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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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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

Battle of Sarh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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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619년 (광해군 11년) 4월 14일 ~ 18일
(음력 3월 1일 ~ 5일)
장소

중국 푸순시
원인 누르하치 사이의 관계 악화
교전국 후금
(공세)
명-조선 연합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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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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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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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제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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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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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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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다이샨
다이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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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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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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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제
홍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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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구르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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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구르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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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망구르타이
망구르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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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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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르한
명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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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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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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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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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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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명나라)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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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백

조선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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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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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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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성 (중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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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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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이일원 (우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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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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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이찬 (연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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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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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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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이민환 (종사관)
전력 후금군: 25,000명
- 갑병: 10,000명[2]
- 보병: 15,000명[3]
연합군: 107,646명
- 명군: 90,000명
- 조선군: 17,646명
피해 사상자: 200명 (만문노당)
명군

전사자: 45,870명
말: 24,800필
조선군

전사자: 10,146명
포로: 4,291명
말: 3,260필
대포: 99문
조총: 6,800정
갑옷: 2,500벌
화약: 48,000근[4]
결과 후금의 대승
영향 청나라 건국

1. 개요2. 배경
2.1. 명나라 치하 여진족의 상황2.2. 이성량2.3. 누르하치의 대두2.4. 만주 통합2.5. 만주의 2.6. 팔기군과 여진 문자의 창설
3. 사르후 전투 직전 상황
3.1. 명나라의 대후금 경제봉쇄
3.1.1. 경제봉쇄의 역효과
3.2. 후금의 무순 공략3.3. 명나라의 후금 정벌 논의3.4. 파병에 소극적인 조선의 광해군
4. 전투
4.1. 양군의 편제
4.1.1. 명나라군4.1.2. 후금군
4.2. 명나라군의 실상4.3. 전장의 환경4.4. 명군의 작전계획 및 그 문제점4.5. 서로군의 상황
4.5.1. 맹장 두송의 막무가내 전진4.5.2. 서로군의 전멸(사르후 전투)
4.6. 북로군의 상황(상간하다 전투)4.7. 동로군의 상황(푸차 전투)4.8. 조선군의 상황
4.8.1. 행군 및 군량보급의 난관4.8.2. 심하 전투4.8.3. 푸차 전투: 동로군의 궤멸4.8.4. 조선군 좌•우영의 궤멸4.8.5. 강홍립의 항복
4.9. 남로군의 퇴각
5. 결과
5.1. 후금의 만주-내몽골 제패5.2. 명나라: 멸망의 시작5.3. 조선에 준 영향5.4. 몽골에 준 영향
6. 강홍립 밀지설7. 대중매체8. 기타9. 같이 보기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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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19년[5], 명나라후금이 요동에서 벌인 일련의 전투를 통칭해서 말하는 명칭이다. 실제로 사르후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 전투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현재는 이 회전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명청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전투로 명의 요청으로 조선군도 파병되었다. 이 전투는 후금군의 대승으로 끝나 만주족이 요동, 더 나아가 만주 전체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조선군이 참여한 심하(深河) 전투와 푸차(富察, fuca) 전투는 사르후 전투의 일부이다.

2. 배경

2.1. 명나라 치하 여진족의 상황

단편 영화 <사르후>

여진족은 원래 말갈로 불리던 민족으로, 고구려 및 발해에 복속하고 있었다. 926년 발해거란에게 멸망한 이후 민족적인 자각을 거쳐 1115년 생여진 완안부가 금나라를 세워 중원을 차지하고(1127년, 정강의 변) 한 때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금나라는 세워진지 119년만에 몽골 제국에게 멸망했고,(1234년) 금나라를 지배하던 세력은 원나라 통치하의 중원에 머물러 있다가 한족에게 동화되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여진계 부족은 중원이 아니라 만주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북원을 격파하며 만주까지 올라온 명나라나 혹은 북진정책을 취하며 압록강-두만강 이남을 병탄하던 조선에 복속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문화수준이 낮은 데다가, 조선 및 명나라의 견제 때문에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별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명이나 조선과 교역하기도 하고, 가끔은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이때 명나라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사는 곳과 생활 수준에 따라 나누어 길림성(吉林省)의 건주여진(建洲女眞), 흑룡강성(黑龙江省)의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분류했다.

그러던 중 오이라트몽골에 시달리던[6] 명나라는 여진족을 이용해 이이제이를 할 생각으로 그들에게 접근했는데, 이 중 요동 인근의 산지에 살며 당시 명나라의 기준으로 세 여진 부족 중 가장 문명화된 건주여진이 낙점되었다. 이에 1403년 후라가이(胡里改路, 호리개로)의 부족장 아하추(阿哈出, ? ~ 1411)가 명성조 영락제로부터 건주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7]를 임명받았다.

이후 건주여진은 빠른 속도로 한화하여 영락제의 치세때부터 요동에 마(馬)시장이 열리게 되었고, 부족장들에게 성이나 지위와 함께 조공의 권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에 명군이었던 효종 홍치제(弘治帝)의 치세에 이르면 양측은 확연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외에도 명나라는 요동총관 이성량이 건주여진 뿐만 아니라 해서여진도 포함하여 나름의 위세를 떨친다는 인물 300명을 찾아 일일이 관직을 하사하고 조공의 권리, 즉 일종의 무역 허가증을 주었다. 여진족에게 있어 명나라와의 교역은 생존과 직결되는 요건이었고, 명나라는 300명에게 이 권한을 분산하여 이들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하려고 했다.

여진족들의 생활 양식은 몽골몽골 고원에서 발흥한 여타 유목민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목은 주요 생업이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이들을 그저 '유목민'이라는 호칭으로 퉁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여진족들은 주로 무순(撫順)[8] 등에서 수렵한 붉은여우, 검은담비, 표범, 호랑이, 해달, 수달 등의 모피를 팔았고, 그보다는 인삼진주 등을 사용한 교역을 더 중요시했다.

또한, 이들은 지리적인 상황이나 기타 사정으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농업에 집중했다.
"서(墅[9]) 가운데 일구지 않은 곳이 없고, 산 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많이 개간했다."
신충일(申忠一)[10]
"토지는 비요(肥饒=땅이 걸고 기름짐)하고, 화곡(禾穀=벼에 딸린 곡식의 총칭)은 심히 무성하다."
이민환(李民寏)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11]

물론 어느 정도의 유목을 하기는 했다. 이렇듯 여진 자체로서도 여러가지 면모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에 원래 유목에 종사하던 몽골족, 이 시기부터 유입된 한족 농경민들까지 섞이다보니 이 지역은 민족적으로도 복잡했다.

건주여진이 중국과 우호관계일 때, 해서여진 역시 힘을 키웠다. 이들은 스스로를 '후룬'(扈倫, 呼倫, 忽剌溫, 忽溫)이라 부르며 야인여진은 물론 건주여진에 대해서도 일종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해서여진이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의 직계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해서여진 중에서도 예허부는 몽골의 혈통도 섞여서 여진족 중 가장 명문이었다.[12] 이에 반해 건주여진은 방계 취급을 받는정도였다. 해서여진은 우라(烏拉), 후이파(輝發), 예허(葉赫), 하다(哈達)의 4개 부족으로 나뉘었다. 이중 전통적인 강자인 예허부가 주춤하던 사이, 하다부는 나라 왕타이(那拉 王台)[13]라는 유능한 수장의 통치 아래 명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어 교역에서 우대를 받아 세력을 불렸으나, 왕타이가 죽고 난 뒤 혼란이 벌어져 다시 예허부가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허부는 반명적인 태도를 취해서 친명적인 하다부와 잦은 대립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건주여진의 한 집안에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2.2. 이성량

이성량임진왜란때 명나라의 조선 지원군 장수였던 이여송의 아버지로 당시 요동의 실질적인 제왕으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이성량은 조상이 고려에서 넘어온 후 계속 철령위의 첨사(僉事)를 세습했는데, 위(衛)의 장관이 지휘사, 그 밑의 차관이 지휘동지, 첨사가 그 밑의 직급이었기에 하잘 것 없다고는 해도 대단히 높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세습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면 베이징으로 가서 수속을 밟고 돈도 상당히 들었던 모양으로, 이성량 대에 이르자 집안까지 가난해져서 직책을 세습할 자금조차 없었다. 이에 이성량은 무려 40세가 될 때까지 백수 노릇을 하며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의 기량을 보고 인정하여 베이징으로 데리고 오면서 간신히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요동 험산(險山)의 참장(參將)이 되었고, 1567년 토만(土蠻)이 영평(永平)을 침공하자 자원하여 공을 세워 부총병이 되어 요양으로 이동했다. 이후 1570년 총병 왕치도(王治道)가 전사하자 그 대신에 도독첨사대리가 되었다.

40세까지 아무런 재주도 발휘하지 못했던 이성량은 한번 관직에 오르자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승진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사단장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다. 당시 명나라의 동북변에 한부(漢部), 태평부(泰平部), 타안부(朶顔部) 등 온갖 부족들이 난립하며 지난 10여 년 동안 명나라의 많은 장수들이 전사했는데, 이성량이 군비를 갖추고 장교들을 선발하여 40,000명의 군대를 갖추자 그 위용이 천지를 진동시켜 명군은 다시 싸울 의욕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해 5월, 토만이 대거 침공하여 명군이 막아내지 못하자 이성량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수장들을 죽이고 500여 명이 넘는 적군을 섬멸했다. 그 후에도 토만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냈고, 타안부가 4,000기로 공격해오자 이 역시 저지했다. 이때 건주여진의 왕고[14]가 명나라 군관 배승조(裵承祖)를 살해하자 이성량이 왕고의 공격을 물리치고 무려 1,000여 명이 넘는 적을 일거에 섬멸했다. 1575년에는 심지어 20,000명이 넘는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화기를 이용해서 단박에 적을 깨부수기도 했다.

이성량은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공훈을 끊임없이 올렸다. 1584년에는 여러 부족이 연합한 무려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격파해 내는 가공할 위업까지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이성량이 동북변에 머문지 22년, 북경의 조정에 보낸 대승의 보고만 무려 10여 차례를 넘었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도 모두 높은 보상을 받았으며, 서달과 같은 개국의 명장들 이후로 지난 200여 년 동안 변경에서 이렇게 공을 세운 장수는 척계광(戚繼光)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다. 황제는 계속해서 이성량에게 어마어마한 재물들을 포상으로 주었고, 이성량의 집안은 물론 그 하인들까지도 서로 재물을 가지고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역전의 명장 이성량은 신분이 높아지자 점점 사치스러워졌고, 승리를 거둘 때마다 더욱 거만해졌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동북 지역에서 군자금, 말의 판매 차익, 소금에 대한 세금, 상금, 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성량의 손아귀에서 이루어졌다. 즉 이성량은 요동 지역의 실제적인 지배자이자, 왕이었던 것이다.

2.3. 누르하치의 대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6%B8%85_%E4%BD%9A%E5%90%8D_%E3%80%8A%E6%B8%85%E5%A4%AA%E7%A5%96%E5%A4%A9%E5%91%BD%E7%9A%87%E5%B8%9D%E6%9C%9D%E6%9C%8D%E5%83%8F%E3%80%8B.jpg
누르하치
이성량이 여진의 왕고를 물리친 이후, 왕고의 양아들이었던 아타이(阿臺, ? ~ 1583)는 친명파인 하다부에서 아버지를 팔아넘겼다고 여기며 하다부와 대립하던 반명파 예허부와 손을 잡고 군대를 계속 동원했다. 이에 이성량은 하다부를 도와 아타이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 누르하치의 아버지 아이신기오로 탁시와 할아버지 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도 휘말리고 말았다.

기오창가와 탁시는 명나라 편이었는데, 기오창가의 손녀딸[15]이 명에 맞서던 아타이의 아내였다. 기오창가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 아타이가 있는 성에 들어섰지만 아타이가 아내를 내어주지 않아 억류당했고, 탁시 역시 따라 들어갔다가 억류당했다. 그 직후 이성량이 화공을 구사해서 아타이를 죽였으나, 친명파였던 기오창가와 탁시 역시 불에 타 죽었다.

이에 관한 다른 이야기로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러 들어갔다가 붙들렸고, 기오창가는 불에 타 죽었으며 탁시는 난입해 온 명군이 오인하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때가 1583년의 일이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개죽음을 당했다. 누르하치는 비범하게도 이성량이 자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도덕적으로 보면 이성량은 25세의 장성한 청년 누르하치에게 큰 빚을 진 셈은 맞았다.

누르하치는 이성량과 아주 잘 맞는 청년이었다. 어리고, 똑똑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쨌든 명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 이성량은 결과적으로 누르하치에게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과의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내주었다. 청나라 태조의 첫 번째 군자금은, 아버지할아버지의 목숨 값이었던 것이다.

2.4. 만주 통합

파일:external/www.eeloves.com/17541467be609145a8.jpg

이러한 이성량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누르하치는 차근차근 여러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건주여진의 통합으로, 만력 11년(1583년)부터 만력 17년(1589년)에 이르는 전쟁을 통해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서여진을 통합하게 될 기반을 다진 것이었다.

앞서 여진에게 있어 교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때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등 네 곳의 관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을 하여 내실을 키웠는데, 교역을 하는데 문제가 되는건 안전성이었고, 이제 통합이 된 건주여진은 매우 안전했으므로 상품 유통은 아주 원활했다. 만력 19년(1591년) 경에는 압록강로도 손에 넣어 조선과의 교역길까지 열게 되었다.

반면에 해서여진은 예허부와 하다부 사이의 오랜 대립으로 혼란스러웠으므로 교역로가 폐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주, 모피, 인삼 등의 교역품이 건주여진을 경유하게 되면서 각지의 상인들이 건주에 몰려들었고, 해서여진 4부는 금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해서여진 중 가장 강력한 예허부가 앞장서서 나왔다. 예허부는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상 시비나 다를 바 없었기에 누르하치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나는 곧 '만주'이며, 너는 곧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 해도, 내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넓다 하여도, 너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만주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일컫어 '만주'라고 하며 개별적인 태도를 취했다. 즉 당시 누르하치에게 '만주'란 건주여진의 5개 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허부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진족이 새로이 만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누르하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 법했고, 공포심을 느낀 해서여진은 변경의 각 집단에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말한 '만주'라는 괴물을 쳐부수려고 했다. 어느 순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이권을 저 만주라는 괴물이 집어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두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끝에 임진왜란 중인 1593년, 해서 4부족에 시버족(锡伯族) 등이 포함된 9부의 연합군이 편성되었다. 그 숫자는 30,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만주'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상상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적이었다. 누르하치는 구러산 전투에서 9부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백두산의 주셔리부와 너옌부 너머로 원정을 벌여, 그 지역마저 모두 합병해 버렸다.

새롭게 깃발을 내건 만주의 기세는 꺼질 줄을 몰랐다. 이 시기, 누르하치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망으로 인하여 200,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 임진왜란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그 직전 1591년 11월, 어사 장학명(張鶴鳴, 1551 ~ 1635)[16]의 주청으로 '요동의 왕' 이성량이 해임되었다. 이성량이 열심히 뇌물을 먹인 유력자들이 조정을 떠난 탓에 아군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 것이 원인이었는데, 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후임자들이 차례로 요동에 파견되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성량의 엄청난 영향력은 요동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후임자들은 그 영향력때문에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성량이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지만 능력 하나 만큼은 천하의 명장이라 할 만 해서 이성량이라는 큰 기둥을 뽑은 요동은 10년 동안 군사 책임자가 8번이나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다. 이성량은 한참 후인 1601년에 노령의 나이로 다시 복귀했다.

어린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이성량은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다. 이성량은 요동에서 신이나 다름없었고, 누르하치가 이름을 좀 날렸다 한들 그에게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러나 이성량이 어찌되었건 실무에서 잠시 손을 떼는 모양새가 되었고, 저 멀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함으로서 명나라의 시선은 완전히 남쪽에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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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정 때문에 정말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때마침 이성량도 개입 못할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9부 연합군을 구러산 전투에서 대파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었다.

이성량의 후임으로 온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일이 손에 안맞아 허둥대면서 현지 사정에 대한 파악을 제대로 하는 것도 힘들어 했고, 그나마 계속 교체되었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 즉 '만주'의 힘을 크게 늘리면서 '후룬'(해서여진 4부)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히데요시가 야망을 버리지 않고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킬 당시에 해서 4부는 울며 겨자먹기로 강대해져가는 만주와 화약을 맺었고, 전쟁이 끝나던 1599년에는 기어코 친명파인 하다부가 만주에 항복하고 말았다.

당시 누르하치는 무엇보다 명나라와 우호관계에 있었다. 이성량이 밀어준 누르하치가 아니었던가. 해서여진 4부를 굴복시켜도 명나라에 대한 반항이 아니게 되니, 저지할 만한 세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 즈음, 하다부를 예허부가 충동질했고, 하다부의 공격을 만주가 격파한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명나라와 만주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2.5. 만주의

명나라의 사자는 누르하치를 힐문하기 위해 만주부에 왔다. 슬슬 이쪽에서도 누르하치가 너무 강대해져 가는 것에 대해선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예허부도 하다부를 공격한 건 마찬가지이니 저쪽을 힐문하라고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만주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예허부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어 서로 싸우게 하여 기를 꺾을려고 했다.

이즈음 하다부는 계속된 패배와 식량 부족으로 몹시 곤궁해져 있어 명나라에 도움을 구했지만 이미 예허부를 파트너로 선정한 명나라는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견디디 못한 하다부는 누르하치의 만주에게 항복하고 말았으니, 이제 명나라와 만주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이성량이 고삐를 쥐고, 누르하치라는 맹수를 적절히 조율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성량은 22년 동안 재임하며 상당히 나태해졌고, 중간에 파면까지 당했으며, 복귀했을 때는 이미 70이 넘은 고령이었다.

누르하치는 기세를 타고 거침없이 성장세를 달렸다. 하다부에 이어 후이파부가 1607년에 멸망했고,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4부 가운데 2부를 병합했다. 그 다음으로 누르하치에 대적한 해서여진은 울라부였는데 울라부와 누르하치는 후이파부 멸망 직후인 1607년에 격돌했다. 그런데 이들이 조선 영내에서 싸우느라 함경도 종성이 한바탕 난리가 난 바가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피해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의 군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 兵使) 이용순(李用淳, 1550 ~ ?)이 치계[17]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엽(鄭曄, 1563 ~ 1626)의 치보(馳報)에

‘싸움에 임하여 황급했으므로 적의 정세를 이제서야 비로서 연유를 갖추어 알린다. 이번에 도임한 뒤로는 성식(聲息)을 진고(進告)하는 일이 아주 없었으므로, 8월 14일 해돋을 때에 능사군(能射軍) 30여 명 가운데에서 유진군(留鎭軍)을 헤아려 남겨두고, 칠탄(七灘)의 수호군(守護軍) 각각 3명을 정해 보내어 농민을 거느리고 강가에 나가게 했는데, 진시(辰時)에 수호군과 봉군(烽軍) 등이 급히 고하기를

"죽기동(竹基洞)·문암(門巖)·쌍동(雙洞) 세 곳의 동구(洞口)에 적기(賊騎)가 수를 알 수 없이 많고, 오갈암(烏碣巖)[18]에서 금경륜탄(金京倫灘)까지 20여 리의 땅에 가득 깔려 곧장 나와 강물을 건넌다."

라고 했다. 이에 오래 앓던 끝에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성에 올라가 보니, 수많은 적병이 창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는데, 군관(軍官) 두 셋과 지친 사군(射軍) 10여 명이 있을 뿐이므로 사세가 급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곧 성문을 닫고 판관(判官)을 솔령장(率領將)으로 차정(差定)하여 군관과 토병(土兵) 6∼7명 및 포수(砲手) 5명을 주어 나가 싸우게 했더니, 다들 죽을 힘을 다하여 계속해서 포를 쏘았는데, 적이 점점 물러가 저편으로 도로 넘어가 유둔(留屯)했으므로 성 안의 노약한 남녀와 맹인(盲人)을 찾아 모아 성 위에 벌여 세웠다. 이어서 생각하니 적이 혹 다시 오면 전혀 지탱할 수 없는 형세인데, 강을 넘어오도록 유인하여 선봉(先鋒)을 급히 쳐서 그 형세를 조금 꺾으면 혹 의구심(疑懼心)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듯 했다. 망령되게 요행을 바라는 생각을 하고는 솔령장과 토출신(土出身)인 전 만호(萬戶) 김사주(金嗣朱)·박응참(朴應參, 1540 ~ 1607)과 토병 4∼5명 및 포수 5명을 시켜 곧바로 강가에 달려가 위아래서 유인하게 했더니, 적병 30여 기(騎)가 먼저 건너와 바야흐로 접전하는데 적이 또 무수히 이어서 건너왔다. 성 위와 성 밖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았더니, 적의 선봉이 점점 물러가므로, 곧 전령(傳令)을 보내어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때부터 바깥 마을에 사는 백성과 품관(品官) 및 경원(慶源)의 군사 15명과 온성(穩城)의 군사 10명이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후(虞候)가 포수 9명을 거느리고 잇따라 성에 들어왔으나,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보기에 한심했다. 15일 새벽에 적의 무리가 강여울을 오르내리며 깊이를 살폈다. 주회(走回)한 번호(藩胡)들이 진고하기를

"이들은 홀라온(忽刺溫)인데 그 장수 만도리(萬都里)가 지난해에 조선에서 살해되었으므로 복수하려고 군사를 3운(運)으로 나누어 부성(府城)을 침범하기도 하고, 바깥 마을을 약탈하기도 한다."

라고 했다. 호인(胡人)의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나 적의 정세를 살펴보면 애막(艾幕)을 크게 설치하여 오래 머무를 생각이 있는 듯 했다. 이어서 번호를 분탕(焚蕩)하여 타는 불길이 하늘에 찼고, 번호들은 높은 봉우리에 의지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방어할 생각을 했으나 적이 곧 층루(層樓)을 만들어 한꺼번에 목책을 넘어갔는데, 그 쳐죽이는 소리가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 형세를 상세히 보니 결코 맞설 수 없으므로 우후와 함께 의논하여 밤을 타서 강을 건너가 야습할 방책을 쓰려 했으나 2일 동안 계속해 비가 내려서 강물이 깊어지고 포를 쏘기도 어려워져서 바야흐로 염려하고 있던 중 16일 미시(未時)에 적병이 도로 죽기동으로 향했는데, 해가 진 뒤까지 계속하여 철수했다. 번호와 후망군(候望軍)이 진고하기를

"동중(洞中)의 깊은 곳에서 말에서 내려 모여 있다."

라 하고, 밤이 깊은 뒤에 산 위에 숨어있던 호인들이 잇따라 진고하기를

"심처풍가(深處豐家)로서 향화(向化)한 오랑캐인 어구대(於仇大) 부락을 분탕하려고 선발대가 어젯밤 비내리는 중에 이미 떠나갔다. 유둔(留屯)했던 적은 16일 미시에 죄다 들어갔다."

고 했다. 동관(潼關)의 치보에는

"지금 학쌍이(鶴雙耳)·차일(遮日) 두 부락에 머물러 있는데 흉모를 헤아릴 수 없고 진군 방향을 모르겠다."

고 했다. 대개 이 적의 형세는 눈으로 본 것과 이곳 장사(將士)의 말을 참고하면 그 진퇴하며 합전(合戰)하는 상태가 자뭇 기율이 있어서 예전의 잡호(雜胡)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장수 2명이 각각 붉은 형명(刑名)을 설치하고, 호령할 때 고둥부는 소리가 멀리 부성(府城)에 들리고, 갑옷·투구·창·검과 전마(戰馬)가 매우 정건(精健)한 것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 이 적이 있는 곳은 멀리 15∼16일정(日程)에 있어 번호들도 미처 알지 못했고, 앞서 살륙당하여 남은 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이 뒤로는 성식(聲息)을 더욱 듣기 어려운데, 만일 갑자기 변란이 일어나기를 번번이 오늘의 일과 같이 일어난다면 방비할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포수(砲手)와 정병(精兵)을 급히 보내고 뒷일을 선처하는 방책도 계문(啓聞)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두 번째 접전할 때는 죽은 전사(戰士)가 한 명도 없다. 포수 조응례(趙應禮)와 노(奴) 응상(應祥) 등 3명이 바로 앞에서 포를 쏘다가 칼을 맞아 다쳤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봉수군(烽燧軍) 오정(吳井)이 적을 만나 살해되었고, 농군(農軍)은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거의 다 들어왔다.’

라고 했습니다. 이 적의 왕래는 갑작스러워서 물러갔다 하더라도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으므로 신칙(申飭)하여 변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홀라온은 종성·온성(穩城)·경원(慶源) 등의 번호와 원수를 맺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전혀 왕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홀적(忽賊)의 동지(動止)에 대해서는 번호가 전혀 알지 못하고 침입하여 성까지 온 뒤에야 비로서 적이 온 줄 알게 되니, 뒷날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선조 실록》 166권, 36년(1603년 계묘 / 명나라 신종 만력 31년) 9월 1일(갑인) 5번째 기사
<오랑캐 침입에 대한 함경북도 병사 이용순의 치계>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했고 1608년에는 울라의 이한(Ihan) 산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6년 뒤인 1613년에 울라부가 멸망하고, 울라부 수장인 부잔타이는 예허부로 망명했다. 부족 하나를 멸망시키는 사이에도 만주는 내부적인 역량이 차곡차곡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예허부 뿐이었다. 이에 예허부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유격 마시남(馬時楠)과 주대기(周大較) 등에게 1,000명을 주어 보내는 등 공개적으로 누르하치의 반대편을 들기 시작했다. 아직 명나라와 싸우기엔 시기상조였으므로 이때 누르하치는 7개의 성 등을 함락시키고 일단 물러났다. 1616년 1월, 누르하치가 드디어 가한, 즉 칸(Khan, 여진어로는 '한')의 자리에 올랐다.

2.6. 팔기군과 여진 문자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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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황기(鑲黃旗)
한(칸)의 앞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놓여 있었다. 우선, 한 다리 건너면 알고 있는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더 큰 조직을 꾸리는 일이었다.

사실 여진족은 유목보다 오히려 사냥이나 교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사냥은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 바 없었으므로, 끊임없이 사냥을 하는 여진족은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그들을 규율에 잘 복종시켜서 단결시키면 상당한 전력이 될 것이 분명했다.

여진어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본래 커다란 화살을 이르는 말이었다. 여진족은 수렵 집단이었던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정해져 있는 인원수가 있었고, 이 10명 정도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이 어전이라고 불렀다. '어전'은 '주인'이라는 말인데, 사냥시에 여러가지 독재적인 권한이 있었다. 만일 사냥시에 누군가가 함부로 움직이거나 해서 사냥감이 도망간다면 큰 타격이었다. 즉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였던 이 방식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다. 300명을 1니루로 했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甲喇, 갑라), 5개의 잘란을 1구사로 삼았다. 그리고 구사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旗)였다. 즉 1잘란에 1,500명, 1구사(기)에 7,500명이었다.

누르하치가 한에 즉위할 당시 만주의 니루는 총 400개였고, 이는 대략 120,0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여러 기(구사)를 두어 이를 색으로 나누어 구분했다. 니루는 사냥을 할때 지휘통제를 위해 깃발을 사용했는데, 최초의 팔기인 4기(즉 이 시점에선 팔기라는 명칭이 아닌)는 황색, 남색, 홍색, 백색을 상징으로 했다.

누르하치는 기존에 있었던 남, 황, 백, 홍색 기는 정기(正旗)로 삼았고, 또한 새로 4기를 더 창설하여 양기(鑲旗)라 칭했는데, 남, 황, 백기는 홍색 테를 두르고, 홍기엔 하얀 테를 둘러 단일 색으로 된 정기와 구별했다. 누르하치는 이런 깃발을 사용해 만주족을 군사체제 위주의 국가로 만들었고, 이 팔기는 각각이 군단인 동시에 백성들의 소속집단이 되었다. 즉 만주족이란 예외없이 누구든 이 팔기의 일원으로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한족 사람들이 절강성 출신, 복건성 출신 등으로 구분한다면 만주족은 정황기 사람인가, 양람기 사람인가 하는 식으로 서로를 구분했다. 만주족을 일컫어 기인(旗人)이라고 하는건 이 때문이다.

누르하치가 이런 체제를 선택한 것은 만주족들이 개별적으로 전사이기도 하고, 또한 한족보다 워낙 숫자가 적은지라 만주족 전체를 군사집단화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팔기에 대해서는 《팔기통지》(八旗通志)라는 기록이 있는데, 근세부터 근현대까지 존재했던 거대제국 청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라는 점에 비하면 의외로 기원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기록이 부실하고,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팔기통지》에 따르면 누르하치 즉위 직전에 있었던 400여 개의 니루 중에 만주족과 몽골족의 니루는 308개, 몽골족의 니루가 76개, 한족의 니루가 16개였다.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만주족과 몽골의 혼성 니루가 있고, 몽골인의 니루가 무려 76개나 되며, 한족의 니루 또한 16개나 되는, 숫자로 보면 5,000명 가까이가 된다. 숫자가 적은 만주족 공동체에서 이는 매우 많은 숫자로, 이 정권은 여러가지로 기묘했다.

누르하치의 정권이 이러했고, 누르하치 본인도 만주어, 한어, 몽골어 등을 구사하는 국제적인 색깔을 보였다. 다만 이 시기에는 만주어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었다. 물론 금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여진 문자가 있긴 했다. 하지만 금나라 문자는 동아시아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한자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결국 이와 비슷해졌고, 그 금나라 문자 역시 금나라의 한화(漢化) 등으로 인해 별로 쓰이지가 않아서 사용하기에 불편했다. 당장 금나라 문학들만 해도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다. 이러한 금나라 말을 공식문서로 쓰고는 있었지만 금나라 문자는 만주족 내에서도 극소수나 쓸 수 있었고, 오히려 주로 사용되는건 몽골 문자였다.

여기에서 착안한 누르하치는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해서 만주어를 표현하기 위해 어르더니와 가가이에게 새로운 문자의 작성을 명령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처음 이 쪽에 손을 댄 것은 1599년 즈음이니, 즉위하기 한참 이전에도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이다. 여기서 누르하치가 무언가 더 큰 어딘가를 보고 있는 느낌은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에 분주하던 누르하치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명나라가 만주와의 교역을 정지시킨 것이다. 교역 정지 명령은 만주에게 영향이 컸는데 하늘과 땅을 뒤덮는 100만 대군도, 가공할 화포도 아닌 단지 이 한 장의 명령서로 인해 누르하치와 만주는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3. 사르후 전투 직전 상황

3.1. 명나라의 대후금 경제봉쇄

여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교역이라고 말한 바 있다. 누르하치가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4개의 관을 이용한 활발한 무역이었고, 해서여진이 몰락한 이유도 교역의 어려웠던 측면이 강했다. 이 시기쯤 되었다면 교역도 오랫동안 했을 테니, 당연히 누르하치도 인삼 등의 재고를 계속 보유하고, 모피를 대량으로 사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는 교역을 중단시켰다. 교역이 멈추었다면 사 놓은 인삼이나 모피 등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한껏 팽창시킨 영역과 백성, 그리고 군대를 먹여살리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현대의 국가에 국제사회가 합세하여 모든 무역 활동을 정지시킨다면, 그 나라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면 된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과거 중동에서 석유 제재 조치를 취하자 그것만으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힌 전례가 있다. 그리고 당시, 만주에게 있어 명나라는 전세계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 사회를 유지시키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조선처럼 명나라에 고개를 숙이는 방법 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충분히 역량이 성장한 여진족이 굳이 명나라에게 계속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굴복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명나라와의 대결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머리를 숙이면 당장의 일신은 모면할 수 있지만, 결국 영원히 명나라부터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으로 인해 쟁여놓은 인삼 등은 썩어버리고, 모피 등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걸레가 되어버렸겠지만, 누르하치는 애초부터 불안정했던 교역이 아닌 다른 방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상기한 대로 여진족은 이미 농사를 할 수 있는 대로 짓고 있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경제적인 자립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렇다면 역시 명나라와의 대립으로 인해 더 이상의 확장을 할 수 없는 교역보다는 농업을 육성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자신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 온 한족 유민을 활용하여 농업의 규모를 늘리는 정책에 착수하고자 했고, 옛 하다부 남쪽에 있는 시하(柴河)·범하(范河)·삼차얼(三岔兒) 등에서 누르하치는 대규모적인 개간 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농업 확장 정책은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후 누르하치의 통치 내내 이어진다.

명나라 역시 그러한 사정은 알고 있었다. 총병 장승음(張承蔭, ? ~ 1618)은 사람을 보내 이번에 개간 사업을 시작하는 세 곳의 작물을 수확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다고 따지며 견제 행위를 벌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방법이 없었기에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지금 명은 이미 예허를 도왔고 또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벼를 예확(刈穫=곡식 거두다)하지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0,000명의 병사를 주둔시키지는 못할 터, 만일 1,000명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어마어마하게 강도가 높은 발언이었다. 이 시기는 1615년이었고, 중국의 황제로 말하자면 만력제의 재위 43년의 일이었다. 또한 누르하치가 내부 기반을 어느 정도 다져놓은 상황이었다. 이 시점의 누르하치가 거대한 대제국 건설에 대한 구상이 있었을까라고 묻는다면, 아마 회의적인 대답을 하겠지만, 최소한 명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분명히 그랬다. 바로 다음해, 즉 1616년 1월에 그는 대금(大金)이라는 국호를 삼고,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내세웠으며, 흥경(興京)을 수도로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후금(後金)의 탄생이다.
'금', 곧 '아이신'. 이 말을 듣는 여진인들은 모두 거란 천조제의 대군 700,000명을 깨부순 금태조 완안아구다와 한족의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넣은 금태종 완안오걸매의 영광을 떠올리며 피가 끓어오를 것이었으며, 반대로 중국의 한족들에게는 여러모로 불길한 이름이었다. 건국 초기에 여진 동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한다면 '금'이라는 국호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음험한 궁정 암투에 골몰하던 명나라의 조정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들려왔고,
"남송과 금의 역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누르하치, 곧 천명제(Emperor Tiānming of Qīng)는 즉위 2년이 되자 <칠대한>(七大恨 nadan amba koro)이라는 개전 이유를 내걸고, 대제국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칠대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와 아버지인 탁시를 이유없이 죽인 것.
2. 명나라가 건주여진을 학대하고,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하다부를 편애한 것.
3. 명나라가 누르하치와의 영토 협상을 부인하고, 쳐들어와 살인을 자행한 것.
4. 명나라가 건주여진을 막기 위해 예허 부락에 군대를 증원해 파병한 것.
5. 예허부가 같은 여진으로서 신의를 저버리고, 명나라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자신의 약혼녀를 몽골 부족에게 강제로 보낸 것.
6.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차이하, 파나하, 산차라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
7. 명나라의 요동총독 소백지(蕭伯芝)가 권한을 남용하여 건주여진인들을 착복해 도탄에 빠트린 것.

요약하자면 예허부를 편애한 것, 개간 사업을 한 새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 천명제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은 것 등의 이유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왜 우리만을 괴롭히냐, 하는 뉘앙스도 있었다. 《청태조실록》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대국의 임금을 세움은 곧 천하의 공주(共主)로 삼으려 함이거늘, 어찌 오로지 우리나라에게만 원한을 맺으려 하는가?"
이 시점까지를 보면 누르하치도 명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인정은 하고 있었다. 다만 어찌하여 우리만을 그렇게 괴롭히고, 다른 부족들은 편애하냐는 식이었다.

3.1.1. 경제봉쇄의 역효과

사실 누르하치도 소규모 농업을 넘어서서 한족 유민을 동원한 대규모 농업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이는 1622년 요양으로 천도해서 3년 동안 노력해보다가 안 된다고 생각한 후, 심양으로 재천도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당시 후금에게 있어서 농업 사회로 편입된 시기는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시대로[19], 농업 확장 정책의 실패 이후 누르하치는 1625년 사실상 농업에 대한 의지를 거의 접고, 기존의 유목민 기병을 중심으로 한 팔기군 체계의 정비에 더 힘을 쓰게 되었다.

또한 명나라의 교역 금지는 사르후 전투 이전에 발생했고, 그 후 후금은 거의 10년 동안 명나라와의 교역이 불가능했던 상태에서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했으며, 거의 10년쯤 후인 정묘호란을 통해서 조선에 무역을 강제로 하게 하여 명나라가 단행한 교역 금지의 어려움을 상당수 해결했다. 이를 보았을 때, 명나라의 교역 금지 정책이 누르하치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명나라의 경제봉쇄는 오히려 후금의 확장을 촉진시켰다. 후금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으로 팽창한 것이다. 일단 사르후 전투 이후에 후금은 만주를 통일한 후, 산해관을 향해 가려고 했지만, 좌절된 후 내몽고 방면을 공략해서 몽골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이것으로 후금군은 내몽골를 통과하여 만리장성을 통과해 산서성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들어가 수도 베이징 근처의 하북성, 심지어는 그 동남쪽으로 내려가 해안지방인 산동성까지 공략했다. 비록 산해관 때문에, 오삼계가 투항하기 이전에는 보급문제로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만리장성을 우회한 대규모 약탈 원정을 감행해 명나라 북부를 황폐화시킬 수 있었다. 이후 명나라의 북중국 지역에서는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까지 겹쳐 대규모의 농민 반란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농민반란 중 하나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난인걸 생각하면 명나라의 교역 금지는 결국 스스로를 멸망시킨 자충수임에 틀림없다.

한편 이런 경제봉쇄는 사르후 전투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 와중에서 막대한 이득을 본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었다. 사실 명나라의 경제봉쇄는 후금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지만, 그에 못지 않게 명나라 당파 싸움의 돈줄 역할을 했던 베이징의 상인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모문룡은 한편으로는 후금과 전투를 행하면서도 명나라 조정의 금지령을 어기고, 군자금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후금과 명나라 본토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모문룡의 상관인 병부상서 원숭환은 바로 이 점을 두고 모문룡이 후금과 내통한다고 생각해 모문룡을 처단한 듯 하다. 하지만, 이는 모문룡의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던 상인들의 큰 분노를 샀고, 이 상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당파를 움직여 원숭환을 참소하여, 그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시켰으니, 어찌되었든지간에 명나라의 경제봉쇄 또는 교역금지는 여러 직•간접적인 효과로 명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사실 경제봉쇄는 명나라에게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르후 전투로부터 170년 전에 일어났던 토목의 변의 직접적인 원인도 명나라의 오이라트에 대한 경제봉쇄였고, 이렇게 교역이 금지된 오이라트는 더 날뛰면서 변경을 어지럽혔고 명나라의 영종 정통제가 이를 두고 오랑캐를 토벌하겠다며, 직접 친정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는 한심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3.2. 후금의 무순 공략

이렇게 명나라의 경제봉쇄로 후금은 크게 곤란해졌으나, 1618년 4월 후금군은 명나라의 무순을 전격적으로 공략해 함락시켰다. 무순성의 수장인 유격 이영방(李永芳, ? ~ 1634)은 누르하치의 항복 권고문을 받고는 기다렸다는듯이 곧바로 항복을 해버렸는데, 이후 이영방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누르하치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총병으로 승진했다. 이는 사전에 무언가 이야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순에는 여러 상인들이 많았는데, 누르하치는 상인 16명을 불러 여비를 주고 <칠대한>의 문서를 건네주고는 돌려보냈다. 주민들은 모두 포로로 삼았는데, 이 시점의 누르하치에게 가장 급한 일은 어마어마한 거대 제국 명나라에 비하면[20] 터무니없이 부족한 만주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은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일단 누르하치는 무순 주민들을 포로로 삼고는, 무순의 성벽은 훗날을 위해 파괴한 후 되돌아가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총병 장승음이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둘러 팔기군을 요격하려고 추격했다. 누르하치 역시 맞서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돌렸는데, 이 순간 하늘이 그를 돕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갑자기 커다란 바람이 불면서, 모래먼지가 명군을 덮쳤고, 만주 팔기는 아직 싸울 준비가 안된 명군을 신속하게 덮쳤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대승으로 끝나, 총병 장승음을 포함한 명나라 간부 군인들은 전원이 전사했다. 후금군의 엄청난 대승이었다.

광녕순무 이유한(李惟翰)은 싸움이 끝나자 누르하치에게 사람을 보내 포로 송환 문제를 논의하려고 했지만, 누르하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
"사로잡은 것은 곧 나의 백성들이다. 어찌 송환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인적 자원이 가장 급한 만주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실상 그들에게는 토지보다도 사람들이 더 필요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마을 주민은 데려오고, 점령했던 땅은 그냥 내버려 둔채 되돌아오는 약탈식의 싸움을 많이 벌였다. 당시 만주에 귀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그 '귀부'라는 것은 실상은 납치되어 잡혀오는 사람들이 었다.

3.3. 명나라의 후금 정벌 논의

무순 함락과 장승음의 패전은 명나라 조정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위험성이 있는 가능성에서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상이 변모한 것이었다. 이에 명나라 조정도 큰 마음을 먹게 되었고, 결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적이 더 기세를 타기 전에 대군을 동원하여 완전히 짓밞아 버리자는 것으로,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시기적절한 판단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누르하치를 그대로 두면 크게 후환이 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무순이 함락된 1618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속 대만주 정벌 준비를 실행했다. 그리하여 원래 요동에는 60,000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중국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으고, 누르하치와 반목하는 해서여진 부족인 예허부와 임진왜란때 도와준 바 있는 조선의 병력도 모아서 120,000명 정도의 대군을 편성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명나라가 모을 수 있는 병력의 최대치였으며, 명나라는 이후 24년을 더 존속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운용하지는 못했다.

1619년,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던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경략에 임명되었고, 4로 총지휘로 심양에 주둔했다. 4로 총지휘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군은 네 가지 길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과 총병 경험을 가진 인물이 6명이었다. 명나라에서 총병은 현대의 기준으로는 군단장급의 인물이었므로 적어도 6개 군단 정도의 병력이 참여한 것이었다.[21]

이때 명나라의 유명한 무장으로는 산해관 총병 두송(杜松)[22]과 보정 총병 왕선(王宣, ? ~ 1619), 개원 총병 마림(馬林, ?-1619) 및 임진왜란에 참여했었던 요양 총병 유정(劉綎) 등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李如栢, 1553 ~ 1620)은 당시 퇴역해 있었는데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요동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보이는데, 준비도 제법 철저했다. 조선의 지원군 18,000명도 파견되어 유격 교일기(喬一琦, 1571 ~ 1619)가 이를 지원했다. 그리고 만주가 멸망하기를 가장 바라고 있었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도 15,000명을 지원했다.

당시 양호가 누르하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당시 명나라의 군대는 무려 470,000명이었다. 물론 이는 누르하치를 겁주기 위한 것으로 실제 병력은 100,000~160,000명 가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만주를 평정하고 위험 가능성을 내포한 누르하치를 물리치기에는 적절한 숫자였다. 만약 그대로 싸움이 벌어졌다면 누르하치가 고대 이집트람세스 2세처럼, 스스로 신이 되어 적군을 물리치거나 하지 않는 한 무슨 재주를 가졌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한산도 대첩이나 칸나이 전투 등 전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전투들이 있는 반면에, 보고 배울 것이 없는 말도 안되는 기적으로 가득찬 전투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전투는 승자의 전술적인 식견 이전에 패자의 터무니없는 실수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는 후자의 대표 주자격으로 실수의 주체는 당연히 명군이었다.[23]

3.4. 파병에 소극적인 조선의 광해군

명나라는 누르하치 세력을 더 크기 전에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정벌계획을 직접 맡아 요동을 관할하고 있었던 명나라의 요동아문은 북경 조정의 논의와는 별개로 계속 자체 판단하에 파병을 하도록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개 지자체가 외국에 계속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이었지만,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24] 요동아문의 공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가 되어 직접 전쟁을 지도해보았고, 명군의 실상에도 밝았기 때문에 이 전쟁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후금 정벌을 적극적으로 거들어야 한다는 조정의 중론도 계속 무시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광해군의 입장은
"명나라가 만약에 국력이 충분하다면, 후금 따위는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을테니 우리 도움은 필요 없을 것이다."
였다. 실제로 명나라는 16세기 내내 외란과 내란에 휘말렸지만, 조선에 군사 지원은 요청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을 위해 임진왜란에 출동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광해군은 만약에 명나라가 조선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라면, 명나라가 만주를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 듯 하다. 만일 명나라가 만주를 상실할 경우, 명나라와의 육로는 끊겨버리고 조선은 오로지 후금과 국경을 두고 대치하기 때문에,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 소모하기보다는 차라리 압록강 국경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이렇게 후금과의 대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파병에 매우 소극적이었지만 조선 조정의 신료들, 심지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대북의 실권자인 대제학 이이첨조차도 이에 호응해 계속 대군을 준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이런 신하들의 주장에 대응하여, 지방기관인 요동아문이 아니라 황제가 있는 북경의 조정에 직접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황제의 명이 있으면 파병하자는 핑계로 계속 시간을 끌면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이런 광해군의 자세에 좀 더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계속 파병을 미루며 명나라 조정을 떠보고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왔었던 양호가 여진족 토벌의 대의를 맡은 요동경락에 임명되면서 조선 조정에 보내오는 압력이 더욱 커졌다. 양호는 아예 조선 사신이 명나라 조정에 보내는 글을 중간에 가로채 읽고, 조선 조정이 파병을 미루는 여러 핑계를 반박하는 항의성 공문을 보내오기도 했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23일)

이렇게 요동아문의 독촉은 한 귀로 흘리던 광해군은 베이징에서 신종 만력제 명의의 조서가 내려오자 결국 마지못해 파병을 결정했다.(《광해군일기》 11년 2월 13일)

4. 전투

전투 경과를 다룬 사료로는 후금측의 기록, 명나라측의 기록과 조선측의 기록이 있다. 세 기록이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후금이 서로군, 북로군, 동로군을 시간차로 각개격파했다는 사실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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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양군의 편제

4.1.1. 명나라군

명군의 전략은 4개 방면에서의 분진 합격으로, 사르후에서 만나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포위하여 후금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후금보다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 4개의 부대는 사실 동서남북이 아니라 모두 허투알라의 서쪽에서부터 출발한 병력이었다.

명나라에서도 후금을 가볍게 보지 않고, 당시에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에이스들로 지휘부를 꾸렸다. 총사령관 양호는 한국의 일부 사극(<불멸의 이순신>) 및 임진왜란을 다룬 일부 서적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바람에 졸장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명나라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에이스였다.[25] 원래 과거 급제자로 문신 출신이었지만 지방 행정관을 하다가 몽골의 침략을 물리쳐 군재가 있음이 발견되었고, 그 이후로는 장수로 나서게 된 케이스였다. 과거 급제자인만큼 조정과 지방을 오가며 중앙 요직을 맡고 있다가 변경이 위급하면 야전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사르후 전투 직전에도 당상관급인 병부우시랑(조선의 병조참판급)을 하다가 현장 지휘관에 발탁되었는데, 병부시랑은 병부상서(조선의 병조판서)로 가는 요직이었으며[26], 만약 사르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면 병부상서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유정이여백[27]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었고, 두송은 몽골 및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마림은 문신에 가까웠으나, 명장 마방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전략•전술을 배웠는데, 마방은 몽골 튀메드부의 영웅 알탄 칸을 패퇴시킨 바 있었다.

명나라는 후금의 싹을 말려버리려 했고, 전국 각지에서 가용가능한 병력을 모두 긁어모았다. 만주 지역의 병력뿐만 아니라 당시의 중국의 서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사천성이나 남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광동성의 병력까지도 수천 km가 떨어진 만주까지 동원했을 정도였다. 사료에는 병력수가 무려 200,000명에 달했다고 나오나 실제로는 그 반정도였을 것이다.[28]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목을 가져오거나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은 10,000냥[29]의 상금과 도지휘사의 벼슬을 내걸었다. 그리고 버일러(패륵)급의 목을 가져오면 은 2,000냥과 지휘사의 벼슬을 내리며, 누르하치에 귀순한 한족들에게는 다시 배신을 유도하기 위해 오랑캐 장수의 목을 들고 재귀순하면 죄를 면해주겠다고도 공포했다.

다음은 명나라군의 편제이다.

총지휘 경략[30] 양호: 직속부대는 수천 명~15,000명이었으며,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양호의 직속부대는 심양에 머물러 있었고, 이는 첫 번째 회전이 벌어진 사르후에서 약 50km 밖에 떨어져 있었다.

문제는 이들 장수들이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점이다. 특히 경략 양호와 총병 유정은 견원지간이었고, 북로군의 사령관 마림은 휘하 지대의 범종안과 사이가 나빴다. 보통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의 패배에 대해 두송 등의 현장 지휘관들이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 5명의 명군 고위 장수는 참패한 후 모두 제명을 못살았다. 유정과 두송은 전사했고, 마림은 부상당했으나 자신의 부대 주둔지인 개원으로 후송되었다가 그곳을 급습한 후금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여백은 자결했다. 양호는 패전의 책임으로 10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의종 숭정제가 즉위한 후 참수되었다.

어쨌든 명나라가 적을 얕보지 않고 대군을 동원한 것은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문제는 누르하치의 지략이나 후금군의 전투력이 명나라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날씨나 지형과 같은 요소마저도 후금의 편이었다.

4.1.2. 후금군

후금으로서는 명나라가 작정하고, 자신들을 섬멸하러 오는 셈이라 당연히 전군을 동원했다. 당시 막 조직된 팔기군은 한 기군(旗軍)에 7,500명의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8개 부대의 총수는 60,000명이었다. 각 부대는 누르하치 한 및 그 아들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후금군의 이점으로는 1590년대부터 계속된 여진 통일전쟁으로 거의 매년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30년에 걸친 무수한 실전 경험이 있었던데다가, 명군이 거쳐오는 지점은 바로 누르하치의 군대가 30년 동안 거의 매년 전투를 벌이던 곳이었다. 후금군은 전장을 손바닥 보듯이 정통했고, 특히 변덕이 심하며 황사바람이 불어오는 해빙기인 3월 만주의 날씨에도 익숙했다.

4.2. 명나라군의 실상

명군이 후금군을 얕본 것은 아니었고, 후금보다 적어도 2배의 병력을 동원한 만큼, 이 전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보낸 최고위급의 장수 5명(양호, 두송, 유정, 마림, 이여백)들도 모두 평판이 괜찮은 장수들이었다. 명나라군의 경우는 만력 3대정을 비롯하여 16세기 내내 내란 및 외침이 잦았기 때문에 실전 경험은 많았고, 장수들도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중기에 환관의 국정농단 및 사대부와 환관 사이의 권력투쟁, 여기에 만력제의 태업으로 국정이 마비되었고, 이 때문에 군제의 근간을 이루는 위소군 제도가 무너지면서, 명나라의 국방력 자체가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도 만력제가 명나라의 국정을 돌보지 않아 명군이 약해졌다고 디스할 정도였다.[35]

장부상으로는 명군이 3~400만 명의 병력을 자랑했지만, 위소군으로 편입된 병력의 상당수가 적은 보수와 형편없는 처우 등을 문제로 이탈하면서 명나라 말기의 군사력은 초기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군인들의 보급 문제를 둔전제로 해결하려 했는데, 원말 명초 당시 중원에 비옥한 황무지가 널려있었을 때는 둔전 운영만으로도 병졸들의 봉급을 제대로 지불할 수 있었지만, 이후 명나라의 국경이 확대되고 둔전 위치가 사막이나 밀림 등으로 이동되면서, 병사들이 둔전에서 충분한 소출을 올리지 못하고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는 일이 증가했다. 위소군은 둔전제를 기반으로 한 제도였고, 둔전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면서 위소군들의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해결책으로 군인들에게 은화를 지급하고, 군량을 구입하게 했지만 이는 군인들이 훈련 대신 부업에 열중하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명나라 조정의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도 다 털어봐야 장부상 병력의 1/3에 불과했으며,[36] 이들 또한 상당수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무늬만 병력인 상태였다.[37] 위소군에 등록된 인원 중 전투에 쓸모없는 노약자의 숫자도 많았다.

임진왜란때 조선 파병 당시에도 명군은 화력에 의존하는 한편, 소위 '가정'이라 불리는 군벌 휘하의 정예 사병들이 선두에 서고,[38] 후속 병력이 전투를 마무리짓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군대의 주력이 되어야 할 군벌 및 가정 집단은 만력 3대정으로 상당부분 소모된 상태였고, 명나라도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그렇게 강조한 것도 실상은 정예병이 하나라도 더 필요해서였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르후 대전에 출진한 명군은 전국에서 병력을 긁어모았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결코 정예병력이 아니었고 오합지졸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군대로 원래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귀신같은 여진족 출신에, 지난 30년 동안 실전으로 단련된 누르하치의 후금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르후 전투 직전의 명나라 군대가 엉망진창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명군에서 군령 위반자를 참수할 때 도부수가 내리친 칼날이 녹슬어서 목이 잘려지지 않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칼날을 내리쳐야 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무술 시범 현장에서 기마병이 가진 창의 날 부분이 녹슬어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명군의 장비 관리가 부실했고, 불량 무기가 많았으며 장비 점검 상태가 형편없었던 것이다.

4.3. 전장의 환경

넓은 개활지가 펼쳐진 심양 북서쪽과는 달리 전투가 벌어진 심양의 남동쪽은 압록강변의 조선 국경까지 산지가 많은 지형이었다. 게다가 당시 만주는 인구가 매우 적었고, 빽빽한 밀림으로 덮여 있었으며 냉대기후였기 때문에 양력 4월에도 간간히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도로는 포장된 것이 절대 아니었고, 인마가 다니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열악한 것이었으며, 가뜩이나 좋지 않은 도로 사정에 얼음이나 눈도 녹지 않거나 녹기 시작해 이동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즉, 눈이 그대로 있으면 얼음이 되어 미끄러지고, 녹기 시작하면 뻘밭이 되었다. 여기에다가 몽골고원에서 불어오는 봄철의 황사는 가끔씩 시계를 제로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까지 닿는 경로는 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부대의 이동은 일렬로만 가능했고, 이런 길 자체도 많지 않아 후금은 명나라의 대군이 이동하는 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복병에 당하기 딱 좋은 지형인데다가, 산길을 빠져나온 명군이 운좋게 분지에 닿아도 적을 맞아 진을 치는 것은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다. 후금은 이러한 지형상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명군이 산지를 빠져나와 진을 치는 도중이나 진을 치기도 전에 복병이나 기병을 이용한 돌격으로 섬멸했다.

4.4. 명군의 작전계획 및 그 문제점

최고 지휘관인 요동경략 양호가 짠 작전은 간단하게 설명해서 군대를 4개로 나누어 적진으로 쳐들어간 다음에, 누르하치의 본거지 코앞에서 합류하여 해당 근거지를 포위, 압박하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4갈래로 분산해서 진격한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도로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일렬로밖에 진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양호해 보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결국 최악의 작전이었다.
결국,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명군이 최악의 작전을 선택한 셈이었므로, 이 시점에서 이미 명군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된 셈이었고 실제로 총병 중 한 명인 유정은 이미 패배를 직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선 지휘관의 무능함과 대삽질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무능과 대삽질만 안 했어도 그렇게 큰 참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4.5. 서로군의 상황

4.5.1. 맹장 두송의 막무가내 전진

서로군의 지휘관이었던 두송은 원래 내몽골에 인접한 영하 사람으로, 1594년 참장의 계급에 오른 전형적인 맹장이었다. 그는 '검은 두송'이라는 뜻의 '두흑자'(杜黑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검은 갑주를 갖추고 황금빛 쌍 칼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여 섬서성 주변의 오랑캐[44]들과의 전투에서 백전백승하는 용맹을 떨쳐 이름이 높았다. 1600년 이후에는 내몽골 방면으로 전근되어 몽골족을 격파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여 승부를 내는 스타일이었다.

두송은 맹장답게 고지식하고 아첨과는 무관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평소에 자신의 몸에 생긴 칼자국을 자랑하며 다녔고, 공적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고생 등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즉 용맹하기만 한 장수라는 뜻인데, 뛰어난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돌격대장으로서는 몰라도, 대군을 이끌기에는 뭔가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맹장이기도 했지만, 지략으로도 보통내기가 아닌 누르하치였으니, 명나라로서는 상성이 썩 좋지 않은 대진이었다. 이런 두송이 전투의 첫단추를 잘못 끼우게 된다.

두송은 2월 말 먼저 무순에 도착하여 후금이 미리 비워버린 무방비의 무순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이후 일기가 안 좋아졌고, 눈까지 내리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원래였다면 음력 3월 1일에 4갈래 부대가 사르후에서 합류하기로 했지만 다른 부대들이 기한 내에 도착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두송만큼은 처음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인 심양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혼자서만 기한을 맞출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반면 보병으로 이루어진 다른 부대들은 현지에 도착하려면 10일 정도 걸려야 했다. 두송이 전략적인 고려를 했다면 다른 부대들이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으나, 그는 무순을 무혈로 함락시킨 것에 고무되어 의기양양해졌고, 다른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공을 세우고자 홀로 전진을 개시했다.

두송은 성급하게 군대를 재촉해서 혼하(渾河)를 건넜다. 워낙 물살이 센 강을 말을 타고 급하게 건너는 일인지라, 이 과정에서도 이미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강을 건넌 후에 두송은 사르후(薩爾滸)에 20,000명의 병사를 머물게 하고, 자신은 계번성(界藩城)[45]으로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누르하치가 계번에 성을 쌓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미 단독행위를 했는데, 또 그 단독행위를 한 부대를 다시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명군이 들은 정보대로라면 계번성은 15,000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키는 장병은 고작 호위 400여명 뿐이었다. 한번 들이닥치기만 하면 승리는 기정사실로, 두송이 공을 탐내고 무리하게 일을 벌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명군의 움직임은 후금군 휘하 정찰조의 활동으로 누르하치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즉 명군은 후금군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데 반해, 후금군은 명군 부대들이 분산되어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었다.

4.5.2. 서로군의 전멸(사르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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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누르하치는 즉시 8남인 홍타이지에게 팔기 중 2기를 내주어 계번성을 구원하도록 하고, 실질적인 주력이었던 6기의 45,000명을 스스로 이끌고, 20,000명의 병사가 대기하고 있었던 사르후의 명군 진영을 급습했다.

사르후에 남은 20,000명의 명군은 계번성으로 간 병력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대기하는 부대였고 주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총사령관도 자리를 비운데다가 대기군이라는 생각 탓에 방심하고 있었으며, 저녁이 되자 황사바람까지 불어닥쳤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20,000명의 명군은 횃불을 밝혔고, 덕분에 후금군 45,000명은 어두컴컴한 쪽에서 불길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치는 셈이 되었지만, 반면에 20,000명의 명군은 어둑어둑한 사방에서 화기를 사용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적군과 격전을 벌어야 했다.

이때 후금군이 화살을 쏘아 명군에 퍼붓기 시작했는데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라는 기록까지 있을 만큼, 후금군에게 있어 이 싸움은 너무나도 싱거운 일이었다. 후금군은 불꽃이 있는 쪽으로 그저 화살을 쏘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혼란스러운 명군에게 기병으로 돌진해서 격파를 하면 끝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명군도 나름 화살과 총포를 쏘아 이에 대응했지만, 급습을 당해 정신이 없는 판에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 사격을 하는 일은 절망만을 가져다 주었다.[46] 명군의 화살과 총포는 후금군을 맞추기는 커녕 모두 버드나무에 맞았기에 아무 소용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명군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조건에서 싸움을 벌였고, 결국 전멸했으며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계번성으로 향하던 두송 또한 후금의 매복군을 만나 고전하던 중에 이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순식간에 명군의 전 장병들에게 패전 소식이 확산되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누르하치는 기회를 놓칠세라 승리한 6기를 빠르게 움직여 두송 휘하의 군대 10,000명의 후방을 들이쳐서 맹공하기 시작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결국 후금군의 격렬한 공격으로 두송이 이끌던 10,000명의 명군까지 문자 그대로 전멸했다. 사령관 두송도 분전을 펼치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 이때 두송의 명군은 30,000명의 병력 중 제대로 살아남거나 도주한 병력이 극소수일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두송의 패잔병들은 이 충격적인 패배를 맛보고 인근의 쇼킨 산으로 달아나자, 누르하치는 3월 1일 밤이 지나가기 전까지 팔기군을 이끌고 추격해 쇼킨 산을 뒤지며 명군 패잔병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두송에게 승리를 거두고 패잔병들을 학살하던 바로 이때, 마림의 북로군이 상간하다에 도착했다.

4.6. 북로군의 상황(상간하다 전투)

한편, 북로군의 지휘자는 마림이었고, 두송군이 전멸한 날인 3월 1일 밤 상간하다(尚間崖)에 도착했다. 북로군의 경우, 본대는 지휘관 마림이 지휘했고 병력은 19,000여 명이었으며, 각각 5,000명의 병력을 가진 두 분대를 범종안(范宗顏)과 공연수(龔年遂)가 이끌고 있었다.

마림은 문신 출신이라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범종안은 두송과 같은 성향의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본대를 이끌고 있었던 마림과 사이가 나빠서 돕지 않았다고 한다.

마림도 밤에 두송의 참패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상간하다의 주둔지에서 밤새 거마작[47]을 둘러싸며 기습에 대비했고, 그 뒤에 대포를 배치하면서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세워 철저한 방비에 나섰다. 범종안과 공연수는 각각 본대의 양 측면에 배치되어 적이 다가오면 협공을 하려고 했다. 범종안은 상간하다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비분산에 주둔하여 한쪽이 공격을 받으면 호각의 세로 원조를 하려고 했다.

이들을 노리고 있는 후금군의 군세는 다이샨이 이끌고 있는 부대로서, 다이샨은 정홍기와 양홍기 두 부대, 총병력 15,000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다이샨은 일단 300명의 정찰부대를 파견해 적진을 파악했다.

3월 2일 아침, 마림이 구축한 북로군 진영이 예상보다 견고한 듯 하자, 다이샨은 동생 홍타이지가 이끄는 정백기 및 전날 두송군을 격파하고 패잔병을 살육하고 있었던 부친 누르하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두송 부대의 패잔병 2,000명을 1,000명으로 섬멸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 다이샨의 지원 요청이 왔기에 패잔병 추격을 그만두고, 직속부대를 인솔해 마림의 북로군과 다이샨군이 맞서고 있는 곳으로 왔다.

누르하치는 북로군과 맞서고 있는 지점에 도착하고 나서 세심하게 지리를 살폈다. 마림의 본진 동쪽에 산이 있었고, 명군 본진은 참호 및 거마작으로 층층히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뒤에 화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명군이 참호를 파고 화기로 수비를 했기에 후금군은 아예 병사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후 앞의 거마작을 치우게 했고, 뒤에 반이 대기하고 있다가 거마작이 없어지면 바로 돌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쪽의 산을 장악해, 위에서 내려치는 형태로 싸우기로 하고, 여기에서도 산지를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내보냈다. 마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 그 술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명군도 즉시 산으로 군대를 보냈고, 여기서 명군과 후금군이 대치했다. 이때 후금의 원병이 아직 모두 도착하지 않아 병력은 4,500명 정도 밖에 안되었고, 게다가 산에 오른 병력은 말에서 내려 모두 보병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병력수가 많은 명군이 우세를 보였다. 이때 누르하치의 주변에는 40~50명의 병력밖에 없었다.

바로 이 순간이 누르하치가 계획을 간파당해 사르후 전투에서 제일 고전한 순간이었다. 만약 5,000명의 분대를 거느리고 누르하치의 동쪽에 주둔했던 범종안이 이때 교전하고 있었던 마림의 본대를 지원했다면 누르하치는 양 측면에서 협공을 당해 크나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종안은 움직이지 않았고, 마림군만이 누르하치와 동쪽 산에서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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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누르하치의 병력이 위기에 처한 순간 이를 지켜보던 다이샨군이 그대로 돌격을 감행해 명군 진영으로 돌입하니 싸움은 혼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금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왜냐면 후금의 6기가 계속해서 싸움터로 달려와 후금군이 수적 우위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마림군이 약 19,000명이었는데, 후금군 6기의 총수는 45,000명이었으니 이제 마림군의 화력이 우위라고 해도, 근접전에서는 별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림의 본진은 후금의 철기병에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마림이 호각지세로 나누었던 범종안이 마림군이 우세에 있었을 때도 구경만 했을 뿐 도통 구해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마림군은 붕괴했고, 참패하고 말았다.

다만 이 싸움에 대해 범종안과 마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는 설이 정설이긴 하지만, 후금쪽 기록을 따를 경우 상황이 조금 다르다.

후금의 기록에 따르면 선전했다는 마림군은 이미 후금의 6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산에서 누르하치군에게 격파당해서 후퇴를 하고 있었고, 후금의 6기가 도착한 것은 마림의 본영에 누르하치가 돌격해 들어갔을 때였다. 범종안이 마림을 구원하려 나왔다면 오히려 누르하치와 6기에게 싸먹혔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선전했다곤 하지만 애초에 마림군은 채 2시간을 버티지 못했을만큼 전투 자체가 급박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산에서 마림군은 범종안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격파되어 자신들의 본영으로 후퇴했고, 범종안이 구원할 타이밍에는 이미 후금의 6기가 도착하면서 마림군 본영이 휩쓸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후금의 6기만 일방적으로 전장에 증원되자 혼전양상에서 버티고 있었던 마림의 본대도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말았으며, 마림은 간신히 몸만 빼서 도주했다. 마림을 꺾은 누르하치는 곧바로 범종안의 분대에 싸움을 걸었고, 범종안군은 전투마차로 길목을 막고 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이때는 본래 계획대로 일부 부대를 말에서 내려 투입하는 전략으로 범종안의 명군을 손쉽게 전멸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범종안은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북로군에는 명나라 편에 선 해서여진의 병력(예허부)도 많이 섞여 있었는데, 명군이 궤멸하는 것을 보고 싸우지 않은채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후금군은 북로군을 완전히 섬멸했고, 누르하치는 쉬지않고 다음 작전을 위해 부대를 재편성했는데, 목표는 유정의 동로군이었다.

한편 마림은 몇몇 부하들을 이끌고 겨우 자신의 주둔지였던 개원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48]

4.7. 동로군의 상황(푸차 전투)

동로군은 총병 유정이 이끌고 있었다. 유정은 주로 남방국가나 남방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여 두각을 나타낸 장수로, 1583년 미얀마 원정에서 공을 세우면서 조정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10년 후인 임진왜란때도 조선에 파견되어 평양성 전투에 참전해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패퇴시킨 적이 있었다. 이후 1600년에 중국 최서방의 구이저우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여기에도 파견되어 공을 세울 정도로 경험이 많았다. 개인적인 무용도 대단해서, 70kg이 넘는 120근의 칼을 자유자재로 써서 '유대도'(劉大刀)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런 실전 경험 및 개인적인 전투력뿐만 아니라 나름 병법에 능통해 지장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유정이 이끄는 병력의 수준이 너무나 형편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늦었다는 점에 있었다.

유정의 동로군은 주로 남방 지역에서 끌어모은 묘족병과 사천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당연히 이들이 만주같은 혹독한 기후를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기는 바닥이었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거의 패신에 홀린 듯한 언행을 보여주었는데,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유정과 함께 편제되어 있어 같이 싸웠기에 《조선왕조실록》에는 강홍립이 유정과 나눈 대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49] 이때 유정의 부대가 너무 형편없어서 조선군이 주력이었으며, 경략 양호는 도와줄 생각을 안했고 유정은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죽으려고 진군하는 막장 상황이었다. 즉 유정이 이끄는 명군 병력은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말 그대로 폐급이었다.

강홍립이 유정에게 휘하 병력이 얼마냐고 묻자 유정은
"서남 방면에서 지휘하던 병사들이 수만 명(= 사천+절강병)이었지만 이쪽은 수천 명밖에 안된다."
고 말하며
"내가 이끌던 사천 지역의 강병[50]을 증원 요청했는데 양호와 사이가 나빠 거절당했다. 아마 양호는 나와 사이가 나쁘니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 나야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으니 나는 죽기를 각오했지만, 내 아들들은 아직 국가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데리고 오지 않았다."
라며 오로지 조선군에만 의지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강홍립이
"대체 왜 이리 빨리 진군하냐?"
고 묻자,
양호가 천시를 얻었다며 군령이라는데 어쩌겠냐.
라고 유정이 대답했다. 심지어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명군 병력에 대포와 대기도[51] 없었던 데다가, 지형 상태도 좋지않았었다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유정 자신이 미얀마와 조선에서 산전수전 다겪은 장수인데도,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비관론에 젖어 있었으니 다른 명군 장졸들의 사기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때문에 광해군도 보고를 듣고는 패배를 예측하고, 조선의 군사들이 죽을 테고 패배하면 저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변란이 닥칠텐데 어쩌냐... 며 비밀리에 비변사에 전교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유정은 일단 대대급 병력 700여 명을 추려 직접 선봉에서 싸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렇게 후금군을 물리치며 나름 순조롭게 진군을 하고 있었는데, 3월 2일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赫圖阿拉) 근처 아부다리강(阿布達里岡)에 이르러서 소수의 후금군과 교전했다. 유정은 전초대를 보내 져주는 후금군에게 유인되어 적진 깊숙히 들어갔다.

하지만, 명군의 총사령관 양호는 3월 1일과 2일에 서로군과 북로군이 모두 전멸한 것을 뒤늦게 듣고, 이미 작전을 그르쳤음을 깨닫고는, 동로군의 유정과 남로군의 이여백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은 유정은 바로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금군의 철기병은 이미 서로군과 북로군을 섬멸한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로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후금의 추격 부대는 당시 누르하치의 후계자군으로 거론되던 아들들인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이끌고 있을 정도의 후금군 내에서도 정예 부대였다. 이들 부대에는 원래 다이샨이 거느린 정홍기 및 양홍기와 홍타이지가 거느린 정백기 외에도, 누르하치의 직속 병력인 정황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8기 중 4기(약 30,000명)가 동로군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3월 4일 후금 기병은 푸차 평원에서 3면으로 조명 연합군을 포위해 조여왔고, 조명연합군은 앞서 녹각을 버렸기 때문에 긴급방어선을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유정은 버티지 못하고 자결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폭약과 장작을 쌓은 후, 휘하 장수들과 함께 자폭했다고 한다. 후금 측 기록에 의하면 분전 중 후금 군사들의 검에 의해 얼굴이 잘렸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분전하다가 결국 후금 군사들의 화살을 맞고 장렬하게 죽었다고 나와 있다.

4.8. 조선군의 상황

조선군은 명나라의 동로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실제 병력수는 유정이 거느린 동로군 본대보다 많았던 듯 하지만, 어쨌든 유정의 명령을 받았다. 일단 여기서는 후금측에서 설명하는 동로군의 전멸 과정과 별개로 조선의 사료인 《책중일록》을 근거로 조선군의 움직임을 서술한다.

조선측과 중국(후금)측 사료의 설명이 다른데, 3월 2일에 500명 가량의 후금군 기병 전초대와 동로군의 교전이 있었고, 이때 동로군이 승전했다는 것은 양측의 설명이 공통적이다. 다만 이 교전 장소를 후금은 아부다리강, 조선은 심하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 사건도 양쪽의 설명이 다르다. 후금측 사료에서는 총사령관 양호의 명령을 받고 동로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푸차 평원으로 왔고, 조선측 사료에서는 그 승전에 고무되어 북쪽으로 계속 진격해 푸차 평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3월 4일 푸차에서 후금의 기병 주력을 만나 동로군이 전멸했다는 사실은 양측의 설명이 일치한다. 아부다리강이 푸차보다 더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후금의 설명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4.8.1. 행군 및 군량보급의 난관

한양에서 출정할 때 조정에서는 병사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렸다. 날은 춥고 길은 먼데 면포로 한기를 막고 흰쌀로 주린 배를 채워 줄 생각을 못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힘없고 가난한 나라였기에 줄 수 있는게 없었다. 주지는 못해도 하나있는 목숨만은 뺏지 말아야 한다....(중략)....출정 전에 장졸들을 부풀리는 건 군문에서는 늘상 있는 일. 허나 그 숫자는 5배 이상 차이가 났다. 병사들의 예기(銳氣)만 살아 있어도 이리 걱정하진 않았을 거다. 이럴 때일수록 병력을 모아야 하는데 4개의 길로 10만이 아니, 10만도 안되는 병력이 움직인다. 불안하다.
진주박물관에서 만든 단편영화 <사르후>에 나온 김응하의 나레이션

조선군은 1619년 1월에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편제상 명나라 총병 유정이 거느리는 동로군 휘하에 편입되었다. 일단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으나, 이때는 한겨울이었고, 음력 3월(양력으로는 4월)이 되었어도 아직 가시지 않은 영하의 추위 때문에 조선군의 행군은 매우 고통스러웠다.[52] 이렇게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군의 어려움을 더 가중시킨 것은 군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행군 내내 계속 굶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군량은 전진하는 병사의 후위에 따라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만주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계속 끊겼으며, 게다가 후금의 기병이 치고 빠지는 덕에 그런 수송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619년 3월 1일, 군량 조달의 총 책임자였던 평안도 관찰사 박엽(朴燁, 1570 ~ 1623)과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 윤수겸(尹守謙, 1573 ~ 1624)의 태업 때문에 처음으로 보급이 도착했다.[53] 그 전에는 그냥 굶거나 명군에게 식량을 빌렸을 정도로 보급 상태가 막장이었다. 심지어 도착한 군량도 매우 모자랐다.

4.8.2. 심하 전투

3월 2일 정오, 이런 막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행군을 계속하여 조선군은 심하(深河)에 도착했는데 후금군의 선봉 500기가 조선군을 건드려 보았으나, 빗발치는 조선군의 사격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이를 심하 전투라고 한다.[54]

이 심하 전투는 사실 후금군이 조선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하거나 혹은 적을 유인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으며, 적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정찰대급 병력을 조선군이 막아내서 서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것은 본격적인 전투라기보다는 전초전에 가까웠다.

이런 승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상황은 매우 나빴다. 3월 3일, 보급 상태가 막장인 걸 보다 못한 도원수 강홍립의 거듭된 요청에 총병 유정은 행군 중지를 허락했다. 사실 이것은 유정이 조선군의 사정을 봐준 것이 아니라, 아끼던 부장 한 명이 심하 전투에서 전사하여 그의 시신을 수색하기 위해 멈춘 탓이었다. 어쨌든 행군을 하루 늦추는 데 성공한 강홍립은 근처의 만주족 마을을 약탈하여 숨겨둔 식량을 수색해 죽을 끓인 후 병사들에게 먹였다.

위의 기술은 조선측 기록인 《책중일록》의 서술이고, 후금측 기록에는 동로군이 행군을 멈춘 것이 아니라, 북로군과 서로군이 섬멸된 것을 알게 된 경략 양호의 긴급 명령을 받고 후퇴를 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4.8.3. 푸차 전투: 동로군의 궤멸

3월 4일 오전 8시(진시), 조선군은 행군을 재개해 수십 리를 진군한 후 푸차(만주어, 한자로는 富車 또는 富察) 들판에 도달했다.[55] 이 푸차는 현재의 본계시 환인 만족자치현 화래진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이샨은 다시 군대를 움직여 곧바로 조명 연합군을 기습했다. 이를 푸차 전투라고 한다.
적의 기병이 일제히 돌진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 했다. 대포와 조총을 한 번 쏜 뒤에 다시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우리 진영에 들어와 있었다,…(중략)…중영에서 좌•우 두 군영까지의 거리는 1,000 걸음도 넘지 않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달려가 구해줄 겨를조차 없었다. 석양 아래 쏘는 화살이 비와 같고, 철마가 나아갔다 물러났다는 모습만 보일뿐 흐릿하여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56]
이민환 《책중일록》[57]
이때 명나라의 해개도(海蓋道,? ~ ?)와 강응건(康應乾, 1572 ~ ?)이 이끄는 보병이 조선군과 함께 부찰(富察) 들판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병사들은 낭선과 장창을 들고, 등갑과 피갑을 입고 있었다. 조선병은 종이로 된 갑옷을 입고, 투구는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었으며, 화기를 층층이 겹쳐서 (진을 이루어) 기다렸다.…(중략)… 명병과 조선병이 적에게 달려나가 화기를 발사했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일어 돌과 모래가 날렸는데, 연기와 먼지가 거꾸로 적 진영으로 몰아쳐 어둠에 쌓였다. 우리(후금) 군대가 이를 틈타 비 오듯 화살을 쏘아 크게 깨뜨려 적의 군대 20,000명이 섬멸되었다.[원문]
《황청개국방략》[59]

조선군은 명군과 합류하여, 조총수들을 통해 명군을 지원한다는 초기 방침을 지키기 위해 산에 진영을 치려고 진군했으나, 유정군을 비롯한 명군이 상상 이상으로 빠른 시간내에 격파당했기에, 후금군이 들이닥칠 징후를 포착한 조선군은 행군을 멈추고 푸차 들판에서 급하게 진지를 꾸렸다. 평지에서 기병 위주의 후금군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불운인데, 후퇴하는 명군의 패잔병들이 조선군의 진지로 피신해오면서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조선의 기록에는 군기를 망칠 것을 우려하여 명군 패잔병들의 합류를 거절했다고 되어 있는데, 후금(청)의 기록에 따르면 명군의 소수 패잔병들이 조선군의 편제와는 별개로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정은 자신이 지휘하는 동로군이 궤멸되자 끝까지 항거하다가 전사 혹은 자결했고, 지휘관이 없어진 명군 병사들은 후금군의 기병에게 살육당했다.

4.8.4. 조선군 좌•우영의 궤멸

유정의 명군을 궤멸시킨 후금군은 재빠르게 명군의 후위에 있었던 조선군으로 육박해왔고, 우영의 조선군은 진을 미처 다 치기도 전에 공격을 받아 전멸당했다. 좌영의 조선군은 말을 막는 장애물을 설치해놨었으나 후금군은 돌격하기 직전에 명군에게서 빼앗은 말들을 몰아보내 장애물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수천 기에서 10,000기에 달하는 후금군 기병이 무방비 상태에 놓인 좌영을 급습했는데 좌영의 조선군 포수들이 거리를 재면서 사격전을 벌였으나 하필이면 엄청난 흙먼지와 모래 바람이 불어 닥쳤고, 결국 풀이 아직 나지 않았을 때인 3~4월에 몽골고원에서 봄철마다 발생하는 황사[60]가 불어서 조총과 화포가 무력화되는 순간, 양익을 이룬 후금군 기병대가 덮쳐들었다.[61]

좌영장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는 혼자 남게 되자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들고 싸웠는데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웠다. 그러다가 칼이 부러지자 이번에는 칼자루만 들고 버드나무 아래에 지쳐 쓰러져 전사했다. 이때 김응하는 이미 몸에 수십 개의 화살과 창을 맞은 상태였으며 가슴팍을 창이 관통하기도 했었지만 활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래서 후금군도 그의 분전에 감복하여 김응하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고, '의류장군'(依柳將軍) 혹은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김응하는 죽기 직전 전포를 찢어 전사일자(戰死日字)를 혈서로 써서 그가 타고 온 말의 목에 맨 뒤
"집(강원도 철원)에 돌아가서 전하라."
하고 죽었는데, 그 말은 3일 만에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동생인 김응해(金應海)는 그 전포를 매장해 형 김응하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데 전포를 전달한 말은 그 뒤 여물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사람들은 그 말이 의리를 안다고 해서 관을 만들어 매장해 주었다고 한다.

좌영의 전투 양상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종군사 이민환의 《건주견문록》(《책중일록》+《건주문견록》)의 기록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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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좌영에서 몇 번의 화포 사격으로 적을 격퇴했지만, 갑자기 모래가 섞인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불이 꺼지고, 그 바람 사이로 후금군이 달려와 척살했다.'
고 되어 있으며, 《책중일록》에는
'기병이 계속 모여들어 양익을 이루다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진중 안으로 돌파했다.'
고 되어 있다. 두 사료를 절충하면 그럴 듯한 해석이 나온다. 후금군이 적정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전열을 짰고, 모래바람이 불자 일점 돌파를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의 화포가 100보 이상에서는 명중이 힘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병 돌격을 허용할 만한 거리이다. 또 다른 참전국이자 당사자인 후금(청)의 기록에도 돌격은 한 번이었으며, 지갑(紙甲)[62]과 화포로 무장한 솔호(조선)와의 전투에서 큰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돌격했다는 언급이 있다.

애당초 조선군은 조총병이 대다수였고, 본래 전략은 명군이 조선군의 화력 지원을 받는 대신 엄호해 주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군의 참전 규모는 18,000명 정도로 전체 원정군의 1/5~1/6 정도였지만, 이것은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국력을 모두 짜서 내보낸 것으로, 당시 1,000만 명이 안되었던 조선의 인구보다 16~20배 정도 많았던 명나라가 100,000명을 동원한 것을 봤을 때, 조선으로서는 확실히 무리한 것이었다.[63]

이 병력들조차, 기병으로 이루어진 연영 5,000명의 병력[64]은 보급선을 담당하느라 후방에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원정군의 전투부대는 13,000여 명 정도였다. 게다가 보급 책임자들이었던 박엽과 윤수겸의 태업 때문에 전투부대는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2일 연속으로 굶은 상태였다. 본래 연영은 500명씩 10개 조로 나뉘어 보급선을 지키면서 후방 정찰과 군량 조달을 전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위에서부터 지시가 내려오지 않고, 방치가 계속되자 알아서 와해되어 버렸다고 한다.

결국 명나라의 동로군이 후금군의 공격으로 허무하게 와해된 순간부터 아무 의미없는 작전이 된 셈이었다. 원래 산으로 올라가서 방어를 한다는 방침이 세워져 있었지만 그런 지형에 도착하기도 전에 참전 병력 전체에 필적하는 머릿수의 후금군 기병에게 기습을 당한터라 우영은 진을 치기도 전에 궤멸당했고, 좌영은 좌영장 김응하까지 전사해가며 분전했으나 역시 궤멸당했다. 좌•우영이 전멸하자 표하군과 중영은 산에 올라가 화포를 비롯한 수단으로 어떻게든 방어에 성공했지만, 좌•우영이 전멸당한 시점에서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4.8.5. 강홍립의 항복

강홍립과 김경서는 중영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목책으로 일단 방어망을 구축했으나, 후금군은 산을 겹겹히 포위하고 퇴로를 막았다. 강홍립 등은 화약을 터트려 자결하려고 했지만, 후금에서는 조선 진영에 사절을 보냈고, 김경서가 이에 응해 역관을 대동하고 후금군의 진영으로 갔다. 후금군의 장수는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즉 누르하치의 차남이었고,[65] 다이샨은 김경서에게 포로의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김경서는 다이샨의 진영에서 하루 머물렀다가 다음날 강홍립에게 가서 다이샨의 뜻을 전했고, 강홍립은 다이샨을 만나
"명나라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에 다이샨은 수긍했으며, 또다시 포로의 안전보장을 확인하여 결국 항복했다.[66]

조선군 장령들과 포로들은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후금측에 내주고 무장해제한 후 수도인 허투알라로 이송되었다.

조선군 진영측에는 명나라 측 패잔병도 섞여 있었으나, 후금은 명군과 조선군의 포로를 분리하여, 명군 포로는 학살했다. 조선군 진영에 파견되어 연락장교를 하던 명나라 유격 교일기는 강홍립이 명군 포로들은 학살되니 조선군으로 가장해 계속 조선군과 함께 행동하라고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로써 사르후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고, 남서쪽으로부터 허투알라로 향하던 남로군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4.9. 남로군의 퇴각

이여백이 지휘하는 남로군은 진군하던 중에 경략 양호의 후퇴 명령을 받았고, 곧 이어 동로군을 지휘하는 유정의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시간에 맞춰 구원할 수 없었다. 이여백은 양호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주둔지인 요양까지 후퇴했으나, 후퇴 이후 북경 조정에서 본인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고 하자 처벌이 무서워 이듬해 자결했다.

5. 결과

5.1. 후금의 만주-내몽골 제패

사르후 전투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했다는 점에서 누르하치와 후금에게 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전략적으로 본다면 누르하치측이 병법의 정석을 우직하게 지킨데 반해서, 명군은 그 반대로 행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불보듯 뻔한 결과였다. 즉, 후금의 승리는 양측 지휘부의 작전 능력에서 후금이 월등히 우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면, 후금은 자신에게 익숙한 기후와 지리를 유리하게 이용했고, 정찰을 이용해 명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기병이 주력인 팔기군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며 기동력으로 거의 대부분의 접전 지역에서 숫자의 우위를 확보했다. 반면에 명군은 적은 물론 자신의 사정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지도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작전을 짜서 패배를 기정사실화한 것도 모자라, 일선 지휘에서도 열세를 메꿀 찬스가 있었는데도 장수들의 연락 두절, 돌출 행동, 서로간의 불화 등이 겹쳐 참패했다.

후금은 이 전투에서 본거지인 만주의 지리와 기후를 100% 활용했다. 명군이 포위하려던 허투알라의 숲에 숨어 신출귀몰하면서 적의 부대가 기병이 돌격하기 좋은 개활지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흙먼지를 동반한 폭풍이 불 때, 명군의 분산된 갈래를 급습, 섬멸하고, 이후 다시 이동하여 다른 갈래의 부대를 치는 전법을 썼다. 후금이 공세를 펼 때마다 모래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하늘마저도 누르하치의 편을 들었던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는 매년 이맘때, (전투가 벌어진 음력 3월, 즉, 양력으로 4월) 몽골 고원에서 동남쪽으로 부는 황사 바람이었을 뿐이다. 후금의 공세가 있을 때마다 황사가 불었던 것이 아니라, 황사가 불 때마다 후금의 공세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게 더 맞다. 누르하치는 매년 이 시기에 황사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시기를 틈타 적에게 공세를 폈으며, 그때마다 시계 확보가 안된 명나라 군대는 참패를 했다. 결과는 해당 지역의 기후를 알고 이를 이용한 후금과 이를 모르고 공세를 감행한 명나라의 차이였으며, 즉 운이 아니라 실력 차이였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와 조선군의 절대 다수가 제대로 냉병기를 갖추지 못한 채, 화약 병기로만 무장을 하고 있었던 점도 패인으로 지목된다. 아직 조총과 같은 화약병기의 집단 전투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동아시아의 전술로는, 수만 기의 기병을 상대하기가 무리였다는 것이다. 설령 능통한 조총 방진을 짰다고 해도, 평지에서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후금군의 수천 철기를 막아내려면 힘들었을 것이다.[67]

한편, 후금에 편입되지 않았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는 이후 추격해 온 후금군에게 패배했고, 반누르하치파 족장이었던 긴타이시와 부양구는 참수되었으며, 부족은 팔기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후금은 전 여진족을 통합하고,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싸움의 결과로 후금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자신들의 세력권을 굳힐 수 있었고, 추가로 원응태, 웅정필, 왕화정 등이 후금군에게 당하면서 누르하치는 자신의 위치를 굳게 다질 수가 있었다. 후금군의 기세는 파도와 같았고, 이는 원숭환영원성 전투에서 이를 저지해낼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5.2. 명나라: 멸망의 시작

명나라는 사르후 전투의 패전이 재난이었는데 이 전투에서 장수만 해도 314명, 병사가 45,878명이나 전사했고 군마를 28,400필이나 잃어 말그대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많은 정예 병력과 장수들, 군마를 상실한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해 개원, 선양, 요양을 내주고 만다.

더 안좋은 것은 모조리 짜낸 병력을 헛되이 날림으로서 국방력에 큰 구멍을 냈다는 점이다. 즉, 사르후 전투 직후 중국 전역에서 농민반란이 발발하여 명나라는 다시 군을 재건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노력하지만, 사르후 전투 당시만한 병력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모을 수 없었다. 즉 사르후 전투가 명나라의 운명을 결판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나라측 장수들은 전사하거나 혹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옥에 갇혔다. 4갈래의 지휘관들 중에서 두송과 유정은 전사하고, 마림은 주둔지로 되돌아 가긴 했으나, 추격해온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여백은 자살했고 총사령관 양호는 해임당한 후 감옥에 갇혔지만 숭정제가 즉위한 해에 처형당했다.

명나라는 더이상 후금을 막을 수 없어서 몇 년 안가 4로군이 출발했던 기지인 개원, 단동, 심양, 요양이 모두 후금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명나라는 만주 전역 뿐만 아니라 내몽골의 통제력까지 모두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산해관 안으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다.

5.3. 조선에 준 영향

조선의 타격도 매우 컸다. 왜란 이후 야심차게 양성한 조총병 수천 명 및 조총 수천 정이 이 전투로 증발했다. 왜란 이후 조선의 인구도 격감했고, 수공업과 경제도 별로 좋지 않았던 상황에서 이런 조총병 및 조총을 날려먹은 것은 조선의 국방력에 큰 타격이 되었다. 때문에 광해군은 이후 명나라의 원병 요청(주로 조총병)이 거듭되지만 파병을 거부했다. 조선 조총병은 명•청 양국에 인상적이었든지, 1637년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군을 지원해 명군을 쳤지만, 이때도 항상 조총병을 파병했다. 조선군이 청군측으로 파병되어 명군과 싸운 송산 전투에서 명군은 조선 조총수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이때 명군을 지휘했다가 청군에 투항한 홍승주는 이에 원한을 품었는지, 조선측이 공식적으로 국교를 끊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자신들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청군에 자백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전장에 투입된 조선병 13,000명 중 30% 정도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 생활 중 처형되었다. 7,000여 명이 전사하고(9,000여 명 궤멸) 4,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 중 900여 명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500여 명은 포로 신분으로 범죄를 저질러[68] 학살당했다.[69] 결국 2,700여 명만이 생환할 수 있었다(이민환, 《책중일록》). 훗날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군의 붕괴와 함께 이후 후금군 및 청군이 쉽게 조선의 북방을 유린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조선군의 강홍립 및 고위 장수 10여 명은 허투알라 성내에서 비교적 후대를 받으며 지냈고, 학살되지 않은 일반 사졸들은 성 밖에서 노역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빛을 발해 강홍립과 김경서를 제외한 포로들은 1년 후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청나라측은 강홍립을 석방하지 않은 이유를 몸값을 안내기 때문이라고 조선 사신에게 말했는데, 실제로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생각해서 억류하는 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강홍립은 누르하치의 포로라기보다는 객장의 대접을 받았고, 후금측의 주선으로 허투알라에서 첩까지 얻어 생활했다. 이렇게 귀환했던 포로 가운데 한 명이었던 종사관 이민환은 《책중일록》을 남겨 후대인들로 하여금 당시 조선군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했다.[70]

어쨌건 광해군은 이후, 이 전투의 참전을 통해 재조지은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판단한 뒤 명나라에 거리를 두며 후금과 명나라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중립외교를 시행했다. 다만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자들이 지배하던 조정은 계속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방해했고,[71] 친명배금 정책을 계속 주장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강홍립이 항복한 것을 두고 명나라가 조선을 의심할까 걱정했지만, 실제로 명나라는 의심은 커녕, 수천 명이 전사한 조선이 후금에 붙을까봐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희종 천계제는 조선의 전사자들 유가족을 위문한다는 명분으로 은자 수만 냥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르후 전투가 조선 사대부들의 화이관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는데, 그들은 후금의 실력으로 명나라가 참패했음에도 후금의 실체를 보기보다는 명나라가 운이 안좋은 것 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사르후 전투에서 보여준 명나라의 한심함과 후금의 막강한 군사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막연한 당위론적인 사고로 명나라가 최후에는 만주를 다시 평정할 것이니 후금에 유화책을 쓰면 나중에 명나라에 책임을 추궁당할지도 모르니까 후금에 계속 적대정책을 펼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과대평가 및 후금에 대한 과소평가는 이후에 정묘호란병자호란의 두 참화를 부르고 말았다.

5.4. 몽골에 준 영향

북원 이후 몽골 부족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몽골은 부족별로 명나라에 복속하거나 혹은 명나라와 대립하고 있었지만, 몽골 제국 시절처럼 통합된 민족국가는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몽골 민족은 지역별로 나뉘어 내몽골은 차하르부, 외몽골은 할하부, 서쪽은 오이라트[72]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여진족처럼 몽골족도 이 대부족 아래 여러 하부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다. 특히 내몽골에 위치한 차하르부의 여러 부족들은 누르하치가 주도한 여진 통일 전쟁에 개입하여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건주여진이 이름을 바꾼 후금의 세력이 점점 세지고, 심지어는 사르후에서 명나라까지 격파하자, 내몽골의 여러 부족들은 사르후 전투 직후부터 후금에 복속하기 시작했다. 몽골은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집착하던 조선과는 달리 단순히 힘의 논리를 추종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흐름이 후금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누르하치 시절부터 보르지긴씨의 일족인 오바타이지와 같은 내몽골 부족장들은 명나라와 북원[73]을 버리고 후금에 충성하여 복속하기 시작했고, 사르후 전투 10여년후 누르하치를 이은 홍타이지는 원숭환과 휴전을 맺은 기간 동안 이름뿐인 북원을 멸망시키기 위해 내몽골에 친정하여 링단 칸의 아들 에제이 칸에게 대원전국옥새를 선양 받고 모든 내몽골 부족들의 충성을 맹세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 용골대는 이렇게 후금에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 추장들을 조선에 데리고 와서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하지만,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은 몽골과는 달리 감히 오랑캐 후금이 황제를 참칭한다며 척화론이 대세가 되었고 결국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산해관에 입관할 때까지 후금은 내몽골 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켰고, 태종 홍타이지는 대원 전국옥새까지 손에 넣어서 청나라 황제는 몽골의 대칸도 겸임하게 되었다. 내몽골의 부족장들은 청나라에서 우대를 받아 귀족 계급으로 활동했다. 다만 외몽골은 고종 건륭제 시절이 되어서야 복속했고 오이라트, 특히 준가르는 청나라를 거부하여 명나라 시절처럼 중국 변경을 어지럽히다가, 건륭제의 대규모 토벌 및 대량 학살, 전염병으로 인해 전멸했다.

이렇게 청나라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내몽골 부족들은 20세기 외몽골 부족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몽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도 중국에 남았다.

6. 강홍립 밀지설

광해군이 출병 전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형세를 보고 후금이 유리하면 항복하게 했다는 밀지설이 있다. 당대에는 밀지설이 널리 퍼져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사실로 여겼다. 그 증거로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가 내린 광해군의 폐위 교서에서 이를 지적했다. 게다가 강홍립이 푸차 전투 전에 미리 역관을 후금 진영으로 보내 조선의 상황을 설명했다고 사서에 설명되어 있는데, 조선 왕조의 특성상 강홍립이 혼자서 이런 짓을 할리는 만무하니, 광해군의 뜻에 따라 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강홍립의 패전 이후에도 조정 관료들은 강홍립의 가솔들을 모두 옥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한사코 물리쳤고, 누르하치도 포로인 강홍립을 석방하지는 않았지만 꽤 후대했다. 또한, 사르후 전투의 조선군 참전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정 반대로 반박하는 사례이기에 광해군의 중상정책을 고평가하는 근래의 한국 사학계에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밀고 있다.[74]

사르후 전투 이후 포로가 된 강홍립은
"조선이 누르하치와 적대할 뜻이 없음을 설명했다."
는 식으로 광해군에게 장계를 올렸다. 이와 함께 온 누르하치의 서신도
"조선과 우리(후금)는 원수진 바가 없으니 이후에도 잘 지내기 바란다."
는 식으로 이야기했고(#광해군 11년 4월 2일), 광해군은 조정 신료들이 이를 오만방자하다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에게 좋은 말로 답신을 써보내라는 교지를 내렸다.(#광해군 11년 4월 9일)

반면 거의 9000명에 가까운 병사를 잃을 때까지 항전했다는 것에서 광해군의 밀지같은건 없고, 패색이 짙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것이라는 연구 또한 있으며 이쪽이 현재로서는 주류에 더 가까운 해석이다. 즉, 밀지설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이것은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했을 뿐으로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는 설이 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75]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계내의 대표적인 전쟁사학자인 임용한 교수 또한 광해군 밀지설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었다.
강홍립 밀지론은 역사학자들까지도 속여넘겨서 1970~80년대까지도 학계에서 정설처럼 돌아다녔다.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루머가 거꾸로 광해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는 게 다만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광해군을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 가짜 뉴스를 굳게 믿는다. 정치 투쟁에서 가짜 뉴스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정치인들 사이에 오가는 가짜 뉴스를 우리는 음모와 모략이라고 한다. 이건 광해군만의 비극이자 불운이었을까? 아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군주들이 음모론의 주인공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음모론에 쓰러졌을까? 그것은 그의 체제가 그만큼 불안정했고, 상대를 포용하는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조현영 지음) - p. 53. 사르후 전투>

무엇보다 이러한 밀지설은 해당 주장의 유일한 근거가 인조반정 당시 서인측의 반정 명분으로 끌어들였던것이며 편향성으로 지적받는 광해군일기조차도 항복하라는 밀지를 교서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76] 이후 일본 제국의 역사학자 다가와 고조가 주장했던 내용, 곧 식민사관이 근원으로 주류 학계에서는 사실이 아닌것으로 판단한다.# 더해 항복을 위한다면서 1만의 정예 포수를 차출한 점, 명군이 전멸한 이후에도 지속된 조선군의 항전과 강홍립의 자결시도, 조선군의 매우 큰 피해등 정황적으로도 밀지설을 사실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해당 밀지설은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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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1875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1] 초명은 김응서(金應瑞).[2] 한참 후인 1648년 당시 만주족 장정이 5만 5천 정도인데 1619년에 기병 6만을 동원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3] 만문노당[4] 심하 전역(深河戰役, 1619) 당시 조선 ‘도요군'(渡遼軍)의 편제와 규모[5] 광해군 11년, 명 만력 47년, 후금 천명 4년[6] 과거 오이라트에게는 토목의 변으로 영종 정통제가 포로로 잡혔고, 세종 가정제의 치세때 몽골 튀메드부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포위당한 적이 있었다.(경술의 변)[7] 지방 군사 지휘 조직의 총사령관이며, 정원은 1명[8] 지금의 푸순[9] 농장의 조그만 집을 말한다.[10] 생몰은 1554 ~ 1622, 조선의 무관 출신으로 당시 조정의 명령을 받고 여진족을 정탐한 인물이다. 꽤 소상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때 누르하치에게 절을 했다는 이유+임진왜란 중 전선을 이탈했다는 죄목이 더해져(정확하게는 오배삼고두, 즉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숙이는 것.) 탄핵되었다.[11] 이민환은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해 강홍립과 함께 후금군에 붙잡힌 인물이다. 《건주견문록》은 이민환이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한 일을 시작으로 사르후 전투의 과정, 이후 17개월간 포로가 되어 목책(木柵) 속에 갇혀 지내다가 1620년에 조선으로 귀환할 때까지 견문한 일들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다. 생몰은 1573 ~ 1649[12] 정확히는 몽골 튀메드부의 싱언 다르한이 예허부에 들어와서 스스로 예허나라씨를 참칭했고, 이때부터 몽골족과 여진족이 혼혈된 반몽골 반여진부족이 되었다.[13] 누르하치의 장인이기도 하다.[14] 누르하치의 외조부[15] 즉 누르하치의 사촌 누이[16] 같은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서주(徐州)군 출신이며, 생몰연월과 직위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명사》의 기록에는 경진년 문과회시(文科會試)에 합격했다는 기록만 있다.[17] 馳啓, 말을 달려와서 보고함[18] 지금의 함경북도 종성군 삼봉 지역에 있는 산으로, 조선 전기부터 오갈암 봉수가 있었다.[19] 게다가 홍타이지는 아버지인 누르하치보다 호전적이었으며 팽창주의 성향이 매우 강해, 농경문화권 정복을 위한 정책을 많이 폈음을 감안해야 한다.[20] 이때 명나라의 인구는 1억 6,000만 명이나 되었다.[21] 명나라 군대의 계급은 내림차순으로 제독(도독) > 총병 > 부장 > 참장 > 유격 > 도사 > 수비 > 천총 > 파총이다. 이중 도독은 전역사령관 정도가 된다. 이여송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의 계급이 제독이었다.[22] 용맹한 맹장이었지만 성질이 급하고 천성이 사나우며 욕심이 많았는데, 특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기와 갑주를 부수어 미치광이 두(杜)로 불렸다고 한다.[23] 이런 류의 전투 중 유명한 것은 파르살루스 전투이다.[24]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군인 조승훈이여송 등의 군대는 모두 요동군 소속이었다.[25] 양호는 1555년생으로, 당시에는 64세였으며, 명나라군 최고 원로급이었다. 그러니까 실전과 행정 경험도 있는 문무겸비의 최고참급 장수였고, 그리하여 명나라의 국운을 건 원정에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26] 역대 명나라의 병부상서들은 모두 이 자리를 거쳤다.[27] 이성량의 아들이며, 이여송의 동생이다. 그리고 후금에 귀순한 이영방은 그의 아들이었다.[28] 각 방면 부대의 병력수 최대치는 《청사고》의 기록인데, 청나라 측이 과장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는 반정도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29] 1냥(37g)의 가치는 2023년 가치로 약 40,000원 정도 된다. 즉 4억원을 주는 셈인데,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은의 가치는 훨씬 더 높았다.[30] 경략은 명나라에서 대규모 대외원정이 있을 때 임시로 부여하는 총사령관급이었다.[31] 총병은 9단계의 명나라 군대 계급에서 2번째로 높은 계급이었다. 현대로 치면 군단장급 정도 된다.[32] 강홍립이 지휘하는 조선군 병력은 13,000명 정도여서, 유정이 거느린 명나라 군대보다 많았지만, 조선군은 유정의 지휘를 받았다.[33] 누르하치의 적장자였던 추옌의 맞아들로 누르하치의 적손이었다. 추연은 보위를 빨리 잇기 위해 누르하치를 무속으로 저주했다가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졌지만, 적손 두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누르하치의 재위 시절에는 지위를 유지했다. 누르하치 사후 양백기는 누르하치의 12남인 도르곤과 15남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34] 아민은 역모 혐의로 갇혀 옥사한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의 아들이었지만, 백부인 누르하치의 아들을 제치고 자기 부대를 이끈 걸로 봐서는 그가 얼마나 재주가 뛰어났고 누르하치의 신임을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홍타이지 치하에서 토사구팽된다.[35] (출처)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했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 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時皇帝已倦勤, 閹豎用事, 軍興不繼, 又諸軍輕進失利, 都督自縊死)."- 조증(詔贈) 요동백(遼東伯) 김 장군(金將軍) 묘비(廟碑)[36] 마르틴 데 라다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조정에 있는 장부상의 병력은 400만여 명에 군마 78만 필이었다고 한다.[37] 당시 장수들은 위소군 병졸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훈련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유생들의 한탄섞인 기록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이다.[38] 이들은 여타 위소군에 속한 병사들에 비해 4~5배 정도에 달하는 봉급을 받았다. 당연히 박봉에 시달리는 위소군들의 사기가 더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39] 인구에서 반농반목인 후금이 명보다 열세이기에 후금의 군대는 많은 수가 아니었다. 몽골의 수십만 대군이 너무 임팩트가 세서 그렇지, 원래는 수만 명 정도로 유목민들이 인력을 심각하게 쥐어짜서 무리한 것이었다. 명군이 주장하는 후금군 60,000명도 실제로는 대부분이 비전투 병력이자 보조인 한족 노예인 '쿠툴러'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40] 양호는 이미 임진왜란에서도 일본군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지휘관이라는 혹평을 들었었다. 근본적으로 총사령관에 맞지 않는 인사였던 것이다.[41] 실제로 멀티코어 프로그래밍의 장점과 단점을 어느 정도 대입할 수 있다. 연산량이 분산되기 때문에 많은 연산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 연산이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나 할당 문제로 연산이 한쪽에 몰빵되는 경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는 보급로가 분산되지만, 위에 말한 지형 불균형이나 적 공격 가능성 등등이 해당된다.[42] 그리고 역사적으로 대국이 소국을 짓밟지 않고 그냥 두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 보급으로 인한 분산문제였다. 분산해서 진군하던 이들이 지리적 이점을 알고 있는 현지 군대에게 각개격파를 당해서 전멸했던 일은 역사적으로 종종 있었던 일이다.[43] 사실 이쪽은 근대 이전 군대의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회전에서나 어느 정도 되었던 일이고, 진군 도중에 연락체계를 통해서 현장 지휘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44] 당시 섬서성은 이후 준가르부가 되는 오이라트의 침입이 잦았다.[45] 둘 사이의 거리는 약 8km라고 한다.[46] 현대에도 야간사격은 굉장히 어렵다.[47] 대기병 목책을 말한다.[48] 마림은 이후 개원의 방위를 위해 몽골의 원병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몽골 부족들은 명군의 참패를 보고 상당수가 후금에 붙어버렸다. 결국 개원은 사르후 전투 몇 개월 뒤 공략해온 후금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마림도 그때 전사했다.[49] https://areyoukorean1.tistory.com/8[50] 사천 지방의 장창으로 무장한 중보병들을 가리킨다. 사르후 전투같은 평야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청의 기병돌격을 저지할 거의 유일한 병력 자원이었다. 청나라 기록에서는 만문노당이던, 청실록이던간에 공통적으로 사천병들이 매우 잘 싸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명에게는 안타깝게도 사르후 전투 당시는 제대로 동원되지 못했다.[51] 대 기병 무기를 말한다.[52] 사르후와 거의 동일 위도에 있는 선양시의 3월 평균 기온이 영상 1도이다.[53] 원정군 사령관인 도원수와 직급이 비슷했기 때문에 지시가 먹혀들지 않아 도원수를 무시한 것이다.[54] 후금측의 사료에 나오는 아부다리강은 조선측 사료에 나오는 심하(深河)와 동일 지명인 듯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55]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푸차는 조선군이 후금의 선봉대를 물리친 아부다리강보다 훨씬 남쪽에 있다. 즉 《책중일록》의 이야기와는 달리 동로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56] 원문 雜著,《柵中日錄》 3月 4日, “賊騎齊突勢如風雨 砲銃一放之後 未及再藏 賊騎已入陣中… (中略)… 自中營去兩營 不過千步 而倉卒之間 無暇赴救 夕陽下 但見射矢如雨 鐵馬進退 而恍惚難狀矣.”[57] 도원수 강홍립의 막료로서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전한 후 후금군의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쓴 글이다.[원문] “時明海蓋道康應乾步兵 合朝鮮兵 營于富察之野 其兵執狼筅長槍 被藤甲皮甲 朝鮮兵被紙甲 其冑以柳條爲之 火器層疊列待 …(中略)… 明兵及朝鮮兵 競發火器 忽大風驟作 走石揚沙 煙塵反搏 敵營昏冥晝晦 我軍乘之 飛矢雨發 又大破之 其兵二萬人殲[59] 《皇淸開國方略》卷6, <太祖于大屯之野> 당시 후금의 입장에서 사르후 전투를 묘사한 부분.[60] 서북풍이었다고 한다.[61] 바람이 한 번 휩쓸고 가라앉기 전에, 좌영의 병력이 증발했다고 한다(...). 이건 수천 명의 기병대가 일으킨 먼지바람이 돌풍이랑 뒤섞이면서 오랫동안 시야를 가린 이유도 있었을 테지만, 수만 명의 명군을 수차례 갈아버린 후금 기병의 전투력과 평지였던 지형을 감안하면, 정말로 순식간에 승부가 났을 것으로 보인다.[62] 한지를 여러 겹 겹친 후 경화시켜 갑찰로 쓴 갑옷. 철으로 만든 갑옷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냉병기에 어느정도 방어력이 있었다.[63] 병력의 경우, 표하군(標下軍) 2,230명(원수 직속 부대, 도원수 직속 340명, 부원수 직속 1,890명), 중영(中營) 3,350명, 좌영(左營) 3,480명, 우영(右營) 3,370명, 명군에 파견된 포수 400명, 연영(連營) 5,000명(기병으로만 이루어진 보급 및 후방 정찰부대). 전투부대 병력 도합 12,830명, 총 병력 도합 17,830명. 장수의 경우 표하군 16명(도원수 직속 9명, 부원수 직속 7명), 중영 2명, 좌영 2명, 우영 2명, 연영 1명. 도합 23명.[64] 보급 및 후방 정찰을 담당[65] 당시에는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누르하치의 후궁과 간통을 했다는 의심을 받아 후계자군에서 탈락한다.[66]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서 여진 마을을 약탈하다가 수많은 조선군 포로가 학살되었지만, 적어도 명나라군 포로처럼 현지에서 학살되지는 않았다.[67] 사르후 전투보다 약 40년 전인 일본의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군의 조총 방진이 다케다씨의 기병대를 전멸시켰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다케다의 기병대 돌격 자체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유물로 추정되기로는 방책을 만들고 양측 모두 조총을 동원한 전투가 나가시노 전투였고, 이때 다케다군이 기병대를 운용했다고 한들 후금의 만 단위의 기병대와는 달리 소수 정예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대세이다. 게다가 사르후 전투에서는 황사 때문에 조총병의 시계가 확보되지 않아 싸울 수가 없었다. 또, 나가시노에서는 오다군이 방어적인 입장이었지만, 사르후의 명군은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총병은 특성상 방어에 좀 더 유리했다.[68] 여진족 마을 약탈과 여진족 여인 강간 및 후금군 수급 은닉 중 발각[69] 심지어 누르하치는 포로들을 전부 몰살시켜려고 했었으나 아들인 다이샨이 말려서 전원 몰살은 하지 않았다. 후금은 포로들을 계급별로 분리해 관리했는데, 양반 출신 포로들이 위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연대 책임으로 이 양반 출신 500명이 학살되었다.[70] 강홍립은 정묘호란 후에야 귀국했고, 김경서는 억류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71] 심지어 광해군을 등극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이첨 등의 대북은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 세력보다도 더 후금에 적대적이었다. 서인 세력의 대후금 온건파인 최명길이나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의 주화파였다.[72] (특히 일본쪽) 중앙아시아사를 전공하는 일부 학자나 역덕들 중에는 오이라트가 몽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나무위키에도 비슷한 투로 씌여져 있지만, 학계의 주류설은 이들이 원나라 이후 분화한 몽골족의 일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들의 후예인 러시아의 칼미크 공화국 사람들은 현재의 몽골국과 많은 교류를 하며 서로를 친척 국가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후금이나 여진족들도 이들 오이라트를 몽골족의 일파로 여겼다.[73] 당시 북원은 분열 때문에 이름뿐인 처지였다.[74] 이이화나 서강대 계승범 교수도 밀지설이 신빙성있다고 보았다.[75] 원정군 1만 3천명은 명의 반복되는 요구에 따라 대부분 조총병 편제로 이루어졌는데 사르허 전투 당시 앞서가던 명군은 후금 기병대에 포위 섬멸당하고 뒤이어 가던 조선군은 대 기병전을 위해 언덕에서 야전 축성을 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청군이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때마침 불어닥친 모래 바람으로 시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맨몸으로 기병 돌격을 받은 조선군 좌영, 우영의 조총병들은 괴멸되었고 핵심 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했다. 이미 명군의 홀대와 시원찮은 보급으로 사기가 떨어져있던 강홍립의 중군은 결국 투항했다. 이 당시 강홍립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일부러 투항했다고 보기는 힘들다.[76] 간혹이를 ‘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라는 광해 11년 2월 3일 정사 2번째기사를 들어 실록의 내용이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기라는 정 반대의 내용이다.[77] 요즘도 거의 CG를 쓴다. 영화 <안시성(영화)>의 기병 전투 장면은 CG가 많이 쓰였다.[78] 그나마 동맹군은 양 웬리의 등장으로 전멸은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