싸워주는 형세가 되어 직산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남원성 전투에서는 조선군과 힘을 합쳐 농성을 벌이다 전멸당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싸울 의지가 없는 군대가 무슨 지구전을 펴고, 전투할 생각이 없는 군대가 무슨 수륙협공 계획을 짜며, 뭐하러 적군을 완전하게 몰아낼 대전략을 세운단 말인가. 차라리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명군 묘사가 더 정확하다. 이 작품에서는 초반부에 조승훈과 이여송의 전투를 굉장히 적극적으로 묘사했고, 정유년 파트에서도 울산성 전투, 왜교성 전투 등을 잘 묘사했다. 유정이나 진린 등이 악역처럼 등장하긴 했지만 유정의 경우 이순신과 반목한 점은 사실과 다르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점이나 큰 군공을 세웠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은 사실과 같으며, 진린은 처음에는 능력은 모자란 주제에 전공 욕심만 내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2.21. 제33회
- 명군은 권율의 행주전투에 전혀 부정적이지 않았다. 승전을 전해들은 사대수는 부하편에 예물을 보내 치하했고 경략 송응창은 권율이야말로 나라를 중흥시킨 명장이라며 홍단견(紅段絹) 4단(端), 백은(白銀) 50냥을 하사했다.(선조실록 1593년 2월 24일)
- 가토가 고니시와 신경전을 벌이면서 고니시가 가토에게 정문부에게 참패한 것을 언급한다.
-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류성룡이 장수들을 모으면서 변응성을 언급하는데, 이시언과 함께 추격시키게 한다.
- 류성룡이 기패에 고두례를 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선조실록 1593년 4월 20일) 이는 강화에 승복할 수 없어 한 행동으로 류성룡 혼자 한 행동도 아니었고 이때 명군을 맞은 신하들 전부다 그랬다. 그리고 이건 선조가 사전에 강화논의에 일절 참여치 말라는 언질을 누차했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강화를 추진한다는 소문을 들은 선조는 류성룡을 불러 강화를 논하는 자는 효수라고 지시하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선조실록 1593년 3월 16일 기사) 류성룡이 강화논의에 반대하지 않는 거 같다며 불만을 표시한 적도 있었다.(선조실록 1593년 3월 27일) 재상급 인사를 장 100대를 치려 하고 세자가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죄하는 일은 없었다. 진짜 명군에게 곤장 맞을 뻔한 고관은 윤근수다,(선조실록 1593년 11월 25일)
2.22. 제34회
- 심유경이 송응창과의 대화에서 강화를 위해 보낸 사신으로 사용재, 서일관 등을 언급한다.
- 삼국지 연의 동승 흉내를 내며 밀서를 전하려는 이덕형을 송응창이 저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명 조정은 송응창이 왜군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일본이 사실상 승전국 요구조건(황녀하가, 영토할양)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실무담당 심유경이 숨겨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송응창과 명 조정내의 주전론과 철수론자들 모두 일본의 조건을 책봉 정도로 알고 있었고 송응창과 이여송은 책봉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공격받고 있었다. 때문에 송응창은 조정에다 자신은 기만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변명해야 했다. 즉, 송응창은 드라마에서처럼 여유있게 암약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 선조가 이순신이 피난민들을 정착시켰다는 보고를 듣고 난민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언급을 한다. 언뜻 매몰차 보일 수 있으니 맞는 말이었다. 개전 직후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다니며 화적 내지 가왜(假倭)가 되거나[37] 전쟁공포를 확산시켜 아직 왜군이 이르지 않은 지역까지 황폐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38]
- 제2차 진주성 전투때 명군은 진주성 구원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단 드라마에서처럼 명군이 갑질하느라 그런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어서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 투입된 왜군은 육군 92,972명, 수군 5,460명이다. 이는 부산, 김해, 기장, 거제등 경상도 남해안에 주둔하며 조선측 역공에 대비하는 23,226명을 제외한 전력이었다. 전투가 벌어질 무렵 유정과 오유충이 대구, 낙상지와 송대빈은 남원 방면에 있었고 상주쪽에도 일부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다 합쳐도 일본군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강경한 태도때문에 왜군의 전투 의지까지 강했던지라 공격하면 준엄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엄포 놓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명군만 진주성 구원을 포기한 게 아니다. 행주에서 왜군 전사자들을 찢어버렸던 권율, 왜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홍계남,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등 왜군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강한 조선 장수들조차 진주성 방어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구원을 포기했다.
- 2차 진주성 전투는 전투개시 수개월전부터 예고된 제한적 공세였다. 진주대첩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히데요시가 누누히 강조했고 강화협상을 통해 명과 조선측에도 알려졌다. 심유경은 계획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니시는 그냥 진주성에서 인마를 모두 빼내는 게 나을 거라고 답했다.
- 류성룡이 병상을 털고 일어난 후 남쪽 전선을 순시하고자 남하하여 이순신을 만나는데,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다. 만난 시점이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질 무렵인데 이 무렵 류성룡은 명군에게 진주성 구원을 청하느라 대구로 내려갔다.(그러나 이미 성이 함락된 뒤였다.)
- 거기에 더불어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정착시켰을 무렵에는 이순신은 이미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한산도의 전진 기지로 옮겨간 후였다. (통제사 임명 이후엔 통제영으로 격상)[39]
- 명의 석성과 송응창, 심유경이 한통속이 되어 조선의 한강 이남 땅을 넘겨주고 왕까지 갈아치워서라도 이를 실현시켜 강화협상을 맺으려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명에서 조선을 분할하거나 왕을 교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서애집>에 자세하게 나온다. 그러나 이 의견을 낸것은 명 조정의 급사중 위학증이었고 병부상서 석성은 반대했으며 요동에 있던 송응창은 윤근수를 불러 이 사실을 알리고 조선측이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사실이 접수되자 선조는 명을 거스른다는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명목상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류성룡을 필두로 조정은 전 외교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한다.(서애집 및 선조수정실록 1593년 윤 11월 1일 기사 참조) 류성룡이 왜 최고의 실무형 관료로 칭송받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인데 드라마에선 엉뚱한 인빈과 광해군을 엮어서 완전히 삼천포로 빠졌다.
- 송응창은 강화 추진과정에서 일본이 책봉 이상의 조건(할지)을 요구할 가능성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강화를 추진한 심유경조차 그렇게 해서 전쟁을 끝낼수 없다는 걸 알기에 국제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명은 강화협상 초기에 영토보장을 약속했고 송응창은 할지 소문을 접한 뒤 왜국사신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 미니다큐에서 김천일을 최초의 의병장이라 언급하는데 김천일은 임진년 5월 16일 거병했고 곽재우는 4월 22일이 유력하다.[40] 전라도로 한정지어도 5월 1일 창의 격문 돌리며 병사를 모집한 유팽로가 최초다.
2.23. 제35회
- 진주성 관민이 몰상당한 원인은 간단하다. 둘러싸면 빠져 나갈 길이 없는 평지 읍성에서 소수 병력으로 1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맞았기 때문이다. 조선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경우 성을 비우라는 지시를 거부하고[41] 사수를 택한 전사자들에게 패전 책임을 돌리는 모양새가 되기에 다른 원인들이 거론되었다. 실록에선 지휘관급 장수가 너무 많아 지휘권이 단일화 되지 못한점, 선거이, 최원, 곽재우 등 조선군 지휘권들이 구원을 거부한 점 등이 거론되었고 징비록에선 확장공사로 방어가 극히 불리해진 점을 들었다. 이외 서예원, 김천일 등 일부 지휘관의 자질 문제가 거론되었다. 작중 윤두수가 권율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관들이 진주성에서 농성했으면 이길 수 있었다 진언하는데 그건 영호남 조선관군 전부 죽이자는 소리다.
- 심유경은 1593년 명 조정에서 선조를 갈아치우고 새 왕을 세우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드라마와는 정반대로 반대했다.
-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표현은 당대에 꽤나 유행했던 표현으로 보인다. 류성룡의 서애집에 1593년 말에 조선에 파견된 명사신 사헌이 류성룡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 말을 거론하며 사실이냐고 슬쩍 떠본 기록이 있다. 어떻게든 전쟁에서 발을 빼고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려 했던 사헌은 대민약탈을 긍정할 경우 명군의 거취 관련해서 류성룡을 흔들 계획이었던 듯 한데 류성룡은 소소한 피해야 있겠지만 그거야 당연히 있는 일이니 신경쓸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수만의 외국군대가 장기간 움직이지 않고 진주하니 민생에 피해가 없을 수 없었지만 조선 입장에선 명을 어떻게든 붙들어 놓아야 했고 류성룡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 사람이 조승훈 앞에서 칼을 들을 들고...
- 조선이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명군 병사 1인에게 군량 3말씩을 매일 지급할 능력이 있는 국가였다면 벽제관 전투는 고사하고 명군을 부를 필요나 있었을까. 명군의 대민약탈 행위는 조선의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운송조차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에서 하던 식으로 은을 통한 상거래도 불가능해서 벌어진 일이었다.[42]
- 정철총통을 제작해 비변사에 올려보낸 기록은 난중일기 1593년 5월 12일조에 적혀있다. 작중 류성룡이 개발진으로 언급한 정사준, 언복, 동지, 안성 외에 낙안군수 이필종이 참여했다. 승자총통류의 궁극진화라 할 수 있는 소승자총통이지만 점화장치와 휴대성, 정확도 면에서 조총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말한 것처럼 훈련도감 주력 화기로 쓰려고 하진 않았다. 소형총통류도 19세기까지 꾸준히 생산은 되었으니 보조무기였고 훈련도감에서 가장 중시한 화기는 잘 알려져 있듯 조총이다.
- 조선이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병사들을 교육한 것은 명군 지휘부에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명이 경계한 것은 염초 제작법 등의 군사 기밀이 새나가는 일이었지, 조선군이 강화되는 것을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훈련도감이 창설될 시점이면 명군은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기효신서가 조선에 알려진 것은 평양성 전투 이후 이여송이 선조와의 대담에서 언급하면서부터고 제독검 등은 낙상지 측에서 먼저 제안하여 전수되었다.
- 고니시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요시토시에게 나이토와 함께 가라고 언급하는데, 나이토 조안을 가리키는 것이다.
- 외침을 받을 때 노비 문서를 태우고 면천을 보상으로 내걸어 천민들을 군인으로 동원한 사례는 고려사에도 보이며, 조선만 보자고 해도 을묘왜변 때도 공을 세운 공, 사노비를 면천시켰다. 즉 급할 때 거론되는 궁여지책을 뿐이며, 오히려 삼수병 가운데 사수는 노비들 가운데 차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선조실록 1596년 1월 23일) 당시 선조와 대신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은 천민들을 면천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개인 재산인 사노비를 징집할 때 그 주인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보상해주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사노비 주인들에게 파격적으로 벼슬을 내리거나 부세를 감면해 주는 방안을 내놓았다. (선조실록 1596년 2월 23일) 한편 36화에 등장한 류조인이 사노비를 군사로 동원하는 것을 반대하자 유성룡이 소를 올려 시무를 모르는 말이라고 논박하는 일도 있었다. (서애집 연보 권2 을미 12월) 반면 드라마에서는 노비를 동원한다는 것을 참신한 계책, 고금에 유례가 없는 희대의 결단 쯤으로 묘사하며 수구와 진보의 대립으로 그렸다.
2.24. 제36회
- 드라마에선 곽재우가 김수에게 부산에서 유격전을 벌일 것을 제안하나 거절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의병장 신분으로 유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나레이션은 다시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36회의 시간적 배경은 곽재우가 성주 목사에 취임한 이후고(1593년 4월 15일) 훈련도감이 창설되고(훈련도감 설치가 8월 14일, 사목 발표가 8월 22일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1593년 8월 30일)되기 전이니 1593년 8월 중순 쯤인데, 이 무렵 곽재우는 관직을 때려치우기는커녕 경상우도조방장에 임명되었다(1593년 9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경상우도에서 왜군을 감시하고 삼가, 의령, 단성, 고령 등 낙동강 일대의 주요 산성들을 수축, 관리하는 일을 총괄했으며,(선조실록 1593년 12월 21일) 1594년 10월에 장문포 해전에 참가했고 12월 진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1595년까지 경상도에서 계속 군무를 수행하다 그해 말에 강화 회담에 불만을 품고 낙향했으며,(선조실록 1595년 12월 5일) 1596년 11월까지 병을 핑계로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야인으로 묻혀지내다 정유년 말에 복직해 화왕산성을 수비했다. 전후에는 잠시나마 경상좌병사까지 역임했다. 또한 곽재우가 자주 낙향한 것은 관군과 의병 연합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곽재우라는 인물의 성향 자체가 관직 생활과 맞지 않았을 뿐이다. 비슷한 시기에 영남에서 거병한 김면이나 정인홍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 드라마에서는 내내 경상 감영 소속으로 묘사되는 김수는 1592년 8월 한성판윤에 제수되어 중앙으로 옮겨간다. 전쟁 초기 민심 이반의 책임을 물어 잠깐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나 중국어에 능통한 점을 인정받아 명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 송응창은 자신을 압박하는 명 조정에 대부분의 왜군이 본국으로 철수했고 고니시만 강화협상 마무리를 위해 '서생포라는 작은 섬'에 주둔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명 조정에도 왜군의 주둔실태가 알려졌기에 반신반의 하였다 송응창은 정철이 가지고 간 사은표문(한양, 개성, 평양을 수복한 것에 대한 감사표명)만을 올리게 하고 조선이 아직 위급하다는 문서를 올리지 못하게 방해 했기 때문에 명조정에서 왜군이 물러갔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 강화론이 힘을 얻게 된다.
- 정철이 사은사로 다녀온 후 탄핵을 받은건 사실이나,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기축옥사 때 어그로를 끈 동인들이 최영경의 억울함을 내세우며 반격한 탓사은사로 간 자리에서 일본군이 경상도에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철수했다는 가짜 정보를 송응창이 흘렸는데 이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명나라 파병군에서 난리가 났었다.[43] 덧붙여 류조인은 감히 여기에 끼어들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 명군은 1593년 8월 10일 한성을 출발해 철수를 시작했다. 송응창과 이여송은 9월 13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돌아갔다.[44]
- 드라마에서 대간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실세로 등장하는 류조인은 출신 성분도 보잘것없었고 늙도록 과거에 급제를 못 했다. 음서로 겨우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렇다 할 실권도 없었으며, 대간의 지지를 받기는커녕 실록의 사관평에는 대놓고 미천한 신분이라거나(선조실록), 학문이 불순했다고(선조수정실록) 되어 있다. 또한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으면 개구멍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고 했다고 말한 일로 비웃음을 샀으며, 천거를 받아 형조참의까지 올라갔다가 1595년 12월 8일 별시 문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청해 윤허를 받았으나 대간들이 반대해서 반려되었다.
류조인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을 탈탈 털어도 6번 나오는 인물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관직에 제수되었다거나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정치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것은 사노비 징집을 반대했을 때 한 번에 불과하다. 과거에 급제도 못 하고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간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창피한 일로 여겨졌으므로 대간의 지지를 받을 입장도 아니고, 엘리트 코스를 걸은 유성룡과 감히 마주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런 인물이 후대에까지 언급된 것도 서인의 거두였던 박세채가 쓴 선비 평전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뿐, 여기 실리지 않았다면 아주 잊힐 위인이었다.
끝으로 1595년 12월 류성룡의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보면 전쟁에 아주 무식한 것이 드러나는데, 중국의 기술인 총과 포만을 중시하고 전통적인 무기인 궁시를 멀리해서는 안 되며 사노비를 군사로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이 상소를 가리켜 국가 위기 상황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제작진은 이러한 인물을 조선 대간의 정신적 지주로 그리고, 당시 사대부와 지주들을 그에게 동조하고 개혁 관료 유성룡에 반대하는 꽉 막힌 인물들로 묘사했다. 더불어 당시 70이 다 된 노인(1595년 12월 8일 기사 사관 평 참조)이었음에도 중년 배우를 쓴 것도 고증 오류.
2.25. 제37회
1593년 조선은 물론 요동에도 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라 제대로 된 보급소요를 기대 할 수 없었고 결국 강남 등 본토지역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지게 되었다. 5만을 파병하면서 누적된 전비는 명의 국가 총예산을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때문에 1593~94년간 조명관계 최대 화두는 어떻게든 발 빼고 싶은 명과 무슨수를 써서든 명을 잡아두려는 조선의 외교전이었지 단순히 조선왕을 갈아치우려는 암약 따위가 아니었다. 명의 어려운 사정 역시 후에 만력제와 석성의 대화에서 살짝 드러나긴 한다(41화)- 정철의 사은행 이후 조공 없이 책봉만 허락하는 강화론으로 여론이 기운 명은 삼경을 되찾고 조공을 다시 한 것을 치하하며 다시 구원을 바라기보단 스스로 조심하고 삼가라라는 칙서를 내려보낸다. 이때 칙서를 가져온 사신 사헌에겐 광해군, 윤두수 형제에게 병조, 호조, 공조 판서들을 거느리고 영, 호남으로 내려가 요해지 설치, 군량독촉, 훈련을 담당케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는 송응창이 1593년 8월 경 명 조정에 보낸 자문에 기초한 지시이다. 송응창이 이를 제안한 목적은 강화에 반대하는 선조를 압박하기 위함이었고 사은행 이후 이 지시를 하달한 명 조정 입장에선 개경, 평양, 한양 등 주요 도시가 모두 수복되어 전쟁이 마무리되었다보고 발 빼기위한 방편이었다. 선조를 몰아내고 광해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술책이 아니었다.(선조를 갈아치우자는 주장이 명 조정에 있음을 알고 조선에 알려준게 송응창이다.) 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던 조정은 눈병 핑계로 광해군을 내려보내지 않는다.
- 강화협상은 명 조정 내부는 정쟁과도 연관이 있었다. 쟁국본과 업무방기로 권위가 심하게 떨어져 있던 만력제는
일하는 대신제후국을 구원해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싶었고 내각은 재정과 민력 부담에 철수론(이것도 빨리 손털고 나오자는 전면 철수론과 다 철수하기 전에 영토는 찾아줘야 한다는 일부 철수론으로 나뉜다. 석성과 송응창은 강화를 수단으로 택한 일부 철수론 계열이다.)이 고개를 들었다. 반면 동림당에 가까운 신하들은 주전론을 내세우며 강화에 반대했다. - 왜군이 여전히 조선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명 조정에 전해졌고 조선이 명 사신 편으로 전하기도 한터라 계사년 말 송응창의 처지는 굉장히 고달파져 있었다. 송응창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결국 이 해 11월 경략 자리에서 밀려난다.
- 심유경은 이순신에게 찾아가 군량 다 내놓으라고 강짜부린 일도 없고, 이순신은 명군 지휘부에 강화를 하면 천병이 아니라고 대놓고 도발한적도 없다, 다만, 담종인이 금토패문을 가져왔을 때 항의서한을 보낸 적은 있다. 하지만 이 때도 일단은 담종인의 요구는 수용하면서 서한으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전달한 것이지 그냥 대립만 한 건 아니었다.[45]
2.26. 제38회
- 명 조정에선 급증하는 재정부담과 당최 자강의 여지가 안보이는 조선의 태도 때문에 고려대의 정동행성 같은 통치기구를 만들어 직할 통치를 하자는 견해와(병부시랑 손광(孫鑛)) 아예 선조를 갈아치우자는 의견(급사중 위학증)등이 제안되었다. 이런 제안들은 명의 현실적인 부담이 컸고 조선이 명의 생각보다 약해서 자강도 힘들다고 보았기[46] 때문이지 송응창이 주도한 음모 같은 게 아니었다.
배우 출연료 문제도 있고 하니명 조정 내의 다양한 의견 분화 양상을 자세히 전하기 버거워서 그냥 악역(...)을 송응창 한 명에게 몰아 버린 듯. - 선조는 이때 선위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 명에서 조선을 분할하거나 왕을 교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서애집>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 의견을 낸것은 명 조정의 급사중 위학중이란 사람이었고 병부상서 석성은 반대했으며 요동에 있던 송응창은 오히려 윤근수를 불러 이 사실을 알리고 조선측이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사실이 접수되자 선조는 명을 거스른다는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명목상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류성룡은 필두로 한 조정은 전 외교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한다.(서애집 및 선조수정실록 1593년 윤 11월 1일 기사 참조) 류성룡은 이때 사헌을 말 그대로 관광태우는 언변을 보여준다.
- 칙서와 별개로 사헌 본인은 조선에 대해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조선은 전쟁 전개과정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와 왜군의 주둔사항에 상세한 진술, 왜군이 교전기간 중 경주를 공격해 오유충의 명군과 교전한 사실등을 전했고 사헌은 이를 명 조정 전할 것이며 조선에서 사신이 올 경우 자신에서 문서를 봉해서 주면 전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미니다큐에서의 언급과 달리 광해군은 대동법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원익이 주장한 경기 선혜법에 동의한 것 자체가 수동적이었고 확대를 막았으며 선혜법 자체가 경대동이라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동법이 보다 체계화되고 실패원인 분석과 운용 노하우가 축적되는 것은 인조대, 인조대의 실무경험과 인력을 기반으로 재개하여 완연히 뿌리내리는 게 효종과 현종대이다.[47]
- 미니다큐에서 광해군 관련 유적으로 경희궁과 창덕궁이 등장한다. 창덕궁은 선조때 재건 사업을 시작되어 1611년 마무리 하였으며 경희궁은 정원군의 사저에 왕기가 있다는 비현실적 이유로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친채 부지를 박탈하고 1617년 공사를 강행해 1620년에 완공했다. 광해군을 몰락시킨 궁궐병의 시작점 쯤 된다.
2.27. 제39회
- 송응창이 실각되자 고양겸이 경략으로 파견되어 요동에만 웅거했다는 사실을 나레이션을 통해 언급된다.
- 조선은 그냥 사헌편에 조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수레바퀴에 구멍 뚫는 007작전 같은 거 한 적 없다.
- 윤근수의 말에 따르면 사헌이 송응창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하는데, 윤근수는 작품 내에서 꾸준히 언급되지만 등장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징비록 공식 홈페이지의 등장인물 목록으로 나오긴 했지만, 정작 등장하지 않는다.
2.28. 제40회
- 명나라에서 조선에 요청해 무군사를 시행하게 했는데, 극중 내에서는 광해군이 꾀병을 부려 하삼도로 내려가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해군이 이 당시에 몸이 불편했으며, 명나라의 재촉이 심해 12월 말에 전주에 도착했다.
- 이순신 진영에서 독자적으로 치른 과거시험에서 한문을 잘 모르는 병졸이 합격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처럼 이순신이 시험 종목을 임의로 변경했다거나 하면 모를까[48] 그대로 준수했다면 합격 통보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 시대에 무과 시험은 병법서인 무경칠서도 읽을 줄 알아야 하지만,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암기해야 했기 때문. 따라서 '정확한 답을 말했는데 한자 좀 모르기로서니 불합격시켜도 되겠느냐' 운운할 수는 없었다. 덧붙여 유성룡의 휘하로 나오는 가상인물 이천리도 한문을 잘 모르면서 무과 시험을 준비했다는 설정이 붙는데, 이 쪽도 똑같은 이유로 어색하다고 할 수 있다.
2.29. 제41회
- 송유진의 난은 아산으로 피난왔던 홍가신이 류성룡에게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하면서 알려졌다. 충청병사 변양준(邊良俊)이 무사 김응룡을 시켜 송유진을 유인했고 송유진이 부하 10여명과 함께 직산으로 나왔을 때 김응룡이 미리 매복시켜둔 군사들을 풀어 사로잡았다. 이일은 순변사로 반란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류성룡은 함부로 잡아들이지 못하도록 할 것을 건의했고 선조도 받아들였다.
- 송유진이 죽기 전에 자신은 동네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가 이산겸이 자신을 사주했다고 언급했으며, 극중에서는 류성룡이 송유진을 꾸짖으면서 넘어가는 식으로 나오지만, 이산겸은 이 일로 연루되어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산겸이 의병을 모아놓고도 왜적을 치지않은채 가만 있었던 이유로 류성룡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은 이산겸을 강하게 의심했다.
-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이미 민간에선 미포로 공물을 납부하는 게 일반적이 되어 있었다. 또한 수령이 주관하는 사대동[49]이 확산되고 있었고 조정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정에서의 공물작미는 군량미 마련 대책으로 임진년부터 실시했다. 이전에도 군량미가 필요할 때 등의 경우에 일시적으로 특정 지역의 공물을 쌀로 받은 적이 있다는 전례 덕분에 별다른 반발도 없었다.
- 공물작미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치는 사람들의 의견은 1595년 9월 24일 김응남의 장계에서 엿볼수 있는데 반상의 법도 그런거랑은 상관없고 민간에도 양식이 부족한데 미곡을 징발하면 민생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고 작미 과정에서 운반경비를 포함한 부대비용이 감안되지 않았으며 유통망이 피폐되어 쌀을 받아도 공물과 바꾸기 힘들어 민의 고통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민생을 걱정하는 주장이었다.
- 선조 27년 1월 1일에 조정은 기존의 공안을 분실했고 민심도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공물가 인하를 골자로 한 공안 상정 및 작미(공물을 쌀로 받음)의 논의를 시작했다. 이후 몇달 뒤 조정은 류성룡의 주도 하에 결당 2두로 정해 걷기로 하는 등 대동법과 일견 유사한 형태로 변화한다.[50] 류성룡이 뛰어난 점은 '전결에 따른 공납의 균등화' 와 '지역에 따른 방물가의 균등화' 를 주장하여 각관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사대동의 수준을 한 단계 넘어섰다는데 있지 조선의 양반 지주 전체와 맞짱을 뜨는 정의로운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 윤두수가 자신의 이름을 빌어 육군과 수군이 일본군을 협동 공격을 시도하려는 와중에 김덕령이 수군에 파견되었는데, 김덕령이 이순신에게 인사를 올리면서 선거이에 대해 언급한다.
- 곽재우를 일찌감치에 하차시켜 버린 탓에 장문포 해전에는 김덕령 혼자 나온다.
2.30. 제42회
- 항복사절을 인솔해 간 건 소 요시토시가 아니라 나이토 조안(内藤如安, 小西飛[51])이다. 1593년 9월 35명의 항복사절(納款使)이 평양에 도착했으나 히데요시의 항표가 없다는 이유로 북경입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고니시와 심유경은 항표를 조작해 이듬해 2월 요동에 있던 나이토 조안에게 전달해 북경에 입조할 수 있게 하였다.
- 장문포 해전 당시 일본측 지휘관은 가토가 아니다.
- 장문포 해전은 윤두수 독단으로 진행했고 조정도 이를 잘 알고 있어 대간은 한달이상 윤두수를 탄핵했고 선조는 반려하다 결국 받아들이는 걸로 종결된다. 이걸로 폐세자 운운하며 광해군 물고늘어지고 신료들이 사직소로 대응한적 없다.
2.31. 제43회
- 명나라에서 보낸 책봉사로 이정성, 양방형이 언급되었다.
- 1593년 7월에 이미 조선에는 명일 강화과정에서 한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영토를 나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동년 11월 도원수 권율과 접반사 김찬이 명의 유정에게 화친, 할지, 구혼, 봉왕, 인신, 조공, 용의(龍衣) 등 7개 조항이 명일교섭의 핵심 조건이란 정보를 입수한다. 1594년 2월 2일에는 이덕형이 척계광에게 심유경이 4도를 할양하기로 합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송응창에게 확인하려 했다. 2월 4일에는 심유경의 조선분할 밀약에 대한 문답이 오갔고 6일에는 석성이 할지를 찬성했다는 사실을 심유경이 고니시에게 전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조선 조정은 가토와 회담을 갖기 이전부터 할지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2월 11일에는 심유경과 고니시가 위조한 히데요시의 항표 초본까지 입수해 대응을 논의한다.
- 회담은 1594년 2월 21일 가토가 경상좌병사 고언백에게 서신을 보내 제안했고 심유경을 믿을 수 없었던 조선조정은 응한다. 사명당이 선택된 것은 비밀유지에 공직에 있는 관리들보다 유리했고 일본에는 승려들이 중요한 외교/교섭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 명군 역시 이 사실을 알았고 유정은 모든 일을 명과 상의한다는 전제하에 교섭에 동의한다.
- 일본 정세를 상세히 알지 못했던 명과 조선은 가토를 일본왕으로 삼겠다고 충돌질해 가토와 히데요시 사이를 이간하는 걸 목표로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서 가토는 심유경과 고니시가 추진하는 강화내용을 알고 있냐며 떠보고는 그들이 협상내용이라며 1. 명황실과의 혼인 2. 할지 3. 교린 4. 조선왕자를 볼모로 보낼것 5. 조선 대신과 대관을 볼모로 보낼 것. 5개 조항을 알려주었다. 사명당은 단호히 용납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히며 회담은 마무리된다. 조선은 강화에 대한 정보를 얻긴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었고 히데요시가 내세운 강화조건인지 고니시와 심유경의 독단인지 파악하지 못했기에 큰 반향은 없었다. 그리고 7월에 있었던 2차 회담에서 상술한 5개 조항이 히데요시의 의중이며 히데요시와 고니시라는 서로 다른 2개의 노선에서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음을 파악한다. 참고로 사명당과 가토의 1차 회담내용은 민간에도 빨리 퍼져서 오희문의 <쇄미록> 1594년 5월 20일조에도 실려있다.
- 사명당과 가토의 회담은 총 4차례였으며 1597년 3월에 있었던 마지막 회담을 제외한 3번이 1594년(4월, 7월, 12월)이다. 이중 3번째는 가토측에서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장소는 서생포였다. 드라마에선 장문포 해전이후에 가토와 사명당이 만나는데 장문포 해전이 9월이니 그보다 앞서 다뤄줘야 했다.
2.32. 제44회
- 수구파와 개혁파의 대립으로 나온 속오군 제도 시행과정은 관련 학설이 갈린다. 속오군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는 지방향촌에 대한 지배력 강화다. 초(哨)-기(旗)-대(隊)로 과거 진관제도보다 강화된 하부조직을 결성하고 지역 방어를 맡겨 면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면임(面任), 리정(里正), 권농(勸農) 등 향촌 지배층은 물론 자치기구인 향청의 수장격인 좌수(座首)들도 참여시키고 장수들이 견제하게 했다. 무엇보다 천인이란 이유로 그간 국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던 사천에 역을 부여해 국가의 통제속에 집어넣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를 통해 양인의 부담을 줄이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며 투탁이나 출가를 통해 역을 회피하는 일을 방지하려 했다. 지역 사족의 사노, 전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던 의병 병력도 속오군에 편제되었다.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 등을 통해 사병 성격이 강한 의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선조 입장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방사족이 대다수인 의병장중에 속오군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왔다.(대표적으로 정인홍) 중앙에선 별 반대 없었다. 양반이 군역을 져서 전국 사족들이 반발하고 이런 일은 없었다.
- 고니시가 심유경과 이야기하는 중에 그 문제의 '세이쇼 죠타이'가 언급되는데, 이는 고증오류로 실제 이름은 '사'이쇼 죠타이다. 항목 참고. 일본어에서 한자 '西'의 음독이 주로 '세이'다 보니 난 오역.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세'이쇼로 유명하다.
하지만 다음 화부터는 '사'이쇼라 잘만 발음하고, 자막에도 그렇게 나온다. -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임득의, 박명현, 신경행 등이 언급되었다. 근데 정작 이들을 이끌고 홍주성 방어를 지휘한 홍가신은 언급되지 않는다.
- 교란계로 이몽학의 반군을 와해시킨 사람은 홍주목사 홍가신이지 중앙에 있던
이 드라마 한정 제갈량의 현신류성룡이 아니다. 한양에서 보낸 병사들은 7월 11일 출발했다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회군했다. 홍가신은 홍주성으로 진군하는 반군에 첩자 2명(신 아무개와 관속 이희수)을 보냈다. 첩자들은 거짓투항하며 자신들이 홍주성의 허실을 찾아 안쪽에서 와해시키겠다며 이몽학을 꾀였고 이몽학은 그들을 믿고 하루를 기다린다. 하루를 번 홍가신은 각지에 전령을 보내 원군을 모으고 수성준비를 갖춘다. 충청수사 최호를 시작으로 도원수 권율, 충청병사 이시언, 전라감사 박홍로, 순안어사 이시발, 진주에 있던 김덕령과 경상도 항왜병들까지 동원되었다. 수세에 몰린 반군에게 수성군이 공세를 취하며 한편으로 설득하자 이몽학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반군은 와해된다. - 김덕령은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거나 도망쳐온 반란군을 풀어준적 없다. 진주에 주둔하다 7월 14일 권율의 지시를 받고 이동하다 17일 남원에 도착했을 때 반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했다. 그리고 기록상 김덕령은 군사들에게 인자한 인물은 아니었다.
- 이일은 이때 북병사로 임명되어 한양에 없었다. 진주로 귀환한 김덕령을 잡아가둔건 진주목사 성유문이며 전 현감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압송했다. 이일이 아니다.
- 김덕령의 옥사 와중에 선조가 최담령, 고언백 등을 언급했다.
- 김덕령의 옥사는 1593년 거병 이래 이렇다할 공적이 없고 1596년 1월에 사소한 이유로 역졸과 종을 때려 죽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던 상황에서[52] 그의 높은 명성을 노린 반군들이 누차 그의 이름을 팔아먹은 탓이다. 1594년 송유진의 난때도 이름이 거론되었고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반년전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 불만을 가질만한 정황까지 생긴 상황에서 관련 증언이 여러군데서 나온탓에 전근대 왕조 국가 특성상 살아나갈 길이 요원했다. 즉, 김덕령의 옥사는 선조의 주도한 모략이었던 이순신의 백의종군과는 성격이 달랐다. 함께 반군이 이름 팔아먹은 곽재우, 홍계남, 고언백은 불문에 붙여 아예 압송조차 하지 않고 김덕령 휘하에 있다. 잡혀온 최담령과 최강은 무죄방면한데서 알 수 있듯 이때 선조는 다 죽이겠다느니 하면서 이성을 잃은 상태가 아니었다.
- 김덕령 옥사와 관련해 윤두수는 어차피 죽을사람 차근차근 문초하자는 류성룡과 달리 즉시 진상을 문초해 빨리 진상을 파악하자고 주장했다. 연루된 자들이 풀려난건 어디까지나 선조 의중이다.
- 류성룡은 반란연루자들이 다 잡힌 다음에 국문을 하자고 했지 김덕령을 살려주려 하지 않았다. 일단 선조실록부터 보자. 선조실록에선 즉각 심문해야 한다는 윤두수와 의견을 달리해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죄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다른 주모자들이 모두 도착한 다음에 처러해야 한다 주장했다.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여러 역적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부터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 본 다음에야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게 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 - 선조실록 1596년 8월 4일
“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여러 역적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부터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 본 다음에야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게 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 - 선조실록 1596년 8월 4일
며칠 후 김덕령 휘하에 있던 최담령을 친국할 때도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전략)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역적들의 공초에 많이 나온 자가 김덕령이어서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하겠지만, 여러 죄인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처결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중략)
“김덕령은 송유진(宋儒眞) 때에 자주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었으나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현(韓絢)의 초사 속에 나왔으니, 이는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중략)
유성룡이 아뢰기를, “만일 엄하게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먼저 죽어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머물러 두고 기다렸다가 추문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우선은 형벌을 정지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선조실록 1596년 8월 8일
“역적들의 공초에 많이 나온 자가 김덕령이어서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하겠지만, 여러 죄인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처결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중략)
“김덕령은 송유진(宋儒眞) 때에 자주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었으나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현(韓絢)의 초사 속에 나왔으니, 이는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중략)
유성룡이 아뢰기를, “만일 엄하게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먼저 죽어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머물러 두고 기다렸다가 추문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우선은 형벌을 정지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선조실록 1596년 8월 8일
김덕령 관련해서 류성룡에게 가장 우호적으로 적힌 기록이 선조실록인데 여기서도 류성룡은 김덕령을 살려주려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명백히 의심하고 있었고 단지 관련자들이 모두 압송된 다음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자 주장했을 뿐 이다. 또한 1604년 8월 10일 기사에는 사관평에는 류성룡이 김덕령의 죽음과 관련해 구설수에 올랐다는 사관평이 실려있다.
인품이 일을 만나면 과연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정성은 있으나 또한 치우치게 자기 소견만을 고집하는 일이 있고 또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비평이
있었으며,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에 대하여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다. - 선조실록 1604년 8월 10일
있었으며,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에 대하여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다. - 선조실록 1604년 8월 10일
선조수정실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596년 8월 1일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596년 8월 1일
선묘중흥지, 국조인물고, 송자대전등에선 아예 김덕령을 죽이는데 앞장선다. 선조가 "재주가 아까우니 살려줄까?"라고 하자 "어차피 살인도 저지른 작자인데 살려줄 이유가 있음? 게다가 이런 애 풀어주고 뒷감당할 수는 있긴 한가요?"라고 주장했다고 적혀 있다. 김덕령의 무죄를 믿었던 사람은 뒷날 신구차를 올려 이순신을 구명하는 정탁이다. 정탁은 김덕령 옥사이후 소를 올려 김덕령은 단지 명성이 높아 이용당했을 뿐 이라는 주장을 피력했다.(약포집)
2.33. 제45회
- 곽재우는 그저 강화에 불만을 품고 낙향했을 뿐이며, 그 시기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전인 1595년 말이다. 또 낙향 후에도 정계에 관심을 끊지 않았고, 출사하여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낙향하는 식으로 출사와 낙향을 거듭했다. 관직에 더 이상 나서지 않게 된 이후에도 조정의 동향에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으며, 정계에서 완전히 발을 빼게 되는 건 광해군대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다 광해군에게 찍히고 대북이 조작한 옥사에 휘말릴 뻔하고 나서의 일이다.
- 기축옥사에 희생된 자들을 신원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이경전, 남이공, 정경세 등이 언급된다. 이경전은 광해군 시기 대중국 외교에서 역량을 발휘한 인물로 그 실무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폐모살제에 찬성했음에도 인조반정 때 제거되지 않고 계속 중용된다.
- 류조인이 기축옥사에 신원된 명단에 대해 불만을 품을 때 이발, 정개청, 노수신 등이 언급된다.
- 인빈이 광해군 편에 서는 건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는 욕심을 내비쳤고 광해군과도 사이가 안좋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세자가 된 이후에는 관계개선에 힘써 외조카인 신경(辛鏡)의 딸을 광해군의 후궁(숙원 신씨)으로 들이고 선조와 광해군 사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해 광해군과의 사이가 크게 개선된다. 뒷날 아들 잃고 화병으로 죽는 정원군도 인빈 생전에는 왕실 어른으로 무탈하게 지냈다.
- 사이쇼 죠타이가 칙서를 있는 그대로 읽었던 것은 사전 계획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고니시의 계략대로 거짓되게 말하겠다고 선약을 했으나 이를 칙서를 읽는 자리에서 번복한 것이 사실에 가깝다. 게다가 극중에서 사이쇼는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강직한 성품으로 그려지는데, 실제의 그는 진구황후의 정한론에 푹 빠져 산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절대로 '정직' 해서 그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2.34. 제46회
- 고니시와 심유경의 국제 사기극이 드러나면서 일본에서 귀환한 황신이 언급된다.
- 고니시가 할복 명령을 받고 "어쩌겠나, 태합 전하 명이니 할복해야지"라고 하는데 고니시는 키리시탄(기독교 신자)이며 자결은 기독교에서 절대 금기시하는 대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작중 초반부터 여러번 언급되는 내용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패한 고니시가 할복을 거부하고 참수된 것도 그 때문.
-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출전 명단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모리 히데모토 등이 언급된다.
- 일본군의 가토가 서생포로 출전한다는 정보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이중첩자 요시라와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언급된다.
- 남인 김응남이 뜬금없이 북인이 되었다(...).
- 드라마에선 류성룡이 이순신의 충심을 끝까지 믿고 비호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순신을 작정하고 쳐내려는 선조에게 이순신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은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이 직언으로 이순신의 결백을 주장하면, 선조의 노여움만 극대화해 사태를 악화시키키 때문에 한 전략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순신도 이를 알고 믿었기에 석방된 후에 류성룡을 찾아갔고, 밤새 전란 극복에 대해 서로 대담을 하였다. 오히려 드라마에서 이순신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는 윤두수가 원균과 통제사직을 나누자, 파직하자 정도로 온건하게 처벌을 주장한 편이다. 이 당시 류성룡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보면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
정리하자면 처음에 제가 천거할 때는 괜찮았는데 관직이 계속 올라가니깐 얘가 점점 너무하네염. 이번 일은 분명히 잘못했으니 비변사에서도 이순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 것이다. 이후 구명을 위해 움직이지도 않았다. 징비록 외에 류성룡 종가에서 따라 보존해온 난후잡록(亂後雜錄)에는 이순신이 하옥된 후 조카 이분이 옥리에게 뇌물을 주면 몸을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물으러오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되묻고 돌려보낸 기록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류성룡은 이순신과 사적으로 교분이 깊기에 섣불리 옹호했다간 선조의 진노만 가중시키기에 선택의 폭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을 끝까지 비호한 건 이순신과 관련이 없었기에 오히려 운신이 자유로웠던 정탁과 이원익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란 명을 받고 풀려난 후 류성룡을 찾아갔다는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이순신도 류성룡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준 것으로 보인다.
- 조선 조정은 가토 못 잡는 거 처음부터 알았다.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요시라에게 가토 도해에 관한 정보를 전해들은 것이 1597년 1월 11일.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가 무척 안좋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던 터라 이 정보를 들은 김응서는 즉각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장계가 조정에 접수된 날짜는 1월 19일. 그러나 1월 21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기장현감 이정견(李廷堅)의 보고를 인용해 가토가 1월 13일에 다대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1월 23일에는 경상도 위무사 황신이 가토가 1월 13일에 바다를 건너 가덕도에 이르고 14일에 다대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1월 21일에 가토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으니 허점을 노려 공격해 올지 모른다며 방어대책을 논의했고 별도로 권율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군에는 출동령을 내린다. 이때까진 아무 문제없었다. 사단은 1월 22일 부산으로 진격해 가토를 물러가게 하겠다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균의 상소가 접수되며 시작된다. 원균의 상소를 보고 이순신을 대신할 대체자를 찾은 선조는 다음날인 23일부터 갑자기 치매라도 온 마냥(...) 한산도에 편히 누워 아무것도 안했다며 이순신을 맹비난하고 겨우 5일만인 1월 28일 삼도 수군 통제사의 관할을 분할하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겸 전라 충청 통제사로 하고, 원균을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실행되기 전에 2월 4일 사헌부가 이순신을 탄핵하고, 이틀 후인 2월 6일 이순신을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려지고, 원균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다.
- 이순신이 부산으로 출정하라는 선조의 명을 무시한 적 없다. 분명히 부산으로 출정했다. 이순신 본인은 귀환후 압송되어 장계를 남기지 못햇으나 권율이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다른 정탐꾼 등의 보고를 통해 작성한 장계가 남아있고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 이순신 비난하는 장계를 올려 본의아니게 부산으로 출정했음을 증명해준다. 권율의 장계에 따르면 1597년 2월 10일에 김응서가 동승한 63척의 전선이 부산포로 진격해 한바탕 무력시위를 했다. 왜군이 견내량 주변에 왜성을 쌓아 틀어막았다 어쩌니 하지만 왜군이 세운 안골왜성과 가덕왜성은 소규모의 성들로 조선 수군의 진격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할 수준이었다. 김응서의 보고에 따르면 부산 앞바다에 조선 함대가 정박하자 왜군 300여 명이 저항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날이 저물자 조선 수군은 절영도로 후퇴했는데 이중첩자로 알려진 요시라가 찾아와 가토가 조만간 부산에서 나와 바다로 싸우러 올 것이라는 정보를 주는데, 이순신과 김응서는 의논 끝에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 12일에 회항을 시작했다. 회항 도중 가덕도에 정박했는데 가덕왜성의 왜군이 기습하여 병사 하나를 죽이고 5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진노한 이순신은 김응서 휘하의 육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요시라가 직접 사정해 포로들을 전부 돌려받아 회항했다. 사실 조정에서도 이순신의 출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서 심지어 체포 명령을 내릴 때도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라 하였을 정도다.
2.35. 제47회
- 원균에게 부산포로 공격하란 지시를 내린건 이순신에게 받은 모함 중 하나가 이순신이 출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며 자신을 어필할 때 제안한 전략이 부산포 진격이기 때문이다.
- 선조와 이순신은 직접 대면한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류성룡도 이순신과 만난건 국문에서 풀려나고 백의종군하란 지시를 받은 후의 일이다.
2.36. 제48회
- 1592년에 유배되었던 이산해가 1595년에 복귀해 이몽학의 난 때 관련자에 대한 추문을 맡았는데, 극 중에서는 1597년에 이순신이 하옥되었다가 복귀한 시점부터 재등장한다.
- 기문포 해전과 해당 전투에서 전사한 보성군수 안홍국이 언급된다.[53]
- 송희립이 백의종군하는 이순신과 만난 자리에서 선조가 원망스럽다고 대놓고 디스하는데, 조선 시대의 국왕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더군다나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위기는 또다른 기회 운운하고 마는데, 실제로나 본작에서나 충신으로 묘사되는 만큼 '주상 전하께 그 무슨 불경인가!' 하는 식으로 꾸짖으면서 격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실제 칠천량 해전은 군사들의 피로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막무가내로 함대를 운용하고 기본적인 경계조차 하지 않은채 기습을 허용하고(그래봤자 단 2척) 종래에는 수군을 모두 육지에 상륙시켜 도망시킨 희대의 졸전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군의 치밀한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싸워서 전멸시킨 거라 처리했다. 내레이션으로는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을 원균도 잘못이 있지만 전장을 모르고 명령을 내린 조정이 더 크다고 못박았다.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것으로 따진다면 조정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원균은 칠천량 이전까지 정말 실드가 불가능한 수준의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고, 여기에 절묘한 처세술과 로비로[54] 소위 맹장 포지션을 점유하고 있어 그와 얼굴 맞대고 일할 일이 없는 조정에서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을 잡아들인 것과 별도로 조정에서 그를 임명한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하고 부산으로 가겠다고 주장한 게 원균이며 지휘라고 이름붙이기도 민망한 졸렬한 판단과 행동으로 일관해 수군을 궤멸시킨 것도 원균의 책임이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은 밤에 일어났다.
- 이순신과 권율의 대화를 통해 칠천량에서 원균, 이억기, 최호 등이 전사하고 배설만 12척의 배를 가지고 도망갔다는 것이 언급된다. 다만 실제로는 절반. 최소 3분의 1 이상이 도망에 성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명량 해전 이후 합류한 수군 장수들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다, 이 해전에서 기적적으로 12척 배를 보존하여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미 수군이 붕괴된 상태라 신조함을 대거 건조하거나 화약을 대량으로 재생산하는 등 뭔가 수습을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선조가 이순신을 복귀시켜야 할 것 같다고 스스로 말하고 지시하는데 초본 징비록을 보면 선조는 모든건 원균의 잘못이며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는 김명원과 이항복의 주장에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도저히 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 또한 선조는 부산에 안간다는 모함으로 이순신을 몰아내고 원균을 자리에 앉힌 장본인이면서 당의 가서한과 북송의 양업의 고사를 들며 비변사가 원균을 독촉해 패배를 자초했다며 질책하는 졸렬한 책임전가를 보여줬다.[55] 어쨌거나 이순신을 복직시키긴 했지만 품계를 1등급 내려 정3품 절충장군으로 임명해 또 한번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중에 돌려주긴 했지만 그게 해를 넘겨 무술년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 조정은 물론 명의 양호까지 나서 누차 이순신에게 포상을 내려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이다.
- 양호가 일본군에게 남원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받을 때 양원, 진우충이 언급된다. 이 둘은 각각 전라도의 핵심은 남원과 전주를 지켰으나 양원은 미심쩍은 행보를 보이다 적전도주하고 진우충은 전주에서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 이 때문에 도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참형에 처해졌다. 명 내부의 여론이 심유경의 사기가 걸린 뒤 강경 위주로 돌아선 데다 제2차 진주성 전투같은 제한적 공세가 아닌 전면침공을 맞이해 핵심 요충지를 내줘버린 것이기에 사정을 봐줄 수 없었다.
- 남원성 전투에서 명군은 달아나고 조선군만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싸우다 죽었다고 언급하는데 실제로 도주한건 양원 등 소수에 불과하다. 천총 장표, 이신방을 비롯한 대다수의 명군은 이복남이 이끈 조선군과 함께 남원에 뼈를 묻었다. 양원이 처형당한 것도 이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명군이 조선에 민폐를 많이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도움 된 것 역시 사실인데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묘사한다면 은혜도 모른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이건 6.25전쟁 드라마에서 미군이 최소한 도움은 되는 걸로 묘사되는 것과 비교된다.
- 직산 전투에는 마귀와 해생이 이끄는 기병 4,000만 참여했다. 조선군은 후방인 한강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명군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왜군의 북진을 일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대승을 거두진 못해 재차 북진이 예상되었으나 명량해전 패배로 퇴각한다.
- 직산 전투 직전에 권율이 군사를 지원한다는 이야기로 송언신이 언급된다.
- 우키타가 와키자카에게 공훈를 세웠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칠천량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인물은 도도 다카토라이다.
한국작가들은 와키자카를 너무 좋아한다 - 이분의 행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임진년부터 열심히 생산하여 원균에게 인계한 화약이 4천근이었다. 근데 드라마에선 칠천량 해전과 명량해전 사이의 두달여 동안 화약 5천근을 생산해낸다. 전라도 모든 민가에 들어가 재를 긁어내고 군사들이 물먹고 소변만 봐도 그렇게는 못한다.
2.37. 제49회
- 울산성 전투에서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양호는 고사작전으로 전략을 변경, 성 주변의 수원을 모조리 차단해 가토를 할복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작전실패는 어디까지나 나베시마 나오시게, 모리 가쓰노부, 아사노 나가마사 부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하치스카 이에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남부 지역 각지에 웅거중이던 왜군부대가 일제히 가토 구원에 나서 조명연합군(명군 3~4만, 조선군 1만)을 가볍게 뛰어넘는 대부대를 형성해 몰려왔기 때문이다. 퇴각결정은 합리적이었고 연합군 지휘부는 이 과정에서 매복부대를 후방에 배치해 왜군을 물리치는 등 나쁘지 않은 대처를 했다. 헌데 드라마는 이걸 계속해서 밀어붙일것을 주장하는 류성룡과 권율의 간언을 제풀에 지친 양호가 무시한 걸로 했다. 정유재란 당시 명군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운 전투가 울산성 전투이다.[56]
- 이항복이 선조에게 양호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양호가 정응태에게 탄핵당한 것을 이야기한다.
- 류성룡 탄핵과정도 양호가 전과를 허위로 보고했다 탄핵받은건 사실이지만 조선이 사신을 보내려 하고 류성룡이 사신으로 가길 거부한 것은 정응태가 조선을 무고한 다음의 일이다.
2.38. 제50회
- 사로병진책이 통째로 생략되면서 노량해전에 앞서 진행된 순천 왜교성 전투도 나오지 않고, 모두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이순신이 홀로 왜군을 가로막는 것으로 나온다. 제작비와 분량에 압박을 받던 제작진이 정유재란을 46회~50회안에 다 제작해 집어넣으려다 보니 생긴 결과이다.
- 북인들이 류성룡을 탄핵하면서 작미법, 면천법, 속오법 등 류성룡이 추진한 개혁에 대한 이야기로 신충원이 언급된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의 주역으로 나오는데, 실제 참전한 주력 부대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끌던 구원 함대에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가세한 정도로 와키자카는 노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으로 철수했다.
- 노량해전을 그리며 조선수군이 왜군 함대에 돌격해 관음포로 밀어넣은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관음포로 끌어들여 기습했다.
-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던 가장 큰 이유는 명의 해군 지휘관 등자룡이 전사하고 진린이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를 구하기 위해 이순신은 근접전을 감행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전사했던 것.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진린은 전황이 유리할 때만 참전하기로 작정하고 일본 함대가 관음포로 이동한 뒤에야 출진했다. 진린이 조선에 파견된 초기에는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노량해전 즈음에는 이미 이순신을 존경하게 된 지 오래였다.
- 정유재란 당시 의병이 임진왜란 초기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을 김덕령을 처형한 선조의 탓으로 돌렸지만, 명군의 군량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거나 의병의 기반이 되는 향촌 사회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탓이 더 컸다.
- 류성룡이 파직당한 후 이덕형이 한양에서 이항복과 함께 류성룡을 배웅하나, 이 때 이덕형은 순천 방면을 공략하던 서로군에 내려가 있었다. 조정에 순천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에 대한 장계를 올리고,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할 후임 통제사를 보내달라 장계를 올린 것이 다 이덕형이 한 일이다.
- 내레이션으로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고도 반성이나 대비 없이 병자호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하는데, 절반만 맞는 소리다. 군사적인 대비를 아주 안 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갖추어 놓았기 때문. 다만 병자호란 때는 정쟁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기껏 군사를 마련해 놓고도 방어체계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했다. 왜란 때문에 묻히는 사실이지만 선조의 대여진 정책은 굉장히 잘 된 편이었다. 진작부터 누르하치의 위험성을 꿰뚫어 보고 정보를 적극적으로 모으고 강온 양면책을 적절히 활용한 인물이 바로 선조이며, 1600년에는 여진족의 약탈에 대한 대규모 보복 공격도 단행했다. 그렇지만 인조대에 들어서 이괄의 난이 문제였다. 이괄의 난으로 전략예비군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상황에서 다시 군적을 정비하고 중앙군을 증강하고[57] 그냥 성곽만 세워놓은 수준이던 남한산성을 천혜의 요새로 탈바꿈 시키고 강화도 성지도 증축해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수도권 방어에 주력하지만 정작 서북 지역 방어가 이괄의 난 이후로 박살 난 시점에서 병자호란 초기에 허무하게 북쪽이 금방 뚫리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체찰사와 강도검찰사가 김자점과 김경징이었다는 것과 남한산성에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지 못한 것[58]은 병자호란 참패의 큰 원인이기도 했다. 다만, 병자호란 때는 이괄의 난의 피해가 대부분 복구되었다. 또 이 시점에서 다른 이야기지만 병자호란 자체는 조선이 잘못해서 발발한 전쟁이 아니다.[59][60] 친명배금 정책에 따라 후금에 대한 군사적 대비는 나름 갖추려 노력했으나 정작 인사배치를 제대로 못해서 군사력을 제대로 못 써먹고 헛수고만 한 게 인조 때였고, 중립외교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왕이 방납커넥션과 붙어먹으며 뇌물 상납액으로 지방관 고과 메기고 염초로 기와 굽고 심하 전투 기간에도 군량미 빼돌려서 궁궐공사하고 백성 고혈 쥐어짜며 기병과 근접전 능력은 내버리다시피 했던 것은 횡령왕 광해군 시절이다.[61][62] 흔히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통해 후금의 침공을 막은 명군으로 알려지고, 병자호란이 조선 인조 정권의 일방적 잘못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조선인들에게 주입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1] 예: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 ~ 1727)가 7차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언급했었다.[2] 예: 야사에서는 조슈번 5대번주 모리 요시모토(毛利吉元, 1677 ~ 1731)가 가신들에게 징비록 구입을 명령한적이 있다고 한다.[3] 가마쿠라 시대의 호조 씨가 아니라 센고쿠 시대의 고호조 씨.[4] 호조 가의 5대 당주 호조 우지나오의 아버지로 아들 우지나오에게 당주를 넘겨주었으나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5] 다만 이것은 신앙 문제 뿐만 아니라 사위였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자신의 이권에도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6] 가톨릭에서 자살은 금기사항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에 바로 자살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 사형 당한 것.[7] 다만, 드라마 내에서는 "오랜 상인가문이었던 고니시 가문이 가진 조선에 대한 정보력" 때문에(즉, 아직까지는 쓸만하다고 판단되기에) 내치지 못 하는 것으로 고니시를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용하려는 히데요시의 속마음이 묘사된다.[8] 이 때, 이항복이 22세, 이덕형이 17세였다.[9] 그 외에도 현재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는 복지 재정 문제를 풍자하고자 하는 의도도 보인다. 더불어 요새 걸핏하면 거론되는 군대 문제도 함께. 전작인 정도전 경우도 역사에 현실을 대입하여 풍자한 경우가 있었기에 이를 따라한 듯하다.[10] 경상좌수사 박홍은 개전 첫날 병력집결을 마치고 동래성으로 이동했다.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 서평포권관 박진남은 모두 농성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수전을 시도한 지휘관은 한명도 없다.[11] 통합되기 전에도 가까워서 다대포 동쪽으로 아주 약간 떨어져있었다.[12] 가덕도는 대마도 지역의 선박이동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지로 봉수와 연대가 2곳이상 설치되어 운용되었다.[13] 임진년 4월 18일 난중일기에 기록된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내용이다. 이 내용을 비춰보면 이각과 박홍이 겁먹고 달아났다는 기존의 통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미 적의 군세가 대단함을 아는 박홍이 겁먹고 달아나려 했다면 굳이 동래성에 접근할 이유도 없고 밀양부사 박진이 올때까지 소산역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14] 역시 김해로 가야 할 의령군수 오응창의 병력은 배로 이동하다 사고가 생겨 합류하지 못했다. 의령과 초계는 경상우병영 소속이다. 김해성이 17일 혹은 18일 일본군 3, 4군 상대로 종일 싸우다 4번째 공격으로 함락되었음을 고려하면 경상우도도 개전 직후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15] 적의 상륙지점에 가장 가까운 동래(경상좌도)와 김해(경상우도) 1선, 황산-작원잔도와 울산의 경상좌병영, 창원의 경상우병영이 2선, 경상도 중심부인 대구가 3선, 신립이 끌고 내려온 군사가 4선 이었다. 이외 조령, 죽령 등 고갯길 방어임무를 맡은 경장들이 별도로 파견되었다. 2선까진 해당지역 지방관이나 병,수사가 담당하게 되어있었다. 결코 중앙에서 장수내려올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거나 한번 뚫리면 그걸로 끝나는 체제가 아니었다.[16] 일례로 하양현 군사 500명은 경상좌병사 이각에게 갔으나 이각은 그들이 경장(조방장 성응길)에게 속해야 한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다 용궁현감 우복룡에게 전멸당한다.[17] 왜군은 군을 나눠 한쪽이 박진의 시선을 끌며 교전을 벌이는 사이 다른쪽이 고개를 우회해 박진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박진은 개인의 무용으로 겨우 빠져나와 밀양성 창고에 불을 지른후 퇴각한다.[18] 절반이 전투 불능 상태라면 그 나머지 절반은 전투 중 도주하는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에서라면 전투 유닛이 주변의 아군들이 쓰러져나가든 말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주변의 전우들이 픽픽 쓰러지는데도 제자리를 지킬 사람은 없다.[19] 더군다나 이후 20화에서는 대동강을 건너려다가 병사 2백이 죽었다는 언급이 나오기까지 하는데, 소규모 접전도 아니고 대규모 회전 두 번에서 전사자가 1천 8백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20] 고쿠다카는 고니시가 24만석, 마츠우라가 6만 3천석이다.[21] 그러니까 왕이 피난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파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는 소리다. 그만큼 파천이란 말 자체가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단 소리이기도 하다.[22] 심지어 극중 선조는 왜군의 진격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란 사실까지 유추해냈다. 15화에서의 류성룡의 행적은 오히려 후일 평양성에서 의주로 몽진하려는 선조를 말리며, 파천 시 민심이반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평양성을 지켜내겠다고 주장한 윤두수의 행적과 더 닯았다. 더군다나 전략적으로도 아군이 약하고 적군의 전력과 기세가 강할 때는 이리저리 피해서 보급과 충원을 더디게 함으로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게 하는 게 상식이다. 이건 전근대의 전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대전에서도 꽤 잘 먹히는 대전략이다.[23] 불멸의 이순신 같은 경우 이산해가 가장 먼저 파천 이야기를 꺼내고 윤두수가 그에 동의했으며 정탁이 종묘와 왕릉이 모두 한양에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유성룡이 다시 파천에 찬성하여 여론이 결정되는데, 이 쪽이 사실에 조금 더 가깝다.[24] 한성의 성첩 등에 최소 인원만 배치해도 거의 만오천명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 애초에 한성은 방어 목적이 아닌, 조선의 도읍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에 가깝다.[25] 그렇기에 더 문제다. 조선의 최고 책임자인 좌의정에 체찰사를 겸임하고 있는 류성룡이 이를 모른다는 것은 류성룡을 무능한 인물로 폄하하는 꼴이므로.[26] 실록에선 뽑은 이가 4천 5백 명에 궁가(弓家)가 7천 2백이라고 되어 있다.[27] 여담으로 지도 남쪽에 남극 대륙으로 보이는 대륙이 있지만 이는 사실 남극 대륙을 묘사한 게 아니다. 과거 서양인들은 남쪽에 커다란 대륙이 존재할 것이라고 여겼고 이를 묘사한 것이다. 자세한 건 미지의 남방대륙 항목 참조.[28] 전쟁 발발 1년 전이기는 하지만, 유성룡이 이일을 경상 병사로 삼자고 건의했다가 거부된 적도 있었다.[29] 온전히 사로잡았다는 설명이 뭘 의미할 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적선에 뛰어들지 않으면 무슨수로 적장을 사로잡는단 말인가?[30] 이 점은 불멸의 이순신 때에도 묘사되지 않아 지적되었다.[31] 26회 뿐만 아니라 분조를 이끄는 내내 광해군의 언행은 위험 수위를 수시로 넘었다. 16세기 조선은 전근대적인 군주 국가였으므로 군주의 말은 곧 법이었는데, 아무리 국가 비상시라고 하더라도 화를 벌컥 내며 '이 왕명은 마음에 안 든다', '이 왕명은 따를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은 조선의 법 따위 따르지 않겠다. 즉 조선인임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32] 태종 시기 왕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 했을 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선위 반대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빌미삼아 귀양, 사사된 적이 있다. 이후에 태종이 정말로 충녕 대군에게 선위를 하게 되었을 때도 신하들은 죽자살자 말릴 정도로 선위란 신하들 입장에선 무조건 반대해야 하는 행위였고 선위의 전 단계인 대리청정도 경종이 대리청정을 빌미로 노론들을 털어먹을 정도라 신하들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때 빼고는 선위고 대리청정이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봤다.[33] 임진왜란 초기 : 왜놈들 싹 쓸어버리겠어! → 임진왜란 중후반기 : 어... 이놈들 생각보다 강하네... 협상을 하는 게 서로 좋지 않을까... → 정유재란 : 재침? (지쳐서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냥 깔끔하게 정리해버리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협상의 결렬에는 양쪽의 조건 차가 너무 컸던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대 희대의 낚시꾼 심유경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도 있다.[34] 이와 비슷한 예로는 원균맹장설이나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철쇄로 이겼다는 것 등이 있다.[35] 여기서도 배를 끌고 온 사람이 이빈인지 정걸인지, 화살을 보급하는 군선이었는지 전라도 조운선이었는지의 논쟁이 있다.[36]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 전투에서 비명횡사할 뻔했으나 드라마 상의 묘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 외에도 이시다 미츠나리,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등이 조선군의 승자총통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37] 왜군점령지인 영남과 인접해 있으면서 전쟁 초기엔 왜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군사들이 징집을 거부해 반란까지 일으켰던 호남 지역에서 많이 발생했다. 의병장 유팽로의 임실 길암역 전투(5월 11일)와 의병장 양대박의 운암전투(6월 25일)는 임진년 5월, 6월에 전라도 한복판에 대규모 왜군부대를 의병대가 격퇴했다는 전투인데 시기상 이때 왜군이 전라도 중심부에 나타나는 건 불가능하다. 도적질을 일삼는 가왜를 격퇴하고 왜군으로 기록했을 확률이 높다.[38] 2차 진주성 전투 직후 전라도 복병장으로 두치진(하동현 서쪽 5리 나루터)을 수비하던 장흥부사 유희선이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양, 순천 지역으로 도망쳐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고 다니자 전쟁공포에 휘말린 백성들과 병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 소요사태는 전라도 남부 전체로 확대되어 조선군 보급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서애집, 난중일기)[39] 이 때도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은 유지되어 이순신도 공무 처리를 위해 한산도에서 여수로 나오곤 했다. <난중잡록>을 보면 정유년 초 가토의 도해 정보가 올라올 때가 이순신이 여수에 나와 있을 때였다. 당시 수군 주력은 한산도에 주둔 중이었고, 여수의 본영은 전라도에서의 병력 징집이나 보급물자 조달 등 행정업무 위주였던 듯[40] 4월 20일설(선조실록 권 32, 25년 11월 25일), 4월 22일설(난중잡록), 4월 24일설(선조실록 권 27, 25년 6월 28일), 4월 27일설(이긍익,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22일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곽재우가 경상감사 김수와의 갈등을 조정에 해명하기 위해 올린 자명소(自明疏)에서 자신의 거병 일자를 22일로 밝혔기 때문이다.[41] 제2차 진주성 전투는 강화 회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본군의 제한적 공세였기에, 그 이상의 진군을 위한 목적은 없었다. 게다가 정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으면 백성들은 전부 소개하고 군인들만 남아 시간을 끄는 방법도 있었다. 수만 명의 민간인은 먹여살릴 방법이 없으면 오히려 부담이 된다. 당시 진주성내의 사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의병장들이 민간인 철수에 적극적이지 않은 가운데 민간인들은 진주대첩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수성이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의거 대부분 성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42] 이때문에 은광개발은 명군이 조선에 하는 훈수의 단골메뉴가 된다. 사실 조선이 은광개발을 안 한 이유는 조선에서 은이 난다는 사실이 명에 알려질 경우, 명의 공물, 사신들에게 주는 뇌물에 은이 추가 될 가능성이 한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에서 은이 난다는 사실을 안 명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조선 입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은을 뇌물로 꼭 요구했기 때문에 조정이고 백성이고 사신단이 오기만 하면 죽을 맛이었고, 은에 눈 돌아간 명 대신들은 명말 만주가 누르하치 손에 떨어져 조선과의 육상 교통로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요소가 많은 바다를 통해서라도 조선에 가 은을 털고 왔다.[43] 최경영은 정철 사후의 이야기이다[44] 철수는 38회에서 이루어진다.[45] 이순신이 무조건적으로 명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건 아니지만 최대한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금토패문 건을 제외하면 조선 수군과 명군 지휘부 사이에 큰 마찰은 없었으며, 명군 지휘부는 이순신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심지어 명군 지휘부는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이후에도 이순신에게 원래의 정2품 품계를 돌려주지 않는 선조를 압박해 원래의 품계를 돌려주게 한 적도 있다.[46] 왜란 이전 명이 조선을 바라본 기준은 고구려였다.[47] 인조대의 삼도대동법은 기존 선혜법 방식을 적용했는데 기존 방식이 왜 실패했는가를 연구하고 개선점을 찾아내었기에 이후 대동법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이시방과 같이 대동법을 추진할 숙련된 관료층이 양성되고 조정 내에 지지층이 증가한 때도 인조 시기이다. 이에 기반하여 효종 2년에는 호서대동법이 나온다. 한편 이러한 대동법 추진과정에서 조선 후기 제도사에서의 인조 위상 및 정치인으로서의 단점이 도출되는데, 첫술을 뜸으로써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까진 잘 해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대목에 있어서는 인조가 후대에 의외로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잘 못 받는다. 애초에 다른 부분에서 워낙 암군이기도 하다[48]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궁술 외에 판옥선에 대한 지식, 수영 시험 등을 본 반면 본작에서는 검술과 창술 시험을 보는 것이 나오므로 이렇게 이해하기도 힘들다.[49] 쉽게말해 수령주관으로 각 고을이 1년에 바치는 전체 공물가를 한꺼번에 마련하는 것[50] 다만 어디까지나 일견 비슷하다는 말이다. 대동법의 개념이 확실히 잡히는 건 인조 말기부터다.[51]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이름으로 등장한다.[52] 이때 선조는 대간의 처벌요구를 뿌리치고 전마까지 챙겨주었다.[53] 역시 이 해전에서 나온 사망자인 평산포만호 김축은 안면에 총을 맡고 얼마간 중태에 빠졌다 사망한 탓인지 언급되지 않는다.[54] 드라마에선 마냥 이순신을 지원하는 이덕형만 해도 이순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원균 말만 듣고 잘못된 언급을 하기도 했다.[55] 가서한과 양업은 모두 명장으로 주어진 관문을 잘 사수하고 있었으나 윗선의 독촉으로 억지로 나가싸웠다가 패전한 장수들이다. 원균의 케이스에 가져다 붙이기엔 과분한 인물들이다.[56] 평양성 전투 장면을 짜집기한 탓에 도산성이 왜성이 아니라 전형적인 조선식 성이다.[57] 5군영중에 선조대 창설된 훈련도감, 숙종대 창설된 금위영을 제외한 어영청(1624년), 총융청(1624년), 수어청(1626년)이 인조대 작품이며 금위영의 모태가 되는 정초청도 인조대(1636년) 신설된다.(정초청에 현종대(1669년) 신설된 훈련별대를 1682년 통합하여 만들어진게 금위영이다.) 그리고 이괄의 난의 교훈을 받아들여 광해군대에 내버리다시피 했던(목장관리는 고사하고 감목관직조차 광해군대 없어졌다 인조대에 복구된다.) 기병전력과 근접전 능력의 배양이 이뤄졌다. 쌍령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지방군과 달리 중앙군은 팔기군에 밀리지 않는 역량을 보여줬다. 숫자가 적어서 문제였지.[58] 이괄의 난으로 북방지휘관 상당수가 날아가고 장만과 정충신도 병사해 호란 당시 인조정권에는 믿고맞길 국방전문가가 없었다. 인조라고 남한산성의 물자 비축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죽은 뒤 왕자들이 강화도에서 항쟁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이렇게 보면 물자가 거의 고갈되기 직전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며 10만 대군을 막아서던 인조가 왜 강화도가 함락되자마자 바로 항복을 했는지도 답이 나온다. 호란이 발발한 그 시점에 인조의 선택지는 사실상 강화도가 함락되지 않기를 비는 것 말고는 없었다.[59] 세폐에 형제관계까지 조선은 명과 단교하고 (산해관도 못뚫던)청과 군신관계를 맺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제외하면 어떻게든 들어주려 했다.[60] 병자호란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당시 청나라는 약탈 경제 체제로서 경제 상황 자체가 완전히 파탄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침공의 구실을 찾았어야만 했다.[61] 인조대의 국방시책(동국사학, 1985, 최효석), 인조조~병자호란시기 조선의 전술전개(한국사학보, 2011, 노영구), 인조시대 대후금 대청 방어책의 추진과 한계 - 수성전술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2012, 허태구) 등등. 인조대의 국방강화 노력이 적지 않았음은 학계에선 80년대에 이미 나온 말이고, 2010년 이후에는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대의 민력고갈과 각종 실정에 대해서도 2010년대 들어서 연구성과가 풀리고 있는데 하나같이 대중매체에는 피드백이 안되고 있다.[62]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여민휴식을 국정운영 모토로 하여 국가재정규모 감축, 긴축재정, 세금부담 완화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광해군대에 완전히 180도 돌아서 일탈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국정을 운영한다. 그리고 중국의 왕조교체라는 격변과 소빙하기로 인한 이상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넘긴후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