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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9:21:24

함무라비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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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de_of_Hammurabi_IMG_1932.jpg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함무라비 법전.[1]
파일:hammurabi.jpg
▲법전 맨 위에 있는 조각을 확대한 모습.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함무라비 왕, 오른쪽 의자에 앉은 신은 샤마쉬이다.[2]

1. 개요2. 설명
2.1. 동해보복의 원칙
3. 법전 내용 (일부)
3.1. 재판(1-5조)3.2. 절도죄(6-25조)3.3. 군법(26-41조)3.4. 농업 및 가옥 (42-87조)3.5. 상법 (88-111조)3.6. 채무 및 공탁 (112-126조)3.7. 친족 (127-132조)3.8. 배우자의 장기부재 (133-136조)3.9. 이혼 (137-143조)3.10. 취첩 (144-153조)3.11. 근친상간 (154-164조)3.12. 상속 (165-184조)3.13. 양자 (185-193조)3.14. 유모3.15. 존속폭행3.16. 상해 및 치사 (196-214조)3.17. 임신부에 대한 상해3.18. 각종 직업 (215-277조)
3.18.1. 의사3.18.2. 건축업자와 선원3.18.3. 축력과 인력의 사용
3.19. 노예에 관한 법 (278-282조)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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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1년에 발굴된 기원전 1755년 ~ 1750년경에 고대 바빌로니아함무라비 왕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추정되는 법전. 전문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데 표기에 사용된 언어아카드어이고 문자쐐기 문자이다.

2. 설명

당시에 신실한 영주이며 신들을 경외하는 나 함무라비가 정의를 이 땅에 세워 악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없애고 약자들이 강자에게서 상해를 입지 않도록 태양신과 같이 사람들 위에 떠올라 국가를 밝히도록, 아누엔릴은 사람들을 잘 살게 하도록 나의 이름을 불렀다.
- 함무라비 법전 서언 中[3]
법률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은 '정의의 임금' 입상, 곧 나의 법률이 서술된 돌 앞에 와서 그 법을 읽고, 나의 법을 담은 돌은 그에게 그 내용을 소개해야 한다. 그러면 시민은 무엇이 정의로운가를 발견하고 마음이 기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백성들에게 아버지 같은 주군이신 함무라비는 그의 신인 마르둑의 뜻을 하늘과 땅에 이르도록 노력하였고, 마르둑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규정하였으며 땅에 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을 그가 말하기 바라며, 나의 신 마르둑과 나의 여신 자르파니투[4] 앞에서 온 마음으로 나를 축복하기 바란다. 에사길에 머무는 보호의 남신과 여신은 매일 나의 신 마르둑과 여신 자르파니투 앞에서 나의 소리에 따라 올바로 행하기 바란다.
미래에 이 땅에 즉위하는 임금은 내가 돌을 새겨 놓은 저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기쁘게 받아들인 법을 바꾸거나 폐기하지 않기 바란다. 만일 임금이 나라를 올바로 이끌 통찰력과 능력이 있다면, 내가 돌에 새겨 놓은 이 법을 주시하고 받아들여서, 내가 이 땅에 펼친 정의와 나라를 위해 내린 올바른 결정들을 이 돌을 통해 볼 것이다. 이 돌이 백성들을 올바로 이끌 것이고 백성들에게 정의를 펼칠 것이며 그 땅에 있는 악인들을 구분하여 격리시켜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할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 결언 中[5]

고대 법전 중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법전으로 한때 인류가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문법은 1951년 발굴된 우르남무 법전으로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300년 이상 빠르고, 함무라비 법전은 우르남무 법전의 영향을 받기까지 했다.[6] 그럼에도 여전히 함무라비 법전이 더 유명한 이유는 함무라비 법전 발굴 당시 전세계에 돌던 고고학 열풍과 제국주의 시대 당시에 발전한 통신 기술이 맞물린 덕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6백년 후인 기원전 1158년에 엘람 왕국에게 약탈당했고, 3천 년동안 이란에 머물다가 1901년 이란에서 유적을 발굴하고 있던 자크 드 모르강의 프랑스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어[7] 프랑스로 옮겨졌고, 루브르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

이전까지 내려오던 수메르 법에 아카드 법을 절충하고 집대성하여 282개 판례 조항으로 이뤄져 있고, 법의 처리 절차를 규정한 절차법보다 어떤 규범을 정해놓은 실체법의 성격이 강하다. 흔히 동해보복형 형법규정과 엄벌주의로 유명하지만 사실 현대로 치면 민법과 상법에 해당하는 사법 규정도 상당 부분이 포함되어 혼인과 이혼 등 가족관계 및 소유관계, 직업, 토지경작권과 소작, 채무, 이자, 담보, 노동자 고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자유민'과 '평민', '노예'의 3계급제 신분 사회였으므로 어떤 신분이 어떤 신분에게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따라 처벌 방식이 다 달랐다.[8]

이 법전의 의의는 성문법이라는 점 외에도 사유재산과 화폐 사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과 개별 도시법(都市法)들을 왕국의 통일된 법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9] 시대적 한계를 못 벗어난 법조항들도 있지만 지금 봐도 합리적일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은 법조항들 역시 많다.

2.1. 동해보복의 원칙

"동해보복"을 원칙으로 하며 흔히 알려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 탈리오 법칙 lex talionis)이 나온 법전이다.[10] 곧,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 한 자는 눈을 멀게 하는 등등. 가짜 술을 판 자는 물에 빠뜨려 죽이는 형태도 있었다. 자유형 형벌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시무시해 보이고, 반대로 엄벌주의자들은 이걸 언급하면서 고대시대 법이 차라리 더 합리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잔인해 보이는 성문법이 나온 시기는 인류가 유목이나 수렵과 같은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얼굴 붉히는 일이 생겼어도 계속 같이 붙어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목민과 같은 원시 부족 사회에서 부족 내부 구성원이 아닌 외부와의 투쟁이나 내부인들 간의 분쟁으로 일어나는 폭력의 정도는 지극히 동물적이고 감정적인 발로에서 시작하고 결말도 파괴적이다. 가령 가축을 훔쳤다거나, 방목지가 겹친다거나, 가축에 물을 먹이다가 시비가 붙는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에도 당사자들의 감정이나 피해가 제대로 봉합되지 않는다면 결국 칼침이 날아온다! 이는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는 상대에게 손해 이상의 보복을 하여 상대로부터 자신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본능이다.[11] 거기다 당시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감옥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형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결국 중재할 적절한 방법이 없을 경우 서로 악감정이 쌓이고 쌓이며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결국에는 공동체가 공멸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12] 그래서 원시부족들은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여러 관습, 금기를 가지고 있다. 일단 음식을 대접한 손님이면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접대의 관습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13] 다르게 보면 이런 평화유지적 관습을 정착시키지 못한 집단은 붕괴해버린다.

즉, "동해보복"의 원칙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똑같이 앙갚음을 하게 하는 야만적인 법이 아니다. 이 법전의 골자는 '상대방이 내 팔을 부러뜨렸다면 똑같이 팔을 부러뜨려 복수를 해라'가 아니라 '똑같이 상대방 팔까지만 부러뜨릴 수 있고 그 이상 나가 다리까지 전부 부러뜨리거나, 죽일 수는 없다'이다. 사형에 처할 때도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화형이나 거열형, 능지형처럼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았다.[14] 현대의 법도 범죄자가 지은 죄보다 과도하게 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함무라비 법전의 골자는 현재에도 유효하다.[15] 이 동해보복의 기준을 세우는 더 강력한 권위의 중재자를 자처한 것이 바로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이며 이것이 공권력의 시작, 그리고 형사법과 죄형법정주의, 법치주의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동해보복의 원칙에서 더 나아가 동해보복이 적용하기 힘든 상황에 대해서도 계급에 따라 대체할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였다. 노예는 재산 취급이므로 노예에 대한 폭행이나 상해는 돈으로 때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의료사고로 환자가 불구가 되면 의사의 손을 자르라고 되어 있지만 환자가 노예인 경우는 돈으로 때우도록 되어 있다. 반대로 자유민이 귀족을 향해 저지른 범죄는 가중처벌 될 수 있었다.

3. 법전 내용 (일부)

3.1. 재판(1-5조)


엄밀히 말해 함무라비 법전의 1조와 3조는 현행법의 무고죄위증죄와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현행법의 무고죄와 위증죄는 "고의로 허위의 사실을 신고 또는 진술한 경우"를 처벌하는데, 함무라비 법전의 1조와 3조는 "자신이 신고 또는 진술한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때"를 처벌한다. 입증하지 못한다고 허위는 아니지만, 허위라면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무고죄나 위증죄의 초기형태라 볼 수는 있다. 이 방법의 문제는 만약 용의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하여 고발자가 입증을 못하게할 경우 고발자는 허위고발로 몰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3.2. 절도죄(6-25조)

3.3. 군법(26-41조)

3.4. 농업 및 가옥 (42-87조)

3.5. 상법 (88-111조)

3.6. 채무 및 공탁 (112-126조)

3.7. 친족 (127-132조)

3.8. 배우자의 장기부재 (133-136조)

3.9. 이혼 (137-143조)

3.10. 취첩 (144-153조)

3.11. 근친상간 (154-164조)

3.12. 상속 (165-184조)


위의 조항들을 보면 남편의 재산권과 아내의 재산권을 명확히 분리한 것을 알 수 있다.

3.13. 양자 (185-193조)


이 조항들을 보면 흥미롭게도 환관들은 양자를 들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세계 많은 문명권과 시대에서 환관을 운용했지만 환관에게 양자를 들이는 제도를 마련한 것은 중국조선 외에는 많지 않았다.[67]

3.14. 유모

3.15. 존속폭행

3.16. 상해 및 치사 (196-214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이들 조항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극히 계급 간에 불평등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전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법으로 정한 것 이상으로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보다 계급 간 불평등이 더 심했던 사회에서 만약 평민이 귀족의 눈을 빠지게 했다면, 그 평민은 죽고 그 가족은 노예로 팔려 갔을 것이다. 반면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똑같이 눈을 빼는 것으로 처벌을 제한하였다.

3.17. 임신부에 대한 상해

3.18. 각종 직업 (215-277조)

3.18.1. 의사

보면 알겠지만 의사는 자신이 치료해 준 사람의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로 인해서 의사들 입장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치료하는 걸 더 선호했겠지만[69] 의의를 따져보면 계급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미리 정해두어 낮은 계급의 사람이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일을 줄이게 하려고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진료를 하면 바로 그 댓가를 지급받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내어야 이를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현대의 의료행위는 원하는 결과발생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 댓가를 지급받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70] 이는 당시의 진료행위의 성공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임을 추정할 수 있다.

3.18.2. 건축업자와 선원

3.18.3. 축력과 인력의 사용

3.19. 노예에 관한 법 (278-282조)

4. 기타

함무라비 법전의 결문에는 '함부로 이 법전의 내용을 고치거나 짐(함무라비)의 이름을 지우면 신의 징벌이 따를 것이다'는 내용이 있는데 훗날 바빌로니아를 침략한 엘람 왕국의 슈트룩나흐훈테 1세 왕이 이걸 탈취해 자국으로 가져가서는 법전의 하단부 일부를 지운 뒤 자기 전공을 새기려고 했으나 지워놓고 딱 새로 새기려던 찰나에 진짜로 나라 자체가 공중분해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82] 이때 지워진 십여개의 조문은 다른 문헌자료를 토대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법전은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 샤마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샤마쉬는 방금 전에 서술한 것처럼 태양의 신이기도 하지만, 법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막상 살인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남편을 살해하면 아내를 말뚝으로 찔러 죽인다’는 조항처럼 특수한 사례에 대해서만 처벌 규정이 있을 뿐이다. " 앞에서 확증"이란 말이 매우 자주 나오는 것 치고, 그 맹세가 거짓 맹세였을 경우 어떻게 처벌하는지에 대해서도 126조를 제외하고는 별도 규정이 없다. 이런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관습에 따라 너무나 당연한 이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별도로 처벌 규정을 두지 않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83] 다만 잃어버린 재산과 관련된 확증에서는 처벌규정이 있지만 단지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액수만큼을 물어내라고 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징역 얘기는 안 나오는데 당시엔 자유형 개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84]

은 1미나는 1세기 경에는 농장 인부의 석달치 월급에 해당한다. 함무라비 시대에도 거금이었다. 1미나는 60셰켈과 같다. 제273조에 따라 하루 은 5~6셰켈을 받는다고 하면 열흘에서 12일치 봉급에 해당한다.[85] 2019년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은 1미나는 약 470달러(한화 약 56만 5천원) 정도이다.[86] 그래서 한달을 30일로 잡으면 당시 한달 최저임금을 환산 시 2019년 한화로 최소한 160~170만원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9년 한국 최저임금 기준 월급과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편, 법전에서 많이 등장하는 부피 단위인 1구르는 약 18000L, 1카는 약 120L 정도이다. 상법에 보면 곡물 1구르에 대하여 60카의 이자를 받는다고 나오는데 이율을 환산하면 40%다. 은의 경우에는 1셰켈당 1/6셰켈의 이자를 받았으므로 17%의 이율이다. 즉 곡물을 빌렸을 때 이자를 더 비싸게 받았다. 시대를 고려하면 이정도 이율도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87]

이라크 2만5천디나르 지폐 뒷면에 도안으로 실려 있다.


[1] 2,35m 높이의 함무라비 비석은 검은 섬록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만에서 채석된 것이다.[2]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쪽에 앉은 이를 함무라비 왕으로 알고 있는데, 위 장면은 함무라비 왕이 신하에게 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샤마쉬 신이 함무라비 왕에게 법을 하사하는 장면이다.[3] 이는 임금의 자기자랑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법전이 가진 목적의 표현이기도 하다.[4] Zarpanitu. 마르둑의 부인.[5] 서언과 결언은 채홍식 역주 《고대 근동 법전과 구약성경의 법》에서 간접 인용하였다.[6] 함무라비 법전에서 나타나는 서문과 본문, 결문의 체계는 우르남무 법전의 구성을 계승한 것이다.[7] 발견 되었을 당시 함무라비 법전은 세 토막으로 파손된 상태였다.[8] 뒤에 설명되겠지만 이는 신분 차별의 목적도 있지만 높은 신분이 낮은 신분에게 벌이는 사적제재의 남용을 통제한 것이기도 하다.[9] 전국을 통일하고 동일한 법으로 통치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업적과 비견되지만 함무라비가 진시황보다 천년 이상 앞선다.[10] 동해보복 자체는 함무라비 법전뿐만 아니라 관습적으로도 사회체계가 잡힌 곳에서는 인정되는 방법이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친 만큼 배상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당연하기 때문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이를 법전의 형태로 체계화하고 정리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11] 악명을 떨치려는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것을 침범하는 상대방을 볼 때마다 전부 쫓아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상대방에게 본인에게 잘못 걸리면 얻는 이득보다 더 큰 손해를 안겨주겠다는 본능적인 교육 목적도 있다.[12] 현실성 없어 보이지만 현대에도 복수의 관습이 만연한 경우에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알바니아카눈이 대표적인 사례다. 단순히 두들겨 맞았다는 이유로 살인으로 응답하고 또 그에 따라 더 심한 복수를 하는 등 막장이다. 심지어 복수가 당대로 끝나지 않고 자식대로 내려오기까지 한다. 현대조차 이럴진대 고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정말로 이런 지역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식 '동해보복의 원칙'이 차라리 더 합리적일 정도로 막장극이 벌어지는 셈이다.[13] 모든 문명이 이러한 관습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 교류하지 않은 문명 사이에서도 인류가 사회를 형성하면서 이러한 공통적인 부분을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4] 다만 모자 간 근친상간이나 여사제의 음주화형에 처한다고 따로 명시되어 있다.[15] 다르게 보면 사적제재를 금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만일 법에 불복해서 가해자를 죽였다고 가정하면 이번에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법에 의해 죽을테니까[16] 이러한 재판 형태을 시련재판(trial by ordeal)이라고 하는데 무고한 사람은 신이나 정령이 도울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 물, 독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하는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정적을 처리하거나 처형할 만한 사유가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 사용되어서 더 오래된 우르-남무 법전에만 봐도 같은 조항은 있지만 가라앉는지 뜨는지 중 어떤 것이 무죄인지 판례가 없으며 중세에 가선 1338년 밀렵꾼에게 내린 판결을 보면 아예 뒤집혀서 가라앉는게 무죄라고 판결한다. 그 후 마녀재판 시기에 남용되는데 기원전부터 있던 전통적인 형벌을 악마가 물속에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온다는 엉뚱한 논리로 포장해서 사용하게 된다. 단 마녀재판은 마녀사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의도와 목적이 현대인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랐다. 마녀사냥 항목 참조.[17] 즉, 생명 관련 재판에서 위증하지 말라는 것. 생명 관련 재판에서 위증을 하면 무고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18] 계약 없는 증여를 금지하고 있다.[19] 6조에서 '신전이나 왕궁에 속한 재산'은 영문에서 'property of a temple or of the court'로 번역된 반면, 8조의 '신전이나 궁전에 바칠 것'은 영문에서 'it belong to a god or to the court'로 번역되어있다. 즉, 8조에서 나열된 가축들은 신전이나 왕궁의 소유가 아니라 신이나 왕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볼 수 있다.#[20] 이 점으로 보아 이 때에는 형벌노예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21] 도망치는 노예가 자신의 집에 숨었다고해서 노예를 붙잡아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았다. 선택적인 행동과 강제적인 의무를 명확히 구분했다고 볼 수 있다.[22] 포로가 되었지만 자신의 몸값을 치를 군인에 대한 몸값을 국가가 배상하도록 되어있는 조항이다.[23] 만약 대신한 사람이 전사했다면 28조와 29조에 따라 전사자의 유족이 집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24] 추정상 이 시대에는 삼포제가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3년에 한번씩 경작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면 4번째 해를 강조할 이유가 있다.[25] 이는 홍수나 가뭄으로 인한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를 망쳤을때 채무자가 빚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농사를 망쳐서 먹을것도 없는데 빚까지 갚아야 한다면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26] 위와 비슷한 원칙이 목자와 과수원 경영자에게도 적용된다(57~59조).[27] 즉, 허가없이 밭에 양을 들여보내 풀을 뜯게 하였음에도 땅주인은 수확물의 피해에 대해 정해진 액수 이상의 추가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28] 똑같이 반을 나누지만 우선적인 선택권은 토지의 주인에게 있다.[29] 임차인이 집주인의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의 유지보수의 의무를 떠맡도록 규정되어 있다.[30] 즉 이자에 대한 상한선을 설정하여 채무자가 과도한 빚을 지지 않게 하는 것은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자율이다. 은 1셰켈에 1/6 이상 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을 백분율로 환산하면 약 13%다. 조선시대 성종이 내수사 운영에 대해서 "시중 이자는 50%인데 내수사에서는 30%만 받으니 괜찮은거 아니냐" 라고 옹호했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이자율이 훨씬 낮다고 할 수 있다.[31] 즉, 이 법은 상인이 법에 정해진 이자 상한을 초과하여 받을 경우 그 이자의 근거가 되는 채권 전체를 압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32] 영수증 의무 발행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다.[33] 불고지죄를 규정한 것이다. 만일 이 조항이 합리적이라면 추정상 법전 어디에도 남주인을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아 당대에는 여자가 술집 주인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예나 지금이나 술집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는데 그걸 주인 혼자서 말리는 것은 꽤나 벅찬 일이며, 심지어 여자라면 말이 필요없다. 때문에 술집 주인은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제압하게끔 힘센 사람을 고용한다든가 노예를 동원한다든가 하는 식의 방법을 썼을 것이고 이 분위기에 맞게 '불량배는 술집에서 제압할 것'이라고 법을 만들었다면 말이 된다. 어쨌든 여주인이 '직접' 잡아오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34] 현행 민법, 민사집행법의 압류금지채권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35] 현행법의 점유강취죄와 일정 부분 유사하다 하겠다.[36] 이런 조항이 있었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채무자가 빚을 못 갚으면 채권자가 채무자의 아들이 죽이는 악습이 있거나 아니면 홧김에 죽이는 일이 많았다든가 할 수 있고 때문에 채무자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로 보인다. 즉 채무를 변제하지 않으면 대를 끊어버리는 극악 무도한 짓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법률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채무자의 아들이 구타당해 죽으면 '무조건' 채권자의 아들이 죽게 되어 있다는 점과 '구타당해' 죽은 것에 대한 조항만 있어서 전자의 경우 채무자가 하지 않았음에도 책임을 지거나 최악의 경우 '채권이 취소된다.' 라는 점을 노려 자기 아들을 구타하여 죽인 뒤 채권자가 죽였다고 누명을 씌우는 막장 채무자가 나올 수 있고 후자의 경우 구타만 해당되니 '사고사 위장' 이라는 방법을 쓸 수 있다. 허나 수메르 사회는 인력 그것도 농경, 목축, 군사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젊은 남성은 매우 중요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집의 아들은 대를 잇는 존재라는 점을 바탕으로 할 때, 굳이 채무를 면탈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위 조문의 제정 취지는 '무려 남의 아들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짓을 하다니! 당신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어라!'에 가깝다.[37] 반대로 고구려 같은 경우는 채무자가 빚을 못 갚으면 그 자식을 노비로 삼게 되어 있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자비로운 처분, 물론 3년밖에 못 부려먹는 채권자 입장에서는 혹독하게 쥐어짜낼 수도 있겠지만...[38] 현행 형법의 반의사불벌죄 혹은 친족간의특례 등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다. 특히 주관적불가분원칙이 적용되는 점 또한 유사하다.[39] 함무라비 법전은 간통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현행범 체포를 요건으로 하고 있다. 즉, 간통 현장에서 잡혀야 한다는 의미. 이는 사형(수장형)으로 처벌되는 사안의 중대성으로 인하여 단지 강한 의심 정도로 처벌되는 일을 방지하고자 현행범 성을 처벌의 요건으로 함으로써 혐의 입증의 엄격함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40] 현대 대다수의 지역에서는 130조 그대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해서 아무 책임을 묻지 않고 그게 당연하다는걸 모두 알고 있다. 이는 명예살인이 횡행하는 국가에서도 원칙은 그러하다. 다만 여성에게 전가하는 전근대적 풍습이 일부지역에 남아있을 뿐이다.[41] 이슬람교도가 많은 국가에선, 여성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며 함무라비 법전이 쓰이던 기원전 시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쿠란 24장 4절에는 4명의 간음증인 없이 무고한 여성을 비방하면 매를 때리라는 말이 적혀있으며, 이슬람 관습법인 샤리아에는 강간피해를 당한 여성이 간음으로 모욕당하지 않고 강간피해를 당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권리를 제시한다. 샤리아를 국가형법으로 대체한 현대에 와선 더더욱 피해자 여성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42] 다만 이 조항에는 맹점이 있다. 제130조는 오직 처녀이고 미혼이라 가부장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만을 보호하고있으며 기혼자에 대한 내용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고대 근동에서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노예와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가장에 종속된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기혼자에 대한 강간은 남편, 즉 가부장의 권리를 건든것으로 여겨져서 사적처벌을 허용했다. 이후 시대의 일이지만 히타이트의 법에 따르면 기혼여성은 외간남자에 의해 겁탈당할 시 반드시 소리를 질러 주위에 알려야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화간으로 간주해 여성도 간통죄로 처벌했으며 (단 죽이지는 않았음)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해당 법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이럴 경우 가부장이 자체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43] 시련 재판이라는 개념이다. 당대에는 신이 판결해주는 재판이므로 공평한 재판으로 간주되었다. 함무라비 법전 2조 참조바람.[44] 기대가능성 없음이 인정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 남편만 목 빠지게 기다리느라 식량도 없는 집을 지키다가 굶어죽으라고 하는 건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니.[45] 수메르족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이다.[46] 아내에게 귀책 사유가 있으면 위자료를 안 주고도 이혼할 수 있되 이혼 대신 여종으로 삼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후대 이슬람교의 샤리아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47] 남편에게 귀책 사유가 있으면 아내에게 재산분할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48] 즉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조치이자 남편이 제멋대로 아내를 쫓아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보호 차원에서 넣은 조항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아래의 145조를 보듯 아내가 첩을 주지 않아도 남편은 첩을 얻을 수는 있지만 아내를 쫓아내도 된다고 하진 않고 있다.[49] 이 경우 여자가 스스로 원하지 않았는데도 두 번째 아내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의 이슬람법에 의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아내들의 동의와 허락을 구해야만 하며, 같은 집에서 모든 아내들이 거주할 수 없게 되어있다. 각각의 아내들에게 서로 다른 집을 주어야 한다. 이 이슬람식 일부다처제는 매우매우 깐깐해서 쿠란에서는 아얘 대놓고 "너님은 이거 절대 못 지킬거니 걍 포기하셈" 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고 이에 '까짓거 빡빡하면 뭐 얼마나 빡빡하겠냐'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집도 따로따로 지어줘야하는건 시작일 뿐이고 진짜 결정직인건 '대우'다. 이 아내들을 모두 평등하게 대해줘야 하는데 이 평등의 정도가 장난이 아니라서 예를 들어 무슬림이 만원짜리 A라는 물건을 선물하고 싶은데 아내는 4명이고 물건은 3개밖에 없다고 가정하면 만원짜리인 다른 물건을 하나 더 살지언정 물건이 없다는 이유로 3개만 구하거나 물건을 사도 가격이 더 비싸도 더 싸도 안된다. 이뿐만 아니라 잠자리 횟수도 같아야 하기에 한 아내하고 잠자리를 하면 다른 아내들하고도 나중에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 괜히 쿠란에서 이슬람식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너님은 절대 못 지킬거니 걍 포기하셈" 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A] 즉 아무리 아내가 자식을 못 낳았어도 첩보다는 지위가 높음을 강조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사라하갈에 대한 대우는 그러한 법의식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A] 즉 아내가 자식을 못 낳았어도 첩보다는 지위가 높음을 강조한 것이다.[52] 즉 아내가 병에 걸렸다고 버리지 말것을 명시한 것이다. 현행 형법에서도 친족상속법상 부부간의 부양 의무를 져버리는 행위를 유기죄로 처벌하는 것을 고려해보면 꽤 선진적인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53] 이는 아내에게 이혼할 권리와 위자료를 받을 권리를 준 것인데 특이하게도 남편이 이혼할 시 여자의 재산을 내줄 것까지 명시하고 있다. 이후에 등장한 많은 종교에서 이혼이 어렵거나 가능해도 여성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게 많은 것과는 대조적이다.[54] 이 조건절 이하의 내용이 152조까지 이어진다.[55] 빚 대신 사람을 노예로 내놓을 수 있던 때였기 때문에,(단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어디에도 채무 노비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채무자가 돈이 없어 처자를 채권자에게 내줘도 3년간만 일할 수 있게만 규정되어 있다.) 아내 측에서 결혼 계약 시 자신을 팔아 채무를 변제할 수 없다는 조건을 삽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6] 미혼여성에게도 독자적인 재산권이 인정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재산권이 없으면 빚을 지는 (= 돈을 빌리는) 의미 자체가 없으니까.[57] 두 사람이 결혼한 후[58] 별로 가혹하지 않은 조항 같아 보이지만 당대에는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가 멀고 숫자도 적었으며 그 밖은 이렇다할 인프라가 전무한 야생 수준이었다.[59] 이 조항은 약간 문제가 있는데 '강간'인지 '합의'인지 나와있지 않다. 전자라면 여자에겐 책임이 없지만 후자라면 얘기가 다르기 때문이다.[60] 처벌이 약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의미가 아버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 뿐만이 아닌 다른 권리들(특히 유산)까지 박탈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꽤 강한 처벌이다. '자녀를 낳은'계모로 한정한 것을 볼 때 형사취수제와 마찬가지로 자녀가 없는 첩의 경우엔 그녀를 부양할 자녀가 없으니 그 자식이 취하더라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1] 현행 민법에서도 계약금(약정위약금)을 받은 자는 배액을 상환하고, 지급한 자는 이를 포기하여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2] 결혼 시에 신부가 친정아버지한테서 받아 가지고 가는 혼수는 보통 동산이었으나 때로는 토지일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평생 아내의 것이며 자녀가 있으면 그들에게 상속되었고 자녀 없이 아내가 죽으면 친정으로 반환되었다. 이때 장인도 사위에게 그가 가져왔던 "신부의 값"을 반환함을 원칙으로 하였다.[63] 164조까지 이어지며, 지참금에서 신부대를 제하고 신부의 아버지에게 반환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보통 지참금이 신부대보다 많았음을 알 수 있다.[64] 이 점을 통해 바빌로니아는 장자상속제를 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65] 아버지 쪽은 첩을 취할 수 있는 만큼 아들들의 생모는 제각각일 수 있을테고 이 경우 어머니쪽의 모든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한다면 외가쪽이 잘 사는 쪽 아들들에게 불리하다.[66] 이 점은 후에 중세 유럽에서 서자에게 가독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쓰여지는데 중세 유럽은 대게 서자는 계승권이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서자가 아들로 인정받으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67]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환관 조등의 양자였으며 조선은 환관의 입양이 보편화되어 있어 양세계보라는 환관 족보가 있을 정도다. 일본은 예외적으로 환관 제도가 없었지만 성불구자를 궁중의 일꾼으로 채용해서 일을 시키는 사례는 있었다.[68] 일부러 죽인것은 아니니 처벌을 감해준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조항을 보면 알겠지만 대상이 '귀족' 이다. 귀족인 만큼 처벌이 셀 텐데도 죽인다든가 뭘 자른다든가 한 게 아니라 그냥 배상금만 물어주는 선에서 그치게 한 거다. 이 시대부터 이미 과실에 의한 치사상과 일반 살인죄를 구별했음을 알 수 있다.[69] 같은 질병을 치료했을 때 평민보다 귀족에게서 두배나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귀족 한 명 치료하면 평민 두 명분의 값을 받으니 같은 질병이면 귀족을 치료하는걸 선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의료사고 시 배상해야 하는 비용도 더 컸으니 마음놓고 선호하긴 힘들었을 수도 있다.[70] 예를 들어 어떤 수술이든 성공유무에 상관없이 동일한 치료비가 발생한다. 치료의 결과가 발생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치료비를 받을 수 있는 체제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영업 자체가 극도로 힘들 것이다.[71] 의료와 관련된 조문 중 안과 진료에 대한 조문이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안과 치료의 위상이 매우 드높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 눈은 매우 중요한 기관인지라 현대에도 시각을 상실한 자에게 가장 높은 장애등급을 부여할 정도인데, 하물며 육체노동의 의존도가 높았던 고대 사회에선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72] 이를 통해 낙인 등의 잔인한 방식이 아니라 특정한 머리 모양으로 노예임을 표시했음을 알 수 있다.[73] 하자담보책임 혹은 채무불이행책임. 현대 민법은 금전배상을 원칙으로 하기에 이런 무시무시한 일은 발생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사고로 사람이 죽었을 경우 일실수입(피해자가 사고로 잃어버린 장래의 소득의 상실)에 해당하는 금액을 유족들에게 보상해야 하는데 이러면 보상금 단위가 인당 수 억원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면 대기업 하나를 해체시켜도 힘들 수 있다.[74]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배는 일반적으로 갈대를 엮어만든 배였다.[75] '옥수수'라고 적힌 번역본도 있는데, corn으로 번역한 것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76] 맹수가 가축을 물어죽인 손실에 대해 차용인의 변상의무가 없다는 점을 규정하고 있다. 현대법에서도 맹수에게 행위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맹수에게 물린 것은 법적으로 모든 면에서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취급한다.[77] 바로 다음 조문인 251조를 보면, 소가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는 소라고 도시회의에서 주인에게 알려줬음에도 주인이 조치를 하지 않아서 자유민의 사망사고가 발생한 경우에 소의 주인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물리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소가 자유민을 받아죽인 경우에는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 250조의 내용이다. 즉 이 시대는 소 주인이 자기 소가 사람을 들이받는 버릇이 있는 소라는 것을 잘 모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소가 사람을 들이받아 사망하는 일이 소 주인의 악의나 과실에 의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고 입법자가 인정한 셈인데, 이 시대의 소는 가축화가 덜 되어 야성이 충분히 지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 법전이 쓰여졌을 당시는 인류 문명의 초창기였다.[78] 비슷한 내용이 구약성경에도 나오는데, 여기선 반대로 소가 누군가를 받아 죽이면 그 소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나와있다. 거기다 소에게 원래 받는 버릇이 있는데, 주인의 부주의로 사람이 죽으면 소와 주인을 둘 다 돌로 쳐서 죽이라고 나와있다.[79] '소의 뿔을 자르고 매어두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문구로 보아 주인이 필요한 조치를 충분히 취했음에도 사고가 난 경우는 250조와 마찬가지로 면책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해당 법조문에선 배상 책임만을 명시했을 뿐 사람을 받아 죽인 소를 어떻게 하라는 언급은 없다. 물론 계속해서 사람을 받는 소는 주인이 관리하기도 곤란할 뿐더러 사망자 유족과 같은 주변의 비난도 있었을테니 해당 소 외에 재산이 없어 처리가 곤란한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처리했을 확률이 높겠지만, 이런 소를 주인이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것과 법에 의해서 처리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80] 이미 이 시절부터 품질보증기간의 개념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상이 노예라는 점은 좀 그렇지만...[81] 노예의 해외 반출 및 출입에 대한 제한이 있는 법이다.[82] 하지만 이때 바빌로니아도 함께 멸망해 버리는 바람에 함무라비 법전은 두번다시 바빌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계속 엘람의 수도 수사에만 묻혀있었기 때문에 신바빌로니아 시대 칼데아인들은 아마 함무라비 법전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83] 1조에서 살인을 고발한 사람이 살인을 확증하지 못하면 고발자를 사형할 정도로 엄격했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84] 근대까지만 해도 감옥에서의 식사는 외부에서 넣어주든지 해서 죄수가 알아서 챙겨먹어야 했다. 함무라비 시절의 경우 노예 개념은 있었지만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자유민 신분으로 일해서 갚으라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갚을 능력이 없는 도둑같은 경우에 한해 죽이라고 되어있다.[85] 참고로 이스카리옷 유다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이 은 30셰켈이다. 단, 예수의 공생애 시대엔 은 30셰켈이 노동자 넉달치 임금이었기 때문에 함무라비 시대보단 가치가 높았다.[86] 1912년 미국 달러 기준 USD$ 18.05[87] 한국은 2011년 대부업법 개정 이전 법정최고금리가 39%였고, 2021년 이후부터 20%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은과 달리 곡물은 보관에도 비용이 들어가므로 만약 춘궁기에 곡물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갚는다는 계약을 할 경우 17% 이자는 빌려주는 사람이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