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 대한 내용은 명성황후(드라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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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CB2D><colcolor=#B22222> 조선 고종의 왕비 대조선국 고종의 왕후 | |||
대한제국 고종의 황후 명성태황후 | 明成太皇后 | |||
출생 |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 ||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現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 |||
사망 |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향년 43세) | ||
한성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 |||
능묘 | 홍릉 (洪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비 | ||
1866년 3월 21일 ~ 1895년 1월 12일 | |||
대조선국 왕후 | |||
1895년 1월 12일 ~ 1895년 10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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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자영(玆暎) 혹은 아영[2] | ||
부모 | 부친 여성부원군 민치록 (驪城府院君 閔致祿, 1799 ~ 1858) 모친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韓昌府夫人 韓山 李氏, 1818 ~ 1874)[3] | ||
형제자매 | 2남 3녀 중 3녀 | ||
배우자 | 고종 태황제 | ||
자녀 | 1남 (4남 1녀) | ||
종교 | 무속 | ||
신장 | 163cm[5] | ||
전호 | 경효전(景孝殿) | ||
존호 |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6] | ||
휘호 | 제휘열목(齊徽烈穆) | ||
시호 |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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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단은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정실이며 2대 황제 순종의 친모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사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각각 하위 문서들 참고.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호칭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호칭 문서 참고하십시오.4. 책봉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책봉 문서 참고하십시오.5. 사치설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사치설 문서 참고하십시오.6. 초상화와 사진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초상화와 사진 문서 참고하십시오.7. 평가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8. 가계
8.1. 친가(여흥 민씨)
- 6대조부: 증 의정부 영의정 여양부원군 문정공(贈 議政府 領議政 驪陽府院君 文貞公) 민유중(閔維重)[7]
- 5대조부: 숭록대부 의정부 좌참찬 충문공(崇祿大夫 議政府 左參贊 忠文公) 민진후(閔鎭厚)
- 고조부: 민익수(閔翼洙)
- 증조부: 민백분(閔百奮)
- 조부: 예조참판(禮曹參判) 민기현(閔耆顯)
- 아버지: 증 의정부 영의정 여성부원군 순간공(贈 議政府 領議政 驪城府院君 純簡公) 민치록(閔致祿)
-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韓昌府夫人 李氏)
8.2. 외가(한산 이씨)
- 외조부 : 이규년(李圭年)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김씨(贈 貞敬夫人 金氏)
8.3. 시가(전주 이씨)
8.3.1. 배우자 / 자녀
- 남편 : 고종 광무 태황제(高宗 光武 太皇帝) 이재황/이형/이희(李載晃/李㷗/李熙)
9.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10. 기타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래 사상 최초로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조선의 왕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한양을 침공하여 조선 궁궐에 들어온 적도 있었지만 당시 선조의 왕후였던 의인왕후는 선조를 따라 피난을 갔었기에 왜군과 마주한 적이 없었지만 왜란과는 다르게 일본 낭인들이 조선의 궁궐에 직접 잠입하여 소란을 부리며 직접 찾아내어서 대놓고 살해를 했던 점이 다르며 전쟁기인 왜란 때와는 달리 을미사변은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고의적인 지시로 했던 일이기에 다른 점이 있다. 여기에 왜란 때 선조와 피난을 갔던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와는 달리 고종과 함께 궁궐에 있던 중 일본 낭인들의 기습에 의해 피난을 가지못하고 시해를 당한 것도 다르다. 또한 조선왕조 역대 왕후들 중에서 사상 최초로 외국과 직접 관계를 맺고 개화를 시도하려고 했으며 국왕인 고종보다 국가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와 통치를 하면서 흥선대원군에 이은 또다른 고종의 섭정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국왕인 고종이 성격상 유약한 면이 있는데다가 아버지인 대원군의 섭정기를 겪어와서 일찍이 적극적으로 정사에 나서지 못해서 어두웠던 면도 있기에 그렇다.
- 조선왕조 개국 500년 넘어 이래 최초로 외국 자객에게 시해를 당한 왕후로서 이 때문에 조선왕조 국왕들에 비해서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왕조 왕후들 중 유일하게 널리 잘 알려진 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명성황후만이 가진 국제적인 감각과 지략 그리고 일본에 대한 노출적인 적개심과 러시아에 대한 우호 증진, 청나라에 대해서 임오군란 당시 도움을 청했지만 나중에는 청나라에 대한 불신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역대 조선왕후 왕후들에 비해서 국제적인 시각을 일찍이 가진 왕후이기도 하였다. 국왕인 고종은 그 동안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기로 인해서 자체적인 정략과 지략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또한 왕후에 비해서 국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감각이 거의 없거나 더딘 편이었다. 때문에 국제적인 시각은 모두 왕후에게 맡기거나 그녀의 조언을 얻으며 일본과 러시아 등의 국제 정세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지만 왕후의 사후에도 국제적인 정세에 눈을 뜨지 못하여서 그녀의 사후 10년만에 을사조약 체결이라는 비극과 15년 후 경술국치라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24년 후(1919년) 결국 고종 역시 왕후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을 당하게 되는 비극을 겪으며 승하한다. 이렇듯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서 국왕이면서도 본인보다 왕후에 위탁하여서 국제 정세를 조언받은 것은 고종이 최초이기도 하다. 전제군주제였던 조선왕조에 있어서 고종과 같은 국왕이 나온 것도 이 때가 최초이다. 고종 이전의 조선왕조 선왕들은 일부 왕후의 조언을 듣기도 하지만 전제군주제이자 전체 통수권을 가진 국왕이라는 점에서 보면 모두 국왕들 본인이 직접 통치를 하면서 결단을 내린 것이 전부이나 그에 비해서 고종은 그와 다르게 왕후로부터 국제 정세를 조언받게 되면서 행동하게 되었던 역사상 보기 드문 전제군주가 되었다.
- 을미사변으로 인한 영향도 있지만 국왕인 고종보다 정사에 직접적인 개입을 했던 점, 외국과의 관계(특히 일본, 러시아 등)에도 적극적이면서 특히 말년에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일본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행적 등으로 인해서 역대 조선왕조 왕후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를 남겼다.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도 현대에서 유명하지만[11] 원래 조선왕조의 왕후들은 유교의 사상에 의해서 아낙들은 정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정서도 있고 조선 임금의 절대적 왕권의 영향도 있어서 명성황후 이전의 조선왕조 왕후들은 정사에 나서거나 국왕보다 먼저 앞서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역대 조선왕조의 왕후들은 내조와 정조를 지키는 성향을 가져온 영향 때문에 조선왕조 역대 27명의 임금들에 비해서 그리 현대에 알려진 바가 많이 없고 때문에 명성황후 외에 역대 조선왕조 왕후들의 이름을 아는 현대인들은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명성황후는 격동의 시대와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 그리고 메이지 유신으로 제국화가 되어갔던 일본의 상황,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등 여러가지 눈에 띄이는 행적들 때문에 조선왕조 왕후들 중에서는 현대에서 가장 잘 알려져있는 편이어서 현대의 매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영향도 한몫한다. 만약 시대가 달랐다면 역대 선대 조선왕조 왕후들과 같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 이렇게 국왕보다도 정사에 적극적이고 외교에도 탁월한 처세 등을 가진 조선왕조의 왕후는 명성황후 외에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조선왕조의 상황이나 여성에 대한 비중이 매우 낮거나 배제적이었던 점을 봐도 명성황후 같이 국왕인 고종보다 적극적으로 내정은 물론 외교에도 뛰어난 인재는 없다. 역대 조선왕조 왕후들이 앞서 말한 것처럼 왕실에서도 내조를 지키거나 유교의 사상 등으로 인해서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드물어보이는 점을 봐도 그렇다.
- 국왕인 고종에 비해서 외교관들과의 만남이 많았던 왕후이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 등 여러 주 조선 외국 공사들과 독자적으로 접견을 하였다. 이는 조선왕조 개국 이래 사상 최초이자 드문 일로 원래는 조선왕조 임금이 하게되는 일이었지만 고종은 명성황후에 비해서 외교 능력이나 처세가 부족하고 또한 유약하고 힘이 없는 성격도 있어서 공사관을 접견하는 것도 명성황후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무리 왕후라고 국왕의 어명도 없이 사신이나 외교관을 독자적으로 만났던 사례는 거의 조선왕조 국왕들이 했을 뿐 왕후가 독자적으로 사신이나 외교관을 독자적으로 만났던 일은 거의 없다. 이것도 고종이 외교면에서 약한 면이 있는 점도 있지만 명성왕후가 일찍이 외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이기에 가능했다. 설령 왕후가 독자적으로 외국 사신이나 공사를 만난다고 해도 조선왕조 국왕의 어명이 없이는 불가한 일이라 반드시 국왕의 어명을 받고 만나야하는 점이 있지만 명성황후는 고종의 어명을 받지않고 독자적으로 외교관들을 접한 조선왕조 왕후 중 최초의 사례를 가졌다. 조선왕조 시기상 유교의 숭배가 강하고 유교 사상에 따라 아녀자는 정사에 관여해서도 안 된다는 정서가 베여있던 점을 보면 파격적이기도 하다.
- 조선왕조 역대 왕족 중 최초로 서양과의 접촉을 가졌던 왕후이다. 공교롭게도 명성황후가 고종과 함께 정사를 보던 시기는 서양 열강들의 아시아 진출과 식민 지배를 꿈꾸던 시기였고 때맞춰서 스페인이 지배했던 남미 대륙과 포르투갈[12]이 지배했던 브라질이 독립을 하게 되면서 식민지를 상실하자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한 후 이제 남은 신흥 대륙인 아시아를 향해 시선을 가짐과 동시에 식민 지배를 하려는 야욕이 들끓는 시기였고 일찍이 미국은 일본 열도에 쿠로카네라 불리운 함대를 보내서 일본의 문호개방을 요구하였고 영국은 청과 아편전쟁을 벌였으며 프랑스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식민 지배를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유럽과 미국의 식민 지배기와 맞물려서 격동의 시대에 고종이 재위하면서 함께 정사를 보게되었던 시기와 맞물려 이 때를 계기로 명성황후만이 가진 독자적인 노선이 발휘되기도 했던 것이다.
- 아들인 순종이 즉위했지만 사후인 1907년에 부왕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았기 때문에 조선왕조 왕후 중 대비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례를 가졌다. 만약 살아서 순종 즉위를 봤다면 중전에서 대비로 승격되었을 수도 있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12년 전인 1895년에 시해되었기에 대비가 아닌 중전으로 최종 지위를 영구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남편이자 국왕인 고종도 사후인 1907년에 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지만 이미 조선은 사후 10년 후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서 조선통감부가 통감 정치를 하게되었고 여기에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구실로 당시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적인 명령에 따라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물러나게 된 것이기에 그렇다. 이토는 2년 후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 의장이 되었을 때 조선인 안중근에 의해서 하얼빈에서 저격당하게 된다.
- 공교롭게도 모두 군인들과 악연을 갖고있는 것도 특징이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신식 별기군을 지지하면서 구식 군대를 외면하게 되고 썩은 쌀을 주었다는 이유로 구식 군대 군인들의 표적이 되어서 궁궐을 빠져나가 피신한 적이 있고 최후를 맞이하는 1895년에는 친일 성향의 조선군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친위대인 대한제국군 시위대로 대체하려고 하자 이에 일본공사관의 지시로 훈련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본 낭인들과 함께 궁궐에 쳐들어가게 되면서 친일 훈련대와 낭인들로부터 시해를 당하게 된다.
- 비숍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식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흡연에 남녀는 물론 미성년자 구분도 두지 않았고 궁녀들이 애연가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예 이상할 건 없다.[13]
- 남편인 고종과 초반에만 데면데면 했을 뿐 금슬이 좋았으나 정작 후손은 순종 말고 없었다. 실제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순종만 장성해서 살아남았다.[14]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왕비든 그럴 수 있기는 하나[15]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 시대의 왕실 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여인으로서 남편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생모들을 궁궐에서 내쫓았다.[16] 본래 왕이 죽기 전에 후궁이 그것도 왕의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조선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명성황후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7]
- 가족에게 친필 편지도 많이 썼는데 조선의 왕실뿐 아니라 사대부가를 포함하여 개인의 편지로는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2020년대까지 파악된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는 180여 통인데, 그중에서 146통이 친필 한글 편지이다. 명성황후의 친필 한글 편지는 136통이 조카 민영소(閔泳韶, 1852~1917)에게 보낸 것이고, 민응식(閔應植, 1844~1903)에게 보낸 것이 5통, 민응식의 아들 민병승(閔丙承, 1865~1946)에게 보낸 것이 5통이다. 민응식과 민병승에게 보낸 편지는 청일전쟁이 전개되는 기간에 보낸 것이라 주목할 만한데, 민응식은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숨겨주며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개화파 내각과 대치하다 물의를 일으켜 유배를 당했었다. 이후 민응식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민병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네 아버지는 유배가 풀리니 너무 다행이다.”라며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고 한다.
- 2018년 9월 구한말 왕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에게 하사됐던 명성황후의 부채가 134년 만에 알렌 후손의 무상 기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단독] 명성황후 부채 134년 만에 귀환…알렌 후손 기증
-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명성황후의 외모를 이렇게 기록했다. ‘키는 별반 크지 않았고 살도 찌지 않았다. 오히려 날씬한 편이며 얼굴은 갸름하였다. 눈은 가늘고 눈끝이 위로 치솟아 언뜻 보기에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험한 얼굴은 아니다. 조선 부인 치고는 표정이 풍부하여 예쁜 축에 들었다.’#
-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사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의 특집 기사를 쓰러 외국 특파원이 방문했을 때 사진이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1번째로 암살 위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벽 5시까지 잠들지 않았으며[18] 침실이 여러 개 있었고 침실에도 비밀문이 있어 비상시 빨리 피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외모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린 것. 하지만 세자가 사진을 찍자 해맑게 기뻐했다는 기록, 이사벨라 비숍 여사에 따르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진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19]
- 일본 측의 훼손설도 있는데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진을 찾기도 했으며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없는 사진을 찾으려고 거액을 현상금을 걸리도 없으니 을미사변 직후 일본제국 측에서 을미사변의 흔적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진을 고의로 없앴을 수도 있다. 일본제국의 사후 대응은 뻔뻔스러운 발뺌과 시치미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국내 권력 다툼으로 인한 정변으로 꾸미려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우라 공사를 주축으로 한 낭인들과 일본군 장교에게 시해되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데 한밤 중에 목격자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암살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복장을 입은 인원 다수가 전투를 벌이며 일국의 궁전에 쳐들어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왕비를 공개적으로 살해했고 그 때는 해가 솟아오른 여명의 아침이었다. 수많은 궁인들과 군인들, 심지어 서양인까지도 목격하는데서 일을 크게 벌였으니 일본제국은 최대한 은폐를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며 그 중 한 방법으로 그날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없애거나 훼손시키고 궁녀로 둔갑시키는 한편 일본인은 조선의 왕비를 죽인 적이 없다고 시치미 뚝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살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주한 일본공사의 명령으로 궁궐 안에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고종도 못 찾을 정도였으니 확실하고 명확한 사진이 없는건 그렿다쳐도 명성황후를 직접 모셔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상궁 등 궁인들이 광복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는데 위 3개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다는건 이상하기는 하다. 명성황후 사진 논란 관련 내용은 다음의 기사들을 참조하면 좋다.기사1 기사2기사3기사4기사5
11. 참고 문서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경복궁 건청궁
- 고종
- 고종실록
- 김보현
- 김옥균
- 김좌근
- 김홍집
- 니콜라이 2세
- 대한제국
- 대한제국/황사
- 동학농민운동
- 매천야록
- 미우라 고로
- 민겸호
- 민승호
- 민승호 암살사건
- 민영익
- 민영환
- 민치록
- 박영효
- 별기군
- 서재필
- 손탁호텔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 순종
- 순종실록
- 아관파천
- 여흥부대부인 민씨
- 운현궁
- 유길준
- 육영공원
- 윤치호
- 이사벨라 비숍 여사
- 임오군란
- 순헌황귀비
- 신정왕후
- 영친왕
- 을미사변•
- 의친왕
- 이완용
- 조선/왕사
- 조선군 훈련대
- 조선왕조실록
- 조선책략
- 철인왕후
- 청일전쟁
- 최익현
- 통리기무아문
- 카를 베베르
- 호러스 뉴턴 알렌
- 홍유릉
- 황현
- 효정왕후
- 흥선대원군
- 흥친왕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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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방파 27세 ○鎬(호)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고, 양오빠 민승호(閔升鎬)가 항렬자를 사용했다.[2] 명성황후/호칭 참조.[3]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는 아버지 민치록의 둘째 부인이었다. 첫째 부인이었던 해주 오씨는 자식 없이 1833년(순조 33년) 사망했다.[4] 항문 폐쇄증(쇄항증)으로 사망.[5] 명성황후를 직접 본 서양인의 말에 따르면 "조선인 여성보다는 키가 컸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본 사람은 그녀의 키가 좀 작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6]
1차 추상 고종 9년 12월 24일
2차 추상 고종 25년 1월 15일
3차 추상 고종 26년 12월 17일
4차 추상 고종 29년 6월 24일
5차 추상 광무 3년 12월 30일
6차 추상 광무 6년 3월 5일
휘호 추상 1921년 2월 16일[7] 그의 딸이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이다.[8] 혈연상 시조부는 남연군이다.[9] 혈연상 시아버지는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10] 항문이 막힌 기형아로 태어났다. 쇄항증(항문폐쇄증)으로 의심되는데 얼마 안가서 죽었다.[11] 사실 이쪽은 장희빈의 표독한 성격 등의 영향이 있기는 하였다.[12] 스페인과는 다르게 중국 마카오를 식민지배하여 1999년까지 지배하게 된다. 당시 마카오는 조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었지만 불과 이 곳마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게되면서 서양 열강들의 아시아 침투가 본격적으로 퍼지게 되는 시기였다.[13] 다만 조선시대에는 곰방대라고 불리는 파이프 담배의 사용률이 높았고 현재의 궐련을 사용하는 비율은 적었다.[14] 이에 살아 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15] 조선 시대에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나 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첩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16]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도 있다.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17]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나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단적으로 그 예시를 보여준다.[18] 조선 궁궐의 아침 일과가 보통 새벽 5~6시쯤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19] 비슷한 예로 이토 히로부미도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조선에서는 자신의 사진이 나돌지 못하도록 조치해서, 원태우 의사나 안중근 의사도 목표를 특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었다.
1차 추상 고종 9년 12월 24일
2차 추상 고종 25년 1월 15일
3차 추상 고종 26년 12월 17일
4차 추상 고종 29년 6월 24일
5차 추상 광무 3년 12월 30일
6차 추상 광무 6년 3월 5일
휘호 추상 1921년 2월 16일[7] 그의 딸이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이다.[8] 혈연상 시조부는 남연군이다.[9] 혈연상 시아버지는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10] 항문이 막힌 기형아로 태어났다. 쇄항증(항문폐쇄증)으로 의심되는데 얼마 안가서 죽었다.[11] 사실 이쪽은 장희빈의 표독한 성격 등의 영향이 있기는 하였다.[12] 스페인과는 다르게 중국 마카오를 식민지배하여 1999년까지 지배하게 된다. 당시 마카오는 조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었지만 불과 이 곳마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게되면서 서양 열강들의 아시아 침투가 본격적으로 퍼지게 되는 시기였다.[13] 다만 조선시대에는 곰방대라고 불리는 파이프 담배의 사용률이 높았고 현재의 궐련을 사용하는 비율은 적었다.[14] 이에 살아 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15] 조선 시대에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나 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첩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16]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도 있다.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17]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나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단적으로 그 예시를 보여준다.[18] 조선 궁궐의 아침 일과가 보통 새벽 5~6시쯤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19] 비슷한 예로 이토 히로부미도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조선에서는 자신의 사진이 나돌지 못하도록 조치해서, 원태우 의사나 안중근 의사도 목표를 특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