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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룡봉추 ,伏龍鳳雛, | |||
복룡 ,伏龍, | 봉추 ,鳳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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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colbgcolor=#fff,#000>충무후(忠武侯) | |||
작위 | 무향후(武鄕侯) 무흥왕(武興王)[1] | |||
최종직위 |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2]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 |||
본관 | 남양 제갈씨 | |||
명 | 량(亮) | |||
자 | 공명(孔明) | |||
신장 | 189.6cm[3] | |||
아버지 | 제갈규(諸葛珪) | |||
생몰연도 | 181년 ~ 234년 10월 8일 (양력) 181년 ~ 234년 8월 28일 (음력)[4] (향년 52~53세) | |||
고향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
사망지 | 오장원(五丈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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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鞠躬盡力 死而後已, 국궁진력 사이후이
몸이 부서지도록 사력을 다하고 눈을 감아서야 멈춘다.
몸이 부서지도록 사력을 다하고 눈을 감아서야 멈춘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을 보였으며,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으며,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의 법도를 아는 빼어난 인재로 관중, 소하에 버금갔다.
진수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으며,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의 법도를 아는 빼어난 인재로 관중, 소하에 버금갔다.
진수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 자는 공명(孔明), 작위는 무향후(武鄕侯), 시호는 충무(忠武). 와룡 또는 복룡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형주에 머물다 유비를 따르기 시작했으며, 이후 유비 세력의 대전략과 내정을 담당하였다. 촉한이 건국되자 초대 승상 직위에 임명되었고, 유비 사후에는 군권을 포함해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다. 한중에 막부를 두며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모두 결정했다.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충성심으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훌륭한 신하이자 재상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군사 또는 참모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삼고초려, 수어지교, 출사표, 난공불락, 칠종칠금, 읍참마속 등 현대에도 전해지는 여러 고사성어의 유래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기도 하다.
2. 특징
제갈량은 후한 말 형주의 사족이자 소열제 유비의 신하, 그리고 촉한의 승상이다. 형주를 아직 유표가 다스리던 무렵, 그의 아래에서 힘을 모으던 유비에게 기용되었다. 이에 얽힌 사자성어로 삼고초려가 전해진다.유종이 항복하고 조조군이 남하하자 유비는 하구까지 피난했는데, 제갈량은 하구에서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사자로 파견되어 동맹을 체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유비 세력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적벽대전과 뒤이은 남군 공방전이 마무리되고 유비가 손권에게서 형주를 빌리자, 형주의 여러 군을 맡아 군대를 보급하였다. 유비가 익주로 향했을 때 처음에는 형주에 머물렀고, 익주에서의 전쟁이 격해지자 장비와 함께 물길을 따라 익주로 향하며 현들을 정복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제갈량 최초의 군사활동이나, 여기에 그가 얼마나 관여하였는지, 구체적인 전개가 어땠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유비가 무리한 원정으로 신생 국가인 촉의 국력을 소진시킨 후, 유비는 자신의 후계자인 유선을 보좌할 보정대신으로 이엄과 제갈량을 두었다. 행정권은 제갈량에게, 군권은 이엄에게 맡김으로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수행하였으나,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손오와 군사동맹을 회복한 뒤 남만에서의 반란 진압을 근거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최초 반란중심지인 월수군을 제외한 남만에 간접적인 복속만을 받은 채로 돌아와 북벌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갈량은 촉의 행정, 인사, 군권, 상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대규모 원정을 입안, 실행하였다. 같은 보정대신이었던 이엄을 탄핵한 제갈량은 명실상부한 촉 정계의 일인자가 되어 북벌을 주도하였다. 제갈량의 집권 기간 동안 그의 막부가 머무르는 한중은 촉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하임에도 후임을 지목할 수 있었고 후임자로 지목된 장완과 비의 역시 한중에서 촉 전체를 통치해나갔다. 비의 대까지 제갈량의 정치적 후계자들은 촉한의 전권을 행사했으며, 이는 진지와 황호가 집권한 시기에 들어서야 막을 내렸다.
제갈량의 북벌은 대체로 과단성보다 견실함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천수가 호응하였으나 느린 행보로 인하여 좌절된 1차 원정에서 보이듯 공세적인 원정의 승리를 담보하기 어렵게 하는 한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병력을 온존할 수 있게 하였다. 제갈량이 주도한 북벌은 명백한 한계를 맞이했다. 그는 북벌에 뒤따르는 보급 문제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이는 제갈량 개인이나 촉한이라는 시스템의 문제 이전에 전근대 보급 체계의 한계였다. 결국 제갈량은 5차 원정 도중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제갈량은 사후, 촉한 2대 황제 유선에 의해 충무후로 봉해진다. 사후에 미화가 진행되었으며 당대 기록에서도 단편적으로 확인된다. 남만이라 불리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남조는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갈량을 신격화했는데, 현재에도 남만 일대에서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과장된 전승들이 전해져 내려오며, 연구자들은 이를 남조 대에 이뤄진 의도적 신격화의 영향으로 본다.[6] 사후 남송 대에 이르러 제갈량은 그의 군주인 유비와 함께 강하게 신격화되었고, 원 대의 삼국지평화, 명 대의 삼국지연의를 거쳐 현대에까지 통용되는 제갈량의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현대 동아시아에서 제갈량은 강력한 문화적 상징이다. 그가 지나친 장소들, 혹은 신빙성이 거의 없는 민간전승조차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어 판매된다. 한 편으로, 현대 역사가들은 오랜 기간동안 신격화된 제갈량의 이미지를 객관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다.
예컨데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제갈량의 남방 정책이 실질적인 개발로 이뤄지지 못해 국력을 신장시키지 못했음을 지적하였고, 존 킬리그루(John Killigrew)는 제갈량의 북벌을 다룬 논문에서 전반적인 군사적 능력을 비판하며, 그가 불필요한 전쟁을 유지하였고 원정 전반에 어떠한 중대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성공도 거두지 못했음에도 비운의 영웅으로 포장되었다고 평가했다.[7] "케임브리지 중국사" 의 촉 파트를 저술한 마이클 파머(J. Michael Farmer)는 지나친 제갈량 고평가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비판했다. 통사 레벨을 벗어나 현대 중국 주류 사학계의 논문을 봐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중국 사학계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에 회의적인 의견이 정설로 인정되며, 이제는 되려 제갈량의 북벌과 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이 스스로를 주류 사학에 도전한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민간전승에서 제갈량은 몇몇 발명품, 혹은 음식의 시초로 전해진다. 그중에 제갈량의 발명품 가운데 사료적으로 근거가 확실한 것은 제갈노, 목우, 유마이다. 제갈노는 기존 연노의 개량품으로 간주되나 정확한 실물은 전하지 않아 개량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고, 목우와 유마는 현대 학계에서 외바퀴 수레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외바퀴 수레와 연노는 촉에 앞서 한 왕조에서 이미 실존했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나타나므로, 이들 역시 엄밀히는 발명이 아니라 개량에 가까우며, 정확한 실체는 전하지 않는다. 목우, 유마는 진령산맥이라는 자연경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원활한 보급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만들어졌다는 기록 바로 다음에 보급 부족이 적힌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근본적인 보급 문제 해결은 불가능했고, 이는 전근대 육로 보급의 한계를 생각해볼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보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을 평하는 글에서 그가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썼다. 상국이란 나라의 재상을 일컫는데, 승상의 다른 이름이다.[8]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시기 제갈량은 이미 승상이었으므로 명목상 내지 명예직으로 한 단계 더 윗 자리인 상국에 올랐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후한서 백관지와 진서 직관지 모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설이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승상과 대사도, 상국은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직위였고, 이는 진까지 이어진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연의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삼국지연의 문서 참고하십시오.5. 인간관계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인간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업적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업적 문서 참고하십시오.7. 평가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8. 논란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9. 관련 일화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일화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사상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노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과 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 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 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여명협 교수는 저서 《제갈량 평전》에서 이글, 「논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이 지은 글인) 「논제자」는 선진 시대 대표적 학문이었던 유가와 묵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순자』의 「해폐편(解蔽篇)」은 유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나 묵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갈량이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경향이 드러난다. 그는 시와 예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라나 배우기 시작하면서 형주의 많은 명유 석학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가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묵가의 절용(節用)과 절장(節葬) 및 과학기술에 대한 중시 경향도 제갈량이 높이 쳤다. 이처럼 그가 유가와 묵가를 학문의 으뜸으로 쳤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논평을 하지 않은 듯하다.
...........제갈량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공자 · 맹자 · 순자 중 그 사상은 뚜렷이 순자에 기울었다. 「논제자」 중 직접 『순자』의 「해폐편」을 본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자』「군도편君道篇」에서는, "몸을 닦으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순자』 「성상편成相篇」에는, "다스림의 핵심은 예와 형이다"라고 했는데, 제갈량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덕과 형벌을 동시에 중시했다. 『순자』 「왕제편王制篇」에는, "칭찬과 상으로써 힘쓰도록 하고, 형벌로써 징계한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상벌을 엄격하고 밝게 할 것을 강조했다. 주지하다시피 순자는 유가학파 중에서도 가장 법가에 접근한 사상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는 모두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 제갈량 역시 법치를 숭상했으니 학술사상 방면에서의 사승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명협, 《제갈량 평전》, 600p
...........제갈량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공자 · 맹자 · 순자 중 그 사상은 뚜렷이 순자에 기울었다. 「논제자」 중 직접 『순자』의 「해폐편」을 본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자』「군도편君道篇」에서는, "몸을 닦으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순자』 「성상편成相篇」에는, "다스림의 핵심은 예와 형이다"라고 했는데, 제갈량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덕과 형벌을 동시에 중시했다. 『순자』 「왕제편王制篇」에는, "칭찬과 상으로써 힘쓰도록 하고, 형벌로써 징계한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상벌을 엄격하고 밝게 할 것을 강조했다. 주지하다시피 순자는 유가학파 중에서도 가장 법가에 접근한 사상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는 모두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 제갈량 역시 법치를 숭상했으니 학술사상 방면에서의 사승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명협, 《제갈량 평전》, 600p
이렇듯, 여명협 교수는 저서를 통해 제갈량의 「논제자」가 『순자』 「해폐편」에서 탈태한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 방향에 차이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9][10]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비학무이광재, 비지무이성학.
배울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움 없이 재능을 키울 수 없고, 뜻한 바 없이 이뤄지는 배움도 없다.
慆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도만즉불능여정, 험조즉불능야성.
거리끼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는 정신을 진작할 수 없고, 조급하고 위험스러워서는 마음을 기르고 닦을 수 없다.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연여시치, 의여일거, 수성고락, 다부접세, 비수궁려, 장부하급!
세월은 시간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가고, 의지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데, 시들어 지고 말면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슬프게 부서진 집이나 지키고 있게 될 테니, 그때 가서 후회와 원망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계자서》(誡子書)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비학무이광재, 비지무이성학.
배울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움 없이 재능을 키울 수 없고, 뜻한 바 없이 이뤄지는 배움도 없다.
慆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도만즉불능여정, 험조즉불능야성.
거리끼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는 정신을 진작할 수 없고, 조급하고 위험스러워서는 마음을 기르고 닦을 수 없다.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연여시치, 의여일거, 수성고락, 다부접세, 비수궁려, 장부하급!
세월은 시간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가고, 의지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데, 시들어 지고 말면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슬프게 부서진 집이나 지키고 있게 될 테니, 그때 가서 후회와 원망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계자서》(誡子書)
한편《무후사, 그 안에서 본 삼국지》(신아사, 2017)의 50번째 챕터와《제갈량 평전》은 제갈량의 계자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명협 교수에 따르면 담박과 영정이라는 어휘는 비록 단어는 달라도 고요함을 위주로 하는 도교 사상과 같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냉정하게 처세하는 마음의 자세를 반영했다는 청정무위의 수신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11]
11. 여담
- 키가 8척에 달했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9척인 관우, 10척인 여포, 8척인 장비 등 키가 큰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만 정사에서 큰 키가 언급된 경우는 드물다. 정사에 기록된 인물들 중 최장신은 8척 3촌인 정욱이고 8척은 제갈량, 허저, 조운 등 몇 명만 해당한다. 이보다 작으면서 큰 키가 묘사된 인물의 경우 7척 5촌 유비, 7척 7촌 태사자 등이 있다.[12] 즉, 제갈량은 당대 기준으로 키가 굉장히 큰 사람으로 보인다.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13] <삼국지연의>에서는 흰 피부에 입술이 붉었으며 자태는 신선과도 같았다고 묘사하는데 흰 피부와 붉은 입술은 미인을 상징하는 용어이며 신선같은 외모는 절세미남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처럼 창작물에서 제갈량을 미남으로 묘사하는 경향은 현대까지 이어져 <고우영 삼국지>나 <이충호 삼국지> 같은 일부 창작물들에서는 마치 여성과 같은 외모로 묘사되기도 한다. <삼국전투기>, <여자 제갈량>처럼 성별이 진짜로 바뀌어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제갈량의 상징은 학창의,[14] 윤건,[15] 백우선(白羽扇),[16] 사륜거[17] 등이 있다.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동진 시기부터 있었던 듯한데 동진 시기의 지인소설인 《어림》과 태평어람 인용《촉서》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위수에 대치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을 살펴봤는데 제갈량은 흰 수레를 타고 갈건을 쓰고 학우선을 든 채 삼군을 지휘하여 중군이 그에 따르니 사마의가 감탄하여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제갈량의 외향 묘사는 <삼국지연의>보다 이른 시점에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헌제와 생몰년이 동일해서 181년 출생 234년 사망이다.
- 한국에서도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 명사화 되어 불린다. 보통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을 앞에 붙여서 X갈량,[18][19] 또는 이름만 따서 제갈X[20]로 부르는 식.
-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장 유봉이 살아 있으면 촉한이 유봉파와 유선파로 100% 갈라질 것이라 확신했기에 유봉을 어쩔 수 없이 죽게 했으며, 양의가 어떤 인물인지 일찌감치 간파하고 촉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작에 간파해 자신이 죽기 전부터 이미 인사 배치를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의 후임 승상은 장완, 대장군은 강유로 배치했으며 양의한테는 불만만 안 하도록 중군사에 배치했다. 하지만 양의는 자신이 승상이 되지 못했다고 불만을 드러내 그나마 중군사도 삭탈관직 되었다. 사실 중군사는 양의의 깜냥으로 제갈량에게 받을 수 있는 최대의 관직이었다.
-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병법 24편》, 혹은《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21],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편의십육책》그리고 태평어람 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와 집본(輯本) 제갈량집으로, 현재 남은 집본(輯本) 제갈량집은 청나라 시대 인물 장주(張澍)가 제갈량의 남은 문장, 편의십육책과 장원,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등을 모은 책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단독으로 입전(立傳)된 인물은 제갈량과 육손뿐이다. 진수는 제갈량전 본문에 1만 1722자를 사용했으며 마지막 평왈(平曰)에서는 천여자로 제갈량을 평했다. 배송지는 3천 자에 달하는 주석을 달았다. 이는 선주전보다도 많은 양이고, 정사 삼국지에서 제갈량전보다 분량이 많은 기전은 무제기, 문제기 정도뿐이다.[22]
- 후출사표에는 "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온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의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23][24] 뒷날 유교 문화권에서 제갈량의 삶을 압축하는 문장이라 여겨져 유명한 표현이 되었다. 이는 훗날 강희제나 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다.
- 기록상 과로사가 의심되는 인물이다.
- "초주와 대립했다."는 인상이 있지만, 초주가 본격적으로 북벌을 반대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갈량의 사후이며, 제갈량의 집권기에 북벌을 반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제갈량과 초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초주의 용모를 보고 비웃은 기록 정도가 전한다.
-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사천 지방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사천 분주보다 하북 분주가 낫다."는 말과 "제갈량은 얼간이다."라는 말을 하면 사천 사람들은 못 참고 뛰쳐나와서 싸운다고...
- 한국의 제갈씨는 제갈규의 5세손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자 위(魏)나라에 불만을 품고 미추 이사금 치세시 신라로 망명하여 지리산에 산 데서 시작하였다. 이후로 후손들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등 변천사를 겪다가 21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공식적으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졌다. 고려 현종 때 후손 형제가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로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린다. 그러나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 원나라 시절 연극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25]을 위해 유비를 따르는 인물이었다. 원대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도사에 가까워서, 유비가 황제가 된 이후 고작 3년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이지만,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이외에도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나, 명나라 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제갈량을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 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 잡혀버렸으니, 이에 사람들은 즙을 짜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 위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26]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다. 조상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 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 일부 사람들이 향료이자 약재인 정향의 효능을 설명하기 위해 제갈량이 입냄새가 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조조에게 계설향(鷄舌香)을 받은 것도 그래서라고. 하지만 이는 근거없는 낭설이고,[27] 실제로 조조에게 계설향을 받은 이유를 중국에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정향이 군주를 가까이에서 알현해야 하는 고관들이 썼다는 것에서 조조의 심중을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일화 문서를 참고할 것.
- 소설《삼국지》에서 중국의 남쪽 지방을 정벌하는 남만 정벌로 불리는 부분에서는 사람의 머리(수급)을 쌓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황에서 제갈량이 사람 머리 대신에 만두를 쌓아놓고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나와[28] 제갈량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의 바탕이 되었다.
- 좌천된 인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상당했다. 가령 요립이나 이엄이 불평 불만을 할까봐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다시 등용해서 아주 중히 써 주겠다"하고 약속을 해 놓았는데, 이 때문에 요립과 이엄이 조용했다. 반면 제갈량이 사망한 뒤 좌천된 양의는 제갈량처럼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탓에 위나라 귀순이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결국 서민으로 강등당했고, 그러고도 불평 불만을 그치지 않아 결국 성도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자살했다.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신은 본래 남양땅에서 밭갈며 지내던 미천한 백성이라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성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세번이나 소신의 초옥을 찾으시어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 중에서
왜 이 구절이 문제가 되느냐면, 제갈량 사후 이 "밭 갈며 지내던 남양 땅이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직접 밭 갈던 곳을 궁경지라고 칭하는데, 동양권에서 삼국지의 인기가 대단한지라 이에 따른 관광 산업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29] 궁경지 논쟁에서 후보지는 2곳으로 압축되어 있는데 후베이성의 샹양(양번)과 허난성의 난양이다. 원래 궁경지 논쟁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논쟁으로 삼국시대 이후 육조 ~ 남송까지 현재의 남양이 남양 완현이라는 기록이 없는데 이후 원나라의 남양현지, 남양부지 같은 자료가 남양 완현이 남양 등현 융중이라는 주장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양번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양번 융중을 제갈량의 궁경지로 인정하고 있으며 같은 하남성 출신 사학자들마저도 양번 융중설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양 지역의 첨예한 갈등은 다음 내용에서도 볼 수 있는데 청나라 대에 호북 출신인 고가형이 남양 지부로 부임할 때 어떤 사람이 고가형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물었을 때 쓴 시로 고가형은 애매모호한 시를 쓰면서 진땀을 빼며 이 논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만큼 양 지역간의 제갈량이 밭갈던 곳이 어느 곳이냐 논쟁은 쉬이 가라앉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30][31][32] 근데 정말 웃긴 건, 제갈량의 출생지는 이러한 궁경지 논쟁 때문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제갈량의 출생지는 현재의 산둥성 린이시. 결국 린이시는 '제갈량문화관광지구'를 설치해 4평방킬로미터 내에 와룡산과 제갈량이 태어난 생가 등을 복원하고 이후 제갈량문화관광축제를 개최해서 산업을 유치한다. 하여간 궁경지 논쟁에서 샹양과 난양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샹양의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 사이에 샹앙은 제갈량의 궁경지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이때 일본 대기업의 상무가 제갈량의 광팬이라 나중에 이곳에 이 기업과 중국 자동차 기업의 합작 공장이 샹양에 지어지고, 융중을 개발해서 국가 관광 단지로 만들고 8~10억 위안어치 매출을 올리겠다고 계획하였다. 난양의 경우 무후사를 기점으로 한 와룡강문화관광산업단지를 건설했는데 2015년의 매출은 14.35억 위안에 이르렀으며 종사하는 사람은 2만여 명, 그 부수효과로 취업하는 사람은 8만 명에 이를거라고 추산하고 있다. 샹양시의 경우엔 아예 시내에 제갈량 광장을 만들어 놓고 제갈량 동상을 세워놓았다.[33] 한편 《위촉오 삼국사》의 저자 허쯔취안은 "융중은 동한 말 삼국시대 기준으로는 남양군 등현[34] 소속이지만 현재는 양번시[35] 소속이다."라며 논쟁을 일축했다.
12.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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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진 시대에 추봉되었다.[2] 유선 태자 책봉문에 따르면 사지절(使持節)이다. 가절보다 사지절이 더 권위가 높은데 가절은 평상시에는 사람을 처분할 권리가 없고, 전시에는 군령을 어긴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사지절은 평상시 및 전시 가리지 않고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중간에 지절이 또 있으며(평상시에는 관직이 없는 사람을 처분할 권리가 있고, 전시에는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죽일 권리가 있다.) 가장 끝판왕으로 가절월(앞서 얘기한 절을 가진 장수를 죽일 수 있다.)이 존재한다.[3] 키가 8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7cm로 계산하면 189.6cm가 나온다. 다만 7척, 7척 5촌, 8척등의 딱 떨어지는 숫자인 사람이 유독 많은 것을 보면 정확한 키를 기록했다기보다는 평균보다 작으면 7척, 크면 8척 등으로 대략적인 분류를 한 것으로 보는게 좋을 것이다.[4]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단 헌제는 3월, 제갈량은 8월에 사망했으며 헌제의 사망 당시 제갈량은 5차 북벌군을 이끌고 북진 중이었다.[5] 유선 태자 책봉문에 따르면 사지절(使持節)이다.[6] 정면, 雲南의 諸葛亮 -南蠻 정벌 전설의 西進과 南詔國-[7] John Killigrew, Zhuge Liang and the Northern Campaign of 228–234[8] 《후한서 백관지》.[9]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가려들어야 한다. 윗글에서도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데, 그 근거로 많은 명유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굳이 유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으나 묵가까지 도매금으로 묶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고대 중국 학문 가운데에서 과학과 논리의 흔적이 뚜렷한 명가나 묵가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며 순자도 비슷한 이치로 좋아한다. 순자가 분명 공맹순 중에서는 가장 논리적이고 법가에 기울어져 있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묵가랑 친한 것도 아니다. 제갈량이 묵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마치 유가를 언급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묵가를 선호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중국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는 바를 세우기 위해서 올바른 근거를 생략하거나 납득이 어려울 정도로 박약한 채로 내버려두고 진행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또한 인용문뿐만이 아니라, 책 전체를 봤을 때 제갈량이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고 공학적인 발명품을 중시했는데, 그것은 묵가의 성과이니 묵가와 통한다는 것은 이 인용문만 보는 것보다야 좀 근거가 강해지긴 하지만 여전히 근거가 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대의 과학과 기술에 관한 종류의 담론과 연결되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간단히 말하자면 묵가와 순자가 제자백가 가운데 과학과 논리의 흔적이 뚜렷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제자백가 가운데에서 그랬던 것에 불과하며, 중국의 이런 경향은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조선의 실학 등을 그 실제보다 확연히 과대평가하는 풍조와 비슷하다. 또한 유가라고 해서 공학과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아예 무관심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이것 역시 조선의 주류 담론을 깎아내리고 양명학, 실학 등을 과대평가하는 흐름과 비슷하다. 전국시대 이후 중국의 발명가들이 모조리 다 유가형 인물이 아니라 묵가나 순자형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병기를 고안하거나 화약무기에 관련된 책을 쓴 이후의 장수, 학자들이 모조리 다 묵가인이 된다고 하기 어려운데 갑자기 묵가니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10] 물론 순자를 직접 인용한 듯한 한 구절이 있으니 이후의 학자들에 비해 순자를 중시했다고 하면 맞는 말이다. 실제로 순자는 후대인들의 평가에 따라서 위상의 부침이 심한 학자기도 하고. 그러나 묵가까지 나가는 것은 지나친 넘겨짚기다. 제갈량이 정말 묵가 등을 배웠다면 사마휘에게 배웠을 것인데 진시황 이후로 명맥이 끊겼다는 묵가까지 통달했을 정도로 수경선생의 학식이 그렇게 넓고 깊고 훌륭했단 말인가? 묵가의 경전은 전문적인 현대의 학자들이 현대의 방법론을 적용해서 해석, 연구해 보려고 해도 그들의 책이 너무 난해하다고 난리인데 특별한 학통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없는 수경선생은 혼자서 그 어려운 묵가를 훌륭히 습득했단 말인가? 난리통에 형주까지 오면서 묵가의 책을 포함해서 수많은 책들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왔단 말인가? 또한 출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출세와는 상관없고 쓸데없이 고전의 전승만을 위하는 고리타분한 먹물 냄새 나는 학문을-그래서인지 잊혀져 있다가 고증학의 청나라 때나 재평가되는 묵가를- 가르치고 제갈량은 난세에 그걸 또 배웠단 말인가? 그렇다면 제갈량의 다른 동문들도 배웠을 것인데 왜 다른 동문들에게서는 묵가의 풍조가 나타나지 않는가? 사마휘가 수제자라고 생각한 제갈량에게만 묵가를 가르쳤단 말인가?[11] 그래서 성도 무후사의 제갈량 사당이자 정전인 정원당(靜遠堂) 대들보에는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이라고 새겨져있다고 한다.[12] 후한 기준 1척이 23.7cm로 계산하면 유비는 178cm, 태사자는 182cm 정도가 된다.[13] 재밌는 우연으로 위, 촉, 오 창립자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잘 생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4] 학창의는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덕망이 높은 학자가 연거복(燕居服)으로 입었던 것으로,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진 웃옷이다.[15] 비단실로 짠 두건(頭巾). 은자(隱者)가 쓰는데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등용된 뒤에도 계속 썼다 함.[16] 흰 새의 깃을 모아서 만든 부채.[17] 바퀴가 넷 달린 수레.[18]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성을 붙일 때는 X량이라고 해야 한다. 제갈량은 성이 제갈(諸葛)씨이고, 이름이 '량(亮)'이기 때문. 그러나 X량이라고 하면 어색하기도 하고, 글자 수도 맞지 않기에 X갈량이라고 표현하는 듯.[19] 예를 들어, 무한도전의 노갈량, 프로듀스 101 시즌2의 황갈량이나 KBO 리그의 염갈량 그리고 프로듀스 48의 채갈량이나 프로듀스 X 101의 싸갈량[20] 이후락의 별명이 제갈조조였다. 뒷쪽의 조조는 같은 시대의 그 조조다.[21]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22] 三國演義三國志對照本[23] 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에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 표기되어 있다.[24] 다만 후출사표는 위작 논란이 있다.[25] 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26] 원래 이름은 제갈일소(諸葛一蘇).[27] 저 링크에서는 조조가 적국의 재상인 제갈량을 조롱하기 위해 정향을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실제로 제갈량이 재상인 승상이 된 것은 조조가 죽은 후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조조는 결국 위왕으로 남아 죽었고, 그 아들 조비 대에 이르러서야 선양받아 위나라가 황제국이 됐으며, 그 이후에 한 황실 복권을 명분으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며 제갈량을 승상에 임명했기 때문이다.[28] 하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에는 정사에 기록할 만한 내용은 아닌 상대적으로 사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29]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지역 분쟁이 있었는데, 정몽주의 출신지를 두고 영천시와 포항시가 분쟁을 벌인 바 있다. 다만 이쪽은 문헌상으로는 영천시 출생설이 거의 정설로 굳어진 상태. 그 외에도 독일 본과 오스트리아 빈에서 베토벤의 출신지를 두고 분쟁을 일으켰을 정도로 역사적 유명인의 고향이나 연고지를 두고 벌어지는 지역분쟁은 세계 곳곳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현상이다.[30] 1990년에 중국 정부가 중국우정이 삼국연의 특종 우표 2세트를 만들었는데 그 중 1장이 삼고초려였다. 이 우표의 최초 발행지를 결정하는 와중에 샹양과 난양끼리 서로 다투다가 결국 2곳에서 각자 최초 발행식을 치르게 했다.[31] 2003년 중학교 어문교재에다가 10년 전에 삭제한 융중대를 실었는데 여기에 주석으로 융중은 산 이름이며 현재 후베이성 샹양에 있다고 적어버려서 난양 사람들 1만 명이 서명하는 항의 행사까지 있었다.[32] 2008년에는 중국 관영 언론 CCTV 어느 프로그램에서 샹양의 도시 광고를 내보냈는데 "제갈 궁경지, 산수양번성"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난양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나타났다.[33] 전근대 기준으로 하면 번성 쪽이다.[34] 등현 자체가 남양군에서도 최남단 지역이다. 여기서 한수를 건너면 바로 (남군) 양양[35] 2010년 이후 양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