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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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3141a><colcolor=#fff> '''문신 文信' | Moon Shin''' | |
출생 | 1923년 1월 16일 |
일본 사가현 다케오시 | |
사망 | 1995년 6월 26일 (향년 72세) |
고향 | 경상남도 마산[1]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화가, 조각가 |
본명 | 문안신(文安信) |
학력 |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 |
배우자 | 최성숙 |
묘소 | 창원시립문신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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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과 프랑스에서 활동 한 조각가이자 화가이다.2. 생애
1986년 4월 1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2.1. 유년 시절(1923~1937)
일본인 어머니[2]와 광부 출신 아버지[3] 사이에 1923년 1월 16일 일본 규슈에서 문신이 태어났다.[4] 그러나 아버지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문신의 존재와 그들의 부부 관계는 집안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부부는 탄광촌 부근의 농가를 빌려 문신을 길렀고, 상황이 나아질리 없자 문신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한국행을 감행하여 그의 고향이 되는 마산에 정착하게 된다.문신은 마산의 푸른 바다에서 어머니는 조개잡이를 했고, 자신은 모래성을 쌓으며 처음으로 예술적 감각을 느껴보았다고 회고한다. 결혼 반대를 무릅쓰고 희망을 꿈꾸며 정착한 마산이었지만, 일본인이었던 어머니가 좀처럼 현지적응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마음 먹게되고, 문신의 아버지도 그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된다. "어린애를 일본으로 데려가면 일본놈이 된다"는 문신의 할머니의 타박으로 문신은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홀로 마산에 남게 된다.
7살에 마산 성호초등학교에 입학했고,[5] 8살에 마산의 해룡사란 간판가게에서 제작한 싱싱한 과일 그림을 보며, 큰 충격을 받고 친절한 해룡사 주인이 작업실을 구경시켜주어 예술가라는 자신의 꿈을 발견하게 되지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삼촌에게 맡겨진다. 부모와 조모와의 이별에 어린 나이에 술담배를 배우며 외로운 시기를 보내다 12살에 아버지가 귀국을 한다. 아버지는 노동자 출신이었지만 남다른 예술적 감성의 소유자였다. 문신에게 매미를 잡아 손에 내어 주는 따뜻한 아버지와 함께 마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정겨운 기억들을 쌓게 되고, 이는 훗날 문신의 생명론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6]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문신은 그의 특기를 살려 온갖 아르바이트를 시도했다. 자동차 수리일도 서슴 없이 했으며, 영화 간판을 그리는 일로 명성이 자자해져서 마산 이외에 진영, 수산, 진주, 통영까지 간판을 그리러 갔다고한다. 태서명화란 화방에 취직하였는데 그곳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그려 판매하고, 액자도 만들고, 그림 모사까지 하며 그림 실력을 제대로 키워나갔다고 한다. [7]
2.2. 일본 유학 시절(1938~1945)
화가가 되고싶은 꿈과, 일본으로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문신은 1938년 무작정 일본으로 밀항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윽고 1939년 16세의 나이에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8] 부모의 도움없이 계속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병행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돈의 일부분을 아버지에게 보내 땅을 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이 땅은 마산 추산동에 위치 한 땅으로 문신의 마지막 꿈인 문신 미술관의 땅자리가 된다.2.3. 한국 광복 후 귀국(1945~1960)
1945년 광복 함께 22살의 나이로 귀국한 청년 문신은 미군정 시절 5년 간 마산, 부산, 서울 등지에서 10여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그의 예술은 표현주의적인 화풍과,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자연을 주제로한 구상적인 회화였으나, 후에 추상적인 회화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모던아트협회에 참여하면서 모더니즘을 선도한다. 그의 회화는 일본식 화풍을 그대로 전수받은게 아닌 문신만의 신선한 화풍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이후 명성이 자자해지자 마산중등학교 교사직을 요청받았고 1년간 일임하다 작가활동의 온전한 전념을 위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예술의 길만을 이어나갔다.2.4. 1차 도불과 2년의 한국 생활(1961~1967)
1961년 2월 40살 나이에 단돈 50불로[9] 프랑스로 간 문신은 돈을 벌기 위해 파리의 라브넬이라는 고성을 수리하는 일을 맡아 3년간 목수 석공 미장이 일을 하면서 예술인생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조각가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이 시기에 이성숙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으나 이혼했고,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이자 성형외과 의사인 정성체를 만나, 두 번째의 결혼을 하여 이태원에 정착한다. 또한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그동안의 프랑스 활동으로 명성이 쌓여 홍익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하였다.2.5. 2차 도불(1967~1980)
재혼을 했던 정성채와도 이혼을 하고 그 아픔으로 문신은 다시금 프랑스로 2차 도불을 한다. 여기에 와서도 1년간 고성 수리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고, 프랑스 남부 발카레스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태양의 인간>이라는 13미터 높이의 대형 조각작품을 출품하여 세계구급의 예술가로 발돋움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다시 돌아온 프랑스에서 문신은 리아 그랑빌러라는 독일인 출신의 3번째 여인을 만났는데 그의 동거인이자 물심양면이 되어주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또한 그녀와 10년 동거를 지속하다 헤어지고 만난 4번째로 만난 인연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훗날 문신 미술관 명예 관장이 될 24살 연하의 최성숙씨다. 그녀는 같은 서울대생 출신의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사별한 미망인으로서 그 슬픔으로 독일로 떠나 2년 뒤 우연히 파리에 갔다가 화가 모임에서 문신을 만나 만남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2.6. 한국으로 영구 귀국(1980~1995)
나의 생을 돌아보면 화살이 떠오른다. 화살은 휘어 날아가 어디엔가 확박히면 뽑아내버리지 않는 한 그 자리에 꽂혀있다. 나는 파리에 날아가 20년간 박혀있었고, 다시 마산으로 날아왔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작품을 하고 미술관을 세우겠다.
문신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각종 미술전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세계적인 조각가의 반열에 오른 뒤, 고향 마산으로 돌아와 추산동에 있는 언덕배기에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곳을 점지해뒀던 그곳에 문신 미술관을 짓기 위해 남은 일생을 바쳐 14년간 직접 구상, 제작, 작업에 돌입한다. 죽기 1년 전 1994년에 완공을 성공하고 1995년 5월 24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우주로 향하여 별이 되었다.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문신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오피시에 예술문학기사 훈장을 수여했다.
3. 작품 세계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궁극적으로 생명의 의미성을 가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만물은 엄연히 원초에서 생성했어도 그것을 시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인간은 현실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우주)에 대한 꿈을 꾸고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제는 없지만 그들 자체가 실재를 가진 형태들이다. 나는 이 형태들이 생명의 의미를 가지게 되길 바라며 작업을 했을 뿐이다.
이렇듯 문신의 예술 세계는 자연과 생명의 원리를 작가 스스로 체득하여, 분출한 창조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가장 먼저 발견 할 수 있는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은 작품 전체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이 모든 생명의 형체에는 좌우대칭의 균형이 깃들어 있다는 자연의 이치를 표현한다. 또 하나의 주요한 사실은 좌우대칭의 오른쪽과 왼쪽이 서로 완벽히 일치하지 않고, 일견 규칙적으로 보이는 좌우의 균형 속에서 돌출이나 적은 부분에 갈수록 어긋나지는 변화를 취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생물이 좌우균제의 균형으로 생장하는 과정 속에 대칭의 균형이 미묘하게 깨지는 생명의 섭리를 표현한다.
조각하기 이전에 작품의 구상을 위하여, 원과 선을 사정없이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표현된 원과 선은 예술가의 손으로서만 체화된 즉흥적 작화로써 자와 컴퍼스를 이용하여 원과 선을 그리는 서구 화가들의 기계적인 방식과 달리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접근으로 표현된 원과 선, 그리고 입체화된 곡률의 어긋난 진행은 생명의 활기를 띠는 리듬이 시각화되어 인간적인 향기가 맴돈다. 그렇기에 감상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관능미, 시적인 이미지, 경건함, 명상성 등의 다채로운 감정들과 여타의 개미, 식물, 인체, 등과 같은 다양한 자연물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건축이 공간을 견디듯이 그 지배를 겪으면서도 두 다리를 뻗고 성장해나가는 동물의 직립성과 햇빛을 받기 위해 부피를 늘려가는 식물 생장성을 모사하며, 모든 만물의 에너지인 태양과, 우주 공간을 향한 무한한 생명체의 충동과 의지가 담겨져 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생명의 의지 그 자체를 모사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에서 음악을 느낄 수 있으며, 독일의 작곡가 보리스 루코비치는 문신의 작품 <화 和>를 테마로 한 실내악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표현주의와 야수파의 화풍을 지닌 구상적인 회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부잡이>의 과감한 생략과 과장, <생선>에 찍힌 생선 눈알의 표현을 보면 그가 점점 추상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던아트 협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추상작업에 돌입했으며, 이때에 플라스틱 아트라는 주제에 석고조각을 내면서 조각에도 점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파리의 고성을 수리하면서 입체적인 감각을 깨달아 화가에서 조각가로 변모했다. 말년에는 빛의 조각이라는 계획으로 보다 궁극적인 작품세계의 변화로 진출하는 과정에 있었다.
흑단이란 재료를 조각했던 점이 유별나다. 흑단은 나무이지만 쇠처럼 단단해서 물에도 가라앉는 매우 다루기 어려운 목재이다. 그러나 본인은 "흑단은 윤을 낼수록 결이 살고 여물수록 표현하자는 본질이 산다"라고 평하며 애용했다.
보통 사회의 학습으로 인하여 일반적인 언어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문신의 작품을 처음 직면했을때 상투적인 시선으로 인하여 난해하다라는 네 단어로 속단하고 외면해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난생 처음 추상 조각을 대할때의 낯섦에 불안해하지 말고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표현된 것이라는 문신의 말을 떠올리며, 순수한 시선으로 그 자체가 주는 본연을 느껴보자.
4. 작품 일람
자화상 (1943) |
어부잡이 (1948) |
아침바다 (1952) |
태양의 인간 (1970) |
개미 (1985) |
올림픽 1988 (1988) |
우주를 향하여3 (1989) |
5. 창원시립마산 문신미술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신길 147에 위치한 미술관
홀홀단신으로 유럽으로 떠나 세계적인 조각가로 거듭난 문신이 애향 마산에 돌아와 몸소 지은 건물로 그의 평생 숙원이 고스란히 체화 된 곳이다. 건물 자체의 도안과 설계, 바닥의 타일과 정문 디자인, 심지어 바깥에서 쓰이는 석재들의 모양까지도 전부 스스로 구상해서 배치한 것으로 전체 공간이 예술가의 의도대로 지어진 것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먼저 미술관의 정경을 머금은 스테인리스 조각들이 반겨주는 곳으로, 예술작품이 주는 감정 이외에도 총체적으로 마산 앞바다가 탁트이면서 싱그러운 꽃들과 투명한 연못이 어울러져 자연적인 정취를 뿜어낸다.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원형전시장, 아트샵, 교육실로 구획이 나뉘어져있다. 제1전시실 1층에는 문신의 조각품들과 회화가, 2층에는 문신미술관에 관련한 사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각종 전시전을 열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관람하는 용도로 쓰인다. 원형전시장은 석고 재질의 원형적 작품들과, 그가 작업할 때 썼던 화구들을 볼 수 있고, <태양의 인간>이라는 문신의 다큐멘터리를 수시로 상영한다. 아트샵은 카페 용도로도 이용할 수 있고, 문신에 관련한 기념품들을 살 수 있다. 교육실은 원형 전시관 맨 1층에 자리하고 있으며 어린이, 청소년 위한 교육공간이다.
자연과 어우러져 고락했던 유년기의 장소이자 문신 자신의 필생의 작품이 이곳이었기에 묫자리도 여기에 남겨두었다. 문신의 묘지는 미술관 야외에 있는 고갯길로 올라가면 대면 할 수 있다. 초록색 덤불을 둘러싸고 안치되어 있으며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며, 신처럼 창조한다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어릴 적 문신이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던 산언덕에 위치하여 자연적인 조망과, 현인이 묻힌 곳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돈다. 또한 그 묘지에서 뒤돌아 보기만 하면 보이는 마산 앞바다의 전망은 정말로 그 자리에서 그렸던 <아침바다>의 정경의 원본이다. 유심히 보면 그가 애착 했던 남도 산맥의 완만한 선이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규격화된 고층 아파트들이 시야를 헤쳐, 옛 마산의 아침바다는 이제 보지 못하게 되었다. 문신 자신도 미술관 앞에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 개발에 대해 고향 마산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하며 극렬한 반대를 표명했고, 마산 문화계에서 한데 모여 탄원을 했던 사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막을 수 없었다.
마산에서 초-중학교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최소 한 번쯤은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10] 통합창원시 특성상 미술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곳은 봐야 성산아트홀과 비교적 최근에 생긴 도청미술관과 소규모 갤러리인데, 소규모 갤러리의 존재는 학생들이 알기는 어려우니 아주 가기 좋은 곳이다.
마산 문서에서는 데이트 코스로도 좋은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날이 좋을 때에는 손을 맞잡고 걸어다니는 젊은 커플들을 자주 볼 수 있고, 또한 미술관을 관리하시는 중년의 여성 분들도 친절하시다. 기본적으로 다들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찾아왔기 때문에 서로 은은하게 지나치며 서로를 대한다.
입장료는 어른 500원, 어린이 2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창원에 있는 문신미술관 이외에도 숙명여대에도 문신미술관이 있는데, 이곳은 시민을 위한 기관으로서의 기능보다 학술적인 의도가 짙은 곳이라고 한다.
6. 문신의 말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표현된 것이다. 요컨대 숨겨져 있던 생명이 그런 미美로 나타난 것이다.
제가 집착하고 있는 면이 있다면 자연 속의 생명체 그것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어떠한 구상적 현실의 재현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스러운 형태들이다. 그것은 그들 자체의 현실을 가진 형체들이다. 즉 주제가 없지만 그들 자체의 실재를 가진 포름들이다.
공이란 어디까지나 단순하면서, 여러 각도의 공간에서는 곡선이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이것은 생태의 국면으로 무의식 속에 접근되는 포름으로 느끼게된다.
작품 만들기 전에 생각하는 작품의 주제는 없고 (...) 어릴 적부터 동물세계와 바다세계, 즉 자연의 관찰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정신적인 바탕이 작품에 작용하고 있다.
나의 작품에서 성기와 같은 부분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인체를 연상하여 그와 같은 일부를 의식해서 작품화 할때는 없다. 더욱이 작품에 관능적인 요소를 노출시켜 흥미의 대상이 되게끔, 그와 같이 작화는 추호도 작용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실히 나의 독특한 작품양식인 시메트리의 기본적인 형체에서 기인되는 것일 뿐이다. 감상자가 자연에 있는 물체와 연상을 해서 보기 때문이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궁극적으로 생명의 의미성을 가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만물은 엄연히 원초에서 생성했어도 그것을 시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인간은 현실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우주)에 대한 꿈을 꾸고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제는 없지만 그들 자체가 실재를 가진 형태들이다. 나는 이 형태들이 생명의 의미를 가지게 되길 바라며 작업을 했을 뿐이다.
7. 여담
- 경상도청 경남은행 등 마산 곳곳의 주요 건물 근처에서 문신의 작품을 볼 수 있다.
[1] 태어난 곳은 일본이지만, 문신은 다섯 살부터 열 여섯살까지 유년을 보낸 마산을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2] 성명: 치와타 타키(한국식 한자음: 천명다기)[3] 성명: 문찬이[4] 호적 신고가 1년 늦쳐져 실제로는 1922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2살 위의 친형이 있었다.[5] 당시의 학교명은 마산공립보통학교이고, 27회 졸업생이다.[6] 또한 마산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여체를 조소하여 조형적 감각을 길러 나갔다.[7] 태서명화에서 일을 하던 도중 사장 방명수씨가 사망하여, 문신이 화방을 인수받아 직접 운영을 하기도 했다.[8] 교내에서 그림 실력이 손에 꼽는 학생이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공모전에 번번히 낙선 당하는 모진 차별을 받았다.[9] 700불을 소지하고 있었으나 중간에 사기를 당했다[10] 초중학생 미술시간에 흔히 나오는 미술관 관람 수행평가를 위해서 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