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906년의 입헌 혁명에 대한 내용은 카자르 왕조/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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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시아어: انقلاب ۱۳۵۷영어: Iranian Revolution, Islamic Revolution
1979년 이란 제국에서 발생한 입헌군주제(사실상 권위주의 전제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이슬람 공화국을 만든 혁명(사실상 신정 체제). 이슬람 성직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게 되었다.
2. 배경
백색혁명의 주요 정책을 설명하고 있는 팔라비 2세 (1963년) |
친서방 정책으로 미국, 영국의 지지를 받은 팔라비 왕조였으나 내부에서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1950년대에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와 대립하던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2] 모사데크를 내쫓고 전제군주제를 지향했으며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를 만들어 반대파를 탄압했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 하에 있었던 이란에서는 이 일로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슬람주의자들도 팔라비 왕조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했다.
이란의 좌익 정당인 투데당과 좌익 무장단체인 무자헤딘 헐크(Mujahedin Khalq), 페다야네 헐크(Fedayan-e Khalq)도 군주제 타도를 목적으로 반정부 투쟁을 일으켰다.[3] 이슬람주의자들도 1963년에 율법학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 중부의 종교도시인 쿰(콤)에서 샤한샤를 규탄한 죄목으로 체포되자 본격적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였고 정부는 호메이니를 터키를 거쳐 이라크, 다시 프랑스로 추방했다. 호메이니는 해외에서도 국내 이슬람주의자 세력과 연계하여 반정부 운동을 이어갔다.
석유화학 단지를 방문한 팔라비 2세 (1970년) |
비슷한 시기인 1960, 19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쿠웨이트, 모로코 같은 다른 중동 군주국들은 샤리아 등 이슬람 법계를 국법으로 채택해 이슬람의 영향이 강력한 보수적인 자국 사회의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국내 정책을 안정적으로 펼쳤다. 반면 이란 팔라비 왕가는 철저히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와 가까운 정체를 확립해 국민들의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은 급격한 탈종교화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이란은 다른 중동 군주국들보다 인구가 워낙 많았고 급진적이고 부의 편중이 심각한 경제개발 및 탈종교화 정책으로 국민들의 왕가에 대한 지지가 극도로 약했다.
이 상황에서 황제가 자신이 현명한 대처를 하지 않으면 이러한 저항을 효율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는데 경제정책의 탈선으로 반대파가 세를 확장하는 와중에 팔라비 2세 전 황제가 70년대 중후반기에 암 선고를 받으면서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이란 제정 자체가 마비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 전개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1978년 8월 20일에 아바단에서 일어난 렉스 극장 화재 사건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슬람주의자의 방화라고 주장했지만 반정부 측에서는 사바크의 방화라고 주장했고 범인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미 반왕정 시위가 거셌던 정세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되었다.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던 가운데 9월 8일에는 테헤란 동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군경은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으며 이 사건은 검은 금요일로 불린다.
팔라비 2세 이란 황제의 사진에 불을 지르면서 규탄 구호를 외치는 이란 시민들 |
혁명이 격화되자 당시 나자프에서 파리로 옮긴 호메이니는 육성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이슬람주의자들의 결집을 촉구했고 하산 하비비(Hassan Ebrahim Habibi),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Abol Hassan Bani Sadr), 사데크 코틉자데(Sadeq Qothbzadeh), 이브라힘 야즈디(Ebrahim Yazdi) 등의 해외 반왕정 인사들을 규합했다. 이들의 혁명 이후 행보는 제각각이었지만 혁명 때는 같은 편이었다.
- 하비비는 혁명 후 이란에 남았고 법무부장관, 부통령을 맡기도 했다.
- 바니 사드르는 이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노선 차이로 호메이니와[7] 노선 차이와 대립 끝에 실각했고 재차 프랑스로 망명했다.
- 야즈디는 과도정부에 참여했지만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때 퇴임 후 이슬람 정부에 반대하면서 재야 인사로 활동했다.
- 코틉자데는 혁명 이후인 1982년에 호메이니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그동안 이란에서는 팔라비 2세가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수상에 임명하여 군대, 경찰의 힘으로 시위를 통제하려고 했고 불만이 터진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민주적 다당제에 입각한 새 총선 실시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로의 개헌[8], 언론 자유 허용, 정치범 사면, 세금 감면, 사바크 해체[9]. 국내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 등 여러 개혁안들을 발표했지만 이미 민심의 이반으로 불만이 터질때로 터진 이란 국민들과 왕당파를 제외한 이슬람주의파와 공화주의파 등 이란 내 각 정파 세력들은 국왕의 개혁안에 찬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팔라비 2세 국왕의 즉각 퇴진과 왕정폐지를 요구했다.
시위를 진압하러 온 육군 장교에게 꽃을 주는 시민 |
당시 이란군 내부에서도 육군과 공군, 해군 등을 막론하고 팔라비 왕조에 반기를 들어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거나 혁명을 지지하는 장교와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더욱이 이란의 우방국인 미국과 유럽 등 서방권 국가들에서도 팔라비의 인기가 떨어진 데다 1979년 1월 과달루프 선언으로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이란 사태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여 팔라비를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팔라비 왕조는 안팎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한편 혁명이 격화되던 1978년 말에 이웃나라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부 내 반란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대통령과 영부인, 자식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팔라비에게 알려지자 자기도 다우드 칸처럼 정권이 몰락하여 가족들과 함께 혁명 세력들한테 타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더욱 커졌고[10]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팔라비 2세는 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퇴위 밎 국외 망명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란을 떠나는 팔라비 2세 | 철거되는 팔라비 2세의 동상 |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샤푸르 바크티아르를 신임 총리로 임명한 다음 퇴위하였고 이란을 떠나 미국, 파나마, 멕시코, 모로코 등 여러 국가들을 전전하다가 1980년 지병이었던 암이 악화되어 마지막 망명국이던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팔라비 2세의 퇴위 이후 이라크와 프랑스 등 외국에서 망명하던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하여 이슬람 혁명 위원회를 조직했다. 한편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과 정국안정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바크티야르의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면서 바크티야르에게 맞섰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즉각적 사퇴에 반발하던 바크티야르 내각과 왕실과 바크티야르 내각에게 충성과 지지를 맹세한 이란 육군 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호메이니 지지를 표명한 육군 내부의 반정부 세력과 전투를 벌이다가 10일여간의 접전 끝에 호메이니가 바크티야르 총리와 친 팔라비 왕조파 세력들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2월 11일 팔라비 2세 전 이란 황제의 퇴위와 구 왕가의 해외 도주로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던 팔라비 왕조의 이란 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혁명이 성공했다.
4.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수립
호메이니는 일찍부터 이슬람 율법에 입각하여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혁명을 주도한 다른 정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이란에서는 이슬람주의자 외에도 서구식 민주주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세력, 서구식 정체와 이슬람주의를 절반씩 섞은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 이슬람 사회주의 및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왕정을 폐지/전복해야 한다는 의견은 일치했기 때문에 혁명 때는 힘을 합쳤지만 팔라비 왕조가 무너진 후에는 서로 자기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려고 하며 적이 되어 대립했다. 크게 나누면 이슬람주의 vs 세속주의의 구도였다.1979년 3월 30일과 3월 31일에 실시되었던 왕정 폐지 이후 이란의 새로운 정체 수립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발표된 결과는 이슬람 신정 국가 수립에 찬성하는 비율이 98.2%였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투표 결과를 근거로 이슬람 신정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투표율 자체를 의심한 다른 정파들은 당연히 부정 투표라고 주장했으며[11] 이러한 타 정파 세력들의 반발에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암살, 숙청, 공산주의자 몰이로 이들을 억압하거나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슬람주의 진영에서도 샤리아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 아예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와 이슬람과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충, 혼합하여 공화주의적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1905~1986) 사이에 대립이 있었지만 결국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 지지파의 승리로 끝났다.[12]
내부 교통정리를 마친 이슬람주의자들은 6월 18일에 헌법초안을 완성했고 율법 전문가회의 임원 73명을 8월 3일~4일에 선거로 선출한 다음 심의 끝에 11월 15일에 이슬람 공화국 헌법을 가결한 후 12월 2일~3일에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율을 근거로 정식으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13]
5. 결과 및 영향
이란 현대사에서 이란 혁명은 민중의 투쟁으로 이란 역사상 수천년간 이어져 온 군주제를 쓰러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한 것으로 이란 당국에서 위대한 시민혁명이었다고 기려지고 있지만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가 수립된 후 결과적으로 친팔라비파, 좌파 인사가 신정 신정부에 탄압당하는 새로운 국가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혁명 이후 수립된 이란의 정부는 말만 공화제이지 실질적으론 종교 지도자 라흐바르 하의 신정 독재 체제로서 아직까지 독재정치가 이어지고 있으며[14] 기존에 팔라비 왕조가 내세우던 세속주의 정책이 부정되고 인권 탄압이 매우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론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퇴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 또한 존재한다. 이란 혁명은 이슬람 신정으로의 보수반동으로 받아들일 측면이 있으나 사후적인 평가에 따르면 그 전개는 오히려 전형적인 근대 혁명에 가깝다는 것이다.[15] 문맹률의 감소와 보편교육 기회의 확대, 여성의 경제적•공적 영역에서의 역할 증대[16] 등 이란 혁명에는 보수적 반동과 근대 혁명이라는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다. 실제로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신정국가로 퇴보했다는 이란은 여전히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에 속한다.[17] 그러나 혁명은 냉전 시기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고 그 자체로 정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평가받기가 어렵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적 경향의 학자들이 이란 혁명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크게 부각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냉전과 이후의 양국 관계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들어간 것이다.
이란 혁명 이후에 국제사회 제재 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명백한 수치로 드러난다.[18] 여기에 원리주의자들의 내부 통제로 인한 숙청과 탄압으로 희생된 숫자도 크다. 단순히 서구 학계의 비판적 시각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매우 정치적인 반골 의견일 뿐이다. 내부적으로는 원리주의에 의거한 살인적인 독재가, 대외적으로는 신정체제에 의한 국제고립이 국운을 수십년 후퇴시켰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철권 통치에 대한 비판이 신보수주의에 의한 일반화라는 주장은 이란의 정치적 자유 등 여러 실태만 확인해봐도 모순이 증명된다. 현대 사회와 국가의 존립 이유는 신앙의 실현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로 변질된 이란 혁명은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란-이라크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란의 잠재력을 크게 깎아먹은 대재앙이었다. 일단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팔라비 2세가 강탈해간 샤트알아랍 강을 탈환할 계획은 있었어도 이란을 전면 침공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호메이니의 망명을 받아주고 후원해 줄 만큼 호메이니에 우호적이었지만 이란 혁명 이후 호메이니가 대놓고 이라크에 대한 정복욕을 드러내고 실제로 이라크 시아파의 폭동을 부추기는 등 온갖 위협을 했기 때문에 예방전쟁 차원에서 이란과의 전면전을 결정했다.[19] 게다가 이라크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상대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나 이슬람 혁명 수출 선동 같은 온갖 도발을 일삼은 결과 소련, 서방, 중동 할 것 없이 이라크를 지원해 주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지원 탓에 이란은 국력과 군사력에서 훨씬 열세였던 이라크를 상대로 8년 동안 엄청난 국력과 인명을 소모한 끝에 무승부로 전쟁을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표면상의 무승부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이란의 국력을 소모시킨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세인의 승리였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의 끔찍한 경험에서 배운 바가 전혀 없었는지 이란 이슬람 정권은 지금까지도 온갖 외교적 행패로 고립과 국력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거기에 예멘 내전까지 개입하며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한다. 그리고 옛 팔라비 왕실이 누리던 부와 특권들이 시아파 성직자들과 혁명 수비대 같은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옮겨졌을 뿐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히 극심하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란 혁명은 처음에는 팔라비 왕가의 독재에 반대하는 고결한 목적으로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더 심한 독재를 불러왔을 뿐이다. 애당초 히잡을 금지하고 여성인권을 증진시키는 독재와 히잡보다 더 심한 차도르를 강제하고 여성인권을 추락시키는 독재는 동일선상에서 비유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다.
또 이 혁명은 왕정 붕괴라는 결과를 초래했던 데다 호메이니가 와하비즘과 사회주의를 공격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아랍 왕정 국가에서는 종파 문제를 넘어서서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일으켰고 친미/친서방 성향의 아랍의 군주국들이 이란을 견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친미 일변도의 대외 정책과 세속화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내부적인 불만 등을 달래기 위해서 영화 상영과 음악 공연 등 대중문화를 금지하는 원리주의로의 반동적인 회귀가 1980년대부터 쭈욱 일어나게 되었다.[20]
결과적으로 이란이 이 혁명을 계기로 신정체제로 바뀌면서 반미, 반서방 국가가 되었으며 팔라비 왕조 시절 미국 등에 무기를 주문한 계약이 파기되었고 당시 왕정에 대한 불만으로 발흥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겐 자기 라이벌(시아파의 종주국) 나라가 신정국가로 변신한 데 대한 경쟁심과 자신감으로 인해 엄청난 자극이 되었는데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중동 전체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그해 11월 메카 그랜드 모스크 폭동 유혈사태라는 이슬람 전체에 충격을 크게 주는 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수많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완전히 각성해 지금의 지하디스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이어지면서 이들이 무자헤딘, 무장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동 전체가 도미노처럼 이슬람 극단주의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혁명의 여파로 1979년 이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취소되었다.
6. 여담
서구 학자 중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한때 이란 혁명을 지지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이란 혁명이 서구근대와는 다른 방식의 대안 정체를 지향하리라고, 그리하여 그의 정치철학적 경향에 부합하는 공간을 형성하리라고 믿지만 그 결과는 이슬람 신정 체제의 수립이었고 사후의 전개는 일반적인 근대 혁명의 양상을 따라갔다. '자기의 테크놀로지' 개념을 호메이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등[21] 제법 진지하게 이란 혁명을 지지했던 푸코는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붕괴되고 혁명 직후 이란의 정권을 장악한 혁명 세력들은 팔라비 전 왕과 미국, 유럽, 캐나다 등 서방권 국가들로 도주한 팔라비 황족들에 대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는데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정이 붕괴된 지 수십년이 넘도록 이란에서 이 사형 판결은 현재까지도 사법부나 정치권에서 존치되고 있어 현재 망명 중인 팔라비 구 왕족들의 이란 귀국이나 방문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의 왕정이 전복된 이란보다 일찍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전복되었던 동쪽 이웃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이 왕정폐지 이후 국외로 추방당했던 구 바라크자이 왕가의 귀국을 허용해 주고 현 이란 신정체제보다 더 잔인하게 이슬람 신정 통치를 펼치는 현 아프간의 실질 집권세력인 탈레반과 탈레반 정권과 대립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 등 아프간 내 반 탈레반 저항세력들이 구 바라크자이 왕족들을 사형시키거나 처벌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국민으로 살려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22][23]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만든 게임 개발자 나시르 게벨리가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 망명하면서 전설적인 프로그래머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관련 영상
7. 각종 매체
- 페르세폴리스 - 이란 출신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자전적 만화로 이란 혁명 전후 이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혁명 전 어린 소녀인 주인공이 샤의 독재와 비밀경찰을 통한 국민 감시, 공산주의자 및 반대파 탄압 등으로 인해 팔라비 왕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란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히잡이 강제되고, 서구 문화를 단속하고, 여성 인권이 추락하고, 정치적 탄압이 더욱 강화되면서 세속주의자로서 샤에게도, 호메이니에게도 비판적이었던 부모에 의해 이란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가게 된다. 이후 이란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결국 이란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 브릴(진 해크먼 분)이 주인공 로버트 딘(윌 스미스 분)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력을 잠깐 언급하는데 그는 이란에서 공작활동을 벌이다가 이란 혁명이 벌어진 후 그동안의 공작이 드러나 존재의 부정을 당하게 됐고 함께 활동했던 파트너는 탈출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 1979 Revolution : Black Friday - 이란 혁명을 소재로 한 모바일 게임. 스팀에는 2016년에 출시되었고 구글스토어에는 2022년 2월 8일에 출시되었다. 다운로드 주소: #
8. 참고 자료
-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혁명 전후 이란을 다룬 만화. 작가가 세속주의자, 여성, 이란계 프랑스인이어서 이슬람 혁명에 비판적인 논조다.
-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대한민국에 출간된 호메이니 전기. 이란 근현대사에 대한 설명도 포함됐다.
[1] 차도르 금지는 이미 팔라비 1세 시절인 1936년부터 시행되고 있었으며 팔라비 1세 시절보다는 좀 더 느슨한 조치가 이루어졌다.[2] 특히 CIA에서 에이젝스 작전(Operation Ajax)으로 지원했다.[3] 무자헤딘 헐크는 이슬람 사회주의 단체, 페다야네 헐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이슬람주의자가 집권한 후 이란 국외에서 반정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4] 1977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50달러였다.[5] 결국 이들은 이란 혁명이 일어나자 호메이니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재산들을 모두 몰수당하고 하층민으로 몰락하거나 미국이나 캐나다 등 서방 국외로 망명을 떠났다. 그 덕분에 팔라비 왕조 시절에 일가가 고위층으로 부를 누리다가 이란 혁명 이후 몰락한 이란 사람들은 호메이니를 원수 취급하거나 증오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6] 물론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오만 같은 여타 아랍 왕국에서도 석유 수익을 소수의 계층이 과점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도 가정부 1명씩을 고용할 정도로 수익이 늘고 노동력도 외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노동력이 부족해질 지경이었는데 이란은 오일쇼크 직전에 3000만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 계층에 수익이 골고루 퍼지지 않았다.[7]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 이란은 크게 극좌 성향의 투데당, 좌익 성향의 인민 무자헤딘, 중도파 성향의 이란 자유 운동 등과 바니사드르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호메이니의 이슬람공화당과 전투적 성직자회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중 좌익들과 중도파들이 숙청당하는 것과 반미 정책에 반발한 것이 혁명 임시 정부 총리 메흐디 바르자간과 초대 대통령 바니사드르였다. 결과론적으로 중도파들이 이슬람주의자들과 성직자들한테 밀렸으며 바르자간과 바니사드르 모두 망명했다.[8] 무려 내년인 1979년에 총선과 신헌법 개헌을 시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9] 이건 결국 이란 제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바크티아르의 지시에 의해 해산됐다.[10] 1978년 다우드 칸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로 살해당했을 당시에 팔라비는 그저 이웃 타국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취급했으나 같은 해 이란에서 혁명 분위기가 격화되어 왕정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자 자기도 다우드 칸 전 대통령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11] 이들은 다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2] 하지만 그럼에도 호메이니는 정적 샤리아트마다리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대통령, 부통령 등 공화제의 국가수반 직을 신설하였다. 한편 팔라비 왕조 시대에 존재했던 총리 제도는 팔라비 왕조의 왕정 폐지 후에도 형식상으로나마 남겼으나 결국 198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13] 참고 자료: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193~199페이지.[14] 거기다 호메이니의 손자는 정계 거물이고 하메네이의 아들들도 정계 유력인사로 잘 살고 있다. 단, 호메이니의 후손들은 호메이니와 달리 개혁적 성향이 강하며, 이로 인하여 하메네이 체제인 현재 주류에 들지 못하고 있다.[15] 예컨대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이 이런 해석을 채택했다.[16] 그러나 이는 이미 팔라비 왕조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해 오던 정책이었고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란의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를 마지못해 이어온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문맹 퇴치나 공교육마저 반대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많았고 이웃의 사담 후세인 정권도 성공적인 교육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당대 이라크의 여성들이 신정 치하 이란의 여성들 보다 훨씬 많은 권리를 누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란 혁명의 진보성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 수 있다.[17] 그러나 이는 이란의 많은 인구와 넓은 국토, 그리고 팔라비 시절의 유산 덕이지 이란 이슬람 신정 정권이 이란의 국력에 기여한 것은 눈꼽만큼도 없고 오히려 깎아먹기만 했다. 그 국력 낭비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원래 이 전쟁은 국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이란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쟁이었고 후세인의 삽질 덕에 승리는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후세인의 군사적인 무능을 훨씬 능가하는 호메이니의 총체적인 무능 덕에 전쟁은 8년 동안 질질 끈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말이 무승부이지 그래도 걸프 전쟁에 투입할 만한 군사력을 보존한 이라크와 달리 이란군은 거의 괴멸 수준으로 소모되었다. 이는 서방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 거의 대부분 이라크에 흘러간 탓도 있지만 이것마저 호메이니의 막장 외교로 인해 발생한 결과다. 게다가 이란 또한 미국과 중국, 북한 등으로부터의 지원을 상당히 많이 받았었다.[18] 물론 내전과 부족간 내분으로 혼란한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는 이웃나라 아프가니스탄보다는 낫지만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도 모자라 온갖 내전과 ISIS에 시달린 이라크보다도 일인당 소득이 낮다.[19] 샤트알아랍이나 후제스탄 문제 같은 영토적인 분쟁은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가 후세인이 이란 침공 계획과 준비를 겨우 2달 안에 얼렁뚱땅 짜고 끝냈다는 건데 처음부터 이란을 침공할 계획이었으면 그전부터 준비했지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20] 물론 이후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태자의 개혁정책의 주도로 폐지, 완화되긴 했다.[21] 이 부분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22] 사실 당장에라도 탈레반 1차 정권 초기에 나지불라 정권 시기의 대통령이었던 나지불라도 일방적으로 공개처형하여 죽였다가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전적도 있었던 탈레반이 이미 정치적으로 몰락했어도 나지불라 정권보다 더 정통성이 있는 자국의 구 집권 세력이었던 바라크자이 구 왕실가 사람들을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무릅쓰고 사형시켜 죽여야 할 이유나 명분이 하나도 없다. 일례로 이란 혁명 이후 팔라비 1세 전 국왕의 왕묘와 여타 팔라비 구 왕가 사람의 묘지들이 모두 호메이니 정권에 의해 전부 파괴당하거나 훼손됐던 이란과 달리 아프간은 탈레반의 1차 정권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잠깐 붕괴된 후 귀국해 돌아와 모국에서 숨을 거뒀던 자히르 샤 전 아프간 국왕의 묘를 자히르 샤 전 왕이 사망한 지 수년뒤인 2021년 탈레반이 다시 재차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탈레반 측이 왕묘를 파괴하지 않았다.[23] 사실 탈레반의 이슬람 신정주의 정권이 성립되기까지 1973년 왕정 폐지 이후의 역대 정부들만 여러번 무너지고 왕국 시대를 겪은 구 세대들이 전쟁통에 전부 다 증발해 버린 아프가니스탄과 달리 이란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후 이슬람 신정체제 정권이 수립되었고 팔라비 왕조 시절을 경험했던 자국민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에 팔라비 구 왕가가 아프가니스탄의 바라크자이 구 왕가들처럼 원래 모국으로 귀국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하다.