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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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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9대 상대등
알천 | 閼川
출생 603년 이전[1]
신라
사망 654년 이후
신라
재임기간
(음력)
제9대 상대등
647년 2월 ~ 654년/655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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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494><colcolor=#fbe673> 성씨 김(金) / 소(蘇)?[3]
이름 알천(閼川)
골품 진골(眞骨)
관등 이찬(伊湌)
직위 대장군상대등 }}}}}}}}}


1. 개요2. 생애3. 그의 가계에 대한 고찰4. 보천(보질도)태자와 동일인물설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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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대신이자 무장. 선덕여왕 집권 중 이찬에 오르고 화백회의의 장이 되었으며 진덕여왕 대에는 비담을 대신해서 귀족의 수장 지위인 상대등을 역임한 귀족. 알천의 신분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성골 남자가 남아있지 않아서 여왕이 즉위했다는 걸 보면 알천도 성골은 아닐테고, 진골 이상만이 오를 수 있었던 상대등을 역임한 것과 진덕여왕 사후 왕위에 오를 뻔했단 점을 본다면 골품은 진골로 추정된다.[4]

기록은 적지만 상당한 지휘력을 갖춘 명장이었으며 삼국유사에는 화백회의 도중 난입한 호랑이를 맨손으로 집어던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용력도 뛰어났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5]ㆍ무림공(武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이다.】염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이 자리로 뛰어들었다.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이야기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고 땅에 매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처럼 세어서 맨 윗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모두들 유신공의 위엄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

2. 생애

최초의 등장은 636년(선덕여왕 5년) 5월의 옥문곡 전투로, 서라벌을 노리고 백제 무왕이 침투시킨 백제군을 필탄(弼呑)과 함께[6] 기습해 괴멸시키고 장군 우소(于召)를 사로잡았다. 알천은 이 공로 때문인지 다음 해 637년 7월 신라의 대장군에 임명된다.

이듬해인 638년 10월, 당나라와 화친하여 어느 정도 북방을 안정시킨 고구려영류왕이 신라 북방의 요충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자 직접 출전해 민심을 수습하고 그해 11월 칠중성 밖에서 반격을 개시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칠중성 전투)

하지만 선덕여왕 후반에 벌어지는 백제 공격에 대해서는 별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당시 백제가 신라의 주요 성인 대야성을 포함해 수도 서라벌 인근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신라군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서 알천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선덕여왕이 자신의 치세 후기 644년 자신의 창으로 김유신을 선택하고 일곱 성 정벌을 명하는 등 사실상 군권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이는 추측이 있다. 특히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밀렸음에도 김춘추 즉위까지 생존하였고, 비록 형식적이라고 해도 차기 왕으로 추대받았을 정도면 그의 명성이 흠이 갈 만한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

비담의 난이 진압된 직후인 647년에 상대등이 되었는데, 비담의 난 과정에서 알천이 어느 쪽 진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진덕여왕 정권에서 바로 상대등에 오른 것을 볼 때 적어도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여왕을 지지하고 공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위 문단에 있는 삼국유사호랑이를 잡은 일화를 볼 때, 비록 그것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비유적이고 설화적으로 각색되었다고 해도, 진덕여왕 시기 신라 정계에서 알천은 정치가로서나 장군으로서나 대단한 위세를 지닌 호걸로 평가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바로 뒤에 나오는 '알천공의 힘이 이처럼 세어서 맨 윗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모두들 유신공의 위엄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었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진덕여왕 시기의 집권 세력이었던 김유신, 그리고 김유신과 혼맥으로 엮인 김춘추 세력과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관계였고, 비록 알천이 상대등의 자리는 차지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김유신도 알천에 뒤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후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고 성골의 대가 완전히 끊겨 그 다음인 진골 중에서 새로운 왕을 찾아야 할 상황이 오자, 신하들의 합의 끝에 다음 왕좌의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왕이 아닌 섭정으로 추대된 것인데, 성골이 아닌 자의 첫 즉위 사례이므로 돌려 말한 표현일 뿐,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섭정이란 사실상 알천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추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는 너무 나이가 많다며 김춘추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그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진덕이 돌아가시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고 묵직하기는 춘추공만 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만한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원래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하는데, 왕을 안 한 것을 보면 뭔가 거래가 있었던 듯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기록 그대로 이미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는 않)아 양보했을 수도 있고[7], 혹은 섭정으로 추대된 것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이미 차기 왕으로 김춘추가 오를 것은 거의 내정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하며, 혹은 이에 대해 이기백은 8세기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김주원이 명주(강릉시)로 낙향한 것처럼 김춘추와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뒤 알천이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설을 신뢰한다면 알천이 김춘추에 의해 맞은 운명을 김춘추의 후손 또한 되풀이하게 된 셈. 그리고 1년 뒤 655년 정월에 상대등 직위도 금강(金剛)이라는 인물이 맡는데, 다른 상대등 관련 여러 기록을 찾아보면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는 종신직으로 추정됨을 감안하면 알천은 654년~655년 중 어느 시점에 정계에서 사실상 물러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그의 가계에 대한 고찰

진주 소씨 대동보에 의하면 소알천(蘇閼川)의 조상인 소벌도리공은 신라의 초대 왕으로 칭해지는 박혁거세를 옹립한 경주 6개 촌장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하며, 최씨는 소벌도리의 차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족보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8][9] 그냥 이런 기록이있구나, 하고 보면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작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도 알천으로 소개하고 있다.

알천은 삼국사기 기록상 신라의 왕족으로 김씨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소씨의 시조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도 있다. 사학자 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진주 소씨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본인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기백은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거절하여 보냈는데, 이기백은 나중에 신라 말기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10]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므로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소씨도 김씨와 마찬가지로 '쇠'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한 방식일 뿐이고 실은 둘 다 똑같은 성이라는 뜻.이런 식으로 한자의 음(金은 금/김)과 뜻(쇠, 이후 음차해 蘇로 추정)으로 읽기를 병용하는 방식은 현대 한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고대 한국에서는 향찰 등 많이 사용되었다.

다만 그렇다면 또 의문이 남는데 그렇게 되면 왜 왕족인 소씨가 김알지/성한왕도 아니고 하필 6부 촌장 중 하나인 소벌도리를 시조로 삼게 되었는가이다. 같이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는 경주 최씨의 경우 진골이 아닌 6두품이었다.[11]

4. 보천(보질도)태자와 동일인물설

한편, 삼국유사 제3권 탑상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新羅淨神太子寳叱徒與弟孝明太子到河西府世獻角干家一宿, 翌日踰大嶺各領一千人到省烏坪累日逰翫, 太和元年八月五日兄弟同隠入五䑓山. (…) 淨神太子弟副君在新羅争位誅滅. 國人遣将軍四人到五䑓山, 孝明太子前呼萬歳, 即是有五色雲自五䑓至新羅七日七夜浮光. 國人尋光到五䑓, 欲陪两太子還國. 寳叱徒太子涕泣不歸, 陪孝明太子歸國即位. 在位二十餘年. 神龍元年三月八日始開真如院 (…)
신라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더불어 하서부(河西府)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큰 고개를 넘어 각기 1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도착하여 여러 날을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647) 8월 5일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중략) [이 무렵] 정신태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으며 왕위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사람을 보내 오대산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부르니, 이에 오색 구름이 있어 오대에서부터 신라에까지 7일 7야 동안 빛이 비치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질도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만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재위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 비로소 진여원을 세웠다. (후략)
藏師之返新羅淨神大王太子寳川·孝明二昆弟(…)到河西府, [今溟州亦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世献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各領千徒到省烏坪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宻約方外之志, 不令人知逃隱入五䑓山. 古記云 “大和元年戊申八月初王隠山中”. (…) 淨神王之弟與王争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歳, 時有五色雲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排列鹵薄, 将邀两太子而歸. 寳川哭泣以辞, 乃奉孝明歸即位. 理國有年 記云, 在位二十餘年(…)乙巳三月初四日始攺創真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營排殿堂, 并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가 (중략)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곳이다. 혹은 하곡현(河曲縣)이라고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더니, 문득 하루 저녁은 형제 두 사람이 속세를 떠날 뜻을 은밀히 약속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다.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 무신(戊申) 8월 초에 왕이 산중에 숨었다.”고 하였다. (중략) 그 무렵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폐하고 장군 네 사람을 산에 보내 두 왕자를 맞아오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먼저 효명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그때 오색구름이 7일 동안이나 [그곳을] 드리워 덮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쫓아 모두 와서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두 태자를 맞이하여 가려고 하였다. 보천은 울면서 굳이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효명이]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 고기(古記)에 이르되, 재위 20여 년이라 하였다. (중략) 을사(乙巳) 3월 초 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을 개창하니, 대왕이 친히 백료를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세우고, 아울러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당 안에 모셨다. (후략)
삼국유사 대산오만지신조에서는 정신대왕을 정명 신문왕의 잘못으로, 효명태자를 효소왕의 잘못으로 보았으나 문맥상 시점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자장, 태화)과 맞지 않고 지나치게 음상사적으로 유추하여 그 신뢰도가 높지 않다. 심지어 옛 기록을 인용함에 있어서 자의적인 해석(태화 원년이라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재위 20년은 사망 당시 나이인 26세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을 하여 사료의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이를 효소왕 때의 일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애초에 동생을 부왕, 즉 갈문왕으로 봉하는 것은 상대에만 있던 관습으로 중대부터는 이러한 관습이 사라진다. 추가적으로 신문왕효소왕은 이름이 아니라 시호인데 그 글자를 본명과 임의로 섞었을 리가 없고, 삼국사기에서 효소왕신문왕의 장남이라고 한 서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두 기록에서 당시의 정세를 추정할 수 있는 단락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이 중 4번의 행적은 알천과 완전한 판박이다. 진덕여왕 사후 알천이 처음에 섭정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음과 같은 대응 관계를 보인다
보천태자=알천임을 암시하는 금석문은 또 있다.
융기대왕께서
수(壽)가 산하(山河)와 같이 길고,
위(位)가 알천과 같이 크길 바랍니다.
천명의 자손(千子)들은 구족(具足)하며,
칠보의 상서로움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隆基大王
壽共山河同久,
位與軋川等大.
千子具足,
七寶呈祥.
성덕왕 재위 5년(706)에 바치는 기도문.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에서 발췌.

보천태자를 기리는 진여원이 설치된 연도(705)와 거의 인접해 있는데 이는 성덕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다. 보천태자와 알천은 모두 성덕왕의 즉위 정통성을 강조하는 대상으로서 공통점이 나타난다.

한편 반론으로 보천태자가 알천이 아닌 김교각이라는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김교각 문서 참조.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기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강민호가 연기했다. 비중이 김유신에게 집중되는 관계로 병풍 수준의 원로대신으로 나온다. 옥문곡 전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는 했지만 이 전투조차 김유신이 판을 깔아줬기에 비중이 심히 밀린다. 영류왕의 남진 정책을 좌절시킨 칠중성 전투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진덕여왕 사후 차기 왕을 정할 때 역사 기록 그대로 여과없이 정말로 욕심 없어서 김춘추에게 양보하는 걸로 묘사되고 이후 낙향한다.

5.2. 연개소문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김정학이 연기했다. 김유신, 김춘추보다 비중이 밀리는데다 답 없는 꽉 막힌 삽질 관료로 폄하되었다. 심지어 당항성 전투 즈음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태종에게 까이는 문제의 한심한 무명의 사신이 드라마에서는 알천으로 나온다. 선덕여왕 시절에 신라의 국방이 무너진 원인을 설명할 때 김춘추에게 책임을 지우기는 부담스러웠던 제작진이 상대적으로 문중이 약해 만만해 보이는 알천에게 다 뒤집어씌운 셈이다. 삼국기와 마찬가지로 알천의 전공이자 영류왕 말년의 실책 중 하나로 중요하게 볼만한 칠중성 전투가 나오지 않는다.[13]

5.3. 선덕여왕

알천(선덕여왕) 항목 참조

5.4. 계백

2011년 MBC드라마에서 배우 전진기가 연기했는데 김유신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성격이다.

5.5. 대왕의 꿈

파일:external/img.kbs.co.kr/sub_cast04_01n.jpg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임혁[14]이 연기했다. 상술한 드라마의 알천과 다르게 진평왕 시절부터 이미 장년으로 상당히 높은 관직으로 나온다. 작중 초반 알천의 나이는 40대 정도인데 60대인 임혁이 연기하며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편으로 덕만공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김춘추를 진평왕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며 숙흘종, 사도태후 등과 대립하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권신으로 나온다.

고증적인 면으로 보면 선덕여왕보다 훨씬 고증이 잘되어 있다. 그러나 드라마의 인물 소개 페이지에서는 적이 된 아군 보정을 받을 듯한 암시를 주었고 실제로 비담과 접촉하면서부터 김유신과 김춘추의 충심에 1번씩 의심을 제기하는 등 흑화의 조짐을 보였다. 선덕여왕 즉위 초기엔 비담과 협력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비담의 전횡이 심해지고 그가 은근히 역심을 비치자, 비담과 등지면서 근왕파로 돌아서고, 극 초반처럼 김춘추를 차기 태자로 추대하려고 밀며 비담을 압박하는 쪽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담의 이간책에 책동되어 김춘추를 의심하게 되고, 진덕여왕 즉위 후엔 김춘추를 견제하는 정적이 된다.

진덕여왕이 병으로 눕자 김춘추와 섭정 후보에 올라 경쟁을 벌이는데, 김춘추가 친당책으로 김유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잃자 김춘추는 스스로 섭정 후보를 포기했다. 그렇게 알천의 승리로 그가 섭정에 오르는가 싶더니, 알고 보니 알천은 은밀하게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내통하면서 그 힘을 빌어 조정의 친당파들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 의도야 옳은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자국의 조정에서 생긴 일은 스스로 해결할 일이지 타국 권력자의 힘을 빌었다는 것은 역모 및 매국에 가까운 사태다. 만약 이게 성공했더라면 신라는 그대로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연개소문과 주고받던 밀서가 김유신과 김법민에게 발견되었고, 군부와 화랑도를 대동하여 각각 화백회의와 시위부를 장악해버리자 그제야 크게 후회하고 자신이 용상을 탐해 눈이 흐려졌다고 반성하며 김춘추에게 섭정을 넘겨주었다.[15] 태종 무열왕 즉위 후 당나라에 사신으로 1번 갔다오고 낙향했다. 이후 김유신이 나당 동맹에 불만을 품고 김춘추와 거리를 두는 것을 보고 김유신을 찾아가 두 사람이 나라를 맡게 되었을 때의 백성들의 기대감과 달리 친당과 반당으로 갈라져 반목하는 나라 분위기에 김유신도 책임이 있다며 일침을 놓는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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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왕
眞35
경덕왕
김주원 眞38
열조 원성왕
 
 
 
 
 
 
 
 
 
眞37
선덕왕
眞36
혜공왕
김헌창 혜충왕 헌평태자 혜강왕
 
 
 
 
 
 
眞39
소성왕
眞41
헌덕왕
眞42
흥덕왕
선강왕 익성왕 성덕왕
 
 
 
 
 
 
 
 
 
 
 
 
眞40
애장왕
헌덕왕태자 ? 眞44
민애왕
眞43
희강왕
眞45
신무왕
眞47
헌안왕
 
 
 
 
 
의공왕 眞46
문성왕
궁예(?)
 
 
 
 
 
 
 
성무왕 ? 眞48
경문왕
혜성왕 문성왕태자 문성왕의 딸
 
 
 
 
 
 
 
선성왕 흥렴왕
박정화 眞49
헌강왕
眞50
정강왕
眞51
진성왕
의흥왕
 
양부 
 
 
 
 
 
 
 
朴53
신덕왕
김의성 김계아 眞52
효공왕
김억렴 신흥왕
 
 
 
 
朴54
경명왕
朴55
경애왕
眞56
경순왕
 
 
 
 
박언창 박언침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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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54년 당시 자신은 나이가 많다며 왕위를 사양한 점을 볼 때, 603년생인 김춘추보다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 알천은 왕위를 양해한 뒤 654년 3월~655년 1월에 정계에서 물러난 듯하다.[3] 후대에 쓰여진 진주 소씨 대동보에서만 주장된다. 하단의 항목 참조.[4] 알천이 진덕여왕 사후 이미 김춘추가 정계의 권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화백회의에서 알천이 춘추보다 먼저 거론된 점과 알천이 자신을 춘추보다 연상이라고 말한 점에서 사실 알천이 춘추의 형이거나, 형이 아니더라도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단절된 동륜태자계 바로 다음인 진지왕계의 가계에 속한다는 추측이 있다.[5] 죽지의 아버지이다.[6] 필탄은 이 기록 외에 전혀 등장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음운이 유사한 비담의 다른 표기라는 설이 있다.[7] 실제로 얼마 안 있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8] 족보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위조 및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9] 1차 사료들과 교차검증이 되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마한의 왕 계보가 청주 한씨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김해 김씨 족보에는 말왕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나 교과서에서 이들의 이름을 본 적이 있는가?[10]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는 소율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에는 김율희로 되어 있다.[11] 최(崔)가 소씨와 마찬가지로 '쇠'를 음차한 김(金)씨의 다른 표기라는 설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김씨, 소씨, 최씨는 모두 같은 성이 된다. 최씨는 삼국사기에서는 사량부, 삼국유사에서는 본피부를 상징하는 성인데 이중 사량부는 고고학적으로 지증왕-입종갈문왕-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지증왕계 김씨의 중심이다. 사량부 최씨 설을 따를 경우 최씨는 김씨의 분가였을 수도 있다. 김씨 진골의 기준이 내물 마립간부터라서 미추 이사금을 비롯한 내물 이전의 김씨는 진골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12] 동생들인 김백반김국반 역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단순한 “반 갈문왕”과 “국 진안 갈문왕”으로 쓰인 사례가 있다.[13] 고구려와 연관이 전혀 없는 김유신 개인의 초반 행적까지 자세하게 다루는 작품에서 정작 영류왕 말년의 정치역학과 연관지을 만한 이 전투를 생략해버려 이 작품이 도대체 뭘 다루는 작품인지 비판의 여지를 남겼다.[14] 주인공역을 맡은 최수종과 전작인 <대조영>에서 대중상 즉 부자관계로 나왔다.[15] 나레이션으로는 진덕여왕이 알천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본인이 병을 이유로 김춘추에게 양보했다는 실제 기록을 그대로 전달했다. 아마 작가 나름대로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극적으로 재해석하거나 혹은 흥미 유발을 위해 지어낸 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