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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ffffff,#1f2023><bgcolor=#ffffff,#1f2023><(>토론 - 역사 속의 암군 문단의 인물에 볼드체 삽입 금지
토론 - 고종 항목◎표시 유지하기토론 - 순조를 암군 항목에 삽입한다토론 - 암군/목록 문서의 실존인물 예시 목록 문단에는 나무위키에서 정한 근거 신뢰성 순위 6순위 이상의 자료들에서 명확하게 암군 혹은 부정평가가 높다고 명시된 군주들만 추가하며 각주로 그 근거 출처를 반드시 밝혀놓는다. 또한 암군이라는 평가의 근거 출처가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군주들은 목록에서 삭제를 원칙으로 한다.||
1. 개요
- 암군/목록 문서의 실존인물 예시 목록 문단에는 나무위키에서 정한 근거 신뢰성 순위 6순위 이상의 자료들에서 명확하게 암군, 혹은 부정평가가 높다고 명시된 군주들만 추가하며 각주로 그 근거 출처를 반드시 밝혀놓는다. 또한 암군이라는 평가의 근거 출처가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군주들은 목록에서 삭제를 원칙으로 한다.
-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을 경우나,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태국, 모로코,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완전한 입헌군주제하의 군주는 제외한다.
- 공화정 체제의 지도자도 기입하지 않는다.
- 독재자 역시 기입하지 않는다. 단, 군주에게 실권이 없는 국가의 실권자들(예: 막부 정권의 쇼군 등 전근대 일본의 실권자[1])이나 군주 없는 군주국의 섭정으로서 독재를 저지른 인물은 예외로 간주한다.
- ★: 폭군으로도 평가를 받는 경우
- ◆: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A]
- ◇: 육체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A]
- ▲: 시해 또는 전사당한 경우
- △: 폐위되거나 강제로 양위당한 경우
- ◎: 역사 왜곡, 관점 차이 등의 논란이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암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논란이 있는 경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수 있다.
2. 실제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사
2.1.1.1. 고구려
- 모본왕(48 ~ 53)★▲◎: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는가 하면, 함부로 죽이는 등의 폭정으로 인해 신하 두로에게 시해당했다.[4] 다만 역사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 봉상왕(292 ~ 300)★△: 재위기간 동안 자연재해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을 증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의 폭정으로 인해 창조리에게 폐위되는 원인이 된다.[6]
- 안원왕(531 ~ 545)◎: 사실 기록상으로 실정을 벌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도량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평가 및 재위 말을 제외하면 왕이 국정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조정 내의 구체적인 혼란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하는 평가가 있을 정도. 그런 것처럼 재위 중반까진 그냥 평범히 보냈다. 다만, 안원왕의 왕위계승 문제와 왕권이 약해지고 대대로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이를 둘러싼 갈등이 점차 두드러지게 되는 후계자 선정 실패는 안원왕의 실정으로 보고 있다.[7] 물론 문자명왕 때부터 생긴 문제점이 안원왕 시기에 터진 것이라 안원왕 한 명만의 잘못으로 몰빵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2.1.1.2. 백제
- 개로왕(455 ~ 475)▲△◎: 도림과의 바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와 도미 부부 설화로 암군이란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최근에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는 긍정적 평가도 발굴되었다. 다만 왕권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화려한 왕궁 건설과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의 추진으로 민심과 평판은 갈수록 악화돼가고 백제의 국력은 날로 피폐해져서 이 실책으로 인해 개로왕의 전제왕권은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기에 앞서 내외적인 모순이 격화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8]
- 말년의 동성왕(479 ~ 501)▲△◎: 집권 중후반까지만 해도 왕권 강화 정책과 대외 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웅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명군으로서 백제의 중흥기를 잘 이끌어갔지만, 집권 말기 측근 정치에 빠지고 대규모 토목공사와 자연재해로 민심 이반을 겪으며 신하들의 구휼 요청도 무시하고 궁에 틀어박혀 향락만 실컷 즐기는 등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위사좌평에까지 임명하며 신임하던 신하 백가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시해된 점에서 동성왕의 정치적 한계로 지적된다.[9]
- 말년의 의자왕(641 ~ 660)△◎: 집권 후 15년까지는 부친 무왕 대 쌓아온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정국을 이끄는 등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나라와 거리를 두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영토를 확장하는 등 업적이 많았다. 그러나 집권 15년을 지나면서 말년에 여색과 향락에 빠져 충신을 멀리했고 대외관계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대당관계가 파탄나서 당나라가 신라와 동맹을 맺은 뒤 협공을 초래해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10]
2.1.1.3. 신라
- 선덕여왕(632 ~ 647): 당시 신라는 대외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에 무리한 토목공사는 비용과 인력 문제에서 많은 어려움을 발생시킬 있었는데 선덕여왕은 불교를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했으나, 무리한 사찰 및 사탑의 건립 사업과 숭불사업으로 인하여 기층민의 여러 계층의 불만이 생겨났고, 비담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란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해소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뭐라도 제시하지 않고 불사에 과하게 치중하여 국력 탕진을 가속화하는 등 여러 실책으로 인해 대중의 인식과 달리 학계에선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다.[11][12]
- 진성여왕(887 ~ 897)◎: 흔히 매체에서의 언급 탓에 암군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기록만 가지고 마냥 암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실책을 일방적으로 다 떠넘겼다는 평가 역시 공존하는 중이며 더군다나 이 무렵의 신라는 이미 진성여왕 즉위 전부터 몰락하고 있었던 나라였다.[13] 다만, 중요한 인재활용에서 실패하였고 군사력 지지기반에서도 통치력 부재의 허약한 리더십을 가진 점과 농민들이 각지에서 못 살겠다며 난을 일으키는 혼란기였음에도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혼란상을 나 몰라라 하고 방치만 한 점은 명백히 쉴드 여지가 적은 편이다.[14]
- 경애왕(924 ~ 927)▲△◎ : 과거에는 한국사 대표 암군 중 한 명이라는 악평을 들어야 했지만, 제사 장소인 포석정에서 술이나 마시며 놀고 먹다가 후백제군에게 잡혀 견훤에 의해 억지로 자살했다는 부분은 왜곡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실상은 계절 문제로 간절히 제사를 지내다가 정보 부족으로 습격에 당한 것으로 보는 설이 많다. 다만 종교에 대한 의존으로 방어에 대한 대책 대신 포석정에서 신들의 가호를 비는 행사나 현실적인 대응 대신 무모한 외교 정책을 나서게한 점은 경애왕의 실책으로 본다.[15]
2.1.1.4. 고려
- 목종(997 ~ 1009)◆▲△◎: 초창기에는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업적도 많이 남기는 등의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할 모후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른 걸로도 모자라,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왕위에 올리려는 짓 후계 문제가 발생했고, 이 문제는 대부의 기름창고에 일어난 불이 번져 천추전을 태운 사고로 인해 정치적으로 표면화됐다. 또 이 일 때문에 목종은 병이 나서 칩거한 채 궁궐을 폐쇄하고 정무를 보지 않아서, 정국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16]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면과 수반된 은전의 내용과 성격 등이 당시 추진된 정책의 방향 등을 미리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심지어 내부 갈등으로 정권의 몰락까지 초래한 요인 등을 낳기도 했다.[17]
- 의종(1146 ~ 1170)▲△: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임금이다.[18] 그러나 의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더더욱 막장이었는지라, 의종 복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다.[19]
- 충렬왕(1273 ~ 1298.3)(1298.10 ~ 1308)△: 원종대에 원 간섭기가 시작됐지만 그때까지는 외면적인 지배를 당했다면 충렬왕대에는 아예 원의 부마국이 되어 일본정벌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원의 복속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는 점과 카다안의 침입 당시의 행적 및 고려의 노비개혁을 반대했고, 원의 통해 왕권을 강화해 충렬왕 이후 고려는 원에 의존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고려 관원 또한 이에 대한 저항의식은 보여지지 않으며, 고려는 이제 내재적으로까지 원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20]
- 충선왕(1298)(1308 ~ 1313)△◎: 국정 전반에 걸쳐 강도 높은 개혁을 했지만 개혁안들을 정치세력과 연결시켜 경제현상을 정치사에 함몰시켰으며, 당시 개혁이 지녔던 한계로 인한 국정실패로 고려가 성장하기 못한 걸로 지적된다.[21]
- 충숙왕(1313 ~ 1330)(1332~1339)◎: 고려 국왕 중 정치적 시련을 많이 격었으며, 즉위 직후에는 부왕 충선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심왕옹립 세력 및 입성운동파 세력의 정치적 공격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정치, 경제적 혼란을 마주하였다. 다만 인사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 개혁을 한 긍정적인 면모도 있다.[22]
- 충혜왕(1330 ~ 1332)(1339 ~ 1343)★▲△◎: 고려판 해릉양왕으로 온갖 난행을 펼치다가 원나라에 끌려가 죽었다. 사실 도덕적 측면에선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왕이었지만, 21세기 들어선 정치 운영과 정책적 측면에선 또 일부 개혁적 요소도 있었다는 식의 약간의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3]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4]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5]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26]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27]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 충정왕(1349 ~ 1351)★△◎: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폭정과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케 했다.[28] 다만 당시 충정왕은 나이가 너무 어려 스스로 정치를 주도해가지 못했고, 승자인 공민왕 측에서 폐위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도 있다.[29]
- 우왕(1374 ~ 1388)▲△◎: 정국운영 과정에서 자신을 추대한 측근 세력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인임을 중용해 대다수의 정치적 문제를 이인임에게 맡겼고, 이는 측근에 의한 정권 농단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최영이 정국을 장악했을 때도 우왕은 똑같은 방식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처했다. 이는 우왕에게 있어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이러한 선택은 새로이 대두하고 있던 정치세력들과의 공조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종국에 우왕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게 됐고, 특히 이 상태에서 요동 정벌을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우왕대의 측근정치의 폐단으로 위화도 회군이라는 사건이 터져 우왕이 폐위되는 원인이 됐다.[30]
2.1.1.5. 조선
- 연산군(1494 ~ 1506)★△: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행적으로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31] 갑자사화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32], 조선 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줬기는 했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놀아재끼면서 권력남용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망가뜨렸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33].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가 중종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중종(1506~1544)◎: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왕권 강화만을 위해 조광조, 김안로 등의 공신들을 꼭대기에서 고꾸라뜨리는 권력 암투에만 골몰하였다. 조광조와 김안로의 행적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권력의 최정점에서 한순간에 고꾸라트리는 식의 권력 암투로 인해 중종 재위 내내 수많은 사화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중종은 폭군의 대명사인 이복형 연산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복성군까지 죽이기까지 했다.[34] 중종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으로는 몰랐겠지만, 연산군 대에 개발된 연은분리법을 폐지한 것은 일본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비 효과가 되어서 돌아왔다. 어쨌든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을 본받겠답시고 《동문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대전속록》을 각각 《속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전후속록》으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35]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 이 시기에 강원도 양전이 1522년(중종 17년, 중종 17년 11월 30일), 전라도 양전이 1524년(중종 19년, 중종 19년 12월 28일 1, 중종 19년 12월 28일 2), 평안도 양전이 1544년(중종 39년, 중종 39년 12월 28일)에 이루어졌다.
- 선조(1567 ~ 1608)◆[36]◎: 그나마 왜란 종결 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를 내세워서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 등을 행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발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현종 대에 숙종 대에 입안절수(立案折受) 규제 강화[37]와 같은 선조 대에 규제 완화[38]의 부작용들을 수습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해야 했던만큼 세부계획에 있어서 치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거나 하는 대안을 선조 대에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에 실시된 대동법 같이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실시한 적은 선조 대에 전혀 없었다.[39][40]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이것을 원칙으로 간주하겠다고 승인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선조라는 왕이 집권한 동안에는 무엇인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개선책이 실시되고 성과를 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란 전에는 원칙이 없었고[41] 전란 후에는 그나마 여민휴식(與民休息) 같은 그것 자체로는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세부계획이 뻔하고 허술해서 민간의 자생능력에 대부분 의지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42] 업적이 없는 것이야 관대하게 넘어가 줘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선 정부의 세제나 세수구조가 어떠한지 파악조차도 못하고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의 가난으로 치환하는, 그것도 심지어 수백 년 전의 고려와 비교하며 한탄하는 그 유명한 망언[43][44]을 보면 도첩제 존폐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연산군만도 머리는 좋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45] 정책적 성과를 내는 능력은 하다못해 중종, 명종 부자보다도 좋다고는 할 수도 없고[46] 출범 이후 아무런 일도 제대로 못해본 정공도감(正供都監)을 스스로 날려먹은 것을 보면 이정청(釐整廳) 설치 그리고 이정절목(釐整節目) 도출까지는 어떻게 이뤄낸 철종만도 한참 못하다. 그나마도 앞서 언급한 왕들조차도 전혀 명군 축에 못 드는 범부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머리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사람 자체가 왕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문제해결력이 없다시피 극도로 무능했는데 전제군주제 사회라서 자동으로 왕 자리를 거저먹은 폐혜가 아닌지 의심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광해군(1608 ~ 1623)★△◎: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여겨져 왔고, 근현대에 와서는 재평가의 기류도 많았으나, 결국엔 연산군 급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이 다수다.[47] 세자 시절 광해군은 임진왜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명군의 재목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48]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었고 결국은 폐출됐다. 따라서 광해군이 무익한 암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엔 대단한 무리가 있다. 특히 내정에서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으며, 세자였을때와 달리 민간 사회의 복구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고,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 정책 확대에 대체로 반대를 해왔으며,[49][C] 많은 신하들과 왕족을 죽이는 옥사를 벌이고 국가를 망가뜨렸다. 특히 영창대군을 무리하게 죽이는 등 패륜을 일삼았고 간신배들을 끼고 살며 그 똥물에 본인도 자멸했다.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국민 영웅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왕위에 올라 존호가 전체 조선 국왕 중 가장 긴 48자나 될 정도로 왕권이 안정적이었음에도 방계이자 별다른 능력도 없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폭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최근 일각에선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 및 드라마가 성행, 전술한 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었고,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저것에 악영향을 받은 바람에 미쳤을 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으나, 후대나 선대에 비해서도 더 나쁜 암군 / 폭군이라는 평을 피하기 어렵다.
- 인조(1623 ~ 1649)◎: 다방면으로 말아먹었지만 특히 외교적 측면에서 실책(=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많이 저질렀다는 평가가 있다.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인조와 그의 신료들이 국가위기시에 요청되는 공론정치의 적극적 측면을 이용하지 못했고, 신하들이 소극적으로 자문만하거나, 전쟁이 임박해 있는 데도 시비의 문제를 따지며 회의만 거듭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이곤 했다.[51] 또한 아들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의심하여 잔인하게 학대했다. 다만 민생 구휼에 힘쓰는 태도를 보여서 기우제를 친제하거나 내탕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행위는 민생 구휼에 인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기록이 있어 이러한 상황은 인조대 진휼청의 역량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업적은 남겼다.[52]
- 순조(1800 ~ 1834)◆◇: 세도정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삼정의 문란을 방치한 왕으로 평가된다. 사실 순조는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운 시국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였던 영조와 아버지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에만 의존된 정국을 어린 순조는 잘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지쳐버려 이후 정치적 식물인간이 되어 수십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버렸다.[53] 애초에 순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는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되어 국가운영에 일관성을 잃게 되었고, 11년경에는 결국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12년 3월에 회복은 되었으나 정치력의 복구는 이루지 못하여 이전까지의 그의 노력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54] 자연재해, 홍경래의 난, 안동 김씨의 발호, 건강 악화 등을 겪은 순조는 1814년(순조14) 이후 국정에서 한 발 물러섰다. 신료들이 순조에게 적극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순조는 이후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19년(순조 19) 임선(任㸁)은 상소에서 임금이 너무 침묵을 지켜 이해와 공사(公私)의 분별이 권력자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결재가 밑에서 처리된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순조는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임선은 조정 신하들을 없애려 한다는 반격을 받아 유배당했다.[55] 계속 건강이 나빠지면서, 순조도 본인의 문제를 자각은 하고 있어 나중에는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는데 원래 대리청정을 맡기면 신하들이 형식적으로라도 반대를 하겠으나 이 때는 신료들 모두가 이 대리청정을 환영할 정도로 당시 조선은 왕권의 권위 공백의 문제가 심각하였다. 왕권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에서 왕이 정무를 이런식으로 아예 던져버리자 외척이 거대한 왕권을 손에 넣고 나라를 뒤흔드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은 본격적으로 몰락한다. 물론 고조할아버지 숙종 이래로 직계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운영체제에서, 험난한 정치적 풍파와 여러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영조,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즉위하여 초기부터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과 시절만 잘 만났더라면 암군 정도까지 평가받을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의 씨앗을 남긴 부왕 정조도 최근 들어서는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56] 어쨌든 결과적으로 순조는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조선 몰락의 시초를 제공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23세에 요절한 것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 고종(1864 ~ 1907)◎: 우유부단하고 사실상 조선(대한제국)을 멸망시킨 망국의 군주라고 까이기도 하고, 선대들의 실책을 떠안은 채 나름 독립을 위해 힘을 쓴 비운의 군주라고 동정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은 여흥 민씨 등 친정체제를 위해 그들을 끌어들었는데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할 수 있는 체제를 구상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여흥 민씨 세력이 개항 이후 권력을 독점해 국왕이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실책을 저지른 점이 있다.[57]
2.1.2. 중국사
2.2. 유럽
- 러시아 제국
- 표트르 3세(1762)▲△◎: 7년 전쟁의 결과를 완전히 엎어버린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만으로도 암군의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조너선 듈(Jonathan Dull)과 같은 근대사학자들의 최근 견해에 따르면, 표트르 3세가 외교상으로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는 견해가 중론이다. 1762년 러시아가 패색이 짙어진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했을 경우엔 프로이센이 완전히 패망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렇게 되면 프로이센은 당시 폴란드처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당해 과거의 패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프로이센이 몰락한다는 것은 곧 중부유럽에서 오스트리아가 단일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더 나아가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문제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 역시 비대해진 유럽 영토를 노리는 오스트리아-프랑스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 세력과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데다, 비록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지만, 당시엔 그것을 몰랐을테니 오스만 제국의 참전도 경계할 필요성이 높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너무 호구처럼 다 내줘서 그렇지(...) 어느 정도는 아예 납득 불가능한 결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표트르 3세는 어느 정도는 비운의 개혁군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황태자 시절부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것을 비롯해 서유럽식 자유화를 추진하고 싶어 했던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 220개가 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비밀 경찰제 폐지, 왕실지 내 농민 대우 개선, 농노 대우 개선, 귀족들의 해외 여행 자율화, 귀족들의 의무교육제 도입 등, 불과 재위 6개월 동안 220개 가까이 되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수구적인 러시아 귀족들의 반발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시각도 있다.[59] 그를 폐위하고 즉위한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계몽군주를 표방하여 개혁정책을 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정책에서 반동적인 면모를 보인 것도 그녀가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3. 가상의 암군
- 가담항설 - 선대 왕, 왕[60]
- 감수성 - 감수왕
- 갓 오브 하이스쿨 -
The King[61] - 고려 거란 전쟁 - 목종[62]
- 괴도 조커 - 알라딘 국왕[63]
- 눈물을 마시는 새 - 권능왕
- 더 위쳐 시리즈 - 데마벤드 국왕
- 던전앤파이터 - 팔메리어 황제[64], 팔메리어 4세[65]
- 드래곤 퀘스트 다이의 대모험 - 아르키드 국왕[66]
- 드래곤즈 도그마 - 영왕 에드먼
- 라이온 킹 시리즈 - 스카[67]
- 록맨 제로 시리즈 - 엑스[68]
- 롤랑롤랑 - 윌리엄
- 롤링스타즈 - 바키
- 리그 오브 레전드 - 비에고[69]
- 리어왕 - 리어왕
- 마기 - 아부마드[70]
- 마법천자문 - 암흑상제[71], 옥황상제(애니)[72]
-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 - 브륀 왕국의 팔롱 왕[73], 피그넬리아 아르샤빈[74], 발렌티나 그링카 에스테스[75]
- 마하바라타 - 유디슈티라
- 말레피센트(영화) - 스테판 왕
원작이 아닌 실사영화에 나온다. -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아쿠아 레지나[76], 루치아[77]
- 메이플스토리 - 선대 신왕, 헤카톤, 샤렌 3세, 이아손
- 메카드 시리즈
- 무적코털 보보보 - 반들반들리나 4세
- 무한도전
- 묵공 - 양나라 왕[79]
- 바보 영주 - 바보 영주[80]
-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 - 데네소르 2세[81]
- 버림 받은 황비 - 미르칸 루 샤나 카스티나, 회귀전의 루블리스 카말루딘 샤나 카스티나
- 베르세르크 - 미들랜드 국왕
- 붕괴: 스타레일 - 쿠쿠리아 랜드, 시릴 랜드
- 성전사 단바인 - 프라온 엘프
- 소피루비 - 멀구나 왕국 국왕
- 스타크래프트 2 - 아크튜러스 멩스크[82], 말라쉬[83]
- 신격의 바하무트 GENESIS - 샤리오스 13세, 샤리오스 17세
- 신비아파트 시리즈 - 이안[84], 주비[85], 순훤왕
-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 1기 - 해님나라, 달나라[86], 이 외의 5개국 국왕들, 브라이트[87]
- 십이국기 - 봉왕 추타츠
- 십이야(웹툰) - 이원[88]
-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 - 왕여[89]
- 아르슬란 전기 - 이노켄티스 7세[90], 고타르제스 2세[91], 오스로에스 5세, 안드라고라스 3세, 키리카라 2세[92]
- 아바타 - 오자이[93]
- 아카메가 벤다! - 황제[94]
- 악한 기사 - 몬트왕국 국왕
- 앵그리버드 시리즈 - 킹 피그
- 야인들의 마피아게임 3편 - 알파고
-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 - 레오 3세[95],필리프 4세[96]
- 얼음과 불의 노래 - 아에니스 1세, 비세리스 1세[97], 아에곤 2세, 바엘로르 1세, 아에곤 4세[98], 아에리스 1세, 아에리스 2세, 로버트 바라테온, 조프리 바라테온, 발론 그레이조이
- 에빌리오스 시리즈 - 릴리안느 루시펜 도트리슈
- 에이스 컴뱃 7 Skies Unknown - 로자 코제트 드 에루제
- 에픽세븐 - 프리드리히[99], 릴리아스 퍼루티아[100], 지오[101], 벨리안[102]
- 엘든 링 - 만월의 여왕 레날라[103]
- 엘릭 사가 - 엘릭[104]
- 워르테니아 전기 - 루피스 여왕[105]
- 워크래프트 시리즈 - 오스마르 가리토스, 가로쉬 헬스크림, 실바나스 윈드러너
- 워해머 판타지 - 루드뷔크 2세, 보리스 골드게더, 디터 4세, 칼레도르 2세[106]
- 원신 - 훌리야[107], 라이덴 쇼군[108]
- 원피스 - 아르유타얀 5세,
와포루[109], 아발로 피사로, 세키, 베코리 - 은하영웅전설 - 은하제국의 프리드리히 4세[110]
- 은하전국군웅전 라이 - 라코우
- 은혼 - 도쿠가와 사다사다[111]
- 이계진입 리로디드 - 젝센가드 라텐베르크
- 작약만가: 서리꽃 - 황봉림
- 제로의 사역마 - 올리버 크롬웰[112], 필립 3세[113], 죠세프[114], 빅토리오 세레발레[115]
- 젤다의 전설 시리즈 - 가논돌프
- 조이드 제네시스 - 지인
- 진격의 거인 - 칼 프리츠[116]
- 창세기전 시리즈 - 모젤 2세[117]
- 태조 왕건 - 궁예[118]
- 테일즈런너 - 앙리 1세[119], 앙리 3세[120]
- 트로이 - 프리아모스
- 트릭컬 리바이브 - 에르핀[121]
- 티니핑 시리즈 - 새콤핑, 달콤핑[122]
- 파이널 판타지 XV 유니버스 - 레기스 루시스 카일룸[123]
- 포켓몬스터 XY - 아리 공주
- 프리큐어 시리즈
- 프린세스 - 비욘 카칸 표르도바[126]
- 해적전대 고카이저 - 총사령관 왈즈 길
- 황후의 품격 - 이혁
- 히노와가 간다! - 창해국 왕[127], 천랑국 왕 즈노우[128]
- 히어로메이커 - 뭉클리아[129], 골드 수저[130], 베르미누 3세[131]
- NEW 닌자고: 드래곤 라이징 - 베아트릭스 여제
- Fate/Grand Order - 이문대의 왕들, 리처드 1세
- FORMA(CENTAURA/DEAD AHEAD) - 세터스 제국의 프레드릭 스카파 황제[132]
- UFO로보 그렌다이저 - 베가 대왕
3.1. 전략 게임
군주제의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보통 군주 각각이 몇 가지 능력치를 가지며 이것이 게임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군주라는 것이 그냥 약간의 버프, 디버프 정도만 주는 경우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군주의 능력치가 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 플레이중인 국가에 암군이 들어선다면 게임 진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기도 한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 - 게임 내 대부분의 국가가 군주제이기에 랜덤한 확률로 랜덤한 능력치의 후계자가 등장하여 왕위를 잇게 된다. 그런데 군주 능력치에 따라 받는 포인트가 게임 내 거의 모든 행동에 대량으로 소모되어 사실상 돈보다도 중요한 메인 자원이기에 암군이 등장하면 참 골치아프다. 보통 능력치 총합이 6(가령 2/2/2) 미만일 경우에는 심각한 암군으로 취급한다.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비교한다면 능력치 최하의 군주(0/0/0)와 최고의 군주(6/6/6)를 둔 나라는 기술개발만 할 경우 속도가 3배나 차이난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 국가를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중세 영주 개개인을 플레이하는 것에 가까운 게임 특성상 캐릭터 능력치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며 능력치가 쓰레기인 캐릭터가 계승받는다면 난이도가 급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속법과 각종 음모를 통해 능력치 구린 자식을 죽이거나 투옥하거나 하는 등 플레이어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암군의 등장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하다보면 이것이 게임의 메인 컨텐츠 중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 토탈 워 시리즈 - 전반적으로 군주 능력치가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특히 시기상 현대에 가까운 배경을 가진 작품일수록 군주보다는 개별 장군들의 영향이 크며 원하지 않는 군주를 갈아치우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영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꽤 큰 패널티를 가진 왕도 가끔 나온다. 작게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수입 및 민심 감소부터, 크게는 모든 영토에 디버프를 걸어버리거나 외교에 페널티를 주는 경우가 있다.
[1]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다.[A]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A] [4]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태조대왕[5]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태조대왕[6]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미천왕[7] 安原王代의 政局 運營과 大對盧 爭鬪[8] 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9]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동성왕[10]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의자왕[11] 조원숙,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12]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13] 신라 진성여왕대의 재이와 농민반란[14] 신라시대 선덕, 진덕, 진성 여왕의 정치리더십 비교연구[15] 신라의 멸망과 朴氏王家#, ##[16] 고려 초 康兆의 政變과 中臺省의 등장 — 선휘원·은대와 중대성의 치폐과정에 담긴 의미 —[17] 고려 목종·현종대 실시된 사면과 은전의 내용 분석과 그 특징[18]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4) 의종대의 정치혼란[19]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20] 원 간섭기 원종ㆍ충렬왕의 정치적 행적[21] 고려 충선왕의 정치개혁과 元의 영향[22] 고려 충숙왕대 인사정책 연구: 재추의 관직겸임 양상을 중심으로[23]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24]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25]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26]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27]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28]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29] 한국사 연대기[30]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우왕[31]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4) 갑자사화[32]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33] 다만, 조선이 워낙 왕권이 강한 나라다보니,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군약신강 기조가 된 것일 뿐이다. 때문에, 효종 시기부터는 다시 왕권이 강해지기 시작해서, 숙종 시기부터 정조 때까지는 연산군과 맞먹는 수준의 절대왕권이 구축되었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진짜 군약신강 기조가 나타난 것은 철종 대부터다.[34] 패륜의 대명사인 증조부 세조와 이복형 연산마저도 자신의 친자식들은 끔찍히 아꼈다. 애초에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중종 단 둘밖에 없다. 그나마 자식을 굉장히 미워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조까지 셋이다. 소현세자는 청이 소현과 원손들을 볼모로 인조의 왕권을 위협했고, 사도세자는 아예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도 인조, 영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복성군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죽은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장자 인종이 18세로 성년이었기에 혈통 면에서 밀리는 복성군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35] 중종대(中宗代) 속찬증보(續撰增補) 사업과 그 정치적 함의[36]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37] 현종 3년 9월 5일, 현종개수 3년 9월 5일, 현종 4년 4월 13일, 현종개수 4년 4월 13일, 현종 4년 9월 18일, 현종개수 4년 9월 18일, 현종 9년 4월 13일, 현종개수 9년 4월 13일, 비변사등록 숙종 14년 1688년 04월 15일 (음)[38] 인조 1년 8월 10일,인조 1년 윤10월 28일, 인조 1년 12월 7일, 인조 3년 11월 24일, 인조 4년 2월 11일, 인조 4년 2월 13일, 인조 4년 3월 16일, 인조 4년 12월 13일, 인조 14년 8월 1일[39] 율곡 이이는 명종 대에 발생한 해주의 수미법(收米法)으로 불렸던 사대동(私大同)을 본떠서 공물작미(貢物作米) 그리고 공안개정(貢案改正) 등의 대책을 주장했고, 류성룡은 이를 거의 받아서 이를 실현하려 했으나 애초에 1결당 1두만 걷어도 될 정도로 공물부담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해주의 사정이 전국에 적용될 리가 만무했고 그마저도 중앙으로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쌀은 군량으로 대기에 급급했다. 건의한 류성룡은 몰라도 군량 부족과 같은 매번 그때그때 벌어지는 단기적인 문제외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선조에게 '공납제 폐단을 개선하겠다.' 같은 식의 장기적인 정책 목표에 대한 관념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전혀 성과를 얻지 못한채 공납제 폐단을 개선하는 수단인 공물작미(貢物作米)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선조가 떡먹다가 죽을 때까지 거의 15년간 논의 자체도 전혀 진전이 없었다.[40] 이것이 제대로 시행된 것은 광해군 즉위 직후 이원익의 건의로 이루어진 경기선혜법이라는 경기에서의 시범사업이 처음이었다. 단지 왕 하나 바뀌었는데 어느 관서가 재원을 관리할 것인지 어느 관서의 누가 경각사(京各司)의 공물 납입 담당자인지 누가 경각사(京各司)에 직접 공물을 납입할 것인지 사주인(私主人)을 인정할 것인지 같은 주요 쟁점이 이전에는 전혀 논의 자체가 안 되다가 이 정도 성과를 집권 몇년 만에 바로 얻어낸 것이다. 다들 개혁 주장하는 와중에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는 무능하고 수구적인 왕 하나가 개혁의 걸림돌로 40년 동안 죽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이원익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선조 29년 10월 21일 딸깍 버튼 한번 누를 의지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무능의 극치였다.[41]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42] 물론 광해군 대에 보듯 '그 시간도 됐고 궁궐이나 짓겠다'라는 발상보다야 나았다고 할 수 있겠다.[43] 선조 38년 9월 28일 당연히 조선이 고려보다 부유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조선초기 농업생산량 증가와 사회의 안정화로 인한 인구증가로 국가생산은 크게 증가했고 여러가지 폐단으로 골머리를 앓던 선조시기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무정부상태에 가까웠던 고려말기보다는 정부재정도 튼튼했다고 봐야 한다. 출처[44]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3~400명으로 조선군 1만을 대적할 수 있다는 여진족(여진족 1명당 조선군 25~33명에 대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들이 3만(앞의 기록을 감안하면 사실상 75만~99만에 달하는 대군이다.)대군으로 공격해온 니탕개의 난을 결과적으로 막아낼정도는 되었다. 강대국 명나라가 건국 100년도 안 되어서 2만 정도 적들에게 50만 대군이 참패한 토목의 변같은 굴욕을 겪은걸 생각하면 조선은 200년간 여러가지 폐단으로 군사력이 약해졌음에도 상당히 선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업적은 병조에서 이이가 해낸 것으로, 선조는 이이의 십만양병설 같은 국방 강화 대책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동시기 1억이 넘는 인구대국 명나라가 장부상 병력 300만이 무색하게 사르후 전투에서 10만 동원하는 것도 버거워했던 것에서 보이듯이, 전근대 농업국가가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폐단들을 전부 해결하고 국가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하고 약하다고 불평부터 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이 훌륭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는 선조의 '남탓' 버릇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말이라도 최대의 책임감으로 진력하여 나라를 살리려 애썼는데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해 한탄한 군주라면 평가가 달랐으리라.[45] 연산 2년 1월 3일[46] 선조(조선)/평가/부정적 평가/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47] 재위 4년까지는 괜찮았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광해군의 재위기간이 15년이 되는데 거의 재위기간 약 3분의2, 즉 11년 동안 막장 암군/폭군 짓을 한 것[48] 선조의 찌질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광해군의 흑화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있다.[49]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가 되었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C] [51] 10년 간의 위기: 정묘-병자호란기의 공론정치 비판[52] 인조(仁祖)대 재이(災異)에 대한 인식과 대응[53] 순조대 전반기 정국 변동과 의리론의 추이[54]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2) 순조 친정 초기(순조 4년∼11년)[55] 순조(純祖) 19세기 전반, 세도 정치 극복에 실패하다[56] 정조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57] 고종의 친정체제 형성과 그 성격[58] 만력 전반기 명의 정세와 임진전쟁 참전과정[59] Reform and Regicide: The Reign of Peter III of Russia 참고.[60] 아버지가 저지른 추악한 만행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암군이 되었다.[61] 5부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인 이미지이지만 6부에서 밝혀진 사실은 나름 사정이 있어서 차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해당 문서로.[62] 남첩인 유행간의 감언이설에 홀려서 허구헌날 정무는 안 보고 놀아제끼며, 어머니 천추태후가 권신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이부동생을 태자로 봉할 생각에 사촌동생인 신혈소군을 죽이려드는 것도 제대로 못 막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 탓에, 결국 강조의 쿠데타로 인해 폐위된 뒤 시해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유행간이나 김치양이 자기를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국정을 농단하지는 못하게 철저히 틀어막고 있으며, 재능있는 신하들에게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줘서 나라가 잘 돌아가도록 유지하는 유능한 면모도 있다. 거기다가 복지차원에서 백성들을 궁궐로 초청해서 성대한 연회를 열거나, 이때 김치양이 쿠데타를 기도한 바람에 애꿏은 백성들이 대거 희생되었다는 소식에 못내 애통해하는 애민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보이는 등, 단순한 암군이라고만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도 있다. 실제 역사 속 목종도 주류 역사학계로부터 고려 거란 전쟁에서 묘사된 것과 거의 똑같은 평가를 받고있는 입체적인 성격의 군주였다.[63] 34화 요술램프 편에서 등장.[64] 예언자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 광룡 히스마로부터 펠 로스 제국을 넘어 아라드 전체를 구해낸 제국의 두 영웅인 카잔과 오즈마를 악마화시키고 추방하였고 이에 원한을 품은 오즈마로 인해 사후 위장자들이 판치며 제국 전역이 혼란에 빠지며 100년간 검은 성전이라는 전쟁에 휘말린다.[65] 검은 성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지만 나라는 약해질대로 약해진 뒤였고 이를 어찌저찌 막아보기 위해 검은 성전 때 제국을 도와준 수쥬국을 배신하고 전쟁을 벌였지만 대패하여(이후 수쥬국은 이를 경험삼아 국력과 군사력을 꾸준히 키운다.) 그의 치세 이후 펠 로스 제국은 후속 국가인 데 로스 제국에 의해 붕괴된다. 즉 이쪽은 암군이라기엔 선대 팔메리어가 싸놓은 똥이 너무 거대했다는 불운이 컸다.[66] 딸과 사위, 외손자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본인은 물론 백성들이 몰살되고 왕국까지 파멸했다. 또한 그동안 인간을 수호하는것을 사명으로 여긴 사위 바란이 이로 인해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제대로 타락하여 마왕군에 들어가게 되어 다른 인간 국가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67] 자신의 형인 무파사를 죽인 건 물론 심바에게 가스라이팅을 함으로 인해 그토록 집착하던 프라이드 랜드의 왕위를 찬탈한 건 좋았으나, 문제는 자신을 따라 줬던 하이에나에게 약속도 안 지킨 거, 마지막에는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토사구팽한 점으로 인해 자신을 따라 줬던 부하들이 적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그렇게 원하던 왕위 자리에 올랐음에도 정작 통치는 개판으로 한 건으로 인해, 그토록 지배하고 싶었던 프라이드 랜드가 멸망 태그를 탄 것도 모자라 대책도 전혀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심바를 죽이는 데 성공했어도 앙심을 품거나 복수에 이를 가는 다른 사자들이나 하이에나들의 복수의 칼날들에 직면했을 것이다. 또 꼬라지를 보면 그토록 원하던 나라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는 이미 실패한 거나 다름 없었고, 사실상 이러한 만행이 자신의 명까지 재촉한 셈이니 암군이라고 불려고 할 말이 없다.[68] 단, 암군 짓을 저질렀던 레플리로이드 한정이지만 어느 흑막과는 다르게 인간들에게 한해서는 성군이다.[69] 비록 자신이 원해서 왕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연애에 빠져 업무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고, 연인이 죽자 그녀를 부활시키겠다는 그릇된 욕망으로 타락하여 평화롭게 지내던 섬과 자신의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70] 황제국 은행가의 입발림에 넘어가 자국 경제를 황제국에게 의존시키게 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상권이나 외교권 제공권 각종 이권을 팔아 사치를 부렸다. 이로인해 왕족 귀족을 제외한 바그다드의 국민들은 굶주리게 되고 더 이상 팔아먹을 국가의 권리가 없어지자 국민을 노예로 수출한다는 미친 짓거리를(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미친 짓거리 맞다. 전쟁포로나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민을 노예로 파는것이니)하려다가 친동생 사부마드와 이복동생 알리바바의 혁명으로 폐위된다.(이 둘이 아니었으면 반란으로 피의 축제가 벌어질 뻔했다.) 그후 추방되어 트란 섬에서 트란 문화를 연구하는데 이놈이 한 짓 중 국민 노예수출이 라는 건 독자들 입장에선 꽤 비판받는 일이라 후일담이라도 존재하길 바랬지만 완결이 날 때까지 후일담은 없었다. 만화 마기가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71] 마음이 없는 자로 절대악 그 자체이다.[72] 사람은 좋은데 능력이 부족해 대마왕에게 쩔쩔맨다.[73] 원래부터 막장이던 브륀 왕국을 분열시킨 경이로운 암군이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아주 막장으로 해두었는데 지딴에는 왕비랑 딸을 지킨답시고(단 브륀 왕국에서는 딸 밖에 못낳는 왕비는 경시되고 왕녀는 계승권이 아예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공주로 태어난 자식을 남장시켰다. 자기 대에서 일어난 내란은 변경귀족의 활약으로 종식되었으나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사후에는 여왕의 정통성 가지고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냉정히 보면 왕국을 위해서 딸이 찬밥 먹는다 해도 왕비 이외의 측실을 두어서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해두었어야 했는데 딸 핑계를 대면서 넘어가 버렸다. 사후에는 그 딸이 여왕이 되어서 팔롱이 싼 X을 치우는 데 고생하게 된다. 간혹 독자들 중에서는 그 딸 레긴도 암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긴은 암군이 아니라 전대 왕 팔롱이 왕국을 막장으로 만들어서 지지하는 세력이 아주 약했다.[74] 왕은 아니지만 왕 다음 권력을 가진 공녀로 일단은 독립되어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공국의 수장이다. 무력은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식견이나 외교파악하는 능력은 거의 0에 가깝다. 참고로 전쟁에서 한번 졌다고 무책임하게 자살해버린다.[75] 팔롱이나 피그넬리아에 비하면 양반이고 자신의 공국의 통치는 그럭저럭 한 공녀이나 최종목표가 지스터스 7국 지배와 같은 음모를 꾸며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 때문에 소피야 오베르타스와의 관계는 매우 나빠지고 만다.[76] 이쪽은 바다의 여신으로, 7개 바다를 통치하는 능력과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실책으로 사라의 만행과 루치아를 포함한 머메이드 프린세스들이 가쿠토(해신) 일당에게 공격당하거나 나라를 잃는 상황을 방치했다.[77] 이쪽은 주인공으로 aqua 편 한정이다. 선대 아쿠아 레지나에게 악영향을 물려 받았는지 외동딸 루키아에게 세이라의 문제를 떠넘기고, 루키아 일행이 로란에게 공격당하는 상황을 방치했다.[78] 무한도전 춘향전 특집 때 설정 상 이몽룡 포지션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시한 멤버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는데, 문제는 시험장에서 과거 응시자들을 앞에 두고 먹방을 찍는다거나, 용안이 뭔지를 몰라서 무식쟁이 인증을 제대로 하는 등, 왕으로서 영 아니올시다스런 모습만 보여줬고, 그러면서도 답을 틀린 멤버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대는 심술을 부렸다. 결국 시험의 말미에 전원 정답을 맞춘 멤버들에게 역관광당하여 온 얼굴에 먹으로 낙서칠당하는 보복을 당했다.[79] 원작이 아닌 영화판에서만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다. 묵가 측에서 이끌고 온 구원군이 조나라 군대의 기습에 당해서 총사령관인 혁리(유덕화 분) 본인만 살아서 양나라 군에 합류하자 멘붕해서 다짜고짜 조나라에 투항할 생각만 하거나, 주전론을 펼치면서 상세한 전략을 짜고있는 왕세자(최시원 분)와 혁리의 말에 무작정 토만 달면서 훼방을 놓더니, 세자가 조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자 엉뚱하게도 그 휘하의 여장군을 아들을 죽게한 책임을 묻겠다며 거열형에 처하라고 했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게다가 원시적인 열기구를 이용한 항엄중(안성기 분)의 기습공격에 양나라 수도가 끝내 함락당하자, 백성들의 안위는 뒷전인채로 본인만 살려달라고 질질 짜는 등, 그야말로 찌질한 암군으로 묘사된다. 정작 왕세자는 항엄중의 냉혹한 성격을 잘 알아서 백성들을 지키고자 혁리와 함께 필사적으로 항전하며, 전투 때마다 용감하게 앞장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거나, 이러다가 분전 끝에 전사하는 등으로 자격미달인 부왕보다도 오히려 성군으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80] 비록 아랫사람에게는 꽤 따뜻한 면모가 있는 애민주의자이긴 하나, 근본이 바보에 호색한이라서 온갖 기행을 일삼아서 가신들을 곤혹스럽게하는 명백한 암군이다.[81] 엄밀하게 말하면 왕이 아니라 섭정이지만, 곤도르의 섭정직은 세습직으로 사실상 군주나 마찬가지이므로 여기에 등재했다. 원작에서는 찌질이가 아니었는데, 영화판에서는 실질적으로 국교가 단절되었다고해도 명목상으로는 우방국이었던 로한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자는 간달프의 간언을 개무시하거나, 모르도르의 대규모 군대가 나즈굴들을 대동한 채로 몰려오는 것에 멘붕해서 싸워보지도 않고 "모두 도망쳐서 목숨을 지켜라!"라는 명령을 내리다가 간달프에게 두들겨맞고 기절해서 군통수권을 빼앗기기도 하고, 전사한 줄 알았던 아들 파라미르가 실제로는 살아있다는 툭 집안 페레그린의 애원도 무시한 채 아들과 함께 분신자살하려다가 본인만 타죽는 등, 완전히 암군 of 암군이 되었다.[82] 지략과 정치술, 전투력, 지휘력, 행정력 등의 능력 하나는 세계관에서 손에 꼽는 탑클래스이다. 기술력, 경제력에서 훨씬 떨어지는 켈모리안 연합 하나 제대로 제압 못하는 테란 연합의 무능한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냉혹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적을 너무나 많이 만들었고, 덕분에 폭압적이고 가혹한 정치를 펼치는 것은 기본에, 심지어 황태자(후계자)인 아들마저 정적으로 몰아 죽이려 든 것은 크디큰 패착. 결국, 아들을 포함한 자신이 만들어 낸 적들 때문에 자치령은 끊임없는 외부 침공에 시달렸고, 그 중 최악의 적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게다가 최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멩스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치령과 신민들을 자신을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했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죽이려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라를 팔아먹었을 위인이었다.[83] 능력도, 무력도 출중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신이 탈다림을 장기말로 쓰고 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섬기는 광신도였고,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결국 보다못한 알라라크가 댈람을 끌어들여 라크쉬르 대결을 벌여 폐위와 동시에 살해당한다.[84] 성격 자체는 상냥하고 선량하며 아직은 13세 정도 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지만, 1기 19화까지는 뱀파이어 왕으로써의 책무를 버리고 방랑했고 왕가의 보물인 루비 반지도 멋대로 훔쳐 인간인 가은이에게 선물로 주는 등 완벽한 암군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의 왕인데도 흡혈하기 싫다고 왕의 책무를 버린 걸로 추정돼서 뱀파이어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답이 없는 왕이었다. 다행히 현재는 정신을 차리고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존을 위해 왕으로써 노력하고 있고, 성과도 꽤 거두었지만 6년 뒤인 고스트 시그널에서는 자신을 해치려 하는 카뮬라와 브리지트의 계략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옆에 붙여 놓는 등 다시 암군끼가 도진다.[85] 5기 한정. 자기 나라가 거의 멸망하기 직전인데도 망명지에서 놀고 먹는 중이다. 다만 사정이 억까 수준이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동정하는 의견도 많다.[86] 문마리아 여왕은 혼수상태라서 정황을 파악할수 없었다.[87] 흑화 이후 한정.[88] 애초에 모친이 이원을 앉힌 것이지 이원 본인이 원한 자리는 아니었다. 왕자 시절 세자를 부러워하긴 했지만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정함이었지 왕좌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동정하는 독자들과는 달리 작중의 백관들과 백성들에게는 그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폭정을 일삼는 암군일 뿐이었다.[89] 이 사람이 황제로서 한 일은 간신인 박중헌에게 놀아나면서 충신이자 명장군이던 김신을 자기보다 인기가 많단 이유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역자로 몰아 자결하게 하고, 그의 누이이자 자신의 황후였던 김선을 비롯한 김신의 일가친척들을 몰살시킨 후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 밖에 없다.[90] 이 사람은 그야말로 세계관 최악의 암군이다. 무능한 주제에 괜히 툭하면 끼어들기만 해 잘 될일 다 망쳐 동생 기스카르한테 걸림돌만 되었다. 특히 악당 보댕이 이 사람의 멍청함을 이용해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나라일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는지 그가 죽은 뒤 나라는 개막장이 된다.[91] 다만 맨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고 나라를 발전시킨 최고의 명군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이 끊길것이라는 예언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편집증이 생겨 미신을 신봉하고 며느리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며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을 파면하면서 암군이 되었다.[92] 다만 끝에는 후계자 결정을 잘한 편이었다. 특히 장남이 워낙 막장이어서 정식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아 그가 병이 들어도 장남이 함부로 권좌를 차지하지 못했고 나중엔 정상인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하여 나라를 보존할수 있었다.[93] 비록 초반에는 승승장구 했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과 패전으로 불의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아들인 주코가 수습을 잘하여 100년이나 세상을 유린한 전범국가임에도 여전히 불의 제국을 강대국으로써 존중받는 국가로써 유지하였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성군인샘. 다만 패전 문제는 본인의 능력부족은 아니다. 무리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그 전쟁은 할아버지 대부터 100년간 이어오고 있었고 선대들 업적도 있지만 본인 대에 이르면 승리를 목전에 둘만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코믹스에서는 전후문제로 골치썩이는 아들이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즉 암군은 맞는데 무능한 암군은 아니다. 능력을 나쁜데 써먹어서 문제지...[94] 나이도 10대 초중반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어리고, 심성도 착하지만 어떤 돼지에 의해 암군이 되어버린다. 다행히 사형을 당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95] 첫 등장했을 때도 멍청하다는 것은 물론,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최악이라는 게 나왔지만 연재가 진행될수록 군주로서의 자질이 매우 의심되는 행동만 보이는 것은 물론 정당한 후계자인 알폰소에게 열폭하여 견제를 하는 멍청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96] 이쪽은 레오 3세와 달리 머리는 있으나 힘만 믿고 날뛰다가 끝내 나라를 말아먹었다. 또한 여동생과의 근친상간이라는 희대의 개막장짓까지 하여 기본적인 군주의 의무까지 저버렸다.[97] 나라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후계자 문제 때문에 암군으로 평가된다.[98] 타르가르옌 왕조 최악의 암군으로 일컬어진다.[99] 세계정복이라는 같잖은 이유로 선대 왕의 각종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카일론과 빌트레드와 손잡아 이제라 자체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라스의 지휘를 받은 이제라 연합군에 패하여 사로잡힌다. 사로잡힐 때도 이 세계를 가지지 못하니 차라리 망해버리라는 저주를 퍼붓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인 건 덤.[100] 야망에 눈이 멀어 스트라제스와 손잡고 도움을 주려는 라스를 스트라제스 군단에 팔아넘기는 짓을 저질렀으며, 눈엣가시로 여겼던 아킨은 물론 지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위치헤이븐과 멜즈렉까지 공격했다가 라스를 건드려서 리타니아 전체에 광역 어그로를 끈 탓에 리타니아-시도니아 연합군에게 철저하게 털리는 말로를 맞는다.[101] 세계의 변혁을 위하여 파스투스급의 외우주의 재앙인 디무트를 불러오는 만행을 저질렀다.[102] 창조자의 뜻에 따라 폴리티아의 번영을 위하여 각종 극단적인 짓을 벌였으며, 에피소드 3 본편에서 폴리티아의 빈부격차 및 비관리 지구의 치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에 여러 잡음이 새어나왔고, 두 전쟁광들과 손잡고 깔끔하게 망해버리면서 본인의 잘못을 뒤늦게 인지하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다. 폴리티아의 이익을 우선시했다가 그 과정에서 나온 잡음 때문에 모든 걸 망친 케이스.[103] 라다곤과 헤어지기 전까지만해도 전설적인 대마법사이자 마법학교 레아 루카리아의 총장이었지만 헤어진 후유증으로 미쳐버렸다.[104] 마검 스톰브링거의 영향도 있지만 황제로서 한 처신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이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라까지 말아먹었고 본인도 평생 마검 스톰브링거한테 이용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된다.[105] 라이트 노벨로 나오는 여성 군주중에서 암군 오브 암군으로서 선왕 사후 즉위 때는 오르트메아 제국의 계략으로 게르하르트 공작이 사생아 제 2왕녀를 지지하게되어 내전이 일어났는데 불리한 전세에서 주인공 미코시바가 크게 활약하여 역전시키지만 측근인 미하일이 호승심에 닥돌하다 게르하르트 공작파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진다. 내전의 주범인 게르하르트 공작은 미하일을 거래로 2왕녀를 인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루피스는 그 거래를 수락한다. 측근 하나 때문에 내전의 원흉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즉위 했는데 내전에서 활약한 미코시바는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약속 지켜서 왕국 밖으로 보내버려 타국에 등용되면 잠재적 위협이 되어버린다는 논리로 내전에서 활약한 영웅에게 남작 작위를 주고 미개발 오지에 보내버린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근데 이건 타인이 제안한 방법을 그냥 그대로 따라한거다..몰랐다 해도 내전의 원흉에게!) 덤으로 내전에서 삽질해서 근신받던 미하일은 측근이라고 2달만에 복직시켜 버린다. 내전에서 미코시바의 활약으로 끌여들인 중립파는 당연히 이같은 여왕의 행보에 제대로 된 충성을 줄수 없었고 더구나 측근이라는 놈들이 죄다 무인출신이라 명령만 내리고 닥달하는 식이라 내란 이후에도 로제리아 왕국은 피폐해져 버렸다.[106] 사정을 알아보고 배상만 했다면 전쟁을 피할수 있었는데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드워프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말아 패하며 본인의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엘프 왕국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패배로 인해 엘프가 건설한 식민지들도 모두 상실하여 올드 월드에서 엘프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07] 이쪽은 성품이랑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마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무력이 없어서 도망만치다가 결국 백성의 손을 빌려 (사실상의)자살을 선택했다.[108] 마신임무 2장 3막 이전 한정. 마신 임무 2장 이후로는 군주로서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09] 드럼섬편 한정, 이후에는 완전히 갱생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작중에서 저질렀던 폭정과 별개로 능력은 굉장히 유능했던 왕으로 보인다.[110] 정무에 큰 관심이 없고 유흥에 몰두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암군이 맞다. 하지만 이따금 날카로운 뜻이 담긴 발언을 하는 등, 평면적인 암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2차 창작 등에서는 실제로는 유능하지만 제국의 막장 상황에 회의를 가지고 차라리 멸망하길 원했다는 해석도 나온다.[111] 은혼이 개그물이라 묻히지만 사실 이 양반이 은혼의 시작을 연 인물로 매국노이기도 하다.[112] 그냥 꼭두각시. 셰필드가 없을때 트리스테인 게르마니아 연합에 겁을 먹었다.[113] 앙리에타의 할아버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지만 내정은 엉망이었다. 때문에 본편 시점에서 트리스테인은 패권 국가에서 지역 강국으로 위상이 하락했다. 마자리니가 없었으면 아예 약소국까지 추락했을 것이다.[114] 허무의 마법사라서 왕태자 시절때는 4대계통 마법을 못썼고 이를 모르는 주변은 마력이 없다고 평가해 모친마저 없는 자식 취급하였다. 훗날 비교하던 동생을 암살하게 되고 그 허무함에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사망한다. 능력적으로는 암군이 아닌데 결과는 자신의 왕국 갈리아의 초토화[115] 교황인데 재앙(대륙이 하늘로 떠버리는 현상)을 막겠답시고 세계 이주라고 하여 태평하게 살고있는 주인공측 세계(지구)를 정복하려고 했다! 공중전 최강이라는 알비온 용부대가 고작 구식유물에 가까웠던 제로센 1기에게 털리고 수많은 군대조차 어쩌지 못하는 요르문간트를 티거 하나로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말이다! 앙리에타가 지구세계와 대화를 할 생각 없냐고 물었을때는 대화로는 평화를 이룩할수 없고 기습공격 운운했다. 앞에 있는 죠세프는 최소 자국 하나만 망쳤는데 이놈은 최소 다섯 국가를 지옥으로 만들 뻔했다. 지구 침공을 제외해도 왕인 타바사를 납치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였다.[116] 이쪽은 타국의 백성들이 불쌍하답시고 자국민을 버렸다.... 그 자국민들이 거인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해 1800년 간 타국의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자기들끼리 내전이나 벌이는 등, 쌓은 업보가 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 세대까지 저지른 죄악을 묻어 버리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후손들이 외부에서 보낸 무지성 거인들에게 죽어 나가고, 부전의 맹세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식으로 후계자들을 세뇌하면서 시조의 거인의 힘을 못쓰게 해 타국의 보복을 막을 정도의 정당방위도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타국의 백성들을 위한 행동들이 결국은 타국의 백성들과 세상의 파멸을 불러왔고 동시에 계속되는 혼란만을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117] 사실 아버지 모젤 폴루스 공왕처럼 유능했으나, 게이시르 제국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왕권 강화 및 팽창 정책에, 결정적으로 체사레 보르자가 보낸 첩자 죠세핀에게 홀리면서 망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비프로스트 공국의 멸망을 부추기고 만다.[118] 드라마상에서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북벌만 추구하는 암군의 모습이 추가되었다. 현실의 궁예도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드라마상의 모습은 작가의 창작이 꽤 들어갔다.[119] 이 인물의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아들은 악당의 숙주가 되고, 딸은 사망, 손자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아 여러 문제들을 혼자 떠맡는 등 동화나라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120] 인품은 선하지만 왕으로써 제대로 한 일들은 별로 없다. 다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실종, 고모의 사망 등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아 홀로 여러 문제들을 떠맡은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며 그나마 왕으로써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121] 쓰고 있는 왕관의 디버프로 인해 식욕이 높고 지능이 낮아져 허구한 날 왕국의 식량을 축내고 있다. 왕관을 벗으면 멀쩡해진다.[122] 이 둘이 내분을 일으키면서 작중 디저트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는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123] 인품은 훌륭하나, 왕도 인섬니아의 시민들과 킹스글레이브 단원들 입장에서는 암군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자신이 어리석은 왕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본인도 인정한 부분.[124] 전작의 블루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우주 여신들이다. 이매지네이션의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우주에 뿌렸고, 행성들 일부가 멸망당하거나 무언가를 의존하는 상황을 방치했다.[125] 비록 왕은 아니지만 지구의 신인 위치에서 블루의 작중 무능함과 뻔뻔해 보일 태도 덕분에 러블리를 포함한 프리큐어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연관된 왕국과 지구는 끝장 났었을 수준이었다.[126] 작중에서는 끊임없이 성군으로 미화되지만 실상은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비는커녕, 후궁도 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정비로 삼아 나라 전체를 내전으로 몰아넣은 명백한 암군이다.[127] 약소국인 자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해상 패권을 추구하다가 천랑국을 자극해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패전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포로가 되어 참수된다.[128] 간음이 일상인데다 매우 잔혹하여 점령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포로를 팽살하는 것을 즐긴다. 본작의 최종 보스이다.[129] 성국의 성황으로(성국은 투표로 뽑는다.) 성품은 좋은 편이나 타인을 의심할줄 몰라서 개혁으로 나라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상소에 곧이대로 믿어 성국을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그렇게 신하들의 계략에 의해 이용당하던 중 현자의 충고에 성국의 상황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고 자진 퇴위하여 투표를 통해 다음 성황은 제대로 된 성황을 뽑을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무산되고 만다. 변호하자면 성국의 부패가 쌓이고 쌓인게 너무 커서 뭉클리아는 커녕 평타치는 군주라고 해도 커버가 불가능했던 상황.[130] 성국의 뭉클리아 다음의 성황이자(허수아비인 제로경은 퇴위되었다.) 최강의 검 성국의 초대 성왕이다. 출신은 상급기사 출신으로 이름 그대로 금수저다. 히어로 메이커 세계관의 이어 후술할 베르미누 3세와 맞먹는 암군이며 결과로 따지면 성국을 아예 아작내 버리고 신이 인류에게서 성법을 거두는 설령 성국이 막장이 아니어도 커버가 불가능한 암군이다.[131] 제국의 황제로 골드수저와 다르게 멀쩡하게 돌아가는 제국을 즉위 2년만에 내란 상태로 만들었던걸 보면 질이 더 나쁘다. 즉위 초기 공물 안바친다고 세날에 쳐들어갔는데 세날은 이길수 없다는 군경험자인 힐리스의 직언에도 쳐들어갔다가 대패해 겨우 살아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폐륜왕의 이간질에 넘어가 자신을 지키는 힐리스를 죽이려고 했다!(힐리스는 원정으로 대패한 베르미누를 지키다가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힐리스 휘하의 기사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들을 학살하였고 지왕의 혼을 풀려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결국 이번에는 제대로 빡친 힐리스가 근위대 100명을 1초컷으로 날려버리고 베르미누에게 마지막 직언을 올린 뒤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봉인된 지왕의 혼을 홀로 지킨다. 이후 힐리스와 인연이 깊었던 이복형제 후안이 제국의 충신 힐리스를 죽였다며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힐리스가 없어 후안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후 외척인 숙부 머튼경에게 의지하다 장식뿐인 자리에 올라 명분으로만 이용당하면서 약을 먹고 폐인이 된다. 덧붙여 베르미누 전대 황제는 평민인 힐리스를 제대로 기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사후 베르미누 3세가 아닌 제국의 미친 황제로 불린다.[132] 1886년에 바다 하나 건너려고 자원 얻겠답시고 이웃국가인 코르부스 연합을 필요하지도 않은 문명화를 내세워 쳐들어가 남부 지역을 강탈했다. 이는 1908년에 코르부스 연합에게 침공받고 결국 1912년에 코르부스 연합이 끌어들인 안타레스 제국에게 자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