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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신숭겸 충렬도 | ||
시기 | 927년 (태조 10년) 11월 | |
장소 | 신라 대구현 공산 {{{-3 (현 대구광역시 팔공산)[1]남쪽으로 밀려난 한족의 왕조 동진이었고 패자가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이민족의 왕조 전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느낌이 미묘해진다. 왕건이 패한 지역에 비수대전 전적지의 지명을 붙인 사람이 왕건이나 고려 왕조에 대해 뭔가 악의가 있었나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실제로 팔공산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 # ]}}} | |
원인 | 후백제의 신라 침공과 고려의 대응.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후백제 (공세) 승 | 고려-신라 연합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견훤 (후백제 국왕) | 지휘관 왕건 (고려 태조) 신숭겸 † 김락 † 강공훤 전의갑 † 전이갑 † 손행 † 호의 † 전락 † 김철 † 연주 황보능장 경애왕 (신라 국왕) † |
병력 | 후백제군: 20,000명[2] | 고려군: 15,000명 ↑[3]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전사자: 4,930명[4] |
결과 | 후백제의 대승 - 고려의 고위 지휘관 8명 전사 - 고려 주력군 궤멸 | |
영향 | 후백제, 후삼국의 주도권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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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 시대의 전투.서기 927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전투. 전투는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 이후 고창 전투(930) 직전까지 후삼국 시대의 형세는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2. 배경
918년 왕건은 역성혁명를 일으켜 태봉의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서로 사신을 왕래하는 등 고려와 후백제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낸다. 견훤은 숙원이었던 신라 공략에 매진하기 위해 고려 쪽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고, 이는 고려 건국 초기 온갖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고려에는 엄청난 행운이었다.[5]하지만 왕건과 견훤 모두 삼한 통일의 야망을 가진 군웅들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특히 신라를 적대시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신라와의 화친 정책을 폈고, 이는 신라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견훤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왕건과 견훤의 첫 대결은 두 번에 걸친 조물성 전투로,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끝끝내 성을 지켜내어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일단 양국은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에 동의하지만, 후백제의 인질인 진호가 1년만에 병으로 죽자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주살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치부하여 고려측 인질 왕신을 죽여버리고 강화를 파기한다. 이에 분노한 왕건은 신라와 연합하여 견훤에 맞서 싸운다.
견훤의 군대가 웅진으로 치고나오자, 고려와 신라군은 웅진과 문경 인근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때 고려의 장군 영창과 능식이 한반도를 반바퀴 돌아 강주에 상륙, 마을 4곳을 함락시켰고 견훤이 수 차례 공격 끝에 간신히 점령한 대야성을 김락이 탈환하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는다. 이 기동으로 인해, 견훤은 어느 통로로 진격해도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되는 형세에 빠지게 되었다. 왕건은 내친김에 직접 진주까지 남하해서 백성들을 위무하자 문경 일대의 호족들도 고려에 투항하면서 견훤은 전략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전개
926년 4월. 견훤이 보낸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고[6] 웅진으로 진군, 왕건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문을 굳게 걸어닫고 절대 나가 싸우지 말라고 명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이렇게 전한다.“견훤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도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진격의 북을 울려 위세를 떨치신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왕건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이 넘쳐나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결국 견훤은 공세를 포기한다.
그러던 927년 1월, 신라군과 연합한 왕건은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의 용주(지금의 예천군)을 점령하고, 이러한 고려-신라의 공세에 견훤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지만 왕건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후백제를 공격한다. 그해 3월, 왕건은 운주(홍성군)를 공격하고 3일 뒤에는 근품성(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다음 달에는 수군을 시켜 경상도 진주일대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개월 뒤인 7월에 김락의 대야성 공격이 성공하면서 후백제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즉, 완벽한 후백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남쪽 나주 일대는 이미 해군 없이는 공략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게 증명된 곳이고, 북쪽의 충청도 지역은 워낙 걸출한 요새들이 많아서 고려&후백제 모두 공세가 어려웠으며, 합천-진주 방면은 그 유명한 대야성이 버티고 있었고, 김천-대구 라인 마저 진출하는 순간 문경&합천 주둔한 고려군 + 신라군의 합동 공세에 두들겨 맞을 게 확실했다. 포진 자체가 견훤으로 하여금 김천-대구 라인 진출을 강요했다. 다만 일단 추풍령 일대는 그나마 후백제가 노려볼만한 상황이었다. 신라를 고구려, 백제, 당에게서 지켜주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요새들은 이미 후백제군이 아이러니하게도 통일신라의 유산으로서 물려받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추풍령을 벗어나는 길목들에 방어선을 안배해 놓은 상황이었기에 일단 넘어가더라도 고려&신라의 협공에 샌드백 신세가 되는 건 너무나도 뻔했다. 한편, 상황이 이렇게 되자 눈치가 빠른 후백제 성주들은 고려에 귀부하기 시작한다. 8월에 왕건이 포위망의 핵심이었던 문경의 배산성을 수리하고 강주(진주)지역을 순시하자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이 귀부하고 후백제의 성주 여럿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이때 왕건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후삼국 통일이 앞당겨 졌겠지만...
견훤은 침착하게 고려가 점령한 근품성을 우선 탈환하고 신라의 고울부(영천시)을 점령함으로써 신라로 하여금 고려에게 구원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천이 경주의 코앞에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왕건은 급히 공훤으로 하여금 1만 군사를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포위망을 형성하느라 경주 인근은 비어있었다는 점이다. 즉, 견훤은 문경과 김천 사이의 약간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코 신라로 치고 들어갔다는 것. 오늘날인 2024년으로 친다면 견훤이 서라벌(경주시)로 쳐들어간 경로가 정확하게 상주영천고속도로(301번 고속도로) 경로이다. 상주영천고속도로 경로는 상주에서 출발하여 경주시로 들어가는 급소 경로인데 견훤은 이 틈을 정확하게 찔러서 상주 - 군위 - 영천 - 경주 경로로 쳐들어가는 서라벌 기습을 성공시켜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왕비는 직접 강간했으며 서라벌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왕건은 우선 공훤에게 본인과 합류할 때까지 섣불리 경주로 진격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 대야성에 있던 김락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신라군을 인솔하여 대구로 오라고 명령한다.[7] 그뒤 왕건 본인은 정예기병 5천(아마도 왕건의 직속 병력의 전부)을 이끌고 남하한다. 견훤의 병력은 고작 5천이었고 고려군은 거의 2~3배에 달했으니 견훤에게 힘든 싸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당시 후백제군은 유례없는 역대급 기동전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경주가 코앞이긴 했지만 신라군이 병풍이 아니었기에 공훤으로 하여금 바로 견훤을 치게 했다면 일견 유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견훤의 군대는 후백제의 정예였던 반면에 공훤의 군대는 지방에서 차출해서 사실상 손발 안맞는 오합지졸이었고, 신라군의 경우 경주에서 신라군들 대부분의 가족이 후백제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힘들어졌다. 또 결정적으로, 견훤 본인부터가 신라 장교 출신이었던데다, 후백제군 자체도 그 뿌리부터가 신라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신라군의 전략과 움직임, 그리고 경상남도 일대의 지리에 대해 훤했다. 물론 이 당시에 신라 왕실에게 충성하는 마지막 남은 신라군이 있긴 했지만 알맹이는 견훤이 거병해서 후백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후백제군으로 거진 빠져나간지 이미 20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서라벌에서 후퇴하는 견훤의 후백제군과, 천천히 내려와 증원군과 합류한 왕건의 고려군은 공산 일대에서 마주치게 된다. 처음엔 고려군은 후백제의 첨병을 포함한 친백제계 동화사 출신 승병과 잠깐 교전하지만, 첨병들은 고려군을 염탐하고 돌아가버렸으며 승병들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압도적인 고려군을 보고 전의를 상실해 순식간에 흩어져버렸기에 교전은 싱겁게 끝난다. 왕건이 국서에서 말한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달아났고" 운운한 것이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이후 고려군의 정보를 파악해간 후백제군 본대가 들이닥치고, 전열을 정비하며 접근해오길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 본대가 이에 응수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공산 전투가 벌어졌다.
원래대로라면 기병 위주의 기동전을 쉴틈없이 펼쳐왔던 후백제군이 병력의 수나, 체력적으로나 불리했어야 하나, 앞에 언급했듯이 왕건의 정치적 술수로 인해 고려군의 동향을 살피고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번 후백제군은, 지쳤을 것이라 생각한 왕건의 예상을 비웃듯 신속한 기동전을 펼쳐 공산과 그 주변 일대에서 매복, 역매복, 산발적인 기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차례 고려군의 허를 찌르며 승리한다. 공훤의 군대와 합류한데다가 정예병까지 포함되어 숫자 상으로 우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군은, 병력의 수란 장점을 살리지 못한 채 계속되는 교전 속에서 후백제군에게 순식간에 밀려버리며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에 패배의 기색이 역력해진 고려군을 견훤이 포위해 섬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후백제군이 포위하게 되자, 고려군은 산속으로 각자 도주하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고, 왕건은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야성을 상실한 이후의 신라군은 상상 이상으로 무력했고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경주에서의 약탈과 잔학행위를 벌이고도 넉넉히 공산에 포진하는 초월적인 기동력을 선보였다. 왕건 자신도 죽을 위기에 몰렸고 신숭겸과 7명의 장수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하게 된다.
4. 왕건의 도주와 여러 지명
자세한 내용은 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 문서 참고하십시오.5. 결과와 영향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 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8]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고려사》
《고려사》
여태까지 계속 고려에게 밀렸던 후백제 였지만 이 전투 직후 고창전투 이전까지 만큼은 확실히 후삼국의 주도권이 일시적으로나마 견훤이 완전히 움켜쥐게 되어 후백제가 기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하늘을 찔렀던, 그야말로 왕건과 고려에겐 최악의 시련의 기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왕건의 경상도에 대한 영향력 역시 깔끔히 없어진다. 후백제는 신라를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든 동시에 영토 역시 신라 9주 중 6주에 이르러서 최대 판도에 이르렀고 구체적으로는 전주(전북), 무주(광주 전남), 강주(경남 서부), 웅주(충남과 충북 일부), 상주(경북 북부),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이다. 한편 신라는 서라벌과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만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고 고려는 변두리의 한주(경기도와 황해도), 삭주(영서 지방), 명주(영동 지방) 3주만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땅만 넓지 산지가 많고 경제력이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9] 게다가 견훤은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던 나주 점령에도 성공한다.
지난번에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왕경(王京)으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쪼고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 행위였습니다. 이에 내가 먼저 조적(祖逖)[10]처럼 채찍을 잡고, 한금호(韓擒虎)[11]처럼 홀로 부월(斧鉞)을 휘둘러, (신라의) 백관들에게 밝은 햇빛과 같은 맹서(盟誓)를 받고, 육부(六部)에 의로운 기풍을 유시(諭示)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간신은 숨거나 도망쳐버리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고, 결국 경명왕(景明王)의 표제(表弟)[12]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 되는 분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였습니다.
족하(왕건)께서는 내가 알린 충고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수단을 써서 틈을 엿보다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쳐들어와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이 묶인 듯이 패배했고, 같은 달에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13] 앞에서 해골을 볕에 쪼이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포획한 자가 많았으며 쫓아가 잡은 자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다면 승부는 알 만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班) 상서(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경(卿)과 고려는 오랫동안 소통하고 좋아하면서 함께 이웃으로 맹약(盟約)을 맺은 것으로 안다. 근래 두 인질이 다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하였던 옛 관계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의 나라에 가게 하고 또 고려에는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화친하여 길이 평화를 아름답게 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고 왕을 존중하며,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으므로 그 조유(詔諭)를 듣고서 곧 지시를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족하께서 싸움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고, 곤란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싸우려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조서를 베껴 보내드리니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번갈아 이기는 것[㕙獹迭憊]도 끝내 반드시 남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맞버티는 것[蚌鷸相持]도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迷復]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스스로에게 남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공산 전투 이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중에서. 최승우 대필.
족하(왕건)께서는 내가 알린 충고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수단을 써서 틈을 엿보다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쳐들어와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이 묶인 듯이 패배했고, 같은 달에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13] 앞에서 해골을 볕에 쪼이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포획한 자가 많았으며 쫓아가 잡은 자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다면 승부는 알 만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班) 상서(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경(卿)과 고려는 오랫동안 소통하고 좋아하면서 함께 이웃으로 맹약(盟約)을 맺은 것으로 안다. 근래 두 인질이 다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하였던 옛 관계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의 나라에 가게 하고 또 고려에는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화친하여 길이 평화를 아름답게 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고 왕을 존중하며,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으므로 그 조유(詔諭)를 듣고서 곧 지시를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족하께서 싸움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고, 곤란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싸우려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조서를 베껴 보내드리니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번갈아 이기는 것[㕙獹迭憊]도 끝내 반드시 남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맞버티는 것[蚌鷸相持]도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迷復]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스스로에게 남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공산 전투 이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중에서. 최승우 대필.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라고 패기 있게 국서를 보냈던 게 이 공산 전투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공산 전투가 승리로 끝난 뒤인 12월 견훤은 왕건에게 국서를 보냈는데, 국서에는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기존 고려측 사료와는 내용이 다르거나 실리지 않은 말들이 다수 보인다. 정리해 보면
- 견훤이 서라벌로 간 것은 신라의 국상 김웅렴이 왕건을 서라벌로 초청하려고 잘못된 판단을 해서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 견훤이 와서 보니 뜻하지 않게 간악한 신하들은 숨거나 도망쳤고 임금께서는 돌아가시는 변고가 생겼다.
- 공산 전투에서 크게 이긴 기세를 몰아서 고려로 쳐들어가 아주 평양-대동강까지 밀려고 했는데 오월에서 전쟁 좀 그만두라고 말려서 이쯤 한다.
서라벌 약탈을 왕건이나 신라에 책임을 돌리는 건 그렇다 쳐도 경애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난 왕을 죽이거나 할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오니까 돌아가셨더라"라는 투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국서에서 견훤은 "나는 존왕의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다"라고 해서 존왕, 즉 신라 왕실에 대한 존중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왕건에게 피력하고, 자신이 서라벌에 쳐들어가서 새로운 왕을 세운 것은 신라가 고려와 연결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견훤 자신의 승리에 대한 자부심을 과시하고 고려를 약올리는 내용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공산 전투의 승기를 몰아서 그대로 평양-대동강까지 아주 밀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때마침 오월에서 후백제에 국서를 보내 와서 "니들 전쟁 좀 적당히 하고 고려와 화친하라"고 말려서 나도 이쯤하고 봐주는 거니까 알고나 있어라라는 비아냥인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족하께서 싸움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고, 곤란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싸우려 하려는 것입니다."[14]라고 하는 것은 덤이다.
왕건은 이 국서를 받고 이듬해에 견훤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월국의 통화사(通和使) 반 상서가 전한 조서 1통과 아울러 족하(足下)께서 보낸 장문의 편지를 삼가 받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사신이 이렇듯 제서(制書)를 가지고 오니 편지와 좋은 말씀, 겸하여 충고까지 잘 받았습니다. 귀한 글[芝檢]을 받드니 비록 감격은 더하나 봉투를 열어보니 혐의를 떨치기 힘들어, 지금 돌아가는 사신 편에 부쳐 품은 뜻을 말하는 바입니다.
나는 위로는 하늘이 준 것을 받들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에 밀려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차지하여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즈음 삼한(三韓)에 액운이 모여 온 나라에 기근이 드니 백성의 다수가 반란군[黃巾]에 가담하고 토지는 황무지가 아닌 것이 없어, 이에 전쟁에 대한 우려(風塵之警)를 그치고 나라를 재앙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이웃과 친목하고 우호관계를 맺으니, 그 결과로 수천 리에 걸쳐 농상(農桑)을 즐거이 하는 것이 보이고 7~8년간 군사들은 편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을유년(925) 10월(陽月)에 이르러 갑자기 사달이 일어나 결국 교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족하께서는 처음부터 상대를 가볍게 보고 곧장 앞으로 가는 모습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서는 것과 같았으나, 결국 어려움을 알고 용기 있게 물러났으니 이는 모기가 산을 짊어지려는 것과 같았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사죄의 말을 늘어놓으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부터는 영원히 기쁘게 화친할 것이며 만약 맹약을 어기면 신이 죽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 또한 창날을 그치게 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살육하지 않는 인(仁)을 바랐기에, 드디어 겹겹이 에워싼 것을 풀고 피곤한 군사들을 쉬게 하였으며 인질마저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엇보다 백성의 편안함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인데, 어떻게 하여 삽혈(歃血)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위세를 다시 지으며 벌이나 전갈 같은 독으로 생령(生靈)들을 침해하고 이리나 호랑이와 같이 미쳐 날뛰며 왕도 주위까지 쳐들어 와 금성(金城)을 핍박하고 신라의 왕실을 놀라게 할 줄 알았겠습니까? 의리에 기대어 종주(宗主)를 떠받드는 일을 누가 환공(桓公) ‧ 문공(文公)의 패업(霸業)과 비슷하다 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한(漢)을 도모하였던 간악한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과 같아, 지존(至尊)의 왕으로 하여금 족하에게 굽혀서 아들이라고 자칭하게 부르도록 하였다니 존비(尊卑)의 순서를 잃고 위아래가 모두 근심하고 있습니다. 원로의 충순(忠純)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사직(社稷)을 다시 편안히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마음에는 숨겨진 간악함이 없고 신라왕을 존중하는 간절한 뜻이 있어, 장차 조정을 도와 안정시키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바로잡으려는 것을 도우려 합니다. 족하께서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하늘과 땅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서, 임금을 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관리들을 죽여 젓갈을 담그고 백성을 도륙하였습니다. 궁녀들은 취하여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은 빼앗아 가득 싣고 갔으니, 으뜸가는 흉악함은 걸(桀)이나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獍)[15]이나 올빼미(梟)보다 심합니다. 나의 원한은 하늘이 무너지니 극에 달하고 나의 정성은 해를 멈추게 할 만큼 깊습니다.
매와 솔개가 새떼를 모는 것을 본받아 견마(犬馬)와 같이 충성을 다해 다시 전쟁을 일으켜 하늘의 해가 두 번 바뀌었습니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번개처럼 재빨리 적군을 쳤으며, 수공(水攻)에서는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용처럼 솟구치니, 〈군사를〉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성공하였고, 군사를 일으켜 헛되이 발병(發兵)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윤빈(尹邠)을 쫓았을 때는 갑옷 쌓인 것이 산과 같았고, 변방의 성에서 추조(鄒祖)를 사로잡았을 때는 엎어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습니다. 연산군(燕山郡) 근처에서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길환(吉奐)을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언저리에서는 독기(纛旗) 아래에서 수오(隨晤)를 도륙해 버렸습니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킨 날에는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던졌고, 청주(靑州)를 깨뜨렸을 때에는 직심(直心) 등 4~5명이 목을 내놓았습니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달아났고, 경산(京山)에서는 옥을 입에 물고(含璧) 스스로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찾아와 귀부(歸附)하였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옮겨와 예속되었습니다. 쳐들어 나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수복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汦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가 배신한 진여(陳餘)의 군대를 격파하고 목을 벤 것과 같이, 천반(千般)의 한을 씻고, 오강정(烏江亭) 위에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초왕(楚王) 항우(項羽)의 군대와 한 번의 전투를 통해 대업을 이룩한 것처럼, 반드시 풍파를 그치게 하고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데, 천명(天命)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吳越王) 전하가 큰 덕으로 변방을 감싸고 깊은 인애(仁愛)로 작은 나라를 보살피고자 특별히 궁성[丹禁]에서 윤음(綸音)을 내려 청구(靑丘)에서 전쟁을 그치라고 유시(諭示)하시었습니다. 이미 교훈과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족하께서 그 밝은 뜻을 삼가 받들어 흉악한 기략(機略)을 모두 거둔다면, 상국(上國)의 인자로운 은혜에 부합할 뿐 아니라 또한 동해(東海)의 끊어진 계통을 잇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 과오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 위 서신에 대한 왕건의 답서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 중에서-
나는 위로는 하늘이 준 것을 받들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에 밀려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차지하여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즈음 삼한(三韓)에 액운이 모여 온 나라에 기근이 드니 백성의 다수가 반란군[黃巾]에 가담하고 토지는 황무지가 아닌 것이 없어, 이에 전쟁에 대한 우려(風塵之警)를 그치고 나라를 재앙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이웃과 친목하고 우호관계를 맺으니, 그 결과로 수천 리에 걸쳐 농상(農桑)을 즐거이 하는 것이 보이고 7~8년간 군사들은 편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을유년(925) 10월(陽月)에 이르러 갑자기 사달이 일어나 결국 교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족하께서는 처음부터 상대를 가볍게 보고 곧장 앞으로 가는 모습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서는 것과 같았으나, 결국 어려움을 알고 용기 있게 물러났으니 이는 모기가 산을 짊어지려는 것과 같았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사죄의 말을 늘어놓으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부터는 영원히 기쁘게 화친할 것이며 만약 맹약을 어기면 신이 죽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 또한 창날을 그치게 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살육하지 않는 인(仁)을 바랐기에, 드디어 겹겹이 에워싼 것을 풀고 피곤한 군사들을 쉬게 하였으며 인질마저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엇보다 백성의 편안함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인데, 어떻게 하여 삽혈(歃血)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위세를 다시 지으며 벌이나 전갈 같은 독으로 생령(生靈)들을 침해하고 이리나 호랑이와 같이 미쳐 날뛰며 왕도 주위까지 쳐들어 와 금성(金城)을 핍박하고 신라의 왕실을 놀라게 할 줄 알았겠습니까? 의리에 기대어 종주(宗主)를 떠받드는 일을 누가 환공(桓公) ‧ 문공(文公)의 패업(霸業)과 비슷하다 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한(漢)을 도모하였던 간악한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과 같아, 지존(至尊)의 왕으로 하여금 족하에게 굽혀서 아들이라고 자칭하게 부르도록 하였다니 존비(尊卑)의 순서를 잃고 위아래가 모두 근심하고 있습니다. 원로의 충순(忠純)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사직(社稷)을 다시 편안히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마음에는 숨겨진 간악함이 없고 신라왕을 존중하는 간절한 뜻이 있어, 장차 조정을 도와 안정시키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바로잡으려는 것을 도우려 합니다. 족하께서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하늘과 땅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서, 임금을 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관리들을 죽여 젓갈을 담그고 백성을 도륙하였습니다. 궁녀들은 취하여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은 빼앗아 가득 싣고 갔으니, 으뜸가는 흉악함은 걸(桀)이나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獍)[15]이나 올빼미(梟)보다 심합니다. 나의 원한은 하늘이 무너지니 극에 달하고 나의 정성은 해를 멈추게 할 만큼 깊습니다.
매와 솔개가 새떼를 모는 것을 본받아 견마(犬馬)와 같이 충성을 다해 다시 전쟁을 일으켜 하늘의 해가 두 번 바뀌었습니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번개처럼 재빨리 적군을 쳤으며, 수공(水攻)에서는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용처럼 솟구치니, 〈군사를〉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성공하였고, 군사를 일으켜 헛되이 발병(發兵)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윤빈(尹邠)을 쫓았을 때는 갑옷 쌓인 것이 산과 같았고, 변방의 성에서 추조(鄒祖)를 사로잡았을 때는 엎어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습니다. 연산군(燕山郡) 근처에서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길환(吉奐)을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언저리에서는 독기(纛旗) 아래에서 수오(隨晤)를 도륙해 버렸습니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킨 날에는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던졌고, 청주(靑州)를 깨뜨렸을 때에는 직심(直心) 등 4~5명이 목을 내놓았습니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달아났고, 경산(京山)에서는 옥을 입에 물고(含璧) 스스로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찾아와 귀부(歸附)하였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옮겨와 예속되었습니다. 쳐들어 나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수복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汦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가 배신한 진여(陳餘)의 군대를 격파하고 목을 벤 것과 같이, 천반(千般)의 한을 씻고, 오강정(烏江亭) 위에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초왕(楚王) 항우(項羽)의 군대와 한 번의 전투를 통해 대업을 이룩한 것처럼, 반드시 풍파를 그치게 하고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데, 천명(天命)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吳越王) 전하가 큰 덕으로 변방을 감싸고 깊은 인애(仁愛)로 작은 나라를 보살피고자 특별히 궁성[丹禁]에서 윤음(綸音)을 내려 청구(靑丘)에서 전쟁을 그치라고 유시(諭示)하시었습니다. 이미 교훈과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족하께서 그 밝은 뜻을 삼가 받들어 흉악한 기략(機略)을 모두 거둔다면, 상국(上國)의 인자로운 은혜에 부합할 뿐 아니라 또한 동해(東海)의 끊어진 계통을 잇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 과오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 위 서신에 대한 왕건의 답서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 중에서-
왕건 개인적으로는 물론 고려의 전체 역사에 걸쳐서도 통주 전투, 갈라수 전투만큼 최대의 패배였다고 평할 수 있는 전투다. 특히 전투에 참여한 말단 병사들뿐 아니라 주요 장수들 태반이 전사한 것도 모자라 국왕마저 겨우 목숨만 부지해 나온 전투로, 고려가 아니라 한국 역사 전체를 봐도 이런 전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16][17]
그러나 왕건에게 손해만 있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공산 전투 자체는 견훤의 군사적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였으나, 왕건의 지원군 덕택에 후기 신라의 여론은 확실히 고려측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다만 견훤이 신라 왕을 죽이고 신라 왕비를 능욕한 사건으로 신라의 귀족들과 호족들은 견훤에게 큰 반감을 보였으나, 적어도 이는 당장 효과가 나타나긴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견훤은 이 이후에 오히려 경상도에서의 점유 면적을 크게 늘렸고, 경북 서남부 및 옛 백제 지역의 견훤 지지는 이후에도 굳건했다. 이 지역들은 이미 신라 왕실을 마음 속에서 저버린지 오래라 견훤의 이 만행에 그닥 나쁘게 영향받을 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건의 지원군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은 오는 족족 후백제군에게 패배하기 일쑤였으니, 적어도 경애왕 당시까지 신라 왕실에게 충성하던 서라벌 근처 호족들은 제아무리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어도 당장은 살려면 견훤에게 협조할 수밖엔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 견훤은 드디어 아버지 아자개의 세력인 상주와 고향인 문경에 있던 세력들을 군사력으로 찍어눌러 후백제 휘하에 강제로 데려온다. 그동안에는 아버지의 세력권이고 어려서부터 봐온 고향 사람들이라 사정을 봐주었지만 더는 봐줄 수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은 듯하다.[18] 경순왕이 내내 반백제 정책으로 일관했던 걸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한동안 견훤이 이렇게 서슬 퍼렇게 있을 때는 적어도 즉위 초반 몇 년 동안은 견훤에게 협조했었다. 물론 본심은 얼마 안가 드러나지만 가장 견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을 경순왕마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견훤이 일으킨 바람은 무시무시했었다.
다만 공산에서의 대패 이후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위무를 목적으로 본인이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왔다. 그는 명주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호족[19]이었고 궁예가 독립 세력을 꾸리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때문에 태봉의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의 관계가 불편했는데 그런 그가 직접 왕건을 찾아 온 것이다. 사실상 김순식의 왕건 지지 선언이었던 셈. 이를 보아 통일신라 시절 북부 3주였던 지역의 호족들은 견훤의 지나친 만행에 오히려 왕건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겠다고 판단한 걸로 보인다. 패서 호족들은 옛 백제 유민과는 달리 신라 왕실과 그렇게 척질 일이 없었던 것도 여기서 다시 특기할 일이다.
경순왕도 즉위 초기에 백제 눈치를 보다 결국은 고려로 갈아탔으며, 고창 전투에서도 그 일대 신라 호족들이 왕건의 편을 든 것이 결정타가 되었음을 고려할 때 공산 전투로 이어지는 전역은 견훤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많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전역이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으며 그 결과 후백제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신라 왕실 및 아직 신라 왕실에게 충성하는 경북 동부, 경남 일대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것은 반대로 후백제 입장에서는 삼국통일의 마지막 기회였을지 모른다. 아무리 신라가 견훤의 태세에 실망했다고 해도 고려 국왕인 왕건이 죽었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건이 전사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구사일생으로 끝내 살아 돌아왔으니.....
여담으로 공산 전투에 대한 앙금 내지 뒤끝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려 조정은 훗날 공산이 위치한 대구 지역에 대한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하면서 대구 지역 즉 기존의 수창군[20]을 아주 죽죽 찢어놨다. 원래 대구 지역은 수창군이 중심 고을이고 대구현(大丘縣), 팔리현(八里縣)[21], 하빈현(河濱縣)[22], 화원현(花園縣)[23] 이렇게 4개 현이 수창군의 속현으로 있었는데, 현종 9년(1018년)에 수창군의 속현들을 떼어내서 모두 상주목 경산부 관내의 속읍으로 붙여 버리고, 수창군도 동경유수관 아래 속읍으로 편입시켜 버림으로써 대구 지역에서의 기존 통치 구조를 바꿔 버린 것이다.[24] 수창군은 이때부터 대구 지역에서 중심 도시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대신 그전까지 수창군에 소속된 속현에 불과했던 대구현이 두각을 드러내어 인종(仁宗) 21년(1143년)에는 현령(縣令)이 설치되고[25] 대구와 마찬가지로 원래 수창군 속현이었던 팔리, 하빈, 하원이 모두 대구현에 소속되게 되면서 대구현이 대구 지역의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는 동래부 소속이었던 지금의 부산광역시가 거꾸로 동래부를 흡수하면서 성장한 것처럼.
6. 가정
만일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전사했었다면 곧 후백제의 삼한 통일로 이어졌을 것이다.918년에 고려가 건국된 후 궁예를 따르던 태봉국 잔당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난 상황에서 그나마 힘 세고 노회한 호족 세력이 '고려'라는 정치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던 건 고려를 건국한 창업군주 왕건의 개인적인 정치력과 카리스마에 기인한 바가 컸는데, 그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면 고려는 호족들의 급격한 이탈로 인해 순식간에 공중분해되었을 공산이 크다. 훗날 후삼국시대가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잡음이 발생하다가 광종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겨우 기틀이 잡힌 나라가 고려였는데, 하물며 호족 세력이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한참 간보던 혼란한 시기에 왕건이 죽었다면? 왕건이 기어코 살아남았기 때문에 발해 유민과 신라 호족의 힘으로 판도가 역전될 수 있었다.
한편 고려군이 빠르게 후백제군을 쫓아갔다면,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요격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산 대신 경주에 있는 다른 산을 전장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 경우 왕건의 직속 부대는 피해를 안 보았을 수도 있겠지만 강공훤의 군대가 후백제군을 무찔렀을 가능성은 낮고, 되려 당할 가능성이 높다.
7. 대중매체
사극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의 공산전투는, 태조 왕건 이후부터 많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후삼국시대가 등장하는 대중서에서도 공산 전투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 "견훤이 서라벌을 유린하고 경애왕을 죽일 때 왕건은 뭘한 거지?"라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많았을 정도.- 태조 왕건: 공산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사극은 KBS의 대하 사극인 태조 왕건이 사실상 유일하다. 159~161화까지가 공산 전투 본편이고, 162화는 후일담을 다루고 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고려 장수들이 여기서 전사하였고, 왕건을 호위한 복지겸, 박수문, 박수경만 간신히 전장통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견훤 : 허허... 이런 이런... 그래도 그렇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태자들이 대체 어떻게 했길래, 대야성을 잃어...?[26]
최승우 : 폐하, 폐하께오서는 두 개의 성을 내어주시고, 고려를 얻고 신라를 얻으시는 것이옵니다. 이보다 큰 거래가 어디에 있사옵니까?
견훤 :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너무 아깝지가 않은가? 대야성이 어떤 성인가?
최승우 : 대야성이 아니라, 고려와 신라라 했사옵니다, 폐하.
사극 태조 왕건 155화 가운데.[27]
최승우 : 폐하, 폐하께오서는 두 개의 성을 내어주시고, 고려를 얻고 신라를 얻으시는 것이옵니다. 이보다 큰 거래가 어디에 있사옵니까?
견훤 :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너무 아깝지가 않은가? 대야성이 어떤 성인가?
최승우 : 대야성이 아니라, 고려와 신라라 했사옵니다, 폐하.
사극 태조 왕건 155화 가운데.[27]
고려군은 왕건이 이끄는 기병 5천이 먼저 공산지역에 진입했다가 백제군한테 야습을 당해[28] 내군장군 신방을 비롯해 3천이 전사하고 1천이 부상당하는 대패를 당하며 포위된다.[29] 신숭겸과 김락이 이끄는 지원군 5천이 급히 도착했으나 백제는 대야성에서 진군한 고려군의 진군로까지 전부 계산해서 매복지를 선점해 둔 뒤였고, 결국 함께 고립된다. 이후 포위망을 뚫기위한 고려군과 고려군을 완전히 섬멸하려는 백제군의 혈전이 벌어지는데 요소요소를 점거한 채, 전열을 충분히 정비한 데다 대승으로 사기까지 높은 백제군을 당할 수 없이 참패를 당하고 나주 도독을 지냈던 장군 김언이 전사한다. 지치고 상한 2천여 명의 패잔병만 남아 더 이상 방법이 없어진 제장들은, 왕건만은 살려내기 위해 신숭겸은 왕건의 갑옷을, 전이갑은 복지겸의 갑옷을 입고 백제군을 유인한다. 왕건에게는 병졸 갑옷을 강제로 입힌 뒤 병졸들과 섞어서 피신 시켰다. 이때 제장들이 마지막으로 왕건에게 최후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하직 인사를 올리는 장면(아래 대본에 나오지만 160화 말미~161화 초반)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본 드라마에서 가장 슬픈 명장면 이라 할 수 있다.
(백제군 군졸로 변복한 왕건 앞에 희생을 결심한 네 장수가 변복을 마치고 왕건 앞에 나타나자 왕건 깜짝 놀란다.)
왕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숭겸 아우는 그게 무슨 일인가? 왜…왜 이 형의 갑옷을 입었는고? 전이갑 장군은 왜 복 장군의 갑옷을 입었는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네 장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복지겸도 차마 그들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신숭겸: 형님 폐하, 오늘의 이 곤경을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신들이 꾸민 일이옵니다. 무사히 가시오소서…
왕건: 무슨 소리인가? 이…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김락: 폐하! 부디 이 곳을 빠져 나가시어 사직을 보존하시오소서!
전이갑: 신들을 용서하시오소서…폐하, 부디 이 곳을 무사히 나가시오소서!
전의갑: 사직을 보존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나를 속였구만…모두들 나를 속였어! 나를…나를 속였어…! 이제 보니, 아우가 나로 위장하여 적진으로 가는 사이에 이 형보고 도망가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신숭겸: 용서하시오소서, 형님 폐하. 형님 폐하를 위해 목숨을 다할 수 있게 되어 이런 기쁨과 영광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형님 폐하…
김락: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폐하!
(그 말을 듣던 전이갑도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왕건: (좌절하며) 이…이럴 수는 없다…내 목숨 하나 살자고 아우와 제장들을 다 죽이다니, 이럴 수는 없다! (군졸복을 벗으려 하며) 나는 아니 갈 것이야, 나는 아니 갈 것이야!
신숭겸: 무엇들 하시오? 어서 폐하를 뫼시시오!
복지겸: 폐하…용서하시오소서!
박수문: 폐하!
박수경: 폐하!
왕건: (복지겸 등을 뿌리치며) 놔라! 이것들 놓지 못할까?! 나는 아니 간다! 나는 아니 가!!!
신숭겸: 형님 폐하, 가셔야 하옵니다! 형님 폐하의 어깨에는 대 고려제국의 명운이 달려있사옵니다. 신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시오소서. 부디, 부디 강건하시고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니 되네…아니 돼…아니 돼!!
(그러나 왕건의 오열을 뒤로 하고 그들은 서서히 일어서며 하직 인사를 올린다.)
왕건: 아니 돼…아니 된다, 아니 돼…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돼…
신숭겸: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무사히 가시오소서, 형님 폐하…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린다.)
왕건: 아니 된다…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된다! 아니 돼!!!!(여기까지가 160화.)
(여기부터가 161화.) 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돼!
신숭겸: (독백)형님 폐하…대장부들이 가는 길이옵니다. 슬퍼하지 마오소서…사내들의 의리가 다 이와 같은 것이 아니옵니까? 형님을 위해 아우가 감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부디, 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우야! 숭겸 아우야!! 김락 장군! 전이갑 장군! 의갑 장군! 장군들…! 이것들 놓아라…놓치 못하겠는가? 이것들 놔! 놓지 못하겠는가! 내 어찌 아우와 장수들을 죽이고 이 한 목숨 연명하랴…? 놓아라, 이것 놓치 못할까!!!
복지겸: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미 장수들이 떠났사옵니다. 폐하를 위하여 그리고 국가 사직을 위하여 장렬한 선택을 한 저들이옵니다!
박수문: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의 큰 뜻을 받으시오소서!
왕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한 나라의 황제가 할 짓이 아니야.
복지겸: 폐하, 폐하께오서는 바로 국가이시며 제국의 주인이시옵니다! 만 백성의 어버이께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어나 백성의 안녕을 찾는 것은 당연한 본분이시옵니다! 그들의 뜻을 받으시오소서! 그리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왕건: 이 일을 어찌할꼬…? 내 아우와 저 장수들을 어찌할꼬? 아니 된다…! 아니 된다!!!!!!(왕건은 통곡한다.)
왕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숭겸 아우는 그게 무슨 일인가? 왜…왜 이 형의 갑옷을 입었는고? 전이갑 장군은 왜 복 장군의 갑옷을 입었는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네 장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복지겸도 차마 그들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신숭겸: 형님 폐하, 오늘의 이 곤경을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신들이 꾸민 일이옵니다. 무사히 가시오소서…
왕건: 무슨 소리인가? 이…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김락: 폐하! 부디 이 곳을 빠져 나가시어 사직을 보존하시오소서!
전이갑: 신들을 용서하시오소서…폐하, 부디 이 곳을 무사히 나가시오소서!
전의갑: 사직을 보존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나를 속였구만…모두들 나를 속였어! 나를…나를 속였어…! 이제 보니, 아우가 나로 위장하여 적진으로 가는 사이에 이 형보고 도망가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신숭겸: 용서하시오소서, 형님 폐하. 형님 폐하를 위해 목숨을 다할 수 있게 되어 이런 기쁨과 영광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형님 폐하…
김락: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폐하!
(그 말을 듣던 전이갑도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왕건: (좌절하며) 이…이럴 수는 없다…내 목숨 하나 살자고 아우와 제장들을 다 죽이다니, 이럴 수는 없다! (군졸복을 벗으려 하며) 나는 아니 갈 것이야, 나는 아니 갈 것이야!
신숭겸: 무엇들 하시오? 어서 폐하를 뫼시시오!
복지겸: 폐하…용서하시오소서!
박수문: 폐하!
박수경: 폐하!
왕건: (복지겸 등을 뿌리치며) 놔라! 이것들 놓지 못할까?! 나는 아니 간다! 나는 아니 가!!!
신숭겸: 형님 폐하, 가셔야 하옵니다! 형님 폐하의 어깨에는 대 고려제국의 명운이 달려있사옵니다. 신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시오소서. 부디, 부디 강건하시고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니 되네…아니 돼…아니 돼!!
(그러나 왕건의 오열을 뒤로 하고 그들은 서서히 일어서며 하직 인사를 올린다.)
왕건: 아니 돼…아니 된다, 아니 돼…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돼…
신숭겸: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무사히 가시오소서, 형님 폐하…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린다.)
왕건: 아니 된다…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된다! 아니 돼!!!!(여기까지가 160화.)
(여기부터가 161화.) 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돼!
신숭겸: (독백)형님 폐하…대장부들이 가는 길이옵니다. 슬퍼하지 마오소서…사내들의 의리가 다 이와 같은 것이 아니옵니까? 형님을 위해 아우가 감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부디, 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우야! 숭겸 아우야!! 김락 장군! 전이갑 장군! 의갑 장군! 장군들…! 이것들 놓아라…놓치 못하겠는가? 이것들 놔! 놓지 못하겠는가! 내 어찌 아우와 장수들을 죽이고 이 한 목숨 연명하랴…? 놓아라, 이것 놓치 못할까!!!
복지겸: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미 장수들이 떠났사옵니다. 폐하를 위하여 그리고 국가 사직을 위하여 장렬한 선택을 한 저들이옵니다!
박수문: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의 큰 뜻을 받으시오소서!
왕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한 나라의 황제가 할 짓이 아니야.
복지겸: 폐하, 폐하께오서는 바로 국가이시며 제국의 주인이시옵니다! 만 백성의 어버이께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어나 백성의 안녕을 찾는 것은 당연한 본분이시옵니다! 그들의 뜻을 받으시오소서! 그리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왕건: 이 일을 어찌할꼬…? 내 아우와 저 장수들을 어찌할꼬? 아니 된다…! 아니 된다!!!!!!(왕건은 통곡한다.)
왕건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이후 전투에서 백제군을 맞닥뜨린 신숭겸과 김락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다.
김락: 장군, 폐하께서는 충분히 이곳을 빠져나가셨을 것이오.
신숭겸: 그러셨을 것이오. 이제, 앞에는 길이 없소이다.
김락: 그렇소이다.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구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서로를 쳐다본 후에 백제군한테 진군한다.)
신덕: 쏴라!
(김락이 화살을 맞고 낙마하면서 죽고, 다음에 신숭겸이 화살에 맞았다.)
신덕: 고려 왕이 맞았다! 고려 왕이 맞았어!
(신숭겸이 화살은 맞은 후에 말에서 낙마했다. 그리고 백제군 군사들이 목을 베기 위해 다가오기 직전에 장렬히 전사했다.)
신숭겸: 그러셨을 것이오. 이제, 앞에는 길이 없소이다.
김락: 그렇소이다.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구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서로를 쳐다본 후에 백제군한테 진군한다.)
신덕: 쏴라!
(김락이 화살을 맞고 낙마하면서 죽고, 다음에 신숭겸이 화살에 맞았다.)
신덕: 고려 왕이 맞았다! 고려 왕이 맞았어!
(신숭겸이 화살은 맞은 후에 말에서 낙마했다. 그리고 백제군 군사들이 목을 베기 위해 다가오기 직전에 장렬히 전사했다.)
그렇게 이들의 고귀하고 장렬한 희생 덕분에 왕건은 전장을 빠져나왔으나, 일행들과 떨어진 채로 홀로 산 속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30] 낭떠러지에서 구르는 등 갖은 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복지겸 및 박수경, 박수문 형제와 재회한다.
이후 162회에서 최응의 지시로 대야성에서 급파된 배현경과 홍유가 이끄는 지원군이 왕건을 구조했고,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31] 공산으로 돌아가서 장수들의 시신과 전사자들을 수습해 송악으로 쓸쓸히 돌아가는 모습[32]과, 왕건의 목을 취한 줄 알고 기뻐하다 신숭겸의 수급임을 확인한 견훤과 백제 장수들 모두가 갑분싸가 되는 모습이 나온다 . 어쨋든 기록상으론 이 때의 고려 전사자 규모보다 후에 고려의 재역전을 하게 된 고창 전투의 백제 전사가 규모가 좀 더 컸던 것처럼 쓰여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고려군이 1만여 명 가까이가 거의 전부 싸그리 전멸한 것처럼 나와 후에 고창 전투에서의 백제군 전사자 8천명 보다 2천이나 더 큰 피해를 봤던, 실제 기록보다 더더욱 끔찍하고 참담한 패배로 묘사되었다.
이후 162회에서 최응의 지시로 대야성에서 급파된 배현경과 홍유가 이끄는 지원군이 왕건을 구조했고,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31] 공산으로 돌아가서 장수들의 시신과 전사자들을 수습해 송악으로 쓸쓸히 돌아가는 모습[32]과, 왕건의 목을 취한 줄 알고 기뻐하다 신숭겸의 수급임을 확인한 견훤과 백제 장수들 모두가 갑분싸가 되는 모습이 나온다 . 어쨋든 기록상으론 이 때의 고려 전사자 규모보다 후에 고려의 재역전을 하게 된 고창 전투의 백제 전사가 규모가 좀 더 컸던 것처럼 쓰여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고려군이 1만여 명 가까이가 거의 전부 싸그리 전멸한 것처럼 나와 후에 고창 전투에서의 백제군 전사자 8천명 보다 2천이나 더 큰 피해를 봤던, 실제 기록보다 더더욱 끔찍하고 참담한 패배로 묘사되었다.
- 천년의 신화: 고려 3번째 미션으로 등장. 여기에서는 왕건과 신숭겸이 참전한다. 동쪽의 후백제 성을 함락시키면 갑자기 후백제의 유닛들이 몰려와 왕건을 포위하기 시작하고[33], 서쪽으로 왕건과 신숭겸을 도주시키면 신숭겸이 혼자서 대신 싸우는 틈을 타 왕건은 재빨리 퇴각하는 것으로 나온다.
[1] 이게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6백여 년 전에 중국 대륙에서 비수대전이 일어났던 곳의 지명도 팔공산이다. 동진으로 치고 내려오던 전진 군사들이 팔공산에 이르렀을 때 팔공산의 풀과 나무들이 동진의 병사들로 변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두려워하다가 물러났다는 고사인데(실제로는 팔공산에 매복한 동진군의 모습이 설화화된 것이겠지만) 중국 것이라면 찬물이라도 좋다고 일단 마시고 보던 시절의 갖다붙이기식 지명이라고 해도, 하필 그 비수대전의 승자가[2] 후백제군과 승병의 연합군이다. 팔공산 전투 당시 견훤이 이끈 군사의 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5,000명으로 추정.[3] 강공훤의 군사 10,000명 + 왕건의 기병 5,000명 + 김락의 군사 + 황보능장을 비롯한 여타 호족들의 군사를 합한 수치.[4] 김락군, 호족지원군, 강공훤군은 불명.[5] 환선길의 난, 이흔암의 난,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의 반기, 공직의 배신, 청주 호족들의 소요, 웅주(옛 웅진) 일대 호족들의 대거 이탈 등 고려가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은 초창기에 수많은 장수들이 죽거나 이탈하고, 영토는 거의 반토막이 난다. 하지만 견훤이 내란으로 소란스럽던 고려를 치지 않은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지 얼마 안된 초기 혼란상 와중에 견훤은 대야성(합천군)을 거의 15년에 달하는 후백제의 꼬라박음 끝에 신라한테서 대야성을 완전히 빼앗고, 충청도-경상북도 쪽으로는 문경새재 일대를 손에 넣었다. 대야성과 문경새재 모두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데다, 문경새재 일대는 견훤의 고향(당시 상주 가은현, 2022년 기준 문경시 가은읍)이었기에 견훤은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은 초기 고려의 혼란상을 틈타 정치적, 군사적, 가문(개인적)의 이득을 크게 봤다.[6] 고려에 간지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견훤은 이를 고려에서 죽인 것이라고 의심했다.[7]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이 급하게 밤낮으로 달린 걸로 나오나 이는 긴박함을 연출하기 위한 고증 희생이다.[8]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9] 이는 오늘날에도 그런데 사람이 적고 경제력이 딸리는 도외지의 행정구역은 매우 넓은 반면에 반면에 인구가 많고 세수가 커지면 행정구역은 촘촘이 작아진다. 동서고금 다 그런 경향이 있고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것이, 사람이 많이 살고 생산량이 많으면 당연히 이를 관리할 관청도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행정구역이란 관청의 개수로 정해지는 것이므로, A시에 도시 10개분의 인구가 살면 시청을 10개 세우는 게 아니라 그냥 A시를 10개의 도시로 쪼개버려야 한다.[10] 동진(東晋) 때 흉노에 대한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 이남을 회복한 명장이다.[11] 수나라의 무장으로 진 공격 때에 후주 진숙보를 잡은 인물이다.[12] 외사촌 동생[13] 왕건의 군대가 견훤의 군대에 '박살'이 났다는 의미로 붙여졌다는 파군재에서 동화사-파계사 갈림길 올라가는 길 사이에 왕산이라는 산이 있고, 미리사는 이 산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조선 시대까지는 있었던 것 같다. 왕산 밑에 신숭겸의 순절단과 표충단이 위치해 있는데 아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인듯. 왕산이 위치한 지역의 행정구역명인 '지묘동(智妙洞)'도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왕건으로 변장하고 나아가 싸우다 죽었다는 이른바 '위왕대사(爲王代死)'의 일화에서 그러한 신숭겸의 지혜가 참으로 교묘하였더라, 하는 찬사를 담은 이름이다.[14] 그러니까 "나는 평화주의자라 싸움이 싫은데, 니가 자꾸 싸움을 걸어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비아냥이다.[15]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전설상의 새를 가리킨다.[16] 비슷한게 비류수 전투. 자신만만했던 동천왕이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난다.[17] 애초에 한국 역사에서 왕이 직접 전투에 참가한 건 태조 왕건, 견훤이 마지막이라서 적을 수밖에 없다. 왕건 이후 고려왕들과 조선왕들은 전투에 나간 적이 없다. 태조 이성계도 왕이 되기 전에만 전투에 나섰지, 왕이 된 이후엔 전투에 나선 적이 없다. 태종 이방원이 조사의의 난 당시 출병한 적이 있긴 하지만 출발 나흘만에 개경으로 귀환한다.[18] 의성군, 안동시, 영주시, 봉화군 등 경북 서북부는 내내 죽기살기로 저항했지만 이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최전성기 견훤한테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곳이 의성과 안동. 의성은 저항끝에 견훤한테 함락됐고, 견훤은 안동(당시 명칭 ‘고창’)을 점령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몰고 오는데…[19] 오랫동안 궁예 충성파였는데, 왕건이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다. 이에 분노하여 대놓고 반기를 들어 전면전까지 하려 들자 왕건도 무시하거나 맞불을 놓으려고 하지 못하며 굉장히 경계했다. 그나마 아버지 허월의 설득으로 전면전은 안 일어났지만 여전히 독자 노선으로 왕건과 대립하였다. 귀순 후에는 후삼국 최후의 전투였던 일리천 전투에서 자체적으로 1만 군사를 동원한 게 괜히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20]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중동 및 달성군 가창면 일대다.[21] 팔거현(八居縣)이라고 고려 때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 대구 북구 칠곡동 및 구암동 그리고 칠곡군 지역이다.[22]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지역이다.[23]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이다.[24]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대기업의 계열사들을 다른 대기업으로 모조리 옮기고 기존 본사인 대기업을 다른 대기업 계열사로 격하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25] 고려의 지방행정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다스리느냐 아니면 현지 토호가 다스리되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된 고을의 통제를 받는 지역이냐직영점이냐 가맹점이냐에 따라서 그 고을의 격이 달랐다. 대구현령의 파견은 대구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지역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26] 실제로는 이 전투에서 추허조가 김락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생포당하지만, 담당배우 강재일이 서인석과의 불화로 중도하차하면서 916년의 대야성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다.[27] 최승우가 후백제의 삼한 통일 계책을 설파하면서 포스를 뿜어내는 대목으로, 파진찬의 팬이라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다.[28] 고려군 역시 공산지역에 매복군이 있을 것을 염려해 수시로 정찰대를 보내 주변을 살폈지만, 견훤은 이를 노리고 고려군의 진입로에 빈 진영을 세워 후백제군이 여전히 서라벌에 있을거라 착각, 방심하게 만들었다.[29] 실제 역사에서는 왕건이 일부러 천천히 가서 후백제가 덫을 파놓을 시간을 줘서 당했다면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군이 전략을 잘 짜놓고 성공시킨 것도 있지만,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겠다고 무려 사흘간 제대로 쉬지도 않고 강행군을 한 탓에 병사들의 상태가 최악인 점도 있었다.[30] 신숭겸을 비롯한 제장들이 몰살당하는 동안 왕건을 비롯한 소수 인원들은 밤중에 탈출을 감행했으나,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탈영병을 잡던 소규모 후백제군 병력과 조우한다. 하필 왕건과 복지겸, 박수문, 박수경 형제 등이 왕건을 폐하라 부르며 존대하고 있던 상황이다보니 더더욱 의심을 받고 만다. 결국 검문에 응하는 척 하면서 복지겸이 백제군 부장을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측근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왕건은 홀로 도망쳐버린다. 하지만 복지겸 일행이 꽤 잘 싸운 덕분에 오히려 후백제군이 패퇴하고 왕건의 측근들도 탈출에 성공한다. 작중 왕건은 무력 상위권으로 묘사됨에도 이때는 정작 싸울 생각 못하고 부하들이 시간을 벌어줄 때 허둥지둥 도망가기 바빠서 스트리밍 시청자들은 직접 싸우지 왜 도망가냐 이해 못하는 반응이 다수였는데 일단 왕건이 괜히 교전에 직접 나섰다가 잘못되면 신숭겸과 김락, 전의갑, 전이갑의 희생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왕건은 장수들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진 사실에 멘탈이 나가있던만큼 제대로 싸울 정신도 아니었다.[31] 이미 신숭겸의 수급이 사라졌기에 목 없는 시신만 봐선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도 배현경이 신숭겸의 왼발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다는 신체적 특징을 기억해 찾을 수 있었다.[32] 해당 화에서 내레이션으로 친절하게 왕건 최대의 패배라고 한번 더 짚어준다.[33] 후백제 성 함락 직후 대화창으로 뜨고 이후 고려 본진 북쪽에서 후백제군이 스폰된다. 전멸시켜도 일정 주기마다 스폰되기에 망루도비를 해놓으면 막을 수는 있으나, 스폰 부대에 충차가 포함되기 때문에 오래 막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